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민_꽃밭 속의 생각_04

醉月 2011. 4. 24. 13:01

백발을 흩날리는 할미꽃

뒷동산에 할미꽃은
늙으나 젊으나
꼬부라졌네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동요의 한 구절이다. 대개 할미꽃은 꼬부라진 것에 그 특징이 있다. 또 호호백발인 점이 한층 더 특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겠다. 첫 봄 잔디밭에 풀이 파릇파릇 새 생명의 환희를 속삭일 때, 나면서부터 등이 굽은 할미꽃은 벌써 그 입술에 붉은 웃음이 터지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겉은 뿌옇고 속이 자주 빛인 꽃술은 늦은 봄이 되면 떨어지고 기다란 꽃술만 남아 있다. 머리 위로 희게 늘어진 그 모습은 백발을 흩날리는 늙은이와 같다. 그래서 중국 땅에서도 진작부터 이것을 백두옹(白頭翁)이라 불렀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이 할미꽃을 이렇게 노래했다.

마을 길로 취해 들다
들판에서 노래하네.
어이 해 푸른 들에
할미꽃이 피어 있나.
꺾어와 거울 보니
흰 터럭과 꼭 같구나.
옅은 향기 나무라듯
봄바람에 한을 품네.
醉入田家去 行歌荒野中
如何靑草裡 亦有白頭翁
折取對明鏡 惌將衰鬢同
微芳似相誚 留恨向東風

우리나라에서는 이백보다 앞서서 신라의 학자 설총(薛聰)이 〈화왕계(花王戒)〉에서 이미 할미꽃을 말한 것이 있다. 〈화왕계〉는 설총이 신문왕을 위해 풍유의 뜻을 담아 이야기한 것이다. 모란은 화왕(花王)이 되고, 장미는 가인(佳人)이 되고, 할미꽃은 장부(丈夫)가 되어 베옷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머리에 흰 털을 이고 지팡이를 집고 비틀비틀 걸어와 허리를 구부리며 자신이 서울 큰 길 가에 있는 할미꽃이라고 말했다. 장미는 갖은 아양을 다 부리며 임금을 유혹하고, 할미꽃은 바른 말로 임금께 충간(忠諫) 하였다. 하지만 화왕은 가인에게 반하여 장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이에 장부는 “나는 본래 임금이 총명하고 의리를 안다고 해서 왔는데, 아니로구나.” 하면서 예전 이름난 어진 이들이 불우했던 일을 탄식하였다. 화왕이 그제서야 깨닫고서 짐이 잘못이라며 사과하였다. 이것이 〈화왕계〉의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할미꽃은 설총과 이백으로 인해 역사상 이름난 꽃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는 꽃 보다 꽃술이 특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농가의 담박한 운치, 박꽃

〈화편(花編)〉에는 박꽃은 노인이요, 석죽화(石竹花) 즉 패랭이꽃은 소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박꽃은 과연 노인인가. 할미꽃이 구부러진 것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처럼, 박꽃은 하얗기 때문에 노인의 이름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동요에는 박꽃을 오히려 소녀에 비유하였다.

푸른 치마 밑에서
얼굴 감추고
햇님 보고 내외하던
박꽃 아가씨
달님 거동 바라보고
곱게 단장해
이슬총각 입 맞추며
                                                                     방긋방긋

