‘멀고도 가까운’. 한·일 관계를 일컬을 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본의 어떤 다른 지역보다 대마도(일본명 쓰시마)에 더 맞춤한 듯합니다. 거리로 본다면 대마도는 정작 일본보다 부산에서 훨씬 더 가깝습니다. 대마도에서 일본 규슈(九州)의 하카다(博多)항까지는 138㎞. 하지만 부산에서는 49.5㎞에 불과합니다. 마라톤 코스보다 좀 긴 정도니 부산 해운대에서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가 보인다는 건 절대 거짓말이 아닙니다. 대마도는 예부터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의 땅’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침략과 정벌을 거듭하는 곳이었고, 정반대로 교류와 친선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총칼을 겨누며 서로 멀어졌고, 어떤 때는 조공과 화답으로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때마다 대마도는 양국의 경계에서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화해의 시기에 대마도는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며 번성했지만, 갈등의 시대에는 침략과 약탈로 고단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양국 간의 평화야말로 대마도 사람들의 안정된 삶의 조건이었던 것이지요.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다 대마도에 유배됐던 면암 최익현을 기리는 비석을 대마도 사람들이 돈을 걷어 세워준 것도 이런 ‘공존’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대마도는 이제 일본의 주민 수보다 몇 배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아 역사의 흔적을 살피기도 하고, 낚시와 캠핑을 즐기는 평화로운 공간이 돼가고 있습니다. 과거 대마도가 한·일 관계의 시금석이었던 것처럼, 이제 대마도가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즐거운 휴양지가 되느냐로 양국 관계를 가늠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독도 영유권 분쟁에다 일본 정치인들의 잇단 망언으로 양국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만, 대마도는 이제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고 있습니다. 침략도 정벌도 아닌 ‘여행’을 통해서 말입니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마도 가는 길 ‘경계의 땅’ 대마도를 찾아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거리’와 ‘영토’의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산항에서 대마도까지 거리는 49.5㎞. 배로 불과 1시간 만에 보이지 않는 국경을 넘어 일본 땅에 닿는다는 것부터가 낯설다. 이 정도의 거리로 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산 도심에서 해운대까지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일본 땅 대마도까지 건너갈 수 있으니, 요즘에는 부산에서 아예 당일로 대마도를 다녀오는 여행상품이 인기다. 부산에서는 일본 땅으로 건너가 점심으로 ‘우동 한그릇’을 먹고 돌아오는 게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비행기를 탄다면 느낌이 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대마도까지의 비행시간은 1시간 남짓. 어차피 일본 규슈나 오사카(大阪)까지도 비행시간이 1시간 30분이 채 안되니 비행기를 타고 가는 대마도가 ‘가깝다’는 체감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란 짐작이었다. 김포공항 계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행기는 중형버스 크기만 한 18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미국 레톤사가 제작한 쌍발단엽기 ‘비치1900d’. 승객들이 좌석을 다 채우자 평상복 차림의 항공사 여직원이 비행기에 올랐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한 여직원은 ‘잘 다녀오시라’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경비행기를 처음 타본다는 몇몇 승객의 걱정스러운 우려와는 달리 활주로에 진입한 비행기는 새털처럼 가볍게 이륙했다. 기상 상황이 좋아서인지 비행 중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대마도는 단언컨대 배보다는 비행기다. 두 배쯤 비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그렇다. 대마도가 아니고서는 프로펠러로 나는 소형 비행기를 타는 새로운 경험을 어디서 또 해볼까. 국제선 장거리 운항 비행기의 해발고도는 대략 1만1000m 정도. 국내선도 해발고도 7600m 이상 올라간다. 하지만 대마도행 프로펠러 비행기는 해발 5000m 안팎의 상공을 날아간다. 게다가 승합차 정도의 실내 공간에 9열로 배치된 좌석 모두가 창쪽이다. 그러니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성냥갑 같은 도시의 풍경을 지나면 구름에 잠긴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이 나타나고 그 사이를 굽이굽이 물길이 흘러간다. 잘 기운 조각보 같은 논은 모내기를 막 마치고 찰랑찰랑 물을 담고 있다. 부산 상공에서부터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해운대 일대의 고층건물들과 광안대교는 물론이고 다리 아래로 물살을 가르는 배의 모습까지도 뚜렷했다. 창 아래로 부산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섰는가 싶자 곧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공에서 본 부산과 대마도의 거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비행기로 간다면 대마도가 ‘가까운 곳’이란 느낌이 증발될 것이란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이었다. 대마도가 보여주는 풍경은 사뭇 달랐다. 상공에서 본 대마도는 온통 주름 잡힌 진초록의 산자락으로 뒤덮여 있었다. 얇은 초록색 종이를 마구 구겼다가 편 것 같았다.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도 감탄을 자아냈다. 아소만 위에 마치 붓을 찍어 그린 것 같은 수많은 섬을 지나 비행기는 대마도 공항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한 지 꼭 1시간 만이었다. # 대마도의 소박하고 푸근한 마을들 산자락을 급하게 치고 도는 도로를 달리면서 공연한 걱정이 끼어들었다. 대체 대마도 사람들은 이런 척박한 땅에서 무얼 해서 먹고 사는 것일까. 사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일대에 대마도를 근거지로 한 왜구들이 들끓었던 것도 사실 대마도 사람들이 ‘먹고살 것’이 없어서였다. 대마도의 주력 산업은 어업. 하지만 어획량이 날로 떨어지고 있어 경기가 영 예전만 못하다는 설명이다. 