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仙列傳] 제 1화 여동빈(呂洞賓)
팔선(八仙) 일화
팔선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행(奇行)과 속세를 초월한 것으로 알려진 8명의 신선이다. 이들 팔선은 종리권ㆍ장과로ㆍ이철괴ㆍ한상자ㆍ여동빈ㆍ조국구ㆍ남채화ㆍ하선고(女神仙)를 말한다.
민간에서 유행하는 팔선도 그림의 좌측에서부터 조국구(曺國舅)는 송나라 조황후의 아우로서 신선이 되어 운양판(雲陽板)을 가지고 있으며, 종리권(鍾離權)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부채를 가지고 있다. 한상자(韓湘子)는 한상의 존칭이고 당나라 때 인물로서 유명한 유학자이며 문장가인 한유의 조카인데 피리를 불고 있다. 한상자 그림 뒤에 있는 여동빈(呂洞賓)도 당나라 때 사람으로 등에 칼을 차고 손에는 불자(佛子)를 들고 있다. 유일한 여자 신선인 하선고(何仙姑)는 이름이 경(瓊)이며 당나라 때 사람으로 연꽃을 들고 있다.
그리고 남채화(藍采和)도 당나라 사람으로 청년의 모습을 하고 꽃바구니를 들고 있으며, 장과로(張果老)는 장과의 존칭으로 당나라 때 사람이며 나귀를 거꾸로 타고 어고와 간판을 가지고 있다. 이철괴(李鐵拐)는 절름발이로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표주박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
이들 팔선은 개별적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문헌에 나타나다가 원나라 때부터 팔선으로 정리된 듯하며 중국의 소설, 희곡, 회화, 건축 등 여러 분야의 주제가 되어 왔다. 또한 민간에 널리 유전되어 오는 여러 가지 수많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여기서는 이들 팔선의 출생비화, 수도과정, 부명재색(富名財色)을 초월한 행위, 신통 자재한 인생항로, 시공을 초월한 기행(奇行)을 살펴보겠다. 제 일화는 고금에 널리 알려진 여동빈의 이야기이다.
여동빈 악양루에 오르다
신선 여동빈의 일화에 앞서 그의 호쾌함이 돋보이는 당시 한 수가 있다. 당나라 시대, 어느 날 동정호에 달이 휘영청 뜬 밤, 여동빈이 홀로 악양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자영(自詠) 스스로 읊노라
獨上高樓望八都 독상고루망팔도
墨雲散盡月輪孤 묵운산진월륜고
茫茫宇宙人無數 망망우주인무수
幾個男兒是丈夫 기개남아시장부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팔방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 흩어지고 둥근 달만 중천에 외롭게 떠있다.
망망한 우주에 사람은 많고도 많은데
사내대장부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우주공간까지 이어지는 기개를 느끼게 하는 통쾌한 작품이다. 여동빈은 당(唐)시대의 대표적인 도사이며 민간에서는 팔선의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도사 여동빈이 활약하던 그 당시는 황소(黃巢)의 난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였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시에서 여동빈이 황소의 난을 평정할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을 탄식한 것으로도 해석한다.
여동빈이야말로 팔선 중에서 전해오는 일화와 사적이 가장 많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개가 여동빈을 보고 짖다니, 좋은 사람을 몰라본다”(狗咬呂洞濱, 不識好人心)라는 것이 있다.그 정도로 여동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동빈 성명 석자는 세간을 두루 돌면서 중생을 구도한 신선의 대표적 명칭이 되었다.