이 노래에 나타난 박꽃은 〈화편〉에 있는 박꽃과는 정반대로 아가씨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노인과 아가씨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을까? 나는 박꽃에 대해 굳이 늙었는지 젊었는지의 여부를 논하는 대신, 박꽃을 박꽃 그대로 감상하는 것이 한층 더 자연스러울 것으로 생각한다.
농가의 지붕 위나 울타리 위에 여름부터 피기 시작해서 가을까지 피는 박꽃은 확실히 농가의 특색 있는 꽃이다. 시인이 농가를 시로 노래할 때 반드시 이 박꽃을 그리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의 담박한 운치가 한 자락 사라지고 만다. 유명한 박지원의 〈전가(田家)〉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이 새 지킨다 언덕 위 앉았건만
개 꼬리 이삭에 참새가 매달렸네.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다 일 나가고
밭집은 대낮에도 삽짝 문 지처 둔다.
소리개 병아리를 채려다 못 채가니
박꽃 핀 울밑에서 뭇 닭만 요란하다.
며느리 밥을 이고 꼿꼿이 내 건널 제
누른 개 벌거숭이 뒤따라 좇아간다.
翁老守雀坐南陂 粟拖狗尾黃雀垂
長男中男皆出田 田家盡日晝掩扉
鳶蹴鷄兒攫不得 群鷄亂啼匏花籬
少婦戴棬疑渡溪 赤子黃大相追隨

이 얼마나 운치 있는 전가(田家) 시인가. 그 중에서도 소리개가 병아리를 채가려다가 그만 놓치자, 닭들이 박꽃 핀 울밑에서 요란하게 지저귄다고 한 것 같은 것은 참으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박꽃 핀 울타리를 특별히 말한 것은 농가의 자연미를 그리는데 있어 그것이 중요한 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박꽃이 비록 다른 이름난 꽃처럼 훌륭한 꽃의 목록에 열거되지는 못하지만, 농촌과는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를 지닌 아름다운 꽃 중에 하나인 것만은 사실이다. 아침에 피는 나팔꽃도 좋지만 저녁에 피는 박꽃은 어스름 달빛 아래서가 가장 보기에 좋다.

 

싱겁게 키만 큰 접시꽃

촉규화(蜀葵花)는 경기말로 어승어, 황해도말로는 둑두화, 남도말로는 접시꽃이라 한다. 이렇게 여러 이름이 있지만 접시꽃이 가장 부르기가 좋아 여기서는 접시꽃으로 쓰기로 한다. 접시꽃은 줄기와 잎은 물론이요 그 꽃까지 아욱과 비슷하다. 다만 좀 더 곱고 큰 것이 다를 뿐이다. 그 꽃은 무궁화와 같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더 크다.
이 꽃은 한 번 심으면 그 뿌리에서 줄기가 항상 돋아나는, 식물학상으로 이른바 숙근초(宿根草)이다. 싱겁고도 밋밋한 그 키가 7,8척이나 된다. 〈화편(花編)〉에는 이 꽃을 무당에 비하였다. 혹 키가 크고 아리따워서 무당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원에 재배하는 풀꽃 치고는 키가 크기로 유명해서 일장홍(日丈紅)이란 별명을 얻었다.
꽃빛은 붉은 것과 자줏빛과 하얀 것이 있어 제각기 특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데, 그중에서도 분홍 꽃이 가장 산뜻하게 곱다.

장독간에 접시꽃은
어제 온 새 각신가.
분홍치마 휩싸 쥐고
나를 보고 방긋방긋.

이것은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다. 특히 분홍 꽃을 예찬한 것은 새 각시가 흔히 분홍치마를 입는 습속이 있어 그럴 뿐 아니라 원체 그 빛이 곱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꽃에 대해 그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은 어찌 홀로 〈화편〉과 동요가 있을 뿐이겠는가. 한시로 노래한 것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050여년 전에 신라의 선인(仙人) 최치원(崔致遠)의 〈촉규화(蜀葵花)〉시는 가장 유명하다.

