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전남 완도의 두 섬,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장보고대교’가 개통했습니다. 장보고대교가 건너는 건 1.3㎞의 바다입니다만, 이 다리는 바다로 끊어진 77번 국도를 이으면서 완도와 강진을, 더 나아가 해남과 장흥까지 하나의 여정으로 잇습니다. 장보고대교가 연결한 두 섬은 앞서 놓인 연륙교로 육지가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니까, 장보고대교는 섬을 육지로 만든 연륙의 다리가 아니라, 일찌감치 육지가 됐지만, 마주 본 채 건너갈 수 없었던 두 섬을 잇는 연도교인 것이지요. 장보고대교가 연결한 길을 따라 달리면서 완도로도, 강진으로도 길이 열린 세 개의 섬, 신지도와 고금도, 조약도를 찬찬히 둘러봤습니다. # 징검다리가 된 세 개의 섬 새로 놓인 장보고대교는 연륙교가 아니라 섬과 섬 사이에 놓인 연도교다. 연륙교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를 말하고, 연도교는 ‘섬과 섬을 잇는 다리’라는 뜻이다. 연도교인 장보고대교는 완도 땅에 속한 두 섬,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다. 신지도에는 완도와 다리가 놓여 있었고, 고금도 역시 강진과 다리로 연결돼 있었으니, 장보고대교는 완도 쪽에서 넘어오는 길과 강진 쪽에서 이어온 길을 바다 위에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지도를 한 번 보면 이해가 빠르다. 장보고대교가 연결한 건 길의 방향과 흐름이다. 이 다리가 놓임으로써 완도에서 섬을 딛고 강진까지, 반대로 강진에서 섬을 딛고 완도로 물 흐르듯 이동할 수 있다. 완도와 강진을 잇는 효율적인 동선이 만들어지면서 이웃한 해남과 장흥까지도 여행자의 동선 안으로 들어온다. 섬과 섬을 잇는 다리 하나가 남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효율적인 동선과 코스를 선사하는 것이다. 완도에서 연륙교와 연도교를 딛고 강진으로 가는 길에는 모두 세 개의 섬이 있다. 신지도와 고금도, 그리고 조약도다. 이들 섬에 놓인 다리가 완도와 강진, 그리고 해남과 장흥을 잇는 가장 효율적인 코스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 섬이 징검다리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신지도와 고금도, 조약도는 섬 자체가 가진 매력만으로도 관광객을 충분히 불러모으고도 남는다. 세 개 섬만을 목적지로 정해 다녀온대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유배자의 비극적인 삶이 녹아 있는 곳도 있고, 핍박받는 소작인들의 고통이 스며 있는 섬도 있으며,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을 오래 품고 있던 섬도 있다. 이야기뿐만 아니다. 도처에 다도해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명소가 있고, 끝 간 데 없이 꽂힌 매생이와 김·다시마 양식장 지주대가 보여주는 조형미도 있다. 장보고대교 개통으로 한 두름으로 꿰어진 세 섬 모두가 역사와 자연과 생업이 모두 아름답게 빛나는 곳이란 얘기다.
