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삼웅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동안 독립기념관장에 재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조봉암 선생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로 제 2, 3대 대통령 후보에 나서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다가 사법의 이름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환갑을 두달 남겨둔 1959년 7월 31일의 일입니다.
조봉암 선생은 강화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3.1운동때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하면서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에 눈을 뜨고, 그때 막 프로레타리아 해방과 피압박 민족의 독립을 내걸고 성공한 러시아혁명에 빠져들었습니다.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엿장수를 하면서 아나키스트 박열 등과 흑도회를 조직하는 등 일제와 싸우다가 귀국하여 조선공산당의 조직을 주도하였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진영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악명높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을 복역했습니다. 이때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일곱매듭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해방뒤 공산당과 결별하고 분단정부에 참여하여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헌법제정, 특히 국민의 기본권 향상과 경제조항에 관심을 갖고 이를 관철시켰으며, 지주 출신의 한민당과 싸우면서 농지개혁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으로 남한 대부분이 점령되었을 때 농민들이 인민군에 협력하여 봉기하지 않는 것은 조봉암 선생이 닦은 농지개혁도 큰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후 국회 부의장을 두 차례 역임하고 이승만의 폭정이 거듭되면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민주주의가 짓밟히자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혁신정치, 이승만의 허황한 북진통일에 대항하는 평화통일론을 내걸고 진보세력의 규합에 나섰습니다. 제 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혹독한 탄압에서도 ‘득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진’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제 3대 대통령 선거 개표결과, 조봉암 선생이 216만표 득표 획득
조봉암이 독립운동을 할 때에 민족을 배반했던 무리들이 반공의 간판을 달고, 반공 민주사회주의로서 진정한 민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애국자를 결국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저들이 조봉암 선생을 죽인 것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를 제거하려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었고, 두 번째는 혁신정치ㆍ진보정치의 뿌리를 뽑으려는 사이비 보수(수구)세력의 책략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이루어져 조봉암 선생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그로부터 불과 9개월만인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은 괴멸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희생양으로 삼은 조봉암 선생은 반세기가 되도록 ‘간첩’, ‘용공’의 너울을 벗지 못한 채 긴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지고, 친일과 분단과 사대주의 잔재들은 다시금 득세하여 역사를 반세기 이전으로 회귀시키려 합니다.
한반도는 지금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국 어선들이 전부 철수할만큼 일촉즉발의 위기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남북에 도사린 극우ㆍ극좌 세력이 한반도를 또 다른 전쟁으로 치닫게 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조봉암 선생의 선견지명이 현재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봉암 역시 평범한 인간입니다. 하여 그에게도 많은 약점과 과오와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파헤치고 비판할 것입니다. 아울러 용공의 너울 속에서 왜곡되고 묻히고 잊혀진 부분은 가감없이 드러내어 독자들의 심판에 맡기려 합니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2007년 9월 18일 “이 사건은 정권에 위법이 되는 야당정치인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표적 수사에 나서 극형인 사형에 처한 것으로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적 탄압사건” 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 라고 결정하였다.
정부는 ‘사법살인’ 50주년이 되는 을해 조봉암 선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명예를 회복시키고 독립유공자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 평전이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안중근평전>과 <장준하평전>에 이어 <죽산 조봉암평전>을, 권력의 언론탄압과 사이비 언론인들의 곡필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대표적인 정론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게 되어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20여년 전 소련 공산주의가 멸망하고, 오늘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시장경제의 위기 속에서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조봉암 선생의 생애를 돌아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두 분의 평전 연재 때에 많이 읽어주시고 댓글과 추천을 하여 주신 분들께 두손 모아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연재를 하여 주신 <오마이뉴스>에 감사드립니다. (<안중근평전>은 며칠전 ‘시대의 창’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였음을 보고드립니다.)
이 글을 쓰는데 고마움을 드려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진보당 당원으로 평생동안 조봉암과 진보당 연구에 진력하시다 지난해 돌아가신 정태영 선생의 저작물, 조봉암 연구에 학구적인 열정을 바쳐 대단한 성과물을 얻어낸 박태균(서울대)교수님과 서중석(성균관대)교수님, <죽산 조봉암>을 쓰신 이영석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학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저의 집필 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시금 이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서툰 평전 작업은 계속하겠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리영희 선생, 송건호 선생으로 이어질 것이고, 20권의 마지막은 다산 정약용이 될 것 같습니다. 계속하여 성원과 편달을 바랍니다.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조봉암, <어록>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비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9~1959)과 비운의 정당 진보당.
