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같이 마신 친구가 죽은 것도 모른 ´삼일복야´

醉月 2010. 9. 8. 08:42
뛰어난 재기로 당대 풍미…진 원제에 독설도
진(晉)은 남흉노(南匈奴)의 침략으로 인해 민제(愍帝)가 포로가 되고 유민들이 장강을 건너 건강(建康·지금의 南京)에 도읍을 정했다. 이로써 진을 서진과 동진으로 나누어 부르는데, 이 교체기에 승상 왕도(王導)와 함께 진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를 보좌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주의(周顗)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풍류롭고 재기가 넘쳐서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었다. 그에겐 ‘삼일복야(三日僕射)’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 명칭이 제법 호기심을 자극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편≫을 보면, “주백인(周伯仁·伯仁은 주의의 字)은 풍모와 품격이 고상하고 중후하였고, 당시의 위태로운 상황을 깊이 인식했다. 강남으로 건너와서는 여러 해 동안 줄곧 미친 듯 술을 마셨는데, 3일 동안 술에 취해서 깨지 않았기에 당시 사람은 그를 ‘삼일복야(三日僕射)’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는 강남으로 내려온 뒤에 왜 ‘삼일복야’라고 불릴 만큼 술에 빠져 살았던 것일까? 위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의 정세가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을 알았다면 높은 관직에 임한 대신으로써 정사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 아닌가?

사실 이 사건은 그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있을 때의 일로, 그는 이 일로 인해 탄핵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이부상서는 이부의 장관을 말하는데, 이부는 관리의 선발과 승진해임, 과거시험과 교육을 주관하는 등의 업무를 관리한다.


‘삼일복야’와 전혀 관련이 없을지 몰라도 이를 어느 정도 추측해 볼만한 기록이 ≪세설신어, 방정(方正)편≫에 나온다. 진 원제가 정후(鄭后)를 총해하여 명제(明帝)를 버리고 간문제(簡文帝)를 간택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의론이 비등하였다. 특히 주의(周顗)와 왕도(王導)가 이를 시정해 줄 것을 강력히 권했지만 조현량(刁玄亮·현량은 刁協의 자)이 황제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결국 왕도(王導)의 지혜로 인해 이 안건은 폐기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주의가 부끄러워하면서 “내가 항상 왕도보다 뛰어나다고 말했지만 그보다 못한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하였다.

그는 강남으로 건너온 뒤에 항상 중원을 수복하고자 하는 포부를 지녔지만, 황제의 행실과 처세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이부상서의 중요한 업무를 시행하려고 해도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혹시 이러한 방식으로 대응한 것은 아닌지...

그는 위진남북조시대 명사가 보인 풍류스러운 면도 지녔지만 이 고사가 ≪세설신어≫의 <方正篇>에 실릴 정도로 방정(方正)한 일면도 있었던 것 같다.

<방정편>에 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한다. 한번은 진 원제가 여러 대신들과 서당(西堂)에서 잔치를 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노랫소리가 높아질 때 원제가 즐거워서 말했다.

“여러분, 오늘 명신들이 함께 모였으니 설령 요순시대라 하더라도 이와 같겠소?”

주의는 이때 상서좌복야였는데, 큰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비록 임금이 다스리는 것은 같다지만 어찌 성군이 다스리는 것과 같겠습니까?”

황제가 크게 노하여 내전으로 들어가 친히 조서를 꾸며 하옥시켜서 죽이라고 명했다.

며칠이 지난 다음 주의를 풀어주라고 조서를 내렸기에 여러 대신들이 그를 찾아와 안부를 물으니, 주의는 오히려 “나는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소. 죽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올곧은 면은 아마 집안내력이었던 것 같다. 그의 동생 주숭(周嵩)에 관한 고사도 ≪세설신어≫의 <方正篇>에 나온다. 당시 주의는 이부상서였고, 조협(刁協)은 상서령(尙書令)이었다. 그러니까 주의는 조협의 지휘를 받는 위치에 있는 셈이다. 어느날 주의가 크게 아팠다. 조협이 그를 극진히 간호하여 병세가 호전되었다.

