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륙의 외딴 섬’. 강원 양구 땅을 흔히 그렇게 부릅니다. 접적지역의 긴장이 일상처럼 드리워진 양구는 오랫동안 소외된 땅이었습니다. 교통의 발달로 오지가 사라지면서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양구까지의 심리적 거리만큼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화천댐과 소양댐의 완공으로 양구로 들고나는 길이 지워져 버린 상처가 큰 탓이지요. 떠나는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적막한 도심에 활기를 불어넣는 건 지금으로서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대할 만한 건 양구가 지금 ‘산업화’ 대신 ‘문화’라는 무기를 빼 들었다는 것입니다. 시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되, 아직 성공의 길은 멉니다. 그곳에서 한 화가의 가난한 삶 위에다 건축이 씨를 심어서 틔워낸 싹을 봅니다. 박수근미술관. 그곳에서 양구의 희망을 봅니다. # 양구 33명 대(對) 서울 1만6861명 강원 양구는 소도시다. 양구 인구는 2만3000명 남짓. 이를 양구군 전체 면적으로 나누면 1㎢당 33명꼴이다. 우리나라 평균은 1㎢당 487명. 놀라지 마시라. 서울의 경우는 같은 면적에 자그마치 1만6861명이 산다. 양구 33명 대(對) 서울 1만6861명. 서울의 인구밀도는 양구의 511배다. 그러니 서울 사람에게 양구란 ‘인적없는 절간’이나 매한가지인 셈이다. 양구 입장에서야 적은 인구와 낮은 인구밀도가 고민이겠지만, 여행자 입장에서 소도시의 적막에 가까운 고즈넉함은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양구는 접적지역이다. 지금 양구에 사는 사람보다, 과거 전쟁통에 양구 땅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6·25 전쟁 당시 양구 주변 비무장지대(DMZ) 일원에서 벌어진 주요전투만 9개. 도솔산 전투, 피의 능선 전투, 펀치볼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등이 모두 양구 땅을 지나갔다. 전투에서 전사한 남북한군의 숫자가, 지금 양구 인구수의 10배가 넘는, 25만 명에 달했다. 대부분 꽃다운 나이의 젊은 청춘들이었다. 양구 최전방의 산 능선과 골짜기에서 222일 동안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의 비극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깊이 새겨진 접적지역의 소도시. DMZ와 민간인출입통제선, 군부대 주둔으로 인한 각종 규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곳. 소양댐이 세워지면서 양구는 춘천이나 홍천을 잇던 길마저 끊겨 절해고도와 같은 육지 속의 섬이 됐다. 양구는 이제 열악한 교통망으로 정부의 개발정책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낙후의 도시가 됐다. 성장의 동력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그저 군부대의 휴가병이나 면회객들이 떨어뜨리고 가는 몇 푼의 소비에나 기대고 지낼 따름이다. 게다가 겨울 추위는 또 얼마나 매서운가. 겉으로만 본다면, 지금 양구의 형편은 이렇다.
