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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_두번째

醉月 2023. 6. 29. 16:41

이승만 건국사(26) 김구에게 ‘선전포고 하라’ 지시...소련 간첩과 대결

이승만은 바쁘다. 
자신이 [JAPAN INSIDE OUT]에서 경고한 ‘산불’이 마침내 갈망하던 ‘미-일전쟁’으로 폭발하자 흥분하여 동분서주한다. 이제 워싱턴에서 새로운 전쟁국면에 전략전술을 구사해야하는 임시정부의 ‘전시대통령’이 된 셈이다.
 
★이승만, 김구에게 ‘대일 선전포고 하라’ 급전
 
루즈벨트가 의회에서 참전법을 통과시키고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중경의 임시정부 김구에게 급전을 날린다. “임시정부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미국에 모든 협조를 하겠다는 성명을 만들어 나에게 보내 달라.” 이것은 미일전쟁을 예상한 이승만이 진작부터 생각해둔 계획이다. 반드시 미국과 연합국이 되어 일본과 싸워야만 임시정부의 당당한 독립권리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김구는 12월10일자로 대일선전성명을 발표하였고 외교부장 조소앙이 루즈벨트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성명서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7, 연세대한국연구소,2009)
★진주만 기습 이튿날 이승만은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 패디스(Charles Faddis) 의원을 방문, 한국독립과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제기해달라고 요청했다. 패디스는 국무장관 헐에게 곧바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미국무부를 찾아가, ‘한국인은 일본인이 아니다’라며 일본인으로 몰려 공경에 빠진 한국인들을 ‘반(反)일본인’(Anti-Japanese)으로 인정, ‘한국인’으로 대우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왜냐하면 각 주정부들이 한국교민들을 적국 일본국민으로 간주, 은행계좌를 동결하고 사업 중지명령을 내려서 동포들이 하루아침에 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드골의 ‘자유프랑스운동’과 같다“ 승인 요청
 
이승만은 조소앙의 성명을 미국정부에 제출하고, ”중경의 임시정부는 프랑스 드골(Charles de Gaulle)의 망명 자유프랑스운동(Free France Movement)와 같다“면서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우리 광복군이 미국의 전쟁을 적극 협력할 것이니 미국이 한인병력을 활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무부 정치고문 혼벡(Stanley K. Hornbeck)에게 청원서를 내고 루즈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에게 전해주도록 부탁했다. (이승만이 호스킨스에게 보낸 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20, 주미외교위원부, 2007].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때맞춰 보내게 했다.

▲ 이승만이 독립운동기간 주고받은 방대한 영문서한과 전문들을 영인출간한 책 표지. 전8권중 제7권.(연세대 한국학연구소 발행,2009)

◆무장투쟁 선언...”폭력이 아니라 전쟁의 신성한 의무”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장 이름으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포서’(公布書)를 발표한다.
“미일충돌이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전쟁이 돌발한 이상에는 미국이 반드시 승리해야만 합니다. 세계 인류의 희망이 달렸으니까. 동경 베를린 로마에서 미친개 같이 난폭한 저 전체주의자들이 꽁꽁 묶어놓은 세계인들을 해방해야 하겠으니까....(중략)....동포 제군은 이 때에 행할 신성한 의무가 여러가지이니, 일본인의 군기창을 폭파시키고 왜적의 철도를 파괴하며 일군의 통행 도로에 폭탄을 묻고, 무장한 일본인은 보는대로 포살하며, 여러 가지 사보타주 방법과 폭력으로 왜적들의 전쟁 설비를 방해하고 부수며, 사나운 맹호들같이 제군은 동서호응 남북약진하야 적을 습격 박멸하고...”([신한민보]1941.12.25)
평시의 일회용 폭력투쟁을 배격해 왔던 외교독립운동가 이승만에게 이것은 적이 도발한 전쟁인고로 결사적 항전은 ‘신성한 의무’가 된 것이었다. 
진작부터 전쟁임박을 감지한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 도노반(William J. Donovan)이 수장이 되어 갓 출범한 미국 정보조정국(COI:Office of Coordination of Information)의 비밀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COI의 제2인자 굿펠로(Preston M. Goofellow)와 친분을 맺고 있었던 이승만은 자신의 책 [JAPAN INSIDE OUT]을 주고, 한국인들의 대일작전 활용방안에 대하여 논의를 시작한 참이었다. COI는 다음해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전략사무국)으로 개편된다.

▲ 미국무부의 실세 고위관리 소련간첩 알저 히스. 왼쪽사진은 부부.(자료사진)

 
◆미국무부의 소련 간첩 알저 히스, 임정 승인 반대
 
미-일전쟁 발발 한 달도 안돼 1942년 1월1일 26개 연합국 공동 선언(Declaration by United Nations)이 나왔다. “연합국의 모든 자원을 전쟁에 사용할 것과, 추축국인 나치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제국과는 각국이 단독으로 휴전하거나 강화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서 ‘대서양 헌장’과 함께 유엔 창설의 기초가 된 선언이다. 26개국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망명정부들도 참여 서명하였다. 이미 미국무부에 한국도 참여시켜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이승만은 이를 보자 격분, 미국무부 혼백에게 달려갔다.
이승만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고 미군에 편입시켜주면 일본을 잘 아는 한국군대가 파괴공작과 게릴라 활동에 자신 있음을 자세히 설명하며 ‘무기 대여법’을 적용하여 군사지원을 해달라고 다시금 역설하였다. . 
그때 혼벡의 보좌역 히스(Alger Hiss,1904~1996)가 불쑥 나섰다.
”그 제안은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한 것이므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없다. 현 단계에서 미국이 한국정부의 독립을 승인하면 북아시아에 이해관계가 큰 소련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이가 없는 이승만은 막강한 힘을 가진 젊은 미국 관리를 설득하려 시도하였다.
제정 러시아 때부터 소련이 시베리아 남쪽의 부동항(不凍港)을 한반도에서 확보하려고 지난 반세기 넘게 호시탐탐해 왔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미국이 미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치를 해 놓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틀림없이 소련이 먼저 한반도를 점령하고 말 것“이라며 그 이유를 이승만이 설명해 나갔다.
그러자 히스가 말을 잘랐다. 현재 미국의 중요한 전시(戰時)동맹국을 공격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앉아 있기 곤란하다면서, ”소련이 아직 대일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이는 히스였다.
이승만은 그때 미국무부의 실세 관리가 미국이 아닌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술회한다. (Rober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60)
 
★루즈벨트 정부에서 암약하는 소련 간첩 200여명...매카시 선풍
 
알저 히스 부부는 소련 간첩이었다. 
특이한 것은 당시 미국에 들끓던 소련 간첩들이 소련의 유혹이나 협박이나 돈이나 약점 때문에 간첩행위를 했다기보다는 레닌 혁명이후 세계를 휩쓴 공산주의 열풍이 만들어낸 이념적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재무부 차관보 화이트(Harry D. White),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무보좌관 커리(Lauchlin Currie), 국무부 라틴아메리카 국장 비서 리(Duncan Lee)등 수십명의 간첩들이 미국 정부 곳곳에서 활약했다. 극비의 원자탄 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1941~1946) 팀에도 간첩들이 과학자로 위장 취업, 기밀을 빼내 소련의 뒤늦은 원자탄 개발을 앞당길 정도였다. 
미군의 ’베노나(Venona) 프로젝트‘가 암호 해독으로 밝혀낸 간첩만 200명이 넘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히스를 간첩으로 지목하는 경고도 무시하고 특유의 친소주의에 집착, 보란 듯이 그를 총애하였다. 같은 무렵 소련간첩에서 전향한 위터커 챔버스(주간지 [타임] 국제부장)이 히스의 범죄 증거를 폭로하고 FBI가 수사해도 루즈벨트는 외면하였다. 
특히 1944년 전후처리를 위한 얄타회담에 히스를 데려가 소련 스탈린과의 협상에 임하였고, 루즈벨트의 야심작 유엔 창설의 주무를 맡겨 사무총장을 시켰으며, 국제금육기구 IMF 설립까지 담당시켰다. 
뒷날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Joseph R. McCarthy,1908~1957)가 ”미국무부는 간첩의 소굴, 내손엔 205명의 명단이 있다“며 공개 고발하면서 덜미를 잡힌 히스는 하버드 출신 변호사답게 법망을 빠져나가 겨우 위증죄 44개월 징역으로 석방된다. 진보세력(liberals)의 ’매카시즘‘ 역공 분위기를 이용, 적반하장의 반론을 펴며 92세까지 살았다. 중국의 공산화(1949)와 소련의 핵실험 성공 등 ’적색공포‘ 속에서 ’간첩청소‘의 깃발을 들었던 매카시가 일찍 타계하자 좌파의 공세는 ’말 없는 죽은 자‘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키고 말았다.  
 

▲ 미국정부에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기 위해 개최한 한미협회 모임(1944).ⓒ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의 ’문서투쟁‘...’한미협회‘ 미국 지도층은 ‘자유의 동지’들  
 
포기를 모르는 이승만은 히스를 만난 1주일 후 한미협회의 이름으로 ’한국상황‘(The Korean Situation)이란 장문의 보고서를 국무장관 헐에게 직접 보내 본격적인 ’문서 투쟁‘을 병행한다. 
이승만의 ’미국친구‘들로 구성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는 이사장에 미국의회 상원의 원목(Senate Chaplain) 해리스(Frederick B. Harris, 1883~1970)목사, 회장에 전 캐나다 대사 크롬웰(James H. Cromwell), 서기 파머(James W.Farmer), 재무 윌리암스(Jay J. Willams), 법률고문 스태거스(John W.Staggers)등 이사 8명, 전국위원회는 위원장에 상원의원 페퍼(Claude Peffer) 등 36명으로 구성한다.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비롯한 이들의 직업은 외교관, 대학총장과 교수들, 작가 등 문화인, 현직군인 등으로 박사만 15명이나 된다. 한국인은 이승만 혼자뿐, 중국의 유명한 작가 임어당(林語堂,Lin Yutang)과 중국군 대령 예첸 박사를 빼고 전원 미국인 지도층 인사들이다. 이승만이 그동안 미국에서 엘리트층에 쌓아온 인맥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사장 해리스 목사는 청년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대학 시절부터 다녔던 파운드리 감리 교회(Foundry Methodist Church)의 담임목사, 백악관 인근의 교회는 루즈벨트와 트루먼 등 역대 대통령뿐만 아니라 미국 각계각층 지도층의 단골 교회였다. 
특히 해리스는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이 즉시 참전하도록 트루먼 대통령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INS 통신사를 운영하던 윌리엄스는 홍보 선전을 대행하고, 변호사 스태거스와 함께 법무부와 국무부에 이승만의 대리인(agent)으로 등록, 무보수로 이승만을 지원하였고, 건국이후까지 이승만을 국제적으로 대변해주었다. 한미협회 사무실도 스태거스의 소유 콜로라도 빌딩에 입주, 무료로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직접 물심양면을 바쳐 발로 뛴 이 미국지도자들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이 ’한국상황‘에 써 보낸 청원의 요지는 너무나 뜨겁기만 하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는 1882년에 체결된 수호 및 상호방위조약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이 조약은 한국 황제에게 서방 세계와의 무역을 위한 문호개방을 권고했던 미국 해군제독의 요청에 따라 우리 국무부가가 체결했던 것입니다. 이 조약은 1883년에 미연방의회 상원에서 비준된 이래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공동의 적인 일본과 싸우고 있다고 강조한 미국인들은 임정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3.1운동의 지도자‘임을 강조하면서 루즈벨트의 결심을 촉구한다.
”미국 시민들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도력 아래 이 나라(미국)가 외국(한국)과 맺은 조약의 신성한 의무를 준수하는 도덕성을 회복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미국의 승인을 받게 되면 2,300만 한국인들은 항일전에서 미국의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승만의 지론 ’미국 도덕성의 회복‘이란 문구는 미일전쟁에서 한국군을 앞장세워 일본을 격파함으로써 미국이 과거의 죄악 ’배신‘을 속죄하라는 의미, 이 점을 수없이 되풀이 상기시키는 심리전 전술이었다.
 

▲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호텔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 참석자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라파예트 호텔 ’한인자유대회‘
   오로지 ”한국 승인 & 무기지원“ 요구
 
’문서투쟁‘과 ’집회투쟁‘ & ’거리투쟁‘---이것은 23세 이승만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때부터 익숙한 ’운동의 기본‘이다. 1898년 스스로 일간지를 두 개나 창간하여 고종황제를 입체 공격했던 그는 이번에 워싱턴에서 루즈벨트를 향하여 본격적인 전방위 투쟁에 나섰다.
영문저술 [JAPAN INSIDE OUT]을 백악관과 정부와 군부에 배포하고 끊임없는 편지와 문서 전달, 그리고서 미국 독립운동사에 유명한 라파예트(Lafayette) 호텔에서 한인 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한다. 
라파예트 장군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스스로 뛰어들어 공을 세워 ’신대륙의 영웅‘이란 호칭을 받았고 프랑스혁명에도 참여한 ’자유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를 기념하는 라파예트 광장은 백악관 대통령의 공원이며, 거기 라파예트 호텔 미러 룸(mirror room)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어야 하는 것이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다목적 노림수이다. 미러 룸은 1918년 폴란드 독립대회가 열렸던 사실로 유명해진 곳이었기에 그런 곳에서 이번 한인자유대회도 3.1독립운동 23주년 기념 대회로 열었던 것이다.
 
윈크스(WINX) 방송국이 중계한 회의는 2월27일부터 사흘간 한인대표 100명, 미국인사 100명이 참석하여 열띈 연설을 이어갔다. 마지막 날 3월1일에는 ’3.1독립선언서‘를 장석윤(張錫潤,1904~2004)이 낭독하고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뒤 이승만의 만세3창으로 막을 내린다. ([한인자유대회 회의록] 재미한민족연합회, 1942) 
개회사를 비롯, 여러번 발언한 이승만 연설의 주요 대목을 보자.
 
★우리는 1919년 혁명을 엄숙하게 기념하고, 독립선언을 재확인하고, 지난 23년간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자유를 찾기 위해 모였습니다. 압제자는 자유를 구속할 수 있을뿐, 자유를 말살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늘 대회의 목적은 미국정부에게 23년간 존속해온 우리의 정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고문당한 애국자들이 말합니다. 일본은 인류의 적입니다. 
★한국인들이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아무런 해결방안도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이 지어낸 모함이요 거짓선전입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거짓의 뿌리를 뽑아버립시다.
★지금 애쓰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면 당연히 승인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오도된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맙시다. 영국 처칠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벌써부터 처칠을 싫어했다. 영국 식민지 해방을 늘 반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의 독립을 회복시켜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하며, 싸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동지 여러분!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등하는 여론의 물결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재산과 피와 땀을 희생해서라도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내야 한다는 이 위대한 나라 미국의 여론입니다. 그것은 홍수와 같은 자유의 물결입니다. 
한국인의 슬픔의 눈물은 끝났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물결은 해안에 밀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승리의 해안으로!
 
▶소련에도 무기를 제공하는 ’무기 대여법‘에 따라 미국정부가 한인부대도 무장시켜주면 한반도내 일본군 진지와 보급로를 폭파할 것이며, 그러려면 임시정부의 승인을 빨리 해달라고 외치는 이승만의 옷 주머니에는 철도 터널등 폭파지점을 표시해둔 한반도 지도가 들어있었다

이승만 건국사(27) ”나는 이승만입니다. 생명의 소식, 자유의 소식입니다“

이승만, 6월13일부터 7월까지 단파방송
 
1942년 1월 한미협회를 결성하면서 이사장 해리스 목사(미국상원 원목)등 대표3명은 미국 전쟁부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 장관에게 ”이승만과 2,300만 한국인들을 대일전쟁에 활용해달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한시간 ,일분 일초가 아쉽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가 한국인들에게 울려퍼지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지에는 이승만이 참여한 미국 정보국(COI)과 이미 합의한 대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방송할 단파방송 연설문 등 참고문견들을 동봉하였다.
 
드디어 D-데이가 정해졌다. COI의 요청에 따라 개국한지 얼마 안되는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에 방송하게 되었다.
 ‘미국의 소리’는 한국에 갔다가 미국간첩 혐의로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선교사 쿤스(Eewin W. Koons, 한국명 君芮彬)가 한국어 방송 감독을 맡았다. (유병은 [단파방송연락운동:일제하 경성방송국] KBS문화사업단, 1991.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5권, 앞의 책)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천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을 듣난 이는 잘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허랴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천3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학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충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1942년 6월13일, 단파방송 전파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전해지는 이승만의 목소리는 ‘드디어 일본을 물리친다는 67세 독립운동가’의 흥분과 감회에 떨렸지만 어느 때보다 힘차게 울렸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라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楊楊自得:뜻을 이루었다고 뽐냄)하야 왼 세상이 다 저의 것이으로 알지만은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여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원봉,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에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중략)....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임시정부 승인을 방해하고 있는 한길수나 김원봉 연계세력을 의식하여 임시정부의 좌파 김원봉까지 거론하며 ‘일치단결’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제작)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수 있난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장군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적을 물리친 역사를 열거하는 이승만은 자신의 미주 외교위원부의 활동도 소개하며 동포들의 분발을 열정적으로 호소한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미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여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3백만 동포여!” 
 
절절한 호소와 투지를 뿜는 이승만 목소리는 지금 녹음테이프로 들어도 소름이 돋을 만큼.
그 열렬한 유성의 진정성과 선전선동의 마디마디가 너무나 리얼하게 심장에 꽂힌다. 
특히 ‘자유의 기초’ ‘자유의 회복’을 강조하는 의미를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들었으면 좋겠다. 
 
일본 총독부는 이미 그해 4월에 국내 방송전파관제를 일제히 실시, 미국선교사등 모든 외국인의 단파수신기도 압수하였으나 일부 선교사들은 숨겨놓은 수신기로 이승만의 방송을 들었다.
그들은 한국 기독교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일일이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그때부터 7월까지 여러 차례 우리말과 영어로 방송하였다. 
이를 몰래 듣는 한국인들을 검거하는 일본 당국은 외국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방송 뉴스를 전해주어야 할 신문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에 이미 폐간되어 있었다.
 
◆OSS ‘한미 연합작전’ 시도...한인들이 방해...좌절
 
“싸워라, 동포여!”를 외치는 이승만은 스스로 만든 ‘한반도 일본군시설 파괴 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전쟁에 한인 무장부대가 참전하여 미국과 함께 승전국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서 한국의 독립국 지위를 획득하는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세계1차대전후 파리강화회의 결과를 잘 아는 국제정치 박사 이승만은 그때 거부당한 미국의 협력을 얻는 길은 합동군사작전 밖에 없다. 
이승만은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 전략을 위해 한미협회등 미국인 네크워크와 개인 인맥을 풀가동한다. 
 
★미국 전략첩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서 이승만에게 한국인 청년 50명을 추천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미 이승만은 정보조정국COI(OSS 전신)에 장석윤(건국후 내무장관)을 추천하여 장석윤은 일본군이 점령한 버마 밀림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때였다. 
이승만은 OSS의 요청에 신이 났다. 그동안 이승만은 한인청년60명으로 ‘한인자유부대’(Free Korean Legion)를 편성하여 특수 훈련을 시킨 후 한국과 일본 점령지에 파견해달라고 집요하게 물밑작업을 벌인 결과, 드디어 미국이 호응한 것이다. 즉, “왜적은 반드시 한국 손으로 물리치자”하며 한미 군사엽합작전을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이승만의 집념 때문이다. 
 
그 비밀 로비의 네트워크는 OSS 최고책임자 도노반(William J. Donnovan) 아래 게일(Esson M. Gale), 그리고 친분 깊은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이다. 게일은 청년 이승만의 멘토이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1863~1936)의 조카였다. 20대 아승만의 계몽운동을 적극 도와주고 옥중 뒷바리지며 미국 유학 추천서와 세례 받을 목사까지 정해준 게일은 한국최초로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천로역정’을 번역하며 한글을 비롯한 각종 문화개선에 헌신한 한국의 은인이다. 
이승만의 화려한 인맥은 이처럼 어디서나 구세주로 나타난다.
 
OSS는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가운데 12명을 선발,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당초 계획보다 크게 축소되었으나 대일전쟁에 한인들을 활용하자는 방침이 정해짐에 따라 ‘한국인 게릴라부대’를 창설하기로 정해진 것이다. 이승만의 ‘한미군사동맹’ 실험의 꿈이 빛을 보게 되었다.
12명중에는 대한민국 건국후 이승만이 각료로 기용한 사람들도 여럿이다. 
장석윤이 내무장관을 역임한 것을 비롯하여, 장기영 (체신장관 역임), 이순용 (내무장관 역임), 김길준 (미군정장관 공보고문 역임), 한표욱 (주미공사 역임) 등 모두 이승만이 조직한 한인동지회 청년들이었다. 
 

▲ OSS 훈련장, LA 앞바다 카탈리나 섬ⓒ월간조선

★한인들이 미군에 투서, 다 된 밥에 재뿌리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한인자유부대 편성을 위해 ‘무기대여법’을 적용하여 무장시켜달라는 이승만의 끈질긴 요구는 막강한 장애물을 만났다. 무기대여법을 적용하여 원조를 하려면 ‘임시정부 승인’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걸고넘어지는 게 아닌가. 
좌우진영을 넘나들며 이승만을 방해하는 한길수(韓吉洙)와 흥사단 등 서북파 교민단체, 그들의 투서에 OSS내부 조사분석과 매큔(George M. McCune)은 이승만의 한인자유부대 편성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매큔은 좌성향인지라 한인 좌파에 동정적이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5권, 앞의 책).
 
이승만은 급해졌다.
“친애하는 대령, 나는 정적들이 한인뿐만 아니라 나의 평판을 떨어뜨릴 언행을 일삼는 미국인들 사이에도 많다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있으면 그 잘못을 시정하거나 그 오류를 반증할 기회를 갖도록 꼭 알려달라는 말입니다.”(이승만이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 1943.2.9.)
 
굿펠로가 나섰다. 그는 “미국정부 기관들이 각기 다른 한인들을 통하여 한국문제를 다루어왔기 때문에 꼬였다”면서 한길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계속 추진하는 것이 한인 파벌들을 결속시킬 것”이라고 옹호론을 폈다. 이승만과 둘이서 한인부대편성을 추진해온 데블린 소령도 공감하였다. 한편 미국 정보기관들의 실무자 회의에서는 “한길수는 배제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승만은 헐(Hull)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고, 다음날엔 스팀슨(Stimson) 전쟁부장관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들의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은 굿펠로에게 부탁하여 정보참모부에 재촉하는 비망록을 보냈다. 헐 장관에게 면담 요청을 하자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다급한 이승만은 전쟁부 매클로이(John J. McCLoy) 차관보에게 전보를 쳤다.
“한국인들은 일본말을 할줄 말고 쓸줄 알며 일본인으로 통할 수 있다. 그들은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증오하는 민족입니다. 미국에서 성장하고 훈련받은 한인부대는 미군 또는 연합군에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줄수 있습니다.” (이승만이 매클로이에게 보낸 전보, 1943.3.16.)
 
매클로이의 답장이 왔다. “귀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였다.
이유는 미국내 한인청년들의 숫자가 부족하므로 한국인 대대 편성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다만 개인적으로 입대한다면 정보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미국의 대일군사전략이 바뀌었다. 이승만의 주미외교부나 김구의 임시정부를 거치지 않고 소규모의 한국인들을 직접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냅코작전(NAPKO Project)과 독수리작전 (Eagle Project)을 미국과 중국에서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냅코작전은 재미한인과 전쟁포로를, 독수리작전은 중국내 광복군과 일군 탈출 학도병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훈련을 마치고 중경으로 파견 예정이던 한인청년 9명은 주저앉았다. 그러나 미네소타주 소재 군사정보단 언어학교(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Language School)이 이승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한인계 미군부대를 편성하니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승만은 대기중인 9명을 포함 30명의 명단을 보냈다. 
OSS의 새로운 작전에 따라 중국내 임시정부 휘하의 한인선발 업무가 시작된다. 이에 버마 전선에서 첩보활동 중인 OSS대원 장석윤이 중국으로 들어가 김구와 조소앙을 돕는다. 
 