다음날 주의의 동생 주숭(周嵩)에게 통보하자 주숭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조협이 침상 아래에서 울면서 주의의 위급했던 상황을 설명하였다. 주숭은 그를 손으로 밀치고 주의에게로 가서 병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형은 서진(西晉)에 있을 때 화교(和嶠)와 명성을 나란히 하더니만 어째서 아첨꾼인 조협과 우정을 쌓았소!”라고 말하고선 휑하니 나가버렸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란 참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어떤 단점을 발견하곤 아무리 고치려고해도 쉬 고쳐지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데, 희한한 것은 어느 순간 자신의 형제, 혹은 자식에게서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숭은 형 주의보다 더욱 방정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아주 급했던 모양이다.

한번은 주숭이 술에 취해 촛불을 주의에게 던지며 말했다. “너의 재주가 나보다 못하는데 어째서 나보다 높은 명성을 얻었지?” 이에 대해 주의가 평상시 같은 표정으로 “주숭아! 네가 화공(火攻)을 펼치는데, 이것이 바로 하책(下策)인 것이야!”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또한 위진(魏晉)시대 명사의 재치와 유머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유량(庾亮)이 주의의 집에 청담을 나누러 갔다. 주의가 “그대는 무슨 즐거운 일이 있기에 갑자기 살이 쪘소?”라고 물으니, “그대는 무슨 슬픈 일이 있기에 갑자기 야위었소?”라고 되물었다.

주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근심도 없이 정말로 깨끗하고 욕심없이 세월을 보내다보니 찌꺼기가 나날이 없어졌을 뿐이오”

참으로 멋스런 응수다. 그도 자신의 재기에 대해 자긍심을 지녔던 것 같다. 그가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있을 때, 유량(庾亮)이 주의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악광(樂廣·고사 ‘杯中蛇影’의 주인공)과 비교합니다”라고 말하자, 주의는 불쾌하여 “추녀 무염(無鹽)을 아름답게 그린다고 서시(西施)가 될까?”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유량과는 응수에 관한 고사가 또 있다. 상서(尙書) 기첨(紀瞻)이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기첨에겐 애첩이 있었는데 유행가(新歌)를 할 줄 알고 미모도 뛰어났다. 주의는 무리 속에 있다가 그 애첩을 안고 싶어서 마침내 옷을 벗기고 그녀를 추행하려고 하자 군중들이 그를 잡고 말렸다. 하지만 자신은 부끄러운 얼굴빛을 띠지 않았다.

유량이 “周侯(주의를 말함)는 말년에 봉덕(鳳德·사대부의 훌륭한 덕행을 말하지만 봉황(鳳凰)의 鳳은 수컷을 말하기에 여기서는 수컷의 능력에 비유함)이 쇠한 듯 합니다그려!”라고 하자, 주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만약 천리의 장강이라면 어찌 천리를 흐르는 중에 한번은 구부러지지 않겠소?”

이 대답 속에도 자신을 ‘천리의 장강’에 비유할 정도로 대단한 자긍심이 엿보인다. 참고로 주의가 보인 천박한 행위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성범죄행위와 다름없겠지만 이는 당시 위진시대의 많은 명사들이 예법에 구애되지 않는 방종한 모습을 드러낸 한 단면임을 알려드린다.

