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북 군산의 숨은 매력

醉月 2022. 2. 11. 19:25
새만금방조제에서 연륙교를 넘어 고군산군도로 건너가서 섬과 섬을 징검다리처럼 딛고 가는 작은 섬 대장도의 최고봉인 대장봉 정상 전망대 쪽에서 내려다본 모습.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장자도이고 왼쪽의 큰 섬이 선유도다.


전북 군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 여행지가 됐습니다. 군산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의 이국적 풍경에 힘입어 매력적인 여행지가 됐습니다. 식민지배의 수탈 공간이, 식민지 시대의 이국적 건물로 여행명소가 된 역설입니다.

군산은 거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식민지 근대도시의 공간을 복원했습니다만, 한 도시가 특정 시대의 풍경만을 대표 이미지로 갖는다는 건 때로 왜곡과 편견을 만들기도 합니다. 좀 더 다양한 시간의 다채로운 이야기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군산에서 늘 들었던 식민지 시대가 아닌, 다른 시간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던 건 그래서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산의 이야기를 뒤져봤습니다. 낯선 시간의 이야기를 꺼낸 건, 도시 위로 지나간 시간의 층위를 좀 더 다채롭게 바라보자는, 그래서 도시가 가진 숨겨진 매력을 새로 꺼내보자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그날의 경기

군산의 상징은 야구다. 그냥 야구가 아닌 ‘역전(逆轉)의 야구’다. 군산 사람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50년 전 여름날 벌어졌던 한 경기의 야구시합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내내 지고 있다가 9회 말에 전세를 뒤집었던 역전의 경기였다. 야구에서 역전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때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가 또 있었을까. 야구 100년사에서 최고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시합. 젊은이들은 금시초문일 테고. 중년 이상만 아는, 그날의 얘기다.

1972년 7월 19일. 서울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서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프로야구가 없었던 그 시절, TV로 중계되던 고교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중에서도 결승전의 열기는,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축구경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았다.

군산상고 대 부산고. 결승전은 호남과 영남의 맞대결이었다. 선취점을 낸 건 군산상고. 하지만 이내 부산고의 거센 반격에 밀려 역전을 허용했고, 9회 초까지 1-4로 끌려가고 있었다. 9회 말. 모두가 군산상고의 패배를 점치는 순간, 선두 타자 안타와 두 타자 연속 볼넷으로 만루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몸에 맞는 볼에 이은 적시타로 4-4 동점. 2사 만루의 상황에서 3번 타자가 끝내기 좌전안타를 때리면서 5-4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군산상고의 우승으로 군산은 아주 ‘난리’가 났다. 결승전이 벌어지던 시간에 택시기사들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전파상 앞으로 모여들었고, 다방마다 야구경기 중계를 틀었다. TV가 없는 집에서는 라디오로 중계를 들었다. 짜릿한 역전우승이 확정되자 군산 전체가 들썩거렸다. 응원하던 시민들은 죄다 술집으로 몰려갔다.

군산시민들은, 우승하고 돌아온 군산상고 선수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먼저 이리역(지금의 익산역)에서 35사단 지프 차로 갈아타고 전주 시내를 가로질러 전북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도민환영대회에 참석해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전주에서 환영대회를 마치고 나서야 군산으로 향했다.

각양각색의 환영현수막이 내걸린 군산에서는 오픈카를 타고 팔마광장, 째보선창, 군산역로터리를 거쳐 군산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오색 꽃가루가 뿌려지는 가운데 시민들은 환호했고, 선수들은 감격했다.


# 야구의 거리, 그리고 또 다른 역전

역전우승의 기억은 군산상고 곳곳에 새겨져 있다. 군산상고는 딱 하나 있는 운동장이 야구장 전용이다. 트랙도 안 그려져 있고, 축구나 농구 골대 하나 없다. 학생들이 체육수업 시간에 야구만 해야 할 판이다. 학교 교사(校舍) 앞에 2016년에 세운 학교상징 조형물도 ‘야구공을 쥔 손’이다. 방학 중에 학교에 나온 여교사는 “아직도 주변에서 군산상고 역전우승 얘기를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교사 대부분이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에 태어났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는데도, 군산사람들의 감격은 여전하다. 군산상고 역전우승 주역의 50년 후배들을 보고 싶었는데 운동장이 텅 비어 있다. 야구부 전원이 경북 의령으로 내려가 동계 전지훈련 중이란다.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은 도시 사(史) 측면에서도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그날의 경기로 인해 도시 군산은 야구가 정체성이 됐고, ‘역전’의 가치가 슬로건이 됐다. 군산상고가 역전우승의 드라마를 쓴 지 올해로 딱 50년째다. 이를 기념해 군산시는 7월 15일부터 19일까지 ‘역전의 명수, 군산 50주년’ 행사를 열기로 했다. 행사내용은 아직 미정. 행사 때 ‘군산 야구사 기념관’ 건립의 첫 삽을 뜨기로 한 것 정도만 확정됐다.

