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인인 일두 정여창 선생 가문에서 500여 년간 전해 내려온 솔송주 제조 기능보유자 박흥선 명인. 아래 사진은 시중에 판매되는 솔송주. 사진제공=함양군청 | |
솔송주(송순주·松筍酒)라, 들어는 봤던가. 주당(酒黨)의 한 사람은 아닐지언정 술 한 말을 지고는 못 가지만 마시고는 갈 수 있다고 평소 자신했던 바. 그런데도 당최 솔송주는 혀끝에만 맴돌 뿐 기억이 없다. 한자 이름을 풀이하자면 소나무 순으로 술을 빚는다는 뜻일 터인데 대체 무슨 맛일까.
대전~통영을 잇는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지곡IC로 들어섰다. 몇분을 더 달리자 줄을 이어선 고택이 나그네를 맞는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 아직도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 양반마을의 흔적. 세월을 거슬러가는 느낌이다.
마을 한가운데는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 턱 하고 버티고 섰다. 9900여 ㎡의 대지에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켜켜이 내려앉은 500년 성상의 더께가 무겁게 다가온다.
전통식품명인 제27호(2005년 지정), 솔송주를 빚는 박흥선(56) 씨는 그 곳에 있었다.,
우선 궁금한 것 부터 물어봤다. 농림수산식품부의 명인 지정현황에는 박 명인의 보유 기능이 송순주 제조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인터넷 등에서 송순주라는 검색어를 치면 함양뿐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서 이 술을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솔송주와 송순주, 갈피를 잡기가 조금 힘들다. 호사가들이 흔히 말하듯 어느 것이 진짜 전통을 이어온 술인지.
박 명인 대신 남편인 정천상(62) 씨가 말을 받았다. 정 씨는 솔송주를 만드는 (주)명가원의 대표다. "원래는 송순주가 맞습니다. 그런데 주조허가를 받으려다 보니 전국적으로 같은 이름이 몇개 있어 '지리산 솔송주'라고 바꿨습니다."
솔송주는 전통이 길다. 생몰연대가 1450~1504년인 정여창 선생 때부터 가양주(家釀酒)로 내려왔으니 어림잡아도 500년을 훌쩍 넘는다. 당시에는 송순주라 불렸다. 그러나 지금의 명칭이야 어찌됐든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송순주 제조 명인으로 지정된 사람은 박 명인이 유일하다.
정여창 선생 때에는 조선 각지에서 온 선비들로 개평마을이 늘 북적거렸다. 선생의 높은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의 집에서는 이들을 대접할 술을 빚는데 1년에 쌀 300석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박 명인은 32년 전에 함양읍에서 하동 정 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다. 박 명인은 100살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이효의 할머니로부터 솔송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 할머니는 고령이라 몸이 좋지 않아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 하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솔송주를 하루에 꼭 한 잔 이상은 단번에 비웠다. 개평마을에서 여태 이 할머니만큼 오래 사신 분이 없었다. 그래서 박 명인은 솔송주를 시어머니의 장수 이유로 생각한다.
사는 날까지 계속 빚어야 할 솔송주
이 할머니의 술 빚는 솜씨는 예전부터 유명했다. 아들 정 씨의 기억으로는 자신이 어릴 때 술 한잔 얻어 먹기 위해 아니할 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정 씨가 젊었을 때도 소문을 들은 친구들이 늘 집을 찾아 왔으나 이 할머니는 그야말로 맛만 볼 정도의 양만 내놔 모두 입맛을 다시면서 돌아섰다.
솔송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밑술이 필요하다. 박 명인은 찹쌀로 죽을 끓여 밑술을 만든다. 그 다음으로 고두밥을 만들어 식힌 뒤 솔잎과 송순을 쪄 밑술과 섞는다. 송순을 찌는 이유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함이다. 두 달 정도 발효를 시키고 난 뒤 맑은 윗술을 떠낸다. 그러면 명주 솔송주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시는 사람이야 술 한 잔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그만. 그러나 그 술이 빚어지기까지는 명인의 숱한 눈물과 땀이 숨어 있다.