거칠은 밭두덩은 쓸쓸도 한대
연한 가지 누를 듯 꽃은 무성타.
궂은비를 지내어 향기 그치나
보리바람 띠워서 그림자 수긋.
수레타고 말 타고 찾는 이 뉠꼬
나비랑 벌이랑 엿볼 이 그뿐.
더러운 땅 생장해 내 탓 내 하지.
남더러 저 버린다 어찌 한하리.
寂莫荒田畔 繁花壓柔枝
香經梅雨歇 影帶麥風欹
車馬唯見賞 蜂蝶徒相窺
自慚生賤地 敢恨人棄遺

이 시는 접시꽃을 아주 잘 그려 보였다. 특히 그 끝구에 “더러운 땅 생장해 내 탓 내 하지, 남더러 저버린다 어찌 한하리”운운한 것은 최치원이 촉규화를 빌어 자신에 빗댄 것이니, 신라 당시에 벌열을 숭상함이 고루(古陋)하다 할만하다. 김유신의 위대한 공훈으로도 으뜸가는 자리에 앉지 못했고, 최치원의 문학을 가지고도 우대를 받지 못하였다. 꽃의 아름다움을 그린 이 시가 뜻밖에 이상야릇한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록] 최치원의 촉규화 시

거칠은 밭두덩은 쓸쓸도 한대
연한 가지 누를 듯 꽃은 무성타.
궂은비를 지내어 향기 그치나
보리바람 띠워서 그림자 수긋.
수레타고 말 타고 찾는 이 뉠꼬
나비랑 벌이랑 엿볼 이 그뿐.
더러운 땅 생장해 내 탓 내 하지.
남더러 저 버린다 어찌 한하리.
寂寞荒田側 繁花壓柔枝
香輕梅雨歇 影帶麥風欹
車馬誰見賞 蜂蝶徒相窺
自慙生地賤 堪恨人棄遺

이 시는 우리나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촉규화(蜀葵花)를 노래한 것이다. 단언키는 어렵지만, 신라가 사람을 쓰는 것이 출신만을 너무 중시하여 아까운 인재를 많이 버리게 되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가만히 나라 풍속의 고루함을 풍자한 듯 하다.
그는 12세 어린 나이에 일찍이 장사 배를 따라 당나라로 들어가 학문에 힘써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또 황소(黃巢)의 난 때에는 격문을 지어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쳤다. 28세 되는 해에 비로소 고국 신라로 돌아와 시독(侍讀)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세상 일이 이미 그른 것을 보고, 벼슬길에 뜻이 없어 산수 사이를 떠돌면서 풍월을 읊조리니, 이 시도 혹 이때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촉규화는 오늘날 정원에 재배하여 꽃을 감상하는 숙근초(宿根草)다. 최치원의 당시에도 벌써 밭가에 흔히 심은 것은 1,2구에서 “거칠은 밭두덩은 쓸쓸도 한대, 연한 가지 누를 듯 꽃은 무성타.(寂寞荒田側, 繁花壓柔枝)”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꽃의 줄기가 5,6자 이상이 되므로 어승어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꽃이 아름다운 것에 비해 향기는 없다. 그런데 최치원은 시에서, “궂은비를 지내어 향기 그치나(香輕梅雨歇)”라고 했으니, 혹 그때에는 향기 있는 접시꽃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꽃피는 시기로 말하면 5,6월경 보리 이삭이 익을 무렵 해서 꽃이 핀다. 4구에서 “보리 바람 띠워서 그림자 수긋.(影帶麥風欹)”이라 한 것이 또한 적절한 표현이다. 꽃 빛깔은 홍백과 자주색 등 여러 가지가 있어 자못 운치가 있다. 다만 봉선화처럼 시골집 전원에 재배하여, 부귀한 사람의 수레와 말이 찾아와 감상하지 않고, 한갓 나비와 벌만 바쁘게 엿보게 됨을 안타까이 여겨, 다시 5,6구에서 “수레타고 말 타고 찾는 이 뉠꼬. 나비랑 벌이랑 엿볼 이 그뿐.(車馬誰見賞, 蜂蝶徒相窺)"고 하여, 그 적막한 광경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촉규화 시의 핵심은 “더러운 땅 생장해 내 탓 내 하지, 남더러 저 버린다 어찌 한하리.(自慙生地賤, 堪恨人棄遺)”라고 한 마지막 7,8구에 있다. 거리낌 없이 말하자면, 최치원의 심미안의 대상이 될만한 기이한 꽃이 많은데, 홀로 이 촉규화를 읊은 것은 꽃이 아름다워서이기 보다, 그 난 곳의 미천함을 말하려 한 것이다. 그가 본 것은 뒷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꽃만 감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정말 그가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려 했다면, 봄에는 일대에 황금을 펼친 듯한 유채꽃이 있겠고, 가을에는 시냇가에 흰 눈이 내린 듯한 메밀꽃도 있다. 그런데도 구태여 이 접시꽃을 노래하게 된 데는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러나 촉규화가 난 곳이 미천해서 공자나 왕손 같은 부귀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지만, 일반 빈천한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란의 농염한 아름다움은 부귀한 사람들이 아끼는 바이고, 지란(芝蘭)의 고아한 자태는 문사와 묵객 사이에서 보배로이 여기는 바이다. 모란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지란은 너무나 이상적이다. 이것을 둘 다 얻기는 어렵다. 특히 난에 이르러서는 줄기와 잎새가 청초하고, 꽃의 자태가 고아하며, 향기가 그윽하고 아득하여 군자의 태도를 가졌다. 하지만 화분 하나의 꽃이 값이 적지 않아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사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촉규화는 아름답고 고아하기로는 모란이나 지란에 미치지 못해도, 오히려 돈을 들이지 않고 누구든 감상할 수 있다. 이점에서는 이만한 꽃이 드물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백일홍이나 봉선화와 더불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흔히 기르는 꽃 중에서 가장 볼만한 꽃의 하나라 하겠다.

