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사람이 곧 하늘 " 수운 최제우"

醉月 2008. 12. 9. 12:53

  가련하다 가련하다   조국의 운수 가련하다
  전세 임진 몇 해런고   이백사십 아니던가
  개 같은 왜적놈아   너희 역시 하륙하여
  무슨 은덕 있었던고   내가 또한 신선되어
  날아 하늘에 오른다 해도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하룻밤에 멸하고저
  (안심가, 용담유사 중)

 

천서를 얻다

  1885년(철종5년), 최제우는 그의 집 초당에서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졸다 깬 듯이 몽롱한 상태에서 앞을 보니 눈앞에 웬 낯선 중이 서 있었다.
최제우는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중은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하였다. 중은금강산의 유점사라는 절에서 왔다고 한다.

최제우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저는 금강산에서 온 중인데 뜻한 바 있어 백일 동안 하느님께 정성을 드렸습니다.
바로 정성을 마치는 날 뜻밖에도 탑 위에 이상한 책이 한 권 놓여 있었습니다.
얼른 펴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알아볼 사람을 찾아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선생님을 뵙고 느낀 바가 있어 이 책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이 책을 풀어 주십시오.

  하며 공손히 책을 건네 주었다. 최제우가 그 책을 받아 펴 보니 과연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책이었다. 그는 그 책을 받고 3일 동안 연구한 끝에 그 뜻을 풀어내었다. 그러자 중은,

  선생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고는 어찌 이 글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은 하늘이 선생님께 주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전해 드렸을 뿐입니다.

  하고는 두세 발짝 걸어가더니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최제우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그 책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과 그 책이 눈앞에 선하였다. 그리고 그 책의 글까지도 모두 선명하였다.

그럼 그 책을 준 사람이 신령이었던가. 하늘이 준 책이라니, 그럼 천서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일이었다.

훗날 최제우를 체포하여 압송한 관원은 조정에 최제우가 천서를 얻어 공부를 하여 도를 깨쳤다고 보고하였다.

 

  최제우(1824-1864)는 경상도 경주 출신이다. 본래의 이름은 제선이었는데 득도를 한 후 제우라는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제우'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7대조 최진립이 임진 왜란 때 공을 세우고 병조 판서를 지냈다고 하나 6대조
이후에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 양반 출신이다. 아버지 최옥은 근암 선생으로 통하던 학덕 있는 선비였다.

문장과 도덕으로 경상도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학자였으나 평생 뜻을 펴지 못하여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살았다.

최옥은 본처가 있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고 양자를 들이고 있다가 60이 넘은 청상 과부로 지내던 청주 한씨를 소실로 맞아 최제우를 얻었다. 이처럼 자신이 몰락한 양반의 서출이라는 사실은 최제우를 평생을 두고 좌절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최제우는 여덟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의 경전에 소양이 깊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얼굴이 남달리 빼어났고 체격이 좋아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한다. 그리고 두 눈의 정기가 날카롭게 빛나 어떤 이들은 '역적의 눈'을 가진 아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세 살 때에 결혼하였으며 열여섯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 그는 아버지를 잃은 일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감을 막기 어렵다. 슬프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외로운 내 한 목숨,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무엇을 알았으랴.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선친의 일생 사업이 불에 타 흔적조차 없으니 불초한 자식의 여한이 세상의 일에 낙심만 일으킨다. 어찌 애닯지 않으며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 집안 일에 뜻이 있으나 어찌 농사일을 알 수 있으며 글공부가 독실하지 않으니 청운의 뜻마저 꺾이었다.
가산은 점차 기울고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나이는 점점 늘어 가 신세가 장차 어려워질 것이 한탄스럽고 팔자를 헤아릴 수 없으니 헐벗고 굶주릴 것도 염려스럽다(수덕문, 동경대전)

 

