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한번 마시면 반드시 삼백 잔은 마셔야지.(會須一飮三百杯)”
이백하면 항상 술과 달이 떠오르는데, 술과 달의 이미지가 이백처럼 잘 결합되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의 낭만적인 성격과 호쾌한 기질, 시의 풍격 등이 이런 이미지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이백하면 으레 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론이 분분하지만, 이백이 술에 취해 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는 이백의 이미지를 제고시킨 결정판인데, 그는 결국 술에 취해 달속으로 승천한 것이다. 지금은 아마 달에서 토끼를 벗삼아 술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토끼눈이 빨간 것도 바로 이백의 술 때문인가?!
중국 사천성의 한 주류회사에서는 ‘시선태백주(詩仙太白酒)’를 만들어, 1959년에 전국술품평회에서 국경절10주년기념석상의 공식술로 지정되었고, 1984년에는 국가관광국에서 일본까지 수출하였다. 이 주류회사가 이백을 주요상표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니겠는가?
중국 시인 중 이백처럼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는 인물도 드물다. 일필휘지로 시를 단번에 써내는 천부적인 재능, 삼백 잔을 마셔야 시가 나오는 독특한 시작방법, 거칠 것이 없는 광방한 행동, 달을 무척이나 좋아한 성격 등등이 그를 신비한 인물로 만들었겠지만, 출생과 죽음에 대한 역사적인 의문, 확실치 않은 그의 생애 등등이 여러 가지 억측을 낳았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고사들이 나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우선 그의 이력을 보자.
이백은 어머니가 이백을 가졌을 때 ‘태백성(금성)’이 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기에, 아들의 자(字)를 ‘태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701년에 태어나 76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 唐은 현종(玄宗)의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인하여 최고의 번성기를 이뤘다가 안사의 난(安史의 亂:755년∼763년)을 겪은 시기였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백의 祖籍은 분명치 않은데, 유대걸(劉大杰)의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는 “이백의 조적은 감숙, 출생지는 서역, 자라난 곳은 사천, 오랑캐와 한족 사이의 혼혈아다. ……산동과 금릉은 모두 그가 중년에 잠시 거처한 곳이거나 혹은 그의 먼 조상의 관적일 것이다(李白的祖籍是甘肅, 生於西域, 長於四川, 是一個胡漢的混血兒.……至於山東金陵都是他中年寄寓之地, 或是他的遠祖的籍貫.)”라고 하였다.
또한 이양빙(李陽氷)의 <초당집서(草堂集序)>와 범전정(范傳正)의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唐左拾遺翰林學士李公新墓碑)>를 참고로 하면, 이백의 조상은 수(隋)나라 말기의 난을 피하여 서역 일대를 떠돌며 성과 이름을 감추고 살다가, 신룡(神龍:705년∼707년) 초기에 서촉(西蜀)의 광한(廣漢)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시기 이백의 부친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객(客)’이라고 불렸다.
이백의 생애는 대략 여섯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사천성 고향에 머물던 시기(701년∼724년). 둘째, 유랑과 안륙(安陸: 지금의 湖北省 安陸縣)에서의 결혼시기(724년∼730년). 셋째, 벼슬을 위한 유랑시기(730년∼742년). 넷째, 장안시기(742년∼744년). 다섯째, 두 번째 유랑시기(744년∼755년). 여섯째, 안사의 난으로 인한 유배와 세 번째 유랑시기(755년∼762년) 등이다.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시기. 22세 남짓할 때까지 고향에 있었던 이백은 “5세에 육갑을 외울 수 있었고, 10살에 제자백가의 서적을 읽어서 황제(黃帝)시기 이후의 일들을 제법 알게 되었으며, 항상 책을 보다가 아무렇게나 두고, 글을 지어도 싫증나지 않았다(五歲誦六甲, 十歲觀百家, 軒轅以來, 頗得聞矣. 常橫經籍書, 製作不倦.)”(<上安州裴長史書>)고 하였고, 15세에 “기이한 책들을 보았고, 부를 지으면 사마상여를 능가하였다.(十五觀奇書, 作賦凌相如.)”(<贈張鎬>)․“나이 열 다섯에 검술을 좋아하여 제후들 사이를 유세하였습니다.(十五好劍術, 徧於諸侯)”(<與韓荊州書>)․“나이 열 다서에 神仙을 배워, 신선처럼 노니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十五學神仙, 仙游未曾歇.)”고 하였다.
18세(혹은 16세라고 함)에 대광산(大匡山)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는데, 약 4년여에 걸쳐 산림생활을 맛보았으며,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도사를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재주(梓州: 지금의 四川省 三台縣)로 가서 <장단경(長短經)>을 쓴 종횡가(縱橫家) 조유(趙蕤)에게 1여년 동안 왕도와 패도의 통치술을 배웠다. 또한 당시의 저명한 문장가이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소정(蘇頲: 670년∼727년)을 만나, 그의 시부가 아직은 완전한 개성을 갖추지 못했지만 학습을 통해 보완하면 사마상여(司馬相如)에 비견할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둘째 시기. 724년에 친구 吳指南과 남쪽의 초(楚)땅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먼저 사천의 아미산(峨眉山), 성도(成都)부근, 평강강(平羌江), 청계(淸溪), 삼협(三峽)의 장강(長江)을 따라 유주(渝州: 지금의 사천성 重慶), 동정호(洞庭湖)(725년 친구 오지남은 동정호 부근에서 죽었음), 金陵(지금의 南京), 廣陵(지금의 揚州), 여매(汝梅), 운몽(雲夢)을 거쳐 안륙(安陸)의 수산(壽山)에 은거하였다. 26세에 이곳에서 고종(高宗) 때 재상이었던 허상공(許相公)의 손녀와 결혼하고, 장안으로 떠나던 730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무렵 이백의 시문이 제법 무르익었고(“三十成文章”(<與韓荊州書>), 맹호연(孟浩然:689년∼740년)을 만났다.
셋째 시기. 730년에 관직을 얻기 위해 장안으로 떠난다. 장안의 부근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였고, 장안에서 하지장(賀知章)을 만나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지만, 관직의 길은 아직도 요연하였다.
그리하여 실의로 인해 장안과 낙양(洛陽)을 오가며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731년에 황하를 따라 송성(宋城), 양원(梁園: 지금의 河南省 開封), 숭산(嵩山) 등지를 유람하며 친구를 만나고, 734년에는 양양(襄陽: 지금의 湖北省 襄樊)을 유람하였고, 735년에는 태원(太原)에서 곽자의(郭子儀)를 만났고, 숭산(嵩山)에서 은거하는 친구 원단구(元丹丘)를 만났다.
737년에 안륙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남쪽으로 안의(安宜: 지금의 江蘇省 寶應縣)를 거쳐 吳땅을 유람하고, 당도(當塗: 지금의 安徽省 當塗縣)까지 갔다가 돌아와, 이듬해 736년에 동로(東魯)로 이주하여 임성(任城: 지금의 山東省 濟寧)에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740년 한준(韓準)․배정(裴政)․공소부(孔巢父) 등을 사귀고, 다음해 장숙명(張叔明)․도면(陶沔) 등과 더불어 조래산(徂徠山)의 죽계(竹溪)에서 술과 시를 즐기며 놀았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죽계유일(竹溪六逸)’이라고 불렀다.
742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자녀들을 남릉(南陵: 安徽省 南陵縣)에 두고서 월(越)땅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도사 오균(吳筠)을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마침내 오균이 조서를 받고 상경하여 이백을 현종에게 추천하여, 마침내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넷째시기. 오균과 하지장의 추천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란 벼슬을 얻었고, 이 기간에 장안에서 하지장,이적지(李適之), 왕진(王璡),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晋), 장욱(張旭), 초수(焦遂) 등과 술과 시로써 어울리니, 이들이 곧 杜甫가 말한 ‘음주팔선인(飮酒八仙人)’이다. 이 3년의 기간동안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느니, 양귀비에게 묵을 갈게 하고 고력사에게 벼루를 들고 있게 했다는 등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장안에서의 생활과 현종의 총애․이백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당 천보(天寶)연간 봄, 어느날 당 현종 이융기와 애비 양귀비가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 가에서 모란을 감상하는데, 악사들이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도왔다.
막 몇 구절을 노래하는데 현종은 곧 손을 저어서 제지하며 “오늘 명화를 감상하는데, 귀비에게 어찌 옛날 노래를 들려주겠는가? 이학사(이백)를 빨리 궁으로 불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다시 노래하자꾸나!”라고 하였다.
고력사(高力士)가 급히 사람을 보내 한림원(翰林院)으로 가서 이백을 찾았지만 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장안 길가의 한 술집에서 그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술에 크게 취하여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의 귀에 대고 크게 “황제의 조서를 알리노라! 이학사는 흥경궁의 침향정으로 임금을 알현하도록 수레에 올라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에서 깨지 않아서, 몇 사람이 그를 말에 태워서 흥경궁(興慶宮)으로 싣고 왔다. 현종은 그가 떡이 되게 취한 것을 보고, 침향정가에 모포를 펼치라고 재빨리 명령을 내려서 이백을 쉬게 하고서, 친히 용포의 소매로 그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고, 친히 그에게 해장국을 떠먹여 주었다.
조금 지나자 이백이 깨어나서 눈을 뜨고 보니, 현종이 눈앞에 서 있어서 황급히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인사를 드렸다.
현종은 죄를 묻지 않고 다정하게 그에게 말했다. “오늘 모란이 만발하여, 짐이 애비와 함께 감상하여 즐기는데 옛날 가락은 듣고 싶지 않으니, 새로운 노래를 지으려고 자네를 불러온 것이네.” 이백이 머리로 땅을 치고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현종에게 먼저 자신에게 술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현종은 이해할 수 없어서 “너는 막 술에서 깨었는데 어찌 술을 마시려고 하는가? 다시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이일을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백은 답하여 “신은 한말의 술로 시 백편을 쓰고, 취한 뒤에는 시흥이 샘물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현종은 다만 사람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에게 술을 내렸고, 이백은 연거푸 몇 잔을 마시고 천천히 술에 취하여 마침내 흥에 겨워 붓을 놀려서, 마침내 세 수의 유명한 <淸平調>를 곧장 완성하였다.
두보가 <飮酒八仙人>에서 “이백은 한 말의 술에 시 백편, 장안의 저잣거리 술집에서 잔다네. 황제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저는 酒中仙이오’라고 하네.(李白斗酒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라고 표현하였는데, 아마도 이 고사를 중심으로 이백의 기질을 읊었던 것 같다.
두보는 안사의 난 중에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을 배알하여 관직이라도 얻으려고 가다가 반군에 포로가 되어 다시 장안에 연금되었으며, 나중에 봉상(鳳翔)으로 가서 숙종을 배알하고 좌습유를 받지만 이마저도 약 5개월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러한 두보의 입장에서는 생각하면, 이백의 기질과 재능이 얼마나 부러웠겠는가?
다섯째 시기.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동로(東魯) 태주(兗州: 지금의 河北省과 山東省 일대)에 집을 마련하고, 梁園(지금의 河南省 開封)을 중심으로 산동성,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호북성, 호남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를 유람하였다. 이시기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고적(高適)과 양원에서 노닐기도 했다.
또한 749년 무렵에 금릉에 머물며 강남 지방을 유람했는데, 이무렵 네 번째 아내로 그와 말년을 같이 한 종(宗)씨를 맞아들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엔 남쪽의 역양(歷陽: 지금의 安徽省 和縣), 선성(宣城), 추포(秋浦: 安徽省 貴池縣) 등지를 유람하였다.
여섯째 시기.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할 때, 이백은 금릉에 있었고, 당 현종이 난을 피하여 촉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백도 여산(廬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무렵 현종의 여섯째 아들인 영왕(永王) 린(璘)이 현종에게 산남(山南)․강서(江西)․영남(嶺南)․검중(黔中) 절도사로 임명되어, 병사 수만을 이끌고 강릉(江陵)에 머물렀는데, 이때 이백은 李璘의 막료가 되었다.
李璘은 肅宗의 명령을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高適이 이끄는 관군을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하고 李璘을 살해하였다. 이백 역시 반역죄를 받아 심양(尋陽: 지금의 江西省 九江市)의 옥에 갇힌다. 결국 최환(崔渙)․송약사(宋若思)의 노력과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여 야랑(夜郞: 지금의 貴州省 石阡縣)으로 유배당한다.
그리하여 동정호․삼협․무산을 지나는데, 758년에 사면을 받아 일년반에 걸친 유배생활을 마쳤다. 이후 강남일대를 유람하였고, 762년에 당도(當塗)의 현령 이양빙(李陽氷)에게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임종할 때 만권의 초고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이백을 접할 때, 얼핏 이백이 자신의 천재성과 호방한 기질만을 믿고, 술에 빠져 산 것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백의 생애를 다시 한번 보라.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띌 것이다.
첫째는 젊었을 때의 많은 독서와 시작(詩作)연습이다.
둘째는 관직에 나간 기간이 겨우 3∼4년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중국의 곳곳을 유람하며,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임종할 당시 그가 남긴 초고가 만권에 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는데, 그가 거칠것없는 행동으로 하늘을 찌르고 땅을 내달리는 듯이 시를 지은 것은 바로 많은 독서가 바탕이 되었고, 넓은 중국을 유람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백은 약 99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대시인 이백의 입지를 지켜주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천재성을 지니고, 호방한 행동으로써 사람들에 회자되는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한들 시인으로서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한다면 술주정꾼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분명 이백의 등장은 당시의 잔잔한 시단에 물결을 일으키는 한 마리 용이었을 것이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시명이 있던 하지장이 그를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고 하였고, 두보도 이백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백의 등장은 분명 하늘에서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세상에 나설 충분한 준비를 하고서 각지를 유람하며 자신의 명성을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백은 이러한 효과를 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玄宗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唐代)의 과거시험은 현종 때에 이미 시행되었지만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추천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에는 제법 과거시험이 정착되면서 가난한 집안의 자재들이 진사를 통하여 등용되어 힘을 발휘하게 되지만 말이다.
또한 시나 문장 속에서 자주 접하는 ‘민첩(敏捷)’이란 용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현종 때에 과거시험이 정착되지 않았지만 시문으로 관리를 뽑았기에 사인계층은 항상 시문을 공부하였고, 술자리에서 주령(酒令) 등을 통하여 자신의 작시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韻’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시를 지었을 때, 바로 ‘민첩’이란 것이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람의 재능을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백에게 있어 천재적인 재능에다가 습작을 하고서, 나아가 제자백가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해박하게 독서를 하는 등 사회에 나설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쳤기에, 여러 사람과 마음껏 교제를 하는 것이 관직에 나가는 하나의 첩경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백은 도사 吳筠의 추천을 받아 현종을 알현하기도 했지만, 하지장이 그의 <촉도난(蜀道難)>을 읽고서, 감탄한 나머지 ‘天上謫仙人’이란 별칭을 지어주고, 자신이 차고 있던 황금거북이(金龜)를 풀어서 술을 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어쨌든 이백의 시를 읽으면, 거칠 것이 없는 호쾌한 가운데 절묘한 싯구가 사람을 매료시킨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삼백잔을 마시고 시를 읊기에, 이백은 고체시와 악부 등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시에서 그의 재기를 드러내었고, 또한 짧은 절구(絶句)에 절묘한 시가 많다.
