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명인, 명장을 찾아서

醉月 2009. 4. 28. 11:51

박흥선 솔송주 제조 기능보유자

500여 년 내려온 전통 가양주 맥을 잇는다
조선 석학 정여창 선생 댁 찾은 선비들 대접 위해 빚어, "우리 땅에서 난 것 외면한채 외국술 찾는 세태 아쉬워"

명인(名人) 혹은 명장(名匠). 사전적인 의미로는 어떤 분야에서 기예나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일컫는 명사. 이른바 그 방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 다른 말로 고수(高手)라고 부른들 아무도 탓하지 못할 터. 다만 고수라는 단어가 심산유곡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은둔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면 명인과 명장은 우리 주변에서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던져주는 정도의 차이 아닐까. 하지만 누구나 쉽게 지존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 명인이든 명장이든, 혹은 고수든 그들이 디딘 발걸음 발걸음 밑에는 피나는 노력과 무수히 쏟아낸 땀이 깔려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그래서 국제신문 '주말&엔'이 그동안 연재했던 '고수를 찾아서'에 이어 명인과 명장을 찾아나섰다. 명인·명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그들의 치열한 삶을 배우기 위해서.

 
  조선시대 문인인 일두 정여창 선생 가문에서 500여 년간 전해 내려온 솔송주 제조 기능보유자 박흥선 명인. 아래 사진은 시중에 판매되는 솔송주. 사진제공=함양군청
술 익는 마을

솔송주(송순주·松筍酒)라, 들어는 봤던가. 주당(酒黨)의 한 사람은 아닐지언정 술 한 말을 지고는 못 가지만 마시고는 갈 수 있다고 평소 자신했던 바. 그런데도 당최 솔송주는 혀끝에만 맴돌 뿐 기억이 없다. 한자 이름을 풀이하자면 소나무 순으로 술을 빚는다는 뜻일 터인데 대체 무슨 맛일까.

대전~통영을 잇는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지곡IC로 들어섰다. 몇분을 더 달리자 줄을 이어선 고택이 나그네를 맞는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 아직도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 양반마을의 흔적. 세월을 거슬러가는 느낌이다.

마을 한가운데는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 턱 하고 버티고 섰다. 9900여 ㎡의 대지에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켜켜이 내려앉은 500년 성상의 더께가 무겁게 다가온다.

전통식품명인 제27호(2005년 지정), 솔송주를 빚는 박흥선(56) 씨는 그 곳에 있었다.,

우선 궁금한 것 부터 물어봤다. 농림수산식품부의 명인 지정현황에는 박 명인의 보유 기능이 송순주 제조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인터넷 등에서 송순주라는 검색어를 치면 함양뿐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서 이 술을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솔송주와 송순주, 갈피를 잡기가 조금 힘들다. 호사가들이 흔히 말하듯 어느 것이 진짜 전통을 이어온 술인지.

박 명인 대신 남편인 정천상(62) 씨가 말을 받았다. 정 씨는 솔송주를 만드는 (주)명가원의 대표다. "원래는 송순주가 맞습니다. 그런데 주조허가를 받으려다 보니 전국적으로 같은 이름이 몇개 있어 '지리산 솔송주'라고 바꿨습니다."

솔송주는 전통이 길다. 생몰연대가 1450~1504년인 정여창 선생 때부터 가양주(家釀酒)로 내려왔으니 어림잡아도 500년을 훌쩍 넘는다. 당시에는 송순주라 불렸다. 그러나 지금의 명칭이야 어찌됐든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송순주 제조 명인으로 지정된 사람은 박 명인이 유일하다.

정여창 선생 때에는 조선 각지에서 온 선비들로 개평마을이 늘 북적거렸다. 선생의 높은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의 집에서는 이들을 대접할 술을 빚는데 1년에 쌀 300석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박 명인은 32년 전에 함양읍에서 하동 정 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다. 박 명인은 100살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이효의 할머니로부터 솔송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 할머니는 고령이라 몸이 좋지 않아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 하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솔송주를 하루에 꼭 한 잔 이상은 단번에 비웠다. 개평마을에서 여태 이 할머니만큼 오래 사신 분이 없었다. 그래서 박 명인은 솔송주를 시어머니의 장수 이유로 생각한다.

사는 날까지 계속 빚어야 할 솔송주

이 할머니의 술 빚는 솜씨는 예전부터 유명했다. 아들 정 씨의 기억으로는 자신이 어릴 때 술 한잔 얻어 먹기 위해 아니할 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정 씨가 젊었을 때도 소문을 들은 친구들이 늘 집을 찾아 왔으나 이 할머니는 그야말로 맛만 볼 정도의 양만 내놔 모두 입맛을 다시면서 돌아섰다.

솔송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밑술이 필요하다. 박 명인은 찹쌀로 죽을 끓여 밑술을 만든다. 그 다음으로 고두밥을 만들어 식힌 뒤 솔잎과 송순을 쪄 밑술과 섞는다. 송순을 찌는 이유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함이다. 두 달 정도 발효를 시키고 난 뒤 맑은 윗술을 떠낸다. 그러면 명주 솔송주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시는 사람이야 술 한 잔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그만. 그러나 그 술이 빚어지기까지는 명인의 숱한 눈물과 땀이 숨어 있다.

특히 발효가 진행 중일 때는 한눈을 팔기 힘들다. 하루종일 신경을 써야 한다. 날씨와 온도에까지 주의를 기울인다. 온도에 따라 술의 숙성기간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만큼 술을 빚는데 발효와 숙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0여 년 전 솔송주의 대량화에 나섰을 때는 더욱 마음고생이 심했다. 500년 세월 동안 정 씨 집안에서 직감으로, 손맛으로 전해지던 제조법을 수치화하기까지에는 엄청난 노력이 들어야 했다.

"발효가 잘되고 안되고는 하늘만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빚는 데는 간절하게 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술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여서일까, 박 명인은 이제 냄새만 맡아도 발효가 잘됐는지를 아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박 명인은 과실주를 빚는 데도 일가견을 이뤘다. 솔송주 발효 노하우가 과실주 발효에도 그대로 이어진 때문이다. 박 명인이 만드는 과실주는 독특한 향기와 맛을 인정받아 일본 등 여러 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하지만 박 명인이 과실주를 빚게 된 데는 조금은 서글픈 현실이 깔려 있다. 속된 말로 전통주만으로는 생계유지가 힘든 이유다. 집에서 조금씩 담아 먹는 가양주만을 고집하면 모를까, 이왕지사 다중을 상대로 생산공정의 표준화에 나선 이상 손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명인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명인이라는 칭호는 기쁨이 아닌 굴레일 수도 있다.

"시집을 오니 골방에 술 항아리가 그득하더군요. 처음에는 누룩을 보는 것도 싫었어요. 술을 빚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지금도 힘들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명인이 된 이상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늘 느낍니다. 또 명예에 손상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늘 다짐합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술을 빚어야겠다는 각오도 하고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지금도 머리 속에는 항상 그 생각뿐입니다.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요."

솔향이 목을 휘감다

술 제조에 관한한 도사급인 박 명인. 주량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뜻밖의 대답이 돌와왔다. 전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발개져 일찌감치 마시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시음까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솔송주가 잘 빚어졌는지의 최종 판단은 박 명인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 박 명인은 오히려 술은 혀끝으로 맛을 봐야 하는 까닭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감정에 더 유리하다는 말을 던진다.

슬하에 딸 둘을 둔 박 명인. 500년 전통의 솔송주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큰딸이 얼마 전부터 가업을 잇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 명인이 내친 김에 전통주를 홀대시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에 일침을 박았다. 땅과 몸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인데 지나친 외국술 선호가 안타깝다는 것이다.

"술도 신토불이 아닙니까. 제 땅에서 나는 술을 마셔야 더 몸에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술이 제일 좋습니다. 사람들이 전통주를 많이 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렇다면 '백문이 불여일음(?)'. 박 명인이 정성으로 빚어낸 솔송주를 한 번 마셔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병 뚜껑을 여니 향긋한 냄새가 우선 코를 사로잡는다. 한 모금 넘기니 목을 자극하는 진한 솔내음. 그 향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고 소문났다던 솔송주의 명성이 허튼 말은 아니었다.

박 명인의 말에 따르면 이게 솔송주의 비법. 술의 맛은 발효과정에서 남은 당(잔당)이 좌우한다는 것. 당이 너무 없으면 독주가 되고 많이 남아 있으면 고유의 맛이 사라진다.

한 잔을 마신 뒤 다시금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솔송주. 과연 명인의 힘이다.


■ 솔송주의 매력

- 솔향기 일품·건강에도 좋아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솔송주(송순주)는 정여창 선생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술로 임금에게 진상되기도 했다고 한다. 여러 문헌에 언급될 만큼 솔로 만든 술은 전통이 오래됐다. 특히 우리나라 육송의 솔잎에는 혈액을 정화하고 노화를 막아주는 성분이 있어 몸 속의 노폐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기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함양군 지곡면의 토질에는 게르마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이곳에서 자란 소나무로 만든 술은 품질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안동이나 경주 등 역사가 오래된 도시에 전통 술이 있듯이 솔송주는 함양을 대표하는 술이다. 솔송주는 우선 향기가 일품이고 맛이 부드러우며 건강에도 좋다. 지역의 명주이기 때문에 그 기술이 잘 보존돼야 하고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김성진·함양문화원장

홍소술 죽로차 제조 기능보유자
"茶와 함께한 50년,마침내 경지에 오르다"
경남 하동을 명실상부한 차의 고장으로 만든 대부, "조만간 차문화가 우리사회의 정신적 구심점 될 것"

 
  죽로차 제조 기능보유자 홍소술 명인. 그는 올바른 차문화의 정립이 앞으로 우리사회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김세주 기자 sjkim0@kookje.co.kr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가는 길. '화개장터'라는 노래가 혀끝에 맴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거론할라치면 항상 어김없이 등장하던 그 노래가.

남해고속도로에서 하동인터체인지로 빠져 드니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글이 새겨진 큰 돌이 나그네를 맞는다. 다소 뜬금없다. 너무 호들갑을 ㅌ뜨는구나라며 피식 웃고 말았는데, 곧 그 생각을 고쳐야 했다. 강을 따라가는 고즈넉한 길, 참 좋다. 번잡한 도심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할 여유도 있다. 길이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윽고 남도대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을 이어준다. 준공 즈음 '영·호남 화합의 상징'이니 '화합의 다리'니 하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떠돌았다.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불과할 터다. 수백 년 전부터 섬진강을 가로질러 서로 간에 정을 텄던 사람들에게 다리란 다소 편리함을 주는 것 외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사람이 사는 법은 어디서나 같지 않은가.


차의 맥을 이은 화개사람들

죽로차 제조기능 보유자 홍소술(78) 명인. 그는 변함없이 화개 땅을 지키고 있었다. 고향은 경북 고령. 그러나 홍 명인은 토박이보다 더한 하동사람이 된 지 오래다. 하동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1950년대 말. 반백 년 세월 동안 그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하동과는 전혀 연고가 없습니다. 차나무를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기구한 운명이지요."

 
젊은 시절 사업을 하던 홍 명인은 우연한 기회에 차를 접하게 됐고 뜻한 바가 있어 재배지를 찾아 곳곳을 누빈다. 처음에 간 곳은 산청군 시천면. 차나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다. 근데 웬걸, 자신의 말마따나 '있기는 한데 영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낙담해 발길을 돌리려는 홍 명인에게 복음과도 같은 말이 날아들었다. 누군가가 "화개에 가면 차나무가 겁나게 많다"라고 일러준 것. '겁나게'라는 표현은 경상도 사람들이 뭔가를 강조할 때 자주 쓰는 말. 홍 명인에게도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나무를 애타게 찾고 있던 홍 명인에게 '겁나게'라는 말은 꼬집어낼 수는 없지만 어떤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이 표현에 매혹당해 그 길로 화개로 향한다.

"며칠 동안 산청에서 산을 타고 하동까지 왔지요. 넘어지고 긁히고 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또 당시는 산속에 곰 같은 짐승들도 많았을 때라 무섭기도 했지요. 간신히 하동에 왔는데 이번에는 여관에서 재워주지를 않는 겁니다. 복장은 엉망이고 온몸이 흙투성이다 보니 여관 주인이 저를 공비로 생각한 겁니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지리산에는 공비가 설치고 다녔거든요."

화개에 와보니 차나무가 곳곳에 있었다. 모두가 야생 그대로였다.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나 인근 주민들이 감기 몸살을 다스리는 약의 용도로 소량의 차를 재배하는 것 외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상태.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었던 1950년대 말, 차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사치를 떠나 제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질 때였다. 그러나 홍 명인이 볼 때 비교적 잘 보존된 화개의 차나무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건 전통의 계승이었다.

홍 명인은 화개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 차의 맥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고 확신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차문화는 일찌감치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홍 명인은 '하동 차를 일군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식의 칭찬에 겸연쩍은 반응을 보인다.

"저는 제가 이곳에서 차를 처음 만들었느니 하는 소리를 절대 안 합니다. 저는 단지 차를 산업화하는 데 기여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홍 명인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하동사람들은 거의 없다. 지금의 하동 차를 존재하게 만든 이가 홍 명인이라는 점에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하는 까닭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홍 명인은 차나무의 재배와 보급을 통해 하동지역 농가의 소득을 올리는 데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홍 명인이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부터. 시작은 미미했다. 생산량도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차를 만드는 대형업체가 전무했던 당시를 돌아본다면 체계적인 시설을 갖췄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이후 홍 명인은 5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차를 거론할 때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로 자리를 잡는다. 홍 명인이 세운 화개제다는 법인을 제외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제다업체로는 국내 최대규모다.

"그 오랜 세월을 결코 우습게 볼 게 아닙니다. 지금도 그때 심었던 방풍림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참 고생 많이 했지요. 지금 와서 보면 미친 짓처럼 느껴집니다."

홍 명인은 지난해 5월에야 전통식품명인 30호(죽로차·竹露茶)로 지정됐다. 차에 바친 세월이나 명성 등을 감안하면 뜻밖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적극적으로 명인 신청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명인으로 지정되려면 절차가 복잡한 데다 그외에도 알게 모르게 외부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 남들이 인정을 해줘야 진짜 명인이지 스스로가 '내가 명인이오'라고 나서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았다. 현재 가업을 잇고 있는 둘째 아들을 포함해 자식들이 "명인이라는 것이 하나의 명예이니 한번 신청해보자"라며 나서서 수속을 밟아준 덕분에 비로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겸손과 봉사를 추구하는 차문화

홍 명인이 만드는 죽로차는 대나무 밭에서 자란 차나무 잎으로 만든다. 대나무는 뿌리가 옆으로 자란다. 반면 차나무는 뿌리가 밑으로 내려간다. 어찌보면 죽로차는 대나무와 차나무의 절묘한 공생에서 나온 명품인 셈이다. 차는 이른 봄 처음 딴 찻잎으로 만든 차가 가장 우수하다. 첫물차라고 부르기도 하도 잎을 따는 시기가 24절기 가운데 곡우(穀雨)를 전후한 때여서 '우전차(雨前茶)'라고도 일컫는다.

죽로차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 '조선불교통사'나 '해동호남지리산 대화엄사 사적' 등의 문헌을 보면 죽로차라는 단어가 나온다. 가야의 수로왕비 허 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 죽로차라는 설도 있다.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다. 옛날 사찰에서는 '구증구포(九蒸九曝·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빈다)'라는 방법을 이용해 죽로차를 만들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명인이 보는 좋은 차는 어떤 것일까. 내심 궁금했던 터. 근데 돌아온 대답은 다소 싱겁다. 보통 사람들이 시음을 해봐서 좋다고 하면 좋은 차라는….

"사람마다 기술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차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즉 내가 만들면 내 차가 되는 것이고, 남이 만들면 남의 차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차가 제일이라고 하는 자랑은 우스운 것입니다. 차를 마신 사람이 좋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게 좋은 차가 되는 것이지요."

조금 알쏭달쏭하다. 요컨대 아무리 천하명차라도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면 안 마신 것만 못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만들어지는 차가 각양각색이라 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홍 명인이 양보하지 못하는 원칙이 딱 하나 있다. 누가 뭐래도 차는 마무리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론이다.

통상 찻잎은 딴 지 두 시간이 지나면 자체산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녹차는 두 시간 이내에 반드시 덖음작업을 해야 한다. 결국 차를 만드는 작업은 덖음과 건조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완성품이 나오기 전 열처리를 포함한 마지막 공정이 차의 품질을 좌우한다.

"차 맛은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때 차 본연의 맛과 향을 뽑아내야 하는데 대단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20~30년 이상 차와 함께해야 가능한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약간 고소한 맛이 나는 차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원칙적으로 보면 이건 마무리 작업이 잘못돼 온도조절에 실패한 것입니다. 결코 좋은 차가 아닌 것이죠."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던 홍 명인의 어투가 어느 순간 높아졌다. 차문화에 대한 말을 꺼내면서부터다. 홍 명인이 먼저 거론한 것은 차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얕은 의식. 정부기관의 일부 공무원들은 아직도 차를 독립된 식품군이 아니라 채소의 일종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차가 무슨 문화냐'고 반문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도(茶道)라고 해서 너무 격식을 따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차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도 단호한 답을 내놓는다. 지나친 격식을 내세우는 것은 그동안 차인들이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는 관공서나 큰 기업의 책임자들을 만나면 되도록 비서가 차를 가져오지 말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 방의 주인이 차를 직접 타 주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일반사람들이 차를 마실 때는 큰 격식이 필요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든 마시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차츰 차문화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면서 홍 명인은 앞으로 차문화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내놓았다. 차문화의 핵심은 '겸손과 봉사'이며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요소라고 보는 까닭이다.

