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을 대표하는 3대 주상절리 중의 하나인 광석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규봉암. 광석대 돌기둥은 무등산의 다른 주상절리 서석대나 입석대보다 훨씬 더 두껍고 웅장하다. |
특별한 노선 번호 ‘228 - 419 - 518번’
모두 민주화 운동 기념일…‘광주 정신’ 상징
‘아픈 역사’ 도청 자리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45개 총탄자국 발견된 ‘전일빌딩245’도 명소
증심사~장불재~규봉암 코스 색다른 풍경
증심사는 계절마다 화려한 색감 뽐내
허백련 기리는 의재미술관 ‘문향…’展 한창
민속품 가득 ‘비움박물관’선 순백의 즐거움
광역시는 도시 규모 때문에라도 한 번의 여행으로 다 보기가 쉽지 않다. 대도시 여행이 다른 중소도시를 여행하는 방법과 달라야 하는 이유다. 광주를 제대로 보겠다면, 여행의 중심은 단연 ‘동구’다. 무등산도, 증심사도, 서울로 치면 종로나 명동 격인 금남로와 충장로도 동구에 있다. 5·18 때 저항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던 옛 도청 자리도, 그 자리에 들어선 국립아시아문화전당도 모두 동구다. 구도심이 쇠락하면서 인구가 줄고 경제의 중심 자리도 위협받고 있긴 하지만, 광주 동구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광주의 중심이다. 광주의 각 구청장 의전 순서가 아직도 동구가 맨 앞이고 이어 서구, 남구, 북구의 순서다. 다음은 Culture & Life가 권하는 광주의 중심, 그러니까 광주 동구로 떠나는 여정이다.
# 광주 시내버스와 무등산
광주에는 시내버스 노선번호를 부여하는 법칙이 있다. 시외출발 편에 1번, 공영노선에 2번이 붙고, 그 뒤로 노선 일련번호, 출발지점 구(區)의 고유번호 등을 조합하는 식이다. 그런데 광주에 이런 부여법칙을 따르지 않는 시내버스 노선 번호가 딱 4개 있다. 그중 하나가 1187번 버스다. 1187번은 무등산 천왕봉의 해발고도 1187m에서 따온 ‘특별번호’다. 이 노선 버스는 광천동에서 광주역, 금남로를 거쳐 무등산국립공원 원효사까지 다닌다. 산 높이가 버스의 특별 번호가 될 만큼 무등산은 광주시민들에게 각별하다.
말이 나온 김에 특별번호 얘기를 더 해보자. 광주의 특별번호 노선버스는 1187번 말고도 3개가 더 있다. 228번, 419번, 518번이다. 눈치챘겠지만, 노선번호는 각각 2·28 민주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을 의미한다.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숫자다. 4개의 노선버스 번호 모두 광주를 지탱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9와 5·18은 그렇다 치고, 대구에서 벌어진 학생의거인 2·28민주운동이 왜 광주에서 버스 노선 번호가 됐을까. 광주와 대구는 영호남 상생을 위해 이른바 ‘달빛동맹’을 맺었다. 동맹을 기념해 광주에는 228번 버스를 운행하고 대구에는 기왕의 버스 518번에다 5·18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이것이 광주에 228번 버스가, 대구에는 518번 버스가 운행하게 된 사연이다. 노선번호 얘기를 꺼낸 건, 무등산의 각별함을 말하려던 것이었으니 버스 얘기는 이쯤 해두자.
광주의 중심은 무등산이다. 광주와 무등산은 물리적인 거리도 가깝지만, 그보다 정서적 거리가 훨씬 더 가깝다.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말하자면 ‘동네 뒷산’ 격이다. 홀로 우뚝 솟은 해발 1000m가 훨씬 넘는 산의 덩치를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비유지만, 광주사람들에게 무등산은 학창시절 단골 소풍장소로 익숙하고, 친근한 산이란 의미다.