  몰락 양반의 서출로서 양반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물려받은 가산도 없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의 고뇌는 큰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후 집을 나가 전국을 유람하며 방랑하였다. 그 동안에 장사도 하고 의술, 복술 등 잡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세상의 어지러움과 인심의 동향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는 그의 이 방랑 기간을 예수나 부처가 큰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밟은 영혼의 방황과 고행 과정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는 10년간의 방랑 끝에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그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보고 들은 것도 많았고, 느끼고 깨달은 것도 많았다. 극도로 어수선한 세상을 직접 확인한 그는 이 세상이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팔도 강산 다 밟아서
  인심 풍속 살펴보니
  어찌할 수 없게 되었네
  우습다 세상 사람
  천명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몽중문답가)

 

  이 시에서 그는 세상이 어지러워 인심과 풍속이 각박해진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절망을 털어놓고 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절망적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최제우는 고뇌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워진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늘의 뜻인 천명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즉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따르면 세상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늘의 뜻을 알아야 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천명을 알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얻었다는 것이 바로 천서이다. 아버지가 지어 놓은 용담정에서 서책을 보며 천명을 알아 세상을 구제할 길을 찾는 일에 골몰하던 32세 되던 해 봄 초당에 누워 봄볕을 받고 있다가 한 이승에게서 천서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어느 행상인을 통해
백련교나 도교의 술서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적을 행하다

  최제우는 동학 사상을 창도한 인물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고유 종교를 창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교주인 셈인데 그러다 보니 그와 관련된 신비한 일들이 기록에 여럿 남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엇는지 아니면 계기가 될 만한 일이 신비화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쨌든 기록에 따르면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에서 왔다는 이승으로부터 천서를 받은 최제우는 그 책의 가르침에 따라 선성산에 있는 한 암자에서 49일 동안 기도를 드리기로 하였다. 천성산은 옛날 원효 대사가 당나라의 중 1천 명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모두 성인이 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산 이름이 천성인 것도 그 때문이다.
  기도를 시작한 지 47일째 되던 날 그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천도교에서는 최제우의 이것을 신통력이라고 해석하는데 그는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도를 다 마치지 못한 그는 경주로 돌아왔다. 과연 그가 예감한 그 날 그 시각에 작은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장례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신통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앞날을 미리 내다본다느니 도술을 부린다느니 하는 소문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듬해 가을 그는 다시 세상 사람의 눈을 피하여 대장간을 차리고 한 쪽에 기도를 할 수 있는 기도장을 만들었다.

그 일에 필요한 비용에 대려고 그는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남겨 둔 여섯 마지기의 땅을 팔기로 하였다.
그는 이 땅을 일곱 사람에게 차례로 속여 가며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49일 동안의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때 속아서 논을 산 일곱 사람이 아우성을 치며 그를 관가에 고발하였고 그는 관가에 끌려다니면서 고초를 당했다.

관가에서는 맨 처음에 땅을 산 사람에게 그 땅을 소유하게 하고 나머지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어떤 노파가 아들과 사위를 데리고 와서 최제우에게 항의하며 덤볐다. 그런데 한창 승강이를 벌이던 노파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곧 집으로 옮겨 갔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파의 아들과 사위가 몰려와 노파를 살려 내라고 하자 최제우는 노파의 집으로 가 침착하게 닭털 꼬리를 노파의 목구멍에 넣었다.

그러자 잠시 후 노파는 조금씩 기침을 하다가 이어 피를 한 모금 토하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앉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최제우는 신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뒤로 수행에 더욱 정진하였다.

 

 득도

  1860년 4월 5일이었다. 이날은 우리 나라 사상사의 역사적 전환점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그때 최제우의 나이 37세였다.
  그 날은 그가 태어나기 전 양아들로 들어온 형의 아들 즉 조카의 생일이었다.
산에서 두문 불출하고 수행에 전념하던 그에게 조카는 사람을 시켜 옷과 갓까지 보내면서 오라고 기별하였다. 생일 자리에 참석하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최제우는 몸에 심한 한기를 느끼며 곧 쓰러질 듯하여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거처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때 공중에서 홀연히 소리가 났다. 상제의 음성이라고 했다. 그는 상제로부터 병을 고칠 수 있는 영부(신령스런 부적)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뜻하지 않던 중 4월에 몸과 마음이 떨리고 무슨 병인지 모를 증세가 나타났다.
말로 그 상태를 다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 홀연히 어떤 신선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놀라 일어나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들어 보니,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상제라 부른다. 너는 상제도 모르는가?"
하였다. 내가 상제께서 이렇게 나타난 이유를 물으니,
  "나 역시 공을 이룬 바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고자 하니 의심치 말라" 하였다. 내가 다시,
  "그럼 서학으로 사람을 가르칠까요" 하니
  "아니다. 나에게 신령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고 그 모습은 태극같기도 하고 궁궁같기도 하다. 나에게 이 부적을 받아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구하고 나에게 이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해 세상 사람을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할 것이요,