출생일화
여동빈의 본명은 경(?)이고, 자(字)는 백옥(伯玉)이며 또 다른 이름은 소선(紹先)이다. 출가 이후에는 이름을 암(岩)으로 고쳤고, 자는 동빈(洞賓)이다. 그는 당나라 후대, 관서 하중부 낙현사람이다. 현재 지명은 산서성 영락현이며, 그곳에 그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만수궁(萬壽宮)을 세웠다. 그는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 12년(797년) 4월 14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그의 모친이 여동빈을 낳을 때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며 한 마리 선학(仙鶴)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와 침상으로 날아들다가 돌연 사라졌다고 한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미래 예견
여동빈은 태어나면서부터 관상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즉 양쪽 눈썹이 길고 비스듬히 구레나룻과 이어졌고, 봉황의 눈매에 광채가 나며, 코는 높고 단정하며 왼쪽 눈썹과 왼쪽 눈 아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이렇게 기이한 조짐을 갖고 태어난 이 아이를 매우 총애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교롭게도 불교 선종 6조 혜능대사의 손(孫)제자인 마조화상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동빈의 부친은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와서 마조대사에게 보이면서 아이의 앞날을 물었다. 마조대사가 동빈의 운명을 점쳐본 후 “이 아이는 풍모가 맑고 기이하며, 골상 또한 평범하지 않으니, 풍진을 벗어난 뛰어난 인물이다. 아이가 성장한 후 우여즉거(遇廬則居, 여를 만나면 머물고)하고, 우종즉고(遇鍾則叩, 종을 만나면 두드려라)하라면서 이 여덟 자를 평생 꼭 기억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마조대사가 예언한 그 여덟 자의 의미처럼 동빈은 과연 여산(廬山)에서 수행하였고, 종리권(鍾籬權)을 만나 도를 배웠다고 한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 : 당나라때 승려로 750년 전후로 활약하였으며 속성은 마(馬)씨, 통칭 마조도일, 사천성 출신으로 19세 때 출가하여 선종 6조 혜능 문하의 남악 회양(南岳 懷讓)의 법을 이었다. 강서성 홍주를 중심으로 교화하였기 때문에 그 일파를 홍주종(洪州宗)이라고도 한다. 널리 알려진 문하생이 백장, 대매, 남천 등이며 남악의 종풍이 일시에 융성하였으며, 후일 임제종(臨濟宗)으로 발전하였다. 마조 천하라 하여 마조의 선풍이 온 세상을 덮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선(禪)을 실천하는 새로운 선종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의 젊은 시절, 두 차례 과거시험 낙방
여동빈은 어린 시절에 총명이 남달라 하루에 글자 만 자를 암송하고 말이 입에서 나오면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성장한 후 신장은 8척 2촌에 목덜미는 기다랗고 이마는 넓었으며, 봉(황)의 눈과 광채가 나는 눈썹에 행동거지는 당당했다고 한다.
성격은 소박하였으나 말주변이 없었으며, 언사가 능숙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성년이 되어 김씨를 아내로 맞아 자녀 넷을 두었다. 당나라 무종(회창) 연간에 여동빈은 두 차례나 장안에 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 번 다 낙방하였다고 한다.
장안 술집에서 선인 종리권을 만남
여동빈이 두 번째로 장안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6세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낙심한 가슴속에 쌓인 울적한 그 심정은 보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발길이 가는대로 걷다가 어느 작은 술집에 들어갔다. 자작하면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심정은 마치 바람 따라 거리를 떠도는 가을 낙엽처럼 의지할 바 없이 쓸쓸하였다.
바로 이때 술집으로 긴 수염에 빼어난 눈썹, 안색이 붉으레하게 빛나는 도사복장을 한 노인이 걸어 들어와 여동빈의 맞은 편 빈자리에 앉았다. 세간의 다툼이 없는 듯 사리사욕이 없고, 온화함이 넘치는 듯한 그 노인의 풍모는 여동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마주하여 술잔을 권하면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선인 종리권 즉석에서 시를 짓다
술잔을 돌리면서 서로의 심사를 한마디씩 토로한 후, 풍채 좋은 노인은 돌연 시심이 크게 일어난 듯 술집 종업원을 불러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하였다. 노인은 즉석에서 시를 읊으면서 붓을 들어 술집 벽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坐臥常携酒一壺 좌와상휴주일호
不敎雙眼識皇都 불교쌍안식황도
乾坤許大無名姓 건곤허대무명성
疏散人間一丈夫 소산인간일장부
앉으나 누우나 언제나 한 호로의 술을 가지고 다녔고
두 눈으로는 황도(세상일)의 일을 모르도록 했다네
하늘과 땅은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이
한낱 인간세상을 떠도는 한 사내일 뿐일세.
