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최대 5명...VIP처럼 즐기는 서울도보 해설관광

醉月 2021. 9. 18. 10:27



여전한 코로나19의 거리두기 속에서 두 번째 추석을 맞습니다. 명절이란 게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상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대면의 시간인데 벌써 두 해째 이게 쉽지 않습니다. 대면해 가족과 나눌 수 없으니 이맘때쯤 누리던 수확의 기쁨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가족끼리 모이는 것도, 함께 여행하는 것도 금기가 돼버린 명절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추석 명절 앞뒤로 방역수칙을 지키며 가족들과 오붓하게 반나절쯤이면 넉넉히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을 추천합니다.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서울의 명소를 걷는 도보해설관광’입니다. 그저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동행하는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전문적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충실한 해설과 함께 명소를 돌아보는 여정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즐거운지는 경험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여행을 지금 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서울 도보해설관광 프로그램은 보통 15명이 한 팀으로, 많게는 20명 넘게 받아 진행해 왔는데, 코로나19로 회당 투어 인원이 크게 줄었습니다. 거리두기 수칙에 따라 ‘해설사 1명에 참가 인원 3명’이 원칙인데, 백신 2차 접종 후 14일이 지났다면 2명까지 더 받습니다. 그래 봐야 회당 5명에 불과하니 ‘VIP 여행’이 따로 없습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신청자가 몰려 예약이 쉽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서울 도보해설관광 홈페이지(dobo.visitseoul.net)를 통한 예약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비용은 무료. 우천 등 기상 상황에 따라 취소되는 경우도 있지만 투어는 연중무휴. 명절에도 쉬지 않습니다.




북촌한옥마을 코스의 출발지점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다.



■ 북촌 한옥마을
백인제 가옥, 북촌이 한눈에
순례길 곳곳에 아픈 역사가


# 근대 한옥과 공방, 그리고 순례

▲ 운현궁에서는 해설사가 곳곳에 걸린 주련의 글귀도 설명해준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전통한옥들이 모여 있는 북촌한옥마을은 굽이굽이 미로 같은 골목길 사이로 한옥들과 역사문화자원, 박물관, 공방들이 발길 닿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높은 담장의 양반 대갓집이라기보다 대부분 근대에 지어진 한옥 900여 채가 처마를 잇대고 있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도보코스의 출발지점은 운현궁. 운현궁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곳이다. 여기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정책을 추진했다. 흥선대원군의 한옥과 양관(洋館)은 모두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운현궁을 거쳐 들르는 북촌문화센터는 서예, 다도, 판소리 등의 전통문화강좌를 비롯해 자연염색, 오죽공예, 매듭, 조각보 등의 공예실기강좌 등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한옥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한옥강좌, 영화 상영, 연주회 등의 문화행사도 열렸으나 이즈음은 행사가 뜸하다.

북촌 가회동의 백인제 가옥은 주목할 만한 곳. 근대 한옥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이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지 위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 채가 들어서 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해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북촌에는 한옥마을 코스 외에 ‘북촌 순례길’도 있다. 북촌 순례길은 아시아 최초로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천주교 서울순례길’의 명소에다 서울의 관광지를 결합해 만든 3개의 도보 관광코스 중 하나. 순례길은 천주교를 박해한 흥선대원군과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그리고 주문모를 자신의 집에 숨겨준 강완숙,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인현왕후와 명성황후를 비롯해 김옥균, 서재필, 김홍집 등 개화파 독립운동가들과 윤보선 등의 자취를 밟는다.

★도보코스 : 운현궁→북촌문화센터→석정보름우물터→중앙중·고교→가회동 11번지→돈미약국→가회동 31번지→정독도서관→백인제 가옥




위 사진은 낙산 정상의 낙산공원. 아래는 도보코스의 종착점인 마로니에공원.



■ 낙산성곽
600년 수도 성곽길 낭만 가득
해질 무렵 추천… 야경은 필수


# 서울의 보물을 만나는 곳

보물 제1호인 동대문(흥인지문)성곽공원에서 출발해 도성 탐방로를 따라 서울 전경을 한눈에 담은 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까지 걷는 코스다. 흥인지문에서 동대문성곽공원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울디자인지원센터를 만난다. 센터 건물 1층부터 3층까지가 한양도성박물관이다. 2014년 개관한 한양도성박물관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성정보센터 등이 마련돼 있다.

동대문성곽공원에서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조선 시대 축성 기술의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낙산 능선에 복원된 서울성곽을 따라가는 산책코스는 발아래로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길이다. 성벽 초입에 음각으로 새겨놓은 ‘일패장 성세각(一牌將 成世珏)’이니, ‘석수도변수 오유선(石手都邊手 吳有善)’이란 글씨가 눈에 띈다. ‘성세각’과 ‘오유선’은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새겨놓은 당시 공사 담당 책임자의 이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시공 실명제’인 셈이다. 강희 45년(1706년)이라 적혔으니 3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낙산의 등지느러미 같은 서울성곽을 따라 걷는 길도 좋지만, 해설관광을 마치고 해질 무렵 다시 낙산에 올라 성곽 일대의 야경을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따스한 조명이 켜지는 성곽도 좋고, 거기서 보는 야경도 멋있다.

★도보코스: 흥인지문→한양도성박물관→한양도성→팔각정(흥덕이밭)→낙산 정상(전망대)→낙산전시관→낙산1길→마로니에공원




화가 청전 이상범 가옥.



■ 서촌
수성동 계곡 ∼ 박노수 미술관
예술가들 흔적 따라 영감 흠뻑


#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 시범아파트를 철거하면서 복원한 수성동 계곡.


