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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_세번째

醉月 2023. 12. 27. 15:49

이승만 건국사(46)“정읍선언을 유엔에 상정”...이승만, '用美외교‘ 총력전

▲ 건국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영신.

“임영신 의원, 민주의원을 대표해서 그대가 미국에 가시오”
막바지 무더위가 뜨거운 8월 중순, 돈암장 집무실에서 부채질도 잊은 이승만이 말한다.
“이번 유엔총회를 놓치면 우리나라 독립은 기회를 잃게 되오. 엘리너 루즈벨트나 로물로 장군이나  루이스도 잘 아는 사람들이잖소. 승산은 충분하니 최선을 다해주기 바랍니다.”
루이스는 임영신의 미국 이름, 남캘리포니아 대학(USC) 유학후 이승만과 20여년 독립운동을 함께 한 임영신(任永信)은 이승만의 이름 승(承)자를 따서 ’승당(承堂)‘이란 호를 지을 정도로 일심동체의 애국동지, 여성독립당 당수로서 민주의원 구성에도 전력을 기울여 이승만을 도왔다. 이승만처럼 영어에 능통한 임영신은 이미 ’정읍선언‘을 영문으로 작성해 두었고 유엔 로비에 필요한 인물 리스트도 뽑아놓았다. 
 
이승만이 ’건국전략‘을 ’정읍선언‘에 담아 공표한지 두 달, 선언으로 끝날 선언이 아니다.
필자가 앞에서 규정했듯이 그것은 미-소가 흥정하는 한반도의 난국을 돌파하는 전략카드, 즉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내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구상은 곧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독트린‘이기 때문이다.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것‘--임시정부 또는 과도정부가 국제기구 유엔의 승인을 받아 자유세계와 힘을 합쳐 북한의 소련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전략으로서 ’국제승인‘은 국제법박사 이승만의 오래된 독립원칙이었다. 6월말 민통총본부(민족통일총본부)를 출범한 이승만은 그해 10월에 열리는 유엔총회에 이 안을 제안하여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하는 절박한 시간에 몰려있다. 
 
그동안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등 늙은 반탁세력은 은퇴시키라”는 본국정부 훈령에 따라 소위 중도우파 김규식(金奎植)과 중도좌파 여운형(呂運亨)을 묶어 ’좌우합작 위원회‘를 7월 23일 출범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지난 2월 미군정과 함께 설립한 ’민주의원‘을 남한의 과도정부로 이용할 계산아래, 믿을 수 있는 임영신을 유엔에 파견하는 것이다. 

▲ 유엔 총회에 참석한 임병직과 임영신(1946년10월)

★임영신, 유엔 사무총장 만나 성공...한국문제 본회의 상정예정 공표
 
’민주의원 주미의원 겸 대한민국 전권대표‘로 임명받은 임영신은 9월1일 배를 타고 인천을 출항한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 도착, 학비를 대준 사업가 오빠 임일(任一)로부터 활동비를 얻어 가지고 뉴욕으로 달려가 임병직(林炳稷)과 합류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이승만의 지령에 따라 눈코 뜰 새 없이 뛰고 또 뛰었다. 
임영신은 10년 넘게 친분을 쌓은 엘리너 루즈벨트(Anna Eleanor Roosevelt: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에 부탁하여 유엔 사무총장 리(Trygve Lie)를 만나 설득작전을 편다. 그 결과 리 총장은 한국문제를 11월2일 유엔 총회 본회의에 상정하겠다고 공표하기에 이른다. ([승당 임영신 박사 문집] 임영신전집 편찬위원회, 1986)
 
임영신과 임병직으로부터 ’성공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때가 이르렀도다” 쾌재를 부르며 자신이 직접 유엔 총회에 참석하여 목적을 관철할 계획을 짠다.
그러면서 유엔 사무총장 리(노르웨이 출신), 유엔총회 미국대표단 엘리너 루즈벨트, 벨기에 대표단장이며 유엔 총회 의장인 스파크(Paul H. Spaak), 중국대표단장 웰링턴 구(Wellington Koo), 필리핀 대표단장 로물로(Romulo) 장군, 뉴욕교구 스펠먼(Spellman) 추기경 등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한반도에는 중대 상황이 급속히 전개되고 있다. 수많은 적색 테러리스트들이 북에서 침투하여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전국 각지에서 방화, 살인 등 잔학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부디 유엔 총회가 한국의 과도정부를 승인하도록 요구해주기를 간청한다. 승인만 받으면 우리는 유엔과 직접협상할수 있는 지위를 얻게 된다. 중립을 표방하는 미국인들은 사태수습이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승인된 정부를 갖지 못한다면 남한을 지킬 수 없다”
 
동시에 이승만은 친분 맺은 [뉴욕타임스] 발행인 설즈버거(Arthur Sulzvberger)에게 “미국의 중립적 태도가 우리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전보를 치고, 존슨(Richard Johnson) 기자를 한국에 다시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가장 중요한 사람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에게 “개인적으로 한국에 와달라”면서 형편이 안되면 자신을 일본에 초청하여 단독회감을 갖자“고 요청하였다.
(하지 정치고문 랭던이 번스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Langdon to Bynes, 1946, 12.10 수신. FRUS 1946 vol.Ⅷ]). 
미군정은 9월쯤 이승만에게 미육군특수우편(APO) 이용 특혜를 베풀면서 이승만의 국제우편을 빠짐없이 검열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 알면서도 ”너희가 보고 각성하라“는 듯이 솔직한 외교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임병직의 전문이 국내 신문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9일과 12일의 전보는 다 잘 받아 임영신에게 바로 전했습니다. 임은 다대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접촉하는 이마다 극력 협력해줍니다. 필리핀 대통령의 답전을 받은 바, 뉴욕의 자기나라 대표에게 훈령하여 한국의 제의를 응원하라 했는데, 유엔총회 순서에 우리 문제를 넣어야 되는 고로 이를 도모합니다. 국내동포들이 우리 활동을 듣고 흥분한다니 기쁩니다. 전보로 보내주신 선언이 극히 도움이 됩니다. 모든 신문들이 열정으로 후원하여 우리 소식을 알려고 합니다.“(’조선문제 UN상정 내정‘[조선일보]11.23)
 
이처럼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에게 유엔의 각국대표단에 배포할 선언문까지 직접 작성하여 보내는 등 서울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 미군정의 입법의원 설립에 즈음하여 이승만은 워싱턴 한국위원부에 홍보와 로비활동도 강화시키며 독려한다.
”미군정이 신설한 입법의원을 한국정부로 인정하라고 미국무부에 강력 요청하라“
이와 함께 ’모스크바 신탁통치 결정‘의 폐기를 주장하라는 전보는 열두번이나 보낸다.
때마침 영국 베빈(Ernest Bevin) 외상이 의회연설에서 ’38선은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고 발언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조선일보] 1946, 10.26), 이승만은 임병직에게 ”얄타회담 비밀협정 전문을 공개할 것을 미국무부에 요구하라고 재촉하였다.
동시에 카이로 선언,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결정을 즉시 최소하라고 이승만이 직접 나서서 주장하였다.

▲ 미군정의 입법의원 개원식. 의장 김규식이 개회사를 읽고있다. 장소는 옛 일본총독부.

▶미군정, 입법의원 선거...이승만 지지자들 압승...김규식, 재선거 요구
 
스탈린의 지령에 따른 10월폭동이 전국을 휩쓸던 10월7일, 미군정은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하고 12일엔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법령118호)을 공포하였다. 소련과 신탁통치를 위한‘임시한국민주정부’를 합의하여 수립할 때까지 “남한 미군사령관의 정책을 도와주는 입법자문기구를 설치하라”는 본국의 새로운 대한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공산당의 반대는 물론, 모든 정파의 찬반 격론 속에 한국최초의 국민참여선거(간접선거)가 진행된다. 이승만은 이미 국민대표기관 민주의원이 건재한데도 자신을 포함한 우익진영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좌우합작용 입법의원’ 설립에 대하여 “민족통일총본부와 독촉국민회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 그러나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은 각자에게 맡긴다는 기본 입장을 밝혔다.
입법의원 의원수는 선거로 민선 45명, 미군정이 임명하는 관선 45명으로 90명이다.
10월 30일까지 치러진 선거결과는 이승만 계열의 압승이다. 45명중 34명(독촉국민회 17명, 한민당 14명, 한독당 3명) 당선, 무소속 9명, 좌익은 제주도 2명뿐이었다. 공식적으로 ‘단체 불참’을 밝혔는데도 국민은 이승만 지지임이 드러났다. 이승만도 당선되었다. “누가 추천했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불참한다”며 당선을 거부하였다. ([서울신문] 1946.10.31)
기대이상의 선거결과에 흐뭇한 이승만은 선거를 취재하러 온 미국기자 게인(M. Gayn)과 [뉴스위크]의 여기자 에브너(Charlotte Ebener)를 돈암장에 초청, 하지의 부관과 한민당 김성수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게인이 “두 지역에서 이박사 지지자들이 당선되는 것을 보았다”며 축하하자 이승만이 답했다. “우리 인민은 나와 함께 있소이다.” 
선거에서 자기사람이 단 한명도 당선되지 못한 김규식은 뒤늦게 뿔이 났다. “이번 선거는 사기다. 좌익 지도자들이 감옥에 있어 출마도 못했으니 공정하지 않다. 서울과 강원도가 특히 편파적인 결과이므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 이승만 추종자들의 대거당선에 실망이 큰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하지 사령관을 닦달하였다. 
하지(John R. Hodge)는 11월25일 “서울과 강원도 선거 무효”라 선언하고 재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관선 45명에 김규식파와 민주동맹 김약수 등 좌파 일색으로 구성한 명단을 발표한 미군정은 12월11일 미군정청(옛 일본총독부) 대회의실에서 의장에 내정한 김규식을 선출시키고 입법의원 개원식을 열었다. 한민당이 “비민주적”이라며 불참하자 미군정은 ‘정족수 규정’(전의원 4분의 3)을 ‘과반수’로 바꾸면서까지 밀어붙인다. 오로지 ‘좌우합작을 위한 입법기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입법의원의 첫 공식 업무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 일동’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친 것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전 민족이 단결하여 미소공위 재개 촉진과 남북통일임시정부의 조속 수립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자” ([조선일보] 1946.12.14.)   

▲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사진은 1948년 8월15일 건국정부 선포 경축식때 모습.

◆이승만 미국행...맥아더와 단독회담...미국에 ‘한국 해결책’ 제시
 
미국정부가 한국의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까지 실시하는 등 좌우합작을 강행, 소련에 일방적 구애(求愛)를 벌이는 추태를 보자 이승만은 격분한다. 미군정의 비굴한 모습은 스탈린이 좋아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의 행태 그대로였다. 
11월22일 하지를 방문한 이승만은 “한국문제가 유엔에 제출된 마당에 좌우합작을 포기하라”고 요구, 불응하면 하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가 화를 내며 거부하자 이승만은 “내가 당장 미국에 달려가 미군정의 실책을 폭로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서 통과시키도록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어 방미계획을 발표한다. ([동아일보]1946.11.23.)
 
★도쿄에서 맥아더와 장시간 대좌...“가장 중요한 밀담”
 
이승만의 도미 환송회는 가히 국민적 행사였다. 미국과 소련에 막혀 출구를 모르는 한국독립문제의 돌파구를 뚫어 유엔 총회에 상정하게 만든 이승만이야말로 ‘국민 영웅’이 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국민족대표 외교후원회가 잔치를 베풀고 전국학생총연맹이 지지집회를 열었다. 민통총본부는 여비를 마련하고 국민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승만에게 모아준 방미활동비는 후원회 147만4,820원(미화 약 3만5천달러)와 민주의원 50만원(미화 약1만달러), 그동안 받은 정치자금 중 최대금액인데 이 액수의 증빙자료는 이승만이 여행중 꼼꼼하게 기록한 영수증철이다. 이승만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부터 그런 ‘기록의 왕’이었다.
 
이승만은 12월4일에야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이 주선해준 미군용기를 타고 김포를 떠났다. 
가장 중요한 회담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단독회담이다. 오후 5시30분에 만난 두 사람은 장시간 한국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뒷날 미국정부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비밀회담이었다고 연구자들이 평가하고 있다.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6권, 앞의 책.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출판부,2003)
이런 평가는 이승만의 평소 주장을 모아보면 필자도 넉넉히 공감한다.
▶미국의 좌우합작 추진은 헛수고다. 공산독재 소련은 좌우합작을 수용하지 않는다.
▶북한에 이미 단독정권을 세운 스탈린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남한까지도 미소공둥위를 이용하여 공산화하려고 반탁세력의 남북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지 않는가.
▶소련이 분단을 고착시키고 미군이 물러나면 무력침공도 불사할 것이므로, 미국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으려면 지금 미리 미국이 소련에 ‘선전포고’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미소공위 협상은 포기하라. 내가 정읍선언에서 말한 과도정부를 미국은 빨리 세우도록 지원하고 국제지지 확보를 위해 유엔이 과도정부를 승인케 하여 자유세계의 힘을 합쳐 소련을 추방해야만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임을 명심하라.
참고로 이승만의 소련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이 또 있다.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의 글이다.
“소련문제의 경우, 이 박사는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는 길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각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 미국이 어리석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는 만약 지금 소련의 야망을 이대로 묵과하면 조만간 과거 일본을 키워준 것과 같은 종류의 침략세력을 키우는 꼴이 될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견해가 맞을 지도 모른다는 것, 이곳의 미국인들도 한결같이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상권, 비봉출판사, 2013)
 
---이상과 같은 주장은 이승만의 책 [JAPAN INSIDE OUT] 이래로 이승만이 펼친 일관된 지론이다. 맥아더와의 회담내용을 알 수 없다 해도 반공주의자 맥아더는 상당부분 동의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것은 한 달 뒤 1월 국무장관에 임명된 마셜(George C. Mashall Jr.) 장군이 친구 맥아더 장군의 요청을 수용하여 몇 달 지난 가을에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데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10시 맥아더와 헤어져 일본을 출발한 이승만은 하와이에 들러 헐(John E. Hull) 장군(뒷날 주한 유엔군사령관) 휘하의 의장대를 사열한 뒤 12월7일 워싱턴에 도착, 각국 정부요인들이 많이 투숙하는 칼튼 호텔(Carlton Hotel)에 숙박, 대미 여론전을 개시한다. 

▲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의 저서 [이승만의 대미투쟁] 표지와 올리버의 두 모습.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이 결정해야”...이승만 활동을 미국무성이 차단
 
미국 기자들이 호텔로 몰려와 왜 왔느냐고 질문공세를 펴자 이승만은 말한다. 
첫째, 긴급한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에서 토의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미국정부가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한국인자신의 정부를 즉시 수립하도록 도와주고 승인하도록 요청하러 왔다. 
이에 애치슨 국무차관이 재빨리 반응했다. “대한정책은 달라진게 없으며 미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다” 그러자 그러자 이승만은 도착성명이란 이름으로 반박문을 발표한다. “통일도 없이 미군이 머문다면 한국은 미국의 점령국인가. 나는 한국문제가 미국의 힘에 의하여 해결되리라는 희망아래 한국인들의 궐기를 억제하고 있다” ([조선일보]1946.12.12.)
 
유엔 총회의 참석을 신청하고 기다리던 12월10일 미국무부는 한국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이 ‘공식자격’을 갖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 유엔 총회참석을 봉쇄해버린다.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의 길도 막혀버렸다. 이에 개의치 않는 이승만은 본래목표 미국정부, 의회, 언론을 통한 여론작전 팀을 구성한다. 
칼튼 호텔 이승만의 스위트룸은 작전사령부, 유학시절부터 멘토인 해리스(Frederick B. Harris) 상원 목사, 오랜 친구 스태거스 변호사, 언론인 윌리암스(Jay Jerom Williams), 굿 펠로 대령, 우달(Emory Woodall) 대령, 올리버(Robert Oliver) 교수, 임병직, 임영신 등은 전략회의를 구성하고 로비 대상 인물들을 분석 점검하며 작전 스케줄을 짰다.
특히 이승만은 트루먼의 부통령때 절친 상원 원목 해리스를 통하여 트루먼과의 면담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마셜이 국무장관에 임명(1.21)되자 면담신청을 하고 유엔의장 스파크등과 만나려 하였으나 미국무부 알저 히스등 친소세력은 반소주의자 이승만이 ‘공적자격’(official status)이 없다는 핑계로 번번이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문제 해결책’ 6개항을 작성하여 올리버로 하여금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John Vincent)에게 건네주도록 시켰다. 그 6개항은 다음과 같다.
1)분단된 한국이 통일되고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을 다스릴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를 선거를 통하여 수립할 것.
2) 과도정부를 유엔에 가입시킴으로써 미-소 양국군의 철수 등 주요문제를 직접 협상.
3) 한국 경제 복구를 위해 일본의 배상청구를 서두를 것.
4) 모든 나라와 평등하고 전면적인 통상권을 한국에 부여할 것.
5) 한국의 통화 안정을 위해 국제외환제도를 수립할 것.
6) 미-소 양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국 안보군(security troops)을 주둔시킬 것.
이 가운데 주요한 1-2-6항은 바로 ‘정읍선언’을 영문화한 것이었고, 특히 3개항이 경제항목인 점이 뒷날 이승만 집권시 대일협상과 외환관리를 직접 총괄한 것과 관련하여 눈길을 끈다.(손세일, 앞의 책). 
 
올리버로부터 ‘한국문제 해결책’을 받은 빈센트는 마셜 장관과 국무부 점령지역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H. Hildring) 소장에게 전달하였다. 힐드링은 맥아더와 가까운 사이로 이승만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이때 이승만은 올리버(시라큐스 대학교수)를 불러 ‘개인 대변인’(personal representative)이 되어주기를 요청, 월1,000달러 고용계약을 맺었다. 1월중순 가족을 데리고 워싱턴으로 이사한 올리버는 그때부터 1960년 이승만의 자진사퇴 때까지 13년간 대통령의 외교-홍보 보좌관으로 일하였고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의 대미투쟁] 등 현장역사 증언과 기록을 남겨 대한민국 현대사의 귀중한 사료로 남겨주었다.

▲ 임영신의 유엔외교를 도와준 엘리너 루즈벨트(왼쪽)과 한국문제 유엔 사정을 약속했던 초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

★하지, 이승만의 신년사 보도금지...이승만은 “미국이 변하고 있다” 
 
1947년 새해 아침, 미군정은 이승만이 보내온 ‘신년사’를 가로채어 보도를 금지시켰다.
이승만 소식이 궁금한 독자들은 신문에 유독 이승만 신년사만 빠져 어리둥절 더 궁금해졌다. 
이승만은 민통총본부로 신년사를 타전했는데 그것을 본 하지가 펄펄 뛰었다고 한다. 
“미국과 거의 모든 유엔국가들의 여론이 한국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즉시 독립하겠다는 한국인의 결심을 보고 트루먼대통령도 한국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한 나머지 
어떤 새로운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맥아더 장군도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국무부 안의 몇몇 유화주의자들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방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과 독립을 위한 우리의 능력을 세계에 증명해보
일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승만 신년사 주요내용, 하지가 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Hodge to Byrnes] 1946.12.31. FRUS 1946, vol Ⅷ)
 
국제정세를 꿰뚫는 예리한 선견지명자 이승만은 이런 편지도 보냈다.
“미국의회가 반공주의적인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었으므로 미국의 대소련 정책도 변경될 것으
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대한 정책도 바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바라는 쪽으로 달라
지도록 우리도 노력해야 한다. 국내 모든 언론기관과 단체들은 맥아더 원수로 하여금 한국 방
문 시찰토록 요구해서 그가 일본에서 햄함과 같은 시정을 우리에게도 해달라고 요구하라.....
마셜 원수가 국무장관에 피임된 결과 미국 내의 여론은 장차 극동정책에 일대 변동이 있으리
라...” 이 편지 내용은 국내신문들에 크게 보도되었다.([동아일보] 1947.1.11.)

▲ 미육군 동료이자 친구인 맥아더 사령관과 마셜 국무장관.(오른쪽)

★마셜, 한국 정부수립에 긍정적...힐드링, 이승만 제의에 적극적
 
2월15일 마셜 국무장관은 애치슨 차관에게 3부 정책조정위원회(국무부-육군부-해군
부:State-War-Navy Coordination Commission:SWNCC) 산하에 ‘한국문제 특별위원회’를
설치 가동하고 그 결과를 보고 하라고 지시한다. 이어서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게 남한
에 확정적인 정부(a definite government)를 수립하고 이 정부를 일본에 연계시킬 방안을 강
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남실록],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앞의 책).
이때 올리버는 힐드링을 거의 매일 만났는데 힐드링은 “나도 생각이 있다. 이승만 박사의 ‘한
국문제해결책’과 아주 비슷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서 힐드링은 이
승만을 직접 몇차례 만나 서로의 구상을 논의하였다. ([Interview between Dr Syngman
 Rhree and General John Hildring]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소장문서, 올리버 [이승만의 대
미투쟁] 상권, 비봉출판사, 2013).
 
★김구의 두 번째 ‘쿠데타’...임시정부 집권 승인 요구 해프닝
 
이 무렵 서울에서 또 하나의 ‘정변’이 일어난다. 
이승만의 신년사에 화가 난 하지 사령관은 미소공위 재개문제에 대하여 북한의 치스차코프 소
련 사령관과 주고받은 편지를 공개하였는데, 이것은 끝난 줄 알았던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미
를 보임으로써 우익단체들에게 ‘반탁 시위’ 불을 지른 셈이었다.
김구 또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위가 시작되자 이승만의 기세에 한동안 눌려있던 ‘임
정봉대론’(臨政奉戴論)이 고개를 들고 아예 ‘임정봉대운동’을 또 다시 전개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민통총본부, 독촉국민회, 비상국민회의 3개단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자. 그중에 비
상국민회의가 수십년래의 독립운동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니 세 개를 단일화하여 독립운동의 최
고기구로 개조하기를 주장한다.”(2월8일 김구 성명서)
요컨대, 김구의 비상국민회의로 단일화하여 임시정부가 집권하자는 말이다.
김구는 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창덕궁에서 전국대의원대회를 열어 ‘3개단체 통합’을 결의하고 
명칭도 ‘국민의회’로 바꾼다. 바로 임시정부시절의 임시의회를 부활시킨 것이다.
3월1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는 “임시정부를 법통정부로 추대”한다고 선언, 3월3일 국민
의회는 ‘이승만 주석, 김구 부주석’으로 추대한 정부를 구성하여 발표하였다. 김구는 5개연합
국에 자주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5일천하’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김구에게 급전을 보낸다. “내가 귀
국할때까지 기다리시오. 섣부른 행동은 삼가시오.”
미국 CIC와 군정 경찰은 경교장과 운형궁의 국민회본부를 수색하고 김구와 이시영등 4명은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불려가 장사간 추궁을 받았다. ([조선일보]1947.3.6.~9)
이렇게 하여 김구의 ‘미군정타도-임정집권’ 집념은 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김구의 의도와 달리 임시정부를 저항단체가 아닌 하나의 정치정당으로 조용히 바꾸
어 나갔다. 이승만과 김구는 두 번 다시 서로 합작하지 않았다.” (올리버, 앞의 책).

▲ 트루먼 미국대통령(가운데)이 떠나는 국무장관 번스와 신임 국무장관 마셜(오른쪽)과 함께 하고 있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마셜 국무장관은 “남한에 독자정부 수립 용의” 
 
3월12일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미국의 소련정책을 지금까지의 유화적인 협력정책에서 봉
쇄정책으로 전환한다는 연설을 했다. 소련이 공산화 혁명을 시도하는 그리스와 터키에 4억달
러의 경제-군사 원조 승인을 요구하는 연설에서였다. 곧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게 되는 미
국의 대변신, 바로 이승만이 두 달 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예견한 ‘미국의 변화 그것이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이승만은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각하께서 행하신 역사적 연설에 대해 충심으로 공하(恭賀)합니다. 각하께서는 자유를 애호하
는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용감한 입장을 선택함을 
계기로 남한의 미군정당국이 각하의 정책을 받들어 ’좌우합작‘ 운동을 포기하도록 지시해주기 
바랍니다. 한국은 그리스와 같은 전력적 위치에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인들은 
각하의 감동적인 연설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미군 점령지역에 과도적 독립정부가 수립된다
면 그 정부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방파제(bulwark)가 될 것이며 남북한의 통일을 앞당
기는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Syngman Rhree to Harry Truman, March 13, FRUS 1947 
vⅠ)
 
이제야 소련의 침략주의에 눈을 뜨고 행동에 나선 트루먼에게 이승만은 감사와 함께, 좌우합
작이 시간낭비임을 깨우쳐주고 싶어 한반도의 지정학적 전략 가치를 ’반공 방파제‘라고 강조
해 가르쳐준다. 
다음 날, 마셜 국무장관이 한국문제를 거론하면서 소련이 협조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을 처음 
공언하였다. 그리고는 남한에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우남실록]
유영익, 앞의 책). 이승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서한을 받은 트루먼으로부터는 반응이 없었다. 국무부에서 이승만의 편지에 
“응답하지 말라”는 꼬리표(notation)을 붙여 백악관에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 트루먼 독트린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 1면.

이승만의 선수 외교—NYT에 ’폭탄 성명‘ 발표
 
이제 그만 돌아가자. 하지만 4개월간 외교-홍보 등 혼신을 다해 노력했건만 백악관도 국무성
도 공식적인 견해발표를 듣지 못했다. 국무성의 소련 간첩 등에 당하던 때가 떠오른다. 지금
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다. 
3월22일 [뉴욕 타임즈]에 깜짝 놀랄만한 성명서가 보도된다. 이승만이 발표한 것이다.
요점은 “미국 정부가 남한에 과도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 한미양곡
이 정부수립에 협력하기고 하였다”는 주장이다. 
「남한의 독립은 곧 기정사실화 될 것이다. 4천년동안이나 지켜온 독립을 회복하려는 한국인의 
기나 긴 투쟁은 이제 결정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 같다. 그 새로운 프로그램의 기
본요소들(basic elements)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상 합의를 이루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소련이 북한에서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게 하고, 한반도 전체의 
통일과 완전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기에 한-미 양국간 협력기반을 튼튼히 마련하는 것이
다. 기본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향후 30~60일 이내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2) 과도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엔에 가입하며, 워싱턴DC와 각국 수도에 대표부를 설치
   한다.
3) 미국은 남한에 대사급 고등판무관을 파견한다.
4) 북한에서 소련군을 철퇴시킨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안정적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은 안보군으로서 남한에 주둔한다.
5) 한국의 부흥을 돕고 파멸적인 남북분단으로 야기된 경제적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미국은 
   대규모의 차관을 남한에 제공한다. 
6) 남한 과도독립정부는 각 부처에 미국인들을 고문관으로 기용할 수 있다.
 
이들 요소들은 이승만이 마셜이나 힐드링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와 자신의 구상을 버무려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방미외교에서 협의-합의하고 싶었던 항목들을 미당국과 못했던 대신
에 일방적 성명서로 공개한 것, 이는 미국정부가 한국독립을 위해 수행해야할 최소한 의무와 
희망사항들을 나열한 것이었다. 
애치슨 국무차관은 재빨리 나서 “이승만 개인의 가정(suppositions)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과연 그런가? 이승만의 ’가정‘중 정부수립은 불과 1년후 거짓말처럼 현실로 재현된다. 간절히
소원하면 이루어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미리 보는 눈은 다르다.
 
애치슨은 득달같이 이승만이 예약한 일본행 미군용기 탑승권을 최소시켰다.
이승만은 웃었다. 행방직후 귀국 때도 당한 일, 사흘 뒤 힐드링이 따로 주선해준 민간여객기
편으로 도쿄 맥아더를 만나러 떠난다.
 
4월6일 이승만은 이번에도 도쿄에서 맥아더와 두시간 넘게 회담하였다. 미국으로 떠날 때와 
한국으로 돌아올 때 두 차례 비밀회담, 그 결과는 5개월 뒤 9월16일 마셜의 “한국문제 유엔
이관”으로 나타난다. 

▲ 방미외교에서 돌아온 이승만. 오른쪽부터 프란체스카, 이승만, 중국서 동행한 이청천, 김구, 김규식.

★이승만 귀국 성명 “북한을 하루바삐 해방시키자”
 
맥아더가 마련해준 비행기를 탄 이승만은 곧장 귀국하지 않고 중국 남경으로 장제스를 찾아갔
다. 최초의 만남이다. 상호협력을 다짐한 뒤 6일간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승만이 4월21일 귀
국할때 장제스는 20만 달러를 기증하고 전용기 자강호(自强號)까지 제공한다. 
이승만의 방미외교 성공을 축하하는 국내 분위기는 환송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었
다. 당시 미 정보당국 근무자 로빈슨(Richard D. Robinson)은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의 계량
기가 폭발직전에 이르렀다”고 써놓았다. (리차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1988)
 
이승만이 귀국 기자회견과 도착 성명, 4월27일 대대적 환영식에서 말한 요지는 더욱 단호하
다. 미국이 반공으로 선회하며 미-소 대결의 냉전 국면이 ’자유한국‘ 건국의 길을 밝혀주지 않
는가. 평생 불굴의 신념이 개척한 글로벌 리더십의 카리스마가 한층 빛을 뿜는다.
 
◉과도정부를 하루 바삐 세워 연합국들과 협력, 38이북을 하루 바삐 해방시키자.
◉좌우합작이란 구실로 통일을 방해하는 행동이나 언론을 일절 하지 말라.
◉입법의원은 하루 바삐 총선거 법안을 만들라.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하지 말라.
 
이승만이 불지른 ’건국 분위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건국‘까지는 ’시련의 1년‘을 더 견뎌내야 할 운명이 가로막고 있음에랴. 
미국의 전략부재 우유부단과 스탈린의 무서운 ’공작‘ 때문이다.  

 

이승만 건국사(47) 하지, 이승만을 연금...한민당의 ‘배신’...서재필 귀국...이승만은 마포장 '유폐'...암살 모면...이화장으로

▲ 1947년 4월 미국 외교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미군정 하지 사령관(왼쪽)을 방문하여 요담을 나누었다. 그 다음달 하지는 이승만을 돈암장에 가택연금한다.ⓒ국사편찬위

‘돌아온 국민영웅’ 이승만의 방미외교 성공을 축하하는 광고들이 신문에 넘치던 무렵,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를 앞둔 미국무장관 마셜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에게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美蘇共委)를 재개하자고 제의한다. 
지난 3월 유럽의 소련침략 방어정책 ‘트루먼 독트린’ 발표와 함께, 뒷날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유럽 재건사업을 입안한 마셜은 한반도에서도 소련의 공산화 공세를 막아내는 해결책을 조속히 강구해야하기 때문이다. 방미한 이승만의 면담요청에 미국정책상 응할 수는 없었지만 이승만과 맥아더가 보내준 ‘한국문제 해결방안’ 문건을 받은 마셜이 이를 비공식적으로 검토를 거듭해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몰로토프가 5월8일 미소공위 재개에 동의하였다. .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5월15일 미소공위가 재개된다고 공식발표한다. 그리고는 “이번엔 양국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우익세력들이 미소공위 협의대상 그룹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죽어도 반탁’을 고집하는 이승만을 돈암장(敦岩莊)에 가택연금 시킨다.
 
“이승만 박사는 봄부터 여름까지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전화도 철거되고, 헌병들이 24시간 그의 집을 감시했다.
모든 우편물은 검열 받았고, 매주 방송하던 라디오 담화는 중단되었다.
그를 만나러 한국에 온 방문객들은 못 만나도록 조용 받거나 방해받았다. 
이 박사가 국민들을 접촉할 모든 수단이 막혀버렸다.
하지 군정청은 그러나 이 박사가 남한 전역에 확립해 놓은 광범위한 정치조직까지 제거하거나 억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워싱턴에 있는 우리와 같은 이박사 지지자들의 활동도 막지 못했다.” (로버트 T. 올리버 지음, 한준석 옮김 [이승만의 대미투쟁] (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비봉출판사, 2013)

▲ 방문객도 금지되고 전화도 끊어진 돈암장에서 정원을 거니는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하지의 ‘불변의 법칙’=흔히 행방정국의 ‘앙숙’으로 불리는 하지와 이승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저해한 것은 “그들의 성격 탓이 아니라 정책 때문“이었다고 올리버는 지적한다. 그것도 정책자체보다 미국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맡기는 ‘채널’을 잘못 선택한 미국 정부의 ‘실수’의 문제라는 것. 즉 하지 사령관은 그 채널에 맞지 않는 ‘잘못된 배역’(miss-cast)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하지는 충성스러운 야전사령관, 평생 정치는 관심도 없던 군인인데 정치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미-소 대결의 국제정치를 맡겨놓았다.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 밖에 모르는” 장군은 그에게 주어진 ‘미소공위의 성공’이란 ‘사명’ 앞에서 이를 시비하고 저지하려는 이승만은 미국의 승리를 가로막는 ‘적’이나 다름없다. 맥아더가 일본을 좌지우지 하듯이 하지도 ‘작전지역‘ 남한을 한손에 쥐고 달린다. 그는 직속사령관 맥아더를 넘어 번스 국무장관이나 대통령 트루먼에게 ”이승만은 개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을 괴롭히는 방해꾼이니 제거해 달라“고 몇차례나 직소하였다. 그에게 미소공위는 ’불변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올리버, 앞의 책)
 
이 ’불변의 법칙‘이 변화하고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변화를 감지하는 하지도 일단 임무는 완성해야하는 ’군인정신‘으로 이승만을 감금하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감금한 것은 한미양국에 가장 중대한 실수였다고 올리버는 탄식한다. 

▲ 1947년 5월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리셉션에서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오른쪽)를 만나 대화하는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왼쪽). ⓒ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미국식 민주주의냐? 소련식 민주주의냐?“
 
미고공위 재개에 대비하여 미군정은 우익정파들 설득에 나섰다.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Albert F. Brown) 소장은 이승만, 김구, 조소항, 김성수, 백남훈, 장덕수, 서상일 등 8명을 덕수궁으로 불러 타협안을 제시한다. 신탁통치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남북한임시정부를 먼저 구성할 테니 ”반대는 그만하고 꼭 참여해 달라“고 3시간이나 호소하였고, 이튿날엔 하지가 직접 나서  2시간 넘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하지를 향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입장을 천명한다.
”신탁통치문제를 미루지 말고 아예 그 조항을 삭제하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통일임시정부가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 정부‘인지를 명시하기 전에는 참가할 수 없다.“
이에 다급한 하지는 국무부에 설득용 성명이라도 내달라 건의했으나 국무부는 거부한다.
이승만은 우익세력에 행동통일을 다짐하고 나서 5월21일 단호한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미소공위 임무수행에 다음 두가지 조건이 명시되기 전에는 양심상 참가 못한다.
1) 소위 신탁통치와 임시독립정부와는 모순되므로 신탁통치 조겅을 전부 삭제하라.
2) 미소 양국이 한국에 민주주의적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바, ‘민주주의’라는 명사에 2종의 구별이 있으니, 소련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정체가 그 하나요 미국에서 실행되는 민주정체가 그것이다. 이 두가지 중에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겠다. 소련식 민주주의냐, 아니면 미국식 민주주의냐, 이 두 가지를 혼잡해서 정체를 세원다면 장래 분열과 혼란을 면키 어려우며 열국의 기대에 어그러지게 되는 까닭이다. 이 2개 조건이 해결되기까지 우리는 참가를 보류한다.“ ([조선일보] 1947.5.23.)

▲ 한민당 총수 김성수(왼쪽)와 이승만이 담소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뜻밖에 한민당이 ’배신‘...”국민도 자신도 속이지 말라“
 
미소공위가 ’정부수립‘부터 한다며 설득하자 반탁투쟁을 벌이던 우파 진영은 크게 동요한다. 
이참에 불참했다가는 새로운 정부에서 제외될 것이고 그동안 투쟁도 보람없이 ”닭 쫓던 개“처럼 권력에서 밀려나 수십년 독립운동도 헛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돈암장에 김성수, 장덕수, 김준연 등 한민당 인사들은 연일 돈암장에 몰려와 이승만에게 강력히 ’참가‘를 주장하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때마다 ’보류‘로 못을 박곤 하였다. ([동아일보] 1947.6.1.) 5월30일 또 다시 한민당 간부들이 졸라댔을 때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 날 이승만이 마지못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가 하는 말이 내가 방해꾼이라 하니, 귀하들에게 참가하지 말라고는 안하겠소. 다만 나는 불참할 것이니 각자 알아서 자유의사대로 결정하면 되지 않겠소“
한민당 인사들은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드디어 ’참가 명분‘을 얻었다는 듯 그들은 ”신탁통치문제는 미소공위에 참가해서 반대해도 될 것“이라 다짐하며 신나는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아연했다. 이럴 수가...혼자 남은 이승만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왜놈이라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야...“  내 뜻을 아는 자들이 ’설마‘ 했던 이승만은 몹시 낙담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비서 윤석오(尹錫五)의 증언 [경무대 4계], 손세일, 앞의 책). 지도자의 신념을 잘 아는 정치집단이 말한마디를 핑계 삼아 적대적 권력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등을 돌린 ’집단배신‘을 이승만이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한민당은 6월6일 담화를 발표한다. 
”공산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정부가 되고, 신탁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정부가 되기 위하여 미소공위와 협조하는데 참가함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김성수와 장덕수는 반도호텔 하지를 방문 요담을 마친후, 6월10일 ’미소공위 참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른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미소공위에 들어가 관절코자 함이다“ 주언부언 궁색한 설명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다.
 