"기존의 종교로는 향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할 갈등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공자 맹자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 대안은 차문화를 바로 세우는 방법밖에 없는 거죠. 단순히 차를 마시는 데서 끝낼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 차문화 속에 숨어 있는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적 운동이라도 벌어졌으면 합니다."

 

김나미 자수명장

"뼈를 깎는 고통 끝에 찾아낸 전통자수"
선조들의 바느질 문화 계승에 반백년 세월 바쳐, 하루 스무시간 일하며 자신만의 색깔 만들어내


 
  우리나라 전통자수의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김나미 명장이 자신이 만든 의걸이장 앞에 서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고려시대 자수유물인 사계분경도의 재현품.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아녀자들이 거처하는 방에 일곱 부인들이 모였다. 모두 여인네들의 침선(針線·바느질)을 돕는 이들. 모임을 가지게 된 이유가 사뭇 진지하다. 글을 하는 선비들은 붓과 먹, 종이, 벼루로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삼는데 규중 여자인들 어찌 벗이 있을 수 없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이유로 서로 이름을 정하여 벗을 삼기로 한다. 졸지에 바늘은 세요각시(細腰閣氏), 자는 척 부인(戚夫人), 가위는 교두각시(交頭閣氏), 인두는 인화부인(引火夫人), 다리미는 울랑자, 실은 청홍흑백 각시(靑紅黑白閣氏), 골무는 감토할미가 된다. 이어 일곱 부인들은 침선을 하는 데는 내가 제일이라며 앞다퉈 저마다 공치사를 늘어놓는다.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작가가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조선시대 한글 수필. 글의 주제는 간단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으니 그에 따라 성실한 삶을 살라는 것. 규중 아녀자로 추정되는 저자는 물건의 의인화를 통해 세상의 교만을 통렬하게 경계한다.

자수 명장을 찾아가는 길. 학창시절에 배웠던 옛 글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기억을 좀 더 더듬어가니 '조침문(弔針文)'으로 이어진다. 한 부인이 평소 아끼던 바늘을 부러뜨린 뒤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을 담은 글. 그만큼 조선시대 규중 여인들에게 침선은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었으리라.


파리로의 유학을 꿈꾸던 소녀

부산 동구 좌천동의 한 아파트. 승강기에서 내리자 단아한 한복을 입은 부인이 방문객을 맞는다. 김나미(69) 자수명장. 전통자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다. 출입문에는 '대한민국 명장의 집'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명장의 자부심이 여실히 묻어 나온다.

자수(刺繡). 여러 가지의 색실로 옷감이나 헝겊 등에 그림이나 글자, 무늬를 수놓는 일. 바늘로 한 뜸 한 뜸 정성을 들여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지금은 모든 면에서 눈이 핑핑 돌아갈 만큼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미덕인 시대. 이런 마당에 자수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여고시절 은사가 저를 자수의 길로 이끌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요. 지금은 아무도 이것을 몰라주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펼쳐나가면 반드시 빛을 볼 것이다라고요. 저는 전통자수가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를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소중한 문화라고 믿습니다."

김 명장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다. 어머니가 명주에 직접 염색을 해 뽑아낸 남색과 황색 등의 색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어머니의 일을 많이 도와주면서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힌다.

이런 김 명장을 눈여겨 본 사람은 여고 때 가정과목을 가르쳤던 선생님. 청빈하고 단아했던 이 여교사는 바느질 솜씨가 좋은 김 명장을 아끼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그 때 김 명장의 꿈은 프랑스로 유학을 가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는 것. 여고시절 직접 바느질을 해서 만든 옷을 입고 다닐 만큼 솜씨가 있었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꿈은 컸지만 현실을 녹록잖았다. 당시는 웬만한 뒷받침이 없고는 외국으로 나간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던 때. 김 명장은 도리없이 꿈을 접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생활을 위해 소규모로 바느질 일을 하던 김 명장에게 다시 여고 은사의 연락이 왔다. 유학준비가 잘되고 있는지를 묻고는 "제1희망이 안되면 제2의 희망을 찾자"며 함께 일할 것을 권유했다. 김 명장이 자수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마음먹는 것이 힘들었지 일단 자수에 발을 들어놓고 나니 김 명장은 말 그대로 '물 만난 고기'였다. 밤을 꼬박 새기도 일쑤. 남북 간 체제경쟁이 치열하던 때, 민방공 훈련으로 등화관제가 되면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 쯤에 내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은사의 소개로 선배와 함께 일을 했는데 아래 위가 있다 보니 늘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독립을 하고 나서는 '나미수예사'라는 이름으로 민예사도 차리고 학원에서 수강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다보니 일은 재미가 있었다. 어느 정도 명성도 따라왔다. 그러나 김 명장은 그때까지도 전통자수라는 것이 있는 줄 몰랐다. 자신이 하던 것은 그냥 동양자수라고 불렸고, 크게 신경쓸 이유도 없었다. 그즈음 김 명장에게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다가온다.

우리 것을 찾자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지요. 평소 알고 지내던 젊은 화가들이 제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더니 "자수가 무슨 작품이냐. 남의 그림을 얹어놓고 수를 놓은 것뿐인데"라고 지적을 하더군요. 그때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지요."

당시만 해도 동양자수는 남이 그린 그림을 천 위에 올려 놓고 색깔에 따라 수를 놓는 것이 일반적인 제작 방법. 그러니 화가들이 비아냥거릴 만도 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김 명장은 화가들의 힘을 빌리는 것을 거절한다. 창작품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기존 전통작품을 차용할 때는 윤곽선만을 그린 상태에서 수를 놓았다.

 
김 명장의 작품세계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된 것은 동양자수로부터의 탈피다. 자수는 신바람 나는 일이었지만 하면 할 수록 뭔가 우리 것이 아닌 것 같다는 허전함이 들었다. 그래서 찾으려 한 것이 우리의 전통자수.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전통자수 제품도 적은 데다 관련 문헌마저 찾기 힘들어 김 명장의 노력은 거의 맨손으로 언 땅을 파는 격이었다.

근데 갈망하다 보니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한상수 자수장(중요무형문화재 80호)을 만나게 된 것. 서로가 전통자수(궁중자수)에 목마를 때였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문헌을 뒤지고 전통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 것을 되살리려 온힘을 다했다.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전통자수는 그렇게 되살아 난다.

"10년을 준비한 끝에 지난 1983년 100여 점의 작품으로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주위의 반응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이전에 저를 비난했던 화가들에게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를 다시 한번 평가해 보라고요."

김 명장은 이 개인전 이후 문화계에서 확실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자수명장이 된 것은 지난 1999년이다. 현재 전국에 있는 자수명장은 모두 5명. 부산에서는 김 명장이 유일하다. 올해초에는 전통자수와 침선을 섬유예술에 접목시켜 생활예술로 승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제9회 부산문화대상(문화예술 부문)을 받았다.

장롱에 전통자수를 접목한 이도 김 명장이다. 자수로 함을 장식한 것은 전해지는 것이 있지만 자수로 치장한 장롱은 찾기 힘들다. 김 명장은 반년가량을 들여 '애기3층장'을 만들었다. 당연히 큰 호평이 돌아왔다.

자수는 만만찮다. 아니할 말로 중노동에 가깝다. 작품 하나를 제대로 해 내려면 길게는 몇년이 걸린다. 한창때 김 명장은 하루 20시간씩 일한 적도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자수를 하다보면 어깨가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한자리에 앉은 채 장시간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명장은 틈틈히 걷기와 스트레칭 등으로 몸을 풀어주고 있다.

자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경제성은 없다. 속된 말로 '돈이 되는 직업'이 아니다. 자수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김 명장도 한때 무너져 내릴 듯한 고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 명장은 '돈에 연연하지 말고 작품의 수준을 높이자'라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지금은 형편이 좀 나아진 편이다.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전통자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까닭이다.

김 명장이 바늘 하나를 들어 보인다. 보통 바늘의 반 정도 되는 크기. 바늘 귀가 가물가물하다. 돋보기로 확대를 한들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여기에다 어떻게 실을 꿴다는 말인가. 엷은 웃음을 짓던 김 명장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는다. 그리고는 실을 잡더니 대번에 바늘귀에 꿰어 버린다. 입이 딱 벌어진다. "단련이 돼서 그런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김 명장은 그 작은 바늘로 밑그림을 따라 한 뜸 한 뜸 수를 놓아 나간다. 안경을 벗으면 뚝 떨어지는 시력. 그럼에도 김 명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안으로 그 정밀한 작업을 해 낸다. 하긴, 아무나 명장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장은 남에게 본보기가 돼야

김 명장은 현재 자신의 집이자 작업실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 가까이 자수를 공부한 이들이다. 김 명장은 제자들과 함께 오는 11월 전수자 작품 발표회를 가질 계획이다. 경성대 외래교수인 김 명장의 딸도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올 봄에는 모녀가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내년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 작품전을 열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딸은 여중생 때부터 자수를 했다. 처음에는 손이 모자라서 시켰다. 그때는 딸의 불평이 많았다. 엄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절대로 따라하지 않겠다던 딸이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쫓아 왔다.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제자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 봤다. 마음에 찍어 놓은 사람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 따님이 아니냐는 물었더니 "그래 주면 좋지"라며 웃는다.

전통자수 부문에서 우뚝 선 김 명장은 자수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할 말이 많다. 아직까지도 자수를 하찮은 바느질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수명장이 뭐가 대단한 거냐"고 폄훼까지 하는 문화관련 공무원들을 보면 기가 턱 막힌다.

지금 우리 지역에서 부산을 널리 알릴만한 문화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은 것이 현실. 때문에 김 명장은 부산시 등이 나서 공항이나 항구 등 관문에 자수 전시관만 두더라도 외국인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역에 문화관련 명장들이 있으면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메세나 운동 같은 것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김 명장은 명장의 지위에 오르고 난 뒤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남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고 행여 누를 끼칠까봐서다.

"전통자수는 여성으로서 해볼 만한 일이죠. 어려운 일도 많았으나 이 길을 걸은 데 대해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수는 보통 끈기가 아니면 이겨내기 힘듭니다. 이 일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 겁니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우리 전통문화가 중요시돼야 하니까요."

 

양창선 양복명장

"최고기술자도 장인정신 잃으면 곧 도태"
'옷의 달인' 자리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는 담금질, 60년된 양복점 100년 동안 이어가는 것이 희망


 
  자신의 양복점이 100년을 이어가기를 꿈꾸고 있는 양복명장 양창선 씨. 양 명장은 지금도 직접 바느질을 하며 양복을 만든다(아래 작은 사진). 서순룡 기자 seosy@kookje.co.kr

사람사는 세상에서 옷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게 마련. '아무려면 그럴려고'라는 반문이 이어지면 십중팔구 내미는 근거가 '의식주(衣食住)'다. 인간생활의 필수요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지 않느냐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터지만 그만큼 옷는 대우를 받는다. 옷이 좋으면 그것을 입는 사람이 돋보인다는 뜻의 '옷이 날개'라든지 '입은 거지는 얻어먹지만 벗은 거지는 못 얻어 먹는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면접시험 잘 치르는 요령 중 단정한 옷차림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옷이 사람의 첫 인상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진리일지 모른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 장인의 길

부산 중구 남포동 지하철 역에서 내려 용두산공원쪽으로 가다 보면 '국정사'라는 간판을 단 건물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매장. 국정사라는 이름만으로는 양복점인지도 쉬 짐작하기 힘들다.

그곳에 양복명장(2005년 지정) 양창선(60) 씨가 있다. 40여 년을 양복만들기에 매달려 온 장인이다.

양 명장은 제주도가 고향.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속된 말로 '해 먹을 게 없어'큰 곳에서 기술을 배워볼 요량으로 1960년대 중반 부산으로 왔다. 확실한 내 일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부모형제와 의논조차 않고 무작정 배를 탔으니 사실상 가출이었다. 부산항에 내리고 보니 코 앞이 바로 남포동과 중앙동. 300여 곳의 양복점이 이 일대에 모여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대처로 나오긴 했지만 현실이 섬 청년에게 고분고분 기회를 주리라 생각했다면 언감생심. 양 명장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양복만드는 일을 하기로 한다.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당시엔 제화나 양복업이 최고의 선망 대상. 옷을 만드는 게 다른 직종보다는 좀 더 멋있게 보이더라는 점도 선택에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스물이 채 안된 풋내기에게 선뜻 기술을 가르쳐주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청년은 책을 보고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스승이나 선배의 어깨너머로 양복만드는 것을 하나하나 터득해간다.

"선배들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습니다. 양복 만드는 것은 일종의 도급제여서 다른 사람이 일감을 맡으면 내 몫이 줄어드니 기술을 절대 알려주지 않지요. 그래서 밤낮없이 파고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스스로 해 낸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일을 하게 된 것을 조금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양 명장이 이끌고 있는 국정사는 설립된 지 60년이 된 양복점이다. 14명이 일하고 있다. 웬만한 중소기업 수준이다. 역사나 규모면에서 우리나라 양복점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라고 양 명장은 자부한다. 30~40년된 숙련공도 많다. 양복부문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했다면 이곳에서는 아예 기술자 축에 끼지도 못한다. 금메달을 딴 사람이 다섯 명에다 은메달 수상자도 다섯 명이나 된다. 기술자 중에는 양 명장의 40년 지기도 있다.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사이다. 두 사람은 눈짓 하나로 모든 것이 통한다.

국정사의 최초 설립자와 2대 사장은 양 명장과 혈연 관계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1981년 양복점을 물려받았다. 양 명장은 윗사람들이 자신을 잘 봐줬기 때문이라고 겸손해한다. 또 당시에는 양복점이 제대로 대우를 못 받던 시절이어서 자식들에게 가업을 물려 주지 않으려 한 점도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양 명장이 국정사에서 일할 때는 비슷한 또래의 기술자들도 많았다. 2대를 이어온 양복점을 남의 피붙이에게 넘겨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없고서는 불가능할 터다.

양복은 사양산업이 아니다

명장이라는 칭호답게 양 명장은 양복부문에서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단골고객만도 1500명에 이른다. 40년 고객도 적지 않고 한 가족이 4대를 이어 양복점을 찾는 경우도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고객도 수두룩하다. 대체 양 명장의 양복은 다른 제품과 뭐가 다른 것일까.

"고객들이 제 옷을 입으면 착용감이 좋고 짜임새가 있다고 합디다. 한 번 보면 그 고객에게 맞는 색깔과 모양새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옷이 딱 맞게 되는 거지요. 흔히 옷은 제2의 피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비유하자면 기성복은 나이가 든 피부고 맞춤복은 20대의 생기있는 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알고 옷을 만들기 때문에 고객들이 끊이지 않는 듯합니다."

양 명장의 고객 가운데는 전직 대통령과 장관을 지낸 사람들부터 정·재계, 문화계 인사등 계층이 아주 다양하다. 그런 만큼 인맥관계도 넓다. 어찌보면 '정보의 보고'다. 그러나 양 명장은 단골 전직 대통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양복업계에서 양 명장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에는 기존의 제작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원타임 시스템'의 도입이다. 사회가 점점 바빠지다 보니 양복 한 벌을 맞추면서 예전처럼 치수재기, 시침질(가봉), 마무리 작업 등을 위해 고객을 여러 번 양복점으로 오게 하기는 힘들어진 것이 사실. 그래서 단 한 번의 방문으로 모든 공정을 끝낼 수 있도록 한 게 원타임 시스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을 세분화한 뒤 치수와 색깔에 맞춰 표본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즉석에서 일관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기성복의 장점을 수제품 제작에 녹여 넣은 것.

하지만 양 명장이 양복에 관한한 도사급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양복업은 명백히 하향길에 있는 업종. 미래에 대해 불안감이 없지는 않을 듯도 했다. 근데 웬걸, 양 명장의 어투가 단호해진다.

"양복업은 절대로 사양업종이 아닙니다. 맞춤양복을 선호하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가격이 부담스러울 따름이지요.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만 봐도 수제품(핸드메이드)쪽으로 가는 추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2%는 최고급 양복을 찾는다고 확신합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수치 아닙니까. 물론 사양업종이라는 이유로 중도에 양복업을 그만두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저는 그것을 장인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쯤되니 양 명장의 양복 가격이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의 최고급 계층이 선택하는 옷이라면 가격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상일 수밖에 없는 노릇. 얼핏 매장에 진열된 양복의 가격표를 보니 얼추 130만 원에서 200만 원. 여기서 양 명장은 "최고급 원단을 쓰면 더 비싸다"는 말 이외에는 더 이상의 언급을 꺼렸다. 하긴 값을 알면 뭘 하겠는가. 명품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가격이라는 것은 허울에 불과할 따름인데.

100년 양복점을 바라보다

양복은 상의 한 벌에 1만2000번의 바느질이 들어가야 하는 고된 작업. 상·하의 한 벌의 양복이 완성되는 데는 닷새가 걸린다. 그럼에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지금도 양 명장은 직접 옷을 만든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최소한 시침질까지는 자기손으로 처리를 한다.

"모름지기 명장이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이 부족한 것은 더 많습니다. 명장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명장이 된 이후에 외면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명장이 됐으면 명장다운 품질을 세상에 내놔야죠. 명장이 만든 제품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명장도 장인정신이 없으면 도태하고 맙니다. 현실에 맞게 계속 연구하고 노력해야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명장 정도 되면 "내가 최고"라며 뒷전으로 물러날만도 하련만 양복 작품전을 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양 명장은 지난 8일부터 부산롯데호텔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심혈을 기울인 양복 60점이 출품됐다. 양 명장은 개인전 이후에는 아예 상시 매장을 열 계획이다. 고객들에게 수제양복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양 명장은 자신의 모든 것이 녹아 있는 국정사에서 이제 100년 양복점을 바라보고 있다. 60년이 된 국정사가 계속해서 양복의 명소로 남기를 희망하는 까닭이다.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양 명장의 아들 필석(28) 씨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들의 나이가 있는 만큼 최소한 40년은 충분히 이끌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필석 씨 역시 각오가 대단하다. 그래서 양 명장은 대기업 디자인센터를 졸업하고도 아버지처럼 바느질을 하겠다는 아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여기에는, 앞으로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잘 살아남는다는 길이라는 생각도 깔려 있다.