서촌에는 조선 시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윤동주, 이상, 노천명 등의 문인과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등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거주했다. 그래서 서촌을 걷는 건 이 땅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이자, 그들이 살았던 일제강점기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출발해 옥인동 윤씨 가옥을 거쳐 수성동 계곡까지 갔다가 윤동주 하숙집터와 박노수미술관, 이상범 가옥, 이상의 집 등을 보고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집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3시간이 휙 지나간다.

반환점이 되는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 동쪽 계곡으로 계곡 물소리가 요란하다 해서 ‘물 수(水)’에 ‘소리 성(聲)’자를 쓴다. 조선 시대 빼어난 경관을 찾아다니던 시인 묵객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계곡은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멘트 건물 틈 사이에 묻혔으나, 2010년 시범아파트를 철거하면서 계곡공원으로 복원해냈다. 계곡 초입 바위에 놓인 돌다리 기린교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다리와 어찌나 똑같은지 마치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박노수미술관은 2011년 박노수 화백이 미술작품, 수석 등 994점과 함께 자신이 살던 집을 종로구에 기증해 문을 연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된 집은 친일파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마련한 집으로 단아한 느낌의 한옥을 기본으로 지은 절충식 가옥이다. 이상의 집은 사직동에서 태어난 작가 이상이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와 스물세 살까지 20년 동안 살았던 집이 있던 자리다. 원래 있던 집은 허물어졌고 지금 이상의 집은 여러 필지로 나눠 지은 집 중 한 곳이다.

★도보코스: 경복궁역→통의동 백송터→상촌재→윤덕영 집터(벽수산장)→옥인동 윤씨 가옥→수성동 계곡→윤동주 하숙집터→박노수미술관→이상범 가옥→노천명 집터→이상의 집→금천교시장




위 사진은 서울을 상징하는 시설물인 보신각. 아래는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쌈지길.



■ 인사동
필방·놋그릇점 등 세월의 향기
조계사 500세 백송보며 기원도


# 도심 속 전통문화의 거리

골동품상점과 한정식집, 전통찻집, 기념품가게 등이 밀집한 인사동은 외국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내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명소다. 해설코스의 출발지점은 탑골공원. 본래 코스는 공원 안을 살피고 나오도록 짜여 있는데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탑골공원이 1년 6개월 넘게 문을 닫아 공원 담장을 끼고 인사동으로 바로 향한다.

인사동 코스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중앙대교당은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가 모금운동을 주관해 지은 천도교 총본산 교당이다. 300만 천도교도가 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당시 화폐 22만 원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숙명여고와 조선상공회의소 건물을 지은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설계를 맡았다. 1918년 12월 공사를 시작해 1921년 2월에 완공했다.

중앙대교당을 보고 경인미술관을 거쳐 조계사로 코스가 이어진다. 조계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민족종교 보천교가 전북 정읍에 지은 ‘십일전’ 건축물을 사들여서 해체해 복원한 것이다. 조계사 대웅전은 독특한 꽃문살로 유명하다. 마당에는 50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백송과 400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인사동 골목을 걸으면서 가장 오래된 고미술품 전문 갤러리인 ‘통인가게’, 붓을 만들고 도장을 파는 일로 30년을 이어온 ‘명신당필방’, 무형문화재 방짜유기장 집안에서 운영하는 놋그릇 가게 ‘납청놋전’ 등도 들른다.

★도보코스: 탑골공원→통인가게→명신당필방→천도교 중앙대교당→경인미술관→납청놋전→쌈지길→조계사→보신각




 



■ 덕수궁
중세·근대 섞인 석조전·정관헌
근대사 상처 건물마다 새겨진듯


# 대한제국의 역사를 만나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서울 4대 궁궐에서는 모두 해설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궁궐마다 특징이 있어 어느 한 곳을 추천하기란 어렵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면 500여 년 동안 조선의 중심이 됐던 조선 최대의 궁궐인 경복궁을, 자연과 건축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적 공간 분위기를 감상하고 싶다면 창덕궁을,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도세자 등의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다면 창경궁을 찾으면 되겠다.

4대 궁궐 중에서 덕수궁 코스를 추천하는 건 다른 궁궐은 해설이 없더라도 큰 불편 없이 돌아볼 수 있지만, 고종 재위 말년 10여 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던 덕수궁만큼은 해설이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궐 곳곳에 새겨져 있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상처를 듣고 난 뒤 덕수궁을 돌아보면 새삼 느끼는 게 많다. 전통 목조건축은 물론이고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유럽풍의 석조전, 정관헌 등 근대식 전각과 서양식 정원 및 분수 등이 함께 어우러져 중세와 근대의 모습이 뒤섞인 덕수궁의 독특한 분위기도 이색적이다.

궁궐을 나와서 담 밖 정동극장 뒤편의 중명전과 조선호텔 앞의 환구단에도 들른다. 중명전은 1897년 세워진 황실 도서관으로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서양식 2층 전각.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이곳에서 접견했으며, 을사늑약이 여기서 체결됐다. 환구단은 왕이 풍작을 기원하거나 비를 기원하는 등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이었다.

★도보코스:대한문→하마비→중화문→중화전→석어당→덕홍전→함녕전→정관헌→즉조당→준명당→석조전→중명전→환구단


■ 도보관광코스 몇 개나 될까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서울 도보해설관광코스는 모두 37개나 된다. 코스는 8개의 테마로 구성됐는데, 사전예약이 필요한 일반코스 28개와 예약 없이 현장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3개의 상설코스, 그리고 시청각장애인 코스 5개와 교통약자를 위한 1개의 무장애 코스가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dobo.visitseoul.net)에서 코스별 정보를 확인하고 예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