이승만은 즉각 한민당의 행태를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공위에 참가해서 신탁에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나로서는 해석이 곤란하다. 차라리 신탁을 지지하기로 결심하고 들어갈 것이니, 서명은 지지를 말함이오,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신의를 스스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들이 국제회의석상에 우리 대표로 참가하는 것도 원치 않거니와, 설령 자기의 마음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 들어간다 해도 반대할 기회를 허락받지 못할 것인 즉, 공상으로써 인심을 현혹케 하는 것은 공사간에 유해무익일 것이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한민당 인사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다음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때 건국내각에서 한민당의 총리 등 입각요구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앞의 책)

▲ 50년만에 인천으로 귀국한 미국시민권자 서재필(가운데)을 마중간 '좌우합작 대표' 김규식(왼쪽)과 여운형이 한차에 탄 모습.

★서재필, 50년 만에 귀국...하지, ”이승만 물리칠 대타” 초청
 
장마철 하늘이 잔뜩 흐린 날 7월1일 오후4시, 인천항 부두에 말쑥한 양복차림의 미국신사 한명이 배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김규식과 여운형 등이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그는 85세 필립 제이손(Phillip Jaisohn), 50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1864~1951) 박사였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미국에 망명, 의사가 되어 미국여인과 결혼하여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가 1895년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 중에 1897년 추방되어 도미, 이번엔 하지 사령관의 초청으로 왔다. 하지는 이승만의 측근 올리버에게 서재필을 설득하여 데려오라고 부탁하였다. 반소주의자 이승만 대신, 이승만의 스승 미국인 서박사가 좌우합작을 지원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처음에 사양하던 서재필이 나타난 것이었다.
 
서재필의 귀국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혼자서 중얼거렸다고 한다.
"공산당과 합작 성공을 위해서 모셔온다고? 서재필 아니라 서재필 할아버지를 데려와봐라, 그게 되나.." (윤석오의 증언 [경무대 사계] 동양방송, 1977)
 
7월12일 서재필 박사 환영대회가 서울 운동장(현재 DDP)에서 열렸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이 환영연설을 했다. 거리에는 환영 현수막이 걸리고 여러 가지 전단이 뿌려졌는데 서재필 박사에게 “과도정부 대통령직을 수락하라”는 내용이 많았으며 이를 위해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지 장군이 이승만 박사를 퇴진시키려고 서재필 박사를 데려왔다고 말했다. 
서재필은 공개석상에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국을 돕기 위해서라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대답하여 ’이승만 대타 서재필‘이란 인식을 강화시켜주었다.
그런 그가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기자회견에서 “한국인들은 비누 한 개도 제대로 만들줄 모르는데 어떻게 자치(自治)를 할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모두 놀랐다고 한다. 
하지의 기대감과 현실의 한계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던 필립 제이손은 복잡한 정쟁 속을 헤매다가 더 견디지 못하고 점차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미군정의 일부 한국인들은 실제로 이승만을 거부하는 나머지 하지를 부추겨 ’서재필 대통령‘을 추진하였고, 노쇠한 서재필이 도미하자 “미군정의 연장”까지 획책했음이 뒷날 드러나고 만다. 서재필은 6.25때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1951년 1월5일 제2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 1947년 8월 이승만이 사실상 유폐되었던 집 '마포장'의 위치 현재 모습, 새 건물에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조선DB

★“집 비워달라” 돈암장서 쫓겨나...‘마포장’ 유폐...‘이화장’으로 이사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돈암장의 집주인 장진섭(張震燮)이 윤치영에게 말했다.
“그만 집을 비워주시오. 내가 써야겠소” 장진섭은 이승만의 거실까지 자기 물건들을 들여놓았다. 하지의 사주(使嗾) 여부는 알길이 없지만, 미군정과 불화한다는 말을 듣고 나온 행동임이 분명하다. 윤치영은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실감하며 새집을 물색하겠다고 답했다.(윤치영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81.9.12. 손세일, 앞의 책)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으나 마당한 집을 찾지 못하고 결국 미군정에 수소문하여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마포지역 한강변 언덕에 일본총독부 정무총감이 여름 별장으로 쓰던 집, 미군 진주후엔 미군 대령이 기거하다가 떠나고 텅 비어있는 집이다. 
[동아일보]는 이승만 박사가 8월18일 마포로 이사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부터 ‘마포장’으로 불린 집엔 이승만 부부와 비서 3명(이기붕, 윤석오, 황규면)이 들었는데 집안이 정리되지 않아 짐도 다 풀지 못했다고 한다. 비서 윤석오의 증언을 들어보자.(윤석오의 증언).
이승만이 작업복으로 갈아있더니 팔을 걷어부쳤다. 문을 닫아도 맞지않자 비서에게 연장박스를 가져오라 말했다. 하와이에서 쓰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연장이 가득한 상자에서 망치와 대패를 꺼내더니 문짝을 떼어내 자로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다. 숙련공 같았다.
문을 달아 맞춰놓고는 씨익 웃은 이승만은 정원으로 나갔다. 버려진 고목을 도끼질로 쓰러트려 치우고 무성한 잡초를 모조리 뽑는 것이었다. 그것도 능숙한 목수처럼 정원사처럼.
 
‘마포장’에서 사실상 유폐생활하는 이승만은 명상과 사색으로 건국 구상을 다듬는다. 
지금도 보존되어있는 ‘정부수립 성명’이란 문서는 붓글씨 친필로 '토지개혁'까지 다짐한다. 
“이번에 세울 과도정부는 북한에 소련이 설립한 정권이나 남한에 미국이 설립한 민정부 등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총선거로 정식 정부를 하루 속히 건설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하고 정식정부가 수립되면 모두 자동적으로 해체한다고 셜명한다. 그 새 정부의 과제는 38선 철폐와 미소 점령군 철수 등 9개항으로서 ★파괴-분열-반역 분자 제재 특별법 제정 ★친일분자-사대주의 분자 처벌 특별법원 설치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여 지주도 소작인도 손실이 없게하는 토지개혁 등이 두드러진다.

▲ 이화장 뒷편 언덕에 서있는 조그만 정자, 이곳에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내각을 조직하여 '조각당'이란이름이 붙었다.

★또 암살음모 적발=이승만은 직계조직 ‘독촉’을 총동원하여 선거 채비를 서두르고,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는 임정세력으로부터 김구를 떼어내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 무렵, 놀라운 사건이 적발된다. 이승만 암살음모, 범인들은 마포장 경비 경찰 4명과 남한강 파출소 순경 1명이었다. 마포 경찰서장 윤우경(尹宇景)이 아슬아슬하게 검거한다.
“마포장 경비순경 전원이 남로당에 가입하여 이승만 박사를 저격 살해할 음모를 적발 검거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운수도 윤 서장의 운수도 아니오, 이승만 박사가 정권을 잡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훈시, 윤우경 [만성록晩省錄] 서울프레스, 1992).
미군 방첩대(CIC)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세력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김구 쪽 누군가가 이승만을 암살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정보도 입수했다고 했다. 
 
윤우경 서장과 이승만 측근들은 이래저래 집을 옮기자고 했다. 일본식 여름 별장 가옥은 가을 바람이 불자 계절보다 먼저 추워졌다. “이 박사는 심한 기관지염으로 눕고 저도 그렇습니다. 난방이 안 되어 전기난로 하나로 견디는데 그나마 전력이 약해 가열되지 않는 군요”(프란체스카가 올리버에 보낸 편지).
윤치영이 다시 집을 구하러 나섰다. 실업가 33명의 도움을 받아 이화동1번지 김상훈의 집을 사게 되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지원하는 승려 백성욱(白性郁)이 자기 매부 권영일(權寧一), 전용순(全用淳), 신용욱(愼鏞頊), 홍찬(洪燦) 등 기업인의 뜻을 모은 것이다. (윤석오, 앞의 증언). 창경궁 동편 낙산(駱山) 자락에 앉은 그 집은 조선시대 인조(仁祖)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인도 살았던 풍광 좋은 동네, 곧 ‘이화장(梨花莊)’으로 불린다. 
마포로 쫓기듯 옮긴지 딱 두 달 된 날, 10월18일 이승만 부부 일행은 이화장으로 이사하였다. 올해로 76년째 ‘건국대통령의 집’이 된 그곳은 과연 ‘대한민국 탄생’의 명승지다. 선진국 같으면 ‘건국의 성지’가 되었을 이화장은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사적 제497호로 지정하였고, 지금은 서울 어딘가에 세워질 ‘이승만기념관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이화장에서 이승만은 또 어떤 드라마를 쓸 것인가.

 

 

이승만 건국사(48) 여운형 피살...미, 한국문제 ‘유엔 상정’ 발표...소, 양군 철수 제의...이승만 “소련군만 가라. 미군은 못 간다”

1947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미소 양국의 ‘한반도 흥정’은 마지막 씨름을 벌이다 끝내 종지부를 찍는다. 마침내 미국은 협상을 통한 ‘해결’을 포기하고 유엔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으로서 그것은 ‘스탈린의 친구’ 루즈벨트가 남기고 간 유산 ‘신탁통치’란 괴물을 차버린 것이었고, 스탈린 측은 동유럽에서 성공했던 바 ‘테이블 요리로 먹는 공산화’ 꿈이 무산되어 남한 땅을 놓쳐버린 꼴이다. 왜 유독 한국에서 실패하였는가? 이승만의 집요한 ‘반소-반공-반탁’ 투쟁과 미국 설득작전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5월에 재개한 미소공위가 10월 21일 최종 폐업, 서울을 떠날 때까지 5개월의 풍경을 둘러보자.

▲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던 고당 조만식, 북한인민위원장 김일성, 한반도 공산화 총책임자이자 소련군정 지휘자 슈티코프.(왼쪽부터).

★미소공위, 평양 회의...조만식 돌변 “이승만은 신탁통치 받아들여야” 
 
서울서 실랑이하던 미소공위는 7월1일 평양에 가서 평양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와 회합식을 가졌다. 예상대로 소련측과 북한 단체들은 남한의 반탁투쟁위 산하의 15개단체는 절대로 참여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강화하였다. ‘제5호 성명’에 서명한 정당이나 단체들도 제외시키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가해서 반대하겠다며’ 서명했던 한민당 등은 협의대상에서 빠지라는 말이다. 그동안 ‘진전’되었던 사항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때, 미국대표단장 브라운 소장이 요청하여 조만식을 면담한다. 그런데 브라운의 질문에 대한 조만식의 대답이 예상 밖이어서 놀랐다고 한다. 조만식은 “미국만의 신탁통치가 바람직하나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면 받아들여야한다”고 말하고, “이승만과 김구가 미국의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큰 유감”이라고 했다. 조만식은 남한에 내려가서 정치를 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피력했다고 한다. (정용욱 [해방직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 출판부, 2004).
조만식의 이런 대답이 본인의 변심에서 나온 것인지, 고려호텔에 연금시킨 소련군정의 세뇌공작 결과인지, 그후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평양의 미소공위는 초장부터 격돌, 합의는커녕 미국과 소련 대결의 선전장으로 변했다. 
보름후 브라운이 소련 주장을 비판하는 단독성명을 발표하고, 슈티코프가 미국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왼쪽부터).

★여운형 암살...배후는 누구? 미국은 또 김구를 의심
 
그 사이, 서울에선 여운형이 7월19일 대낮에 암살당한다.
여운형은 좌우합작문제로 미군정 민정관 존슨(E.A.J. Johnson)을 만나러 승용차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가는 순간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검거된 범인 한지근(韓智根, 19세)은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기거했는데 공범 4명이 뒷날 밝혀진다. 
배후세력에 대한 수사와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번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미군정 측 자료에는 김구가 조직한 청년조직이나, 임정시절부터 김구의 오랜 측근이던 염동진(廉東振)의 비밀결사 백의사(白衣社)를 지목하였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한다. 임정집권을 노리고 있는 김구는 장애물 좌우합작을 증오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김일성이 키워낸 여운형의 둘째 딸 여연구(呂鷰九)는 “아버지를 살해한 세력은 종파분자들”이라 주장하였다. (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연구] 김영사,2001). 그가 말한 종파분자란 여운형을 이용하고 경멸하며 좌우합작을 배척한 박헌영 일당을 가리킨다. 
여운형의 피살 전 4월에 작성된 소련 정보문서를 보자. 미군정의 좌우합작이 공산당 고립작전으로 경계하는 소련은 여운형이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조선로동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 인민당과 사회로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빼가려 한다. 미국을 믿는 여운형은 김규식과 좌우합작을 강화할 것이며 하지는 여운형의 말에 만족하고 있다...” (전현수 편역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보고서-1946~1947] 국사편찬위, 2003)
이 무렵부터 여운형은 여러차례 테러를 당한다. 암살의 배후가 박헌영이라는 반증의 하나로 보이지 않는가.

▲ 여운형의 아들과 두 딸이 김일성(가운데)를 오랜만에 만나 우는 모습(1979년 북한 공개사진). 오른쪽은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

★여운형, 김일성과 비밀회동 5차례...거물간첩 성시백이 심부름
 
해방순간, 일본총독으로부터 치안행정을 인계 맡아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을 전국에 주직하였으나 곧 나타난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에 깡그리 빼앗긴 여운형, 그 악연은 3.1운동후 1920년대 상하이로 거슬러 오른다. 일찍이 레닌의 코민테른에 참여, 클렘린 궁에서 레닌을 두 번이나 만나 충성을 맹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회의원 여운형은 임정 총리 이동휘와 함께 상하이 ‘고려공산당’ 을 창당한다. 여기에 나타난 20대초반 박헌영을 14살 선배 여운형이 키워주고 엮어주며 이때부터 두 사람은 조선공산주의를 이끄는 선봉이 되었다. 
 
그런데 해방후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1945)에는 여운형에 관하여 “한국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의 지원금(2,000만엔)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6.25때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철에도도 "변명할 필요 없는 친일분자"라고 써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조병옥(趙炳玉) 박사도 [나의 회고록]에 여운형의 친일(親) 행위를 회고하는 기록을 남겼다.
 
해방초기 ‘인공’ 부주석 여운형이 북한에 처음 잠입한 것은 1946년 2월, 북한 단독정권 인민위원회가 수립된 다음날 10일 위원장 김일성과 첫 비밀회동을 가진다. 이때 박헌영 노선을 비판하며 민족통일전선에 김구와의 합작을 논의하였다.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앞의 책). 
그때부터 5차례나 밀입북하여 김일성 자택에서 지내며 비밀회동을 거듭, 소련군정의 공작지령을 받아가며 박헌영과의 경쟁을 벌인다. 
“북조선은 해방되었는데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며 좌우합작을 통한 적화통일노선을 장담하는 여운형에 대하여, 김일성은 “박헌영과 달리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남한의 중도세력 흡수에 좋다”며 자금을 계속 지원한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서울 가서 정치활동을 안심하고 하라”면서 북한로동당이 힘 닿는데까지 돕겠다고 격려하였다. 그는 “유능한 정치공작원 성시백(成始伯)을 서울에 상주시킬 예정이니 그에게 시킬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시켜도 좋다”고 다짐하였다. 성시백은 이미 남북을 오가면서 김일성과 여운형의 심부름을 계속해왔으므로 여운형도 여러번 만나 잘 알고 있다. 
김일성 직속의 성시백은 여운형의 3당합당과 박헌영의 남로당 결성 임무를 마친 뒤에는 아예 ‘북로당 전권대표’ 자격으로 서울에 정착하여 김구의 남북협상을 비롯, 6.25침략까지 어마어마한 공작을 벌이게 된다.
 
마지막 밀입북때 여운형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에게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맡아달라고 부탁, 1947년 3월 평양에서 온 사람이 데려갔다. 김일성 덕분에 모스크바 유학까지 마친 여운형의 자녀들 중 차녀 여연구는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까지 올랐고, 문익환 목사 등의 입북을 알선했으며, 1989년 밀입북한 여대생 임수경이 한국경찰에 구속되자 석방투쟁위원장 노릇도 했다. 
 
인물 좋고 체격 좋은 여운형은 화려한 웅변과 특유의 매력으로 청년남녀의 인기를 독자지, 스포츠를 좋아하여 알몸 광고모델까지 나서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우선 정부부터 세우자. 이념은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발언처럼 여운형은 이념집착형 박헌영과 달리 시대 변화의 물결에 따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즐기는 인간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합주의자] 서울대 출판부, 2008.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그러나 여운형이 청춘부터 뿌리박은 삶의 기둥은 공산당이다. “미국에 이용당하면 안된다”는 김일성의 지적에 여운형은 “내가 미국을 이용하고 있으니 두고 보라”고 장담하며 "이승만 타도부터 할것"이라고 다짐했던 그는 62세에 쓰러졌다.  장례식은 8월3일 서울운동장에서 ‘인민장’으로 치러진다.
 
좌우합작에 목을 맸던 하지 사령관은 7월23일 “여운형씨의 참화는 한국정계의 비극적 현상을 여지없이 말하는 것으로서 청년단체, 언론기관, 정치 지도자들의 맹성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냈다.([조선일보]1947.7.24.). 이제 짝을 잃은 김규식의 좌우합작은 어디로 갈 것인가.

▲ 미소공위의 소련대표단을 만난 여운형(오른쪽).

★임정봉대론 부활...이승만, 김구에게 ‘썩은 동아줄 그걸 못 끊어!“
 
좌우합작의 좌축(左軸) 여운형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김구 측의 ‘임정봉대론’이 또 전면에 나선다. 미소공위가 완전 무산되고 나면 임정이 선수를 쳐서 권력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동안 이승만은 미소공위 ‘5호성명’에 가담하는 정당-단체들이 몰리자 그 대응책으로 전국적인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구성하고, 김구의 국민의회와 통합을 추진하며 독자적인 총선거 실시방안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김구 측은 미소공위가 결렬될 것이 확실시되자 이승만 측과의 통합에 불응하게 된다. 
김구의 국민의회는 9월1일 ‘긴급제안’을 내고 “이승만의 총선거 안은 38선을 존속시키고 조국을 양분할 남한 단독정부 노선으로 향하는 것이므로 중지해야”한다고 선언, 임시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자율적 집권, 즉 실패하였던 임정 집권론을 꺼내 들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이승만은 이를 반박하며 김구를 설득하는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다.
“남한의 총선거를 원치 않는다는 주장이 있은 즉, 이는 사세(事勢)를 떠나서 건국대업의 전도를 막는 공담(空談)일 뿐이다....(중략)....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남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통일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미국인들과 협조할 필요 없이 정부를 세우자는 국민의회의 그 정신만은 절대 찬성하는 바이나, 당초에 우리 힘으로 왜적을 타도하였으면 타국의 간섭이 없을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하였으므로 미국이 이 땅을 장악한 경우에서 독자집권을 맹목적으로 고집한다면 우방의 동정도 잃을 것이오, 고립무원으로 야심을 가진 타국(소련)을 대적하기에 더욱 위태로울 것이다. 하물며 미국이 우리 독립을 반대한다면 죽기로써 항거할 것이나 만국전체(세계)가 우리 독립을 절대 주장하는 터이다. 우방과 합작 안할 이유도 없거니와, 총선거로 국회만 성립된 후에는 국권(國權)이 우리 손에 있는 것인 즉, 이것을 하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즉 독립을 돕는 일이니 이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동아일보] 19437.9.4)
김구와 이승만의 세계정세 통찰력과 지정학적 독립 전략전술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은 김구를 붙잡고 ‘주석’을 이용하는 임정봉대론 세력으로부터 김구만이라도 떼어내고 싶어 조바심친다.
 
“김 주석과 나는 이러한 양해와 결심이 공고하므로 공사 간에 의점(疑點)이 조금도 없으나, 오직 중국에서 수십년 동안을 임시정부 옹대로 사생을 같이하던 동지들과 노선이 갈리기를 차마 못하는 후의로 김 주석이 마음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이니...(중략)....총선거를 조속히 진행하여 국가 운명을 누란에서 구원하며 민족정세를 구학(丘壑; 언덕 골짜기)에서 구제하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메아리 없는 호소...과연 김구는 이승만의 간곡한 설득에 응할 태세가 되어있던가?
날마다 김구의 결단을 기다리는 안타까움에 이승만은 혀를 찼다고 한다.
”다 썩은 동아줄, 이걸 못 끊어. 이걸 못 끊는단 말이야“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앞의 책).
그 썩은 동아줄은 김구를 꽁꽁 묶은 측근들, 조완구(趙琬九), 조경한(趙擎韓), 엄항섭(嚴恒燮) 등을 말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들이 없으면 김구는 꼼짝도 못하는 형편인 것을!

▲ 이승만과 맥아더, 마셜 국무장관(왼쪽부터).

◆미국의 결단, 소련과 유엔에 ”한국문제 유엔 상정“을 통보
 
하지는 당황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은 물거품이다. 미소공위도 평양에 가더니 타협은커녕 극과 극의 선전장으로 변해 파탄을 향해 달린다. 하지는 합동참모본부에 미소공위의 실패를 전제한 대한정책 방향을 건의하는 급전을 쳤다. 
미국 정부는 급변하는 상황전개에 따라 7월23일 3부조정위원회(SWNCC) 산하의 한국특별위원회(Ad Hoc Committee on Korea)를 열어 한국문제처리방안을 만들었다. 국무부 동북아시아국 부국장 앨리슨이 7월29일 정리 보고한 ‘앨리슨 비망록’의 내용은 ▶소련이 미소공위를 파탄시키면 모스크바 신탁통치 결정 4대국 회의를 소집, 남북한 미소 점령지역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임시한국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이 4대국 회의를 거부할 경우,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는 것 등이다. (Memorandum by Allison, FRUS 1947 vol.Ⅵ.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7권)
이승만의 오래된 구상이 마침내 맥아더를 거쳐 마셜의 결심을 끌어내 미국정부의 공식정책으로 채택된 역사적 문서가 탄생한 것이었다. 
 
미국무부는 8월26일 소련외상 몰로토프에게 9월8일부터 워싱턴에서 4대국회의를 열자고 제의하고 영국-중국에도 통보한다. 몰로토프는 ”4대국회의가 모스크바 결정에 위배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영국과 중국은 수락하였다. 소련의 거부를 예상한 미국은 몰로토프의 답신이 오기 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회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유엔 총회, 한국문제 의제 채택 41대6 결의
 
드디어 9월16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 훈령을 내린다.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를 소련 외상에게 통보하라.“ 그리고 영국-중국에도 같은 사본을 보냈다. ”한국독립문제에 합의하기 위해 미소공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양방이 인정하였고, 소련이 4대국회의를 거부함으로써 남아있는 유일한 해결방안은 유엔상정 뿐“이라고 천명하였다. 
이어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Lie)에게 한국문제를 유엔총회 의제로 추가해달라고 요청하고, 마셜 장관은 유엔총회에서 연설로써 전세계에 공포하였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문제는 9월21일 유엔 제1정치위원회에서 ‘총회의제 포함’ 건의안을 12대2로 결의했는데 반대는 소련과 폴란드였다. 이어서 9월23일 유엔총회는 ‘의제 접수’를 41대6으로 통과시켰다. 

▲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슈티코프, ”미군이 철수하면 소련군도 동시에 철수하겠다“
 
한국독립문제의 유엔총회 이관 뉴스로 뜨겁게 달아오른 서울 장안에 소련이 난데없는 폭탄을 던졌다. 9월26일 덕수궁 미소공위 석상에서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가 돌연 ‘철군’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 대표가 1948년 초까지 미국 군대를 남한에서 철수시키는데 동의한다면, 소련군은 미군과 동시에 북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을 소련대표 이름으로 성명한다. 양군 철수 후에 남북한의 한국인들끼리 연합정부를 세우도록 하자“ ([조선일보]1947.9.27.)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종착점에 이른 때, 소련대표단장이 꺼내든 ‘철군’카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전혀 예상 못했던 하지 사령관은 충격을 받은 듯 참모회의에서 말했다. ”이 제의는 우리가 한국에 온 이래로 가장 부담스러운 선전책동이다.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약소국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인 것 같다.“ (정용욱 편 [해방직후정치사회자료집-1, 다락방,1994. 손세일, 앞의 책]
그런가? 군사전투전문가 하지 장군이 정치 물을 먹더니 넋이 빠졌나?
북한 인민군은 급성장하였다. 지난해 7월 김일성과 박헌영, 슈티코프를 모스크바로 부른 스탈린이 ”북한군을 무장시켜라“ 명령한 사실을 잊었는가. 그때부터 소련 군사전문가들과 고문관들, 탱크, 전투기, 각종 무기와 탄약 등이 압록강을 건넜다. 소련과 중공 지역의 조선 병사들은 또 얼마나 고향으로 몰려갔던가. 북한의 소련 군정은 1년동안 정예 병력만 10만명 넘게 만들어냈다. 미-소 양군 동시철수 제안은 미군만 태평양으로 가라는 말, 소련군은 압록강-두만강만 건너면 된다. 
당시 주한 미군은?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뒤늦게 창설하였지만 남로당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절반이상은 공산군이 되었다. 민주주의 원칙을 지킨다는 미군정은 남로당 청년들의 신분조사는커녕 그들에게 ‘국방’을 맡겨놓고 있는 형편이었다. 

▲ 스탈린의 미-소 양군 동시철군 제의에 혼자서 맞선 이승만(왼쪽)과 슈티코프-스탈린.

◆이승만, ”소련군만 나가라. 미군은 못 나간다“ 왜?
 
슈티코프의 미-소 동시철군 제안을 듣자 이승만의 머리가 분노에 곤두섰다.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에 능한 이승만의 레이더가 소련의 술수를 금방 다 읽어낸다. 미소공위가 실패할 경우, 조마조마했던 이승만은 ”그러면 그렇지“ 올 것이 온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남한 공산화 야욕이 뽑은 새 카드는 ‘군사적 도전’이다. 나흘 후 9월30일 이승만은 결단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소 양군을 동시 철퇴하자는 소련의 제의를 우리는 의외로 알지 않는다. 그 배후의 의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말문을 연 성명은 소련의 심장을 찌른다.
예상했던 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스탈린의 침략주의! 일찍이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이 망하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한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속히 승인해야 ”또 하나의 전쟁과 동족상잔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해온 지 몇 년이던가.
이승만의 단호한 성명은 소련군의 북한점령 자체를 ‘이유 없는 국제적 폭행’이라 규정한다. 
 
”파괴된 정의와 인도에 대하여 세계여론이 분기한다면 그 세력을 소련으로서도 전연 무시치 못할 것은 잘 알았던 바이다. 약소한 우방의 반부(북한)를 하등의 이유나 권리도 없이 점유함은 막심한 국제적 폭행이다. 진전 세계평화를 희구한다면 문명한 국가들은 중세기적 비행은 단연코 금기하고 세력보다 공론을 중히 해야 할 것이다. 
40년전 서양제국이 일본을 허하여 한국을 강점케 하던 때에 나는 이런 말을 하였거니와 다시 반복하여 말하노니, 총검을 가지고 선인(善人)을 협박하는 강도를 좌시하면, 같은 총검이 좌시하던 사람에게도 가는 날이 있으리라고 했던 것이다. 미국은 1941년12월7일에 진주만의 쓰라린 경험을 반복치 말라고 능히 경고하는 바이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할 이유가 없다함은 이승만이 반복 주장해 온 바, 소련의 대일참전 포고가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뒤였기 때문이며 ‘해방군’을 자처하는 것은 어불성설 공산당의 침략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군은 불법점령한 소련군만 북한에서 나가면 된다고 강조한다. 
 
”적국을 포함한 모든 다른 피점령국가들은 총선거로 각자의 정부를 조직하였음에 반하여, 과거 2년동안 한국인은 남한에서도 정부건립 총선거를 시행하도록 용허되지 않았다. 한국민족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참경에 빠져 있음은 아무나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으리라. 이에 한인들은 미국 점령지에서라도 총선거를 행항여 정부를 조직키로 필경 결심하게 된 것이다. 미군정부의 협력이 속이 있다면 협력 있이 해도 좋고, 가망이 없다면 협력 없이라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양 주둔군을 동시 철퇴하자는 소련의 제안이 있다. 그들이 그들의 고상한 표방과 같이 과연 한국이 통일 민주국가 되기를 바라는 성의가 있다면 우리의 자유선택의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북한에서 즉시 또는 무조건으로 철퇴하기를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군이 우리에게 둘러씌우는 것은 무엇이고 안 받을 작정이다. 일보 진하여 소련이 미국과 협동하여 한족의 주권을 엄격히 존중함을 선언하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이승만은 ‘기회 포착’의 명수, ‘정읍선언’에서도 요구했듯이 소련군 철수는 소련 스스로 ‘철군’을 입밖에 내놓은 지금 당장 솔선수범하라는 강박전술이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하여는 그 반대로 ”결코 철수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들이대며 ”철수 말라“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또 한편으로 미국에 요청하는 바는 우리 총선거를 통한 민의에 의하여 정부를 세우고 군정에서 북한에 있는 한인 적군부대(赤軍部隊)를 해산하고 우리의 국방군이 사용할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여 달라는 것이다. 정권을 인수할 때까지는 치안에 필요한 근소한 군대만을 독립국가로서의 우리 권리에 간섭함이 없이 계속 주둔함이 가할 것이다. 
한국 분단의 책임을 미국이 적어도 일부 진다고 생각되는 이상, 외국 분점에 의하여 발생된 혼란을 정돈할 시간을 우리가 가질 때까지는 미국이 빠져나감이 불가하며 또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 이승만 얼굴 변천사. 왼쪽부터 20대 죄수, 35세 프린스턴대학 박사, 45세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73세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건국’도 하기 전, 미국에 ‘남북통일과 군사협력’부터 요구한 이승만
 
이승만의 용미(用美) 전술은 굳은 신념에서 나오는 종교적 용기와 지혜의 작품이다. ‘굳은 신념’이란 기독교국가로서의 미국은 약소국을 분단시킨 ‘죄’를 회개하고 합당한 책임을 다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신앙 깊은 이승만이 아니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독교 외교’인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철군은커녕 분단 한반도를 다시 합쳐야 놓아야 할 장본인이므로 계속 남아서 북한의 공산군을 해산시켜주고 한국군에게 충분한 무기원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설교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미군 철수는 ‘불가’(不可)하며 ‘도망갈 수도 없을 것’임을 못 박았다.
‘철수’란 말 대신 ‘빠져 나간다’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죄 짓고 도망치듯 책임회피 말라“는 이승만 특유의 비유법, 기독교적 양심을 찌른 송곳이다. 그는 평생 말과 글로써 독립운동을 성공시킨 문장가, 전도사, 웅변가, 교육자, 명칼럼리스트, 언론인이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세우기도 전에 미국 정부에 ‘통일책임’과 ‘한미 군사협력’부터  요구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그 누가 그때에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으랴. 이승만에게 한미동맹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부터 설계했던 꿈이었기에. 
 

이승만 건국사 (49) 김구 “남한 단독정부 지지, 이승만 박사와 일치" 담화 되풀이...장덕수 암살...김구, 배후로 지목 받아 재판에

 

▲ 미군정 한인민정장관 안재홍, 좌우합작의 김규식, 하지 사령관. 이들은 '미군정 연장 음모'로 들통난 <시국대책요강>이란 문서 때문에 곤경을 치른다.

 ★미군정 연장 음모 ‘시국대책요강’ 드러나 대혼란
 
미국이 한국독립문제의 ‘유엔 이관’을 발표한 직후, 난데없이 ‘미군정 연장’을 기획한 ‘시국대책요강’이란 문서가 정국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9월25일자로 작성된 문서의 주요내용은 이러하다. 
▶한국의 진정한 독립과 통일은 미군 정부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 3천만 한인은 미군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여겨야 한다. 군정부에 협력하여 이것이 사실상 우리 정부로 변형되도록 함이 우리의 사무이다.
▶미군사령관이 남한에서 주권을 장악한다. 그가 제3자적 입장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적 입장에서 주권을 행사하기를 우리는 그에게 기대한다.
 
요컨대, 미군정 하지(Hodge) 사령관이 한국의 주권을 행사하여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문서를 폭로한 이승만 측 ‘총선거촉진국민대회’에서는 “한인 민정장관 안재홍과 좌우합작의 김규식, 미군정 사법부장 김병로(金炳魯)가 연서로 서명하여 이 문서를 미군 정부에 ‘군정연장 청원서’로 제출했다”고 주장하며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안재홍과 김규식은 ‘비민주적 모략’이라고 부정하였는데, 마침내 11월5일 안재홍이 ‘시국대책요강’ 전문을 공개하고 9월 하순에 작성했음을 인정하며 그 동기를 “민족독립국가 완성을 위한 노력이었다”고 설명한다. ([민세 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이승만은 이 문서가 하지 사령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정치인들의 분파주의를 매도한다. “어찌 공산당 뿐이리오,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독립방해자’로 인정하여 민간의 포용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우리 살길을 찾을 수 있다.”

▲ 우익단체들이 '미군정 연장 절대 반대' '이승만 박사 절대 지지' 등 플래카드를 들고 미군정 참여 세력의 군정연장 음모를 규탄하는 집회를 연일 열었다.(자료사진)

◆유엔 총회, 결의안 통과...이승만, 동유럽형 공산화 우려
 
10월30일 유엔총회 제1위원회(정치위원회)가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 한국인시위원단을 파견한다”는 미국 결의안을 찬성 41표, 반대 0표, 기권6표로 가결하였다.
이승만은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을 비롯한 10여개 정당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움직임 때문이다. 자칭 ‘중간파’를 내세운 이들은 ‘임정집권’을 주장하는 세력과 박헌영의 공산당서 버림받은 좌익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승만은 11월4일 새로운 상황전개에 새로운 정국관과 대책을 피력한다.
“우리는 허영이나 혁식상 독립보다 사실적 국권회복하려는 것이니, 민의에 따라 국회를 세워서 신성불가침의 정권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독립이다....(중략)....유엔 대표단이 와서 남북총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소련이 불응하면 그 결과는 남한 총선거로 귀결 될 뿐이니, 기왕에 미소공위로 인연하야 오륙개월 세월을 허비한 후 또 다시 시일을 허비할 필요도 없고 형편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설령 유엔의 결정대로 남북총선거가 된다 할지라도 유엔대표단이 미-소 사령관들과 다소간 협의가 될 것이니, 그 결과로는 진정한 민의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이요, 파괴분자들이 참가되는 날은 정부나 국회에 들어가서 파괴를 일삼을 것이니, 남들 보기에 한인들이 자치능력이 있다 없다 하는 수욕(羞辱:수치와 치욕)의 구실을 만들 것이다. 
또한 북한의 공산군이 남한침범을 준비한다는 보도가 자주 들리는 이때에 우리는 하루바삐 정부를 세워서 국방군을 조직해 놓아야 남한이 적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경향신문]1947.11.5.)
따라서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는 의외의 위험한 부작용이 크므로 이승만은 미리 총선거를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독촉국민회와 한민당 등 우익 14개 정당-단체들은 11월15일 서울운동장에서 ‘유엔결정감사 및 총선거촉진 국민대회’를 열고, 여러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갈 곳이 없게 된 공산분자들이 중간파 명의를 둘러쓰고 12정당합동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남한에 공산정권을 세우려 획책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 유엔총회가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키로 결의한 기사. 조선일보 1947년11월16일자 1면 보도.ⓒ조선DB

★마침내 유엔 총회 결의안 통과...총선감시 임시위원단 구성
 
11월14일 유엔 총회서 드디어 한국결의안이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통과되었다. (기권6개국은 소련,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유엔을 통과한 역사적 결의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선거에 의해 선출된 한국 대표들이 한국문제 심의에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그 대표들이 한국국민에 의해 공정하게 선출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 전역에 걸친 여행, 감시, 협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를 설치한다.
2) 유엔 위원단이 한국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조속히 달성시키는 문제를 협의할 수 있고, 국회(National Aseembly)를 구성하여 한국중앙정부(Nat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수립할 대표들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늦어도 1948년 3월31일 이전에 실시되어야한다.
3) 선거후 가능한 한 빨리 국회를 소집,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그 사실을 위원단에 통보한다.
4)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위원단과 협의, 자체의 국방군을 창설하고, 이에 편입되지 않은 모든 군사단체 및 준군사단체를 해산시키며, 남북한의 군사령부와 민간기관으로부터 정부의 기능을 인수하고, 될수 있는대로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을 완전히 철수시키도록 점령국과 조정한다.
5) 위원단은 상황의 진전에 따라 유엔총회의 임시위원단(소총회)와 협의할 수 있다.
6) 회원국들은 위원단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원조와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이어서 유엔총회는 9개국으로 UNTCOK을 구성,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프랑스, 인도, 필리핀, 엘살바도르, 시리아, 우크라이나를 지명했는데, 소련 연방국 우크라이나는 거부했다. 
 
