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남 강진 다산초당&백련사

醉月 2015. 3. 6. 01:00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천년고찰 백련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있다. 백련사 동백은 3월 초순부터 만개하기 시작, 하순에는 수천 그루 나무에서 떨어진 핏빛 동백꽃으로 오솔길이 뒤덮인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 백련사 동백나무 숲에서 직박구리가 동백 꿀을 먹고 있다. 김낙중 기자

경칩을 코앞에 두고
봄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남쪽에서 연일 타전되는 꽃소식에
엉덩이가 들썩거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목석이나 다름없을 터.
해토머리 부드러운 바람에 심신을 헹구고
마음 가난한 이들에게
남녘의 봄을 배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선 길이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람의 칼날은 무뎌진다.
얼었던 땅도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붉은 속살을 흔연하게 내놓았다.
마음에 걸어두었던 빗장이 스르르 열린다.
겨우내 숭어뜀 뛰듯 하던 가슴도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황토색 풍경 앞에 잠시 차를 세운다.
어쩌면 저 색깔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심성 고운 아낙처럼 푸근한 색.
황토는 그 무엇도 밀어내지 않는다.
생명을 품은 땅이다.
봄은 벌써 그 위에
드문드문 꽃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봄을 만났으니 이제 한 사람을 찾아간다.
역경 속으로 던져졌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
고난 속에서 더욱 화려한 꽃을 피워낸 사람.
그는 이 척박한 시대를 어떻게 진단할까.
한 줄기 빛 같은 처방전을 기대하며
남쪽으로 달린다.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남아 있는 땅
강진으로.



# 사의재·다산초당 = 다산초당을 뒤로 미루고 먼저 강진 읍내에 있는 ‘사의재(四宜齋)’로 향한다. 이곳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시작한 주막이다. 사의재는 자신이 거처하던 방에 다산이 붙인 이름이고 주막의 이름은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였다. 초가집 두 채가 약간 비켜서서 마주 보고 있다. 주막으로 쓰던 안채와 다산이 머물렀다는 바깥채. 바깥채의 ‘四宜齋’라고 쓴 현판 앞에서 옛사람의 고뇌를 읽어보려 서성거린다.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1801년 겨울, 다산이 누릿재(황치)를 넘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중범죄자인 ‘천주학쟁이’를 도왔다가는 경을 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 외면하기 바빴다. 관에서도 거처를 정해주지 않았다. 다산은 가족에게 띄운 편지에 “사람들은 나를 역병에 걸린 환자를 보듯 피했다”고 썼다. 심지어 백성들이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기까지 했다. 그런 다산에게 거처를 내준 이가 동문 앞에서 술과 밥을 팔던 주막의 주모였다. 그녀의 보살핌 속에서 다산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안채를 기웃거리다 보니 벽에 붙은 차림표가 눈에 띈다. 아욱국 5000원, 추어탕, 매생이전… 다산은 주모가 끓여주는 아욱국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출출한 김에 아욱국 한 그릇 청해 볼까 주인을 불러 보지만 기척이 없다. 하긴 지금이 어느 철인데…. 이 주막은 ‘다산 실학 성지 조성사업’의 하나로 옛터로 추정되는 곳에 2007년 복원됐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대숲의 서걱거리는 소리로부터 시작한다. 새들을 품은 숲이 통째로 지저귄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도열한 길에는 나무뿌리들이 온통 얽혀 있다. 땅속에 있어야 할 몸을 지상에 드러낸 뿌리들은 생채기투성이 손을 뻗어 땅을 움켜쥐고 있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흙이 아니라 생을 향한 열망이다. 저 경건한 모습 앞에 누가 주어진 생을 가볍게 여기랴. 삶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장애물을 이기는 방법은 좌절하고 원망하고 울부짖는 게 아니라 꿋꿋이 일어서서 걸어가는 것이다.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산이 그랬다. 그는 평생 5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그중 많은 것들이 가장 불행했던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 시절에 쓴 것이다. 서, 예, 악, 춘추, 역, 천문, 지리, 산술, 의술, 금석학을 섭렵했던 다산을 말하기에는 그가 너무 크다. 200여 년 전 그가 걸었던 길을 묵묵히 따라 걸어볼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은 벅차고 숨이 가쁘다. 길가 도랑에는 겨울이 녹은 물이 졸졸거리며 흐른다. 다산도 봄마다 이 소리를 들었겠지. 원래는 어둡고 습한 길인데 오늘은 햇살이 좋다.

