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든 '나'는 희생에서 자존의 주체로 발전
갑골문의 我는 용도가 다양한 창의 형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창은 '나'를 나타내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인기를 얻자 중국에서도 <我是歌手 Wǒ shì gēshǒu>라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어설픈 실력으로 무늬만 그럴듯하게 포장된 가수보다는 가수 본연의 실력과 아이덴티티를 지니기를 바라는 대중들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정글과도 같은 경쟁의 전장터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실력만이 자신을 지켜줄 무기뿐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창(戈)을 든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을 나타내는 我(wǒ)이다.
자살한 장궈롱(張國榮)이 불렀던 <我>라는 노래를 중국판 <나는 가수다>에서 상원제(尚雯婕)가 리메이크하여 불렀는데 가사 중에 '나는 바로 나다(我就是我 Wǒ jiù shì wǒ)'라는 대목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내가 그녀가 되고, 그녀가 내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굳건한 나 자신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최근 중국의 젊은이들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SNS를 통해 나(我)를 발음이 비슷한 '偶(ǒu)'로 바꾸어 표현한다고 한다. 방언의 발음을 가져와 사투리가 갖는 친근함과 신선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겠지만 '한 자녀 정책' 이후 너무 홀로 고립된 자아에 대한 반대급부로 '짝, 커플'의 의미가 담긴 '偶'가 환영받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버리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교의 고장 중국 황산(黃山)에는 여자 조상을 따로 모신 청의당(淸懿堂)이라는 사당이 있는데 그 현판에 쓰인 '我'는 가로획이 끊어져 있다. 여자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나는 늘 가족과 국가를 위해 희생되어지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我가 '나'인지 '우리'인지 모호한 것처럼 가족공동체 의식이 강한 한국인은 '나'와 '우리'의 구분이 모호하다. 예를 들면 '우리 아내', '우리 엄마' 등이다. 우리집을 중국어로 '我家'가 아닌 '我们家'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런 혼란 때문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은 중국어로 我思故在(Wǒ sī gù zài)라고 한다.
'나'를 나타내는 말에는 我 이외에도 吾(wú), 予(yú), 余(yú) 등이 있는데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吾'는 육체로서의 일반적인 자신을 이르고, '我'는 수련의 결과로 이룬 진정한 자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나(我)'는 전통사회에서 국가나 가정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작은 존재에서 점점 스스로 자존감을 갖는 소중한 존재로 발전되어 왔다. 인간은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와 행동의 방식을 유지, 고집하며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我行我素(wǒxíngwǒsù)의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조조가 우유에 '합(合)'자를 쓴 까닭은?
윗부분의 솥뚜겅이 아랫부분의 용기와 합해져 잘 맞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맹자는 일찍이 중국의 역사를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예언한 바 있다.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는 중국사를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합해진 지 오래되면 나눠지고, 나눠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다시 합해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말로 간명하게 표현한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분열이 가져오는 혼란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중국인들은 그래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나 다소간의 비민주적인 통치방식에도 비교적 관대하게 수용하는 편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합(合, hé)' 의 가치에 동의하고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갑골문에 보이는 '합(合)'자는 솥의 위 뚜껑과 아랫부분의 용기가 하나로 알맞게 합해짐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닫다, 합하다, 알맞다는 의미가 파생된 것이다. 현재 중국은 여러 개의 솥뚜껑이 '중국(中國)' 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잘 합(合)해져 있는 역사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56개의 민족을 '중화(中華)'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고, 한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민족의 역사도 큰 틀에서 중국역사로 편입하는 '합(合)'의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는 시점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합(合) 이데올로기'에 견해를 같이하며 불모이합(不谋而合, bùmóu'érhé)의 태도를 보인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웅(英雄)>에서 충분한 능력을 갖춘 전설의 자객이 천하의 안정과 통일을 위해 진시황의 시해를 스스로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티베트와 위구르의 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소수민족들도 자발적으로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고 있다.