진보당은 6.25전쟁 뒤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1956년 11월 10일 결성하여 창당 15개월 만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등록이 취소되고, 1958년 2월 25일 소멸되었다. 그리고 당수 조봉암은 처형되었다. 한국 현대정당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정강ㆍ정책을 제시하고,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6.25 한국전쟁이 겨우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어버렸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한반도 남쪽에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졌다.”(주석 1) 이런 상황에서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민주사회주의 깃발을 내걸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활동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주석 2)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한국의 혁신세력은 1951년 7월 2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채택된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의 강령인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라는 역사적 체험에 기초를 두고, 민주적사회주의의 진로를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첫째,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보장ㆍ완전고용ㆍ생활수준의 향상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분배의 평등화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계획화를 추진하여야 하고, 둘째, 좌우익의 어떠한 형태의 독재로부터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정치적 민주주의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선언은 전문 <민주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요약)
민주사회주의는 자본주의사회 고유의 폐해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고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이거나 관리자인 소수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들을 해방하여 경제력을 국민전체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자유로운 사람들이 평등한 인간으로 함께 일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 많은 나라에서는 자유방임의 자본주의 대신 국가간섭 및 공공소유로서 사적자본가를 제한하는 경제가 들어서고 있다. 사람들은 계획의 필요성을 더욱 더 인정하고 있다. 사회보장, 자유노동조합, 산업민주주의 등이 지반을 넓혀 가고 있다. … 최근 세계 저개발지역의 민족들은 국민적 자유와 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민주사회주의가 가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토지개혁과 공업화와 산업공유제도의 확장과 생산자ㆍ소비자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해서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한다. … 민주사회주의는 사회정의, 보다 좋은 생활, 자유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노력한다. … 민주사회주의는 국내 및 국제문제에 있어서 자유와 계획을 표방한다. 민주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최고형태이다. (주석 3)
한국 혁신계 인사들은 6·25 전쟁과 이승만의 폭정을 겪으면서 민족의 진로를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으로 인식하고 활동에 나섰다.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 ‘반공 히스테리’가 판치는 풍토에서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동렬이거나 사촌 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박멸의 대상이 되고, 합법 공간에 설 자리를 갖지 못하였다. 아울러 ‘진보’라는 용어도 ‘평화통일’이라는 말도 배척되었다.
진보(Progre's/Progress) - 여행자는 자신이 뒷걸음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자기와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는 두 지점이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제 앞으로 간다 뒤로 간다는 개념은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평균 수명은 살인의 방법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늘어날 것이며 농업은 기아와 함께 발전할 것이다. 시장의 세계화는 전지구의 연대를 강화하게 될 것이며 이와 동시에 정체성의 추구는 민족국가를 증가시킬 것이다. 통신수단, 학습과 기분 전환의 방법은 고독의 기회만큼 무한정 늘어날 것이다.
미래에는 선과 악의 끔찍한 공존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주석 4)
현재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 자크 아탈리가 내다 본 ‘진보’의 개념이다.
‘선과 악의 끔찍한 공존’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1950년대 한국에서, 자유당과 민주당, 그리고 진보당 사이에 한동안 이루어졌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도전하는 사람은 죽음(죽임)이 따랐다. 제헌의원 선거에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처형되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이던 백범 김구는 암살되었다. 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병사하고, 현직 부통령 장면은 수하들이 총을 쐈지만 ‘불행히’(다행히) 죽지 않았다. 다음은 조봉암 차례였다.
농림부 장관 시절의 죽산
제 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도전하고, 제 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조봉암은 정권에 위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미 3대 대선 때에 혼쭐이 났었다. 자신이 조각할 때에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했던 사람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처형하고 진보당은 해산시켰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는 이유를 댔지만 배경은 ‘정적제거’에 있었다.
한국의 ‘반공 히스테리’ 세력은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북화해 협력이나 비판세력을 친북 좌경으로 몰아붙이는 터에 당시에 정적이나 비판세력에 붉은 딱지 붙이는 일은 식은죽 먹기였다. 조봉암은 공산주의사상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 삼고 사회혁명사상으로 받아들여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해방을 맞아 전향했다. 이승만 정권에 똬리를 튼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재빨리 반공주의로 탈바꿈 하면서 독립운동가ㆍ남북협상세력ㆍ반독재 인사들에게 용공의 너울을 씌우고 더러는 형장으로 끌고갔다.
그들에게 반공은 구원의 메시지이고 자신들을 감싸준 이승만은 바로 구세주였다. 그래서 ‘국부(國父)’의 뜻이라면, ‘국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최능진이고 김구이고 장면이고 조봉암이고 가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전력이나 현재의 위치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의 안위는 곧 자신들의 생존의 길이고 입신출세의 방편이었다. 정권ㆍ사법부ㆍ군ㆍ검찰ㆍ학계ㆍ언론계에서 친일파는 새로운 주류가 되고 있었다.