★이승만의 새로운 우려...“유엔위원단 오기 전에 총선거 해야”
 
‘남북한 총선 결의안’이 유엔을 통과함에 따라 국내외 파문이 소란하다.
첫째, 소련은 이미 모스크바 결정이 있으므로 유엔은 한국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기권하였다. 따라서 유엔총회 결의안의 시행을 소련이 거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둘째, 남북한총선거에 대하여 유엔감시단이 상대할 선거주체가 북한은 인민위원회라는 정부가 존재하는데 반하여 남한의 한인대표는 미군정 자문기관 입법의원 뿐이다. 
셋째, 선거법도 남한엔 미정상태였고, 남북한 공동적용 선거법의 필요성 등도 첨예한 문제다.
이와 관련 이승만의 고뇌와 위기의식은 커져만 갔다. 특히 유엔감시위원단을 구성한 9개 국가들중 중립국 인도나 친소국가들을 보면서 그는 노심초사의 나날을 보낸다. 
▶남한에 한인정부대표가 존재하지 않으니 유엔위원단은 북한을 통치하는 김일성의 북한인민위원회 견해에 비중을 두고 진행하려는 편의주의에 흐르지 않을까.
▶이승만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새로 수립될 연립정부의 ‘국가정체성’ 문제였다. 유엔위원단이 본질은 도외시한 채 형식상으로만 ‘독립모양’을 갖춘 정부를 만들어놓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소련이 동유럽에서 구사한 공산화 성공 무대를 가설해주는 꼴이다. 폴란드나 체코처럼 연립정부를 세워놓고 공산당이 금방 ‘숙청’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 만약 유엔위원단이 북한에 이끌려서 그런 환경을 제공해주고 떠난다면 결단코 안될 일이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임박한 위기감을 주체 못하는 이승만은 11월18일 “총선거를 즉시 실시하라”고 선언한다.
“남조선 총선거를 반대하는 분자들이 두 가지 문제를 일으켜서 선전하는데, 한가지는 남방에서만 정부를 세워서 서울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서북(북한 평안도-함경도)을 떼어버리려는 계획이라 하나니, 이는 지방열(지역감정)을 고취하여 민족분열을 시켜 당파적 세력을 추진시키려는 계획이니 그 뜻이 심히 음험하다...(중략)...또 한가지 선전은 유엔위원이 조만간 내도하리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자초로 이박사가 침니자이니 믿지 말고 우리가 자율적으로 전취하자고 경향에 은근히 선전하던 인사들 측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남조선총선거는 1년 전부터 시작하여 미국무성에서 언명하였고 하지 중장이 선언으로 과도입법의원에서 법안만 통과되면 곧 실행한다고 한 것인데, 그후 백방으로 연기하여온 바 공개로 막지는 못하고 핑계만 하고 있는 중이라....(중략)....
가장 긴요한 점은 유엔위원이 언제 도착하든지 우리가 선거를 하루바삐 행하여 민의로써 성립한 국회가 있어야만, 그 위원들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대표와 협의 합작애서 민의대로 해결할 것인데, 그러히 아니하고 앉아 기다리면 그 위원들이 누구와 의론하며 누가 합작할 것인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 중장이 자기의 의사만을 실시하려는 중에서 우리는 중립파라 좌우합작파라 하는 모든 정객드의 분규 혼잡한 상태는 유엔위원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어서, 그 결과는 과거 양년간 경험에 다시 빠지게 되리니 심히 위태한 사정이다. 그러므로 일반민중은 지금에 다 된 독립만을 완성키 위하여 모든 선동에 파동이 되지 말고 하루바삐 선거를 진행하여 국권을 세워 남북통일을 속히 이루기로 일심 매진하자.” ([동아일보] 1947.11.19.)

▲ 이승만을 이화장으로 연일 방문한 김구.(사진은 돈암장때 모습).

★김구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 정부 세워도 단독정부 아니다”
 
이승만은 이화장으로 김구를 자주 불러 논의를 거듭한다. 김구와의 합작이 중요한 때다.
11월30일에도 이승만을 방문하고 경교장에 돌아온 김구는 의미심장한 담화를 발표한다.
“유엔결의안을 지지”한다고 입을 연 김구는 소련의 보이콧과 관련하여 견해를 밝혔다.
“혹자는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하야 유엔안이 실시 못된다고 우려하나, 유엔은 그 자신의 권위와 세계평화의 건설과 또 장래에 강력의 횡포를 방지하지 위하야 기정방침을 변하기가 만무다. 그러면 우리의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은 문제도 없는 일이나, 만일 일보를 퇴하야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야 북한의 선거만은 실실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어느 때든지 그 방해가 제거 되는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 독립을 전취하는 효과에서는 그 정부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을 겋이다.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일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하여튼 한국문제에 대하야 소련이 보이콧하였다고 하여 한국 자신이 유엔을 보이콧 하지 않은 이상 유엔이 한국에 대하야 보이콧할 이유는 존재치 아니할 것이다.” ([동아일보]1947.12.3.)
 
김구는 12월 1일에도 이승만을 방문하고 국민의회 44차 임시대회에 참석하여 자진의 지지자들에게 “이박사의 주장과 자기의 주장이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는 덤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보류되었던 이승만의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김구의 국민의회의 통합교섭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2월3일엔 ‘공동협상서’가 발표되었다.
김구는 다음날 두 단체의 통합으로 “나와 이승만 박사는 통일된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이 완전히 일치한 것이다. 우리 양인 간에는 본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며 설혹 일시에 소이(小異)가 있다 해도 즉시로 일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 암살된 장덕수. 오른쪽 사진은 김성수, 이활, 신성모, 장덕수(오른쪽 끝)

◆장덕수 암살...미군정, “배후는 김구” 지목 수사
 
이때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53세)가 피살되었다. 해방후 세번째 암살.
12월2일 저녁 설산(雪山) 장덕수는 동대문 밖 제기동 자택 청설장(聽雪莊)에서 오늘도 당간부들과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논의한다. 11월 14일 유엔총회가 통과시킨 ’유엔감시 남북한 총선 결의안’에 따른 한민당의 집권전략이 발등의 불이다. 
그동안 거론되던 김구의 한국독립당과의 통합문제는 김구의 임정봉대론(임정집권론)에 막혀 장덕수는 “합당이 아니라 헌당(獻黨;당을 바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에 서있었다. 
“임정봉대론은 비현실적인 김구의 권력욕일 뿐, 궁지에 빠진 한독당을 합당으로 구해줄 이유가 없다”는 당론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송진우에 이어 여운형까지 암살되자 미군정과 친밀한 장덕수도 임정봉대세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유학과 독립운동을 함께한 선배동지 송진우를 잃은 분노가 깊어져 있었다. 
 
운명의 그 날도 해가 저물어 회의중인 사랑방에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일행이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경찰이 장부장님을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는다.
장덕수 부인 박은혜(朴恩惠 1904~1963, 뒷날 경기여고교장)이 대신 나가 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복차림의 청년과 검은 옷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긴한 일이라 장 박사님을 직접 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인은 경찰관인지라 아무 생각 없이 방안의 남편에게 알렸다. 
숟가락을 놓은 장덕수도 별 의심 없이 방문을 열고 성큼 나섰다. 
말문이 열리기도 전에 경찰관과 청년의 칼빈 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탕---그대로 쓰러진 장덕수는 숨을 거둔다.
 
◉장덕수 약력◉
황해도 재령출신(1894),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26세때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1920)때 주필-부사장, 1923년 미국유학, 이승만의 독립운동단체 ‘동지회’ 참여, 허정 등과 ‘삼일신보’ 창간, 이승만의 독립운동 적극 지원, 1936년 귀국, 동아일보 취체역, 이승만의 ‘흥업구락부’ 설립, 해방후 이승만의 ‘독립촉성 중앙협’ 이론가 활동, 김성수와 한국민주당 창당, 미소동위 참여 지지, 남한단독정부 수립 찬성, 김구와 합작 반대.

▲ 김구가 장덕수 암살 배후자로 지목되어 수사받는 중, 미군정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발언하는 모습.(왼쪽)

★“백범 선생의 지시 받아 죽였다” 백범 측근의 진술...범인들 일치
 
범인 2명은 이틀 후 붙잡혔다.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23)과 연희대학 3년생이자 초등교사 배희범(裵熙範,20)이었다. 
이들은 김구가 귀국후 새로 조직한 ‘대한학생총연맹’ 간부들이자 한독당원으로 밝혀진다.
그들은 김구가 중국에서 윤봉길-이봉창과 그랬듯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 민국 29년 [1947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000"라고 쓴 혈서를 가슴에 붙인 사진을 찍었다. 범행과 김구 배후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이었다.
 
이런 사실이 확인되자 미군정 경찰은 범인의 배후로 김구와 국민의회를 지목하였다. 국민의회 재정부장 신일준(辛一俊)과 비서부장 조상항(趙尙恒), 최중하(崔重夏, 뒷날 최서면崔書勉)등 10여명을 연행하였다. 한독당 중앙위원으로 김구의 측근인 김석황(金錫璜)이 중간배후로 찍혔다.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미군정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위원장으로 한 수사위원회를 구성, 수사망을 좁혀 들어갔다.
김석황의 입에서 “백범 선생의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이 나왔다. 그는 김구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있다가 압수당해 꼼짝없이 실토한 것이다. 공범들의 진술도 일치하였다. 
김구가 “나쁜 놈, 죽일 놈”으로 좌표를 찍으면 암살대상이 되었다는데 몇 명이 더 남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즉, 김구 주석의 집권을 절대시하는 ‘임정봉대’세력이 훈련된 조직 청년들을 동원하여 반대측 ‘죽일 놈’으로 찍힌 장덕수를 제거한 살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기자들이 “배후를 왜 밝히지 않느냐”고 추궁하자 이렇게 말했다.
“전위단체 8명중 1명을 체포하지 못했고, 배후관계는 4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단계가 미체포이므로 그 전모를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4단계에 김구 등 고위층이 관련되어있음을 시사하는 대답이었다. 수사위원장 장택상은 간부 몇 명이 더 관련되어있다면서 국민의회의 집회허가도 보류시켰다. ([동아일보] 1947.12.11.)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딘(William F. Dean)은 총격한 박광옥, 배희범을 비롯, 배후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등 10명을 범인으로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배후에 김구“를 지목했던 미군정은 김구의 소환 방식을 ‘증인’으로 정하고 트루먼 미국대통령 이름으로 소환장을 발부하기로 변측을 택한다.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은 ”임정 주석을 범죄 피의자로 부르면 민심 동요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배려를 해야했다고 말한다.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 출판부, 1974).
 
이듬해 3월 12일 미군정 법정은 김구가 출석한다는 뉴스에 방청객이 초만원이다.
증인석에 책상다리로 앉은 김구는 질문마다 “모르오. 아니오...”를 연발, “나는 왜놈 말고는 죽이라 하지 않았소”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미군 법무관들이 증거를 제시하며 압박하자 김구는 증언을 거부하며 “더 할말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 퇴장하였고, 범인들은 “모략이다” 외치며 법정소란을 일으켰다. 3월15일 재판정에 두번째로 출두한 김구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과는 ‘김구 무혐의’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매듭지어진 것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장택상에게 수사를 “중지”시켰기 때문으로 알려졌으나, 일찍부터 임정을 지원했던 칠곡(漆谷) 거부의 아들 장택상도 놀라고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뒷날 아버지 장택상의 [창랑(滄浪)일대기]를 펴낸 장택상의 딸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임정의 명예를 위해 살인범으로 만들 순 없다며 기록을 모두 없애겠다고 말씀 하셨다.” 
미군정 사람들은 ‘임정집권 쿠데타’를 시도한 김구의 폭력적인 이력전모를 파악하고 있었기 에 “ruthless(무자비)하고 unscrupulous(부도덕한) 인물”로 평가해왔다는데 암살사건이 거듭되자 “김구는 백범이 아니라 흑범, 블랙타이거(Black Tiger)"라 불렀다고 미 군정측 정보보고서들이 기록을 남겼다. 
 
엎친데 덮친 격이 된 국민의회는 분열된다. 궁지에 몰린 김구의 한독당도 세 조각이 났다. 1947년 12월 ”지지세력을 잃은 김구는 측근만 남고 고립되었다“는 학자들의 평가가 많다. 과연 ‘외로워진 백범’은 1948년 새해 초부터 충격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이승만 건국사(50) 스탈린의 새로운 공세...김구의 '돌변'..."백범은 모스크바 대변인이냐?"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하는김포공항 연도에 세운 환영아치.(1948년 1월)

유엔이 ‘남북한총선’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각 정파들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다. 스탈린이 모스크바 결정을 내세워 결의안을 반대하고 총회 표결에서 기권하였으므로, 소련이 북한의 선거를 거부할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게 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특히 이승만은 문제된 ‘시국대책요강’이 미군정내와 좌우합작 한국인들의 ‘미군정 장기집권’ 저의를 획책하는 음모였기에 하지가 배후인 것으로 보고 이것부터 막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승만, 하지에 쐐기...“용공정책-괴뢰정부 연장 포기하라"
 
11월 26일 ‘애국동포에게 거듭 경고’라는 성명을 낸 이승만은 하지 사령관을 정조준한다.
“소위 미소공위가 연거푸 실패한 후에는 즉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남한에 독립정부를 세워서 우리에게 정권을 맡기고 함께 소련군의 철퇴를 도모할 것이어늘, 하니 중장은 종시 자기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백방으로 핑계하야 총선거를 막으며 민의를 불고하고 중간파를 지지하야 괴뢰정부를 연장하야 자기들의 권력을 공고케 하려는 중이다.”
 
이승만은 미군정 장관 안재홍 등 한인들을 하지를 따르는 ‘괴뢰정부’라 규정한 뒤, 유엔 결의는 남북통일을 위한 선거를 하자는 것이오, 유엔 감시란 소련의 간섭을 막자는 조처이거늘, 7개월간이나 우리 총선거 주장을 가로 막은 하지 중장이 “민족진영을 극우라 지목하고 좌우합작이란 허울로 공산측과 내통하는 중간파 인사들로 우리를 대표하게 한다니...(중략)...우리강토를 일척일촌(一尺一寸)이라도 양보할 수 없으며 북한 동포를 하루바삐 구제키로 결심 매진해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1947.11.27.)
 
이승만은 ‘남한의 단독선거’도 특유의 비유화법으로 설득한다.
“사람이 반은 살고 반은 죽었는데 그 죽은 부분을 살리기 위하여, 산 부분에 약치료를 하면 죽은 부분도 살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살아있는 남조선에 총선거를 실기하여 장차 전조선 총선거를 실시하면 조선은 온전히 살아날 수 있다”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을 환영하는 포스터.

★김규식, “제주도에 있어도 단독정부 아닌 통일정부”
 
설립 1년 남짓한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15일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김규식은 기자들이 소련의 총선거 거부 관련해 질문하자 이렇게 답변한다.
 
“그러한 경우 나의 보는 바로는 유엔대표단이 처리하기 보다는 유엔에 보고하여 결재를 요할것이고, 설혹 남조선단독정부가 수립되다 할지라도 나의 견해로는 그 명칭만은 남조선단독정부라 아니할 것이고 한국 중앙정부라든지 부를 것이다...(중략)...국토의 일부만 차지해도 앞으로 전국통일을 기도하며 중앙정부라 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금에도 타국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즉 제주도 일우만 차지해도 중앙정부라 할지언정 단독정부라 함은 그 명칭부터 불가할 것이다.”([서울신문] 1947.12.14.)
‘민족자주연맹’이란 단체가 새로 등장한다. 좌우합작을 포기한 김규식이 12월21일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결성식에는 하지 사령관이 메시지를 보내고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장건상,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이 단체는 좌우합작에 실패한 하지 사령관이 김규식을 특별 지원하여 설립한 것으로서 주석에 김규식을 선출하였다.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정치카드임은 물론이다. 김규식은 이로써 하지가 만들어준 독자적 정치세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 조병옥-장택상에게 “이승만과 손떼라” 종용
미군 방첩대 보고에 따르면 이때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에게 1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고 (손세일, 앞의 책), 조병옥과 장택상을 집무실로 불러 “이승만과 손을 떼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장병혜 [상록의 자유혼: 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 소련이 유엔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기사(조선일보1948.1.25)

◆소련이 유엔의 入北 거부...김구도 ‘단정 반대’ 발표
 
대한민국 건국사에 운명적인 해, 1948년의 아침 해가 밝았다.
유난히 추운 정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8개국 대표들은 1월 8일부터 29일까지 개별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우크라이나는 진작에 빠졌고 엘살바도르 대표가 맨 마지막에 입경한 것이다.
제1진 호주와 인도, 시리아 대표단과 유엔 사무차장 호세택(胡世澤) 등 30여명이 도착한 김포공항에서 시내까지 연도엔 맹추위도 무시한 인파가 무려 25만명 쯤이나 몰려나와 태극기를 흔들어 환영하였다.([동아일보] 1948.1.9.)
환영 나온 이승만은 호세택의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15년전 제네바 국제연맹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 국제연맹서 탈퇴하게 만들 때 이승만은 호세택과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노련한 중국외교관 호세택이 유엔한국위원단의 사무총장이 되어 왔으니 좋은 징조가 아닌가.
위원단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인도의 메논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그리고 16일 메논은 하지 미군사령관과 평양의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Gennadii P. Korotkov)에게 수시로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동시에 유엔의 소련대표 그로미코(Andrei A. Gromyko)에게도 전달하도록 조치하였다. ([경향신문] 1948.1.21.)
 
★소련, 유엔위원단의 북한 입경 거부
 
[레이크석세스24일발AP합동] 22일 UN에서는 소련이 유엔 조선위원단의 소점령하의 북조선 입경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에 있어 남조선 미군점령지대에 있어서의 UN위원단의 노력을 제한하는 소련의 태도는 소련외상대리 그로미코씨로부터 UN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씨 보좌 안드류 코디어씨에 대하야 전달된 1월22일부 서한 중에 표명한 것으로서 동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간다.
「북조선 소련군사령관 방문의 희망을 표명한 조선위원단 임시의장으로부터의 서한원문을 전달한 1948년1월18일부의 서한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는 귀하에게 1947년의 제2차 UN정치총회 상에서의 UN조선위원단 수립에 대하여 상기시키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1.25. 1면 머리기사)
소련의 ‘거부’는 미국은 물룬 국내의 정파들도 모두 예상했던 일인지라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다. 조선일보는 다만 서울 미군정의 여론국장을 역임했던 게일 크리랜드 박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 내용만 1면에 보도하였다. 
“조선의 현실정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한나라에서 충돌할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하느냐하는 비극의 예일 것 같다. 소련은 지금 북조선, 루마니아, 불가리아, 항가리 등 소련 연방에서 시현된 바와 같이 조선전체를 소련에 종속한 공산주의국가화 하고자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은 조선에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도입하려고 노력을 다하였으나 소련의 방해 사보타주, 선전, 그리고 모스크바가 고취한 폭력적 공격에 의하여 큰 지장을 받아오고 있다”
 
★유엔,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수 등과 면담
 
덕수궁의 위원단은 1월22일 남북한 총선문제 협의 대상자로 이승만, 김구, 조만식, 김규식, 김성수,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두봉 둥 9명을 선정 발표하고, 26일 오전10시 맨 먼저 이승만을 초청한다. 이승만은 하지 사령부의 답답한 정책을 비판하고 소신을 명확하게 밝혔다.
“미군 정부가 중간파를 후원해서 공산분자가 다시 활약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므로 전 민족이 공포중에 있다. 하루 바삐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 3분의 2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한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유엔이 그 정부를 원조하여 국권과 강토를 먼저 회복시켜서 극동평화를 보장시켜야 한다”
김구는 오후2시반부터 유엔단을 면담하고 나서 짧은 담화를 냈다.
“미-소 양군이 철퇴한 후에 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1948.1.28.)
여기서 ‘요인회담’이란 남북 정치지도자 회담을 말한다. 김구가 처음으로 남북회담을 거론한 이 담화는 앞으로 전개될 김구의 “대한민국 건국 반대”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다음날 27일 김규식은 유엔위원단 면담에서 소련의 거부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한국문제를 유엔에서 재론해야 할 것, 소련과 달리 북한 공산당은 한인이므로 남북회담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 미-소 양군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등을 말했다. ([조선일보] 1948.1.28.)
한민당 김성수는 29일 “북한의 소수인 외에는 모든 동포가 남북총선을 원하고 있으며 선거가 가능한 남조선에서만이라도 선거를 반드시 실시해야”하며 방화와 폭력행위를 한 범인은 북조선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동아일보] 1948.1.30.)

▲ 김구의 '돌변'에 대하여 한민당 측이 비판한 성명 기사(조선일보1948.1.30)

◆김구의 돌변, “미-소 양군 철수후 남북요인회담 하자“
 
김구는 유엔위원단을 만난 이틀 뒤, 28일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그 요지를 보자.
1) 우리는 조속한 총선거로 통일된 정부 수립만 요구한다. ‘시국대책요강’ 등 미군정을 연장시킬 우려가 있는 소위 남한단독정부도 반대한다.
2)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 자유의사에 의해 실시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북한의 소련당국자들은 북한 선거가 가장 민주적으로 되었다 하는데, 미 당국자들을 이것을 긍정하지 않고 남한에서는 미군정하에 모 일개 정당이 선거를 농단하리라는 것은 거의 남한의 여론이 되어있다.
3) 소련의 입북거절을 구실로 유엔이 직무태만이나 그 과업에 위반되는 다른 공작을 전개하려 해서는 안된다.
4) 현재 남북한에 구금되어있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한다.
5)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되 그 진공상태로 인한 치안 책임은 유엔에서 부담하라.
6) 남북 한인지도자 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 한국문제는 결국 한인이 해결할 것이다. 양군철수후 즉기 평화로운 국면을 조성하고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영원 해방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노력할 수 있는 방안을 작성하자는 것이다.([서울신문]1948.1.29.)
소련이 유엔을 통해 유엔결의안을 반대하고, 한국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공식 거부한 후 1주일이 지난 시점이다. 그동안 ‘남한단독정부도 단독정부 아니다’라며 이승만과 한치의 의견차이도 없다고 몇 번이나 공개적으로 다짐해왔던 김구가 왜 이랬을까? 우파의 반응부터 들어보자.
 
★한민당 ”김구는 모스크바의 대변인...자살적 행동...공산당의 모략“
 
정가는 폭탄이 터진 듯 들끓었다. 김구가 부총재인 ‘독촉국민회’는 긴급회의 끝에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고 남북요인회담으로 해결하자는 것은 한국독립을 지연시키려는 공산당의 주장이므로 김구 선생이 그런 주장을 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공산당의 모략이란 실로 새삼스럽게 생각된다. 유엔 결의에 없는 사실을 요구함은 위원단을 철수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도 되지 않는다.”([동아일보] 1948.1.30.)
 
김구가 의견서에서 ‘모 일개정당’으로 지목한 한민당은 가뜩이나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수사를 촉고하던 차에 다음과 같은 격앙된 담화를 발표했다.
“김구씨의 이 주장은 유엔총회에 있어서의 소련대표의 주장과 곡 일치한 것으로서 소련은 조선의 김구씨에게서 그 충실한 대변인을 발견했다고 할 것이다. 외국군철퇴와 남북요인 회담후 총선거란 듣기에 달콤하고 좋은 듯한 말이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이것은 조선전체를 소련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여서 민족진영은 물론 김구시 자신도 반대하였고 자유국가들도 단호히 반대하였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김구씨가 이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은 조변석개의 일시적 과오로 볼수 없는 것이고 심사숙고의 결과라 보지 않은 수 없으니 김구씨의 자설적 행동으로서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구씨의 평소 주장과 판이한 이 주장은 결국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화하려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김구씨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의 신자라고 규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조선일보]1948.1.30.)
 
전국학생연맹의 이철승(李哲承)도 “우리 영도자로 경앙해온 김구 선생께서 공산당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하신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지도자로서의 위신을 스스로 상실케 하는 자멸적 행위이다”라고 발표하였다.
 
★김구-김규식, 이번엔 유엔위원단에 ‘남북지도자 회담 의견서‘ 제출
이후 날마다 회의를 거듭한 김구와 김규식은 2월6일 두 사람이 함께 유엔위원단이 머무는 국제호텔을 방문한다. 메논 의장, 호세택 사무총장, 잭슨(S.H. Jackson) 호주 대표와 회담하고 준비해온 ’남북지도자 회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한다. 사흘 후 9일엔 메논 의장에게 남북회담 계획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 위원단이 협조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동아일보] 1948.2.11.)
“친애하는 메논 박사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하여 귀하와 귀위원단에 우리의 의견과 각서를 이미 제출한 바이어니와 우리는 가급적 우리 양인의 명의로 남에서 이에 찬동하는 제정당의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제1차 회의를 하겠습니다. 이 회의에서 남쪽이 대표를 선출하면 북쪽에 연락할 인원과 방법에 대한 것을 결정하겠습니다. 귀위원단이 이에 대하여 원만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직접 간접으로 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으며, 우리 양방의 노력으로 우리가 공동이 목적하는 바가 이루러지기를 믿습니다.” ([동아일보] 1948.2.11.)

▲ 남한공산화 3인방, 스탈린, 슈티코프, 레베데프(왼쪽부터).

◆2.7폭동...스탈린, 남한선거 저지 폭력투쟁 시작
 
스탈린이 준비해 놓고 때를 기다렸던 ’제2의 남한 먹기’ 카드를 꺼냈다.
미소공위 실패에 따른 다음단계 전략으로 스탈린이 취한 행동은 다음과 같다.
1) 남북한의 미군과 소련군을 동시에 철수, 남북한 한국인들이 연합정부 수립 제의.
2) 유엔총회의 남북한총선 결의안을 반대, 유엔에 통고. 
3) 유엔위원단이 요청한 북한방문 거부.
4) 남한전역에 ’총선저지‘ 파업-폭동 ’2.7구국투쟁‘ 전개.
 
★이와 때를 맞춘 듯 김구는 소련의 유엔결의안 거부 발표 1주일 만에 ’남한단독선거 반대‘와  ’남북한 요인회담‘ 제의를 담은 의견서를 유엔위원단에 제출하였다. 이어서 김구와 김규식이 희의 끝에 양인명의로 ’남북지도자회의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한 것은 남로당이 2.7폭동을 개시한 하루 전 2월6일이고, 9일엔 메논 의장에게 협력을 당부하는 편지까지 보냈다. 
 
 한민당이 김구의 ’돌변‘은 “공산당의 모략(음모와 책략)”이라 비판한 말이 아니라도, 누가 봐도 ’동시다발적 장군멍군식 상황전개‘는 김구의 배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지라 온갖 소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유엔-미국의 한국 철수를 노린 폭동...제주도 4.3폭동으로
 
1948년 2월6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소련의 ’입북거부‘에 따라 유엔소총회에 새 방침 등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자 즉시 일으킨 남로당의 ’2.7거국투쟁‘은 바로 남한선거를 막고 유엔위원단의 한국 철수와 미국의 남한 포기를 노린 스탈린의 지령, 슈티코프는 평양소련군정사령부와  김일성-박헌영을 총지휘한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앞의 책 등.)
 
남로당과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동한 폭동사태는 7일 새벽부터 전평 산하의 산별노조를 시발로 전국 각 지역에서 총파업을 감행, 철도 전신 체신을 비롯하여 공장, 광산, 사업소 등이 일제히 폭력투쟁에 돌입하였고, 부산 선박 시위도 벌어졌다. 경찰관서 습격, 기관차 파괴, 전신주 절단, 교량 폭파 등도 잇따랐다. 제주 지역에서도 제주4.3폭동의 전초전이 시작되어 청년들이 도로 위에 장애물을 쌓아 교통을 차단하였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2월 10일 성명을 통해 “해방 이래 조국의 소련화를 기도해 온 남로당 중심의 공산도배가 남조선의 치안을 파괴하고 질서를 교란함으로써 유엔 위원단의 업무를 방해하고 조선 독립을 불가능케 하고자 폭동을 일으켰다.”라고 발표하였다.
폭동결과는 경찰관 등 사망 39명, 부상 133명이고 8,479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3월1일 곧바로 제주4.3폭동이 일어난다

 

이승만 건국사(51) 스탈린-김일성-성시백의 화려한 입체공작 성공...궁지의 김구-김규식 낚이다

 

흔히 일부 국내학자들은 김구의 ‘남북회담 제의’를 두고 “백범선생이 남북통일을 위해 처음 제의한 역사적 결단”이라고 주장해왔다. 미-소 공위도 포기한 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김구 주석의 민족애’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말인데, 역사 기록도 무시한 좌파의 선전선동을 그대로 외우는 앵무새들이다. 
지금까지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협상과 관련된 책이나 논문들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배후공작 부분은 모조리 배제하고 김구의 ‘활약상’만 부각시킴으로써 스탈린의 공산화 음모를 은폐 보호해주고 엉뚱한 김구의 영웅담으로 분식시켜온 것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웃지 못 할 희극이다. 
 
한마디로 남북협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탈린의 작품이다. 
소련 혁명기부터 써먹고 동유럽 공산화에 적용해 대성공을 거둔 소위 ‘통일전선’ 전술이다. 스탈린이 미-소 공동위가 실패할 경우(즉, 미국이 말을 안들을 경우) 쓰려던 카드를 드디어 뽑은 것, 이 전술에 경험많은 ‘북한 총독’ 슈티코프가 작전을 지휘했고 김일성이 실행한다..
그것도 김구가 1월말 유엔위원단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기 4개월 전의 일이다.
미국의 마셜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열흘 뒤, 1947년 9월26일 미소공위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가 발표한 ‘미소 양군철수’ 제안에 바로 ‘남북협상’이 들어있던 것이다. 
양국군이 철수하고서 남북한 한국인들끼리 협의(협상)하여 정부를 세우게 하자는 것, 미국과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을 원천봉쇄하려는 선전선동 남한포섭작전이다. 
 
그 1주일 후, 1947년 10월 3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회의를 소집하여 남북정치회의를 주장한다. 스탈린의 지령대로 슈티코프가 만들어준 각본에 따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소공위도 끝났으니 이제 외국의 간섭 없이 우리의 힘으로 구국대책을 세웁시다. 조선인민들이 소-미 양군을 동시에 철거시키고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민족분열책동을 파탄시키며 통일적인 민주주의 중앙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정치정세를 토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소위 남북연석회의를 열자는 김일성의 첫 제안이다. 김일성은 11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이듬해 1월까지 반복한다. (정리근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88.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국가정보학회,2007) 
 
◆스탈린의 지령-->슈티코프 지휘-->김일성-성시백 액션
 
북한 공산정권 두목으로 김일성을 선택했던 스탈린은 이번에 남한 공산화에 써먹을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을 물색한다. 소련혁명기 레닌이 애용한 ‘쓸모있는 바보’ 활용전술을 원용하여 권력을 확보했던 스탈린, 그가 노린 남한 최대의 표적은 김구와 김규식이다.두 김(金)씨의 출생 이래 활동상과 이력서가 스탈린으로 하여금 주저 없이 ‘적임자’로 점찍게 하였다. (양동안, 앞의 책). 
 
평양의 소련 군정은 해방 6개월후 1946년 2월8일 북한의 단독정권(인민위원회)를 수립하면서 동시에 남한의 제정당과 사회단체등에 대한 공작을 대폭 강화한다. 그후 1년동안 미군정의 남한은 박헌영의 남로당을 제외하고도, 한마디로 ‘간첩과 프락치의 좌익 전성시대’로 변했다. 
그 중심에 김일성의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이 있다. 성시백은 소련군정이 중국공산당 주은래 (周恩來, 1898~1976일)에게 의뢰하여 데려다가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붙여준 공작전문가였다. 
그때 주은래는 성시백 외에도 유명한 작곡가 정율성(鄭律成,1914~1976)도 추천했다고 한다. 성시백이 1946년부터 6.25침략 직전 잡힐 때까지 펼친 암약상은 소련의 전설적인 국제간첩 조르게(Ricard Sorge, 1895~1944))를 능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박병엽, 앞의 책).  

▲ 변장의 달인 '거물간첩' 성시백의 두 얼굴. 김일성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 김일성의 대남공작 총책 성시백(成始伯,1905~1950)
 
공교롭게도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평산(平山) 출생 성시백은 해주 출신 김구를 인질삼아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무너뜨리려다가, 6·25직전 '반공'검사 해주 오씨 오제도(吳制道)의 손에 붙잡혀 6·25발발 이틀 뒤 총살된다.
성시백이 공산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 때, 박헌영이 1925년 비밀 창당하는 조선공산당 가입이다. 3년 뒤 1928년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 정향명(丁向明)으로 개명, 서안(西安)지구 정보기관에서 활동하며 국민당 정부 장개석(蔣介石)의 직계 호종남(胡宗南) 사령관의 막료로 침투한다. 모택동의 연안(延安)과 장개석의 중경(重慶)을 오가며 남다른 암약을 펼쳐 중공 주은래(周恩來)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정향명은 중국어에 능통하고 변장술이 귀신같아 중국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조차 조선인인줄 몰랐다고 한다.
 
1935년 김원봉(金元鳳)의 조선혁명당에 가담한 성시백, 아니 정향명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상대로 통일전선 활동에도 집중, 임정 요인들과 폭넓은 인맥을 다진다. 
특히 1942년 김구가 임시정부를 좌우합작체제로 바꿔, 좌익 김원봉을 군무부장(국방장관)으로 앉히자 그 측근으로 해방 때까지 함께 활동한다. 
그때 임시정부에서 성시백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군무부 관계 김홍일, 이범석 등과는 ‘형님, 아우’로 부를 만큼 격의없는 관계였다. 
한 마디로 곤경에 빠져 굶주리는 임정의 민원 해결사! 국민당 정부와 군대의 기밀을 빼내 주은래에 바치는 간첩 성시백은 김구가 중국정부에 요구하는 돈 청탁 문제나 임정 사람들의 밥벌이 등 다리 역할을 도맡아주었고, 신문에 김구의 선전 기사도 써주면서 '독립운동 동지'로 ‘2중간첩’ 10년을 보낸다.
임정 요인들은 "힘들 때마다 도와주는 젊고 유망한 독립운동가"로 칭송하며 성시백을 의지하게 되면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해방 후의 악연’을 쌓아갔던 것이다.
 
성시백의 귀국=1945년 해방되던 해 12월경, 배편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남한 정계와 지인들을 두루 살핀 성시백은 1946년초 평양으로 넘어간다. 중국서 사귄 김두봉 등 북측 임정 요인들을 만난 즉시 북조선공산당의 중견간부가 되었고, 김일성은 성시백을 자신의 직속 대남공작부서인 연락실(북로당 조직부 연락실: 5호실)의 부책임자로 임명한다. 당시 대남공작 최고 실세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유영구,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월간중앙]1992년 6월호).
김일성의 관사에 머무는 동안, 김일성의 처 김정숙은 직접 밥상 술상을 차려 극진히 대접하고 41세 성시백도 34세 김일성을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한달 뒤 3월부터 성시백은 38선을 넘나들며 대남공작활동을 개시한다. 특히 박헌영과 여운형의 빈번한 밀입북을 주선하고 서신왕래의 심부름을 맡았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김일성은 라이벌 박헌영보다 여운형과 손을 잡으려한다. 그해 12월 여운형이 평양에 숨어들어 김일성 집에 머물 때 김일성은 “나의 직속 공작원을 서울에 상주시킬 테니 무엇이든지 요청하면 다 들어 주겠다”고 다짐했음은 앞에서 소개하였다. 그 공작원 성시백은 이미 서울 정착준비가 끝나있을 때였다. 
▶변장의 달인=1947년 11월 김일성은 성시백을 불러 “김구와 김규식 등에게 합작의사를 전달하여 남북연석회의 실현에 반드시 참여시키라”고 소련군정의 지령을 지시한다. (김광운 [북한정치사 연구] 선인, 2003)
“장군님, 염려 놓으십시오. 임정 요인들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성동무, 동무와 나의 성패가 백범에게 걸려 있소. 동무만 믿겠소”
김일성은 차고 있는 금빛 회중시계를 풀어 성시백에게 걸어주었다. 
시계뿐이랴, 성시백을 '북로당 남반부 특별 정치위원'으로 임명, 김일성에게만 충성하는 직속
심복으로서 박헌영의 남로당을 압도하는 '남조선 내 북한정권'의 대표격으로 남파하는 자리였
다. 그의 이름은 정향명에서 이미 정백(丁栢)으로 바꿨으며, 변장의 달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일성조차도 노인으로 위장한 성시백을 몰라보고 놀랐다는 '괴물'이다.
 
▶돈을 물쓰 듯=소련 대표부가 자리한 서울 서소문 거리에 아지트를 차린 성시백은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암약을 펼쳤던가. 박헌영의 최측근 비서였다가 박헌영 월북후 남로당 총책을 맡았던 박갑동(朴甲同,1919~)의 증언을 들어보자.
「...중국 공산당과 김일성의 연합공작단의 총사령 격으로 서울에 잠입한 성시백은 남한에 남로당 이상 규모의 김일성지지 좌익정당을 결성하는 일에 분주하였다. 
당시 남북한 밀무역이 성행하던 때인지라 성시백은 해주에서 인천으로 오는 배편을 이용, 북조선과 만주에서 쓰던 조선은행권 뭉치를 카바이트 드럼통에 감춰 비번이 반입하였다. 그 엄청난 돈으로 성시백은 사로당(사회로동당)계를 흡수하고, 신문을 잇따라 창간한다.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 및 [광명일보] 등인데, 이 밖에도 여러개 신문에 자금을 지원하며 선전망-정보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의 부동산을 대거 사들일 때. 북한 연락과 남한 공작에 용이한 여관, 목욕탕. 이발소 등을 많이 확보하였다. 김일성과 성시백은 백년대계로 남한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었다. 동시에 지하당인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도 조직하였으며 계속 늘어나는 밀무역 자금을 물 쓰듯 쓰면서 남한 정계를 주물렀다. 그후 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서울 부산 경기도 등을 비롯한 주요지역에 자신이 포섭한 후보자들을 출마시켰다...」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 
이러한 사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발행한 [북한대남공작사](1972)에서도 확인된다.
 