그러므로 이백의 음주에 관련된 시 또한 이백의 장기와 재기를 충분히 감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백의 시 천 여수 중에 음주에 관련된 수가 170여수 정도가 된다고 하니, 이 역시 이백과 술을 분리시켜 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호쾌한 모습, 달을 노래하는 모습, 친구와의 우정, 자유로움을 추구한 산속 생활 등으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호쾌하고 스케일이 큰 것이 이백 시의 매력이다. 도사나 신선을 좋아했던 자유로운 기질에다가 젊었을 때의 독서로 인하여 옛날의 전설이나 옛 사람의 고사를 적절하게 운용하였는데, 인위적인 모습이란 절대 보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워, 역시 이백시답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먼저 권주가라고 할 수 있는, 장진주(將進酒)를 보자.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복회). 내달려서 바다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고대광실에선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하지만,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에 금방 세는 것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는 모름지기 즐겨야하거늘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달을 마주하고서는 황금 술통 헛되이 두지마라.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고;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양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술 권하노니 잔 멈추지 말고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그대에게 노래 한곡 부를 테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그대여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나 주게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고상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 귀할 것도 없고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지 않기를!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하지만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오로지 술꾼만이 그 이름 남겼다네.
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 그 옛날 진사왕 曹植은 평락관 연회에서,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하게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주인양반 어찌 돈이 모자란다 하시오,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곧 술 사다가 함께 마시리.
五花馬․千金裘(오화마천금구)! 털이 아름다운 명마․천냥의 가죽옷!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좋은 술과 바꿔오게나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천고의 명시라는 이 한편의 시에 이백의 기질이 모두 드러난다.
구절구절이 명구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만고의 시름을 잊어보는 것이다. 만고의 시름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래와 방패로도 막을 수 없다는 세월, 인생무상이다.
‘君不見’으로 연결된 구절이 두 개가 들어있다. 첫구절의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내 달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은 뒷 구절의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고대광실에선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하지만,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에 금방 세는 것을!”로 들어가기 위해, 내세운 이백의 천부적인 재능이 드러난 구절이다.
이 시가 첫 구절을 생략하고 두 번째 구절부터 시작되었다해도 웬만한 시인의 시상(詩想)으로서는 나무랄 것이 없지만 역시 스케일도 작고 이백답지 않다.
첫 구절은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에 대해 ‘黃河’와 ‘天上’을 빌어서 설명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의 물도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써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세월이란 한번 가면 오지 않는데, 하찮은 인간에게 있어 세월의 흐름을 어찌 하겠는가?
그 다음구절부터는 이백의 낭만적이고 호쾌한 성격이 드러난다.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는 모름지기 즐겨야하거늘, 달을 마주하고서는 황금 술통 헛되이 두지마라.”,“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고,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양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그 옛날 진사왕 曹植은 평락관 연회에서,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하게 즐겼다네.”,“털이 아름다운 명마, 천냥의 가죽옷! 아이 불러 좋은 술과 바꿔오게나.”
참으로 거칠 것이 없고,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이 시에서 ‘人生得意’한 일이 뭐겠는가? 바로 당시 736년 무렵 숭산(嵩山)에 은거하는 친구 元丹丘와 岑勛을 만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기(知己)를 만났으니, 손에 쥔 돈이 없으면 또 어떤가?
이백에게 이런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타고 온 명마와 입고 있던 귀한 옷을 맡기고 술을 받아오면 되었다. 협객의 기질이 있었던 이백으로서는 지음(知音)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나, 형가(荊軻)와 고점리(高漸離)의 고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원래 보통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하고, 좋은 친구가 찾아오면 술을 대접하고, 더욱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차를 대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백에게 있어 차보다는 술에 취하는 것이 더욱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고상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 귀할 것도 없고,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지 않기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친구를 대하는 모습이 이러할진대, 이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재능이 아까와서, 혹은 지음으로써 대하던 이백의 진심을 알기에 너도나도 그를 구원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백은 괜찮은 삶을 살고 간 것이다. 우리는 일생동안 지기를 한명도 얻기가 어려운데......
다시 <襄陽歌>를 보자.
落日欲沒峴山西(낙일욕몰현산서), 해는 현산 서쪽으로 넘어 가려는데,
倒著接䍦花下迷(도저접리화하미). 흰 모자 거꾸로 쓰고 꽃 아래 방황하네.
襄陽小兒齊拍手(양양소아제박수), 양양의 어린이들 나란히 손뼉치고,
攔街爭唱白銅鞮(난가쟁창백동제). 거리를 막고 ‘백동제’란 동요를 다투어 노래하네.
傍人借問笑何事(방인차문소하사), 옆 사람에게 무슨 일로 웃는가 물어보니,
笑殺山公醉如泥(소살산공취여이). 山簡이 질펀하게 취한 모숩이 생각나 웃겨 죽겠다네.
鸕鷀杓,鸚鵡杯(노자표, 앵무배), 가마우지모양의 술국자,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육천일), 백년은 삼만육천일,
一日須傾三百杯(일일수경삼백배).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셔야지.
遙看漢水鴨頭綠(요간한수압두록), 멀리 보이는 漢水는 청동오리의 머리처럼 푸른데,
恰似葡萄初醱醅(흡사포도초발배). 마치 포도주가 막 익을 때와 같구나.
此江若變作春酒(차강약변작춘주), 이 강물이 변해서 봄술이 된다면,
壘麴便築糟丘臺(누국편축조구대). 누룩이 쌓여서 술지게미누대가 되리라.
千金駿馬換小妾(천금준마환소첩), 천금의 준마를 소첩과 바꾸고,
笑坐雕鞍歌落梅(소좌조안가락매). 화려하게 안장에 미소띄고 앉아서 <落梅>를 노래하리.
車傍側掛一壺酒(차방측괘일호주), 수레 옆에는 술 한병 매달고,
鳳笙龍管行相催(봉생룡관행상최). 봉황을 새긴 생황과 용을 새긴 피리로 서로 재촉하네.
咸陽市中歎黃犬(함양시중탄황견), 함양의 저잣거리에서 李斯 부자를 탄식하는 것이,
何如月下傾金罍(하여월하경금뢰). 달 아래서 황금 술잔을 기우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晋朝羊公一片石(진조양공일편석), 진나라 羊公의 墮淚碑는,
龜頭剥落生莓苔(구두박락생매태). 비석의 거북머리는 떨어져 나가고 이끼가 낀 것을!
淚亦不能爲之堕(누역불능위지타), 눈물 역시 양공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고,
心亦不能爲之哀(심역불능위지애). 마음 역시 양공을 위해 슬퍼할 수 없다.
清風朗月不用一錢買(청풍랑월불용일전매), 청풍명월을 가지는데는 한푼의 돈도 들지 않고,
玉山自倒非人推(옥산자도배인추). 玉山이 저절로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밀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舒州杓,力士鐺(서주표, 역사당), 서주의 술국자, 역사가 겨우 들던 술그릇.
李白與爾同死生(이백여이동사생). 이백은 이것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
襄王雲雨今安在(양왕운우금안재), 양왕이 함께 노닐던 雲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江水東流猿夜聲(강수동류원야성). 장강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니, 원숭이가 밤중에 우는구나.
이 시는 양양(襄陽: 지금의 湖北省 陽樊市)를 지나면서, 역사적인 인물인 ‘죽림칠현’의 하나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에 얽힌 ‘倒著白接䍦’의 노랫말, 하(夏)나라를 망친 桀王이 주지육림으로 매일같이 잔치를 했음으로 술지게미가 쌓여 누대가 되었다는 고사,
위(魏)나라 조창(曹彰)이 준마가 탐이 났으나 말 주인이 팔려고 하지 않자 자신의 소첩과 바꾸었다는 고사, 진(秦)의 수도인 함양의 저잣거리 이사가 죽기전에 아들을 향해 “다시 한번 너와 함께 黃犬을 끌고서 고향의 교외에서 토끼사냥을 해보았으며 좋겠다”고 한 고사, 진(晉)의 양호(羊祜)가 양양을 잘 다스려 민심을 얻고서 죽자, 백성들이 양호가 놀던 현산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을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고 하여 ‘墮淚碑’라고 했다는 고사, 진(晉)대 혜강(嵇康)은 술에 취해 쓰러지는 것이 마치 옥산같았다는 고사, 초(楚)양왕이 운몽에서 무산의 신녀와 즐겼다는 운우에 얽힌 고사 등등을 인용하였는데, 결국 이 또한 만고의 시름을 잊고, 지금을 즐기자는 또 다른 권주가인 셈이다.
이속에서도 그는 “백년은 삼만육천일,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셔야지.…이 강물이 변해서 봄술이 된다면, 누룩이 쌓여서 술지게미누대가 되리라.”라고 하여, 인생을 넉넉히 백년으로 계산하고서 평생 술을 마시면 끝없는 장강의 술로 인해 그 옆에는 당연히 술지게미 누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인데,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스케일이다.
그러면 도대체 평생 몇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백은 “舒州의 술국자, 역사가 겨우 들던 술그릇. 이백은 이것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연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한 <양원음(梁園吟)>을 지었다. 양원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漢)대 양효왕(梁孝王)의 정원으로, 이백이 이 정원을 유람하면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이 시속에서도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관하면 어찌 근심할 여가가 있겠는가? 다만 좋은 술을 마시고 높은 누대에 오르는 것만이 있을 뿐.……옛 사람은 信陵君을 호걸로써 귀하게 여겼지만, 지금 사람은 신릉군의 무덤에 밭을 가네. 황폐해진 성벽에는 푸른 산위에 뜬 달만이 공허하게 비추고, 고목은 순임금이 돌아가신 창오산 위에 뜬 구름 속으로 들어갔네.
양왕의 궁궐은 지금 어디에 있나? 매승과 사마상여가 먼저 죽었지만 기다리지 않을텐데. 춤추는 모습과 노랫소리만이 맑은 연못 위에서 흩어지고, 텅빈 변수만이 동쪽 바다로 흘러든다.(……人生達命豈暇愁, 且飮美酒登高樓.……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 荒城虛照碧山月, 古木盡入蒼梧雲. 梁王宮闕今安在, 枚馬先歸不相待. 舞影歌聲散淥池, 空餘汴水東流海.)”고 하였다.
여기까지 조금 정성들여서 읽은 사람이라면 <장진주>,<양양가>,<양원음>에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江水東流’,‘汴水東流海’ 등이 공통으로 들어가는 점을 알아챘을 것이다. 인생사 ‘一場春夢’으로, 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만고의 시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득의한 일을 얻거나 만들어서 술에 취해 인생을 즐기자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시간이 아까우니, “밤을 밝혀 놀아야 한다(秉燭夜游)”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한 ‘江水東流’는 훗날 송대 소식(蘇軾)이 <염노교(念奴嬌)>(赤壁懷古)의 첫구절에서 “장강은 동쪽으로 흐르네, 파도속에 천고의 풍류로운 인물들을 다 집어 삼키고(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라고 표현하여 유명해졌으며, ‘大江東去’는 “세월의 흐름이나 인생무상”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훗날 장한수(張恨水)의 소설 제목과 매염방(梅艶芳)의 노래 제목이 되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식 또한 이백의 싯구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염노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식 또한 “옛 땅에서 혼백으로 노니는 다정한 이여(이미 죽은 자신의 부인을 말함) 마땅히 나를 비웃겠지, 일찍 머리 셌다고! 인생이란 꿈만 같은 것! 한잔 술을 들어 강에 비친 달에게 바친다(故國神遊․多情應笑我, 早生華髮. 人生如夢! 一尊還酹江月.)”라고 하지 않았던가!
천하의 이백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과 인생무상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늙어감을 아쉬워하기가 평범한 우리네들과 같겠는가? ‘재주를 가진 사람은 때를 만나기가 어렵다(懷才不愚)’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세상을 한탄하는 경우가 우리네들하고 같겠는가?
천재나 총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재주만을 믿기에 경박함으로 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고, 아울러 포부가 크지만 이룬 성과물이 많은 경우가 드물다. 술은 뜨거운 성질을 가졌기에 사람의 기질을 사납게 만든다. 그렇기에 총명한 사람이라면 더욱 술을 마실 때 가벼운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며, 옛 사람의 말을 빌린다면 독서로써 이를 보강해야 한다.
세상에 눈꼽만큼의 손해도 없으며, 오로지 이익만이 있는 것이 독서라고 했다. 책 한 쪽을 읽으면 한 쪽만큼, 하루를 읽으면 하루만큼 이로움이 있지 않은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일로써 자신을 보강할 일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하는 이백도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만큼 많은 시를 남겼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는 지금 어떤가? 어떻게 해야 할까?
[참고]: 그의 호쾌함을 알 수 있는 시로는 <여산의 노래를 侍御 盧虛舟에게 부침(廬山謠寄盧侍御虛舟)>/<꿈에 天姥와 노닐다가 시를 지어 이별선물을 대신함(夢游天姥吟留別)>/<집안 숙부 형부시랑 李曄과 중서사인 賈至를 모시고 동정호에서 놂(陪族叔刑部侍郞曄及中書賈舍人至游同庭)>第二 등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론이 분분하지만, 이백이 술에 취해 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는 이백의 이미지를 제고시킨 결정판인데, 그는 결국 술에 취해 달속으로 승천한 것이다. 지금은 아마 달에서 토끼를 벗삼아 술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토끼눈이 빨간 것도 바로 이백의 술 때문인가?!
중국 사천성의 한 주류회사에서는 ‘시선태백주(詩仙太白酒)’를 만들어, 1959년에 전국술품평회에서 국경절10주년기념석상의 공식술로 지정되었고, 1984년에는 국가관광국에서 일본까지 수출하였다. 이 주류회사가 이백을 주요상표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니겠는가?
중국 시인 중 이백처럼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는 인물도 드물다. 일필휘지로 시를 단번에 써내는 천부적인 재능, 삼백 잔을 마셔야 시가 나오는 독특한 시작방법, 거칠 것이 없는 광방한 행동, 달을 무척이나 좋아한 성격 등등이 그를 신비한 인물로 만들었겠지만, 출생과 죽음에 대한 역사적인 의문, 확실치 않은 그의 생애 등등이 여러 가지 억측을 낳았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고사들이 나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우선 그의 이력을 보자.
이백은 어머니가 이백을 가졌을 때 ‘태백성(금성)’이 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기에, 아들의 자(字)를 ‘태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701년에 태어나 76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 唐은 현종(玄宗)의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인하여 최고의 번성기를 이뤘다가 안사의 난(安史의 亂:755년∼763년)을 겪은 시기였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백의 祖籍은 분명치 않은데, 유대걸(劉大杰)의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는 “이백의 조적은 감숙, 출생지는 서역, 자라난 곳은 사천, 오랑캐와 한족 사이의 혼혈아다. ……산동과 금릉은 모두 그가 중년에 잠시 거처한 곳이거나 혹은 그의 먼 조상의 관적일 것이다(李白的祖籍是甘肅, 生於西域, 長於四川, 是一個胡漢的混血兒.……至於山東金陵都是他中年寄寓之地, 或是他的遠祖的籍貫.)”라고 하였다.
