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도립미술관부터 예술따라 한바퀴...전남 '미술관'기행

醉月 2021. 5. 29. 14:07

 

전남도립미술관 개관 전시 중 하나인 ‘현대와 전통, 가로지르다’는 전통의 순수화와 수묵화를 한국화와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등 현대적인 조형언어로 재해석한 전시다. 이 전시에 걸린 김병연 작가의 수묵 대작, ‘지리산’(사진 왼쪽)과 ‘월출산’(오른쪽). 수묵으로 옮겨진 지리산은 전남 구례의 사성암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여행에서는 일상에서 결핍한 것들을 찾으니, 도시 사람들의 여행이 자연으로 향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결핍한 게 어디 자연뿐이겠습니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지침으로 문화예술 콘텐츠를 직접 접할 기회가 크게 줄었습니다. 미술관도, 공연장도, 박물관도 멀어졌습니다. 바깥을 통해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인문학적 성찰의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지요. 미술관을 ‘마지막 목적지’로 하는 여행을 제안하는 까닭입니다. 계기는 전남도립미술관의 개관이었습니다. ‘예향(藝鄕)’이라며 뻐기던 전남에 이때껏 변변한 도립미술관 하나 없었다는 건, 사실 어이없는 일이었지요. ‘이건희 컬렉션’의 기부로 이뤄진 잇단 ‘미술작품의 귀향’도 미술관으로 가는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예술과 역사가 깃든 인문적 공간이 지금,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위로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은 예술품 앞에서, 오래된 박물관의 유물 앞에서 우리는 위기를 극복해온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남도 땅 이곳저곳을 다 둘러본 뒤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러 남도의 자연과 정서를 불어넣은 그림 앞에, 혹은 오래전의 것에 깃든 옛사람의 마음 앞에 서보는 경험을 권합니다. ‘공간’은 ‘숙명’입니다. 숙명 때문에 남도의 미술관은, 서울의 미술관과 같을 리 없습니다. 그곳이 고향인 이들을 숙명처럼 불러 모으고, 시간과 기억을 증거합니다. 시간과 기억을 불러내는 것. 그게 ‘장소’가 가진 힘입니다. 따지고 보면 여행도 그런 ‘장소’를 찾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3월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 전경. 사선의 유리로 된 외형이 현대적이다.

# 예술품의 ‘제자리’는 어디인가

모든 것을 있었던 제자리로…. 그렇게 그림이 왔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얘기다.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평생 모은 예술품, 그러니까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일부가 작가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작가가 어디서 활동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고향이다. 어디서 나고 자랐는가. 그렇게 진도 출신 허백련, 화순 출신 오지호, 신안 출신 김환기, 고흥 출신 천경자의 그림이 전남도립미술관으로 보내졌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아주 독특한 한국적 사고”라고 했다. 그림의 제자리를 ‘화가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것 말이다. “외국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도 했다. 전남도립미술관은 지난 3월 22일 문을 열었다. 그전까지 전남도에는 도립다운 도립미술관이 없었다. 곡성에 ‘전남도립 옥과미술관’이 있긴 했지만, 그거야 원로화가 개인이 땅을 내주고 수집한 그림까지 기증해서 문을 열게 된 경우다. 미술관이 필요해서 문을 열었던 게 아니라, 기증하는 걸 받자니 ‘도립’이란 공공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미술관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게 전부다. 전남도가 스스로 ‘예향’이라며 예술적 전통을 뻐겨왔던 걸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전남도립미술관이 개관한 건 지난 3월 22일. 미술관은 개관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본전을 뽑았다. 지난 4월 이건희 컬렉션의 미술작품 스물한 점이 도립미술관에 기증된 것. 기증한 작품을 보관하거나 전시할 시설이 없는 곳에다 그림을 줄 수 없는 일. 도립미술관이 지어지지 않았다면, 전남도는 과연 이 작품을 기증받을 수 있었을까. 도립미술관 건축비 총액은 200억 원이다. 모르긴 해도 도립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 스물한 점 가격이 이보다 더 비싸지 않을까.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전남도립미술관 분관 아산조방원미술관.

