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신앙의 본산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전경. |
우리나라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지역감정도 한 개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다. 가장 큰 지역감정은 이북, 즉 북한 지역 사람들이 가졌던 차별의식이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이북은 차별당했다. 여기서 차별이라 하는 것은 고위직 진출이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평양(평안)감사 자리이다. 이북 출신이 평양감사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이남 출신이 이 노른자 벼슬을 차지하였다. 조선에서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신들이 중간에 반드시 들르는 지역이 평양이다. 사신으로 가는 정권 실세들에게 평양감사는 대접을 후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홍수로 압록강에 물이 불어나면 평양 체류기간도 길어졌다. 평양감사는 이 시간에 진수성찬과 여색을 대접했다. ‘럭셔리’ 접대를 제공한 평양감사가 비리 혐의로 중간에 파직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실세들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역 차별의 역사
이북 지역의 군수 이상 자리는 대부분 이남 출신들이 올라가서 차지하였다. 그래서 이북 사람들의 한이 쌓였다. 특히 인재가 많았던 서북 지역(평양과 인근 지역)은 지역감정이 쌓였다. 한양정부가 볼 때 서울의 서북 지역에 해당하는 평양 일대는 한양을 때리는 살풍(殺風)이 불어오는 위험 지역이었다. 서북 차별의 쌓인 한이 폭발하는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왜 이북 사람에게 벼슬을 주지 않았는가. 벼슬을 주면 한양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북 지역이 무력에 강하다고 여겼던 탓이다.
영남은 어떤가? 영남도 조선 후기 250년 동안 차별을 당하였다. 대략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부터 차별이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은 기호 지역인 서인들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경남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남명학파가 괴멸되다시피 타격을 받았다. 경북 지역인 퇴계학파도 탄압을 받긴 했지만 남명학파보다는 덜 받았다. 임진왜란 때 서애 류성룡 이후로 영남 지역에서 영의정 벼슬이 나온 것도 드물다. 장관급인 판서 벼슬도 2~3명 정도밖에 없다. 영남 출신 인사가 정3품 당상관 이상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조령을 넘어 한양 가기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안동의 명문가 종손들이 술자리에서 필자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250년 동안 노론의 칼바람을 맞으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안동김씨 세도’는 무슨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안동김씨는 서울 장동(壯洞·지금의 청운동 일대)에 살았던 장동김씨를 가리킨다.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후손들을 말한다. 대략 17세기 중반부터 득세하기 시작하여 대원군 때까지 세도를 누렸던 집안이다. 이 사람들은 원적지는 안동이었지만 1500년대 초반부터 서울에 이사와서 살기 시작하여 계속 서울에 살았던 서울 사람들이었다. 족보가 안동이라고 해서 안동 사람은 아니다. 서울 장동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인 노선도 영남의 남인당이 아니라 기호의 노론당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집안이다. 따라서 안동김씨는 안동 사람들이 세도를 누린 게 아니라 서울의 집권 여당에 속하였던 장동김씨들이 세도를 누린 것이다. 세도의 측면에서 안동과는 상관없다.
안동을 포함해서 영남은 조선 후기 250년 동안 춥고 배고팠다. 안동이 간고등어와 헛제삿밥을 먹어야 했던 배경이다. 250년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끝내준 인물이 박정희다. 5·16 군사정변 이후로 영남은 지역차별의 한을 풀었다. 근래에는 삼성이 반도체로 세계적 기업이 되면서 남명학파의 축적되었던 한이 풀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황창규를 비롯한 삼성의 핵심 인재들이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권의 경남 지역 출신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남차별은 어떻게 되는가? 5·16 이후로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지역차별이라 할 만큼의 차별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호남의 지역차별이 역사적 뿌리가 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660년 백제 패망부터 거슬러 올라가 시점을 잡는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점령되면서 백제는 패전국 백성이라는 고달픈 삶을 살아야만 하였다는 상황은 짐작이 된다. 패전국 식민지 백성들의 한을 풀어준 인물이 바로 8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던 진표율사(眞表律師)이다. 백제 패망 후에 100년쯤 지나 나타난 인물이 진표이다.
