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탈속한 자유 정신_화담 서경덕

醉月 2008. 12. 2. 09:17

  독서하던 당일에는 경륜에 뜻을 두었지만
  만년에 이르니 안연의 가난이 달구나.
  부귀는 다툼이 있어서 얻기가 어렵고
  임천은 금하지 않으니 몸을 편한히 할 수가 있다.
  나무하고 고기 잡아 배를 채우고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어 정신을 펴기에 족하다.
  공부가 의심없는 데 이르니 쾌활함을 알아서
  백년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술회 화담집)

 

탐구심 많은 소년

  어느 봄날 한 소년이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 소년은 번번이 밤 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바구니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들녘에 나갔다가 종달새에게 정신이 팔려 나물을 캐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들녘에 가니 종달새가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틀전에는 어린 종달새가 한 치쯤 날아오르더니 어제는 두 치를 날아롤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아올랐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나물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화담집 서)

  소년은 봄 들녘의 새끼 종달새가 하루가 다르게 점점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현상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나물 대신 그 이치를 캐기 위하여 고심했다.
그 결과 그의 바구니는 텅 비고 머릿속은 회의로 가득찼다. 나중에 그는 종달새가 가벼운 깃털로 위를 향해 오르는 지기(땅의 기운 봄 아지랑이)에 힘입어 날아오른다고 풀이하였다.

이 탐구심 많은 소년이 훗날 기 철학을 확립하여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화담 서경덕이다.
  화담(1489-1546)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화담의 할아버지는 종9품의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서호번은 부의라는 말단의 관리를 지냈는데 남의 토지를 경작하는 처지였다.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화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모든 사물을 그냥 지나치는 일없이 관찰하고 궁리하였다. 한미한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못하고 거의 독력으로 학문을 이루었으며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빈한하게 살았다.
31세에 조광조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연구와 제자 교육에 힘썼다. 43세 되던 해에 어머니의 간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역시 벼슬하지 않았고 56세에 후를 참봉에 추천되어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호는 복재라 하나 화담에 살았다 하여 화담 선생으로 알려졌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 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 삼절이라고 일컬어진다.

  화담은 중국 송나라의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들의 우주론을 조화시켜 기존 성리학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일원론(일원적 주기론)을 제창하였다.
송도(지금의 개성) 동문 밖 화담위에 조그만 초막을 짓고 혼자 사색하고 연구하며 산천을 벗삼아 살았는데 그 생활의 청정함과 기쁨 그리고 우주의 오묘한 원리를 터득한 감흥을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 끝에 달이 밝게 올라 오고
  비 뒤에 풀이 향기롭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는 것을 보니
  물물이 서로 의지해 있다
  아득한 기미에서 꿰뚫어 얻은 경지에서
  허실에 앉으니 빛이 난다(천기 화담집)

  화담이 태어나던 15세기 말엽의 우리 나라 사상계는 이미 성리학의 수용 단계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정착되던 단계였다. 모든 학자가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를 신봉하였고 성현을 본받고 배우기 위하여 온 힘을 다 쏟아 붓고 있었다.

모든 학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기준을 주자에서 찾았고 성현을 독실히 믿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화담은 같은 시대의 다른 학자들과는 학문하는 태도가 달랐다.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고 맹목적으로 암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학습하는 내용을 실증적인 방법과 합리적 사색을 통하여 이해하려고 하였다.

한 구절이라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에 부딪히면 '선배 학자가 왜 이 곳에 이 내용을 써 전하려 했을까?' 회의하며 그 뜻을 캐고 또 캤다.
  화담의 탐구 정신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무슨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의문스러운 것이 있으면 끝까지 깨달으려 했으며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탐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화담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서당에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이란 책에서 태음력에 관해 해설한 '기삼백편'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이 대목은 나도 배우지 못한 바이고 세상 사람 누구도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하며 설명을 해 주지 못하였다.
화담은 더 물어야 소용없음을 알고 홀로 생각하고 계산해 보았다. 1년의 시간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해서 한 해가 되돌아오는가 그는 보름 동안 침식을 잊고 이 문제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꼭 보름이 되던 날 기어이 그 이치를 깨닫고야 만다.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 방법

  학문을 하는 데는 의양(본받고 따르는 것)의 방법이 있고 자득(스스로 터득하는것)의 방법이 있다.