# 없는 게 없지만, 되는 곳도 없다 양구에서는 관광지 시설물의 종류를 거의 다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나는 것만 잠깐 간추려 봐도 이렇다. 전망대, 집트랙, 생태식물원, 야생동물생태관, 천문대, 전쟁기념관…. 손바닥만 한 소읍에 박물관만 해도 백자박물관, 인문학박물관, 근현대사박물관, 선사박물관까지 두루 갖췄다. 말하자면 ‘없는 게 없는’ 셈인데, 문제는 ‘이거다’ 싶은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양구는 일찌감치 관광에 눈을 떴다. 농토도 변변찮고 인구도 적은 접적지역의 소도시가 성장동력으로 삼을 만한 게 관광 말고는 없었던 탓이다. 시작은 안보 관광이었다. 군사분계선 너머로 북한군 진지가, 반대쪽으로는 ‘펀치볼’의 지형이 보이는 가칠봉 능선에 을지전망대를 세운 게 1988년 12월이다. 여기다가 1990년 인근에서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인 제4 땅굴이 관광객들에게 공개되면서 양구 해안면 일대는 대표적인 안보 관광지가 됐다. 안보관광이 사람들을 불러모으자 양구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에 손을 댔다. 곳곳에 박물관을 짓고, 식물원과 캠핑장을 들였다. 도보여행이 인기를 얻으면 걷는 길을 놓았고, 집트랙이 성공을 거뒀다면 집트랙을 놓았다. 콘텐츠가 턱없이 부족한데도 박물관을 자꾸만 지었다.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진본 그림 한 장 없이 문을 열었던 박수근미술관의 시작도 처음에는 이랬다. 남의 흉내나 내는 시설물이나 콘텐츠가 절대 부족한 박물관이 사람들을 끌어들일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자꾸만 짓고 문을 열었지만 정작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급기야 고심 끝에 양구는 새로운 가치를 들고나왔다. 이른바 ‘국토의 배꼽’이다. 한반도 동쪽 끝 독도와 서쪽 끝인 평안도의 섬 마안도를 잇는 가로 선을 긋고, 남쪽 끝 마라도와 북쪽 끝 함경북도 유포면을 세로 선으로 이은 뒤 이 두 선이 교차하는 곳이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 48번지’라며 양구가 우리 국토의 정중앙임을 선언했다. 이어 이를 기념하는 탑을 세우고, 천문대를 짓고, 파로호에 한반도 모양의 국내 최대 인공습지 섬을 조성해 전망대까지 만들었다.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작위적인 의미인 ‘국토의 중심’은, 강릉 ‘정동진’의 낭만적인 경관도 갖추지 못했고, 해남의 ‘땅끝마을’과 같은 비장감을 이끌어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 실패한 관광지, 키치와 B급 정서 역설적이지만 양구의 관광지에서는 성급한 의욕과 부족한 콘텐츠가 빚어내는 키치 문화와 B급 정서가 오히려 눈길을 끈다. 실패한 관광지들의 통속적이고 치기 어린 모습이 외려 독특하고 비주류적이며 개성적인 풍물이 된다는 것이다. 국토 정중앙에다 세운 독특한 모양의 휘모리 탑도 그렇고,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한반도 형상의 습지도 그렇다. 양구읍 중앙로 번화가의 ‘차 없는 거리’에 조선시대 해시계를 본떠 스무 배의 크기인 지름 4m, 높이 2m로 만든 앙부일구야말로 키치문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을 가리키는 영침에다 순금 2.3㎏을 발라 만든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비싼 해시계’로 세계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이게 과연 영광일까. 양구를 찾은 관광객 중 누가 그런 걸 보고 싶어 할까. 앙부일구는 거대한 위용과 호화스러움 대신 소박한 소읍의 황당한 과시욕, 혹은 콤플렉스와 안쓰러움으로 다가온다. 양구읍 파로호를 끼고 있는 근현대사박물관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지나간 접적지역에서 ‘근현대사’를 이름으로 걸고 있으니 적잖은 기대를 불러일으키지만, 정작 박물관에는 무미건조한 근대사 연표와 엽서 및 우표, 잡지 창간호 몇 권, 영화 포스터 몇 장이 고작이다. 여기다 국민학교 통지표, 풍금, 국수틀 등 잡동사니들이 두서없이 전시돼 있다. 전시품이 턱없이 빈약하다. 하지만, 이곳에선 세련된 전시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훈훈함 같은 것이 있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수집가가 평생 모은 손때묻은 소장품을 뒤지는 기분이랄까. 이런 곳들이 바로 ‘키치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만든 이들은 더 없이 진지하고, 그럴 의도가 전혀 없기에 더욱 그렇다.