사회봉사활동에서도 양 명장은 명장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장기재소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전문대 패션학과와 힘을 합쳐 맞춤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갈수록 양복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그 대안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높고 이직률이 낮아 지속적으로 양복 제작 기술을 익히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양 명장은 또 양복만드는 일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국정사를 찾기를 당부한다. 자신에게 교육을 받으면 최고기술자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에게서 기술을 배운 사람 가운데 독립한 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명장이 되고 나니 오히려 사회적 책임감이 더 생깁니다. 이 분야를 잘 지켜나가면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양복만드는 일을 계속하려 합니다. 저에게는 오직 양복뿐입니다."

 

이동환 건축시공명장
"돌, 이만큼 매력있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10대 때 입문한 뒤 40여 년 건축시공 한 길 걸어, "완전히 빠지지 않으면 절대로 작품 나오지 않아"


 
  돌에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동환 건축시공명장.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서정빈 인턴기자
너무 넘치면 소중한 것을 모른다고 했던가. 돌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돌은 자연상태에서 존재하는 소재 중 가장 튼튼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광물. 또한 어디에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장점. 반면 그런 점 때문에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아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돌은 지구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인류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어온 터. 석기시대 때의 돌도끼나 돌화살 등에서부터 석탑이나 신전 등 인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유산에 이르기까지 돌의 쓰임새는 아주 다양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돌을 떡 주무르듯 한다'는 명장이 있다기에 길을 나섰다.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기장방면으로 조금 이동하다 보니 '모퉁이돌'이라는 간판을 단 곳이 눈에 띈다. 이름이 참 정겹다. '○○석재'라는 식의 상호에 견주면 훨씬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첫 눈에 보기에도 뭔가 남다른 기술을 가진 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동환(64) 씨가 낯선 방문객을 맞는다. 근데 이 씨가 건네는 명함에는 뜻밖에도 '건축시공명장'이라고 적혀 있다. 순간 약간 혼란스럽다. 돌을 다루는 분으로 들었는데 건축시공이라니. 의문은 이 명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풀렸다. 쉽게 말해 돌로 석등 같은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이는 석공예명장이고 돌을 이용해 건축을 하는 이가 건축시공명장이라는 것.


돌과의 천생연분

이 회사에서 이사로 일하고 있는 이 명장이 애초부터 돌과 친분을 맺어온 것은 아니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호구지책으로 돌을 접하게 된 것인데 이제는 천직이 되어 버렸다.

"함안군 칠원면이 고향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하는데 마침 세살 터울의 동생이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된 겁니다. 당시만 해도 다 가난할 때라 형제 두 명이 모두 학교에 갈 수는 없겠고, 동생이라도 중학교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제가 양보를 한 거죠."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한 이 명장은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왔다. 마침 지인 가운데 돌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든다.

세상 모든 일은 서로간에 인연이 있어야 빛을 보는 법.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돌을 만지기 시작했지만 슬슬 일에 재미가 붙었다. 이 명장의 말마따나 "적성에 딱 맞더라"는 것. 그러다 보니 별로 힘든 줄 모르고 일에 매달렸다. 요즘같이 기계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라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졌지만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사회에 어떤 체계적인 질서가 잡히지 않았던 때. 어수선한 시절이다 보니 작업장에는 군대 기피자 등을 포함한 사고뭉치들도 더러 있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당연히 기술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고 또 그런 것을 요구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게다가 일터에서 제일 막내였던 이 명장은 새벽 3시께 일어나 나중에 고참들이 일하기 편하게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연장의 날이 무뎌지면 벼려야 하고, 또 풀무질을 하기 위해 불도 피워야 하니 할 일이 많았습니다.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심할 때는 망치에 머리를 얻어 맞기도 했죠. 월급도 없었을 때니 주는 밥만 먹고 그저 일만 했습니다."

노력 앞에는 당할 자가 없다고 했던가, 3년가량을 그렇게 일하니 이 명장의 눈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1960년대 중반 서울에서 기능대회가 열렸다. 이 명장은 이 대회에 참가해 당당히 2등을 차지한다. 아하, 이게 나의 천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이 명장은 한눈팔지 않고 한 길을 걷는다.

실력이 나날이 쌓이면서 이 명장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주위의 평가도 달라졌다. 이 명장은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다른 기술자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았다.


돌에 미쳐라

건축시공분야의 명장은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이다. 이 명장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지난 1994년. 일에 종사한 기간이나 나이 등을 감안하면 그리 이른 나이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다.

"1980년대말부터 명장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때에는 직접 시연을 해야 했지요. 서울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그동안 쌓은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제가 명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촌사람이어서 그런지 심사위원들의 서울 말이 당최 잘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모이는 장소를 제대로 듣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나중에 부랴부랴 뛰어와보니 실격처리됐다고 하더군요. 시험장의 모든 사람들이 제가 만든 작품이 제일 좋았다고 평가를 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규정은 규정이니까."

낙심까지는 아니더라도 황당한 경험을 했던 이 명장은 이후에는 명장제도 심사에 응하지 않았다. 명장 칭호만 없었지 일정수준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는 데다 최고라는 자부심도 있었던 터라 심사관들 앞에서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

다행히도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명장제도의 틀이 많이 바뀌었다.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장인들을 우대하기 위해 경력과 공적, 사회기여도 등을 종합해 서류심사만으로 명장으로 인정하기로 한 것. 비로소 그도 명장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긴 어떤 분야의 최고수가 하수들을 앞에 두고 기술을 심사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명장에게 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간단히 "참 매력있다"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려면 돌에 완전히 빠져야 합니다. 돌에 완전히 미쳐버려야죠. 돌은 나무로 만든 것들에 비해 오래가지 않습니까. 그게 큰 매력입니다. 솔직히 돌은 한없이 무겁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일을 계속 해야죠."

이 명장은 문화재수리 기능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보존되어야 할 문화재에 문제가 생기면 해체 및 보수작업을 할 수 있는 전문가라는 뜻이다. 이 명장은 그동안 동래성이나 정발장군 동상, 여수 진남관 등의 보수 작업에 참여했다.

명장의 자리에 오른 지금도 이 명장은 웬만한 일은 직접 처리한다. 기계작업이 대세인 시대라 해도 반드시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명장이 일하는 현장은 부산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워낙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있다 보니 전국에서 작업 의뢰가 들어온다.


전통은 이어져야

명필이 붓을 나무라기야 하겠는가만 현재의 상황은 이 명장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우선 좋은 돌을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재료가 부실하면 좋은 음식이 나올 수 없는 노릇. 그건 돌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명장이 보건대 우리나라에 있는 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전북 익산의 황등석이다. 질이 우수해 가공하기가 아주 편하다. 경북 문경의 문경석도 괜찮다. 그런데 요즘은 중국산이 판을 친다. 값이 싼데다 최근에는 환경파괴 등을 이유로 광산허가가 잘 나지 않아 국내산의 공급이 달리는데 원인이 있다.

별다른 노력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돌을 다듬어 건축을 하는 업자들의 태도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장인정신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돌을 이용한 건축물은 수백년을 버텨야 하는데 이래서야 수십년조차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명장으로 달랑 지정만 해놓고 나몰라라 하는 행정당국의 태도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기술도 하나의 전통일진대 이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특히 '큰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명장은 요즘은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최근 허남식 부산시장이 명장들과의 만남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급을 한 까닭이다. 허 시장은 그 자리에서 명장현판 부착이나 부산시보 등을 통한 기사 게재, 공공장소에 명장들의 작품 진열 등을 약속했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안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명장은 시에서 각 분야의 고수들을 예우해준다는 데 대해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전시품의 의뢰가 들어오면 최고 수준의 작품을 서너점 정도 만들어 내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솔직히 건축시공은 수익성이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또 힘이 드는 직업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지요. 이것도 오래전부터 대대로 내려온 전통 가운데 하나인데 제 선에서 끊겨버린다면 큰 국가적 손실아니겠습니까. 정부의 인식전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명품을 남기고 싶다

명장이 되고 난 뒤 사회적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됐다는 이 명장. 그는 명장이 갖춰야 할 조건 중의 하나로 "돈에서 떠나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돈에 연연해서는 올바른 장인정신을 발휘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다.

이 명장은 돌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아왔고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아직 넘지 못한 벽은 있다.

수년 전 이탈리아의 로마에 갔을 때 이 명장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성당 등의 문화유산에 사용된 석재작품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돌을 자유자재로 다듬고 깎았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문가가 볼 때에도 신기했다. 그 성당 등은 현재와 같은 각종 장비가 제대로 없었던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 그럼에도 어쩌면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할 수 있을까라는 느낌에 이 명장은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최첨단 기계를 이용한 지금의 기술로도 해내지 못할 것들도 수두룩했다.

이 명장은 그 기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서너차례 로마를 찾아갔다. 그 때마다 놀라움만 더해졌다. 그는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그것을 재현해보려고 무지 노력도 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석재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 명장에게 큰 자극이 됐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물이 생긴 까닭이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기회가 된다면 돌로써 멋진 건축물을 한 번 지어보고 싶은 게 소원입니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김영재 침선명장

"힘들지만 하면 할수록 신기한 것이 침선(針線)"
복식유물 복원·염색 등 분야 자타공인 최고수, "옛 옷 만질 때면 밤샘작업해도 피곤하지 않아"

미라로 남은 시체는 썩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은 신기하다는 생각에 앞서 공포감마저 들 법하다. 게다가 아직 삭지 않은 의복의 사이사이에 살점이라도 붙어나올라치면 끔찍하다.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스스로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자기의 발로 보러 왔으니 개의치 않는다. 만약에 이런 기회조차 없었으면 어디서 수백 년 전 옛사람들의 일상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옛 복식을 재현한다는 건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지금도 어디에서 복식유물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지체없이 달려갑니다. 전국 어디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섭지는 않지요."


 
  옛사람들이 옷을 어떻게 만들어 입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다는 김영재 침선명장. 그는 우리 선조들의전통복식 재현과 문헌정리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고 있다. 곽재훈 기자 kwakjh@kookje.co.kr
옛 것을 찾는 지난한 길

단정한 한복과 은발이 무척 잘 어울리는 올해 일흔 셋의 침선(針線)명장 김영재 씨. 그에게는 무덤 속에서 나온 복식유물이 있는 곳이 현장이요 공부의 장이다. 의복의 특성상 옛것이 남아있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 그런 만큼 썩지 않은 미라가 입고 있는 옷은 보물이나 다름없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편안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김 명장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무덤 같은 곳에서 나온 옛날 옷을 보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바느질이 나오기도 합니다. 재봉틀도 없었을 때의 옛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옷을 지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고 궁금하죠. 이런 유물들을 만지고 있으면 밤새도록 해도 잠이 안 옵니다. 일반 옷들을 만들려고 한다면 조금만 해도 피곤한데…. 제가 선조들의 대를 잇는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고요."

김 명장은 옛 의복을 접하게 되면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바느질기법이라든가 천의 종류, 염색방법 같은 것들을 분석한다. 그리고는 일일이 바느질과 염색을 하면서 유물을 복원해 낸다. 다음으로는 그 과정을 문헌으로 하나하나 정리한다. 이런 여러 단계를 거치면 수백 년 전 우리 선조가 입었던 옷들이 비로소 현대에 와서 재현된다.

유물복원을 위한 김 명장의 노력은 집요하다. 한창 옛 의복에 미쳐 있을 때는 한 달에 두 번가량 서울로 가 대학원에 적을 두고 유물연구 및 복원 등에 관한 공부를 했다. 늦깎이 공부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재미가 더 있었다. 자신의 말마따나 취미가 없었으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통바느질은 지금 와서 개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식유물을 보고 재현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관련된 유물도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고 문헌은 아예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러다 보니 궁중의복을 포함해 옛 복식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복식유물에 매달릴 수밖에요."

그동안 김 명장이 재현한 옛 옷들은 사도세자의 딸이 입었던 네 겹 당의를 비롯해 명문 사대부 집안의 의복, 신랑 예복, 어린이 옷과 배냇저고리 등 수십 가지에 달한다.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친 것들이다.

오랫동안 복식유물에 빠져 산 김 명장이 보건대 궁중의복과 민초들의 의복은 바느질 기법 등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농투성이들이 입었던 옷이 더 곱다. 많은 식구들의 옷을 일일이 지어 입혀야 했던 우리 옛 여인들의 솜씨가 그만큼 만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남달랐던 손재주

'침선'. 한자 뜻 그대로라면 바늘과 실, 곧 바느질을 말한다. 김 명장은 지난 1997년 이 분야의 명장자리에 올랐다. 열아홉 살 때 상품을 염두에 두고 바느질을 시작한 지 40여 년 만이다. 명장이 된 데는 그동안 김 명장이 해온 복식유물 복원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거기에다 직접 개발해 특허를 받은 미싱 노루발의 보급도 한몫을 했다. 오랜 연구 끝에 김 명장은 솔기를 박을 때 천이 울지 않는 노루발을 만들어 각 대학 의상관련학과나 전문가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부산 서구 서대신동의 김 명장 작업실에는 '대한민국 침선명장 1호, 명장 김영재'란 간판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강한 자부심으로도 느껴진다.

근데 김 명장은 오히려 이 간판 때문에 여러 가지 손해를 본다며 손사래를 쳤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다가도 간판을 보고는 놀라서 가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 아마 명장이라는 칭호가 주는 무게감과 제품에 분명히 이름값이 포함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 명장은 "한때 간판을 내릴까 하고 심각히 고민한 적이 있었다"며 웃었다.

김 명장의 고향은 전남 광양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 바느질은 집에서 배웠다. 할머니는 고을 좌수의 딸이었고 어머니는 면장집의 여식이어서 손재주가 뛰어났다. 김 명장은 그런 웃어른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바느질 솜씨를 익혔다.

스무 살 때 결혼을 한 김 명장은 해군이었던 남편을 따라 진해로 거처를 옮겼다.그러다가 제대를 한 남편이 해양경찰 생활을 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오게 된다. 본격적인 바느질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염색분야에서도 김 명장은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다. 웬만한 염색은 직접 해낸다. 또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염색법은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터득해 낸다.

"솔직히 쪽으로 물을 들인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는 쪽으로 염색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서운암 성파스님에게서 10년가량 쪽물 들이는 것을 배웠습니다. 일일이 염색을 하려니 손이 많이 가고 일도 힘이 들지만 그 아름다움은 비할 데가 없지요."

하나를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이는 김 명장은 그래서 달랑 몇 주 염색을 배운 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의 행태에 대해 "우습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쥐꼬리만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저마다 자신이 강사입네 하며 떠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려니 기가 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APEC에서 빛나다

김 명장의 침선솜씨는 2005년 부산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때 또 한번 빛을 발한다. APEC 회의가 끝난 뒤 21개국 정상들은 우리나라 전통 의복인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때 부산지역의 침선 및 한복명장 3명에게 각 세 벌씩 모두 아홉 벌의 두루마기를 지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김 명장이 맡은 일감 가운데는 홍콩과 파푸아뉴기니 정상 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두루마기도 들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APEC회의 주재국 정상. 당연히 세계의 시선은 노 전 대통령에게 더 쏠릴 것이 당연했다.

"정말 어깨에 짐을 한 짐 졌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보통 2~3일 정도면 한복 한 벌을 짓지만 그때는 일주일이 더 걸렸던 것 같습니다. 다림질을 해도 한 번은 더 해야 했고요. 게다가 각국 정상들이 양복을 입은 채로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어서 치수를 살리는 것도 힘들었지요. 이런 고생을 해서인지 그날 두루마기를 입고 촬영하는 것을 보니 제가 만든 세 사람의 옷이 다 좋아보여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과 김 명장과의 인연은 APEC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통령 취임 전 노 전 대통령 부부의 한복 일습을 만든 적도 있다.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로 한 어떤 이가 수소문을 하다 제작을 의뢰했고 김 명장은 이를 수락했다. 옷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권양숙 여사는 퇴임무렵, 입을 옷과 버릴 옷 등을 정리하면서도 김 명장이 지은 한복만은 꼭 챙겼다고 한다.

APEC 당시 김 명장은 언론사 기자들의 공세에 무척 시달렸다. 대통령이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에 대해 귀띔이라도 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기자들이 앞다퉈 김 명장의 작업실로 찾아왔던 까닭이다. 김 명장은 행사 주최 측과의 약속대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 명장이 생각건대 좋은 한복은 입는 사람이나 남이 볼 때 편하게 보이는 것. 그러나 말이 쉽지 이건 오랜 세월 닦은 기술과 겹겹이 쌓은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50여 년 이상 침선의 길을 걸어온 김 명장 정도의 경지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도 하다.

이런 김 명장의 솜씨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침선이라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 까닭에 한번 문하생이 되면 보통 10년가량 김 명장과 동고동락을 한다. 작년까지는 대학에 출강도 했다. 하지만 강의에 신경을 쓰다가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지금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잠시 접은 상태다.