 

빨간 사랑이 데굴데굴, 앵도화(櫻桃花)

붉은 꽃 봄날에 곱디 곱더니
빨간 열매 여름날 동글동글해.
絳葩春艶艶 朱實夏團團.

이것은 고려 때 천재 시인으로 유명하던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가 앵두를 노래한 시의 첫 두 구절이다. 봄에는 발그레한 꽃이 곱게 피고, 여름에는 빨간 열매가 예쁘게 데굴데굴 맺어 꽃과 열매가 모두 시적인 앵두는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이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속담에 “처가 집 세배는 앵두꽃 꺾어 가지고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처갓집 세배는 늦어도 괜찮다는 뜻이지만, 그 반면에는 앵두꽃이 사랑의 대상이 될 만한 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날 세상에 유행하는 잡가(雜歌)에도 앵두가 남녀의 사랑을 묘사함에 있어 배경으로 나타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노래가 그 한 예이다.

앵두나무 밑에
병아리 한 쌍 노는데
정든 님 공양으로 나간다.

서양에서도 프랑스에서는 혹 앵두를 사랑해서 그리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폴레옹이 일찍이 청년 사관(士官)으로 어느 소녀와 연애할 때에 두 사람이 앵두를 먹으며 사랑을 속삭였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춘향가〉에도 이런 시가 나온다.

한 쌍의 옥 같은 손 천 사람이 베개 베고
반 점의 앵두 입술 만 사람이 맛 보네.
一雙玉手千人枕 半點櫻脣萬客嘗

여기에 나오는 앵순(櫻脣), 즉 앵두 입술이 있고, 《서상기(西廂記)》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앵두 입술 붉게 열려
흰 이가 드러나니
가만한 그 소리 방언과 흡사하여
마치 꾀꼬리 소리가 데굴데굴 꽃 밖에서 구르는 듯 하여라.
櫻桃紅破 玉粳白露
半响恰方言 似嚦嚦鶯聲花外囀