또한 이양빙(李陽氷)의 <초당집서(草堂集序)>와 범전정(范傳正)의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唐左拾遺翰林學士李公新墓碑)>를 참고로 하면, 이백의 조상은 수(隋)나라 말기의 난을 피하여 서역 일대를 떠돌며 성과 이름을 감추고 살다가, 신룡(神龍:705년∼707년) 초기에 서촉(西蜀)의 광한(廣漢)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시기 이백의 부친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객(客)’이라고 불렸다.
이백의 생애는 대략 여섯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사천성 고향에 머물던 시기(701년∼724년). 둘째, 유랑과 안륙(安陸: 지금의 湖北省 安陸縣)에서의 결혼시기(724년∼730년). 셋째, 벼슬을 위한 유랑시기(730년∼742년). 넷째, 장안시기(742년∼744년). 다섯째, 두 번째 유랑시기(744년∼755년). 여섯째, 안사의 난으로 인한 유배와 세 번째 유랑시기(755년∼762년) 등이다.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시기. 22세 남짓할 때까지 고향에 있었던 이백은 “5세에 육갑을 외울 수 있었고, 10살에 제자백가의 서적을 읽어서 황제(黃帝)시기 이후의 일들을 제법 알게 되었으며, 항상 책을 보다가 아무렇게나 두고, 글을 지어도 싫증나지 않았다(五歲誦六甲, 十歲觀百家, 軒轅以來, 頗得聞矣. 常橫經籍書, 製作不倦.)”(<上安州裴長史書>)고 하였고, 15세에 “기이한 책들을 보았고, 부를 지으면 사마상여를 능가하였다.(十五觀奇書, 作賦凌相如.)”(<贈張鎬>)․“나이 열 다섯에 검술을 좋아하여 제후들 사이를 유세하였습니다.(十五好劍術, 徧於諸侯)”(<與韓荊州書>)․“나이 열 다서에 神仙을 배워, 신선처럼 노니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十五學神仙, 仙游未曾歇.)”고 하였다.
18세(혹은 16세라고 함)에 대광산(大匡山)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는데, 약 4년여에 걸쳐 산림생활을 맛보았으며,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도사를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재주(梓州: 지금의 四川省 三台縣)로 가서 <장단경(長短經)>을 쓴 종횡가(縱橫家) 조유(趙蕤)에게 1여년 동안 왕도와 패도의 통치술을 배웠다. 또한 당시의 저명한 문장가이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소정(蘇頲: 670년∼727년)을 만나, 그의 시부가 아직은 완전한 개성을 갖추지 못했지만 학습을 통해 보완하면 사마상여(司馬相如)에 비견할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둘째 시기. 724년에 친구 吳指南과 남쪽의 초(楚)땅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먼저 사천의 아미산(峨眉山), 성도(成都)부근, 평강강(平羌江), 청계(淸溪), 삼협(三峽)의 장강(長江)을 따라 유주(渝州: 지금의 사천성 重慶), 동정호(洞庭湖)(725년 친구 오지남은 동정호 부근에서 죽었음), 金陵(지금의 南京), 廣陵(지금의 揚州), 여매(汝梅), 운몽(雲夢)을 거쳐 안륙(安陸)의 수산(壽山)에 은거하였다. 26세에 이곳에서 고종(高宗) 때 재상이었던 허상공(許相公)의 손녀와 결혼하고, 장안으로 떠나던 730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무렵 이백의 시문이 제법 무르익었고(“三十成文章”(<與韓荊州書>), 맹호연(孟浩然:689년∼740년)을 만났다.
셋째 시기. 730년에 관직을 얻기 위해 장안으로 떠난다. 장안의 부근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였고, 장안에서 하지장(賀知章)을 만나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지만, 관직의 길은 아직도 요연하였다.
그리하여 실의로 인해 장안과 낙양(洛陽)을 오가며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731년에 황하를 따라 송성(宋城), 양원(梁園: 지금의 河南省 開封), 숭산(嵩山) 등지를 유람하며 친구를 만나고, 734년에는 양양(襄陽: 지금의 湖北省 襄樊)을 유람하였고, 735년에는 태원(太原)에서 곽자의(郭子儀)를 만났고, 숭산(嵩山)에서 은거하는 친구 원단구(元丹丘)를 만났다.
737년에 안륙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남쪽으로 안의(安宜: 지금의 江蘇省 寶應縣)를 거쳐 吳땅을 유람하고, 당도(當塗: 지금의 安徽省 當塗縣)까지 갔다가 돌아와, 이듬해 736년에 동로(東魯)로 이주하여 임성(任城: 지금의 山東省 濟寧)에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740년 한준(韓準)․배정(裴政)․공소부(孔巢父) 등을 사귀고, 다음해 장숙명(張叔明)․도면(陶沔) 등과 더불어 조래산(徂徠山)의 죽계(竹溪)에서 술과 시를 즐기며 놀았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죽계유일(竹溪六逸)’이라고 불렀다.
742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자녀들을 남릉(南陵: 安徽省 南陵縣)에 두고서 월(越)땅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도사 오균(吳筠)을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마침내 오균이 조서를 받고 상경하여 이백을 현종에게 추천하여, 마침내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넷째시기. 오균과 하지장의 추천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란 벼슬을 얻었고, 이 기간에 장안에서 하지장,이적지(李適之), 왕진(王璡),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晋), 장욱(張旭), 초수(焦遂) 등과 술과 시로써 어울리니, 이들이 곧 杜甫가 말한 ‘음주팔선인(飮酒八仙人)’이다. 이 3년의 기간동안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느니, 양귀비에게 묵을 갈게 하고 고력사에게 벼루를 들고 있게 했다는 등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장안에서의 생활과 현종의 총애․이백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당 천보(天寶)연간 봄, 어느날 당 현종 이융기와 애비 양귀비가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 가에서 모란을 감상하는데, 악사들이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도왔다.
막 몇 구절을 노래하는데 현종은 곧 손을 저어서 제지하며 “오늘 명화를 감상하는데, 귀비에게 어찌 옛날 노래를 들려주겠는가? 이학사(이백)를 빨리 궁으로 불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다시 노래하자꾸나!”라고 하였다.
고력사(高力士)가 급히 사람을 보내 한림원(翰林院)으로 가서 이백을 찾았지만 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장안 길가의 한 술집에서 그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술에 크게 취하여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의 귀에 대고 크게 “황제의 조서를 알리노라! 이학사는 흥경궁의 침향정으로 임금을 알현하도록 수레에 올라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에서 깨지 않아서, 몇 사람이 그를 말에 태워서 흥경궁(興慶宮)으로 싣고 왔다. 현종은 그가 떡이 되게 취한 것을 보고, 침향정가에 모포를 펼치라고 재빨리 명령을 내려서 이백을 쉬게 하고서, 친히 용포의 소매로 그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고, 친히 그에게 해장국을 떠먹여 주었다.
조금 지나자 이백이 깨어나서 눈을 뜨고 보니, 현종이 눈앞에 서 있어서 황급히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인사를 드렸다.
현종은 죄를 묻지 않고 다정하게 그에게 말했다. “오늘 모란이 만발하여, 짐이 애비와 함께 감상하여 즐기는데 옛날 가락은 듣고 싶지 않으니, 새로운 노래를 지으려고 자네를 불러온 것이네.” 이백이 머리로 땅을 치고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현종에게 먼저 자신에게 술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현종은 이해할 수 없어서 “너는 막 술에서 깨었는데 어찌 술을 마시려고 하는가? 다시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이일을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백은 답하여 “신은 한말의 술로 시 백편을 쓰고, 취한 뒤에는 시흥이 샘물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현종은 다만 사람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에게 술을 내렸고, 이백은 연거푸 몇 잔을 마시고 천천히 술에 취하여 마침내 흥에 겨워 붓을 놀려서, 마침내 세 수의 유명한 <淸平調>를 곧장 완성하였다.
두보가 <飮酒八仙人>에서 “이백은 한 말의 술에 시 백편, 장안의 저잣거리 술집에서 잔다네. 황제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저는 酒中仙이오’라고 하네.(李白斗酒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라고 표현하였는데, 아마도 이 고사를 중심으로 이백의 기질을 읊었던 것 같다.
두보는 안사의 난 중에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을 배알하여 관직이라도 얻으려고 가다가 반군에 포로가 되어 다시 장안에 연금되었으며, 나중에 봉상(鳳翔)으로 가서 숙종을 배알하고 좌습유를 받지만 이마저도 약 5개월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러한 두보의 입장에서는 생각하면, 이백의 기질과 재능이 얼마나 부러웠겠는가?
다섯째 시기.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동로(東魯) 태주(兗州: 지금의 河北省과 山東省 일대)에 집을 마련하고, 梁園(지금의 河南省 開封)을 중심으로 산동성,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호북성, 호남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를 유람하였다. 이시기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고적(高適)과 양원에서 노닐기도 했다.
또한 749년 무렵에 금릉에 머물며 강남 지방을 유람했는데, 이무렵 네 번째 아내로 그와 말년을 같이 한 종(宗)씨를 맞아들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엔 남쪽의 역양(歷陽: 지금의 安徽省 和縣), 선성(宣城), 추포(秋浦: 安徽省 貴池縣) 등지를 유람하였다.
여섯째 시기.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할 때, 이백은 금릉에 있었고, 당 현종이 난을 피하여 촉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백도 여산(廬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무렵 현종의 여섯째 아들인 영왕(永王) 린(璘)이 현종에게 산남(山南)․강서(江西)․영남(嶺南)․검중(黔中) 절도사로 임명되어, 병사 수만을 이끌고 강릉(江陵)에 머물렀는데, 이때 이백은 李璘의 막료가 되었다.
李璘은 肅宗의 명령을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高適이 이끄는 관군을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하고 李璘을 살해하였다. 이백 역시 반역죄를 받아 심양(尋陽: 지금의 江西省 九江市)의 옥에 갇힌다. 결국 최환(崔渙)․송약사(宋若思)의 노력과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여 야랑(夜郞: 지금의 貴州省 石阡縣)으로 유배당한다.
그리하여 동정호․삼협․무산을 지나는데, 758년에 사면을 받아 일년반에 걸친 유배생활을 마쳤다. 이후 강남일대를 유람하였고, 762년에 당도(當塗)의 현령 이양빙(李陽氷)에게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임종할 때 만권의 초고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이백을 접할 때, 얼핏 이백이 자신의 천재성과 호방한 기질만을 믿고, 술에 빠져 산 것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백의 생애를 다시 한번 보라.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띌 것이다.
첫째는 젊었을 때의 많은 독서와 시작(詩作)연습이다.
둘째는 관직에 나간 기간이 겨우 3∼4년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중국의 곳곳을 유람하며,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임종할 당시 그가 남긴 초고가 만권에 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는데, 그가 거칠것없는 행동으로 하늘을 찌르고 땅을 내달리는 듯이 시를 지은 것은 바로 많은 독서가 바탕이 되었고, 넓은 중국을 유람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백은 약 99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대시인 이백의 입지를 지켜주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천재성을 지니고, 호방한 행동으로써 사람들에 회자되는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한들 시인으로서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한다면 술주정꾼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분명 이백의 등장은 당시의 잔잔한 시단에 물결을 일으키는 한 마리 용이었을 것이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시명이 있던 하지장이 그를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고 하였고, 두보도 이백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백의 등장은 분명 하늘에서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세상에 나설 충분한 준비를 하고서 각지를 유람하며 자신의 명성을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백은 이러한 효과를 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玄宗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唐代)의 과거시험은 현종 때에 이미 시행되었지만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추천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에는 제법 과거시험이 정착되면서 가난한 집안의 자재들이 진사를 통하여 등용되어 힘을 발휘하게 되지만 말이다.
또한 시나 문장 속에서 자주 접하는 ‘민첩(敏捷)’이란 용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현종 때에 과거시험이 정착되지 않았지만 시문으로 관리를 뽑았기에 사인계층은 항상 시문을 공부하였고, 술자리에서 주령(酒令) 등을 통하여 자신의 작시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韻’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시를 지었을 때, 바로 ‘민첩’이란 것이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람의 재능을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백에게 있어 천재적인 재능에다가 습작을 하고서, 나아가 제자백가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해박하게 독서를 하는 등 사회에 나설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쳤기에, 여러 사람과 마음껏 교제를 하는 것이 관직에 나가는 하나의 첩경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백은 도사 吳筠의 추천을 받아 현종을 알현하기도 했지만, 하지장이 그의 <촉도난(蜀道難)>을 읽고서, 감탄한 나머지 ‘天上謫仙人’이란 별칭을 지어주고, 자신이 차고 있던 황금거북이(金龜)를 풀어서 술을 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어쨌든 이백의 시를 읽으면, 거칠 것이 없는 호쾌한 가운데 절묘한 싯구가 사람을 매료시킨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삼백잔을 마시고 시를 읊기에, 이백은 고체시와 악부 등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시에서 그의 재기를 드러내었고, 또한 짧은 절구(絶句)에 절묘한 시가 많다.
그러므로 이백의 음주에 관련된 시 또한 이백의 장기와 재기를 충분히 감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백의 시 천 여수 중에 음주에 관련된 수가 170여수 정도가 된다고 하니, 이 역시 이백과 술을 분리시켜 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호쾌한 모습, 달을 노래하는 모습, 친구와의 우정, 자유로움을 추구한 산속 생활 등으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호쾌하고 스케일이 큰 것이 이백 시의 매력이다. 도사나 신선을 좋아했던 자유로운 기질에다가 젊었을 때의 독서로 인하여 옛날의 전설이나 옛 사람의 고사를 적절하게 운용하였는데, 인위적인 모습이란 절대 보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워, 역시 이백시답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먼저 권주가라고 할 수 있는, 장진주(將進酒)를 보자.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복회). 내달려서 바다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고대광실에선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하지만,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에 금방 세는 것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는 모름지기 즐겨야하거늘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달을 마주하고서는 황금 술통 헛되이 두지마라.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고;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양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술 권하노니 잔 멈추지 말고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그대에게 노래 한곡 부를 테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그대여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나 주게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고상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 귀할 것도 없고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지 않기를!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하지만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오로지 술꾼만이 그 이름 남겼다네.
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 그 옛날 진사왕 曹植은 평락관 연회에서,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하게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주인양반 어찌 돈이 모자란다 하시오,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곧 술 사다가 함께 마시리.
五花馬․千金裘(오화마천금구)! 털이 아름다운 명마․천냥의 가죽옷!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좋은 술과 바꿔오게나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천고의 명시라는 이 한편의 시에 이백의 기질이 모두 드러난다.
구절구절이 명구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만고의 시름을 잊어보는 것이다. 만고의 시름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래와 방패로도 막을 수 없다는 세월, 인생무상이다.
‘君不見’으로 연결된 구절이 두 개가 들어있다. 첫구절의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내 달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은 뒷 구절의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고대광실에선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하지만,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에 금방 세는 것을!”로 들어가기 위해, 내세운 이백의 천부적인 재능이 드러난 구절이다.