암살ㆍ테러ㆍ사형(私刑)ㆍ납치ㆍ투옥 등 정적제거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사법살인(司法殺人)’의 방법도 활용되었다. 조봉암에 적용된 제거의 방식은 사법살인이었다. 상식적으로 사법부는 시비정사(是非正邪)를 엄정하게 가리는 국가기관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3권 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입법부나 행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다루는 사법부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법관과 검찰은 오로지 양심과 법률에 따라 사법권을 행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사법부가 행정부의 하수인이 되어 사법의 칼날을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른다면, 정치보복이 자행되고 인권이 유린되어 민주주의는 끝장이다.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MBC)이 우리 나라의 근대적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현직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 판사들은 인혁당사건 재판이 “우리 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이었다.”고 응답하여, 법조인들도 이 사건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의는 인혁당사건의 최종 판결이 날 때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국사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라고 박정희 정권을 비난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9일 유망한 인물 8명을 ‘사법살인’했다. 형식적인 재판의 절차를 거쳤으니 살인에 사법부가 하수인 역할은 한 것이다. 하여 ‘사법살인’이라 이름한다.
인혁당사건보다 16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진보당수 조봉암도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사법부를 동원하여 독립운동가이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두 번이나 지낸 사람을 좌경용공으로 몰아 처형했다. 어김없는 ‘사법살인’이었다. 보수야당과 신문들이 침묵했다. ‘공범’까지는 몰라도 ‘종범’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독재정권이 필설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패악을 저질렀지만, 무엇보다 무고한 사람들을 사법의 이름으로 죽인 것처럼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도 달리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은 대가로 사형을 당하는 것도, 하늘이 준 인명을 차마 할 일이 아니라고 하여 사형제 폐지가 국제사회의 대세가 되고 있는 터에, 죄를 날조하여 사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일반 살인행위보다 훨씬 악랄한 죄악이다.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기 어렵다. 그것도 정치적 라이벌, 나라의 큰 인물을 죽인 행위는 결코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이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사법살인’에 희생되었다.
주석
1) 한홍구, '현대한국의 저항운동과 촛불',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15쪽.
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262쪽, 인물과 사상사, 2004.
3) 양호민 편역, <사회민주주의>, 283~286쪽, 종로서적, 1985.
4) 자크 아탈리, <21세기 사전>, 288~289쪽, 중앙 M&B, 1999.
"농림장관 임명하고도 용공으로 몰아"
노회한 이승만은 조각을 하면서 친일파ㆍ우파 일색의 인물들만으로는 미국과 유엔의 지지가 어려울 것으로 알고 공산주의자 출신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뒤에 전향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친일 지주계급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견제하고, ‘이승만정부’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로 조각되었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그를 등용했다. 뒤에서 다시 쓰겠지만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천거설도 있었다.
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각에서 한민당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친일지주 출신들이라는 이유와 함께 잠재적인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한민당을 견제한 것이다. 한민당을 배제하면서 시급한 현안인 농지개혁을 단행할 적임자로서 조봉암 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 공산주의운동을 하면서 친일파 지주계급에 중오심을 갖고 있었고, 미국과 유엔 등 대외용으로도 적격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조봉암의 대중적 인기는 어느 국무위원 못지 않았다.
국민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일제와 친일 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려 온 농민들은 정부의 농지개혁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북한에서는 이미 몇 해 전에 ‘무상몰수ㆍ무상분배’의 방식으로 농지개혁이 이루어진 터였다.
조봉암은 농지개혁을 서둘렀지만 한민당의 제동으로 쉽지가 않았다. 이대통령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아가는 그의 행보에 속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농민들은 조봉암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신의주형무소에서 손가락 일곱마디가 잘려진 손목을 잡으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가 입각할 때에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지만 퇴각할 때에도 그랬다. 6개월만에 농림부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제정의 기초위원으로 활약이 남달랐던 터였다.
6.25전쟁 시기에는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발췌개헌 당시에는 주위의 많은 오해를 사가면서 이를 지지했다. 이승만과 척을 지게 된 것은 제 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그와 대결하면서부터였다. 이후 3대 대선 때에는 온갖 탄압과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표가 쏟아져 나왔다. 1960년 제 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세력은 조봉암이란 존재가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승산이 어려웠다. 그래서 제거공작이 시작되었다.
조봉암의 ‘사법살인’에는 법조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권력의 수족이 되어 양심과 법률을 팔았고, 조봉암은 끝내 사형대에 서게 되었다. 그를 ‘사법살인’으로 몰아간 관료ㆍ정치인ㆍ검사ㆍ판사 중에는 친일행위자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은 누대를 두고 잘먹고 잘살았다. ‘민족모순’의 현재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났다.
용공의 너울을 쓰고 ‘사법살인’의 희생물이 된 조봉암에게는 반세기 동안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공산주의자’,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쉽게 뽑히지 않았다. 그는 언제까지나 ‘불온’의 상징이 되고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죽인 주범은 이승만이었지만 ‘사법살인’에 가담한 공동정범의 법조인들과, 이를 방관한 정치인ㆍ언론인ㆍ지식인 등 종범들이 반성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는 까닭이다.