보이는 것이 진짜는 아니다

침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김 명장은 요즘 한복집의 행태에 대해 영 마뜩잖은 마음을 갖는다. 한복집이 적지 않게 생기고 있지만 옷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복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만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 법인데 그러지 않다보니 두루마기는 이 집, 저고리는 저 집 하는 식으로 특정 품목만 짓는다는 것. 나머지는 하청 등을 통해 해결하는 게 최근의 실태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루마기 하나라도 제대로 만드는 곳을 찾기 어렵다는 게 김 명장의 생각이다.

이쯤에서 김 명장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저는 절대로 하청을 주지 않습니다. 하청을 하면 몸이야 편하겠지만 제가 만드는 옷을 밖으로 내 주는 것을 원래부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자신의 대에서 전통바느질 기술이 단절되지 않을까 하는 것도 김 명장의 고민이다. 부지런히 문헌으로 정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

그래서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계승대책을 기대하고 있지만 요지부동의 공무원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한복은 지금도 사람들이 입고 다니기 때문에 맥이 끊길 우려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상대하노라면 아주 답답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겉치레일 뿐 진짜가 아닐진대 전통 문화를 찾을 줄 모르는 정부 당국이 한심할 뿐이죠. 침선은 하면 할수록 더 힘들지만 만지면 만질수록 더 신기하기도 한 일입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흉내를 내지 못하는 게 이 분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이 일을 계속 하고자 합니다."

 

강현우 조리명장
"노력하지 않으면 꿈은 파랑새처럼 날아간다"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일궈낸 조리분야 최고봉, 명장 자리 오른 뒤에도 혹독한 자기계발 마다하지 않아


 

지난 7월 업무보고 청취를 위해 이명박 대통령이 부산시청을 찾았다. 오전 일과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됐지만 일정이 빡빡한 탓에 외부식당 이용은 엄두도 못낼 판. 자연히 시청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했다. 음식은 해물된장찌개와 제육볶음, 쑥갓 겉절이 등의 토속적인 음식이 주를 이뤘다. 이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무원과 부산시 직원들을 위해 이날 마련된 점심은 모두 400인분. 자리가 자리인지라 음식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찬은 차질없이 준비됐고 행사는 별 탈없이 잘 마무리됐다. 이날 점심식사의 총책임을 맡은 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리명장 강현우(51) 씨였다.

"대통령이 이런 이런 음식을 좋아한다고 미리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고, 특별히 부담되거나 떨리지도 않았습니다. 늘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고객들로부터 "음식이 참 맛있다" "최고다"라는 말을 들을 때 남들이 모르는 보람을 느낀다는 강현우 조리명장. 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며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안다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라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만큼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 각종 언론매체에서 맛있는 음식점 소개가 빠지지 않고, 허영만 씨의 만화'식객(食客)이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이유다. 당연히 음식을 잘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강 명장은 조리분야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정규 조리관련 학교나 호텔 등을 거치지 않고 오직 혼자의 힘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경남 하동이 고향인 강 명장은 어린 시절 부산으로 건너왔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생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조리분야에 뛰어든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린 나이여서 마땅히 일할 곳도 없었고 '먹고 살기에는' 음식점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아서였다. 또 어떤 기술을 배워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면 이 분야가 가장 빠르겠다는 다소 순진한 생각도 있었다.

처음 일자리를 잡은 곳은 부산의 한 일식집. 그의 나이 열일곱살 때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개인 텃세가 어디보다 센 조리분야에서 숙련자들이 "어서 오십쇼"하고 어린 소년을 호락호락 받아줄 리는 만무했다.

"참 많이 얻어맞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선배들이 출근하기 전에 칼을 갈아놔야 했고, 입었던 위생복의 세탁도 제 몫이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장보러 가는데도 따라가야 했고, 일이 끝난 뒤에는 모든 정리를 다 해야 했지요. 칼 쓰는 법을 배우느라 손을 다친 적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연탄을 사용해 음식을 조리하던 시절이어서 연탄불 안꺼지게 하려고 제대로 잠도 못잤습니다. 서너시간 정도만 자고 일했던 것 같습니다."

혹독한 고생 속에서도 강 명장이 놓치지 않은 것은 기록. 선배의 어깨너머로 본 조리법들을 하나하나 공책에 적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알아주는 법. 이런 노력 덕분에 강 명장은 불과 3년 만인 지난 1976년 일식자격증을 취득한다. 그를 가르쳤던 스승도 가지고 있지 않던 자격증이었다 일식분야에서 어느정도의 수준에 올랐지만 강 명장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한식분야. 그 밑바닥에는 많은 것을 경험해보라고 한정식집을 추천해준 스승의 배려도 있었다.

최고가 되기 위한 강 명장의 노력은 집요했다. 누구의 음식솜씨가 뛰어나다는 말이 들리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때로는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지만 강 명장의 욕구를 누를 수는 없었다.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스승들이 아주 귀찮아하고 지겨워하죠.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반드시 배울 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음식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한 강 명장의 조리인생은 군대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일반병으로 입대를 했으나 경력을 인정받아 조리병이 된 것. 강 명장이 양식조리법을 배운 것은 이 시절 특전사에서 근무하면서였다.

식신(食神)의 경지에 오르다

군대에서 제대한 강 명장은 지난 1982년 삼성에버랜드(당시에는 중앙개발)에 입사하면서 또 하나의 전기를 맞는다. 직장에서는 단체급식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곳에서 식단개발과 관리, 조리, 배식시스템 등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일반 호텔 음식처럼 접시에 장식만 안했을 따름이지 단체급식도 고난도 기술입니다. 겉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한식과 중식, 그리고 일식 등의 복합체이지요. 절대로 다른 것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강 명장은 조리 외에도 단체급식 분야에서 굵직굵직한 업적들을 남겼다. 대단위 산업체 급식장에서 최초로 자율배식 실시, 복수메뉴 제공, 시차조리 도입 등이 모두 강 명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조리에 대한 열정은 이곳에서도 이어져 강명장은 1987년 한식기능사 자격증을 딴 것을 비롯해 1995년 조리기능장, 1996년 조리기술지도사, 2002년 푸드서비스매니저 1급과 미국위생사 자격증 등 정상정복을 위한 계단을 차근차근 걸어 올랐다. 체계적인 양식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까지 건너가 ICIF(이탈리아 요리학교)에서 100가지가량의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지난 2003년 마침내 그는 평생의 소원이던 조리부문 명장 자리에 오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조리명장은 모두 6명. 이 가운데 비호텔 출신은 강 명장이 유일하다. 게다가 그는 서울 이외의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단 한사람의 조리명장이기도 하다. 조리업계에서는 이같은 강 명장의 경력에 대해 놀라운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서울 소재의 일류 호텔 등에서 체계적인 조리수업을 받지 않는다면 명장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힘든 일인 까닭이다.

"사실 이 분야에서 호텔출신이냐 아니냐 하는 차별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그런 우려가 나올까봐 더욱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도 많이 했고요. 지금도 잠은 4시간가량 밖에 자지 않습니다. 처음 음식을 배울때부터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인재가 숨어 있으면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세상사 이치. 강 명장도 솜씨가 널리 알려지면서 호텔 등에서의 초빙제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강 명장은 한 우물을 판다는 생각으로 그런 요청을 거절했다.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한 지금의 직장에 대한 고마움이 먼저 앞섰고, 돈 몇 푼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자존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강 명장은 명장이 된 이후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내친 김에 위생·안전지도사, 위생사, 영양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말 그대로 조리나 음식에 관한 자격증은 거의 다 가지고 있는 셈. 그의 말마따나 이제는 조리에 관한 한 더 정복해볼 분야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다.

강 명장이 현재 직장에서 하는 일은 부산 경남지역에 산재해 있는 자사의 매장을 찾아 식단 관리에서 부터 식자재 검사, 조리, 배식 등을 총괄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조리도 직접 한다.

모 자동차 회사 구내식당의 경우 강 명장의 감독 아래 만드는 음식은 하루 6500인분이 넘는다. 여기에는 영양사 4명에 조리사 11명, 그리고 80여 명의 조리원이 동원된다. 더 큰 사업장에서는 하루에 1만3000인분을 준비한 적도 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떠올랐다. 강 명장도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할까. 바깥에서 어떤 분야의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집에서는 지겹다는 이유로 손을 놓는 경우를 자주 봐왔지 않던가.

"저는 집에서도 요리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외식보다는 음식을 직접 해먹였지요. 남편이 조리명장이어서 집사람이 음식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느나고요. 하하, 아닙니다. 집사람도 요리를 잘 합니다. 또 밖에서 먹는 음식과 집에서 먹는 음식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조리 고수를 아버지로 두고 있지만 강 명장의 두 아들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취미가 없었던지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도 아주 힘든 여정이라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솔직히 털어 놓는다.

어렵게 최고의 위치에 오른 까닭에 강 명장은 후학을 가르치는 데도 열심이다. 제대로 배우면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일부러 에둘러 올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강 명장은 여러 전문대학의 전임강사 자리를 거쳐 지금은 영산대학교 한식조리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론보다는 실기위주의 강의에 치중한다.

강 명장이 강의 때마다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인내심을 가질 것과 부단히 노력할 것, 안목을 넓힐 것 등이다. 많은 사람들이 젊음을 놓치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주변이 전부 경쟁자라는 것을 인식해 하루라도 빨리 인생을 설계하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는다.

강 명장은 아직도 배움에 대한 욕망이 대단하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획득한 뒤 동부산대학 영양학과를 거친 그는 지금은 부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식품산업공학 석사과정을 수학 중인 만학도이기도 하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법 한데 건강을 관리하는데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의외로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조리실에서 서서 움직이면 그 자체가 운동이 아니겠냐는.

"명장이란 그 분야에서 최고라는 인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으면 파랑새처럼 모든 꿈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저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 음식의 세계화와 후배 지도 등 해야 할 일도 널려 있고요. 앞으로도 계속 열정을 담아서 이 일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헤어지기도 앞서 집에서는 어떤 음식을 해 먹어야 좋을지를 물어봤다. 육류를 줄이고 생선과 야채를 많이 먹되 염분이 든 음식도 자제하라는, 어찌보면 아주 평범한 비결이 제시됐다. 하지만 그 어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 더 피부에 와 닿는다. 30년 이상을 음식과 함께 보낸 조리명장이기에.

 

정봉기 항공정비명장

"내가 손댄 헬기는 누구라도 믿고 타야 참 정비사"
30여 년 동안 한 길만을 걸어온 국내 유일의 헬기정비 지존, 지독한 기록정신으로 방대한 항공관련 자료 축적에도 일조

 
  대한민국에서 운용되는 헬기는 거의 자신의 손을 거쳐갔다고 말하는 정봉기 명장. 기회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것이 평소 그의 신념이기도 하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1998년 봄, 막 임무수행을 나가려는 헬리콥터가 도열한 군부대의 한 비행장. 정비사 한 사람이 손으로 가볍게 헬기를 때려나가면서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이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상적인 헬기는 통상 가벼운 소리가 울리는 데 반해 한 헬기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린 것.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즉시 점검창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력조절볼트가 빠져 있었다. 위기일발이었다. 나사의 이탈 등은 웬만한 기계로도 감지하기 힘든 부분. 오랜기간의 정비경험과 감이 없었더라면 헬기는 결함을 안은 채 날아오를 뻔했다. 항공기에 있어 정비실수란 곧 조종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 이상이 생기면 갓길에 정차할 수 있는 자동차와 달리 항공기는 대책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군은 이 정비사의 공을 높이 사 '정비사 웰던상'을 수여했다. 육군항공부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손을 거치지 않은 헬기는 없다

항공정비명장 정봉기(60) 씨. 우리나라 헬기정비의 지존. 동시에 국내에 한 사람밖에 없는 이 분야의 최고수이기도 한 사람.

정 명장을 만난 곳은 경남 마산 창신대의 헬기정비과 사무실이었다. 그는 30여 년간 군무원 생활을 하다가 지난 2006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직업군인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군에서 일했으면 다소 딱딱한 인상을 풍길 법도 하건만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 푸근함을 던져준다. 벌써 손자를 본 할아버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손자를 보지 못하면 견딜 수 없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주당 평균 10시간가량 강의를 합니다. 이론과 실습을 병행해 항공기관과 동력전달 등에 대한 수업을 하지요. 요즘은 학생들 가르치는 재미에 삽니다."

지금은 이 분야의 일인자이지만 정 명장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짓는 진해의 반농반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정 명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학진학이 힘들자 학교의 추천을 받아 지난 1969년 인근에 있던 육군 제3정비창의 기술공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헬기라는 것을 접했고 정비를 배웠다.

2년 정도를 근무하다 육군 항공부대에서 부사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정 명장은 1974년 제3정비창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는 기술공이 아니라 정식 공채를 통한 떳떳한 군무원 신분이었다. 기술공 시절, 같이 일을 시작한 동기는 모두 스무 명. 모두 그처럼 생활고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끝까지 항공정비분야에 남은 이는 오직 그뿐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이었지만 이공계통이 적성에 맞았는지 정 명장은 기계를 만지고 다루는 일에 아주 재미를 느겼다. 뭔가를 분해하고 끼워 맞추는 것이 신기했고, 자신이 손을 본 항공기가 창공으로 날아가면 아주 기분이 좋았다.

정 명장은 30여 년의 군무원 생활 동안 코브라, UH-1H, 시누크 등 현재 국내에 있는 헬기는 거의 다 만져봤다. 좀 더 체계적인 정비기술 습득을 위해 지난 1998년에는 미국의 보잉사에 가 교육을 받았다. 우수한 정비실력이 소문이 나면서 정 명장은 수차례 전군 항공부대 기술지도 및 항공기 상태 점검방문관으로 임명된다. 이 보직은 육군 항공기의 모든 것을 지도 감독하는 자리. 한 해에 수백여 대의 항공기를 점검, 관리해야 했다.

"우리나라 군 부대에서 운용하고 있는 헬기 가운데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봐야죠. 새로운 기종이 배에 실려 들어오면 부산의 군용부두까지 와서 정비를 해 각 부대에 실어 보내기도 했거든요. 또 일선부대에서 고장이 나면 직접 그곳에 가서 정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르는 것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쓴 헬기결함사례집 같은 것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평가를 받와왔던 그는 마침내 지난 2004년 항공정비명장 자리에 오른다. 민간항공사가 아닌 군대 내에서 관련 명장이 배출되기는 처음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항공정비명장은 모두 4명. 이 중 헬기정비 분야에서는 그가 유일한 명장이다.

천직인 헬기 정비

명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랄까, 그런 것들을 물었더니 평범한 대답이 나왔다. "연구·노력하고 한 우물만 팠더니 그렇게 됐더라"는. 그러나 정 명장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큰 오산. 그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끊임없이 공부하며 실력을 닦았다. 항공산업기사와 항공기관정비사, 항공정비사 등 항공관련 자격증만 3개를 갖고 있고 대부분의 헬기를 검사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정 명장이 헬기정비에 특히 애착을 갖는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오직 이 일만 한 까닭이다. 그는 지난 1969년 기술공으로 이 계통에 발을 들여놓은 뒤 군복무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 헬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만 가지의 부품으로 이뤄진 헬기는 정비가 까다롭기 그지없다. 나사 하나를 잘못 조여도 기체가 뜨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정 명장은 정비과정 중에 일어나는 여러 사례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그만의 '노하우'를 쌓았다. 여기에는 그의 꼼꼼한 성격도 한 몫을 했다.

정 명장은 30년 이상 일기를 쓰고 있으며 직장 초년생시절부터 지금까지 받았던 월급과 상여금 봉투, 연말정산 자료, 각종 상장, 사령장 등을 모두 보관하고 있다. 중간에 간간이 정리를 했음에도 월급봉투의 수량이 300여 장을 넘는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일하면서 느끼고 배웠던 것들을 모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공정개선자료집, 정비세부지침서자료, 항공기결함사례집, 해외교육사진모음 등 그의 사무실에 꽂혀 있는 자료집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심지어 대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의 인적사항이나 강의 내용 등도 모두 모아놨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항공정비 관련 자료전시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그동안 겪었던 모든 경험과 터득한 지식 등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주고 싶기 때문이죠. 죽어서 땅속에 가져가면 뭘 하겠습니까."

이런 정 명장의 노력은 자기계발에서도 비켜가지 않는다. 바쁜 군무원 생활 중에도 창신대 평생교육원에 적을 두면서 학점은행제를 이용해 항공관련 전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아무리 정비기술이 우수하다해도 일정 수준의 학력과 이론적 뒷받침이 없으면 대학에서 정식교수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까닭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평소 해 놓았다는 정 명장은 그래서 '기회의 문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열리더라'는 평소의 지론을 지금도 신봉한다.

군대에서 헬기정비를 하면서 정 명장이 늘 마음에 새겼던 것은 '신뢰'였다. 조종사가 마음 놓고 헬기를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비사의 신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는 곧 조종사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저는 남들이 한 번 정비할 때 한 번을 더 봤습니다. 헬기정비에는 조종사와 정비사 간에 신뢰 구축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정비한 것은 마음 놓고 탈 수 있다는 믿음을 조종사가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명장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정 명장은 지난 2006년 군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정년이 조금 남아 있었으나 후학을 가르쳐 보겠다는 욕심히 더 컸다. 다행히 군무관시절부터 초빙교수로 출강했던 창신대학에서 그에게 자리를 내줬다. 하긴 학교 측의 그런 배려가 아니더라도 헬기정비과라는 학과가 있는 한 정 명장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없기에.

학교에서 정 명장은 무척 엄하다. 자신이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섰던 까닭에 대충대충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자신의 말대로 아주 혼을 내준다. 뭐든지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다.

