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매곡동 김준선 전 순천대 교수 집 개방정원에 피어난 홍매화. 일찌감치 피어난 꽃이 만개로 치달으며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
대를 이은 ‘홍매가헌’ 마당 두 그루에 紅梅가 가득
원도심 매곡동에 매화 구경용으로 ‘탐매마을’ 만들어
왕지동 순천복음교회 정원엔 100년 넘은 古梅 38그루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선암사 ‘선암매’가 첫손
‘미술 마을 프로젝트’ 금곡동선 흥미진진 골목투어
축구·야구 하던 ‘공마당’의 청수골 둘레길서 옛 정취
300여 동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낙안읍성
밭둑·마당·장독대 곳곳에 매화 피어난 풍경도 일품
매화꽃이 활짝 피었으니 이제 봄입니다. 다시 새순이 돋는 계절의 첫머리에 섰습니다. 전남 순천 원도심의 고즈넉한 주택가 언덕 위에 만개한 두 그루 홍매화 나무로 올해 봄의 기별을 전합니다. 봄은 설렘의 계절.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봄의 기운이 반가운 건, 이제는 정말 ‘끝’이 멀지 않았다는 기대 때문이겠지요.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다시 맞는 봄처럼,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어둡고 긴 터널에서 벗어나 눈부신 일상이 시작됐으면 좋겠습니다. 봄꽃 보러 가자고, 벌써 꽃이 이만큼 피었다고 호들갑을 떨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그렇다고 모진 겨울을 이기고서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봄꽃을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대신 떠났습니다. 남도 땅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소식을 전합니다.
# 일찍 핀 매화나무 두 그루
깊은 산중의 산사도 아니고, 햇볕 따사로운 강변도 아니다. 전남 순천 고즈넉한 원도심 골목 오래된 주택 마당의 매화나무 두 그루에 홍매화가 가득 피었다. 홍매화가 만개했음은 먼발치에서 느껴지는 그윽한 꽃향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집에 ‘홍매가헌(紅梅佳軒)’이란 현판을 달았다. ‘붉은 매화가 아름다운 집’이란 뜻이다. 등처럼 붉은 꽃을 단 매화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은 순천 매곡동의 김준선 순천대 교수, 아니 지난해 여름 정년퇴직했으니 ‘전(前) 교수’의 집 정원이다. ‘모든 일’은 김 전 교수 집 정원의 매화나무 두 그루에서 시작됐다.
홍매가헌은 김 전 교수가 3대를 이어 살고 있는 집. 개인 주택이지만 마당만큼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개방정원’이다. 홍매화를 보러 오는 이가 많은 봄날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낮 시간에 한해 마당을 열어놓는다. 김 전 교수는 “아들이 여기서 자랐고 함께 살지는 않지만, 손주까지 드나드니 따져 보면 5대에 걸친 집”이라고 했다. 이 집의 매화나무는 김 전 교수가 학창시절 서울로 유학을 떠난 사이에 학교 교장이던 부친이 심은 것이다. 30년이 넘는 수령의 매화나무를 50년 전쯤 심은 것이라니 최소 80세가 넘는다.
“할아버지의 매화나무가 죽자 아버지가 다시 심은 매화나무예요. 그 전에 기막힌 수형(樹形)의 노거수 홍매와 백매가 한 그루씩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선암사에서 구해와 심으셨다고 했는데 나무도 근사하고, 꽃도 좋고, 향도 참 짙었지요. 지금까지 살았으면 명목(名木)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태풍으로 가지가 부러져 죽었어요. 나무가 죽자 허전해 하던 아버지가 어디선가 홍매화 나무 두 그루를 구해 대신 심은 게 지금 저만큼 자랐어요.”
# 탐매…매화 핀 경치 구경
해마다 일찍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는 김 전 교수 집 정원의 두 그루 홍매나무가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마을의 값진 자원이 됐다. 두 그루의 홍매나무를 중심으로 순천의 원도심 매곡동에 ‘탐매(探梅) 마을’이 조성된 것. 이름처럼 ‘매화 핀 경치를 구경하는’ 마을이다. 남도 땅에 매화 한두 그루 없는 동네가 있을까. 하지만 매곡동 매화는 존재감이 남다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일찍 피어서’다. 똑같은 꽃이라도 봄에 저 홀로 이르게 피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여린 꽃이 알리는 봄의 도래는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순천의 매화 중 첫손으로 꼽히는 선암사 매화를 보려면 한 달도 더 남았고, 낙안읍성의 매화도 아직 멀었다. 내륙에서 꽃소식이 가장 빠르다는 금둔사 매화조차, 올해는 지허스님이 장기 출타 중이어서 그런지 이제야 겨우 한두 송이 힘겹게 꽃망울을 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매곡동 주택가의 홍매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진작 붉게 피어나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두 번째는 나무의 키가 크다는 것이다. 매실 수확을 목적으로 심은 과수원의 매실나무는, 가지를 쳐내서 키가 작게 키운다. 열매 수확을 쉽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매곡동의 매화는 오로지 꽃을 보기 위해 심은 것. 가지를 옥죄거나 쳐내지 않고 풀어서 키우니 성큼성큼 자라서 훤칠하게 크다. 과수원의 매실나무처럼 꽃눈이 촘촘하지 않지만, 본디 매화는 이렇듯 가지가 낭창거리고 꽃이 좀 성글어야 하는 법이다.
