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큰비 내린뒤 전남 화순

醉月 2021. 7. 15. 19:29

전남 화순의 소반바위산 아래 꼭꼭 숨어있는 마고할미 폭포. 장마철에 비가 내린 뒤에야 우레 같은 물소리와 함께 이런 웅장한 물줄기를 보여준다. 강원도나 지리산이 아니라 순한 지세의 남도 땅에 이런 폭포가 숨어있다는 게 뜻밖이다. 화순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화순·나주 경계에 마고할미 폭포, 장맛비로 수량 풍부해져

‘운주사 와불 서면 천지개벽’전설… 불사바위서 보는 풍경‘압권’


100t 넘는 고인돌 수십 기 사이로 차 타고 둘러보다

세계최대 규모 ‘핑매바위’ 위에 돌 던져 소원 비는 재미도



큰비가 쏟아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면모를 드러내는 근사한 경관이 전남 화순에 있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다니 지금 같은 장마철에 딱 맞는 여행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도 아는 이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곳. 그렇다면 ‘거리 두기’의 여행지로도 적당하다 싶었지요. 거기다가 화순은 희망과 기원, 혹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겹쳐 있는 땅이기도 합니다. 출구의 불빛이 보이는 듯하다가 감염병의 재창궐로 맥이 탁 풀려있다면 화순, 이곳에서 다시 기운을 얻을 수 있을까요.


# 손바닥만 한 마을의 은밀한 계곡

전남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봉하마을은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마을이다. 화순과 나주의 경계에 있어 마을에는 화순 군내버스도, 나주 시내버스도 드나들지만, 사실 ‘버스가 다닌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하루 운행 차량이 몇 대 안 될 정도로 배차 간격이 긴 데다, 버스를 타면 화순군청에서도, 나주시청에서도 50개가 넘는 정류장을 거쳐야 하니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두 지역의 경계에 있다는 건 이쪽의 중심에서도, 또 저쪽의 중심에서도 멀다는 뜻. 그만큼 오지라는 얘기다.

이 마을 뒷산에는 비가 내리면 비단처럼 걸리는 근사한 폭포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다. 아니, 계곡 입구의 폭포까지 더하면 도합 세 개다. 봉하마을은 광덕산(379m)과 소반바위산(492m) 골짜기 아래 있다. 마을 뒤로 골짜기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차로 들어가면 미륵암이 있다. 암자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찰이 아닌 굿당이다. 굿당은 이른바 ‘기도발이 좋은 곳’에 들어서는 법. 주변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명소가 있는 경우가 많다.

미륵암 앞에서 두 개의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우당탕 합류한다. 암자 맞은편 계곡에 폭포가 하나 걸렸다. 물줄기가 이리저리 꺾여서 쏟아지는데, 장맛비가 내린 직후라 물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적요한 미륵암을 혼자 지키고 있던 이에게 폭포 이름을 물었더니, “저게 무슨 폭포냐”는 답이 돌아왔다. 좀 여위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폭포 높이가 제법 돼 보였는데, 이 정도는 폭포 축에도 끼워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물길 위에 놓인 나무다리 건너편 숲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올라가면 진짜 폭포 세 개가 있다”며 “이틀 전에 장맛비가 내렸으니 아직까지는 제법 볼만 할 것”이라고 했다.


# 비 오면 쏟아지는 두 개의 폭포

이건 산행이랄 것도 없다. 미륵암에서 물길을 끼고 오르니 금세 요란한 물소리로 폭포가 가까이 있음이 느껴졌다. 수락폭포다. 거대한 역암의 바위벼랑을 따라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80도쯤 되는 경사를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온통 포말을 이뤄 마치 흰 비단을 걸쳐놓은 듯했다. 수락폭포 주변은 무성한 나무들로 가득해 가까이 다가가 위를 올려다봐야 폭포의 전모를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압도하는 느낌이 더 강했다. 폭포 아래는 짙고 축축한 원시림의 숲 그늘이었다. 염천의 더위에도 쏟아지는 물줄기가 밀어내는 바람은 서늘했다.