덕을 천하에 펼 수 있으리라" 하였다(포덕문,동경대전)

 

  최제우가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면서 이 소리를 듣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집안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 사람에게는 안 들리는데 그만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무아지경에 빠져 몸을 떨고 있는 최제우를 본 가족들은 그가 실성하였다고 단정하였다. 가족들은 캄캄한 밤중이라 약도 의원도 대지 못하고 그저 아우성만 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집안 사람 거동 보소
  경황 실색하는 말이
  애고애고 내 팔자야
  무슨 일로 이러한고
  애고애고 사람들아
  약도 사 못해 볼까(안심가)

  이렇게 혼비백산한 가족들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심지어 부인 박씨는 남편이 실성한 데에 낙담하여 세 번씩이나 물에 빠져 죽으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체험을 통해 최제우의 종교적인 신념은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또 그의 행동도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최제우는 그 후 한동안 하느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깊이 체득하는 데 힘썼다. 처음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당황하고 흥분하여 마음의 안정을 잃었으나 1년간 더욱 정진한 뒤인 다음해에는 차츰 마음도 가라앉고 그 가르침을 깊이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그(상제의) 가르침을 잘 익히면서 미루어 생각해 보니  가르침에는 당연한 이치가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주문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의 방법을 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잊지 않기로 하는 맹세의 글을 지었다. 결국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은 바로 주문 스물한 자에 달려 있다(논학문)

  이렇게 도를 닦는 절차와 방법이 정해지자 그는 포덕을 시작하였다. 뜻밖에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그 무렵의 사회 현실이 너무 어수선하고 암담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였다. 최제우는 이를 동학이라고 불렀다.

 

동학의 창도 

전환의 시대

  최제우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전환기였다. 즉 봉건 시대의 암울한 질곡을 깨고 근대적 역동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시대적으로 중세적 말기와 근대적 질서로 재편되고 있었고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외세의 침략과 내정의 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외척 중심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과거 제도의 모순, 매관 매직의 성행, 법도와 기강의 문란 등 정치가 극히 혼미하였고 그 부담이 모두 백성들에게 떠넘겨져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양반 세도가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백성에 대한 착취 행각을 일삼아 농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리 대금업과 삼정의 문란의 폐단이 가장 심하였다. 삼정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전정이었는데 20년마다 실시 되던 양전 사업이 중단된지 이미 130여 년이나 되어 토지의 경계 의식마저 혼란한 지경이었다. 전정의 문란은 호남 지역이 가장 심했고 다음이 영남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민생이 도탄에서 허덕이고 있어 비록 좋은 계책이 있어도 수습할 수 없다"는 말이 고위 관리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에 동요하고 침체되어 유리 결식하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심지어는 화적 떼를 짓거나 광대패와 어울리는 농민도 생겨났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조금씩 눈뜨게 된 농민들은 음으로 양으로 지배층에 저항하게 되었다.
도처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민란이 속출하였으며 철종 때에는 최대 민란인 진주 민란이 남도 지망을 휩쓸고 있었다.
  또, 1841년 겨울에는 괴질이 전국에 크게 돌았고 1846년 6월에는 지진이 났다.
또 그해 9월에는 큰 홍수가 졌다. 이어 1851년 7월에도 전국을 휩쓴 물난리로 서울 지방과 삼남 지방에 유민이 많이 생겼다.

게다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점차 심해지면서 처형당하는 신도들도 늘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러한 국내의 위기 상황에 더하여 외세의 침범이 민심을 더욱 동요시키고 방황과 혼란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낯선 서양배들이 우리 나라 연안에 자주 출몰하였고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굴복하였다는 소식이 나라 안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 등화에 놓여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였고 농민들은 만나기만 하면 이 나라는 망할 것이며 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망국가로 세월을 보낼 지경이었다.