탐매 마을을 조성하면서 마을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동네 주변에 홍매화 1000그루를 심었다. 두 그루 홍매화에서 시작한 꽃불이, 동네에 심은 매화나무로 옮겨붙게 된 것이었다. 마을 곳곳에 홍매화가 피고, 골목마다 미술 마을 프로젝트로 그리거나 설치한 벽화와 조형물이 들어섰다. 여기까지가 순천 원도심의 조용한 주택가인 매곡동 탐매 마을이 고즈넉한 봄꽃 여행지가 된 사연이다.
금전산 구분 능선의 암자 금강암이 마당으로 삼은 암봉. 여기 오르면 초록으로 푸릇푸릇해져 가는 낙안 일대는 물론이고 순천, 벌교의 갯벌까지 내려다보인다. |
# 절이 아니라, 교회의 매화
매화 얘기가 나온 김에 빼어난 매화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순천의 새로운 명소 한 곳을 살짝 귀띔한다. 광주지법 순천지청 북쪽의 시내 외곽 왕지동에 순천복음교회가 있다. 17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가도로 교각 옆 빈터에 지난 2012년 새 건물을 지어 이전한 교회인데, 교회를 지으면서 마당 3300㎡(약 1000평)에다 연못과 개울을 놓고 갖가지 색의 꽃을 피우는 다양한 수형의 매화나무를 가져다 심어 근사한 매화정원을 조성했다. 매화정원은 약 2년 전 은퇴한 이 교회 양민정 담임목사의 30년 넘는 꿈이었는데, 그 꿈을 경남 진주에서 매화숲을 조성하고 있는 박정열 생태조경가가 합세해 이뤄냈다.
교회 정원에는 동백·소나무·산다화 등 300여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매화나무다. 매화는 꽃의 크기나 색깔, 가지의 형태 등으로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는데, 그런 구분법으로 세면 정원의 매화는 홍매·백매·청매·흑매·비매·오색매·능수홍매·운용매 등 15종에 이른다. 청매는 꽃받침이 초록색을 띤 매화고, 흑매는 홑겹의 붉은 꽃이 너무 붉어 검게 보여 붙여진 이름. 운용매는 뒤틀린 가지가 구름 속을 나는 용을 닮았다 해서, 능수매는 가지가 능수버들처럼 늘어져 자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정원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고매(古梅)다. 보통 100년 수령이 넘는 매화를 고매라고 하는데, 이런저런 인연 등으로 교회 정원에다 가져다 심은 고매만 38그루나 된다. 그중에서도 영월에서 가져왔다는 ‘복음매’와 전남 영암에서 데려왔다는 백매, 장흥에서 가져온 홍매는 모두 수령이 200∼300년은 족히 넘는 늙은 매화다.
대형 수목원이나 매실 농장에다 대면 규모가 크지 않아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매화정원에 들어서서 은은한 매화향을 맡으며 꽃을 감상하다 보면 이른 봄을 누리기에 이만한 호사가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매화는 고즈넉한 절집에 어울린다 싶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도 썩 잘 어울린다. 지난 주말 정원의 매화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3월 초에는 만개할 듯하다.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집들이 늘어선 낙안읍성의 마을. |
# 매곡과 매산
다시 탐매 마을 얘기로 되돌아간다. 탐매 마을이 매화나무 두 그루에서 시작됐다고 했지만, 매곡동과 매화의 인연은 자그마치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매곡동의 ‘매곡(梅谷)’은 매화 계곡이라는 뜻. 이 동네의 중고등학교도 교명으로 ‘매산(梅山)’을 쓴다. 필시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 다음은 이런 단서로 찾은 이야기.
경북 성주 출신의 배숙이란 사람이 있었다. 1516년생이니 500여 년 전 사람이다. 과거 예비시험 격인 사마시(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7년 동안 있었지만,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해 벼슬자리에 나서지 못하다가 순천에 교수 직함을 받아 부임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향교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지금으로 치면 공립학교 교사쯤이다. 그의 호가 ‘매곡’이었다. 배숙은 매화를 좋아해 순천의 거처에다 ‘매곡초당(梅谷草堂)’이란 현판을 내걸고 뜰에다 홍매화 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순천 매곡동이란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고 보면 그때의 매곡동이나, 지금의 탐매 마을에 공통점이 있다. 500년의 시차를 두고 매곡동에는 배숙과 김준선이 집 뜰에다 매화나무를 심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교수다. 배숙은 그가 남긴 저서 ‘매곡집’에서 매곡초당에 기거하면서 ‘이른 봄 매화나무에 내리는 비(早春梅雨)’를 즐겼다고 썼는데, 김 전 교수도 비 내리는 봄날의 매화를 정취의 으뜸으로 쳤다.
