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에는 예당호가 있습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3.7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입니다. 저수지 둘레가 마라톤 풀코스 거리쯤 되는 40㎞에 달한다니 말 다했지요. 여기에 국내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가 놓였습니다. 내달 6일 개장하는 ‘예당호 출렁다리’입니다. 64m 높이 주탑이 지탱하고 있는 출렁다리의 길이는 402m. 걸어서만 건널 수 있는 보행교로 지어진 다리는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호반 한쪽에 지름길을 내듯 놓인 다리입니다. 순전히 ‘관광용’ 다리인 것이지요. 이런 다리는 ‘사람을 건네주는’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노골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전국이 가히 출렁다리 열풍입니다. 감악산 출렁다리에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 마장호 출렁다리, 장성호 출렁다리…. 예산의 출렁다리가 국내 최장, 아시아 최장이라지만 그 타이틀은, 올 연말 완공 예정인 논산 탑정호 600m 출렁다리가 놓일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앞다퉈 출렁다리를 놓고 있으니, 이제 또 곧 논산의 출렁다리보다 긴 다리가 놓이겠지요. 그럼에도 예당호 출렁다리가 각별한 건 다리 자체의 위용이나 볼거리보다는 다리가 예당호를, 그리고 예산을 다시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출렁다리는 예당호가 얼마나 멋진 수변 경관을 갖고 있는지를, 호수의 수몰 나무들이 얼마나 회화적인지를 새삼 들여다보게 해줍니다. 더불어 추사 고택이나 수덕사, 임존산성, 남연군묘 같은 예산의 명소까지도 다시 보게 해줍니다. 예산에서 이런 것을 만났습니다. 추사 고택과 화암사에서는 긴 유배 끝에 돌아와 묻힌 추사의 자취를, 임존산성에서는 덧없이 스러진 백제 유민들의 항거와 절망을, 수덕사에서는 선종을 일으킨 경허, 만공 스님을, 그리고 남연군묘에서는 쇄국을 고집하던 야심가와 무덤에 자리를 내주고 쫓겨간 절집을…. 그 시절을 다 살아서 지금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이 쌓여서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쩌면 예당호에 놓인 출렁다리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은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예산과 당진, 그래서 예당호 먼저 싱거운 얘기 한 토막. 충남 예산의 저수지 ‘예당호’의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예산군과 당진군의 첫 글자를 따서 붙였다. 예당저수지는 예산군 대흥면과 응봉면 사이에 끼어 있다. 당진 땅과 접해 있지 않은데도 왜 당진의 이름이 들어갔을까. 그 까닭이 이렇다. 예당호는 예산과 당진을 걸친 홍문(鴻門) 평야에 물을 댄다. 호수의 소재지가 아니라, 물을 대는 곳의 지명을 딴 것이란 얘기다. 농경시대의 작명법이다. 예당호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착공했다. 해방 무렵 잠깐 공사가 중단됐다가 1946년 예산·당진 수리조합 주관으로 공사가 재개돼 1963년에 댐이 완공됐다. 첫 삽을 뜬 지 34년 만이다. 이만큼 오래 걸린 건 예당호가 ‘내륙의 바다’로 불릴 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세 배에 달하는 예당호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 예당호는 오래전부터 낚시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수몰나무들 사이의 좌대에서 개구리 소리와 함께 밤을 보내거나 물안개 가득한 아침을 맞는 경험은 낚시꾼들이 누리는 호사였다. 정작 낚시꾼들은 경치보다는 ‘손맛’이 관심사였겠지만 말이다. 낚시꾼이 아니라면 예당호는 그저 수변에 늘어선 식당에서 매운탕이나 어죽을 맛보러 간혹 들르던 곳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예당호가 달라졌다, 습지가 조성되고 생태공원이 들어섰으며, 수목원이 문을 열었다. 생태공원에는 전망대와 조망대가 들어섰고, 습지에는 창포·연꽃이 심겼다. 그러자 청둥오리와 백로가 날아들었다. 오는 4월 6일 개통하는 예당호 출렁다리도 관광자원으로서 예당호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다. 예산군이 105억 원을 들여 호수에 놓은 402m 현수교는, 예당저수지가 예산 관광의 가장 선명한 아이콘이 될 것이란 기대와 자신감을 보여준다.