▶김구-김규식의 측근들 포섭=그러나 정작 중요한 임무는 김일성의 남북협상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착수한 김구와 김규식의 측근들을 포섭한 일이다. 자신의 하부인 서완석과 강병찬을 통해 김규식의 비서실에서 중요 인물 송모와 권태양을 포섭했다. 김규식이 의장인 ‘민족자주연맹’의 간부 박건웅과 임정계통의 김찬도 그의 핵심들이다. 
드디어 성시백은 김구의 개인비서 안우생을 포섭했다. 안우생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아들이자, 김구의 맏며느리 안미생의 사촌동생이다. 
김구의 입이자 손발 같은 최측근 엄항섭(嚴恒燮,1898~1962)은 중경시절부터 성시백과 절친이며, 엄항섭의 아들은 남로당원이었다. (유영구, 앞의 책).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 동조로 입장을 선회한 후에는 성시백은 남한의 남북협상세력을 ‘통일전선기구’로 묶는 일에 주력했다. 1948년 3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인회가 열리고 4월 3일 정식 결성된다. 이 협의회는 당연하게도 주요 정파 지도자들의 실무 비서들 권태양, 최백근, 안우생 등 여러명이 이끌었는데 그들은 모두 성시백과 손잡은 공작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며, 이 기구로써 김구와 김규식을 꽁꽁 묶어두려는 목적이었다. (양동안, 앞의 책).
 
◆김일성, 남한의 ‘중간파 지도층’ 포섭공작 대박...‘친북-종북’의 원조 탄생
 
김일성은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을 남파하기 전부터 남한의 유력한 중간파 지도자들을 포섭하는 공작을 벌였다. 1946년 1월에 백남운, 3월에 홍명희를 포섭한 것이 대표적이다.
경성대(서울대 전신)의 권위있는 교수 백남운과 인기 작가이자 언론계중진인 홍명희는 남로당 등 좌익정당에 일체 가입하지 않고 김일성의 ‘협조자’가 된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공산당과 무관한 사회지도층으로서 비밀리에 평양을 들락날락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와 수행하는 그들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김구-김규식은 그들을 의심하였을까? 모를 일이다. 아무튼 백남운-홍명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국회-대학가-언론계-문화계 등에 숨어 좌지우지하는 ‘친북-종북’ 인사들의 원조 격이 되었던 셈이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에게 남북협상에 참가하라고 촉구한 ‘문화인 108인 성명’도 백남운과 홍명희가 연출한 작품이라고 한다. 포섭된 김구-김규식이 참여한 남북협상에 동행했던 그들은 회담후 북한에 남아서 홍명희는 9월 공식화한 김일성정권 부수상이 되고, 백남운은 교육상을 거쳐 최고인민회의(국회) 의장까지 지낸다. 

▲ 언론인이자 인기 소설가 홍명희. 오른쪽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임꺽정'(자료사진)

◉홍명희(洪命憙, 1888~1968) 약력=충북 괴산 양반가 출생. 일본 유학시 사회주의 클럽 참여.귀국후 1924년 좌경서클 신사상연구회 가입. 1920년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역임. 신간회 부회장 역임 등.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13년간 소설 [임꺽정] 연재 대인기.
1945년 해방직후 좌익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전국문학가동맹의 전신)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홍명희는 남한에 사는 동안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으므로 ‘중간파’ 지도자격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차남과 딸은 공산당원이고, 장남은 아버지처럼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좌익협력자였다. 공산당 핵심간부 김삼룡은 친척이고 그의 조카 김기환은 일제 때부터 홍명희의 측근 일꾼이다. 중간파 안재홍, 김규식과 잘 어울리며 우익인사들과도 가까웠다. 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1950)의 둘째딸을 홍명희 둘째아들 홍기무와 결혼시켰고, 김구의 측근 조완구는 홍명희의 처삼촌이었다. 
 
홍명희는 해방 이듬해 봄 3월 처음 평양을 비밀 방문한다. 김일성을 만나자마자 북한공산당의 협조자’가 되어 소위 민족통일전선에 앞장선다. 8월 두 번째 김일성 방문후 ‘중도노선’ 민주통일당, 민주독립당 등을 만들고 김규식을 도와 ‘민족자주연뱅’을 1947년 12월 20일 결성하였다. 김규식이 위원장, 홍명희는 5명의 부위원장 중 1인이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의 우파격 주인공 김규식을 김일성도 포섭에 성공한 것인데, 김일성의 역공작을 모르는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을 적극 밀어주기만 했다.  
 
이처럼 ‘남한정부수립반대-남북협상지지’ 동원 체제를 확립하자 홍명희는 김구-김규식 등을 만나서 ‘남북의 정당지도자들이 만나 구국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중앙일보, 앞의 책). 성시백의 공작에 포섭된 측근들로부터 남북협상을 해야 한다는 압력를 받고 있었던 김구와 김규식에게 미치는 홍명희의 영향력은 강력했다.(양동안, 앞의 책).
두 김씨가 그때 홍명희가 북한정권에 포섭되어있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대한 확인은 어렵다. 홍명희는 1948년 2월 네 번째로 비밀리에 평양을 갔다온 후, 북한 공작원들과 협력하여 남북협상파의 통일전선 기구인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했다. 백남운과 함께였음은 물론이다. 김구와 김규식 등이 ‘변심’하지 못하도록 관리 감시 압박하는 그물망이다.

▲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교수 백남운, 오른쪽은 유물론에 입각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저서(자료사진).

◉백남운(白南雲, 1894~1979) 약력=전라북도 고창 출생. 수원농업학교를 나와 일본 동경상과대학 졸업. 여기서 마르크스 경제이론 수용. 1925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 우리나라 고대 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조선사회경제사](1933년)를 저술, 학자지위 확보함. 해방후 1945년 조선학술원 설립 원장,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법문학부 재정학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46년에는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서는 좌우연립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조선민족의 진로] 책자를 발표했다. 
홍명희처럼 백남운도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아 중간파로 분류되고 우익진영과도 친근했다.  
 
백남운은 김일성에게 제일 먼저 포섭된 남한의 지도자급 정치인이다.
그는 1946년 1월 25일 경에 평양을 처음으로 비밀 방문했는데, 이는 여운형의 2월이나 홍명희의 3월 밀입북보다 앞선 일이다.  첫 번째 방문에서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로부터 남한의 학자와 문화인들을 북한으로 빼돌리는 창구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하였고, 돌아와서는 북한이 지원하는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하고 문화인들을 북으로 빼돌린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앞의 책).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근민당)을 함께 만든 백남운은 여운형이 암살되자 위원장이 되어 1947년 10월 중순 아홉 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였고, 돌아오자마자 10월 18일 근민당, 사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등 중간파 5개 정당 합동으로 ’미-소양군 조기철수와 남북협상‘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백남운은 12월 초에도 평양에 갔으며, 그때 김일성이 ‘남한에서 온 한 혁명가’를 만나서 이승만 김성수 등 반동분자들을 제외한 남조선의 애국적인 모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남북 연석회의의 소집을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즉, 김일성이 백남운에게 김구-김규식의 포섭을 직접 지시하였다는 말이다. (정리근, 앞의 책)
그에 따라 백남운은 두 김씨와 북한정권 간의 연결을 맡았다. 백남운의 밀입북은 확인된 것만 14회에 달한다. 그는 김일성과 김두봉의 서한을 김구와 김규식에 전달하는 ‘배달부’ 노릇을 할때에는 옷도 변장하였고 두 김씨에게 남북협상에 관한 김일성의 뜻을 해설해주었다. (유영구, 앞의 책). 또한 성시백이 결성하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 홍명희와 협력, 두 김씨가 중도이탈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앞에 밝힌대로다. (양동안, 앞의 책).
◆성시백의 ‘대통령 미끼’...“김구는 자기의 집권을 믿었다” 남로당의 증언
 
북한공산당 [로동신문]은 성시백이 김구를 직접 찾아가 남북협상 지지를 설득했고 김일성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했다고 공개하였다.([로동신문], 1997. 5. 26). 
성시백이 김구를 어떻게 포섭하였는지 서영해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임정의 프랑스 파리 주재원이던 서영해(徐嶺海)도 북한 공작원으로 서울에 남파되어 엄항섭을 통해 경교장의 김구를 방문한다. 물론 성시백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나는 현재 북조선에서 모기관의 요직을 맡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한 서영해는 사명을 설명하였다. “김구 주석께서 유엔에 의한 단독선거를 배격하고 북조선의 김일성 위원장에게 남북총선거를 제의하면 남북을 통한 총선거가 가능합니다. 김일성 위원장은 독립운동 경력이 짧아서 김구 주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지요.”라고 전달했다. 
김구는“서형의 확실한 신분을 대주오. 지금 이북의 무슨 기관에서 일하고 있소?”라고 물었다. 서영해는“김 주석께서 앞으로 평양에 오시게 되면 다 알 수 있게 됩니다”라고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론을 거듭 역설했다. 김구에게 통일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는 미끼를 던지기로 결정한 것은 1947년 11월 15일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제안에 따라 합의된 것이라 했다. (이기봉,“남조선 반동거두 김구를 평양에 불러라: 1948년 남북협상 이면비화” [민족정론]1994년 8월호).
 
이처럼 김구가 성시백-서영해의 ‘유혹’에 이끌려 남북협상에 따르게 되었다는 견해를 밝힌 김구의 측근이 또 있다. 임정때 국무원 비서장이자 해방후 한독당 상무위원 조경한(趙擎韓,1900~1993)이 엄항섭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공개한 것이다. 
“하루는 엄항섭이 찾아와 하는 말이 남북협상을 해야겠다고 말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면 장덕수피살사건 여파로 한독당이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에 도저히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 정치적 출로로 남북회담이 요청되고...(중략)...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되면 김구 선생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으니 남북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더니 임정 주불 연락원으로 있었던 서영해라는 사람이 김구 선생을 찾아와서 김일성이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자꾸 종용하고 있다는 말까지 털어놓아요.” (조규하등, [남북의 대화] 고려원, 1987. 양동안, 앞의 책).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통곡의 언덕에서]를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백범은 남북 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조만식계 북조선민주당 인사들이나 북조선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범은 북한 동포들에게 자기 얼굴을 꼭 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다.
또한 백범이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비밀서한을 김일성-김두봉에게 발송한 날은 미군청이 장덕수 암살사건 증인으로 나와달라는 소환장이 백범에게 전달된 날이었다...」
 
그러니까 김구는 측근 등 사면팔방 남북협상의 설득과 스스로 평양행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장덕수암살의 압박감까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리자 결단을 내려 김일성의 요구에 응하였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마침내 2월 10일 김구는 유명한 성명을 발표한다.
 
◆ 김구의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성시백의 작품?
 
‘읍고’(泣告)란 눈물로 고한다는 말, 제목부터 감성에 호소하는 김구의 성명은 자신이 제안한 미소양군 철수와 남북협상을 ‘크렘린의 대변’이라 비판한 한민당을 질타하고 한국인의 심장에 파고드는 비장한 문장으로 쓰여졌다.
소련이 지령한 2.7폭동이 한창일 때 나온 성명인지라 “암살과 파괴와 파업은 외군의 철수를 지연시킨다”고 한마디 걸치고 나서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보자.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보자”고 외친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중략)....삼천만 동포 형제자매여!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深思:깊이 생각)하라” ([조선일보]1948.2.12).
 
무슨 과거를 잊고 무엇에 관대하자는 것인지 설명이 안보인다. 그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38선을 철폐하자”는 감상론의 호소가 눈에 띄는 성명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 방법론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이 성명은 김구의 최측근 엄항섭이 작성하였다는데 그때 성시백과 몇차례 만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검찰청 [좌익수사실록] 제2권) 
그러나 뒷날 북한에서 출간한 문헌에는 성시백이 직접 성명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종항-안우생 「남북연석회의 회고」[로동신문]1986.4.19. 김종항-안우생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남북련석회의와 백범 김구선생을 회고하여」 [인민들 속에서]-39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6). 김구 따라 평양회담에 갔다가 주저앉았던 비서 안우생의 회고이기에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란 소련 공산당의 통일전선 테크닉, 일찍이 소련혁명과 동유럽 공산화에 써먹은 레닌-스탈린의 전유물이다 그 화려한 심리전술을 어느 국가 누가 흉내낼 수 있으랴. 김구의 비장한 연설 “38선 베개 눈물”은 평양 소련군정사령부 전문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성시백에 가져와 김구 측근에게 주어 ‘교육’시키며 보완했다고 보는 것이, 소련 공산주의 연구자라면 어울리는 추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연석회의’ 자체가 김구의 아이디어는커녕 스탈린의 지령이었고 이는 오래전부터 준비해두었던 소련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4월 평양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진행된 주요 연설문들은 미리 소련 군정이 써놓은 것들이었음이 모두 밝혀졌다. (레베데프의 증언,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앞의 책, [쉬띠꼬프의 일기] 앞의 책).
 
북한이 놀랐다. “김구의 전환이 예상보다 빨라서...”
 
김일성은 1월 초에 김구와의 합작을 강조하며 지령을 내렸고 1월 중순께 성시백 등 공작원들을 통하여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정당 및 단체 대표들에게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북조선로동당은 놀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1월28일 두 김씨가 유엔위원단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였고, 2월16일엔 ‘남북정치 지도자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토의하자’는 내용의 공동명의의 편지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두 김씨의 태도전환이 예상보다 빨라 놀랍고 반가운” 김일성과 북로당은 다시 홍명희를 평양에 불러 올리고, 성시백의 상관인 북로당 조직부 연락실장 임해(任海,1900~1962. 뒷날 6.25때 모스크바 대사)를 서울로 보내 포섭된 중도파 지도자들과 김구 김규식의 진의를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김광운, 앞의 책).
김일성은 3월15일 두 김씨에게 답장을 보내고 두 김씨도 또 답장을 보낸다. 이제 의기가 통한  3김씨는 측근과 공작원을 통한 연락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김구는 이때까지도 편지연락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었다. 하지만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 법’이다. 소문이 번지자 놀란 두 김씨는 3월31일 비밀편지 북송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건국사 (52) 잊혀진 드라마! 모윤숙-메논의 달밤 데이트...이승만, 스탈린의 손에서 한반도 절반을 구해내다

 

▲ 이승만 박사와 여류시인 모윤숙.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역사를 가르는 우연..."첫 눈에 반하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毛允淑, 1910 ~ 1990)은 이승만의 건국사에서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역할을 맡도록 이승만이 선택한 적역(適役)의 히로인(heroine)이다. 
우연인가, 운명인가. 인간의 운명과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리저리 돌리는 우연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국에 처음 온 인도 외교관 메논이 모윤숙을 만난 우연은 대한민국 건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가 되었다.
1948년 1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이 인도 대표 메논(K.P.S. Menon, 1898~1982)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한 날 저녁,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린 유엔위원단 연회에 참석한 모윤숙은 조병옥이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이라는 소개로 메논을 처음 만나 악수한다. 당시 메논은 중국주재 대사였다.
 
메논은 모윤숙을 보자 첫 눈에 반해버렸다.(최종고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기파랑,2012). ‘첫 눈에 반한다’는 일은 남녀관계만이 아니라 그 대상이 물건이든 자연이든 모든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장의 마법이다.
그날 연회가 끝나기까지 메논은 시간을 잊었다. 모윤숙이 중학교 때 인도 시인 사로지니 나이두의 ‘부러진 날개’와 ‘등산지기’를 읽었다는 말을 듣자 한국을 노래한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비롯, 간디까지 시와 명언들을 낭송하며 다른 사람들을 잊었다. 
그뿐인가. 연회가 끝나자 메논은 모윤숙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그래도 아쉬운 듯 밤에 비서를 시켜 호텔로 모윤숙을 초대하였다. 유엔위원단 일행 60여명이 묵고 있는 국제호텔은 바로 모윤숙의 집 옆이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랴.
다시 만난 남녀는 밤12시 통행금지 시간까지 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시며 양국의 문화 이야기에 젖었다. 모윤숙은 메논의 잇따른 시낭송을 들으며 조바심이 났다. “제발 정치이야기가 나와 주었으면...나에겐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윤숙 [영운 모윤숙문학전집] 풍성한출판사, 1986)

▲ 춘원 이광수(왼쪽)와 여류문인들.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왼쪽부터)와 김동환. 오른쪽 아래 사각 인물사진은 모윤숙이 결혼2년만에 이혼한 남편 안호상(건국후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과 헤어진 모윤숙, 가정을 버리기로 작정
모윤숙은 누구인가. 해방이 되자 35세 모윤숙은 ‘가정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문학과 사회활동에 나선다. 
한일병탄 직전 1910년 3월5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모윤숙은 원산과 함흥의 보통학교를 거쳐 개성 호수돈여고를 졸업, 서울 이화여전(女專, 이화대학 전신) 영문과에 입학, 학생회장이 되어 3학년 때 독립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1931년 용정 명신여학교 교사, 서울로 옮겨 경성방송국 기자, 잡지 [동광]에 시 ‘검은 머리 풀어’로 등단,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가 불러 문단의 선후배로 가까이 지내면서 춘원이 모윤숙의 호 ‘영운(嶺雲)’을 지어준다. 
1934년 7월20일, 춘원이 소개한 보성전문 교수이자 철학박사인 안호상(安浩相, 1902~1999, 건국내각 초대 문교부장관)과 결혼, 다음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국문학을 전공하고 딸을 낳은 뒤 결혼 2년 만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다.(정식이혼은 1960년). 잡지 [삼천리] 기자를 거쳐 경성방송국 여성교양강좌를 맡은 모윤숙은 ‘빛나는 지역’(1933), ‘렌의 애가’(1937)를 펴내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독립 활동이 문제되어 일본 경찰에서 구류도 살았던 모윤숙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총독부의 ‘명사동원 작전’에 휘말려 전쟁독려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뒷날 ‘친일’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 [모윤숙문학전집]9권, 최종고 저서, 메논의 영문 자서전.(왼쪽부터)

◆“믿고 따를 지도자는 이승만 뿐” 모윤숙의 결심
 
1945년 11월 이승만이 소집한 민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해달라는 비서 이기붕의 연락이 왔다.
마지막 연사 이승만의 연설을 들은 모윤숙이 일어나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지도자 어른들께 한마디 하겠습니다. 해외에서 생각하셨던 우리 국민은 모두가 믿을 수도 없고 약해 빠져서 무슨 일을 시킬 수도 없으려니 여기셨을 줄 압니다만 36년간 고초를 겪느라고 죽고 감옥에 간 사람도 허다하오며, 지금도 많은 지도자 어른들이 마음은 살아있어 할 일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국내에 계신 여러 어른께도 똑같은 기회와 일을 주시고 직위나 명예보다 누가 더 잘 희생하여 이 난국을 바로잡나 하는 데 주력을 두시기 바랍니다” (모윤숙 [회상의 창가에서] 중앙출판공사, 1968).
대회가 끝난 뒤 이승만은 모윤숙을 돈암장으로 불러 당부한다. “해외에서 온 사람이나 나라 안에 있던 사람들이나 다 뭉쳐야 해. 나라를 생각해서 자주 와서 나에게 좋은 의견을 말해 주기 원하오”
 
 모윤숙은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지고 반탁의 기운찬 소리가 온 남한을 휘몰았을 때, 유엔 총회에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유엔위원단을 한국에 보냈다. 이승만 박사의 고집은 그때 정세를 수습하는데 약이 될만한 것이었다. 소련의 야욕이 무엇인 것도 알아차린 것 같고, 미국의 너그러운 듯 하나 속이 비어 있는 민주주의의 협조자로서의 뜻도 잘 알아차린 듯하였다. 나는 김구, 김규식 두 분을 다 숭배했다. 그러나 더욱 이유있게 숭배한 분은 이 박사였다,
하지 중장은 한국의 왕이나 다름없이 세도가 높았다...그를 호되게 비판하고 배격까지 한 사람은 이 박사였다. 모든 혼란을 주재하지 못하는 책임이 하지 중장의 얼떨떨한 통일론이라는 것이었다. 물과 기름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북한을 통일하겠다는 것이냐는 것이 이 박사의 논지였다. 어딘지 여성 같은 김규식 씨의 이북(以北)론은 서로 의논해서 하자는 선의의 학자식 정치관을 늘 내놓아 이 박사와의 충돌을 면치 못하였다. 이 박사는 현실과 정치를 분리하지 않았다. 나는 이 박사가 하지 중장을 떳떳이 상대하여 비판하는 개성미가 좋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박사의 굳센 결의에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모윤숙, 앞의 책).
 
1948년 1월 모윤숙은 날마다 이승만의 이화장에 갔고, 메논은 날마다 모윤숙의 집에 들렀다. 
아침에 덕수궁 회의에 나가면서 메논은 대형 세단을 문앞에 세워놓고 문간방에서 놀고있는 딸 일선이를 껴안고 볼에 굿모닝 키스를 해주곤 했다. 저녁에는 비서를 시켜 초콜렛 등 과자를 보내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메논 박사의 마음을 이승만에게로 돌리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모윤숙 [영운모윤숙문학전집] 앞의 책)
 

▲ 모윤숙과 메논, 김활란이 함께 걷는 모습. 이 사진은 메논이 귀국후 인도신문에 공개한 것이다.

★“나라에는 자유가 없어도 요정에는 자유가 있었다”
 
모윤숙이 전하는 당시 서울 외교가의 풍경을 돌아보자.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리는 유엔위원단 회의장 방청석에 갔다. 메논이 방청하러 오라고 해서다. 유엔 대표들 중에는 좌경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국 제안, 소련 제안, 중립노선 제안을 놓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국내 정치인들은 방청석에서 외국인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와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며 누구 편을 들어야 이로운지 기막힌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일을 외국인들이 이러고저러고 하는 일도 걱정인데 우리 정치인들이 아직도 정신이 안들었구나 싶어 한심스러웠다. 
그들에 비하면 이승만 박사는 미국무성이나 외국인이 넘보지 못할 그 자신의 혼이 있었고 주장이 있었다. 또 비굴하지도 않을뿐더러 미국이나 소련의 눈치나 보면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도 않았다. 한국의 절대권력자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에 동조하고 그를 밀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승만 진영의 조병옥씨나 장택상씨 등은 메논과 하지의 접촉을 줄이려 노력했다. 거의 매일 밤처럼 충무로 ‘천향각’ 등으로 메논 박사를 초청하여 기생파티를 열었다. 메논이 기생파티를 싫어하는데도 말이다. 당시는 요정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사교장이요 무도장이다. 평소 싸우던 정치인들도 요정에만 가면 희희낙락 의기투합하는 듯, 기생을 안고 국사를 논하다니...나라에는 자유가 없는데 요정엔 자유가 있었다. 36년동안 말 못하고 살아서 그랬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말부터 해대는 것이었다...」 (모윤숙, 앞의 책).
 
문제는 그런 자리에도 메논이 모윤숙을 꼭 불러내어 문학이야기나 한국 풍속 이야기만 하는데 있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도통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중립국 외교관 메논, 어느 날 모윤숙이 참다못해 화제를 돌렸다.
“박사님은 문학토론이나 하려고 한국에 오신 것 같군요. 덕수궁 회의에서도 문화토의를 하시나요?” 
메논이 금방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문학 토론이나 했으면 좋겠소. 그런데 머리가 터질 듯 골치 아픕니다. 한국의 길잡이가 누가 되면 좋겠습까? 김규식 같은 이는 학자 정치가라서 남북한 의사도 조화실킬 수완도 있어 보이고...”
“이승만 박사는요?” 모윤숙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훌륭한 분이지요. 그런데 하지 장군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나는 이 나라 국민을 진심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를 모두 만나고 싶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이승만 박사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사람이구요.”
기다렸다는 듯 다짐하는 모윤숙의 말에 메논의 표정이 종잡을 수 없이 변하였다.

▲ 경성방송국 기자시절의 모윤숙과 인도 외교관 크리슈나 메논.

◆이승만의 건국전쟁 막판 초읽기 위기...“메논을 잡아라”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운 소련의 남한 공산화 공세를 유엔의 힘으로 막아내려는 이승만의 건국전쟁은 이제 마지막 무대에서 초읽기에 몰렸다. 예상대로 소련이 유엔의 북한 선거를 거부하였고, 철석같이 맹세하였던 김구가 하루아침에 소련 편으로 돌아섰다. 유엔한국위원단은 남북한선거를 포기하느냐 마느냐,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으로 우왕좌왕을 거듭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잠 못 이루는 이승만은 ‘묘수’를 찾는다. 메논을 잡아야 한다. 
 
★모윤숙의 ‘메논 잡기’ 제1라운드
 
메논이 유엔총회에 한국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일이다.
“이봐, 미스 모, 메논 박사와 저녁 먹으러 오지. 그 사람이 하지 말만 줄곧 듣고있으면 큰 결단 나겠어."
 이승만은 손가락을 훅훅 불어댔다. 20대 시절 한성감옥서 받은 참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흥분할 때면 화끈거리는 손가락들에 이승만이 입김을 불곤 하였다.
하지와 김규식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론에 메논이 솔깃해 있음을 알고 있는 모윤숙은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겁나는 일인지 깨닫고, 이승만의 남한 총선거론이 당시로는 가장 현실적 해결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모윤숙은 메논을 불렀다. 메논은 ”차 한잔할 시간밖에 없다“며 따라왔다. 이화장에서 차를 마시는 메논은 하지장군과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는 모윤숙을 주방으로 끌더니 황급히 속삭였다.
 ”이 박사께서 하지와 메논이 마지막 방안을 합의할 것이라며 안절부절 못하시니 어쩌면 좋으냐“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럼 하지 장군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모윤숙이 결심을 한 듯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는 비서가 받았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모윤숙은 거침없이 거짓말을 한다.
”저는 메논 의장님 대신 전화를 거는데요. 그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저녁 디너를 다른 날로 미뤄달라고 하십니다. 미안합니다“ 
”오, 정말 그렇습니까?“ 상대방의 응답을 들으며 모윤숙은 다음 말이 겁나서 얼른 전화를 끊는다. 
달아오른 얼굴로 메논에게 돌아와 방금 저지른 일을 실토한 모윤숙은 ”무례한 일을 처음 해봤습니다. 부디 오늘 저녁은 이박사와 하시지요“ 애원하는 눈길로 메논의 눈을 사로잡는다.
”왜 내 말도 안듣고 그런 전화를...“ 메논은 놀란 것도 잠시, 이승만과 만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메논이 좋아하는 한식을 차리도록 이미 준비해놓았다.
밤 늦게까지 이승만은 한국의 공산화 위기와 남한단독선거의 불가피성을 간절히 설명하였다.
메논은 충분히 이해하였다며 헤어졌는데 그의 결심은 뉴욕으로 떠나기기까지 ”무너지지 않았다“고 모윤숙은 써놓았다. (모윤숙, 앞의 책).

▲ 모윤숙이 메논에게 달밤 산책가자고 유인한 금곡릉. 1년후 모윤숙이 메논의 초청으로 인도에 가서 구경한 타지마할.

★모윤숙의 ‘메논 잡기’ 제2라운드
 
2월13일, 유엔위원단은 결국 의장 메논이 유엔에 가서 결론을 얻어오도록 일임하기로 결정한다. 
그날 밤, 이승만은 또 다시 모윤숙에게 전화를 건다. 내일이면 메논이 뉴욕으로 떠난다. 
 
”이봐, 윤숙이. 밤이 늦었지만 메논씨를 좀 데려와야겠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박사님도...지금 몇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수 있어요“ 모윤숙은 거절한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어디 있나. 전화좀 걸어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이승만의 너무도 간곡한 목소리에 모윤숙이 일어났다.
며칠전 메논과의 대화를 떠올린 모윤숙은 메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도의 타지마할 얘기가 나왔을 때 메논이 달밤에 타지마할을 봐야 그 낭만을 맛볼 수 있다던 말, 모윤숙은 한국의 왕릉들도 달밤에 걷는 게 좋다며 안내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달빛이 좋은데 금곡릉 산책 어떠세요?“ 메논은 뉴욕 다녀와서 가자고 거절했다. 모윤숙은 뉴욕 가시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졸랐다. 역시나 메논은 차를 몰고 대문 앞에 왔다.
동대문 쪽으로 가다가 ”추운데 인삼차 한잔 마시고 가지요“ 이화장 마당에 차를 세웠을 때 메논은 따라 내리면서 한마디 했다. ”노티 걸(Naughty girl)“
그때, 바지 저고리를 입은 이승만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달구경 가자는 바람에 나왔지요. 여기가 목적지 아닙니다“ 겸연쩍게 웃는 메논은 이승만에게 끌려 인삼차 테이블에 앉았다.
그 사이 프란체스카는 모윤숙을 주방으로 끌고 가서 한지(韓紙) 두루마리를 주었다. 
그것은 이승만 지지자 60여명의 명단, 타이핑보다 손으로 쓴 붓글씨라야 진정성이 보인다는 이승만의 요구로 이름을 쓰고 날인한 족자형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지지자 명단을 메논에게 전달하였는데 비서 이기붕이 깜빡 잊어버려 뒤늦게 비서 윤치영이 급조한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이화장을 나서는 메논에게 모윤숙은 두루마리를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 박사는 포기한 줄 알았는데...왜 미스 모에게 이런 일을 시킬까요“ 
중얼거리는 메논에게 모윤숙은 다짐을 두었다.
”모든 이유는 훗날 역사가 의장님께 알려 줄 것입니다. 만약 의장님이 이 서류로 우리 일을 성공시켜주신다면...저는 의장님만 믿습니다. 온 국민이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지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그때 메논이 지긋이 손을 잡았다. 약속의 암시 같았다. (모윤숙, 앞의 책)
 
★이승만의 집념...날마다 메논에게 전보 치게 하다
 
메논이 떠난 날부터 이승만은 날마다 모윤숙에거 전화를 건다.
”전보를 쳐야해. 윤숙이, 우리의 원하는 바를 그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전보를 쳐야 해.“
”그럼, 박사님이 전보를 치시면 되잖아요“ 모윤숙은 퉁명스럽게 대응한다.
”아니야, 윤숙이 이름으로 쳐야 받아보고 참고 해 줄 거야“
이 박사는 자신의 오래 된 타자기로 전보문을 치고 끝에 ‘매리언 모’(Marian Moh)란 이름을 치고는 모윤숙에게 사인을 하라고 시켰다. 그렇게 보낸 전보가 단 1주일간 10통이 넘었다.
메논씨는 내가 그렇게 유창한 영어문장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회현동 내 집으로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주었다. ”한국민이 원하는 대로 힘쓰고 있소. 선이에게 초콜릿을 보내오.“ (모윤숙, 앞의 책)

▲ 유엔소총회에 참석한 메논(중앙), 왼쪽에 한국위원단 사모총장 후스쩌 박사, 오른쪽에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

◆ 메논의 연설 ”이승만은 남한에서 마력을 가진 이름이다“
 
당시 뉴욕 롱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Lake Success)에 위치한 유엔에서 유엔소총회가 2월19일 열렸다. 개회 벽두에 연단에 오른 메논은 한국문제 전반을 보고하는 연설을 했다.
메논은 소련의 입북거부로 난관에 빠진 위원단이 격론 끝에 유엔이 위임한 사항을 총회에 반납하는 선택은 만장일치로 폐기하였다고 단호하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남한단독 총선거 등 3개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재 남한의 대표적인 우익 3개정당(독촉국민회,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과 좌익4개정당(남조선로동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을 설명하고, ”유엔에 의하여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 될 정부를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2개“라고 밝혔다. 그 정당들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와 김성수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며 ”이들이 남한에서 여론의 대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메논의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진다.
”즉시 총선을 주장하는 우익 2개정당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재산이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의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평생의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판디트 자와하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박사는 돌연히 38선이 표징하는 좌우대립이 들이닥침으로써 극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옹호하거나 또는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이다.“ (Yoon Sook Mo, [Speeches of Dr. Menon] Mun Hwa Dang, 1948. [동아일보] 1948.2.22.). 
메논의 보고를 청취한 각국대표들이 자국입장을 밝힌 뒤, 유엔소총회는 4일간 휴회에 들어갔다.

▲ 체코 공산화 쿠데타에 '공포시대'를 경고하는 마셜 미국무장관. 체코 외상 자살기사(조선일보)

★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스탈린 지시로 공산당이 쿠데타
 
메논의 연설이 진행될 무렵, 동유럽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과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스탈린이 지시한 쿠데타였다. 연립정부에서 경찰력을 장악한 공산당 내무장관이 우파세력을 숙청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2월15일경부터 22일에 걸쳐 정권을 전복시킨 것. 독일 패망후 귀국한 망명정부 인사들이 세운 체코 제3공화국은 사라지고 스탈린이 지도하는 공산당 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
동유럽을 점령한 스탈린은 2차대전이 끝나자 점령국들의 공산화 시나리오를 진행하였는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민주주의민족해방전선 등을 만들어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이란 전형적 적화수법을 총동원하였다. 선거결과는 공산당 제1당이다. 그렇게 좌우연립정부를 세우고 나서 기회를 노리다가 미국의 마셜 플랜에 참여하자는 움직임이 나오자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즉, 스탈린은 마셜 플랜에 맞서 코민포름을 창설해 대응하던 중, 우파세력의 마셜플랜 지지 움직임에 이를 ‘계기’ 삼아 쿠데타를 지령하였던 것이다. 
연립정부 대통령 베네시는 공산당의 협박으로 사임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인정해야 하였으며, 반공주의자 외무장관  마사리크는 호화로운 궁정에 있는 관저3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은 뒤늦게 성명을 발표, 체코사태를 ‘폭력정치시대’로 규정하고 전세계에 초비상적 중대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며 ”체코 정권은 인민이 승인한 것이 결코 아니오 ‘공포 정권’“이라 비상을 걸었다. 
 
이런 체코 사태가 미국과 유엔의 ‘남한단독선거’를 결심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것은 메논의 연설에서도 확인된다. "최근의 체코 사태에서 보듯이 소련의 강경태도는 우리 위원단으로 하여금 현안의 남북한 협상이 기대할만한 성과가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였다."
메논의 연설에 흡족한 이승만, 그에게는 주요 고비마다 예상치 못한  ‘행운의 여신’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 스탈린이 만든 빨간 세계지도. 대륙 끝에 붙은 한반도 남쪽만 파란 나라다.

◆남한단독 총선거 결의...메논 ”내 심장이 가는 대로 했노라“
 
2월24일 다시 열린 유엔소총회에서 미국 대표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을 제시하였고 26일 투표한 표결에서 찬성 31표, 반대2표, 기권 11표로 가결되었다. 국내에서는 이승만을 비롯, 주요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며 감격에 취하였다.
드디어 스탈린이 미소공위 꼼수로 적화시키려는 한반도에서 '절반'만이라도 우선 ‘구원’을 얻었다. 
소련이 북한에 소위 ‘민주기지’를 세워 남한까지 '민주화'(공산화)하려는 것을 막고, 이젠 남한에 ‘자유기지’를 세워 북한 공산지옥을 자유화시켜 통일을 이뤄낼 역사적 기회가 활짝 열린 것이다. 
스탈린과 거기에 끌려간 김구가 가로막은 ‘적화 위기’에 맞서 이승만 혼자 싸우는 ‘1인 건국전쟁’은 마침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남한 총선거만 남았다.
 
메논은 3월6일 서울에 돌아왔다. 모윤숙의 회상록을 다시 펼쳐 보자.
「그는 퍽 피곤해 보였다. 이 박사는 그날로 회현동 우리 집에 메논을 초대해서 대접하라고 했다. 메논씨는 귀국환영 파티를 일찌감치 마치고 후스쩌(胡世澤호세택) 박사와 함께 나타났다. 후 박사는 메논씨와 인간적으로 각별한 사이여서 농담도 잘해 좌중을 곧잘 웃겼다.
”일주일을 어떻게 참았소? 미스 모가 보고 싶어서 말이오. 이 집 2층과 호텔 당신 방 사이에 구름다리를 하나 놓는 게 어떻겠소? 하하하“
우리를 통행금지가 넘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지난 일이 떠올라 흐르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메논씨는 서울에 온 며칠 후에도 우리 집에 통행금지가 지나도록 앉아 있다가 야단이 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논을 찾아 헤매다 화가 난 비서가 뛰어들고 헌병대장도 헐레벌떡 ”각하, 서울을 다 뒤져도 계신 곳을 몰라 헌병 백명을 풀었습니다. 혹시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평양에 가시지 않았나 했죠. 이제 안심했습니다“라며 돌아갔다.
 
메논씨는 실로 대화의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디까지가 공동의 대화이며 어디까지가 마음 설레는 사적 대화인지 분계선을 가리기 어려웠다. 두 가지가 다 농후해져 나를 그에게로 이끌어갔다. 그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마음의 빛깔이요, 울림이요, 갈망이기도 했다...」(모윤숙, 앞의 책)

▲ 메논의 유엔 연설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1948년2월21일자.