# 규봉암에 가야 하는 이유
▲ 국내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조성룡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등산 증심사 아래 의재미술관. 지하 전시장 위쪽으로 자연을 끌어들이는 통유리창이 보인다. |
무등산은 산세가 유순해서 등산이 쉬운 편이다. 급한 경사도 많지 않고, 거친 길도 없다. 무등산은 너른 품으로 산중에 들어선 이들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무등산 탐방코스는 여럿이지만, 증심사 입구에서 새인봉과 서인봉을 거치고 장불재를 통해 서석대로 오르는 게 ‘표준’이다. 표준 코스를 택하면 3시간 30분쯤 소요된다.
산 중턱까지만 다녀오는 1시간 30분짜리 짧은 탐방 코스도 있고, 옛길의 자취를 따라 산허리를 걷는, 족히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장거리 코스도 있지만 산꾼이 아닌 여행자들에게 추천하는 건 표준코스다. 좀 더 욕심을 내면 증심사에서 출발해 장불재까지 가서 서석대 대신, 절집 규봉암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를 권한다. 규봉암은 서석대보다 거리는 멀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에 경사가 거의 없어 길은 더 편하다.
서석대 대신 규봉암을 권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병풍처럼 펼쳐진 주상절리와 그 아래 절집이 어우러지는 경치 때문이다. 지금이야 발길이 뜸하지만, 옛사람들은 규봉암 일대를 무등산 최고의 경관으로 쳤다.
조선 후기 학자 김창흡이 규봉암 일대를 다녀간 뒤 남긴 시의 한 구절을 꺼내 읽어보자. “바둑 두는 신선의 자취 가까이 본 듯하여/ 가부좌하고 앉아 돌아갈 마음 잊었네.” 내로라하는 명승마다 자취를 남겼고, 설악산에 암자를 짓고 은거했으니 세상의 경치는 다 보았을 그도, 규봉암의 기이한 경관 앞에서 못내 돌아서기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기대승도 규봉암의 주상절리를 보고 감동해 ‘우두커니 서서 탄식을 했다’는 글을 남겼다. 그 이전에 고려 때의 문인 김극기가 쓴 “돌 모양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산 형세는 옥을 깎아 이룬 것 같다”는 시문도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 허백련의 그림에서 인연을 보다
무등산 산행의 출발지점인 증심사는 명성에 비해 좀 실망스럽다. 내로라하는 남도의 대찰에 비하면 어림없는 규모도 그렇고, 절집의 고색창연한 묵은 맛도 덜하다. 천년고찰이라지만 제 것이 거의 없다. 철불도, 석불도, 석탑도 다 인근의 폐사지에서 가져다 놓은 것들이다.
증심사를 창건한 철감선사 도윤의 흔적도 여기가 아니라, 화순 쌍봉사의 걸작 중에 걸작인 철감선사 부도 탑으로 더 뚜렷하게 남아있다.
증심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무등산의 계절이다. 옮겨가는 계절의 색감이 여기 증심사에서 가장 화려하다. 지난 주 증심사에서 올해 가장 고운 단풍색을 만났는데, 그것도 이제는 한발 늦었다.
무등산 아래서 지금 가봐야 할 곳은 증심사보다 증심사 턱밑에 있는 의재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하나만으로도, 당장 광주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의재미술관은 남종문인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을 기리기 위해 20년 전에 지은 미술관. 1년 6개월 동안의 시설개선 공사를 마치고 최근 문을 다시 열었다.
미술관은 우선 건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의재미술관은 국내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건축가 조성룡 조성룡도시건축 대표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는 국내 최고 권위 건축문화대상의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는데, 그중 한 번이 의재미술관으로 받은 것이다.
의재미술관은 비탈진 경사의 부지에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져 단아하게 서 있다. 건물의 선은 직선이지만, 자연 속에 푹 파묻혀 풍경과 겉돌지 않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입구에서 전시동으로 건너가는 동선 한쪽에 펼쳐놓은 통유리창이다. 한쪽 벽면을 다 터서 만든 병풍 같은 유리창이 자연의 풍경과 맑은 빛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다.