화담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는 자득법을 자신의 학문 방법으로 삼았다.
  그 시대의 학자들이 따랐던 방법은 의양이었고, 그 대표적인 학자가 퇴계였다.
그들은 지배 이념으로서 권위를 누리던 전통적 견해인 성리학을 옹호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야만 그 권위에 힘입어 자기의 권위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도학을 하던 학자는 누구나 의양을 존중했다. 퇴계는 물론이고 율곡 역시 주자를 따르는 의양을 했다.

퇴계는 스스로 "어리석고 고루하며 소견이 막혀 다만 성현을 독실히 믿을 따름이다"라고 하면서 의양을 학문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성현의
말을 인용하고 풀이하는 것을 논리 전개의 주요한 방법으로 삼았다.
그는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 해도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리 정연하고 체계적인 의양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자득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의양을 주로 한다 해도 자득은 있게 마련이며 그런 차원에서 모두 자득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학자들의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화담이 방법으로 삼은 자득은 훨신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지 않았으며 스스로 터득하여 알았다는 것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학설이 "천고의 의문을 논파하기에 충분하니 잃어버리지 말고 후학에게 전해 중국과 변방에 동방에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화담이 선배 학자들의 학설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 학자들의 학설은 화담에게 문제를 발견하고 사색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화담이 학문의 방법으로 구태여 자득을 고집한 것은 선배 학자들의 학설에 불만스러운 점이 있고 또 완전히 승복할 수 없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배 학자들의 부족한 점이나 잘못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삼은 것이 그들의 학설을 직접 따져 보기보다는 자연의 실상을 직접 탐구해 보는 격물치지였다.
격물치지란 온갖 일과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연구함으로써 점차 지식과 참된 앎을 이루어 자기의 생각을 바로잡아 맑고 곧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화담의 나이 열여덟 살일 때였다. '대학'이라는 유학의 경전을 읽다가 '참된 앎에 도달하는 것은 사물을 직접 탐구해 보는 데 있다'는 글귀를 보았다. 그는 이에 "공부를 함에 있어 먼저 사물을 탐구해 보지 않는다면 독서는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며 그날부터 천지 만물의 이름을 모두 써서 벽에 붙였다.
그리고 매일 그 사물의 이치를 사색하고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다(화담집 권 3)

  이렇듯 화담은 선배 학자들에게 배우기보다는 자연의 실상 그 자체에서 배우는 것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화담은 방법에서만 차이를 보인 것이 아니라 학문의 내용에서도 남달랐다. 당시의 학자들이 인간 사회의 윤리를 확립하는 일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다면 화담이 중심에 두었던 것은 자연이었고 우주였으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물아 일체의 경지였다.

 

격물과 물아 일체

  화담은 일생을 빈한하게 살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세상에 진출하기 위한 명분이 아니었고 심섬을 닦는 수양의 길도 아니었다. 오로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규명하고 스스로 그 질서에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담이 제창한 것이 기 일원론인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이미 조선 사상계에서 정통 이념으로 자리잡은 주리론(이기 이원론)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주기론에서는 경험적 관계의 판단보다는 불변의 이치인 이를 앞세운다. 주리론의 이러한 특성은 "이 일이 있기 전에 그 이가 먼저 있으니 군신이 있기 전에 군신의 이가 있고 부자가 있기 전에 부자의 이가 있다"는 이황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변화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확고한 절대적 진리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변화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군신의 이치가 있어야 군신간의 의리를 주장하고 불의를 배격할 수 있으며 부자의 이치가 있어야 군신간의 의리를 주장하고 불의를 배격할 수 있으며 부자의 이치가 있어야 부자간의 친애를 강조하고 패륜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리론에서 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여러 관계를 통괄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데 기준이 되는 원리를 밝히려는 목적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 반면에 화담은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밝히고 그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물아 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사물을 탐구하는 격물에 학문의 중심을 두게 된다.
객관적 자연물을 하나하나 대상으로 삼아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왜 그렇게 변화하는지 묻고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 화담 철학의 중심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화담이 취했던 태도가 경이었다. 경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사물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선입관을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사물에 마음을 모아야 하며 그렇게 하면 마음이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맑은 거울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담은 문제 해결에 몰두하면 밥먹는 것도 잊고 화장실에 가서 용변 보는 것도 잊을 정도로 대단한 집중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화담의 철학 세계