★메논의 자서전 ”모윤숙은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 불렀다“
유엔에서 돌아온 메논은 오자마자 인도의 외무장관으로 발령되어 3월19일 서울을 떠났다.
외무장관 봉직에 이어 모스크바 주재 소련대사를 9년간 지낸 뒤 메논은 1965년 펴낸 자서전에서 모윤숙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그중 가장 친애한 사람은 지도적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 나는 그녀와 많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정치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았다.
매리언 모는 시인이요 애국자였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의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aberration)일 뿐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Saviour of Korea)라 부르는 몇 편의 시까지 지어 읊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나의 나라(인도)가 유엔 결의(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나의 평생 공직생활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K.P.S. Menon [Many Worlds Revisited] 1981. 최종고, 앞의 책)

▲ 1948년 12월 파리 유엔3차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 온갖 노력끝에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유엔 승인을 압도적지지로 받아냈다. 왼쪽에 조병옥, 가운데 모윤숙, 오른쪽 장면.

 
 
 
 
 
 
 
 
 
 
 
★모윤숙, 메논의 초청 받아 인도에 가다
1948년 8월15일 건국후, 파리에서 열린 유엔3차총회에 모윤숙이 참석한다.
12월 말 압도적 지지표로 대한민국 정부승인을 얻어낸 사절단의 일원이던 모윤숙은 귀국길 인도에 기착한다.
1년전 김포 공항에서 ”인도에 오시오. 언제든 꼭 인도에, 인도에...“ 여러번 간곡히 요구하며 비행기 창문에 원을 그리던 메논이 파리의 모윤숙을 부른 것이었다. 
1949년 2월 인도 공항, 도착한 모윤숙을 맞은 사람은 기대했던 메논이 아니라 메논의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호텔서 하룻밤만 지내고 떠나겠다는 모윤숙을 메논 부인은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눈부신 분수와 꽃들과 수목이 무성한 수천평 정원에 높이 솟은 화강암 저택이 으리으리하게 다가왔다.
첫 날 여권을 빼앗아 간 외무장관 메논은 모윤숙 앞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메논의 형과 메논의 부인이 타지마할 등 명승지로 데리고 다녔다. 
 
서먹하고 의아한 나날에 뜻 밖에 네루 수상이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물론 메논의 연출이다.
2월22일 밤 네루 수상은 몹시 친절한 태도로 모윤숙을 옆에 앉혔고, 그제야 마즌 편에 부인과 앉은 메논을 눈으로 만날 수 있었다. 
네루는 한복을 칭찬하며 정치를 하라고 권했다. 모윤숙은 메논씨가 한국이 어려울 때 한국인이 원하는 일을 해주었다고 응답했다. 메논은 미소만 지었다. 
네루는 ”이승만 박사가 좀 부드러우면 나와 함께 일할 수 있을 텐데 고집 좀 숙이라고 하시오“ 농반진반 웃었다. 모윤숙은 ”인도와 같은 중립노선이 한국엔 맞지 않는다“며 이승만의 고집정치가 반신불수 한국을 구할수 있는 약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네루는 이승만 박사에게 줄 선물로 회고록을 주었다.
 
새벽 1시 넘어 귀가했을 때 메논은 ‘굿나잇’ 한마디만 던지고 부인과 함께 사라졌다.
잠 못드는 모윤숙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M선생! 모두가 지나치게 잔인한 친절 속에 저를 가두어놓고 의장님은 만날 수도 얘기할 수도 없는 거리에 계시는군요. 가난하고 비교도 안되는 금곡릉을 타지마할에 비교했던 나의 무지에 대한 보복인가요. 왜 나를 불러놓고 한 번의 식사, 한 번의 만남조차 없이 이리저리로 나 혼자만 다니게 합니까? 지난 번 복도에서 빼앗아간 여권을 빨리 돌려주세요. 이처럼 낮선 사람들 틈에 더 섞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떠나겠어요. 이 진저리나는 고독과 슬픔들이 나를 몰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정월 그믐밤 러크나우에서 M“ (모윤숙, 앞의 책)
한 달이 되도록 메논을 단둘이 만나지 못한 모윤숙은 메논 저택을 떠나 귀국한다.

▲ 모윤숙은 '펜클럽의 대모'로 불렸다.1954년 런던 거리를 걷다가 'pen' 간판을 발견, 무작정 들어가보니 국제펜클럽 본부였다. 그자리에서 한국의 가입을 요청한뒤 귀국하여 한국펜클럽을 창설, 가입한다. 영어에 능통하여 한국문인들을 이끌고 국제대회마다 참석, 세계에 한국문학을 알렸다. 왼쪽사진은 문단 행사에서 시낭송과 노래를 즐기는 모윤숙. 오른쪽은 1937년에 발표하여 90년대까지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문집 [렌의 애가] 표지. (가운데 국제펜클럽 로고 pen=poet,essay,novel의 모음).

5년 뒤 1954년 국제 펜(PEN)클럽 가입 문제로 런던에 갔던 모윤숙은 후배 문인 조경희(趙敬姬,1918~2005)와 함께 인도에 들렀다. 왜 메논씨에게 연락하지 않느냐는 조경희의 물음에 모윤숙이 터졌다. ”부질없는 일이야“ 벽에 이마를 찧으며 한참 흐느꼈다는 말이 전해진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2년 뉴델리, 국회의원이 된 62세 모윤숙은 인도 출장길에 메논을 찾았다. 관직에서 은퇴하여 인도-소련 협회장이 된 74세 메논, 더 다정해진 그 부인이 선물을 건네며 ”아예 인도에 와서 함께 살자“는 말을 꺼냈다. 메논도 거들었다. 말없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 모윤숙의 대답은 자수정 반지를 빼내 부인 손가락에 끼워준 것이었다. 
메논은 1982년 84세로 죽었다. 1990년 모윤숙도 80세로 눈을 감았다.
이승만의 ‘유엔외교-독립전쟁’을 위기에서 승리로 반전시키는 계기를 만든 남녀의 인연, 우연히 만난 인도 외교관이 한국의 여류시인에 끌려 ‘뜻밖의 외교드라마’를 연출하고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연인 아닌 연인’ ‘우정을 넘은 우정’이 대한민국 건국사의 아슬아슬한 막간(幕間) 고리를 드라마틱하게 연결 구원해주었다.
오늘을 사는 자유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잊은 은인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승만 건국사(53) 이승만 “갈 테면 소련 가서 스탈린과 담판하라”....김구 “우리민족끼리 담판, 실패하면 38선서 자살”....슈티코프 “김구 참석이 가장 중요” 남북회의 지휘

 

▲ 이승만, 김구, 김규식 3거두는 남한단독선거 문제로 하지 사령관 앞에서 갈라진다.

’지도자‘라고 다 같은 지도자일까.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면서 공산당의 정체도 모르고 이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 위치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들은 스탈린이 이용할 먹잇감이 되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일찍이 공산주의 정체를 갈파하여 스탈린과 20년 넘게 싸워 온 이승만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을까. 그들의 대화내용을 들어보자.
 
★이승만, “당신들은 염려 말라. 나 혼자서 역사에 책임 지겠다”
 
메논이 유엔에서 연설하기 전날 밤, 2월19일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경무대 관저로 초청했다. 그는 한국지도자 3거두가 유엔소총회에 ’단합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한 시간이나 설득조로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놀랍게도 딴청을 피웠다. 불과 열흘 전 이승만과 남한선거에 대하여 ’합의‘했던 일을 잊은 듯 말을 바꾸는 것이었다. 두 김씨는 남북지도자회의를 성사시키기까지는 선거를 미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게 아닌가.
김규식은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 노력도 해보지 않고 남한선거를 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분단을 영구화시킨 반역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이 “그럼 당신의 해결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규식은 엉뚱하게도 “남한 선거로 수립되는 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 또 미국이 그 정부에 원조를 해줄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선거에 뛰어들 수는 없다”고 버티는 결의를 보였다.
 
이승만은 격분했다.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는 것도 그 이유도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시오, 우사(尤史:김규식 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외국에게 우리를 얼마나 도와주겠는가 물을 수 있겠소? 유엔이 승인해준다는 답을 먼저 들어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말이요? 우리가 힘을 합해 정부를 세우고 나서 승인을 요구해도 승인을 해줄지 말지인데 그것도 당신은 모른단 말이잖소?
당신들이 염려할 필요 없소. 나 혼자서 역사에 책임을 질것이고, 아무도 당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오.”
이승만은 벌떡 일어섰다. 하지를 향해 속사포를 날렸다.
“나는 이 두 양반, 특히 김구씨에게 선거에 참여하자고 온갖 수단으로 설득해왔지만 실패했소이다. 장군의 영향력은 성공할지 모릅니다. 이 두 양반을 장군에게 맡깁니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났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두 김씨의 표변한 대화법의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사흘 전 2월16일 그들이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써서 북한 공작원을 통해 보낸 뒤, 그 회답을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이승만도 누구도 아직은 아무도 알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김두봉에게 보낸 김구의 편지는 다분히 옛정을 그리는 감상적 문투였다고 한다. (손세일, 앞의 책). 
“인형이여,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弟)는 인형이 보고싶을 때마다 때묻은 보따리를 헤치고 일찍이 중경(重慶)에서 받았던 혜찰(편지)을 재삼 읽고 있습니다”로 시작, 남북지도자회의를 열어 남북통일문제를 논의하자고 호소한 편지는 결론을 이렇게 장식한다.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우사 형과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를 주장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호응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백범김구전집-8] 대한매일신보사, 1999). 
김구 연구에 헌신한 손세일은 이 편지가 엿새 전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서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그 ’38선 베개‘ 성명서는 앞서 밝혔듯이 북한공작원 성시백이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번 편지 작성자도 ’비슷한 인물‘이 아닐까. 김구의 입이자 손발인 엄항섭은 성시백과 계속 만나고 있었다.

▲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오른쪽)은 유엔서 돌아와 김구를 방문, 총선거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김구는 거부하였다.

◆두 김씨, 선거 거부 발표...이승만은 ’건국 스케줄‘ 발표
 
유엔소총회가 2월26일 ’남한단독선거‘ 결의안을 확정하자 이승만은 즉각 환영하고 나섰다.
“유엔이 한국총선거에 대하여 31대 2표로 가결한 것은 유엔대포단의 노력과 미국무성의 정당한 주장으로 우리의 기대한 바를 달성하게 되었다....지금은 유엔의 협조와 미국의 후원으로 모든 장애가 해소되고 우리 앞길이 순조로이 열리게 되어, 이제부터는 우리 전 민족이 주저말고 일심합력하여 모범적 선거를 진행해서 국권을 확립하고 조국통일책을 여러 우방의 협조로 속히 해결되기 바란다.”([경향신문] 1948.2.28.)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정반대로 말한다.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조국 통일과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분투하겠다.(김구 [경향신문] 1948.2.28.)
”나는 통일선거라 해도 참여하지 않겠고 앞으로는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 하겠다“(김규식 [경향신문]1948.2.28.).
 
★두 김씨, 3.1절 기념식도 따로...미군정, 선거일 5월10일 확정
 
서울운동장에서 3.1절을 맞아 10여만 군중이 모여 경축행사가 벌어졌다. 3.1독립선언 기념식에 이어 유엔의 중앙정부수립 결정에 대한 축하 국민대회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선거일정을 비롯, 정부수립과 국방군 창설, 유엔 가입에 이르기까지 건국 스케줄을 발표하여 군중의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반면, 김구와 김규식은 경교장에서 해방우 처음 이승만과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김구는 이대로는 통일할 수 없으므로 남조선선거에 응하지 않겠다며 ”이승만과 더 이상 행동을 같이할 수 없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서울신문] 1948.3.3)
 
하지 미군사령관은 이날 총선거 날짜를 5월9일로 발표하였고, 이를 계기로 38선을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이 갑자기 늘어나 하루 1,000명에 유박하였다.([동아일보] 1948.3.4.)
유엔위원단은 3월12일 전체회의에서 선거일을 5월10일로 변경한다. 9일은 일요일이므로 기독교계에서 반발했기 때문이다.
메논 의장과 후스쩌 사무총장은 경교장을 방문, 김구에게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조선일보] 1948.3.14.).

▲ 유엔소총회의 남한선거 결의후 김구가 '선거 불응'을 발표한 기사(조선일보 1948.3.1일자). 오른쪽 지면은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기사.

★김구, 장덕수암살 재판 연속 소환에 위기감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구는 3월12일과 15일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다.
소환장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미 군정이 김구의 소환거부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김구는 이 사건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전면 부인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나에게 이렇듯 죄인 취급을 하는데는 나로서 말할 것이 없소. 죄인이라면 기소하고 증인이라면 할 말이 없으니 가겠소“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김구를 변호인쪽에서 말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검사가 증거를 대며 계속 추궁해도 묵묵부답이다.
방청석에서는 ’뭘 숨기느냐. 다 불어라‘ 수근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김구는 뒷날 암살재판 수모 때문에 고립감과 위기감을 느껴 북한행을 더욱 결심했다고 실토한다. 
”나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려 한 것을 볼진대 점차로 험악해오는 신변의 위험성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만일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김구는 통일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였다고 전해주기 바란다.“([경향신문] 1948.4.17.)
 
재판출석 이후 거리에서도 손가락질과 야유까지 받아야 했던 김구, 하지만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마샬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두 김(金)이 표면상으로 부를짖는 것은 ’한국의 통일‘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평양의 초청을 수락한 기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적어도 이번 선거에게 그들의 주총자들 중에 당선되거나 고위직에 오를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즉 ’들러리 서기‘가 싫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다른 데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다. 공산주의는 이런 반대파 속에서 번성한다. 두 김은 평양에서 일이 잘 안될 경우에 대비하여 남한에 정치적발판을 마련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김규식이 공개적으로는 선거를 보이콧하고서도 비밀리에 그의 친구들에게 국회에 몇 명이라도 자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후보자들을 내고 선거운동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보고를 받아왔다....좌익과 중도세력은 유권자의 10~15% 정도이다. 그들은 지금 후보자 등록을 하고 있다.」 (Jacobs to Marshall, Apr. 9, FRUS 1948).

▲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나와 진술하는 김구(왼쪽 앉은이).

◆성시백, 김일성 편지 전달...슈티코프, 김일성에 남북회의 코치
 
드디어 기다리던 북쪽 두 김씨(김일성-김두봉)의 편지가 3월27일 남쪽의 두 김씨(김구-김규식)에게 전달되었다. 심부름은 역시 거물 공작원 성시백이다. 2월16일 성시백을 통해 편지를 써보냈던 남쪽 두 김씨가 40일째에 받은 편지를 보니 북쪽 두 김씨가 도장을 찍은 날이 3월15일이다. 왜 이렇게 늦었을까.
 
소련군정청장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는 그의 일기에 상세히 적어놓았다.
소련군정은 이미 김일성을 시켜서 ’남북제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를 정해놓고 그 준비를 하면서 ’올가미‘에 걸린 남쪽 두 김씨를 초조하게 길들이는 순치기간을 두어, 김일성의 협상 주도권을 확보해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회답를 늦추어 보냈다는 것이다. 
레베데프는 소련에 있는 ’북한 총독‘ 슈티코프에게 일일이 보고를 보내 지령을 받는다.
슈티코프는 ”김구의 반탁투쟁 등 공산통일 방해행위부터 신문사설로 문책하라“고 명령한다.
김일성은 준비회의에서 슈티코프의 지시대로 주장한다. 
”김구는 미군철수부터 요구해야한다. 남조선 선거를 반대한다면 반대 투쟁을 벌여야 하고, 평양에 와서 선거반대 공동성명에 서명해야 할 것이다. 김원봉의 말로는 김구와 김규식이 말로만 반대하고 실제는 선거에 참여한다고 한다.“ (전현수 편역 [레베데프 일기 1945~1948] 나모커뮤니케이션, 2007).
 
★김일성의 ’일방적 통고와 명령‘ 편지...김구 ”그래도 북한에 가야한다“
 
김일성-김두봉의 편지는 너무나 뜻밖에 일방적이고 위압적인 명령조였다. 인사말도 없이 ’당신네들‘이란 말로 두 김씨의 '반통일적 행태'를 질책하며 미소공위의 파탄 책임을 물었다. 
그것은 김구가 김두봉을 ’인형(仁兄)‘이라 부르며 다정하게 호소했던 감상문과 천지차이였다.
”이제야 당신들은 유엔과 미국의 정치음모를 간파한 듯 한데, 당신들은 어떤 조선을 위하여 투쟁하려는지 그 목적을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대책을 이미 세워두고 그 투쟁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한다“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편지에서 말한 남북통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남쪽 두김씨의 편지는 그 편지를 보낸 것으로 용도종료, 성시백을 시켜 두 김씨를 옭아맨 것으로 끝이다.
북의 편지는 남조선의 참석자 명단을 20명 지정하고, 회의 순서까지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김구의 경교장(京橋莊)과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엔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및 북의 초청 통고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시백은 북한이 지정한 참가대상 인사들 모두에게도 편지를 전했던 것이다. 홍명희 등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북한의 공작을 받은 사람들은 날마다 구수회의를 거듭한다. 
그 사이 북한 라디오는 남북정치협상회의를 4월14일 평양에서 개최한다면서 남북의 참석정당들을 거명. 희망자들은 연락하라고 방송하였다. 
엎친데 덮친 격이 된 두 김씨는 차마 북한 편지 내용은 발표하지 못한 채, ’감상(感想)이란 이름의 성명을 발표한다.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의구가 없지않다“면서도 ”좌우간 평양에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회담의 성공을 확신하는가” 묻자 김구는 “북한의 소련군도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런 국제분위기로 보더라도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서울신문] 1948.4.1)
그야말로 ‘일방적 지령’에 끌려가면서도 막연한 희망사항을 되풀이 말함으로써 남북회담에 대한 국내외 기대감만 높여준 셈이었다. 

▲ 북한 공산화과정과 남한 폭동 등의 사건 진상을 알려주는 두 일기. 소련붕괴후 공개되었다.

◆이승만 “공산주의와 결전” 선언...김구의 방북에 직격탄
 
미군정의 선거준비와 함께, 3월초부터 본격적인 선거 캠페인에 돌입한 이승만은 ‘투표자에게 권고함’이란 담화를 발표, 이번 선거가 “공산주의자와의 결전”이라 선언한다.
“우리가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잃었던 국권과 강토를 회복하여 삼천만이 다 자유로 살자는 목적일 뿐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은 그들이 타국(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하여 우리 독립목적을 방해하는 까닭이니, 누구를 막론하고 독립방해분자들과는 끝까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민족진영에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승리할까가 문제가 아니요, 오직 독립주의와 독립반대주의,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기회만 엿보는 중간주의, 이 세가지 중에서 어떤 주의가 성공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서 투표해야 할 것이며,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분투할 가장 양심적이고 건설적인 애국인사만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총선거에 대한 주의건 15개항’도 발표, “주의와 사실로는 다툴지언정 인신공격 등을 금지하여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위신을 손상하지 말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연설에 맞춰 대동청년단, 독촉국민회청년단, 대한노총, 서북청년회, 전국학생연맹 등 14개 청년단체도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과 국민참여를 계몽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3월31일 두 김씨의 ‘감상’을 들은 이승만은 측근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저 김일성 뒤에 소련이 있는 줄 모르고, 쯧쯧..,소련에 직접 가서 스탈린과 담판하겠다면 모를까 김일성을 백번 만나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쯧쯧“(비서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앞의 책).
그리고 이승만은 이런 담화를 또 발표한다.
”남북회담 문제는 세계에서 소련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줄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아직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蒙昧)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이번 북한에서 온 편지 내용이 발표된 것과 같다면 이것은 소련 목적을 성원하는 이외에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을 다 알수 있는 것인데, 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국사에 방해되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욱 낙심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국권회복을 하루바삐 성취하자는 합의로써 총선거를 충분히 진행한 뒤에 우리 힘으로 남북통일을 우리 정부에서 달성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동아일보]1948.4.2.「남북협상은 소련 목적에 추종」)
 
★이승만,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남북회담전망’
「두 김씨의 북행 결정은 그곳에서 큰 선전꺼리가 될 것으로 일단 관측됩니다. 이미 이곳 공산당 신문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은 김구를 부의장으로 만들어 북한에 체류시키려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결국 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을 들고 나오든가, 북한정권이 유일한 정부이므로 통치권이 남한까지 미친다고 공포하라고 김구를 조용할 것입니다. 북한의 군사적 준비가 그걸 말해줍니다. 김구는 늘 그랬던것처럼 미군철수부터 요구할 것이 틀림없지요. 소련군은 국경을 건너가서 미국을 주시할 것이고 만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 뒤의 일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김규식 박사는 꾀가 너무 많은 사람이라서 꾀로 소련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남쪽에서 지체 없이 우리 계획을 추진하는 일입니다. 1948.4.5」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1960)
 
★미군정,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으려는 것...북행 도로는 넓다‘
 
딘 미군정장관은 4월1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넓은 도로 뿐만 아니라 철도도 있으니 이를 이용하면 좋을 것이며 우리는 하등의 간섭도 안할 것이다. 하루바삐 통일을 원하는 것은 미국이 누구보다 더 갈망하고 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지푸라기를 잡으려다가 귀한 생명을 잃어선 안된다” ([동아일보]1948.4.2.)
 
하지 사령관은 4월6일 ’남북협상의 선행조건‘이란 특별성명을 내놓았다.
“무릇 협상 대표란 선거로 뽑힌 사람이라야 국민적 대표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딘 장군 보다 더 강한 비난을 쏟았다. 
“북한에서 온 초청은 남한의 주요 정당 영수들은 다 빼고, 국민대표를 선정하는 유일한 방법인 선거를 반대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지명했다. 그 대다수는 공산주의 주구로서 해방이래 남한에서 반동행위를 해왔고 한반도를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보려고 애쓰던 자들이다” ([조선일보]1948.4.7.)

▲ 북한공산화의 두 주역, 슈티코프와 렘베데프(오른쪽).

◆슈티코프 “김구의 참석이 가장 중요”...김일성 연설문까지 직접 작성
 
★두 김씨, 신변보장 받으려 연락원을 김일성에게 파견
 
남북연석회의 날짜가 다가오자 김구와 김규식은 사전파견 연락원으로 안경근(安敬根)과 권태양(權泰陽)을 선정, 편지를 써서 평양으로 보냈다. 회의 개막날짜 연기와 신변보장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특히 신변보장은 김구가 몹시 신경쓰는 문제다. 왜냐하면 중국 임정시절 김구는 공산당원들을 여러명 ’해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월 성시백이 처음 ’김일성 장군 특사‘라며 나타났을 때에도 김구는 물었다. “장군께서 나의 과거를 용서해주실는지...” 성시백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장군께서는 과거를 일체 불문에 부치시고 백범 선생을 통일 대통령으로 모시고자 정해놓고 계시니 아무 염려마시고 평양에 가시면 됩니다.” 그 말에 김구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의 입으로 확약을 받아야 하겠기에 편지에 “지난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백지에서 출발하자”고 써 보냈던 것이다.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안경근은 회의 날짜 연기와 신변보장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우리가 통일을 위해 만나는데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이미 회의 준비도 끝나있으므로 두분 선생이 이쪽으로 넘어오셔서 우리와 상의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송남헌 증언, [남북의 대화] 고려원, 1987). 레베데프는 “과거를 백지화 하자고? 자기 죄를 다 인정하는군” 낄낄 웃었다.
 
★슈티코프, 남북회의 의사일정 확정...김구 ’축사‘ 시킨다
 
레베데프는 연락원이 가져온 편지도 슈티코프에게 즉각 보고한다.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는 남북연석회의를 주재하는 총감독이다. 모든 시나리오는 이미 스탈린의 결재를 받아 시행중이다. 슈티코프가 “가장 중요한 것은 김구의 참석”이라며 독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북회의를 여는 목적이 김구를 이용한 남한선거 저지전략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뒷날 소련 패망후 공개된 [슈티코프 일기]와 [레베데프 일기]에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3월30일자 레베데프의 기록. 북남조선 연석회의 의사일정이다.
 
「4월14일의 확대회의에 대하여 협의하다.
정치정세에 대하여 김일성, 김구, 허헌 세사람이 보고한다.
김일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박헌영이 한다. 보고가 끝나면 의견교환 뒤에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한다.
제1일, 연석회의를 거행한다.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로 주석단을 구성한다.
의사일정을 채택한다. 김두봉, 김구, 허헌, 김규식, 김달현, 이극로 최용건, 김원봉 이상8명의 축사를 듣는다.
제2일, 첫 번째 문제에 대해 3명의 보고를 듣는다. 토론시간을 갖는다. 토론자에게는 발언시간을 15분으로 제한한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결정서를 작성할 위원회를 선거한다.
제3일, 첫 번째 문제에 대한 토론을 종결하고 결정서를 채택한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 보고자는 허헌이다. 선전노선에 대하여 조직노선에 대하여 토론한다....등」
 
이와같이 스탈린이 남조선 선거저지-공산화 각본을 정하고 슈티코프-레베데프가 시나리오와 콘티까지 짜서 김일성 일당을 무대에 내세워 연기 시키는 남북연석회의는 이제 남한의 두 김씨가 거느리고 오는 남한 엑스트라의 입장을 기다리는 중이다.
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연설문도 직접 써서 레베데프에게 넘겼다.

▲ 제주4.3폭동의 희생자들 위패를 모신 평화공원 건물. 가해자인 남로당원들까지 포함시켜 계속 문제가 되고있다.

◆제주 4.3폭동 만발...김구는 경교장 뒷담 넘어 38선 직행
 
★남로당 폭력투쟁 전국 일제히 개시 
 
소위 ’2.7구국투쟁‘이란 선거반대 폭동에 이어 선거일이 5월10일로 확정되자 남로당은 4월부터 본격적인 폭력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한다. 이것은 물론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것인데 북한에 있는 박헌영에게는 김일성과 헤게모니를 다투는 ’충성경쟁‘이므로 총력을 기울여 지휘한다. 
청년당원들로 ’선전선행대(宣傳先行隊)‘라는 무장조직을 구성, 목포 유달산에 봉화를 올린 것을 신호로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폭력을 개시한다. 선거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후보자들에 대한 테러, 교량과 철도 폭파, 전신주 뽑아내기, 무자별 방화 등 전국을 휩쓸었다. 서울 북한산과 인왕산에 봉화시위가 벌어지고 후보자 등록 사무소들을 기습한다. 미군정은 당시 3만여명에 불과한 경찰력만으로는 1만3,800여개소의 선거사무소를 지키기에도 역부족인지라 다급하게 지방별 향보단(鄕保團)을 조직하여 대응하였으나 어림도 없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4.6.~12)
제주4.3폭동은 남로당 폭력투쟁의 하이라이트였다. ’슈티코프의 일기‘를 보면 박헌영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투쟁을 격려한다. 25세 김달삼(金達三, 1923~1950. 본명 이승진李承晉)이 제주남로당 군사부장-유격대사령관으로 4월3일 밤 제주일대 경찰지서들을 일제히 기습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확산된 폭동을 계속하여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저지‘에 성공하였다. 
 
★김구 “우리민족끼리 해결”...김규식 “북한군에 남조선 정부 며칠 못 간다”
 
이런 와중에 김구와 김규식은 4월12일 이승만-이청천-김성수 등을 자기조직 국민의회에서 해임하는 ’공식이별‘ 작업을 벌인다. 김일성의 ’무조건 환영‘에 답하듯이 남북회의를 앞두고 집안정리를 서두른 것이다. 이에 맞장구를 치듯이 ’문화인 108명 성명‘이 14일 나왔다.
동아일보 주필 출신 설의식(薛義植)이 주동한 이 성명은 당시 문화계의 명사들을 망라하여 남북회의를 지지한다는 명문이었다고 한다.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를 외치는 글은 지식인다운 정세분석은 아예 없고 오로지 ’불타는 민족주의 열정‘이 넘치는 선동문이었다. 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하자는 취지였다,
15일 저녁에는 김구가 경교장 정원에서 북행환송파티를 열고 한바탕 민족주의를 부르짖는다.
“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민족끼리 민족정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 해보자는 것이다...담판을 해보아서 안되면 차라리 38선을 베개삼아 메고 자살이라도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삼천만에 읍고함‘이란 성명에 나온 말을 되풀이 하였다.
 
이보다 앞서 나온 김규식의 발언은 한술 더 떴다. 섬찟하다.
“북조선에 20만의 군대가 있으니 남조선에 정부가 서도 그 정부는 며칠 못갈 것인데,...그래서 우리는 남조선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반대하는 것이다....우리 일은 우리끼리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을 알아야 한다....흥해도 우리 힘으로 흥하고 망해도 우리 손으로 망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8.4.6.) 
김규식의 주장은 북한군에 남조선정부가 며칠못가 망한다면서 북한에 간다니, 김일성과 ’우리끼리‘ 무슨 일을 끝장 본다는 것인지, 김규식을 아는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평양방송은 19일 밤 10시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기 바란다’고 방송하여 두 김씨를 잡아끌었다.

▲ 김구가 38선 표지선 앞에서 아들 김신(오른쪽)과 비서 선우진(왼쪽)과 기념 쵤영을 하고있다.

★"가지 마시오" 북행 말리는 시위대 경교장 앞마당에 농성
 
드디어 19일 아침, 경교장 마당은 인파에 덮였다. 김구를 환송하는 한독당 사람들을 비롯, 월남한 기독교단체, 부인단체, 서북청년회, 전국학련 학생들이 뒤섞인 500여명이 진을 쳤다.
김구는 둘째아들 김신(金信)과 비서 선우진(鮮于鎭)을 대동하고 경교장을 나왔다. 그때 ”가지 마시오“ 외치는 인파가 김구 앞에 누워버렸다. 일부는 김구의 자동차 바퀴 공기를 빼놓았다.
베란다에 올라선 김구는 ‘내 마지막 독립운동 길을 막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경교장을 나갈 수가 없었다. 김구 측근들은 다른 승용차를 뒷담 너머에 대기시킨다.
점심까지 챙겨먹은 김구 일행은 오후 2시 넘어서 남몰래 경교장 뒷담을 넘었다.
(선우진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이승만 “남산의 소나무들이 다 죽어가고 있소”
 
2월 하순경 이런 일이 있었다.
김구가 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남한만의 선거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아일보 기자가 물었다. 
“백범 선생은 전에 이승만 박사에 대한 애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남산의 푸른 소나무가 색이 변한대해도 나는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선거 반대는 그 말과 상치되는 것 아닙니까?” 
김구는 10여분 뒤에 대답하였다. “작은 문제는 이견이 있어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뜻을 같이 하고 있소”
이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승만이 말했다.
“남산의 소나무들이 전부 죽어가고 있소”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김구, 38선에서 기념 사진...김규식, 북한의 짐검색에 호통
 
김구가 38선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6시40분, 기자들과 짧은 회견을 하고 북한사람의 도움으로 38선을 넘었다. 작은 마을서 저녁도 굶은 채 대기중 밤11시가 되어서야 북한측 영접책임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사무착오”라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평양서 보낸 차로 옮겨타고 어느 여관에 도착하니 새벽1시, 이튿날 사리원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 닿은 시간이 20일 오후 2시였다.
 
“설사가 나서 뒤따라 가겠다”던 김규식은 21일에야 승용차 11대에 일행 16명을 태우고 서울을 떠났다. 경찰이 지프차로 에스코트하였다. 일행은 원세훈, 김봉준, 최동오, 신숙, 김성숙, 박건웅, 신기언, 송남헌 등이다. 38선을 넘어 평양서 보낸다는 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복차림의 북한 보안원들이 일행의 짐을 샅샅이 검색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노발대발 호통을 쳤다. 
깊은 밤 새벽1시에 ’특별열차‘로 출발, 아침6시 평양 도착, 김구가 머무는 상수리(上需里) 특별호텔에 합류하였다. (선우진, 앞의 책). 이 같은 북한의 두 김씨 영접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승만 건국사 (54) 스탈린 연출 ‘평양 인형극’...첫사랑 만난 김구, 김일성과 '망명' 논의까지..."우리민족끼리 뭉쳤다" 자랑

 

▲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김구와 홍명희, 김일성이 나란히 앉아있다. '인공기'를 만들어놓은 북한은 이때까지도 태극기를 사용하며 남한인사들을 기만했다.

★레베데프 “김구가 말을 안들으면 미국의 간첩으로 폭로”
 
경교장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김구가 평양에 도착한 날은 4월20일 오후2시, 소련이 연출한 남북연석회의는 이미 19일 김일성이 개막하여 진행 중이었다. 
상수리 호텔에 나타난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두봉이었다. 그는 “손님이 먼저 주인을 찾아가야지요”라며 김구를 김일성에게 데려갔다. 김구-김두봉은 임시정부에서 함께 했던 사이지만 북한의 ‘새로운 주인‘ 김일성은 김구보다  37년아래 아들 같은 36세 애송이로 첫 대면이다. 
 
이들의 만남과 대화를 지켜 본 레베데프는 ’김구가 평양에 왔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만약 김구가 연석회의 참가를 거부한다면 그 대리인이라도 참가시켜야 한다. 문제는 그들이 회의를 결렬시키고 퇴장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퇴장하라하고 예정대로 회의를 계속한다. 그리고 김구를 ’미국의 간첩‘으로 폭로한다...」 ([레베데프 일기] 앞의 책).
이렇게 ‘만약’의 대비책도 세워놓은 레베데프는 뜻 밖에 ‘순종적’인 김구와 측근들의 행동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모란봉 극장에서 진행된 회의에는 남북한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남한쪽 대표 백남운-홍명희 등 중진급 말고도 200여명은 김일성 직속공작원 성시백이 선발, 인솔하여 왔다. 
 
★김일성 “이승만은 매국노”...타도대상 공식화
 
김일성이 개막식에서 회의 목적 ‘4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 유엔위원단 추방 및 유엔 결의 무효화. 2) 단선 단정 반대. 3) 미-소 양국군 철퇴. 4)자주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이다. 
첫날 28명의 주석단을 선출한 회의는 김구가 도착한 하루를 쉬고 21일 속개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정세보고’에서 이승만을 집중 비난한다.
“이승만 등 배족적 망국노들이 남조선에서 미국철거를 반대하여 매국적 반동분자들의 정체와 진면목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이승만 도당들이 미제국주의에 우리 조국과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는 미제국주의 충견임을 보여주었다...(중략)...매국노 이승만은 근40년 동안이나 미제국주의자들이 길러낸 그들의 주구이며 자기의 미국 주인들이 시키는대로 무엇이든지 감행하려고 한다...” 
레베데프는 참석자들의 반응이 뜨거워 연설이 ‘36차례 박수’를 받았다고 일기에 썼다.
날마다 회의 진행과 결과를 슈티코프에게 보고하고 코치를 받는 레베데프, 왜냐하면 김일성의 연설원고는 모두 슈티코프가 직접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연설만이 아니다. 김일성의 ‘정세보고’에 대한 토론내용도 딱10분씩 시간에 맞춰 사전에 작성, 결재한 것들이다. ([레베데프 일기] 앞의 책).
남북연석회의 목적 그대로 “이승만을 미국의 충견 매국노로 만들어 선거를 봉쇄하자”는 캠페인을 소련과 그 선발된 연기자들이 날마다 열을 뿜는 ’인형극‘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이 김일성을 시켜서 이승만을 ’타도대상‘으로 낙인찍은 첫 공식대회이다. 
평양에서 이날 시작된 ’이승만 죽이기‘는 바로 ’대한민국 건국봉쇄 전술‘인데 이것을 건국후 지금까지 75년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부 지도층과 일부 지식인들이 계속 이어가고 있다.  

▲ '단선단정 반대' 회의에 참석, 축사하는 김구.

★김구의 축사 “우리 공동목표는 단선단정 분쇄”
 
스탈린이 남한의 선거 저지를 위해 벌여놓은 정치쇼 남북연석회의 셋째 날 22일, 호텔을 나선 김구는 회의장 모란봉극장에 갔다. 박헌영이 나타나 "김구선생을 주석단에 추대하자”고 제안,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김구는 주석단에 앉았다. 새로운 참석자들이 차례로 인사를 한 뒤 김구가 연단에 올라 인사말에 이어 ’축사‘를 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 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해야할 것이며,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우진, 앞의 책).
 
23일 김원봉(인민공화당)의 사회로 이어진 회의에서는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결정서‘의 요지는, 남조선을 미국 식민지로 만들려는 이승만, 김성수 등을 ’매국노‘로 낙인, 타도하자는 것이었으며, 북조선은 소련이 광범한 자유를 주어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로 발전한다고 대비시켜 “남조선 제정당-사회단체들은 총집결하여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한다”고 결정, 이는 가장 정당한 구국투쟁이라 규정하였다. ([레베데프 일기])

▲ 안창호의 동생 안신호. 김구가 28세때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첫 사랑. 40여년만에 평양서 다시 만난 73세 김구의 호텔수발과 안내를 맡았다. 오른쪽 사진은 옛추억의 영천암을 찾은 김구와 안신호 일행.

★김구, 옛 약혼녀 안신호 만나 17일간 지내다
 
김구가 평양의 호텔에 들었을 때 뜻밖에도 무척이나 반가운 여인을 만났다.
슈티코프의 ’김구 이용작전‘은 치밀했다. 김구가 28세 총각시절 약혼했던 안신호(安信浩, 1884~1963)를 수배하여 72세 김구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여동생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진남포에서 살고 있는 64세 과부였다.  
 