이 시가 첫 구절을 생략하고 두 번째 구절부터 시작되었다해도 웬만한 시인의 시상(詩想)으로서는 나무랄 것이 없지만 역시 스케일도 작고 이백답지 않다.
첫 구절은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에 대해 ‘黃河’와 ‘天上’을 빌어서 설명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의 물도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써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세월이란 한번 가면 오지 않는데, 하찮은 인간에게 있어 세월의 흐름을 어찌 하겠는가?
그 다음구절부터는 이백의 낭만적이고 호쾌한 성격이 드러난다.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는 모름지기 즐겨야하거늘, 달을 마주하고서는 황금 술통 헛되이 두지마라.”,“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고,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양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그 옛날 진사왕 曹植은 평락관 연회에서,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하게 즐겼다네.”,“털이 아름다운 명마, 천냥의 가죽옷! 아이 불러 좋은 술과 바꿔오게나.”
참으로 거칠 것이 없고,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이 시에서 ‘人生得意’한 일이 뭐겠는가? 바로 당시 736년 무렵 숭산(嵩山)에 은거하는 친구 元丹丘와 岑勛을 만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기(知己)를 만났으니, 손에 쥔 돈이 없으면 또 어떤가?
이백에게 이런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타고 온 명마와 입고 있던 귀한 옷을 맡기고 술을 받아오면 되었다. 협객의 기질이 있었던 이백으로서는 지음(知音)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나, 형가(荊軻)와 고점리(高漸離)의 고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원래 보통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하고, 좋은 친구가 찾아오면 술을 대접하고, 더욱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차를 대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백에게 있어 차보다는 술에 취하는 것이 더욱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고상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 귀할 것도 없고,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지 않기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친구를 대하는 모습이 이러할진대, 이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재능이 아까와서, 혹은 지음으로써 대하던 이백의 진심을 알기에 너도나도 그를 구원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백은 괜찮은 삶을 살고 간 것이다. 우리는 일생동안 지기를 한명도 얻기가 어려운데......
다시 <襄陽歌>를 보자.
落日欲沒峴山西(낙일욕몰현산서), 해는 현산 서쪽으로 넘어 가려는데,
倒著接䍦花下迷(도저접리화하미). 흰 모자 거꾸로 쓰고 꽃 아래 방황하네.
襄陽小兒齊拍手(양양소아제박수), 양양의 어린이들 나란히 손뼉치고,
攔街爭唱白銅鞮(난가쟁창백동제). 거리를 막고 ‘백동제’란 동요를 다투어 노래하네.
傍人借問笑何事(방인차문소하사), 옆 사람에게 무슨 일로 웃는가 물어보니,
笑殺山公醉如泥(소살산공취여이). 山簡이 질펀하게 취한 모숩이 생각나 웃겨 죽겠다네.
鸕鷀杓,鸚鵡杯(노자표, 앵무배), 가마우지모양의 술국자,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육천일), 백년은 삼만육천일,
一日須傾三百杯(일일수경삼백배).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셔야지.
遙看漢水鴨頭綠(요간한수압두록), 멀리 보이는 漢水는 청동오리의 머리처럼 푸른데,
恰似葡萄初醱醅(흡사포도초발배). 마치 포도주가 막 익을 때와 같구나.
此江若變作春酒(차강약변작춘주), 이 강물이 변해서 봄술이 된다면,
壘麴便築糟丘臺(누국편축조구대). 누룩이 쌓여서 술지게미누대가 되리라.
千金駿馬換小妾(천금준마환소첩), 천금의 준마를 소첩과 바꾸고,
笑坐雕鞍歌落梅(소좌조안가락매). 화려하게 안장에 미소띄고 앉아서 <落梅>를 노래하리.
車傍側掛一壺酒(차방측괘일호주), 수레 옆에는 술 한병 매달고,
鳳笙龍管行相催(봉생룡관행상최). 봉황을 새긴 생황과 용을 새긴 피리로 서로 재촉하네.
咸陽市中歎黃犬(함양시중탄황견), 함양의 저잣거리에서 李斯 부자를 탄식하는 것이,
何如月下傾金罍(하여월하경금뢰). 달 아래서 황금 술잔을 기우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晋朝羊公一片石(진조양공일편석), 진나라 羊公의 墮淚碑는,
龜頭剥落生莓苔(구두박락생매태). 비석의 거북머리는 떨어져 나가고 이끼가 낀 것을!
淚亦不能爲之堕(누역불능위지타), 눈물 역시 양공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고,
心亦不能爲之哀(심역불능위지애). 마음 역시 양공을 위해 슬퍼할 수 없다.
清風朗月不用一錢買(청풍랑월불용일전매), 청풍명월을 가지는데는 한푼의 돈도 들지 않고,
玉山自倒非人推(옥산자도배인추). 玉山이 저절로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밀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舒州杓,力士鐺(서주표, 역사당), 서주의 술국자, 역사가 겨우 들던 술그릇.
李白與爾同死生(이백여이동사생). 이백은 이것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
襄王雲雨今安在(양왕운우금안재), 양왕이 함께 노닐던 雲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江水東流猿夜聲(강수동류원야성). 장강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니, 원숭이가 밤중에 우는구나.
이 시는 양양(襄陽: 지금의 湖北省 陽樊市)를 지나면서, 역사적인 인물인 ‘죽림칠현’의 하나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에 얽힌 ‘倒著白接䍦’의 노랫말, 하(夏)나라를 망친 桀王이 주지육림으로 매일같이 잔치를 했음으로 술지게미가 쌓여 누대가 되었다는 고사,
위(魏)나라 조창(曹彰)이 준마가 탐이 났으나 말 주인이 팔려고 하지 않자 자신의 소첩과 바꾸었다는 고사, 진(秦)의 수도인 함양의 저잣거리 이사가 죽기전에 아들을 향해 “다시 한번 너와 함께 黃犬을 끌고서 고향의 교외에서 토끼사냥을 해보았으며 좋겠다”고 한 고사, 진(晉)의 양호(羊祜)가 양양을 잘 다스려 민심을 얻고서 죽자, 백성들이 양호가 놀던 현산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을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고 하여 ‘墮淚碑’라고 했다는 고사, 진(晉)대 혜강(嵇康)은 술에 취해 쓰러지는 것이 마치 옥산같았다는 고사, 초(楚)양왕이 운몽에서 무산의 신녀와 즐겼다는 운우에 얽힌 고사 등등을 인용하였는데, 결국 이 또한 만고의 시름을 잊고, 지금을 즐기자는 또 다른 권주가인 셈이다.
이속에서도 그는 “백년은 삼만육천일,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셔야지.…이 강물이 변해서 봄술이 된다면, 누룩이 쌓여서 술지게미누대가 되리라.”라고 하여, 인생을 넉넉히 백년으로 계산하고서 평생 술을 마시면 끝없는 장강의 술로 인해 그 옆에는 당연히 술지게미 누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인데,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스케일이다.
그러면 도대체 평생 몇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백은 “舒州의 술국자, 역사가 겨우 들던 술그릇. 이백은 이것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연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한 <양원음(梁園吟)>을 지었다. 양원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漢)대 양효왕(梁孝王)의 정원으로, 이백이 이 정원을 유람하면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이 시속에서도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관하면 어찌 근심할 여가가 있겠는가? 다만 좋은 술을 마시고 높은 누대에 오르는 것만이 있을 뿐.……옛 사람은 信陵君을 호걸로써 귀하게 여겼지만, 지금 사람은 신릉군의 무덤에 밭을 가네. 황폐해진 성벽에는 푸른 산위에 뜬 달만이 공허하게 비추고, 고목은 순임금이 돌아가신 창오산 위에 뜬 구름 속으로 들어갔네.
양왕의 궁궐은 지금 어디에 있나? 매승과 사마상여가 먼저 죽었지만 기다리지 않을텐데. 춤추는 모습과 노랫소리만이 맑은 연못 위에서 흩어지고, 텅빈 변수만이 동쪽 바다로 흘러든다.(……人生達命豈暇愁, 且飮美酒登高樓.……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 荒城虛照碧山月, 古木盡入蒼梧雲. 梁王宮闕今安在, 枚馬先歸不相待. 舞影歌聲散淥池, 空餘汴水東流海.)”고 하였다.
여기까지 조금 정성들여서 읽은 사람이라면 <장진주>,<양양가>,<양원음>에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江水東流’,‘汴水東流海’ 등이 공통으로 들어가는 점을 알아챘을 것이다. 인생사 ‘一場春夢’으로, 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만고의 시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득의한 일을 얻거나 만들어서 술에 취해 인생을 즐기자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시간이 아까우니, “밤을 밝혀 놀아야 한다(秉燭夜游)”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한 ‘江水東流’는 훗날 송대 소식(蘇軾)이 <염노교(念奴嬌)>(赤壁懷古)의 첫구절에서 “장강은 동쪽으로 흐르네, 파도속에 천고의 풍류로운 인물들을 다 집어 삼키고(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라고 표현하여 유명해졌으며, ‘大江東去’는 “세월의 흐름이나 인생무상”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훗날 장한수(張恨水)의 소설 제목과 매염방(梅艶芳)의 노래 제목이 되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식 또한 이백의 싯구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염노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식 또한 “옛 땅에서 혼백으로 노니는 다정한 이여(이미 죽은 자신의 부인을 말함) 마땅히 나를 비웃겠지, 일찍 머리 셌다고! 인생이란 꿈만 같은 것! 한잔 술을 들어 강에 비친 달에게 바친다(故國神遊․多情應笑我, 早生華髮. 人生如夢! 一尊還酹江月.)”라고 하지 않았던가!
천하의 이백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과 인생무상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늙어감을 아쉬워하기가 평범한 우리네들과 같겠는가? ‘재주를 가진 사람은 때를 만나기가 어렵다(懷才不愚)’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세상을 한탄하는 경우가 우리네들하고 같겠는가?
천재나 총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재주만을 믿기에 경박함으로 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고, 아울러 포부가 크지만 이룬 성과물이 많은 경우가 드물다. 술은 뜨거운 성질을 가졌기에 사람의 기질을 사납게 만든다. 그렇기에 총명한 사람이라면 더욱 술을 마실 때 가벼운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며, 옛 사람의 말을 빌린다면 독서로써 이를 보강해야 한다.
세상에 눈꼽만큼의 손해도 없으며, 오로지 이익만이 있는 것이 독서라고 했다. 책 한 쪽을 읽으면 한 쪽만큼, 하루를 읽으면 하루만큼 이로움이 있지 않은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일로써 자신을 보강할 일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하는 이백도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만큼 많은 시를 남겼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는 지금 어떤가? 어떻게 해야 할까?
[참고]: 그의 호쾌함을 알 수 있는 시로는 <여산의 노래를 侍御 盧虛舟에게 부침(廬山謠寄盧侍御虛舟)>/<꿈에 天姥와 노닐다가 시를 지어 이별선물을 대신함(夢游天姥吟留別)>/<집안 숙부 형부시랑 李曄과 중서사인 賈至를 모시고 동정호에서 놂(陪族叔刑部侍郞曄及中書賈舍人至游同庭)>第二 등
술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고...
먼 타향의 나그네가 되었을 때, 환하게 비쳐오는 달빛은 어떤 느낌인가? 특히 중추절에 달빛은 환하고, 날씨는 서늘해지기 시작하는데, 멀리서 귀뚜라미까지 울어대면, 사람의 감정이란 더욱 처량하고 쓸쓸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 술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명대 오빈(吳彬)은 술마시기 좋을 때를 “봄날 교외에서 천지에 제사지낼 때, 꽃이 필 때, 맑은 가을날, 신록이 질 때, 비가 갤 때, 눈이 쌓일 때, 새 달이 떴을 때, 저녁이 서늘할 때”라고 하였다. 이것을 참고로 한다면 거의 봄과 가을철이 술마시기에 적당할 때다. 그런데 필자의 경우를 보면 굳이 달이 없더라도 봄보다는 가을이 더 제격이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고, 골목에서 풍겨오는 어묵냄새나 매콤한 구이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눈앞에는 포장마차가 반기고 있는데, 그냥 지나간다? 그래 지나가야지... 암∼, 그냥 지나쳐야지. 앞에서 말한 독서라는 말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그냥 집으로 향해야지...?!
각설하고, 이백은 24세에 고향을 떠나 잠시 안륙(安陸)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정착하고 생을 꾸린 적이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이런 그가, 특히 타고난 감성을 지닌 그가 달을 보면 술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필자도 2004년 무렵 중추절날 북경에서 달을 봤다. 한국에서 보던 달과 달리 너무 컸고, 정말 쟁반처럼 환한 비치는 달 속에 절구질하고 있는 토끼를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그 달을 보는 순간 이백이 생각났고, 그래서 그런지 차갑다는 느낌 속에 정감이 느껴져서, 옆에 있던 딸과 아들에게 저 달의 느낌이 찬지, 따뜻한지를 물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애들의 말은 정확했다. 차갑단다....
이백에 있어 달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술잔을 들게 하여 주흥을 돋우어, 결국 시를 짓게 만드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달로 인해 고향을 생각하는 천고의 명시 <정야사(靜夜思)>를 보자.
牀前明月光(상전명월광), 침상 머리에 명월이 비치는데,
疑是地上霜(의시지상상). 땅에 서리가 내렸나?
擧頭望山月(거두망산월), 머리를 들어 산 위의 달을 바라보고,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이백은 이 짧은 몇 구절 안에서 아지랑이같기도 하고 서리가 내린 것 같기도 한 달빛의 특성을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문득 고향을 생각나게 만드는 달의 역할을 드러내었다. 밝은 달빛으로 인해 잠을 깨었는데, 그 달로 인해 고향이 생각나니, 작자는 또한 술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우인회숙(友人會宿)>에는 이러한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 천고의 근심을 풀어내려면,
留連百壺飮(유련백호음). 연달아 백 병의 술을 마셔야지.
良宵宜淸談(양소의청담), 이렇게 좋은 밤엔 청담을 나누는 것이 적당하고,
皓月未能寢(호월미능침). 밝은 달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네.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 취하여 텅빈 산에 누우면,
天地卽衾枕(천지즉금침). 천지가 곧 금침인 것을.
타향의 나그네가 되면 주변의 조그만 충격과 사물에도 쉽게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세상의 모든 근심을 혼자 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니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보면, 其3에서도 “그 누가 봄날 수심을 떨칠 수가 있으랴, 이럴 땐 곧 모름지기 술마실 뿐.(誰能春獨愁, 對此徑須飮).”이라고 하여, 앞의 <우인회숙>에서 “천고의 근심을 풀어내려면, 연달아 백병의 술을 마셔야지.”라고 했던 논조로, 술로써 근심을 잊기를 바랬다. 그렇다고 술로 모든 근심을 없앨 수 있을까?
이백의 말처럼 연달아 백병의 술을 마신다면 천고의 근심을 풀 수 있을까? 그 술은 어떤 술일까? 천일주(千日酒)라면 가능할까? ≪수신기(搜神記)≫에 의하면, 千日酒는 중산(中山)의 적희(狄希)라는 사람이 만든 술로써, 한모금만 마셔도 천일을 간다고 한다. 이 술이라면 천고의 근심을 풀 수 있을까?