정 명장이 대학에서 주안점을 두는 것은 단순한 지식 전수 외에 인성교육이다. 그동안의 직장 생활을 통해 제 아무리 기량이 훌륭하더라도 사람 됨됨이가 좋지 못하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공부를 못해도 성실성이 있어야 참 일꾼이 된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명장이 되고 나니 자부심보다는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는 어떤 것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이 헬기정비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학생들에게 물려줘야죠. 그래서 대학에 온 것이고, 설사 교수직을 그만두더라도 필요하다면 후학들을 도울 계획입니다."

정 명장과 이야기 하는 도중 내내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거기에 달변에다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무슨 까닭에서일까.

"평소 남을 배려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엄청 편해지지요. 그래야 오래 살 수도 있고요. 저는 가급적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 합니다. 남이 욕을 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깁니다. 뭐 힘든 세상사, 웃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병수 가구제작명장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배우는 게 전통가구 제작"
스승들의 모진 채찍질에다 노력 더해 최고 장인자리 올라, "전문 이수자 없어 힘들게 익힌 기술 명맥 끊길까봐 두려워"

 
  김병수 가구제작 명장은 웬만해서는 주문제작을 받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작품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장인정신 때문이다.
질 좋고 무늬가 또렷한 나무. 소목장(小木匠)에게는 생명보다 귀한 물건. 그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 나무를 모았다.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나무를 보면 가슴이 뿌듯했다. 이걸로 장롱을 만들고, 삼층장도 만들 꿈에 부풀었다. 그러던 1997년 초겨울의 어느날, 아침에 작업장으로 나와 보니 '자식새끼만큼 귀하게 여기던' 나무들이 싹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가 차를 가져와 하루 밤 사이에 모두 싣고 가버린 것.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완전히 미쳐버렸다". 그렇다고 넋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도둑맞은 자식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남들이 보기엔 똑 같은 나무지만 그는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애지중지 모았던 나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행여나 남아 있는 자투리 나무라도 도둑이 또 와서 가져갈까봐 산 위에서 몇날 며칠을 잠복하기도 했다. 모두가 허사였다. 중고트럭이라도 사려고 한 푼 두 푼 모았던 돈마저 다 날아가 버렸다. 술로 시름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점집에도 가봤지요. 굿을 해보기도 했고요. 결국 나무는 찾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다가 이러다간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서 이듬해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없인 좋은 가구도 없다

김병수(56) 가구제작 명장. 김 명장에게 나무는 일의 시작과 끝이다. 진주에서 산청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한송공방. 그 한쪽에 붙은 방에는 화려한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 나무가 그득하다. 누가 방 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주객이 전도된 느낌. 김 명장의 방에 나무가 들어올 자격을 얻으려면 벤 지 최소한 5~6년가량은 돼야 한다. 이 가운데는 몇 십 년 된 것도 적지 않다. 방에는 사시사철 불이 들어온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위해서다. 나무에서 수분이 완전히 빠져야만 좋은 가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채 후 최소 4~5년은 끝부분이 썩을 만큼 노지에서 자연건조를 시키고, 제재소에서 판재를 켠 다음에도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1년 이상 말려야 한다.

"나무의 기(氣)를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를 누르지 못하면 나무는 사정없이 비틀어집니다. 젖은 나무로 가구를 만들면 팍팍 터져나가지요. 좋은 가구란 얼마나 잘 말린 나무를 쓰는가에 달려 있다고 봐야죠. 나무는 알고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대개의 장인이 그렇듯 김 명장도 좋은 나무를 얻기 위해서라면 발품 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괜찮은 물건이 있다는 나무 판매상들의 연락이 있으면 우리나라 어디든지 달려간다. 나무 백 그루에서 하나 나올까 말까한 좋은 목재란 금방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확장이나 재개발지역, 수몰예정지구 등에도 늘 관심을 기울인다. 이곳에서는 공사로 인해 잘려지는 질좋은 느티나무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분야 전문가들이 '용목(龍木:나뭇결이 불규칙하고 고운 재목)'이라 부르는 좋은 나무는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 김 명장과 비슷한 일을 하는 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기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면 빈손으로 돌아와야 한다.

김 명장이 볼 때 가구제작에 가장 좋은 소재는 오동나무다. 습도조절이 저절로 된다. 벌레도 침범하지 못한다. 오동나무로 만든 베개 등에 생국화를 넣으면 곰팡이가 슬지 않고 자연건조가 될 정도다. 옛사람들이 귀중품을 보관하는 데 오동나무를 사용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나무와 함께 반평생을 산 김 명장인지라 목재를 도둑맞은 뒤 다시 마음을 다잡기까지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데다 부모마저 차례로 병치레로 앓아 눕는 바람에 고통은 더 심했다. 하다 못해 김 명장은 가구 관련 인테리어 업체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기도 했다.

"한 7~8년 그렇게 했는데, 주위에서는 명장이 그런 일 한다고 욕하기도 하더군요.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목일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위안이 많이 되기도 했습니다."

 
  삼태극 이층문갑장
어깨너머로 배운 소목일

나무를 소재로 하는 분야는 크게 대목(大木)과 소목으로 나뉜다. 대목은 궁궐 등과 같은 큰 건축물을 다루는 것을 일컫고 소목은 대목보다는 규모가 작은 것을 통칭한다. 그래서 대목보다는 소목의 범위가 더 넓다. 대목이 기본 얼개를 짜는 일을 담당한다면 소목에는 창호에서부터 부엌 가구 문방구에 이르기까지 나무를 소재로 하는 온갖 것이 포함된다. 2004년 가구제작 분야 최고수가 된 김 명장은 소목장이다.

김 명장의 고향은 경남 진주시 명석면.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진주시의 한 가구점에 들어간 그는 2년가량 허드렛일을 하면서 대충이나마 나무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이후 고향선배의 추천으로 서울로 올라가 나전칠기 공장에서 보다 체계적인 수업을 받았다.

일은 힘들었다. 처음 한 달동안에는 오후 8시까지 일을 했으나 다음달에는 밤 10시, 그 다음달에는 밤 12시까지 근무 시간이 점점 늘었다. 급기야는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새벽 4시가 돼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김 명장이 이곳에서 처음 맡은 일감은 문갑을 짜는 것이었다. 기술이 부족했던 탓에 남들이 3~4일에 끝낼 것을 보름이 더 걸려서야 마쳤다. 그때부터 스승인 정진현 씨의 트집잡기가 시작됐다. 자기 딴에는 실컷 한다고 했는데 스승의 평가는 냉혹했다. 때로는 그가 만든 가구를 망치로 때려 부수기도 했다. 분명히 옆사람이 만든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을 하는 데도 스승은 유독 김 명장의 것만 사정없이 밟아버렸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다 났습니다. 그래서 안 부숴지게 하려고 더 열심히 일했지요. 그렇게 엄했던 스승님이 나중에는 최고급품 제작을 맡기더군요.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남들보다 저에게 좀더 애정을 가져서 그렇게 모질게 대한 것 같습니다."

5년6개월가량 서울에서 엄한 교육을 받은 김 명장은 군입대 문제 때문에 1974년 고향으로 내려온다. 전화위복이었다. 김 명장은 고향에서 당시 소목분야에서 이름을 떨치던 강삼봉 선생을 만나게 된다. 강 선생은 디자인과 조각, 칠 등 소목의 모든 분야를 두루 꿰고 있던 장인이었다. 이곳에서 6년 정도 공부를 한 김 명장은 다시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였던 정돈산 선생을 만나 7년을 더 기술을 갈고 닦았다. 이 과정에서 김 명장은 소목장 기능보유자(1980년), 소목장 전수 장학생(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1992년)로 지정되는 등 차근차근 주위의 인정을 받아 나갔다.

숱한 스승 밑에서 소목일을 배운 김 명장은 마침내 1998년, 한송공방을 차리게 된다.

명장은 작품으로 말한다

김 명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자세히 보니 오른 쪽 손가락 두 개가 뭉툭하다. 한창 일에 재미를 붙여가던 지난 1980년,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톱날에 날아가 버렸다". 손이 생명인 소목장에게 손가락 절단은 치명타. 하는 데까지 해 보라는 스승의 격려가 없었다면 일을 포기했을 터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김 명장이 예전의 기술을 되찾는 데는 1년여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소목일은 공구가 손에 들어와야 하는데 이게 안되는 겁니다. 손가락이 없이도 공구를 다루는 일을 새로 터득해야 했지요. 어찌보면 기술을 다시 배운 셈입니다."

김 명장은 웬만해서는 주문제작을 받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믿음에서다. 대신 나름대로,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 한 점 한 점 작품을 만들어낸다. 당연히 엄청난 제작기간이 소요된다. 작품 하나에 2~3년이 걸리는 것도 있다. 그런 만큼 김 명장의 작품은 주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덩치가 큰 장롱의 경우 1억 원을 호가한다.

한송공방에서 나오는 가구들에는 못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모두 옛 방식대로 나무들을 끼워서 만든다. 그런데도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한 번 끼워진 나무들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다. 그 미세한 틈을 파고 끼우는 것을 모두 손으로 해낸다. 기계는 큰 나무를 켜는 것 정도 외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세밀한 작업에는 기계가 손을 못따라온다는 이유에서다. "대개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아주 가늘다고 하지만 우리 공방에 한 번 와보면 머리카락이 엄청 두껍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김 명장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구의 접합 부분은 정교하기 그지없다. 머리카락조차 들어갈 틈이 없다.

다른 전통 공예 분야와 마찬가지로 소목일 역시 큰 돈이 되지 않는다. 취미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 뿐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이도 거의 없다. 그래서 김 명장은 늘 안타깝다. 자신을 끝으로 전통기술이 끊길 수 있다는 염려에서다. 내심 아들이 뒤를 이어줬으면 했다. 한때는 아들도 이 일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아내의 결사 반대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김 명장은 백제시대부터 있었으나 현대에 와서 거의 사라져가던 '황칠법(黃漆法)'을 재현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황칠나무에서 추출한 액을 사용하는 황칠법은 목가구의 자연미를 가장 두드러지게 해주고 수명도 오래가게 한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는 옻칠이 천 년이면 황칠은 만 년'이라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이를 '금칠(金漆)'이라고도 부른다.

"남들은 저를 명장이라 하지만 저 자신은 절대 최고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우는 것이 소목일이거든요. 이 일에 뛰어든 것에 대해 후회는 전혀 안해봤습니다. 끝까지 해야죠. 지금 와서 무슨 다른 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중율 정보통신명장

"평생 간직한 도전정신… 아직도 더 오를 자리가 있다"
말단 체신공무원으로 시작 20여 년만에 경지 이르러, 불편한 것 참지 못하고 발의한 제안만 6000여 건 달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냥 넘기지 않는 성격 때문에 수많은 제안을 발의, 광통신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서중율 명장. 그의 인생에서 늘 따라다닌 단어는 '도전'이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부산 도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동네에 아주 힘들게 살던 소년이 있었다.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여의치 않아 우여곡절 끝에 공업계 고등학교 들어갈 만큼 가세도 넉넉지 않았다. 어린 나이인지라 세상의 무게가 무겁게 다가오면 절망할 법도 하건만 소년은 그렇지 않았다. 그럴때면 그는 집 뒤에 있는 천마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는 바위 하나가 턱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바위에 서면 부산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소년은 그 바위에 올라 늘 외쳤다. "나는 최고가 될 것이다" "꼭 성공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소년은 그 바위에다 '야망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기에는 언젠가는 자신의 야망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꿈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야망바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 소년은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서중율(51) 대한민국 정보통신 명장. 우리나라에 단 한사람밖에 없는 이 분야의 최고수다.


정보사회의 동맥을 지킨다

KT 영도전화국에 근무하는 서 명장을 만나러 가면서 내내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대체 정보통신명장이라는 것이 어떤 분야의 일인자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지인들조차 그런 쪽에도 명장이 있냐는 물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현재 우리나라에는 통신분야에 모두 4명의 명장이 있다. 이 분야는 크게 무선통신과 방송통신, 정보통신, 전파통신으로 나뉜다. 서 명장은 이 가운데 정보통신을 담당한다. 그의 주전공은 광통신. 좀 더 쉽게 말하면 광케이블이나 광전송장비 등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이다.

그래도 헷갈리기는 여전히 마찬가지. 서 명장이 자신의 사무실과 붙어 있는 한 공간으로 안내를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선들이 다닥다닥 연결되어 있다.

 

 



 
"이 설비가 모두 통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영도구 전체를 관할하는 것이죠. 만약 여기에서 케이블 하나만 빠져도 영도구의 한 개동에 있는 인터넷과 전화가 모두 불통됩니다. 극히 중요한 보안시설이어서 예전부터 아주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철저하게 관리를 하고 있지요."

이제사 다소 감이 온다. 그의 임무란 정보화사회의 동맥을 지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서 명장은 회사 내에서는 아주 유명 인물이다. KT부산본부의 현장훈련센터에서 수년째 사내교수로 일하면서 약 2000여 명의 기술인력을 양성했다. 사내외의 여러가지 상도 수차례 받았다. 광통신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갖고 있는 까닭에 KT 직원들은 그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만은 한 번쯤 들었을 정도다.

광통신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서 명장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는 그동안 10여 권의 전공서적을 펴냈다. 일부는 대학교재로도 이용되고, 또 어떤 책은 공업계 고등학교의 교재로도 쓰인다. 광통신 실무경험에서 그를 따라잡을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바쁜 생활 도중 부경대학교 대학원 정보통신학과에 다닐 때도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실물을 직접 가져와 교수들의 이론 강의에서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준 까닭이다.

서 명장은 제안왕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2001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6300여 건의 제안을 했다. 2002년에는 KT제안왕으로 선정됐다. 시상식 당시 상을 주던 회사 사장은 "이런 사례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왕성한 의욕은 서 명장의 성격 탓이다.

"생활을 하다가 불편한 것은 참지 못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무엇이든 고쳐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밤잠을 안자기 일쑤지요. 다소 엉뚱한 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일에 대한 열정이 나를 키웠다

이쯤되니 궁금한 점이 갑자기 떠올랐다. 서 명장이 제출한 제안 가운데 어느 정도가 실용성을 띤 것일까. 발상은 좋지만 현실성은 없는 것들이 많지 않았을까.

근데 웬걸, 서 명장의 제안 상당수는 현장에서 채택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허도 모두 3건이나 취득했다.

이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케이블 행거'. 케이블을 설치할 때 묶거나 푸는 작업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치다. 이 제안은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졌다. 서 명장은 일선 현장에서 기존의 선 위에 새로운 선을 가설할 때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묶는 장면을 여러번 봤다. 해체할 때는 반대로 하나하나 묶은 선을 풀어야 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둥근 고리 속에 케이블을 잡아 넣는 것. 반향은 폭발적이었다. 선을 묶기 위해 고공에서 일할 필요성이 없어져 추락사고도 크게 줄어들었다.

'케이블 행거'는 어찌보면 현장직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했을 만큼 쉬운(?) 장치였다. 하지만 발명은 '콜럼버스의 달걀'. 성공의 과실은 문제를 눈여겨 보고 풀려고 했던 사람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던가.

이 장치는 지난 2003년 특허를 취득했는데 지금까지 현장에서 두루 쓰이고 있다. 몇년 전 서 명장은 우연히 통신선 가설 공사장을 지나다가 "'케이블 행거'를 누가 만들었는지 참 편리하다"는 현장 직원들의 말을 듣고는 큰 보람을 느낀 적도 있다.

서 명장의 집요함은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 열수축관의 간편절개장치를 개발할 때는 관련 기계를 6개월 이상 발밑에 두고 살았다. 자리에 앉았다 일어섰다, 나갔다 들어왔다 할 때마다 보고 또 보면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를 찾는데 골몰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복하는 법, 그러던 어느날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장치 역시 특허를 받았다.

"한 때는 제안을 너무 많이 하니까 직원들이 안좋아했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너무 튀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결과물이 있고 나니 지금은 괜찮습니다. 특허를 받았으면 돈을 많이 벌었나고요? 특허권이 회사에 귀속되는 바람에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케이블 행거'는 지금도 많이 팔린다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하하."

이런 공적과 일에 대한 열정이 모여져 서 명장은 지난 2004년 대한민국 정보통신 명장 자리에 오른다. 지난 197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급을류(지금의 9급) 공무원으로 체신청에 발을 들여 놓은지 26년 만이었다. 천마산 '야망바위'에서의 약속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꿈을 꾸다

서 명장은 가끔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천마산에 오른다. 그리고 '야망바위'에 서서 여기가 가난하게 컸던 아버지가 최고가 되기를 약속한 곳이라며 자식들에게 일러준다.

통신분야의 최고봉인 서 명장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도전정신이다. 그는 체신공무원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목표의식을 가지고 도전을 해왔다. 도전정신은 이따금씩 그가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할 때 늘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려웠던 청소년 시절을 먼저 거론한 뒤 20~30년 뒤에는 여기에 있는 학생들도 명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그럼, 이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른 서 명장에게 도전정신이라는 것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뜻밖의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도 도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앞으로 5년 이내에 산업훈장을 받는 것이 꿈입니다. 이는 명장이 된 이후에 무슨 활동을 더해 어떤 공적을 남겼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저는 명장이 되는 것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봅니다. 국가에서 이런 호칭을 준 것은 더 잘하라는 의미 아닙니까. 많은 명장들이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의 기술발전 노력을 하지 않고 정체되는 수가 많은데 저는 그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런 치열한 도전정신은 올해 그에게 두가지 경사를 안겨졌다. 지난 6월 한국신지식인협회의 근로자부문 신지식인 대상을 획득했고, 9월에는 노동부로부터 직업능력개발 관련 유공자로 선정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상의 무게가 큰 만큼 여기저기 자랑을 할 만도 하건만 주위에서도 서 명장의 수상 소식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조금 쑥스러웠다는 것이 그의 짤막한 변명이었다.