여기에 보이는 앵도홍파(櫻桃紅破) 또한 앵두를 가지고 미인의 붉은 입술을 형용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궁중에서 앵두를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예가 있었고, 당나라 때 시인들이 앵두를 즐겨 노래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앵두를 읊었을 뿐, 그 꽃을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 보면 앵두의 열매가 꽃보다도 한층 더 운치가 있어 그랬겠지만, 꽃도 향기롭고 불그레하여 버릴 수가 없다.
더욱이 앵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일화가 하나 있다. 우리 민족의 큰 성인이신 세종대왕께서 앵두를 아주 즐겨 하셨던 까닭에 그 아드님이신 문종이 부왕(父王)께 올리려고 손수 앵두를 심으셔서, 궁궐 정원에 온통 앵두나무뿐이었다고 한다. 대개 한 나라의 고귀한 세자가 아버님을 위해서 앵두나무를 심은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아드님이 심은 앵두를 잡수신 세종께서는 또 얼마나 기쁘셨겠는가. 근대의 이름난 재상인 박규수는 일찍이 이 역사적 사실을 시로 읊은 적이 있다.

앵도꽃이 만발하니 온 대궐이 환하고나
잎마다 가지마다 그 모두가 동궁의 정.
오월 단오 열매 맺게 각별히 간수하려
총알을 매번 쏘아 꾀꼬리를 쫓았다네.
櫻桃花發滿宮明 葉葉枝枝總睿情
結子端陽看守別 每煩金彈打流鶯

여름부터 가을까지, 백일홍(百日紅)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하지만, 백일홍만은 그 이름과 같이 거의 백일을 두고 계속해서 핀다. 같은 백일홍이라고 해도 아주 다른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무에 피는 백일홍이고, 다른 하나는 풀에 피는 백일홍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목백일홍(木百日紅)은 본래 이름이 자미화(紫薇花)인데 우리나라 남쪽에 본래부터 있던 것이다. 옛날부터 이것을 백일홍이라 하였고, 초백일홍(草百日紅)은 경기도나 충청도에서는 백일홍이라 하나 황해도에서는 백일화라 하고, 일본에서는 백일초라 하는 것이니, 멕시코 원산으로 우리나라에 옮겨온 것이다.


목백일홍은 나무 껍질이 하얗고 윤이 난다. 키는 한 길이 훨씬 넘는다. 이 나무의 기이한 특징은 만일 사람이 손으로 껍질을 조금이라도 긁기만 하면 나무의 전신이 저절로 흔들흔들 움직이게 되므로, 파양수(怕痒樹), 우리말로는 간지럼꽃이라 하여 간지럼 태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 꽃은 붉은 것보다 자줏빛에 가깝고, 꽃술에 주름살이 있으며, 꽃 달린 줄기는 빨갛고, 잎은 서로 어긋난다. 한 가지에 여러 촉이 있고, 한 촉마다 여러 송이의 꽃이 달린다.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목백일홍은 옛날 당(唐)나라의 각성과 관아에 많이 심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성원(省院)에는 이 꽃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영남 근해의 모든 고을과 촌락에 흔히 심는다. 기후 때문에 5,6월에 피기 시작해서 7,8월에야 그친다. 곱게 붉은 꽃이 정원에 피어,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할 때 가장 운치가 있다. 서울에는 귀인의 저택에 즐겨 심지만, 근년에 겨울이 몹시 추워 얼어 죽어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겨우 열에 한 둘 쯤 될까 말까 하니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서울 안에 목백일홍이 있는 집이 과연 몇 곳이 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귀인이 아껴 감상하는 목백일홍보다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초백일홍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비록 조선의 원산이 아니고 외국에서 온 꽃이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널리 퍼져서 어느 사람의 정원에서든지 이 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운 향기는 부족하지만 꽃빛이 예쁘고 꽃 피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있다. 꽃술은 한 겹으로 된 것도 있고, 열 겹이 넘는 것도 있다. 빛깔은 주홍색과 붉은색, 자주색과 노란색 등이 있고, 이밖에 밤색과 흰색 등 여러 종류가 있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인의 눈을 가장 기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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