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신앙 창시자 진표율사 생가 터 추정, 비산비야의 학성강당
‘영’(靈)의 본래 뜻은 무엇인가? 우선 무당의 ‘무’(巫)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무’는 하늘(一)과 땅(一)을 세로로(I) 연결하는 사람(人)을 가리킨다. 무당을 간단히 볼 게 아니다. 이 무당이 입(口)으로 중얼 중얼 주문을 외우며 간절하게 빈다. 그러면 하늘에서 비(雨)가 내린다. 따지고 보면 가뭄에 비 내리게 하는 것이 영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비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 들어서 다 굶어 죽는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가뭄이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영지(靈地)의 어원적 의미는 비를 내리게 해주는 장소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있지만 우리 몸 안에서 내리는 비도 있다. 신장(腎臟)에서 품어 올려 주는 수기(水氣)가 그것이다. 근심걱정을 너무 많이 하고, 매일 신경 써야 먹고 살고, 운동부족이고, 화가 치솟을 일만 많아지면 결국 수기가 고갈된다. 그러면 심장병, 우울증, 뇌졸중, 공황장애가 오는 것 아니겠는가. 수기를 회복시켜 주는 곳이 어디인가?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곳이 영지다. 그러자면 고전을 공부하는 것도 방법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치유방법이다. 너무 새로운 것만 좇다 보면 긴장이 뒤따른다. 조상들이 공부했던 방법으로 돌아가면 안정감이 든다.
전북 김제에 가면 한옥으로 지은 학성강당(學聖講堂)이 있다.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는 강당’이라는 뜻이다. 필자가 보기에 영지는 산 위에도 있지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강당에도 있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유학의 경전들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배우는 곳이다. 수업료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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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륵신앙의 창시자인 진표율사의 생가 터로 추정되는 학성강당에도 눈이 내려 온통 순백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학성강당의 강주(講主)인 청곡(靑谷) 김종회(50) 선생. 중키 정도의 신장에 단단한 체격이다. 얼굴은 수더분하게 생겼다. 시골사람 같은 인상을 풍기면서도 포용력과 함께 내면에는 자기 신념이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청곡은 ‘수업료를 받으면 훈장이 되고, 수업료를 안 받으면 선생이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는다. 수강생은 고등학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한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고전을 공부하러 온다. 몇 년을 하는 사람도 있고, 몇 달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형편상 주말에만 와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학성강당 자리는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비산비야’다. 이런 터에 대명당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내가 보기에는 미륵신앙의 창시자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태어난 생가 터가 아닌가 싶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현재 김제의 만경현 대정(大井) 출신으로 되어 있다. 학성강당 터의 원래 이름이 대석정(大石井)이었다. 왜정 때 대석(大石)으로 지명이 변화되었고, 현재는 성덕면 대석리(大石里)로 되어 있다. ‘구글어쓰’로 성덕면을 보면 사람 형상이고, 학성강당 자리가 그중에서도 배꼽자리에 해당된다. 대석리에서는 이 자리가 가장 기운이 뭉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진표 같은 인물도 이 학성강당 자리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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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성강당의 함덕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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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무료로 가르치는 학성강당의 전경.
기운이 뭉쳐 있는 성덕면의 배꼽 자리 해당
내가 보기에 청곡 선생은 풍수의 대가다. 풍수이론과 땅의 기운을 보는 영안(靈眼)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개 이론에 능하면 영안이 열리지 못했고, 영안이 있는 사람은 이론과 경전 공부에 약하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기는 쉽지 않다. 청곡은 어렸을 때부터 독특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인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 선생이 호남의 손꼽히는 유학자이다. 기호학파의 마지막 장문인인 간재(艮齋) 선생의 학맥을 이은 계승자이며, 전북 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현존 인물인 것이다. 학성강당은 그의 부친인 화석 선생이 운영하던 서당을 아들인 청곡이 계승 발전시킨 셈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했다.
유학(儒學)을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풍수다. 유학과 풍수는 동전의 앞뒷면, 또는 음과 양의 관계다. 유학에서 언급하지 않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죽은 부모에 대한 효(孝), 명당에 산소를 쓰면 후손이 발복(發福)한다는 주술적 측면. 이 3가지가 모두 풍수에 담겨 있다.