★일본과 싸우는 ‘한미연합 군사작전’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은 너무나 강했다. 
‘무기 대여법’ 원조관리처에 편지를 보내, 한인부대 청설 자금 50만 달러를 요청한다. 미국내 및 중경 임시정부 산하에서 500~1,000명의 부대를 조직 활용하겠다는 계획서를 첨부했다.
원조관리처는 전쟁부에 떠넘겼다. 이승만은 전쟁부 장관에게 또 편지와 계획서를 보냈다, 전쟁부는 중국 관련은 중국 대사관에 내라고 했다. 이승만은 중국무관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호의적으로 검토하겠다며 귀국하였다.
이번에는 합동참모본부 의장 마셜(Geoge D. Marshall)에게 같은 계획서를 보냈다. 이를 검토한 일본정보 담당 관리는 ‘한국승인은 안된다“고 냉혹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그 계획서를 보냈다. 일주일이 넘어도 답이 없자 독촉 전보를 또 쳤다. (방선주 [미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1993)   

이승만 건국사(28) 카이로 선언 ‘한국독립’ 조항에 얽힌 비밀

김구의 요청을 장제스가 실행? NO!장제스는 전후 한반도 재점령을 요구했다

루즈벨트, 이승만에게 직접 '답장' 보내

▲ 카이로회담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 부인 송미령.(왼쪽부터). 영어 잘하는 미인 송미령은 국제외교에서 남편 대역을 많이 했다.(자료사진)

왜? 유독 한국만 콕 찍어 '독립 보장'하였는가?
 
강대국 국제회담에서 세계 3거두가 ‘한국 독립’을 최초로 공개 선언 보장한 카이로회담, 한국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943년 11월22일부터 26일까지 카이로 근교 메나 하우스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중국 장제스가 비밀회의를 열고 일본 패망 후 영토처리를 논의한 합의문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을 12월2일 발표하자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환호하면서 분노하였다. 
환호는 ‘한국 독립’이 보장되었다는 기쁨 때문이오, 분노는 ‘적당한 시기’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정식 의제도 아니었던 ‘한국 독립’이 명문화되고 문제의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가 삽입된 과정과 배후의 흑막을 들여다보자.
 
「...위의 3대국은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 영어원문은 아래와 같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먼저 ‘환호’쪽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중경의 임정 김구는 신문보도로 ‘기쁜 뉴스’를 보자 회의를 중단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즉시 등사판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호외를 쩍어 동포에게 돌리고 카이로선언 축하 집회를 열자고 서둘렀다.
김구는 자신과 임정간부들이 7월26일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을 직접 만났을 때 “임정을 승인해주고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장제스가 넉달 뒤 11월 카이로회담에 가서 반영해주었다고 판단해 의기양양해졌던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지금에도 일부 국내 학자들은 김구와 같은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이 그 증거로 제시하는 자료 중에 장제스가 카이로회담 중에 쓴 일기에 ‘한국 독립’ 네 글자 메모가 적혀있고, 국민당 비서장 왕총혜(王寵惠)가 정리한 회담 요지 10개항 중에 ‘장 총통은 한국에 독립을 부여할 필요성 강조했다’란 기록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참 단순한 사람들이다. 카이로 회담을 첨부터 추진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록은 쳐다보지도 않는가? 
 
더구나 장제스는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15일, 김구가 “이제라도 임정을 승인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끝내 거부한 사람이다. 

▲ 루즈벨트의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the most trusted advisor)로 유명한 해리 홉킨스(오른쪽).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대화하는 모습.(자료사진)

◆루즈벨트, 2월부터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방송
 
 
1943년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9개월 전, 미국대통령 F. 루즈벨트는 2월23일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 탄생일을 기념하여 전국중계 라디오 연설을 했다. 미일전쟁 설명 중 “일본의 가혹한 압제에 한국 국민이 당하는 노예상태”를 적시하며 처음 ‘한국’을 공개거론,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남다른 동정심을 드러내 전후처리 구상의 일단을 밝힌 것이었다.. 
12월 발표된 카이로선언에 명문화된 그 말 ‘한국인민의 노예상태“(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라는 구절이 그때 이미 루즈벨트의 두뇌 메모리에 저장되어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방송을 듣던 이승만은 만세를 불렀다. 그토록 ‘임정 승인-무기지원’을 갈구해도 국무부는 외면하는데 뜻밖에 대통령의 입에서 ‘가혹한 압제를 당하는 한국인“이란 말이 공개방송으로 나오다니...!
2년전 이승만이 자신의 저서 [JAPAN INSIDE OUT]를 보내고 ’한인자유부대 편성‘ 계획서도 보내고 편지도 보냈던 루즈벨트, 그가 그것들을 다 읽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이승만은 눈앞에 검은 장막이 걷히는 듯 환하게 밝아졌다. 그때 이승만이 무엇을 했는지 기록은 없다. 
나흘 뒤 2월 27일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호텔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개회사를 시작한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부터 했다. 
”오랜 기간 미국 관리들의 연설 가운데 미국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처음 ’한국‘이 언급된 연설이며, 우리에게는 가장 고무적인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미협회 이사장 해리스 목사, 변호사 스태거스, 언론인 윌리암스의 연명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장문의 친서를 보냈다. 한국 독립과 관련된 조치들, 임정 스인과 무기대여법에 따른 한인부대 창설문제다. 
”...지금이야 말로 미국이 지난 38년동안 한국민에 대하여 저지른 잘못과 부정의를 시정할 때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중략)....진주만 사건 이후 우리는 미국무부를 향해 역사상 가장 오래 존석한 망명정부인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우리가 받은 대답은 아주 대수롭지 않은 변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소련이 종전후 한국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할 것이라는 보고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가 근거없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는 40년 전에 미국이 우려했던 러시아의 극동진출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실해야 할 것입니다.
대일전쟁에 박차를 가하고 나아가 태평양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간청하는 바,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우리의 공동의 적 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들의 몫을 감당함으로써 미국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수 있도록 원조와 격려를 베풀어 주기시를 바랍니다.“
 
이승만은 이 서한을 비서 임병직이 들고 백악관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오랜 측근실세 홉킨스(Harry L. Hopkins)에게 직접 전달하여 접수시켰다. 

▲ 미극대통령 F.루즈벨트와 독립운동가 이승만.ⓒ뉴데일리DB

◆루즈벨트, 이승만 편지에 직접 ’답장‘ 보내다
 
놀랍게도 루즈벨트와 홉킨스는 5월26일 의미심장한 ’접수 통보‘를 보내왔다.
루즈벨트가 비서실장 왓슨(Edwin M. Watson) 소장의 명의로 이승만에게 보낸 메시지 내용은 이렇다.
 
”친애하는 이 박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나는 귀하의 서한을 잘 접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서한이 ’섬세한 주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섬세한 주의‘를 받았다는 말—-어찌 이번 서한만이랴, 그동안 루즈벨트와 홉킨스는 이승만이 보낸 책이나 여러 서한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말이 나올 것인가. 이승만이 제기하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오랜 검토 끝에 생긴 결심이 있기에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공식문서로써 이승만에게 알려주는 말이었다. 
이로써 카이로 선언문의 ’한국독립‘ 문구는 이때 이미 정해진 바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연구의 선구 유역익 교수도 이승만의 고품격 편지가 루즈벨트와 홉킨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조항을 넣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평가한다.(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이승만은 두 차례 더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낸다. 8월29일 캐나다 퀘벡에서 루즈벨트가 처칠을 불러 회담할 때, 전후처리 문제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한미협회의 해리스 목사에 이어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무어(John Z. Moore) 목사로 하여금 서한을 보내도록 했다.
이처럼 유력한 목사들을 동원하는 이유는 루즈벨트와 홉킨스가 대통령과 특별보좌관이란 관계를 넘어 기독교 신앙으로 뭉쳐진 동지임을 이승만이 알기 때문이다. 

▲ 3국 수뇌가 회담한 카이로 근교의 메나 하우스. ⓒ조선일보DB

◆루즈벨트 ”장제스는 한반도 재점령을 원한다“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11월22일부터 26일까지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가 회담을 시작한다.
워낙 장제스는 소련 스탈린이 반대하여 제외시켰는데 스탈린이 불참하겠다하여 다시 부른 사람이다. 스탈린은 이란 테헤란에서 중국 장제스 없이 3국만 만나기로 했다.
 
처음부터 한국독립문제가 카이로 회담의 정식 의제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1월 카사블랑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독일-일본 이탈리아 추축국엔 타협 없는 전면전과 무조건 항복“에 합의한 뒤, 루즈벨트는 전후 외교정책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 on Post-War Foreign Policy)를 구성, 무기대여법 등으로 강화된 미국의 국제적 주도권을 확립할 전후구상을 설계한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 ’국제신탁통치제도‘이다. 여기서 작성된 ’한국 독립문제‘ 보고서에 ’신탁통치‘가 들어갔다. 
이 방침을 루즈벨트가 중국 장제스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방미하였을 때 처음 알려주었다. 이를 송미령이 장제스에게 전한 것이 6월26일이다. (일본 산케이신문사 [장개석 총통-14-일본항복] 1977. 손세일 앞의 책)
 
이런 상황에서 7월26일 장제스는 김구 일행과 면담한 것이었다. 그것은 윤봉길 의거후 남경에서 만난 이래 11년 만이다. 조소앙은 뉴스에서 본 ’신탁통치‘에 관해 질문하며 한국 독립주장이 관철되도록 중국이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영국과 미국에서 논의하는 문제“라고 신탁통치에 대한 대답을 피하면서 ”한국진영 내부의 단결을 되풀이 강조“하였다고 중국측 기록에 보인다.
임정 기록은 임시정부 승인, 광복군 행동준승 개정, 경제상 원조를 요구하였다고 써있다.
그러니까, 이날 만남에서 장제스는 ’한국 독립문제‘에 확언을 안했고, 임정 측은 카이로회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을 요구한 것이 없는 셈이다.
 
★루즈벨트, 장제스와 처음 대면...”중국의 광범한 야욕“에 충격
장세스를 처음 만나는 루즈벨트는 단독대화의 시간을 마련한다.
카이로회담 다음날 저녁 7시30분터 11시까지 장시간 진행된 만찬에서 교환된 의견들은 중국측이 나중에 정리한 내용 뿐, 미국측은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뒷날 해제된 미국무부 극비문서(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엔 놀라운 대화내용이 드러난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는데 토의 내용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말했다. 중국은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한 야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It seemed that the Generalissimo had been well satisfied with the discussion held the previous day. There was no doubt that China had wide aspirations which included the re-occupation of Manchuria and Korea.(미국무성 비밀해제극비문서: The First Cairo Conference, p334. 정일화 [카이로 선언] 선한약속, 2010).)
중국측 기록엔 없는 내용이다.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인정‘한다면서 그것은 일본을 물러가면 만주도 되찾고 청일전쟁때 잃어버린 한반도를 되찾겠다는 의도를 루즈벨트에게 드러낸 ’광범한 야욕‘인 것으로 해석된다는 말이다. 미국무부의 공식기록이다.
이 문서엔 장제스가 경제안정문제, 주중 미군 유지비, 일본점령 도서 처리, 만주 대련항의  국제화, 청도의 비행장건설, 무기대여법 등이 토의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하나의 기록은 다음날 24일 루즈벨트가 처칠과 미영회담을 열었을 때의 발언이다. 즉, 장제스의 태도와 발언이 한국의 진정한 독립을 지지하기보다는 한국을 중국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면서 루즈벨트는 ”한반도와 만주전체를 재점령(re-occupation)하려한다“고 반복 발언하고 있다.

▲ 중국의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워싱턴 독립운동 지도자 이승만.ⓒ뉴데일리DB.

◆세번 고친 ‘in due course’...김구의 격분과 이승만의 전략 
 
카이로 선언문은 해리 홉킨스 단독 작품이다. 3국간 공동선언문 기초 팀도 없었다. 
루즈벨트가 지시하고 홉킨스가 혼자 썼다. 그것은 루즈벨트의 회담결과 처칠과 장제스의 내심이 루즈벨트의 ‘새로운 세계평화질서 구축의 철학’과 너무나 동떨어져 교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칠은 영국 식민지 독립을 우려하여 어떠한 ‘독립 명문화’도 싫어하였고, 장제스가 ‘광범한’ 영토야욕을 드러내지 않는가. 공동성명 공동작성은 포기해버렸다. 
기억력이 좋기로 정평이 난 홉킨스는 아무런 메모도 없이 코넬리우스(Albert M.Cornelous) 준위에게 선언문 초안을 금방 구술하여 금방 타이핑을 끝냈다. 그리고 곧 루즈벨트에게 제출한다. 그 초안의 ‘한국독립’ 부분을 홉킨스는 이렇게 만들었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de that that country,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초안에 필자가 밑줄 친 부분의 의미와 뉴앙스가 너무 다르다. 일본에 의한 배신적 노예상태란 표현, 그리고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해방 독립시킨다는 적극적 표현은 그때까지 루즈벨트와 홉킨스의 머리에 준비된 생각이므로 줄줄 흘러나왔던 것이다. 
‘treacherous’나 ‘enslavement’ 같은 용어는 국제정치문서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 종교적 언어로서, 전체주의 만행에 대한 신앙인 홉킨스의 인식체계를 말해주는 표현이며, 이승만이 ‘미국의 배신’을 거론하며 기독교적 도덕성 회복을 미국에게 환기시키는 그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초안을 한참 들여다 본 루즈벨트는 직접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를 ‘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하였다. ‘가장 빠른 시기’가 ‘적절한 시기’로 한참 뒷걸음질 쳤다.
3개국 실무자 회의는 예상대로 갈등을 거듭했다. 미국의 홉킨스와 주소련 대사 해리먼, 중국의 왕총혜, 영국 대표 이든(Eden)과 캐도건 사이의 말씨름은 마지막 날 오후까지 꽉 막혔다. 심지어 영국 대표는 ”한국 독립관련 조항 전체를 아예 삭제하자“고 덤볐다. 영국식민지들에 미칠 영향 때문에 ‘독립’이란 단어조차 없애자는 것이다. 
폐막이 다가오자 영국 처칠 수상이 자신의 수정안을 내놓았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유명한 ‘in due course’가 등장하였다.
홉킨스 초안에서 일본 국명 Japan 두 개가 삭제되고, 루즈벨트가 고친 ‘at the proper moment’ 대신에 처칠이 ‘in due course’로 고친 것, ‘적당한 절차를 거쳐’ 또는 ‘적당한 시기에’ 등으로 풀이되는 이 어구(語句)로 뒤바뀐 선언문은 11월27일 3거두가 서명하고, 그길로 이란 테헤란에 달려가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12월2일 발표되었다. 
홉킨스가 원했던 ‘한국의 가장 빠른 독립’의 꿈도 사라지고, ‘코걸이 귀걸이’로 모호하고 불투명한 카이로 선언의 ‘in due course’는 즉시 ‘신탁통치의 불‘을 지른다. 
 
◉장제스는 선언문에서 ’한반도를 빼고‘ 얻을 것을 다 얻었다. 청일전쟁때부터 일본에 빼앗겼던 대만, 만주, 팽호도 등을 반환받는다는 보장이 명문화 된 것이다. <선언 전문은 하단에>
 
★김구의 격분=카이로선언 축하 집회를 서두르던 김구는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란 
말이 신탁통치로 보여진다는 문제제기에 접하자 금방 분노하였다. 김구는 영어를 몰랐다.
”독립을 보장한다는 선언을 듣고 나의 유쾌함은 형언할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던 김구는 한국독립당 대표와 조선혁명당 대표를 미국 대사관에 보내 어구해석을 요구했다.
시원한 대답은 없고 분통 터지는 신문보도만 나온다. 로이터통신 기자는 「조선이 노예생활 50년이므로 자유를 학습하는 시기를 거쳐야 할 것이며, 중국이 다시 조선의 종주국이 되는 것을 응낙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김구는 취재하러 온 AP통신 기자에게 울분을 토한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통치할 능력을 가졌으며 다른 족속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고 노예로 삼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일본이 붕괴되는 그때에 독립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격정을 토로하는 김구는 과연 급변하는 새로운 국제정세를 알고나 있었는가? 
로이터 통신 기자가 ’중국이 또다시 조선의 종주국이 될 것‘이란 기사를 왜 썼는지 짐작이나 하겠는가? 분노만으론 아무 소용이 없다. 
김구 자신이나 임시정부 자체가 이미 ’다른 족속’ 중국 장제스의 통치와 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아니한가? 장제스가 왜 우리 임시정부에 거금을 투자하고 광복군을 틀어쥐겠는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장제스가 전후 한반도에 ‘친중정권-친중국가’를 세우려는 포석임은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런 추리 아니겠는가? 
 
★장세스의 계산=장제스는 카이로에서 ”중국군의 한반도 점령“을 꺼냈다가 루즈벨트가 소련의 대일참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신탁통치’ 참여를 제안하자 물러섰다. 그래서 소련군이 먼저 ‘일본땅 한반도’에 진군하면 중국군이 배제될까봐 신탁통치에 동의하였고, 루즈벨트가 패전후 일본영토 점령을 논의하자 ‘일본영토 한반도 점령’을 생각하며 신탁통치 일원으로 참여하기로 말한다.처칠도 장제스를 경계하였다. 일본이 물러가면 버마, 싱가포르, 말레이 같은 영국식민지를 장제스가 중국에 편입하려 한다고 경계하였다. (정일화, 앞의 책)
 
장제스는 그동안 김구가 ‘임정 승인’을 요청할 때 울물쭈물 했으며, 해방 날 8월15일 임시정부가 정부 승인과 중국군내 한인병사의 인수, 교민 보호와 귀국 알선, 경비 원조 등 6개항 요구에 대해서도 묵묵부답 하였다. 해방 한달 뒤 9월26일 ”임정을 승인 못하겠으면 비공식 과도정권으로라도 인정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김구의 간청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외면당했다. (선우진 ‘전환기의 내막-임시정부 귀국’, 조선일보, 1982)

▲ 오하이오주 애쉴랜드에서 임시정부 승인대회를 개최한 한미협회 지도부. 왼쪽부터 이승만, 한미협회 애쉴랜드 지회장 마이어스의 부인. 변호사 스태거스. 아메리칸 대학 총장 더글러스, 고종의 특사였던 홈버 헐버트, INS통신사주 윌리엄스.

◆ 이승만의 새로운 전략 ”우리 하기에 달렸다“
 
카이로 회담 이전에 벌써 루즈벨트의 전후처리 구상 ‘신탁통치’가 여기저기 보도되었다.
분노한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통신, 1943.11.18>에 ”모든 애국동포는 이 망언망설을 고치도록 항의편지를 보내자“고 주먹을 쥐었다. 
”반만년 금수강산을 잃은 것이 우리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요, 임금과 부패한 정부가 타국의 약조를 의뢰하다가 왜적의 간교수단에 빠져서 싸움도 할 여지가 없이 만들어 놓아, 전국이 눈 뜨고 도적맞은 것이요. 이때까지 참고 온 것은 미일전쟁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지 나의 노예라도 되어서 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미일전쟁이 왔은 즉 왜적은 결단나고야 말 터이니, 우리가 많은 피를 흘려서라도 완전독립을 회복하여 남의 보호나 지도를 의뢰하야 살려는 민족이 아닌 것을 세상에 표명하자.“
 
★위기마다 좌절보다 ‘희망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정치가 이승만
신탁통치설이 나돌 때부터 반대 캠페인을 벌이던 이승만은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침묵모드로 돌아섰다. 그리고 금방 밝은 표정이 되어 일어나 미정보국의 단파방송을 시작하였다.
 
”우리 삼천만 동포에게 나 이승만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기쁜 소식은 카이로회담의 결과입니다. 대한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다 하였으니 이는 3천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선언은 다만 우리의 길을 열었으니 앞길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국제정치 외교의 달인, 영어의 고수 이승만이 카이로선언문의 ’in due course(적당한 시기)‘를 왜 모르랴. 그 ’적당한 시기‘도 이제부터 우리의 책임이 되었다며 독립운동의 ’단결‘에 초점을 맞춘다. 그 시기의 짧고 긴 것이 ’우리 하기 나름‘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제 합동하야 외국에게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상당한 시기를 따라서‘ 독립을 얻게 한다는 구절이 심히 불만족하므로 우리 정부에서도 이미 선언하였나니......우리는 우리의 닫힌 길을 열어주는 것만 다행이라 할지니, 열린 길로 나아가 싸워서 독립을 찾고 못 찾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라. 누가 돕고 아니 돕는 것을 어찌 의뢰하리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20대 청년시절 서울거리 ’만민공동회‘ 투쟁 때 외쳤던 이승만은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합을 위한 한민족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대회 이름도 ’승인대회‘(Recognition Conference)로 부르기로 정하고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서신을 띄운다.
”카이로 선언은 어떤 강국도 한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지 못하도록 연합국이 보장해 놓은 것.....과거의 폐습을 고치지 않다가 연합국이 주는 ’금 같은 기회‘을 잃고 보면 동포들이 우리를 무엇이라 하겠느뇨. 지난 문제가 있었을 지라도 다 용서하야 잊어버리고, 카이로 대회가 주는 새 기회를 이용할만한 전 한족의 새 방침을 정하기로 주장하자. 
우리가 아직 잃은 강토만 못 찾았지 독립은 찾아놓은 민족이니, 우리 한인의 쾌활한 자유 기상과 열렬한 애국심을 드러냅시다!“
 
오하이오주 애쉴런드에서 1944년 1월21일부터 23일까지 미국인들이 주동이 되어 개최한 ’한인승인대회‘는 미국 전역 114개 라디오 방송국에서 중계하였다. 
”여러분은 제가 미국은 언제나 위기에서 그 영혼을 찾는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정화(淨化)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이 축복받은 땅에서 재생을 느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세계의 도덕적 사상과 정의의 지도자이를 기대합니다. 한때, 오래 전에, 여러분은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고 우리를 여라나라들과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주었습니다. 그때와 같은 손을 지금, 우리의 손이 여러분에게 뻗쳐뎌 있을 때에, 부디 뿌리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손세일, 앞의 책)
 
청도교가 세운 나라 미국의 청중들을 의식한 이승만의 신앙 깊은 연설은 미국을 독립시킨 청도교정신의 사명감을 불러오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미국독립 쟁취의 자유투사 정신으로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도 정화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이다.   
 
카이로 선언 全文
 
「각국 군사사절단은 몇 차례 회의 결과 일본군에 대한 장래의 군사작전에 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3대 연합국은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해상, 육상 공중 공격을 통하여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압력은 이미 증대되고 있다.
3대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징벌하기 위하여 현재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위 연합국은 자국을 위하여 이득을 요구하지 않으며, 또한 영토 확장의 의도도 없다. 위 연합국의 목적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일본이 탈취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일본으로부터 박탈하고, 아울어 만주, 대만, 팽호동와 같은 일본이 중국인들로부터 도취한 모든 영토를 중화민국에 반환하는데 있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모든 영토로부터 축축될 것이다. 위의 3대국은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위의 3대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연합국들과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는 데 필요한 엄중하고도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Final Text of the Communique’ FRUS, Conferences at Cairo and Teheran 1943. 정일화 [카이로선언] 앞의 책).   