전국시대 강대국 진(秦)에 대항하기 위해 소진(蘇秦)의 종적 연대인 합종(合從)에 맞서 장의(張儀)는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성사시키는 연횡(連衡)으로 중국을 통일하였다. 지금도 중국 중앙정부는 소수민족을 개별적으로 각종 혜택과 발전공약으로 회유, 포섭하며 '하나의 중국'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위나라의 조조는 진상되어온 당시 귀한 우유를 혼자 마실 수 없어서 한 입 조금 마시고는 우유병에 '합(合)'자를 써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그 우유를 한 모금씩 돌려가며 마셨다. '合'자가 사람 인(人), 한 일(一), 입 구(口)가 모여 된 글자여서 '사람마다 한 모금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전의 성과를 한 입씩 골고루 나눠 먹는 것이 어쩌면 '합(合)'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지금 중국은 하나로 합(合)해진 상태이고 소수민족의 독립 등 분열을 예방하기 위해 강력한 중국공산당독재를 실시하고 있지만 극심한 빈부격차와 지역차를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합구필분(合久必分)'의 역사적 경험으로 비춰보면 합(合)의 상태인 '하나의 중국'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 4대 발명품 중 2개가 책과 관련 있는 이유
책 ‘서(書)’자는 붓(聿)과 아래의 그릇에 담긴 먹을 찍어 글을 쓰는 모습을 나타낸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은 종이, 나침반, 인쇄술, 화약인데 이 가운데 두 가지는 책(冊)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책을 매우 중시한 나라이며 중국인들은 뛰어난 기록정신과 문자 숭배 전통이 이어져 풍부한 역사 기록물을 남겨 놓았다.
책을 나타내는 한자 '冊'은 죽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죽간을 가죽 끈으로 묶는데 공자가 <주역(周易)>을 여러 번 읽어 그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책 '서(書)'자는 붓(聿)과 아래의 그릇에 담긴 먹을 찍어 글을 쓰는 모습을 나타낸다. 해서(楷書)체의 글자 형태를 지금 중국에서는 간체자로 사용하고 있다. '서(書)'자 발음은 'shū'인데 '(경기에서)지다(输)'와 발음이 같아서 공자님이 이사 간다고 하면 뒤에 자연스럽게 '온통 책이다(净是书)' 라는 말이 이어지므로 시합에서 졌다고 할 때 중국인들은 '공자님이 이사 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주자(朱子)가 선정한 유교 필독서인 4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가리킨다. 중국 문화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한 권의 책(最能代表中國文化的一本書)을 묻는 인터넷 설문조사에 중국인들은 4서 3경을 비롯해 사마천의 <사기(史記)>, <홍루몽(紅樓夢)>, 이백과 두보의 시집, 루쉰(魯迅)의 소설 등을 꼽았다.
진시황은 BC213년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는데 이때 불태운 책은 모두 죽간 형태의 것이고 춘추전국시대 이미 책의 보급이 이뤄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책에 적힌 옛 것을 가지고 진시황을 비방하던 학자 460명은 산 채로 땅에 묻혀야 했다.
진시황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화폐, 도량형, 문자, 사상 등 강력한 통일 정책은 중국 대륙이 유럽처럼 여러 국가로 분화하는 것을 막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수레는 같은 넓이의 궤도로 하고 문자는 하나로 같게 한다(車同軌, 書同文)는 정책이 없었다면 중국도 유럽처럼 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 구역으로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국시대의 다양한 금문(金文)을 진시황은 문자의 통일을 위해 소전(小篆)으로 통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분서를 단행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의 분서 이후 한 무제에 이르러 옛 책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하는데 민간에는 다행히 불태우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었다. 공자의 후손이 노벽(魯壁)에 책을 숨겨 놓은 것이나 복생(伏生)이 구술로 사라질 뻔한 <서경(書經)>을 불완전하게나마 되살린 이야기는 중국인들이 책에 대해 얼마나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脩)는 장서 만 권, <집고록(集古錄)> 천 권, 거문고, 바둑판, 술 주전자와 자신을 합쳐 '육일거사(六一居士)' 라고 스스로 칭했으니 책을 자신의 또 다른 분신으로 여기던 고대 지식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심해도 너~무 심한 중국어 과장법
아들 왕헌지가 쓴 大에 아버지 왕희지가 점을 더해 太가 되었다.
언제
중국 샤오싱(紹興) 인근에 있는 <난정집서>(蘭亭集序)로 유명한 란팅(蘭亭)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가이드가 클 태(太)자 비석 앞에서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사람이 많아 들을 수가 없었다. 붓글씨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Wáng Xīzhī)가 쓴 것이겠거니 하고 돌아서려는데 가이드가 친절하게도 다가와 개인적으로 설명을 다시 해줬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의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献之·Wáng Xiànzhī)가 어렸을 때 붓글씨 연습을 하다가 부모님께 칭찬을 받기 위해 하루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말 잘 썼다고 생각되는 글씨 '대'(大·dà)를 가지고 아버지 왕희지에게 보여줬다. 왕희지는 아들이 쓴 글씨를 보고 아무 말 없이 점 하나만 더 해 '태'(太·tài)로 만들어줬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지 못한 왕헌지는 그 글씨를 들고 다시 어머니에게 보여줬다. 어머니는 글씨를 자세히 보더니 다른 것은 다 아직 부족한데 여기 이 점은 정말 잘 썼다고 칭찬해줬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가 찍어준 것이었다. 왕헌지는 자신의 붓글씨가 부족함을 알고 더욱 노력해 아버지의 대를 잇는 위대한 서예가가 됐다는 이야기다.
