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이미 봄의 한복판입니다. 동백꽃 낭자한 낙화에 이어 한라산 중산간에는 이미 복수초부터 변산바람꽃, 노루귀까지 바야흐로 ‘꽃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제주에서 매화는 이제 막 절정을 넘겼고, 더 이르게 피었던 수선화는 지고 있는 중입니다. 돌담 아래 양지바른 곳마다 유채꽃도 무더기로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지고 또 피며 교대하는 봄날의 꽃들을 만나러 제주를 다녀왔습니다. # 오름에서 봄꽃을 만나다 제주 한라산의 서쪽 자락에는 왕이메오름이 있다. 거대한 왕관처럼 생긴 전형적인 모습의 오름인데, 봄이면 이르게 피어나는 야생화로 꽃밭이 되는 곳이다. 제주의 봄꽃이라면 매화와 수선화, 그리고 유채꽃이 대표지만, 오름의 야생화에서 느끼는 봄의 기미는 또 다르다. 차가운 대지를 뚫고 마른 낙엽 위로 밀어 올린 꽃대가 이리도 대견할 수 없다. 허리 숙여 꽃과 눈을 맞추면 봄의 두근거림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 왕이메오름에 가면 만발한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잘 알려진 제주의 오름은 주로 한라산 동쪽에 몰려 있다.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거문오름, 아부오름…. 반면 제주 서쪽에는 이렇다 할 오름이 없다. 이름난 오름들은 또 대부분 제주시에 있다. 제주시의 오름은 열 개도 넘게 댈 수 있는데, 서귀포시의 오름은 서너 개가 고작이다. 하지만 이른 봄에 ‘봄의 기미’를 느끼러 떠난 제주 여행이라면 한라산 서쪽의 서귀포시에 속한 왕이메오름의 이름을 기억해두자. ‘왕이메’란 오름의 이름은 옛날 탐라국 삼신왕이 이곳에 와서 사흘 동안 기도를 올렸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오름의 해발고도는 612m. 웬만한 산 높이지만 겁먹을 건 없다. 정작 오름의 표고 차는 92m에 불과하니 말이다. 출발지점의 높이가 해발 520m. 오름 정상까지 92m만 올라가면 된다는 얘기다. 왕이메오름은 오목한 분화구를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서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깔때기형의 원형 분화구 바깥쪽은 울창한 해송과 삼나무로 뒤덮여 있고, 분화구 안쪽은 활엽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변산바람꽃과 복수초, 그리고 들꽃 호명목장의 사유지인 왕이메오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입산 시간이 정해져 있다. 오름 입구에서 들어서자마자 인상적이었던 건 깊고 어둑한 삼나무 숲길. 대기는 청량하고 길은 푹신했다. 오름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원형의 왕관 같은 능선을 따라 걷는 길과 분화구로 내려가는 길이다. 느릿느릿 두 길을 다 걷는다 해도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다. 왕이메오름에 야생화가 지천이라지만, 무심코 가서는 꽃 한 송이도 보기 어렵다. 분화구 바닥에는 키 작은 관목과 잡풀이 삭아있었는데 도대체 야생화가 있을 만한 지형이나 토양이 아니다. 고백하건대 왕이메오름 화구 안에 들어섰다가 몇 시간째 꽃 한 송이 찾지 못했다. 실망해서 되돌아 나오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제주 주민의 안내로 되돌아가서야 겨우 꽃밭을 찾을 수 있었다. 분화구의 동쪽 사면, 그러니까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가장 오래 받는 자리에 꽃이 있었다. 순백의 꽃잎에 보랏빛 은은한 꽃술을 뽐내는 가녀린 변산바람꽃이 꽃밭을 이룬 채 흐드러졌다. 고개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꽃의 자태와 색감이 우아하다. 반들반들 광택이 나는 노란 꽃잎의 복수초도 곳곳에 군락을 이뤄 피어 있다. 오름의 야생화는 이제서야 꽃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제주의 봄 들꽃은 이미 길가까지 밀려 나오고 있었다. 제주 서귀포의 어디든 양지바른 돌담 아래에는 개불알꽃과 별꽃, 광대나물 같은 꽃들이 만발했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행여 한 송이라도 밟을까 싶어 발밑이 조심스럽다. # 노리매공원에서 즐기는 ‘탐매(耽梅)’