이승만 건국사(29) 얄타회담-스탈린 음모...30분도 안걸린

‘한국 흥정‘

▲ 얄타의 위치(오른쪽 위 빨간풍선 표지). 미국에서 출발한 루즈벨트 대통령 함대는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로 들어와 왼쪽 아래 몰타(Malta)에 기착. 하룻밤 자고 비행기로 바꿔타고 크림반도에 도착, 자동차로 6시간 달려 얄타 회담장에 들어감. 휠체어를 탄 '환자' 루즈벨트는 직선거리 약 1만㎞를 여행하고 녹초가 되었다.(구글지도 캡처)

'냉전의 잉태' 얄타, 한반도 분단의 불씨 피우다
 
레닌이 혁명직후 한때 포기했던 유럽의 곡창 우크라이나,
2차대전까지 20여년간 반쯤은 외세 지배를 당했던 우크라이나,
스탈린이 점령한 뒤 40여년간 공산주의 식민지 우크라이나,
독립 20여년 만에 지금 다시 푸틴이 먹으려 덤비자 필사의 방어전을 벌이는 우크라이나, 그 기구한 운명의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 크림(Crimea)반도 남단 얄타(Yalta)에서 2차 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1945년 2월(4~11) 냉전시대를 열었다는 얄타회담, 미국 루즈벨트가 소련 스탈린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내주어 동유럽과 중국대륙과 한반도까지 “팔아먹었다”는 그 얄타로 다시 가보자.
 
★스탈린의 독무대...‘중환자’ 루즈벨트 장거리 여행시켜 ‘농락’
휠체어(wheel chair)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63세 대통령 루즈벨트, 1945년 1월20일 그는 연속 네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큰 아들 제임스에게 유언장을 남겼다. 
그리고 22일 밤, 수행원들을 데리고 방탄열차에 올라 워싱턴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 8시30분 미해군 중형 순양함 퀸시(USS Quincy)호는 뉴포트 뉴스(Newport News) 항을 출항, 휠체어를 탄 루즈벨트는 구축함 8척과 순양함 9척의 보호를 받으며 대서양을 건넌다. 그는 언제나처럼 최측근 홉킨스(Harry Hopkins)와, 부인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 대신 외동딸 애나 루즈벨트 베티커(Anna Roowsvelt Boettiger)를 동반하였다. 
1년2개월 전 카이로와 테헤란을 왕복한 장거리 여행을 했던 루즈벨트의 이번 목적지는 흑해연안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 ‘친구’로 만들어야 할 스탈린이 회담장소로 얄타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세르히 플로히 [얄타:8일간의 외교전쟁] 허승철 번역, 역사비평사, 2010)
 
스탈린은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처음 루즈벨트를 만났을 때 “이 친구 오래 못 살겠군” 직감하였다고 한다. 카이로 회담후 곧바로 테헤란에 온 휠체어의 미국 대통령은 지쳐있었다. 카이로 선언에 두 말 없이 찬성한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대일전쟁 참전을 요청하며 전후 한반도 신탁통치 이야기를 하자 흔쾌히 화답하면서, 부동항으로 부산(釜山)의 할양(割讓)을 떠보았다. 확답은 못 받았지만 거부도 없었다. 이번 얄타 회담에서 결심해야 할 문제이다. 
 
‘중환자’에 가까운 루즈벨트를 추운 겨울 얄타까지 끌어들여 영토적 야심을 채우려는 스탈린의 완벽한 음모, 꿈을 쫓는 이상주의자 루즈벨트는 야수의 그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 얄타 회담이 열린 미국대표단 숙소 리바디아 궁전(자료사진)

◆루즈벨트의 마지막 꿈 ‘유엔 창설’...“다른 것들은 희생해도 좋다”
 
불과 29세에 뉴욕 주 상원의원이 된 루즈벨트는 39세때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피나는 재활훈련을 거쳐 뉴욕 주지사가 되었고 1932년 40세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집념의 사나이 루즈벨트는 전무후무한 3선 대통령에 이어 4선에 올랐다. 그동안 루즈벨트는 휠체어에 탄 모습을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대중 앞에 서는 행사엔 남모르게 부축을 받았다. 그러나 국제회담에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독일 패망이 눈앞에 다가서자 영국 처칠과 소련 스탈린을 불러 전후저리 회담을 여는 루즈벨트의 회담 의제는 ⓐ독일 영토문제와 국제제재 ⓑ소련의 대일참전 수락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가장 큰 필생의 목표는 ‘전후 평화로운 세계 만들기’ 즉 국제연합(Uniter Nations: UN) 창설이다. 그것은 윌슨 대통령이 실패한 국제연맹을 뛰어넘는 이상주의자 루즈벨트 정치철학의 실현이었으므로 “유엔만 창설된다면 다른 어느 것을 희생해도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스탈린의 야망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영토 회복은 물론, 레닌의 국제공산당 이상주의를 넘어서 소련 역사상 최대의 ‘스탈린 제국’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스탈린은 이미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하는 대로 공산화 작업을 진행하였고, 루즈벨트 생일 1월30일엔 독일 수도 베를린 70㎞에 교두보를 설치하였다.
노르망디 상륙후 서부에서 독일로 진격하는 미-영 연합군은 소련군의 동부전선에 의지하는 형국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감사 아닌 아첨까지 서슴치 않았다. 스탈린의 신뢰를 얻어놔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유엔 참여를 성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상이몽, 스탈린은 가능하다면 미-영과 3국수뇌회담 중에 베를린을 점령했으면 좋겠고 영토협상에 앞서 최대한 점령지를 넓혀야한다는 목표로 독전하는 판이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루즈벨트를 육해공 1만㎞가 넘는 여행으로 녹초를 만들어 ‘추운 겨울’의 얄타에서 뜻대로 요리하려고 작심, 이 목적을 위해 스탈린은 “항공여행을 못 한다”는 거짓말로 루즈벨트가 원하는 회담장소 ‘따뜻한 지중해’ 로마 등을 거부했던 터이다. 
 
★입벌린 채 멍한 루즈벨트의 표정==독일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얄타에서 조금 떨어진 회담 장소 옛 왕궁들만이 성한 건물이었다. 영국 처칠은 투덜거렸다. “우리가 10년 걸려 찾는다 해도 세상에서 얄타보다 더 나쁜 장소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뒷날 회고록에 썼다. 
처칠의 주치의와 소련 의사들은 루즈벨트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대통령은 나이보다 너무 늙고 야위고 핼쑥해 보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만 본다” (세르히 폴리히, 앞의 책). 
루즈벨트 외동딸 애너는 아버지 건강을 챙기느라 처칠 수상의 중요만 면담조자 기피한다. 처칠도 딸 사라(Sarah Churchill)를 동반,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만(Averell Harriman)도 딸 캐스린(Kathleen Harriman)이 따라와서 회담을 도왔다.
우크라이나 대사를 역임(2006~8)한 허승철(고려대)교수가 번역한 역사의 현장 증언록 [얄타의 딸들](The Daughters of Yalta, 캐설린 그레이스 카츠 지음, 책과함께, 2022)에 그 세 여성은 생생한 목격담과 체험의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다. 
 
★사면팔방 도청 감시==얄타의 3개 궁전은 리바디아 궁(미국), 보론초프 궁(영국), 유스포프 궁(소련)으로 3개국대표단 수백명이 나누어 머물렀는데, 이들 궁전들은 모두 소련 정보당국이 미리 도청장치를 빈틈없이 설치하고, 지향성 마이크로폰(directional microphone)까지 동원하여 먼 거리 대화까지 녹음했다. 넓은 궁정과 도로마다 소련 경비병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출입 검사와 비밀탐색을 벌였다. 이 국제첩보작전의 총책임자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두목(내무장관) 베리야(Lavrentiy Beria,1899~1953), 현장 총책은 외아들 전기공 세르고(Sergo Beria)가 맡았다. 세르고를 불러 직접 지령한 사람은 스탈린이다. 그는 테헤란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얄타에서도 회담 전에 이미 미국과 영국의 계획들을 속속들이 보고받았다. 미국과 영국 선발대는 도청장치를 탐색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 얄타회담의 스탈린과 루즈벨트.(자료사진)

◆‘알아서 미리 주는’ 루즈벨트...스탈린은 ‘더 달라’ 몽니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던가, 유언장을 써놓고 회담에 임한 루즈벨트의 관심은 오로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엔 창설에 소련을 참여시키는 것, 또 하나는 대일전쟁에 끌어들이는 것. 미군부는 소련의 참전에 대하여 대통령을 졸라대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달성한 루즈벨트는 회담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난다.
 
유엔 투표권 ‘1국1표’ 원칙 깨고 소련에 3표 주다
유엔 창설에 대하여 스탈린은 안정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반대하였다. 협상카드였다. 목적은 소비에트 연방의 16개 공화국을 모두 독립국으로 대우하여 투표권16표를 요구하였다. 루즈벨트는 난감하다. 스탈린은 “병자를 짜증나게 하면 이긴다”며 시간을 끄는 몽니를 부린다. 소련외상 몰로토프와 측근 홉킨스 등 실무회담에 넘겼지만 결론은 루즈벨트 몫이다. 마침내 루즈벨트는 우크라이나 1표와 벨라루스 1표를 더 주기로 결정한다. 
유엔 회원국 투표권 ‘1국1표’ 원칙을 깨버리고 특별히 소련에만 3표를 선물로 준 것이다.
반대하던 목소리도 쑥 들어갔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발소리에 미국도 영국도 2차대전의 스탈린에게 맡긴 듯, 음흉한 독재자 앞에 큰 소리를 낼 용기는 없어진지 오래다.
필생의 꿈을 이룬 루즈벨트는 안도하였다. 스탈린이 감사하다며 유엔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인생 최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럽 전후처리 ‘핵심’ 폴란드 포기...국경도 스탈린이 그리다
1939년 독일침공 이래 반나치 투쟁을 벌이던 폴란드는 스탈린이 침공하자 소련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쓴다. 즉, 골치 아픈 폴란드의 반란군을 독일군이 진압하도록 방관하고, 독일군이 물러가자 남아있는 폴란드 지식계층 2만2천여명을 집단 학살한다. 1940년 카틴 숲 학살(Katyn Forest Massacre)이다. 그리고 공산당 정권(루불린 정권)을 세웠다. 폴란드 민주세력은 파리에서 망명정권을 세우고 전쟁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한다.
얄타에서 영국 처칠은 “폴란드 때문에 참전했다”면서 런던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스탈린은 완강하다. 소련이 폴란드를 해방시켰고 루불린정권은 해방정권이므로 인민의 지지가  높으니 다른 정권을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처칠은 폴란드 문제에 정치생명을 걸고 있었다.
루즈벨트가 중재안을 낸다. 기존 정권은 제외하고 ‘새로운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자는 것, 바로 해방 한국에 진주한 미국이 남북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스탈린은 기다렸다는 듯 폴란드의 자유선거를 통해 새 정부를 만들겠다며 배짱을 퉁긴다.
결과는 스탈린의 승리였다. 처칠의 흥분한 웅변도 루즈벨트의 맥빠진 중재도 무력하다.
독일과 폴란드의 새로운 국경 오데르-나이세 강 연결선도 스탈린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세르히 플로히, 앞의 책). 결국, 루즈벨트나 처칠은 ‘반대는 하였으나 체념’으로써 ‘미필적 고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독일 항복후 영토분할 점령에 프랑스 참여, 독일의 전쟁 배상, 동유럽과 발칸 국가들은 저절로 ‘스탈린의 제국’ 영토로 승인받게 되었다. 발칸반도 국가 중 그리스 하나만 영국의 영향력이 겨우 인정되었다.
유명한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1941)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14개조항 중 첫 3개항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양국은 영토나 기타 어떤 세력 확장도 추구하지 않는다.
Ⓑ양국은 국민들의 자유롭게 표현된 소망에 어긋나는 어떠한 영토적 변화도 원치 않는다.
Ⓒ양국은 모든 국민이 그 속에서 영위할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한다. 또 양국은 강압적으로 빼앗겼던 주권과 자치 정부를 인민들이 다시 찾기를 원한다.
과연, 얄타의 영토거래는 이 원칙들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지 두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러면서도 루즈벨트는 이 대서양헌장을 기초로 유엔 헌장을 만들었다.

▲ 얄타회담 스탈린, 루즈벨트,처칠. 루즈벨트 뒤에 앨저 히스(원내).

★암호명 ‘알레스’=앨저 히스...소련의 훈장 받고 10년간 간첩질
스탈린을 ‘친구’로 만들려는 루즈벨트가 얄타회담에 앨저 히스를 데려간 것은 당연하다. “변호사 중의 변호사”라며 루즈벨트는 국무부 고위관리(특별정무국 부국장) 하버드 출신 젊은 변호사 앨저 히스를 총애하여, 그에게 유엔 창설 작업을 맡겼다. 얄타에서는 특히 소련의 유엔참여를 위해 스탈린을 ‘유혹’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앨저 히스는 루즈벨트의 충실한 심복이 되어, 유엔 헌장과 조직, 강대국간 갖가지 조율에 앞장 선 주인공이었다. 그는 거기서 미국의 대소전략이 담긴 ‘블랙북’(Black Book)의 관리자, 유엔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창안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 방첩부가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일환으로 암호를 해독한 소련 비밀문서에 ’얄타의 알레스‘가 나타났다. 미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소련 스파이망에서 10년이나 일했고 소련의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얄타회담 후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소련 외우차관 비신스키의 감사표창을 받았다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알레스‘는 누구? 앨저 히스였다.
앞장에서 설명한 대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가로막은 소련간첩이 얄타에 가서 ’유엔병‘ 걸린 루즈벨트를 움직여 그 많은 ’선물‘들을 스탈린에게 제공한 것일까? 소련에게 유엔 투표권 3표를 준 것도 앨저 히스의 장난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유엔창설이 확정되자 루즈벨트는 얄타에서 앨저 히스를 유엔 초대 사무총장으로 지명한다. 미국 언론들은 ’평화시대의 젊은 세계 지도자‘를 반기며 대서특필하였다.
 

▲ 얄타회담 3거두, 왼쪽부터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시거를 들고 있는 처칠 옆에 루즈벨트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자료사진)

◆스탈린의 마지막 먹잇감 ‘코리아의 운명’
 
루즈벨트의 꿈 ‘유엔 창설’이 이루어지자 그는 너무나 관대한 자선가로 변한 것일까.
회담 초기부터 소련의 대일참전 이슈를 던져보았지만 스탈린은 막판까지 묵묵부답, 짜증나고 초조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개인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스탈린은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다. 거기엔 테헤란 회담 때부터 요구했던 대일참전의 대가,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복음이 쓰여져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또 딴청이다. 영유권 문제와 대일전 참전 협상은 별개로 해야한다. 
일본에 선전포고 한다면 일본땅 만주국과 한반도로 쳐들어가 점령하게 되지 않는가.
만주엔 청일전쟁때 차지했던 요동반도 대련, 여순이 있고, 러일전쟁 때까지 건설한 남만주 철도가 있다. 게다가 한반도는 10년간 품속에 안았다가 일본에 빼앗긴 황금알 같은 땅, 이미 루즈벨트에게 부동항 부산을 갖고 싶다는 말까지 건넨 터였다.
 
★스탈린, 루즈벨트와 단독 밀담...30분도 걸리지 않았다
2월8일 오후 3시30분, 중요한 담판일수록 루즈벨트와 단둘이 사적인 만남으로 해결하는 스탈린은 이날도 외상 몰로토프만 데리고 리바디아 궁전의 루즈벨트 방으로 숨듯이 들어섰다.
이미 모든 걸 다 주고 다 갖기로 작심한 남녀처럼, 두 사람은 의미있는 웃음의 인사를 나누며 마주 앉았다. 
“우리가 대일본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은 무엇인가요?”
스탈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돌진한다.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가 종전 후에 소련에 양도되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루즈벨트는 이미 편지로 알려준 내용을 확인해준다. 스탈린이 참전을 결정했나보다.
그러나 스탈린은 못 들은 사람처럼 전혀 다른 표정으로 루즈벨트를 정시한다.
“요동반도의 대련,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한 만주철도를 소련이 관할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외몽고의 현상유지도 지지해 주시오.” 
루즈벨트는 사전에 해리만을 통해 양해를 구했던 말 ‘장제스’를 꺼내 설명한다.
“그것은 중국과 협의해야할 문제인데...장세스와 논의할 기회가 없었다”고 얼버무린다.
스탈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소련과 일본은 지금 불가침조약국이다. 이런 상태에서 소련 국민들에게 참전할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내가 말한 조건이 충족되면 국민들도 이해할 텐데...안 되겠네요”
협박이다. 루즈벨트는 당황했다. 고질인 혈압과 열이 오르고 참기 힘든 짜증이 난다. 
“중국과 이야기하면 세계가 다 알게 될 텐데...” 그는 ‘비밀거래’를 암시하는 말을 던졌다.
흥정은 성립된다. 3개국만의 서면 결의로 확정하자는 스탈린의 말에 루즈벨트가 끄덕였던 것이다. 드디어 소련의 참전이 결정된 순간이다. 스탈린은 병든 미국대통령을 농락하며 남의 땅 주어먹기에 바빴다.
소련의 참전일자는 다른 날 결정된다. 독일 항복 후 소련군을 극동으로 이동하려면 3개월쯤 걸리니 그때로 하자고 스탈린이 정했다. 
 
★스탈린이 노리는 남은 땅 ‘한반도 흥정’
한국의 산탁통치 문제를 루즈벨트가 꺼냈다. 
“필리핀은 신탁통치 40년 만에 독립시켰는데 한국은 20~30년은 해야겠지요?”
“아닙니다. 기간은 짧을수록 좋겠지요.” 스탈린은 신탁통치 따위 안중에도 없다.
테헤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의 독립준비기간 ‘신탁통치’(trusteeship)에 동의하면서도 스탈린 자신은 뜻이 다른 ‘후견’(tutelage)이라고 적었다. 소련이 후견인이 되어 위성국을 만드는 기간은 길 필요가 없다. 수십 년 써먹은 코민테른 수법이다. 
그해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김일성정권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기까지 1년도 아닌 만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은 앞으로 미국의 보호령이 되는 겁니까?” 스탈린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단박에 부정하는 루즈벨트는 그때 스탈린이 한반도를 소련의 보호령 이상으로 구상하고 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보호령은 아니라 해도 미국 군대는 한국 내에 주둔시키겠지요.” 스탈린은 집요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각적이고 분명한 대답에 스탈린은 또 한번 놀랐다.
‘좋아. 아주 좋아’ 스탈린은 심각한 얼굴과 달리 뱃속에 웃음이 폭발한다. 
‘그렇다면, 패전 일본 영토 중에 열도는 미국, 한반도는 소련...좋았어, 아주 좋았어...’
 
이때 루즈벨트-스탈린의 비밀회담은 소련의 참전 흥정에서 마지막 ‘한국 거래’가 끝나기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얄타:8일간의 외교전쟁]을 저술한 세르히 플로히(Serhii M. Plokhy)는 그날 배석자 몰로토프, 해리만과 두 통역자의 증언이 '30분내'로 일치했다고 책에 써 놓았다. 
그 30분에서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몇 분이 걸렸을까? 절반 15분쯤?

이승만 건국사(30) '얄타 비밀협약' 폭로...38선이 한반도 남쪽 살리다

루즈벨트 서거...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 총회
 
미국 애틀랜타 온천지 웜스프링스(Warm Springs)의 리틀 화이트하우스(Little White House)는 루즈벨트의 개인 별장, 뉴욕주지사 때 지은 작은 집은 그가 1932년 대통령이 되자 ‘리틀 화이트하우스’로 불렸다. 1945년 얄타회담후 3월부터 머물던 ‘환자’ 루즈벨트는 그날도 벽난로 앞에 앉아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의지에서 굴러 떨어진다. 뇌출혈 돌연사, 63세. 얄타회담이 끝난 지 꼭 두 달 되는 4월12일이다. 
즉시,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이 부통령 취임 83일째 날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리고 2주일 후 4월25일 샌프란시스코, 루즈벨트의 마지막 작품 국제연합 유엔의 창설 총회가 열린다. 초대 사무총장은 루즈벨트가 얄타에서 지명한 앨저 히스, 소련 간첩이 주도하는 유엔탄생 행사엔 50개국이 초청되었다. 
 
 

▲ 유엔 창설 사무총장 앨저 히스. 그는 소련 간첩이었다.(자료사진)

★“미국이 임정 승인 안하면 한반도에 소련 공산국가 들어선다”
 
이승만은 유엔 창설총회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 9명을 구성, 스태티니어스 미국무장관에게 회의 참가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국무부가 ‘미승인단체’라며 거절하자 이승만은 “아르헨티나, 시리아, 레바논도 부적격인데 초청받은 사실”을 들어 거듭 독촉, 한국자료를 잔뜩 만들어 미국무부에 보내고 유엔 회원국들과 언론에 배포하였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카이로 한국독립‘ 선언에 ‘in due course’란 구절을 넣은 것은 미국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여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 아래 두기위해 한국독립을 늦추려 한 것 아니냐. 지금 중국과 시베리아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 공산당정부를 세우려 준비하고 있다. 미국이 이를 방치하면 한반도는 일본이 물러간 뒤 소련 제국주의가 지배한다. 미국이 더 큰 곤경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속히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한국이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막을 수 있도록 유엔 회원국으로 반드시 참여시켜 달라“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신화속의 인물] 앞의 책)
 
강대국들의 속셈을 꿰뜷는 통찰력과 예지력이 빛나는 이 글 내용은 해방 후의 한반도 정세를 미리 본 듯 그대로 적중하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루즈벨트의 무작정 유화정책은 소련의 제국주의 행동양식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러일전쟁 때 ‘일본의 멍에’를 한국에 지워준 미국이 이번엔 ‘소련의 멍에’를 지워주는 배신행위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각성의 촉구와 분노를 거듭 거듭 표출한다. 
 
이승만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미국무부만이 아니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였다. 서북파와 한길수 등 그들은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유엔에 파견할 별도의 ‘민중대표단’을 구성하였고, 이승만 임정대표단이 참가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우리가 해외한인대표“라며 선전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신한민보, 1945.5.17.)
 
허수아비 국무장관을 제쳐놓고 유엔 창설을 총지휘하는 앨저 히스는 뒤늦은 답장에서 끝까지 소련의 이익을 대변한다. ”한국의 어떤 대표도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은 유엔에 한국이 참여할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 말은 ‘해외한인대표’를 자처하는 재미한족엽합위원회를 두고 조롱하는 최종 통보였다. 이승만이 전부터 [세계상황](World Affairs,1943년6월호)에서 지적한 바, ”미국무부가 다른 망명정부와 달리 유독 한국임시정부만을 승인하지 않는 이유가 소련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책“이란 말 그대로 앨저 히스는 끝까지 소련사람처럼 단호했다.
 

