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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노고단 맥이 내려와 멈춘 곳, 전남 구례 용호정

醉月 2021. 10. 1. 14:05
▲ 용호정

지난 30년간 필자는 ‘필드가 선생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전국 여러 곳을 답사 다녔다. 책과 자료에는 없는 정보들이 현장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등산화 수십 켤레가 닳았다. 그래서 좋은 등산화를 보면 욕심을 낸다. 현장답사에서 얻고자 하는 정보는 대강 이렇다. 풍수(그 지역 산세가 어떻고 명당이 어디인가), 족보(명문가 집안의 역사 그리고 계보), 사주, 그 지역이 배출한 인물, 불교사찰, 도사들이 기도하던 기도터 등이다. 이러한 답사 포인트를 뭉뚱그리면 ‘강호동양학’이 된다. 강호동양학은 강단동양학에서는 결여된 분야이다. 강단이 있으면 강호도 있는 법이다. 강호동양학의 장문인이 전라도 지역을 답사할 때 느끼는 소감이 있다. ‘이야기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그 지역의 역사, 인물, 산세, 유불선을 두고 서로 대화할 사람이 아주 적다는 점이다. 사람이 없다 보니 어떤 때는 적막강산에 서 있는 것 같다. 산천은 남아 있으나 사람이 없구나! 다 어디로 갔나!
   
   이에 대해 필자가 내린 결론은 ‘동학, 6·25 때 다 죽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때 죽은 전라도 사람이 대략 20만명으로 추정한다. 6·25전쟁으로도 전라도가 직격탄을 맞았다. 전답이 넓으니 평소 쌓여 있었던 지주와 소작인 간의 투쟁이 심했고, 난리가 나니 평소 쌓여 있던 계급갈등이 폭발하여 서로 죽이고 죽였다. 경상도는 동학과 6·25의 피해가 전라도의 3분의1이나 될까. 동학, 6·25로 전라도의 식자층과 중산층이 대거 사라졌다. 그렇다 보니 전라도 산천을 다닐 때마다 풍수와 주역, 족보를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우두성(禹斗晟·1952~) 선생은 전라남도 구례에서 문화원장을 지냈고, 1950년대 중반부터 지리산 등산 코스를 개척했던 ‘지리산연하반(煙霞伴)’의 리더 우종수(禹鍾秀·1921~2014) 선생의 아들이다. 구례에 가서 우두성 선생을 만나니 평소 필자가 느끼고 있던 허기의 원인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 섬진강을 타고 올라오던 왜군들과 구례 사람들이 석주관(石柱關)전투에서 싸우다가 구례 사람 약 30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3000명이 몰살당하고 보니 당시 구례가 텅텅 비었다고 하죠. 광복 이후 빨치산 시기에 구례 사람 약 800명이 죽었습니다. 먹물이 든 식자층은 다 죽었다고 봐야죠. 그 이후로 50년간 암흑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구례의 학문과 역사, 인물을 논할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가 6·25 이후로 70년이 된 최근 들어서야 역사가 발굴되는 느낌입니다.”
   
   

▲ 섬진강과 오산.


   매천의 스승 왕석보
   
   “구례의 역사와 인물을 꼽을 때 누구를 꼽겠습니까?” “매천 황현입니다. ‘매천야록’을 빼놓을 수가 없죠. 그런데 여기서 더 들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1816~1868) 선생이죠. 매천은 알아도 매천을 가르쳤던 스승 왕석보 선생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매천의 선생이죠. 전남 광양 태생이었던 매천이 10대 초반부터 구례에 와서 공부를 한 이유는 바로 이 왕석보 선생 때문이었습니다. 큰선생 밑에서 배우기 위해서 나중에는 아예 구례로 이사까지 옵니다. 왕석보의 장남이 왕사각(王師覺·1836~1895)인데, 이 왕사각도 학문이 대단했습니다. 왕석보가 죽고 난 후 왕사각 밑에서 매천이 본격적인 학문을 연마합니다. 왕석보를 비롯한 왕씨 집안이 구례의 명문가이자 부잣집이었습니다.”
   
   구례에서는 개성 왕씨 집안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씨조선이 창업하면서 왕씨들은 씨를 말렸다고 하는데,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왕씨들이 이 구례에 터를 잡고 돈과 학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왕씨들은 정유재란의 석주관전투에서도 돈과 목숨을 바쳐 왜군과 싸웠다. 왕득인(王得仁·1556~1597)이 그렇다. 왜장 시마쓰(島津義弘)에 의해 구례성이 함락되자 의병 3000명을 모집하여 석주관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석주관칠의사 가운데 한 명이다.
   
   왕득인의 아들이 왕의성(王義成)이다. 아버지가 전사하자 왕의성도 석주관에 나가서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과 같이 석주관칠의사의 하나로 싸웠다. 하지만 용케도 살아남아 다시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돈 문제이다. 이 시절에 의병을 모집해서 싸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리더가 장기간 의병들이 먹고살 수 있는 군량미를 대야 한다. 이 군량미를 마련하려면 자기 재산을 털어야 한다. 무기와 갑옷도 마련해야 한다. 이것도 역시 돈이다. 임란이나 조선 후기에 의병장을 했다는 것은 목숨도 바쳐야 하지만 재산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목숨과 재산. 쉽지 않은 이 두 가지를 바쳤으니 후세 사가들이 존중해야 함은 마땅하다. 왕씨들은 만석군을 두 번이나 했다. 한 번 하다가 좀 시간을 두었다가 다시 한 번 만석군을 했다고 한다. 한 번 할 때는 3만석까지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구례는 들판이 넓은 곳이다. 지리산 밑이라서 산골 같지만 의외로 들판이 넓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섬진강이 둥그렇게 감아 돈다. 배산임수. 물이 감아 돈다는 것은 벼농사에 엄청 유리한 장점이다. 매천을 가르쳤던 천사 왕석보도 왕득인, 왕의성의 후손이다. 6~7대 후손쯤 된다고 한다. 왕석보도 가지고 있던 전답이 약 130마지기 정도 되는 부자였다. 이 전답을 제자 양성하는 데 거의 썼다고 전해진다. 가난한 제자들이 오면 자기 집에서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며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조선시대 선생은 월사금을 받지 않고 공짜로 가르쳐 주는 전통이 있었다. ‘월사금을 받지 않으면 선생이 되고, 돈을 받으면 훈장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개성 왕씨가의 힘
   