공원의 매화나무가 이제 제법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매화나무의 수령이 더해지면서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축축 늘어지는 ‘능매화’의 자태가 해마다 더 화려해진다. 일찌감치 지난 9일 시작한 매화 축제는 오는 3월 10일까지 이어진다. 공원의 백매화는 이미 절정을 살짝 넘어섰는데, 올해 홍매화의 꽃소식은 늦어져 이제야 하나 둘 피기 시작했다. 노리매공원 매화나무는 늙은 것이 많다. 성근 가지에 드문드문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여럿이다. 매화에서 품격이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늙은 매실나무는 화려하게 번성하지 않지만, 맑고 고결한 느낌을 준다. 늙은 매화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능매화다. ‘수양 매화’라고도 불리는 품종인데, 부챗살처럼 펼쳐진 가지가 아래로 축축 처졌다. 덕분에 꽃이 다닥다닥 붙은 가지를 매단 나무 전체가 화려한 한 송이 꽃처럼 보인다. 관람객들에게는 잘 내보이지 않지만, 노리매공원 본관 건물에는 제주 출신의 화가 강요배의 매화 그림 한 점이 있다. 화가가 매화를 좋아하는 노리매공원 주인에게 그려준 것이라는데, 비쩍 마른 채 둥치를 뒤틀고 있는 늙은 매화나무 그림의 여운이 길다. 그윽한 매화 향 속에서 떠오르는 문장 한 구절.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 황벽 희운 선사가 남긴 글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番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차가움이 한 번 뼛속을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매화꽃이 코를 찌르는 짙은 향기를 얻겠는가.’ # 봄꽃과 활기로 가득 차다…휴애리공원 남원읍 신례리의 휴애리자연생활공원도 제주에서 손꼽히는 매화 명소다. 휴애리공원은 노리매공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노리매공원이 차분하고 고즈넉한 사색의 분위기라면, 휴애리공원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로 유쾌한 행락지의 느낌이다. 휴애리에는 봄꽃도 매화만 있는 게 아니다. 복수초도 있고, 수선화도 있다. 한쪽은 제법 규모가 큰 동백 정원이다. 해마다 봄이면 매화축제를 열지만, 여름에는 수국축제, 가을에는 핑크뮬리축제, 겨울에는 동백축제까지 4계절 제주도를 대표하는 꽃을 테마로 축제를 연다. 여기다가 토끼, 제주마, 송아지, 염소 등 다양한 동물에게 직접 먹이를 주며 가까이서 관찰하는 체험도 있고, 흑돼지와 거위가 등장하는 공연도 펼쳐진다. 흑돼지 공연에 어린이 관객들이 어찌나 열광하는지, 공연 내내 아이들이 지르는 환호성으로 정신이 다 쏙 빠질 정도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라면 꽃밭에 다양한 소품을 활용한 제법 세련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포인트를 만들어놓은 것도 흡족하겠다. 올해 매화축제는 3월 10일까지. 노리매공원보다 꽃소식이 좀 더 일러서 매화나무 중에는 벌써 분분히 꽃잎을 떨구며 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휴애리공원 매화정원의 특징은 나무 아래에 초록의 초지가 조성돼 있다는 것. 나무 밑둥을 뒤덮은 초록의 기운이 보태져 매화의 느낌이 훨씬 더 싱그럽다. 날씨가 좋으면 휴애리공원에 만발한 매화 너머 눈 덮인 한라산의 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휴애리공원 입구에는 주차장을 끼고 제법 너른 매화밭이 있다.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밭 안으로 발을 들일 수는 없지만, 매화밭을 끼고 있는 도로를 따라 꽃향기를 맡으며 산책할 수 있는 곳이다. 입장권을 끊지 않고서도 말이다. 매화밭이 공원 안의 매화 군락보다 훨씬 더 크다. 공원의 매화보다 개화가 늦어 매화밭에는 이제 막 꽃이 구름처럼 만개했다. # 낙화…짧아서 아쉬운, 붉어서 비장한 이번에는 제주에서 지고 있는 꽃들에 대한 이야기. 가장 이르게 만개했다가 지고 있는 수선화부터 시작하자. 제주의 수선화는 이른 봄 산방산과 대정읍 일대에 만발한다. 