  화담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시선을 집중한 곳은 자연이었다. 그는 사물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그것들을 자연물이게 하는 보다 큰 자연의 본체 우주의 본체(그는 이를 선천이라 하였다)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었다.
  화담의 제자였던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전한 말에 의하면 화담은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춤을 추어야 할 정도의 감격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흥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꿰뚫어 낸 감격이었다.
  화담이 꿰뚫어 낸 것은 바로 우주 자연의 본질이었고 그것을 해명한 것이 그의 기 철학이다. 기란 우주 만물에 꽉차 있는 알갱이와 같은 기운이고 나아가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기를 에너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화담은 기가 만물의 근원이며 천지간의 만물은 모두 기의 모이고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물질적 실체라고 생각하였다.

우주에 꽉차 있는 이 기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하지만 그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는다. 기가 한데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소멸한다. 이는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로 다시 환원되는 것과 같다.
  기라는 개념은 장자가 먼저 사용한 것인데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삶이란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고 죽음이란 태어남의 시작이지만 누가 그 법칙을 다스리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사람의 태어남은 기의 모임이고 모이면 생겨나고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천하는 하나의 기로 통한다고 한다(장자, 지북유편)

  장자도 화담처럼 우주의 본질은 기이고 이 기가 모이면 만물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소멸하는 것처럼 사람도 기가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기의 운행이 곧 우주의 운행이고 자연의 질서이지만 그 모두가 인간의 인식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자동차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꽃이 피는 소리나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수 없다고 해서 꽃이 피지 않거나 지구가 자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들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주 자연에서 새로운 생명체들이 모체에서 생겨나고 자라나는 과정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져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쉼 없이 생겨나고 자라나며 죽어 간다. 말하자면 우주는 기로 꽉차 있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든 없든 귀로 들을 수 있든 없든 모두가 기로 이루어져 있고 기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담은 우리의 경험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 이전의 기의 상태를 '선천(자연)'이라 하고 우리의 경험 세계에 들어온 가시화한 세계를
'후천(자연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는 볼 수 없는 것까지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천의 세계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새로운 경지를 자득한 그는 자기 학설의 도달점이야말로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자부하였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소리가 없어도 들을 수 있고 냄새가 없어도 접할 수 있다.
옛 성인이 말하지 않은 곳이다(화담집 권 2)

  배우는 자가 진실로 힘써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비로소 옛 성인이 다  전하지 못한 그 은미한 뜻을 꿰뚫어 낸 것이다(화담집 권 2)

 

  기 불멸론:죽어도 죽지 않는 것

  화담은 기는 결코 멸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그것을 촛불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심지가 타들어가 초가 녹으면 초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양을 바꿀 뿐이다.

이처럼 기는 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흩어져 다시 우주의 기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유사한 그의 이 주장을 '일기장존설'이라고 한다.
  초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삶도 우주의 기가 모여 육체와 정신을 이룬 것이고 사람의 죽음은 마음과 몸이 흩어져 우주의 기로 되돌아간 것일 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개체적인 개인'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화담이 주장하는 삶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삶을 뛰어넘어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된 물아 일체의 삶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이란 우주의 기로 환원되는 것일 따름이라는 '사생일여'의 관점에서 "진실로 이러한 이치를 밝게 안다면 장구 치면서 우리 님을 보내오리라" 던 화담은 자신의 죽음도 남다르게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의 생각이 어떠십니까?" 하고 묻자 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다. 지금의 내 마음은 편안할 뿐이다"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세속에 초연한 삶과 정신

