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민_꽃밭 속의 생각_09

醉月 2011. 5. 19. 06:49

필 때보다 질 때가 아름다운 벚꽃

벚꽃이 우리나라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했으므로, 봄이 오면 저절로 피었다가 저절로 질 뿐, 사람들에게 일찍이 사랑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근교 명소의 하나인 우이동의 벚꽃도 그 유래를 알아보면 꽃을 위해 가꾼 것이기보다는 지금부터 약 280년 전에 효종이 북벌을 계획할 때 활의 재료로 사용하려고 심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일본 가는 통신사 조엄(趙曮)에게 부탁하여 벚꽃 묘목을 현해탄(玄海灘)을 건너 가져와 재배한 것이라고도 하나, 그의 문집 속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옛날에 우이동은 물과 바위의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있었다. 벚꽃의 아름다움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을 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창경원과 장충단 벚꽃이 오늘날 꽃구경하는 사람을 열광케 하는 것을 볼 때, 꽃도 시절 형편에 따라 드러나고 감춰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전에는 꽃이라면 흔히 도화행화(桃花杏花)를 말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봄빛을 독차지한 꽃은 복사꽃과 살구꽃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복사꽃과 살구꽃 대신에 벚꽃이 봄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벚꽃보다도 요새말로 사꾸라꽃이라 부르는 편이 새로운 맛이 있을는지 모른다.
어떤 학자의 주장을 들으면, 사꾸라의 원산지는 우리나라라고 한다. 수십 년 전에 제주도에서 사꾸라의 원종을 발견하였다 하며, 최근 또 남해도에 속한 한 무인도에서 수백년 묵은 몇 그루의 고목이 발견되어 사꾸라의 원산지가 우리나라라는 설이 차츰 유력하게 증명되는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재배 결과 벚꽃이 여러 변종이 생겼다. 그 중에서도 팔중앵(八重櫻) 같은 것은 화판이 많고 꽃빛깔이 곱기로 유명하다. 이 꽃의 아름다움은 한 가지나 또는 나무 한 그루로 볼 때는 복사꽃이나 살구꽃에 미치지 못할는지 모르나, 많은 꽃나무를 전체로 볼 때는 일대 미관을 이루게 된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는 것이 이 꽃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필 때보다도 질 때가 더욱 좋다. 그러나 이 꽃은 향기가 없는 것이 흠이 된다.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옅어, 이꽃에 얽힌 전설이나 시는 없지만, 꽃을 말할 때 빼놓을 수는 없다.

 

재미와 실익을 두루 갖춘 양귀비(楊貴妃)꽃

일년생 풀꽃 중에 가장 요염한 것이 양귀비꽃이다. 식물학에서는 이것을 앵속화(罌粟花)라고 부른다. 무릇 십여 종이 되며, 그 빛깔도 녹색과 황색, 홍색과 남색 외에 연분홍 등 별별 잡색이 다 있다. 화판은 홑잎과 겹잎이 있다. 얼핏 보면 어떤 것은 울금향(鬱金香), 즉 튤립 비슷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월계수와 비슷하나 그 꽃들보다 한층 더 곱고 아름다워 구경하는 이의 넋을 빼앗아 가기도 하니, 양귀비란 명칭이 생긴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양귀비의 다른 이름에 미낭화(米囊花)가 있다. 남부 유럽이 원산이라 하나, 동양에도 옛날부터 있었다. 옹도(雍陶)의 시에도 다음과 같이 보인다.

말머리서 처음으로 미낭화를 보았네.
馬頭初見米囊花

당시에 벌써 양귀비꽃이 자생 혹은 재배된 것 같다고 일본의 큰 승려인 대곡광서(大谷光瑞)가 말한 바 있다.
이 꽃의 한 종류로 꽃과 잎의 자태가 모두 아름다운 이른 바 우미인초(虞美人草)란 별명을 가진 것이 있다. 일찍이 송나라의 문인 남풍(南豊) 증공(曾鞏)이 장편의 시를 노래한 것이 있다. 양귀비꽃이 우리나라로 수입된 지도 오래일 텐데, 오늘날까지 시 한 수 노래 한 마디 전해오지 않는 것을 보면 완상용으로 널리 재배하게 된 것은 이 근래의 일인 듯 하다.


양귀비는 줄거리가 큰 것은 한 다섯 자 가량 된다. 꽃은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린다. 피기 전에는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필 때는 반드시 위를 향해 머리를 든다. 꽃 몽우리를 감싸고 있던 2개의 초록색 껍질은 꽃이 완전히 핀 뒤에는 땅에 떨어진다. 흔히 꽃이 고우면 향기가 적은 법이지만 이 양귀비꽃은 그렇지가 않다. 꽃의 자태가 요염할 뿐 아니라, 꽃 향기가 더욱 아름답다. 다만 이 꽃이 너무도 연약해서 까딱하면 꽃잎이 떨어지기 쉽다.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귀비는 꽃으로 감상할 뿐 아니라, 잎사귀도 어렸을 때는 따서 채소로 먹을 수 있다. 열매는 과자와 기타 요리에도 쓸 수 있으며, 씨앗의 껍질은 약재로 쓰여, 꽃과 잎과 열매와 씨와 씨의 껍데기까지도 하나 버리는 것이 없다. 참으로 재미와 실익을 모두 갖춘 이상적인 꽃이라 하겠다.
다만 사람을 마취시키는 마약인 아편이 양귀비 열매에서 나온 액체임을 생각하면 그 해독 또한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양귀비의 잘못이겠는가, 아니면 이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의 잘못이겠는가?