새로운 세상은 차별 없는 세상
진표는 어떤 방식으로 백제 식민지 백성의 한을 풀어주었는가? 방식이 중요하다. 미륵신앙이다. 미륵은 미래에 등장하는 미래불이다. 석가불은 이미 돌아가셨다. 죽은 양반에게 비는 것보다는 앞으로 나타날 미래 부처님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당대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미륵불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가. 백제 유민의 고달픈 삶이 종식되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그것이 용화회상(龍華會上)이다. 미륵부처님이 나와서 다스리는 세상이다. 용화회상이 되면 뭐가 좋아지는가.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가? 그것보다는 차별 철폐였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백성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평등 세상’의 도래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미륵불이 양반, 상놈의 차별을 없애주는 부처님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하층계급의 민초들이 떠받드는 부처님으로 자리 잡았다. 미륵불이 나오면 상놈 딱지를 뗄 수 있다고 말이다.
한국 미륵신앙의 원조는 진표율사이다. 진표율사가 보여준 도력과 감화력, 그리고 성자로서의 면모가 미륵신앙을 한국 땅에 뿌리내리게 만들었다. 외래 사상이 그 땅에 뿌리를 내리는 단계에서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인물이 진표율사다. 그리고 그 사찰이 김제 금산사(金山寺)인 것이다. 진표 뒤에는 꼭 율사(律師)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다.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고대 불교의 수행방법은 우선 계율을 지키는 일이었다. 화두를 잡거나 염불을 하는 방법보다는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게 곧 수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계율이 어떤 것이겠는가. 간단하게 설명하면 살도음(殺盜淫)을 안 하는 것이고, 잡스러운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면 자연스럽게 삼매에 들고, 삼매에 오래 들어가다 보면 신통력도 생기고 특출난 지혜가 생긴다. 진표는 특별한 신통력의 소유자였다. 도력이 없으면 사람들이 어찌 믿겠는가. 예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진표는 금강산으로 가면서 강원도 강릉 지역 일대를 통과하였는데, 강을 건널 때 다리가 없었다. 이때 자라 떼가 엄청나게 나타나 다리가 되어주었다. 진표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말이다. 진표가 흙바닥 길을 건너갈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이 나와서 머리카락을 잘라 길에다 깔아주었다. 질퍽한 진흙을 밟지 말고 머리카락을 밟고 가라는 의도에서였다. 당시 사람들이 성자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을 이런 식으로 표시했던 것 같다. 교황청에서 깔았던 카펫이 레드카펫이라고 들었다. 존경과 성스러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제에서 까는 레드카펫도 로마 교황청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서양에서 붉은색은 아주 신성한 색이었다. 양(陽)을 상징하는 색이다. 귀신을 쫓는 색이다. 레드카펫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카펫이 머리카락 카펫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서 길바닥에다 깔아놓고 성인이 지나가도록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진표는 머리카락 카펫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얼마나 그 인품이 고결했고, 얼마나 그 아우라가 성스러웠으면 그랬겠는가. 일연의 ‘삼국유사’는 내용의 대부분이 신라 중심의 콘텐츠에 해당한다. 일연이 경상도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에 백제 지역의 일화는 드물다. 그런데도 진표율사 이야기는 2편이나 소개되고 있다. 내용도 상당히 자세하다. 진표보다 무려 500년의 시간 격차를 두고 활동한 일연스님이 자기와는 멀리 떨어진 전라도 동네의 진표율사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입전(入傳)시킨 것은 그만큼 진표의 임팩트가 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맥의 기운이 뭉친 곳
금산사는 김제 모악산(母岳山· 793m) 자락의 정기가 뭉쳐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는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육산(肉山)이다. 지리산, 오대산과 같은 육산의 계보에 속한 산이다. 그런데 악(岳) 자가 붙어 있다. 악은 험한 바위가 있는 산에 붙는 이름이다. 설악산, 개성의 송악산, 원주 치악산, 월악산, 운악산, 관악산 등이다. 모악산은 어머니 품 같은 육산이면서도 속에는 악산(岳山)의 기운이 꿈틀거린다는 뜻이 아닐까. 이리 되면 외유내강이다. 사람도 외유내강이 있지만 산에도 외유내강이 있다. 원래 모악산은 금산(金山)이었다는 설이 있다. 산 속에 금이 많이 묻혀 있어서 생긴 이름 같다. 왜정 때에도 일본인들이 모악산 이쪽저쪽에서 금을 채굴하려고 시도하곤 하였다. 이 금 채굴에 결사 반대하다가 금광업자들에게 돌을 맞아 돌아가신 스님도 있을 정도다. 금이 많이 묻혀 있는 금산에 있는 절이 금산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작명이다.