다산초당은 체로 친 듯 곱게 내리는 햇살 아래 묵묵하게 서 있다. 새들도 햇살을 한 가닥씩 물고 이 나무 저 나무 옮아 다닌다. 초당은 여전히 와당(瓦堂)이다. 원래 작은 초가였는데, 허물어진 것을 1957년 다시 지으면서 기와를 덮은 것이다. 다산이 거주하기 전에는 해남 윤씨 가문의 산정(山亭)이었다. 윤선도를 배출한 해남 윤씨와 다산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의 모친이 바로 그 집안 출신이다. 그러니 비록 유배 중이라 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서야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초당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이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넓은 돌이다. 다산이 찻물을 끓였다는 다조(茶俎·차 부뚜막)다. 뒤뜰에는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샘 약천(藥泉)이 있다. 다산이 차를 끓이던 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실 수 없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왼편 산비탈로 올라가면 다산이 바위에 손수 쓰고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글자 한 자 한 자에서 옛사람의 고독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있는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에 들른다. 연못 한가운데 돌로 산을 쌓고 대롱으로 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이들이 이른바 다산사경(茶山四景)이다.

동암을 지나 천일각으로 간다. 다산이 초당에 거주할 때는 없었던 정자다. 강진만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다산 역시 이 언덕에서 바다를 자주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닷물은 형 정약전이 있는 흑산도를 쉽게 오갈 수 있었을 테니. 형제는 의금부를 출발해서 나주까지 유배 길을 함께했다. 하지만 나주 율정주막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해야 했다. 음력 11월이었으니 바람이 매서웠을 것이다. 유난히 정이 깊었던 형제는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바닷물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엎드려 있고 봄을 싣고 오는 바람은 부드럽다. 눈앞의 늙은 낙락장송이 숨겨진 이야기라도 들려줄 듯 가지를 흔든다.

▲ 다산이 손수 바위에 쓰고 새겼다는 글씨 ‘정석(丁石)’.

▲ 정약용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다산초당 내부.

# 백련사 = 천일각을 뒤로 하고 백련사로 가는 산길로 접어든다. 다산은 이 길을 넘어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러 다녔다. 혜장선사 역시 이 길을 걸어 다산을 만나러 왔다.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두 사람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길은 온갖 형용사가 부끄러울 만큼 아름답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대밭이 이어지고 언덕 위에서는 저만치 있는 바다와 다시 만난다. 길옆에는 겨울을 견딘 야생 차나무들이 봄맞이를 하느라 분주하다. 흙은 밟기 미안할 정도로 부드럽다.

다산이 이 길을 걸어간 것은 그 끝에 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벗 혜장선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을 찾아가는 걸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마지막 언덕에 오르니 저만치 어깨를 맞대고 있는 절집들이 보인다. 백련사다. 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내처 절까지 이르지 못하고 멈추고 만다. 느닷없이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는 동백나무 숲. 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 1500그루가 넘는 동백나무의 바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장엄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300년이 넘었다는 나무들에게서 신령한 기운을 읽는다. 다산 역시 봄이면 이 숲에 들어 시름을 내려놓았으리라. 양지쪽은 온통 붉은빛이다.

눈을 낮추니 길섶에 손톱보다 작은 꽃들이 점 점 점 피어 있다. 큰개불알꽃이다. 쪼그리고 앉아 작은 생명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정말 봄이 오긴 왔나 보다. 그 어떤 꽃도 시련 없이 피어나지 않는 법. 숙연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꽃들 사이를 서성거린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무염(無染)스님이 창건한 백련사는 고려 때 8국사를 배출하고 신앙결사운동이자 불교정화운동인 ‘백련결사’의 본거지가 되면서 이름이 알려진 절이다. 다산과의 인연도 깊다. 그가 강진으로 유배를 올 당시 백련사에는 혜장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대흥사의 12대 강사로 기록될 만큼 큰스님이었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다산과 혜장선사가 나눈 우정은 깊고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산도 혜장도 없다. 절 마당에 서서, 늙은 배롱나무 가지 사이로 동백 숲과 강진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들도 그랬을까? 이 나무 앞에 나란히 서서 저 바다를 바라봤을까? 나라 걱정도 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가 절실한 시대, 옛사람의 혜안이 한없이 그리운데 오늘 이곳은 바람조차 침묵한다.