태(太)는 '크다'는 의미의 '大'자에 아래에 점을 찍어 더 큼을 나타낸 지사자다. 중국어에서는 '너무'라는 의미의 부사로 사용되는데 약간 과장된 언어습관을 즐기는 중국인들은 습관적으로 '너무' 라는 말을 붙여 쓴다. 그래서 너무 혹은 매우에 해당하는 단어가 매우 많다. 很(hěn),真的(zhēnde),非常(fēicháng),挺(tǐng),特别(tèbié),实在(shízài),十分(shífēn),好(hǎo)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하여 중국인의 화법에서 너무·정말·매우 등이 상투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대화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말의 의미를 때로는 평가절하해 들어야 할 때가 많다는 의미다. '0'의 개념을 만들어낸 인도인의 풍부한 상상력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허풍과 뻥에 능한 것이 중국인이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과장법이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적인 수사법으로 자리 잡았다.
<해하가>(垓下歌)에서 항우의 힘을 표현하며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氣蓋世)"라고 하는데 조금 심한 과장일 테다. 두보(杜甫)는 천재 시인 이백(李白)을 "붓을 들면 비바람이 놀라고 시가 완성되면 귀신이 울고 갔다(笔落惊风雨,诗成泣鬼神)"고 높게 평가한다.
이에 질세라 이백은 유명한 <추포가>(秋浦歌)에서 "백발 삼천 장 / 시름 때문에 이처럼 자랐나니 / 알 수 없구나 / 밝은 거울 속의 몰골은 / 어디서 가을 서리 맞았는지(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라고 삼천 장의 머리카락 운운하며 과장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언어마다 독특한 스타일과 맛이 있다. 중국어는 성조 언어로서 날아다니는 무술영화 같은 다이내믹함과 '뻥'이 내재돼 있으면서 또 기름지고 느끼한 중국요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한 의미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가 많다
차에 들어있는 숫자 108 보이세요?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에는 삶을 관조하는 여유가 깃들어 있다.
차(茶)는 고대로부터 비단, 도자기와 함께 중국의 3대 수출품이었으며 전 세계로 전해졌다. 그런데 육로를 이용해 차가 전해진 지역에서는 차의 발음이 주로 광동(廣東)발음인 'cha'이고 바닷길로 전해진 지역은 푸젠(福建)발음인 영어의 'tea'처럼 읽힌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茶의 독음으로 '차'와 '다' 모두 사용된다는 점이다. 차집과 다방이 모두 가능한 셈인데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깝다보니 두 지역의 말이 모두 유입되어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차(茶) 자를 하나하나 보면 위에 풀 초 十, 十 더하면 20이고, 아래에 있는 八과 나무 木에 있는 十을 합친 80을 더하면 100이 되며, 마지막 두 획인 八을 더하면 108이 된다. 그러니까 차에는 백팔번뇌와 같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 있고 또 땅, 해, 바람, 이슬 등의 대자연이 함유된 차를 많이 마시면 108세까지 건강하게 산다는 의미가 되는 셈이다. 중국어에서 차수(茶壽 cháshòu)라고 하면 108세의 생신을 이르는 말이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졸음이었다고 한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졸음이 오는 것을 보고 달마는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달마상이 눈꺼풀이 없는 동그란 눈이라고 한다. 그런데 버려진 눈꺼풀이 떨어진 곳에서 나무가 자라났는데 그것이 차나무였고 달마는 그 차를 마시며 졸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차에 함유된 비타민 성분이 졸음을 쫓는데 효과가 있고 또 차는 다도로 통할 만큼 동양적인 선(禪)의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는 함의는 느낄 수 있게 한다.