 

시인의 사랑을 독차지 한 국화(菊花)

일반 화훼 가운데 가장 진화한 것이 국과(菊科)다. 국과의 식물 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것이 국화다. 오늘날 일본에서 재배하여 감상하는 것만 해도 무려 2천 여 종에 달한다.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동양적 취미를 대표하는 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나타났고,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 예찬한 바 있다. 하지만 국화가 시인 사이에 크게 사랑받게 된 것은 도연명(陶淵明) 이후의 일이다.

동쪽 울타리 밑 국화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이 구절은 국화의 아름다움을 자연과 인생에 아주 잘 조화시켜서 표현한 은일 시인 도연명의 천고의 걸작 중 한 구절이다. 담백하면서도 해맑은 멋이 과연 동양 예술의 정수를 깊이 얻었다 하겠다. 직접 국화를 노래하지 않은 곳에 도리어 일층 더 자연스러운 정취가 드러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저 요염한 장미나 평범한 다알리아 같은 꽃을 사랑하는 서양사람들은 이 동리국(東籬菊)의 유명한 구절을 깊이 음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양화편(養花篇)〉에는 도연명이 몹시 아끼던 동리국(東籬菊)은 자줏빛 줄기의 노란 꽃인데, 국화의 본성이 서향을 좋아하므로 동쪽 울타리에 심는다고 하였다.


국화의 품종 중에 좋은 것은 일찍이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송나라 때 국화 재배로 이름 높았던 범성대(范成大)와 유몽(劉蒙)의 《국보(菊譜)》를 보면 원나라의 좋은 품종 국화가 우리나라로 들어오기 훨씬 전에 신라국(新羅菊)과 고려국(高麗菊)이 중국 땅에 건너가 사랑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국경(菊經)》에는 옛날 백제시대에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오색 국화를 일본으로 가져간 일이 적혀 있으니, 이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국화를 가꾼 것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의 일임을 알 수 있겠다.
국화는 꽃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봄에는 움싹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고, 가을에는 꽃을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는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네 연중행사의 하나이던 화전(花煎)놀이에서도 봄에는 진달래로, 가을에는 국화로 하였다. 국화에 얽힌 전설과 그림 및 시가가 고금을 통해 볼 때 너무나 많으니 어찌 그것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550년 전에 고려의 사직(社稷)을 지켜 순절한 포은 정몽주의 〈국화탄(菊花嘆)〉이란 장편시가 있다. 이 가운데 몇 구절을 간추려 보이면 다음과 같다.

꽃은 비록 사람 말을 이해 못해도
그 마음 꽃다움을 내 사랑하네.
평생에 술을 입에 안 대었지만
널 위해 한 잔 술 들어 보노라.
평생에 입 열어 안 웃었는데
널 위해 한바탕 웃어보리라.
국화야 너는 내가 아끼는 바니
도리꽃은 풍광이 곱기만 하네.
花雖不解語 我愛其心芳
平生不飮酒 爲汝擧一觴
平生不啓齒 爲汝笑一場
菊花我所愛 桃李多風光

이 국화시에도 선생의 심경이 반영된 것을 어렴풋이 볼 수가 있다. 국화가 충신에게 사랑을 받고, 충신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모두 그럴 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록] 국화의 전래

매화는 청우(淸友), 연꽃은 정우(淨友), 국화는 가우(佳友)라고 한다. 또 모란 작약과 함께 국화는 3가품(佳品)이라고 한다. 동리가색(東籬佳色)은 국화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우(佳友)․가품(佳品)․가색(佳色) 등 여러 가지로 일컬어져도 언제나 아름답다는 뜻의 가(佳)자를 지닌 것이 국화다.


그러나 국화의 아름다움은 모란 작약처럼 농염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동시에 매화나 연꽃처럼 청정한 아름다움도 아니다. 요컨대 국화의 아름다움은 늠름한 자태에 있다. 국화를 누가 은일(隱逸)의 선비에 견주었던가. 바람과 서리를 오만하게 보고, 우뚝 서서 홀로 가는 것이 정인군자(正人君子)에 견줄 만 하다.


