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켜켜이 새겨진 이야기가 있는곳...전북 익산

醉月 2021. 12. 3. 21:31
가을빛으로 물든 아가페 정원. 50년 전, 은퇴한 뒤에 노숙자를 보살피던 한 신부가 길러서 팔면 보탬이 될까 싶어 손수 심은 나무들이 이렇듯 거대한 숲이 됐다. 울타리처럼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전북 익산은 호남의 관문이자 호남고속선, 일반선, 전라선 등 5개 철도 노선이 지나는 명실상부한 철도교통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여행 목적지로는 존재감이 덜합니다. 미륵사지나 왕궁리유적 등 백제유적이 있긴 하지만, 백제의 대표 도시라 할 수 있는 공주나 부여에 밀려, 익산은 그동안 제대로 눈길 한번 받지 못했지요.

익산이 보여주고자 하는 건 ‘백제 무왕의 천도(遷都)의 꿈’입니다만, 고심 끝에 그 얘기는 여기서 빼기로 했습니다. 익산에는 백제 말고도 곳곳에 켜켜이 새겨진 이야기가 가득해서 그렇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가 어찌나 많은지 여기에 다 하지 못했습니다. 장르가 저마다 다른 뜻밖의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다 완결구조를 가졌습니다. 익산 여행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촘촘하게 기워낸 옴니버스 영화를 보듯 다녀올 수 있는 이유입니다.


# 솜리가 이리로, 이리는 익산이 되다

익산시는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면서 만들어졌다. 통합 당시 이리시 인구는 20만 명으로, 익산군의 두 배가 넘었다. 이리시민 89%가 통합에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로 통합 여론도 압도적이었다. 그런데도 통합시 지명은 ‘이리시’가 아닌 ‘익산시’가 됐다. 인구가 절반밖에 안 되는 익산군이, 번성했던 도시 이리시를 삼켜버린 셈이었다.

이리(裡里)는 ‘속 이(裡)’ 자에 ‘마을 리(里)’ 자를 쓴다. 본디 ‘솜리’란 순우리말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었다. 우리 옛말에 속(內)을 ‘솝’이라고 했는데, 속 또는 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솝리’라고 불리다가 솜리가 됐다. 그걸 일제가 행정구역개편을 하면서 뜻을 풀어 억지로 한자로 옮겨 적은 지명이 이리다.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익산의 원래 이름은 솜리다. 솜리, 동그랗게 입술을 모아 발음하는 고운 이름이다.

통합시가 이리가 아닌 익산의 이름을 갖게 된 건 이리가 본래 익산군에 속한 하나의 리(里)와 읍(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란 지명이 일제에 의해 제멋대로 붙여진 것이었으니 통합시의 명칭에 그걸 가져다 쓸 수가 없었으리라. 게다가 이리란 지명이 1977년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를 연상케 한다는 고려도 분명 있었겠다.

통합 익산시 출범과 함께 이리란 지명은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익산에서 조금만 과거를 뒤적이면 곳곳에서 이리의 기억과 맞닥뜨리게 된다. 26년 전에 지도에서 지워졌지만, 익산에는 ‘이리’ 간판을 떼지 않은 곳이 하나둘이 아니다. 익산에는 이리중앙교회가 있고, 이리중학교가 있으며, 이리새마을금고와 이리자동차공업사가 있다. 학교와 관공서뿐만 아니다. 맥줏집도, 카페도, 삼겹살집도, 족발집도 여전히 ‘이리’ 간판을 달고 있다.

하나의 도시를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이름으로 추억한다는 건 생소한 경험이다. 이리와 익산으로 기억이 분절된 도시를 살피다 보면, 이리가 마치 오래전에 멸망한 도시처럼 느껴진다. 익산의 근대 혹은 과거를 찾아가는 여정이, 마치 유적 발굴처럼 흥미진진한 이유다. 과거의 익산을, 아니 이리를 여행하는 건, 유년시절 다락방에 두고 아득히 잊고 지냈던 오래된 물건을, 어른이 돼서 꺼내 보는 느낌과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옛 당본백화점 건물. 지금은 커피숍으로 운영하고 있다.