# 석양에 불붙다… 황금 나무 예당호에는 ‘황금 나무’가 있다. 만수위 때면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자라는 버드나무다. 황금 나무는 매운탕이나 어죽을 파는 식당인 예당 가든 바로 앞에 있다. 나무가 호수 동쪽 끝에 있어 해 질 무렵 나무와 마주 서면 서쪽으로 지는 해를 안게 된다. 물에 잠긴 버드나무 뒤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온통 석양빛으로 물든 수면 위에서 역광을 받고 서 있는 나무를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면서 수몰 나무는 ‘황금 나무’란 별명을 얻었다. 관광지의 사진 명소에 가보면, 잘 찍은 사진과 실제 모습의 차이로 실망하기 십상인데, 황금 나무 앞에서는 그런 아쉬움이 없다. 해 저무는 시간대에 맞춰가기만 하면 사진보다 더 화려한 노을의 색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당호에는 황금 나무처럼 물에 반쯤 몸을 담그고 자라는 수몰 나무가 많다. 수몰 나무는 황금 나무의 반대쪽 수변, 그러니까 예당호 서쪽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호수 동쪽의 황금 나무가 저 홀로 노을 속에서 존재감을 뽐낸다면, 서쪽의 수몰 나무들은 이른 아침 물안개 속에서 수면 위로 데칼코마니 무늬를 찍어낸다. 예당호에서 출렁다리뿐만 아니라 호수의 수변을 끼고 이어지는 나무 덱에도 마음이 끌렸다. 출렁다리 주변의 부잔교(폰툰다리)와 나무 덱으로 조성한 호반 산책로의 정취가 훌륭했다. 다만 경관이 빼어난 수변에다 모조리 나무 덱을 놓는 바람에 ‘헐거운 호수 풍경’을 잃어버리게 된 건 아쉬웠다. 호수의 경관을 나무 덱이 막아서니 드라이브하면서 호수의 풍경을 감상할 수 없게 된 것도 서운했다. # 추사 고택에서 소치의 자취를 찾다 예산의 다른 얘기를 해보자. 남도의 ‘화선(畵仙·그림의 신선)’으로 일컬어지는 소치 허련. 일흔한 살의 그가 1878년 음력 6월 3일, 주머니를 털어 엽전 한 꿰미로 죽순과 포 등 제수를 마련해 스승 추사 김정희의 충남 예산 고택을 찾았다. 그날은 추사가 세상을 뜬 지 22년째 되던 해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허련은 그해 여름을 추사 집안의 원찰인 화엄사에서 지냈다. 추사는 생전에 허련을 아꼈고, 허련도 스승을 정성으로 모셨다. 소치는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추사를 세 번 찾아갔다. 이런 정성은 추사가 죽고 난 뒤에도 이어졌다. 추사가 세상을 뜬 나이인 일흔한 살이 되는 해에 맞춰 허련이 추사 고택을 방문한 것에서도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추사 고택은 예산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추사 고택은 단아하지만 사실 집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크지 않다. 고택의 건축적 양식의 탁월함이나 건축의 배치나 정원 조경 등은 특이할 게 없다는 얘기다. 애초의 53칸짜리 고택을 절반 규모로 복원한 것이라 어디에도 추사의 손때가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고택에서는 ‘형태’가 아닌 ‘공간’의 감회가 느껴진다. 집이 간직하는 건 ‘형태’일 때도 있지만, 더러 깃든 이의 ‘정신’일 때도 있다. ‘추사 고택’으로 불리지만, 사실 이 집을 지은 주인은 영조의 사위 김한신이다. 그가 바로 추사의 증조할아버지다. 증조할머니는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 고고한 선비의 풍모를 갖춘 김한신은 88명의 사위 후보를 면접한 영조의 눈에 들어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김한신은 서른아홉 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러자 아내 화순옹주는 식음을 전폐한다. 영조가 딸의 마음을 돌이키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에 화순옹주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고택 옆에는 김한신과 화순옹주를 함께 묻은 합장묘가 있고, 그 앞으로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 세워져 있다. 열녀문은 아버지 영조가 세운 게 아니다. 영조는 딸 화순옹주가 ‘정절은 있지만, 효가 모자라다’며 열녀문을 세우길 거절했다. 열녀문은 화순옹주의 조카 정조가 내렸다. 추사의 증조할머니 화순옹주는 이렇게 조선 왕실의 유일한 열녀가 됐다.