수락폭포 못미처에 다른 폭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수락폭포에서 평탄한 숲길을 걸어 300m만 더 가면 만나는 ‘마귀할멈 폭포’다. 이정표에 ‘마귀할멈’과 ‘마고할미’가 혼재돼 있는 데다 이정표의 방향이나 거리표시가 제각각이어서 자칫 두 개의 폭포로 착각하기 쉽지만 같은 폭포다. 마귀할멈과 마고할미가 동일인인 셈이다. 둘 중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한다면 단연 ‘마고할미’ 쪽 손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화순 운주사에도, 화순 고인돌을 대표하는 핑매바위에도 마고할미 전설이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전설 얘기는 뒤에서 다시. ‘마귀할멈’이라면 어쩐지 서양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어색한 이름이지 않은가.

마고할미 폭포 아래 물길에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다리 위에서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내려다볼 수 있다. 우레와 같은 물소리로 쏟아지는 폭포는, ‘할미’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힘이 넘친다. 폭포 위쪽에는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피워올린 물안개가 흘러다녔다. 비 올 때만 볼 수 있는 경관이라지만, 이런 풍경이 설악산이나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가 아니라, 화순의 순한 산자락에 감쪽같이 숨어있다는 게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마고할미 폭포를 지나 화학산 방향으로 더 가면 물줄기가 치마폭처럼 펼쳐지는 근사한 폭포가 하나 더 있다고 했는데, 그건 찾지 못했다. 원시림의 숲이 깊었다. 아기자기한 세 개의 폭포와 그 폭포로 가는 숲길의 서늘함과 청량함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왼쪽 사진은 화순 고인돌유적. 고인돌 군락 사이로 4㎞ 남짓 이어진 길을 차로 달리며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관람할 수 있다. 오른쪽 위 사진은 운주사 불사바위에 올라 절집을 굽어보는 모습. 오른쪽 아래는 세계 최대 크기 고인돌이라는 핑매바위.



# ‘스님 마트’가 있던 마을… 중장터

봉하마을에서 멀지 않은 도암면 용강리에는 ‘중장터’가 있다. 중장이란 ‘중(僧)을 상대로 열리는 장(場·시장)’. 요즘으로 친다면 ‘스님 마트’가 있었던 곳이다. 중장터는 말 그대로 중이 장을 벌이고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다. 중이라고 사고파는 데 별다른 혜택이 있던 건 아니었고, 신분증을 검사하거나 뭐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일반인들도 함께 장을 이용했다. 그러니 중장터는 한때 번성했던 상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장은 딱 두 곳밖에 없었다. 영남에는 상주, 호남에서는 나주. 당시만 해도 번듯한 대도시 나주에 서던 중장이 조선 시대에 여기 화순의 시골구석으로 옮겨왔다. 조선의 억불 정책 때문이었다. 스님의 지위가 백정이나 노비와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추락하면서 관의 횡포가 기승을 부리고 건달까지 업신여기며 시비를 걸자 아예 장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중장이 열린 화순 도암은 인근의 절집에서 두루 찾아오기 좋은 자리다. 도암은 화순과 나주의 경계이기도 하고, 영암이나 장흥과도 가깝다. 주변의 절집만 헤아려도 숨이 차다. 운주사, 불회사, 보림사, 쌍봉사, 개천사, 죽림사, 다보사…. 이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내로라하는 큰 절에서도 중장을 보러 왔다. 어디서 출발하든 관가를 만나지 않는 외곽 길을 택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중장터는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는 비밀스러운 경유지이기도 했다. 훗날 갑오 농민전쟁에서는 농민군이 이 길을 걸었고, 좌우대립의 시기에는 빨치산이 이 길을 탔다.


# 마음으로 보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

중장은 한 달에 한 번, 매달 보름날에 열렸다. 흩어진 실타래 같은 산길을 오래 걸어와서 장을 본 뒤에 그날로 다시 걸어 절로 돌아가야 하는 스님의 밤길을 밝히려면 달이 밝은 때를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달력을 볼 필요도 없이 차오르는 달을 보고 장날을 가늠했으리라. 중장의 거래방식은 대개 물물교환이었는데, 절마다 특산품이 있었다. 쌍계사에서는 차를, 화엄사에서는 목탁과 발우, 목기를 가져왔고, 내장사에서는 백지, 창호지, 닥종이를 가져왔다. 또 대흥사에서는 유기, 무위사에서는 자기, 송광사에서는 염주나 법상을 가져다 장에 내놨다.

