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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군 암태도 노만사에서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 ‘송악’. |
고대 그리스는 선자천하지대본(船者天下之大本)이라! 뱃사람이 천하의 근본이다. 이 전통이 15~16세기 대항해 시대까지 서양에서 주류적 가치로 이어져온 문화이다. 현재 미국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10만t급 항공모함도 이 전통에 서 있는 것이다. 조선은 어땠나? ‘농자천하지대본’이었다. 농사가 중요하고 배를 타는 사람은 ‘뱃놈’이라고 부르며 아주 천시했다. 농사짓는 농자는 정권의 세금 착취와 통제가 용이하지만 바다의 뱃놈은 통제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 결과는 해상무역의 실종이었다. 무역은 곧 해상에서 이루어지는 법인데, 해상을 봉쇄하고 천시하니까 돈이 생길 리가 없었다. 농사지어 가지고는 보릿고개를 넘어갈 수 없었다. 조선 후기는 최악의 빈곤국가였다. 섬은 죄인들이나 보내는 유배지가 되는 것이었다.
한국도 따지고 보면 섬이 많은 나라이다. 해상무역이 어느 정도 발달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던 나라였다. 제주도를 포함해서 서남해안에 널려 있는 수천 개의 섬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신라 말기의 장보고가 바다와 섬을 근거지로 삼아 해상무역을 작동시켰지만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이것이 이어지지 못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섬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토목기술의 발달로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섬이 고립의 공간이 아니고 자연 풍광이 좋은 휴양지로 변모하고 있다. 다리의 연결로 섬과 육지의 장점이 결합된 셈이다. 그런 대표적인 지역이 전남 신안군이 아닌가 싶다. 일명 천사의 섬이다. 여기서 천사는 ‘1004’를 가리킨다. 섬이 1000개가 넘는다.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수십 군데이다.
고립의 섬에서 휴양지 섬으로
목포가 1970~1980년대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였기 때문에 정권의 차별을 받았지만 굶어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신안군의 섬들이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신안군의 수십 군데 유인도에서 학생들이 목포에 유학와서 학용품도 사고, 수업료도 내고, 어부들이 목포의 가게와 시장에서 물건들을 구입해준 덕택이다.
목포가 암탉이라면 신안군 수십 개의 유인도는 병아리였다고나 할까.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안군의 섬 주민들은 고려시대 이래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양 정권으로부터 큰 혜택을 받은 것이 없었던 지역이다. 착취를 당했으면 당했다. 그러나 21세기의 다리가 모든 상황을 바꿨다고 본다. 땅을 보는 데 있어서 놀라운 예지력을 지니고 있었던 통일교의 문선명은 이미 1980년대에 “앞으로 서남해안의 섬들이 후천개벽을 이끌어 간다”는 예언을 한 바 있다. 참모들에게 “섬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수시로 강조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목포 바로 앞에 있는 섬이 압해도(壓海島)다.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의 이름으로 보아서 이 섬은 조선조까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돌아서 꺾어지는 지점의 바다를 통제했던 수군 지휘부가 상주했던 섬이다. 서남해안 코너 지역을 조망하기에 좋은 지점이다. 압해도까지는 이미 10여년 전에 다리가 놓인 상태였다. 근래에 이 압해도에서 다시 암태도(巖泰島)까지 다리가 완공되었다. 길이가 7.2㎞에 달한다. 옛날 같으면 돛단배를 타고 들어가야 할 암태도를 자동차로 들어가니까 이런 상전벽해가 없다.