▲ 이승만에게 '얄타밀약'을 알려준 미국 언론인 고브로(왼쪽), 이승만의 절친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뉴데일리DB

◆ 루즈벨트-처칠-스탈린의 ‘비밀협약‘ 폭로...미국도 영국도 발칵
 
하나님이 보내셨을까...출구 없는 이승만 앞에 뜻밖의 ’귀한 손님‘이 나타났다.
이승만의 유엔외교 캠프 모리스 호텔(Maurice Hotel)에 워싱턴의 한미협회 이사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가 낮선 미국 기자를 이승만에게 홍보전문가로 추천한다며 보냈는데, 이름은 에밀 고브로(E'mile Henri Gauvreau)이며 ’소련 공산당에서 전향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이미 다양한 경력을 가진 뉴욕의 저명한 기자였다. (그동안 구베로(Gouvereau)로 알려진 이름은 복사과정의 착오, 바른 이름은 고브로(Gauvreau). 작가 복거일이 스스로 확인한 결과를 [월간조선] 2020년 1월호 ’현대사의 발굴‘에 발표함)
 
이승만은 깜짝 놀랐다. 고브로가 석 달 전의 얄타 회담에 관한 ’비밀 정보‘를 알려주었다. “얄타에서 루즈벨트-처칠-스탈린이 한국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의 영향 아래 두며, 미국과 영국은 한국에 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기로 했다”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 게 아닌가. 
고브로가 취재했다는 극비정보는 즉각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이 오랜 기간 우려해왔던 ’강대국들의 한국 흥정 음모‘ 예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고브로를 소개해준 이승만의 절친 미국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는 허스트(Hearst) 계열 통신사인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에서 평생 일하였고, 고브로는 허스트 계열 [뉴욕 데일리 미러]에서 여러 해 활동했으므로 두 사람은 이미 신뢰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믿었고, 더구나 공산당을 떠난 고브로가 한국독립운동단체 간부 윌리엄스에게 한국 독립의 위기를 알려주고 윌리엄스가 그것을 한국 지도자 이승만에게 알려주어 3인이 비상대책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음에 달려간 트루먼 부통령이 백악관에서 33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오른쪽 부인과 딸.(자료사진)

★이승만 작전 개시...언론에 제공...미 의회와 트루먼 대통령에 편지
 
이승만은 칼을 뽑았다. 
우선 미국 최대의 신문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보수계 언론재벌 허스트(William R. Hearst)에게 ’얄타의 밀약‘을 알려주는 편지를 쓴다.
“한국이 비밀흥정의 희생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귀하는 아시겠지요. 이런 국제적 노예무역의 비밀이 탄로난 이상, 세계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팔고있다는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인식시킬 사람은 귀하와 같은 언론 지도자입니다. 만일 미국 국민이 이일은 중단시키지 못하면 그 자녀들은 다음 15년 안에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5월8일부터 [시카고 트리뷴 The Chicago Tribune],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The San Francisco Examiner], [로스앤젤에스 이그재미너 The Los Angeles Examiner] 등 대형 언론사들은 일제히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허스트계 신문들은 가뜩이나 얄타회담 내용이 발표되지않아 조바심치던 중에 이승만의 폭로내용을 미국 전역의 언론망에 상세히 보도하는 것이었다. 
한인동포 신문 중에는 [북미시보](The North American Times)의 보도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소련이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에 한인공산당 임시정부를 조직해 두었고 앞으로 폴란드의 루블린(Lublin) 정부처럼 승인을 주장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도 몇 번 주장하던 것인데, [북미시보]는 이승만이 본토에 조직한 한인동지회 기관지이다. 
 
미국과 유엔이 뒤집어지고 영국과 소련까지 발칵, 이승만의 폭로작전은 대박을 터트렸다.동시에 이승만은 친분 있는 미국 상하원 지도자들과 백악관 트루먼 대통령에 장문의 친서를 지급으로 보냈다.
상원의원 조지(Walter F.George), 브루스터(Owen Brewester), 하원의원 호프만(Clare E. Hoffman)에게 얄타밀약을 알려주고 “한국이 소련의 지배아래 넘어가지 않도록 개입해 줄 것”을 촉구하고 유엔 가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느님과 미국인의 정의의 이름으로 3천만 기독교 한국국민이 러시아인들에게 팔려가는 이 위급한 순간에 의회지도자인 당신이 그들을 구원하는 무엇인가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이렇게 썼다.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얄타의 밀약이 최근에 밝혀져 대통령께서 크게 놀라셨을 줄 압니다. 나도 매우 놀랐습니다. 각하는 미국의 비밀외교로 한국이 희생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사실을 떠올리실 줄 믿습니다. 1905년 한국을 일본에 팔아버린 비밀협정은 2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쳤지요. 다행히 얄타 밀약은 이번 유엔 회의 중에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각하가 이 상황에 개입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각하의 직접개입만이 과거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3천만의 한국인이 또 다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5월15일자 친서)
 
미 국무장관 대리 그루(Joseph Grew)가 극동국장 대리 록하트(Frank P. Lockhart)이름으로 이승만에게 ’사실무근‘이란 답장을 보내고 이어 6월8일 “얄타에서 어떠한 비밀협정도 맺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한국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또 못을 박았다.
 
영국의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처칠은 의원들의 질문에 ”약간의 일반적인 이해가 성립되었지만 비밀 협약은 아무 것도 체결되지 않았다“ 답하고 6월7일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
소련의 5월24일자 공산당 기관지는 ’밀약‘을 부인하며 ”정신 나간 사람의 황당한 주장’이라 반박하였다. 스탈린 정부 차원의 논평은 없었다. 
 
 

▲ 이승만을 도와준 월터 조지 상원의원(왼쪽)과 언론재벌 허스트.(자료사진)

★“사실이 아니라면 3개국 정상들이 ‘공식 부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라“
 
이승만은 유엔총회가 끝나고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폭로전을 벌이는데도 얄타회담 3개국은 진상을 발표하지도 않는다. 이런 판에 포츠담회담까지 열리고보니 백전노장 이승만의 불안과 한국의 운명에 대한 긴박한 노심초사는 폭발 직전이다. 
 
이승만은 포츠담회담(7.17 개막)에 참석중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7월18일 특별전보를 친다. 
“여기 증거가 있는 밀약설이 진정 사실이 아니라면, 포츠담에 모인 3개국 정상들이 한국에 관한 비밀협약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라.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당신들의 주장을 믿지 못하겠다.
#소련 정부는 불길하게도 아직 침묵을 지킨다. 소련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답이 없다.
#처칠 총리는 얄타의 많은 논의사항을 밝힐 수 없다고 한다. 그는 그 속에 한국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포츠담회담에서도 세 수뇌가 한국의 정치적 주권과 영토적 통합에 악영향을 주는 어떤 비밀협약이나 합의도 거부할 것을 보장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해야 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주면 종전후 귀국 1년이내 총선거를 실시하여 연합국과 같은 민주국을 설립하겠다.”
 
바로 이것이다. 이승만이 가장 걱정하는 전체주의 공산독재자 스탈린의 입에서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무슨 말인들 신뢰성 여부와는 별개로 스탈린이 국제적으로 ‘공식 부인’ 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승만이었다. 전쟁이후 한반도의 운명, 히틀러는 자살(4.30)했고 일본의 패망도 눈앞이다. 얄타에 이어 포츠담까지 강대국들의 손아귀에 쥐어진 3천만의 생명, “주여, 한민족을 구하소서” 걸으면서도 기도하는 70세 지도자 이승만의 절박한 위기감을 그 누가 알겠으랴!
 
또 다시 이승만은 사면초가, 미국 정부만이 아니라 한인동포단체도 밀약폭로를 비난한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 국제정치학자 정한경(鄭翰景,1890 ~ 1985)이 심상치 않은 사태가 걱정되어 안타깝게 말문을 열었다.
“박사님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너무 큰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실제로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깊은 생각에 빠진 이승만은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다.
“그렇소. 정박사 말대로 나는 증거가 없소. 그것은 오직 나의 관찰에 따른 신념일 따름이오. 한국을 위하여 내가 틀렸기를 바라오. 만일 비밀협약이 없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나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려하오. 
그러나 사실이든 거짓이든 지금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것을 지금 터뜨릴 필요가 있는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 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 밀약을 공식적으로 부인해달라는 것이오. 그것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할 일은 없소.”
(정한경 [이승만:예언자이자 정치가](Syngman Rhee: Prophet and Statesman), 한미협회, 1946)
 
이승만의 눈은 보통사람과 다르다. 보통사람은 ‘증거 유무’부터 따지고 걱정하지만, 이승만은 ‘사실이든 거짓이든’ 관계없이 ‘한국에 대한 밀약’이란 이슈를 터뜨려야할 절호의 기회 ‘지금’이란 ‘때’를 보고 지체 없이 ‘국제적 핵폭탄’을 적시 만루홈런 치듯 때렸다. 
 
「무엇이나 때가 있다....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구약성경 ‘전도서’ 3장)
 
항상 기도하는 개신교 신앙인 이승만의 눈은 언제나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패권주의 도박판에 올려진 한국의 생명, 얄타회담에서도 포츠담회담에서도 일본식민지 한국문제는 정식 의제로 오르지도 못한다. 어느 도둑이 언제 훔쳐갈지 모르는 막판 투기놀음이 한창인 이때, 가장 유력한 ‘강도’는 구한말 ‘고종을 얼리고 뺨쳐 먹은 러시아 황제’보다 더 무서운 공산당 제왕 스탈린이다. 상하이 임정 대통령으로서 당했던 레닌의 공세에 맞서 발표한 ‘공산당의 당부당’이란 반공논문에서 갈파하였듯이 이승만은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 수법을 미리 막지않으면 안된다. 그 ‘때’가 보이자 소련의 야욕을 세계의 하늘에 펼쳐 보이며 ‘고립무원의 한국’을 국제이슈로 쏘아올린 것이었다.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 ‘한국 독립’ 네 글자가 미사일처럼 솟구쳐 미-영-소의 바둑판을 강타한다.
 

▲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고독한 투사 69세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에 붙잡힌 미국과 소련...38선이 남쪽만이라도 살려주다
 
유엔창설을 위해 스탈린을 ‘친구’로 끌어안고 이땅저땅 달라는 대로 다 주었던 루즈벨트는 유엔의 꿈을 이루고 죽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소련의 이익’을 앞세워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하며 미국무부의 친소정책과 유엔을 틀어쥔 소련간첩 앨저 히스는 살아있다. 
새로 대통령이 된 트루먼도 루즈벨트의 유산을 이어받아 한반도를 소련에 넘길 것인가.
‘얄타 밀약설’을 무기 삼아 미국과 소련을 향하여 외롭게 분투하는 이승만의 몸부림은 강대국들이 외면하는 ‘한국 독립’의 생명을 살리려는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그것이었다.
 
이승만을 연구하여 연재소설을 쓴 작가 복거일(卜鋸一, 1946~)은 말한다.
“그 폭로는 오직 우남(雩南:이승만)만이 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멸망한 나라로서는 세상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운명이다. 잊혀지지 않아야, 언젠가는 부활이라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 우남은 조국이 잊혀지는 것을 막기위해 평생 진력했다. 얄타밀약을 공개적으로 거론함으로써, 그는 미국 시민들과 관료들과 정치가들이 ‘Korea’를 결코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복거일 [프란체스카] 북앤피플, 2018)
복거일은 그 성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미국정부가 밀약이 없다고 확인해 준 것. 둘째, 소련이 슬그머니 한반도를 장악할 위험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 성과가 실질적으로 작용한 모습은 ‘38선 획정’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 정부가 무관심했던 한반도를 이승만의 문제제기로 ‘Korea’를 떠올려 38선을 그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소련이 다 집어삼키려는 찰나에 ‘남한 반토막’이라도 미국이 구해냈다는 지적이다. 결국 그때 이승만이 그러지 않았으면 남한까지도 동유럽처럼 스탈린의 ‘공산 식민지’가 되었으리라는 진단이다.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그 현장 포츠담(Potsdam)으로 달려가 보자.

 

이승만 건국사(31) 미 원자탄 성공!...스탈린, 한반도 총공세...38선 탄생

▲ 포츠담 회담이 열린 독일 포츠담의 체칠리엔호프 궁.(자료사진)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 스탈린의 3거두 회담 개막, 7월17일 독일 빌헤름 황태자의 집 체칠리엔 궁 회담장에 들어선 트루먼은 상기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참석한 국제정상회담은 미국이 4년간 싸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후처리를 결정해야하는 자리...그것만이 아니다.  
바로 전날 16일 새벽 5시(미국시간)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Alamogordo)에서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코드명:트리니티 trinity)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트루먼도 몰랐다가 대통령 되고서야 브리핑 받은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1942년 시작된 원자탄 개발이 마침내 성공, 세계사를 바꾸는 쾌거를 이루었다는 흥분에 신참 대통령은 초조감에서 갑자기 자신감으로 넘쳐흘렀다.

▲ 포츠담 회담 3거두, 처칠, 트루먼, 스탈린.(자료사진)

★트루먼 "스탈린은 얄타협약을 깨는 배신자"
 
트루먼은 이번에 스탈린을 처음 만났다. 
친소주의 루즈벨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버거운 짐 스탈린! 얄타회담이 끝나자 동유럽 점령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폴란드의 좌우 자유선거 약속도 버린 채 루블린(Lublin) 공산정권을 r기정사실화하는 공산독재자 스탈린은 신뢰할 수 없는 국제법 파괴자 ‘배신자’ 아닌가. 
이 같은 스탈린에 대한 경계심은 얄타 이후 미국정부에 널리 번졌다.
국무부가 6월22일 작성한 「종전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정세와 미국의 정책」 중 ‘한국항목’에서 “소련이 참전하면 한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점령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며 이를 막기 위한 정책은 ‘카이로선언’의 실현이라 강조하였다.
(Department of State, ‘An Estimate of Conditions in Asia and the Pacific in the Close of War in the Far East and the Objective Polices of the United States’ FRUS 1945, vol. Ⅵ. 손세일, 앞의 책)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 트루먼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전쟁부(국방부) 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은 이승만이 주장해 온 ‘소련의 한반도 공산정권 수립론’을 이야기 한다.
“소련이 4개국 신탁통치에 동의했지만 상세한 것은 합의된 게 없다. 소련이 외국군의 한반도주둔을 원치 않는 이유가 있다. 제가 알기로 소련은 이미 1-2개 한인병력사단의 훈련을 마쳤는데 이를 소련지배하의 정권수립에 이용할 것이다. 이것은 소련이 약속을 깬 ‘폴란드 복사판’을 극동에 옮겨놓는 격이다.”
이러면서 스팀슨도 ‘신탁통치’의 강력한 추진을 건의하고 미군의 상징적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키자고 제안하고 있다. 즉, 한반도를 어느 특정국가가 지배하면 국제분쟁이 재발할 것이므로 소련의 지배를 막으려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의 반복이다.(Stimson to Truman, Jul.16,1945, FRUS 1945 Conference of Berlin Potsdam, vol.Ⅱ)
 
이렇듯 당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한국인의 즉각 독립 희망’과 관계없이 오로지 ‘분쟁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소련을 꼭 참전시켜야한다고 거듭 확인하였다.
미국 엘리트층의 정치적배경이 약한 ‘시골 출신’ 대통령 트루먼이 국무부나 군부의 주도에 끌려가던 당시, 한국문제는 ‘카이로 선언’에서 한발작도 나아가지 않은 상태로 포츠담회담에서 군사작전상의 부수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트루먼은 루즈벨트와 달리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싫어하고 배척하려 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도 미국의 이익에 관한 것일 뿐, 한국의 독립과는 직결되지 않았다는 데에 ‘한국의 비극’은 불가피한 숙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총선에서 패배한 처칠은 귀국하고 노동당 애틀리(왼쪽)가 참석한 포츠담회담. 가운데 트루먼, 오른쪽 스탈린.(자료사진)

◆ 트루먼 “소련 참전 불필요”...처칠 “일본 상륙작전도 불필요”
 
개막 다음날 트루먼은 원폭개발에 참여한 영국 처칠에게 ‘성공’을 알려주고, 스탈린에게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 의논했다. 지금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면 소련이 당장 참전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처칠은 “지구를 흔들만한 뉴스”라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했구나’ 생각했다. 미-영군은 이제 엄청난 희생을 치를 일본본토 상륙작전을 안해도 되고, 더 좋은 일은 대일전에 소련이 참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처칠 [세계2차대전:승리와 비극] 1953)
 
당연히 트루먼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다. 포츠담회담에서 가장 급한 것이 ‘소련의 참전’을 앞당기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거꾸로 소련의 참전여부를 미국이 재검토해야할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소련군의 도움 없이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종결, 미국 단독 승리를 원하고 있었다.
회담이 폴란드 등 동유럽문제와 독일처리문제, 태평양 전쟁 종결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7월21일 트루먼이 기다리던 ‘반가운 보고’가 또 들어왔다. 
“8월1일 이후에는 원자탄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트루먼은 무릎을 쳤다. 골치 아픈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드디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7월24일 미-영연합참모본부와 소련참모본부가 처음 합동회의를 열고 한반도에서의 작전문제를 협의하던 날 저녁, 식사를 위해 휴식에 들어갔을 때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를 갖게 되었소.” 원자탄이란 말은 빼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스탈린은 ‘반가운 소식이다. 일본에 잘 쓰기 바란다’고 말했다. 
(손세일 번역, [트루먼 회고록] 지문각, 1968. 원전 Harry S. Truman [Memoires] Doubleday & Company,1955). 
 
★이날 열렸던 연합국 3개국 참모본부 연석회의에서 논의된 한반도 작전 문제는 애매하게 끝났다. 소련군 참모총장 안토노프(Aleksei Antonov)가 소련군의 작전에 미군의 대응 여부를 물었을 때 마셜(George C. Marshall) 미국 참모총장은 “그런 계획은 없다”고 미국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작전부장 헐(John E. Hull) 중장에게 “미군의 한국진공작전 계획을 준비하라” 지시하였다. 
이것이 포츠담회담에서 미군의 한국 진주문제가 처음 표면화된 대목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나 미 군부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한국 내륙 점령 문제나 내정문제 등에는  한 가지도 확정된 계획이 없이 ‘원자폭탄에 의한 종전’에만 매몰되어갔다.
단지 7월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 제8항에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연합3국이 확인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같은 날 영국 총선결과가 최종 집계되었다. 80% 승리를 예상했던 전쟁영웅 처칠의 보수당이 참패하고 노동당이 승리,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1883~1967)가 포츠담에 참석하고 처칠은 돌아갔다. 
 

▲ 냉전기류가 표면화한 포츠담 회담 전경.(자료사진)

★미, 포츠담선언문 서명에 스탈린 이름 빼다...‘냉전 기류’ 표면화
 
미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가 주도한 포츠담 선언문 서명자 명단에서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 대신 중국의 장제스가 들어갔다. 갑자기 무슨 까닭인가.
미국의 설명은 ‘1941년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은 태평양전쟁의 비교전국’이므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불복시 섬멸전을 규정한 선언문에 서명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요컨대, 소련에게는 ‘참전자격이 없다’는 메시지, 즉 “참전 말라”는 통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회담에서 미국이나 영국은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원자탄 성공이후 달라진 미국정부의 노선이 처음 ‘냉전의 안개’처럼 피어오른 장면이다.
선언문 사본을 받아본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발표를 늦춰달라 했지만 번즈는 이미 언론에 배포되어 안 된다고 잘랐다. 스탈린은 ‘미국의 배신’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스탈린의 참전 준비는 회담전 벌써 끝나 있었다
 
트루먼이 ‘신무기를 가졌다’고 말했을 때 스탈린은 즉각 알아차렸다.
오래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에 심어놓은 과학자나 간첩 등 정보망을 통하여 ‘원자탄 성공’을 예측하고 있던 스탈린이다. 거의 동시에 정보 보고도 받았다. 
예상보다 빠른 원폭성공을 확인하자 스탈린은 기존의 참전계획을 독려하고 나선다.
독일 항복 3개월 뒤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약속했다. 그것은 8월이다. 소련군 참모본부는 그때부터 ‘극동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과 무기, 군장비를 계속 실어 날랐다. 당시 40개사단이던 극동군은 80개 사단으로 배나 커졌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루즈벨트로부터 확약 받은 만주, 사할린, 쿠릴열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을 착착 진행시킨 것이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 공격, 동시 점령을 목표로 한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후퇴하는 일본군의 배후 차단 작전이 기본, 그것은 바로 한반도 북부부터 점령해야하고 필요하면 소련이 원하는 부산(釜山)까지도 선점해야 한다.
 
미-영이 포츠담선언문에서 스탈린의 서명을 제외시킨 일은 오히려 ‘반전의 행운’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궁지에 몰린 일본이 서명에서 빠진 소련에게 불가침조약을 근거로 미-영과의 종전협상 중재를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귀축’(鬼畜)으로 선전해놓은 미-영에 항복하느니 소련의 중재를 통해 보다 유리한 항복조건을 원했던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이 26일 발표되자 28일 “오직 묵살할 뿐”이라 선언한다. 일본 군부가 “1억 옥쇄”(玉碎)를 부르짖으며 항거했던 까닭이다.
‘묵살’은 ‘항복 거부’--미국은 즉각 ‘섬멸전’에 돌입한다.
 
 

▲ 역사상 최초의 원자탄 투하.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한 원폭 '리틀보이' 핵구름.(자료사진)

◆사상 최초의 원폭 투하...소련군은 만주-한반도에 쇄도
 
남태평양 티니언(Tinian) 섬에서 일본의 태풍이 잠자기를 기다리던 B-29 폭격기는 8월6일 새벽 2시45분에 이륙, 일본 열도를 향해 고공비행을 시작한다. 기장 티베츠(Paul W. Tibbets) 대령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에놀라 게이’(Enola Gay) 폭격기에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싣고 히로시마(廣島)를 찾아간다. 
당시 실험한 원폭은 두 개, 플로토늄탄이 길죽한 ‘꼬마’ 리틀 보이, 우라늄탄은 통통한 ‘팻맨’(fat man)이다. 
열도 상공을 선회한 에놀라 게이가 리틀보이를 투하한 시간은 아침 8시 15분, 출근시간 히로시마는 7만6,000여개 건물중 7만개가 핵폭풍에 전소하고 11만명의 시민과 군인2만명이 즉사, 그해만 14만명이 사망한다. 
포츠담에서 귀국하는 트루먼은 오거스타 함상에서 기쁨의 웃음을 터트린다.
“이 폭탄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을 도발한 행위에 대한 보복이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 국민들을 구하려는 것이었는데 일본 지도자들이 즉시 거부하였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본적 없는 ‘파괴의 비’(rain of ruin)를 받아야 한다.” 백악관이 발표한 트루먼의 성명이다.
 
‘원폭 투하’ 듣자마자 스탈린은 총공격명령을 내린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스탈린은 급하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소련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으면 절대 안된다.
원자탄을 쓰기 전에 참전하자. 아니다, 원자탄을 맞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이 절호의 기회다.
기회를 놓치면 미국이 원자탄을 무기로 소련까지 지배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빼낸 정보로 개발 중인 소련의 핵무기는 언제 성공할지 아직 막막하다.
 
8월6일 드디어 원폭 투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작전개시, 총공격명령을 내린다.
외상 몰로토프가 일본대사에게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것이 모스크바 시간 8월8일 오후6시, 포츠담회담 폐막과 함께 전투태세로 배치해 둔 3개방면군, 제1극동방면군, 제2극동1방면군, 자바이칼방면군은 일제히 만주 국경지대와 한국의 두만강을 넘어 쇄도하였다.
 
그 시간 두 번째 원폭 ‘팻맨’을 탑재한 B-29가 일본열도로 들이닥친다.
당초 목표는 큐슈(九州) 고쿠라(小倉)라였으나 두꺼운 구름 때문에 선회하다가 U턴,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한다. 일본시간 8월9일 오전 11시, 4만명이 즉사했다.
트루먼은 또 라디오로 ‘진주만의 보복’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소련군의 목표, 미군 상륙 전에 서울 점령
 
두만강을 넘어온 소련군은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군, 연해주집단군의 사단장이던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가 지휘하는 4만명 규모의 병력이다. 8월8일밤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경찰서 습격 방화하고, 나진(羅津)항엔 조명탄을 쏘아올려 일본 관동군의 물자와 창고를 불태우며 부두의 유류드럼통이 모두 폭발하여 항구일대는 바다까지 불바다가 되었다. 
웅기(雄基) 항에 소련 군함2척이 들어와 쏟아져 나온 소련군이 일제히 상륙작전을 벌였다. 13일엔 청진(淸津)에 함포사격, 15일까지 육군 1개사단과 전차부대가 상륙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흘간의 전쟁은 18일 소련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일본군의 소련 침공 작전기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소련군은 21일 원산(元山)에 상륙, 함경도를 장악했다. 
서부지역에 쇄도한 소련군은 8월22일 평양을 점령하고 25일엔 황해도까지 장악한다.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항복방송(8.15)이 나간 지 불과 열흘 만에 소련군은 북한 전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미군 선발대는 9월8일에야 인천에 들어온다. 