천하의 이백이라고 하더라도 술로써 천고의 근심을 어찌 풀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에서 “칼을 빼어 물을 잘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을 들어 근심을 없애려 해도 근심은 더욱 근심스럽다.(抽刀斷水水更流, 舉杯消愁愁更愁)”고 하였다. 그래서 <月下獨酌>其3에서,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춘삼월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비단을 펴 놓은 듯.
誰能春獨愁(수능춘독수), 그 누가 봄날 수심을 떨칠 수가 있으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이럴 땐 곧 모름지기 술마실 뿐.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곤궁함과 영달함, 수명의 장단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태어날 때 이미 다 정해진 것이고,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통 술이 生死와 같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세상의 온갖 일 정말로 알기가 어렵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서 홀로 잠들면,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런 즐거움이 최고더라.
라고 했던 것이다. 즉 ‘곤궁함과 영달함’, ‘수명의 장단’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인간으로써 어찌할 수 없음을 이백은 이미 절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중요한 관건인 生死觀만큼 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취하여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내 몸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런 즐거움이 최고더라”고 설파하였다.
나아가 그는 <月下獨酌>其2에서 “이미 청주와 탁주를 다 마셨으니, 굳이 신선이 되기를 바랄소냐.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된다(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고 했던 것이다.
옛 청언(淸言)에, “명예와 이익의 핵심을 꿰뚫어 체득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조그만 안정이고, 삶과 죽음의 핵심을 꿰뚫어 체득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커다란 안정이다.(透得名利關, 方是小休歇; 透得生死關, 方是大休歇.)”고 했다.
이백도 달관하지 않고서는 천고의 시름을 풀어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관하면 어찌 근심할 여가가 있겠는가?(人生達命豈暇愁)’<양원음>라고 했고, “거나하게 취하여 교활한 속된 마음을 잊는다(陶然共忘機)”(<下終南山過斛斯山人宿置酒>)라고 했던 것이다.
이쯤해서 이백은 달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지녔는지, <古朗月行(고랑월행)>을 보자.
小時不識月(소시불식월), 어려서는 달을 잘 몰라,
呼作白玉盤(호작백옥반). 백옥 쟁반이라 부르기도 하고.
又疑瑤臺鏡(우의요대경), 또 혹 선녀가 화장하던 거울인 듯,
飛在青雲端(비재청운단). 푸른 하늘 끝에 걸려있었지.
仙人垂兩足(선인수양족), 신선이 두 다리를 쭉 뻗고,
桂樹何團團(계수하단단). 계수나무는 얼마나 둥글던가?
白兔搗藥成(백토도약성), 하얀 토끼가 약방아를 다 찧으면
問言與誰餐(문언여수찬). 누구에게 먹이려는지 물어보네.
蟾蜍蝕圓影(섬서식원영), 두꺼비가 둥근달의 형상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大明夜已殘(대명야이잔). 휘영청 밝은 밤도 이미 기울어지고.
羿昔落九烏(예석낙구오), 그 옛날 羿가 아홉 마리 홍곡을 떨어트려,
天人清且安(천인청차안). 하늘과 사람이 모두 편안했다네.
陰精此淪惑(음정차윤혹), 저 달은 이처럼 야금야금 이지러져,
去去不足觀(거거부족관). 갈수록 볼품이 없어지리니.
憂來其如何(우래기여하), 근심이 어떠하겠는가?
凄愴摧心肝(처창최심간). 슬퍼서 가슴이 찢어지누나.
이 시는 천자의 눈을 흐리게 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간신배를 풍자한 것이지만, 달은 곧 천자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밝히는 존재로 인식된다. 아울러 달의 세계는 곧 신선의 세계이며 이상향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두꺼비가 야금야금 갉아먹어서 이지러지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이백은 달을 신선세상에 있다는 瑤臺에서 仙女가 사용하던 거울(鏡)인 듯 착각할 정도였기에, 그 달 속에는 당연히 신선이 한가롭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았고, 토끼는 아마도 不死藥을 찧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다시 <파주문월(把酒問月)>을 보자.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내기시), 푸른 하늘의 달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나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 보노라.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사람이 밝은 달을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지만,
月行卻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달은 오히려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
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 떠다니는 거울처럼 밝게 선궁(仙宮)에 걸려서,
綠煙滅盡淸輝發(녹연멸진청휘발). 푸르스름한 안개가 사라지고 나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다만 밤이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만 볼 뿐,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 어찌 새벽에 구름 사이로 지는 것을 알리오?
白兎搗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 토끼는 일 년 내내 불사약을 찧고,
嫦娥孤棲與誰鄰(항아고서여수린). 항아는 외로이 머물며 누구와 이웃하여 사는가?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 물과 같이 흘러가지만,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함께 달을 보는 것은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오직 바라노니,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
月光長照金樽裡(월광장조금준리). 달빛이 술통 속에서 오래도록 빛나기를.
달은 세상을 밝히거나 맑게 해주는 존재로써, 모든 사람이 그 밝음을 향유할 수 있지만,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천자조차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밝은 달을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지만, 달은 오히려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人攀明月不可得, 月行卻與人相隨.)”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고 하여, 지금의 작자처럼 옛날의 수많은 시인묵객이 저 달로 인해 온갖 시름을 자아내고, 아파하며 술로써 근심을 해소하려했을 것이라 추측했던 것이다.
이백이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처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었던’ 달은 이백과 평생 함께 한 희망,고향,친구,이상향,낭만 등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다.
이백이 청운의 꿈을 안고 蜀에서 장안으로 나오면서 쓴 <峨眉山月歌>에서도,
峨眉山月半輪秋(아미산월반륜추), 아미산의 달 가을철인데도 반만 둥근데,
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 그 모습 평강물로 들어와 따라 흐르네.
夜發淸溪向三峽(야발청계향삼협), 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을 향해 가는데,
思君不見下渝州(사군불견하유주). 그대가 그립지만 만나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가네.
라고 하였는데, 달은 평생 줄곧 이백을 따라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밝은 달이 사람에게 토끼가 불사약을 찧는 아름답고 밝은 전설만을 전해주던가?
앞의 <靜夜思>에서도 보았듯이, 타향의 나그네에게는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됨과 동시에 酒興을 돕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월하독작(月下獨酌)>其一을 보자.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 속에 술 한병 놓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시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술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술마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다만 나의 몸만을 따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를 짝하여,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모름지기 봄을 즐기네.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배회하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흐트러지고,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술이 깨었을 때는 함께 즐기지만,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술에 취해서는 제각기 흩어진다.
永結無情游(영결무정유), 영원히 맺은 무정한 사귐,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 저쪽 세상에서도 기대해본다.
이백하면 달을 연상하게 되는 이유를 답해주는 것이 바로 이 시다.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자. 이백이 홀로 술을 마시지만 달빛으로 인해 그림자가 생겨나고, 결국 의인화된 두 가지 사물로 인해 전체가 셋이 된다.
그리고서 “노래하거나 춤출 때처럼 술이 깨어있을 때는 함께 즐기지만, 술에 취해서는 제각기 흩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혼자 즐기고 혼자 술에 취해 쓰러지는 상황으로, 지극히 외롭거나 혹은 달을 정말로 좋아하는 두 가지 비정상적인 경우일 것이다.
즉 이백에게 있어 달은 자신의 이상향(신선세계)과도 같은 존재이면서도 자신과 함께 하는 영원한 친구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명대 오빈(吳彬)은 술마시기 좋을 때를 “봄날 교외에서 천지에 제사지낼 때, 꽃이 필 때, 맑은 가을날, 신록이 질 때, 비가 갤 때, 눈이 쌓일 때, 새 달이 떴을 때, 저녁이 서늘할 때”라고 하였다. 이것을 참고로 한다면 거의 봄과 가을철이 술마시기에 적당할 때다. 그런데 필자의 경우를 보면 굳이 달이 없더라도 봄보다는 가을이 더 제격이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고, 골목에서 풍겨오는 어묵냄새나 매콤한 구이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눈앞에는 포장마차가 반기고 있는데, 그냥 지나간다? 그래 지나가야지... 암∼, 그냥 지나쳐야지. 앞에서 말한 독서라는 말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그냥 집으로 향해야지...?!
각설하고, 이백은 24세에 고향을 떠나 잠시 안륙(安陸)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정착하고 생을 꾸린 적이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이런 그가, 특히 타고난 감성을 지닌 그가 달을 보면 술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필자도 2004년 무렵 중추절날 북경에서 달을 봤다. 한국에서 보던 달과 달리 너무 컸고, 정말 쟁반처럼 환한 비치는 달 속에 절구질하고 있는 토끼를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그 달을 보는 순간 이백이 생각났고, 그래서 그런지 차갑다는 느낌 속에 정감이 느껴져서, 옆에 있던 딸과 아들에게 저 달의 느낌이 찬지, 따뜻한지를 물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애들의 말은 정확했다. 차갑단다....
牀前明月光(상전명월광), 침상 머리에 명월이 비치는데,
疑是地上霜(의시지상상). 땅에 서리가 내렸나?
擧頭望山月(거두망산월), 머리를 들어 산 위의 달을 바라보고,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이백은 이 짧은 몇 구절 안에서 아지랑이같기도 하고 서리가 내린 것 같기도 한 달빛의 특성을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문득 고향을 생각나게 만드는 달의 역할을 드러내었다. 밝은 달빛으로 인해 잠을 깨었는데, 그 달로 인해 고향이 생각나니, 작자는 또한 술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우인회숙(友人會宿)>에는 이러한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 천고의 근심을 풀어내려면,
留連百壺飮(유련백호음). 연달아 백 병의 술을 마셔야지.
良宵宜淸談(양소의청담), 이렇게 좋은 밤엔 청담을 나누는 것이 적당하고,
皓月未能寢(호월미능침). 밝은 달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네.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 취하여 텅빈 산에 누우면,
天地卽衾枕(천지즉금침). 천지가 곧 금침인 것을.
타향의 나그네가 되면 주변의 조그만 충격과 사물에도 쉽게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세상의 모든 근심을 혼자 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니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보면, 其3에서도 “그 누가 봄날 수심을 떨칠 수가 있으랴, 이럴 땐 곧 모름지기 술마실 뿐.(誰能春獨愁, 對此徑須飮).”이라고 하여, 앞의 <우인회숙>에서 “천고의 근심을 풀어내려면, 연달아 백병의 술을 마셔야지.”라고 했던 논조로, 술로써 근심을 잊기를 바랬다. 그렇다고 술로 모든 근심을 없앨 수 있을까?
이백의 말처럼 연달아 백병의 술을 마신다면 천고의 근심을 풀 수 있을까? 그 술은 어떤 술일까? 천일주(千日酒)라면 가능할까? ≪수신기(搜神記)≫에 의하면, 千日酒는 중산(中山)의 적희(狄希)라는 사람이 만든 술로써, 한모금만 마셔도 천일을 간다고 한다. 이 술이라면 천고의 근심을 풀 수 있을까?
천하의 이백이라고 하더라도 술로써 천고의 근심을 어찌 풀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에서 “칼을 빼어 물을 잘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을 들어 근심을 없애려 해도 근심은 더욱 근심스럽다.(抽刀斷水水更流, 舉杯消愁愁更愁)”고 하였다. 그래서 <月下獨酌>其3에서,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춘삼월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비단을 펴 놓은 듯.
誰能春獨愁(수능춘독수), 그 누가 봄날 수심을 떨칠 수가 있으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이럴 땐 곧 모름지기 술마실 뿐.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곤궁함과 영달함, 수명의 장단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태어날 때 이미 다 정해진 것이고,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통 술이 生死와 같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세상의 온갖 일 정말로 알기가 어렵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서 홀로 잠들면,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런 즐거움이 최고더라.
라고 했던 것이다. 즉 ‘곤궁함과 영달함’, ‘수명의 장단’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인간으로써 어찌할 수 없음을 이백은 이미 절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중요한 관건인 生死觀만큼 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취하여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내 몸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런 즐거움이 최고더라”고 설파하였다.
나아가 그는 <月下獨酌>其2에서 “이미 청주와 탁주를 다 마셨으니, 굳이 신선이 되기를 바랄소냐.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된다(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고 했던 것이다.
옛 청언(淸言)에, “명예와 이익의 핵심을 꿰뚫어 체득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조그만 안정이고, 삶과 죽음의 핵심을 꿰뚫어 체득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커다란 안정이다.(透得名利關, 方是小休歇; 透得生死關, 方是大休歇.)”고 했다.
이백도 달관하지 않고서는 천고의 시름을 풀어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관하면 어찌 근심할 여가가 있겠는가?(人生達命豈暇愁)’<양원음>라고 했고, “거나하게 취하여 교활한 속된 마음을 잊는다(陶然共忘機)”(<下終南山過斛斯山人宿置酒>)라고 했던 것이다.
이쯤해서 이백은 달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지녔는지, <古朗月行(고랑월행)>을 보자.
小時不識月(소시불식월), 어려서는 달을 잘 몰라,
呼作白玉盤(호작백옥반). 백옥 쟁반이라 부르기도 하고.
又疑瑤臺鏡(우의요대경), 또 혹 선녀가 화장하던 거울인 듯,
飛在青雲端(비재청운단). 푸른 하늘 끝에 걸려있었지.
仙人垂兩足(선인수양족), 신선이 두 다리를 쭉 뻗고,
桂樹何團團(계수하단단). 계수나무는 얼마나 둥글던가?
白兔搗藥成(백토도약성), 하얀 토끼가 약방아를 다 찧으면
問言與誰餐(문언여수찬). 누구에게 먹이려는지 물어보네.
蟾蜍蝕圓影(섬서식원영), 두꺼비가 둥근달의 형상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大明夜已殘(대명야이잔). 휘영청 밝은 밤도 이미 기울어지고.
羿昔落九烏(예석낙구오), 그 옛날 羿가 아홉 마리 홍곡을 떨어트려,
天人清且安(천인청차안). 하늘과 사람이 모두 편안했다네.
陰精此淪惑(음정차윤혹), 저 달은 이처럼 야금야금 이지러져,
去去不足觀(거거부족관). 갈수록 볼품이 없어지리니.
憂來其如何(우래기여하), 근심이 어떠하겠는가?
凄愴摧心肝(처창최심간). 슬퍼서 가슴이 찢어지누나.
이 시는 천자의 눈을 흐리게 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간신배를 풍자한 것이지만, 달은 곧 천자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밝히는 존재로 인식된다. 아울러 달의 세계는 곧 신선의 세계이며 이상향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두꺼비가 야금야금 갉아먹어서 이지러지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이백은 달을 신선세상에 있다는 瑤臺에서 仙女가 사용하던 거울(鏡)인 듯 착각할 정도였기에, 그 달 속에는 당연히 신선이 한가롭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았고, 토끼는 아마도 不死藥을 찧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다시 <파주문월(把酒問月)>을 보자.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내기시), 푸른 하늘의 달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나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 보노라.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사람이 밝은 달을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지만,
月行卻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달은 오히려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
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 떠다니는 거울처럼 밝게 선궁(仙宮)에 걸려서,
綠煙滅盡淸輝發(녹연멸진청휘발). 푸르스름한 안개가 사라지고 나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다만 밤이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만 볼 뿐,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 어찌 새벽에 구름 사이로 지는 것을 알리오?