그는 재기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광릉(廣陵)의 대약사(戴若思·若思는 戴淵의 자)도 당시의 준재였지만 평소 주의의 명성을 동경하였다. 그래서 그 까닭을 알아보려고 그를 방문했다. 그런데 대약사는 끌어다놓은 보리자루마냥 앉아만 있다가 나오니, 다른 사람이 그에게 왜 말을 꺼내지도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의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어찌 나의 보잘 것 없는 재주를 빛내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나중에 난을 일으켜 주의를 죽인 왕돈(王敦) 또한 주의를 만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귓불이 붉어져서, 한겨울에도 손으로 부채질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하여튼 그가 괜히 ‘삼일복야’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진서(晉書), 주의열전≫권39에 의하면, 주의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서 기쁜 나머지 술 두 말을 함께 나누어 마시고 크게 취했다. 술에서 깨어나니 친구가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난 것을 보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술도 좋아했지만 또한 말술이었고, 말술이면서도 나름 위진명사의 풍모까지 갖췄던 모양이다. ≪세설신어, 방정편≫에 또한 고맹저(顧孟著·孟著는 顧顯의 자)가 주의에게 술을 권했지만 받지 않았다. 고맹저가 기둥으로 가서 기둥에게 말했다. “어찌 기둥으로 자처하시오?” 주의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그와 친구가 되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왕도의 사촌형 왕돈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의 죽음이 혹시 ‘삼일복야’에 대해서도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참고로 이 고사는 ‘백인이 나 때문에 죽었다(伯仁由我)’라는 말로 더욱 유명하다.

남흉노에게 쫓겨온 사마예는 명족 왕도(王導)의 활약에 힘입어 망명귀족과 강남호족의 지지를 모아 317년에 건강(建康)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을 세우게 된다. 그렇지만 혼란한 틈을 타서 승상 왕도의 사촌형 왕돈(王敦)이 322년에 유외(劉隗)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건강을 함락한 뒤 주의를 비롯하여 대연(戴淵), 조협(刁協)이 함께 죽임을 당하고, 유외(劉隗)는 석륵(石勒)에게로 도망가서 투항한다.

당시의 재상 왕도는 주의를 매우 신임하여 주의의 허벅지에 드러누워 주의의 커다란 배를 가리키며, “여기에 무엇이 들어 있소?”라고 하자, 주의가 “이 텅 빈 굴속에는 다른 것이 없소. 다만 당신 같은 사람은 몇 백 개를 넣을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이러한 친분을 유지했던 사이였는데, 왕돈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의는 ‘삼일복야’처럼 말을 아꼈다가 왕도의 오해를 사게 되어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왕돈(王敦)이 군대를 일으키자 유외(劉隗)가 원제에게 왕씨 일가를 모두 참살해야 한다고 권했고, 사공(司空) 왕도(王導)는 당제(堂弟) 왕수(王邃), 좌위장군 왕이(王廙), 시중 왕간(王侃), 왕빈(王彬)과 친족의 자제 20여명을 이끌고 매일 아침 조정에 가서 죄를 기다렸다. 마침 대궐로 들어오는 주의를 만났기에 주의를 불러 말했다. “백인! 우리 집안사람 수백 명의 목숨이 당신에게 달렸소!”

주의는 아예 그를 보지도 않고 곧장 조정으로 들어갔다. 주의가 조정에 들어온 뒤에 원제에게 왕도는 임금과 국가에 충성하는 신하니 결코 죽여서는 안된다고 간언하였다. 원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그도 매우 기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나서야 나왔다.

이때 왕도는 궁문 입구에 무릎을 꿇고서 죄를 기다리다가 주의가 나오는 것을 보고 주의의 이름을 불렀다. 주의는 여전히 그를 무시한 채 단지 좌우 시종에게 “지금 저 건강(建康)의 도적들을 말살해야 커다란 관직을 얻을 수 있소!”라고만 말했다.

궁궐을 나온 뒤에 주의는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왕도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런데 왕도는 주의가 자신을 구원한 사실을 몰랐기에 그를 매우 원망하였다.

