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건, 가을이 늘 오래 붙들고 싶은 계절인 탓이겠지요. 가을이 이제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물기 직전, 오후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운 가을의 기운을 따라 남쪽으로 떠난 길입니다. 목적지로 삼은 곳은 낙동강. 강 이쪽에는 내버려 두어서 더 아름다워진 은행나무 숲이 있었고, 강 저쪽에는 옛사람의 정신이 새겨진 서원을 지키는 거목 은행나무가 있었습니다. 갈대와 억새가 눈부신 솜털로 빛나는 습지도, 기막힌 자리에 세워진 비각도 있었습니다. 낙동강에는 호국의 자취로 남은 서사의 풍경과, 저무는 가을 서정의 풍경이 있었습니다. 낙동강과 그 지류를 더듬으며 때로는 풍경을, 때로는 이야기를 앞세워 따라간 이야기들입니다. #비밀의 명소…낙동강 변 은행나무 숲 낙동강 변을 따라 은행나무가 도열한 숲이 있다. 경북 고령의 좌학리 은행나무 숲. 잘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호젓하기 이를 데 없는 가을의 명소다. 은행잎이 가장 늦게까지 물드는 그 숲은 지금 온통 노란 세상이다. 은행나무들이 내려놓는 샛노란 잎들이 억새꽃 환한 강변 습지와 아직 초록으로 반짝이는 풀을 이불처럼 덮고 있다. 좌학리 은행나무 숲이 보여주는 풍경은 특별하다. 우선 은행나무 단일수종으로 이뤄진 숲부터가 드물고, 은행나무가 강변을 끼고 서 있는 것도 흔한 경관은 아니다. 게다가 강변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억새와 갈대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보여준다.
이 숲에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나무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은행나무에서는 ‘야생의 냄새’가 난다. 여윈 나무둥치에서 어지럽게 잔가지가 뻗어 나간 수형(樹形)도 그렇지만, 무성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심은 자리’도 그렇다. 나무를 심으면서 키도, 줄도 맞추지 않았다. 은행나무 숲 사이 운치 있는 오솔길도 누가 일부러 낸 게 아니라, 숲을 찾은 이들의 발자국이 겹쳐져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좌학리 은행나무 숲도, 수변을 따라 들쭉날쭉한 키의 은행나무가 심어진 긴 가로수 길도 ‘의도된 계산’이 아니라 ‘무성의함’으로 방치되면서 얻어진 것이다. 하기야 정성을 다한답시고 오와 열을 맞춰 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치고 콘크리트를 들어부었더라면 오히려 조악한 공원에 불과했으리라. #도동서원 은행나무, 회연서원 느티나무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 고령의 좌학리 은행나무 숲이 있다면, 강 동쪽에는 도동서원 은행나무가 있다. 서원 문 앞에서 활개 치듯 가지를 뻗치고 수문장처럼 선 400년 수령의 거목 은행나무다. 한훤당 김굉필을 제향한 도동서원은 건축을 통해 성리학의 흐트러짐 없는 정신을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 곳. 서원에 모신 인물의 정신세계와 유학의 근원적인 담론을 건축과 경관으로 드러냈다는 얘기다. 도동서원에서는 돌로 쌓은 기단부터 서원 건물에 이르기까지 엄격히 적용된 좌우대칭과 품격을 느낄 수 있다는데, 은행나무 잎의 노란색이 너무 현란했기 때문일까. 대쪽 같은 선비의 푸른 기운보다는 팔레트에 넉넉히 짜놓은 물감 같은 진노랑의 아찔함이 더 강렬했다. 도동서원 은행나무의 단풍은 지난 주말 직전에 절정을 막 넘어섰다. 때 이른 한파 탓에 지금쯤 은행나무 잎이 다 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 그렇다 해도 아직 고목의 발치에 떨어진 은행잎이 주위를 온통 샛노랗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니 영 늦어버린 건 아니다. 김굉필은 위로는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 아래로는 정암 조광조의 학맥을 잇는다. 지역적으로는 인근 경북 성주를 근거지로 삼았던 한강 정구와도 학맥이 이어진다. 한강 정구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을 이어받은 대학자. 한강 정구의 학파 확장은 김굉필의 학문적 자양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니 내친김에 도동서원과 함께 낙동강 넘어 한강 정구를 모신 성주의 회연서원을 함께 찾아보는 것을 권한다. 도동서원을 지키는 게 풍성한 은행나무라면, 회연서원의 수문장은 성마른 느티나무다. 400년 된 느티나무가 낙엽을 다 떨군 이즈음 회연서원의 정갈한 아름다움은 가슴이 저릿하다. 단정한 서원의 경관 속에서 차고 맑은 선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떨어져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가을 끝까지 두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끔히 쓸어내는 통에 아쉬움이 있지만 말이다. #영호남을 아우른 대가야의 땅, 고령
대가야의 화려했던 영화는 역설적으로 가야의 왕들이 흙으로 되돌아간 무덤에서 되살아났다. 지산동 고분군의 가야시대 봉분은 1994년까지만 해도 158기 남짓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7년 전쯤 정밀 지표조사를 벌인 결과 2.4㎞의 고분군 구간에서 봉긋한 무덤 형태 고분만 714기가 확인됐다. 봉분이 없는 작은 무덤의 경우는 어찌나 수효가 많은지 아예 세기를 포기했다. 봉분과 작은 무덤을 모두 합친다면 자그마치 2만 기가 넘을 것으로 추산할 따름이다. 2만 명이 넘는 죽은 가야인들이 1500년 전의 영화를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가야사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취임 초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했던 것. 우리 고대사가 삼국 중심으로 쓰여 가야사 연구가 부진하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영호남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데서 착안한 지시였다. 지시에는 가야사 발굴이 곧 영호남 통합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묻어 있었다. 가야사 연구와 복원작업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추진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영호남 통합이란 함의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정책 우선순위에 오르지 못했고, 지원도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영호남 상생으로 고대 가야문화가 영원히 빛나길 기원합니다.’ 고분군 아래 대가야 박물관 기념비에 친필로 쓰인 이 전 대통령의 글씨는 정권을 넘어 가야사 재조명의 당위성을 드러내고 있다.