白兎搗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 토끼는 일 년 내내 불사약을 찧고,
嫦娥孤棲與誰鄰(항아고서여수린). 항아는 외로이 머물며 누구와 이웃하여 사는가?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 물과 같이 흘러가지만,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함께 달을 보는 것은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오직 바라노니,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
月光長照金樽裡(월광장조금준리). 달빛이 술통 속에서 오래도록 빛나기를.
달은 세상을 밝히거나 맑게 해주는 존재로써, 모든 사람이 그 밝음을 향유할 수 있지만,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천자조차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밝은 달을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지만, 달은 오히려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人攀明月不可得, 月行卻與人相隨.)”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고 하여, 지금의 작자처럼 옛날의 수많은 시인묵객이 저 달로 인해 온갖 시름을 자아내고, 아파하며 술로써 근심을 해소하려했을 것이라 추측했던 것이다.
이백이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처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었던’ 달은 이백과 평생 함께 한 희망,고향,친구,이상향,낭만 등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다.
이백이 청운의 꿈을 안고 蜀에서 장안으로 나오면서 쓴 <峨眉山月歌>에서도,
峨眉山月半輪秋(아미산월반륜추), 아미산의 달 가을철인데도 반만 둥근데,
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 그 모습 평강물로 들어와 따라 흐르네.
夜發淸溪向三峽(야발청계향삼협), 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을 향해 가는데,
思君不見下渝州(사군불견하유주). 그대가 그립지만 만나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가네.
라고 하였는데, 달은 평생 줄곧 이백을 따라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밝은 달이 사람에게 토끼가 불사약을 찧는 아름답고 밝은 전설만을 전해주던가?
앞의 <靜夜思>에서도 보았듯이, 타향의 나그네에게는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됨과 동시에 酒興을 돕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월하독작(月下獨酌)>其一을 보자.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 속에 술 한병 놓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시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술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술마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다만 나의 몸만을 따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를 짝하여,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모름지기 봄을 즐기네.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배회하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흐트러지고,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술이 깨었을 때는 함께 즐기지만,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술에 취해서는 제각기 흩어진다.
永結無情游(영결무정유), 영원히 맺은 무정한 사귐,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 저쪽 세상에서도 기대해본다.
이백하면 달을 연상하게 되는 이유를 답해주는 것이 바로 이 시다.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자. 이백이 홀로 술을 마시지만 달빛으로 인해 그림자가 생겨나고, 결국 의인화된 두 가지 사물로 인해 전체가 셋이 된다.
그리고서 “노래하거나 춤출 때처럼 술이 깨어있을 때는 함께 즐기지만, 술에 취해서는 제각기 흩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혼자 즐기고 혼자 술에 취해 쓰러지는 상황으로, 지극히 외롭거나 혹은 달을 정말로 좋아하는 두 가지 비정상적인 경우일 것이다.
즉 이백에게 있어 달은 자신의 이상향(신선세계)과도 같은 존재이면서도 자신과 함께 하는 영원한 친구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장강의 강물과 석별의 정, 어느 것이 길고 짧은가?
우정(友情)이란 단어는 어감이 주는 따뜻함이 있다. 사람이 처세의 이치를 가장 빨리 배워서 마음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 친구간의 사귐일 것이다. 그런데 순수한 친구간의 사귐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이란 계속 여일(如一)하기가 어렵기에 순수한 우정을 지켜내는 것 또한 쉽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지음(知音),백아절현(伯牙絶絃),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관포지교(管鮑之交),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의 문경지교(刎頸之交), 유비와 제갈량의 수어지교(水魚之交) 외에 단금지교(斷金之交), 망년지교(忘年之交) 등등 아름다운 우정이 천고에 향기를 뿜고, 우리는 이에 대해 찬탄하고 동경하는 것이다.
이백의 경우를 보면, 그의 호방하고 낭만적인 성격으로 인해 진실한 친구를 사귀기가 참으로 어려운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선다. 그러나 한평생 천하를 떠돌며 생활한 그가 친구를 사귀는 특출난 점이 없었다면 그러한 생활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물론 그에게는 현종의 총애를 받은 시를 짓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유했다는 점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린(李璘)의 난으로 인해 옥에 갇혔을 때, 곽자의(郭子儀) 등이 성심껏 그를 구원하여 살려낸 것이나, 오균(吳筠),하지장(賀知章)이 그를 조정에 천거한 것이나, 공소부(孔巢父),한준(韓準),배정(裴政),장숙명(張叔明),도면(陶沔) 등과 함께 조래산(徂徠山)의 육계육일(竹溪六逸)이라 불렸던 점을 감안하면,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필자는 지금 이백이 지닌 그 특별한 점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이백과 함께 어울렸던 조래산의 죽계육일이 우정을 거론할만한 모임인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들지만 음주하며 시를 짓고 읊조리는 일종의 문인모임인 죽계육일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오랫동안 즐겼다는 것 자체가 ‘문인은 서로를 경시한다(文人相輕)’는 문인특유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백의 재능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거니와 그의 친교 또한 과히 상식 이하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친구간의 사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참으로 어렵다.
공자는 ≪논어≫의 첫 장에서 군자의 덕목 중 두 번째로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사의 친교가 즐거움만으로 되던가?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정이 조금씩 삐걱거리며 소원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곤 자책하거나 혹은 친구를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친구를 사귐에 있어, “사귀기 전에는 마땅히 잘 살펴봐야 하고, 사귄 뒤에는 마땅히 믿어야 한다(交友之先宜察, 交友之後宜信.)”(≪醉古堂劍掃≫11장75)고 했지만, 어디 이것 또한 쉬운 일이던가?
이백도 화려했던 장안생활을 청산하고 천하를 떠돌 때 인간의 염량세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동문을 나선 뒤 아쉬운 정을 가지고 한림원의 여러 公들게 부침(一作出東門後書懷留别翰林諸公)이란 부제가 붙은 <동무음(東武吟)>에서, 황제에게 인정받아, 궁정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언급하고 난 뒤, “하루아침에 금마문을 떠나니, 정처없이 날리는 쑥대의 신세가 되었어라, 찾아오는 빈객들은 날로 적어지고, 옥술독도 이미 다 비었구나(一朝去金馬, 飄落成飛蓬. 賓客日疏散, 玉樽亦已空.)”라고 하고서, 마지막에 자신은 漢나라 때의 신선 黃綺翁을 찾아 떠난다고 밝혔다.
자신의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처는 컸을 것이지만 문인은 풍부한 감수성으로 인해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의 하루 일과나 창작생활이 일반인의 일상과 상반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이백은 염량세태나 우정에 대해 다시금 통감하게 된 듯 하다.
<箜篌謠>를 보면,
攀天莫登龍(반천막등룡), 하늘에 올라도 용에 오르지 말고,
走山莫騎虎(주산막기호). 산을 달려도 호랑이는 타지 마라.
貴賤結交心不移(귀천결교심불이), 귀하고 천한 이가 서로 친구되어 마음변치 않는 예는,
唯有嚴陵及光武(유유엄릉급광무). 오직 엄릉과 광무제 뿐이라네.
周公稱大聖(주공칭대성), 주공이 비록 큰 성인으로 칭송될지라도,
管蔡寧相容(관채녕상용).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어찌 용납할 수 있었던가?
漢謠一斗粟(한요일두속), 한나라 노래에, 漢 문제(文帝)는 한말의 곡식이라도,
不與淮南舂(불여회남용). 회남왕(厲王)과는 찧지 않는다 하였네.
兄弟尚路人(형제상로인), 형제도 오히려 남이 되는 세상,
吾心安所從(오심안소종). 내 마음 어찌 따를 곳이 있겠는가?
他人方寸間(타인방촌간), 남의 작은 속마음은,
山海幾千重(산해기천중). 산과 바다처럼 몇 천 겹이던가?
輕言托朋友(경언탁붕우), 친구에게 속마음 경솔히 말했다가,
對面九疑峰(대면구의봉). 구의봉 같은 것과 마주했노라.
開花必早落(개화필조락), 일찍 핀 꽃은 반드시 일찍 지나니,
桃李不如松(도리불여송). 복사꽃과 오얏꽃은 소나무만 못하다.
管鲍久已死(관포구이사), 관중과 포숙아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니,
何人繼其踪(하인계기종). 어느 누가 그들의 발자취를 이어 가리오.
라고 하였다.
어떠한 사유로 마음에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지만 첫구절을 보면 황제의 총애를 받고서 무례하게 행동한 사실로 인하여 내침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여간에 진정한 우정에 대해 회의를 지녔음에도 이백은 천성적으로 친구를 좋아하고 또한 한번 사귄 친구는 진정으로 믿었던 것 같다. 친구간의 우정은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오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한 마음으로는 만명의 친구를 사귈 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한 명의 친구조차 사귈 수 없는 것!(一心可以交萬友, 二心不可以交一友.)”(≪醉古堂劍掃≫11장6)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백의 친구사귀는 모습이 이러한 듯 하다. <贈孟浩然>을 보면, “높은 산을 어찌 우러러 볼까, 다만 맑은 향기나는 절개에 절할 뿐이리.(高山安可仰, 徒此揖淸芬.)”라고 하여, 맹호연이란 인물에 대해 과찬이라고 할 정도로 칭송하였다.
그런데 맹호연을 전송하며 지은 <送孟浩然之廣陵>보면,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친구는 서쪽으로 황학루와 작별하고,
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꽃이 흐드러지게 핀 3월에 양주로 내려가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의 아득한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오직 장강만이 하늘 끝으로 흐르네.
라고 하였는데, 시의 이면에는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는 이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로써 이백이 말로만 친구를 과찬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친구를 진정으로 대하는 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귀는 친구도 가졌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듯 하는데, <贈汪倫>이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 이백이 배에 올라 떠나려 하는데,
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 갑자기 언덕 위에서 송별의 노랫소리 들리네.
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천척), 도화담의 물이 천척이나 깊다해도,
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륜송아정). 나를 전송하는 왕륜의 마음에 미치랴!
바로 이백은 자신이 친구를 진정으로 대했듯이 친구의 진정을 충분히 감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옛 ‘사귄 뒤에는 마땅히 믿어야 한다’는 사귐의 철칙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백은 평생 천하를 떠돌면서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그렇기에 증별시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與謝良輔游涇川陵巖寺>,<宴陶家亭子>,<在水軍宴韋司馬樓船觀妓>,<憶舊遊寄譙郡元參軍>,<淮海對雪贈傅靄>,<贈徐安宜>,<贈任城盧主簿>,<早秋贈裴十七仲堪>,<贈范金卿>(其一,其二),<贈瑕丘王少府>,<贈丹陽橫山周處士惟長>,<玉眞公主別館苦雨贈衛尉張卿二首>,<贈韋秘書子春>,<贈韋侍御黃裳>(其一,其二),<贈薛校書>,<贈何七判官昌浩>,<讀諸葛武侯傳書懷贈長安崔少府叔封昆季>,<贈郭將軍>,<賀去溫泉後贈楊山人>,<金陵白下亭留別>,<別東林寺僧>,<竄夜郞於烏江留別宗十六>,<留別龔處士>,<贈別鄭判官>,<將游衡岳迂漢陽雙松亭留別族弟浮屠談皓>,<留別賈舍人至二首>,<別韋少府>,<別山僧>,<贈別王山人歸布山>,<江夏別宋之悌>,<南陽送客>,<送張舍人之江東>,<送當塗趙少府赴長蘆>,<送友人尋越中山水>,<送友人游梅湖>,<送崔十二游天竺寺> 등등이 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모두 진정으로 사귀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렇게 각종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백이 생각 외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장점을 지녔을 것으로 사료된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에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괜찮은 인생인데, 자신의 주변에 늘 사람이 끓게 되는 것은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그의 증별시를 보면 많은 연회에 참석하는 모습, 이별의 아쉬움, 친구가 보낸 선물로 통해 친구를 더욱 간절하게 생각하는 모습, 명승지에 도착하여 그 지역과 관련된 친구에 대한 그리움․그 지역과 얽힌 옛날의 고사 등의 내용이 나타난다.
이백이 술마시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이 갑자기 느끼는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간의 유한한 생명에 대한 유감이다. 어느날 문득 귀밑머리가 하얀 것을 발견하거나 추운날 양치질할 때 이가 시린 것을 느끼게 될 때, 세월의 빠름과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해 근심하게 된다.
그의 <추포가(秋浦歌)>17수를 보면, 시름으로 추포의 나그네가 되어(愁作秋浦客)<추포가>(6)), 청계(淸溪)의 물소리가 창자를 끊는데, 떠나려고 하나 떠나지 못하고, 잠시 논다는 것이 이토록 오래 되었다(青溪非隴水, 翻作斷腸流. 欲去不得去, 薄游成久游.)<추포가>(2)는 상황이 되었으니, 나이 먹어가는 것이 얼마나 그의 가슴을 짓눌렀겠는가? 그중 15수를 보면,
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백발은 길이가 삼천 발,
緣愁似個長(연수사개장). 근심 때문에 이렇게 자랐다.
不知明鏡裏(부지명경리), 알 수 없구나, 맑은 거울 속 나의 백발은,
何處得秋霜(하처득추상). 어느 곳에서 서리를 얻어왔나.
라고 했으니, 어찌 술없이 이러한 세월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對酒>에서,
勸君莫拒杯(권군막거배), 그대에게 권하노니 술잔을 거절하지 마소,
春風笑人来(춘풍소인래). 봄바람이 비웃는다오.
桃李如舊識(도리여구식), 복숭아와 살구나무는 친구처럼,
傾花向我開(경화향아개). 꽃을 기울어 나를 향해 피네.
流鶯啼碧樹(유앵제벽수), 떠돌던 앵무새는 푸른 나무 위에서 울고,
明月窺金罍(명월규금뢰). 밝은 달은 황금술잔을 비춘다.
昨日朱顔子(작일주안자), 어제는 붉은 빛의 젊은 얼굴이,
今日白髮催(금일백발최). 오늘은 백발을 재촉한다.
棘生石虎殿(극생석호전), 대추나무 황폐해진 石虎殿에 자라고,
鹿走姑蘇臺(녹주고소대). 사슴은 황폐해진 姑蘇臺를 뛰논다.
自古帝王宅(자고제왕택),예로부터 제왕의 집,
城闕閉黃埃(성궐폐황애). 궁궐이 누런 티끌로 뒤덮혔다.
