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 명당순례_08

醉月 2014. 9. 26. 17:09

나의 글방-축령산 休休山房] 본인에게 맞는 곳이 ‘명당’

집 뒤 편백숲길 3~4시간 걷고 사색하며 의욕과 영감 얻어


‘어디에 사시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이 질문은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다.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전국 곳곳의 좋은 풍수와 명당을 답사하면서 살아온 당신은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느냐?’ 더 들어가면, ‘당신은 얼마나 좋은 명당에서 사느냐?’ 하는 질문인 것이다. 흔히 목수가 사는 자기 집은 볼품없다. 남들 집은 잘 지어 주면서 정작 자신의 집은 대강 사는 경우를 보았다. 이게 어디 목수뿐이겠는가!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9> | 나의 글방-축령산 休休山房]
▲ 장성 휴휴산방 뒤로는 편백나무숲이 있어 서너 시간 걷고 나면 의욕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사진 조선일보DB>

내가 사는 곳은 가족들과 살림하는 아파트가 익산에 있고, 글을 쓰는 글방이 따로 있으니 거처는 두 군데인 셈이다. 글을 쓰는 작업공간인 글방이 바로 전남 장성군 축령산 자락에 있는 휴휴산방(休休山房)이다. 직업이 문필가(文筆家)인 사람은 글을 써서 먹고 산다. 많은 직업 중에 어떻게 하다 보니까 문필업자가 되었다. 사주팔자에는 학당(學堂)과 문곡성(文曲星)이 각각 2개씩 들어 있으니까 팔자에 없는 직업은 아니다.


팔자에 문창성(文昌星)이 들어 있으면 살아서 이름을 날리는 문장가가 된다. 신라의 최치원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의 시호(諡號)도 문창제군(文昌帝君) 아닌가! 그러나 문곡성이 있으면 죽어서 이름을 조금 남긴다고 한다. 문창성은 양지의 문장을 다루지만, 문곡성은 음지의 문장을 다루기 때문이다. 문곡성을 타고난 팔자이긴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사색과 정신집중을 요한다. 그래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콘텐츠가 떠오른다.


문제는 정신집중이다. 정신집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이다. 필자의 방법은 산책이다. 걸어야 생각이 나오고 생각이 정리된다. 걷다 보면 안개같이 흐릿한 생각의 줄기도 선명하게 정리되고, 생각지도 않았던 아이템이 떠오른다. 걸어야 나온다. 산책하는 데서 글이 생산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시간도 관계된다. 1시간 미만을 걸으면 효과가 적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적어도 1시간 이상 걸었을 때 사고가 정리되기 시작한다. 보통은 1시간 반이 적당하고, 특별히 생각이 나지 않거나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서는 2~3시간도 걷는다. 두 다리와 몸에 약간 피로감이 들 때 이상하게도 머리는 개운해지는 것 같다. 고대 희랍에서 이리 저리 숲길을 걸으면서 사제 간에 문답을 주고받는 소요학파(逍遙學派)가 있었다고 하는데,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산책도 코스가 있다. 도시에서 차가 씽씽 다니는 보도블록 깔린 길보다는 숲길이 훨씬 좋다. 숲속에서 나무 냄새가 풍기는 길을 걸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상쾌해진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방 도시이기는 하지만, 아파트 뒤로 넓은 들판이 있다. 봄에는 모를 심고, 여름에는 벼가 자라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가을에는 누렇게 벼가 익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장관이다. 벼가 자랄 때 내뿜는 냄새도 좋다. 들판의 길을 걷는 것은 사시사철 변하는 벼의 모습을 관조하는 길이다. 들판에는 바람도 불어오고, 저쪽 너머로 개 짖는 소리도 들린다.