# 이리역 폭발, 그리고 추억의 공간

익산의 과거, 그러니까 이리에 대해 말하자면 이리역 폭발사고를 얘기하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자그마치 30t이 넘는 화약을 싣고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열차가 이리역 구내 철로 대기 도중 폭발했다. 화약을 가득 실은 열차의 신참 호송원이 술에 취해 화차 안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이 들었다가 불이 화약 상자에 옮아붙으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세 번의 거대한 폭발 이후에 역 주변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됐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그때까지 발생했던 사고 중 최대의 폭발사고였다. 이날 참사로 59명이 죽고, 1343명이 다쳤다. 완파된 건물이 811동이었고 반파된 건물이 780동이었다. 크고 작은 피해를 본 건물까지 다 합치면 6000여 동이나 됐다. 이재민 수는 1674세대, 7873명에 달했다. 한국 현대사에 각종 폭발이나 붕괴, 화재 등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가 좀 잦았던가.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고 규모가 작아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는 6·25전쟁 때 말고는 폭발사고로 10명 이상 사망자를 낸 사고가 없었을 때이니 말 그대로 ‘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쑥대밭이 됐던 역 맞은편 중앙동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가장 번화했다’는 뜻으로 ‘영정(榮町·사카에마치)’이라 불렸다. 영정의 지금 지명은 중앙동이지만, 신도심 개발로 익산의 중심이 영등동 일대로 빠져나가면서 ‘중앙’ 역할을 잃은 지는 이미 20년이 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업과 금융, 문화의 중심지였고 호남권 최대의 상권을 이루며 황홀했던 전성기를 보냈던 중앙동 일대는, 진작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스러져가던 거리가 이즈음 ‘문화의 거리’로 옷을 갈아입고 도심재생사업을 통해 식민지 근대 혹은 압축성장의 시기를 추억하는 역사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 시절의 옛 얘기를 중앙동의 중국집 ‘야래향’의 화교 출신 주인에게 들어보자.


익산 남부시장 인근 인화동의 명금다방 건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다.



# 삼산의원, 당본백화점… 근현대 이야기

‘문화의 거리’ 중심인 중앙동에는 근대와 옛 이리를 기억하는 근현대사 공간이 즐비하다. 중앙동의 중심 건물이라면 단연 1922년 개원한 삼산의원 건물에 들어선 익산근대역사관이다. 의원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건축물 입면이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르네상스양식과 고딕양식을 뒤섞어놓은 건물에서는 어쩐지 성당 건축의 느낌도 물씬 풍긴다.

광복 후 삼산의원 건물에는 한국무진회사, 한국흥업은행, 국민은행 등이 입주하기도 했다. 건물은 낡아지면서 비워졌고, 결국 택지개발로 건물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익산시가 매입해 2019년 통째로 건물을 뜯어다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 익산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관에는 호남선 개통부터 지금까지 익산의 100년 역사를 담아뒀다.

거리 전체의 중심이 삼산의원이라면 상점가 중심은 당본백화점이다. 1928년 일본인이 문을 연 당본백화점은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다. 국회 당사, 양재학원을 거쳐서 지금은 향긋한 커피를 내는 카페가 됐다. 카페 안에는 커피숍 리모델링을 하기 위한 철거 과정에서 발견한 건축 당시의 실내 목조트러스구조 천장과 전선을 옛 모습 그대로 보전해뒀다.

중앙동에는 쇠락해 가면서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낡은 가게가 곳곳에 있다. 중국집 ‘야래향’도 그중 하나다. “옛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야래향의 주인 겸 주방장 유비택(74) 씨는 이리역 폭발사고 얘기부터 꺼냈다. 폭발사고가 있었던 44년 전 그날, 그 시간에 한국 대 이란 축구대표팀의 올림픽 예선전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폭발로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서 지붕에 올라갔는데 커다란 트럭 바퀴가 날아와 지붕에 아슬아슬 얹혀 있었어요. 그게 무너진 지붕 아래로 떨어졌으면, 그 아래 방에서 잠자던 4남매는 죽은 목숨이었지요.”


야래향의 주인 겸 주방장 유비택 씨.