# 화암사 석벽에 새긴 글씨 예산의 추사 고택까지 간 길이라면 인근의 절집 ‘화암사’를 놓치지 말 일이다. 화암사는 추사 집안에서 대대로 가문의 안녕을 비는 원찰로 삼았던 곳이다. 화엄사는 추사의 자취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어 각별하다. 그럼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추사 고택을 방문한 이들도 여기까지는 발을 들이지 않는다. 추사는 집 뒤편의 구릉 전체를 ‘용산(龍山)’이라 불렀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언덕임에도 화암사가 들어선 곳을 오석산이라 했고, 고택 뒤 작은 봉우리를 앵무봉이라 따로 이름 붙였다. 추사는 여기를 자신의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그의 뜻이 화암사 뒤편의 병풍바위와 쉰질바위에 글씨로 새겨져 있다. 병풍바위에는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란 글씨가 뚜렷하다. 절을 일러 ‘천축(인도)의 옛 선생댁’이라고 표현한 글이다. 쉰질바위에 새긴 ‘소봉래(小蓬萊)’라는 글씨는 그곳을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한 추사의 뜻이 담겨 있다. 병풍바위에는 ‘시의 경지’를 뜻하는 ‘시경(詩境)’이란 글씨도 새겨져 있다. 추사는 제주 유배 중 화암사를 고쳐 짓는다는 전갈을 듣고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고즈넉한 화암사에 걸려 있는 현판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추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을 수덕사로 보낸 대신, 화암사 대웅전에는 수덕사 원담스님이 써준 글씨가 걸려 있다. # 덧없던 꿈… 임존성과 남연군묘 충남 예산군 광시면의 봉수산에는 사행하는 뱀처럼 구불거리며 능선을 넘어가는 임존성이 있다.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최후까지 격전을 벌였던 성이다. 가족을 잃은 분노와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는 열망 때문이었을까. 백제 부흥군은 한때 돌과 몽둥이만으로 10만 명이 넘는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을 격퇴했다. 임존성을 무너뜨린 것은 적이 아니라 내부의 암투와 배신이었다. 백제 부흥군을 이끌던 장수가 당나라에 투항한 뒤 적의 선봉에 섰고, 비로소 임존성은 함락됐다. 자신을 지휘하던 장수가 적이 돼서 칼을 겨눴을 때 백제 유민들의 상실감은 어땠을까. 패망한 나라를 되찾으려던 백제의 유민들은 이 성에서 마지막 싸움을 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산에서 가봐야 할 한 곳이 하나 더 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의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다. 남연군의 묘는 원래 경기 연천군에 있었는데, 아들 대원군이 묘터의 풍수에 능한 지관에게서 ‘2대에 걸쳐 임금이 나오는 명당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 묘를 여기로 옮겼다. 높은 둔덕 위에 올라서 있는 남연군묘의 지세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관의 예언대로 대원군의 아들과 손자인 고종과 순종이 잇따라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로써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으니, 여기를 과연 명당이라 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모두 덧없는 꿈이었다. ■ 가는길 먹을 것 묵을 곳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예당호 주변에 펜션이 있기는 하지만, 가족 여행이라면 숙박 시설이 밀집하고 온천욕도 겸할 수 있는 덕산온천을 추천한다. 온천 워터파크를 갖춘 리솜스파캐슬도 있고, 가야관광호텔, 덕산온천관광호텔, 스파뷰 호텔 등과 새로 지은 깔끔한 모텔도 있다. 예산 상설시장 주변에는 전통방식으로 뽑아서 널어 말리는 국수 가게가 여럿 있다. 물과 소금, 밀가루만으로 만드는 국수인데 쫄깃한 식감이 좋다. 예산의 대표 먹거리라면 예당호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끓여낸 어죽과 어탕국수다. 그런데 정작 예산읍에서는 어죽집을 찾기 어렵다. 어죽을 내는 내로라하는 식당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어선 예당호가 가깝기 때문이다. 여간 솜씨가 좋지 않아서는 시내에서 어죽 식당을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니 시내에서 지역 주민을 상대로 어죽을 주메뉴로 한다면, 그리고 그것도 장사가 잘된다면 믿고 가볼 만하다. 하루에찬(041-332-5393)이 바로 그런 식당이다. 예산 삽교에는 소머리국밥으로 이름난 한일식당(041-338-2654)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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