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절세미인, 작약화(芍藥花)
작약이 꽃나라의 재상이라고는 하나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이다. 작약의 품종 가운데 예전 중국 오나라의 절세미인 서시(西施)가 술에 취한 모습 같다 해서 붙인 취서시(醉西施)란 것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취서시작약시(醉西施芍藥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양 떠는 고운 자태 너무도 아리따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취서시(醉西施)라 한다네.
이슬 젖은 꽃 기울면 바람이 들어주니
오나라 궁궐에서 춤추던 때 비슷해라.
好箇嬌饒百媚姿 人言此是醉西施
露葩攲倒風擡擧 恰似吳官起舞時
작약은 꽃의 모습이 작약(綽約), 가냘프고 맵씨가 있다 해서 작약(芍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이는 억지로 가져다 붙인 말에 지나지 않는 듯하니, 나원(羅願)이 지은 《이아익(爾雅翼)》에는, “음식의 독을 푸는 데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어서 ‘약(藥)’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서양에서도 작약은 일찍부터 약재로 사용한 일이 있었다. 이로 보면 작약은 동양 서양 할 것 없이 처음에는 약재로 쓰던 것이 나중에 점차 완상용으로 변하게 된 듯 하다. 작약이란 명칭이 생겨난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작약은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함박꽃이니, 본래 깊은 산 속에 자생하는 꽃이다. 흔히 정원에 즐겨 심어 구경꺼리로 삼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작약은 그 종류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붉은 색과 연분홍색이 있을 뿐이다. 서유구(徐有榘)의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나라의 작약은 명품이 많지 않다. 내가 본 것은 붉은 색과 백색, 분홍색 등 몇 종류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중국 땅에는 작약의 종류가 아주 많다. 작약의 빛깔도 노란색과 붉은색, 자주색과 흰색 등 여러 가지 색깔로 나뉘어, 노란색 중에도 7종이 있고, 붉은색에는 21종이 있으며, 자주색은 6종이 있고, 흰색은 5종이 있다. 이것을 합치면 작약이 거의 40종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품은 어의황(御衣黃)과 관군방(冠群芳)이라는 품종이다.
작약이 우리나라 역사에 보이는 것은 지금부터 770년 전인 고려 의종(毅宗) 때 일이다. 의종은 정치보다 놀이를 좋아하여, 하루는 대궐 정원에서 꽃구경을 할 때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작약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이때 지어 바친 시 가운데 현량(賢良) 황보탁(皇甫倬)의 〈작약〉시가 제일이었다.
꽃은 주인 없다고 누가 말했나
임금께서 날마다 친애하시네.
궁궐의 아가씨들 질투 말게나
비슷해도 마침내 진짜 아니니.
誰道花無主 龍顔日賜親
宮娥莫相妬 雖似竟非眞
이 시가 의종의 눈에 들어 크게 칭찬하고 시를 지은 황보탁을 벼슬에 임명했다.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이 한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시 자체로만 보면 그리 훌륭한 줄은 모르겠다.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온 세계를 뒤흔들던 원나라 세조의 따님으로 충렬왕의 왕비가 되신 제국공주(齊國公主)로 인해 작약은 단번에 정사(正史)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고려사》 충렬왕 23년 5월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시 수녕궁의 향각에 작약이 성대하게 피어 있었다. 공주가 한 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한참을 만지작거리시더니 느낌이 일어 우셨다.
작약이 고귀한 여성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길이 전하게 된 것은 기이한 인연이라 할 것이다.
[부록] 작약과 제국공주(齊國公主)
수녕궁 향각에 작약이 성대하게 피어 있었다. 공주가 한 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한참을 만지작거리시더니 느낌이 일어 우셨다.
이 말은 당시 천하를 뒤흔들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따님으로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공주가 하루는 수녕궁(壽寧宮) 향각(香閣)의 어원(御苑)을 산보하다가 작약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시녀를 시켜 한 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손에 들고 한참을 감상하다가 그만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이로부터 병이 들어 얼마 못가 세상을 떴다.
작약이 《고려사》에 나타나게 된 인연이 야릇하기도 하다. 공주의 비애를 자아낸 까닭에 작약의 꽃다운 이름이 역사를 통해 후세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덕여왕의 일화로 인해 신라사에 실린 모란과 대조해 보면, 하나는 경쾌한 정조가 흐르고, 하나는 침울한 기분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꽃에도 또한 행 불행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두 꽃은 모두 고귀한 여성으로 말미암아 역사 상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우연이면서 또 기연(奇緣)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중대한 사건이 잘 전해지지 않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한 두 마디 꽃 이야기나마 어쩌다 전해지는 것을 요행으로 여길 뿐이다.