# 그 밖의 가볼 만한 곳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강진에는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월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무위사를 빼놓을 수 없다. 10세기 이전에 창건된 이 절은 소박한 아름다움이 매력이다. 특히 국보 13호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극락보전에 31점의 벽화가 있었는데 그중 29점은 분리하여 성보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강진군청 옆에 있는 영랑생가에는 시인 김윤식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안채, 문간채, 사랑채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시의 소재가 됐던 샘,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안채 뒤편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동백나무 다섯 그루가 있는데 꽃이 절정을 이루는 3월에는 장관을 연출한다. 여행작가

 



동백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백련사. 김낙중 기자


유배지에서 만난 인연

다산이 강진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사람은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주모였다. 모두가 외면할 때 방을 내주고 밥을 끓여낸 그녀는 다산이 심신을 추스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다산은 유배 초기 정신적 충격으로 석 달이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날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에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보라고 권한 사람도 주모였다. 그녀는 보통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산이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날 저녁 주인 노파가 제 곁에서 한담(閑談)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영공(令公)께서는 글을 읽었으니 이 뜻을 아시는지요? 부모의 은혜는 다 같은데 어찌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게 하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는지요. 아버지 성씨를 따르게 하고, 상복도 어머니는 낮출 뿐 아니라 친족도 아버지 쪽은 일가를 이루게 하면서 어머니 쪽은 안중에 두지 않으니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제가 노파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준 시초라 하였소. 어머니 은혜가 깊기는 하나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과 같은 큰 은혜를 더 소중하게 여긴 때문인 것 같소.”

그랬더니 노파가 또 말했습니다.

“영공의 대답은 흡족하지 않습니다. 내 그 뜻을 짚어보니 풀과 나무에 비교하면 아버지는 종자요, 어머니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자를 땅에 뿌리면 지극히 보잘것없지만 토양이 길러내는 그 공은 매우 큽니다. (하략)”

저는 이에 뜻밖에도 저도 모르게 크게 깨달았고, 삼가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천지간의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묘한 의미를 바로 밥 파는 노파가 말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매우 기이하고도 기이합니다.

▲ 다산이 유배 초기 머물렀던 주막의 바깥채 ‘사의재’.

다산의 말대로 기이한 일이다. 주모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산도 그렇고 엄격한 남존여비 시대에 남녀 관계에 대해 일갈한 주모의 당당함도 놀랍다. 주막에서 4년을 지낸 다산은 강진읍 고성사에 있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1년 가까이,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도 2년 가까이 머문다. 1808년 봄에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가 해제된 1818년까지 10여 년을 지낸다.

다산이 유배 시절에 가장 깊이 교류를 맺은 이는 혜장선사다. 둘 사이에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백련사를 찾아간 다산은 혜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우연히 들른 객인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섰다. 뒤늦게 다산을 알아본 혜장선사가 부리나케 쫓아가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주역을 논했다. 결국 사자후를 토하듯 주역을 풀어가던 혜장이 다산의 질문 하나에 “20년 공부가 물거품입니다. 깨우침을 내려주십시오”라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다산은 혜장과의 만남을 계기로 불교 서적을 읽고 배우게 됐고 차를 즐겨 마시면서 앓고 있던 속병도 차츰 낫게 되었다.

다산에게 혜장은 삭막한 유배생활에 빛과 같은 벗이었을 테고 혜장에게 다산은 배움의 갈증을 풀어준 스승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얼마나 정이 깊었으면 다산은 깊은 비 오는 밤에도 찾아오는 혜장을 생각해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깊은 우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뜻밖의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다산보다 열 살이나 어렸던 혜장선사가 1811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목포IC)→2번 국도→남해고속도로 강진 무위사 나들목에서 빠져 보성·강진 방면의 왼쪽 길을 택한 뒤 다산초당·백련사 쪽으로 좌회전,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 묵을 곳·먹을 것 = 한옥 펜션, 민박형 펜션, 단체실 등을 갖추고 있는 ㈜덕룡산행복마을(061-434-7907)과 강진베이스볼파크펜션(061-433-1880), 가우도한옥펜션(061-432-0407) 등 여러 곳의 펜션·민박이 있다. 강진 읍내와 마량 등에는 곳곳에 모텔이 있다. 청정해역에서 생산되는 어패류 등으로 푸짐하게 차려내는 한정식이 유명하다. 명동식당, 남문식당, 청자골종가집, 강진만한정식 등이 있으며, 특히 버스터미널 근처의 해태식당은 푸짐한 밑반찬과 정갈한 요리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