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처럼 사라져 버린
굶어 죽은 천재 천문학자 김영 이야기
지은이 : 정민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능력 있는 사람이 대접 받는 사회, 공정한 룰이 지켜지는 시스템을 사람들은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세상이 그렇듯이 공정하지도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림 당하고,
부족한 것들이 작당해서 능력 갖춘 사람을 왕따시켜 버리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상 있는 일이다.
1998년 대만의 정치대학교에 교환교수로 1년 간 머문 적이 있다. 학교에는 주인 없는 개들이 유난히 많았다.
두세 마리 혹은 서너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는 이 놈들은,
따뜻한 볕을 찾아 배를 깔고 누워 자다가 밥 때가 되면 식당 근처나 쓰레기통 주변을 기웃거리며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일이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이 개들에게도 이른바 구역이 있어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좀체로 없었다.
각 구역에는 으레 두목 격의 개가 한 마리씩 있었다. 상경대학 주변에 있는 개들이 덩치가 제일 크고 무리도 많은 편인데,
이곳은 구내식당과 인접해 있고 학생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종종 가져다주어 굶을 걱정이 없는 명당자리였다.
이곳의 대장은 덩치가 큰 검은 점박이였다. 녀석은 언제나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는데,
먹을 것이 생겨도 부하들은 결코 먼저 입을 대지 않았다.
간혹 영문을 모르는 신참내기 개가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대번에 부하들에게 물어 뜯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곤 했다.
어쩌다 한 번씩 학교에 때아닌 개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내 연구실이 있던 외국어문학부 건물 주변은 다리가 짧은 엷은 밤색개의 관할구역이었다.
검은 점박이와는 달리 녀석은 부하를 거느리는 법 없이 혼자 다녔다. 아침마다 제 구역을 한 바퀴씩 시찰하는 모양인데,
녀석이 짧은 다리로 한참 폼을 잡고 걸어갈 때 차가 옆을 지나갈라치면 물어뜯을 듯 짖어대며
자동차를 향해 덤벼드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녀석의 호전적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보는 사람이 적을 때는 절대 그러지 않는 것도 특기할 만했다.
먹을 것이 신통 찮은 후문 어귀나 후미진 신문관 쪽은 으레 힘이 없어 쫓겨난 흉터 투성이 개들의 차지였다.
간혹 거기서도 위계질서 같은 것이 보여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었다.
저는 손 하나 까딱 않고 부하들만 시키는 검은 점박이나, 일일이 제가 다 챙기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밤색 짧은 다리,
그 밑에서 넘버 투나 넘버 쓰리 자리를 놓고 충성을 경쟁하는 부하들,
또는 공연히 멋모르고 주위를 서성대다가 아닌 이빨에 제 살을 뜯기고 마는 신참내기,
아니면 아예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굶주림을 감내하고 있는 상처 입은 개들.
참 이곳 개들의 사회도 사람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란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에 싸움 잘하는 한국의 진돗개나 풍산개 한 마리를 풀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강의실을 오가곤 했다.
그 해 11월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자자리 유성우(流星雨)의 장관을 TV화면으로 보다가,
나는 전혀 엉뚱하게도 학교의 개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유성처럼 사라져버린 조선 후기 한 천문학자의 서글픈 초상이 그 위에 포개져 떠올랐다.
김영(金泳, 1749~1817), 내가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이 유일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문집에 대한 해제를 쓰면서였다. 벌써 10년 저쪽의 일이다.
홍길주의 문집은 3종 36권 17책으로, 당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고양된 문화 역량을 한눈에 보여주는 방대하고도 호한한 저작이다.
그 가운데 나를 특히 애먹였던 것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는 <기하신설(幾何新説)>과 <기하잡쇄보(幾何雑砕補)> <호각연례(弧角演例)> 같은 기하학 관련 저술이었다.
자술(自述)에 따르면 홍길주는 7~8세 때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 때 이미 연립방정식의 해법 및 제곱근과 세제급근의 풀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완전히 해득했을 만큼 수학과 기하학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호각연례>는 황도와 백도 상 해와 달의 운행을 예측한 것으로,
유클리트의 평면기하학을 넘어선 구면삼각법(球面三角法)의 난해한 이론을 소화하여 천문학에 활용한 것이다.
중국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보고, 그 내용이 너무 소략하여 이해하기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부연하고 도면으로 풀이한 것이다. 스물아홉(1814)에 착수하여 23년 뒤인 쉰둘(1837)에야 완성을 본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간과치 못할 특이한 저술이다.
비록 아직까지 학계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홍길주는 <호각연례>를 완성한 후 바로 자신의 수학 선생인 김영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못내 애석해했다.
그의 문집에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던 김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 <김영전(金泳伝)>이 실려 있다.