# 유배자들의 섬, 신지도 먼저 섬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부터 앞세우자. 전남 완도에서 840m의 짧은 다리를 건너면 신지도다.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뒤져 확인한 유배자만 40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신지도에 서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유배지들은 거기로 유배 온 내로라하는 선비들의 학문적 세례를 받게 마련이고, 유배자들에게 배운 후학들의 자취가 서원으로 세워지는 게 보통이지만 신지도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신지도로 유배 온 이들이 대부분 중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지도는 멀다. 땅끝 해남을 지나 완도를 징검다리처럼 딛고 다시 건너가야 한다. 유배지가 멀다는 건 그만큼 처벌이 중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큰 죄를 지은 죄인들만 신지도로 보내졌다. 신지도로 유배 온 중죄인들은 조정의 감시와 주민들의 경계를 담처럼 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주민들과 교유가 거의 없었으니 섬에 서원이 없고, 길러낸 후학도 없는 건 이 때문이리라. 신지도로 유배 온 이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이광사다. 동국진체 서예의 대가. 이광사는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의 필법을 개척했다. 글씨를 쓰는 일이 곧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던 시대. 이광사의 글씨는 서남해안 일대 선비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이라 할 만한 글씨가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 있다. 제주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내리고 내 것을 걸라’고 했다가, 훗날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도로 걸어달라’고 했다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웅보전 현판 글씨 말이다. 그의 글씨는 구례 천은사, 고흥 금탑사, 강진 백련사, 장성 백양사, 나주 심향사, 고창 선운사에도 있다. 남도 땅에서 만나는 이광사의 글씨에서는 특유의 기운이 느껴진다. 한눈에도 손끝으로 쓴 게 아니라 ‘마음을 담은’ 글씨라는 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 섬에서 사나운 운명을 살다
이광사는 모든 것을 잃고 이곳 신지도로 왔다. 부인은 자결했고, 명성은 한낱 물거품이었다. 처절한 절망 속에 살았을 그가 신지도에서 남긴 시 한 편에서 그의 비탄을 본다. “평생 속된 뜻 없이 살았거늘 / 늙어서 유배객이 되었네 / 꿈속에 친구의 서실을 찾기도 하고 / 길을 잃고 북극성을 바라보기도 했네 / 만 가지가 스스로 뜻을 얻은 듯하고 / 외로운 객이 더불어 마음을 기쁘게 하네/ 점점 문장이 지극한 것을 사랑하는데 / 운명이 사나워지는 것만 근심할 뿐” 스스로 쓴 시처럼 ‘점점 문장은 지극해지는데 운명이 사나워지는 것’을 근심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신지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배형에 처해진 지 23년, 신지도로 유배된 지 16년 만에 죽음으로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다. 말 그대로 ‘사나운 운명’이었다. 그가 말년을 살았던 집이 신지도 금곡리에 있다. 금곡리 마을회관 뒤편의 허름한 농가다. 지붕은 개량된 것이지만, 집의 골격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란다. 마당 한쪽의 별채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 얼기설기 각목으로 흙벽을 겨우 버텨 놓았다. 아쉽게도 이광사가 신지도에 남긴 건 이 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 그 집마저 목숨을 다해 가고 있다. # 상산의 조망, 명사십리의 낭만 섬에 깃든 이야기를 앞세우다 뒤로 밀렸지만, 신지도는 품고 있는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다도해 한복판의 섬에서 훌륭한 경관을 만들어내는 건 다름 아닌 ‘높이’다. 신지도에는 상산(352m)이 있다. 완도에서 신지대교를 건너면 우뚝 서서 마주 보고 있는 산이 바로 상산이다. 신지대교 건너 물하태 선착장 쪽에서 상산 정상을 오르는 등산코스가 있지만, 이보다 더 쉽게 오르는 방법도 있다. 청화사로 이름을 바꿨지만, 지도나 내비게이터에 여전히 ‘영주암’으로 표시되는 절집이 상산 7분 능선에 있다. 차를 타고 절집까지 가서 300m만 숲길을 걸으면 산 정상이다. 거리는 짧지만 직선으로 낸 숲길이 어찌나 가파른지 내내 헐떡거리게 된다. 상산 정상은 통신시설과 산불감시카메라가 차지하고 있다. 정상석은 정상 아래 조망이 좋은 언덕에 있다. 여기에 서면 바다 건너 고금도에서 신지도로 건너오는 장보고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침 대기가 맑은 날이어서 완도 너머로 해남의 땅끝 전망대까지 뚜렷했고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청산도, 노화도, 보길도도 손에 잡힐 듯했다. 