금산사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계단(戒壇)이다.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 출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시설이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우선 계율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다. 그 출가식을 거행하는 계단은 국내에 2군데 남아 있다. 하나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이고, 또 하나가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이다. 금강계단에 비해 방등계단이 좀 더 평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금강계단이 출가자 전용 계단이라고 한다면 방등계단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다. 출가뿐만 아니라 재가의 남녀 신도를 포함한 사부대중 모두가 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계단은 언덕 주변에 네모지게 돌난간을 만들고 기단은 석축으로 쌓았다. 필자를 안내하면서 직접 설명을 해주신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圓行)스님은 금산사가 머리를 깎은 출가본사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꿰뚫고 있다. “모악산에서 맥이 이 금산사 쪽으로 3군데가 내려옵니다. 모악산에서 왼쪽으로 내려온 줄기는 절의 좌청룡이 되었고, 오른쪽으로 내려온 맥은 우백호가 되었어요. 그 가운데로 내려온 맥이 바로 이 방등계단으로 왔습니다. 가운데 맥의 기운이 뭉친 지점이 계단인 것이죠. 옛날 어른들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가운데 맥이 떨어진 지점에다 진표율사가 계단을 설치한 것이죠. 이 지점에 계단을 정식으로 설치한 시기는 신라 경덕왕 21년인 762년입니다.”
전라도는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논밭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특히 쌀농사를 짓는 데에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전라도에는 고대부터 저수지가 축조됐다.
대표적으로 세 곳의 대규모 저수지가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 앞에는 둘레 70리(27㎞) 크기의 저수지 황등제가 있었고, 김제 금산사 옆에는 벽골제가 있다. 또 고창 선운사 옆에는 눌제가 있었다. ‘제(堤)’는 물을 가두는 제방(堤防)을 가리킨다. 이 세 곳의 ‘제’ 옆에는 공통적으로 미륵사찰이 있었다.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믿는 불교신앙이 미륵신앙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쌀 수확을 마치고 미륵불 앞에 추수감사제를 올렸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제방 3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벽골제이다. 벽골제라는 이름은 ‘볏골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일대는 벼가 많이 자라는 ‘벼의 골’, 즉 ‘볏골’이었다. 전라도 최대의 쌀을 생산하는 고장의 중심 사찰이 바로 금산사였고, 금산사 미륵불이 전라도 농민이 믿고 의지하는 부처님이었다. 미륵전 터는 원래 용이 살던 늪지대였는데, 진표율사 당대에 숯으로 터를 메우고 법당을 만들었다. 경주 황룡사, 양산 통도사, 익산 미륵사, 그리고 금산사 미륵전도 용이 살던 터였다. 고대에는 용이 살던 터에 법당을 짓는 관습이 있었다. 용을 대체한 것이 미륵불이다.
금산사에는 구룡토수(九龍吐水)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 터에 살던 9마리의 용이 물을 토하면서 미륵불을 지키는 호위신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설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 백제 유민들이 금산사 미륵불을 더욱 의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갈 곳 없는 망국 백성이 의지할 데는 종교, 신앙일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하면 좋은 세상 오리라! 탄압에서 벗어나고 모두가 잘 사는 좋은 세상. 양반, 상놈 없어지는 평등 세상. 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인물이 진표율사이고, 희망의 본산이 금산사 미륵전이었다. 당연히 그 미륵불은 크게 조성할 수밖에 없다.