송나라 때의 대문호인 소식(蘇軾)이 관복을 벗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절에 갔더니 주지가 "앉아. 차 좀 드려(坐,茶)!"라고 했다. 그러다 소식이 많은 돈을 공양하자 "앉으시지요. 차 좀 대접해라(請坐, 上茶)!"라고 했다고. 또 그가 바로 천하의 대문호 소식임을 알아보고는 "윗자리로 앉으시지요. 좋은 차 좀 내와라(請上坐, 上好茶)!"라고 했다고 한다. 주지가 소식에게 절에 붙일 좋은 글을 좀 써 달라고 요구하자, 소식은 바로 "坐,請坐,請上坐;茶,上茶,上好茶。"라는 주지의 말을 그대로 대련으로 써 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 차(茶)를 사용했기 때문에 차례(茶禮)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조선시대 들어서며 억불숭유정책으로 불교 풍습을 없애기 위해 차 대신 술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대자연의 풍파 속에서 삶을 관조하고 자연의 멋과 여유를
즐기려는 중국인의 정신이 스며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말이 도착하면 승전보를 전해온다는 고사 때문인지 중국인들은 유독 말을 좋아한다.
중국인들은 유독 말(馬, mǎ)을 좋아한다. 말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말띠해가 끝나가는 음력 12월 말경 중국 산부인과 병원은 양띠해가 되기 전에 아이를 출산하려는 임산부들로 북적일 정도라고 한다.
말이 도착하면 곧 승전보를 전해온다는 '마도성공(馬到成功, mǎdàochénggōng)'이라는 성어는 어떤 일을 시작하여 곧 성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목민족이던 몽고족은 말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몽골까지 5000km 거리를 7마리의 파발마로 하루 800km씩 달려 승전보를 전했다고 한다.
준수한 외모에 빠른 발로 전쟁에 유용할 뿐만 아니라 승리의 기쁜 소식까지 전해주니 중국인들이 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말과 관련된 고사성어가 유난히 많다. 주마간산(走馬看山), 새옹지마(塞翁之馬), 주마가편(走馬加鞭), 견마지로(犬馬之勞), 마이동풍(馬耳東風)….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 시황제는 지방의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제일 먼저 말 여덟 마리가 달릴 수 있는 길, 즉 고속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을 하면 최소 2∼3개월이 걸리는데 중앙군이 도착하면 반란군은 바로 항복을 하더라도 돌아오는데 또 2∼3개월이 걸려 엄청난 군량미와 재원이 들어간다.
반란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대를 지원하다가 국고가 바닥나 망하는 나라가 많았다고 한다. 진시황이 황토를 다져 만든 당시의 길은 지금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구간이 남아 있으며 중국어에서는 넓은 대로를 이를 때 지금도 마로(馬路, mǎlù)라고 표현한다.
진(秦)나라 환관 조고(趙高)가 이세(二世) 황제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도 유명하다. 일본어에서 바보를 '빠가(馬鹿, ばか)'라고 하는데 원래는 범어의 우둔하다는 뜻의 막가(莫迦, moha)에서 왔다고 하지만 음차(音借)하여 한자 마록(馬鹿)으로 표기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사슴과 말을 구분 못하는 지록위마를 연상되게 한다.
"천하에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伯樂)은 늘 있는 것은 아니다(千里马常有,伯乐不常有)"라는 말은 인재를 알아보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 쉽지만은 않음을 나타낸다. 목왕이 탔던 여덟 마리의 준마(穆王八駿), 항우가 타던 오추마(烏騅馬), 여포, 조조, 관우가 함께 탄 것으로 유명한 적토마(赤免馬), 당 태종이 이세민의 무덤에 조각된 소릉육준(昭陵六駿) 등이 명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고마비(天高马肥)'는 흔히 가을의 청명함과 풍요를 나타내고 '독서하기 좋은 계절'을 의미하지만 과거 중국인들에게는 이민족이 겨울 양식을 구하기 위해 살찐 말을 앞세운 강한 전투력으로 중원의 풍요를 넘보는 무시무시한 시절을 이르는 말이었다. 즉 '전쟁하기 좋은, 위험한 계절'이었던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철로의 폭이 143.51cm인 것도 말 두 마리의 엉덩이 넓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니 말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이 참 크다
곡식이 익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양으로 맛과 소리의 조화를 나타낸다.
요철(凹凸)문자처럼 생긴 활자 인쇄 공연을 위해 896명의 군인들은 6m의 나무통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통 안에서 단 1초 만에 6m를 기어오르는 힘든 훈련을 소화한 끝에 마침내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의 '화(和·hé)'자 공연을 성공적으로 완성해 낼 수 있었다.