평생 잊지 못하는 옛사랑을 만난 남녀의 감회가 어땠을까. 그들은 좋아하면서도 헤어져야 했던 젊은 날의 연인들, 왜 결혼하지 못했던지 그 사연을 김구의 글로 돌아보자.
「평양 예수교회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호를 만났다. 숭실중학교 학생이면서 애국자로 나와 뜻이 맞았다. 최광호는 내가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도산(안창호)의 영매로 스무살, 극히 활발하고 신여성중의 명성(明星)이라고 말했다. 나는 안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회견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줄 믿고 있었는데 곧 혼약이 깨졌다고 알려왔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안도산이 미국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 학생 양주삼(梁柱三)에게 신호와 혼인하라 말하고 신호에게도 양주삼이 졸업하면 혼인을 결정하라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후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신호에게 왔다. 이 편지를 받고 고통한 안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양주삼과 김구를 다 거절하기로 하고 동네 친구 김성택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얼마후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흠모하였다」 (김구 [백범일지] 1979).
 
무려 45년만에 다시 만난 연인들, 안신호는 김구의 호텔방 수발을 도맡았다. 
청년시절 추억을 더듬는 김구는 중노릇할 때 머물던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의 영천암을 찾았다. 안내역 안신호가 앞장섰다. 누가 봐도 부부 같은 남녀는 신호의 오빠 안창호가 말년에 휴양하던 송태산장도 돌아보았다. 
북로당의 열혈당원이자 간부인 안신호는 말끝마다 김구에게 김일성을 추켜세우기 바빴다고 한다.(선우진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김구가 북한을 떠나는 순간까지 함께 했던 안신호는 여성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스탈린의 남한선거 저지작전 ’평양 쇼‘ 덕분에 옛사랑과 보름 넘게 생활하게 된 김구는 모처럼 청춘시절의 행복에 젖었던가. 특히 김구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제삿날(4.26)까지 챙겨  푸짐한 제수를 차려주는 북한 측에 김구는 감격하였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옛 여인과 옛날로 돌아간 듯, 소위 ’혁명유가족학원‘도 시찰한다. ’혁명유가족‘이란 남한 공산화 폭동에 참여했던 사망자들의 가족을 말한다. 
돌아오는 길엔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찾아가 둘러보고 김일성의 조부도 만났다.
 
’우리민족끼리‘ 통일독립을 논하겠다며 38선을 넘었던 김구, 사전에 빈틈없이 짜여져 시계처럼 돌아가는 남북연석회의에는 비집고 들어갈 기회도 없었고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북측은 김구를 구워삶는 심리전술 코스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다. 김구는 회의에 딱 한번 참석한 5분 축사뿐, 그것으로 그의 역할은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스탈린에게는 김구의 ’쓸모‘가 이제부터이다. 
 
“내가 회의에 참석치 않은 것은 몸도 피곤하고 또 나대신 대표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여러 결정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찬동한다. 남북요인회담이 선행되었어야 할 것을 그리 되지 못하고 장차 있을 예정인데 내 본의는 이 회담에 있는 만치 그 결과를 보아서 공적 의사표시를 하겠다.” (김구 기자회견, 평양, 1948.4.27.)

▲ 오늘의 모란봉극장. 해방 이듬해 소련군정이 1946년2월 북한정권을 세운후 건립한 모란봉극장은 1948년4월 남북연석회의를 열고 김구-김규식 등을 참석시켜 '통일전선' 정치쇼를 벌였다.(자료사진).

김구, “남북공동성명에 만족” 서명...김일성과 ’망명 논의‘까지
 
’매국노 이승만 타도‘와 ’남한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결의한 ’결정서‘ 채택까지 너무나 순조로운 회의 결과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가 있다. 바로 총지휘자 슈티코프.
남북연석회의 마지막날 슈티코프는 긴급지시하여 ’남한단선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 홍명희-백남운울 비롯하여김구의 최측근 엄항섭 등 남쪽 참가자들 50여명으로 조직한다. 이 투쟁본부는 황해도 해주에 두기로 했다.
 
이어서 슈티코프는 ’남북지도자협의회‘ 구성을 지시한다. 김구가 요구했던 ’요인회담‘을 슈티코프식으로 조직하여 김구를 확실하게 얽어매려는 수법이다. 
그는 남북지도자회의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방침을 지시하였다.
“지도자회의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외국 군대 철수 뒤에 내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권력을 접수해서 선거를 실시하고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만일 이상의 합의사항에 반대하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신망과 주도권을 장악한다...” ([슈티코프 일기] 1948년 4월24일자)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엄항섭, 박헌영, 백남운 등 남북요인 15명으로 구성된 지도자협의회는 4월30일 모란봉 극장에 모였다. 김구가 주장하는 요인회담 ’4김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도 빠짐없이 열었고 오후 4시부터 별관에서 ’공동성명서‘를 확정하였다. 
이어 밤9시, 남북연석회의 전체회의를 열어 공동성명을 채택, 남북의 참가단체 대표들이 단상에 올라 차례로 서명을 마쳤다. 
성명 내용은 물론 슈티코프가 지시한 ’스탈린의 명령‘ 그대로였다. 
외국군대 철수, 특히 미군 즉각 철수, 내전 발생 방지,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남조선 단독선거 무효 등이다. 
 
김구는 서명 후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만족한다. 통일 전에야 어찌 만족할 수 있으랴만, 다만 우리 과업이 하나의 난관을 개척해 나가는 것 같아 매우 유쾌한 일이다.”

▲ 대동강 하류 쑥섬에 세워진 '통일전선탑'앞면. 뒷면엔 남북회의에 참가한 김구와 김규식 등 이름을 새겼다.

★메이데이 군사 퍼레이드 참관...대동강 쑥섬회동 ’통일전선 기념탑‘ 세워
 
공동성명 서명 이튿날 5월1일 메이데이(May Day 노동절) 평양역 광장, 노동자 농민들을 비롯한 대규모 행진에 이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인민군 부대의 사열행사가 진행된다. 
따발총을 든 보병부대, 학생부대, 장갑차와 각종 포대가 소련제 트럭을 타고 지날 때마다 김일성이 손을 흔들었고, 그 옆에 김구는 막강한 무력에 위압당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30만 군중이 비를 맞으며 4시간 넘게 계속된 퍼레이드엔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초상화가 춤을 추었다.
「남쪽 대표 모씨는 "새 젊은이들이 상하결속, 강력한 조직체로 밀고 나아가니 이런 씩씩한 힘이란 남조선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을...“ 혀를 내두르며 경탄하였다」 ([조선일보] 1948.5.8.)
 
다음날 일요일 김구는 안신호와 함께 평안도 기독교의 요람 장대현(章臺峴)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이날 오후 김일성은 대동강 하류 ‘쑥섬’에서 남북요인들의 ‘뱃놀이 회담’을 벌였다. 
북로당 대남연락부장 임해(任海)와 남조선 공작책 성시백(成始伯)이 꼼꼼히 챙긴 행사에는 남쪽요인들의 수행비서들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유명한 대동강 어죽 잔치 회식을 2시간 넘게 계속하며 나눈 대화는 평양의 역사와 추억을 곁들여 ‘남북공동성명’을 재확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날의 회담을 기념하여 김일성은 1980년대 후반에 ‘쑥섬 통일전선 탑’을 세운다. 스탈린이 꾸민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를 참여시켜 대성공을 거둔 ‘통일전선 공작’을 김일성은 뒷날 두고두고 이를 인용하며 자신의 공적을 치켜세웠다. 거기엔 ‘김구-김일성의 단독회담’ 성공이 빠지지 않는다. 아들 김정일 역시 이때의 ‘김-김 밀담’과 이를 성사시킨 거물공작원 성시백을 ‘영웅1호’로 받들었다.

▲ 단독회담을 위해 김구(오른쪽)을 북한정부청사 사무실로 안내하는 김일성.

★김구, 김일성과 단독회담...망명 타진...”과수원서 여생 보내겠다“
 
김구가 원하던 김일성과의 회담은 5월3일 오후 3시, 북한인민위원회(정부) 청사 김일성의 방에서 두 시간쯤 이어졌다. 회담 내용을 전해주는 김구 쪽의 기록은 없다. 비밀을 유지하고 싶었을까. 
대신에 소련군정 [레베데프 일기]와 당시 북로당의 회담 기록을 전해주는 북로당 고위직 박병엽(朴炳燁)의 증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2010)이 남아있다.
 
◉[레베데프 일기] 요약=「김구는 북한에 수감된 한국독립당 당원의 석방을 요구. 김일성은 ‘테러분자’들이라고 대답하다. 김구는 ”선물을 달라“면서 조만식 석방과 ‘북한 전기의 남한송전’ 문제를 꺼냈다. ”남조선은 지금까지 북조선에 전기료를 지불하는데 전기가 모자란다. 미군정이 돈을 어디 쓰는지 모르겠다. 북조선에서 남쪽이 전기료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방송을 통하여 자주 보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남조선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다.“
김구는 자신의 장래에 관하여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조선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망명처)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고 물었다.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레베데프는 이날의 일기 말미에 “남조선에 보내는 전기는 당장 끊어야한다”고 적어놓았다. 
 
◉박병엽의 증언 요약=김일성은 남북연석회의 성공이 김구의 지도력 덕분이라며 감사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선생께서 남조선에 내려가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이 탄압하면 어느 때라도 북으로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서울서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북조선 공산당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반대해야 할 뿐 아니라 이북에서도 단독정부를 세워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구는 김일성의 신변걱정에 대하여서는 “남쪽에서 어려워지면 올테니까 그때는 과수원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의 진술=회담 당사자 북한 김일성이 뒷날 직접 진술하는 김구와의 회담 내용이 있다. 일본 이와나미(岩波)문고 그룹이 발행하는 좌익잡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가 평양에서 ‘해방40주년 기념’ 김일성을 인터뷰하여 게재했는데, 김일성의 답변 내용중 김구 부분은 다음과 같다. 
 
“김구는 나를 만나기 위하여 북조선에 오기 전에 재차 자기 비서를 보내와 과거의 자기 죄과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어왔다. 나는 과거의 일은 모두 백지로 돌리자고 하였다. 그는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들어와 우리들이 소집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때, 나는 김구와 수차례 만나 담합하였다.
그는 나에게 과거에 자신들이 중국의 상해에서 공론(空論)으로 밤낮을 보내고 있을 때, 장군은 무기를 손에 들고 싸웠으며, 승리하여 나라의 독립을 찾았다. 자신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반대하였지만 용서하여 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김구는 북조선의 공산주의자는 이전에 자기가 보아온 공산주의자와는 다르다면서, 장군 같은 공산주의자라면 손을 맞잡고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함께 싸울 수 있다고 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김구는 남조선으로 돌아갈 무렵, 자기는 북조선에 체류하고 싶지만 오래있으면 북조선에서 자신을 억류하였다고 반동분자들이 데모할지 모르니 돌아가야겠다고 말하고 몇가지 부탁을 했다. 황해도 연백평야(38도선 이남)의 농민을 위해 관개용수의 공급을 재개해달라 제기하였고, 또한 남조선에서 투쟁하다가 활동을 못하게 되면 다시 올 생각이니 여생을 보낼 수 있게 과수원이나 하나 주기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전부 해결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세카이] 1985년8월호).
[세카이] 야스에 편집장은 김일성을 10여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북한 찬양-대한민국 비난을 지속한 인물이다. 그때 김대중의 일본-미국 망명 행각을 돕고 장문의 인터뷰를 거듭하여 지원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세 가지 자료에서 김구의 ‘북한망명 타진과 과수원’ 발언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망명 이야기는 뒷날 증폭되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정부 주석의 직인(職印)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장군님이 국가의 지도자이시니 이를 맡으라”고 요청했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이에 김일성은 “그냥 가져가시오. 내가 그 걸 무엇에 쓰겠습니까?” 거절했다는 북한의 공식 기록이다.(‘김일성저작집’(4), 김구와 한 담화,1948년 5월 3일).
무엇이 진실이든 김구의 북한행은 이렇게 끝났다. 
'남한단선단정 반대' 합의를 제외하고는 남북통일에 대한 실천방안 제시도 협상도 전혀 없었다. 
 
“별별 짓을 다 하던 김구가 이제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게 되니까 살려고 평양에 온다”(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2)며 웃던 북한 지도층, “김구는 쓸모있는 바보”라며 남한선거 저지에 활용했던 소련 스탈린의 심복 슈티코프의 모란봉극장 정치 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김일성은 죽는 날까지 이때의 ‘김구 공작’을 ‘통일운동의 공적’으로 자주 거론하였으며 [김일성 저작집]에 수록하고, 북한공산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때만 되면 이 ‘수령님의 공훈’을 특집으로 보도하곤 했다.

▲ 평양 을밀대를 돌아보는 김구와 김규식 일행.

◆김구의 귀환 성명 “우리민족끼리 단결”...김일성, 세가지 약속 즉각 파기
 
김일성은 김규식도 만나준다. ‘만나준다’는 말은 ‘김구만 우대’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200여명의 남쪽 좌익인사들은 북한이 정해준대로 공장 시찰이나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남조선에서 간 대의원들은 활기에 차 있었지만 동시에 '정치건달'들은 가련했다. 그들은 일단 회의에 출석하는 것은 인정받았으나 각종 분과위원회의 중요토의에는 박헌영 일파에 의하여 참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여관방 하나에 두 사람씩 배정되어 아침부터 명산품이라는 평양소주와 닭고기, 돼지 고기를 푸짐하게 대접받고, 전용버스로 회의장으로 실려가서 찬성 거수를 하였고, 밤에는 조선의 무희로 불리는 최승희(崔承姬) 무용단 춤을 관람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남한의 반파쇼투쟁위원회 대표로 참석했던 고준석(高峻石)의 증언이다. ([조선 1945~50: 혁명사의 증언] 1985. 손세일, 앞의 책)
 
 남한대표들 가운데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 등 70여명이 북한에 남겠다고 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에게도 ‘잔류’를 권유하였다. 김구는 측근들이 반대하여 단념했다고 전해진다. (선우진, 앞의 책)
평양을 떠나기 전 김구는 ‘기분 좋은 얼굴’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레베데프 일기])

 

“북조선에서는 벌써 기초가 많이 건설되었고 또 건설되고 있으나 남조선에서는 아무 것도 건설되지 못했다”는 김구는 “미국인들이 남조선 내정에 광범위하게 간섭하여 인민들의 불만이 많다”고 했다. 특히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어떠한 자유로운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고 강조하였다.
두 김씨가 서울로 귀환하는 계획은 갑자기 변경된다. 남한의 반공청년들이 북한에 잠입하여 두 김씨의 귀환열차를 폭파하려는 음모가 들통났다며 북한 측은 열차 대신 승용차를 배정, 비밀리에 38선을 넘어야 했다.(송남헌의 증언, [신동아] 1983년 9월호).
두 김씨 일행은 17일간의 ‘우리민족끼리’ 회합을 마치고 5월5일 저녁 서울에 도착하였다.
 
★“북한은 단전 안한다” 두 김씨의 자랑...1주일만에 물 먹다
 
다음날 5월6일,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귀환성명을 발표한다. 
그 성명서는 평양에서 미리 작성해온 것이었다. 
“이번 우리 북행은 우리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각국과 다수 동포들에게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남북회의는 남조선 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 요구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하였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신발전이며 큰 서광을 주는 바이다.”
두 김씨는 자신들이 서명한 남북공동성명서의 내용을 남북협상의 최대성과로 꼽았다.
“우리는 어떤 험악한 정세에 빠지더라도 공동성명에 명시된 바와 같이 동족상잔(同族相殘)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고 두 김씨는 장담하였다.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斷電)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조만식 선생의 남행도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두 김씨는 마치 남북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자신에 찬 표정으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북조선이 단정을 수립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듣는 이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2년전 북한엔 이미 단독정권(인민위원회)가 수립되어 토지개혁과 민족세력 숙청 등을 비롯한 공산화 작업이 다 끝나 있지 않은가. 
‘동족상잔은 없다’는 대목은 슈티코프가 특별지시로 집어넣은 사실을 두 김씨가 알 턱도 없다.
살인을 준비 중인 살인범이 “너희는 안 죽이겠다”고 문서로 안심시키는 꼴, 이 다짐은 도둑이 제발 저리 듯 2년 후 소련이 감행하는 6.25 전면남침을 스스로 예시하는 ‘신호’였음을 누가 알겠으랴.
  
요컨대 두 김씨가 내놓은 ‘성과’는 ‘단선단정 반대’와 김일성의 세가지 약속, 즉 단전 안한다, 송수(送水)도 해준다, 조만식도 보내준다 등이다. 그러나 이 약속들은 그날부터 1주일 뒤, 일거에 깨지고 만다. 
5천년 민족사 최초의 국민 총선거 5월10일 투표에 이어 개표가 끝나자 5월14일, 북한은 압록강 수풍발전소에서 보내주던 전기를 전면 단절한다. 남한 전국은 암흑천지가 되었고 연백평야에 송수는커녕 두 김씨만 배불리 물을 먹고 말았다.
 

이승만 건국사(55) 공산폭동 속에 투표율 95.5%...이승만의 ’자유선거 혁명‘ 대성공...선거 보이콧 김구 “北남침 없어, 김일성 약속 믿는다”

 

 

▲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도록).

이승만, '이런 사람 뽑아야" 국민들에 사상최초의  선거 계몽
 
5천년 민족사에 최초로 실시하는 ‘국민 자유 총선거’는 3월 초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유엔위원단에 선거관련 건의서를 보낸 이승만은 3월10일 “이번 선거는 공산분자와의 결전”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잃었던 국권과 강토를 회복하여 삼천만이 다 자유로 살자는 목적일 뿐이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은 그들이 타국(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하여 우리 독립목적을 방해하는 까닭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분자들과는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총선거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대다수 민중과 독립을 방해하는 소수 분자 사이에 어떤 편이 승리해야 우리 민족이 복스럽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을까를 저마다 생각해서 가장 공정한 각 개인의 투표로 결정할 것이다.
 
민족진영에서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승리할까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오. 
오직 독립주의와 독립반대주의와,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기회만 엿보는 중간주의, 이 세가지 중에서 어떤 주의가 성공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서 투표해야 할 것이며,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분투할 가장 양심적이고 건설적인 애국인사만을 선택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 담화문 ‘투표자에게 권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3.11. 밑줄은 편집자)
 
이승만은 ‘총선거 주의사항’ 15건을 지적, “주의와 사실(fact)로는 다툴지언정 개인이나 단체의 결점을 내세워 피차의 감정싸움을 하는 것은 우리 예의적 위신을 손실함이니 피차 양보하여 포옹해야” 한다고 당부, 인신공격등 ‘허위와 중상모략 싸움’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때 동시에 대한노총, 독촉국민회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14개 청년단체들도 자유분위기 보장과 국민의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일찍부터 50여만명의 청년들을 포용한 이승만의 지도력은 이렇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3월30일 선거인등록과 입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었다. 
선거권(투표권)은 만21세 이상의 남녀, 피선거권(출마) 나이는 만25세로 정해졌다. 
남북한 공산당의 ‘총선저지’ 폭력사태를 맞아 미군정은 경찰을 총동원, 특별경계에 돌입하였다. 치안총책 조병옥은 경찰력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지방마다 향보단(鄕保團)을 조직, 남로당의 암살 테러와 투표소 기습에 대응하였고, 서북청년회등 월남 애국청년들도 스스로 공산폭력배 방어에 발벗고 나섰다. 수도경찰 총책 장택상은 야간 통행금지 기간을 10시로 앞당기고 “폭동을 인민항쟁이라는 칭호로 찬미하고 폭동을 조장하는 의미로 문자나 언사로 민중을 현혹케하는 자는 시간을 지체치 않고 고발 처단 하겠다”는 경고문을 발령했다.

▲ 5천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1948년 5.10 총선거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난생처음 투표하는 모습.(자료사진)

◆이승만, 남북회의 ‘무시’...“총선만이 국권 회복의 길”
 
“남북요인회담에 대하여는 나는 기왕에 설명한 바 있으므로 우리의 기정 계획에 조금도 변동이 있을 리 없고, 양군 철퇴문제에 대해서도 소련이 진심으로 공정한 해결을 원한다면 먼저 북한의 공산군을 해체시켜 무장을 회수하고 유엔 감시 하에 자유분위기에서 총선거를 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가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요,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정부를 수립해서 국방군을 조직한 후에야 비로소 협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공동성명’이라는 것을 나는 중요시하지 않는다” ([서울신문] 1948.5.4. 이승만 논평)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서 돌아와 김일성과 서명한 '공동성명'을 설명하고 총선 거부를 발표하자 이승만은 거듭하여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남북협상에 관하여서 이미 수차 말한 바 있으므로 이상 더 말하고 싶지 않고 또 그 필요조차 느끼지 않거니와, 다만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소위 정치요인들이 우리 정부를 수립하여 우리 국권을 회복하려는 금번 총선거를 단정단선이라 하여 민심을 선동시키고 있는데 그 의도가 나변(那邊)에 있는지 이해키 곤란하다. 그러나 우매하지 않은 우리 애국동포는 이러한 모략과 선동에 동요되지 않을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총선거만이 우리 국권을 회복하는 길인 것을 잘 인식하여주기를 다시 강조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9.5.8. 이승만 논평)
 
미군정의 남한 과도정부 정무회의도 김구-김규식의 귀환성명을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남조선 일부 정객들은 결국 공산주의 세계제패를 강행하는 소련의 군문에 항복하였고 그 대변인 북조선 공산도배들과 야합, 완전독립을 위한 총선거를 파괴하기는 행동에 나섰다....북조선에는 30만의 무장 공산군을 배경으로 한 공산독재가 양군철퇴 직후 24시간내 전조선에 적색정권을 세울 자신이 만만한 까닭이다....정치적 야망에 불타는 일부 불평부득의 정객들이 공산당의 거짓말과 참말을 섞어 쓰는 기술을 모르는 수작이다. 그들은 공산당의 포로 됨이 분명하다. 진정한 지도자란 민족을 생과 광명의 길로 선도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력을 가진 자이거늘, 과거의 명성과 관록으로만 그 지위를 유지 못한다. 여러분 동포들이어, 정치적 잡음에 흔들리지 말고 5월10일에 닥쳐오는 국운을 좌우할 총선거에 총진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조선일보] 1948.5.8.)

▲ 1948년 제주4.3폭동의 주역 김달삼(당시25세). 오른쪽은 1949년 6월7일 한라산에서 사살된 이덕구,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되었다.

◆슈티코프 지원, 박헌영 남로당 전국 폭동...제주도는 ‘해방구’
 
김구-김규식 두 김씨가 공식적인 ‘총선 보이콧’을 발표함과 동시에, 이번에 평양서 슈티코프가 두 김씨를 앞세워 결성한 ‘남조선 단선반대 투쟁위원회’가 해주(海州) 본부에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박헌영의 남로당은 김일성과의 투쟁경쟁에서 질세라 5월8일 총동원령을 내린다.
▶부산=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리고 투표사무소에 들어가 선거위원장을 살해하려다 실패, 선거위원들을 집단 폭행, 선거인명부를 탈취한다. 영도 투표소에 침입, 권총을 난사했으나 실패.
▶대구=‘단선반대’ 삐라를 살포하고 30여명이 대구방직공장에 난입, 곤봉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파업을 선동하고 신문사 인쇄공장에 수류탄을 던져 파괴하다.
▶전남 광주-목포=관내 전역의 전신주를 뽑아버려 통신 불통, 터널 속 철길을 파괴하여 열차들이 탈선, 문서창고의 선거관계 서류와 투표용지를 탈취하여 불살라버리다.
무안-함평에서는 경찰의 무기를 강탈, 총격전이 벌어져 4명이 즉사, 20여명이 체포되다.
▶대전=기관차끼리 충돌 시켜 전복하고 전선을 모조리 절단하며 밤엔 봉화를 올려 야간 투쟁을 벌이다. 새벽까지 3개 선거사무소에 난입 불을 질러 선거가 지연되다.
▶인천=몇개 투표소에 수류탄을 던져 선거위원들이 부상, 송림동 사무소엔 20여명이 난장판을 만들고 휘발유를 뿌려 전소시켰다. 부평 소재 미군 디젤공장에 불을 질러 차고가 전소되다.
▶강릉=경찰서 3개 지서를 폭도들이 습격했으나 경찰이 물리치다.
 
▶제주4.3폭동=25세 청년 김달삼(金達三,1923~1950)이 주동한 제주 폭동은 내륙의 폭동과는 그 규모와 참상과 피해에서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내란’이었다. 소련 총독 슈티코프의 자금 지원을 받은 박헌영이 김삼룡(金三龍)에 지령하고 김달삼과 이덕구(李德九,1920~1949) 등이 자행한 남로당 최대의 반란! 여기서는 그 무차별 만행의 ‘선거전후 피해’만 적어본다. 
◉사망: 경찰15명, 후보 2명, 공무원11명, 양민107명. 부상자: 경찰 23명, 우익 후보 등 133명. 경찰서 피습 26건, 무기 약탈 12건, 검거인원 8천4백여명이다.
제주도의 남북2개군은 투표가 불가능하였다. 주동자 남로당 간부 김달삼은 소위 지하선거를 하여 투표지를 가지고 해주로 월북하고, 이덕구가 이어받아 폭동을 확산, 대한민국 건국후 10월에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선전포고’를 발령, 한라산에 사령부를 두고 해주와 평양을 오가며 장기 폭동을 이어간다. 제주도는 그들이 말하는 ‘해방구’였다. 그것은 바로 ‘무장봉기 인민항쟁’을 가장한 북한공산군과 싸우는 ‘남북전쟁’이었고, 6.25남침의 전초전이었다. 한라산 빨치산 투쟁은 휴전 후 1954년에야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전국 선거저지 폭동 피해 최종집계=사망 191명, 부상 643명. 건물 파괴 432건. 방화 224채. 총기도난 131자루. 철도파괴 147건. 통신파괴 1112건. 봉화 877곳. (박찬표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7. 손세일, 앞의 책).

▲ 이승만 자신이 만들어낸 유엔감시 총선거, 이화장의 이승만이 종로구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1948.5.10)

◆5천년만의 자유민주 선거 '대박'...남녀평등 실현...미국 “한국인 능력 보았다”
 
드디어 5월10일, 공산당의 폭력 테러와 싸우면서 대망의 총선거가 전국에서 일제히 완료되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직접투표에 참여하였을까. 이승만을 비롯한 각 정파들과 미군정은 물론, 총선감시에 나선 유엔 한국위원단의 관심도 참여율과 투표율에 총집중되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국회의원 선거위원회의 집계는 총유권자 813만2,517명 가운데 등록유권자 784만817명, 그 중에 748만7,649명이 투표에 참여, 무려 95,5%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서도 투표율 95.2%로 집계, 95%가 넘는 투표율엔 변함이 없었다.
단군 이래 5천년 왕조의 전제주의 아래서 신음하던 백성들이 역사상 최초로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직접 뽑는 선거에 얼마나 큰 기대와 참여의 기쁨이 컸던가. 산골 벽지와 다도해의 섬들까지 남녀노소들이 스스로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국민 의무’에 뛰쳐나온 것이었다. 난생처음 붓뚜껑으로 지지후보 이름 옆에 O을 찍는 투표의 유효투표율이 96.4%나 되어, 이승만도 하지 사령관도 유엔위원단도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이승만은 귀국 후 3년간 온갖 정치적-이념적-국제적 진통 끝에 회심의 ‘유엔 외교’로 치룬 선거 결과를 보자, 감격 감사하며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금번 총선거에 90% 이상의 호성적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다시 한번 표명한 것이다. 외국 신문기자들이 말하기를 한국 부인들의 투표가 50% 이상이나 된다 하니 한국의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모든 동포가 건국정신으로 이와 같이 열정을 나타낸 것은 깊이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이승만 담화 [경향신문] 1948.5.13.)
낙선자들에게 당선자를 지지 후원하라고 당부한 이승만은 당선자들에게는 “민의를 위반하고 횡주(橫走:멋대로 날뜀)하지 말라”며 국가 건설에 희생정신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다짐을 두었다.
“일반 동포는 자신들이 세운 국회에서 무슨 문제가 결정되면 절대 불가침의 국법이 되는 것이니 사사로운 이해를 초월해서 지지해야 한다”는 국민계몽도 잊지 않았다.
 
하지 사령관도 “모든 남녀가 공산분자의 무서운 협박과 폭행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용감하게 투표장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며 “미증유의 민주주의 승리”라고 찬사를 보낸다..
미국무장관 마셜도 기자회견에서 “소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적 선거방해에도 불구, 90%가 넘는 투표율은 한국인들의 자주적 민주정부 구성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성명을 냈다.
 
이승만의 ‘선거 혁명’ 5·10 총선거는 남녀평등론자 이승만이 출발부터 여성에게 완벽한 참정권을 보장한 세계신기록이다. 유럽의 선진국 스위스조차 1971년에, 아랍부국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서야 여성 참정권을 일부 허용하지 않았는가. 
 
★이승만, 무투표 당선=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다른 후보가 등록을 안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등록하려다가 못한 사람은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내다가 부장 조병옥과 갈등 끝에 파면당한 최능진(崔能鎭)이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에 참여했던 그는 이승만의 국회진출을 막기 위해 김구가 출마해야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이 입후보하려고 막판에 등록했다고 한다. (송남헌 [해방30년사-1] 성문각, 1976). 그러나 그의 등록은 취소되었다.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인 200명도 못 채워 명의를 도용하고 인장을 위조한 2중 추천명단들이 발견되어 선거관리위원회가 등록을 무효화 시킨 것이었다.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현음사, 2001). 이승만 말고도 무투표 당선된 후보는 전국에서 12명이 나왔다.
 
★국회 의석 분포=북한지역 의석 100석을 남겨두고 남한전역 200석 가운데 제주4.3폭동으로 투표를 못한 2석을 제외한 198석의 의원이 당선 확정되었다. 
이들의 세력분포는 무소속 85명, 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등 순이다. 기타 대한노동총연맹 등 11개 단체가 각 1명씩이었다. 
무소속이 가장 많은 이유는 ‘선거를 거부한 김구’의 한독당원들이 무소속으로 많이 출마하였고 중간파들이 합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85명중 30명 선이고 나머지는 한민당과 노선이 같은 의원들‘임이 판명되었다. ([동아일보] 선거분석. 1948.5.20. 손세일, 앞의 책).
따라서 참패한 것으로 드러난 29명의 한민당 의석은 곧 크게 불어나 70석을 넘게 된다.
 
이승만의 지지 세력은 어떤가. 
이승만의 직계 독촉국민회 55석, 독촉농민총연맹 2석 및 독촉노동총연맹 1석 등 총 58석이다. 여기에 무소속에서 재입당한 당선자들과 이승만의 남한 단독선거 노선을 지지지 협력해 온 한민당 계열,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12석 및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6석까지 합치면 친이승만 세력은 총 150석 내외로 어림되었다. 즉 198석의 75% 선이다.
그러나 정치는 숫자만으로 계산되지 않는 권력의 동물, 그 정체가 제헌국회에서 드러난다.

▲ 김구와 김규식(오른쪽)이 1946년 2월 민주의원 설립식에 참여한 모습. 가운데 미군정장관 아놀드.

◆선거 거부한 김구 “모든 문제는 ’남북 정치회의‘가 결정해야”
 
총선거를 “한국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전진”으로 평가한 유엔위원단은 다시 서울에 모여 두 김씨를 초청하여 만난다. 남북회의와 앞으로의 행보를 알기 위해서다. ’공보‘60호로 발표한 대화내용을 요약한다.
◉김구의 답변=“남북공동성명서의 내용은 꼭 실행할 것을 북한당국자가 약속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미-소 양군의 철수후 치안문제는 남북이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다짐 하였으니 일단 현상유지 될 것이오, 내전은 없다고 명문화 하였고, 북한이 통과시킨 인민공화국 헌법은 장래 통일정부를 위한 초안이라 즉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장래 남북회의 등 모든 문제는 전국(남북한) 정치회의에서 최종결정을 내릴 것이다.”
◉김규식의 답변=중국대표 유어만(劉馭萬)이 미군 철퇴후 북조선이 남조선에 쳐들어오지 안겠느냐고 묻자, 김규식은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언약이 김일성 장군으로부터 제안되었고 우리가 정중히 서명한 만큼 불신임하지 않는다.”
 
★북한, 남한에 송전 중단...전국이 한때 암흑세계
 
김구와 김규식 두 김씨가 유엔위원단에게 “남북약속과 김일성을 불신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5월14일 그날 그 시간에,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명령에 따라 대남송전(對南送電) 스위치를 모두 꺼버린다. 평양에서 김구에게 송전계속을 다짐한지 불과 9일만이다.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역은 암흑세계로 변하고 모든 공장들이 멈춰 서고 말았다. 미군정은 부산항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발전선들을 풀가동하며 응급대책에 나섰다.
 
★김구의 은퇴설=총선 열풍에 남북협상파는 한풀 꺾이고 이미 항간에는 ’김구 은퇴설‘이 파다하게 퍼져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결코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던 그들은 '95.5%' 민의 앞에 꼬리를 감출 수 밖에 없었다. 
김구는 “나는 혁명자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투쟁할 뿐”이라며 은퇴설을 애써 부정하였다.  그리고 5월19일엔 경교장에서 한독당 상임위를 열어 "개인자격으로 선거에 출마했거나 당선된 자들에 대하여 제명처분"을 내렸다.
5월29일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이승만과의 합작”을 묻는 질문에 마침내 “전면 거부”를 선언한다. “그 분의 말과 같이 피차에 방향을 고치기 전에는 합작은 불가능할 것이다.”([조선일보]1948.5.30)
철석 같은 약속을 식기도 전에 헌신짝처럼 금방 던져버리는 소련과 김일성의 일방적 횡포를 당하면서도 김구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북한 공산당과의 합작에 매달리는 것일까. 
그 한 달 전 4월 중국 남경에서 귀국한 김구의 측근이자 동지인 남파 박찬익(南坡 朴贊翊)이 김구에게 토로한 기록을 보자.
“공산당은 믿을 수가 없는데 백범은 통일을 위해 이념을 배제해야 한다고 고집하다니....중국의 국공합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산당이란 제스처만 할뿐 타협할 수 없는 인종들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공산당과의 협상을 추진한 것은 백범의 실수요. 국민들에게 통일 환상만 불러오고 용공분자들의 활동 토대만 만들어주었으니, 당장 국민 앞에 사과하고 은퇴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박찬익전기간행위원회 [남파 박찬익 전기] 을유문화사, 1989. 손세일, 앞의 책)
 
그런데도 김구는 제 발로 걸어들어간 함정에 너무 깊이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김구를 앞세운 남한 총선거 저지작전에 실패한 슈티코프와 김일성, 남조선담당 공작총책 성시백은 이제부터 새로 수립되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서 ’김구라는 무기‘가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이리라.
 
◆이승만, 국정 구상 밝히고 정당들의 ’단결 서약서‘ 받기 운동
 
미국 상하의원들을 비롯한 각계의 축전과 하와이 동포들의 축하와 선물이 이화장에 날아든다. 이승만은 5월20일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로 ’중앙정부수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행동통일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당사회단체의 ’서약서‘를 받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 '서약서'는 이승만이 미국-유럽에서처럼 '충성서약'을 의무화하는 문화를 한국에도 심으려는 시도로 보였다. 
「이번 국회는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여 국가 주권의 즉시 회복, 독립정부의 조속 조직, 민생경제의 긴급시책 등에 그 사명이 있음에 비추어 본위원회 구성원 각 정당사회단체 소속 국회의원들은 국회에서 이승만 박사 통제하에 행동을 통일할 것을 결의함」 ([조선일보]1948.5.25.)
 
26일엔 이화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국정부 수립과 주요정책에 대한 구상을 밝힌다.
▶정부수립은 국회의원들이 허심탄회로 일치단결하여 노력한다면 빠를 것이오, 과도입법의원과 같은 방식이면 늦어질 것이다.
▶민생문제가 시급하다. 곧 이어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국방군을 조직할 것.
▶미군은 우리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국방군을 조직해야 하고, 서북군(북한군) 침공의 우려가 해소될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남북 통일문제는 국제정세에 의해서 좌우될 문제이다.
▶남북협상이라 하는 것도 새 정부(대한민국) 대표가 해야 할 문제.
▶정부형태는 곧 국회가 작성하는 헌법에 정해질 것이지만 나는 대통령 책임제를 채택한다.
▶김구, 김규식 양씨와 합작에 노력해왔다. 나는 쓰러진 부분을 먼저 세워놓고 다음에 쓰러진 부분도 살려야 된다는 것이 본래부터의 주장이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과 어떻게 합작이 가능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양씨가 뜻을 고친다면 서로 노력할 수 있다. 한군데로 방향을 고쳐야만 될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관과 국정 구상은 단호하고 확고했다. 
국제사회의 힘으로 소련을 물리쳐 남북통일을 하겠다는 ’정읍선언‘을 유엔에 올려 결의안으로 채택하게 만들고 유엔의 힘을 빌은 총선거를 통해 ’반공-자유 혁명‘에 성공을 거둔 이승만은 더욱 자신감을 얻은 듯, 이제 제헌국회 개회와 건국헌법 제정에 돌입한다.