백제 유민들의 천년 기도
미륵전의 미륵삼존은 지금 보기에도 엄청난 크기이다. 진표율사 당대인 8세기 후반에는 더욱 크게 보였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늘나라 천당이 한 층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하늘나라가 33층이다. 33천(天)이 있다고 믿는다. 하늘나라 가운데가 미륵불이 계시는 도솔천(天)이다. 도솔천에 사는 천인(天人)들은 모두 키가 크다고 한다. 4~5m 크기이다. 불교 신자들이 꿈에 보는 미륵불이나 도솔천의 천인들은 모두 큰 사이즈로 나온다. 미륵불을 조성하는 석공들은 그러한 꿈을 직접 꾸거나 아니면 체험담을 듣고 불상을 조성한다. 자기 맘대로 조성하는 게 아니다. 불교의 불상을 조성하는 장인들도 계율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수도생활을 해야만 불상을 제대로 조성할 수 있다. 영험한 꿈이라도 꾸어야 한다. 삼겹살에 소주나 먹고 사는 게 아니다. 아무튼 망국의 백성, 백제 유민들의 메시아가 바로 금산사 미륵불이었고, 이 미륵불이 나타나기를 백제 유민들은 천년이 넘게 기도하였다. 전라도민의 정신이 모아진 곳이 바로 금산사 미륵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에서 전라도로 이어지는 이곳 민초들의 정신이 농축액처럼 모여 있던 금산사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정유재란은 전라도를 타격하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보전되는 바람에 전쟁을 못 이겼다고 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특별히 전라도를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금산사 출신 승병장이 뇌묵처영(雷黙處英)이다. 승군 총대장이 서산대사라면 왼팔은 사명대사이고, 오른팔은 뇌묵처영이었다. 서산대사는 당시 노인이었으므로 전쟁터에 나가지는 못했고, 사명과 뇌묵처영이 실전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러나 뇌묵처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거의 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뇌묵(雷黙)은 뇌성벽력 같은 용맹함을 지녔지만 그의 행적은 침묵 속에 묻혀 있다. 그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진입해 오던 구례 석주관 전투, 남원성 전투, 그리고 금산사 일대 전투, 전주에서 진안 넘어가는 곰티재 전투, 행주산성 전투를 지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근처의 행주산성전투만 하더라도 산성 입구에서 왜군과 직접 육박전을 벌인 부대는 뇌묵처영이 지휘하던 승군들이었다. 권율은 후방에 있었다. 가장 치열한 최전방에는 승군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승군 지휘를 뇌묵처영이 하였다.
왜군들은 뇌묵처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뇌묵처영의 출가 본산지인 금산사로 쳐들어와서 철저하게 불을 지르며 초토화시켰다. 금산사는 넓은 평지에 자리 잡은 절이라서 건물이 수백 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 수백 칸이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금산사 인근의 사찰들, 예를 들면 귀신사(歸信寺)도 이때 불탔다. 불에 타고 남은 것은 미륵전의 쇠로 만든 좌대(座臺)였다. 미륵불 발밑을 받쳐주는 밥솥 형태이다. 말하자면 쇠솥 형태이다. 지금도 미륵전의 반지하에는 이 좌대가 남아 있다. 인근 전라도 사람들은 좌대를 손으로 만지면 재수가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필자도 초등학교 다닐 때 미륵전에 오면 어른들 따라서 이 좌대를 만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진표율사 당대에 만들었던 좌대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좌대 위에 다시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조선 중기 때 환성지안(喚醒志安·1664~1729) 법사가 금산사에서 대중 법회를 열었다. 이때 참석한 인원이 1500명 정도 되었다. 전화가 없고, 자동차도 없었던 당시로는 엄청난 인력 동원이었다. 메시아 출현의 신앙이 어려 있는 금산사에서 대규모 불교도가 모였다는 소문은 한양 정부를 긴장시켰다. ‘이러다가 혹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다른 사찰도 아니고 하필 금산사에서 벌어진 집회였기 때문에 정권이 긴장하였다고 보인다.
한양 정권에서는 환성지안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낸 다음에 장살했다. 금산사 집회를 정치 집회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환성지안을 장살했다고 해서 금산사의 미륵불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에도 금산사는 후천개벽의 성지로 믿어졌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금산사 일대에서 출현한다는 천년이 넘는 믿음이 다시 작동한 셈이다. 강증산과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이 금산사와 인연이 깊다. 강증산은 호가 시루 증(甑) 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다. 시루는 무엇인가? 떡을 찔 때 솥 위에 올려 놓는 것이 시루이다. 강증산이 자신의 호를 떡시루의 의미가 들어 있는 증산으로 정한 데에는 민중들에게 떡을 주겠다는 의도가 있다. 시루는 밑바탕에 솥이 반드시 필요하다.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 좌대를 바로 그 ‘솥’으로 여겼다. 자신이 미륵불이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미륵전의 미륵불로 다시 오리라’라고 하는 게 증산의 예언이기도 하였다.