공연 마지막에 나무통 속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공개되자 디지털 그래픽인줄 알았던 문자공연이 그들의 피땀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중국이 세계에 던진 메시지는 '평화'였지만 중화민족주의로 무장된 화평굴기(和平崛起·hépíngjuéqǐ, 평화롭게 우뚝 선다)는 나무통 가면을 쓴 위장된 평화의 이미지만 세계인들에게 강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이징올림픽 공연의 영향 때문인지 '화(和)'자는 중국 네티즌들로부터 2010년 중국을 대표하는 한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G2로 성장한 중국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중화패권주의나 중국위협론 등으로 대두되자 중국은 유난히 평화와 화합의 이미지 만들기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벼 화(禾·hé)는 익어 고개를 숙인 곡식의 모양인데 남방에서는 벼, 북방에서는 조일 가능성이 높다. 흔히 벼, 곡식의 수확, 중요한 재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화목할 '화(和)'는 벼가 입에 있으니 싸우지 않고 화목하다는 평화의 의미를 나타낸다.
고대에 '화(和)'는 '오미(五味)'와 '팔음(八音)'의 조화를 뜻하는 글자였다고 한다. 벼(禾)는 맛을 대표하고 입(口)은 불어서 내는 악기의 소리를 상징하여 그 맛과 소리의 조화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어울리면서도 자신만의 견해를 가질 줄 알아 화이부동(和而不同·hé'érbùtóng)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이(利)를 따져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tóng'érbùhé)라고 했던 공자의 말도 조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개혁개방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배고픔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했으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배 아픔의 문제가 새롭게 등장한 셈이다. 선부론(先富論)에서 공부론(共富論)으로, 발전에서 분배로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후진타오(胡錦濤)와 원자바오(溫家寶)도 조화로운 사회(和諧·héxié) 건설을 국가의 주요 시책으로 설정했으나, 큰 성과 없이 시진핑(習近平)에게 그 무거운 짐을 넘겨준 상태다. 화해(和諧)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이고, 해(諧)는 모든(皆)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결합이라고 하는데 과연 중국이 그 조화를 어떻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뤄갈지 주목된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 세 가지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갓난아기는 '엄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듣고 '엄마'라는 그 생(生)의 첫 마디를 할 수 있게 될까? 모르긴 해도 수천 번은 족히 넘어야 가능할 것이다. 선천적 청각장애인은 입이나 목의 떨림을 기억하는 피나는 노력이 없으면 거의 언어장애인(벙어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루 동안의 언어 사용 중 듣기가 45%(말하기 30%, 읽기 16%, 쓰기 9%)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듣기는 언어 생활의 시작이다. 심리치료사들은 환자의 말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며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상당한 심리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첫째 아들의 책 읽는 소리, 둘째 술 익는 소리, 세 번째로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꼽았다고 한다. 들려오는 소리 자체보다는 그 소리 너머에 이미 마음이 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들을 '청(聽, tīng)'자에 마음 '심(心)'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청(聽)자는 귀 이(耳), 임금 왕(王), 열 십(十), 누운 눈 목(目), 한 일(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로 임금같이 큰 귀와 열 개의 눈, 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간체자를 쓰는 현대 중국어에서는 웃을 은(听, tīng)자가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들을 문(聞, wén)자는 마음으로 이해해 보다 깊은 심연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듣는 것도 태도와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쓰인다. 귀를 기울려 듣는 경청(傾聽, qīngtīng), 몰래 듣는 도청(窃聽, qiètīng), 옆에 듣는 방청(傍聽, pángtīng), 감시할 목적으로 듣는 감청(監聽, jiāntīng) 등이 있다. 귀를 씻고 공손하게 듣기도 하고(洗耳恭听, xǐ'ěrgōngtīng), 귀를 막고 듣지 않기도 한다(充耳不闻, chōng'ěrbùwén).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听而不闻, tīng'érbùwén)고 했고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으라고 한다. 영국의 시인 존 키츠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 라는 시에서 "들리는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답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피리들아, 계속 불어라./ 육체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아름답게/ 영혼의 귀에다 불어라, 소리 없는 노래를."라고 노래하고 있다.
마음을 열고 우주의 기를 모아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면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리라.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친구 종자기(鐘子期)에 얽힌 고사 '지음(知音)'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소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귓바퀴와 귓볼을 형상화한 귀(耳)가 어쩌면 모든 지혜와 소통의 중심에 놓인 문인지도 모르겠다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겠다?
'말하다'는 고대 중국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된 경우가 많은데 신중하게 삼가하라는 의미가 담긴 듯하다.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할 때의 평가 기준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던 것을 보더라도 말은 용모·말씨·판단력과 함께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로 활용돼 왔다.