# 80년 된 중국집서 듣는 하모니카 연주

폭발사고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유 씨는 익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만 국적의 화교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국 산둥(山東)성 자오둥(膠東) 출신 아버지가 익산으로 건너와 처음 터를 잡았다. 자오둥이란 자오저우(膠州)의 동쪽 지방을 일컫는 말로, 칭다오(靑島)를 중심으로 한 주변 도시를 말한다. 자오둥 중에서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곳이 지금의 옌타이(煙臺)인데, 유 씨의 아버지가 옌타이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3년 가뭄 끝의 대흉년으로 기근이 계속되자 통통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와서 익산에서 중국집을 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유 씨는 도합 80년 넘게 중국음식점을 하고 있다. 아버지가 운영할 때는 ‘대만식당’이란 상호였는데, 장소를 옮기면서 ‘신의반점’이 됐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서는 ‘야래향’으로 간판을 달았다. 대표 메뉴는 된장 짜장면. 다른 지역의 중국집처럼 캐러멜을 섞은 춘장을 쓰지 않고, 중국 된장을 직접 담그고 항아리에서 숙성해 그걸로 면을 노랗게 비벼내는데 짭짤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진다.

유 씨는 짜장면과 함께 자신 있는 메뉴로 ‘난자완스’를 꼽았는데, 사실 그가 더 자신 있어 하는 건 하모니카 연주다. 양파를 썰던 그가 가죽 가방을 꺼내 보여줬는데 그 안에 크고 작은 하모니카가 여덟 개나 있다. 그가 하모니카 하나를 꺼내 ‘야래향’을 애절한 곡조로 연주했다. 하모니카뿐만 아니다. 해금 비슷한 얼후(二胡), 태평소를 닮은 후르쓰(葫蘆絲), 그리고 색소폰까지 못 만지는 악기가 없다. 바쁘지 않을 때 청하면 손님에게도 기꺼이 솜씨를 보여준다.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민자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대만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뿌리 뽑힌 삶이지만 음악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같은 처지의 화교들과 만나서 쓰는 말도 한국어 반, 중국어 반이다. 허름한 중국집에서 짭짤한 정통 중국 짜장면 한 그릇을 앞에 놓고서 유 씨의 구슬픈 하모니카 연주를 듣노라니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쯤, 더 멀게는 개항시대쯤으로 돌아간 듯했다.


촘촘하게 줄지어 3열로 심어진 아가페 정원의 메타세쿼이아 나무.



# 엄동설한에 피어난 난초 이야기

익산 여산면에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그를 잘 모른대도 그가 지은 시조에 곡을 붙인 동요 ‘별’을 들어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리라.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서산 머리의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이병기 시조 ‘별’ 중에서’.

그는 노래 위주, 그러니까 창(唱)이었던 시조를 현대시조로 바꾼 인물이다. 본디 시조는 짧은 노래라고 해서 ‘단가(短歌)’라거나, 가곡으로 부르는 사설이라 해서 ‘가곡창사(歌曲唱詞)’라 불렀다. 그런데 그는 창곡을 빼고 운율만 살려 시조를 지었다. 그로 인해 시조가 입고 있던 고색창연한 격식을 벗어버린 셈이었다.

그의 생가는 대숲을 병풍처럼 두른 자리에다 여러 채의 초가를 지어놓았는데, 초가로 지은 생가는 그가 남긴 시조처럼 단아하기 이를 데 없다. 정갈하게 꾸민 집에서는 애지중지 난초를 기르던 집주인의 성품이 묻어나는 듯하다. 기념관에는 가람과 관련된 갖가지 자료와 이야기를 잘 정리해 전시해 놓았다. 기념관에서는 열아홉 살 때인 1909년부터 일흔일곱 살 되던 해인 1966년까지 자그마치 58년 동안 써온 일기와 함께 시조와 산문, 편지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다.