좌로부터 정태영, 이동화, 김병휘, 김기철, 신창균, 조규희, 조규택, 권대복(뒤), 윤길중, 박준길(뒤), 김달호, 안경득(뒤), 박기출, 최희규(뒤), 조봉암(이명하, 전세룡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억울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아버지나 삼촌이, 혹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혹독한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가 끊어지는 옥고를 치루고, 공산주의자들의 패악에 그들과 결별하면서 정부수립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이승만 정부와 보수세력의 독재ㆍ부패를 개혁하고자 혁신의 깃발을 들고, 평화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된 서대문형무소의 바로 그 형장에서 밧줄에 목을 걸어 죽였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원통할 것이다. 조봉암처럼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누명을 쓰고 죽었다면 얼마나 분통할까.
아버지의 신원을 위하여 반세기 동안 싸워 온 유일한 혈육인 딸 조호정은 “아버님은 <춘항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정이 많은 분이었다.”라고 회고한다.
그가 추구하던 노동자 독재도 자본가 독재도 거부하고 다수가 잘사는 통일된 민주주의 조국건설이라는 가치가 유효할진대, 그의 삶과 죽임이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 글은 그의 ‘억울함’을 해원(解寃)의 의미와 함께 이같은 악행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다.
이승만은 조봉암이 자신의 라이벌로 부각되면서 일찍부터 이를 ‘제거’할 뜻을 갖고 있었다.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친필지령’을 내렸다. 다음은 언론인ㆍ혁신정치인 출신 고정훈의 증언.
나는 진보당을 할 땐가 민주혁신당을 할 땐가 고 김창룡 중장한테 불리어가서 듣고 본 해괴한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김창룡 장군은 내가 미군사령부에 있었고 그가 국방경비대 소위로 있을 때부터 잘 아는 처지였고 내가 육군본부에서 근무할 때에도 그랬고 육본 정보국 차장으로 있을 때는 더욱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나를 불러놓고,
“어쩌자고 조봉암이와 같이 몰려다니느냐?”고 따지면서 큰일 난다고 충고했다. 그의 충고는 고마웠다.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면 김장군은 그런 말을 안 할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대장이고 중장이고 수틀리면 족치는 무시무시한 염라대왕이었다. 나는 서상일씨와의 관계, 야당통합운동 등을 말했고 법치주의의 중대성을 맹렬히 내세우면서 CIC 만큼은 법치주의를 철저하게 존중해 줄 것을 당부했었다.
그 때는 아직 진보당사건이 터지기 한참 전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말은 원칙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법치주의’와 ‘이박사의 말이 법’이라고 동시에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충성을 바치던 그는 나에게 “여기 이박사의 명령이 있소” 라고 하면서 보잘 것 없는 양면괘지의 쪽지를 내보여 주었다.
<조봉암은 공산당이니 없애야 한다>는 이박사의 친필이었다. 나도 국방장관실에 근무할 때 이박사의 친필을 많이 보았었다. 틀림없었다.
나는 ‘대낮 속의 암흑’을 느끼면서 김장군과 헤어졌다.
“설마?”
나는 심리작전의 한 수법이겠지, 설마 야당 지도자의 한 사람인 조씨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야 아니겠지 하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김구선생 살해사건이 나의 머리를 짓눌렀다. 나는 야당통합의 시급을 절실히 느꼈고 더욱 열심히 조병옥ㆍ장면ㆍ조봉암 세 선생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진보당사건이 터진 것이었다.(주석 5)
주석
5) 고정훈, <명인옥중기>, 24쪽, 희망출판사, 1966.
서대문 감옥의 "봉암새"와 "죽산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사진은 오블의 초석님이 찍은 겁니다(http://blog.ohmynews.com/cornerstone/124472)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 재판을 받았다.
3ㆍ1운동 당시에도 1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던 곳이다. 다음은 진보당사건(2년)과 민족일보사건(5년)으로 7년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이상두(李相斗)가 죽산 조봉암이 수감되어 처형 직전 비둘기에 모이를 준 일과, 사후에 수인(囚人)과 형무관 사이에 나돈 ‘봉암새’의 얘기를 적은 것이다.
나는 어느 사이 비둘기의 벗이 되었다. 악하고 거짓 많은 인간들보다 이 비둘기는 얼마나 더 기특하며 정다운 친구인가 말이다.
비둘기가 좋아하는 콩, 그 콩을 내 밥에서 골라내어 던져준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어 먹는 배고픔 속에서도 이 비둘기 모이만은 잊지 않는다. 식후 창가로 가서 구구구 비둘기를 불러 콩알을 던진다.
여기저기 모여와 구구거리면서 그걸 쪼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끝없는 희열감에 젖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일은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딴 방의 사람들도 소중한 밥을 나누어 던져주는 것이었다.