청곡은 어려서부터 집안에 출입하던 수많은 지관(地官)들을 보며 자랐다. 만경은 모악산과 금산사가 지척에 있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걸쳐 전국의 수많은 도사와 술사들이 운집했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라는 사실을 참고해야 한다. 김제 모악산 일대는 후천개벽의 성지였던 것이다. 다양한 수준의 지관들은 청곡 집에서 몇 년씩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유년시절부터 청곡은 풍수에 관한 전설과 설화들을 들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부친을 포함해 집안어른들 모두가 풍수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학과 풍수는 동전의 앞뒷면, 음과 양의 관계
집안에는 성백운(成白雲)이라는 이름의 전속 지관도 같이 살았다. 청곡이 어렸을 때 박광오(朴廣悟)라는 80대 노인도 옆집에 살았는데, 평생 동안 전국의 명당을 보러 돌아다닌 프로페셔널 지관이었다. 박광오는 그 유명한 강증산을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은 세대였고, 강증산을 신처럼 모신 인물이었다. “증산이 주문을 외우면 진흙땅도 얼어붙는다. 겨울에 수박을 먹고 싶으면 수박을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를 어린 청곡에게 들려주었다. 지금 들으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어린 청곡은 초월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크게 키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좀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스케일이 커진다.
청곡이 어렸을 때는 한문공부 안 한다고 부친으로부터 회초리도 많이 맞았지만, 이후로는 취직해라, 성공해라, 좋은 대학 가라는 이야기는 듣지 않고 컸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사춘기 반항심도 작용한 나머지 수시로 집을 나와 전국을 걸어서 돌아 다녔다. 차를 타지 않고 대부분 걸어 다닌 점이 이색적이다. 생과 사는 무엇인가? 종교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도를 통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다녔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전국의 민족종교 종단을 찾아 다녔다. 많은 도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차비는 별로 들지 않으니까 먹는 것이 문제였다. 시골동네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암자에서도 자고, 허름한 시골집 창고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마쳤다. 지방에서 4년제 대학도 마쳤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기약도 없고 목표도 없는 주유천하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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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성강당의 명인정사 현판 밑에 김종호씨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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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성강당의 명인정사 건물.
25년 전 쌍계사 불일암서 신비체험
그러다가 그가 25세 때 여름 하동 쌍계사 위의 불일암(佛日庵) 터에서 신비체험이 있었다. 지금부터 25년 전이다. 그때는 암자건물이 없었고 빈 터였다. 이 터는 좌우에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이 싸고 있는 명당 터였다. 텐트를 치고 사서(四書)를 소리 내어 읽고 있는데, 공중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3~4일간 이러한 글 읽는 소리가 청곡의 귀에 계속 들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꿈을 꿨다. 주변 사방에서 귀신들이 청곡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청곡이 칼을 뽑아들고 귀신들을 물리치다 보니까 맨 나중에 어떤 동자승이 하나 남았다. 이 동자승 귀신마저 칼로 치려는 순간에 그 동자승이 책상 밑으로 숨으면서 제발 목숨만 달려 달라고 간청했다. “나를 살려주면 훗날에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살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뒤 집에서 꿈을 꾸는데 이 동자승이 나타났다. 대문이 크게 서 있는 궁궐 같은 집으로 청곡을 안내하는 게 아닌가! 대문을 3개나 열고 들어가니까 마지막에는 금관을 쓴 지장보살이 앉아 있었다. 청곡은 놀랐다. ‘내가 집안 대대로 유학만 신봉하는 사람인데, 어찌 불교의 지장보살이 나타나나?’ 금관을 쓴 지장보살이 밥상만 한 크기의 네모진 종이를 하나 주었는데, 거기에는 지장인(地藏印)이 찍혀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하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 체험이 있은 뒤부터 청곡은 산의 기운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저기에 복호혈(伏虎穴)이 있구나, 저쪽 산모퉁이에 와우혈(臥牛穴)이 있구나’하는 감식안이 열리게 된 것이다. 지리(地理)에 대한 영안이 열리게 된 계기가 이렇다. 학성강당 자리가 진표율사 생가 터라고 주장할 만한 자격이 있다.