이 전기에 따르면, 김영은 인천 사람으로 신분이 미천했으며, 용모가 꾀죄죄하고 말도 어눌하여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역상산수(曆象算数)의 학(学)에 있어서는 신수(神授)라 할 만큼 독보의 조예가 있었다.
그는 스승 없이 《기하원본(幾何原本)》 1책을 독학해서 익힌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에 흥미를 느껴 향후 15~16년 간 역상(曆象)에 더욱 침잠 몰두하여 마침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김영의 재능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 1736~1799)였다.
산학으로 당대에 가장 이름이 높았던 서호수는 관상감(観象監 : 오늘날 기상대와 천문대의 기능을 아우르고 있던 서운관書雲館)의 제거(提挙)로 있을 때,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본 후, 대번에 당대 으뜸으로 자부하던 자신의 실력이 그에게는 결코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관상감의 책임자로 있던 홍길주의 조부 홍락성(洪樂性, 1718~1798)에게 김영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김영은 관상감에 기용될 수 있었다.
김영이 당대 쟁쟁한 벌열이었던 홍씨 집안과 서씨 집안에 드나들게 된 것은 이런저런 얽히고 설킨 인연이 있었다.
홍길주의 어머니 영수각(令寿閣) 서씨(徐氏)만 해도 서호수와 한 집안인데다,
《주학계몽(籌学啓蒙)》에서 평분(平分), 약분(約分), 정부(正負:양수와 음수),
구고(句股: 직각삼각형)에 대한 설명이 번잡하여 어려운 것을 보고 스스로 계산법을 창안할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홍길주의 문집에 대한 해제를 쓴 뒤, 김영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희미해져갈 무렵, 나는 다시 한 번 김영과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
어느 날엔가 서호수의 아들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을 보다가
그에 대한 또 한편의 전기인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伝)>과, 서유본이 김영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서유본의 문집은 국내에는 없고 일본에만 있는 것을 이우성 선생께서 복사해와 소개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진 책이었다.
특히 서유본이 쓴 전기는 홍길주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해, 이 글을 읽고는 김영이란 인물이 보다 실감 있게 다가왔다.
서유본의 글을 보고 나서 나는 자꾸 그가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어한다는 이상한 느낌을 가졌다.
이후에도 《이항견문록(里巷見聞録)》과 《조선왕조실록》에 그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서유본의 전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영(泳)이요 자는 계함(季涵)이니 김해 사람이다. 아비는 아무이고 조부는 아무이다. 대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이리저리 떠돌다 서울로 왔다. 사람됨이 성글고 고집불통인데다 기질(気疾)이 있었다. 키는 후리하게 크고 얼굴은 야위었으나 두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서유본은 김영을 김해 사람, 홍길주는 인천 사람이라고 했고, 《이항견문록》에는 또 영남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출신조차 분명찮은 미천한 신분이었던 듯하다.
여기에 홍길주의 기록까지 더하면 비쩍 마른 꾀죄죄한 용모에 후리후리한 키, 성깔 있고 고집 있게 생겼으되,
말은 어눌하여 우물대기만 하는 괴퍅한 성격의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에 계(季)자를 쓴 것으로 보아 여러 형제 중 막내였던 듯 하나 이것도 확인할 수 없다.
기질(気疾)이 있다고도 했다. 《이항견문록》에는 그가 젊은 시절 산술에 통달하고도 본원(本源)의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여러 해 고심진력 하느라, 마침내 유울지질(幽欝之疾)을 앓아 여러 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었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우울증 증세도 보였던 것 같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주변 사람과 별 교통이 없는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공부하였고,
거기에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스승조차 없는 답답함이 더하여, 종내는 히스테리 발작 증세까지 나타났던 모양이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789년의 천역(遷役), 즉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顕隆園)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할 당시였다.
그 전해에도 일식(日食)의 도수가 북경과 큰 차이를 보이자 김영이 들어가 원인을 규명한 일이 있었다.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정남쪽에 보이는 별인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난지라 별자리의 위치가 1도 가까이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이 실제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관상감사(観象監事) 김익(金熤)이 김영을 천거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 적도경위의(赤道経緯儀)와 지평일구(地平日晷:해시계) 등을 만들게 했다.
이때 김영은 이들 의기(儀器)와 함께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누주통의(漏籌通義)》를 편찬하여 바쳤다.
이것으로 중성을 관측하여 올바른 시간을 추산해 천역(遷役)의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때 일은 《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 8월 21일자 기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김영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특례로 역관(曆官)에 발탁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문직이었던 관상감에는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특례로 발탁된 전례가 없었다.