# 도립미술관의 첫 메시지…왜 ‘배산임수’일까

전남도립미술관은 광양읍 한복판에 있다. 낙후된 구도심이다. 맞은편에는 카센터와 주유소가 있고, 피자집과 횟집, 부동산이 있다. 길 하나를 두고 예술의 공간과 일상의 누추한 공간이 대치하고 있다. 미술관이 들어선 자리는 옛 광양역이 있던 자리다. 10년 전쯤 경전선 선로 직선화 공사로 광양역이 옮겨간 자리에 미술관이 지어진 것이다. 경전선 열차를 타고 광양을 들고나던 옛 역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선 것이다.

미술관 건축은 모던하고 도시적이다. 마름모꼴 유리 외벽의 건물 세 개가 나란히 연결돼 있는 듯 보인다. 옛 광양역 자리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열차. 실제로는 하나의 건물이지만, 나란한 세 개의 건물처럼 지어져 열차를 연상케 한다. 두 번째로 느껴지는 건 산(山)이다. 건축물 유리 외벽이 부각하는 건 사선이다. 사선의 상승감은 건물을 마치 산처럼 느끼게 한다. 어두운 유리로 마감된 외벽은 거울 역할도 한다.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른 하늘과 구름을 마치 거대한 캔버스처럼 비춰낸다.

유리 외벽으로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도립미술관 전시실은 지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개방감이 탁월하다. 전시실에서는 개관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다’전(展)이다. 산을 등 뒤에, 물을 앞에 두는 것.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전시의 큰 제목으로 잡았다. 이미지는 전남 미술의 성지로 불리는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기거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 뒤로 산을, 앞으로 연못을 두고 있다.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자리다.

개관전이 내건 배산임수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등 뒤에 둔 산은 뿌리 깊은 남도예술의 전통을, 앞에 둔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변화와 미래를 상징한다. 전통과 미래의 조화를 뜻한다는 얘기다. 실은 운림산방의 가장 주목할 만한 가치도, 소치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종화의 맥을 이었다는 것에 있다고 보면 일맥상통한다.

개관전은 미술관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렇다면 도립미술관이 개관전으로 보여준 배산임수는 ‘전통을 자산으로 미래를 모색하자’는 의미다. 이지호 관장은 ‘전통의 계승과 전복(아방가르드)이 공존하는 미술관’을 얘기했다.


# 전통과 현대, 미래를 넘나들다

▲ 국립광주박물관의 국보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본래 전남 광양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이다.


도립미술관 개관전은 세 개의 전시로 이뤄졌다. 첫 번째 전시 ‘의재와 남농: 거장의 길’은 전남 전통 회화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의 전시다. 진도의 같은 집안 출신으로 그림을 함께 배웠지만, 의재는 전통의 바탕을 중시했던 반면, 남농은 새로운 그림을 추구했다. 두 거장의 작품을 통해 남도 미술의 전통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남도의 푸근한 자연과 빼어난 경관을 붙잡아 그린 수묵담채화가 푸근하다.

두 번째 전시 ‘현대와 전통, 가로지르다’는 전통을 바라보는 현대 작가들의 시선의 다양한 확장을 보여주는 전시다. 홀로그램 필름 위에다 그린 그림도 있고,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지리산과 월출산을 그린 대작도 있다. 빔프로젝터로 반전된 산수화를 화면에 상영하고, 그 아래 물을 담아 수면 위에 화면이 반영되는 장면을 보여주는 미디어아트 작품도 있다. 개성적인 해석과 거침없는 상상력이 흥미진진하다.