건너편 2사의 조봉암 선생도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 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 분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죽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교수대에서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 후 사형집행의 버드나무엔 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위 ‘봉암새’ 혹은 ‘죽산조(竹山鳥)’라는 얘기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누가 지었는지 조차도 확실치 않는 ‘봉암새’의 얘기가 서대문 징역꾼과 형무관 사이에 마치 하나의 전설이나 민화(民話)처럼 구전되고 있다. (주석 6)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사진은 오블의 초석님이 찍은 겁니다.(http://blog.ohmynews.com/cornerstone/124472)
조봉암은 앞에서 말한대로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는 등 숱한 고난을 겪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전향하여 이승만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1948년 5ㆍ10선거에 참여하여 제헌의원이 되었고, 1950년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7월 발췌개헌 후 국회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제 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얻고 1956년 5월 제 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여 이승만 정부의 온갖 부정과 탄압에도 216만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조봉암은 1956년 1월 26일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정당의 창당준비에 들어갔다.
<창당발기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3ㆍ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환기 계승하여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제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의 배격과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추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강령>을 채택하였다.
1.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를 실현한다.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을 육성한다.
3. 민주우방과 유대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한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제시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통일방안이었다. 평화통일론을 제시한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진보당을 기소한 검찰은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주석 7) ‘반공 히스테리’의 저급한 마녀사냥이었다.
주석
6) 이상두, <옥창너머 푸른 하늘이>, 118~119쪽, 범우사, 1972.
7) 박태균, <조봉암 연구>, 331쪽, 창작과 비평사, 1995.
평화통일론을 보안법으로 묶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헌법파괴’, ‘국헌위배’라는 이승만 정부의 무소불위한 정치공작이고 인권탄압이었다. 이에 대해 조봉암과 진보당의 반박논리는 오히려 명쾌했다.
북한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억지요, 난센스다.
북한에서 ‘밥’이라고 한다고 우리는 ‘밥’을 ‘떡’이나 ‘죽’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북한이 평화통일론을 들고 나온다고 하면 우리는 수세에 몰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ㆍ능동적으로 이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진보당의 통일론은 결코 공산당의 전술에 넘어간 것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 만일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보안법 위반이라면 자유당이 내세우는 유엔 감시하의 북한만의 선거안(案)과 1954년 변영태 외무장관이 제네바회담에서 제시한 14개조 통일론도 무력통일ㆍ북진통일이 아닌 바에야 평화통일이므로 위법이 아닌가. 사실 북진통일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또 위헌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헌법 제 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한반도와 부속도서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에 사는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그러할 때 북진으로 전투를 수행하면 필연코 우리 영토를 파괴ㆍ유린하고 국민을 대량 살육하는 결과가 된다. (주석 8)
이승만은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혁신세력의 리더로 떠오르는 조봉암과 진보당의 제거에 나섰다. 조봉암의 제거에는 민주당이나 보수신문ㆍ미국에서도 침묵 또는 ‘묵시적 동조’의 분위기여서 일을 꾸미는데 어렵지 않았다.
검찰은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조봉암은 피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검찰은 2월 16일 조봉암과 당간사장 윤길중을 비롯하여 박기출ㆍ김달호ㆍ신창균ㆍ조규희ㆍ이명하ㆍ조규택ㆍ전세룡ㆍ이상두ㆍ권대복ㆍ이동화ㆍ정태영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조봉암에게는 국보법 외에도 간첩죄에 무기불법소지죄 등이 병합되었다.
조봉암은 피신했다가 당 간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자진 출두하여 구속되었다.
검찰은 조봉암에 대한 기소장에서
① 박정호 등 당시 남파되었다가 검거된 간첩과 접선 내지 간첩의 공작목표가 진보당의 지원이라는 것
② 재일 조총련에서 파견한 정우갑과 밀회
③ 북한 당국 산하의 이른바 조국통일구국투쟁위원회 김약수에게 밀사를 보내어 평화통일추진을 협의한 사실
④ 북한노동당이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이자 진보당의 비밀당원인 정태영을 통하여 진보당에 대한 강평서를 보낸 사실 등을 열거하였다. 뒤에서 상론하겠지만, 대부분이 조작된 것이었다.
자유당은 1958년 24파동을 일으켜 국보법을 개정하였다. 요지는 평화통일론을 엄단하려는 목적이었다. 어디까지나 조봉암을 모살하려는 조치였다. 측근들이 조봉암을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자신도 진보당 탄압의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 없다.”(주석 9)고 거절하였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조봉암은 이 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 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하겠다고 전하였다. (주석 10)진보당 간부들의 체포와 조봉암의 자진출두와 관련되는 구체적인 증언이 있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돌연 비상사태에 돌입한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 진두 지휘 아래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민의원 선거 4개월을 앞두고 선거대책에 몰두하다가, 겨우 잠자리에 든 윤길중ㆍ조규희ㆍ조규택씨 등은 서울에서, 그리고 박기출씨는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약수동의 조봉암씨 집을 급습한 10여 명의 형사대는 이미 이틀 전에 조씨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극도로 당황했다. 이로부터 48시간 동안 시경은 관하 전 수사능력을 조씨 색출에 투입했으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조씨는 이틀 전에 치안국에서 새어나온 수사기밀을 탐지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뒤였으며 관철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일 밤 그는 그곳에서 밤새껏 술을 마시며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친구들은 이제 붙들리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모든 준비를 해 줄 터이니 해외로 망명이나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한다.