미술관 개관 20주년과 재개관을 동시에 기념해 의재미술관에서는 지금 ‘문향, 인연의 향기를 듣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의재 선생이 생전에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선물한 글과 그림 30여 점을 걸었다. 집안 어른의 회갑연에 그려준 그림도 있고, 단골 표구사 주인의 딸 결혼식에 그려준 그림도 있다. 모두 전시회를 위해 소장자로부터 빌려온 것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싶다.
광주 대인동의 한미쇼핑 사거리에 설치된 광주 폴리 ‘광주사람들’. 대숲이나 새 둥지를 연상케 한다. 이란계 미국인 건축가 나데르 테라니의 작품이다. |
# 민주화의 공간이 문화의 중심으로
광주 동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여놓은 엄청난 크기의 문화공간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얘기를 하려면 ‘공간’에 대한 얘기부터 하는 게 순서겠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를 담은 가슴 뜨거워지는, 기념비적 사진이 몇 장 있다. 그중 한 장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분수대 주변에 모여있는 사진이다. 1980년 5월, 분수대 가장 높은 곳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시민들은 광장에서 시국 토론을 하며 군부독재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사진 속 분수대 주변이 바로 도청 앞 광장이다. 전남도청 광장은 5·18 당시 불의에 맞섰던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곳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집회 참가 독려 구호가 ‘가자, 도청으로!’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도청은 시민공동체의 중심이자 처참한 비극이 지나간 공간이기도 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아 저항하던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무차별적 무력진압에 쓰러졌다. 5·18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리고 암전(暗轉).
그리고 35년이 지난 뒤 분수대 뒤편 도청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섰다. 이 무겁기 짝이 없는 공간에다 들여놓은 것이 ‘아시아’ 그리고 ‘문화예술’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공약이 ‘광주를 아시아문화 수도로’였다. 공약이 실현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분노와 열망, 그리고 비극이 스며있는 공간이 35년 만에 ‘문화와 예술’의 옷을 입게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 세대가 걸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도청부지뿐만 아니라 주변 건물들을 헐어낸 4만8000여 평의 공간에 들어섰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예술의 전당보다 한참 더 크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기관이란다.
그럼에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전당 건물들이 ‘위’가 아니라 ‘아래’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하 공간이지만 개방적인 느낌의 광장에다 자연과 독특한 미감의 건축물을 조화롭게 배치한 것만으로도 전당은 가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전일빌딩245 옥상 전망대 ‘전일마루’에서 내려다본 옛 전남도청과 도청 앞 광장의 분수대. 지상의 도청건물은 보존하고 그 아래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지었다. |
# 광주 폴리, 동선을 만들어주다
광주에는 ‘폴리’가 있다. 폴리는 ‘본래 기능을 잃고 장식적 역할을 하는 건축물’을 뜻하는 건축학 용어. 광주 폴리는 광주시가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개막을 앞두고 공공시설물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첫 폴리 제작 주제는 ‘역사의 복원’. 세계적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을 비롯,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대학장 나데르 테라니, 국내 최고 건축가 조성룡 등 국내외 건축가 11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장소가 지닌 가치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조명하며 도시의 문화적 자산을 만든다는 취지 아래 옛 광주읍성의 자취를 따라 11개의 폴리를 설치했다.
광주 폴리가 시민들의 눈길을 모으자 2013년부터는 비엔날레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문화형 도시재생사업으로 다시 추진됐다. 이렇게 총 4번에 걸쳐 4가지 주제의 31개 폴리가 광주 전역에 설치됐다. 폴리는 도심 공간에 쉼표를 찍거나 의표를 찌르는 구조물로 도시에 리듬을 부여하고 있다.