세 번째 전시에서는 프랑스의 현대미술 작가 로랑 그라소가 시대와 문명의 통합을 담은 회화, 영상, 설치미술 작품을 보여준다. 눈에 띄는 건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제작된 신작 ‘과거를 연구하다’ 연작. 공재 윤두서의 ‘말 탄 사람’과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총도’를 독특한 해석으로 옮겨놓았다. 역사적인 그림을 유사한 화법으로 재현하고 재배치한 그림이 오래 발길을 붙잡는다.

예향 남도에 문을 연 전남도립미술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이를테면 남도의 빼어난 경관이나 인문적 공간을 두루 여행한 뒤에 여정을 정리하며 미술관에서 이런 감상을 되새기는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면…. 해남의 녹우당과 완도의 보길도를 돌아보고 ‘자화상’을 비롯한 공재 윤두서의 귀기 어린 그림을 감상한다거나, 강진의 다산초당을 다녀온 뒤 다산의 글을 얹은 화첩을 본다거나 하는 그런 경험 말이다.

이지호 관장은 “아직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우선,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남도의 역사를 두루 꿰고 있는 기획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적어도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도 했다. 완결된 형태가 그쯤에나 나올 것이란 뜻이지, 계획과 시도는 부단하게 이뤄진다. 오는 7월 18일까지 열리는 개관특별전에 이어 두 번째로 준비 중인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의 전시가 기다려지는 건 그래서다. 이 관장은 이어 지역의 공공미술관이 갖춰야 할 책임 이야기를 꺼냈다. 간추려 정리하면 도립미술관은 관광객이나 외지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 지역민들에 대한 예술 향유의 공간으로써의 기능, 그리고 지역 예술의 지원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얘기였다.


조선 후기의 명필 창암 이삼만이 다양한 서체로 쓴 ‘여원규서’. 동국진체의 완성형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 옥과미술관이 이름을 바꿔 단 까닭

이제 미뤄둔 옥과미술관 얘기를 해보자. 곡성의 옥과미술관은 전남도립미술관이 문을 열기 전까지 유일한 도립미술관이었다. 광양에 새 도립미술관을 짓기로 결정이 내려졌을 때 옥과미술관은 기대에 넘쳤다. ‘전남 유일의 도립미술관’의 자리에 있다가 ‘도립미술관 분관’으로 지위가 격하될 게 뻔했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이렇다. 옥과미술관은 남농 허건의 제자인 한국화가 아산 조방원 화백이 평생 수집한 그림 등 소장품 6800여 점과 땅 1만4090㎡(4263평)를 기증해 1996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도립미술관이다. 기부자가 미술관 부지부터 소장품까지 다 내놓은 데다 미술관 운영도 기부자가 설립한 재단에서 맡았다. 본래 예정했던 미술관 명칭은 ‘전남 아산미술관’이었다. 기증자인 조 화백의 호 ‘아산’을 미술관 이름에 넣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의회 심의과정에서 ‘공공미술관에 개인의 호나 이름을 넣을 수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결국 미술관은 지명인 ‘옥과’를 이름 삼아 문을 열었고, 20년 넘게 그 이름을 고수해왔다. 2014년 조 화백이 작고하자 유족들은 다시 미술관 개명을 요구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그러다가 전남도립미술관이 광양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옥과미술관은 ‘아산조방원미술관’으로 이름을 고쳐 달 수 있었다. 그러니 새 도립미술관 건립 결정을 반겼을밖에….

아산조방원미술관에서는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보다 2층 전시실 유물을 눈여겨볼 만하다. 조 화백이 기증한 유물이 전시돼 있는 미술관 2층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중간쯤에 있다. 이곳에서 다른 것 다 제치고 먼저 봐야 할 것은 조선 후기 서예가 창암 이삼만의 서첩 ‘여원규서’다. 여원규서는 창암이 제자에게 주는 서예의 비법을 적은 글인데 글씨의 뜻에 따라 초서와 해서, 행서 등 다양한 서체를 섞고, 글자의 크기까지도 자유롭고 분방하게 구사했다. 대가의 풍모와 함께 동국진체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미술관에는 추사 김정희가 보낸 간찰도 있고, 원교 이광사의 힘찬 기운의 글씨를 담은 12폭 병풍도 있다. 파격적인 매화 그림으로 일세를 풍미한 우봉 조희룡의 묵매도와 난초 그림도 빼놓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전남 강진 용혈암터에서 출토된 청자편. 나한상 조각에서 고려인의 얼굴이 보인다.