▲ 1945년 8월12일 새벽, 백악관 별채 3부조정위원회 지시에 따라 본스틸 대령이 30분만에 그렸다는 38선 표시 지도.(자료사진)

◆ 38선 탄생 이야기...벽걸이 지도 내려 30분만에 그렸다
 
8월10일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다음날 8월11일, 미국정부 3부(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SWNCC)가 열렸다. 포츠담 회담 한 달 전에 트루먼이 소집한 군 수뇌회의에서 처음 한반도 작전문제를 포함한 소련 참전 대책을 논의한 뒤 두 달 만에야 이번엔 국무부까지 포함하여 일본 항복후의 미국정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연 것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스탈린은 이미 포츠담회담 전에 모든 참전 준비를 끝냈고 지금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공격, 물밀 듯이 전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8월11일 군부의 요구에 따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락’을 내놓았다. ‘천황의 지위 유지’가 항복 조건이다.
미국은 즉각 거부하였다. 그리고 지금 3부조정위원회는 최종 방침을 결정하고 이를 문서화하느라 분주하다. 이 회의가 만든 것이 ‘일반명령1호‘(General Order No. One)이다.
제1항은 ‘일본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위(authority)는 항복한 순간부터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것을 규정하고, 제4항에서 ‘일본의 궁극적인 정체(政體)는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여 ‘천황제 유지’의 가능성을 일단 양보한 것이 되었다.
일본에 관한 것은 영국, 중국, 소련의 동의를 거쳐 일본정부에 일방 통보하였다.
 
유명한 <일반명령 1호>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것이 38선이다.
원자탄 투하로 소련의 참전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으려던 미국의 생각은 생각일 뿐, 일찌감치 물 건너갔다. 스탈린이 예상보다 빨리 선전포고를 발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황하였다. 이대로 두면 한반도는 우려했던바 ‘폴란드의 복사판’이 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38선을 그은 장교 트리오—링컨, 본스틸, 러스크 
 
트루먼 대통령이 만든 SWNCC는 백악관 비서실 별채에 상주하였는데, 임시 차출된 엘리트 장교들 중에 ‘38선’을 뚝딱 만들어낸 3명이 들어있었다.
바로 ‘일반명령 1호’ 작성을 담당한 팀의 조지 링컨(George A. Lincoln·1907~1975) 소장,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III·1909~1977) 대령, 딘 러스크(Dean Rusk·1909~1994) 중령이 그들인데 모두 옥스퍼드 출신 30대중반 ‘자칭 천재’들이라 한다. 
 
지난달 7월 포츠담에서 마셜의 지시를 받은 육군 작전국이 만들었던 계획안은 한반도를 독일처럼 4개연합국이 도별로 분할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안은 소련이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긴급 상황에선 무용지물이다. 
3부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ames C. Dunnn)은 8월 11일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수도 서울과 인천, 부산을 장악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시간은 새벽2시, 뉴욕 타임즈를 읽고 있던 링컨 소장은 본스틸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똑 같은 지시를 내린다. 본스틸과 러스크는 코리아 지도를 찾았으나 마땅한 게 없어 고민하다가 벽걸이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지도를 보았다. 이를 내려놓고 두 사람은 “30분쯤 궁리 끝에” 푸른 잉크로 서울과 인천을 포함하는 38선을 그어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다. (신복룡 [주간조선] 2015, 4.3, NO 2351)
이 안이 합동참모본부(JCS)와 3부조정위원회의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 스팀슨(H. Stimson) 전쟁장관, 포레스털(J. V. Forrestal) 해군장관의 검토를 거쳐 트루먼 대통령에게 올라가고 최종적으로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 38선을 만든 3인조. 링컨 소장,본스틸 대령, 러스크 중령.ⓒ조선DB

◆스탈린, 연합군사령관 2명 제안...미국이 거부하자 38선 수락
 
흔히 스탈린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자 “뜻밖에 순순히 응했다”고들 말한다.
과연 그랬던가. 뒷날 공개된 미국무부 문서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즉, 협의과정에서 스탈린은 한반도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미국측과 소련측의 두 사람”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패망 후 일본영토 분할에 스탈린은 얄타회담서 약속받은 전리품(남만주철도, 남사할린, 쿠릴열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양국이 대등하게 나눠 갖자는 속셈을 드러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서울을 선점하려고 빠르게 남진, 미국이 38선을 제안했을 때 이미 38선을 넘어 개성(開城) 남쪽까지 밀고 내려온 참이었다.
미국이 물론 ‘2명의 연합군총사령관’ 제안을 거부, 남진하던 소련군은 다시 개성이북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왜 미국의 거부에 반항하지 못하고 물러갔던가?
미국의 원자탄 때문이다. 며칠 전 원폭 두 방을 거침없이 사용한 미국과 군사충돌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되고 그 원폭은 모스크바를 때릴 지도 모른다. 트투먼은 루즈벨트가 아니었다.
기다리자. 언제까지? 지금 미국의 기술을 훔쳐다가 개발 중인 소련의 핵실험이 성공할 때까지! 
스탈린은 울멱 겨자먹기로 38선 제안을 수락하였고, 서울 점령을 눈앞에 둔 소련군을 북상시키며 다짐한다. 핵무기 가지게 되면 반드시 다시 오리라.
 
★스탈린, 베리야를 질책...원자탄 개발 총력전 돌입
 
포츠담 회담 일주일째 되는 날,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신무기’를 은근히 자랑하던 7월24일.  스탈린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어찌 되었느냐? 한다 한다하는 원자폭탄 실험 결과는 무엇이냐?”
“2주 전에 실험한다 했는데 계획했던 폭발 여부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다”
스탈린이 폭발했다. 지금껏 미국서 빼내온 정보들이 모두 거짓 아니냐, 베리야는 미국의 간첩들 손에 농락당하는 것이냐? 펄펄 뛰는 스탈린은 미국이 유럽과 소련을 지배하면 어쩔것이냐고 식식거렸다. “그렇게는 안돼...안돼...” 미국의 핵무기독점은 절대로 안된다고 다짐하였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회고록] 1989)
 
스탈린의 특별지시로 베리야가 총지휘하는 ‘특별위원회’가 출범, ‘원자력 산업’이라는 이름아래 어마어마한 개발 총력전이 벌어진다. 우라늄 농축 기업들과 원자로, 원심분리기, 폭탄 제조 공장들이 단기간에 설립됐다.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등 깊숙한 곳에 비밀 산업단지들이 나타났다. 그 도시들의 정체는 개발 관련자들만이 '아톰 그라드'로 부르는 ‘핵도시'. 그리고 4년후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에서 마침내 원자탄 폭발실험 성공! 
다음해 6월25일 일요일 새벽, 한반도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침략전쟁을 개시한다.

이승만 건국사(32) 해방 순간--이승만과 김구는 어디서 무엇을 했나?

망국의 설움과 독립투쟁 35년, 몽매에 그리던 ‘해방’은 벼락 치는 원폭과 함께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 순간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해방후 ‘건국전쟁’의 주역이던 이승만과 김구가 일본 패망이란 역사적인 시간에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더듬어 보자.

 
해방 즉시 스탈린에 전보...‘신탁통치 반대...38선 반대’ 투쟁 
 
포츠담선언이 발표된 다음날 7월27일, 이승만은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Douglas MacAthur) 장군과 태평양전선 해군사령관 니미츠(Chester W. Nimitz) 제독에게 전보를 친다. 이승만이 직접 마닐라로 가서 국내동포에게 방송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보냈다. 
“진주만 공격이래로 우리는 연합국을 위해 우리 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소련의 영향 때문에 미루어져 왔습니다. 1942년 7월의 방송에서 나는 한국인들에게 지시를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봉기할 때가 왔습니다.”
이승만은 필리핀의 로물로(Carlos P. Romulo,1899~1985) 장군이 마닐라에서 방송을 할 수 있게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1942년 퓰리처(Pulitzer) 상을 받은 언론인 로물로는 진작부터 이승만이 친교를 맺은 동지이다. 로물로는 맥아더의 무관이며 국제연합창립시 필리핀 대표였다. 그러나 니미츠도 맥아더도 워싱턴 고위당국 소관이라 답하는 것이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앞의 책).
 
8월3일 이승만은 마셜 장군에게 편지를 보낸다. 마닐라에 가서 국내동포에게 방송을 보내고 한국에 상륙하는 연합군과 함께 귀국하고 싶다는 희망을 간곡히 전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진 후 8월8일엔 트루먼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다. 나가사키에 연달아 원폭이 투하되자 이승만은 8월10일 미국 전쟁부에 즉시 귀국하겠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하지만 응답도 없이 급박한 시간만 흘러간다. 
 
마침내 일본 천화의 항복 방송을 들은 이승만은 8월15일 워싱턴에서 긴급회합을 소집하였다. 임병직, 장기영, 한표욱(韓豹頊) 부부 외 측근들이 참석, 일본 패망의 기쁨을 나누며 귀국문제와 해방 후의 한국 사태를 점검하였다. 침통한 이승만이 말한다.
“문제는 대일전에 뛰어든 소련인데 한반도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큰 걱정이다.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민족주의 세력과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당 사이에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
해방 순간에 ‘공산세력과의 유혈 내전’을 예견한 발언은 이승만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때 ‘38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8선’ 뉴스가 보도된 것은 8월24일이다.  
 
이승만은 점심 식사를 끝낸 일행과 헤어져 즉각 행동에 나섰다.
맨 먼저 미국 트루먼, 소련 스탈린, 중국 장제스에게 축하전보를 쳤다. 
“각하. 우리는 대한이 일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데 대하여 마음 깊이 밥힌 감사를 각하와 미국인들에게 표합니다. 미국 군인의 용기와 과학적 천재력을 보여준 미국 군력과 공업적 위력으로 인하여 일본은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습니다. 영구적 감사를 간직합니다. 27년전 대한이 일본에 대항하는 혁명(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 민국정부는 미국 제도를 모방하였습니다....” ([주미외교위원부 통신] 제115호). 이승만은 이처럼 축하전보에서도 한국과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 이승만(왼쪽)이 해방즉시 '평화 촉구' 전보를 보낸 스탈린.(자료사진)

이승만이 공산 전체주의 독재자로 규탄해온 스탈린에게는 왜 축하전보를 쳤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소비에트 연방이 거둔 승리와 세계 평화의 복구를 짐심으로 축하합니다....평화를 사랑하고 소비에트연방에 호의를 갖고 있는 3천만 한국인이 건설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국가 한국이 소비에트공화국과 극동 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안전장치가 될 것을 확약합니다.” (이승만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서한집). 
‘평화’를 거듭 강조한 이승만의 본심은 무엇인가. 소련의 침략주의를 훤히 알고 있기에 이승만은 스탈린에게 한반도의 평화를 깨지 말라고 완곡한 경고를 발한 전보였다. 이것은 이승만이 소련에 의한 ‘한반도 공산화’를 염려하여 스탈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호소한 글이다. 
 
중국 장제스에게는 ‘성심껏 축하’한다며 “대한과 중국은 동일한 전후문제에 당면하였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김구에게는 “임시정부는 ‘조선정신’을 유지하라”면서 귀국후에 정식정부가 되면 일반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선거가 잘 이루어져야 동적간의 피흘림을 막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거듭 주입시키고자 했다.
 
18일에는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이 김구와 공동명의로 트루먼에게 보낸 축하편지를 백악관으로 보내고, 20일에 번즈 국무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 이승만(왼쪽)이 해방순간 전보를 보낸 연합국 지도자들. 트루먼, 장제스, 애틀리.ⓒ뉴데일리DB

이때 이승만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소식을 처음 듣고 경악한다.
설마설마 했지만 역시나...‘얄타 밀약’의 현실화, 격분한 이승만은 8월21일 트루먼과 장제스에게 또 급전을 날린다. 
“독립을 보장한다고 위장하여 한국을 ‘괴뢰’(傀儡:꼭두각시)로 이용하려는 계략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채택하지 말도록 권고해주십시오.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지 않는 어떤 계획도 모두 한국인은 거부합니다.” (이승만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
 
이승만은 동시에 영국 애틀리 수상에게도 전보를 친다. 
“한국이 또 다른 폴란드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각하께서 중재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명목상의 독립이라는 미명아래 한국을 노리개로 이용하려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3천만 한국인을 위해 개입해 주시고 통일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승만이 애틀리에게 보낸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서한집)
 
다급한 이승만은 한미협회의 더글러스 아메리칸 대학총장, 스태거스 변호사, 언론인 윌리엄스 세사람으로 하여금 트루먼에게 ‘이승만의 조속귀국’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게 한다.
 
백악관의 회답을 기다리다 지친 이승만은 또 트루먼에게 전보를 친다. 8월들어 다섯 번이나 트루먼에게 전보와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오로지 미군만을 한국의 점령군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단일민족을 분열시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초래할 공동신탁통치나 공동위원단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각하께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해주기기를 간청합니다. 제 조국의 미래는 대통령 각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8월27일자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서한집)
 
28일 마닐라 맥아더에게 또 전보를 친다. 조속히 귀국할 수 있도록 트루먼에게 건의해 달라고부탁 하면서 되풀이 간청한다. 
“...우리는 공동점령 또는 신탁통치에 반대합니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합니다. 왜 우리가 소련이 들어와 공산주의를 세우고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합니까?...” 
 
이와 같이 이승만은 ‘38선 분할점령’ 대하여 미국을 설득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38선 반대’ ‘신탁통치 반대’ 투쟁을 귀국 전부터 사면팔방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또 다시 특유의 이벤트를 펼친다. 
‘한국 해방의 밤’(Korea’s Liberation Night) 만찬 연설회를 여는 캠페인이다.
그것은 해방축하라는 이름으로 미국에게 ‘즉각적인 완전독립’을 호소하는 행사였다.
8월30일 저녁, 워싱턴에 친한 미국인사들이 130여명 모여 해방과 독립을 축하하는 연설을 쏟아낸다. 선전 전문가 이승만의 놀라운 동원력, 미국 ABC 방송이 주요 연설을 생방송으로 중계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10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승만도 그 까닭은 잘 알고 있었다.
 
 

▲ 김구(왼쪽앞)와 도노반 장군이 중국 서안에서 광복군의 OSS 특별작전문제를 논의함.ⓒ김구선생기념사업회

◆김구 ‘좌우합작’의 마지막 시련...김원봉당, 임정 해체 주장
 
김구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게 된 것은 8월10일 서안(西安)에서였다.
이승만이 주선하고 미국 OSS가 이끄는 광복군 게릴라 훈련 현장을 시찰하고, 중국에 온 미국 도노반(William J. Donovan) 장군을 만나 국내침투 합동작전을 의논한 김구는 이청천, 이범석 등 일행과 함께 산시성(陜西省) 성주 축소주(祝紹周)의 집을 방문했다. 저녁식사를 마쳤을 때 축소주가 전화를 받더니 “왜적이 항복한다” 소리치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김구 일행은 순간 놀라고 기쁘고 감격하면서도 뭔가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김구는 [백범일지]에 썼다. 훈련받은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려는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완전 항복한 사흘후 8월18일 충칭(중경)에 돌아온 김구는 주말에 휴식을 취하고나서, 21일 중국국민당 실세 오철성(吳鐵城)을 방문했다. 8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국민정부에 감사인사를 하자 오철성은 각정파들의 단합부터 강조했다. 김구는 “임시정부가 귀국하면 선거를 실시하여 정식 정부가 될 터이니 순조롭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승만이 강조한 ‘선거‘를 인용하는 것이 눈길을 끈다.
오철성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공동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라면서, “듣자하니 소련군과 미군-중국군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여 적의 무장을 해제시킬 것”이라는 정보를 김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추측이지만 한국은 당분간 신탁통치나 과도적 군사정부 통치가 될지도 모르며 장래에는 폴란드와 같이 통일적 임시정부가 들어설지도 모른다”고 부연설명을 한다. 
’분할점령‘ ’신탁통치‘ ’폴란드와 같이‘라는 당시 최대의 국제적 핫이슈에 대하여, 김구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김구는 그 자리에서 한국독립당을 계속 지원해달라는 것과 임시정부의 조속한 승인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장제스 정부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 좌익세력 “임정 해체하라”...줄줄이 총사퇴한 까닭은...
 
일본이 항복하자 지난 3년간 임시정부의 의정원(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좌익정파들이 들고 일어났다. 해방 대책을 논의하는 8월18일 의정원은 개회 벽두부터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의원들이 임정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했다.
그들은 의정원이 결의한 *정권의 국내봉환과 *임시정부의 조속 입국 등 두 가지를 적극반대하였다. 과격파 손두환이 가장 격렬하였는데 그는 김구의 황해도 청년시절 제자였다. 
“그동안 총사직을 권고해 왔는데, 사직은 안하고 국내로 들어간다니 무슨 말이오? 당신들이 이 정부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즉 내란을 일으키자는 위험한 생각이오. 그런 위험한 정책을 가진 정부를 그대로 둘 수 없단 말이오...당신들이 언제 국내 인민의 정권을 받았소? 어서 사직들 하시오.”(임시의정원회의 제39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945.8)
요컨대 임시정부가 귀국하면 내란이 난다는 것, 국내 동포들이 선출한 정부가 아니므로 자격이 없다는 덧, 즉시 해체하라는 주장이다.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좌익세력이 해방이 되자 왜 이럴까. 
한마디로 한국에 새로 세울 정부는 공산당 정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좌익정파들은 8월17일 독자적인 행동에 돌입, 한국혁명운동자대회를 열었다. 박건웅의 개회사와 윤기섭(尹琦燮) 의장 선출에 이어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최형록, 손두환(孫斗煥), 이연호 등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10여명이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개조와 귀국문제, 연합4국에 축전발송 등 7개항을 결의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金元鳳)은 김구보다 앞서 중국국민당 오철성 비서장을 방문, 귀국지원과 귀국후 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추헌수 편 [약산과 오철성의 회담요점] 자료한국독립운동(2)
 
★김구는 정부 총사직 문제를 분명히 반대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우리 임시정부는 기미년 3월1일에 국내에서 피를 흘린 결과로서 13도 대표가 모여 조직한 것이다. 이제 국무위원들이 결속하여 본토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한국사람이 난타를 당한다면 중국이 법치국이 못되는 것이니, 우리는 중국군이 한국에 들어갈 때에 광복군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보따리를 싸야 할 이때에 총사직은 불가하다.”
위기를 당한 김구가 귀국을 앞두고서야, 이승만이 줄곧 법통을 주장해 온 13도대표의 한성임시정부를 앞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규식도 이때 비슷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귀국‘ 결의안을 표결에 부치자 민족혁명당 등은 일제히 퇴장하였다. 
사실상 마지막 의회의 파장! 폐회사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 1942년 10월, 장제스의 단일지원 압력 앞에서 ’좌우 합작‘ 정부를 구성했던 김구의 꿈은 이렇게 3년 만에 사라졌다. 그 시련은 얼마나 컸던가. 김원봉을 군무부장(국방장관)과 광복군 부사령관에 앉힌 뒤에 겪은 갖가지 횡포, 의정원을 좌지우지하는 좌익 정파들의 독무대, 허울 좋은 ’통합 독립운동‘의 명분은 공산주의를 모르는 우파세력의 순진한 낭만이던가. 
 
김구는 한국독립당만 귀국하기로 작정하였다. 
장제스에게 비망록을 보내 자금지원을 부탁한다. 장기적으로 5억원이 필요한데 우선 5,000만원을 오철성에게 요청하고, 귀국에 대비하여 당헌, 당책을 손질한다. 국내에 시군구(市郡區)에 면(面) 단위까지 조직책을 임명하는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때 한독당에 남아있는 당원은 중국내에 174명, 재미동포 81명이 전부였다.(한국독립당원명부)
이처럼 김구는 중국군이 한국을 점령할 줄 알았고 이들과 함께 귀국하면 한국독립당이 정국을 장악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귀국은 아직 멀었다. 11월까지 더 기다려야한다

 

이승만 건국사(33) ‘조선의 레닌’ 박헌영, 여운형과 남한을 선점하다

▲ 미남 여운형은 체격도 언변도 좋아 남녀 청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나가는 여운형이 연설하는 모습. 남다른 열정과 어퍼컷 주먹질이 청중을 휘어잡았다고 한다.(자료사진)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 온다”
이승만이 수없이 경고했던 말이 현실로, 그것도 전광석화처럼 닥쳐왔다.
“스탈린은 한인부대를 훈련시켜 한반도를 점령하고 공산정권을 세우려 한다”
트루먼과 미국무부에 이승만이 여러 번 예고했던 대로, 대일참전 소련군은 물밀 듯이 쳐들어와 며칠 내로 서울까지 점령할 기세였고 남한의 공산세력도 눈앞에 다가온 ‘공산 천국’의 꿈에 부풀어 일제히 지상으로 뛰쳐나왔다. 이때 전국 형무소에서 석방된 좌익 사범들만 1만 명도 넘는다. 
 
◆해방 그날,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발족...금방 전국 조직화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다급했다. 8월10일 항복 의사만 밝힌 본국의 조선정책이 없어 금방 소련군에 짓밟힐 듯. 아니, 한국인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 77만 일본인들을 보복할 긴박한 위험에 빠졌다. 경무국장 니시히로 타다오(西廣忠雄)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나선다.
먼저 민족세력의 중심인물 송진우(宋鎭禹,1890~1945)에게 교섭하여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송진우는 즉각 거절한다. “일본인들이 후퇴하면 될 것인데. 지금 조선인이 일본인의 지시를 받아 일할 때란 말이냐” 그리고 집에 몰려온 동지들에게 말한다.
“지금은 침묵이 상책, 우리가 움직일수록 일본의 손아귀에 끌려들어갈 뿐이오”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귀국하기만 하면 ‘만사 해결되리라’ 태평이었다고 한다. 
안재홍은 “참 로맨틱도 하시오. 침묵만 하고 앉아있으면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함이라도 타고 인천 항구에 들어올 줄 아시오?” 화를 냈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 1965, 김준연 ‘나만이 아는 비밀,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과 해방정국’ [독립노선] 돌베개. 1984)

▲ 여운형과 마지막 일본총독 아베 노부유키(오른쪽).

다급한 총독부는 여운형(呂運亨)을 부른다. 
소련군이 8월17일경이면 서울에 들어 올 것인데, 레닌의 지도를 받은 친공 인물 여운형이 오히려 훨 유리하다. 소련군 앞에 내세우면 답답한 송진우보다 좋은 방패 아니냐.
8월15일 이른 아침 6시 필동의 정무총감 관사(현 한국의 집 자리)에 달려간 여운형은 즉시 수락하였다. 엔도의 간청에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치안권’을 접수, 식량사정과 경찰 관할권 등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때, 총독부는 활동비라며 일본돈 2,000만 엔을 여운형에게 주었다고 한다. (미군정문서 [주한미군사] 돌베개, 1979)
여운형과 안재홍(安在鴻,1891~1965)은 ”치안권 만으론 안 되고 정치를 장악해야 한다”고 합의, 그날로 여운형은 1년 전에 만든 비밀 측근조직 ‘건국동맹’ 인사들을 소집한다. 
소련치하의 독립을 위해 모든 공산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확인한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을 발족시켰다. 이름은 문재 좋은 안재홍이 즉석에서 지었다. 
안재홍은 ‘공산당 일색’의 조직에 놀라 여운형에게 ”우파도 넣자‘고 몇 번 말하다가 결국 얼마후 탈퇴하게 된다. 
이튿날부터 전국에 지방 ‘건준’이 조직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나타난 ‘건준’에 전국이 열광한다. 
”드디어 이것이 우리 독립정부구나“ 너도 나도 건준 조직에 뛰어들었다. 산불처럼 번지는 ‘빨간 정부’가 며칠 사이 지방도 휩쓸었다.
 
송진우는 약병을 머리맡에 두고 아프다며 이불속에서 꼼짝도 안한다. 
 

▲ 박헌영과 여운형.(자료사진)

◆박헌영, 서울로 직행 ‘8월 테제’ 발표...조선공산당 재건
 
박헌영이 나타났다. 6년 전 출옥한 그는 전라남도 광주에 숨어 똥지게를 지고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벽돌공장으로 옮겨 벽돌을 나르던 중에 뛰쳐나온 것, 8월17일 광주역에 달려가 양복을 사 입고 트럭에 올라탄다. 광주 ‘건준’을 만들고 서울 가는 트럭이다. 
가장 급한 일은 조선공산당 재건이다. 자신이 25세 때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뛰면서 지하활동을 벌여 1925년 창립했다가 무너진 조선공산당 재건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고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번번이 실패하였다. 
 