 

  사상적 혼미

  조선 왕조의 지배 이념이던 성리학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현실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제시되었던 실학은 이단으로 몰려 개혁 사상으로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유학자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은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 부재 현상으로 말미암아 황당 무계하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일쑤였던 정감록이 민간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고 동요하게 하였다. 게다가 서학(천주교)이 지배층까지 번질 만큼 유행한 것도 위기 의식을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온 백성이 사상적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하였으며 새로운 사상에 대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최제우는 이렇게 말했다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의 다스림으로도 족히 건지지 못하고 공맹의 덕으로도 족히 다스리지 못한다(몽중가)

 

  새로운 사상의 창도

  이러한 상황을 맞아 최제우는 심한 위기 의식을 느꼈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는 요즘 나쁜 질병이 나라 안에 가득하고 또 백성은 일년 내내 편안할 날이 없다. 이것도 상해를 입을 운수의 한 본보기이다.

한편으로는 서양 사람들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으니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중국이 온통 망해 없어지면 우리 나라도 따라서 그렇게 될 우려가 없지 않다.
아! 이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이 앞으로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포덕문, 동경대전)

  천재지변이 잦고 나쁜 질명이 돌고 정치가 문한하여 민심이 어수선한 당시 국내 현실을 최제우는 남과 달리 보았다.

서양이 무력으로 중국을 무찌르고 우리 나라에도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인식은 그를 너무 놀라게 하여 어떤 초인간적인 힘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나라 안의 현실을 '상해를 입을 운수'라 하였고 서양이 위세 좋게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도 그들이 '천명'을 받아 그렇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도 불도 수천 년에 역시 운이 다했던가" 탄식하면서 기존 이념으로는 이 나라의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은 천명을 아는 것이라고 보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 큰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동학 사상-사람이 곧 하늘

  시천주 사상

  동학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을 종합하고 민간 신앙적인 요소도 아우른 우리 고유의 사상이며 우리 고유의 종교이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을 구제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으며 크게는 시대를 넘어서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이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상대하여 이름한 것으로 최제우는 이에 대하여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를 받았으니 비록 천도일지라도 학문인즉 동학"이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스스로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이 21자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 21자는 이렇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이 주문의 내용을 해석하면 '지극한 기운이 지금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가 된다.


  최제우는 '동경대전' '논학문' 부분에서 이 주문에 대한 결정적인 해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주문 가운데 앞의 8자의 뜻은 본 주문 13자의 뜻속에 겹쳐져 있거나 반복되어 있어서 핵심적인 의미는 본 주문 13자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이 13자를 하나씩 보면 '시'는 모신다는 뜻이고 '천주'는 한울님이니, '시천주'는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인데 넓게 보면 모든 사람 중생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일체의 생명을 제 안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한울님을 모신다는 사상은 더 나아가 한울님을 기른다는 양천 사상과 한울님을 사회적으로 구현한다는 체천 사상으로 발전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보다 실천적이 의미를 띠게 된다. 즉 동학은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이요 행위의 가르침인 것이다.
  또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를 말하는데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화하고 활동함으로써 어떤 것도 하지 않음이 없는 일체의 생명 활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노장철학의 '무위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정'이란 그 활동의 덕에 마음을 정하는 것이고, '영세'는 사람의 일평생이며, '불망'은 언제나 생각을 두어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사'라 함은 모든 일을 말하고,

'지'란 그 도를 알아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13자의 주문을 합하여 종합해 보면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밝고 밝은 덕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면 지극한 기로 화하여 지극한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는 뜻이 된다.

 

  최제우는 세상 사람 누구나 성인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체천이 필요한데 체천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울님을 체현한다'는 뜻으로 다만 '사람이 곧 한울님'인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한울님이 되도록 하라'는 명령이다. 즉 적극적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천명을 알아 성인 군자가 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성인 군자의 이상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소극적으로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명제에 반대되는 모든 도덕, 언어, 심리, 경제, 정치, 사회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의미한다.