잘 자란 마늘과 겨울 무의 초록잎 가득한 밭담 아래에서 수선화는 핀다. 제주의 수선화는 육지의 것과 종류가 좀 다르다. 육지의 수선화와 달리 제주 수선화는 속꽃잎이 치렁치렁하다. 제주 토종이 아닌지는 한눈에도 금방 구분된다. 제주 수선화 이야기를 하자면 추사 김정희 얘기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주로 유배 온 추사는 수선화 만발한 대정읍에 거처를 마련했다. 극심한 풍토병에 시달리는가 하면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몸에 맞지 않는 옷가지로 갖은 고초를 토로하던 추사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배지의 들판에 군락을 이뤄 피어나던 수선화였다. 수선화는 서울에서 귀하디 귀한 꽃이었다. 어쩌다 중국에 다녀오는 이가 가져오면 모두 신기해하며 모여서 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던 수선화가 유배지 제주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니 추사는 감격했다. 산방산 아래 대정 들판의 수선화는 이제 거의 다 졌고, 대정향교에 늦게 핀 군락들만 겨우 남았다. 한 번 피면 한 달 가까이 꽃대를 올리는 유채꽃과 달리 수선화는 짧게 피곤 일순 져버린다. 봄날의 수선화가 더 귀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리라. 단산의 거칠고 황량한 그늘 아래서 유배생활을 한 추사가 유독 제주의 수선화에 마음을 두었던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제주에서는 동백도 이제 끝물이다. 동백 군락지인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주변은 지금 떨어진 동백 꽃잎으로 흥건하다. 하지만 끝물이라고는 해도 끝이 난 건 아니다. 종류에 따라 제주의 동백은 3월 말까지 꽃을 피워내는 것들도 있다. 꽃이 질 때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지는 겹동백은 이제 거의 다 지고 말았다. 아직 꽃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한창 꽃이 필 때 나무 전체를 붉게 물들였던 것에다 대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1977년에 심어서 40여 년을 길렀다는 겹동백나무들이 줄 맞춰 서 있는 위미리의 제주 동백수목원도 이제 휴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위미리마을 한복판의 토종 동백 군락지에서는 아직 붉은 동백꽃이 피고 또 진다. 활짝 꽃을 피운 것도 있고, 이제 막 꽃망울을 맺은 것도 있다. 위미리 동백나무 군락은 100여 년 전쯤 열일곱 나이로 이 마을로 시집온 현병춘 할머니가 씨를 뿌려 길러낸 것. 100년 전이라면 3·1운동 무렵이었을까. 현 할머니가 해초 캐기와 품팔이로 어렵게 모은 돈 35냥으로 황무지를 사들였고,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에서 동백 씨앗을 따다 뿌렸다. 그렇게 심은 것이 지금의 어둑한 동백 숲이 됐다. 이제 봄이 당도했으니 앞으로 한동안 위미리 마을은 자결하듯 모가지째 뚝 떨구며 지는 토종 동백의 낙화로 낭자하리라. ■ 몸으로 느끼는 봄… 내달 23·24일 ‘유채꽃 걷기’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명상공간 지니어스 로사이를 리모델링한 유민미술관은 예술과 자연의 조화가 돋보이는 공간. 미술관 돌담 사이로 보이는 봄날의 유채꽃과 성산 일출봉의 경관은 그야말로 ‘백만 불짜리’다. 제주에서 유채꽃 사이로 걷기 = 제주를 상징하는 봄꽃은 단연 유채꽃. 제주에서 유채꽃을 가장 잘 즐기는 방식은 ‘걷기’다. 오는 3월 23, 24일 양일간 서귀포시 일원에서 ‘서귀포 유채꽃 국제걷기대회’가 열린다. 서귀포시와 한국체육진흥회가 공동주최하고 서귀포시관광협의회가 주관하는 이 대회는 올해로 21회째를 맞는다. 첫날인 23일에는 제주월드컵경기장 광장에서 서쪽으로, 둘째 날에는 동쪽으로 걷는다. 5·10·20㎞ 코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걷는데 코스 중간중간 거리공연, 특별체험행사 등이 진행된다. 참가비는 개인 1만 원(단체 8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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