나는 십몇 년 전부터 암태도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 이름이 바위가 크다(巖泰)는 뜻 아닌가. 바위가 크다는 뜻의 지명은 그만큼 기가 세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더군다나 바다의 섬이면 고립된 곳이고, 고립된 곳은 도 닦기에 좋은 곳이다. 도는 고립과 고독, 그리고 가난이다. 막상 암태도에 와 보니까 의외였던 부분은 논밭이 많다는 점이었다. 전답이 아주 넓었다. 섬인데도 불구하고 고기를 잡는 어업보다는 농사가 주업이었다. 진도(珍島)도 1년 농사지으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농토가 넓은 지역이었는데, 암태도에 와서 보니까 진도 못지않게 농토가 많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농토가 넓은 지역은 사회적 전환기에 반드시 투쟁이 있었다. 암태도의 소작쟁의는 1924년에 일어났다. 당시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내야 할 소작료는 거의 7할에 가까웠다. 생산량의 7할을 지주에게 바치고 소작인은 나머지 3할만 가지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너무 과도한 소작료였다. 이러한 소작료는 암태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낮춰달라고 항의하였다. 논은 4할, 밭은 3할이었다. 소작쟁의 지도부가 목포 경찰서에 구금이 되자 암태도 소작인들은 목포에 배를 타고 건너가서 투쟁하였다. 당시 배들은 노를 젓고 바람을 타고 가는 풍선이었는데, 목포까지는 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정상적으로 순풍을 탔을 경우였다. 바람이 예상대로 불지 않으면 1박2일도 걸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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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농민들의 ‘아사동맹’
암태도 사람들은 목포 경찰서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첫 번째 데모는 범선 7척에 나누어 타고 온 400명이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암태도로 돌아왔지만 소작쟁의 주동 간부들이 풀려나지 않자 두 번째로 다시 600명이 목포로 갔다. 이때 암태도 사람들은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었다. 데모를 하다가 굶어 죽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자는 각오였다. 결국 목숨을 건 소작투쟁의 결과로 소작료는 4할로 낮추어졌다. 이게 일제강점기 전국 소작쟁의의 모델이 된 것이다. 암태도 사건이 신문 보도를 통해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결과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 이후로 거의 30년 만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일어나 투쟁에 성공한 결과였다. 암태도의 치열한 소작투쟁의 배경에는 암태도의 지세도 관련 있다. 바위가 많은 지형에서 배출되는 강인한 기질이다. 바위가 많으면 기질도 강하기 마련이다. 아사동맹은 아무나 맺는 게 아니다.
바위가 많은 지형인 암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승봉산이다. 해발 356m. 승봉산의 7부 능선쯤에 노만사(露滿寺)가 있었다. 이슬이 가득 차 있다(露滿)는 의미이다. 절은 바위 절벽이 움푹 들어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바위 절벽의 터를 보면 불교 사찰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토착민들이 기도를 드리던 터가 대부분이다. 토착민들이 기도를 드려서 영험하다고 알려진 터에 불교 사찰이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법당 뒤로 움푹 들어간 바위 틈 사이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 이끼 사이로 바위 틈새에서 새어나온 물이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절을 지키고 있는 70대 중반의 노스님 이야기로는 그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이슬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슬이 가득 찬 절’이라는 말은 이 이끼 틈새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해서 섬의 주민들이 노만사에 와서 이 물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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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붙어 사는 ‘송악’의 메시지
1960~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암태도에는 지금보다 주민들이 훨씬 많이 살던 시절이었다. 노만사는 터의 바닥도 암반이었고, 법당 왼쪽에도 바위 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법당 뒤도 물론 바위 암반이다. 이렇게 되면 터가 아주 세다. 터가 세다는 것은 2가지 의미를 갖는다. 일반인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터라는 의미가 된다. 220V 가전기구를 500V에 꽂으면 제품이 상한다. 일반인들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용량이 작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도를 닦는 수행자에게는 터가 셀수록 좋다. 로켓의 발사 추진 화력이 되기 때문이다. 주지스님 말로는 젊은 스님들이 기도한다면서 노만사에 머무르지만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수가 많다고 한다. 터가 세서 버티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뒤집어 보면 그만큼 경제적 궁핍이 심해서 버티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만사는 잘해봐야 신도가 10명 남짓이다. 바닷가 어촌의 나이 먹은 신도 10여명이 절 살림을 지탱해주는 단월(檀越)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말이다. 너무 춥고 배가 고프면 버티기가 힘든 법이다. 노만사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지중해의 어느 섬 풍광 못지않다. 절 앞으로 여러 개의 섬이 잔잔하게 서 있다. 풍광은 참 그림 같다. 그러나 배는 고픈 절이다.
노만사에는 ‘송악’이라 불리는 희귀한 나무가 자란다. 법당의 좌청룡 자락 바위 암벽에 서식하는 나무이다. 보통 10m 정도 높이로 자라는 상록활엽성 만경목이라고 한다. 노만사 법당 앞의 송악은 수백 년 자란 수종이다. 나무 높이 16m, 굵기 50㎝이다. 암벽에 찰싹 붙어서 산다. 어떻게 저리 바위 암벽에 힘들게 붙어서 살까 걱정이 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이다. 잎과 줄기는 지혈 작용과 경련을 멈추게 하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하는 나무인 것이다. 이 송악은 신안군에서 자생하는 송악 중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한다. 남해안 따뜻한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바위 절벽에 바짝 붙어서 수백 년 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해온 송악이라는 나무를 노만사에서 처음 보았다. 송악이 인간에게 많은 메시지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