군산에는 아직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지만, 그날의 영광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곳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좀 초라하긴한데, 군산상고 사거리에서 학교 정문까지 이어지는 110m 구간에 ‘군산 야구의 거리’가 있다. 2018년에 조성했다.야구의 거리 초입에 투수와 타자의 동작을 형상화한 두 개의 동상을 세우고, 길 옆에다는 역대 선수의 약력을 적어놓은 안내판을 줄줄이 걸었다. 보도블록에는 글귀를 새겨놓았는데, 그날의 감회를 적은 글도 있고, 군산 야구의 자부심을 담은 글도 있다. 그중 몇 개를 읽어본다.

“결승전 중계하는 날, 거리에는 시민들이 없고, 택시도 없었다. 추억의 그날이 생각난다.” “역전하는 순간! 군산의 소주, 막걸리는 바닥이 났다. 덩달아 내 주머니도 비었다. 그날이 그립다.” 조마조마하고 통쾌했던 그날의 역전 이야기는 반세기가 지난 아직도 군산 사람들의 대폿집 술상 위에 자주 오르내리는 술안주다.

군산에서 야구는 그냥 야구가 아니다. 군산 시민들이 그날의 경기에서 소환하는 키워드는, 역전우승이란 ‘결과’보다는 역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걸 짐작게 하는 글. “연습에 또 연습, 훈련에 또 훈련이 역전의 명수를 만든다.” 역전은 운이 아니라 노력에서 온다는 깨달음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전우승의 기(氣)를 군산경제의 활력소로 이어가자는 다짐도 있고, 선배들의 야구 전통을 취업 전통으로 이어가자는 학생의 얘기도 있다.

보도블록에 새겨진 또 다른 글귀 하나. ‘역전의 명수는 끝나지 않았다.’ 현대조선소와 GM의 철수 등으로 극도의 침체를 겪고 있는 군산의 또 한 번의 역전은 가능할까. 쇠락한 산업도시에서 근대 문화공간을 갖춘 ‘관광도시’로 변신하고 있는 군산의 역전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① 군산상고 정문 앞에 세워진 ‘역전의 명수’ 조형물. 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110m쯤이 ‘야구의 거리’로 조성됐다. 군산상고가 역전 우승한 1972년 7월 19일 황금사자기 야구대회 결승전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군산시민들의 집단 기억 속에 있다. ② 레트로 느낌으로 가득한 경암동 철길마을. ③ 1970~1980년대 달동네를 재현한 신흥동 말랭이마을의 양조장 벽화. ‘말랭이’란 고갯마루를 뜻하는 사투리로 마을이 비탈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④ 백화양조 공장이 있던 현대오솔아파트 자리에 세워진 여고생 조형물. 인근에 여학교가 많아 등교하는 여고생을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여학생이 딛고 선 게 백화양조가 만들어 히트했던 양주 ‘베리나인’ 병이다.



# 백화수복과 베리나인 골드의 추억

1970년대 군산을 얘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백화양조’다. 백화양조는 한때 청주는 물론이고, 연이은 위스키 히트작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차례나 제사상에 올리는 제주(祭酒)의 대표 격인 청주 ‘백화수복’이 백화양조의 간판 상품이었다. 1985년 백화양조가 두산에 팔리고, 백화양조를 산 두산주류마저 롯데주류로 넘어가면서 백화수복을 처음 만들었던 회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백화수복은 아직도 그 상표 그대로 팔리고 있다.

백화양조가 만들었던 술 가운데 최고로 히트한 것이 아마도 ‘베리나인’시리즈가 아니었을까. 백화양조는 양주에 손을 대면서 위스키 원액 19.9%의 기타재제주 ‘죠지드레이크’를 선보였는데, 이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원액함량이 낮다는 이유로 죠지드레이크에 ‘위스키’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위스키 원액을 25%로 높인 ‘베리나인’을 만들었다.