신지도를 대표하는 명소는 사실 명사십리다. 명사십리는 희고 가는 모래의 백사장이 활처럼 휘어진 운치 있는 해변이다. 신지도의 명사십리는 ‘밝을 명(明)’이나 ‘이름 명(名)’이 아니라 ‘울 명(鳴)’자를 쓴다. 울음이란 이름을 붙인 데는 연유가 있다. 역시 유배 얘기다. 철종 때 외척의 전횡과 관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다 신지도로 유배된 문신 이세보. 어찌나 억울했던지 유배지에서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던 그는 밤마다 해변으로 나가 모래톱에 시를 쓰고 읊었다. 그 소리가 울음소리 같아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신지도에는 남쪽 해안을 끼고 명사십리까지 이어지는 도보코스인 ‘명사갯길’이 있다. 상산 정상에 올랐다가 명사갯길로 길을 갈아타고서 명사십리까지 이어 걷는다면 신지도가 품은 자연경관을 빼놓지 않고 만끽할 수 있다. # 이순신 장군이 죽어 묻혔던 자리
고금도는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의 통제영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때 수군 8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에 본영을 설치했다. 고금도 동쪽 끝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무사가 있다. 남해안 전역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은 많지만 충무사가 각별하게 느껴지는 건,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시신이 충남 아산 선영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여기 사당 앞 야트막한 언덕에 80여 일 동안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가묘 자리 주변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는데 장군의 시퍼런 기개로 지금도 일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단다. 본디 충무사는 관운장을 모시는 ‘관왕묘’였다.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 5000명을 이끌고 고금도에 주둔했던 명나라 장수 진린이 관운장이 꿈에 나왔다며 관우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은 게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진린은 남은 군비를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관우사당에 제사를 모셔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다 숙종 때 관왕묘는 옮겨지고 그 자리에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가 들어섰다. 충무사 부근 숲에는 짧은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 숲길은 난대림의 초록에다 늦단풍이 어우러져 계절을 잊게 한다. 난대림의 초록이 어찌나 짙고 깊은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절이 가을을 넘어서 늦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다. # 고된 노동이 바다에 그린 그림 고금도 남쪽 해안에는 매생이 양식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해안가의 얕은 바다에 굵은 대나무를 꽂은 뒤 거기에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 발을 널어 두고 매생이를 기른다. 이른바 지주식 매생이 양식이다. 너른 바다에 촘촘하게 대나무를 꽂아 만든 양식장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매생이 양식은 고된 노동을 예사로 하는 바닷가마을 사람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정도로 힘들다. 시장의 좌판이나 밥상의 뜨끈한 국 속에 든 매생이만 봐온 도시 사람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대나무를 잘라 발을 엮고, 그걸 바다에 꽂은 지주에다 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만, 물때에 맞춰 엄동의 바다로 나가 뱃전에 엎드려 바닷물에 손을 넣어 끊임없는 반복노동으로 매생이를 훑어내는 수확작업은 웬만한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뱃전에 엎드려 장시간 일을 해야 하니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는 일도 허다하다. 물때를 맞추려면 잠조차 편히 잘 수 없다. 길어봐야 서너 시간의 토막잠을 자면서 겨우내 초인적인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어디 이뿐인가. 바닷물 온도와 일조량에 따라 매생이를 붙여 기르는 대나무 발의 수심도 맞춰줘야 하고 수확한 매생이도 일일이 씻어 출하해야 한다. 매생이 양식은 이렇듯 힘든 일이지만, 외지인의 눈에 매생이 양식장은 조형미 넘치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겨울 바다 위에 꽂아놓은 대나무 지주가 일정한 패턴의 추상미술 작품을 연상케 하는 까닭이다. 매생이 양식장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는 감동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게 고된 노동이기 때문이다. 신지도에서 장보고대교를 건너 연동리와 부곡리, 척찬리와 화성리로 이어지는 해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 하나의 섬이 가진 두 개의 이름