#옛 무덤에서 느끼는 가야인의 체온
지난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함께 묶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을 가보겠다면 되도록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지금 가면 코앞에서 1500년 전의 시간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령군은 지난 6월 CCTV 전선 매립을 위해 지산동 고분군 시굴작업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가야시대 무덤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당초 8월 중순쯤에 시굴작업을 끝내고 전선을 묻을 계획이었으나 삽을 대는 곳마다 무덤과 유물이 쏟아지는 통에 아직 작업의 절반도 못 끝낸 것이다. 시굴작업은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길옆에서 최소한의 통제 속에 이뤄지고 있다. 고분군을 거닐며 옛 가야시대의 무덤이 드러나는 발굴작업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시굴작업으로 발견된 가야시대 덧널무덤들은 거의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차곡차곡 쌓은 돌의 위치는 당시 가야인들이 올려놓았던 그대로다. 한쪽에서 토기가 쏟아져 나오는 무덤도 있다. 흙 속에 반쯤 묻혀 있는 토기의 물결 문양이 어찌나 섬세한지 가야시대의 것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발굴과정의 유물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기분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박물관의 전시 유리 너머로 만나는 유물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실재의 느낌이 생생하다. #서사의 나루와 서정의 물길
개경포는 고령의 개진면 개포리와 달성의 구지면 도동리를 이었다. 개경포는 본래 개산강이나 개산포로 불렸다. 개경포로 이름을 바꿔 달게 된 건 고려 시대 강화도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합천 해인사로 옮긴 이후다.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기기 위해 배가 강화도에서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 물길을 거슬러 올라와 마지막으로 닿은 포구가 바로 이곳 개경포였다. 경전을 옮긴 포구라고 해서 개산포에서 ‘뫼 산(山)’ 자를 떼고 ‘글 경(經)’ 자를 넣어서 개경포가 됐다. 포구에 내려진 대장경은 한 장 한 장 사람이 손수 들어서 해인사까지 옮겼다. 이를 기념해 조성한 개경포 공원에는 독경을 외우며 선두에 선 스님과 머리에 경판을 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화강암으로 조각돼 있다. 공원의 개경포 표석에 정확한 포구 위치를 ‘200m 떨어진 제방 끝 개산 아래’라고 써두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하기야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진 강에서 정확한 자리를 찾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령의 남쪽 끝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물길이 있다. 회천이다. 낙동강이 고령과 달성을 가른다면 회천의 물은 고령과 합천을 나눈다. 회천은 여느 강이나 하천과는 사뭇 다르다. 물 바닥에는 물길이 실어나른 모래가 가득하다. 흰 모랫바닥이 환히 비치는 물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이 물길을 따라 도로를 달리는 맛이 제법이다. 이 길을 달리다 보면 물 건너편 단풍 물든 직벽의 절묘한 자리에 기가 막히게 올려진 비각이 눈을 붙잡는다. 비각 안에는 임진왜란 때 피란 와 시를 짓고 거문고 타면서 울분을 달래다가 왜적에게 붙잡혀 순절한 월오 윤규의 비석이 있다. 회천의 물길 주변으로 진초록으로 반짝이는 마늘밭이 펼쳐진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회천은 대가천으로 이름을 바꿔 성주 회연서원과 이 서원의 주인 한강 정구가 노닐던 ‘무흘구곡’으로 이어진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대구에는 호텔이 곳곳에 있다. 고령과 멀지 않은 남쪽 달성군 쪽에 디종호텔(053-263-1515), 비즈니스호텔 유럽(053-615-4577), 호텔 아젤리아(053-610-5700) 등이 있다. 대구 도심으로 가면 호텔인터불고 대구와 노보텔앰배서더 대구를 비롯해 엘디스리젠트호텔, 호텔대구, 대구 그랜드호텔 등 수준급 숙소가 있다. 고령이나 성주는 숙소 사정이 열악한 편. 읍내에 몇 곳의 모텔이 있긴 하지만 추천하기가 주저된다. 대구 달성의 ‘교동면옥’(053-634-9222)은 육전을 고명으로 올리는 진주식 냉면을 내는 맛집이다. 유명세로 보자면 달성을 대표하는 건 현풍 곰탕이다. 현풍면 성하리 인근에는 원조 현풍할매집곰탕(053-614-2031) 등 곰탕집들이 몰려 있다. 현풍 5일 장날 맛볼 수 있는 수구레국밥은 취향에 따라 선호가 극명하게 갈리는데 신현대식당이 이름난 집이다. 수구레란 쇠가죽 바로 아래서 발라낸 질긴 부위를 일컫는다. 고령의 맛집으로는 시원한 복국을 끓여 내놓는 ‘월산복어’(054-956-8600)를 추천한다. 내륙 한복판에서 웬 해산물 맛집인가 싶지만, 인기메뉴인 해물찜도 좋고, 복국도 솜씨 좋게 끓여낸다. 성주의 맛집으로는 청국장을 내는 성주읍 ‘왜관식당’(054-932-9554)이 제법 이름난 곳. 성주 시외버스터미널 옆의 감골식당(054-931-3100)의 정식도 괜찮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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