# 땅에 새길 사람의 이름을 찾습니다 관광지 조성을 위해 닥치는 대로 기념 공간을 만들어낸 양구가 ‘사람’을 빠뜨릴 리 없다. 대표적인 양구 출신 명사라면 화가 박수근이 첫손에 꼽힌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뒤에서 하기로 하자. 이해인 수녀와 코미디언 고 배삼룡도 양구 태생이다. 이런 인연으로 양구군은 지난 2012년 ‘이해인 시문학관’을 열었다. 시문학관 개관 준비과정에서 실향민 출신 김형석·고 안병욱 교수 가족의 제안을 받아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인 두 교수의 애장품과 유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철학의 집’도 같은 지붕 아래 들여놓았다. 이해인 시문학관은 그러나 성베네딕도 수녀원과 이해인 수녀가 ‘평등한 수도자의 입장에서 개인적인 기념공간이 부담스럽다’고 요청하면서 2014년 이해인 수녀 관련 전시품이 치워지고 대신 한국 대표시인의 시를 내건 전시장이 됐고, 이듬해 아예 ‘인문학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양구 출신의 이해인 수녀는 물론이고, 이북 출신 학자까지 양구는 ‘제 사람’으로 품고, 시와 철학을 넘어 ‘인문학’으로 지평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 앞은 공무원과 향토 문인을 기리는 공적비로 어지럽고, 박물관 전시주제 등도 이름값을 하기에 멀었지만, 짓고 있는 강의동과 숙소가 마무리되고 상설 인문학강의가 열린다면 양구만의 독특한 자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양구의 ‘사람’에 대한 욕심은 군청 옆에 조성한 ‘박정희 전 대통령 사단장 공관’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양구군은 2009년 안보 관광지를 조성하겠다며 1955년 박 전 대통령이 육군 제5보병사단장 재직 중 기거했던 공관 건물을 복원하고 타던 구형 지프를 전시하는 기념관을 만들었다. 짧은 부임 기간에 머물던 공관까지 관광 자원화하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강박’까지 느껴진다. 관광지 조성은 실패였다. 올 상반기에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고작 하루 3명꼴. 양구군은 급기야 공관 문을 닫아걸었다. # 건물부터 짓고 본 미술관의 기적 양구에는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박수근이 태어나 자란 생가터에 세운 미술관이다. 양구에서 ‘꼭 봐야 할 곳’을 딱 한 곳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고백하자면 최근까지만 해도 박수근미술관은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할 곳’의 목록에 올려두고 있었다. 박수근미술관은 2002년 진본 그림 단 한 점도 없이 개관했다. 값비싼 유화 작품이야 그렇다 쳐도 드로잉이나 판화작품마저 한 점 없었다. 명색이 화가 이름을 딴 미술관을, 그가 그린 그림이 한 장 없이 문을 열었다는 얘기다. 화가의 이름을 단 미술관이 모작이나 복사본으로 관람객에게 그 화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건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는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자연스러운 건 이런 방식일 게다.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화가를 기리기 위해 애호가와 지역 주민들이 나서고, 후원자들이 생전에 남긴 작품을 구입해 기증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운동처럼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만들어지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박수근미술관은 관광지 개발이 필요한 관의 주도로 건물부터 지어졌다. 보여줄 콘텐츠는 없이 껍데기부터 만들어지는 이 같은 방식에서 십중팔구 실패가 예감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예감은 틀렸다. 기념관 건물 하나뿐이던 박수근미술관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까지 더해져 세 개의 독립된 공간으로 확대됐고, 수집과 기증을 통해 박수근 작품 203점과 관련 자료 178종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을 살려낸 공은 다양한 요소들이 나눠 가져야겠지만,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건축의 힘’이다. 