중장은 이제 서지 않는다. 지금 누가 산길을 걸어서 중장에 올 것인가. 세상이 달라지면서 중장은 진즉 파장했다. 중장이 사라진 뒤 1980년 초반까지 5일 장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다 그나마도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중장이 서던 마을에는 지금 ‘도암 중앙교회’가 있다. ‘중장터’는 버스정류장이나 방앗간, 농기구상의 상호로만 겨우 남았다. 그저 슬레이트와 함석판으로 덧댄 누추하기 짝이 없는 집들이 줄 맞춰 늘어선 모습에서 오래전에 북적였을 장터와 좌판의 모습이 마음으로만 그려질 뿐이다.

용강리에는 한창때 전교생이 400명도 넘었다는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도 있고, 한데 모아 줄지어 세워둔 열녀비와 효자비도 있으며, 1933년에 서른다섯 명 주민들이 시작해 여태 이어오고 있다는 마을 계를 기리는 공적비도 있다. 마을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지나간 것’들이다. 쇠락해가는 시간의 흔적은 눈으로는 남루할 따름이지만, 마음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로소 보인다. 번성하던 때의 중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폐교된 해에 졸업생이 딱 두 명뿐이었던 용강분교에 402명이 다니던 시절의 학교 운동장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 천불천탑… 아직도 살아있는 꿈

▲ 화순 쌍봉사의 주 불전인 대웅전. 1984년 불이 나 전소된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안정적인 비례와 날아갈 듯한 상승감이 돋보인다.


중장터에서 가장 가까운 절집이 운주사다. 일어서지 못한 와불과 끝내 꺾이고 만 개혁의 꿈이 있는 곳. 운주사는 화순에서 가장 이름난 명소이니 건너뛸 수는 없다. 1000개의 탑이 세워지고 와불이 일어서는 날 천지개벽이 온다는 천불천탑의 전설이 전해지는 절집. 탑은 다 세워지지 않았으므로 운주사의 와불은 여태 누워 있다.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못생기고 비례도 맞지 않는 운주사의 불상에서는 서툰 솜씨로나마 정성을 다해 구원을 기다렸던 보통사람들의 간절했던 염원이 읽힌다.

길고 어두운 터널은 희망으로 건너는 법. 운주사의 와불이 일어서지 않은 건 어쩌면 다행이지 않은가. 실현된 희망은 더 이상 꿈이 아니고, 와불이 일어서서 희망이 실현되는 순간 꿈은 사라져버릴 것이므로…. 그러므로 운주사의 희망은 아직 살아있다. 지금처럼 뒤숭숭한 시절에 운주사에 가게 되거든 마음을 다해 깎아 세운 불탑과 불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품은 희망 하나를 포개 놓고 와도 좋겠다. 그러기에 딱 맞는 자리가 미륵전 뒤편의 ‘불사바위’다. 죽지 않는 ‘불사(不死)’가 아니라, 사찰을 짓거나 고치는 걸 뜻하는 ‘불사(佛事)’다. 이 바위 위에서 도선국사가 운주사 창건을 지휘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의 풍광과 인문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절묘한 자리. 그다지 높지 않은데도 불사바위 위에 올라앉으면 운주사는 물론이고,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운주사를 들고나는 길에 화순 군립 ‘천불천탑 사진문화관’이 있다. 애초에 박물관을 생각하고 지은 것인데, 다 짓고 보니 ‘가져다 놓을 것’이 없어서 2년을 비워뒀다가 2017년에 사진문화관으로 문을 연 곳이다. 전시관에서는 명예관장이기도 한 오상조 작가의 ‘돌의 형상’ 전이 열리고 있다. 30년 동안 광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한 오 작가는 평생 운주사와 불상, 고인돌, 당산나무 등이 가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흑백사진에 담아왔다. 전시에 걸린 노(老)대가의 흑백사진에서는 생생한 질감이 느껴진다.