두 번째로 꼽는 임업도 그다지 수지가 맞지 않는단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밀어닥치면서 그나마 관광산업 쪽만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16만 명. 올해는 19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마도 인구(3만5000명)의 다섯 배가 넘는 한국인 관광객이 매년 찾아오는 셈이다. 도로 표지판은 물론이고 웬만한 호텔이나 식당들이 빠짐없이 한국어 간판이나 메뉴를 갖추고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대마도의 자그마한 마을들은 물론이고, 가장 번화하다는 이즈하라(嚴原) 시내의 풍경조차 소박하기 그지없다. 공장이라야 자그마한 간장공장을 본 게 전부. 도시 안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5층짜리 쇼핑센터일 정도다. 시내 뒷골목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 일제강점기 자취가 남아있는 군산이나 목포의 뒷골목 풍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일본 특유의 깔끔한 도시 분위기 탓일까. 이런 풍경들은 누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 역사의 행로를 따라가서 화해와 만나다 대마도는 남북의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진다. 북쪽을 상대마도, 남쪽을 하대마도로 부른다. 두 섬은 본래 연결돼있었는데,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군이 군사적 필요에 의해 윗섬과 아랫섬을 잇는 가는 목을 잘라 뱃길을 냈다. 육지를 잘라 만든 뱃길 위로 다시 다리를 놓아 길을 이었으니, 섬은 둘이면서 하나인 셈이다. 대마도에서는 여행 패턴이 두 가지로 뚜렷하게 갈린다. 먼저 역사 유적을 찾아갈지, 자연경관이나 이국적인 풍물을 찾아갈지부터 정해야 한다. 역사 유적지는 한국과 가까운 대마도 윗섬의 북쪽 일대와 대마도 아랫섬 이즈하라시 쪽에 몰려있다. 대마도 윗섬의 역사의 장소들은 대개 그저 비석으로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그다지 볼 것은 없다. 그것도 대부분 근래 들어 한국과 대마도 간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세운 것들이다. 하지만 이 비석들은 역사적 현장이라는 의미 차원을 넘어, 늦게나마 상대국의 인물을 추념하거나 기리는 비석을 세워 양국 간의 이해와 화해를 상징한다는데 뜻이 더 깊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왕인박사 현창비와 조선통신사 이예 공적비 등도 모두 1988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세워진 것들이다. 대마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대마도 아랫섬의 이즈하라 시내에는 오랜 시간을 건너온 역사의 흔적들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이 빠뜨리지 않는 곳이 절집 슈젠지(修善寺)의 면암 최익현 순국비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던 면암은 이곳 대마도에 감금됐다가 세상을 떴다. 그의 장례가 치러진 곳이 바로 이곳 슈젠지였다. 대마도에 당도한 조선통신사들이 묵어갔다는 사찰 세이잔지(西山寺)는 사찰체험을 겸한 숙소로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이밖에 일본 귀족과 결혼한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1931년 대마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당시 대마도에 살던 한인들이 세웠던 결혼봉축기념비가 이즈하라의 옛 성터에 남아있다. # 자연이 만들어낸 장쾌하고 우람한 경관 대마도에서 최고의 경관 명소로 꼽히는 곳은 바로 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 가파른 산길을 차로 올라 주차장에서 5분쯤 걸어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와 섬의 경관이 360도로 펼쳐진다. 해발 176m란 높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쾌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에보시다케 인근의 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는 문의 형상을 한 도리이(鳥居)로 바다 쪽에 세워져 있는데 그 문을 통해 누군가 걸어들어올 것 같은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기에 버금가는 명소로 꼽히는 곳이 최남단의 쓰쓰자키(豆酸崎)다. 대한해협과 쓰시마해협의 경계쯤인 이곳은 바위섬과 암초들이 늘어서 있는 거친 바다 너머 등대가 솟아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곶 끝에 서서 바다 쪽으로 펼쳐지는 시야가 어찌나 넓은지 수평선의 양 끝이 둥글게 보일 정도다. 대마도 곳곳에서 만나는 수백 년이 묵은 신령스러운 나무들이 버티고 선 거대한 숲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짙고 어둑한 숲은 신사나 사찰 주변에 있다. 종교와 신화에 대한 경외가 숲을 온전히 남겨둔 때문이다. 쓰쓰자키 부근의 긴잔조(銀山上)신사는 초록 이끼로 가득한 참배로가 인상적인 곳. 숲길을 따라 늘어선 아름드리 삼나무와 육박나무들의 위용이 거대하다. 특히 신사 안 쪽의 깊은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구실잣밤나무 거목은 그 거대함에 입이 딱 벌어진다.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로 꼽히는 가이진(海神)신사 주변의 숲도 빠지지 않는다. 대나무와 구실잣밤나무, 삼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은 육중한 깊이감이 느껴졌다. 그 깊은 곳에서 산새가 청아하게 울었다. 그러나 막상 가이진 신사 경내에 들어서자 생각은 좀 복잡해졌다. 일본의 진구황후가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세운 뒤 귀국해 세웠다는 터무니 없는 전설이 신사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더 난감했던 것이 한국의 문화재 절도범들이 국내로 들여와 최근 반환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던 불상 두 점 중 하나가 바로 여기서 도둑질해 간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역사 왜곡과 과거의 약탈, 그리고 현재의 절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마침 신사 마당의 텃밭을 돌보고 있었던 일본인 노부부와 눈을 맞추기가 불편했다. 그쪽도 그런 모양이었다. 이런 불편함은 대마도를 둘러보는 동안 몇 번 더 마주쳤다. 2차대전 참전 일본군을 추모하는 비석 앞에서도 그랬고, 한국인 여행자를 위한 관광 안내자료에 등장하는 ‘왜구‘나 ‘약탈짓’이란 표현에서도 그랬다. 목적지가 역사 유적이든, 빼어난 자연이든 대마도에서 종래에 만나는 것은 도리없이 이런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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