순천 원도심에서 진행된 미술 마을 프로젝트는 3가지 테마로 진행됐다. 매화를 테마로 한 매곡동 말고도 이웃한 동네 금곡동에 두 가지 테마가 더 있다. 하나가 금곡동의 공마당 청수골로 대표되는 원도심 변두리 골목이고, 다른 하나는 금곡동 일대에 남아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자취다.
탐매 마을에 들렀다면 이웃 동네의 흥미진진한 원도심 골목 투어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 원도심 골목을 느릿느릿 걷는 맛
금곡동은 순천향교 뒤편의 변두리 마을이다. 본래 마을 뒷산인 난봉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해서 조선 시대까지는 ‘청수리(淸水里)’로 불렸던 곳이다. 금곡리에는 ‘공마당’이 있다. 향교가 소유한 오래 묵은 밭이 ‘빈(空) 마당’ 같아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개화기 순천 청년들이 축구와 정구, 야구 등 공(球)을 치고 받았던 마당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전한다. 마당에 집이 지어지고 미로 같은 골목으로 바뀐 지금도 일대는 여전히 공마당으로 불린다.
공마당에는 ‘청수골 둘레길’이 있다. 쇠락해가는 원도심을 지원하기 위한 ‘창조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산책길이다. 비탈진 산동네에다 아기자기한 벽화를 그려놓고 코스를 만들었다. 둘레길의 하이라이트는 순천 원도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마을 뒤쪽에는 1977년 3월에 만들어져 금곡동 일원에 식수를 공급하던 물탱크가 있는데, 2014년 지방 상수가 들어오면서 폐쇄된 물탱크 앞에다 전망대를 놓았다.
청수골 둘레길은 마을 골목에다 놓은 짧은 길이어서 30분이면 다 걸을 수 있지만, 오래된 풍경의 좁은 골목을 느긋하게 둘러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길이다. 둘레길은 동네 어디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 ‘공마당 슈퍼’를 겨눠서 찾아가는 게 좋겠다.
금곡동에는 국비지원을 받은 마을기업이 운영하는 식당과 카페도 있다. ‘청수정 식당’과 ‘청수정 다방’이다. 세련된 식당에서는 가오리찜이나 주꾸미볶음 등 계절별 메인 요리에 칠게 된장찌개 등을 곁들이는 순천 정식을 비롯해 순천 삼합·칠게장 볶음밥 등의 메뉴를 내는데, 아쉽게도 오미크론 확산으로 식당도 다방도 휴업 중이다.
마을주민 커피숍 등이 들어선 탐매희망센터 앞에서 동네 노인들이 따스한 봄볕을 쬐는 모습. |
#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우리 꽃
금곡동 일대와 매곡동에서는 초기 선교사들의 자취를 근대의 풍경과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금곡동과 매곡동 일원에는 1913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순천에 선교부를 세우면서 병원과 학교, 기숙사, 선교사 사택 등을 지었다. 순천 선교부 설립 당시 선교부지와 각종 물품 구입 비용만 2000달러에 달했다. 당시 2000달러는 우리나라 돈으로 환전해, 옮기는 데 당나귀 3마리에 나눠 실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순천 선교부 건물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기념관으로 꾸민 안력산(알렉산더) 병원의 격리병동과 병원으로 쓰고 있는 순천기독진료소(조지와츠기념관), 그리고 3채의 선교사 주택 등 근대건축물들이 매곡동과 금곡동 일대에 남아있다. 매곡동에서 매화와 함께 찾아보면 좋을 곳들이다.
매곡동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는 당시 선교사들의 자취를 모아 전시하고 있다. 전시품 중에는 선교사들이 들고 왔던 트렁크며 궤짝도 있다. 트렁크 한쪽에 있던 커다란 드럼통은 젖먹이 자녀를 위해 분유를 담아왔던 통이라고 했다. 이런 물건에서는 삶의 터전을 척박했던 이국으로 옮겨와 살았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삶이 느껴졌다.