작약은 모란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명화다. 잎과 꽃이 모란과 비슷하지만 맑은 향기와 풍족한 자태가 모란보다 조금 못하다. 그러나 작약이 모란보다 먼저 존재한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중국에서 모란을 목작약(木芍藥)으로 부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원예가의 말을 들어보면, 작약의 원종은 백색으로 산야에 자생하던 꽃이었는데 인위적으로 개량한 결과 홍색과 자주색의 엷고 짙은 꽃 외에도 여러 가지 변색이 있고, 모란에 비해 기르기가 쉽지 않지만, 땅에 심으면 화분에 기르는 것보다 좋은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전부터 작약은 꽃은 감상 거리가 되고 뿌리는 약용으로 쓰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못 보배롭게 여겼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이것을 재배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함박꽃’이란 우리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본래 있던 것임을 추측할 수는 있다. 혹 중국에서 옮겨 심은 우등의 품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재배가 모란보다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작약이 어째서 모란보다 천년이나 뒤에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드러나고 가려지는 것이 달라진 것일 뿐이니, 이것을 가지고 실물의 유무를 따지는 자료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약은 봄철에 줄기가 솟아나, 여름철에 꽃이 핀다. 그 시기는 모란보다 뒤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제국공주가 향각을 거닐던 때는 5월이었다. 모란은 활짝 필 시기가 지났고, 작약이 바야흐로 활짝 피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꽃 중에서도 특히 작약을 꺾어 들고 아껴 감상했던 것인가 한다. 그리고 작약은 천성이 모래 같은 흙을 좋아하여, 개성 같은 곳이 기르기에 가장 적합하였으므로, 아마 어원에도 이 꽃이 제일 번성했던 듯 하다.
향풍에 대낮은 고요도 한데
이슬은 새벽녘 서늘도 해라.
香風遊午寂 豊露泛晨凉
이 싯귀는 개성이 낳은 근대의 시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영작약(咏芍藥)〉의 유명한 구절로, 실제 광경을 그린 것이라 한다. 작약을 감상함에는 무르녹은 이슬이 맺힌 서늘한 새벽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향기로운 바람이 움직이는 고요한 한낮이 좋다. 상상컨대 당시 제국공주의 어원 나들이도 새벽이 아니라 필경 한낮이었을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홍운(紅雲)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향기 속에 싸여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그녀가 정감이 여린 여성이어서 눈물을 지었다기 보다는, 인간은 영물(靈物)이라 무슨 잠재의식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무상을 직관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월나라 아가씨의 사랑, 연꽃
산주(尙州) 함창(咸昌)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애기.
연밥 줄밥 내 따줄게
요 내 품에 잠들어라.
잠들기는 늦잖아도
연밥 따기 한철일세.
이것은 오늘날까지 남부 지방에 유행하는 민요다. 흔히 농촌에서 모내며 부르는 채련곡(採蓮曲)이다. 연꽃이 드문 조선에서는 모를 낼 때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종의 운치라면 운치인 셈이다.
연꽃은 본래 인도에서 나는 것으로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 땅에 들어와서는 불교를 떠나 아주 현세화하여 중국 남방의 오나라나 월나라 아가씨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연꽃이라 하면 벌써 연밥 따는 아가씨를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채련곡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처럼 천연적인 호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연못 같은 것도 드물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곳곳에 늪을 파서 연꽃을 즐겨 길렀다. 서울에도 옛날에는 남대문과 서대문 밖에 연지(蓮池)가 있었고, 동대문 안쪽에도 연지가 있었다. 또 각 성읍에도 반드시 이러한 연지가 있어 뜻하지 않은 재변을 방비하는 한편 풍치의 미관을 도우려고 했던 것이니 이른바 일거양득이라 하겠다. 그중에서도 앞서 말한 상주 공갈못의 연꽃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경기지방에는 수원의 방축 연(蓮)과 황해도 지방에는 해주 부용당(芙蓉堂)의 연이 유명하였다.
연꽃과 인연 있는 전설과 일화는 적지 않다. 〈심청전〉에는 용왕이 심청을 한 송이 연꽃에 담아서 인간 세상으로 내보냈다는 로맨틱한 전설이 있다. 고려 충선왕이 사랑하던 원나라의 미녀에게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며 석별의 정을 표시했던 일화는, 그녀가 충선왕에게 올린 사랑의 노래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미녀가 충선왕에게 올린 노래는 다음과 같다.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주시니
처음엔 불타는 듯 붉었더이다.
가지를 떠난 지 며칠 못 되어
초췌함이 사람과 다름 없어요.