  화담의 기 철학은 노장 철학과 많이 닮았고 또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성리학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고 성리학의 격물 치지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다만 다른 특징이 있다면 자득의 방법에 의해 자연의 이치를 보고자 했던 자연 철학이라는 것이다. 종래의 성리학은 사회 윤리적인 학문으로서 인성론과 도의론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화담은 자연에 학문의 중점을 두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색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철학을 자기의 삶 속에서 실현하였다.
  화담은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원리를 알아 그 통찰 안에서 대조화를 이루어 물아 일체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의 삶은 온전히 진리에 바쳐졌다. 그에게는 세상의 부귀 영화나 지위도 다 소용이 없었다.
늘 가난했지만 재물을 모으기 위해 학문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억지와 집착을 버리고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런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나를 잊고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는 경지에 이르니
  마음이 곳에 따라 절로 맑고 따뜻하구나.
  (무제 화담집)

  '나를 잊는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자의식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너'라고 하는 대립 의식을 잊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과 삼라 만상에 대하여 차별심을 갖지 않고 자기의 몸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곳에 따라 맑고 따뜻하듯이 나도 상황에 따라 맑고 따뜻하게 된다"고 한 것인데 이를 유학에서는 시중(때에알맞음)이라고 한다.

 

화담의 철학이 남긴 문제

  화담은 한국 성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성리에는 세 흐름 즉 '하늘과 간격 없는 하나'를 실현하는 세 가지 노선이 있다.
먼저 인간의 내면 수양을 통하여 하늘과 하나(하늘=인간) 되고자 하여 인성론을 중심 논제로 삼아 경 중심의 수양 철학을 정립한 이언적 이황의 노선이 그 하나이다.
이 노선에서는 수양을 강조하고 수양한 후에 실천하자는 논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실천이 약화되는 면을 보인다. 그 반면에 하늘의 이상이 현실 사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천리=인사)는 지치주의의 정치 사상을 정립한 조광조 이이의 입장이 또 한 노선을 이루는데 이 노선에서는 수양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실천하면서 그 과정에서 수양하자는 논리로써 실천을 더욱 강조한다. 이 두 노선이 인간이 가진 사회적 속성을
중심 문제로 삼았다면 세 번째 노선을 택한 남명 조식(1501-1570)과 화담은 인간이 가진 자연적 속성을 문제로 삼았고 자연과 우주를 연구하면서 그 우주(선천과 후천)와 하나(자연, 하늘=인간) 되어 물아 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세 번째 노선은 후대에 녹문 임성주(1711-1788)에게 계승되어 '기 일원론'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화담은 한국 성리학의 한 흐름을 떠맡아 이황, 이이와 더물어 한국 철학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철학은 인간의 사회적 속성보다는 자연적 속성을 중심 논제로 삼는 탓에 사회, 정치 활동에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화담이 평생 벼슬하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화담은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 남긴 '원이기(이기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뜻)'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 네 편의 논문과 그의 삶과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시 부 등의 문학 작품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은 당대의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후대의 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제자인 박순은 훗날 영의정이 되었다.
또 이지함은 '토정비결'을 지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허엽의 아들인 허균은 유명한 '홍길동전'을 지어 당시의 사회 제도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 사상을 내놓았다.
  화담의 가장 돋보이는 점은 자득을 중시하는 주체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자주적인 학문 태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개항 이후 우리의 옛 학문을 버리고 서양학을 주로 하면서 이전에 지녔던 자득의 주체적인 능력을 많이 잃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외국의 학설을 잣대로 삼아야 자기 학문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또 우리에게는 철학도 학문도 없었다는 식의 자기 비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강요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기철학이 공리 공론이라는 선입견은 식민지 교육의 잔재이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화 전반을 낮추어야 했던 데서 비롯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고 민족 허무주의의 한 표현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동안의 노력으로 상당히 바로잡혔으나 철학 사상 분야에서는 아직도 뿌리깊이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담의 주체적이고 용기있는 학문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스스로 깨우쳐 얻는다는 자득의 주체성과 독창성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현실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 필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