중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상대방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요소로 화술이 35%로 가장 높았으며 매너 30.6%, 표정 16.5%, 자세 6.8%, 옷차림 5.7%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말을 적시에 한다면 어딜 가든 환영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다'는 의미의 중국어는 말씀 설(说·shuō)이다. 제단에서 맏이(兄)가 말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말하다'는 의미로 道(dào),谈(tán),讲(jiǎng) 등이 있는데 말을 잘한다고 할 때(能说会道, néngshuōhuìdào)나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때(胡说八道, húshuōbādào) 함께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자에서 말(言)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고대 중국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말을 빼어나게(秀) 하는 것을 유혹(誘)하는 것으로 여기고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속이는(詐)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말에도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다. 중국어에는 "담에는 구멍이 있고 벽에는 귀가 있다(墙有缝,壁有耳, qiángyǒufèng, bìyǒuěr)"는 말이 있다. 말의 속성 자체가 날개를 달고 쉽게 남에게 전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말을 단단히 묶어(兼) 겸손하게(謙) 해야 하고 말을 제사 지내듯 신중하게 삼가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세 치 혀로 천하를 합종연횡(合從連衡) 했던 소진과 장의처럼 세 치 혀로 천하를 쥐락펴락하기도 하지만 한 번의 말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자주 목도하게 된다.
5왕조 11군주를 섬기며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던 처세의 달인 풍도(馮道)는 <설시(舌詩)>에서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이니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연산군은 이 시가 적힌 '신언패(愼言牌)'라는 나무패를 환관들에게 차고 다니게 하였다고 한다.
공허한 말은 화자의 경박함만 드러내거나 "돌을 베개 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 zhěnshíshùliú)"고 해야 할 것을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 shùshízhěnliú)'고 한 손초(孫楚)처럼 한번 잘못한 말 때문에 또 다른 거짓과 억지의 말을 만들어내야 할 때도 많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말에는 어떤 주술성이 담겨져 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보다 신중하고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하루라도 책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 돋는다!"
읽을 독(讀)은 형성자로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 큰 소리로 말하듯 책을 읽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5분 분량의 중국 단편영화 <독자연애(讀字戀愛, dúzìlián'ài)>에는 휴대전화 문자의 글씨체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사랑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쩌면 종이로 된 자료보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읽을 독(讀, dú)자는 형성자로 물건을 팔기(賣) 위해 큰 소리로 말(言)하듯 글을 읽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의사소통에서 듣고 말은 하지만 글을 읽지 못하면 '문맹(文盲)'이라고 한다. 1949년 건국 초기 중국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중국의 민족혼이라 불리는 루쉰(魯迅)마저도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틀림없이 망할 것이다(漢字不滅, 中國必亡)'고 외치며 한자를 폐지하고 로마자 표기를 주장한 바 있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은 심각한 수준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어려운 한자의 개혁을 선택했다. 그 결과 획순을 대폭 줄인 2,235개의 간체자(簡體字)가 등장했다.
문자개혁과 경제발전의 성과로 문맹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지만 중국정부가 정한 문명인(文明人)의 기준인 1300자의 한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1억 상당의 인구는 여전히 '까막눈'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책을 읽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허용된 일은 아니었다. 사대부만이 독서를 업(業)으로 삼을 수 있었으며 하층민들에게 독서는 엄격히 통제되었다. 왕안석(王安石)은 "가난한 사람은 독서로 부자가 되고 부자는 독서로 귀하게 된다(貧者因書富 富者因書貴)"고 했지만 사실 가난한 사람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두보(杜甫)가 말한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男兒須讀五車書)"는 시구에서 확인하듯 여성에게는 독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가 않았다.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에 나오는 '한우충동(汗牛充栋, hànniúchōngdòng)'고사처럼 우리 주변에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에 쌓으면 대들보에 닿을 정도로 책이 넘쳐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안중근의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나라 성인의 4명 중 1명은 1년 동안 단 1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도서 출판국이면서 연간 독서량은 4권으로 우리나라의 11권보다 훨씬 낮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책을 읽어 자고독서(刺股读书, cìgǔdúshū)의 고사를 만들어냈다. 반딧불을 모아 그 빛에 책을 읽은 차윤(車胤)이나 눈에 책을 비춰 읽은 손강(孫康)의 형설지공(螢雪之功, yíngxuězhīgōng) 고사는 이미 널리 회자되는 얘기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위해 후한의 동우(董遇)는 '독서삼여(讀書三餘)'의 고사를 남겨 놓았다. 겨울은 한 해의 남은 시간이고, 밤은 하루의 남은 시간이며, 계속 내리는 비는 한 때의 남은 시간이라고 했으니 곧 자투리 시간을 아껴 책을 읽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 써야 살아남는다"
쓴다는 것은 단순히 베끼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논리를 정교하게 가다듬는 일이다.