 

 

이승만 건국사(56) 기도로 연 ‘독립문’ 제헌국회...한민당 집권욕심 ‘내각제 헌법’ 추진...이승만 “여기가 왕국이냐?” 대통령중심제 관철...5천년 만에 ‘자유민주공화국 헌법’ 탄생

 

▲ 중앙청 의사당에서 개원한 제헌의회, 이승만은 맨처음 순서로 북한출신 목사 이윤영 의원을 불러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하나님께 감사” 이승만, 개원식에 식순 없는 기도부터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8년 5월31일 오전 10시, 중앙청에 마련된 국회의사당에 국회의원 198명이 모여 제헌국회를 개원하는 시간, 시내 거리에선 ‘건국국회 개원 축하’ 행진이 벌어지고 있었다. 
회색두루마기를 입은 이승만은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이 되어 단상에 오르자마자 뜻밖에 ‘하나님 감사’로 입을 여니 국회의원들도 방청객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李允榮)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식순에도 없는 행사 첫 순서 기도, 참석자들은 좌파까지도 홀린 듯 모두 일어서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제헌국회 속기록](1) 제1회 제1호, 1948.5.31)
 
단상에서 기도하는 평양 목사 이윤영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렸다. 간단하게 해달라는 이승만의 부탁도 잊은 듯 눈물 섞인 기도는 길어졌다. 북한에서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만들어 독립을 준비하다가 소련의 만행에 쫓겨 월남한 그는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종로 터줏대감 김성수를 설득 양보를 받아 ‘정치1번지 종로’에 이윤영을 출마시켜 국회의 상징적 ‘북한대표’격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이윤영을 특별히 지목하여 ‘개원 감사기도’를 시킨 까닭이다.
25세때 한성감옥에서 ‘성령’을 받아 거듭난 이승만은 73세 이날까지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수행하며 기도로 끝내는 신앙 깊은 현대적 선지자, 반세기의 독립운동 끝에 세워지는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어찌 기도로 시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워주는 나라가 아니랴.
 

▲ 건국헌법 공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 7월18일자.ⓒ조선DB

★이승만, 대한민국 탄생 선언...1919년 서울서 수립된 임시정부 ‘한성정부’ 법통을 중시
 
의장단 선거에서 198명중 188표를 얻어 의장이 된 이승만은 부의장 신익회-김동원과 함께 오후 2시반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 참석한다. 하지 등 미군정 수뇌들과 장성들, 각국 외교관과 유엔 위원단, 국회의원 전원과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가득 모인 식장에 궁중 아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승만은 단상에 올랐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 대한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인연하여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 못되었으나, 우리 애국남녀가 해내 해외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의 민국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입니다” ([조선일보]1948.6.1)
 
여기 말하는 ‘기미년 민국정부’가 바로 ‘한성정부’로 별칭 되는 임시정부이다. 한성YMCA 총무였던 이상재를 비롯, 미국 박사로 돌아온 이승만이 전국에 조직했던 기독교 청년세력(YMCA)이 주동한 한성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로 세웠고, 그 절차도 이승만에게서 배운 대로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에 따라 전국13개 도대표들이 ‘국민대회’ 형식까지 갖췄던 것이다. 
이 통지를 받은 이승만은 즉시 미국 정부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통고하고 일본 천황에겐 “새 정부가 생겼으니 일본은 즉시 철수하라”는 영문편지도 보냈다. 이때 이승만이 ‘집정관총재’를 ‘President of Korea’란 영어명칭으로 처음 사용한다. 
 
이어서 그해 1919년 9월 3개지역 임시정부를 통합할 때,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헌법과 조직등 법통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안창호등 상하이 ‘4월임정파’는 이를 수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한성정부의 부활”이며 “법통계승‘이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며, 이는 임정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으로서 남북한 전체의 민족적 대표성과 국가적 정통성-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목적이었다. 그것은 북한 공산정권이나 이에 협력하려는 김구-김규식에 대한 견제구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일부에서 ’임정 건국설‘의 근거로 삼는 이승만의 ’기미 연호‘ 기산도 초대대통령 취임사 말미에 한번 쓴 뒤로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임정 법통문제는 어디까지나 독립정신-국가정신의 정신적 계승일 뿐, 국제적 실정법상 국가적 제도적 계승이 아님을 국제법 박사 이승만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이승만의 개원식 식사는 마치 대통령의 취임사 같았다.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해 한 맺힌 듯, ”이북 5도 동포가 참석치 못한 것을 극히 통분히 여긴다“면서 ”또 다시 맹세하는 바는 우리 민족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이요, 우리 강토는 일척일촌(一尺一寸)이라도 남에게 양여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다짐했다.
이어서 민생을 살리는 경제정책, 토지개혁 실시, 개인의 평등자유를 위한 입법, 교육향상과 공업 발전, 국제외교관계 등 새정부 국가시책을 제시하고, 주요관심사 미군철수 문제에 대하여 국제외교가답게 명쾌한 설명을 해준다.
”미주둔군은 우리 국방군이 준비될 때까지 머물러 있기를 우리가 바라는 터이나, 미국과 유엔과 우리 정부 사이에 상당한 협의로 조건을 정해서 진행 될 것이다....미국은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지 영토나 정치상 야심이 없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이요, 오직 민주정부를 세워서 세계 평화와 국제통상과 우호로써 공동 이익이 될 것을 주장할 뿐이다“
 
공산당에 대하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이니 개과회심(改過回心)해서 동주병제(同舟並濟:같은 배로 함께 건넘)하게 되면 다 같이 선량한 동포로 대우할 것이요, 우리나라를 남의 나라에 복속시키자는 주의로 살인 방화 파괴를 자행할진대 국법으로 준엄히 처단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을 향해 ”민주정치에서는 민중이 주권자이므로, 주권자가 가만히 있으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면서 ”이제는 노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왕조의 계급독재-백성노예 착취로 놀고 먹는 양반층에 넌더리가 난 이승만의 뼈에 사무친 당부였다.
 
 

▲ 건국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국회의장.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계동궁서 탄생한 ’비빔밥 정부‘
 
건국작업에 돌입한 제헌국회가 드디어 입법 활동에 들어간다. 헌법, 국회법, 정부조직법 등을 담당할 기초위원 30명을 정당안배로 선정하였다. 
6월4일부터 시작된 헌법 제정은 한국 민주당(한민당)이 이미 지난 한 달 동안 만들어 놓은 ’유진오안‘을 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이었다. 
건국 헌법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역시 권력구조 아닌가.  
대통령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 한민당은 진작부터 ’내각책임제‘로 당론을 정해 두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을 제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구한말부터 미국 일류대학 박사로 국민을 휘어잡고 오랜 망명기간 독립운동을 통하여 임정대통령을 역임, 해방후 미-소의 압력을 물리치며 유엔을 끌어들여 자유총선거를 실시, 대승을 올린 73세 노련한 글로벌 리더 이승만의 마법적 카리스마를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한민당은 당시 거의 유일한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1906~1987)에게 내각제 헌법을 만들도록 서둘렀던 것이다. 요컨대, ’국민적 영웅 이승만‘은 영국이나 일본의 왕처럼 상징적 존재 또는 방패로 모셔두고 실질적 정치권력은 한민당이 장악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승만과는 사전에 한마디 협의도 하지 않았다. 협의 자체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 지지‘를 밝혔는데도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는 것은 결정적 실수였다.

▲ 헌법에 서명후 세계에 대한민국 건국헌법을 선포하는 공포사를 살피는 이승만 국회의장.

★한민당, 내각제 헌법초안 제시...이승만 ”이름만의 대통령 않겠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때부터 미국과 같은 대통령중심제 민주공화국을 당연한 것으로 굳히고 있었다. 그는 1944년 전쟁 말기에 프린스턴 대학교 슬라이(John F, Sly) 박사에게 연락하여,  곧 전쟁이 끝나면 한국에 자신이 건국하게 될 터인데 그때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놓기도 하였던 것이다. (유영익 논문 ’이승만국회의장과 대한민국헌법제정‘ [역사학보]189집, 2006)
6월7일 국회의장으로서 처음 기자회견을 열었을때 기자들의 질문 역시 권력구조 문제다. 이승만은 그동안 간간이 거론했던 대통령중심제 주장을 제헌에 앞서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영국이나 일본의 제도가 내각책임제라 할 것인데, 영국이나 일본은 군주정체로 뿌리가 깊이 박힌 나라일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 제도를 없앨 수 없는 관계로 군주제도를 유지한다. 우리나라는 군주제 관념도 사라졌고 30여년 전(3.1독립선언)에 민주제도 수립을 공포한 이상, 민주정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그렇게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독재정치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선출한 이상 모든 일은 잘하든지 못하든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지, 안그러면 사리에 맞이 않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두는 내각제 헌법이 통과된다면 나도 이에 추종하게 될 것이다“
기자들이 대통령 선거를 국회에서 할지 인민들이 할지를 물었다.
”지금 또 다시 전국민이 선거하기가 곤란하므로 국회에서 선출하자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일보] 1948.6.8.). 언론들은 ’책임 내각제 불가‘를 크게 보도하였다. 
’대통령중심제‘만이 사리에 맞는다며 적극 주장하는 이승만이 ’국회가 내각제 헌법을 만들면 따르겠다‘고 한마디 덧붙인 것이 눈길을 끈다. 헌법기초위원들이 들으라고 구슬리는 화법이다.
 
6월15일 이승만 국회의장은 부의장 신익희를 데리고 헌법제정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마침 유진오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해야한다‘고 열심히 발언하고 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승만이 발언을 요청한다. 독립운동가 출신 서상일(徐相日, 1886~1962) 위원장이 발언권을 주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하게 된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책임제로 의결한 모양이나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대통령은 간접선거든 직접선거든 인민이 선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하더라도 인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므로 인민이 직접선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직접 지우는 것이 옳은 일이지, 대통령을 왕처럼 불가침적 존재로 한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은 의장실로 유진오를 불렀다. 작달막한 유진오가 들어서자 반갑게 손을 잡아끌어다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히고 자기는 카펫바닥에 앉았다. 손을 어루만지며 미소로 입을 열었다.
”훌륭하오. 우리 한국인 중에 헌법을 기초할 젊은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소“
이승만은 유진오를 칭찬하면서 덧붙였다. ”이런 유능한 학자가 있을 줄 모르고 나는 프린스턴대학의 슬라이(John F. Sly) 박사에게 헌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두었지요“
유진오는 73세 거물 독립운동가의 황송한 응대에 황홀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중심제로 헌법 수벙을 요구하기 위한 정치가의 노련한 제스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유진오 [헌법기초 회고록] 일조각, 2008). 
이어서 이승만은 6월17일 독촉국민회에게 ”국호는 대한민국, 국회는 양원제, 정부구조는 대통령중심제로 된 헌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 작업은 19일쯤 사실상 끝났다. 내각책임제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승만은 회의장에 들어갔다.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이유를 30분이나 설명하고 나서, ”만일 이 초안이 이대로 국회에서 채택된다면 나는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으로 남아서 국민운동이나 하겠소“ 단호한 어조로 선언하고 나와버렸다.
기초위원들은 이승만을 설득하기로 했다. 허정, 유진오, 윤길중 등을 이화장으로 보냈다. 이승만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자 즉시 이승만은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불렀다.
”나는 이름만의 대통령을 할 생각은 없소“ 폭탄선언이다. 
김성수는 이승만의 강경한 태도에 놀라 이런저런 말을 이어갔다.
”한민당이 꼭 그렇게 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시오“
이승만은 노기 띤 얼굴로 벌떡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1976)

▲ 내각책임제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왼쪽부터)와 그의 회고록 [헌법기초회고록) 표지. 내각제 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수정한 김준연.

★놀란 한민당, 깊은 밤 계동궁서 ’헌법 수정‘ 30분
 
숨 가쁜 21일 그날 밤, ’계동궁‘(桂洞宮)으로 불리는 김성수의 계동 저택에 한민당 간부들과 한민당 소속 헌법기초위원들이 다 모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만을 더 설득해 보자는 말은 설득력을 잃었다. 
해방후 김구를 지지하다가 실망하여 이승만을 적극 협력했던 한민당, 이제 와서 이승만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집권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상황이다. 어떻게 하든지 국민의 영웅 이승만을 앞세워 권력을 잡아놓고 나서 실권을 강구해야할 궁지에 몰렸다. 그렇다고 100조가 넘는 방대한 헌법을 처음부터 뜯어고칠 수도 힘들거니와 그럴 시간도 없다. 난감한 마당에 한숨과 침묵만 흐른다. 
”이거 보시오. 그리 어렵지 않으니 내가 30분 내로 고쳐놓겠소“ 
침묵을 깬 사람은 김준연(金俊淵,1895~1971)이었다. (김준연 [나의 길] 홍우출판사, 1966)
머리 좋기로 소문난 그는 동경제대와 베를린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고, 한때 조선공산당(ML당)사건으로 옥고도 치루고,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당대의 지식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말 그대로 30여분쯤 헌법을 뒤지며 연필로 지우고 덧붙이더니 김성수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손질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김성수는 유진오를 불러오라 재촉한다. 
밤중에 달려온 유진오는 김준연이 급히 수정한 조항들을 살핀다.
”어때요? 앞뒤 연락은 되지요?“ 김준연이 물었다.
“네, 연락은 됩니다만...” 유진오는 뭔가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셨다.
“이대로 가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빔밥 정부‘ 꼴이 될 것입니다” 
유진오는 대꾸도 없는 좌중을 훑어보며 자리를 떴다. (유진오, 앞의 책)

▲ 헌법 공포식을 마친 제헌의원 전원이 중앙청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

◆이승만, 제헌작업 재촉...9월 유엔총회서 ’국가승인‘ 받아야
 
이승만은 서둘렀다.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반드시 ’국가 승인‘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헌법 제정은 7월에 마쳐야 하고, 정부구성도 8월이 되기 전에 끝내야한다. 건국선포식을 8월15로 예정했기에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
 
6월 22일 이승만의 결단으로 대통령중심제 헌법 초안이 나왔다. 유진오가 지적한 ’비빔밥‘ 헌법이다.
내각책임제 조항에서 국회의 내각 불신임권을 삭제하였고, 대통령 권한 중에 ’국회해산권‘을 지웠다. 대통령의 전횡을 막기 위한 것이다. 임기도 원안의 5년에서 4년으로 단축시켰다. 
이 초안은 다음날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제1독회부터 시작되었다. 헌법기초위원장이 서상일이 나서서 헌법을 설명하며 이런 발언을 했다.
“헌법의 정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들이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구성해서 우리 3천만은 물론이요, 자손만대로 민족사회주의 국가를 이루자는 그 정신의 골자가 이 헌법에 총집(總集)되어 있습니다” 
민족사회주의?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민족사회주의 헌법‘이라고 설명하는 중진 의원, 이것이 당시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식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건국 헌법의 ’비빔밥‘은 대통령제+내각제의 권력구조 만이 아니라 곳곳에 섞여있었다. 특히 경제조항들은 국민의 ’경제적 자유를 허용’한다면서도 사회주의-공산주의식 규제들로 줄줄이 묶어놓은 것들이었다.
 
★ ‘비빔밥’ 경제 조항들---사회주의-공산주의식 국가 통제경제
 
건국 헌법의 경제질서 부문을 조금만 살펴보자.
제5조에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 하였고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제15조)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등은 국유‘로 경영해야 하며, 통신, 금융,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며 대외무역은 국가통제하에 둔다’고 규정했다. (제85조, 87조).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제88조).
 
이처럼 당시 헌법 입안자들은 자본주의적 자유경제를 지향한다면서도 그들의 의식세계는 그야말로 ‘비빔밥’식 혼돈을 맴돌았다. 조선왕조시대 ‘돈을 천시’하던 선비사상의 잔재, 일본식 군국주의 통제 경제, 공산주의식 반자본주의 계급독재 및 사회주의 계획경제 등등 제헌의원들의 사고체계 자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대공황이후 대세였던 케인즈의 혼합경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등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시대, 일본교육을 받은 젊은 법률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 작업’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요컨대, 정치분야는 미국 헌법을, 경제 분야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따른 작품이 나왔던 것이다. (이영훈 [한국경제사-Ⅱ] 일조각, 2016)
 
대표적인 사회주의적 사례가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이익균점권’ 보장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서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분배에 규점할 권리가 있다」(제18조)는 것인데, 이는 헌법 초안에도 없던 것을 심의 과정에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한 긴급제안”이란 즉흥적 발의가 나오자 찬성이 쏟아져  전문적 검토도 없이 채택, 삽입하는 형편이었다.
일부에서 "통제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문제제기에 대하여 광복군사령관 출신 이청천(李靑天) 의원이 다음과 같이 반격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평등을 위하여 잘 살고 고르게 살자는 기본이념이기 때문에, 전체주의하는 공산주의체제나 무제한 자본주의를 취하지 않고, 국가권력으로 무제한 민족주의로 나가야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민족사회주의입니다”
민족사회주의를 반복하듯 동조하는 의원들은 또 있었다. 사상이나 이념의 미성숙 미분화 단계랄까.
한마디로 건국헌법 경제체제는 혼합경제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이익균점권 주장의 배경에는 다른 계산이 숨어있엇다.
바로 ‘적산’(敵産)으로 부른 일본의 재산 처리 문제, 즉 일본인이 남기고 간 기업들이나 각종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인계받아 이를 ‘귀속재산'(vested property)으로 묶어 불하-매각할 때에 '나눠먹기'하겠다는 정치적 로비가 뻔히 드러나고 있었다. 여기엔 좌우가 없었으므로 의원들의 발언권이 줄을 이어 시간만 흘러갔다.
뒷날 이승만은 '국유화하자'는 민족사회주의식 주장을 뿌리치고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대소 기업에 공평하게 불하한다. 기독교 신앙인 이승만에게 '부패'나 '유착'이란 사탄의 죄악 그것이다. 그토록 청렴한 대통령이 그때 거기 있었기에 그것이 국민국가 국민경제를 키우는 토대가 되었고 박정희 산업혁명의 기둥이 된 것이었다.

▲ 1948년 7월17일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헌법공포식.

◆’국방군‘을 ’국군‘으로 개칭...역사적 헌법 공포식
 
발언경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헌법심의를 보다 못한 이승만이 칼을 빼어 들었다.
“이익균점권 문제는 이렇게 합시다. ‘지주와 자본가와 근로자는 공동한 평균이익을 국법으로 보호한다’고 만들어 놓으면 원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것을 헌법에 다 넣을 수 없으므로 이 다음에 법률을 정할 적에 반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헌법이 백년 만년 고치지 못하는 게 아니므로 시기 변동대로 고치자고 다수결로 정하면 고칠수 있는 것이니, 여기에선 대강만 명시하여 공포하고, 하루 바삐 우리 정부를 수립합시다. 8월15일이 며칠 안남았습니다.” 
표결결과 ‘경영참여+이익균점권 보장’안은 부결되고 ‘이익균점권’만 반영되었다. 그것도 1962년 박정희가 개헌할 때 삭제되고 만다. 
 
이승만은 헌법의 축조심의가 지지부진하자 조속한 통과를 협박조로 재촉하였다.
“몇몇 분자들이 장난을 해가지고 국회의 국사를 방해한다면 용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송장(시체)들이 아닙니다....정신 차리시오. 몇 사람들이 쑤근쑤근 헌법통과를 하루라도 제체하자는 태도가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서 조치하는 방법이 있으니 생각들 하시오”    ([제헌국회 속기록(1)] 1948.7.5.~12)
 
몸살까지 앓던 이승만은 7월5일부터 직접 의장석에서 사회봉을 들고 두드리며 정리해나갔다.
유엔총회를 앞둔 준비기간이 촉박하므로 근본적인 수정은 엄두도 안 난다.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제 그대로 통과시키고 직접선거는 뒤로 미루었다.
청년시절부터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통상-시장경제를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써놓았고 독립운동 내내 직접 기업운영까지 해본 이승만은 터무니없는 ‘전제주의식 통제경제’를 담은 경제조항들도 좌익세력이 설치는 국회에서 당장 개폐하기란 세월만 허송할 뿐이므로 통과시켰다.
7월12일 제3독회를 열어 자구수정작업에 착수, ‘국방국’을 ‘국군’으로 바꾸는 정도로 끝내고, 이어 정부조직법 심의도 사흘 만에 마친다.
 
★헌법공포식=마침내 7월17일 오전 10시, 중앙청 제헌국회 의사당에서 건국헌법 공포식이 열렸다. 이승만 의장은 두권의 헌법정본(국한문본+한글본)에 서명한다. 붓에 먹물을 찍어 이름을 쓴 이 헌법은 전문10장 102조로서, 5천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공화체제의 국권과 국민주권과 영토를 정한 대한민국 건국장전(建國章典), 한민족사의 국보이다. 
서명한 헌법을 감개어린 듯 잠시 만져본 이승만은 그의 떨리는 목소리로 공포사를 읽었다.
“3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3독회로 정식 통과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이승만은 국회의장 자격으로 이 간단한 예식으로 서명하고,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합니다.” ([조선일보] 1948년 7월18일자)
 
드디어 나라를 세웠다. 헌법공포가 사실상 건국이므로 대한민국 건국선언도 하였다. 
부패무능한 황제 고종과 싸우고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과 싸우고,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스탈린과 싸워서 세운 나라, 삼천리 강산 북쪽을 소련이 식민지로 만들었으니 남한만이라도 자유기지를 만들어 자유세계의 힘을 빌어 소련을 몰아내자는 ‘정읍선언’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공산당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일성과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고집하는 김구-김규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세기 투옥과 망명과 말과 글로써 자유세계를 포섭한 독립운동 끝에 73세 이승만은 기어코 나라를 세우고야 말았다. 
너무 늙었다고? 아니 이제부터 할 일이 지난 세월투쟁보다 몇 곱절 지난한 사명이거늘! 이승만은 기도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던 꿈의 ‘자유국민국가’를 이루었으니 이제 또 기도하고 기도하며 나라답게 국민답게 만들어가야 한다. 
“이 일은 나 이승만 말고 어느 누가 해낼 수 있으랴! 김성수도 아니고 김구는 더더욱 아니지 않는가” 부족한대로 허겁지겁 서둘러 세운 나라를 정녕 올바르고 튼튼하게 다시 세우는 Nation-Building! 그것은 진정 ‘제2의 건국’을 하지않으면 안될 황무지였기에 또 다시 이승만은 기도한다. 
 
참조/건국 초기 개헌 파동
유진오가 말한 ‘비빔밥’ 헌법은 공포 한달도 안돼 ‘개헌의 그물’에 걸린다.
◉한민당의 개헌시도=건국내각에 ‘총리+장관6명’을 달라고 김성수가 요청했다. 이승만은 거부했다. 후회막급 한민당은 즉시 ‘내각책임제 헌법’ 회복을 추진한다. 8월15일 건국선포식 1주일 전이다.
◉이승만의 첫 번째 개헌 ‘부산정치파동‘=1952년 제2대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 야당은 공모한다. 6.25전쟁중 미국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할 목적, 야당은 이승만의 권력을 빼앗아야한다. 진작 이를 알고 있던 이승만은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한다.
◉이승만의 두 번째 개헌 ’사사오입 파동‘=1953년 8월 가조인한 한미동맹은 곡절 끝에 다음해 1954년 11월 발효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헌법의 ’통제경제‘를 몰아내고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면 개편한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확보, 평생의 목표 ’자유통상 입국‘ 기반조성에 나선다. 이승만이 1960년 하야할 때까지 5년간 가져온 미국 자금은 당시 30억 달러가 넘었다.

 

 

이승만 건국사(57) 충격의 대화록! 김구는 김일성의 남침음모를 알고 있었나?...정부수립 2개월전 유엔의 ‘국가승인’ 저지 사절단 파견 준비

▲ 1948년 남북의 4김씨.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왼쪽부터).

★슈티코프, “대한민국 건국 저지” 2차남북협상 공작 지휘
 
역사적인 5.10총선에서 역사적인 헌법 제정 공포까지 약 2개월동안, 남북한의 4김(金: 김구+ 김규식, 김일성+김두봉)은 총선거 저지작전에 이어 대한민국 건국을 가로막을 새로운 전략에 부심한다. 물론, 여기에 앞장서서 전략전술을 짜주고 총지휘하는 사람은 슈티코프였다. 이 공작 역시 실무 행동 전위대는 평양의 김일성과 그의 심복 서울의 성시백이오, 박헌영은 조연(助演)이다.
 
슈티코프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쪽의 두 김씨는 제2의 남북협상 준비에 분주하다. 총선거를 보이콧한 김구는 선거결과와 변화를 지켜보다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6월1일 경교장에서 김구의 한독당 측근 5명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5명이 합동회의를 연다. 
이 자리에도 평양의 1차남북협상 성사에 성시백과 함께 앞장섰던 권태양((權泰陽)1913~1966)이 합류했다. 북조선로동당 김일성은 성시백의 서울공작위원회를 통하여 김구 비서 안우생, 김규식 비서 권태양, 조소앙에게 김흥곤을 공작원으로 밀착시켜 2차남북협상도 전처럼 치밀하게 진행시켰음이 뒷날 드러난다. (송남헌, 앞의 책. 박병엽, 앞의 책. 서동만 [북한사회주의체제 성립사-1945~1961] 선인, 2005, 외 다수).
안동출신 권태양은 일본 중앙대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 서무부장, 민족자주연맹 비서부 총무,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남측 대변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6.25때 서울서 김규식을 북한인민군에게 넘겨주었고, 1966년 숨지자 북한은 권태양을 인민위원(국회의원)으로 승진시켜 ‘조국통일상’을 준다. 

▲ 1948년 6월25일 여주 남한강 신륵사를 둘러보며 기념촬영한 김구와 김규식(오른쪽).

★김구 “남한정부는 무용지물 될 것”...유림 “협상파는 공산당 제5열”
 
「약 1개월간 침묵리에 통일공작을 추진하던 김구, 김규식 양씨의 행동통일은 대한민국의 국회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실현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직적 규합과 남북정치회의를 소집할 것으로 관측되어 국회가 발족한 작금의 정국에 비추어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김구와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던 조선일보(1948.6.2.)의 보도 내용이다.
경교장에서 연석회의롤 거듭한 김씨들은 평양의 ‘결정서’에서 동의했던 남북 정치회의를 개최하려는 작업을 이어가며 “우리의 무기는 민족단결뿐”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물밑작업을 계속하면서 5.10선거에 참여한 당원들을 모두 제명해버린다.
 
6월24일 김구는 기자들의 질문에 “남한 반쪽 정부는 무용하게 될 것이다. 이때야 말로 이승만박사는 물론이요, 남북 전민족이 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총선거로 구성되는 대한민국 정부가 ‘일시적 정부’로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송남헌 증언, 앞의 책).
 
두 김씨는 여주(驪州) 신륵사 등을 관광하고, 한강 상류에서 뱃놀이도 하고 개를 잡아 개장국을 즐기며 ‘통일독립 촉진회(약칭 통촉)를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북한에서 6월29일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열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분신 같은 공작원 성시백은 두 김씨와 조소앙, 김창숙, 유림, 장건상 등에게 “해주에서 긴급회담을 할 테니 해주로 오라”는 북한 두 김씨(김일성-김두봉)의 편지를 전하며 공작을 벌이느라 바쁘다.
이때, 김구의 안우생과 김규식의 권태양 등 ’공작 실세‘들은 해주로 갔다. 두 김씨는 해주행을 머뭇거렸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충칭(重慶) 임정에 참여했던 유림(柳林,1898~1961)의 이탈과 비판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유림은 1929년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고 임시정부의 ’아나키즘진영 대표‘ 국무위원, 이때 그는 남북통일협의회 결성에 앞장섰는데, 김구-김규식 등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세력에 대하여 “공산당 제5열”과 다름없다는 비판 성명을 냈다. 
“국회에서는 조속히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가을 파리 유엔총회에서 우리 정부의 승인을 획득하려고 만반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이때에 좌익계열은 물론 김구씨와 김규식씨를 비롯한 반정부파에서도 유엔총회에 그들의 대표를 파견하려는 운동이 최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김구-김규식씨등 중간파 인사들이 평양에서 귀경한 이래 ’최후의 투쟁 목적‘이라 한다. 그런데 이 공작은 중간파 단독행동이 아니라 남북공산당과의 연락하에 진행되고 있다.” 
이에 유림의 독립노동당에서는 “남북협상파들은 공산당 제5열에 동록되었다”고 비난하고 일체의 관계를 끊어 통일지도자협의회에서 탈퇴하였다. ([동아일보] 1948.6.19.)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평양에 가서 신탁통치에 서명하고 한패가 되었으니 지조 없는 독립운동가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유림의 성명으로 파란이 일어나 두 김씨는 자파세력 안에서도 곤경에 몰리게 되었다. 
 
★김일성, 단독정부 공식 출범 준비...“북한 헌법 실현하겠다”
 
슈티코프의 지령에 따라 7월5일까지 닷새동안 열린 평양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김일성은 “결정적 구국대책을 취하겠다”고 연설하였다. 지난 4월 김구가 방북했을 때 통과시킨 북한헌법이 “우리 손으로 통일하는 유일의 길”이라 말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현시킴으로써, 북한 단독정부가 아니라 남조선인민들이 참여하는 전 조선정부를 수립해야겠다”고 장담한다. 즉, 2년전 1946년 2월 출범한 단독정권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남북통일 정부로 공식 출범시키겠다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김구와 함께 월북하여 북한에 잔류했던 홍명희, 백남운 등 남한 좌익인사들이 김구와 김규식을 대리한 안우생과 권태양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쳤음은 물론이다. 
이 회의도 [레베데프 일기]는 김일성의 연설문을 비롯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코프의 감독하에 진행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전현수 옮김 [레베데프 일기, 1945~1948] 2006)
 
또 하나 밝혀준 놀라운 사실은 김규식이 6월23일에 북한에 보낸 편지 내용이다. 김구와 자신은 월북이 힘들다고 말하고 북한에서 100명의 대표를 남한으로 보내주면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북한이 공개하지 않았다.

▲ "남한정부는 임정계승 자격없다"고 부정한 김구의 인터뷰 기사.(조선일보 1948년7월2일자 1면)

★김구 “반쪽 정부 열 개를 만들어도 임정 계승 자격 없다”
 
이 무렵 기자회견에서 김구가 밝힌 답변들이 또 파문을 일으킨다.
기자: 북한의 송전(送電) 중단 문제에 대하여 질문.
김구: 전기 문제는 민족적으로 해결할 문제인데, 조선인대표를 보내지 않아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국제화하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문제로 되었으니 해결 불능이다. 
기자: 국회서 정한 ’대한민국‘ 국호는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는 것인가.
김구: 남북을 통합한 선거를 통하여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해야만 되며, 현재의 반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 정부를 하나 아니라 열 개를 만들어도 법적으로 조직이 안된 정부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할 수 없다. ([조선일보] 1948.7.2)
이처럼 김구는 자신이 ’주석‘인 임정이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통하여 남북선거를 치러 세우는 통일정부, 즉 자신이 권력을 잡는 정부만이 ’임정 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거기엔 ’공산주의‘ 여부는 따질 틈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북한의 송전중단문제가 단지 ’조선인까리의 해결‘로 보는 관점이 진심이라면 이것은 김구 자신이 미-소의 분단점령상황과 국제정치적 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이 결여된 ‘우물안 개구리’ 시각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김구에 긍정적인 연구자 손세일조차 “그것은 너무나 안이한 판단”이라 비판한다. (손세일, 앞의 책).

▲ 경교장을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 일행.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유어만 중국대표와 김구가 나란히 앉아있다.(1947.12.18)

◆김구 “소련은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시켜 남한에 인민공화국 세울 것”
 
7월11일 오전 11시 경교장에 유엔위원단의 중국대표 유어만(劉馭萬,1897~1966) 공사가 나타났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화중대(華中大) 교수를 역임한 유어만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친분이 깊었으며 장개석 정부에 임정지원을 적극 권장한 인물로서 김구 가족과도 친밀한 인물이다. 미군정에도 임정지원을 권장했던 그는 뒷날 백범 아들 김신이 대한민국의 주대만대사가 되자 자주 어울리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김신 자서전 [조국의 하늘을 날다] 돌베개, 2013).
그런 유어만 공사는 김구의 총선거부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반대가 내심 심히 안타까웠고, 장개석까지 김구를 설득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경교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유어만은 김구와 대담 기록을 영문으로 작성하여 대만 정부에게 보고하고, 이승만에게도 보냈다. 지금도 이화장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 사본들이 보존되어 있다. 통역으로 한 시간 넘게 진행된 대화의 놀랄만한 내용은 당시 김구의 돌발적인 변신과 ’김일성 연대론‘의 의혹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 자료이므로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김구-유어만 대화록▶
 
   ◉유어만: 나는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도 외교관이지만 솔직한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한 것이 첫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문한 입니다.
   ▶김구: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떡이다)  
   ◉유어만: 유엔위원단의 한 사람으로서 만나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만, 며느님과 아드님이 중국에 체류중이라 하고 엄(항섭)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으니 통역이 없는 것 같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김구: 그 사람들이 없어도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유어만: 나는 오철성(吳鐵城, 중국 2대 외무장관, 김구와 친분)이 보낸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장개석 총통께서도 선생께 편지를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나의 보고를 받고 나서 쓰도록 건의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 통의 편지가 선생께 전하는 같은 메시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승만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박사와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립하는 데 함께 협조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니까요.
중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집안 형제들이 다툴 수는 있지만 타인들의 비방을 자초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선생의 아드님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저의 말이 거슬리더라도 아들이 아버지께 진심으로 올리는 말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지만, 그러면 부디 그렇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는 정치적 적수로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김구: (심각한 표정으로 웃음 지으며)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말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기는 부적절 하지요. 이 정도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아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겠지요.
   ◉유어만: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제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는 최종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김구: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
   ◉유어만: 내가 이승만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곤 했지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저의 말에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관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이박사와 협력하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우익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찬란한 애국활동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 지도자협의회에 참여하심으로써 그런 기록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벌써 북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이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김구: 나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기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했듯이, 사람들은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이승만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가 될 것이오. 내가 밖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소.
  
   ◉유어만: 선생의 말씀은 오히려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하는군요. 이승만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의 동지였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참여하여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될지 모릅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국익을 위하여 일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그들을 견제하면 이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포기한다면 이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한민당이 견제 없이 국정을 농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김구: (정치싸움 등을 되풀이 말한 다음) 더구나 나는 특정 정당의 비방질 때문에 반미주의자로 색칠 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들의 협력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유어만: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이승만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악평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갈 사람들입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게 소환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 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김구: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승인하는 첫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유어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러리라 확신합니다.
   ▶김구: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유어만: 불가능합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지지하니까요.
 
   ▶김구: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회의에 참석한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직접 알아보려는 것이었소. 
북한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하고, 그 사이 남한이 무슨 노력을 해본다 하더라도 북한군의 현재 수준에 필적할 군대를 육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필자주:북한군)을 남진(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유어만: 소련이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요,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지요.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에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소련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주권국가가 될 것이고, 남북통일을 성취할 기지(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을 약하게 보실수록 조건 없이 여기에 투신하셔야 합니다. (이상 대화 끝)

▲ 김구와 유어만 중국대표의 대화록. 유어만이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하고 이승만에게도 보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김구는 소련과 북한의 남침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나?...모순점과 의구심
 
유어만과 김구의 대화기록을 읽어보면 김구의 발언에 문득문득 놀라게 되고, 김구의 행동에 대한 모순점과 의구심이 더욱 깊어진다.
첫째,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는데, 최측근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일‘이란 무엇인가.
둘째, 미국이 정책을 바꿔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던가.
셋째, 결정적 대목은 이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시키는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정부를 수립하여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언, 김구가 임정을 의탁했던 장개석정부의 외교관 앞에서 토해낸 공언이다. 
단시간에 인민공화국정부 수립이라니? 과연 김구는 ‘소련+북한 남침’에 대한 무슨 확증을 갖고 있기에 이런 단정적 말을 하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그렇다면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함께 서명 발표하고 서울에 와서도 큰 성과처럼 과시한  ‘4·30 남북공동성명서’ 가운데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없다'는 대목을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착각인가? 아니면 말 못할 속임수라도 있단 말인가? 
즉, 김구는 머지않아 소련과 북한이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미군 철수에 동조하고 스스로 철군을 거듭 요구하였다는 의구심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공산군 남침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 미군의 장기 주둔임을 여러번 공개 주장, 철수 반대를 천명해 왔다.
그런데 김구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김일성과 함께 요구한 것이 될 뿐더러. 소련의 남북한 적화통일 전략에 결과적으로 협력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협력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말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어만이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들이대는 데도 이를 곧장 부정하지 않고 “모든 걸 머지않아 밝히겠다”며 즉답을 피해간다. 
이해부득 말 돌리기에 의심은 꼬리를 물지만 김구 자신의 정직한 해명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바로 1년 뒤 여름, 김구의 ‘좌우합작 친북활동’과 ‘모종의 음모’에 대하여 격분한 청년장교 안두희가 번민을 거듭하던 끝에 김구를 경교장 집무실에서 대낮에 ‘총살’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김구가 그렇게 단둘이 만날 정도로 가까이 하던 한독당 비밀당원이었다. (안두희의 옥중고백록 [시역의 고민: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타임라인, 2021)
 
◆ 김구, 유엔에 ‘정부승인 반대’ 사절단 파견 준비...이승만 “망녕이다”
 
두 김씨가 파리 유엔총회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를 공식화한 것은 6월15일 경교장에서였다.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의 제5차 연석회의는 통일독립운동의 강화, 남북정치회의 소집, 그리고 유엔총회에 대표단 파견 등을 내걸고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보름전에 개원하 국회의 사상최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로 수립될 정부가 ‘부당한 정부’이므로 이를 유엔이 승인하는 절차를 사전에 저지하자는 것이다. 두 김씨의 ‘건국 반대’ 투쟁은 이제 총선거 보이콧에서 ‘신생 정부 전복운동’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었다.
이것이 두 김씨의 주장대로 순수한 통일열망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북한 총독’ 슈티코프의 지시에 의한 김일성-성시백의 공작 결과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놀랍게도 헌법이 공포(7.17)되기 한달 전, 정부가 수립되기 2개월 전에 벌인 일이다.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반대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한 그들이 유엔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것은 망녕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부터의 유엔 대표는 우리 정부에서 선출한 대표만이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어떠한 위대한 인물이나 어떠한 큰 단체라도 우리 대한민국의 대표는 될 수 없는 것이다.”([동아일보] 1948.7.13)
그리하여 이승만은 건국헌법을 공포하자마자 서둘러 사흘뒤 7월20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24일 취임식과 동시에 건국내각 구성을 위해 밤잠을 설친다. 9월 유엔총회에서 세상없어도 ‘국가승인’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건국사(58) 마침내 ‘건국대통령’ 탄생..."새로운 백성 되어야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50년 삭힌 청년의 꿈 활짝

 

▲ 건국 국회 첫 간접선거 결과, 이승만과 김구의 득표수 180 대 13.