   왕석보 밑에서 공부한 인물 중에 전남 보성 출신으로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이 있다. 나철도 젊은 시절에 구례의 왕 선생 밑에서 공부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대부분의 투사들은 대종교 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철의 대종교 사상은 민족주의 사상의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전북 김제 출신의 구한말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1848~1909)도 역시 왕석보 선생 문하에 출입했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왕석보 문하에서 배출된 셈이다. 왜정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선언문을 쓴 인물이 왕재일인데, 이 왕재일 역시 이 집안 후손이다. 광복 이후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시골 촌놈 매천이 서울에 와서 여러 인연을 맺을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씨 집안이 있었다. 왕씨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고 한다. ‘매천야록’을 읽다 보면 놀라운 점이 신문·방송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지리산 밑의 구례 산골에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네트워킹의 저변에는 왕씨들 인맥도 작용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걸출한 학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이처럼 선생들의 지도가 있어야 하고, 걸출한 학자가 한 명 나오면 영향력이 전국에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여진이 오래간다. 매천도 마찬가지이다. 매천이 구례에서 나오니까 일제, 6·25가 초토화시켰어도 아직 구례에 그 희미한 묵향과 정신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정자 앞 오솔길


   봉황의 머리 봉성산의 기운
   
   이번에 쓰는 용호정(龍湖亭)은 구례에 수백 년간 내려오는 정신사와 관련이 깊다. 매천이 1910년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가을 등불 아래서 책을 덮고 천년 역사를 회고해 보니 인간세상에서 식자층 노릇 하기 힘들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을 때 그 파장은 컸다. 석주관칠의사 이래로 내려온 구례의 절의 정신과 왕씨 집안의 학문을 전수받은 마지막 계승자였던 매천 황현이 자결한 것이다. 구례의 별칭이 봉성(鳳城)이다. 구례 읍내 중앙에는 봉성산이 있다. 산은 야트막한 동산에 가깝지만 이 모양이 봉의 대가리같이 보인다. 봉성산 뒤로 뻗은 산맥들은 봉황의 날개이다. 봉은 대가리에 묘미가 있다. 그래서 구례는 봉과 같은 인물이 나오는 고장인데, 매천도 그 봉황에 속한다. 남원의 별칭이 용성(龍城)이다. 남원에는 교룡산성이 있다. 그래서 용성이고, 구례는 봉성이다. 매천이 죽자 구례의 선비들은 돈을 모아 1916년에 추모 공간을 마련하였다. 이게 용호정이다. 구례읍성은 일본인이 허물었다. 일본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성을 허무는 일이었다. 구례읍성(봉성)을 허물 때 북을 걸어 두었던 고각루(鼓角樓)라는 누각 건물을 해체해서 용호정 건물을 세웠다.
   
   용호정 터가 예사 터가 아니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이다. 용의 머리 부분 끄트머리에 위치하였다. 이 용은 어디서 왔는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꾸불꾸불 내려온 맥이다. 용은 지리산에서 평평한 들판으로 내려와 사나운 기운을 누그러뜨린 다음에 그 기운이 섬진강 앞에서 멈췄다. 대개 큰 산에서 내려온 바위 맥이 강이나 호수 앞에서 멈췄을 때 그 자리가 명당이다. 바위의 불 기운과 강물의 물 기운이 서로 만나서 수화기제(水火旣濟)를 이루기 때문이다. 기제(旣濟)는 잘 배합이 되었다는 뜻이다.
   
   용호정 앞에는 섬진강이 그림처럼 감아 돌고 있다. 섬진강 상류에 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 정자 앞 일대가 넓은 호수처럼 보였다고 한다. 아울러 흰색의 모래사장이 넓게 깔려 있었다. 지금의 섬진강 수량은 댐이 들어서고 난 후에 3분의1로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줄어들었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로맨틱한 풍경이다. 더군다나 이 용호정을 앞에서 받쳐주는 봉우리는 오산(鰲山)이다. 자라 오(鰲) 자 오산이다. 구례구역 앞에서 이 산을 바라다보면 흡사 자라처럼 보인다고 한다. 자라가 섬진강 물을 먹으려 하는 포즈이다. 용호정에서 보면 섬진강 바로 건너편에는 이 오산이 받쳐주고 있다. 창고 형태의 창고사(倉庫砂) 같기도 하고, 제왕의 모자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정자에서 보면 오산은 매우 상서로운 봉우리이다. 그 옛날 도선 국사도 구례 사도리(沙圖里)에서 풍수 공부를 하고 용호정 앞의 섬진강을 건너 오산의 오산사(鰲山寺·현재는 四聖庵)로 건너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용호정 앞에서 섬진강이 흘러가는 모습과 오산의 우뚝한 모습, 그리고 목가적인 풍경을 바라다보니 구례를 봉성이라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