독서는 생각을 풍부하게 하고 글쓰기는 생각을 정교하게 한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가다듬는데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대학 진학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학습플래너, 체험활동 보고서 등 다양한 진로 준비 사항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수험생들 사이에 적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로 '적자생존'이란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글을 쓴다는 표현은 중국어로 베낄 '사(寫, xiě)'이다. '집 면(宀)'과 '까치 석(舃, xì)'자가 결합한 것으로 물건을 여기서 저기로 옮긴다는 의미였다가 점차 옮겨 베낀다는 의미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은 기록을 매우 중시하여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역사기록물들을 남겨 놓았다. 한자의 원형으로 삼는 가장 오래된 한자인 갑골문자 또한 왕의 판단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점술의 결과를 기록한 것이었다.
한자가 지닌 상형적인 성질 때문에 문자를 붓으로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는데 그것이 바로 '서예'이다. 서예의 성인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는 거위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 사실을 안 산음(山陰) 지방의 한 도사가 왕희지를 불러 거위를 줄 테니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써 달라고 했다. 거위가 너무 탐난 왕희지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받는데 바로 사경환아(写经换鹅, xiějīnghuàn'é) 이야기이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이다.
<도덕경>의 저술도 우연한 글쓰기에서 이뤄졌다. 쇠퇴하는 주(周)나라를 한탄하며 은퇴를 작정한 노자가 서방(西方)으로 떠나려고 할 때 관문을 지키던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우연히 써 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인재 선발방식은 과거제도였는데 응시생의 답안지 필체를 채점관이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에 채점의 공정성을 위해 응시생의 답안지 전체를 글씨를 잘 쓰는 관리가 똑같은 서체로 모두 필사하여 채점을 했다고 한다.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고전에 나오는 문구를 근거로 글을 쓰는 문언문(文言文)이나 엄격한 규율과 형식을 강조하는 팔고문(八股文)을 지양하고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을 글로 그대로 쓰자(我手写我口, Wǒ shǒu xiě wǒ kǒu)는 백화(白話)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글을 다 쓴 다음에 수정, 보완, 정리하는 작업을 퇴고(推敲)라 하는데 이 또한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한유(韓愈)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의 대학 입학시험인 까오카오(高考) 제1교시 어문(語文)시험의 마지막 문제는 작문(作文)문제다. 150점 만점에 60점에 해당되니 적지 않은 비중이고 한 주제에 대해 800자를 써야 하니 짧지 않은 글쓰기다.
중국 대입 응시자가 약 600만 명이나 되고 채점의 공정성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모든 응시자를 대상으로 글쓰기를 요구하고 평가한다. 이는 일부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논술을 요구하는 우리나라 입시제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각과 논리를 정교하게 가다듬는 글쓰기 교육에 대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다.
관세음보살이 관음보살된 사연
이름 ‘명(名)’자는 저녁(夕)이 되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입(口)으로 불러 상대방을 인식한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는 말처럼 이름은 늘 개인의 삶과 함께 하고, 죽은 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중국인은 이름(名, míng)과 운명(命, mìng)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름을 짓는 것이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태어난 연월일시와 음양오행을 고려해 신중하게 작명을 하였다. 음악이 식물의 성장점을 자극해 발육을 촉진하듯이 이름을 부를 때의 일정한 소리 진동이 평생 그 사람에게 부족한 기운을 채워 주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위화(余和)의 소설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에 보면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이 하소용과 바람을 피워서 낳은 첫째 아들 일락(一樂)이 그의 친아버지인 하소용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지붕 위에 올라가 아버지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장면이 있다.
중국 민간에서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영혼이 늘 곁을 따라 다니는데, 병이 들거나 정신을 잃으면 그 영혼이 사람 곁을 떠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떠나가는 영혼을 지붕에 올라가 이름으로 대신 부르는, 초혼(招魂)의 풍습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운명과 영혼을 돌이키는 행위로 여겨졌던 셈이다.
이름 '명(名)'자는 저녁(夕)이 되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입(口)으로 불러 상대방을 인식한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중국어에서는 이름을 '名字(míngzi)'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名)'과 보통 남자는 20살, 여자는 15살에 하는 관례(冠禮) 때 받는 '자(字)'가 결합된 것이다.