▲ 금산사 미륵전 앞에 있는 석연대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경상도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강증산이 여러 가지 신통, 이적을 보여주자 금산사 일대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왜정 때 특히 그랬다. 경상도에서도 일본 놈 물러가고 좋은 세상이 오면 금산사 용화동 일대가 제일 첫 번째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정 때 경상도 사람들이 집 팔고 논 팔아서 이곳 금산사 밑으로 모여들었다. 1970~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금산사 밑의 용화동 일대에는 경상도 말씨를 쓰는 노인들이 많았다. 왜정 때 이주한 경상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일본에 망했고, 성질 과격한 극소수는 만주에 가서 총 들고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성질이 좀 덜 과격하고 일본 놈 밑에서 살기는 싫었던 사람들은 금산사 일대로 이주하여 신흥 종교를 믿었다. 미륵불 메시아가 불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민초들의 신종교를 떠받쳐 주는 신앙으로 확대된 것이다.
정읍 입암리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보천교가 왜정 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보천교의 창시자 차경석도 금산사와 강증산 신봉자였다. 탄허스님의 아버지 김홍규가 바로 차경석의 핵심 참모였다. 보천교 목방주(木方主)를 맡았다. 목방주는 동쪽 방향의 주인이라는 의미인데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 입암리의 보천교 본부 건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탄허스님도 출신 배경에는 금산사 미륵신앙이 깔려 있는 셈이다.
원불교의 소태산도 젊었을 때 금산사의 송대(松臺)라는 건물에 와서 머물렀다. 방등계단 밑의 오른쪽에 있는 집이다. 그래서 원불교 사람들도 금산사 ‘송대’는 특별한 감정으로 대한다. 익산에 있는 원불교 총본부 내에도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송대’라는 이름을 가진 공간이 있다. 금산사 송대와 연관이 있다. ‘彌勒(미륵)’을 파자하면 ‘이(爾) 활(弓)로 힘(力)을 키워서 혁명(革)하자’라는 뜻이 나온다. 이 해석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고려 공산당 초대 당수를 지냈던 김철수(金綴洙·1893~1986)로부터 필자가 1980년대 초반에 직접 들었던 이야기이다.
마상혈, 일명 벼슬봉이 정면에
금산사 터를 보려면 방등계단 위에서 보아야 한다. 정면으로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나지막한 봉우리 형태가 마상혈(馬上穴)로 보인다. 풍수가에서는 일명 ‘벼슬봉’ 또는 ‘마체(馬體)’라고 부르기도 한다. 둥그스름한 봉우리 두 개가 연이어 붙어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약간 작은 봉우리가 나란히 포진한 모습이다. 이 모습이 말안장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이름에 마(馬)가 들어간다. 이 마상혈이 집터나 동네 앞에 있으면 그 터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벼슬은 말을 타고 온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금산사에서 조계종단의 책임자인 총무원장도 두 명이나 배출되었다. 같은 사찰에서 총무원장 2명이 나온 것도 기록이다. 월주 스님과 원행(圓行) 스님이다. 월주의 제자가 원행이다. 사제지간에 총무원장을 배출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문중이 금산사 문중이다.
미륵전 터는 오공혈(蜈蚣穴)로 알려져 있다. 모악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의 모습이 지네(蜈蚣) 형태이다. 지네는 앞에 닭 봉우리가 있어야 격에 맞다. 지네와 닭은 서로 마주 보아야 힘을 받는다. 그런데 금산사 미륵전 앞에 닭 봉우리가 있다. 미륵전 앞에서 바라보이는 봉우리 이름은 계룡봉(鷄龍峰)이다. 계룡산도 있지만 금산사 앞에는 계룡봉이 있다. 계룡봉 아래 쪽으로 내려가면 용화동이 있다. 왜정 때 후천개벽의 성지로 믿었던 공간이다. 금산사는 진표율사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제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압박당하던 민초들의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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