# ‘제자리’에 있다는 것의 의미

전남도립미술관은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을 오는 9월쯤 전시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진도와 신안, 화순, 고흥…. 화가가 나고 자란 고향 땅으로 돌아온 그림은 ‘제자리’를 생각하게 한다. 기왕 미술관으로 떠난 길, 자연경관보다는 예술과 문화유적의 감상으로 여정을 이어가 보자. 광양에는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귀한 것이 있다. 제자리를 잃고 고향을 떠난 국보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다. 석등은 광양에 ‘있었다.’ 문장은 ‘과거형’이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광주박물관에서 딱 두 개 있는 국보 중 하나다. 나머지 하나가 미감이나 형태보다는 존재로 평가받는 청동기 유물이니, 우아한 형태의 석등은 더 돋보인다. 석등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다. 화강암으로 쪼아 만든 두 마리 사자가 마주 보고 일어서 가슴을 맞대고 불발기집(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다. 살아 있는 듯한 사자의 역동감이라니…. 이 석등은 국보 법주사 쌍사자석등, 보물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 3대 명품 석등으로 꼽힌다.

광양 중흥산성의 통일신라 시대 절터에 삼층석탑과 함께 서 있었던 쌍사자석등이 어떻게 광주박물관까지 가게 됐을까.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 주민들이 옥룡보통학교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한 골동품상에 석등을 팔기로 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뒤늦게 석등이 국보급 문화재이고, 문화재를 팔아넘기는 게 불법행위임을 안 주민들은 매각을 포기했다. 그런데 석등을 넘겨받기로 했던 대구의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가 부산의 골동품상과 모의해 석등 반출을 시도했다. 이들은 석등을 분해해 옥룡면사무소 앞에다 옮겨 놓았는데, 주민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반출은 미수에 그쳤다.

옥룡면사무소에 보관돼 있던 석등을 조선총독부는 전남지사 관사로 옮기게 했다. 석등의 우아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이듬해 석등은 다시 경복궁 자경전 앞으로 옮겨졌다. 이어 1945년 해방을 거치면서 석등은 경무대로 갔다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후에는 국립박물관이 있는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2년 국립박물관이 경복궁으로 이사를 갈 때도, 다시 옛 중앙청 건물로 이전할 때도 석등은 따라다녔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90년에야 고향에서 가까운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90여 년 전에 고향 땅을 떠난 기구한 운명의 석등이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이사를 다니고도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셈이다.

복원된 중흥사 절집 마당에는 삼층석탑이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탑 옆에 복제품 쌍사자석등이 세워져 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그게 어찌 진짜 석등을 대신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본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이 나는 법. 늦었긴 해도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이 반갑고, 아산조방원미술관이 이제야 이름을 찾은 것이 반가운 이유다.


■ 옥과 성황당

아산조방원미술관이 있는 전남 곡성 옥과면에는 대학까지 들어서 있어 농촌이라기보다는 대도시 변두리 느낌이 묻어나는 곳이다. 이곳에 성황당이 있다. 경로당이 겸해 쓰는 공간 한쪽에 성황당이 있고, 성황당 안에는 나무로 된 실존인물 남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다. 남자는 옥과 출신의 고려 신종 때 학자 조통. 여자는 조통을 사랑한 고려의 왕녀 아왕공주. 북벌에 나섰다가 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고 돌아와서 쓸쓸하게 죽어간 조통과 그의 무덤을 지켰던 공주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