정조가 특명으로 그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김영과 같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상례에 따를 수 없다”고 하자,
관상감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시기하여 “이는 우리 관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격렬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를 역관에 임명했을 뿐 아니라 아예 관상감의 관원들을 그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관상감 관원들은 매번 추보(推歩:천체의 운행을 관측함)의 일이 있을 때마다 김영에게 묻지 않고서는 위로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
출신도 불분명한 미천한 농군의 아들이 과거도 거치지 않고 관상감 관직을 얻은 것은 조선조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후 그는 종6품의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통례원인의(通礼院引儀) 등의 벼슬을 거쳤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역관의 일은 늘 겸임하였다. 나라에 성력(星暦)과 관련된 큰 논의,
즉 일식이 있거나 혜성이 나타나면 그는 관상감에 불려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였다. 그의 계산은 역상 서적상의 오자까지도 다 잡아낼 만큼 정확하였다.
정조가 승하하고 후원자였던 서호수 마저 세상을 뜨자,
주변머리 없던 김영은 달리 청탁할 데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그만 벼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1807년 혜성이 나타나더니 1811년 다시 큰 혜성이 나타나자, 나라에서 관상감에 명하여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 했는데,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 들였다.
또 1813년 겨울 역법상의 문제로 중국 흠천감(欽天監)에 가 자문을 청할 적에도 관상감에서는 김영 외에는 달리 적임자가 없었다.
그때 그는 연경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으로 《만년력》 몇 권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로 역법 상의 해묵은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그러자 관상감원들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이제 무서울 것 없는 그들은 거리낌 없이 김영을 못살게 굴었다. 서유본은 이때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관상감에 들어간 뒤 일이 있을 때는 인정받아 중히 여김을 받았고, 일이 끝나면 그 능력을 질투하여 왁자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혹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다 욕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용렬한 소인배들의 행태가 눈에 선하다. 성깔 있던 김영은 더러운 꼴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벼슬을 걷어치우고 나와 버렸다.
벼슬을 그만둔 후에는 집도 절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아이들 서당 선생 노릇으로 근근히 연명하며 지냈다.
아무도 늙고 병든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서유본은 “그가 사색 공부에 힘쏟음이 적었으므로 마침내 기질(気質)이 되고 말았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하여졌다”고 적고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못 이겨 종내는 젊은 날의 우울증 증세가 도져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벼슬을 때려치운 뒤, 그는 수학 공부에서 《주역》에 대한 공부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영의정 김익의 강권으로 장가를 갔지만, 먹고살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다 부서진 집에서 《주역》연구에 몰두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주역선생이라고 불렀다. 《주역》에 대한 경지가 깊어지자, 그는 스스로 “사람이 오래 살아야 백 살인데, 이제부터 내게 30년만 더 주어진다면 오히려 깊고 오묘한 이치를 두루 캐어 물리(物理)의 학문을 크게 펼쳐 이 세상을 위해 한 사업을 마련할 수 있을텐데”라고 말할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도 대단하였다. 서유본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가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을 잘 앓는데다가 알량한 녹(禄)마저 끊어지자 굶주림과 곤궁함이 또 닥쳐왔다. 이따금 호상(湖上)으로 나를 찾아오면 머리를 푹 숙이고 기운도 없이 풀이 죽어 마치 피곤해 꾸벅꾸벅 조는 사람 같았다. 내가 시험삼아 상수(象数)의 요결(要訣)을 가지고 슬쩍 그를 돋울라치면 문득 눈을 부릅뜨고 손바닥을 쳐가면서 정채가 환하게 사람을 격동시켰다.
요컨대 이 시기 그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던 것이다. 오직 학문만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의 관심은《주역》외에 율려(律呂), 즉 음악 방면으로도 확장되었다. 서유본이 그에게 보낸 편지 <답김생영서(答金生泳書)>를 보면 상세한 언급이 있다.
혼자서 침잠하는 동안 지적 희열과 성취욕에 빠져 있던 김영은 서유본에게 자신이 깨달은 이런저런 사실을 이야기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내용인즉 주자가 말한 ‘오십상승(五十相乗)’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다거나, 소강절(邵康節)의 주장이 견강부회의 억지 주장이라는 식으로, 선현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이들의 우주에 대한 지식은 김영이 볼 때 너무 초보적이고 오류 투성이였다.