# 조광조의 개혁과 양팽손의 의리

유교적 이상 정치를 꿈꾸며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기묘사화에 휘말려 서른여덟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조광조. 그가 유배되고 끝내 죽임을 당한 곳이 전남 화순 능주 땅이다.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는 조광조가 죽은 뒤 148년이 지나서 세운 비각과 유배생활을 했던 초가가 복원돼 있고, 강당인 애우당과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이 세워져 있다. 이름하여 ‘조광조 적려유허지’다. 화순에 간다면 들러봐야 할, 개혁을 꿈꾸다 좌절한 선비의 억울한 죽음의 자취다.

조광조가 유배 중 교유한 친구는 학포 양팽손이 유일했다. 양팽손 역시 기묘사화로 고향 화순에 낙향한 처지. 양팽손은 유배 중인 친구 조광조의 뒷바라지를 기꺼이 했다. 손톱만 한 연고도 없는 능주 땅에서 차가운 주검이 된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것도 양팽손이었다. 시신을 거뒀다가 자칫 화를 입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손수 시신을 염습한 뒤 이튿날 아들을 시켜서 중조산 아래 골짜기에 묻도록 했다. 시신을 거둔 사실이 발각되면 자칫 죽임을 당할 수 있어 대를 이을 맏아들 말고, 둘째 아들을 데려갔다던가. 죽음을 무릅쓴 의리. 학포 양팽손의 이름이 조광조의 이름보다 더 깊게 화순 땅 곳곳에 새겨지고 기려지는 연유다.

화순에는 양팽손이 조광조와 교유할 당시 머물렀던 고택 학포당이 있고, 조광조와 양팽손을 함께 모신 죽수서원이 있으며, 양팽손의 부조묘(不조廟)도 있다. 부조묘란 불천위(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어 신주를 꺼내지 않고 계속 기제사를 지내도록 허락받은 이)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이양면 증리의 서원터마을의 허름한 창고 아래 양팽손이 처음 조광조를 묻었던 자리에는 면암 최익현의 친필로 새긴 추모 비석이 있다.


# 이건 꼭 보고 와야지… 부도와 고인돌


서원터마을 근처에는 삼층목탑 형식의 대웅전이 인상적인 절집 쌍봉사가 있다. 쌍봉사에는 1200년 전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문양을 새긴 철감선사 부도가 있다. 그것만큼은 꼭 보고 오시길…. 단단한 돌을 마치 비누 조각하듯 섬세하게 깎아낸 솜씨 앞에서 탄성을 금할 수 없다. 더불어 지석강변에 그림처럼 서 있는 정자 송석정에도 다녀올 것을 권한다. 양팽손의 증손자 양인용이 낙향해 지은 정자인데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자가 앉은 자리도, 소나무와 어우러지는 경관도, 단정한 정자의 풍모도 모두 훌륭하다.

‘꼭 들러야 할 곳의 목록’을 쓴다면 ‘화순 고인돌유적’도 빼놓을 수 없다. 염천의 땡볕 아래서 고인돌 구경이 고역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 이곳의 고인돌 유적은 차 안에서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마치 동물원에서 사파리하듯 말이다. 고인돌 유적에는 100t 이상의 고인돌이 수십 기에 달하는데 그걸 보는 재미가 제법이다.

그중 눈길이 가는 것이 290t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 ‘핑매바위’다. 마고할미가 운주사를 짓기 위해 행주치마에 담아가다가 떨어뜨린 돌이라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핑매’는 ‘(돌)팔매’라는 뜻. 돌을 던져 핑매바위에 얹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위 위에 돌이 소복하다. 그중에는 창궐하고 있는 감염병이 사라지기를. 그래서 모두들 무고하기를 바라는 소망도 얹혀있으리라.


■ 김삿갓, 화순에서 죽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 ‘김삿갓 종명지’가 있다. 종명지(終命地). 글자 그대로 ‘목숨을 다한 땅’이니, 그가 죽은 자리를 말한다. 전국을 방랑하던 김삿갓은 화순의 경관에 반해 세 번이나 찾아와서 머물렀다. 첫 번째 화순 방문에서 적벽을 보고 한눈에 반한 그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화순을 다시 찾아와 압해 정씨 집안에서 내어준 방에서 기거했다. 그는 전국을 떠돌면서도 화순에서 도합 15년을 살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머물던 집이 구암리에 복원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