君若不飮酒(군약불음주). 그대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昔人安在哉(석인안재재). 옛 사람이 어찌 살아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술을 권하는 핑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인생무상함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더 바랄 것이 없던 황제의 궁궐조차 지금은 대추나무같은 잡초가 자라고, 사슴이 뛰어노는 황폐한 곳으로 변한 것을 보고서, 더 이상 가릴 것이 뭐가 있더란 말인가? 이백이야 술을 한번 마시면 ‘연거푸 술 백 병을 마셔야 하고’,‘하루에 삼백잔씩 마셔야 했는데,’
중국의 속담에 ‘술이 친구를 만나게 되면 천 잔도 부족하다(酒逢知己千杯少)’는 말이 있다. 그 넓은 중국의 땅덩어리에서 한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영영 이별할 지도 모를 일이니, 그동안에 쌓였던 가슴 속의 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몇날 며칠을 밤새워 부족할 것이다.
그의 <對酒行>와 <金陵鳳凰臺置酒>를 보자.
<對酒行>
松子栖金華(송자서금화), 赤松子는 金華山으로 들어갔고,
安期入蓬海(안기입봉해). 安期는 동해 바다 속 蓬萊山으로 들어갔네.
此人古之仙(차인고지선), 이 사람들은 옛날의 신선이지만,
羽化竟何在(우화경하재). 신선되어 결국 어디에 있는가?
浮生速流電(부생속유전), 뜬구름같은 인생 번개처럼 빨라,
倏忽變光彩(숙홀변광채). 갑자기 광채로 변하네.
天地无凋換(천지무조환), 천지는 시들어서 바뀌지 않지만,
容顔有遷改(용안유천개). 얼굴은 바뀌는구나.
對酒不肯飮(대주불긍음), 술을 대하고 마시지 않고자 하면서,
含情欲誰待(함정욕수대). 정을 품고서 누구를 기다리시나.
<金陵鳳凰臺置酒>
置酒延落景(치주연락경), 해거름 경치에 술자리를 펼치니,
金陵鳳凰臺(금릉봉황대). 금릉의 봉황대라.
長波寫萬古(장파사만고), 긴긴 파도는 옛 일을 써내고,
心與雲俱開(심여운구개). 마음과 구름이 모두 활짝 펴진다.
借問往昔時(차문왕석시), 옛날을 물어보노니,
鳳凰爲誰來(봉황위수래). 봉황은 누굴 위해 왔는고?
鳳凰去已久(봉황거이구), 봉황은 떠난 지 이미 오래인데,
正當今日回(정당금일회). 바로 오늘 돌아왔구나.
明君越羲軒(명군월희헌), 밝은 임군은 복희씨와 軒轅氏보다 뛰어나고,
天老坐三臺(천로좌삼대). 천제가 三臺에 앉았어도,
豪士無所用(호사무소용), 호걸은 쓰이지 않더라.
彈弦醉金罍(탄현취금뢰). 거문고를 연주하고 금술잔에 취하네.
東風吹山花(동풍취산화), 동풍이 산위의 꽃에 부니,
安可不盡杯(안가부진배).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소냐.
六帝没幽草(육제몰유초), 여섯 황제는 그윽한 풀에 묻혔고,
深宫冥綠苔(심궁명록태). 깊은 궁궐은 푸른 이끼로 어둡네.
置酒勿復道(치주물부도), 술을 두고 다시 말하지 마소,
歌鍾但相催(가종단상최). 노랫소리 종소리만이 술마시라고 재촉하니.
이 두 편을 읽고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술을 권하는 핑계가 지극히 마땅하고 애절한 가운데서도, 술자리의 상황이 머리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술친구든지 기녀든지, 혹은 이미 술에 취했든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든지, 술을 권하는 모습이 이백답다.
“술을 두고 다시 말하지 마소, 노랫소리 종소리만이 술마시라고 재촉하니.” 하하하...
하긴 백거이(白居易)도 “서로 만났으니 다시 술을 사양하지 말고 취합시다, 양관의 이별가 중 네 번째 구절을 읊을테니 귀기울여 듣기나 하소.(相逢且莫推辭醉, 聽唱陽關第四聲.)”(<對酒>其三)라고 하긴 했지만......
이백은 장안을 떠날 때 현종으로부터 받은 만냥의 전별금을 10년만에 모두 다 써버렸다.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千金散盡還復來)”(<將進酒>)이라는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친구와의 진정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친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이다. 그의 전별시에는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예를들면, <贈秋浦柳少府>의 “내가 사랑하는 그대, 오래도록 만류하니 차마 돌아가지 못하네(而我愛夫子, 淹留未忍歸.)”․<別山僧>의 “이번에 이별하면 어느 날에 만날까? 그리운 마음 하루 저녁 원숭이 울음에 깊어만 가고.(此度别離何日見, 相思一夜暝猿啼.)”,<別東林寺僧>의 “동림사 손님을 전송하는 곳에, 달이 뜨니 하얀 잔나비가 운다. 웃으면서 이별하자니 여산은 먼데, 왜 반드시 호계를 건너야 하나.(東林送客處, 月出白猿啼. 笑別廬山遠, 何須過虎溪.)”,<贈任城盧主簿>의 “鐘鼓로는 즐겁지 않고, 안개와 서리내리면 누구와 함께 할꼬. 날아 돌아와선 차만 떠나지 못하네, 눈물흘리며 원앙과 鴻鵠과 이별하네.(鍾鼓不爲樂, 烟霜誰與同. 歸飛未忍去, 流淚謝鴛鴻.)” 등등이 있다. 여기서 그의 <送友人>를 보자.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 푸른 산은 북쪽 성곽으로 가로 지르고,
白水遼東城(백수요동성). 하얀 강물은 성 동쪽을 싸고 흐른다.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 여기서 한번 이별하면,
孤蓬萬里征(고봉만리정). 외로운 쑥대처럼 만리까지 날려 가리.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 뜬구름은 나그네의 마음이고,
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 석양은 친구의 마음이로다.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 손 흔들며 이제 떠나가니,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 쓸쓸하게 떠나는 말도 우는구나.
다시 <金陵酒肆留別(금릉주사유별)>를 보자.
風吹柳花滿店香(풍취류화만점향), 바람이 솜버들에 부니 주막에 향기 가득하고,
吳姬壓酒勸客嘗(오희압주권객상). 오땅의 미희 술을 걸러 손님에게 맛보라 권하네.
金陵子弟來相送(금릉자제래상송), 금릉의 자제들이 배웅하려 찾아왔네,
欲行不行各盡觴(욕행불행각진상).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고 각각 술잔만 비운다.
請君試問東流水(청군시문동류수), 그대에게 묻노니, 동쪽으로 흐르는 장강의 강물,
別意與之誰短長(별의여지수단장). 석별의 정과 어느 것이 길고 짧은가?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모두 아쉬운 것이 진정한 우정이리라. 그런데 친구간의 사귐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서로 의기투합하든지, 절대적으로 친구를 이해하는 마음이 기반되지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옛사람은 “먼저 처음엔 담담하다가 나중에 열렬하게, 처음엔 낯설다가 나중에 친하게, 처음엔 멀었다가 나중에 가까워지는 것, 이것이 친구를 사귀는 도리다.(先淡後濃, 先疎後親, 先遠後近, 交友道也.)”(≪醉古堂劍掃≫1장 116)라고 하였다.
이백은 어떠한 우정을 염원했을까? 물론 목숨을 담보로 하는 우정이겠지만, 그가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 것은 王徽之와 戴逵의 ‘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감(乘興訪友)’ 혹은 ‘눈이 내린 저녁 대규를 찾아가다(雪夜訪戴)’라는 고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의 <東魯門泛舟> 중 其一에서 “가벼운 배를 달밤에 띄워서 계곡을 찾아 돌고도니, 왕휘지가 산음에 눈 내린 뒤 戴逵를 찾은 것 같구나(輕舟泛月尋溪轉, 疑是山隱雪後来.)”고 하였고, 其二에서 “만약 달빛 아래 배를 타고 떠나게 한다면, 어찌 바람에 흘러 剡溪에만 이르게 될까?(若教月下乘舟去, 何啻風流到剡溪.)”라고 하였다.
또한 <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에서 “어제 저녁 오중 땅에 눈이 왔는데, 王徽之는 흥에 겨워 섬계로 떠났었지.(昨夜吳中雪, 子猷佳興發.)”라고 하였다.
잠시 그 고사를 소개하면, 王羲之의 아들 王徽之가 山陰에 있을 때, 저녁에 눈이 왔다가 개이니, 달빛이 더욱 밝아서 사방이 온통 하얗다. 그래서 홀로 술을 마시면서 좌사(左思)의 <招隱詩>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친구 戴逵가 생각났다. 당시 대규는 剡땅에 있었다.
그래서 그 밤에 작은 배를 빌려 타고 친구를 찾아갔다. 밤을 새워 친구가 기거하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문앞에서 그냥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왕휘지가 대답하기를 “본래 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갔는데, 흥이 다 되어 돌아오는데 구태여 친구 대규를 만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참 멋지다. 옛 사람의 흥취가 바로 이런 것이다. 친구간의 우정에는 말이 혹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말하지 않아서 친구가 알지 못하면 어떻고 안다면 또 어쩔텐가? 그게 자신이 친구에게 베푼 우정으로 만족하면 될 것을...
나아가 이백은 친구가 보내 준 선물에도 몹시 감격하였다. 그의 <殷十一贈栗岡硯>에서,
殷侯三玄士(은후삼현사), 은십일이,
贈我栗岡硯(증아율강연). 나에게 栗岡硯을 보냈네.
洒染中山毫(주염중산호), 중산의 붓을 찍으니,
光映吳門練(광영오문련). 吳門의 비단처럼 빛난다.
天寒水不凍(천한수불동), 날이 추워도 먹물이 얼지 않고,
日用心不倦(일용심불권). 날마다 사용해도 싫증나지 않네.
携此臨墨池(휴차임묵지), 이 벼루를 가지고 墨池에 이르니,
還如對君面(환여대군면). 역시 그대의 얼굴을 대하고 있는 듯 하네.
라고 하였다. 일찍이 유명한 벼루인 栗岡硯이 마음에 들었기도 했겠지만, 특히 王羲之의 墨池를 보고 그를 떠올리는 면에서, 이백이 맺은 우정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이 네 번의 결혼을 하였고, 자식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기는 했지만 부인과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천하를 떠돌며 친구를 사귄 점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유가의 근본인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이백이란 인물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들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특히나 이백이 문인이란 특별한 계층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력을 도저히 용납못할 일도 아니다. 다만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달과 술을 벗삼아서 자신의 개성대로 살았지만 그가 한번 친구의 정을 맺게되면 진정으로 대한 이백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세월이 하수상하니!?...
이백의 경우를 보면, 그의 호방하고 낭만적인 성격으로 인해 진실한 친구를 사귀기가 참으로 어려운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선다. 그러나 한평생 천하를 떠돌며 생활한 그가 친구를 사귀는 특출난 점이 없었다면 그러한 생활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물론 그에게는 현종의 총애를 받은 시를 짓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유했다는 점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린(李璘)의 난으로 인해 옥에 갇혔을 때, 곽자의(郭子儀) 등이 성심껏 그를 구원하여 살려낸 것이나, 오균(吳筠),하지장(賀知章)이 그를 조정에 천거한 것이나, 공소부(孔巢父),한준(韓準),배정(裴政),장숙명(張叔明),도면(陶沔) 등과 함께 조래산(徂徠山)의 육계육일(竹溪六逸)이라 불렸던 점을 감안하면,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필자는 지금 이백이 지닌 그 특별한 점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이백과 함께 어울렸던 조래산의 죽계육일이 우정을 거론할만한 모임인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들지만 음주하며 시를 짓고 읊조리는 일종의 문인모임인 죽계육일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오랫동안 즐겼다는 것 자체가 ‘문인은 서로를 경시한다(文人相輕)’는 문인특유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백의 재능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거니와 그의 친교 또한 과히 상식 이하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친구간의 사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참으로 어렵다.
공자는 ≪논어≫의 첫 장에서 군자의 덕목 중 두 번째로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사의 친교가 즐거움만으로 되던가?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정이 조금씩 삐걱거리며 소원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곤 자책하거나 혹은 친구를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친구를 사귐에 있어, “사귀기 전에는 마땅히 잘 살펴봐야 하고, 사귄 뒤에는 마땅히 믿어야 한다(交友之先宜察, 交友之後宜信.)”(≪醉古堂劍掃≫11장75)고 했지만, 어디 이것 또한 쉬운 일이던가?
이백도 화려했던 장안생활을 청산하고 천하를 떠돌 때 인간의 염량세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동문을 나선 뒤 아쉬운 정을 가지고 한림원의 여러 公들게 부침(一作出東門後書懷留别翰林諸公)이란 부제가 붙은 <동무음(東武吟)>에서, 황제에게 인정받아, 궁정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언급하고 난 뒤, “하루아침에 금마문을 떠나니, 정처없이 날리는 쑥대의 신세가 되었어라, 찾아오는 빈객들은 날로 적어지고, 옥술독도 이미 다 비었구나(一朝去金馬, 飄落成飛蓬. 賓客日疏散, 玉樽亦已空.)”라고 하고서, 마지막에 자신은 漢나라 때의 신선 黃綺翁을 찾아 떠난다고 밝혔다.
자신의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처는 컸을 것이지만 문인은 풍부한 감수성으로 인해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의 하루 일과나 창작생활이 일반인의 일상과 상반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이백은 염량세태나 우정에 대해 다시금 통감하게 된 듯 하다.
<箜篌謠>를 보면,
攀天莫登龍(반천막등룡), 하늘에 올라도 용에 오르지 말고,
走山莫騎虎(주산막기호). 산을 달려도 호랑이는 타지 마라.
貴賤結交心不移(귀천결교심불이), 귀하고 천한 이가 서로 친구되어 마음변치 않는 예는,
唯有嚴陵及光武(유유엄릉급광무). 오직 엄릉과 광무제 뿐이라네.
周公稱大聖(주공칭대성), 주공이 비록 큰 성인으로 칭송될지라도,
管蔡寧相容(관채녕상용).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어찌 용납할 수 있었던가?
漢謠一斗粟(한요일두속), 한나라 노래에, 漢 문제(文帝)는 한말의 곡식이라도,
不與淮南舂(불여회남용). 회남왕(厲王)과는 찧지 않는다 하였네.
兄弟尚路人(형제상로인), 형제도 오히려 남이 되는 세상,
吾心安所從(오심안소종). 내 마음 어찌 따를 곳이 있겠는가?
他人方寸間(타인방촌간), 남의 작은 속마음은,
山海幾千重(산해기천중). 산과 바다처럼 몇 천 겹이던가?
輕言托朋友(경언탁붕우), 친구에게 속마음 경솔히 말했다가,
對面九疑峰(대면구의봉). 구의봉 같은 것과 마주했노라.
開花必早落(개화필조락), 일찍 핀 꽃은 반드시 일찍 지나니,
桃李不如松(도리불여송). 복사꽃과 오얏꽃은 소나무만 못하다.
管鲍久已死(관포구이사), 관중과 포숙아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니,
何人繼其踪(하인계기종). 어느 누가 그들의 발자취를 이어 가리오.
라고 하였다.