특히 발효가 진행 중일 때는 한눈을 팔기 힘들다. 하루종일 신경을 써야 한다. 날씨와 온도에까지 주의를 기울인다. 온도에 따라 술의 숙성기간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만큼 술을 빚는데 발효와 숙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0여 년 전 솔송주의 대량화에 나섰을 때는 더욱 마음고생이 심했다. 500년 세월 동안 정 씨 집안에서 직감으로, 손맛으로 전해지던 제조법을 수치화하기까지에는 엄청난 노력이 들어야 했다.
"발효가 잘되고 안되고는 하늘만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빚는 데는 간절하게 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술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여서일까, 박 명인은 이제 냄새만 맡아도 발효가 잘됐는지를 아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박 명인은 과실주를 빚는 데도 일가견을 이뤘다. 솔송주 발효 노하우가 과실주 발효에도 그대로 이어진 때문이다. 박 명인이 만드는 과실주는 독특한 향기와 맛을 인정받아 일본 등 여러 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하지만 박 명인이 과실주를 빚게 된 데는 조금은 서글픈 현실이 깔려 있다. 속된 말로 전통주만으로는 생계유지가 힘든 이유다. 집에서 조금씩 담아 먹는 가양주만을 고집하면 모를까, 이왕지사 다중을 상대로 생산공정의 표준화에 나선 이상 손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명인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명인이라는 칭호는 기쁨이 아닌 굴레일 수도 있다.
"시집을 오니 골방에 술 항아리가 그득하더군요. 처음에는 누룩을 보는 것도 싫었어요. 술을 빚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지금도 힘들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명인이 된 이상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늘 느낍니다. 또 명예에 손상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늘 다짐합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술을 빚어야겠다는 각오도 하고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지금도 머리 속에는 항상 그 생각뿐입니다.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요."
솔향이 목을 휘감다
술 제조에 관한한 도사급인 박 명인. 주량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뜻밖의 대답이 돌와왔다. 전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발개져 일찌감치 마시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시음까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솔송주가 잘 빚어졌는지의 최종 판단은 박 명인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 박 명인은 오히려 술은 혀끝으로 맛을 봐야 하는 까닭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감정에 더 유리하다는 말을 던진다.
슬하에 딸 둘을 둔 박 명인. 500년 전통의 솔송주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큰딸이 얼마 전부터 가업을 잇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 명인이 내친 김에 전통주를 홀대시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에 일침을 박았다. 땅과 몸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인데 지나친 외국술 선호가 안타깝다는 것이다.
"술도 신토불이 아닙니까. 제 땅에서 나는 술을 마셔야 더 몸에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술이 제일 좋습니다. 사람들이 전통주를 많이 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렇다면 '백문이 불여일음(?)'. 박 명인이 정성으로 빚어낸 솔송주를 한 번 마셔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병 뚜껑을 여니 향긋한 냄새가 우선 코를 사로잡는다. 한 모금 넘기니 목을 자극하는 진한 솔내음. 그 향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고 소문났다던 솔송주의 명성이 허튼 말은 아니었다.
박 명인의 말에 따르면 이게 솔송주의 비법. 술의 맛은 발효과정에서 남은 당(잔당)이 좌우한다는 것. 당이 너무 없으면 독주가 되고 많이 남아 있으면 고유의 맛이 사라진다.
한 잔을 마신 뒤 다시금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솔송주. 과연 명인의 힘이다.
■ 솔송주의 매력
- 솔향기 일품·건강에도 좋아
안동이나 경주 등 역사가 오래된 도시에 전통 술이 있듯이 솔송주는 함양을 대표하는 술이다. 솔송주는 우선 향기가 일품이고 맛이 부드러우며 건강에도 좋다. 지역의 명주이기 때문에 그 기술이 잘 보존돼야 하고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김성진·함양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