예를 들면 공자(孔子)의 경우 명이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제갈량(諸葛亮)의 경우 자가 '공명(孔明)'인데 이름의 밝을 '량(亮)'과 밝을 '명(明)'이 서로 통한다. 중국은 1919년 5·4운동 이후 한 이름 갖기가 제창되면서 자(字)를 짓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이름'이라는 어휘 속에는 여전히 자(字)가 녹아 있는 셈이다.
중국에는 또 군주, 성인,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피휘(避諱)의 전통이 있는데 이로 인해 새로운 어휘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대구의 지명이 대구(大丘)였는데 공자의 이름과 같은 한자여서 대구(大邱)로 고쳤다고 하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도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세(世)'를 피하기 위해 관음보살로 불렸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진시황의 이름 정(政)자를 피하기 위해 정월(正月)을 단월(端月)이라 불렀고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여서 24절기의 계칩(啓蟄)이 경칩(驚蟄)으로 바뀌었다.
중국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선호하는 글자는 건국 초기에 건(建, jiàn), 국(國, guó), 문혁시기에는 홍(紅, hóng), 위(衛, wěi)였다가 최근에는 위(偉, wěi) 수(秀, xiù), 명(明, míng)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 듣던 대로 그 명성이 헛되지 않는다는 명불허전(名不虚传)이나 명성과 실제 본
모습이 일치한다는 명실상부(名实相符) 등은 한중 양국에서 모두 널리 쓰이는 말들이다 옳을 '시'(是, shi)는 해(日)가 가운데 바르게(正) 떠 있다는 의미가 합쳐진 글자다.
이 한 글자 때문에 중국어가 확 변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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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典
1978년, 4인방이 체포되고 중국은 문화혁명(1966~1976)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새로운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으로부터 "당신이 일을 하면 나는 안심한다(你辦事, 我放心)"는 말로 후계자 승인을 받은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사상과 실천은 모두 옳다는 '양개범시(兩個凡是)'를 주장했다.
한편,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shíjiàn shì jiǎnyàn zhēnlǐ de wéiyī biāozhǔn)"라는 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들고 나온 덩샤오핑은 화궈펑과 대립했다. 결국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역사 시기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무엇이 '옳으냐'를 놓고 벌인 한판 승부였던 셈이다. 그리고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개혁개방 정책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에 기초해 진리를 구한다는 '실사구시'는 후한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학문을 닦아 옛것을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한다(修學好古 實事求是)"는 구절에서 처음 등장해 공허한 담론을 일삼던 양명학을 배격한 청나라 고증학파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해가 바르게 떠있다는 뜻 담긴 글자
옳을 '시(是, shì)'자는 해(日)가 가운데 바르게(正) 떠 있다는 의미가 합쳐진 글자다. 중국어에서 '是'는 '~이다, 맞다, 옳다'의 의미와 함께 긍정의 대답으로 '예'의 뜻으로도 쓰인다.
'A는 B이다'는 기본 문형에 '是'가 사용되는데 원래 '是'는 고문에서 '옳다'나 '이(this)'의 의미로 쓰이다가 점차 '~이다'의 계사(繫辭, copula)로 쓰이게 됐다. 이로써 중국어는 보다 명확하고 확정적인 강조의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문형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생겨나게 됐다.
춘추전국시대 <순자 권학편>(荀子 勸學篇)에 "눈은 옳은 것이 아니면 보려 말고, 귀는 옳은 것이 아니면 들으려 말고, 입은 옳은 것이 아니면 말하려 말고, 마음은 옳은 것이 아니면 생각지 말라(使目非是无欲见也, 使耳非是无欲闻也, 使口非是无欲言也, 使心非是无欲虑也)"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是'는 옳다는 의미다.
"이익을 보고 정의를 생각하는, 이런 일은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见利思义, 是凡人难行)"라고 할 때 '是'는 앞의 문장을 받는 지시사로 쓰인 것이다. BC 5세기경까지 '是'는 지시사로 쓰이다가 천 년의 시간이 지난 AD 5세기 무렵 완전한 계사로 자리 잡으면서 중국어의 기본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오게 됐다.
"하나는 하나고 둘은 둘이다(一是一, 二是二)"라는 표현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이를 때 사용한다. '시비(是非, shìfēi)'라는 말은 옳고 그름(对与错)을 이르는 말로 우리말에서도 자주 쓰인다.
상대방의 앞에서는 입으로 그렇다고 말하고도 마음으로는 수긍이 되지 않을 때도 있는데 이런 상황을 두고 '구시심비(口是心非, kǒushìxīnfēi)'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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