조봉암 선생 묘소 입구에 세워진 어록비
“망명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나를 받아 주겠는가. 또 설사 해외탈출이 가능하다고 해도, 나에게 걸린 혐의는 사실화되고 애꿎은 당원들만 희생될 것이 아닌가. 설마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선거가 끝나면 내주겠지!” 하고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고, 그 친구들은 말했다. (주석 11)
주석
8) 이상두, 앞의 책, 123~124쪽.
9)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206쪽, 역사비평사, 1999.
10) 임홍빈, '조봉암은 왜 죽어야 했나', <신동아>,1983년 3월호.
11) 임홍빈, 앞의 글, 368쪽.
서대문형무소의 모범사형수
조봉암을 비롯하여 진보당 관련 인사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조봉암은 3ㆍ1운동 때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1932년 9월 28일 상해에서 한인 반제동맹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에 피체되어 이 해 10월 10일 일본 경찰에 신병이 인도되고, 12월 3일 신의주경찰서에 유치되었다. 1933년 9월 공판이 시작되고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1939년 7월 출옥할 때까지 6년 동안 추위와 고문으로 악명 높은 신의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조봉암은 이 때 모진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들이 썩어 떨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진보당사건의 변론을 맡은 한격만 변호사는 조봉암이 과거 농림부장관 재직시 공금유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당시 그를 재판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은 변론을 하여 방청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 때 재판석에서 나는, 피고석에 앉은 죽산 선생의 손가락들이 떨어져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체포ㆍ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들이 썩어 떨어진 고생을 겪은 분을, 일제시에 그래도 편히 지낸 내가 감히 재판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심리를 해나가는 도중 나는 이 사건은 정치적 모략이요, 중상이라고 판단하고 단연 무죄를 언도했던 것입니다. (주석 12)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의 농림부장관 재직시에 공금횡령 혐의로 기소했지만 무죄로 석방되었다.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불안을 느낀 친일지주 출신들이 만든 한민당의 무고였다. 조봉암에 대한 박해는 여야를 가리지 않았고 이처럼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일찍부터 정치적 라이벌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책을 읽으며 조용히 운명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집행의 날을 기다리면서 딸 호정 여사가 차입한 소설ㆍ종교ㆍ철학 등 서적을 많이 읽었고, 한글사전ㆍ과학사전 등은 어찌나 탐독했던지 살아있는 백과사전이 되었다고 그의 딸은 말했다. 하루 30분 가량 간수에 이끌려 수갑을 차고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가거나, 면회를 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정좌하여 독서삼매경에 잠겼고, 엄격한 감방규칙을 잘 지켜, 모범수로서 간수들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고 한다. (주석 13)
조봉암을 죽이기로 한 이승만 정부의 음모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첩자 양명산을 내세워 불순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모략속에서도 1심은 징역 5년을 선고하는데 그쳤다. 용공 판사를 죽이라는 따위의 관제시위가 벌어지고 이승만의 해괴한 발언이 언급되었다. 마침내 고등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도 그대로 따랐다.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조봉암은 7월 17일 제헌절을 맞이하여 옥중성명을 발표하였다. 제헌의원과 두 차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그로서는 제헌절에 남다른 감회를 느꼈던 것이다.
국법에 의하여 사(死)의 재결을 받고 나는 제헌절에 임하여 국민과 동지들에게 한 말씀을 올리려고 합니다. 나는 비록 법 앞에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하여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조국에 대한 충성은 생사를 초월한 나의 신조이고 또 어느 우국자를 막론하고 다 같은 심경일 것입니다. 특히 과거의 우리 동지들은 현실의 포로가 되지 말고 조국번영과 우리의 이념을 살리기 위하여 최후까지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석 14)
조봉암에 대한 재심청구도 기각되었다. 대법원의 주심 판사였던 김갑수가 재심의 주심이 된 것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다. 일반적으로 사형수는 몇 차례 재심 청구를 하고 확정판결 뒤에도 한 두해 정도는 형의 집행이 연기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감옥에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집행이 유예된 사형수가 여럿 있었다. 조봉암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조봉암은 형이 집행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 2사 상 15방에 갇혀 있었다. 사형수들이 갇힌 옥사였다. 사형이 확정된 1959년 7월 30일, 진보당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무죄선고를 받은 권대복 등 관계자들이 조봉암이 수감된 방 앞으로 몰려가 울분에 찬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승만 도당이 선생님을 모살할 것입니다.”