폴리는 다양하다. 바닥 조형물로 글씨를 쓴 구조물도 있고, 가로수 주변을 스테인리스 강관으로 구름처럼 만들어 얹기도 했다. 건물 옥상에다 형형색색의 글씨로 만들어 세운 것도 있고, 도서관 한 귀퉁이를 독특한 미감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장식적인 모습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여행자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폴리의 역할은, 훌륭한 동선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대도시 여행에서 누구나 겪는 어려움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코스를 잡을 것인가 하는 것. 그런데 광주에서는 폴리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도시여행을 할 수 있다. 지도를 들고 폴리를 찾아다니면, 광주 도심의 곳곳을 훨씬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광주 도심 한복판인 광주영상복합문화관 8층에 광주 폴리 인포센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지도와 안내책자를 내준다.
비움박물관의 이영화 관장. 뒤쪽으로 똑같은 모양의 밥사발이 정연하게 전시돼 있다. 얼핏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크기며 모양이며 새겨진 글씨나 문양이 모두 다르다. |
# 건물 이름 뒤에 붙은 탄흔의 숫자
옛 전남도청 앞에 ‘전일빌딩 245’가 있다. 금남로 1가 1번지. 전남도청 앞 광장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전일빌딩은 광주의 5월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목격자였다. 1968년 완공된 전일빌딩은 당시 광주 최초의 10층 건물로 오랫동안 광주 도심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5·18 당시 전일빌딩에는 훗날 언론통폐합으로 광주일보로 제호를 바꾼 전남일보가 입주해 있었고, 나중에 KBS에 통합된 전일방송도 있었다.
2013년 건물 노후화로 1층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전면 폐쇄돼 오랫동안 폐허처럼 남아있던 전일빌딩은 철거돼 주차건물이 될 뻔했다. 그러나 2016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식결과 5·18 당시 총탄이 날아와 박힌 흔적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극적으로 보존이 결정됐다.
245란 숫자는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탄흔의 숫자다. 공교로운 건 2009년 부여된 전일빌딩의 도로명 주소가 ‘금남로 245’라는 것. 탄흔 245개가 발견된 건 2016년인데, 도로명 주소 245가 부여된 건 이보다 7년 전의 일이다.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전일빌딩 245의 이름이 확정된 뒤에 탄흔 25개가 추가로 발견돼 빌딩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은 모두 270개로 늘어났지만, 최초 발견된 탄흔 숫자로 정한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전일빌딩에는 5·18기념관과 옥상 전망대인 전일마루 등 5·18 관련 공간과 함께 남도관광센터, 콘텐츠허브, 투자지원센터, NGO센터 등 다양한 공적 기관과 시설이 입주해 있다.
전일빌딩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10층의 5·18기념관. 여기서 탄흔이 발견된 기둥 등을 둘러볼 수 있다. 기념관의 주제 영상은, 탄흔으로 추정한 총탄 궤적이 5·18 당시 전일빌딩을 향한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기념관에는 헬기 사격 순간을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로 실감 나게 표현해놓은 디오라마도 있다. 11층 옥상 전일마루에서는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와 충장로, 그리고 무등산이 다 보인다.
# 꽉 채워진 ‘비움’ 박물
이번에는 좀 허술하고 투박해 보이는 박물관 얘기. 광주 대의동에 비움박물관이 있다. 민속품 위주의 생활사 유물을 모으고 전시하는 곳인데, 그걸 보여주는 솜씨가 아마추어에 가깝다. 보여 주는 솜씨는 헐겁지만, 차곡차곡 모아둔 유물들의 ‘짱짱함’이 모자란 부분을 꽉 채워주고 남는다. 모으고 전시한 정성만큼은 한가득이다.
비움박물관에서 여러 번 놀랐다. 첫 번째 놀란 건 광주 도심 한복판에 5층 건물을 짓고 전부 박물관으로 쓰고 있어서다. 제 건물이라 임대료를 안 낸다고는 하지만, 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손해가 적잖을 듯했다. 건물을 남에게 빌려주기만 해도 지금 수입의 몇 배는 넘지 않을까. 드문드문 찾아오는 관람객에게 받는 입장료 3000원으로 수익은커녕 전기요금이나 제대로 나올까 싶다.