◆이승만, 압도적 당선...해방후 3년간 1인투쟁의 승리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국회의원 196명(2명결석)의 투표결과다.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1948년 7월20일 오전 10시25분부터 실시된 무기명 투표 간접선거는 예상대로 이승만의 압승, 서재필은 미국적 시민권자이므로 만장일치로 무효 처리되었다. ([서울신문] 1948.7.21)
부통령 선거는 오후2시부터 진행하여 이시영(李始榮,1869~1953)이 당선되었다. 첫 투표에서는 헌법 규정의 출석의원 3분의2 득표자가 없어 재투표를 실시,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가 나왔다.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김구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한민국 국회 안에 30% 가까이 들어온 셈이다. 
 
이로써 마침내 5천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23세때 조선말기 고종 치하에서 미국식 자유민주국을 세우자며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래 무려 50년만에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글자 그대로 ‘건국 대통령’이다. 그가 ‘건국대통령’이라 함은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는 로버트 올리버의 말처럼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싸워 이겨내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첫째,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내세워 건국저지 폭력공세를 펼쳤다.
둘째, 미국 정부가 하지를 내세워 좌우합작을 추진,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하였다.
셋째, 임시정부 세력이 4분5열 우왕좌앙 집권을 위해 갈팡질팡, 특히 ‘주석’이라는 김구는 “임정이 집권하겠다”며 미군정에 두 차례나 쿠데타를 시도하였고. 막판엔 북한 김일성과 손잡고 통일정부 세우자는 떼를 썼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에 배후자로 지목받아 궁지에 몰리자 선택한 남북통일카드. 김구의 주장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볼 때 그것은 스탈린의 함정에 빠진 ‘쓸모있는 바보’의 전형적 실수라 하겠다. 즉 ‘북한 총독’ 슈티코프의 전술을 실행한 ‘꼭두각시’ 김일성이 직속공작원 성시백 등을 시켜 성공시킨 ‘민족통일전선’ 작품인 까닭이다.
 
이승만 혼자 싸워서 쟁취한 유엔 감시 총선을 통하여 유엔이 인정하는 ‘국제국가’를 세운 건국, 그것은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 남북통일 운동을 위한 남쪽 ‘자유기지’를 구축한 국제전략적 선택이었다. 전후 40여개국이 스탈린의 손아귀에 들어가 ‘빨간 나라’ 될 때 극동 한반도 남쪽이라도 지켜낸 ‘파란 나라’의 건국, 국사학의 분류대로 ‘조선의 시조가 이성계’라면 이승만은 쉬운 말로 ‘대한민국의 시조’라 해야 합당하다.

▲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직접 쓴 취임사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 다짐
 
국회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건국 내각 인선에 분주한 가운데, 이승만은 역사적인 취임사를 직접 썼다. 사상 최초의 대한민국 정부통령 취임식은 7월24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앙청 광장 행사장엔 국회의원 전원과 각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비롯하여 유엔한국위원단, 하지 사랑관과 미군정 간부들 등 내외귀빈들이 가득 찼다. 신익희 국회부의장의 개회사에 이어 이승만 건국 초대 대통령이 무대에 올랐다. 헌법 제54조의 규정에 따른 취임선서.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
선서문에 서명한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에 감사, 잃었던 나라를 40년 만에 다시 찾은 감격에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는 것과,
둘째,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시민됨’을 제대로 인식하여 민족 전체를 위한 신성한 책무를 다하도록 국민도 맹서하자.
셋째, 건국 초대내각 구성은 유포되는 여론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 그것은 지역 편중이 아닌 남북한 전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선언한다. 
넷째, 공산주의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민족의 원수’로 간주, 국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것.
다섯째, 민주정부는 국민이 주장하는 것이므로 ‘똑똑한 국민’이 되어야 하고, 새국가 건설에는 헌법과 정부보다 ‘새로운 국민’의 등장이 필수조건이며, 이는 부정부패와 파당분열을 거부하는 국민, 정의와 불의를 구별할 줄 아는 ‘민주 국민’이 우선해야 한다는 평생의 지론 현대적 ‘국민국가’ 정신을 피력하였다.
 장문의 연설 가운데 특히 임영신의 유엔외교를 칭찬하여 입방아를 낳았지만, 이승만으로서는 자기 말대로 미국에서 고군분투한 임영신의 활동이야말로 이승만의 ‘유엔외교독립’ 전략을 성공시켜준 대한민국 건국사의 결정적 고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취임사 전문이다.

▲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이승만 건국대통령 취임식. 1948.7.24 ⓒ연세대이승만연구원.

◆취임사 전문◆(중간제목은 필자)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觸感촉)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木石肝腸)이 아닌 만치 나도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오,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에서 표면(表面)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서...동포들도 맹서하기를!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서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시민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은 결코 아니며 전혀 애국남녀의 합심 합력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완전한 민주주의 선거...좌익 의원도 여럿 당선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들이 칭찬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남녀가 단순한 애국성심으로 각각 직책을 다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되어 2, 3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색태(左翼色態)로 지목받는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 사상 충돌로 분쟁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극렬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 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활히 처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총리-장관 인선에 낭설 유포...여론과 크게 다를 것
 
나는 국회의장의 책임을 이에 사면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부처장으로 임명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 투표구역에서 경선 보결하게 될 것이니 원활히 보결된 후에 의장을 선거하게 될듯하며 그 동안은 부의장 두분이 사무를 대행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 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의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합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간 여러 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 언론에 불과하며 며칠 안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니 부언낭설을 많이 주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민족 대표하는 정부 구성...‘좋은 시계’처럼 잘 돌아가게...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히 주의할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회상 명망이나 정당단체의 세력이나 개인 사정상 관계로 나를 다 인식하고 오직 기능 있는 일꾼들이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을 민의대로 준행해 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격이 너무 커서 적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혹은 적어서 큰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적은 자리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 무슨 책임을 맡기든지 대소와 고하를 구별치 않고 적은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
 
이런 인격들이 함께 책임을 분담하고 일해 나가면 우리 정부 일이 좋은 시계 속처럼 잘 돌아가는 중에서 이적을 많이 나타낼 것이오 세계의 신망과 동정이 날로 증진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수립하는 정부는 어떤 부분적이나 어떤 지역을 한하지 않고 전 민족의 뜻대로 전국을 대표한 정부가 될 것입니다.
 
★국민이 의로운 사람-불의한 사람 구별할 줄 알아야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민주정부는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서 전국이 위험한 데 빠지는 법이니 일반국민은 다 각각 제 직책을 행해서 위선 우리 정부를 사랑하며 보호해야 될 것이니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과거 40년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 자를 옹호하고 불의한 자를 물리쳐서 의(義)가 서고 사(邪)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일꾼이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인을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으나 지금은 백성이 주장이므로 민중이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명백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권을 공고히 하면 우방이 저버리지 않을 것
 
승인문제에 대하여는 그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순서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모든 우방의 호의로 속히 승인을 얻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는 바는 승인을 얻는데 있지 않고 먼저 국권을 공고히 세우는데 있나니 모든 우방이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우리가 잘만 해나가면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후원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우리가 일 잘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9월에 파리에서 개최하는 유엔총회에 파견할 우리 대표단은 특별 긴급한 책임을 가지니만치 가장 외교상 적합한 인물을 택하여 파견할 터인데 아직 공포는 아니 하였으나 몇몇 고명한 인격으로 대략 내정되고 있으니 정부조직 후에 조만간 완정 공포될 것입니다.
 
★임영신 여사의 고군분투 유엔 외교에 감사
 
우리의 대표로 레이크썩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있는 임영신 여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재정 후원도 못하고 통신상으로 밀접히 후원도 못한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치 진취시킨 것을 우리는 다 영구히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반역행위, 전민족의 원수
 
이북동포 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이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남북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하여 가지고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공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 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권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세계와 평화친선...외교통상으로 균평한 이익 도모
 
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다 친린(親隣)해서 평화를 증진하여 외교 통상에 균평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교제상 만일 친소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오 타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이던지 우리에게 친선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할 것이오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는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40년 간에 우리가 국제상 상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새로운 백성 되어야 세계 문명국들과 경쟁할 수 있다
 
일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가 우리 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나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가치대로만 정해 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이니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 주어서 피차에 양해를 얻어 정의가 상통하여 교제가 친밀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오 세계평화를 보증하는 방법입니다.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마는 새로운 백성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샛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난 40년 동안 잊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3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 용진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리승만
 
★앞에서 본 것처럼 ‘대한민국 30년’이라 기록한 것은 정치적 역사적 기록성에 비중을 두어야한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산한 이 기원은 이승만 자신이 8월15일 정부수립선포식에서 한번 더 쓰고 더이상 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국내 서울에서 13도대표가 설립한 ‘한성정부’의 헌법과 직제를 그대로 수용하였고,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이승만이 그대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대한민국은 임정도 신생 건국정부도 모두 이승만이 국가수반이다. 따라서 일찍이 하와이에서 3.1운동을 기획, 실행한 이승만은 그 결과물 임정과, 그후 28년 독립운동의 결과물 대한민국이 모두 자신이 세운 정부이고 국가임으로 그 30년 법통은 누가 뭐래도 이승만의 피땀이요 평생 꿈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 1948년 7월24일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앙청 국회에 들어서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축하인사를 받으며 미소짓고 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건국정부 내각 구성...이승만 ‘조각당’으로 숨다
 
취임식후 이승만은 오후부터 집무를 시작한다. 대통령 집무실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중앙청 3층의 200호실, 이시영 부통령실은 미군정 장관실로 정해졌다.
동양 최고의 화려한 르네상스식 작품이라는 화강암 조선총독부 석조건물은 이제 대한민국 건국 국회와 건국 정부가 사용하는 역사적인 ‘건국 건물’로 변신하였다. 침략자의 본산을 탈환, 명실 공히 독립국가 중심이 되어 대통령이 정부구성 작업에 돌입한 참이다..
신문들은 헌법 공포시부터 무수한 하마평을 보도하기 바쁘다. 대통령 부통령은 예상대로 선출되었으니 초점은 국무총리에 집중된다. 특히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총리=김성수’를 추천공작중이라는 보도가 많이 나왔고, 무소속구락부는 조소앙을, 독촉국민회 쪽은 신익희를 추대한다는 둥 갖가지 여론조각 설왕설래가 날마다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승만이 취임사에서 ‘낭설’ 믿지 말라며 “소문과 크게 다르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이승만의 속 깊은 인물 리스트를 누가 짐작이나 하겠으랴. 이화장을 찾아오는 요인들의 발길이 급증하자 이승만은 아예 본채를 떠나, 산비탈에 걸려있는 방1개짜리 조그만 정자에 들어앉았다. 뒷날 ’조각당‘(組閣堂)으로 불리게 되는 건국내각의 산실, 과연 무슨 작품이 나올 것인가.

 

이승만 건국사(59) 김성수 ’총리+장관6명‘ 입각 요구...’거국내각‘ 주장 이승만이 거부...한민당의 반란, 건국 전야 ‘내각제 환원’ 개헌 추진

 

▲ 대한민국 건국내각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 임영신, 안호상, 이인, 이범석, 이승만, 윤치영, 김도연, 조봉암, 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 김동성, 민희식,유진오.(1948.8.5 중앙청앞에서)

신생 대한민국의 권력을 누가 잡느냐? 대통령은 이승만이 취임하였으니 ‘총리’와 장관’자리를 두고 정파들의 암투가 벌어지고 국민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독립운동 40년 만에 다시 찾은 나라의 권력투쟁은 그만큼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김구가 일찌감치 ‘반(反)대한민국’으로 돌아서며 경쟁대열에서 멀어져 한민당은 안도하였을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차지하리라는 예상이 대세였다. 한민당 자신도 ‘김성수 총리’안을 은밀하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무위원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 이승만이 취임사에서 비친 ‘예상과 다른 인물’은 누구일까. 한민당 인물이 아니라는 시사가 강하다. 
이승만은 해방3년간 한민당의 지원을 받았대서 한민당에 기울지 않았다. 그것은 한민당 쪽이 이승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아니, 막상 이승만이 겪은 한민당 지도층이 가장 신뢰하기 힘든 집단이란 결론을 심어주는 사건이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1년전 미소공위 협상대상에서 한민당을 거부하던 소련이 통일전선 전술로 바꿔 문호를 개방하자 우르르 달려가 가입한 것이 한민당이다. 이승만이 ”공산화 함정“이라고 말렸지만 한민당은 좌우합작정부라도 권력참여가 다급하였던 것, 그때 이승만은 국내파 한민당에 결정적인 ‘불신과 경멸’을 가지게 된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이승만은 넓게 보고 멀리 뛰는 민족 지도자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남한만의 정부가 아니요, ‘정읍선언’에서 밝힌 바 목표대로 유엔의 지원을 받는 ‘남북통일 지향 정부’여야만 한다, 어느 특정당 독점이 아닌 ‘거국내각’이 돼야만 통일노력에 국제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장 ‘조각당’에서 혼자 ‘건국내각’을 구성하는 이승만은 그래서 상징적인 최초의 총리 인선부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결과는 무엇이냐? 그 ‘건국 드라마’의 몇 장면을 열어보자.

▲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했다가 국회서 거부당했던 이윤영 국회의원(왼쪽), 대신 임명한 이범석 초대국무총리.

◆초대 총리 산통(産痛)...이윤영 총리에서 이범석 총리로 
 
취임 사흘간 칩거하던 이승만은 이화장을 나서 중앙청 국회 의사당 연단에 섰다.
7월27일 아침 ‘총리 인선’ 발표의 순간, 숨죽인 국회의원들과 기자들이 집중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자신이 작성한 긴 발표문을 30분이나 낭독하며 꼼꼼하게 설명해 나갔다.
 
★이승만, 김성수-신익희-조소앙을 총리에서 제외. 왜>?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중에 몇 단체와 주요 지도자들과 토의 협정하여 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미리 발설이 되면 매인열지(每人悅之: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부득이 혼자 심사각득(深思覺得:깊이 생각하여 깨달아 앎)해서 오늘까지 초조히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각방면의 지도자 측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하여 정부조직과 국무총리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名錄)이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명록만 채용하여 결정한 것은 아니나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하 연설내용은 [제헌국회 속기록(1) 제1회 제35호. 1948.7.27.]에서 발췌)
이승만은 이처럼 각 정파들과 사전 협의하지 않은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우선 국무총리 적임자로 추천과 여론과 인망을 보아 “가장 유력한 인물들이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세 사람인데, 민의와 국내외 정세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잘라 말했다.
일순 회의장은 물벼락을 맞은 듯 파문을 일으킨다. 곧 이승만의 사유 설명이 이어졌다.
“첫째, 해방후 정부 수립 이전에 정당이 먼저 생겨서 분규가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요, 또 유감으로 아는 바입니다....몇몇 정당으로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정당주의로 권리를 다투는 중에 행정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양년 동안에 몇몇 사회민족운동단체 경력이 소상히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당 지도자가 총리로 피임되면 난편(難便)한 사정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므로 아무쪼록 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즉, 이승만은 정당지도자 총리는 ‘정쟁을 유발’할 것이므로 피하겠다는 말이다. 바로 내각제를  반대한 까닭이다. 이어서 이승만은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에 대하여 각각 ‘중용’할 것이라고 다독이는 것이었다.
“김성수씨로 말하면, 그분의 인격과 애국성심과 공평정직한 것은 추앙하지 않는 사림이 없는 줄로 믿으며....국무총리 보담 덜 중대하지않은 책임을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총리만큼 중용하겠다는 시사였다. 즉, 그가 말한 총리와 맞먹는 자리는 재무장관이었다. 그동안 이화장으로 김성수를 부른 이승만은 미국 건국초기 큰 공을 세운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을 거론하면서 가난한 신생국의 독립을 위하여 재무장관을 맡아달라고 몇 번 간청한 바 있었다.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인촌 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1976)
신익희에 대하여는 ‘역사상 정치상 몇분 안되는 총리감이지만 입법부의 책임이 더 크므로 국회를 맡아달라“고 당부하였고, ”조소앙씨는 일본 유학생 때부터 명망과 위신이 많은 추대를 받아왔으나....민중의 의혹이 다 풀려서 장애가 없어지면...“ 함께 일할 수 있으리라고 못 박았다. 상하이시절에도 이승만을 지지했던 조소앙의 우왕좌왕에 실망한 이승만의 직격탄 경고였다. 아뿔싸...그때 조소앙은 김구를 따라 평양에 갔다가 실망하여 김구와 결별, 기자들에게 강한 입각의욕을 밝히며 이승만에게 러브콜을 계속하던 터였다.
 
이승만은 마침내 ’히든 카드‘를 꺼내들었다.
”국회의원 중에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장내는 조용하다. 
이승만은 ’왜 이윤영 총리‘여야 하는지를 또 길게 설명한다,
”이 공포에 대하여 다들 크게 놀랄 것이지만 이윤영 의원이 가장 놀랄 줄 압니다. 이 분을 임명하는 나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째 국회의원 중에서 총리를 택한 것은 민의를 존중하고자 하는 본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이북 대표 한분이 그 자리에 오르기를 특별히 관심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급한 우리 문제 중에 제일 급한 것이 남북통일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슨 정책을 쓰든지 이북동포의 합심 협력을 얻지 않고는 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먹으나 굶으나 머리 둘 집칸이라도 있고 이만치라도 자유 활동하고 살아온 터이나 이북동포의 참혹긍측(慘酷矜惻)한 정형은 우리가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 없는 터입니다.“
이승만은 조만식 선생을 부통령으로 추대해서 이북동포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생명이 위험해질까봐 자제하였다고 밝히고, 그 대신 평양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부위원장이었던 이윤영 의원이 국무총리를 맡는 것이 민족적 정의로도 가장 적당할 것이므로 ”남북통일 촉성을 위하여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을 믿는다”고 총리 인준을 촉구하였다.
덧붙여 한국의 오랜 악습인 ’지방열‘(지역감정) 타파에도 “서북 출신 이윤영 의원이 지방열을 극렬 반대하므로 적임자”임을 재차 강조하고 국회를 떠났다.
서북(평안도-함경도)파의 지방열은 수백년 묵은 열등의식이 뭉쳐진 ’복수열‘로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안창호의 이승만 배척운동이 지방색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점으로도 증명하고 남는다.([윤치호 일기] 참조)
 
★국회, 이승만 나가자마자 ’이윤영 총리‘ 부결
 
이승만이 이윤영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는 안을 내놓고 퇴장하자마자 국회는 즉석에서 승인여부를 묻는 투표에 들어갔다. 재석의원 193명의 무기명 투표결과 가 59, 부 132, 기권 2표로 부결을 선포한다. 가장 강력한 한민당 세력의 총수 김성수를 ’총리‘에서 제외시켰으니 부결은 불문가지(不聞可知)였다. 
한민당 의원들은 그날 오후3시 당사에 모여 ’기정방침‘대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한다. 이승만의 선택은 모두 부결한다는 것이다. 조소앙을 추대한 무소속계(김구 세력)도 단합회의를 가졌다.
 
이승만은 이튿날 7월28일 국회 정파들을 겨냥한 담화를 발표한다.
“이윤영 의원 임명안을 제출한 후 즉석에서 부결시킨 사실을 보면 두 당이 각각 내응적으로 자기당 사람이 아니면 투표 부결에 부치자고 약속이 있는 것이니, 만일 이것이 사실이면 내가 국무총리를 몇번 고쳐서 임명하더라도 자기들의 내정한 사람이 아니고는 다 부결되고 말 것이오, 그 내용을 좀더 알기 전에는 다시 임명하기를 원치 않으며...이윤영씨를 임명한 이유 중에서 부적당하거나 불가하다는 더 큰 이유가 있다면 내가 알고자 할 것이나, 토론 한 번도 없이 부결하다니...” ([조선일보] 1948년 7월29일자)국회내 다수파 한민당과 김구계를 ’두 당‘이라 지칭하며 정면 비판한 이승만은 그동안 독립촉성국민회의 간부들을 겪어보니 “각자 자기정당을 우선시하므로 민족운동을 해갈 수 없었다”고 실토하고 “지금 초대 정부에 또 그렇게 만들어놓고서야 국가건설을 어찌 해나가겠는가”고 탄식을 토한다.
“국회 안에서 어떤 인물을 지정해가지고 그분만을 지지하기로 활동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 터이니, 이것이 민족의 원하는 것인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민족이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서 그대로 따르기를 결심한다”고 다짐하였다.
’그 분‘이란 한민당의 김성수를 가리킨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7.26)에서 조각의 고민과 ’이윤영 총리‘안의 의미를 털어놓았다.
“...국무총리는 북쪽 출신이어야 하고 부유층 출신은 아니어야 한다. 이 두 요소는 모두 유엔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할 때 파리에서 유리한 자산이 될 것이오.” 
따라서 김성수는 남쪽 출신에다 최대의 부호이므로 자동탈락이 된다. 
“...나는 김성수를 임명하고 싶은데 그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run or ruin) 식으로 뭉쳐 있다오....김성수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일곱 개의 장관직을 줄 것을 요구하고 있소....” 
이래저래 이승만이 김성수를 총리로 선택할 길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던 셈이다.
내각제를 반대하는 그가 ’한민당 독과점 정부‘를 만들 리가 없고, 9월 파리의 유엔총회에서 반드시 조속한 시일 내 ’국가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이 건국 최우선 목표 ’발등의 불‘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지도자의 국제적 국가이익 확보와,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수구 자본세력의 충돌이라 할까. 거국내각을 주장하는 이승만에게는 ’친일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국내파 중심이  되면 유엔이 세워준 자유독립국가의 정부로서 국제적 평판은 물론, 국가승인 투표에도 장애가 될 터였다.

▲ 김성수 부통령시절, 이승만 대통령과 담소하는 모습.

김성수, 이범석 총리 승인 직후 장관 6명 요구
 
이윤영의 총리 임명을 국회가 부결시키자 이승만은 청산리전투의 독립투사 이범석(李範奭,1900~1972)을 지명하고 각당의 지도자들을 불러 승인을 요청한다. 독촉국민회 고희동, 배은희를 비롯하여 한민당의 김성수도 이화장으로 불러 협조를 당부하였다.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부하 참모장이던 이범석의 총리 임명에 반대하였다. 김구계 무소속도 반대를 결의한다.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의 당부를 받은 김성수는 이범석을 계동집으로 불러 ’조각 구상‘을 내놓았다. 
“정부의 12부 4처 가운데 적어도 6개 장관을 한민당에 배정해주지 않으면 당을 설득할 수 없다. 나로서도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한민당이 치른 역할이나 국회 내의 비중으로 보아 그것은 최소한의 요구라고 생각한다”고 압박했다. 12부 장관 절반을 달라는 요구였다. 이범석도 ’동감‘이라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전] 앞의 책).
이범석 총리안에 대하여 한민당 안에서도 격론이 벌어지고 “이승만이 천황 같다”며 비난하는 소리도 높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투표에 맡기기로 하고, 무소속에서도 이번엔 승인하자는 논의가 늘어났다.
 
’이윤영 총리‘ 부결 1주일 후, 8월2일 10시30분 국회에 나선 이승만은 ’이범석 총리 임명을 승인해 달라‘고 원고 없이 즉석연설로 요청한다. 
“....8월15일 안에 여기 미군정당국자들은 하루 빨리 주권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총리승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또 들리는 바 남북협의를 하는 분들이 벌써 남한대표를 뽑아 북쪽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토론만 하고 있으면 안될 것입니다....무슨 당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가지고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무기명투표 결과, 재석의원 197명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 무효 3표로 가결되었다.([조선일보] 1948년 8월3일자)
16세때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 이범석은 19세때 ’청산리 대첩의 용명‘을 얻었다. 1946년 광복군 참모장으로 귀국,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여 미군정의 예산지원까지 받았으나, 건국후 이승만이 총재를 맡은 대한청년단에 통합된다. 이승만을 ’마음으로부터 지지‘한 이범석은 이제 만48세로 역사적인 건국내각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 건국내각 화제의 인물. 농림부장관 조봉암, 상공부 여성장관 임영신, 사회부장관 전진한.(왼쪽부터).

◆’거국내각‘이냐, ’한민당내각‘이냐...김성수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승만의 ‘조각 원칙’
이승만의 조각원칙은 ‘일꾼’과 ‘정부안정’ 그리고 당파를 안배한 ‘거국내각’이었다..
이승만은 열흘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부조직의 원칙을 이렇게 밝혀두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사람의 사회적 명망이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나’를 초월하고 오직 기능있는 일꾼들이 함께 법률을 민의대로 준행해 나갈 사람들끼리 모이는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참으로 큰 사람은 작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서 무슨 책임을 맡기든지 대소와 고하를 구별치 않고 작은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이 도달될 것입니다.” ([조선일본] 1949년7월25일자)
그래서 ‘큰 사람’ 김성수에게 재무장관을 권했지만 김성수는 즉석에서 거절했었다.
 
조각작업=국회의 이범석 총리안이 가결되자 8월2일 그날 저녁부터 이승만은 이범석을 불러 각부 인선을 서둘러, 밤9시40분 1차 임명자들을 발표하였다.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1894~1967)--1919년 도쿄 2.8독립선언 대표 11명중 한사람.
▷법무부장관 이 인(李仁, 1896~1979)--독립운동가들 무료변론 전담,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1898~1959)--조선공산당 창설 멤버, 소련의 코민테른 추종 국                                          내외 암약, 해방후 남노당 박헌영노선 비판 결별.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1895~1980)--미국 유학후 미군정 운수부장.
 
이튿날 8월3일 2차 임명자 발표.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1898~1996)--이승만의 미주 독립운동 청년동지.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1901~1972)--일본유학 노동운동가, 독촉국민회 청년조직위원장.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1902~1999)--독일 유학 철학자, 중국서 독립운동.
 
다음날 8월4일 3차 임명자 발표.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1893~1969)--영국 유학, 은행 경영,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1899~1977)--미국 유학, 이승만 최측근 독립운동가.
▷국방부장관 이범석 국무총리 겸임.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1892~1950)--김구의 독립자금 조달, 무소속 국회의원.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1890~1969)--김성수와 동아일보 창간, 만화가, 이승만지지.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1906~1987)--김성수의 보성전문 교수, 소설가 법학자,
 
사흘 만에 구성을 완료한 건국내각 각료 명단은 이상과 같다. 
가장 화제가 된 것은 공산주의자 조봉암과 최초의 여성장관 임영신, 그리고 전진한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의 의중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인사들이다.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기용한 이유=박헌영과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공산주의를 버렸다는  전향증거가 불분명한 공산주의자를 역사적인 건국내각에 입각시키자 반향은 매우 컸다. 
왜 이승만은 그를 농지개혁을 다뤄야 할 농림장관에 앉혔을까. 바로 농지개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이 미국 교수 보좌관 올리버에게 쓴 편지엔 조봉암을 등용한 이유를 “농민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실토하고 있다. (올리버, 앞의 책).
여기에 이승만의 전략적 사고와 혁명적 혜안이 돋보인다. 해방 전후 몇 년간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대다수 가난한 농민들을 자유의 품으로 되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이구동성 농지개혁을 부르짖었고 건국헌법에도 명문화 시킨 터였다.
이제 드디어 농지개혁을 성공시키려면? 국회를 장악한 지주들과 부유층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대표 격 지도자가 김성수인데 그가 내각책임제로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도, ’총리+장관6명‘ 임명을 줄곧 요구한 것도 이승만은 그래서 단호하게 뿌리치지 않았던가.
오로지 끼리끼리 권력독점을 추구하는 지배계층에 대항할 비밀병기, 이승만이 공산주의자 출신 조봉암을 꺼내든 이유이다. 지주세력과 싸워서 공산당에 빼앗긴 빈농(貧農)들, 즉 다수 국민을 되찾아야 하는 이승만의 혁명적 선택이었다.
일찍부터 공산주의를 알고 공산주의를 활용하는 용재술(用材術)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이승만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뒷날 ’공금유용‘이라는 약점에 걸려 반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여성 장관 임영신은 이승만이 취임사에서도 찬양한 유엔외교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었다. 청년시절부터 남녀평등을 주장한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남녀공학을 처음 실시하였고 기어이 ’장관‘까지 여성을 기용한 것. “우리 백성의 절반이 여성인데 노예로 버려져있으니 이를 혁파하여 독립국가의 파워로 육성하자“고 외쳐온 지 반세기 만에 ‘여성해방’을 행동으로써 국민 앞에 실천해 보였다.
◉노동문제를 관장하는 사회부장관에 젊은 노동운동가 전진한를 배치한 것도 혁명적 카드였다. 조선왕조5백년간 “노동은 상것들이 하는 것, 양반은 노동하면 양반 아니다”라는 왜곡되고 전근대적 계급사회 찌든 악습을 타파하여 ‘일하는 나라’를 만들려는 이승만, 청년시절 예배 때마다 ‘삼천리 금수강산 일하러가자’는 찬송가를 애창하고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건국헌법 제정때 사회주의 경제조항 ‘근로자 이익균점법’(제18조2항)을 추가하는데 앞장섰던 과격파 전진한을 과감히 등용한다. 자유시장경제론가 이승만은 그 조항에 반대하면서도 ‘노동정신혁명’을 단행하기 위해서다. 이승만 자신이 3년뒤 자유당을 창당할 때 처음 당명을 ‘노동농민당’이라 주장했을 정도로 시장경제 건설의 일꾼 노동자 농민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장관 전진한에게 대한노총위원장을 겸임시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밀고 나갔다.
◉한독당 윤석구가 체신부장관이 된 것은 배후에서 김구가 은밀하게 밀었음을 이승만이 알면서도 무소속 구락부(김구파+좌익계)를 배려해서 결재한 인사였다. “말썽 많이 부리는 귀찮은 사람인데 실력은 있다‘면서 이승만이 임명했다고 한다.(윤석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1977. 손세일, 앞의 책)
 
★조각을 대충 마무리한 이승만은 8월4일 국회 제39차 본회의를 열고 후임 국회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또 한명의 부의장에는 무소속의 김약수(金若水)가 한민당의 김준연을 누르고 당선된다. 김구계로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김약수는 다음해 간첩 성시백에 포섭되어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킨 주역이다.
다음날 제40차 국회 본회의는 김병로(金炳魯, 1887~1964) 대법원장을 인준하였다. 
이승만은 이렇게 대한민국 건국정부 얼개를 갖추고 8월15일 출범준비에 들어간다. 

▲ 이승만대통령이 혼자서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 조각당(組閣堂).

돌아 선 한민당...”우리 장관 1명뿐이니 ’내편‘ 아니다“
 
8월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첫 국무회의가 중앙청에서 열렸다. 부통령 이시영이 안보인다.
이시영은 전날 내각 명단이 발표되자 조각구성에서 소외되었다는 불만을 품고 잠적했다. 놀란 이승만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이시영 집을 찾아 갔으나 헛걸음이었다. 이시영은 수원에 숨어 있다가 8월10일에야 제5차 각의에 나타났다.([조선일보]1948년8월11일자)
 
첫 내각 명단을 본 정파들과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당연하게도 가장 격분한 것은 한민당과 인촌 김성수였다. 총리직 제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았으나 12명 장관 중에 김성수가 요구한 6명은커녕 달랑 김도연 재무장관 한명 뿐이다. 
한민당이 얼마나 ’배신감‘에 떨었는지 8월6일 상무위원회를 긴급소집, 짤막한 담화를 발표한다.
”대망하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된 것은 경하할 바이다....본당으로서 이번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관련은 극히 희박하다.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시주의로 임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감시를 게을리 아니 할 것을 이에 언명하는 바이다.“ ([동아일보]1948년 8월7일자)
예부터 당파싸움을 일컬었던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전형적 발로라고나 할까. ’당동벌이‘란 ’자기편 사람은 무조건 싸안고 반대편 사람은 무조건 쳐내는 일‘이다. 집단입각을 기대했던 정부에 자기편이 한사람만 들어갔으므로 그 순간 대한민국 정부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으니 ”두고 보자”는 말이었다.  

▲ 이승만이 김성수의 '총리-장관6명' 요청을 거부하자 동아일보는 1면머리 사설로 전면개각을 요구하였다. 1948년8월7일자.ⓒ동아DB

★동아일보 1면 머리 사설, 이승만에게 전면 개각 요구
 
같은 날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써서 1면 머리에 통사설로 올려놓았다.
제호 옆 2단 제목은 ’측측(惻惻)한 국민의 심정‘--즉 가엽고 서글픈 국민의 심정이다.
 
「건국정부의 구성인물을 보고 국민의 실망과 낙심은 너무나 크다.
무거운 국민의 부탁을 받은 대통령은 오로지 민원의 소재를 통감하고 널리 중망이 높은 인물을 거용하야 정부를 구성하므로써.......전국의 태안을 도모하여야 하겠거늘 그 조각 구상에는 몇몇의 중대한 과오가 내포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국민의 기대와 너무나 현격한 췌약(膵弱)정부를 출현시키고 말었으니....국민의 실망과 낙심은 당연한 일이다...(중략)...몇 가지 중대한 과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자기의 우월성을 너무도 과시한 나머지 국회의 세력관계를 전연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모와 덕망에 있어서 유위유능(有爲有能)의 사(士) 없지 않거늘 조금도 포섭하지 못하고 차선삼선의 인사를 모래와 같이 혼합하므로써 만족하지 않았던가?
민성을 끝내 물리치고 그 사람들만을 기용하지 않으면 아니될 이유가 무엇이며 기상천외의 인사로써 국민을 아연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국민은 도저히 납득하기 곤란하다...(중략)...국민은 유위유능한 인물을 망라한 강력정부의 출현을 기대하였지마는 대통령의 과오로 말미암아 사실은 졸작(拙作)정부가 되고 말었다.
과오는 과오로 알고 개조하는데 발전이 있는 것이니 때를 재촉하여 일대개조의 결단이 있기를
국민은 대통령에게 간원하는 것이며...(중략)...국민 앞에서 엄중한 비판과 감시를 받을 것이매 건국정부의 사명을 완수하여야 할 것을 부탁하여 둔다.」 ([동아일보) 1948년8월7일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중대한 과오를 반성하고 “전면개각은 빠를수록 좋다”고 촉구한다. ’유능한 인사‘들이란 김성수가 이승만에 제안한 인물들임은 말할 나위 없다.

▲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을 이틀 앞두고 국회의원 100여명은 건국헌법을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운동을 벌인다. 입각 못한 불만 때문이다.ⓒ동아DB

★동아일보, 8.15 이틀 전 ”국회의원들 개헌운동“ 1면 톱기사
 
지난 5월31일 제헌국회 개회 초기에 정해놓은 ’정부수립 기념식‘(8.15 건국 선포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8월13일,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또 한 번 1면 머리기사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국회 휴회를 이용하여 헌법개정운동이 맹렬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 운동에 찬성자는 12일 현재 약 100여명에 도달하였다고 하는데, 앞으로 속개되는 국회에서 이 헌법개정이 과연 될 것인지, 또 3세력이 어떠한 논법을 전개할 것인가 극히 주목을 끌고 있다.」
 
거리에는 5천년만의 자유국가 탄생을 반기는 축제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그 무렵, 국회에서는 국가탄생을 코 앞에 두고 개헌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톱뉴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한민당 기관지격인 [동아일보]의 보도는 김성수의 한민당이 벌이는 개헌 캠페인이다. ’시시비비주의‘를 선언한 한민당은 거의 날마다 서울 계동(桂洞) 김성수의 저택에 모여 ’집권의 꿈‘을 불사르고 있었다. 워낙 ’내각제‘의 헌법을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로 양보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 공포시행한지 한 달도 안된 건국헌법을 다시금 ’내각제‘로 환원하는 개헌운동을 은밀하게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의 권력욕망을 어찌 할 것인가. 정부수립 전부터 6.25전쟁 중 부산 피난수도에 가서까지 멈출 줄 몰랐던 개헌 열병은 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때 김성수의 손을 잡았던 미국이 손을 놓고서야 끝나게 된다. 
민족지를 자처한 [동아일보]의 ’독재자 이승만 규탄‘ 보도 역시 이승만이 자진하야 할 때까지 12년간 줄기차게 불을 뿜었고, 그후 60여년간 [동아일보] 지면에선 ’이승만‘이란 이름 석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웬일인가. 2023년 지금, 이승만기념관 건립운동이 시작되자 [동아일보]가 달라졌다. 세상 참 많이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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