조봉암은 껄껄 웃으며 쇠창살문으로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노여워들 하시오. 한 사람이 죽어야 한 사람이 사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 박사가 절대로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 하지 마세요. 내 나이 딱 환갑입니다. 병으로 죽은 사람,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많은데 평화통일운동을 하다 이렇게 떳떳하게 죽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주석 15)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운명의 순간이 그처럼 빨리 닥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승만의 수족이 된 검찰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7월 30일 하오 3시, 재심청구 기각통보를 받은 대검은 긴급회의를 열어 이튿날 상호에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할 것을 결정,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날이 밝아 7월 31일 상호 10시 30분, 대기중인 대검 검사실에 전화로 “집행하라”는 법무장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홍 법무장관은 그 집행명령을 몹시 꺼려하여 되도록 늦추려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권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 시각 사형집행장인 교수대에는 고검의 안문경 검사가 사형수 조봉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검사는 대검으로부터 집행명령을 받는다. 하얀 모시 저고리 바지, 그리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가슴에는 ‘2310’의 번호를 단 채 조봉암이 사형장에 도착한 것은 상오 11시 45분이었다.(주석 16)
죽음이 목전에 닥쳤다.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재심신청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집행을 실감하지 않았다. 아무리 정적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법질서는 지킬 것으로 믿었다.
주석
12) 이상두, 앞의 책, 134~ 136쪽, 재인용.
13) 임홍빈, '죽산 조봉암의 죽음', <신동아>, 1965년 8월호, 377쪽.
14) <한국일보>, 1959년 7월 17일자.
15) 오연호, '조봉암 처형 전야의 미국 공작원들', <월간 말>, 1993년 8월호, 145~146쪽.
16) 임홍빈, '죽산 조봉암은 왜 죽어야 했나', <신동아>, 1983년 3월호, 106~107쪽.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되길...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법무장관 홍진기는 대검찰청에 조봉암의 사형집행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고등검찰청의 안문경 검사가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집행장에서 형 집행을 지휘하였다. 수많은 의병ㆍ독립운동가들의 형이 집행된 바로 그곳이다.
7월 31일 상오 10시 50분, 형무관이 죽산의 감방으로 왔다.
죽산은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감방문이 열리고 죽산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순간 그는 죽음을 보았다.
형무소의 본 건물을 빠져나와 고만통이란 은어로 불리는 사형집행소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길가에 몇송이 들꽃이 피어 있었다. 죽산은 무상하게 들꽃을 바라보며 한마디 말을 피뜩 흘리었다.
“이곳에도 꽃이 피는구먼. 그런데 향기가 없어.”
사형수들이 몸부림치며 가는 그 길을 죽산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히 걸어갔다. 이윽고 ‘고통만’에 다다른 죽산은 하얀 커튼 사이로 사형대의 새끼줄을 보았다. 마지막 입회목사의 설교와 기도가 끝난 뒤, 그는 명상하듯이 삶의 마지막 유언을 했다. (주석 17)
이승만 정권은 철저했다. 이승만의 수족들은 이미 ‘국부’의 뜻을 간파한 까닭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절대권력 구조에서 관료, 법조인들이 얼마나 비인간화되는지는 20세기 3대 파쇼체제라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 스탈린 치하의 공산 소련, 쇼화 치하의 군국 일본처럼, 이승만 치하의 한국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절대권력 구조의 비인간화 현상은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대를 거쳐 사이비 민간정권으로 이어진다.
머리를 산뜻하게 다듬고 평소에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은 사형수는 가슴에 2310이란 번호를 붙인 채 10시 45분에 형장에 도착하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행관과 형무소 간부들 앞으로 태연한 모습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다음 순간이면 이 세상과 영영 이별해야 될 자신의 운명에는 아랑곳없는양 양손을 묶인 채 창백해진 얼굴에 담담한 표정으로 집행관의 의례적인 인상조서를 듣고 있었다. (주석 18)
집행관은 의례적인 철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주석 19)
이 대통령의 정치적 희생양이 된 조봉암은 입회목사에게 누가복음 제 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때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조봉암은 예수가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을 당하는 심경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이승의 모든 절차는 끝났다. 형의 집행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두 눈에 하얀 수건이 가려졌다. 사방은 깊은 물속같이 조용하다. 집행관과 목사, 형무관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집행명령이 내렸다. 사형수 조봉암의 목에 밧줄이 걸리고 이어 ‘철썩!’소리와 함께 사형수가 앉은 의자 밑의 마룻바닥이 떨어져나가면서 일은 끝난 것이다. 시각은 11시 3분, 1959년 7월 31일 한낮의 일이었다. 11분 후인 11시 17분에는 이미 조봉암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검시관의 검시를 받았다. (주석 20)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처형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치안국장 이강학의 명의로 각 언론사에 민심을 자극하고 북을 이롭게 하니 일절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 독립운동가이고 진보적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봉암의 처형사실은 모든 언론이 침묵하는 가운데 한국일보가 1단 6행으로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죽산조’와 ‘봉암새’의 신화가 수인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졌다. 제 3대 정ㆍ부통령선거 당시 조봉암의 러닝 메이트였던 박기출의 증언.