8월18일 서울에 내려보니 ‘박헌영 동무는 빨리 나와 우리를 지도하라”는 벽보들이 반긴다. 
박헌영은 정동의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Anatoli I. Shabshin)부터 찾아갔다. 은신 중에도 자주 연락했던 ’공산 종주국 지도자‘ 샤브신과 운동방향을 논의한 그는 ’8월 테제’를 발표한다. 그것은 소련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국제공산당)이 1927년에 발표한 ‘12월 테제’의 복사판, 즉 한국은 지금 단계에서는 ‘부르주아( Bourgeois) 민주주의 혁명’으로 공산당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달 9월20일 스탈린이 북한에 지령한 ‘민주기지론’과 똑 같다.
그 사이 장안빌딩에서 만든 장안파 공산당을 부정하고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따르라“고 선언, 소위 ‘재건파 공산당’을 새 출발시킨 것이었다.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적자(嫡子)’임을 자처한다. 그만의 국제공산주의 지도자 자격, 일찌기 소련 레닌이 총괄하는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조선위원회는 지하공산당들이 ‘국제선’이라 부르는 기구, 박헌영은 그래서 ‘레닌의 직계’로서 20대 후반부터 ‘조선의 레닌’으로 떠받들어졌다.

▲ 레닌의 공산주의에 매몰된 청년 박헌영(오른쪽).

▶박헌영 이야기◀
 
그리 되기까지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잠깐 돌아보자. 
충남 예산 신양면에서 1900년 지주의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의 생모는 장터 주막집 과부였다. ‘첩의 자식’이란 눈길과 자격지심에 말없는 외톨이가 된 소년, 얼굴이 유난히 까무잡잡하여 ‘기왓장’이란 별명까지 얻은 소학교시절부터 독서와 공부에 열중하여 경성고보(현 경기고)에 진학한다. 신문물을 접하자 ‘미국 유학’ 꿈을 꾸며 영어실력을 키운다. 3.1운동을 겪으며 졸업한 후, 비싼 여비를 대겠다며 함께 유학 가자던 부잣집 아들 친구가 병으로 쓰러지자 박헌영은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두 달을 못 견디고 1920년 상하이로 밀항한다. 거기서 국제유학준비학교에 들어가 영어공부에 매달리면서 평생 동지들 김단야(金丹冶, 1899~1938), 임원근(林元根, 1899년~1963)을 만났다. 일찌감치 공산주의에 몰입한 김단야와 함께 공산주의에 눈뜬 그에게 여운형이 나타났다. 
소련 코민테른이 1920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를 앞세워 고려공산당을 만들 때 창립멤버였던 여운형은 그때 이르쿠츠크파 상하이 지부장으로 박헌영보다 14세 위였다.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박헌영은 뛰어난 이론가로 맹활약하여 비서가 된다. 고려공산당에 가입, 사회주의연구소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유학생 미인 주세죽(朱世竹)이 나타나자 결혼한다.  여운형은 앞장서 결혼반지 등 준비와 주례를 맡아주고 프랑스조계의 자기 집 뒷방에 신혼 살림방까지 내어준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인문서원, 2020)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여운형, 이동휘, 김규식 등과 참가한 박헌영은 레닌의 ‘조선 공산당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아 국내로 잠입한다. 
신의주에서 붙잡혀 2년 복역한 뒤 출옥한 그는 서울로 들어와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위장취업하여, 전국 지방조직을 만들면서 마침내 조선공산당을 창립한다.
1925년 4월17일 점심시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옆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서 연회를 가장하여 조봉암(曺奉岩,1898~1959) 김단야 주세죽 등 19명이 모여 전격적으로 창당을 선언, 책임비서가 된다.
다음날 18일 박헌영은 종묘앞 훈정동(薰井洞) 사글세 단칸방에서 조봉암 등 30세이하 20명이 고려공산청년회도 일사천리로 출범, 책임비서로서 코민테른에 보고하여 모두 승인을 받는다. 고려공산당도 분열되어 승인을 못 받았는데 이로써 사상처음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공산당이 되었다. 
만25세 박헌영은 일약 국제공산당의 조선 지도자로 우뚝 선다. 이제 우리나이 40세 여운형도 젊은 지도자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한 달 후 5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한 박헌영은 해직된다. 동아일보 영업국장이던 홍증식(충남 당진 출신 공산주의자)이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이동하자 홍증식의 주선으로 박헌영은 8월에 사회부 기자로 취업한다. 그리고 9월 소련 총영사관 개설을 위해 총영사가 부임하였다. 박헌영은 즉각 김단야를 샤르마노프 총영사에게 보내 고려공산청년회와 연계를 맺는다. 
그때 조선일보에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폭탄 사설이 터진다.
총독부는 9월8일자로 조선일보를 무기한 정간 시키고 윤전기에 압류 딱지를 붙였다.
문제의 사설은 인기 잡지 [조선지광] 기자를 거쳐 박헌영과 함께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온 청년회소속 논설위원 신일용(辛日鎔)이 썼다. 한 달을 넘긴 필화사건은 총독부 요구대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 기자 17명을 해고함으로서 끝난다. 

▲ 모스크바의 28세 박헌영과 27세 부인 주세죽. 어린 딸은 소련으로 탈출길에 기차에서 출산한 비비안나.(자료사진)

★미친 짓 3개월,,,소련 망명
박헌영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11월25일 밤 신의주 일경 구타사건. 결혼피로연에서 만취해 소란을 피우던 청년들은 식당주인이 아래층에 일본 순사가 와있으니 조용하라고 말리자 흥분한 청년들이 뛰어 내려가 집단 폭행을 가한다. 그 때 팔뚝에 숨겨 감았던 ‘붉은 완장’을 경찰들이 보았다. 일제 수사를 벌이자 ‘붉은 완장’ 청년 집에서 박헌영의 극비편지가 나왔다. 29일밤 박헌영 부부가 체포되고 전국에서 66명이 연행된다.
다음해 6.10만세 사건을 비롯하며 갖가지 혐의로 2년간 참혹한 고문에 시달린 박헌영은 ‘정신이상’이 왔다. 아내도 못 알아보는 헛소리와 욕설, 자기 대변을 칠하고 먹는 미친 짓을 계속하자 1927년 11월 병보석이 떨어졌다. 
박헌영의 목적은 소련 망명, 두 달 동안 매일 계속한 미친 짓은 ”귀신도 속아 넘어 갈“ 연극이었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청계연구소, 1986)
10개월 ‘요양’이 끝난 다음해 학수고대 하던 날이 왔다. 함경선 철도가 개통되어 첫 운행하는 9월1일, 주세죽의 친정 함흥에서 출발한 열차엔 개통기념 기록영화 촬영팀 전용칸이 있었다. 거기 배우로 분장한 박헌영과 만삭의 주세죽이 섞였다. 청진 쯤에서 진통이 왔다. 딸이었다. 뒷날 부모없이 자란 비비안나.
 
두만강 하구에서 갓난애를 안고 내린 부부는 나릇배로 국경을 건넜다. 그때 영화감독 김용환이 지었다는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 한다. ([박헌영 전집] 창비,2004)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열차 편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한 부부는 1928년 1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공산주의 최고 간부를 교육하는 기관, 아무나 입학할 수 없는 그곳에 박헌영은 특별히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는 곧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3년간 혁명가 수련에 올인하며 조선의 현장지도에 매진한다. ‘1국1당’ 체제로 세계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통제하는 기관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는 극동3국 담당, 조선위원회는 무너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확산이 시급하고 그 전권을 위임밭은 코민테른 지도자는 박헌영이다. 그는 이제 완벽한 파시스트 레닌주의자로서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충성하는 ‘국제선’(國際線)이다. 그의 조국은 소련 공산당, 뒷날 이승만이 ”공산당은 저의 조국 소련으로 가라“고 외쳤던 그 공산당의 주인공이 박헌영이었다.

▲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교육생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단야. 그 옆 중앙이 박헌영. 주세죽은 두번째줄 왼쪽 끝.(자료사진)

★박헌영의 김구 비판
1932년 국제레닌학교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수료한 박헌영은 상하이로 파견된다. 주세죽과 세 살 난 딸, 김단야와 함께 프랑스조계에서 코민테른의 공산당 재건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제작, 국내에 배포하였다. 
이때 박헌영이 ‘윤봉길 의거’에 대하여 김구를 비판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개인적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애가 되며.....안중근을 대대로 팔아먹 듯이 윤봉길의 생명을 제단에 바친 김구 일당이 각 방면으로부터 윤봉길의 값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고, 좀 더 얻어먹으려고 각 신문에다 ‘윤봉길을 시켜 폭탄을 던지게 한 어른은 누구냐? 곧 나다. 나는 누구냐? 나는 김구다’라고 커다란 광고를 냈다는 것은 기괴할 것이 없는 것이나 이런 것이 임시정부 수령들이 하는 ‘조선독립운동’이라니...“ ([꼼무니스트] 제6호, 1932). 박헌영은 공산주의 투쟁 방식은 동맹파업, 농민쟁의 조직화라고 주장했다.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잃다
두 번 째 상하이 생활 1년 6개월 만에 박헌영은 또 체포된다. 거리에서 붙잡힌 그가 주세죽에게 연락할 틈도 없이 일본경찰은 일본으로 서울로 끌고다녔다. 온갖 고문 끝에 6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으로 옮겨진다.
그 사이 상하이의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돌아갔는데, 두 사람은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았다.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바람에 공산당 김단야도 죽는다.
베리야가 ‘반혁명분자’ 대청소에서 70만명 이상을 처형하였다. 주세죽도 체포되어 카자흐스탄에 유배되는데 거기엔 홍범도가 유형되어 와있었다. 주세죽은 방직공장서 15년간 노동하다가 남편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 
아내와 친구의 일을 전혀 모르는 박헌영은 1939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인천, 서울 등지의 아지트에 숨어 다니며 코민테른의 지상명령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을 또 한다. 
이때 ‘아지트키퍼’이던 18세 처녀 정순년과 동거한 박헌영은 41세때 1941년 3월 첫 아들 박병삼(朴秉三, 족보명 박세원朴世元)을 낳았다. 그가 뒷날 법명 원경(圓鏡)이란 스님이 되어, 박원순(朴元淳, 1955~2020, 전 서울시장)과 손을 잡고 ‘이정 박헌영 전집’을 출간한다. 이정(而丁)은 박헌영의 호.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기사(애일신문 1945.9.7일자)와 조각 인선 발표기사(매일신문,1945.9.15일자). 폐간되었던 조선-동아일보가 속간되기 전에, 조선공산당은 매일신문을 기관지처럼 사용했다.

 박헌영, 여운형의 ‘건준’ 장악...‘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박헌영에게 있어서 이념선배 여운형은 멘토로 시작하여 국제공산당 질서에 따라 180도 전도된 상하관계로 변한 것은 앞에서 간단히 보았다. 박헌영이 코민테른의 ‘국제선’으로서 온갖 고초를 극복한 투쟁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기에 ‘건준’도 이제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의 손에 달려있다. 
8월20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발표한 박헌영은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편, 전국 조직을 더욱 확대한다. 
그런데, 8월24일 ‘38선 분할점령’이 알려지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다는 발표를 듣자 비상이 걸렸다. 소련군이 먼저 올 줄만 알았던 좌익세력은 바쁘게 뛴다.
9월4일 경성의전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건준’부위원장 허헌(許憲,1885~1951)의 병실에 박헌형, 여운형, 장안파공산당 지도자 정백((鄭栢,1899~1950) 네 사람이 모였다. 
며칠사이 설왕설래한 ”비상한 시국에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대책“(여운형의 말)의 비밀음모, 그 결론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정부를 세우자, 소련군도 연합군으로 오리라...그 앞에 ”조선인의 정부를 세워놓아야“ 오래된 코민테른의 목표 ‘고려인민공화국’을 실현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마당이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을 정했다.
비가 퍼붓는 9월6일 밤, 테러를 당했던 여운형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섰다.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일을 하지않으면 안된다”
인물 좋고 청산유수(靑山流水) 언변을 자랑하는 ’정열의 선동가‘ 여운형의 말이 끝나자 중앙인민위원회가 구성된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 좌우를 망라한 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12명을 발표한다. 총75명 가운데 52명이 공산주의자들이다. 
그 시간, 미군 선발대가 어둠 속에 인천으로 상륙하고 있었다.

▲ 서울 인왕산 기슭 옥인동 높은 언덕에 우뚝 솟은 프랑스식 건물 윤덕영의 별장, 해방후 9월6일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했다.(자료사진)

미군의 진주 전에 부랴부랴 선포한 ’인민공화국‘ 사무실은 인왕산 기슭에 올라앉은 프랑스식 건물, 친일파 윤덕영(尹德榮,순종비 윤비의 백부)의 호화판 별장이다. 
 
9월8일 미군의 서울 진주와 ’인민공화국‘의 출현에 전국이 들끓는 와중에 9월14일 각료명단이 발표되자 해방정국은 또 한번 소용돌이쳤다.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군사부장 김원봉....박헌영은 빠졌다. 친미지도자 이승만을 ’주석‘에 앉힌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위한 통일민족전선” 전략임을 코민테른 전문가 박헌영이 실토한다.
이승만, 김구 등 귀국하지도 않은 본인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여운형 파는 속았다며 반발했다. 예고도 상의도 없이 공산당이 기습적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전국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남한 7개도, 12개시, 131개군 등 도합150개였다.
무주공산(無主空山:임자없는 빈 산)을 단숨에 집어삼킨 공산주의, 북한은 스탈린이 먹고 남한은 ’조선의 레닌‘ 박헌영이 차지하였다.
미국의 이승만이 귀국하기 한 달 전, 중국의 임시정부가 들어오기 두 달 전이다.
 
지방 인민위원회에는 좌익뿐만 아니라 우익 유지들까지 너도나도 대거 참여하였다. 해방된 나라에 등장한 인민공화국을 36년간 갈망하던 독립국 정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민테른 전략가 박헌영이 38선 이남의 헤게모니(Hegemony)를 선점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을 모르는 미군정사령부가 ’영어 행정‘으로 갈팡질팡하는 사이, 이들 인민위원회가 정부 역할을 도맡았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을 뒷바라지 해주고 영어를 모르는 주민들을 도와지방행정에 앞장섰다. 
그러는 한편 지하에선 좌익의 무장조직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다음해 1946년 3월 미군정장관 아널드(Archibald V. Arnold)가 ’인민공화국‘을 규탄하고 박헌영에게 ’국(國)을 당(黨)으로 바꾸라‘고 간청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 한달 전 2월엔 평양의 소련군정이 가짜 김일성을 만들어서 ’북한 인민위원회‘(정부)를 출범시켰다.
일본이 물러간 6개월 넘기까지 남한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북한엔 공산정권이 등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승만 건국사(34) 스탈린, 38선 봉쇄...‘김일성 단독정부 수립’ 지령

▲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 지령 실행팀. 왼쪽부터 총지휘자 슈티코프, 정치담당 레베데프, 민정사령관 로마넹코. 군사령관 치스차코프.@뉴데일리DB

스탈린은 러일전쟁 때 잃었던 한반도 탈환의 꿈을 접어야 했다. 38선 때문이다.
미국이 제안한 ‘38선 분할 일본군 항복받기’를 거부할 수도 없다. 원자탄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 38선이 아니었으면 남한도 공산지옥이 될뻔 했다. 
1945년 8월16일, 38선에 동의한 스탈린은 오래된 시나리오를 반토막으로 줄여나갔다. 서울로 진격하던 소련군은 U턴, 개성 남쪽을 내주고 38선 이북으로 물러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동해안으로 남진하던 소련 태평양 함대는 원산항에서 발이 묶였다.
스탈린이 ‘일단 포기‘한 남한은 그러나 ’레닌의 제자‘ 박헌영이 이미 완전 장악하였으니 남북한 모두 공산당이 차지, 레닌과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는 사실상 한반도를 다 가진 셈이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 대신 북한에 단독정권 수립 계획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인다.
38선을 전면 봉쇄하여 ’국경‘으로 만든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그랬듯이 북한 정권의 간판인물로 김일성을 점찍어 북한으로 들여보낸다. 동시에 ’북조선 소비에트공화국‘ 설립 총책 슈티코프에게 유명한 ’9.20 지령문‘을 하달한다. 북한단독정권 구성방법을 수정 보완하라는 재촉명령이었다. 이것은 뒷날 ’이승만이 분단원흉” 운운 책임전가 선전하던 스탈린이 사실은 해방과 동시에 자신이 먼저 단독정권을 세우고 분단을 고착화 시켰음을 웅변하는 역사의 ‘증거물’이다. 그것도 이승만이 귀국하기 한 달 전, 김구의 임시정부가 들어오기 두 달 전에! 

▲ 훈련중인 러시아 태평양 함대.(러시아군 홈피 캡처)

◆스탈린 “부산까지 점령하라” 태평양 함대에 비밀명령...‘38선’ 나오자 U턴
 
소련군이 평양을 점령한 것은 8월2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열흘만이다.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죽고(4.12), 히틀러가 자살(4.30)하자 독일이 항복(5.9)하기 전부터 시베리아 열차로 극동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선선이 내준 선물, 요동반도-블라디보스톡 만주철도와 사할린 남부, 쿠릴열도부터 먹기 위해서다. 
어찌 그것으로 성에 차랴. 러일 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긴 한반도를 다시 찾아야한다.
 
진작부터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함대에는 “부산을 점령하라”는 비밀명령이 주어졌다. 소련 해병대 상륙부대는 동해안 속초부터 삼척, 포항을 거쳐 부산까지 상륙작전을 짜고 원산항에 입항, 명령을 기다리던 8월20일 돌연 ‘중지’명령이 내려왔다. 소련이 미국의 38선분할관리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38선 이남 점령 작전이 모두 취소되었다고 했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
 
★해방 열흘만에 38선 전면 봉쇄...“소련군이 해방군‘ 포고문
소련군은 평양 점령과 동시에 38선의 남과 북을 단절시킨다. 8월24일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 철도 운행을 중단, 25일엔 경의선(京義線:서울-신의주)을 끊어버린다. 한반도를 잘라 동과 서를 잇는 38도선 봉쇄명령을 내리고 전역에 경비부대를 배치, 북한과 남한의 통행과 교류를 일제히 차단하였다. 남북한의 통신을 끊고 각종 물자와 인적 통행을 일일이 검문 통제하였다. 해방 열흘 만에 소련은 38선을 ‘국경선’으로 만들어놓고 ‘분단 정권’ 출범을 향하여 대대적인 ‘북한 개조’,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돌입한다. 
 
 
평양의 평안남도 도청이 소련군사령부가 되었다. 26일 평양에 들어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1900~1979)가 북한 군정사령관이 되어 포고문을 뿌렸다. 그 포고문엔 날짜도 없었다. 동유럽에서 쓰던 것에 국명만 바꾼 것이리라. 
포고 내용은 일본을 패망시켜 한반도를 해방시킨 미군의 ‘해방’을 가로챈 것, 일주일도 안되는 소규모 전쟁으로 그친 소련군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허위 선전한 심리전술이다.
”조선인들이여! 소련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약탈자를 구축하여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시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렸다. 소련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조선중앙통신사, 1949)
 
이 포고문은 다음달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맥아더 포고문’이 ‘점령군 명령’이라 대비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들을 현혹하는데 두고두고 사용한 선전물이다. 미군 포고문은 소련군이 말한 ‘조선인의 자유도 행복도 지원 다짐’도 언급함이 없이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군사작전용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군정은 처음부터 그랬다.
 
 

▲ 북한을 점령하는 소련군.ⓒ월드피스

소련군의 무차별 약탈-성범죄 만연=‘자유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포고문과 달리 소련군의 무차별 만행은 북한을 하루아침에 무서운 공포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패전국 일본의 재산은 ‘배상금’으로 가져간다며 북한의 주요산업시설을 뜯어내 소련으로 반출하기 시작하였다. 동양최대의 수력발전소 수풍댐을 비롯하여, 흥남 비료공장, 무수한 광산의 지하자원을 무차별로 실어나르고, 지주들의 쌀 창고들을 몽땅 털어내며, 이에 더하여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유린하는 성폭행이 북한전역에서 일어났다. 마을마다 청년들이 밤낮 경비를 서고 매춘업소와 술집을 서둘러 설치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다. 소련 병사들은 강탈한 시계와 보석들을 손목에 줄줄이 꿰 차고 닥치는 대로 민가 약탈에 광분하였다. 
‘해방군’이 아니라 패전국을 짓밟는 정복자들, 그 군대 30%가 형무소에서 징발한 강력범 출신이었다고 한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평남 건국준비위원장 조만식(曺晩植,1883~1950)을 호텔로 불러 만났을 때, 조만식이 대뜸 ”소련군은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따진 것이 그 참상을 말해준다. 치스차코프는 판에 박은 듯 ‘소련군이 진주한 목적은 조선 해방’이라며 ”나는 모르니 민정담당자에게 물어보라“고 딴청이었다.

▲ 김일성(왼쪽)을 에워싸고 조련시키는 슈티코프(중앙)와 로마넹코(오른쪽).

◆스탈린, 김일성 첫 면접...”이승만보다 먼저 북한에 보내라“
 
스탈린이 북한 공산화 지휘감독을 맡긴 사람은 연해주 제1극동방면군 군사회의 위원장 슈티코프(Terentii F. Shtykov, 1907~1964)였다. 벨라루스 태생인 그는 이미 핀란드 등의 공산화 작업을 성공시켰던 ‘위성국 만들기’의 달인이다. 그는 평양에 오지도 않고 치스차코프 북한 군정사령관과 부사령관격인 정치공작담당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1901~1992)를 분신처럼 부리는 ‘북한 총독’이었다. 스탈린의 북한용 하수인 3총사라 할까. 
레베데프는 기록과 증언으로 이런 중대 사실을 가르쳐준다. 
”해방 후 남북한에서 공산당이 벌인 일 중에 슈티코프의 결재 없이 진행된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레베데프 비망록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김국후, 1993)  
이 말은 바로 해방 3년간 남한서 벌인 공산당 폭력사태를 스탈린이 결재했다는 말이다. 슈티코프는 남북한 공산당의 수많은 ‘작전’들을 빠짐없이 ‘당중앙’(스탈린)의 결재를 받아 시행-감독하였기 때문이다. (전현수 옮김 [쉬띄꼬프일기 1946〜1948], 국사편찬위원회, 2004) 

▲ 중국 빨치산 김성주(가운데)가 소련으로 도망친후 1942년 여자빨치산 김정숙(오른쪽)과 아들 김정일(왼쪽)을 낳았다.

★김일성, 원산항에 입항...”김성주입니다“ 첫 인사
 
레베데프가 평양에 도착한지 며칠 후 슈티코프의 긴급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다음 달에 제88특별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평양에 보낼 테니 주택과 자동차, 생필품을 지급하라“는 지시였다. 그때 레베데프는 ”일개 대위한데 무슨 특혜인지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앞의 책), 9월이 되자 또 슈티코프가 전화했다. 김일성이 도착하면 공산당에 입당시키고 소련군이 경호할 것이며 비밀리에 지방시찰을 시키라는 말이었다.
 
드디어 추석 전날 9월19일 오전, 원산항에는 소련 선박 푸카조프(Pukajov)호가 들어왔다. 마중나간 소련군 장교들과 원산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누가 김일성인지 몰라 먼저 내린 소련군 조선인 장교에게 물었다. 아니었다. 그 뒤에 새파랗게 젊은 청년 장교가 내렸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악수하는 젊은이가 ”김성주입니다“ 인사하는 것이었다. 대위계급장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니, 김성주가 왜 김일성이란 말인가?
 