그러면서 서 명장은 만약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무엇이냐고 남들이 묻는 다면 세 가지를 꼽겠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에 들어온 것과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 그리고 명장이 된 것이다. 명장에 대한 이같은 자부심은 그와의 대화 도중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현재 대한민국 명장회 부산지부의 사무국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 만큼 아쉬움도 많다.

"부산에는 지금 각 분야에서 모두 25명의 명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나 시는 이런 명장들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부산시에 외국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 명장이 만든 기념품이라도 하나 선물로 준다면 얼마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저희 명장들은 국가에서 부른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김상규 석공예명장
"돌을 알게 되니 이제야 비로소 돌이 보인다"
서른 초반의 나이에 정상에 오른 '달인', 알음알음 내려온 기술 글로 남기는 게 바람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덩이/ 이름모를 석공의 땀과 눈물이 흘러 내리는/ 은은한 너의 모습 은은한 너의 모습/…/ 바람이 놀다간 바람이 놀다간 너의 가슴속엔/ 석공의 땀이 어린 석공의 손때 묻은/ 징과 쇠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온다 들려온다.

(장애향 노래 '석탑')

작업실에 들어섰다. 방음이 된 벽면을 너머 줄이어 선 오디오의 스피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근데 좀 색다르다. 스피커를 감싸고 있는 재질이 매끈한 돌이다. 저러고도 소리가 울릴까. 낯선 이방인의 궁금증을 눈치챈 듯 작업실 주인장이 돌 오디오는 목재 오디오에 비해 울림이 적다는 말을 던진다. 모양만 특이한 것이 아니다. 이 제품은 유명 오디오 품평회에 출품돼 음질 테스트 부문 1위를 한 적도 있다.

돌을 만지는 사람이 웬 음악.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중학교때 브라스밴드를 할 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는 답이 들려온다.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설명을 곁들여. 결국 예술의 세계에서 장르의 구분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 터. 음악적·미술적 감각이 살아 있기에 돌이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없고 남을 속이지 않기에 돌을 더 좋아한다는 김상규 석공예명장. 돌이 일반인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 아래 사진은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김 명장.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30대에 다다른 고수의 세계

양산시의 북쪽 끝자락인 솥발산공원묘원 가는 길. 석공예명장 김상규(51) 씨의 작업실 '만평석재'는 그곳에 있었다. 덩치가 황소만한 큰 개는 짖지도 않은 채 물끄러미 객을 바라보고만 있다. 누군가는 돌에게서 침묵을 배운다고 했던가. 석공의 개도 주인을 닮아가는 것일까.

김 명장은 부산지역 명장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나이. 명장 모임에라도 가볼라치면 지금도 어린 축에 속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명장이 된 때. 김 명장은 지난 1990년 석공예분야 최고의 명장에 올랐다. 나이 서른 세살때였다. 현재 부산지역에서 그보다 빨리 명장이 된 사람은 없다. 명장수여시기만으로 본다면 사실상 아주 고참축에 속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공적과 사회활동 등을 담은 서류심사가 아니라 직접 시험을 봐서 명장을 뽑았다. 김 명장은 1990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석공예분야에서 1위를 하면서 명장 호칭을 받았다. 이후 기능만으로 사람을 뽑으니 상대적으로 나이가 든 원로들이 소외를 받는다는 말이 있어서 명장제도는 지금의 서류심사제도로 바뀌게 된다. 제도의 운영이야 어떻든 김 명장은 그 나이에 실력으로 당당히 한 분야의 대가가 된 셈이다. 공개석상에서 솜씨를 겨루는 기능대회에서는 편법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다다른 최고의 경지. 그러나 그 자리는 김 명장에게 꼭 좋은 일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명장이 안됐다면 부자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명장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니 남의 눈치가 보여 제대로 사업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아닌 말로 돈이 되려면 중국 등지에서 돌을 수입해 와서 팔기도 해야 하는데 명장이 그런 것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명장이라는 타이틀 하나 받고는 완전히 올가미가 매인 거지요. 하하."

그러나 김 명장은 명장이 된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아쉬움은 없다. 한평생 돌을 다루었고, 그러다보니 돌에 관한 한 최고라는 인정을 받은 까닭이다. 젊은 시절에는 눈앞에 널린 것이 다 돈 버는 일인데 왜 인간문화재들은 모두 가난한지에 대해 이해를 못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왜 그들이 가난하게 살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한다. 다만 명장이라고 뽑았으면 정부차원에서 최소한의 지원을 해 주길 바랄 뿐이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최고 기술자가 되면 황실에서 초청장이 오는 등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명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김 명장이 이끄는 만평석재는 이 세계에서 국제기능대회 금메달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그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런 만큼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끝까지 해보겠다고 우기는 문하생을 매몰차게 내치지도 못한다. 김 명장을 만난 날에도 20대의 한 젊은이는 찬바람이 부는 마당에서 돌과 씨름하고 있었다.


 
쉬면 손이 녹슨다

김 명장이 돌의 세계로 빠져 든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부터. 그 해 부산에 공예학교(지금의 부산디자인고)가 처음으로 생겼다. 예능 쪽에 관심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어 입학은 만만찮았다. 그는 그곳에서 석공예를 택했다. 자신의 말대로 적성에 맞았는지 이후 지금까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돌과 함께 살아올 수가 있었다.

현재의 작업장으로 들어온 것은 10년 전. 돌을 다루는 작업은 아무래도 소음이나 먼지 등의 발생이 잦아 민원을 일으키게 마련. 고르고 고르다 양산과 울산의 경계지점을 낙점했다. 더 좋은 점은 공원묘지와 가까이 있다 보니 오랫동안 개발이 되지 않는 것. 덕분에 김 명장은 남의 눈 신경쓰지 않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긴 무덤 가까이로 일부러 이사를 오는 사람은 없을 법 하다.

사는 곳이 부산이니 작업장에는 출퇴근하는 셈이다. 필요하면 밤샘작업도 한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도와도 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 이 분야도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한다는 것을 김 명장은 잘안다. 손을 놀리지 않으면 곧 손이 녹슬어버리기 때문이다.

명필에게 붓이 중요하다면 석공에게 더 없이 소중한 것은 작품의 소재인 돌. 전북 익산의 황등석이나 충남 보령에서 나는 까만색이 가미된 돌 등이 다루기에 좋다. 갈색빛을 띠는 경기도 포천의 돌도 괜찮다. 그렇지만 이런 생산지를 떠나 김 명장이 볼 때 좋은 돌이란 자신이 구상한 작품에 딱 들어맞는 색깔이나 느낌을 주는 것이다.

"좋은 작품은 돌과 작가가 딱 들어맞아야 합니다. 버려졌던 돌들이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오면 대작이 되기도 하거든요. 즉 돌도 사람을 잘 만나야죠. 참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무엇보다 우리 돌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우리나라 화강석으로 작품을 잘 만들면 아주 기가 막힙니다."

'돌 인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김 명장에게 돌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우선 돌은 진실하다는 점을 먼저 든다. 돌은 말이 없으며, 거짓말도 하지 않으며 작업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 마땅히 작업후에는 어떤 변형도 없다. 간혹 나무로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다 만들고 난 뒤 행여 갈라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또는 물러터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등등.

다행히 돌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다. 대신 돌로 하는 작업에는 그 나름대로의 고충도 있다. 시작이 잘못되면 좀처럼 되돌아 서기가 힘들다는 것.

"돌을 다루는 사람은 뒤를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하거든요. 작품 하나에 몇달씩이나 걸리니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 시작때부터 고민을 많이 해야합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소심해지기 쉽지요. 말수도 점점 적어지고…, 아마 돌을 닮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다

김 명장은 젊은 시절, 불교계로부터 호되게 원성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석조물에 알게 모르게 오염되어 있는 일본풍을 비난하고부터다. 불과 몇십년 전 우리나라 석공예업계는 일본으로 제품들을 적잖게 수출했다. 수요를 맞추려 한 작업장에 수백명의 기술자가 근무하기도 했다. 고객의 욕구를 따르다 보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작업이 이뤄지게 마련이었다.

문제는 상황이 이러니 일본 수출이 끊긴 뒤에도 일본풍의 기술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 일반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 왜색의 흔적이 스며들었다. 돌을 다루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혈기왕성하던 김 명장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문화의 침투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게 잠식당하는 게 문화아닙니까. 우리나라 사찰 등에 왜색문화가 침투해 엉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석조문화가 잘못됐으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돌과 함께 일을 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다는 김 명장은 자신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가르치는데도 열심이다. 여러 곳에서 요청을 받았지만 강의는 동국대 딱 한 곳에서만 한다. 돌작업을 하는 사람은 작업장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대신 평생 체득한 기술과 기법을 책으로 후세에 전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처럼 높다. 그 밑바닥에는 자신이 어깨너머로, 혹은 구전으로 기술을 배우면서 느꼈던 어려움을 후배들은 따라해서 안 된다는 사명감이 깔려 있다. 그는 석공예가가 볼 만한 변변한 책이나 문화재 제작과정을 담은 기록지 하나 없는 입문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때 김 명장은 "이건 정말 아니다,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기술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오른 명장임에도 대학원에 진학했던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이 부분에서 우스갯소리 하나를 덧붙인다. 누가 뭐래도 공부는 제 때 해야한다는 것. 나이를 먹으니 공부하기도 힘들거니와 실기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이론을 습득하는 '거꾸로 된 공부'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까닭이다.

김 명장이 바라는 또 하나는 하찮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돌이 일반인과 가깝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니 비로소 돌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돌이 생활 속으로 들어와야죠. 차탁 등 돌로 된 소품을 만드는 데 신경을 쓰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반인들의 돌에 대한 생각이 좀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이건 결국 저를 포함해 돌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남완진 기계정비명

"KTX, 내 손 거치지 않고는 운행 못합니다"
35년 철도 인생 외길, 기계에 대해서는 '무불통지', 자격증만 무려 14개… 한시도 쉬지않고 자기계발

세상 참 좋아졌다. 고속버스로 꼬박 예닐곱 시간 걸리던 부산에서 서울 가는 길, 이제는 3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차장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경치 구경 조금 하다가 잠깐 졸린 눈 감았다 뜨면 벌써 목적지. KTX 덕분이다. 건설 이전엔 좁은 국토에서 고속철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대 여론도 만만찮았으나 이제는 누구도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때로 편리함은 모든 과정을 덮어주는 요술방망이가 되기도 하는가 보다.

늘 가까이 있는 것에는 무관심한 것이 세상의 이치. KTX도 마찬가지다. 참 빨라 좋구나라고 여길 뿐 누가 그것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생각밖이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요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본다면 한 대의 KTX가 달리기까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쉬 알 수 있다.

남완진(53) 부산철도차량관리단 고속계획팀 차장도 그 중 한 사람. 부산에 도착하는 모든 KTX 차량은 기계정비 명장인 그의 눈길을 피해갈 수 없다. "됐어"라는 그의 신호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천리마처럼 달려야 할 KTX도 철로 위를 질주하지 못한다.


 
  정비고에 들어온 KTX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남완진 기계정비명장. 주경야독의 노력 끝에 마침내 기능인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곽재훈 기자 kwakjh@kookje.co.kr
준비된 기능인

남 명장을 만난 곳은 부산진구 진양삼거리 맞은편 부산철도차량관리단(고속). KTX만을 전문적으로 정비하는 시설이다. 먼저 30만 ㎡를 훨씬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정문에서 보니 어디가 끝지점인지 가물하기만 하다. 최소한 자전거 이상의 탈 것이 없다면 언감생심 이동할 엄두를 내지 못할 터. 하긴 KTX 스무량의 전체 길이가 388m라니 이정도 크기가 아니라면 정비가 불가능할 듯도 하다.

철도정비계통에서 모든 기계분야를 아우르는 기계정비명장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우선 궁금했다. 통상 이 분야에서는 객화차정비명장이나 철도신호명장, 철도동력차전기명장 등 특화된 분야에서만 최고 기능인이 나왔던 까닭이다. 이천호 부산철도차량관리단 부단장이 말을 거들었다. "그래서 남 명장의 명장지정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기계에 다 통달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지난해 9월 기능인 최고의 자리에 오른 남 명장은 사실 준비된 사람이었다. 그는 철도공사 내에서 일찌감치 '만능 철도인''철도정비의 달인'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고 있었다. 남 명장이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자격증만도 무려 14개. 기계조립기능사, 객화차정비산업기사, 건설기계조종사, 전기용접기능사, 선반기능사 등 일일이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 '2004년 올해의 철도차량인' '2005년 자랑스런 철도인' 등 수차례 포창도 받았다. 2000년부터는 내리 3년간 제안왕에 오른 이력도 있다.

"처음 철도청(지금의 한국철도공사)에 입사해 아무 것도 모르다 보니 기계에 대해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노력했는데 그게 많은 자격증을 갖게된 비결인 것 같습니다. 제안왕이 된 데는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불편하다고 느낀 것들과 문제점들을 수첩에 기록한 것이 큰 도움이 됐고요."

 



그러면서 남 명장은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의 수첩 여러 개를 내 보였다. 깨알 같은 글씨가 날짜별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본 명장들의 공통점은 대개 '기록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입사하면서부터 받은 월급명세서를 다 보관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지 않는 장인정신, 불편한 것은 어떻게 하든 해결해야 한다는 집념이 명장을 만드는 '필요조건'임은 또 한 번 명백해졌다.

 
남 명장이 철도분야에 발을 들여 놓은 때는 1975년. 열 여덟살의 어린 나이였다. 손가락으로 셈을 해보니 햇수로 35년째. 그와 비슷한 연배에 이만한 경력을 가진 사람은 철도공사 내에서 찾기 힘들다. 사회에 일찍 진출한 이력에서 짐작되듯 남 명장 역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서둘러 마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인 울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타지에서 숱한 고생을 겪었다.

"실업계고에 합격을 했는데 학비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방황을 하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서울역 앞 세탁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제대로 된 세탁 기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하나 하나 손으로 빠는 등 참 힘들었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객지에서 팍팍한 생활을 하던 남 명장은 철도청의 공채 시험에 붙어 철도인의 길로 들어선다. 철도정비 최말단직이었으나 그걸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일은 힘들었다.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었다. 슬그머니 배워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남 명장은 낮일을 마친 뒤 곧장 당시 동래에 있던 한독직업훈련원으로 향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꼬박 3년을 투자해 기능인으로서 기초를 닦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1983년 자체기능경기대회에서 선반분야 2위에 오른 뒤 그 이듬해에는 철도청 주관 기능경기대회에서 마침내 선반분야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배움에 목말랐던 남 명장의 잰 발걸음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84년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은 뒤 1990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중문학을 전공,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남 명장의 자리 옆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다. 여러가지 기계관련 책자들이다. 이 가운에 눈길을 끈 것은 기술과목 중학교 교과서. 기계정비 분야의 최정점에 선 명장에게 중학교 교과서라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남 명장의 말투는 담담하다. "하루가 달리 기계가 바뀌니 계속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필요하다면 이런 책이라도 봐야 합니다."

직장과 학교를 전전하는 생활이다 보니 남 명장의 가정 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결혼을 했던 1981년은 그가 한참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재미가 붙었을 때. 신혼임에도 늘상 귀가가 늦어 부인과 다툼도 잦았다. 본인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가정 점수는 아주 낮았다. 부인과 함께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했다. 그런 힘든 가정사가 해결된 데는 명장 지정이 컸다.

"명장이 되던 날, 둘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인이 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감회가 더 깊었습니다. 그날 떳떳하게 집사람과 외식을 했습니다."

평생 바라던 명장의 자리에 올랐지만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혜택은 없다. 자신을 바라보는 직장 내의 시선이 바뀌었다는 정도다. 그래도 명장이 주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철도공사 내에서 명장이 더러 나왔지만 특정분야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일반 기능인들과 당당히 경쟁해 기계정비분야 명장을 차지한 경우는 그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철도관련 업계에서는 이런 사례는 앞으로도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덩달아 행동거지도 조심스러워졌다. 어디 가서 함부로 행동을 하기에는 명장이라는 칭호가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두려워하면 성취는 없다

남 명장이 부산철도차량관리단에서 하는 일은 설비유지·보수. 쉽게 말하면 KTX 정비다.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른 만큼 직접 고속열차를 손보지는 않고 일련의 작업들을 관리 감독한다. 과거에는 열차가 정비고에 들어오면 망치 같은 것으로 바퀴를 두드리면서 이상유무를 판단했으나 지금은 그런 수고는 하지 않는다. 대신 자동화된 장비가 알아서 점검을 한다. 그래도 사람의 육감은 아직 유효하다. 기계가 미처 잡아내지 못하는 부분은 오랜 기간 축적된 감으로 집어내야 한다. KTX만 해도 바퀴 부분에 이상이 있으면 달릴 때 소리가 다르다.

열차 정비에는 밤낮이 없다. 최상의 상태로 정비를 해놓아야만 승객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KTX는 부산과 서울을 두 번가량 왕복하면 정비를 받는다. 야간에는 더욱 집중력을 요한다. 작업 도중 문제가 생기면 새벽에라도 현장에 불려나가기 일쑤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야간 정비를 마친 KTX 첫차는 새벽 5시 이전에 관리단을 떠나 부산역으로 향한다.

부산철도차량관리단에서 일반 열차 정비를 담당하던 남 명장은 KTX 개통을 1년 앞둔 지난 2003년 지금의 작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에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한 법. 같이 일하던 많은 동료들이 첨단 열차를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때문에 주저했다. 남 명장 역시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뛰어들었다.