베리나인도 잘 팔렸지만, 이것보다 더 인기를 누렸던 건 원액함량 30%의 고급버전인 ‘베리나인 골드’였다. 원액함량이 30%만 넘으면 특급 위스키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에 베리나인 골드는 국내 특급 위스키 시장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백화양조의 몰락은 청주나 양주에 비해 판매가 저조했던 소주의 주정배정권을 매각하면서 시작됐다. 소주를 포기하자마자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청주나 양주의 소비는 크게 줄고 소주 판매량이 급등했다. 여기다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위스키 원액 100% 양주 ‘베리나인 골드 킹’을 내놓았는데, 이게 OB 시그램의 ‘패스포트’에 밀려 참패하면서 회사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백화양조 몰락의 전조로 1976년 4월 백화양조 계열회사 사장의 아들이 벌인 살인사건을 꼽는 이들도 있다. 계열사 사장의 고교생 아들이 사귀던 여학생을 백화양조 공장으로 불러들여 ‘바람을 피운다’는 이유로 추궁하다 살해한 엽기적인 사건이었는데,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런데 하필 고교생이 여학생을 양조장 술통에 넣어 숨지게 했으니….

백화양조의 번성을 있게 한 월명동 백화수복 공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현대오솔아파트가 들어섰다. 인근의 도시재생 공간과 가까워 관광객들이 아파트 앞을 수시로 지나다니지만, 안내판 하나 없으니 백화양조나 베리나인 골드를 알 턱이 없다. 백화양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단서가 딱 하나 있다. 오솔아파트 앞 보도에 세워놓은 조형물이다.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김형섭 작가의 조형물인데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조형작품의 제목은 ‘즐거운 하루’. 이곳이 군산여고와 중앙여중, 군산여상으로 가던 길목이라 여학생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런데 조형물이 딛고 선 좌대가, 자세히 보니 뉘어놓은 양주병이다. ‘베리나인(VALLEY 9)’이라는 양주 상표와 과거 군산의 대표기업 ‘백화양조’의 상호가 선명하다.


# 말랭이마을에서 보는 1970년대 군산

군산의 1970년대를 볼 수 있는 또 한 곳이 신흥동의 ‘말랭이마을’이다. 군산시가 고지대 불량주거지 정비의 일환으로 매입한 월명공원아래 신흥동 일대 주거지를 철거하는 대신, 체험 공간으로 다듬은 곳이다. 말랭이마을에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두리 달동네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낡은 담벼락에다 그 시절 군산의 풍경을 그리고, 새로 추억 전시관 건물을 지어서 촬영세트장 같은 동네 풍경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말랭이마을에다 1970년대 풍경을 재현한 건 실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군산은 그동안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을 벌이면서 일제 식민지 건축물을 복원하거나 정비했다. 원도심을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의 이국적인 일본인 거리로 조성하는 데 몰두했던 것이다. 이런 시도는 군산시가 나서서 구도심 한복판에다 ‘고우당’이란 일본식 여관을 본뜬 숙박시설을 대규모로 지으면서 절정을 이룬다.

이런 방식의 관광개발을 놓고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일제 건물들을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관광상품으로 이용하려는 얄팍한 발상이란 지적이 대표적이었다. 군산 원도심을 복원하면서 일본인 거리조성에만 몰두했을 뿐, 정작 식민지의 또 다른 한 주체인 조선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비난도 있었다. 급기야 ‘식민지 미화 투어리즘’이란 비판까지 나왔다.

건축물 중심의 역사복원은, 군산의 항일운동 내력을 전시하는 ‘군산항쟁관’마저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 안에 들어서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군산의 한 문화관광해설사는 “관광해설을 오래 했는데, 해설의 80%쯤이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건물을 잘 지었는지에 대한 얘기가 돼버리더라”고 했다.

말랭이마을은, 일본인 원도심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식민지 시대 조선인 마을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조선인촌’으로 조성하려 했다가 명칭과 성격에 대한 시비가 잇따르고,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물이나 공간이 남아있는 게 없어 사업은 표류했다. 그러다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착안해 신흥동을 ‘근대소설마을’로 조성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아예 ‘근대’를 지워버리고 비탈진 골목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의 특징을 살려 ‘달동네 추억의 공간’으로 테마를 바꿨다.

2015년에 시작한 사업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마을 골목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아직 내부 공사가 한창인 추억전시관에서는 1970년대 상점가를 재현해 놓은 풍경을 볼 수 있다. 풍년상회, 아리랑이발소, 청춘사진관, 몽롱문방구, 동광상회, 월명청과상회, 대왕대포집, 명희다방…. 꼭 군산이 아니라도 다른 도시의 달동네에 하나쯤 있었을 상점들이다.


# 도깨비시장서 만나는 펄펄 뛰는 추억

군산의 한복판에는 매일 아침 새벽시장이 있다. 매일 오전 5시쯤 섰다가 오전 9시 이전이면 파장하는 시장이다. 감쪽같이 섰다가 아침이 되면 사라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불린다.

