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영지 순례]이성계가 왕의 ‘금척’을 받은 곳, 전북 마이산 금당사
글·사진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전북 마이산의 금당사는 마이산 암마이봉의 맥이 뭉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
전북의 진안고원. 해발 300~400m 높이에 있다. 고원이니까 시원하다. 그래서 인삼이 잘 자란다. 일교차가 큰 곳에서 농작물의 약효가 발생한다. 이런 고원지대는 도 닦기에도 좋다. 여름에 시원하기 때문이다. 이 진안고원에 높이 솟은 산이 마이산(馬耳山)이다. 바위 봉우리 두 개가 흡사 말 귀 같은 형상으로 뾰쪽 솟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대한 암봉 두 개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매우 이채로운 모습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다. 높이도 거의 같다. 바위가 있는 곳에 지령(地靈)이 있고, 지령이 있는 곳에 도인이 나오고 수도 도량이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가도 만약 마이산처럼 바위 봉우리가 나란히 우뚝 솟아 있으면 이런 곳에는 틀림없이 유명한 수도원이 있거나 기독교 이전의 고대 신전터가 있었다. 이집트나 이스라엘 일대의 산들도 바위산이 많은데, 바위산이면서 물이 나오면 대개 초기 기독교의 교부(敎父)들이 수행하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 마이산의 암마이봉에서 맥이 내려와 봉황의 머리와 같이 생긴 봉두산으로 갔다가, 이 봉두산에서 다시 내려온 맥이 뭉친 지점에 금당사(金堂寺·金塘寺)가 자리 잡고 있다.
금당사는 오래된 절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650년에 망명해온 보덕화상이 있고, 보덕화상의 제자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세운 절이니까 말이다. 보덕화상은 고구려의 비중 있는 고승이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도교 우대정책과 충돌하였던 모양이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면서 도교를 내세우자 기존의 주류 종교였던 불교는 찬밥을 먹어야 했던 모양이다. 연개소문은 강화도 출신으로 무술에 뛰어난 고단자로 알려져 있다. 전통무예를 연마하는 ‘기천문’에서는 연개소문이 기천문의 무술을 연마했던 고단자라고 이야기한다. 기천문의 고급과정 상박권(上膊拳)까지 도달한 무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엎드려 있다가 튀어 오르면서 팔뚝으로 상대방의 관자놀이를 타격하는 기술이 상박권인데, 이 상박권을 한 대 맞으면 상대방은 사망하거나 기절한다고 한다.
열반경의 대가 보덕화상의 망명
무공의 고단자였던 연개소문은 자신의 무술 뿌리를 한민족 고유의 선가(仙家)에 두고 있었고, 선가와 비슷한 중국 도교에 호감을 보였던 듯하다. 아울러 기존 귀족 세력이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새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불교를 통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왕의 이름이 불교식으로 지어진 사례가 많다. 흥미롭게도 백제·신라보다 불교식 왕명이 가장 적은 나라가 고구려이다. 신라가 불교식 왕명이 가장 많다. 그다음이 백제이고, 고구려는 불교적 맥락의 이름이 적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여튼 연개소문의 이러한 불교 소외정책에 순응할 수 없었던 불교계의 고승 보덕화상은 백제지역, 지금의 전주 외곽 고덕산(高德山)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이었다. 고덕산에 있었던 보덕화상의 거처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었다. ‘고구려에서 날아온 암자’라는 뜻이다. 날아왔다는 의미의 비래(飛來)가 붙은 이유는 보덕의 망명이 그만큼 전광석화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현재 고덕산에 가보면 비래방장은 터만 남아 있다. 언뜻 보기에 고덕산은 한 종파의 본산을 형성할 만한 산세를 가지고 있는 산은 아니다. 깊은 골짜기와 높은 암봉을 지닌 산세가 아니다. 그런데도 보덕은 여기에 터를 잡았다. 아마도 전주와 익산이 가깝다는 위치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보덕 사후에 고구려가 망하고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임시 망명정부가 익산의 금마에 세워졌다. 이름은 보덕국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망명국가 이름을 ‘보덕국’이라고 지은 것도 고덕산에 비래방장을 세웠던 보덕화상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이 고덕산에다 비래방장을 옮겨 왔던 것일까? 급하니까 임시로 머무를 만한 터로 옮겨 오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보덕화상은 ‘열반사상’의 대가였다. 대승 경전 중에 ‘열반경(涅槃經)’이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무렵에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열반경’이라고 한다. 요지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한다. 이 부분이 대승불교 특유의 사상이다. 평등사상이다.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노예계급, 천민들도 불성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건 파격적인 생각이다.
▲ 금당사 마당에 연못이 있다. 바위가 많은 곳에는 물이 있어야 터가 오래간다.
원효와 의상으로 이어진 ‘열반방등경’
‘열반경’에 이 평등사상이 많이 들어 있다. 이 평등사상이 원효에게 계승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원효의 저술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열반종요(涅槃宗要)’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성을 6가지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다.