"나이가 든 동료들은 많이 망설였습니다. 새로운 기종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시 공부를 해야하고, 이것저것 알아야 할 것도 많거든요. 처음에는 아주 고생이 많았습니다. 대신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려는 성격 때문에 최고의 기능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남 명장은 올해부터는 외부 강의를 할 준비를 하고 있다. 노동부에서 기본교육도 받았다. 주 대상은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청소년들. 자신도 그맘때 비슷한 맘고생을 했던 까닭에 그들에게 생생한 경험담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명장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는 안주할 수도 있으련만 남 명장은 아직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노동부가 뽑는 '기능 한국인'이 되는 것. '기능 한국인'이란 노동부가 명장이나 기능전승자, 기능장, 국내외 기능경기대회 입상자, CEO 가운데 우리사회의 귀감이 되는 사람을 선정하는 제도다. 남 명장은 '기능 한국인'이 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한 번 더 인증받고 싶다는 강한 도전정신을 감추지 않았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좌우명입니다. 최고 기능인은 결코 노력없이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기까지 오는 데는 동료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명장이 됐을 때는 부산역 등에 현수막까지 걸어주었습니다. 퇴직하는 날까지 철도와 함께 살아야죠. 철도공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한종 주종장(鑄鐘匠
"종(鍾)을 만드는 것은 곧 나를 만드는 일"
1000여년 이어온 에밀레종 제작기법 맥 잇는 명장, "어떤 사람이 소리 들어도 같은 느낌 와야 좋은 작품"

쇠로 만든 종(鐘). 두드리면 당연히 쇳소리가 난다. 쇠이기 때문이다. 근데 누군가가 불쑥 묻는다. 왜 종에서 종소리가 안나고 쇳소리가 나느냐고. 이 기막힌 역설. 웬만한 사람이라면 말문이 막히게 마련이다. 쇠로 종을 만들었되 거기에서 울리는 것은 쇳소리가 아니라 종소리여야 한다는 명제. 평생을 종과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도 풀기 어려운 화두다.

"소리에도 질(質)이 있고, 맛이 있고, 양(量)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겸비돼야 좋은 소리가 날 수 있는 겁니다. "

박한종(68) 주종장(鑄鐘匠)이 알듯 말듯한 답을 내놓는다. 내친 김에 한마디 더 물었다. 어떤 종을 좋은 종이라고 할 수 있는지.

"호수에 돌을 던졌다고 해봅시다. 어떤 때는 파문이 조금 일다가 그치는 수가 있고 어떤 때는 잔잔히 펴져 나가기도 합니다. 종도 그런 것입니다. 소리가 은은하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울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에설까. 기장군 정관면 박 씨의 작업장에 붙은 '소리의 명가 홍종사(弘鐘社)'라는 팻말을 다시 한 번 보노라니 쇳소리를 종소리로 만들고자 하는 장인의 애씀이 흠씬 느껴진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박한종 주종장이 완성된 종을 두드려 보고 있다. 그의 바람은 에밀레종처럼 천 년을 이어가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곽재훈 기자 kwakjh@kookje.co.kr
종에서는 종소리가 나야 한다

일반인들에게 낯선 용어인 '주종장'은 단어 그대로 종을 만드는 장인. 일정한 틀에 쇳물을 부어 여러 철제품을 만드는 기술자인 주철장(鑄鐵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주종장은 '주성장(鑄成匠)'이라고도 한다. 박 씨는 2004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열여섯 살 때 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수 십 년간 한길을 걸어온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입문 동기는 비슷한 연배의 여느 장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먹고 살기 위한 방편'. 하지만 하다보니 매력을 느끼게 됐고 궁금한 것은 스스로 연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길로 종 제작은 그의 천직이 되어 버렸다. 좋은 스승들을 만난 것도 박 씨에게는 행운이었다. 보통 어느 분야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족보가 명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3대 정도의 계보는 확실하게 드러나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종은 만드는 일은 무척 힘들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먼저 내·외부 형틀을 만든 뒤 종의 문양이 될 조각작업을 하고 최종적으로 뜨거운 쇳물을 붓는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20~30t 규모의 큰 종을 만들려면 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래서 박 씨를 비롯해 함께 일하는 이들은 작업장을 '화탕지옥(火湯地獄·불교용어로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 삶아져서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났다가 다시 또 반복하여 끓는 물에 들어가 삶아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이라 부른다.

박 씨가 종 제작에 쓰는 기법은 '사형주조공법'이다. 형틀을 짜는 데 있어 밀랍이나 합성수지 또는 배합사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마사토와 진흙을 고집한다. 형틀이 초고온에도 견딜 수 있어 보다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종의 울림 또한 그의 말마따나 '확실하게 보장'된다.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 국보 29호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도 이 기법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사형주조공법은 다른 것들에 비해 표면이 조금 거친 것이 단점이다. 게다가 전부 수작업이다 보니 제작과정도 훨씬 힘들고 길어진다. 그러나 박 씨는 편한 길을 택할 생각은 없다. 종의 존재목적은 소리라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박한종 주종장이 만든 법당종. 용모양의 종틀이 특이하다.
"사람들이 꽃을 볼 때 아름다움이나 화려함을 볼까요? 아닙니다. 꽃의 진실은 향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의 진실은 소리죠. 그대로 있으면 하나의 종에 불과하지만 두드리면 소리가 모체를 떠나 은은히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표면이 거칠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종과 함께 5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박 씨의 감각은 기계보다 뛰어나다. 오랜 세월 축적된 감으로 어느 부분에 필요 이상의 쇠가 덧붙어 있는지를 알아낼 정도다. 종의 두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곧 소리가 고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히 작은 부분의 두께만 달라도 종이 다른 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것을 알아내는 것은 오직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 대학연구소에서 컴퓨터로 정밀하게 만든 설계도가 그의 수작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아무리 장인의 솜씨라 할지라도 매번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 작업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종도 나오게 마련이다. 수십t이 되는 실패작은 말 그대로 애물단지. 그럴 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가차없이 깨버립니다. 아마 그동안 수십 개는 깼을걸요. 그러나 소리가 좋은 종이 나오면 그동안 겪었던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종은 자손만대 물려줄 보물

종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박 씨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일이 워낙 힘들다보니 손을 놓고 싶었던 것. 그 시기는 환갑 즈음으로 정했다. 근데 웬걸, 2002년 신지식인이 되고 이어 2004년 부산시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니 손을 빼기도 애매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온 때문이다.

게다가 무형문화재라는 직함은 그에게 멍에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큰 부담이 없었으나 이제는 아무렇게 종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상 받은 만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도 박 씨를 괴롭혔다.

"저는 어디 가서 내가 무형문화재요라는 소리를 잘 안 합니다. 밥 먹고 살기 급급하다 보니 국가를 위해 하는 일이 없는 게 부끄러워서지요. 중앙정부에 중요무형문화재 신청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지금도 마음이 무거운데 행여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으면 나라의 몸이 되어 버리니 그 책임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기가 참 두렵습니다."

간혹 그의 작업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박 씨에게 왜 당신의 종이 높은 평가를 받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럴 때 그가 하는 답은 간단하다. 절대 세 가지를 속이지 말라고 요구한다. 양심과 재료 그리고 중량이다. 좋은 재료에서 좋은 음식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듯 종도 마찬가지다. 규정된 재료를 쓰지 않거나 헛된 욕심에 계획된 무게를 줄인다면 그 종은 올바른 기능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박 씨에게 종은 좋은데 당목(撞木·종을 치는 도구)이 나빠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좋은 종이란 아무 도구를 사용해도 좋은 소리가 나게 마련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 종은 양심을 속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투철한 장인정신에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전국 곳곳에 걸려 있다. 용두산공원에 있는 '부산시민대종'을 비롯해 '서울대 법대 100주년 기념종' '독립기념관 광복 50주년 기념 통일의 종' '김천시민의 종' '울산시민대종' '합천군민대종' 등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박 씨가 사용하는 '사형주조공법'은 에밀레종 제작 때부터 내려온 것. 1000여 년의 간극이 있지만 에밀레종과 그의 작품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까. 에밀레종에 대한 평가는 후했다. 소리와 문양에서 세계 최고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 그는 그때보다 모든 면에서 기술이 발달한 현재 종을 만든다면 에밀레종을 능가하는 작품이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자신감을 나타낸다. 그래서인지 그가 지난 1999년 만든 김천시민의 종은 은은하고 맑은 소리의 울림으로 인해 에밀레종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씨는 에밀레종과 같이 자신의 작품이 천 년을 이어갈 것을 원한다. 에밀레종을 만든 박종익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아직까지 남아 있듯 자신의 이름도 후세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방편이 아니라 자손만대에 물려줄 보물을 만든다는 생각을 그가 늘 하고 있는 속내이기도 하다.

"종을 만든다는 것은 곧 나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부끄러움이 없는 작품이 나와야 하지요. 문화재를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어야 하고요. 제가 만든 종이 수천 년 뒤에도 기억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잘 만들든 그렇지 않든 제 이름은 남을 것인데, 다만 후손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용구 징장
"수백, 수천 번 두드려야 알게 되는 게 징소리"
한때 국내 최고 품질 자랑하던 '함양 징' 계보잇는 장인, "부드럽고 길며 웅장한 황소울음이 나와야만 좋은 징"


 

 
  70년 가까이 징과 함께 살아온 이용구 징장. 산업화의 여파로 자칫 맥이 끊어질 뻔했던 함양 징의 전통이 이 징장 때문에 다시 살아 남게 됐다. 사진제공=두부자 공방
1970년대초. 조용하던 농촌에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어닥쳤다. 초가집을 고치고, 마을길도 넓히자는 새마을운동의 노래가 온 국토에 울러퍼졌다. 마을회관 앞에는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깃발이 늘 펄럭였고 사람들은 찌든 가난의 때를 벗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아야 했다. 농촌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하지만 해가 길면 그림자도 길기 마련. 동시에 농촌의 문화도 깡그리 바뀌기 시작했다. 힘든 농사일을 마친 뒤 질펀하게 벌였던 한 판 춤과 노래는 '퇴폐적인 놀이'가 되어 버렸다. 징소리에 맞춰 신나게 들판을 돌았던 농악도 '근대화에 맞지 않는 향략적인 문화'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거센 바람에 밀려 징을 치던 재주꾼들은 차례로 손에서 채를 놓아야 했다. 찾는 이가 없으니 징을 만드는 사람들도 제 몸을 온전히 건사하기 힘들었다. 한 때 50여 곳의 징점(징을 만드는 곳)이 번창했던 경남 함양 역시 이런 소나기를 피하지 못했다. 문을 닫는 곳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우리나라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던 '함양 징'은 경제개발이 지상과제이던 그 몇 년 사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짓밟혀도 살아나는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것이 사람 목숨이라지만 문화의 생명력도 질기기는 매한가지. 거의 맥이 끊긴 것으로 알려진 함양 징의 가녀린 숨결은 뜻밖에도 경남 거창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은 거창 정장농공단지 내 '두부자 공방'. 그 곳에서 징장 이용구(74) 씨가 낯선 이를 맞았다. 경남무형문화재 제14호. 함양 징의 전통을 잇고 있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장인이다.

고향이 함양이고, 그 곳에서 징을 만들던 그가 거창에 자리를 잡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먼저 이 징장의 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그 때는 밥만 먹고 일만 하라는 분위기였지. 그러니 뭐 징 칠 사람도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많던 징점이 모두 없어져버렸지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공장을 정리하는 데도 끝까지 버텨봤습니다만, 저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징장이 경남 안의에서 꾸리고 있던 징점을 정리한 것은 1974년. 그리고는 살 길을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자신의 말마따나 "구멍가게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도시생활에 어수룩한 시골사람에게 서울이 "어서 옵쇼"라고 쉽게 문을 열어줄 리는 만무. 돈이 안 벌리는 것은 그만 두더라도 배운 게 징만드는 것이었고, 마음은 늘 징에 가 있었으니 장사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손을 댄 것이 양푼대야를 만드는 일. 마침 북한 출신의 이 분야 전문가가 이 징장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같이 일하자고 제의한 터였다. 그러다가 독립을 해 징과 유기를 만드는 공방을 차리기도 한 그는 비싼 집세 등에 치이다 고향으로 내려올 결심을 한다.

"애초에는 함양으로 돌아오려고 했지요. 근데 '선산을 떠난지 10년이 넘으면 출세를 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는 바람에, 함양으로 가기는 좀 뭣해서 바로 옆의 거창에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그 때가 1986년. 이 징장은 네 아들과 함께 '오부자 공방'을 열고 명맥이 사그라질 위기에 처한 함양 징의 복원과 계승에 나선다. 한 때는 '이남에서는 이용구의 징이 최고'라는 말까지 들었던지라 거칠 것은 없었다. 스스로 게을러지지만 않는다면.

이 징장이 다시 징점을 시작하면서 붙였던 '오부자 공방'은 '두부자 공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같이 일하던 아들들이 하나 둘씩 작업장을 떠난 까닭이다. 지금은 막내 아들 경동(43) 씨가 이수자로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이남 최고의 징장

 
  이용구 징장이 만든 '하늘소리 징'.
징을 잡게 된 계기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여느 장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배가 고파서 배우게 됐다"다. 이 징장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를 하면서 고향인 함양군 서하면을 떠났다. 마침 새로 들어간 집이 징점을 하고 있어 그는 자연스럽게 징과 마주하게 된다.

이즈음 함양 징의 대가였던 오덕수(1989년 작고) 씨를 만난 것은 이 징장에게 큰 행운. 그의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알음알음 징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될성부른 나무'였을까. 일 잘하고 사람이 낙낙하다 보니 오 씨는 그를 정식종업원으로 고용했다. 그의 나이 열 일곱, 징점에 발을 들여 놓은 지 10년 만이었다. 그 때부터 이 징장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재능이 만개한다. 장정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려다 보니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이 징장은 기술 배우는 재미와 돈 버는 재미에 몸 피곤한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선 이 징장이 자신만의 독립적인 공간을 경남 안의면에 차리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두살 때였다.

이 징장은 1993년 경남무형문화재가 됐다. 객지생활을 접고 고향 근처로 내려온 지 7년 만이었다. 그 전에 그는 1988년부터 내리 3년간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상을 하는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1991년에는 그가 만든 징이 한국의 표준 징소리로 선정됐다. 그 징은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해당 관청에서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징장들이 만든 징 가운데 3개를 엄선해 표준음을 잡는 작업에 들어갔다. 엄격한 심사 끝에 최종 낙점이 된 것은 이 징장의 작품. '이남 최고의 징장'이라는 칭호는 명실상부하게 이 징장의 것이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징장은 이 징장을 포함해 두 사람. 경북 김천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징장 역시 함양 징의 계보에 속한다. 함양 징이 어떻게 출발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은 없다. 이 징장이 스승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래 전 중국에서 징을 얻어온 한 선비가 함양군 안의면 용추사 계곡에 땅굴을 파서 부인과 징을 만들면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정도다. 유래야 어찌 됐든 그 덕분인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기 전 함양군 서상면의 꽃부리 일대에는 수십 채의 징점이 성황을 누렸다.


■황소울음이 나야 좋은 징

징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을 잡는 일이다. 체계화된 문서나 악보가 없다 보니 징소리는 철저하게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야 한다. 하지만 사물놀이나 농악은 동네마다, 지역마다 다 다르다. 드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호남의 농악은 첩첩산중을 마주하고 있는 강원도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징장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징이 필요한 지역의 특성이나 그들의 구사하는 음악에 맞게 징소리를 맞춰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징소리를 잡는 것은 책을 놓고 배울 수도 없고, 또 그런 책이 있지도 않습니다. 연주자에 따라 농악이나 풍물에 사용하는 징의 두께가 다 다르죠. 그렇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듣고 수백, 수천 차례 징을 쳐보면서 소리를 잡아야 합니다. 징을 계속해서 때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징은 하루 이틀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작업하면서 소리를 듣고 배워야죠. 듣고 느껴야 합니다."

이쯤해서 아버지 옆에 앉아 있던 아들 경동 씨가 슬그머니 말을 거든다. 자신도 19년째 징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도 징소리를 알지 못한다며.

어떤 징소리가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당초에 표준화된 음이 없는 것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 어떤 이들은 징에서 벌떼들이 몰려 다니는 벌소리가 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 징장은 좋은 징에서는 황소울음소리가 나야한다고 단언한다. 부드럽고 길게, 그러면서도 웅장하게 울려퍼져야 좋은 징이라는 것이다. 또 공중으로 퍼진 소리가 한 번 힘차게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온 뒤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더 올라가는 식으로 여운을 남겨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말이 쉬워 벌소리니, 황소울음소리니 하지 실제로 이걸 징에서 만들어내기란 보통 사람들에겐 언감생심. 어떤 음을 들었을 때, 다른 음과 비교하지 않고도 그 음의 고유한 높낮이를 알아내는 '절대음감 (絶對音感)'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징장도 징 주문이 들어오면 주문자와 마주 앉아 원하는 음을 맞춰 나가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 징은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죽은 징이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 징장이 만드는 징은 그의 명성에 맞게 국내 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 사물놀이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김덕수 씨도 이 징장의 작품을 찾는다.


■아무나 징을 만들 수는 없다

일흔을 넘어선 이 징장은 현재 직접 징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는다. 손재주가 워낙 뛰어난 아들이 있어서다. 각종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을 한 아들 경동 씨는 지난 2006년 징장 이수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징소리를 잡는 일은 여전히 아버지 이 징장의 몫이다. 수십 년간 체득된 아버지의 감을 아들이 따라잡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인 연유다.

이 징장의 실력 정도라면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어도 마땅한 일. 근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중요문화재 목록에 징장 분야는 없다. 유기장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유기와 징은 재료로 구리와 주석을 섞어 사용한다는 점을 빼면 완전히 다른 작업이다. 그런데도 두 분야가 한데 뭉쳐져 있는데 대해 이 징장은 마뜩찮은 심기를 보인다.