“동쪽 울타리 밑 국화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이 시구는 ·그 때문에 은일의 탈을 뒤집어 써 도리어 그의 진면목이 가리워진 점도 없지 않다.
국화는 식물 중에 가장 진화한 꽃이다. 그 종류가 많기로 으뜸간다. 일본에서는 봄의 앵두꽃과 함께 가을의 국화로 꽃의 두 대(代)를 삼아 재배되는 것만 2천 여 종에 이른다. 현대의 진보한 원예 기술은 온갖 변종들을 다 만들어 냈다. 꽃피는 시기만 보더라도 사계절의 국화가 다 있지만, 가을 국화가 가장 아름답다. 그러므로 국화라면 반드시 추국(秋菊)을 일컫게 된다. 이는 “가을 국화 어여쁜 빛깔이 있네.(秋菊有佳色)”이라고 노래한 1500년 전이나 오늘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가을 국화의 원생지가 어디냐고 유래를 따질 때, 송나라 때 국화 재배로 이름 높던 유몽(劉蒙)의 《국보(菊譜)》에 “신라국(新羅菊), 일명 옥매(玉梅), 일명 육국(陸菊)”이라고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아껴 길렀던 163종의 국화 중에 진작에 신라에서 전래된 특수한 종류까지 있었던 듯 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국화가 혹 우리나라에 고유한 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화에 대한 우리말이 없고, 한자에 따라 부르게 된 것은 바로 국화의 유래가 중국에서 온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원생은 중국 땅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처음에 국화를 오로지 약용으로 재배하다가, 관상용으로 아껴 기르게 된 것은 퍽 후세의 일이라 한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는 국화를 약품(藥品)으로 열거하였고, 선가(仙家)에서는 국화를 연년익청(延年益靑), 즉 수명을 늘이고 젊어지는 약의 재료로 삼았다. 그러나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국화를 노래한 것을 보면 당시에 벌써 관상용으로 즐겨 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삼국시대에 이미 관상용으로 여러 가지 변종을 심었던 사실이, 서기 385년 백제가 일본에 보낸 5색 국화를 보냈던 사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와 《국경(菊經)》에 이 일이 보인다. 일본에 국화가 있게 된 것이 이때부터라고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위례왕궁(慰禮王宮)의 깊숙한 어원(御苑)에 있던 모든 진귀한 화훼 중에서도 아름답게 핀 이 5색 국화가 군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로부터 2,3년 뒤에 이루어진 사비성(泗泚城)의 무왕(武王) 원지(苑池)와 신라 문무왕의 정원에는 몇 십 몇 백을 헤아리는 변종의 국화를 많이 재배하였을 것이나, 다만 이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도 후세에 전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을 뿐이다.

 

이슬 머금고 방긋 웃는 나팔꽃

견우화(牽牛花)는 중국 이름이요, 요즘은 흔히 조안화(朝顔花)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나팔꽃이다. 이 꽃은 이름과 같이 나팔 모양으로 생겼다. 원예가가 재배하여 홍색과 백색, 자주색과 남색 및 잡색의 여러 가지 품종을 만들었다. 향기가 없고, 꽃도 그다지 곱지 않으나, 아침 일찍 이슬이 맺힌 꽃은 보기가 참 좋다.


예부터 이 꽃은 있었지만, 이 꽃을 가꾸어 감상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꽃에 대한 취미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나팔꽃은 연꽃보다 한 시간 뒤져서, 용담(龍膽)보다는 한 시간을 앞서서 오전 5시경에 피어난다. 새벽 달빛이 아직 남아 있고, 서늘한 공기가 떠돌며,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때, 울타리 위에서 방긋방긋 웃는 나팔꽃이 진주 같이 번쩍이는 흰 이슬을 머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햇발이 퍼지게 되면 또다시 입을 다물고 시드니, 아침에 피었다가 대낮에 지는 금전화에 견주더라도 오히려 단명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 꽃의 특징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아침마다 계속해서 피는 데 있다. 덩굴이 뻗어가는 것을 따라 가는 노끈이나 실오리로 난간을 매어주면 그것이 창문을 가리게 되어, 낮에 그늘이 지는 것도 그럴 듯 하다. 혹은 그 덩굴을 방안 천정으로 뻗어가게 하면 한층 더 운치가 있을 것이다.
나팔꽃에 대한 노래와 시, 그밖의 이야기도 꽤 있겠지만, 내가 아는 바가 없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요즘 동요작가가 지은 나팔꽃 노래가 있으니, 끝에다 이 노래나 소개해 볼까 한다.

우물가에 나팔꽃 곱기도 하지
아침마다 첫 인사 방긋 웃어요.
점심때 우물가에 다시 와 보면
방긋방긋 반가워 놀고 가래요.
동무동무 놀다가 늦게 와 보니
노여워 입 다물고 말도 말재요.

아침 일찍 일어나 나팔꽃 핀 덩굴 아래 걸상을 놓고 맨발로 잠옷을 걷어 들고 앉아 있는 여름 아침의 정취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청아한 여름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는 꽃으로 말하면 무궁화가 있으니, 이것은 백송이 나팔꽃을 들이대더라도 한 송이 무궁화를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