결론부터 말하자면 섬의 정식 명칭은 조약도다. ‘약산(藥山)’은 조약도에 있었던 학교 이름이다. 1922년 학교를 열면서 예로부터 섬에 약재가 많이 났다고 해서 약산이란 이름을 붙였다. 학교 이름으로 ‘조약’보다는 그편이 운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학교 이름이 지역명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학교가 섬의 중심이었으니 그리 된 것이다. 결국 약산은 조약도의 정식 행정구역인 면(面)의 이름이 돼버렸다. 대개 섬이 그 하나로 별도의 행정구역이 되면 섬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보통이다. 이를테면 이웃 섬 고금도는 고금면, 신지도는 신지면,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곳 조약도는 ‘완도군 조약면’이 아니라 ‘완도군 약산면’이 된 것이다. 그러니 외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몇 년째 섬에서 근무하는 면사무소 직원들까지 헷갈릴 수밖에…. # 그 섬에서 오래 꺼내볼 풍경을 만나다 조약도는 멀고 먼 남도 끝에 있는 외딴 섬이지만, 뜻밖에 섬은 대대로 조선 왕실의 소유였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돈을 내 백성을 사서 개간했다는 이유로 조약도를 가졌고, 그걸 선조의 딸 정명 공주에게 주면서 소유는 대를 이었다. 이후 고종 때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의 수라상에 오르는 쌀을 대는 땅이 됐다. 물산이 풍족한 것도, 기름진 옥토도 아닌 손바닥만 한 섬에서 왕실에다 수시로 조세를 바쳐야 했으니 섬사람들의 삶이 어땠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약도 사람들의 고초는 더했다. 일제 침략 후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으로 보낸 일제는 조약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삼았고, 한일병합 후에는 고종을 달래기 위해 조약도를 왕실에 양도하고 이 섬에서 거둔 조세로 왕실 경비를 충당했다. 그 뒤에도 일제는 왕실의 재정을 돕는다며 조약도를 숙명여대의 전신인 숙명여전 재단에 팔아넘기면서 주민들에게 ‘토지 경작을 계속하려면 땅값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이에 반발하자 주민들을 잡아다 두들겨 패고 주동자 10명을 옥에 가뒀다. 하는 수 없이 주민들은 땅값 3600냥을 거둬 주민대표 몇 사람이 그 돈을 들고 한양까지 걸어가서 총독부에 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객사한 주민도 있었다. 조약도의 강력한 매력은 단연코 산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산정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 풍경에 있다. 조약도의 다른 이름 약산에서 ‘약(藥)’이 아니라 ‘산(山)’에 방점이 찍힌다. 조약도는 작은 섬이지만 해발 400m에 육박하는 봉우리 셋을 거느린 삼문산이 있다. 삼문산 등산로의 시작은 죽선리. 여기서 정상 망봉을 거쳐 진달래공원과 가사리로 내려오는 코스는 4시간 남짓이 걸리고, 가사리에서 다시 공고지산과 당목항까지 길을 이으면 총 6시간쯤 소요된다. 능선을 걷는 내내 다도해의 기막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코스다. 산행이 부담스럽다면 진달래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5분 정도만 걸으면 당도하는 전망대에만 올라도 오래 마음에 담아두고 꺼내볼 수 있는 귀한 경관을 만날 수 있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완도는 다른 관광지와 달리 이렇다 할 식당을 찾기 어렵다. 전복이 유명하다는 건 알겠는데, 전복을 재료로 코스요리 등을 내면서 지나치게 비싼 값을 받는다는 게 문제다. 대부분의 식당이 이문이 좋은 전복요리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어 메뉴 선택의 폭도 넓지 않은 편이다. 4인분이라고 하지만 물회도 전복 등을 넣었다는 이유로 10만 원을 넘게 받는다. 완도의 숙소로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추천한다. 명사십리 해변 근처에 세련된 펜션과 숙소가 여럿 있다. 강진에는 곳곳에 남도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있다. 상 가득 차려 내는 음식의 맛도 좋지만, 비용 대비 만족도가 특히 좋다. 강진읍은 물론이거니와 병영면 일대에도 내로라하는 한정식집들이 늘어서 있다. 강진읍에만 해태식당(061-434-2486) 예향(061-433-5777) 청자골종가집(061-433-1100) 명동식당(061-433-2147) 다강한정식(061-433-3737) 등 한정식 식당들이 몰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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