죽산은 태연하였고 조용히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제목에 대하여 설교를 요청하고 평온 자약하게 죽음의 계단을 밟고 올라간 것이다. 유해도 지극히 평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또 깨끗하였다고 한다. 이렇게도 늠름하고 이렇게도 평온할 수가 있겠는가. 보통사람이 자기 침실을 찾듯이 고요한 마음으로 교수대를 쳐다 본 것이다. 이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죽산은 참으로 자기의 인간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죽산은 한 정당의 영수되기에는 너무도 위대하다. 죽산은 순교자적 위치에 선 사람이기는 하나 그는 벌써 성자의 경지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 죽산은 일호의 흥분도 없이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의 자신에 가득찬 태도에서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위대하다고 느껴졌다. 말없이 떨어지는 낙조의 장미(壯美)와도 같이 죽산의 최후는 장엄하기도 하다. 생각할수록 죽산은 위대한 인간이었다고 느껴진다. (주석 21)
죽산조(竹山鳥)
(전략)
1958년 1월 13일
죽산 조봉암이 간첩혐의로 구속된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제 2대 제 3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던 죽산
그가 공산당의 앞잡이란다
세상은 놀라고 또 놀란다
스물한 살 나이로 3.1운동에 뛰어들어
징역살이로 청춘을 바친 죽산
일본에 건너가 흑도회를 결성
공산주의 운동에 앞장선 죽산
조선공산주의 조직총국 대표로
모스크바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했고
초기 조선공산당의 기둥이었다가
해방 후에는 돌연성명을 내어
박헌영을 몰아세우고 공산당과 등진 죽산
-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당을 했고 소련의 힘을 빌리고자 그쪽에 가담했다 -
고 뒷날 죽산은 밝혔다
공산당을 처음부터 알았던
그래서 공산당을 뿌리쳐야 했던
대한민국의 그의 이념과 사상을 믿고 받아주었던
죽산이 한낱 첩자였다니.
7월 2일
유병진 재판장은 죽산의 간첩혐의에
- 무죄 -를 선고한다
사흘 뒤 2백을 헤아리는 청년들이
법원에 쳐들어가 유병진 타도를 외친다
9월 4일
2심에서 양명산은 말한다
- 나는 특무대에서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죽산선생은 죄가 없다 -
양명산의 말은 쓰이지 않고
김용진 판사는 검사의 구형대로
김춘봉 신태악 변호사 변론도 허사로
김갑수 대법관과 오제도 검사에 의해
사형선고는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죽산은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죄가 아닐 바에야 죽음이 낫다
- 이념 대립의 한쪽이 없어야 승리한다
스스로 공산당을 등 돌렸으면서도
나라를 개혁하는 데는
사회주의 이론을 끌어들인 죽산
죽산은 삶과 죽음의 너머에 서 있었다
감방의 창문으로 한 마리 새를 불러들였다
밥알을 나누어 주고
새는 죽산을 보러 날아오고 날아왔다
죽산이 새에게 준 모이는 무엇이었을까
기미년 만세소리였을까
현해탄의 검은 물결이었을까
눈물이었을까
웃음이었을까
죽산을 따르던 이들과
딸 호정은 죽음만을 벗게 하려고
피라는 피 살이라는 살을 바친다
- 6.25 때는 반역자 조봉암을 처단하라는 공산당 벽보가 서울에 붙고 오늘은 아버님이 심혈은 기울이신 대한민국 품안에서 사형수가 되는 것입니까 -
리승만과 리기붕에게 향한 눈물어린 호소도
장택상의 구명운동도 모두 물거품
1959년 7월 31일
마지막 재심청구가 기각된 다음날
죽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죽산이 떠난 후에도
그의 창문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는 죽산조
그 새의 나라는 어딘가. (주석 22)(하략)
프랑소아 비용의 <대유언집>
15세기 프랑스의 음유시인 프랑소아 비용(1431~1463)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유언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중간 부분)
내 죽은 뒤 살아남을 모든 이들이여
나를 향해 모진 마음을 품지 말아라
나를 향해 가엾다 생각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그대에게 있으리라.
보라, 대여섯 명씩 결박된 우리들
마음대로 실컷 먹어 살찐 몸뚱이도
먹히고 썩어서 뼈만 앙상하게 나와
버려진 해골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리
아무도 이 비참한 최후를 비웃지 말고
하나님께 우리 위해 기도해 다오.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망정
그대들을 형제라 부르나니 비웃지 말라
세상사람 모두가 다 한결같이
현명하다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니라
우리가 처형을 당한 뒤에는
성모의 아들에게 죄사함을 빌어
지옥의 불길에서 우리를 건져내고
그 은총이 우리 위해 임하도록 하라.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자유로우니. (주석 23)
주석
17) 윤길중, <이 시대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194쪽, 호암출판사, 1991.
18) 박태균, 앞의 책, 395~396쪽.
19) 임홍빈, 앞의 글, 381쪽.
20) 박태균, 앞의 책, 397쪽.
21) 박기출, <내일을 찾는 마음>, 272쪽, 신서각, 1968.
22) 이근배, <한국일보>, 1984년 11월 10일.
23) 졸저, <광기와 방랑의 자유인들>, 57~58쪽, 새터,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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