들판길은 사고확장에 도움… 산길은 집중에 유리
산길과 들판 길은 정서가 다르다. 아무래도 들판은 사방이 툭 트여 있어서 사고가 확장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산속의 숲길은 내면적으로 집중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 휴휴산방은 집 뒤로 300만 평의 편백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사람들은 히노키라고 부르는 나무다. 그 향이 좋아서 목욕통에 깔아 놓는 나무이다. 흐린 날이나 아침 일찍 새벽에 이 숲길을 산책하면 그 향이 짙게 몸에 밴다. 이 세상에 어떤 향수보다 나는 소나무 향과 편백의 향을 좋아한다. 소나무의 송진향은 나의 내면세계 근원으로 들어가게 하는 향이고, 편백의 향은 긴장을 이완시키면서 생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향이다.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9> | 나의 글방-축령산 休休山房]
▲ 1 마당에 매화를 포함한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자라 정신적으로 안정을 준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좌청룡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향이 두 나무의 향이다. 휴휴산방 뒷산인 축령산은 편백의 향이 가득하다. 글을 쓰는 문필가는 이 편백숲길을 걸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향이 나를 릴렉스시켜 주면서 글감을 주기 때문이다. 향(香)과 밥이 같이 온다고나 할까. 


축령산(鷲靈山)은 신령스런 독수리의 형상이란 뜻이다. 영취산(靈鷲山)도 같은 이름이다. 영취산을 영축산이라고도 읽고, 축령산이라고도 읽는다. 산봉우리들이 펼쳐진 모습이 독수리가 날개를 편 모습과 흡사하다. 독수리 머리가 있는 부분은 암벽이 돌출된 높은 봉우리이고, 그 머리 양 옆으로 3~4개의 둥그런 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으면 그게 독수리 날개이다. 휴휴산방은 내가 글을 쓰다가 배터리 방전이 되었을 때 들어온 집이다. 살면서 누구나 위기가 있고, 풍파가 있으며, 배터리 방전의 시기를 겪는다. 이때 어떻게 위기를 넘기느냐? 대응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40대 중반에 너무 과로를 했다. 여기 저기 답사도 너무 많이 다니고, 글을 많이 써대다 보니까 선천기운을 소진했던 것이다. 충전을 어떻게 하느냐? 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꿈을 꿨는데, 장성(長城)의 ‘축령산 자락이 너의 집이다’라고 하는 예시가 나타났다. 부동산이 자기와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꿈에 예시가 있는 법이다. 꿈에 예시가 있을 때에는 가격에 상관없이 무조건 사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부동산은 철없어야 산다. 너무 따지면 못 산다. 비싸고 싸고는 모른다. 자기에게 필요하면 싼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을 사면 비싼 것이다.


축령산에서 내려온 지맥 하나가 중간에 맺힌 지점이 휴휴산방이다. 그리고 앞산도 적당히 기운을 막아 준다. 앞산이 없어서 터가 너무 트여 있으면 허(虛)하다. 정신세계의 고단자는 오히려 앞산이 터져 있는 툭 트인 곳을 선호하지만, 우리같이 초심자는 앞산이 적당히 가려져 있는 곳이 안정감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앞산이 높으면 답답해진다. 적당한 높이로 있는 것이 중요하다.


대지는 350평, 건평은 15평이다. 시골집이니까 약간 넓어도 좋다. 15평 건평은 방이 2개, 그리고 부엌과 화장실이 들어가면 딱 맞는다. 집은 작아야 관리하기 쉽다. 집이 크면 사람을 누른다. 작아야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다. 집이 안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


방 2개 중에서 1개는 온돌방이다. 온돌이 두껍게 깔려 있어서 따뜻해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궁이에 장작을 3시간 정도 때 놓으면 6시간쯤 지나서 방바닥이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이게 단점이자 장점이다. 겨울에 와서 불을 넣기 시작하면 최소한 6시간은 추위에 떨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한 번 달궈 놓으면 2박3일은 온기가 유지된다.