어떠한 사유로 마음에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지만 첫구절을 보면 황제의 총애를 받고서 무례하게 행동한 사실로 인하여 내침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여간에 진정한 우정에 대해 회의를 지녔음에도 이백은 천성적으로 친구를 좋아하고 또한 한번 사귄 친구는 진정으로 믿었던 것 같다. 친구간의 우정은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오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한 마음으로는 만명의 친구를 사귈 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한 명의 친구조차 사귈 수 없는 것!(一心可以交萬友, 二心不可以交一友.)”(≪醉古堂劍掃≫11장6)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백의 친구사귀는 모습이 이러한 듯 하다. <贈孟浩然>을 보면, “높은 산을 어찌 우러러 볼까, 다만 맑은 향기나는 절개에 절할 뿐이리.(高山安可仰, 徒此揖淸芬.)”라고 하여, 맹호연이란 인물에 대해 과찬이라고 할 정도로 칭송하였다.
그런데 맹호연을 전송하며 지은 <送孟浩然之廣陵>보면,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친구는 서쪽으로 황학루와 작별하고,
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꽃이 흐드러지게 핀 3월에 양주로 내려가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의 아득한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오직 장강만이 하늘 끝으로 흐르네.
라고 하였는데, 시의 이면에는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는 이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로써 이백이 말로만 친구를 과찬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친구를 진정으로 대하는 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귀는 친구도 가졌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듯 하는데, <贈汪倫>이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 이백이 배에 올라 떠나려 하는데,
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 갑자기 언덕 위에서 송별의 노랫소리 들리네.
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천척), 도화담의 물이 천척이나 깊다해도,
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륜송아정). 나를 전송하는 왕륜의 마음에 미치랴!
바로 이백은 자신이 친구를 진정으로 대했듯이 친구의 진정을 충분히 감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옛 ‘사귄 뒤에는 마땅히 믿어야 한다’는 사귐의 철칙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모두 진정으로 사귀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렇게 각종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백이 생각 외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장점을 지녔을 것으로 사료된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에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괜찮은 인생인데, 자신의 주변에 늘 사람이 끓게 되는 것은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그의 증별시를 보면 많은 연회에 참석하는 모습, 이별의 아쉬움, 친구가 보낸 선물로 통해 친구를 더욱 간절하게 생각하는 모습, 명승지에 도착하여 그 지역과 관련된 친구에 대한 그리움․그 지역과 얽힌 옛날의 고사 등의 내용이 나타난다.
이백이 술마시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이 갑자기 느끼는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간의 유한한 생명에 대한 유감이다. 어느날 문득 귀밑머리가 하얀 것을 발견하거나 추운날 양치질할 때 이가 시린 것을 느끼게 될 때, 세월의 빠름과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해 근심하게 된다.
그의 <추포가(秋浦歌)>17수를 보면, 시름으로 추포의 나그네가 되어(愁作秋浦客)<추포가>(6)), 청계(淸溪)의 물소리가 창자를 끊는데, 떠나려고 하나 떠나지 못하고, 잠시 논다는 것이 이토록 오래 되었다(青溪非隴水, 翻作斷腸流. 欲去不得去, 薄游成久游.)<추포가>(2)는 상황이 되었으니, 나이 먹어가는 것이 얼마나 그의 가슴을 짓눌렀겠는가? 그중 15수를 보면,
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백발은 길이가 삼천 발,
緣愁似個長(연수사개장). 근심 때문에 이렇게 자랐다.
不知明鏡裏(부지명경리), 알 수 없구나, 맑은 거울 속 나의 백발은,
何處得秋霜(하처득추상). 어느 곳에서 서리를 얻어왔나.
라고 했으니, 어찌 술없이 이러한 세월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對酒>에서,
勸君莫拒杯(권군막거배), 그대에게 권하노니 술잔을 거절하지 마소,
春風笑人来(춘풍소인래). 봄바람이 비웃는다오.
桃李如舊識(도리여구식), 복숭아와 살구나무는 친구처럼,
傾花向我開(경화향아개). 꽃을 기울어 나를 향해 피네.
流鶯啼碧樹(유앵제벽수), 떠돌던 앵무새는 푸른 나무 위에서 울고,
明月窺金罍(명월규금뢰). 밝은 달은 황금술잔을 비춘다.
昨日朱顔子(작일주안자), 어제는 붉은 빛의 젊은 얼굴이,
今日白髮催(금일백발최). 오늘은 백발을 재촉한다.
棘生石虎殿(극생석호전), 대추나무 황폐해진 石虎殿에 자라고,
鹿走姑蘇臺(녹주고소대). 사슴은 황폐해진 姑蘇臺를 뛰논다.
自古帝王宅(자고제왕택),예로부터 제왕의 집,
城闕閉黃埃(성궐폐황애). 궁궐이 누런 티끌로 뒤덮혔다.
君若不飮酒(군약불음주). 그대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昔人安在哉(석인안재재). 옛 사람이 어찌 살아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술을 권하는 핑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인생무상함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더 바랄 것이 없던 황제의 궁궐조차 지금은 대추나무같은 잡초가 자라고, 사슴이 뛰어노는 황폐한 곳으로 변한 것을 보고서, 더 이상 가릴 것이 뭐가 있더란 말인가? 이백이야 술을 한번 마시면 ‘연거푸 술 백 병을 마셔야 하고’,‘하루에 삼백잔씩 마셔야 했는데,’
중국의 속담에 ‘술이 친구를 만나게 되면 천 잔도 부족하다(酒逢知己千杯少)’는 말이 있다. 그 넓은 중국의 땅덩어리에서 한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영영 이별할 지도 모를 일이니, 그동안에 쌓였던 가슴 속의 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몇날 며칠을 밤새워 부족할 것이다.
그의 <對酒行>와 <金陵鳳凰臺置酒>를 보자.
<對酒行>
松子栖金華(송자서금화), 赤松子는 金華山으로 들어갔고,
安期入蓬海(안기입봉해). 安期는 동해 바다 속 蓬萊山으로 들어갔네.
此人古之仙(차인고지선), 이 사람들은 옛날의 신선이지만,
羽化竟何在(우화경하재). 신선되어 결국 어디에 있는가?
浮生速流電(부생속유전), 뜬구름같은 인생 번개처럼 빨라,
倏忽變光彩(숙홀변광채). 갑자기 광채로 변하네.
天地无凋換(천지무조환), 천지는 시들어서 바뀌지 않지만,
容顔有遷改(용안유천개). 얼굴은 바뀌는구나.
對酒不肯飮(대주불긍음), 술을 대하고 마시지 않고자 하면서,
含情欲誰待(함정욕수대). 정을 품고서 누구를 기다리시나.
<金陵鳳凰臺置酒>
置酒延落景(치주연락경), 해거름 경치에 술자리를 펼치니,
金陵鳳凰臺(금릉봉황대). 금릉의 봉황대라.
長波寫萬古(장파사만고), 긴긴 파도는 옛 일을 써내고,
心與雲俱開(심여운구개). 마음과 구름이 모두 활짝 펴진다.
借問往昔時(차문왕석시), 옛날을 물어보노니,
鳳凰爲誰來(봉황위수래). 봉황은 누굴 위해 왔는고?
鳳凰去已久(봉황거이구), 봉황은 떠난 지 이미 오래인데,
正當今日回(정당금일회). 바로 오늘 돌아왔구나.
明君越羲軒(명군월희헌), 밝은 임군은 복희씨와 軒轅氏보다 뛰어나고,
天老坐三臺(천로좌삼대). 천제가 三臺에 앉았어도,
豪士無所用(호사무소용), 호걸은 쓰이지 않더라.
彈弦醉金罍(탄현취금뢰). 거문고를 연주하고 금술잔에 취하네.
東風吹山花(동풍취산화), 동풍이 산위의 꽃에 부니,
安可不盡杯(안가부진배).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소냐.
六帝没幽草(육제몰유초), 여섯 황제는 그윽한 풀에 묻혔고,
深宫冥綠苔(심궁명록태). 깊은 궁궐은 푸른 이끼로 어둡네.
置酒勿復道(치주물부도), 술을 두고 다시 말하지 마소,
歌鍾但相催(가종단상최). 노랫소리 종소리만이 술마시라고 재촉하니.
이 두 편을 읽고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술을 권하는 핑계가 지극히 마땅하고 애절한 가운데서도, 술자리의 상황이 머리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술친구든지 기녀든지, 혹은 이미 술에 취했든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든지, 술을 권하는 모습이 이백답다.
“술을 두고 다시 말하지 마소, 노랫소리 종소리만이 술마시라고 재촉하니.” 하하하...
하긴 백거이(白居易)도 “서로 만났으니 다시 술을 사양하지 말고 취합시다, 양관의 이별가 중 네 번째 구절을 읊을테니 귀기울여 듣기나 하소.(相逢且莫推辭醉, 聽唱陽關第四聲.)”(<對酒>其三)라고 하긴 했지만......
이백은 장안을 떠날 때 현종으로부터 받은 만냥의 전별금을 10년만에 모두 다 써버렸다.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千金散盡還復來)”(<將進酒>)이라는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친구와의 진정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친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이다. 그의 전별시에는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예를들면, <贈秋浦柳少府>의 “내가 사랑하는 그대, 오래도록 만류하니 차마 돌아가지 못하네(而我愛夫子, 淹留未忍歸.)”․<別山僧>의 “이번에 이별하면 어느 날에 만날까? 그리운 마음 하루 저녁 원숭이 울음에 깊어만 가고.(此度别離何日見, 相思一夜暝猿啼.)”,<別東林寺僧>의 “동림사 손님을 전송하는 곳에, 달이 뜨니 하얀 잔나비가 운다. 웃으면서 이별하자니 여산은 먼데, 왜 반드시 호계를 건너야 하나.(東林送客處, 月出白猿啼. 笑別廬山遠, 何須過虎溪.)”,<贈任城盧主簿>의 “鐘鼓로는 즐겁지 않고, 안개와 서리내리면 누구와 함께 할꼬. 날아 돌아와선 차만 떠나지 못하네, 눈물흘리며 원앙과 鴻鵠과 이별하네.(鍾鼓不爲樂, 烟霜誰與同. 歸飛未忍去, 流淚謝鴛鴻.)” 등등이 있다. 여기서 그의 <送友人>를 보자.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 푸른 산은 북쪽 성곽으로 가로 지르고,
白水遼東城(백수요동성). 하얀 강물은 성 동쪽을 싸고 흐른다.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 여기서 한번 이별하면,
孤蓬萬里征(고봉만리정). 외로운 쑥대처럼 만리까지 날려 가리.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 뜬구름은 나그네의 마음이고,
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 석양은 친구의 마음이로다.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 손 흔들며 이제 떠나가니,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 쓸쓸하게 떠나는 말도 우는구나.
다시 <金陵酒肆留別(금릉주사유별)>를 보자.
風吹柳花滿店香(풍취류화만점향), 바람이 솜버들에 부니 주막에 향기 가득하고,
吳姬壓酒勸客嘗(오희압주권객상). 오땅의 미희 술을 걸러 손님에게 맛보라 권하네.
金陵子弟來相送(금릉자제래상송), 금릉의 자제들이 배웅하려 찾아왔네,
欲行不行各盡觴(욕행불행각진상).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고 각각 술잔만 비운다.
請君試問東流水(청군시문동류수), 그대에게 묻노니, 동쪽으로 흐르는 장강의 강물,
別意與之誰短長(별의여지수단장). 석별의 정과 어느 것이 길고 짧은가?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모두 아쉬운 것이 진정한 우정이리라. 그런데 친구간의 사귐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서로 의기투합하든지, 절대적으로 친구를 이해하는 마음이 기반되지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옛사람은 “먼저 처음엔 담담하다가 나중에 열렬하게, 처음엔 낯설다가 나중에 친하게, 처음엔 멀었다가 나중에 가까워지는 것, 이것이 친구를 사귀는 도리다.(先淡後濃, 先疎後親, 先遠後近, 交友道也.)”(≪醉古堂劍掃≫1장 116)라고 하였다.
이백은 어떠한 우정을 염원했을까? 물론 목숨을 담보로 하는 우정이겠지만, 그가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 것은 王徽之와 戴逵의 ‘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감(乘興訪友)’ 혹은 ‘눈이 내린 저녁 대규를 찾아가다(雪夜訪戴)’라는 고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의 <東魯門泛舟> 중 其一에서 “가벼운 배를 달밤에 띄워서 계곡을 찾아 돌고도니, 왕휘지가 산음에 눈 내린 뒤 戴逵를 찾은 것 같구나(輕舟泛月尋溪轉, 疑是山隱雪後来.)”고 하였고, 其二에서 “만약 달빛 아래 배를 타고 떠나게 한다면, 어찌 바람에 흘러 剡溪에만 이르게 될까?(若教月下乘舟去, 何啻風流到剡溪.)”라고 하였다.
또한 <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에서 “어제 저녁 오중 땅에 눈이 왔는데, 王徽之는 흥에 겨워 섬계로 떠났었지.(昨夜吳中雪, 子猷佳興發.)”라고 하였다.
잠시 그 고사를 소개하면, 王羲之의 아들 王徽之가 山陰에 있을 때, 저녁에 눈이 왔다가 개이니, 달빛이 더욱 밝아서 사방이 온통 하얗다. 그래서 홀로 술을 마시면서 좌사(左思)의 <招隱詩>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친구 戴逵가 생각났다. 당시 대규는 剡땅에 있었다.
그래서 그 밤에 작은 배를 빌려 타고 친구를 찾아갔다. 밤을 새워 친구가 기거하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문앞에서 그냥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왕휘지가 대답하기를 “본래 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갔는데, 흥이 다 되어 돌아오는데 구태여 친구 대규를 만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참 멋지다. 옛 사람의 흥취가 바로 이런 것이다. 친구간의 우정에는 말이 혹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말하지 않아서 친구가 알지 못하면 어떻고 안다면 또 어쩔텐가? 그게 자신이 친구에게 베푼 우정으로 만족하면 될 것을...
나아가 이백은 친구가 보내 준 선물에도 몹시 감격하였다. 그의 <殷十一贈栗岡硯>에서,
殷侯三玄士(은후삼현사), 은십일이,
贈我栗岡硯(증아율강연). 나에게 栗岡硯을 보냈네.
洒染中山毫(주염중산호), 중산의 붓을 찍으니,
光映吳門練(광영오문련). 吳門의 비단처럼 빛난다.
天寒水不凍(천한수불동), 날이 추워도 먹물이 얼지 않고,
日用心不倦(일용심불권). 날마다 사용해도 싫증나지 않네.
携此臨墨池(휴차임묵지), 이 벼루를 가지고 墨池에 이르니,
還如對君面(환여대군면). 역시 그대의 얼굴을 대하고 있는 듯 하네.
라고 하였다. 일찍이 유명한 벼루인 栗岡硯이 마음에 들었기도 했겠지만, 특히 王羲之의 墨池를 보고 그를 떠올리는 면에서, 이백이 맺은 우정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이 네 번의 결혼을 하였고, 자식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기는 했지만 부인과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천하를 떠돌며 친구를 사귄 점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유가의 근본인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이백이란 인물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들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특히나 이백이 문인이란 특별한 계층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력을 도저히 용납못할 일도 아니다. 다만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달과 술을 벗삼아서 자신의 개성대로 살았지만 그가 한번 친구의 정을 맺게되면 진정으로 대한 이백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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