贈折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연꽃이 고려 때는 불교의 영향으로 아주 신성시하던 판에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것은 마치 모래 틈에서 꽃이 핀 셈이라고나 할까.
연대는 충선왕 이전의 일이나 연꽃이 고사(高士) 곽예(郭預)로 인해 당시 일반 시인들 사이에 한층 더 시로 읊조리는 표적물이 되었던 때도 있었다. 어쨌든지 연꽃은 역사적으로 조선 사람의 미감을 길러주고 도와 준 고귀한 꽃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부록]1. 부용(芙蓉)과 시화(詩話)
부용은 연꽃의 별명이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있으니, 바로 기생 부용에 얽힌 이야기다.
부용은 화류계의 인물이다. 그녀는 용모뿐 아니라 품격이 고아하고 언행의 기이한데다, 시가 또한 한 세상을 압도했다. 그밖에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황진이 이후 명기를 꼽자면 먼저 성천(成川) 기생 부용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이름이 비록 기적(妓籍)에 있었으나, 실은 시가 전문이요, 문학을 사랑하여 함부로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이 마치 부용이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제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녀의 이력을 잠깐 말해보면 이렇다. 그 숙부가 본래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라, 부용은 어렸을 때 그 숙부에게 글을 배워 일찍 뛰어난 재주를 나타내 보였다. 성천군의 백일장에서 시로 장원하던 때가 겨우 16세 때였다. 그는 성천부사 김이양(金履陽)의 문학에 심취하여 당시 백발과 홍안의 노소 차이가 아주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첩이 되어 매일 시가를 주고 받으며 15년간 동거하였다. 김이양이 세상을 뜨자 부용은 3년상을 마친 뒤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아니하고, 몸을 단속하여 깨끗이 지냈다. 그녀가 죽은 뒤에는 유언에 따라 천안 광덕리에 있는 김이양의 묘 앞에 매장하였다. 이것이 부용의 알려진 약력이다.
일찍이 부용이 부용꽃에 대하여 시를 지은 일이 있었다. 부용이 부용을 읊은 것은 영산홍이 영산홍을 읊은 것과 비슷한 경우로, 이름이 꼭 같은 미인과 명화가 서로 만난 것은 그야말로 쉽지 않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 시는 이러하다.
부용화 활짝 피어 온 연못이 붉으니
사람들은 부용꽃이 내 얼굴보다 낫다 하네.
아침 해에 제방 위로 첩이 지나갈 때면
어이해 사람들은 부용꽃은 안 보는가?
芙蓉花發滿池紅 人道芙蓉勝妾容
朝日妾從堤上過 如何人不看芙蓉
이것을 시조로 번역해 보면 이렇다.
연꽃이 피었는가 못 가득 벌겋구나.
사람들 말하기를 나보담도 곱다지만,
언덕 위로 내 지나 갈 때 어이해 꽃 안 보나.
이 시가 얼마나 영롱한가. 시가 그 사람과 같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부록] 2. 연꽃과 충선왕(忠宣王)
연꽃을 군자라고 하지만, 강남의 채련곡(采蓮曲)을 들을 때면 반드시 오희월녀(吳姬越女), 즉 강남의 아가씨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신앙 때문에 연꽃을 너무나 신성시하여 도리어 그 참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장애가 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려에서는 연뿌리나 연밥을 모두 감히 따지 않는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그것이 부처님의 발이 올라앉으신 곳이라고들 말한다.
고려 사람들이 연뿌리와 연밤송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것은 그것이 부처의 보좌(寶座)인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꽃은 거의 천편일률로 종교적 색채를 띤 이야기뿐이어서 따뜻한 인정미 있는 일화를 좀체 기대하기 어렵다. 불교 국가는 어디든지 대부분 같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 심한 편이다.
그러나 연꽃에 대해 예외적으로 운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예전 고려 충선왕(忠宣王)께서 원나라 서울인 연경에 계실 때 어쩌다 한 아름다운 여인과 가연(佳緣)을 맺어 애정이 자못 깊었었다. 그러다가 충선왕이 하루 아침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녀에게 사랑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주었다. 생이별의 괴로움에 울던 그녀는 충선왕에게 시를 보냈는데 그 시는 이렇다.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주시니
처음엔 불타는 듯 붉었더이다.
가지를 떠난 지 며칠 못 되어
초췌함이 사람과 다름 없어요.
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한시가 아름답고 교묘하여 이야기와 함께 길이 전할만 하다. 서양풍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궁화나 장미를 준다고 한다. 충선왕이 그녀에게 연꽃을 준 것은 자못 운치가 있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에 나타난 연꽃에 얽힌 로맨스로는 대표적인 것이다.