뜻밖에 거기서 알게 된 건 그가 요즘 말로 하면 ‘교가 작사의 끝판왕’쯤이었다는 것. 시조의 운율이 노래 가사에 적합하기 때문이었을까. 생전에 그에게는 교가(校歌) 의뢰가 끊이질 않았다. 그의 손끝에서 나온 교가 가사가 하나둘이 아니다. 재직했던 서울대, 전북대의 교가는 물론이고, 국민대와 경복고, 경기고, 아산고, 부산상고, 천안제일고 등 자그마치 31개 각급 학교의 교가 가사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기념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그의 글이 아니라 시인 정지용이 소설가 이태준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쓴 때는 1936년 1월 20일. 구정(1월 24일)을 며칠 앞두고 정지용은 이태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가람 선생께서 난초를 뵈여(보여) 주시겠다고 22일 오후 5시에 그 댁으로 형을 오시게 좀 알려드리라 하십니다. 그날 그시에 모든 일 제쳐놓고 오시오. 청향복욱(淸香馥郁)한 망년회가 될 듯하니 즐겁지 않으리까.”

설날을 이틀 앞두고 영하 20도의 엄동설한에 꽃이 피었으니 그걸 함께 보자고 가람이 후배들을 부른 것이었다. 망년회에서 정지용과 이태준은 크고 작은 수십 개의 화분 중 가장 어린 난에서 피어난 세 송이의 꽃을, 옷깃을 잘 여미고서 보았다. 겨울의 한복판에 핀 그 꽃의 향기는 어땠을까.


# 아가페 정원에 새겨진 이야기

▲ 박영옥 아가페 이사장.


근래 알려진 익산의 내로라하는 명소는 ‘아가페 정원’이다. 아가페 정양원에 딸린 잘 가꿔진 넓은 정원은 1985년에 세상을 뜬 고 서정수 신부가 1970년대 노숙인을 거둬 공동생활을 하던 곳이다.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해오다 은퇴한 신부는, 노숙 노인들을 위한 무료양로시설 만들기를 꿈꿨다. 양로시설 지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고, 그렇게 심은 나무가 50년 넘게 아름드리로 자라서 아가페 정원의 숲과 정원을 이뤘다.

아가페 정원은 수목의 배치나 조성의 형태가 다른 정원과 전혀 다르다. 나무가 조화롭게 섞여 있지 않고, 수종끼리 군집을 이뤄서 자란다. 향나무는 향나무대로, 만지송은 만지송대로, 벚나무는 벚나무대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구획에 따라 묘목으로 심은 것이어서 그렇다. 마치 묘목을 길러 파는 양묘 농원의 느낌이다. 전체적인 조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심은 것이지만, 그렇게 50년을 빽빽하게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니 그 느낌이 독특하다. 의도치는 않았으되, 가난했던 노 신부가 따뜻한 마음으로 심은 나무가 근사한 정원이 된 것이다.

처음 나무를 심은 건 서 신부였지만, 정원과 양로원을 가꾸고 다듬어 서 신부의 유지를 완성한 건 신부의 제자 격이라 할 수 있는 박영옥(93) 아가페 이사장이다. 대학 재학 중 6·25전쟁 와중에 군종신부로 서울에 와있던 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북 무주에 부임한 서 신부가 문맹자를 위한 한글 교육을 하면서 서울에서 교사로 일하던 박 이사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박 이사장이 그 전갈을 받고 기꺼이 내려가면서 인연은 이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박 이사장은 서 신부를 신앙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아가페 정원의 거대한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숲길과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단풍나무, 은행나무 산책길, 단정하게 꾸며진 포멀 가든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지켜져 온 숲이다. 그러므로 아가페 정원에서는 나무나 정원만 보지 말고, 가난했던 한 신부의 이타적인 삶을 생각해볼 일이다. 더불어 수녀가 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부의 못다 이룬 꿈에 바친 한 사람의 평생도 그 숲을 거닐며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 기차 타면 파격할인

익산시와 코레일은 익산을 여행하는 다양한 철도연계상품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철도 렌터카 연계상품이다. 왕복 열차와 렌터카 이용료를 포함해 최저 6만5600원부터 시작한다. 왕복 열차비 10~60%와 렌터카 이용료 50%를 할인 적용한 가격이다. 익산시 관광지 2곳 방문을 인증하는 사진과 익산시내 식당 이용 영수증을 제시하면 렌터카 1대당 요금을 24시간 기준 8만5000원에서 4만 원으로 할인받아 이용할 수 있는 상품도 있고, 왕복 열차와 익산 관광택시 3시간 이용을 묶은 관광택시 상품(7만8000원부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