“나는 생사 문제가 아직 해결 안 되었다. 죽음이 두렵다.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보고 정리가 되었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오행이 나와 만물을 형성한 것 아닌가. 문제는 최초의 출발인 태극이다. 태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에 나는 어디 있었는가? 불가의 화두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다. 부모미생전은 무극(無極)이다. 아침, 저녁으로 태극도설을 외운다. 이걸 외우면 생사에서부터 세상사의 복잡다단한 일이 다 이치로 환원되는 것 같다. 태극도설을 외우고 정좌(靜坐)하고 앉아 있으면 나의 내장 모습이 보인다.”
“접신(接神)과 보호령의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난자와 정자가 합쳐져서 잉태되면 그 순간에 보호령이 붙는다. 만약 이 보호령이 몸속에 들어가면 접신이다. 보호령은 그 사람이 좋은 길로 인도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부지불식간에 보호령이 그 사람의 행보를 이끈다. 서양에서는 수호천사라고 부른다. 접신은 몸속에 들어가 몸주(主)가 되는 것이다. 접신이 되면 자유의지가 없어진다. 보호령과 접신은 다른 것이다.”
“동양에서 혼(魂)과 백(魄)을 이야기한다. 혼과 백은 어떤 개념인가?”
“혼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기운이고, 백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운이다. 두 기운이 만나면 태극이 형성된다. 흔히 삼혼칠백(三魂七魄)이라한다. 삼혼은 천·지·인의 기운을 가리킨다. 천은 검정색, 지는 노란색, 인은 파란색의 기운이다. 칠백은 해와 달, 그리고 수·화·목·금·토다. 사람이 죽어서 뼈가 보존되면 백이 보존된다. 백이 보존되면 삼혼이 의지하는 의지처 역할도 한다. 혼과 백이 합쳐져야 묘용이 생긴다. 명당에 묘를 쓰면 백이 오랫동안 보존된다. 묘용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이다. 죽은 사람의 혼백은 음이다. 살아 있는 후손은 양이다. 음과 양이 만나야 묘용이 생긴다. 인간의 병도 삼혼과 칠백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온다.”
“수(水)의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동안은 화(火)의 시대였다. 모든 에너지와 문명의 원천이 불이다. 그러나 이제 물의 시대가 도래했다. 물이 중요하다. 중국은 수의 시대가 도래하면 민족, 이념, 경제 문제로 5개국 아니면 10개국으로 나눠질 수 있다. 돈은 상해, 권력은 북경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데, 수의 시대가 되었으니까 이제 돈과 권력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수의 시대가 되면 동북아시아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블록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서로 싸우면 곤란해진다. 물이 서로 섞여야 한다. 동북아공동체는 한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자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미 한국, 일본에도 뿌리를 내렸다. 서양도 알파벳을 공통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한자는 동북아의 알파벳이다.”
“한국의 정세는 어떻게 보는가?”
“박정희 시대가 창업의 시대였다. 불의 시대였다. 경제발전, 산림녹화, 치산, 경제행복이다. 그러나 이제 수의 시대다. 수성(守城)을 해야 한다. 인문학, 분배, 치수(治水)가 수성에 해당한다. 베트남전 파병과 서독 광부, 중동노무자 파견은 한국발전의 요인이었다. 여기에는 유교의 가족주의가 공이 컸다고 본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도 좋다며 자식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이제 분배와 문화의 시대가 왔다. 사욕(私慾)은 억제하고 공욕(公慾)은 장려해야 한다. ‘자식을 낳지 않는다.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 젊어서는 내가 즐기고 늙으면 요양원 간다. 자식 필요 없다. 강아지 키우면 된다.’ 이런 것은 사욕이다. 유교적 공욕으로 가정과 가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본다.”
“유교적 수양방법이 무엇인가?”
“수신(修身)과 치인(治人)이다. 정치를 하려면 수신이 근본이다. 수신은 경전을 읽는 간경과 하루 1시간씩 정좌를 하는 것이 방법이다.”
한국이 좁은 것 같아도 골짜기마다 기인(奇人) 이사(異士)가 있다. 인물이 있는 것이다. 들판도 아니고 산도 아닌 만경의 성덕면에 인물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전국을 주유천하하고 도력을 갖추었으며 이제 서당을 열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영지에는 인물이 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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