여동빈은 시를 음미해 보고는 노인의 시풍이 표일하고 호방함을 깊이 찬탄하였다. 여동빈은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절을 하고난 후 노인에게 물었다. “비록 하늘과 땅이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다고 하였지만, 후배인 저로서는 도장께서도 칭호가 있을 것 같아 묻자옵니다. 도장의 성명 삼자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노인은 두 눈에 미소를 띠면서 “나의 성은 종리(鍾離)이고 이름은 권(權)이요.”라고 하였다. 여동빈은 ‘종리(鍾離)’ 두 글자를 듣자, 마음속에 마치 종이 울리듯 옛날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던 ‘마조(馬祖)선사의 예언’이 떠올랐다. 즉 “우여즉거(遇廬則居)하고 우종즉고(遇鍾則叩)하라” (廬를 만나면 머물고, 鍾을 만나면 두드려라) 문 앞에 앉은 이 기이한 노인이 내가 마땅히 두드려야 하는 종(鍾)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여동빈, 선인 종리권에게 詩로 화답하다
여동빈은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예언이 적중하는 상황을 만나자 순간 멍하였다. 이때 종리 노인이 술잔을 들며 “자, 우리 술 한 잔 합시다.”하면서 술을 권한다. 술을 마신 후 종리 노인은 “자네도 시 한수 짓는 게 어떠한가?”하였다. 여동빈도 술 한 잔을 마시자 시심이 샘솟듯 올라와 붓을 들고 술집 벽 위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生在儒家遇太平 생재유가우태평
懸纓垂帶布衣輕 현영수대포의경
誰能世上爭名利 수능세상쟁명리
欲侍玉皇歸上淸 욕시옥황귀상청
유가 집안에 태어나 태평시대를 만났건만
갓 끈을 걸어두고 허리띠를 벗어 놓았으니 삼베옷이 가볍다(벼슬하지 않은 포의를 비유)
누가 세상과 더불어 명예와 이익을 다투겠는가?
옥황상제를 모시러 상청경으로 되돌아갈까 한다.
종리권은 여동빈의 시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공자는 이미 도를 향하는 마음이 있는데, 나를 따라 세상을 버리고 입산하지 않겠소?”하였다. 여동빈은 머리를 흔들며 다만 집안에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고는 아무래도 속세를 떠나기가 어려운 듯이 말하였다.
종리권은 여동빈을 한번 척 보고는 그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본 듯이 몸을 일으키면서 “ 그대와 나는 곧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지금은 우선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당신은 여기 적혀있는 이 여관의 주소로 나를 찾아오라.”고 말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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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리권과 헤어진 다음날 여동빈은 종리권이 준 주소를 들고 장안 근처 여관으로 찾아갔다. 찾아간 때가 정오여서 선인 종리권은 마침 방안에서 작은 화롯불을 피워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노란 조밥을 짓고 있었다. 서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동빈은 갑자기 졸음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종리권이 보고는 "자네는 이미 피곤에 지쳐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니 저기 내 침상에 올라가 조금 자게나. 내게는 작은 베개가 있는데, 이름을 여의침(如意枕)이라고 하네, 자네는 여의침을 베고 자면서, 여의몽(如意夢)이나 한번 꾸게나."라고 했다. 인생은 한낱 꿈인가 ? 여동빈이 여의침을 베고 눕자마자 몽롱해지더니 하염없이 잠속으로 곯아떨어져 꿈을 꾸었다. 여동빈은 젊어서 장안에 가서 진사시험을 보았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 후 권문세가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장가들고, 자식도 여럿 낳았다. 인간세상의 부귀영화가 한몸에 모이듯이 출세 가도를 달렸다. 평생의 소원을 크게 이루었다고 기뻐하였다. 바야흐로 만사가 순조로워 인생의 최고조를 만난 듯 득의양양할 때, 재앙이 하늘에서 내려오듯이 홀연 다른 당파의 모함에 걸려들었다. 천자의 노여움이 하늘을 찔러, 감찰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여 재산을 전부 몰수하였고, 아내와 자식들도 다 흩어졌으며, 그 자신도 재판을 받아 강제로 멀고먼 변방으로 쫒겨나게 되었다. 그 자신 혈혈단신, 그 고초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인생의 무상함을 크게 탄식하다가 홀연 꿈에서 깨어났다. 