두 번째 놀란 건 민속품 수집벽이다. 박물관을 차릴 정도라면 수집벽이 대충 짐작이 가는데, 같은 물건을 이렇게 많이 모아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순백의 자기에 청색으로 모란을 그린 똑같은 단지가 어찌나 많은지, 폐업한 공장에서 남은 물건을 떨이로 사다가 놓은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도자기의 색이며 그림의 붓질이 세밀하게 다르다. 하나하나 살펴가며 사들여 모은 것이란 얘기다. 이런 식으로 풍로를, 석쇠를, 뒤웅박을, 소반을, 상여 꼭두를 모았다.
문화재는 모아두면 큰돈이 되기도 하지만, 민속품은 모아봐야 돈 되는 일이 아니다. 이영화(70) 비움미술관장은 “소수의 지체 높은 사람들이 즐겼던 예술품보다는 평범한 이들이 썼던 손때묻은 물건들에 더 마음이 간다”고 했다.
이 관장은 40년 넘게 민속품을 수집해왔다.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문구업을 하면서 적잖은 돈을 벌었던 모양이었다. 문구업을 할 때 만들어 팔았던 게, 중년이라면 다들 기억하고 있을 ‘왕자표 풀’이다. 이쯤 되면 성공한 귀부인의 호사 취미로 오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서 보면 안다. 수더분한 차림새의 이 관장에게 민속품 수집이란 소명에 의한 헌신에 가깝다는 것을….
세 번째로 놀랐던 건 전시실 이곳저곳에 걸어놓은 이 관장의 시(詩)다. 등단하지 않은 아마추어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시들이 적잖다. 그중 하나만 보자. 밥사발 전시 공간에다 걸어놓은 시다. “어디/꾸민 구석이라고는 / 없는 흰 그릇 / 시작도 끝도 / 없는 동그라미 / 왠지 모를 자존감으로 / 불쑥 솟아오르는 힘 / 한반도에서 / 그냥 / 살다간 사람들의 / 건강한 아름다움.”
<이영화의 시 ‘밥사발’ 전문>
박물관에서는 이달 말까지 가을 기획전시 ‘헌 종이로 만든 보물단지’ 전이 열리고 있다. 종이로 만든 지공예품 전시다. 지공예라면 예술품을 연상하지만, 전시장에 내놓은 건 1960년대쯤 가난 때문에 헌 종이로 손수 만들어 썼던 상자와 단지, 항아리 등이다. 철 지난 달력이나 연필로 눌러쓴 헌 공책, 누렇게 뜬 헌 책을 ‘가난의 손’으로 접어 만든 것들이다.
이 관장은 비움박물관을 ‘만물(萬物)이 시(詩)로 머무는 곳’이라고 했다. 투박한 살림살이가 추억 속에서 시로 읽히는 공간이란 얘기다. 덧붙이자면 그곳에서는 시를 쓰는 ‘마음’까지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옛 살림살이와 함께 그걸 정성껏 닦아놓은 이의 마음까지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어디 여기만 그럴까. 돌이켜 보면 광주에서 추억 혹은 추모가 새겨진 공간에서 떠올린 건, 상처입으면서도 그 공간을 지금껏 지키고 견뎌온 광주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 여행자에게 ‘최고의 공간’
살짝 귀띔하는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는 여행자에게 추천할 만한 ‘최고의 장소’가 있다. 지난 5월 재단장된 문화정보원 라이브러리 파크다. 상영관, 북 라운지, 전시실, 커뮤니티 룸, 휴게공간 등으로 이뤄진 곳인데 공간을 손보면서 북 라운지와 휴게공간의 시설이나 분위기를 마치 공항의 비즈니스 및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처럼 고급스럽게 꾸몄다. 이용객도 거의 없으니 도시 여행자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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