왕돈이 건강을 점령한 뒤 주의를 죽이려고 할 때 족제 왕빈(王彬)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용서해주도록 간청했다. 왕돈도 주의가 당시의 양대 재자 중 한 사람인 것을 알았기에 그에게 작위를 주려고 하였다. 왕돈이 왕도에게 “주의와 대약사(戴若思)는 사람들이 존중하는 인물이니 마땅히 삼사(三司)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고 물었지만 왕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돈이 또 “삼사에 앉히지 못한다면 복야(僕射)로 삼는 것은 어떻소?”라고 물었지만 왕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왕돈이 “만약 그들을 기용할 수가 없다면 그들을 죽일 수 밖에 없소!”라고 말해도 왕도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주의와 대약사는 과연 체포되었고, 태묘(太廟)를 지날 때 주의가 큰소리로 말했다.

“천지에 선제(先帝)의 혼령이 있소. 적신(賊臣) 왕돈이 사직을 뒤엎고 충신을 함부로 죽이고 천하를 능멸하였소. 신령이 있다면 마땅히 왕돈을 죽일 것이니 왕돈의 집안은 곧 무너질 것이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좌우의 아전이 창으로 그의 입을 찌르자 피가 바닥에 가득 흘렀지만 주의는 안색을 전혀 바꾸지도 않고 태연자약하게 죽었으니 당시 나이가 54세였다.

왕도가 다시 정권을 장악한 뒤에 이전의 상소를 살펴보았다. 주의가 자기를 구하려고 올린 상소가 그 말이 아주 간절한 것을 보게 되었다. 왕도가 이 상소를 들고서 통곡하며 아주 슬퍼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아들들에게 말했다.

“내가 비록 백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백인은 나로 인해서 죽었다. 어리석어서 이 좋은 친구를 저버리게 되었구나!”

그가 왕도를 구하려고 했던 사실을 왜 끝까지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훗날에 와서도 화젯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송대 시덕조(施德操)의 ≪북창자과록(北窓炙輠錄)≫卷上에 이러한 글이 실려 있다. 유우석(劉禹錫)이 “백인이 왕도를 구명했고 그 일은 이미 해결되었는데, 함께 수레를 타고서 황제를 알현하여 구명하려고 했던 뜻을 알렸다면 어찌 살해되었을까요? 죽어도 말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뒤에 해를 당한 것입니다.”고 물었다.

시덕조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이것은 고인의 용심처(用心處)를 드러낸 까닭이오. 원제와 왕도(王導)를 어찌 다른 군신관계에 비교하겠소? 함께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고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 내었소. 지금 왕돈(王敦)이 마침내 이처럼 의심한 것을 군자가 매우 아쉬워한 것이오. 그러므로 백인이 왕도를 구하는 것은 모두 원제에게서 나오게 한 것이지 자신에게서 나오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오. 모든 군신(君臣)이 처음과 끝을 함께 한다는 의도를 가졌기에 백인의 어짊은 바로 이것에 있소.”

시덕조의 말은 주의에게 너무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 듯 하여 다소 억지스런 냄새도 난다. 사실 왕돈에게 잡혔을 때 그는 이미 어떠한 말로도 왕돈의 마음을 되돌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나아가 왕도가 “백인은 나로 인해 죽었다”고 한탄했지만 사실 그가 변호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삼일복야’... 그가 왜 술에 취해 깨고 싶지 않았는지, 그토록 응수에 뛰어난 그가 왜 입을 닫으려고 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혹여 이 고사가 주의가 술에 빠지고 입을 닫은 요인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마지막으로 소개하며 끝을 맺고자 한다.

강남을 건너온 사람들이 늘 좋은 날이면 새로 만든 정자(新亭)에 모여서 꽃을 감상하며 먹고 마시며 즐겼다. 주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탄식하여 말했다. “풍경은 다르지 않는데, 산하(山河)가 다르구먼!” 모두들 서로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왕도만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두들 왕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한다면 중원을 다시 수복할 수 있는데, 어찌 초(楚)땅에 갇힌 죄수처럼 여기는가?” 이리하여 모두들 눈물을 닦고 분발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