연꽃은 순백과 담홍의 두 가지 색이 흔하다. 불경에는 이따금 청련(靑蓮)이 나타난다. 옛날에는 있던 것이 오늘날 없어지고 말았는지, 인도 본토에서도 청련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북경에는 자주색에 가까운 홍련이 있다고 한다. 위 시에서 여인에게 꺾어준 연꽃을 두고 시에서 ‘작작홍(灼灼紅)’ 즉 불타듯 붉다고 노래한 것만 보더라도 그것이 흰 색 꽃은 아니고, 담홍 혹은 아주 붉은 홍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색이란 원래 정성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니 애인에게 주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더욱이 진흙탕에 더럽히지 않는 정결한 꽃이니, 멀리 떠나는 애인에게 주는 것이 또한 의미가 깊다.
충선왕이 스스로 이런 것을 의식하고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꽃을 기념으로 받은 그 여인은 충선왕이 떠난 뒤 항상 몸을 정결히 지키면서 그를 오매불망하였다. 충선왕은 그녀를 잊을 수 없어 이제현을 돌려보내 그녀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라 하였다. 이제현이 가보니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거의 다 죽어갈 지경이었다. 이제현을 본 그녀는 왕에게 전해 달라며 위의 시를 써 주었다. 그러나 이제현은 충선왕의 마음이 흔들릴까 염려하여 그 시를 전하지 않고, 충선왕이 그녀의 안부를 묻자, 술집에 나가 젊은이들과 노느라 찾을 수가 없었노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왕은 침을 뱉고 그녀를 잊었다. 1년 뒤 왕의 생일날 이제현이 사죄하며 그녀의 시를 왕에게 올리며 사실대로 아뢰었다. 충선왕은 이 시를 읽고 울면서, “만일 그때 이 시를 보았더라면 귀국하지 않고 그녀에게도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하며, 이제현을 책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의 충성과 의리를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고개 숙여 웃는 나리꽃
얀달래 반달래
이 가지 저 가지
노가지 향나무
진달래 왜철죽
맨드라미 봉선화
누루퉁 호박꽃
흔들흔들 초롱꽃
달랑달랑 방울꽃
모가지 잘룩 도라지꽃
맵시 있다 애기씨꽃
부얼부얼 함박꽃과
절개 있다 연꽃이냐
이 꽃 저 꽃 다 버리고
개나리꽃이 네로구나.
이것은 항간에 유행하는 꽃타령이다. 모든 꽃을 다 버리고 오직 나리꽃을 사랑하였으니, 나리 또는 개나리는 남도나 서도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한자로는 야백합(野白合), 즉 들백합화를 말한다.
야백합, 다시 말해 산과 들에 자생하는 나리꽃은 일찍부터 일반 민중의 사랑을 받아 이처럼 찬미하게 되었다. 이로 보면 한문에 중독된 시인묵객이 거들떠보지 않은 풀꽃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민중으로 말미암아 발견한 것이니만큼 조선적 정조(情調)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백합은 본래 중국말이다. 그 줄기에 구근(球根)이 많아 붙은 이름이나, 중국말 백합보다는 우리말의 ‘나리’ 혹은 ‘개나리’란 명칭이 진작에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말 ‘유리’의 어미 말이 되었다. 또 서양말인 ‘릴리’와도 서로 공통점이 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핀 백합화는 예수의 입을 빌어 아름다운 시의 형식으로 성경 위에 나타났다.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
수고하고 애씀이 없어도
솔로몬이 입은 옷이
이 꽃만 못하였네.
이것이 예수가 백합을 읊은 시다. 예수교에서는 백합화를 불교의 연꽃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성시 하여, 이 꽃은 단번에 세계의 명화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나라꽃은 백합이다. 그의 순결함을 사랑해서 그리 정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재배 결과 여러 종의 변종이 생겨, 식용과 완상용으로 같이 쓰고, 특히 식료품으로 외국에 많이 수출한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야백합은 드물게 백색도 있지만, 흔히는 주황색이다. 여름철에 깊은 숲 속에 고요히 피어 있을 때, 그 아름다운 자태와 맑은 향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이 늘 고개를 숙이고 탐스러운 웃음만 머금고 있다.
그러나 만일 야백합으로 하여금 불평을 말하게 한다면 그는 수 천 년 동안 귀인들이 한시를 짓고 묵화를 그리면서도 나를 별로 읊어주거나 그려준 일은 없었다고 말 할 것이다.