여동빈은 잠에서 부시시 깨어나면서 “그 수십년의 인생살이 역정에서 부귀영화가 정녕코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낮잠에 들기 전처럼 선인 종리권이 아직까지도 화롯가에 쭈구리고 앉아 노란 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그 조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다. 선인 종리권을 스승으로 모시다 선인 종리권은 여동빈이 꿈에서 깨어난 것을 보고는 웃으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노란 조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꿈이 끝났다. 너의 오십년 부귀영화도 절정까지 갔다가 이렇게 결말나지 않았는가?" 여동빈은 본래 도를 향한 마음이 있었는데, 단지 지난 10년 간 어려운 고난이 있었고 그 고난에 대한 소득이 없어서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생생하게 꿈속에서 점화(點火)되었고, 갑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깨닫게 되자 세상에 미련을 버리고 수도하고자 결심하였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운방(雲房)선인 종리권에게 절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자네 황백술(黃白術)을 배우겠는가 ? 선인 종리권은 여동빈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 여동빈에게 "천부적인 너의 좋은 자질을 보건대 세상을 제도하는 선(仙)술을 닦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욕칠정에 물들은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기가 어려워 신선이 되기는 어렵다. 너의 공행(功行)을 다 채우지 않아서 설사 신선이 되는 신선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실제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쇠를 금으로 만들고, 납을 은으로 만드는 황백술(黃白術)을 전수하는 것보다 못하다. 너는 이 황백술로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라. 삼천 가지 공덕이 차고 팔백 가지 선행을 마치고 나면 내가 다시 와서, 그때, 너를 제도하겠다.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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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 학정봉 동굴에서 수련하다 春氣塞空花露滴 춘기색공화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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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따라 무창 황룡산에 오르다 一粒粟中藏世界 일립속중장세계 半升金當內煮山川 반승당내자산천 難免一朝落空亡 난면일조락공망 황룡선사가 가볍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면서 가운데 손가락으로 기둥에 박힌 보검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보건대 네가 이 검을 능히 칼집에서 끄집어낼 수는 있으나 다시 꼽을 수는 없다.” 여동빈이 그 황룡선사의 도와 법이 높고 깊음에 탄복하고 그 자리에서 절하여 사과하면서 불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였다. 황룡선사는 여동빈의 마음이 진심과 성의 있음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이미 반 되 들이 솥으로 산천을 삶고 또 어떻게 한 알의 조 알 속에 세계를 감출 수 있는가를 듣지 않았는가? 내가 말한다면, 그 뜻은 즉 먼저 마음속에 아무런 물건(욕심)이 없어야만 능히 삼라만상을 둘러싸 안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여동빈은 황룡선사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오도송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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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선사의 가르침에 오도송을 짓다 하나있는 표주박 주머니도 버리고, 거문고도 깨뜨려 버렸다. 아침에 동해에서 놀다가 저물어 창오군(광서성)으로 간다 이 일화를 기리기 위해 이 악양루 우측에는 삼취정(三醉亭)이 세워져 있다. 이 삼취정은 청나라 건륭 40년(1775년)에 세워졌고, 그곳에는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모양의 여동빈 상과 그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무기를 단검으로 만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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