그러자면 사람을 거짓말로 속이지 말고, 사람을 오만하게 대하지 말고, 사람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 입히지 않고,
사람을 교란시키지 말고, 사람을 일찍 죽이지 말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말고, 사람을 ㄱ주리게 하지 않고, 사람을 파괴하지 말고, 사람을 싫어하지 말고, 사람을 굴복, 예속시키지 않아야 하는데 이를 십무천이라고 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시천과 체천의 도리를 구현하여 이미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을 인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낸 것으로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노예 취급하면서는 한울님을 모실 수 없으므로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 침략 행위, 수탈 행위, 기만 행위 등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동학이 갖는 위대한 혁명성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입도한 세상 사람 그 날부터 군자가 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 신선 네가 아니냐(포덕문)

 

  후천 개벽사상

  최제우는 역사란 시세에 변화한다는 변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곧 혁명 사상으로 연결되는데 적극적으로 왕조의 성쇠가 있다고 하여 변화를 강조하면서 당시 왕조의 기운이 지극히 쇠진하여 새로운 시대가 개벽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최제우는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양반 사회의 질서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주역의 이치를 빌어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 법칙적 필연성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변혁 사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그의 이른바 후천 개벽 사상이다.


  그는 자신이 상제의 음성을 듣고 깨우침을 얻은 1860년 4월 5일을 기점으로 그 전을 선천이라 하고 그 후를 후천 개벽의 새 세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서양사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그 전 시대를 암흑기로 보고 그 후의 시기를 광명기로 보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새로 열린 개벽의 시대에는 극도의 빈곤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부귀해진다고 하였고 '시천주' 신앙으로 모두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최제우가 말하는 새 세상은 자연 법칙처럼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당위를 실현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다. 그는 "운수가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는 말로 인간의 능동적인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하여 모두가 하나 되는 군자 공동체의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후의 극락이나 천당을 내세우지 않았고 끝까지 현세의 '동귀 일체의 군자 공동체'를 추구할 따름이었다. 군자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 시천주의 신앙으로 도덕적인 이상인이 되어 이룩하는 도덕 사회이다.
  이러한 후천 개벽 사상에 동학의 혁명 정신이 결합하면서 동학은 동학 운동으로 발전하고 우리 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중 혁명인 갑오 종민 혁명에 사상적인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포교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하지 뜻밖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도를 설법하고 입교한 사람들에게 스물한 자로 된 주문을 외게 하였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도 그를 찾아왔다. 그는 선비들과 자기의 도에 대하여 당당하게 문답하였다. 그리고 입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는 삼천 명의 제자를 거느렸다는 공자에 자신을 비유하면서 자기의 도가 성대한 운수를 맞이했음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갈수록 최제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렇게 동학이 하나의 종파를 이루게 되자 세상의 눈에 띄게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포교를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기 전이었다.
  먼저 근동의 지방과 일가에서 최제우를 비방하고 동학을 중상하기 시작하였고 또 관헌에서는 서학이라고 지목하여 탄압을 하였다.

최제우는 당장 험악한 세상의 지목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전라도 남원 땅에 있는 은적암에 피신하였다.
  최제우의 이러한 피신 행각은 그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큰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는 피신하는 동안 자기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었던 점에 대하여 반성하고 자기의 도를 표현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사상을 더욱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데 힘썼다.
  '동경대전'에 있는 '논학문'은 이 시기에 쓴 것인데 여기에서는 서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면서 자기 사상을 문답식으로 정연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또 '용담유사'에 있는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등도 이 기간에 지어졌는데 거기에 그의 사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최제우는 피신한 지 1년이 못 되어 혹세 무민한다는 죄목으로 경주 진영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이 관에 그 정당성이 입증된 것으로 인식되어 신도가 더욱 늘어났으며 최제우는 포교 방법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신도가 전국적으로 늘어나자 각지에 접(지역 단위 조직)을 두고 접주가 신도를 관장하게 하는 접주제가 만들어져 교세가 경상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 경기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러자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염려한 최제우는 해월 최시형을 후계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그래서 먼저 최시형을 거쳐야만 그를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교세가 크게 불어 그 규모가 거의 전국을 망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급기야 1863년 12월 최제우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자들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조용히 체포되었다.