박수근미술관의 건축이 특별한 것은 그 자체의 미감도 미감이지만,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를 우리가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를 건축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화가의 삶에 바친 건축가의 10년 박수근미술관은 2014년 작고한 건축가 이종호가 죽기 직전까지 10년이 넘도록 매달려 작업해 이룬 결과물이다. 박수근 그림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돌담벽을 세운 것도, 출입구를 후면에 배치해 길을 잃듯이 길게 돌아 들어가는 동선을 설계한 것도, 미술관 옆 자그마한 동산의 능선을 따라 무덤으로 이어지는 길의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낸 것도 모두 그의 솜씨다. 건축가의 솜씨는 미술관을 찾은 이들에게서 공간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애정이 다시 미술관을 아름답게 다듬었다. 이를테면 미술관을 찾은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미술관 뒤편으로 보이는 군인아파트의 경관을 가릴 수 있게 자작나무를 심어달라며 선뜻 기부를 했고, 이렇게 심어진 자작나무가 미술관의 경관을 더 빼어나게 만드는 식이다. 박수근미술관에서 박수근기념관과 함께 빼어난 건축미를 보여주는 것이 이종호의 유작이 된 박수근파빌리온이다. 애초에 관에서 건축가에게 주문한 것은 아무런 자취도 역사성도 없는 ‘생가복원’이었다. 건축가는 있지도 않은 생가 복원의 무의미함 대신 아틀리에와 전시실을 결합한 건축을 고집했고, 그 건축의 결과물이 박수근파빌리온이 됐다. 파빌리온은 세 개의 건물이 통로로 이어진 형태의 건축물인데 박수근이 가장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던 시절, 아틀리에이자 보금자리였던 창신동 집을 모티브로 삼았다. 박수근기념관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질감을 연상케 하는 석재로 벽을 쌓은 뒤 독특한 형태의 철망으로 감쌌다. 전시공간 2층에는 박수근의 아틀리에이자 보금자리였던 창신동 집이 설치작품으로 전시돼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 눈 덮인 빈 땅이지만, 다른 계절에는 피빌리온 주변에 심어진 청보리의 초록이 건축물과 어우러진다. # 그림 속의 나무와 마주 서다
미술관 내 박수근기념관에서는 화백이 생계를 잇기 위해서 잡지 등에 그렸던 삽화와 스케치를 모아 전시하는 ‘빛과 소금’ 전이 열리고 있다. 그중에는 1970년 박수근 유작전에 출품돼 소설가 박완서의 ‘나목’ 집필의 모티브가 됐던 작품으로 알려진 1956년 작 ‘나무와 여인’의 스케치 원작도 포함돼 있다. 미술관 내 현대미술관에서는 제1회 박수근 미술상 수상작가인 황재형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고, 박수근파빌리온에서는 음악과 디지털 영상을 함께 즐기는 미디어아트 전시 ‘반 고흐 인사이드’전이 개최되고 있다. 건축물의 미감과 다양한 전시를 감상하고 화가 박수근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양구까지 간 보람은 충분하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가족단위 여행이라면 양구군 남면 대암산 자락 아래 광치자연휴양림(033-482-3115)을 추천한다. 양구읍 파로호반에 양구 KCP호텔(033-482-7700)이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인증하는 비즈니스호텔급 체인브랜드인 ‘베니키아’ 가맹 호텔이다. 양구읍 중심에 센츄럴 모텔(033-481-2121)을 비롯해 몇 곳의 모텔이 있다. 양구의 특산물은 시래기다. 양구산 시래기로 다양한 요리를 내는 시래원(033-481-4200)은 양구에서 첫손으로 꼽히는 맛집이다. 시래기닭찜, 시래기정식 등을 맛볼 수 있다. 양구종합운동장 인근의 전주식당(033-481-7922)은 가마솥에 장작불로 만든 손두부와 두부전골로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집이다. 양구읍의 동문식당(033-481-1057)은 사골국물에다 콩물을 섞어 끓여내는 ‘콩탕’으로 이름났다. 콩탕은 콩비지와 비슷한데 담백하고 고소한 맛은 한수 위다. 여름에는 콩국수도 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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