김일성은 누구?=평양 대동군에서 1912년 태어난 김성주(金成柱)는 묘지기였던 김형직(金亨稷)과 교회장로의 딸 강반석(康盤石)의 3형제중 장남이다. 14살에 만주로 가서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 19살에 중국 공산당원이 되고 33년 중국공산군 유격대, 빨치산이 된다. 대장이 마적출신이었다. 
한국말보다 중국어가 익숙해진 그는 이리저리 전전하며 ‘마적질’을 거듭한다. 중국 이름은 ‘진지첸’이다. 1937년 일어난 ‘보천보 사건’에서 김성주의 활약은 미상이다. 당시 국내 신문들을 보면 전투중 ‘김일성(金日成)이 붙잡혀 참수 당했다’고 보도하였다. 또 다른 김일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신화로 만든 보천보전투는 마을 우체국을 습격한 무장강도단 비슷한 사건인데 그 상황도 공적도 피해도 한껏 부풀려져 있다. 거기서 죽었다는 김일성의 이름을 김성주가 썼는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죽었다는데 여기저기 김일성들이 튀어나온다. 언제부턴가 항일전의 영웅처럼 만들어진 ‘김일성 설화’를 유격대나 마적까지도 자기라고 내세운다. 한자표기도 가지가지--金日星, 金日成, 金一星, 金一成 등이다. 김성주도 한자로 金成柱, 金聖柱, 金誠柱로도 썼다. 
 
보천보사건 한달 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공산 빨치산은 항일전에 나섰다. 그때 ‘동북항일연군’ 유격대원이던 김성주도 참여한다. 일본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도주하던 빨치산부대는 충치허(紅旗河) 전투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때 김성주는 여자빨치산 김정숙과 결혼, 1940년 소련 국경을 넘어 하바롭스크 부근에 머물던 중에 2년후 김정일을 출산한다.  

▲ 1937년 11월17일자 조선일보가 보도한 '보천보전투' 기사 제목은 '김일성을 붙잡아 참수'했다는 것.ⓒ조선DB

▶스탈린과 김일성=1942년 6월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에 대승을 거두자 스탈린은 대일참전을 염두에 두고 제88특별여단을 만든다. 서쪽에서 독일과 싸우면서 동쪽에선 일본과 싸울 때 전선 후방의 첩보와 파괴활동을 맡길 특수임무부대, 도망쳐온 중국 군인들을 모을 때 김성주도 들어가 빨치산 공로를 내세워 대위계급장을 딴다. 이젠 중국을 버리고 소련국적을 얻고 소련공산당원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어떻게 시베리아의 말단 장교 김일성을 알았을까. 스탈린의 충복 베리야가 추천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창순 증언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8연대는 스탈린이 내무인민위원회(NKVD->KGB) 위원장 베리야의 직속으로 맡겼기 때문이다. 북한공산화 얼굴을 찾는 스탈린에게 평소 김일성 이야기를 들었던 베리야가 천거했다고 한다. 이는 88여단장과 소련군 지휘관들이 보고를 받는 극동군사령부가 김일성을 지켜보고 베리야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다. 
레베데프의 증언은 ”소련극동군사령부가 김일성을 장차 북한의 군부 지도자로 내정하고 입북시켰다고 했다.
「소련군정은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 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이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김용삼[김일성-신화의 진실] 북앤피플,2016)
그리하여 떠돌이 빨치산 김성주는 소련군정에 의해 ”조선인민의 '전설적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으로 둔갑“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9월초 김일성을 불렀다. 전용별장서 4시간 면접후 ”쓸 만하니 소련군이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메클레르 증언, 김국후 앞의 책)
이는 그동안 동유럽에서 모스크바로 망명했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각국 지도자로 선발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즉, 공산주의 여부는 불문,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에 ‘충성’할 수 있는 자만 합격이다.
김일성의 북한 귀환 날짜가 예상보다 앞당겨졌다.
”그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곧 귀국할 예정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고 레베데프가 적어 놓았다. (레베데프 증언, 김국후 앞의 책)
당시 김성주 주변 인물들은 ”김성주는 중국에 살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면서 북한 우두머리가 되기엔 ‘거짓과 추악한 역사가 많아 걱정’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고 한다.

▲ 조만식(왼쪽)과 김일성(오른족)을 첫 대면 시킨 소련군 메클레르(중앙). 1945년 9월30일 평양 일본식당 '하나부사'(花房)에서.

◆스탈린의 ‘9.20 지령’...”북한에 단독정권 세우라“
 
김일성의 입북 다음 날 9월20일자로 된 스탈린의 암호지령문이 극동전선 총사령관과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회의에 날아왔다. 북한점령정책 7개항이다.
한마디로 북한지역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문이다. 이 암호문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 스탈린’임이 밝혀지면 소련이 분단 책임을 져야 하는 국제적 궁지에 몰린다. 미국의 38선 제안은 ‘분단’이 아닌 것을 스탈린이 처음부터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공산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1993년에야 비밀이 해제되었다. 
 
★스탈린의 지령
1. 북한 영토안에 소비에트 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않으며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2.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
3. 붉은 군대는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결성을 원조할 것.
4. 북한 주민에게 붉은 군대가 진주한 목적은  일본침략자 분쇄이지 한국 영토 획득 목적이 아님을 설명할 것.
5. 북한의 사유재산 및 공공재산은 소련군당국의 보호아래 둔다는 점을 설명할 것.
6. 소련군은 기율을 지키고 주민의 감정을 해치지 말 것.
7. 북한 행정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수행할 것.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1-2항과 7항이다. 소련 위성국이란 인상을 피하면서 북한 독자적 공산 정권을 세우는 전술을 강조한 것으로서, 그 지휘는 연해주 슈티코프가 하라는 명령이다.
‘반일적인 정당과 조직’ 연합을 기초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만들라는 것은 박헌영의 ‘8월테제’와 같은 것으로 코민테른의 단계적 혁명전술의 기본이다. 한국은 ‘자본 혁명’인 부르주아혁명단계, 자본가 지주등 민족세력 부르주아 계급을 끌어들여 반항자는 ‘친일파’로 제거하고 순응자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로 써먹고 숙청해버리는 전형적 공산화 ‘민족통일전선’ 전술, 슈티코프의 전공이다. 소련군의 만행까지 보고 받은 스탈린이 민심을 달래면서 목적 달성하라는 경고까지 담았다.
 
이미 김일성 담당 교육자 메클레르는 ‘조만식을 앞세우고 김일성은 뒤로’ 하는 작업에 나서 두 사람을 호텔 만찬에 불렀다.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선생님, 김일성입니다“ 큰절로 인사했는데 스물아홉살 연장자 조만식은 ‘너무 젊은 김일성’에 놀라 3시간동안 말도 안했다고 한다. (오영진 [하나의 증언] 중앙문화사, 1952)

▲ 김성주(가운데)를 '김일성'으로 교육시킨 소련군 메클레르(오른쪽)와 강 미하일(왼쪽). 귀국전 소련 88연대에서 받은 훈장을 찬 김일성. 메클레르는 훈장도 떼고 양복을 입혀 공산주의를 가르치고 연설법까지 훈련시켰다고 한다.

스탈린의 지령에 맞춰 평양엔 별칭 ‘로마넹코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북한 민정을 담당할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로마넹코(Andrei A. Romanenko,1906~1979)는 극동에서 태어나 소련공산당 엘리트가 된 ‘조직 활동가이며 정치일꾼’이었다. 그는 슈티코프가 선발해준 분야별 전문 장교들을 데려와 ‘행정, 사법, 보안, 재정, 산업, 통신, 교통 등 민정기구를 평양세무서 건물에 간판도 없이 설치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북한 개조 개시. 
 
지령 하달 사흘 만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명의로 <정치노선에 대하여>란 문서가 나왔다. 그것은 ”각 계급을 총망라한 대동단결로 단하나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히 숙청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함께 발표한 23개 ’강령‘의 제1항은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였다. 북한 전역에 ’인민위원회‘ 설립을 위한 선거 태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바로 ’흑백 투표‘의 도입이다. 공산당이 지켜보는 지역 투표에서 누가 반대투표를 하겠는가.  
 
로마넹코 사령부는 지방마다 경무사령부를 설치하고 인민위를 감시 감독한다. 
김성주는 평남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달고 지방을 누비며 소련의 코치에 따라 ’김일성 공산당‘을 조직하느라 바쁘다. 조선공산당의 중심은 북한이어야지 남한의 박헌영이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한편 메클레르는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 만들기 교육에 진땀을 흘린다. 김성주가 공산주의 이론은 고사하고 한글로 연설문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 교육을 마친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공식 데뷔하는 행사, 1945년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 '붉은 군대' 환영식. 뒷줄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로마넹코와 치스차코프. 이들이 만들어낸 '스탈린의 인형' 김일성이 앞에 서있다.

◆김성주, ’김일성‘으로 공식데뷔...”가짜다“ 술렁대자 발포
 
10월8일 김성주와 박헌영이 처음 만났다. 장소는 개성 북쪽의 소련군 38선 경비사령부, 로마넹코 민정사령관이 서울서 온 박헌영과 평양서 데려온 김성주를 앞에 앉혀 놓고 ’담판‘을 벌이는 자리였다. ’담판‘이란 지난 며칠사이 서북5도 인민위원회, 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예비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사항들에 대하여, 박헌영의 반발을 막고 결론을 내자는 강압 회동이다. 박헌영이 ’예스‘만 하면 된다. 
 
★소련군정, 김성주 시켜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정
박헌영과 김성주의 주요 합의는 다음과 같다.
조선공산당의 중심은 서울 아닌 북한이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박헌영이 서울에 있지 말고 평양으로 오라“는 것. 이것은 달래기일뿐 사실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조직은 이미 끝나 있었다. 논란 끝에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分局)‘을 설치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합의가 아니라 박헌영이 어쩌지 못하고 ’양보‘한 것이다. ’장안파 공산당‘의 해체는 쉽게 수긍했다. 로마넹코가 주도하는 회동에서 스탈린 지령문 실행이 착착 이루어진다.
 
10월13일 ’열성자 연합대회‘가 비밀회의로 열렸다. 김성주는 ”스탈린 대원수께 감사“를 드리고 박헌영 동지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초점은 공산당 조직문제, 김성주는 남조선 공산당을 ’인텔리 놀음‘이라 정면 비판하고 북부조선분국을 당중앙 직속으로 설치한다고 선언하였다. 박헌영의 공산당이 문제가 많으니 북한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북부조선당을 만들겠다고 못을 박았다. 결정적인 것은 박헌영이 9월6일 선포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이 연합대회가 공식 부정한 것이었다. 
이로써 김성주가 수령되는 ’김일성 조선공산당‘이 태어났다. 그래서 북한은 10월10일을 당창건 기념일로 만들었다. 슈티코프-레베데프의 정치공작은 빈틈없이 실현되고 있었다.

▲ 김일성과 박헌영(오른쪽)은 1945년 10월8일 개성 부근 소련군 38선경비사령부에서 로마넹코가 처음 만나게 해줬다. 박헌영을 굴복시키기 위해서.(사진은 1948년 4월 김구가 참석했던 평양의 남북정당연석회의때)

★붉은 군대 환영대회...33세 김성주, ’김일성‘ 첫 신고
추석도 지난 가을 하늘 드높은 일요일, 평양 공설운동장엔 5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10월14일 오후1시 붉은 군대 환영대회, 소련 군정은 이 단상에 김성주를 처음 공개한다. 
스탈린이 점찍어 보낸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교육시켜 연설문마다 써주고 읽는 법도 훈련시킨 소련 군정, 특히 ’가정교사‘ 메클레르는 한껏 긴장하였다. 
단상엔 레닌과 스탈린의 대형초상화를 걸고, 태극기와 소련기를 중심으로 연합국 깃발을 세운 앞에 치스차코프, 레베대프, 로마넨코 등 소련군사령부 간부들이 앉고, 조만식과 김성주도 앉았다. 소련국가를 먼저 연주하고  올드랭자인 곡에 맞춘 한국 애국가가 울려펴졌다
레베대프 인사말에 이어 조만식이 30분이나 연설을 한다. 이어서 김성주가 마이크 앞에 섰다.
로마넨코가 나와서 ”김일성“을 소개하며 박수를 유도하였다. 
김일성을 보기 위해 몰려왔던 군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명성을 들었던지라 노숙한 장군일줄 알았는데 새파란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김성주를 아는 사람들은 '속았다'며 분노하였다.
 
김일성이 된 김성주는 소련장교가 써주어 연습한 연설문을 읽기 시작하였다. (레베데프 증언, 앞의 책). 연설 내용은 그가 그동안 귀가 아프게 듣고 뒤풀이 연설했던 ’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주입하는 판박이였다.
 
술렁거림은 쉽게 갈아 앉지 않았다. ”가짜다“ 여기저기 수근거림이 들리자 소련군이 총을 뽑았다. 빵 빵...소란은 금방 조용해졌다.(오영진, 앞의 책).

 

이승만 건국사(35) 돌아온 영웅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귀국후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연세대이승만연구원

어느 날 갑자기 항일 독립운동이 끝났다. 
독립투쟁이 아닌 미국이 일본을 원폭 두 방으로 항복시켰다.
독립운동가들은 허탈했다. 남의 힘으로 투쟁 대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다음 순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우리 땅‘을 찾았다는 기쁨은 짧았다.
독립운동가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어느날 갑자기 한반도 허리를 38선이 가로막았다.
“일본만 없어지면 삼천리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인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고 남한은 미국이 점령했다. 한반도는 승전 강대국들 차지다.
전혀 새로운 세상, 새로운 판세!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독립운동가들은 우왕좌왕이다,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독립국가를 세워야 하는데 속수무책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를 만난 듯 북한의 소련 품으로 몰려갔다. 항일투쟁의 목표가 이것 아닌가. 그동안 갈고 닦은 코민테른의 전략전술대로 삼천리 붉은 강산 ’인민공화국‘을 만들면 된다. 중국에서 해방순간 그들은 임시정부를 해체하라 외쳤다. ”너희는 이제 용도폐기야.“
그 임시정부는 어떤가. 소위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기관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와 임정인사들은 안절부절이다. 항일투쟁 밖에 몰랐던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상황 전개 앞에서 갈팡질팡이다. ”소련이나 미국은 곧 물러가겠지. 임정이 귀국해서 집권하면 만사해결 되겠지...“ 하지만 자신이 없다. 중국 장제스에 구원을 청해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장제스는 해방후에도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에 망연자실이다. 
 
이승만이 돌아온다. 37세에 떠난 조국, 70세에 귀국하는 이승만은 달랐다. 
해방순간 그는 허탈하지도 않았고 38선 출현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견했고 얄타회담의 ’밀약‘을 예상하고 분노하였으며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싸워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점령하고 공산정권 세운다”는 예고와 경고를 얼마나 했던가.
세계는 이미 항일투쟁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소련 공산세력과 자유세계의 이념전쟁 시대가 다가왔음을 미국보다 먼저 느끼고 확인하고 이에 대비하려 주먹을 쥔 이승만이다. 
해방되자마자 ’건국외교‘부터 시작한다. 이승만은 미국, 영국, 중국과 소련 스탈린까지 강대국 정상들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축전을 보내고 대한민국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 외교를 서둘렀다. 침략 예상자 스탈린에겐 ’한반도 평화‘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여기서 ’유엔‘에 주목해야 한다. 해방 전부터 그는 유엔의 힘을 독립에 이용하고자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년 후 유엔의 결의를 얻어내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해방정국 3년간 이승만의 독립투쟁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차원이 달랐던 까닭이오, ‘1인 투쟁’ 이승만만이 건국할 수 있었던 새 역사 창조의 글로벌 리더십이다. 그것은 약소국 지도자로서 불굴의 신념과 불굴의 신념이 낳은 불굴의 용기와, 평생 공부한 동서양의 지혜, 세계판도를 아우르는 투철한 통찰력과 예지력이 네트워킹한 전략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선견지명의 역사적 혜안이 설계한 ‘이승만표 건국전쟁’의 발길을 따라 가보자.

▲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실세 소련간첩 알저 히스.ⓒ뉴데일리DB

미국, ‘반소주의자’ 이승만의 귀국을 막다
 
소련 빨치산 33세 김성주가 평양에서 ‘김일성’으로 변신하여 첫 공개신고식을 마친 이틀 후, 10월16일 오후 김포공항에 미군 군용기가 내려앉았다.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The Bataan)이다.
그가 나타났다. 만70세 넘은 이승만이 미군복차림으로 내린다. 군복은 군용기 탑승의 매뉴얼이다. 망명 33년 만에, 유학부터 치면 41년 만에 돌아온 조국, 환영인사는 아무도 없다. 미국이 이승만의 귀국을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왜 해방을 두 달이나 넘겨서야 귀국했나? 소련과 신탁통치를 추진해야하는 미국은 ‘반소’ 이승만의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무부의 소련 간첩들이 가만있겠는가.
그때까지도 ‘무국적’을 고수하고 있던 이승만은 일본이 1차 항복의사를 밝혔던 8월10일 귀국 여권을 신청하였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한 달 지나서 일단 여행권을 재가하였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서는 일본 점령사령관 맥아더의 ‘입경허가’를 받아야하고 교통편의를 허용하는 전쟁부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아직도 한반도는 일본 땅, 아니 미국의 점령지다. 
차일피일 세월만 흘러가는 가운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여권 취소‘ 통보였다. 
이유는 여권신청서에 기재한 ‘주미고등판무관’이란 신분이 부절적하다는 것, 그 신분명칭은 4년전 임시정부가 부여한 ‘주미외교위원장’이란 직명을 ‘High Commissioner to the United States’로 영어 표기하여 사용해온 것인데 이제 와서 새삼 왜 시비일까. 
또 일주일이 지난 9월21일 다른 통보가 왔다. 이승만의 신분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Korean national returning to Korea)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바꿔서 신청하라고 했다. 즉, 임시정부 직함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 무명의 개인자격으로 가라는 이야기이다.
이승만의 직명표기대로 ‘입경 허가’를 내준 합동참모본부의 스위니 대령은 이미 ‘처벌’까지 받았다고 했다. (올리버 [신화속의 인물 이승만] 앞의 책). 
이승만의 귀국을 돕기 위해 앞장선 굿펠로가 이리저리 뛰어도 ‘국무부는 더 이상 이승만의 여행계획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을 막았다. 
 
이런 시비의 주역은 새로 부임한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와 일본과장 딕오버(Dickover)였다. 중국 근무시 중국공산당에 기울었던 빈센트는 루즈벨트 측근이자 소련 간첩인 알저 히스(Alger Hiss)와 함께 사상적 문제아임이 밝혀진다. 1951년에 전 소련간첩에게 고발당한 빈센트는 ‘공무수행 부적격’ 판정을 받고 1953년 덜레스 국무장관 요청으로 축출된다.
 
이승만은 10월1일자 메모랜덤에 ”이들 국무부 안의 친공친일분자들이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아래 두기로 스탈린과 비밀협약을 만든 자들이고, 자신의 여행까지 막고 있다“고 적었다.(이정식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우리 대통령 왜 안데려 오느냐“ 국민들 성화에 하지 나서다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은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Hodge)도 원하고 있었다. 지방시찰한 민정장관 아널드가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왜 데려오지 않느냐’는 주민들의 성화에 놀라 건의하자, 이를 하지가 직속상관 맥아더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을 찾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전문을 받은 전쟁부 소속 군사정보부는 이승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비밀리에 동양노인을 찾았다
마침내 이승만은 10월4일 밤 민간 비행기로 워싱턴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 군용기로 바꿔 타고 멀리 괌(Guam) 섬을 경유하여 10월10일 도쿄 아쓰기(厚木) 기지에 도착한다. 하지는 10월12일 도쿄로 건너가 이승만을 맞이하였다. 
이승만은 하지와 만나 국내상황을 점검한 뒤 맥아더와 장시간 요담한다. 맥아더는 하지에게 ”이승만을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하라‘고 권고, 하지는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임병직 ’워싱턴 외교위원부 장거리 전화‘ [북미시보] 1945,10.18일자.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은 맥아더와 회담을 더 한 뒤, 10월16일 맥아더가 내준 전용기 ’바탄‘을 타고 김포에 내린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독립운동이다. 아니 ’건국전쟁‘의 첫 걸음이다.

▲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망명33년만에 귀국한 이승만 박사에게 조선호텔 최고의 스위트룸을 제공하였다. 사진은 일본이 1914년 건축한 경성철도호텔의 일제시대 모습. 오른쪽 건물은 1966년 철거후 신축한 오늘의 조선호텔ⓒ뉴데일리DB

◆“나는 평생 싸움꾼...건국 위해 당당히 싸우겠다”
 
하지(52세)는 7순의 이승만을 극진히 모셨다. 숙소는 옛 왕궁터 조선호텔 3층에 식당과 회의실이 달린 스위트 룸, 맨 먼저 윤치영, 허정이 달려왔고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장덕수, 김도연, 김준연 등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청년시절 일본이나 미국 유학중에 이승만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거나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다. 
 
★국내파 우익진영 ’한민당‘ 창당=식민시대 온갖 시련을 겪은 국내파 우익진영의 움직임은 왠지 참 느리다. 해방후 소련군 진주설에 긴장하고 임시정부의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제각기 여러 정당을 구상하다가 8월 말에야 ”미군 진주“ 소식을 접하고 ’대동단결‘로 모였다.
9월6일 오후4시 종로의 협성실업학교 강당에서 700여명이 ’단일정당 결성 통합발기총회‘를 열고 ’강령‘과 ’정책‘을 기초하며 ’선언‘을 채택한다. ”우리는 맹세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를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1979)
이날 밤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한민당은 열흘 후에야 창당식을 천도교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하고 ”미군정부에 적극 협력하면서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과 대결하겠다“는 당노선을 밝혔다. 수석총무 송진우는 사실상 당 대표가 된다. 이 한민당 간부들이 청년시절 우상이자 임정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 1945년 9월6일 창당한 한국민주당의 주요인사들. 김성수, 송진우, 이인, 장덕수(왼쪽부터)ⓒ뉴데일리DB

◆첫 기자회견 ”38선은 소련의 요구인가?“ 미-소에 일격
 
귀국 이튿날 10월17일 미군청정 회의실에서 열린 첫 귀국 회견에서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에 일격을 가한다.
”33년만에 그립던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입을 연 이승만은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감상만을 말하고있을 처지가 아니다. 나는 해외에서 싸움을 해온 싸움꾼이다. 건국을 위하여 동포의 살길을 찾아 당당히 싸우겠소”라며 “지금까지 미국 외무성과 싸워온 사람으로서 우리가 지금 이 기회에 정신을 못 차리고 뭉치지 않는다면 이 기회는 다시 얻기 힘들다”고 강조하고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미국 기자가 38선 문제를 제기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승만은 거침없이 속내를 쏟아냈다.
“38선 문제는 미국서도 전혀 몰랐다. 소련 쪽의 요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미국 내에서도 이 38선 분할점령이 미-소 연합군이 합작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으며 나도 그 진실을 묻고 싶다....우리가 뭉쳐서 협력하면 해결될 줄 안다. 북한 점령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실지(失地:북한)의 완전회복이 급선무이다.” ([매일신문] [자유신문] 보도)
이 발언은 이승만이 얄타회담의 ‘밀약설’을 폭로한바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를 팔아먹은 게 아니냐’는 평소의 의구심을 다시 한번 폭로하면서 미국무부의 ‘친소친일분자’들을 공개 공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 회복의 장애물 소련 제거하자‘는 주장이다.
뉴욕타임스는 기사와 사설로 크게 보도하였다. “이승만이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명”했다며 얄타 폭로사건을 되짚으면서 “한국은 38선 분할에 대하여 진실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지지하였다. 
미국무장관 번스는 놀라고 당황하였다. 미군정에 협력하겠다는 이승만의 출국 서약에 주의를 환기시키라는 전문을 일본주재관에게 보낸다. 이는 국무부 안의 알저 히스와 빈센트 등 친소세력이 번스에게 압력을 가한 것임은 물을 필요도 없다. 