한양으로 이송되던 중 철종이 승하하여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국상이 나면 한양에서 옥사를 벌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제자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 일에는 그의 후계자인 최시형도 끼어 있었는데 최제우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 최시형이 대구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빨리 멀리 도망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동학의 포교를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스승을 뒤로 한 채 대구를 벗어났다. 그리고 제 2대 교주가 되었다.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사도 난정(사악한 도로 바른 도를 어지럽힌다는 뜻)이라는 죄목으로 평생에 걸친 구도와 4년에 걸친 포교를 끝내고 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가 처형된 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글들을 모아 기본이 되는 가르침으로 삼게 되었다. 한문체로 된 것을 엮어 놓은 것이 '동경대전'이고, 가사체로 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용담유사'이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도는 전국에 거대한 들불로 타올랐다.

 

타오르는 봉화

  최제우는 일반적인 종교와는 달리 순수한 믿음을 강조하기보다는 대중의 의식을 개혁하여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일반적인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바와는 달리 자신을 신격화하지도 않았고 우상화를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데에서 잘 볼 수 있다.

게다가 사후의 내세관이라든가 영생에 관한 언급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모순된 삶에서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을 주로 하여 자신의
사상 체계를 전개하였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하여 보국 안민과 척왜의 민족주의 정신을 보여 주었고 근대적인 의미의 인간 평등 사상을 주창하였다. 또 사회 안의 비인간적인 모든 차별, 예컨대 양반과 평민, 적자와 서자, 노예와 주인, 남녀, 노소, 빈부 등의 차별에 철저히 반대하였고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사상을 폈다.

그 점에서 그의 사상은 가장 철저한 반봉건적인 평등 사상이며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어떤 학자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야말로 현대의 어는 민주주의보다도 철저하고 깊이있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동학 사상은 궁핍에 시달리던 그 시대 농민들에게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당시의 한 관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신이 듣건대 동학의 무리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번성하는 것은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백 수령의 수탈이 심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능히 살 길이 없어 동학당에 들어가는 것입니다('취어', '동학난기록' 상, 국사편찬위원회)

  동학에 입도하는 백성이 많아지면서 그 교세는 불길같이 퍼져 나갔다.
당시에 선전관이던 정운구가 글을 올려 "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리 걸쳐 동학에 관한 얘기를 듣지 않는 적이 하루도 없으며 경주를 둘러싼 이웃 마을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심하여 주막의 아낙에서 산골의 나무 하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그 주문을 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유명한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는 자신이 동학에 입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 왕조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장에서 정치의 부패함을 실제로 보고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백범일지)

 

  최제우가 순교한 후 대통을 이어받은 제 2대 교주 최시형은 지하로 숨어다니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경전 간행을 통하여 교리를 확립하였고 조직을 강화하여 동학을 완성하였다.

그에 이르러 1대 교주인 최제우가 창도할 당시 모든 사람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개인과 나라의 구제 신앙이었던 동학이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한다"는 가르침으로 발전하여 인간 존중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인간 뿐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산천 초목에까지 한울님이 내재한 것으로 보는 '물물천 사사천'(모든 사물과 모든 일에 하늘이 있다는 것)의 범천론 사상이 널리 민중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제 3대 교주인 손병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을 동학의 종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은 봉건적인 양반 사회 해체기에 농민 대중의 종교가 되었고 동학 사상과 동학 운동은 반봉건적인 민중의 사회 개혁 운동적 성격을 띠었다. 초기의 창도 단계에서는 일반에 널리 유포된 신앙의 형태였으나 교조 신원 운동 등 집단적인 시위 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탐관 오리의 혁파 외세의 배척 등을 주장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갑오 농민 혁명에 이르러서는 '만민 평등의 이념'과 '조직적 역량'이 기반이 되어 우리 나라 농민 운동의 집대성인 사회 개혁 운동으로 힘차게 발전하였다. 1905년에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천도교 운동은 신민회 운동과 함께 민족 운동 세력으로 그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