박물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1912년 선교사인 남편 존 크레인을 따라 순천에 온 플로렌스 여사가 남긴 책 ‘한국의 들꽃과 전설’이었다. 매산학교에서 산업미술을 가르쳤던 플로렌스는 한국의 들꽃을 좋아해 틈틈이 야외에서 꽃을 그렸는데, 그렇게 그린 그림에다 주민들에게 들은 전설을 채집해 우리 식물 얘기를 곁들여 영어로 쓴 최초의 식물도감을 펴냈다. 수채화로 그린 꽃 그림도 좋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채록해 기록한 꽃 전설도 흥미롭다. 초판본은 구할 수 없어서 박물관에는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지시로 복간됐다는 영문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다 궁금했던 건 과연 육 여사는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다. 육 여사는 왜 이 책의 복간을 추진했을까. 우리 꽃을 소중하게 봐준 100년 전 푸른 눈의 이방인이 고마워서였을까. ‘한국의 들꽃과 전설’의 꽃 그림과 글은 금곡동에서 매곡동 기독교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옆 축대에 모자이크 타일 벽화로 재현돼 있다.
# 가까이 보는 봄과 멀리서 보는 봄
순천에서 매화로 이름난 곳은 단연 선암사다. 선암사 무우전 주위에서 고결하게 피어나는 600년 수령 ‘선암매’의 특별함에는 더 보탤 말이 없다. 선암매는, 그러나 꽃이 늦다. 봄이 다 무르익어 다른 지역에서 매화가 꽃잎을 하나둘 떨굴 무렵, 그제야 피기 시작한다.
꽃이 이르기로는 순천 금전산의 금둔사다. 금둔사에는 매화가 지천인데, 그중에서도 낙안읍성에서 지금은 죽은 노거수 매화나무에서 씨앗을 받아다 심었다는 여섯 그루 나무에 매화가 워낙 이르게 피어서 ‘납월매(臘月梅)’라 부른다. 그런데 왜 그런지, 올해는 꽃이 늦다. 이제 겨우 한 그루에 서너 송이씩 꽃망울을 터뜨린 정도다. 그것도 얼어 터진 것이 대부분이다. 주지 지허스님 대신 절집을 지키고 있던 스님은 “올겨울에는 이쪽 골짜기가 유독 추웠다”고 했다. 시작부터 이러니 금둔사의 매화 구경은 권하기가 마뜩잖다.
대신 추천하는 곳은 낙안읍성이다. 성안에 300여 동이 넘는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낙안읍성에는 곳곳에 매화가 있다. 낙안읍성의 매화는 자연 속에서 저 홀로 피는 게 아니라, 마을과 사람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피고 진다. 낙안읍성의 매화는 초록 기운 가득한 밭 두둑에서, 초가지붕의 민가 마당에서, 봄비에 젖은 장독대 곁에서 핀다. 매화와 함께 노란 산수유도 함께 핀다. 여기서 보는 매화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만 따로 보는 게 아니다. 매화가 피어서 비로소 완성하는 봄의 풍경을 총체적으로 감상하는 게 요령이다.
그렇다면 낙안읍성 뒤쪽으로 우뚝 솟은 금전산에도 올라볼 만하다. 금전산의 아랫도리는 평범한 육산처럼 보이지만, 산정 부근은 험준한 바위로 이뤄졌다. 낙안읍성에서 올려다보면 우뚝 솟은 바위산이 정진하는 수행자처럼 장엄하다.
바위 능선으로 이뤄진 금전산 구분 능선에는 암자 금강암이 있다. 말이 암자지 금강암은 돌과 흙으로 쌓아 지은 토굴에 가깝다. 백제 위덕왕 때 검단 선사가 창건해, 한때는 원통전과 지정전, 삼성각, 선원까지 거느린 대찰이었다는데, 퇴락한 암자와 암자가 들어선 아슬아슬한 바위 벼랑 끝자리를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다. 금강암에는 나무 덱을 덧대서 마당 겸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서 보는 봄날의 풍경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발밑으로는 푸릇푸릇 초록 기운이 감도는 낙안의 들판과 낙안읍성이, 멀리는 순천과 벌교 앞바다 갯벌까지 펼쳐진다. 봄날에는 시야가 깨끗하지 않지만, 뿌옇게 흐려진 전망에서 오히려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멀찌감치 물러나서 보는 봄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가까이서 보는 매화 꽃구경 못지않다. 입춘도 지났고, 매화도 피었고, 들녘에는 아지랑이가 오르니, 남녘은 이제 봄이다.
■ 순천의 또 다른 매화 명소
순천 월등면에는 매실 농장으로 가득한 산골 마을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계월리 향매실 마을이다. 계월리 주변의 월평, 갈전, 화전, 송천마을에도 매실 밭이 곳곳에 있어 봄이 무르익으면 마을 전체에 ‘꽃 사태’가 난다. 월등면의 매실 밭은 주로 평지에 펼쳐져 있어 비탈에 자리 잡은 섬진강 변의 매실 농원 풍경과 닮은 듯 다르다. 월등면의 매화는 섬진강 매화가 시들 무렵부터 피기 시작하니 늦은 봄나들이에 딱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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