새벽시장은 1970년대 초 오산이나 임피 등에서 아낙네들이 직접 재배한 배추와 무를 보따리에 이고 와서 군산역 주위에서 노점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이다. 어떤 규칙도 없고 자릿세도 받지 않지만 역이 옮겨간 지금까지도 50년 넘게 새벽시장이 선다.

사고파는 상품이나 흥정하는 모습을 보면 새벽시장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래서 군산의 새벽시장에서는 정물 사진 같은 포획된 추억이 아니라, 아직도 ‘펄펄 뛰는’ 과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새벽시장을 찾은 날은 설 명절 직후라 평소보다 좌판이 크게 줄었지만, 평소 새벽에는 군산화물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골목마다 좌판이 끝도 없이 늘어선다고 했다. 눈대중과 짐작만으로도 시장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만한 규모의 시장이 매일 새벽에 섰다가 아침이면 안개처럼 사라진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눈발이 흩날리는 이른 새벽에 양철통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삼오오 모여 손을 녹이고 있는 상인들이 펴놓은 좌판을 기웃거렸다. 미나리며 푸성귀를 가득 쌓아둔 노점도 있고, 꽝꽝 언 동태와 고등어를 부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도 있다. 그날 새벽, 상인들의 입김으로 가득한 새벽 장에서 보았던 건 좌판의 물건이 아니라 오래전 시장 풍경과 추억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로 가는 여정을 계획한다면 경암동 철길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경암동 철길마을은 신문용지를 실어나르던 화물철도의 선로 변에 형성된 마을. 선로는 2008년 폐선돼 기차는 더 이상 다니지 않지만, 기찻길을 가운데 두고 만들어진 독특한 정취의 비좁은 골목에 레트로 상품 등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곳이다. 철로 변 건물들이 모두 무허가라 정비나 관리가 좀 어정쩡한 게 흠이지만, 그래도 군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꼭 들러가는 곳이 됐다. 군산에서 워낙 유명한 관광명소라 어디서든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 그 얘긴 이쯤 해두자.


# 자연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끝으로 군산에 다녀간다면 새만금방조제로 육지가 된 고군산군도를 빼놓을 수 없다. 섬으로 있을 때야 맘먹고 가야 하는 길이었지만, 지금 선유도나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는 차를 타고 쉽게 건너갈 수 있다. 지금이야 방조제를 타고 가다 섬과 섬을 징검다리처럼 딛고 순식간에 당도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군산여객선터미널에서 선유도까지는 여객선 새마을호로 4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완행여객선을 타고 멀미에 시달리며 만났던 고군산군도의 비경을, 이제는 드라이브를 하면서 차창 너머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섬이 육지가 됐으니 말 그대로 ‘상전벽해’지만, 따지고 보면 섬의 자연경관은 다리가 놓인 것 빼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고군산군도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딱 두 곳만 꼽으라면 첫 번째는 대장도다. 새만금방조제에서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를 딛고 4개의 연륙·연도교를 거쳐 당도하는 작은 섬 대장도. 근육질의 바위로 이뤄진 대장도에는 해발 141m의 대장봉이 있다.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경관은 어디든 나무랄 데 없지만, 그중에서도 대장봉에 올라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단연 최고다.

두 번째로 추천할 곳은 선유도의 옥돌해수욕장이다. 옥돌해수욕장은 이름처럼 옥(玉)은 아니지만, 모래 대신 해안을 따라 물수제비 뜨기에 딱 좋을 법한 납작한 자갈이 가득 깔려 있다. 유독 물색이 맑고, 파도에 차르르 자갈이 구르는 소리도 듣기 좋다. 옥돌해수욕장 옆으로는 해안을 따라 해변덱 산책로가 놓여 있다. 15분쯤이면 다 걷는 짧은 산책로 위에서는 근사한 낙조와 마주 설 수 있으니 대장도와 선유도 등을 둘러보고 해 저무는 시간에 딱 맞춰서 찾아가면 좋겠다.


■ 군산의 먹거리

군산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복성루와 수성반점으로 대표되는 짬뽕과 이성당의 빵을 들지만, 군산에는 뜻밖에도 독특한 이북음식을 내면서 오래 살아남은 식당이 몇 곳 있다. 동의 간장 간을 한 짙은 색 국물에다가 닭고기 고명을 얹어주는 평양냉면을 내는 장재동의 ‘뽀빠이냉면’, 평안도 지방의 전통음식 어복쟁반을 내는 사정동의 ‘압강옥’, 닭이나 꿩, 소고기 등을 우려낸 장국에 밥을 말아내는 조촌동의 ‘평양온반’. 하나같이 심심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음식들인데, 추억을 되살리는 여행에 곁들이면 잘 어울릴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