손톱 끝에 물든 사랑, 봉선화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이것은 요즘 여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창가의 1절이다. 봉선화(鳳仙花), 속어로 봉사꽃은 비록 1년생의 풀이지만 여름에 피는 꽃 중에 흔하면서도 가장 운치 있는 꽃이다. 어느 집을 가든지 울밑 뜰 안이나 우물가에 봉사꽃이 곱게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어여쁜 아가씨들이 이 꽃을 따서 하얀 손톱에 빨갛게 물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운치 있는 일인가?
홍중모의 《동국세시기》 4월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가씨들과 어린 아이들이 모두 봉선화를 백반에 타서 손톱을 물들인다.
아가씨들과 아이들이 모두 봉사꽃을 백반에 이겨서 손톱을 물들이는 것은 백 여년 전인 홍중모 당시에 벌써 풍속을 이루었지만, 실은 이보다 훨씬 옛날부터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며, 이 풍속은 조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봉사꽃은 인도가 원산지다. 그것이 진작에 중국으로 건너왔고, 또 조선에도 왔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다시 일본으로 간 것은 아시카가(足利)시대다. 손톱을 물들이는 풍속 역시 봉사꽃의 전래를 따라 중국, 우리나라, 일본으로 차차 퍼져나간 듯 하다.
《군방보(群芳譜)》에는 봉사꽃이 명칭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줄기 사이에서 꽃이 핀다. 머리와 날개, 꼬리와 발이 모두 오똑하니 들린 것이 봉황새의 형상과 같은 까닭에 봉선화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봉사꽃은 그 줄기가 두툼하고 녹색을 띠었다. 잎은 복사꽃잎이나 버들잎과 비슷하나, 양끝이 뾰족하고, 잎 가로 톱날이 서 있다. 꽃은 홑꽃과 겹꽃의 차이가 있고, 빛깔도 붉은 색, 자주색, 노란 색, 푸르스름한 흰 색, 그리고 잡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봉사꽃은 성질이 굳세므로 어디에 심어도 잘 자라고, 거름을 주면 가지가 잘 뻗고 봉오리가 잘 맺는다. 씨는 타원형의 푸른 색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성숙하면서 푸른 색은 누런 빛을 띠게 되는데, 이때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터져서 씨가 흩어진다. 급성자(急性子)란 이름이 그래서 붙었다. 서양에서도 봉선화를 성질 급한 사람에게 비유하는 것은 동양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수도하는 여승의 청초함, 도라지꽃
도라지꽃은 청초하다. 한자로는 길경화(桔梗花)다. 한 송이 푸른 꽃이 산뜻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볼 때, 텁텁하던 눈이 갑자기 밝아지며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함박꽃과 모란꽃의 풍성하고 요염한 데 시각이 무디게 된 귀인이나 부자들은 청초한 이 꽃을 보고도 아름다운 줄 알지 못한다. 산나물을 뜯으며 약재를 캐는 산촌의 아낙네들은 도라지 타령을 부르면서도 이 청초한 꽃에 대해서는 사랑할 줄 모른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도라지에 관한 민요가 적지 않지만, 그것이 거의 대부분 식용으로서의 도라지를 예찬한 것 뿐이요, 관상용으로서 그 꽃을 노래한 것은 없다. 〈산염불가(山念佛歌)〉에서 노래한 것도 그렇다.
산에 올라
도라지 캐니
들고나 보니
산삼일세.
또 이른바 〈사랑가〉에서도
도라지 캐러 간다고
핑계 핑계 하더니
라 했고, 요새 유행하는 〈도라지 타령〉에서도 이렇게 노래한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가 스리살살 녹는구나.
이처럼 모든 민요를 종합해 본다면 거의 나타난 일관된 정조는 모두 도라지를 캐는 것 뿐이요, 그 꽃을 노래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꽃에 대한 사랑은 꼭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나 개인적 주관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 눈에 비치는 도라지꽃으로 말하자면 잎과 꽃의 자태가 모두 청초하면서도 어여쁘기만 하다. 그 갸름한 잎은 이상스레 뒷면이 하얗다. 종처럼 생긴 푸른 꽃은 줄기 끝에 꼭 한송이만 달려있다. 다른 꽃에 비해 고요히 고립을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적막한 빈산에 수도하는 여승이 혼자 서서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도라지꽃은 어느덧 동양의 정적(靜的)인 철학을 연상케 한다.
야산에 자생하는 풀꽃 중에 향기가 그윽하고 멀리까지 풍기는 것은 야백합, 즉 나리꽃이 있고, 꽃 모양이 풍성하고 아름답기로는 산작약이 있다. 하지만 청초하고도 가녀린 것으로는 도라지꽃에 견줄 것이 없다.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풀꽃 세상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꽃을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먼저 도라지꽃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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