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태백도 부러워한 천하의 주당 산간

醉月 2010. 9. 1. 08:52

술에 취해 거꾸러진 산공(醉倒山公)

술꾼 이백이 완전히 술에 취해 세상을 잊은 듯한 모습을 부러워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산간(山簡)이다. 이백은 그의 시에서 두 번이나 산간을 언급했는데, <추포가(秋浦歌)>제7수에서 “취하면 산공(山公)의 말을 타고(醉上山公馬)”라고 하였고, <양양곡(襄陽曲)>제2수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山公醉酒時(산공취주시), 산공이 술에 취했을 때,
酩酊高陽下(명정고양하). 고양지(高陽池) 아래에서 곤드레만드레 하여,
頭上白接䍦(두상백접리), 머리 위의 하얀 두건(백접리),
倒着還騎馬(도착환기마). 거꾸로 쓰고 말을 타고 돌아오다.

산간은 이백의 언급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듯 하지만, 사실 그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모습은 ≪세설신어․임탄(任誕)≫편에 나온다.

산계륜(山季倫: 산간의 자가 계륜)이 형주(荊州) 자사로 있을 때 항상 외출하면 질펀하게 술을 마셨기에 사람들이 이를 노래하였다. “산공이 때때로 한번 취하고 싶으면, 곧장 고양지로 간다네. 날 저물면 수레에 실려서 돌아오는데, 흠뻑 취해 정신이 없다네. 또 준마를 탈 수 있으면, 백접리를 뒤집어 쓰고서, 손을 들어 갈강에게 내가 너의 병주 사람과는 어떤가?라고 묻는다네.

(山公時一醉, 徑造高陽池, 日莫倒載歸, 茗艼無所知. 復能乘駿馬, 倒著白接䍦, 擧手問葛彊, 何如幷州兒?)” 고양지는 양양(襄陽)에 있고, 갈강은 그가 총애하는 장수로 병주(幷州) 사람이다.

이 고사는 ‘산간이 술에 취하다(山簡醉酒)’와 ‘술에 취해 거꾸러진 산공(醉倒山公)’이란 성어로 유명한데, ‘산공마(山公馬)’,‘산공명정(山公酩酊)’,‘산공도재(山公倒載)’,‘취주고양(醉酒高陽)’,‘고양음흥(高陽飮興)’,‘산간취(山簡醉)’,‘산옹취(山翁醉)’,‘습지음(習池飮)’,‘취습원(醉習園)’,‘고양지(高陽池)’ 등의 말이 있다.


이 산간(山簡)이란 사람은 곧 죽림칠현의 한 명인 산도(山濤)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부친의 풍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술마시는 것 또한 부친 못지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진서(晉書) 산간전(山簡傳)≫에 의하면 위에 인용한 고사가 바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술에 심취한 것이었으니,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살펴보자.

영가(永嘉)3년(309년)에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어 형주(荊州) 상주(湘州) 교주(交州) 광주(廣州) 등 네 곳의 군사와 거짓으로 절개를 보이는 것을 감독하며 양양(襄陽)에 머물렀다. 이때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 세상이 붕괴되었지만 왕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여 조야가 아주 두려워했다. 산간은 우물쭈물하며 한 해를 보내면서 오로지 술을 탐닉하였다.

습(習)씨는 형주땅의 호족으로 훌륭한 연못을 소유하고 있었고, 산간은 늘 외출하여 즐기면 그 연못으로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문득 취했는데, 그 연못의 이름을 고양지(高陽池)라고 불렀다.

당시에 아이들이 이를 노래하여 놀렸다. “산공이 때때로 한번 취하고 싶으면, 곧장 고양지로 간다네. 날 저물면 수레에 실려서 돌아오는데, 흠뻑 취해 정신이 없다네. 또 준마를 탈 수 있으면, 백접리를 뒤집어 쓰고서, 손을 들어 갈강에게 내가 너의 병주 사람과는 어떤가?라고 묻는다네.”

산간이 군사적인 지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술에 심취한 것은 아마도 나름대로 고민한 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가 고민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송대의 문학가이면서 정치가인 범중엄(范仲淹)도 <야색(野色)>에서 “…누가 알리오 산공의 뜻을, 높은 곳에 올라서 취해야 비로소 돌아오는 마음을.(誰會山公意, 登高醉始回)”이라고 했던 것이다.



≪진서(晉書)≫에서 기록한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자.

당시 유총(劉聰)이 칩입하여 경사가 아주 위급했다. 산간이 도호 왕만(王萬)에게 군사를 이끌고 난을 진압하게 하고, 열양(涅陽)에 이르러 완성(宛城)이 왕여(王如)에게 함락되어서 영성(嬰城)으로 가서 지켰다. 낙양이 함락되고 산간은 또 엄의(嚴嶷)에게 위협을 받아 하구(夏口: 지금의 호북성 武漢市)로 옮겼다. 유랑민을 받아들이니 면수(沔水)와 한수(漢水) 지역의 사람들이 귀순하였다.

당시 화일(華軼)이 강주(江州)에서 난을 일으키자 어떤 이가 산간에게 그를 토벌하라고 권했다. 산간은 “화일과는 옛 친구이니 마음이 아프다.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의 위기를 이용하여 전쟁의 공을 이루겠는가?”라고 말했다.

당시 왕여와 엄의는 면수와 한수 지역 난민의 영수이었지만 산도는 이들을 제압하기는 커녕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하구(夏口)까지 물러났다. 이후 왕의는 진동(鎭東)대장군 석륵(石勒)에게 투항하고, 엄의는 석륵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석륵은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결국 후조(後趙)를 건립한 인물이 되었다. 석륵과 비교해보면 정남장군이던 산간은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이는 위에서 인용한 유일(劉軼)과의 고사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듯 하다.

화일(華軼)은 유명한 위(魏)나라 유흠(劉歆)의 증손자로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난을 일으키자 전공보다는 우의를 중시하여 차마 그를 공격하지 못한 그였기에, 고양지(高陽池) 부근에 주둔했을 때에도 술에 취해 실려오거나 백접리를 거꾸로 쓰고 돌아오는 등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백을 위시하여 후대 문인의 감성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래서 후대 문인은 양양(襄陽·지금의 今湖北 襄樊市)에 이르면 당연히 산간을 연상되었던 것이다.

당대 두보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등양양성(登襄陽城)>, 피일휴(皮日休)의 <습지신기(習池晨起)>, 원대 장가구(張可久)의 <춘일호상(春日湖上)>에서 산간에 대해 읊었고, 당대 두보 역시 그의 시 <초동(初冬)> 등 많은 시에서 산간과 관련된 어구들을 이용하여 시를 지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