원효가 ‘열반종요’를 저술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바탕은 보덕화상에게 배웠다고 본다. 선생도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상은 없다. 열반종의 대가인 보덕화상이 백제로 망명해 왔을 때 원효가 여기로 와서 공부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원효와 의상이 보덕화상에게 ‘열반방등경’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의천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 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치원도 보덕의 전기를 남겼다. 보덕이 당대와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대단한 사상가요 고승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는 증거이다. 원효가 말년에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시장바닥을 돌며 민초들에게 불법을 이야기하고 다닌 것은 ‘열반경’의 ‘빈부귀천 없이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는 평등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가능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백제로 망명하여 ‘열반경’ 사상을 전파하였던 보덕화상 문파는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가. 보덕 이후로 그 제자들이 여기저기에 사찰을 짓는다. 대표적인 것이 계룡산 신원사. 계룡산에서 가장 바위 맥이 세게 내려간 곳이 남쪽으로 간 지맥이고 여기에 신원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문경의 대승사도 보덕의 제자가 세운 절이다. 모악산의 대원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이산의 금당사는 보덕화상 이후로 열반종의 중심 사찰로 기능한 것 같다. 우선 산세가 범상치 않다. 마이산의 정기가 뭉친 지점에 자리 잡았다. 비래방장이 있었던 고덕산이 육산이고 산의 규모가 좀 작은 편인데 금당사가 자리 잡은 터는 사방이 바위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절이 바위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으면 사방에서 기가 전해진다. 마치 압력밥솥에서 찌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사방 바위 터는 주변 봉우리가 너무 높지 않아야 한다. 높으면 답답하다. 절을 누른다. 마치 감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당사 터는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암봉들이 절을 누르지는 않는다. 적당하게 둘러싸면서도 압박감은 들지 않는 터에다 절을 잡았다. 고단자의 택지법(擇地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렇게 사방이 바위 봉우리로 둘러싸인 곳은 대개 수행터로서 일급이다. 그러니까 보덕 이후로 열반종의 본찰로 기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바위 옆에는 연못이 있어야
금당사 법당에서 바라다보면 전방 500m 앞의 바위 봉우리 중간에 고금당이 있다. 고금당은 바위굴이 중심이다. 보통 나옹굴이라고 한다. 고려 나옹대사가 이 굴에서 수행하였다. 나옹대사의 토굴가도 이 나옹굴에서 수행한 뒤에 나온 오도송(도를 깨닫고 지은 선시)이기도 하다. 나옹굴은 바위 절벽 7부 능선쯤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아마도 이 바위동굴에서 먼저 도인들이 수행을 하다가 차츰 추종자가 생기고 제자들이 왕래를 하게 되니까 그 밑에 위치한 평평한 지점에 금당사를 세웠을 것이다. 금당사가 본찰이라면 나옹굴(현재 고금당)은 조실 스님이 머무르는 곳이 되거나, 아니면 혼자서 수행을 세게 밀어붙일 때 머무르던 특별한 수행터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왜 절 이름을 금당(金堂)이라 했을까? 오행에서 서쪽은 금(金)의 방향에 해당한다. 동쪽은 목(木)이다. 금당사는 서향이다. 서쪽을 바라다보고 있으니까 아미타 도량이다. 불교에서는 서쪽에 극락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본당 건물 이름이 극락보전(極樂寶殿)이다. 서향으로 되어 있는 불교 법당은 극락보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금당사는 서향으로 되어 있어서 절 이름을 금당사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어떤 문헌에서는 당(塘)이라고 나온다. ‘塘’은 작은 연못을 가리킨다. 절 마당의 미륵전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바위 틈새로 흘러나온 물이 고여서 된 연못이다. 여름에는 연잎이 가득 차 있다. 금당(金塘)이라는 이름은 이 연못으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 같다. 그 터에 바위가 많으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바위는 불이다. 불만 있으면 너무 건조하다. 물기가 있어야 촉촉함이 있다. 그리고 금생수(金生水)의 이치가 있다. 바위는 금이다. 바위는 물을 만나면 그 기운이 좀 빠진다. 기운이 적당히 빠지고 수기가 보충되어야만 터가 오래간다. 그러려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고, 주변에 연못이나 냇물이 감아 돌아야 한다. 금당사 경내의 이 연못은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연못이 있음으로써 금당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金塘(금당)’이라고 이름 붙여도 충분히 일리가 있고, 과한 표현이 아니다. 금처럼 귀한 연못인 것이다.
마이산은 두 개의 바위 봉우리가 오행으로 보면 금체(金體)로 본다. 이씨 조선(李氏 朝鮮)은 자신들을 목(木)으로 보았다. 금극목(金克木)이다. 마이산은 이씨 왕조를 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름을 속금산(束金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금기를 묶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마이산 덕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아이러니하다. 고려 말기에 마이산에서 멀지 않은 남원 근처의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그 왜구와의 전투에서 지형지물을 섬세하게 살폈으며, 그때 이 마이산에 와서 기도를 올려 새로운 왕이 될 수 있는 금척(金尺)을 꿈에 받았다고 한다. 금으로 된 잣대가 금척이다. 금척은 만물을 재고 평가할 수 있는 권력을 상징한다. 마이산은 유달리 금(金) 자가 많이 들어가는 산이다. 그 금이 많은 마이산의 중심에 금당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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