그러자 서유본은 선현의 말씀을 얄팍한 지식으로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며 근거를 대어 준절히 나무랐다. 서유본 또한 김영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공연히 그의 논의가 성현을 표적으로 하여 쓸데없이 구설에 말려드는 것을 염려했던 배려였던 셈이다. 서유본이 김영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는 지적 성취감에 한창 고무되어있던 만년 김영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서유본은 김영에게 당시 남사고(南師古)의 저작으로 전해지던 《동국분야기(東国分野記)》를 보완해 여지도(輿地図)에 따라 별자리의 분야(分野)를 재배열하여 한 권의 완성된 책을 만들어볼 것을 권면하기도 했다. 분야는 천체의 별자리를 구획으로 나누어 방위로 구분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중국을 기준으로 할 때 늘 동북 방면인 기미(箕尾)의 분야에 속했다. 서유본은 중국은 자기 땅을 기준으로 자기 나름의 분야가 있고, 조선은 조선 대로 한양을 중심으로 분야를 표시해야 한다는 자주적 인식에 따른 주문이었다.
김영은 이밖에도 자신이 공부한 것을 <역설(易説)>과 <악률설(楽律説)>로 정리해두었다. 또 《역상계몽(易象啓蒙)》․《기삼백해(朞三百解)》․《도교전의(道教全議)》․《관물유약(観物牖鑰)》 등의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제목만 전해질 분 전하는 것은 없다. 그는 관상감에 있는 동안 많은 책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국조역상고(国朝曆象考)》와 《칠정보법(七政歩法)》등은 모두 그가 중심이 되어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은 책의 맨 끄트머리에 실무 기사의 한 사람으로 올라 있을 뿐이다. 다만 그가 만든 적도경위의(赤道経緯儀)와 해시계의 일종인 지평일구만은 관상감에 보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세상을 뜨기 직전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학문을 저술로 남길 것을 권하는 서유본에게, 서양의 양법(量法)과 시학(視学)을 실용화하고, 불편한 용미거(竜尾車) 대신 편리한 용골거(龍骨車)의 기아(機牙) 도설을 완성해 수리와 농공에 보탬이 되게 하며, 자명종과 시계의 도설(図説)을 정리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작업을 필생의 사업으로 알고 민생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자 밤낮 힘쏟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는 시간이 넉넉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수학에서 출발한 그의 관심은 죽기 직전까지도 천문과 역법, 주역과 악률, 그리고 서구의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탐구욕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죽기 전 그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록해둔 난고(乱稿)가 상자에 가득하다. 반드시 훗날 책을 이루어내려 했으나 이제는 글렀구나. 내 죽은 뒤 삼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가서 삼호(三湖)의 서유본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의 부고를 들은 서유본이 그 집에 사람을 보냈을 때, 원고가 가득 담겨 있던 책 상자는 관상감 생도가 이미 훔쳐가 버린 뒤였다. 이미 그의 연구를 도적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살았을 때 면전에서 욕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자들이었다. 결국 김영의 필생의 저작들은 보아도, 가져가 봐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할 자들의 손에 들어가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고 했다. 워낙 늦은 결혼이었으므로 그가 세상을 떴을 때 모두 어린 나이였다. 홍길주는 <김영전>에서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유락(流落)하여 간 곳을 알지 못한다 한다”고 적었다. 그가 죽자 식솔들마저 유리걸식하며 뿔뿔이 흩어져갔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약간 차이가 있다. 《이항견문록》에서는 을해년, 즉 1815년 봄 곤궁 속에서 굶어 죽었다고 적었는데, 서유본은 그보다 두 해 뒤인 1817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했다. 연도는 서유본의 기록에 더 신뢰가 가지만, 굶어 죽었다는 《이항견문록》의 기록이 마음에 맺힌다. 학문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주변의 질시는 높아만 갔다. 그는 세상에 버림받은 채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평생을 따라다니던 곤궁을 떨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언젠가 대만 정치대학교 본관 앞에서 나는 참혹한 형상의 개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다. 목 둘레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숨쉬는 것조차 힘든 듯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어릴 때 주인을 잃은 개로, 집을 나온 후 몸집은 커가는데 목줄은 그대로 있어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자 제 깐엔 그것을 풀어보려고 몸부림 쳤던 모양이다. 이제 목줄은 살 속 깊이 박혔고 목 둘레는 온통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어 차마 손을 댈 수조차 없을 만큼 참혹한 몰골이었다. 그놈은 이제 숨쉴 기력도 없이, 다른 개들의 텃세를 피해 학교 구석진 곳만을 골라 맴돌고 있었다. 녀석은 제 몸이 커갈수록 점점 더 죄어오는 고삐의 질곡을 괴로워하다 그렇게 세상을 마쳤으리라.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홍길주는 <김영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그러고는 슬쩍 남의 것을 훔쳐다가 제 것인 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하늘을 휘황하게 수놓고 사라져버린 유성을 보다가, 자꾸만 어느 보이지 않는 그늘 아래서 피투성이인 채로 죽어갔을 그 개를 생각했다. 사자자리 유성우의 최초 관측 보고는 김영이 51세 때인 1799년 11월에 미국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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