"징은 악기고, 유기는 그릇 아닙니까. 분야가 완전히 다릅니다. 징 만드는 사람은 유기를 만들 수 있어도, 유기 만드는 사람은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징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소리를 내는 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옛날 방식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죠."

여느 전통공예와 다름없이 징점에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다. 두부자 공방의 경우 20여 명의 직원이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경제성을 위해 생활유기 제조를 함께 하는 까닭에 이만한 규모를 유지하는 정도다. 징 하나를 만들려면 전수조교 이외에 이수자 5명가량이 있어야 한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빠져버리면 제대로 작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징장은 아들이 선뜻 자신의 뒤를 이어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일곱 살 때부터 이 일만 했으니 징밖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화투 등과 같이 남들이 다 아는 노는 기술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김윤태 사기장
"사기장에게 좋은 흙은 시작이자 끝"
가마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도예가문 적자, "전통 다완 완벽하게 재현했다" 평가 들어


 

 
  자식을 포함해 4대째 도예가문을 지켜오고 있는 '상주요'의 김윤태 사기장. 그는 흙을 잘 알지 않고서는 절대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단언한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할아버지는 대한제국시절 '충의참봉'이란 종9품 벼슬을 한 관리였다. 참봉이 살았던 곳은 경북 문경. 예부터 그 고장은 가마터가 많기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마땅히 도공도 북적거렸다. 그러나 점점 나라의 국운이 피폐해지고 있을 때라 도공들은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덩달아 가마터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해 참봉이 가마터를 사들여 직접 운영에 들어갔다. 덕분에 참봉의 장손은 어릴 때부터 가마를 벗하며 살았다. 흙도 만져보고, 불도 지피면서 그릇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만졌던 가마는 그 아들에게로 이어졌고, 손자 때에 이르러 만개했다. 장손의 손때가 묻은 가마는 이제 증손자가 지키려 한다. 도봉(道蜂) 김윤태(74). 부산시무형문화재 제13호 사기장(沙器匠). 4대로 전해지는 도예가문의 맥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사람이다.


■쌀이 좋아야 밥맛이 좋다

경남 거제시에서 경북 포항을 이어주는 14번 국도. 송정을 거쳐 기장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상주요(尙州窯)'를 만난다. '상주'라면 경북에 있는 도시의 이름. 문경이 고향인 김 사기장이 자신의 가마터에 상주라는 지명을 왜 붙인 것일까.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할 요량으로 가마를 만든 곳이 경북 상주의 함창입니다. 1973년이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상주요'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기장으로 온 것은 1976년이고요."

 

 

 

 



 
간단한 대답. 하지만 그 이면에는 녹록지 않은 장인정신이 숨어 있다. 사기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흙. 작업의 시작이며 끝이기도 하다. 김 사기장은 좋은 흙을 찾아 전국을 주유했다. 그러다 자리를 잡은 곳이 경북 상주.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젊은 도공의 마음가짐이 '상주요'란 명칭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기장에 터를 잡은 이유 역시 흙 때문이다.

김 사기장의 흙에 대한 집착은 지금도 여전하다. 좋은 흙이 없다면 절대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까닭이다. 좋은 흙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주저하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쌀이 좋아야 밥이 맛있다는 것은 누구가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도공의 첫째 조건은 흙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 작품은 자신이 직접 산에 가서 퍼 온 흙으로 만들어야죠. 그러려면 늘 흙을 가까이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 도공들 가운데는 흙을 주문해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무슨 훌륭한 그릇이 만들어지겠습니까. 조선백자를 하나 구우려고 해도 족히 15년 이상은 흙을 만져야 하는데요."

 
현재 김 사기장이 문헌에 남아 있거나 실존하는 옛 다완(茶碗) 30여 종을 실제와 다름없이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또한 흙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됐다. 기존 작품을 보면서 이것에는 어떤 흙이 사용됐는지를 분석해낼 수 없다면 재현은 언감생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리석무늬나 나뭇결처럼 수많은 선이 이리저리 이어진 추상적인 무늬를 구현하는 '연리문다완(練理紋茶碗)'에는 적, 백, 흑 등 여러 색의 태토(胎土·도자기를 만드는 흙 입자)가 들어간다. 이 흙들은 점력(粘力)이 모두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을 구울 때 갈라지거나 터져버린다. 서로 다른 종류의 흙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 조화롭게 버무리는 것, 이건 하루 이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능력 덕분인지, 흙을 바라보는 김 사기장의 태도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 "나만큼 흙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다. 하지만 그런 어투가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는 너나없이 인정하는 이 분야의 최고수가 아니던가.



 
  김윤태 사기장의 작품들. 위로부터 대정호다완, 입학다완, 백자진사연화문호.
도공의 두 번째 조건으로 김 사기장은 '가마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든다. 도공에게 흙만큼 중요한 것은 가마. 어떤 가마가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나오는 그릇의 격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김 사기장은 가마 역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다. 그리고 전통가마를 고집한다. 최근엔 사용이 편리한 가스가마의 보급이 활발하지만 김 사기장에게 이건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가마 만드는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지난 2001년 경기도 일원에서 열린 세계도자기엑스포 때도 김 사기장의 가마가 사용됐다. 행사가 임박했건만 전통 가마에 대한 기준이 없다보니 크게 당황한 주최 측이 수소문 끝에 김 사기장을 찾아 그에게 감수책임을 맡겼다. 그때 만든 가마는 아직도 전시장에 남아 있다.

김 사기장의 작업은 철저하게 전통을 따른다. 유약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성형과 불을 다루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직접 챙긴다. '명불허전'. 콩 심은 데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나기 마련이다.


■몸속에 흐르는 도공의 피

예능에 일가견이 있었던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때문인지 김 사기장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장문양을 새길 정도였다.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그릇 만드는 법을 익힌 그의 도공생활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뒤 인근에서 역시 가마터를 운영하던 작은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면서 본격화된다.

문경지역에서 명성을 얻은 김 사기장의 솜씨는 이웃으로 널리 퍼졌고 1964년에는 충북 단양군에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가마를 운영하던 사람이 밑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서너 차례 왕복하다가 그 집의 딸과 백년가약을 맺고부터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김 사기장이 만들었던 것은 생활자기. 먹고 살기가 힘들어 예술작품을 만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고, 그 역시 관심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김 사기장의 삶의 행로가 바뀐 것은 이 무렵. 어느날 한 골동품상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완 사진이 잔뜩 실린 도록을 내놓으며 재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안에는 고려다완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릇. 하지만 그것은 김 사기장이 전통 예술품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다완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제작법을 몰랐던 김 사기장은 그로부터 점차 다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온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매달렸다. 수천, 수만 번의 실패가 뒤따랐다. 그러기를 수십 년. 마침내 김 사기장은 고려다완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는 찬사를 듣게 된다.

"옛날 작품을 재현하려면 옛날을 알아야 합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밑에서 전통 그릇 만드는 것을 배웠고, 흙에 대해 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됐지요."

그가 부산시 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지난 2005년. 이어 김 사기장은 지난해 열린 전시회 '전통에 길을 묻다'에서 전통다완을 선보여 큰 호평을 받았다.

김 사기장이 보건대 전통 다완은 '숨을 쉰다'. 꽃을 꽂으면 한 달이 넘어도 시들지 않고 먹는 물도 정수가 된다. 탁주도 넣어 놓으면 쉬지 않는다. 약간 맛이 간 술을 전통 다완에 담아놓아도 하루 지나면 원래의 맛이 돌아 온다고 한다.

자신이 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전통의 맥이 끊기지 않기 위함으로 생각하지만 전통을 지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김 사기장은 잘못된 도예용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근거가 없는 용어를 만들어내다 보니 혼란스럽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가마를 한자로 '등요(登窯)'라고 하죠. 우리말로 풀자면 '오름가마'인데 이는 틀린 것입니다. '산비탈 등(嶝)'자를 써서 '등요(嶝窯)'라고 해야 합니다. 옛날 전통 가마는 보통 산등성이 비탈길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비탈을 의미하는 '등(嶝)'자가 사용되는 것이 맞지요."

면면히 내려온 김 씨 도예가문의 맥은 현재 그의 아들 영길(43) 씨가 잇고 있다. 일본의 아리다요업대학을 졸업한 영길 씨는 지금은 동부산대학 도예과 교수로 일한다. 특히 전통가마를 학술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술가 내력을 이어받은 둘째 딸 영화(45) 씨는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골프화가'다. 영화 씨의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트로피는 여러 골프대회에서 우승품으로 쓰인다.

김 사기장은 요즘 기장에 세워질 도예단지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다. 90여만 ㎡의 땅에 들어설 이 단지는 오는 2010년께 완공될 계획이다. 김 사기장은 기장도예단지가 세워져 기장의 흙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이뤄지면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관한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도 제 가마가 대를 이어 살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만약 제 아들 대에서 직계가 끊어진다 해도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물려 받으면 되니까요. 그런 제자들도 몇몇 있습니다. 그래서 '상주요'의 이름으로 쭉 이어졌으면 합니다."

 

이상옥 한지 제조 장인
"좋은 종이는 천 년의 세월을 너끈히 견뎌낸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전통 종이 제조방법 지켜와, 질기고 내구성 뛰어난 우리나라 닥나무 재료만 고집


 

 
  고집스럽게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는 이상옥 씨. 열 네살 때 이 일에 발을 담근 후 50년 세월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2년의 어느 여름날, 태풍 '루사'가 온 산하를 덮쳤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금지옥엽과 같은 사람들의 목숨이 스러졌다. 재산손실도 어마어마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에 터를 잡고 있는 이상옥(63) 씨도 그 악몽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작업장은 물폭탄에 부서져버렸고 수십년 동안 모아놓았던 일감재료들은 수마가 휩쓸고 가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참담함은 어디도 비할 바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일, 잘 됐다는 마음에 이 씨는 이참에 손을 아주 놓으려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말렸다.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고 힘을 북돋았다. 한동안 고민이 이어졌고, 이 씨 또한 어린 시절부터 해 왔던 일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이 일은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내려온 가업이 아니었던가. 정성을 다하면 돌부처도 돌아보기 마련. 때마침 도로 확장에 포함된 토지의 보상비가 손에 쥐어졌다.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이 씨는 이 돈을 바탕으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마음을 다잡는 것이 힘들었지, 생각을 굳히니 길은 열렸다. 자칫 소리없이 스러질 뻔했던 우리 종이, 한지의 맥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전통은 쉽게 죽지 않는다

지리산 어귀의 함양군 마천면. 한지 제조 장인인 이 씨의 작업장은 단출했다. 찾아간 날이 일요일, 이웃사람의 결혼식장 가느라고 부인마저 자리를 비워 더욱 휑했다.

"일하려는 사람이 없지요. 일이 힘든 데다 별로 돈도 되지 않으니…. 자식들도 안하려고 하는데 누가 이걸 배우려고 하겠습니다. 뭐 제 대에서 기술이 끊어져도 할 수 없는 거지요."

이 씨의 입에서 약간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느 전통기술과 마찬가지로 한지제조도 완연한 사양산업이다. 이 씨가 이 바닥에 몸을 던질 때에는 경기가 괜찮았다. 동네에는 한지작업장이 많았다. 물건을 만들어 놓으면 금방 팔려나갔다. 마을은 흥청거렸고 수입도 쏠쏠했다. 종이 만들어서 논도 사고 밭도 사곤 했다.

그러던 것이 20~30년 전을 전후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종이 산업이 기계화가 되면서부터 눈에 띄게 한지를 찾는 손이 줄어들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매끈한 종이의 매력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못생긴 몰골의 한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몇년 전부터는 중국산 재료로 만든 한지가 유통되면서 더욱 처지가 나빠졌다.

현재 이 동네를 포함해 인근에서 한지를 만드는 이는 이 씨밖에 없다. 전통도 좋지만 입에 풀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그것에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 이웃들은 하나 둘씩 한지에서 손을 뗐다.

진득하게 작업장을 지키고 있지만 앞으로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 씨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지난 2002년 들이닥친 수해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옳다구나 싶어 아예 이 일을 접으려 했던 것도 앞날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이 씨가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온 가업인 까닭이다.

"열 네살 때부터 이 일을 배웠습니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한지 만드는 것을 보다가 눌러앉은 거지요. 그때만 해도 일감이 많아 다 챙기지 못하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게 아깝기도 해서 저라도 해보자 싶어 일을 배웠지요. 그러다 보니 이게 또 매력이 있습디다. 그게 벌써 50년이 다 됐네요."

이 씨는 자신의 깜냥이 되는 한 전통을 고집한다. 3대째 내려온 우리 기술을 기계에 맡길 수는 없다는 생각때문이다. 중국산 재료를 철저하게 배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보건대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는 우리나라 것과 중국산이 확연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닥나무는 섬유질이 많은 반면 중국산은 그렇지 않다. 삶아보면 그 차이는 더 극명해진다. 중국산은 마치 물에 풀어놓은 밀가루처럼 되어 버려 조절이 잘 안된다. 이는 곧 종이의 질적 차이로 이어진다. 한지는 질기고 오래 보존이 되지만 중국산은 쉽게 찢어지고 빨리 색이 바랜다. 닥나무의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닥풀도 직접 재배해 쓴다. 닥풀을 대신하는 중국산 화공약품은 아예 그의 안중에 없다.

처음은 약간 어두운 분위기에서 말이 시작됐지만 한지의 자랑에 이 씨의 표정이 점차 밝아진다. 오랜 세월 한 우물을 고집스럽게 팠던 '꾼의 기질'이 여실히 묻어 나온다. 장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자부심일 터다.


■명품은 어렵게 만들어진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힘겹다. 우선 좋은 닥나무를 많이 모아야 한다. 예전에는 마천면 일대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야생하는 것도 드물고 재배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점점 닥나무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이 씨는 이웃의 휴천면까지 가서 재료를 가져온다.

한지 제조의 첫 단계는 닥나무를 삶는 일이다.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닥나무를 넣고 껍질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찐다. 그런 다음 껍질을 벗기고 며칠을 말린다. 이 과정에서 잡티를 제거하고 분사기에 갈아 통에 넣은 뒤 으깬 닥풀을 섞어 종이를 뜬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지루하기 그지없다. 하루 이틀에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은 닥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만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극 정성이 없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잡티를 없앤 뒤 '닥돌'이라 불리는 넓은 돌판에 재료를 올려 놓고 나무방망이로 두들기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삶은 닥이 방망이질에 의해 충분히 짓이겨지지 않으면 섬유질이 잘 풀어지지 않는다. 발틀을 사용해 뜬 종이는 도침이라는 마지막 작업을 거쳐 한 장의 한지로 탄생한다. 도침이란 약간 덜 마른 종이를 포갠 후 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인데 이를 통해 한지의 밀도는 두드러지게 높아진다. 학계에서는 이 도침과정을 우리 조상들이 고안한 독특한 종이 표면가공 기술로 보고 있다.

토종 닥나무를 주원료로 하는 한지 제조에는 아무리 우수한 성능을 갖춘 기계라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도리없이 사람의 손이 가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일부에서는 잡재료를 섞기도 한다. 이 씨의 장인정신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 씨는 종이를 뜰 때 요즘 많이 사용되는 쌍발도 거부한다. 쌍발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한 번의 뜨기작업을 통해 두 장의 한지를 만들어 내는 방식. 하지만 쌍발제조법은 종이에 힘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두 번의 뜨기로 한 장의 한지가 나오는 옛 방식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전통 한지는 쌍발을 이용한 한지에 비해 월등하게 질기다.

좋은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난 덕분에 이 씨의 한지를 찾는 발걸음은 잦다. 그 가운데는 한국화 등 전통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다. 대학의 미술 관련 학과들도 주요 고객이다. 대형 사찰 역시 이 씨의 한지를 선호한다. 수의를 만들기 위한 한지 주문도 늘고 있다.

큰 돈이 되지는 않는다. 한지 1000장에 150만 원 정도. 들인 품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경제성 논리를 대입한다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다른 지역의 한지 작업장에도 더러 가보는데 종이의 재료로 중국산을 쓰는 곳이 많더군요. 그렇게 하면 생산성이 높아 좋기는 한데…, 저는 재주가 없는 탓인지 영 그렇게는 못하겠습디다. 컴퓨터도 할 줄 몰라 그냥 전화주문만 받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위가 좀 도와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기술이 계속 이어지기를

작업장을 나온 이 씨가 집안 한 쪽에 있던 창고의 문을 열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한지가 그득하다. 참 오랜만에 한지를 봤다. 한 때는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접했던 것.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찾아주지 않으면 안 될 신세가 된 운명이 얄궂다.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비단은 500년을 가고, 종이는 1000년을 견딘다)'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 씨는 주위의 권유로 지난 2007년 인간문화재 등록을 준비했다. 함양군청 등에서도 적극 지원에 나섰다. 한지 제조와 관련된 전통 기술이 끊어질 것을 우려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별 다른 설명없이 문화재 등록은 뒤로 미뤄진 상태다. 이 씨는 아마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 탓이 아니겠냐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이렇다할 칭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 씨의 한지는 국내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는다. 정작 그 자신은 "누구나 조금만 하면 모두가 저만큼 할 수 있다"고 겸손해하지만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자타가 공인한다.

그런 만큼 이 씨는 전통 한지제조법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해 일말의 걱정은 가지고 있다. 명장이나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에서 나온다. 관련법은 특정 기술 및 기능 보유자가 명장 등에 뽑히면 반드시 전수자 교육을 하도록 조건을 내걸고 있다.

"제 나이도 있고,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하니 이 일을 하다가 안되면 그만 두는 거지만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해 온 건데…, 전통 한지제조 기술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