온돌에 등짝 지져 긴장 풀어지게 하는 게 대접
아궁이에서 장작불을 때는 것도 힐링이다. 장작에 시뻘겋게 타는 불을 보면 마음이 왠지 훤해진다. 불을 보면 왜 마음이 밝아질까. 힌두교의 수행자인 사두들은 그래서 항상 조그만 화롯불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들었다. 유사시에 길바닥에서 차를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마음에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9> | 나의 글방-축령산 休休山房]
▲ 2 흙으로 지어진 장성 축령산 자락 휴휴산방은 꿈으로 예시를 줘서 사게 된 집이다.

허벅지만 한 두께의 장작을 6개 정도 아궁이에 집어넣어 놓으면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는다. 여기에다 등짝을 대고 누워 있으면 긴장이 풀린다. 긴장하면 등짝의 경락이 굳어 있는데, 뜨거운 온돌방이 이거 푸는 데는 최고다. 대접이 따로 없다. 나는 가끔 손님이 방문하면 다른 대접은 없다. 산속이라 먹을 것도 변변치 않고, 부엌도 시설이 열악해서 요리를 할 수 없다. 손님에 대한 대접은 장작불을 충분히 넣어 놓고 방을 달궈서 찾아온 지인의 등짝에 뭉친 긴장을 풀게 해주는 것이다.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9> | 나의 글방-축령산 休休山房]
▲ 3 집은 본인에게 맞아야 명당이다. 장성 휴휴산방의 방 하나는 온돌이고, 다른 하나는 편백나무여서 항상 신선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4 마당 한켠에 쌓은 돌탑은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오후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으면 오전 9시부터 아궁이에 장작불을 넣기 시작한다. 오후 4~5시가 되어 방이 따뜻해진 상태에서 손님이 방에 들어오면 옛날 할머니 계시던 외갓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그리고 나서 방문을 열어 놓고 매화나무의 매화를 바라본다. 물론 매화철에만 가능하다. 지금과 같은 늦여름에는 풀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른 방 하나는 온돌방이 아니고 마루방이다. 방바닥에 편백나무를 깔아 놓았다. 편백나무 밑에는 소금과 숯을 넣어 두었다. 잡냄새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편백나무 방은 주로 여름에 사용한다. 겨울에는 온돌방이지만 여름에는 편백나무 방이 좋다. 맨살이 편백 판자에 닿았을 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적당히 시원하면서도 피부에 거부감을 주지 않는 느낌. 인간의 살갗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게 나무바닥이다.


편백을 바닥에 깔아 놓은 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 향이 사라지지 않고 배어난다. 누워서 코로 편백향을 맡고 있으면 ‘인간 세상에 와서 이만하면 되었다. 뭘 더 바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름날에는 편백방에 누워 유리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보름달을 바라본다. 소나무 사이로 달이 오르면 이 또한 즐겁다. 방 안에 앉거나 누워서 창밖의 달을 보는 것도 정취가 남다르다. 야외에서 보는 달도 좋지만, 방 안에서 편안한 포즈로 유리창을 통해 보는 달이 나는 더 좋다. 왜 그럴까?


명당은 어디인가? 자기에게 맞는 곳이다. 특히 잘 나갈 때보다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힘들 때에 자기를 위로해 주고 에너지를 주는 곳이 명당 아니겠는가! 나에게 전남 장성의 축령산 휴휴산방은 그런 곳이었다. 토산(土山)인 축령산의 부드러운 기운이 나를 훈훈하게 보듬어 주었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독수리가 알을 품듯이 말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영취포란(靈鷲抱卵)이라고나 할까.


집 뒤로는 서너 시간 코스의 편백 산책길이 나에게 의욕과 영감을 주었고, 온돌방의 구들장은 막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저녁에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서 그 옛날 산속의 나무꾼 심정이 되었고, 비오는 날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천지가 인간에게 주는 끊임없는 은혜의 기운을 느꼈다.


명당은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사이다.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병이 들었을 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고, 자기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추어야 하고,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과 궁합이 맞는 터이어야만 한다. 문장을 다루는 문필가에게 편백숲의 산책길이 있는 터는 명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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