▲ 독립촉성회 결성을 보도한 [신조선보] 1945.10.25 (자료사진)

◆1주일 만에 ‘독립촉성회’ 결성...”신탁통치 막자“
 
독립운동의 신화적 인물 이승만의 등장이 일으킨 열풍은 가히 ‘이승만 신드롬’이라 할만했다.(손세일, 앞의 책).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복간하기 전, 좌경적 신문들이 다수인데도 ‘우리의 최고 지도자’ ‘독입운동의 선구자’ ‘건국의 아버지’ 등 이승만을 추앙하는 특집들로 도배하고 일반 기사와 사설에서까지 이승만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승만 바람’이다. 
특히 박헌영과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했던 여운형은 ”민족 최고의 지도자로서 잘 지도해 주실 것이므로 충실히 복종할 뿐“이라며 ”동양화도 한시도 잘 하시며 동양 사상을 잘 알고 계신다”고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인공 부주석으로서 간부들을 데리고 ‘인공 주석’ 수락을 기대하며 이승만을 찾아갔다. 이승만은 ‘인공 대표’는 만날 수 없고 여독이 안 풀려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뭉치고 뭉쳐서 38선을 없애고 북한을 찾자. 나에게 계획이 있다”
“우리의 급한 문제는 삼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따르겠다면 동포를 위하여 죽기를 배우자. 북한문제가 캄캄하다. 그러나 나에게 계획이 있다. 우리의 돈과 힘을 모아서 조국에 바치자. 이 국가의 목숨을 살리자”
날마다 조선호텔에 몰려드는 인사들을 향하여 “강토환원의 장애는 제거되어야 한다‘며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땅을 찾아야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되풀이 역설하는 이승만이다. 10월20일 연합군환영대회의 시민들 앞에 처음 나선 자리에서 건국은 ’남북통일 독립‘이어야 하고 38선을 없애기 위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부르짖었다.
 
귀국 1주일이 되는 10월23일 조선호텔에 한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좌우 50여개 정당-사회단체의 대표 200여명이 모였다. 통일독립을 위한 정파통합 회의다.
“지금 이 자리는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다. 세계 각국이 이 한 곳을 주시하고 있다.”
이승만의 개회사는 필생의 목표를 향한 필살의 애국선동 열변으로 변한다.
“모든 정파가 한덩어리로 뭉칩시다. 이 자리는 대한독립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나는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아니한다. 여러분이 뭉쳐서 대한동포에게 실감을 가르쳐라.
우리가 죽으려면 죽고 살려면 살길이 이 자리에 있다. 깊이 생각하라. 나의 묻고자 하는 것은, 듣고자 하는 것은, 어느 정파의 편협된 의견이 아니오. 3천만 민족의 원하는 바를 대표하는 부르짖음이다. 타국사람들에게 대한을 대표할 수 있는 책임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방을 나갈 때에는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나가도록 약속하자.”
이어진 토론에서 ‘친일파 처단’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통합’ 등 논쟁이 이어지자 여자국민당의 임영신이 일어나 ‘모든 것을 무조건 이승만에게 일임하자’고 제의하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모임의 명칭은 ‘건준’을 작명했던 안재홍이 또 지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의 탄생. 그것은 강대국들의 ‘신탁통치’ 음모를 미리 막기 위해 좌우가 결속한 한국인의 ‘민족통일결집체‘를 만든 것으로서 ‘통일정부’ 창출의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 직접 작성...“38선 철폐–신탁통치 반대”
이승만은 ‘4대연합국과 아메리카 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직접 만들었다.
좌우를 망라한 최대의 통일정부추진 단체 ‘독촉’의 이름으로 38선 철폐와 신탁통치 반대를 해결하려면 4대연합국에 결의서를 보내자며 영문과 국문으로 자신이 결의문을 썼다.
첫째, 남북의 점령구역 분활은 가장 중대한 과오이다. 우리와 무관한 국토양단의 책임자를 알아야하며 조선의 운명에 중대 관계가 있는 연합국의 명백한 성명을 요구한다.
둘째, 조선에 암담한 공동신탁제가 제안되었다는 보도에 경악한다. 미국에 또 다시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이다. 미국이 일본말만 듣다가 진주만의 비극을 초래하였거늘,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이 앞으로 양국관계를 양호한 길로 타개할 줄로 확신한디.
이에 덧붙여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고 환국하면 1년내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라 다짐했다.
이 결의문은 문구수정을 거쳐 연합국에 발송되었다.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이때에도 ‘친일파 축출’을 요구하였다. ‘독촉’ 결성 때부터 좌익단체들은 “대동단결하려면 매국노와 민족반역자들을 먼저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박헌영도 기회 있을 때마다 ‘친일파 청산’을 떠들었는데 결의안 문구를 시비하며 또 나섰다. “친일파를 철저히 배격하는 것만이 진정한 민족통일이 완성된다는 원칙을 채택하지 않으면 탈퇴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 이승만이 1945년 귀국후 거처하던 돈암장, 오늘의 모습(자료사진)

이승만, 박헌영 불러 설득...‘인공 부인’ 방송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한 이승만은 돈암장(敦岩莊)으로 박헌영을 불러 마지막 설득을 해보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좌우통합’을 원할 뿐 아니라, 공산주의 수법을 잘 아는 이승만도 가능하다면 일부라도 전향시켜 포용하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아니하다. 
돈암장은 ‘독촉’ 결성 뒷날 번잡한 조선호텔을 나와 이사한 돈암동 산중턱의 저택이다. 한민당의 장덕수가 같은 황해도 출신 광산 부자 장진섭(張震燮)에게 교섭하여 이승만에게 제공하였다. 양옥은 이승만이 쓰고, 한옥은 윤치영(尹致暎), 이기붕(李起鵬), 윤석오(尹錫五) 등 비서들이 사용하였다. 미국 유학때 이승만의 동지회에 가담했던 이기붕은 당시  장덕수, 허정 등과 [삼일신문]을 발행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왔는데, 돈암장에서 대통령후보 1순위 이승만의 살림담당 집사가 된 것이다. 
 
★70세 반공주의자와 45세 공산주의자의 대화
돈암장 넓은 정원에 단풍이 한창인 10월29일 오후 4시, 이승만은 박헌영과 마주 앉았다. 
70세 자유민주주의 독립운동가와 45세 공산주의 하수인 투사, 지난 20여년간 스탈린과 싸운 반공주의자와 스탈린에 충성한 스탈린주의자, 이날의 만남을 신문들은 ‘역사적인 중대회의’라고 대서특필하였다. 과연 그런가,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통일을 위해 출범한 독립촉성회는 이미 각당 각파를 망라하게 되었는데, 남은 것은 공산당 뿐이다. 3천만의 총의를 모아서 만들어진 독촉을 이제 인정하고 같이 힘을 합쳐 나가야하지 않겠는가?”
박헌영은 줄곧 주장해 온 바를 되풀이 한다.
“그걸 인정하니까 무원칙한 단결에 찬성 못하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잔재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모조리 소탕해야 한다. 그리고서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켜 민주주의 강령하에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해야 할 것이고, 이 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하여 통일민족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이승만은 그동안 기자회견이나 방송에서 밝혔던 친일파 처리 방법을 반복한다.
“물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일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놓을 때다. 우리는 독립국가를 완성한 후에 우리 자신의 정부가 친일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미군정에 그 문제를 맡겨선 안된다. 외국인의 손으로 우리 동포의 허물을 처벌하게 해서 되겠는가. 죄인들도 우리 동포다. 먼저 힘을 합쳐 우리 정부를 세우고 우리 법을 만들어서 우리 법정에서 우리 손으로 해결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박헌영이 화답한다.
“지금 당장 처벌하지는 게 아니다. 오직 독립촉성회라는 건국기관에서 친일파만 제외시켜주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선생과 손을 잡을 수 있다”
공산주의 이론가 이승만이 이런 얄팍한 꼼수에 넘어 갈 리 없다. 그는 화제를 바꾼다.
“하지 중장은 비합법적으로 조직되어 미군정에 대립하는 인민공화국을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나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인민공화국 동포들을 설득하겠다며 강제해산을 중지시켰다. 인공이 다른 나라에서 존중하지도 않는 정부인 바에야 스스로 해산한다면 상황이 훨씬 좋아지지 않겠는가?”
코민테른 이론가 박헌영도 요지부동이다.
“어떤 근거로 해산을 요구하는지, 또 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대립한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조선인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또한 선생의 정치활동에도 우리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대화는 끝났다. 이승만은 “해산하든 말든...뜻대로 할 수 밖에...“ 혀를 찼다고 한다.
   ([매일신보] [자유신문] [신조선보] 등 1945년11월2일자. 손세일, 앞의 책)

▲ 1945년 10월29일 돈암장에서 단독 면담한 이승만 박사와 조선공산당 박헌영(오른쪽).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뉴데일리DB

일주일 후 11월 5일 정례기자회견에서도 이승만은 ’친일파 질문‘에 똑 같이 답하고 설득하였다.
마침내 11월7일 서울중앙방송국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중대선언을 던진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하니 감사하나....나는 종래에 임시정부에 복종하여 온 터이므로 임시정부가 돌아와서 정식으로 타협하기 전에는 다른 정부나 정당에 이름을 줄 수 없다.....정부는 하나이다. 군정청에서는 조선인민공화당은 허락하나 국(國)의 명칭은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조선의 정부는 군정청뿐이다...“
 
방송이 나가자 ’인공‘ 총리 허헌은 ”이 박사의 주석취임문제는 이로써 해소한다’고 선언하였다. 공산화를 겨냥한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인공은 두 달 만에 깨어진 꼴이다.
이승만은 이로써 공산주의 배격을 공식화하였다. ‘스탈린의 하수인들’이 벌이는 공작과 싸우는 것은 임정대통령시절부터 시작한 스탈린과의 싸움이다. 이제 남북한을 휘두르는 ‘스탈린과의 건국전쟁’이다.

 

이승만 건국사(36) 박헌영, 투쟁노조 ‘전평’ 결성...김구 귀국 ‘임정 집권설’

▲ 박헌영이 해방후 두달 만에 1.194개나 조직한 노동조합의 전국조직 '전평'의 로고와 1945년11월5일 결성대회 장면(자료사진)

조선공산당, '인민공화국과 전국노조' 혁명태세 완성
 
해방 석달 째 11월5일, 서울 명동인근 중앙극장에서 ‘전평’ 결성대회가 열렸다.
공산당이 말하는 ‘전평’이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全國評議會)의 약칭이다. 해방즉시 지하에서 지상으로 튀어나온 박헌영은 조선공상당을 재건하고 남한전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동시에 공산혁명의 계급투쟁 전위로서 노동조합을 설립해나갔다. 
노동자-농민과 무산계급의 해방은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박헌영은 ‘레닌의 아이’답게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t revolution)의 기반구축에 한껏 부풀었다.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부터 시작, 모든 기업과 공장들에 직장단위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를 산업별로 정비하였다. 철도, 교통, 통신, 금속, 전기, 섬유, 광업, 어업, 식료품, 목재, 합판, 조선, 화학, 인쇄, 출판 등 대표들 51명을 모아 9월26일 전국대회 준비회의도 마쳤다.
인민공화국 선포(9.6)후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면서 귀국한 이승만과 담판도 해보았으나 역시나였다. 부르주아는 구제불능이다. 공산혁명의 성패는 지상지하 조직력이 좌우한다.
 
중앙극장에 모인 노조대표들은 505명, 남북한 40여개지방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한 조직은 총1.194개나 되었다.
이들은 명예회장에 박헌영, 김일성, 중국의 모택동을 비롯,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노동조합 비서들을 추대하였다. 이어서 ‘조선무산계급의 수령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메시지를 보내고, 조선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박헌영 동무의 노선을 절대지지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박헌영이 보낸 메시지를 낭독하고 줄줄이 축사가 쏟아진다. 인민공화국 노동부, 서울시 인민위원회,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 건국부녀동맹, 조선산업노동조사소, 공산청년동맹,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인민당 대표 등 벌써 엄청난 조직들이 경쟁적으로 나섰다.
이들이 채택한 ’행동강령‘은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등 17개항, 정치적 주요항목은 뒤에 나온다.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 소유의 일체의 기업은 전평 공장위원회에서 관리한다”는 것과 “조선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한다”는 선언이다. ([해방일보] 1945.11.15.)
한마디로 조선인민공화국과 이를 성공시킬 행동대까지 확보한 박헌영이다. 
이후 해방정국 3년간 이들이 벌인 수많은 파업, 폭력시위, 폭동 등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미군정이 ’공산당도 합법정당‘이라며 방관하는 동안, ’서북청년회‘등 민족청년단체들이 나서서 전평의 불법폭력을 도맡아 맞서 싸우고, 이듬해 이승만이 주도한 민족진영의 대한노동총연맹이 3월에 결성되어 격돌을 벌이는 좌우투쟁은 글자 그대로 ’건국전쟁‘이 된다.
 
 

▲ '여간첩 마타하리'로 사형당한 김수임(왼쪽). 오른쪽은 김수임이 동거하던 미군장교 자동차로 월북시켜준 연인 조선공산당 이강국.

★미군정장관, 축사하며 ’인공 해산‘ 간청...좌익은 ’인공 사수‘ 결의
조선공산당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대회가 11월20일 열렸다. 인민공화국(인공)의 ’국회‘격인 모임이다. 서울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사흘간 개최한 대회에는 북한지역을 포함했다는 25개 시, 175개 군대표 610명이 참석했고 인공 서기장 이강국(李康國,1906~1957)이 의장이 되어 진행하였다. 이때 이강국은 5년후 ‘여간첩 마타하리’사건으로 사형당하는 연인 김수임(金壽任, 1911~1950)과 동거 중이었다.  
 
 
이 공산당 대회에 미군정의 아널드(Archibald Vincent Arnold,1889~1973) 장관이 참석하여 축사를 한다. 지난주에도 박헌영을 만나 ‘인민공화국을 인민공화당‘으로 바꾸라며 인공해산을 간청하였고 하지 사령관도 박헌영을 따로 불러 강압했지만 마이동풍이다.
아널드는 축사에서 “미군정청의 한국 건국 노력에 협력해주면 환영한다”고 간청하며 군정청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다시 한 번 못 박듯이 강조하였다. 
공산당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미군정청은 이처럼 조선공산당을 키워주는 일만 하고 다녔다.
두 개의 정부는 안되므로 ‘인민공화국’의 ‘국’을 ‘당’으로 바꿔 정당 되라는 요구에서 보듯이 공산주의 본질과 전략은 무관심한 채 법적 형식논리나 따지는 수준이 군인집단 하지 사령부의 한계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당시 미국무부의 대한정책이란 친소파 극동국장 빈센트와 그 위에 소련 간첩 알저 히스의 손아귀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조종되는 상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이 대회를 소집한 목적은 국제정세 보고와 국내정세 보고였다. 국제정세 보고에서 강진(姜進,인공 외교부장 대리)은 “소련 이외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 인민위원회를 무시하는 여하한 정권도 조선에는 수립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미군정의 요구는 관심도 언급도 없었다.
이강국은 ‘정치보고’에서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하며 ’독촉‘ 결성과 ’인공 주석취임 거부’등을 ‘반통일적인 민족분열 행태’라며 악선전을 퍼부었다. 결국 대회는 시나리오대로 정세가 급변할수록 조선공산당의 인공을 끝까지 사수하자는 결의로 끝났다.
 
이로써 남한 지역의 좌익은 해방 3개월 만에 조선공산당의 인민공화국과 전국 노조 ‘전평’의 조직화까지 완성, 북한의 소련과 함께 한반도 공산화 혁명의 전투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뒷날 6.25침략 때 박헌영이 “수십만명 인민봉기로 전투 없이 승리한다”고 장담한 이유가 이것이다.

▲ 충칭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1945년 11월 귀국직전 찍은 기념사진.

◆ 김구 귀국 “내가 임시정부다”...임정 집권설 파다
 
공산당대회 다음날 23일 김구와 임시정부 일진 15명이 김포공항에 내렸다. 해방 후 88일만이다. 왜 이렇게 귀국이 늦었던가. 엄청난 귀국 비용 때문이다.
해방순간 당황했던 김구는 중국 국민당정부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당시 중경(重慶:충칭)에 거주하는 임정 식구들만 550여명, 상하이와 베이징, 만주까지 동포들은 약400만명이다. 당장 귀국해야하는 임정 주요 인사들만 골라보니 29명이다. 돈 나올 곳은 중국정부 뿐이다. 여기저기 들락날락 알아보고 교섭하느라 세월만 흘러간다.
김구는 9월3일 뒤늦게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국의 해방이 수많은 선열과 중국 미국 소련의 전공임을 감사하고, “우리가 처한 현 계단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계단”임을 밝히면서 ‘당면정책’ 14개항을 발표, “귀국하여 국내정권이 수립되는 즉시 임시정부의 임무는 완료되며, 일체의 직능 및 소유물을 인계할 것”이라 천명하였다.

▲ 임시정부 환국직전, 장제스가 작별기념으로 자필서명하여 김구에게 준 사진.

★장제스, 9월28일 김구 면담...10월30일 지원비 20만달러 결재
김구는 중국정부에 귀국비용 5,000만원(중국돈)과 귀국후 국내활동지원비 50만 달러(약 3억원)를 요청하고, 사흘이 멀다 하고 중국정부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며 장제스 총통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9월26일에야 국민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한국문제와 베트남, 타이 등 전후상황을 검토하였고,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에 친중정권이 들어서도록 지원하고 새로 생길 한국의 군대가 광복군이 중심이 되도록 돕는다” 계획을 세웠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행정원에 보낸 1945년9월 기록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5 ‘중국의 인식’)
장제스가 김구를 부른 것은 그 이틀 후, 9월28일이다. 
관저로 달려간 김구는 7개항의 지원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제시하며 간청한다. 
무엇보다 장제스가 미국과 상의하여 임시정부를 과도정권으로 인정하여 귀국시켜달라고 했다.
장제스는 임정 승인문제는 “영-미와 협상해봐야 할 일”이라며 말을 돌렸다. 해방 후까지도 중국은 김구의 임정을 정권으로서가 아니라 ‘친중정권 만드는 하나의 정당집단’으로만 지원했던 입장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김구는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영구히 합작할 필요가 있으니 협약을 체결하고 상호 대표를 파견, 연락하자고 제안하였다. 장제스는 한국독립당을 계속 원조하겠다며 “형식은 필요없다”고 거절하였다. 마지막 가장 급한 문제, 여비와 활동비 지원을 애원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국 돈’을 장제스가 결재한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 10월30일이다. 여비 5,000만원은 즉시 지급하고 활동비 50만달러중 20만 달러만 주겠다고 통보했다. 감사하는 김구에게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은 중국의 책임으로 간주한다”는 격려의 말을 건넸다.
몇날 며칠 송별회가 이어졌다. 장제스의 부인 송미령이 연회를 베풀었고, 중국공산당 주은래(周恩來)와 동필무(董必武)도 김구와 김원봉 등 각료전원을 초청, 3년간 ‘좌우합작’했던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귀국 직전 또 하나의 소동이 일어났다. 미군정이 요구한 ‘개인자격 입국 서약서’에 대한 서명때문이다. “이런 모욕이 어디 있나. 안가겠다. 미군이 철수한 뒤에 가도 늦지 않다”는 독립운동가들의 반발이 터졌다. 
“그런 고집이 통하겠소? 비현실적인 명분 싸움은 이제 그만 접으시오” 질책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조경한 [백강회고록, 국외편] 한국종교협의회, 1979).
해방후 무려 2개월 반 만에 여비를 마련한 김구 일행은 20만달러를 가지고 장제스가 내준 군용기로 상하이를 거쳐 11월23일 서울로 떠난다. 1진 15명이 먼저 귀국하고 2진은 12월1일 돌아온다.

▲ 경교장의 현재모습. 금광왕 최창학이 지은 별장 '죽첨장'을 임시정부에 재공하였다.(자료사진)

★임정 청사는 ‘죽첨장’...‘친일’ 지목받는 ‘금광왕’이 제공
김구 일행은 서대문 ‘죽첨장’(竹添莊)에 들었다. 일제 때 국내 최대의 벼락부자 최창학(崔昌學,1891~1959)이 지은 서울의 별장, 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신 최창학은 ‘광산왕, 금광왕, 황금귀'(黃金鬼)로 불리던 빈농출신, 하루아침에 ’노다지‘로 ’천만장자‘가 되어, 일제 때 잡지 [삼천리]에는 ’민영휘, 김성수와 함께 조선 3대 갑부‘로 기록되어 있다. 총독부와 각종 활약을 벌여 해방후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제공한 호화별장에 자리 잡은 김구는 집 이름을 근처의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京橋莊)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김구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이승만이다. ’독촉‘의 자리를 비워놓고 김구와 임정의 환국을 기다리던 이승만, 그에게 임정은 3.1운동때 서울서 탄생한 ‘한성정부’와 신생 대한민국의 법통을 잇는 '정통성의 다리‘이다.  이승만은 이튿날 김구를 반도호텔로 데려가서 하지 사령관과 처음 인사시킨다.  그리고 김구는 이튿날부터 며칠 동안 돈암장의 이승만을 찾아가 회담하였다.
 
경교장으로 줄줄이 김구를 찾는 사람들 중에 안재홍이 김구에게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지금 조선은 공산당이 인민공화국을 만들어 혼란을 격화시키고 있는데, 김구 주석이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 과도정권을 새로 수립할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직접 집권하라“고 건의했다는 말이다. 이에 김구는 ’각료들의 입국을 기다려서 협의해 결정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장준하 [돌베개] 2015).
이처럼 임정 지지세력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임정이 돌아왔으니 임정 세상이 될 것으로 믿는 분위기였다. 이것은 김구의 첫 기자회견에서 김구도 그렇게 응수하여 더 굳어졌다.
기자가 “개인자격으로 오셨는데 임시정부는 언제 오느냐”고 묻자 김구는 주저 없이 “내가 왔으므로 임시정부가 온 것이다”라고 선언하듯 잘라 말했다.([중앙신문] 1945.11.25.)
김구는 임정과 자신은 한 몸이란 인식이 몸에 배어있었고, 장제스에게 ‘임정집권 지원요청’까지 하였으므로 특히 임정인사들은 임정집권을 당연지사로 여겼을 터였다.

▲ 해방후 귀국한 김구(가운데)와 함께 반도호텔로 하지 미군정사령관을 예방한 이승만(왼쪽).

◆김구 “소련과 합작” V 이승만 “소련 거부”
 
하지 사령관은 12월12일 기자회견과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인민공화국은 그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정부‘도 아니고 그런 직능을 집행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정당이든지 정부로 행세하려 한다면 불법행동이다.” 하지는 그동안 인공인사들이 약속을 안지키는 것을 참아왔지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면서 “미군과 군정청에 불법 방지를 위한 만반의 조치를 즉시 취하라 명령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1주일 뒤 19일 오전 미군 방첩대(CIC)는 옥인동의 윤덕영 별장에 소재한 인민공화국 사무실을 급습, 서류를 압수하고 간판을 떼어냈다. 윤덕영은 순종비 윤왕후의 숙부로서 일본의 작위를 받은 대표적 친일파의 한사람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 서울운동장에서는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마치 임시정부가 일본과 싸워 이기고 개선한 듯, 10여만 인파는 김구와 임시정부가 독립국의 정부가 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던지라 김구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와 술렁거렸다.
인민공화국의 홍명희(洪命憙)와 한국민주당의 송진우(宋鎭禹)의 환영사에 이어 새로 임명된 미군정장관 러치(Archer L. Lerch) 소장이 축사를 하고, 이날의 주인공 김구와 임정의 초대대통령이자 인기정상의 이승만이 답사를 하였다.

▲ 1945년12월19일 옛 서울운동장(현DDP)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시정부 개선' 환영식.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형아치를 통과하고 있다.

★김구, “중국-미국-소련의 친밀한 합작만이 독립의 기초”
단상에 오른 김구는 감개무량한 인사말에 이어 단결을 강조하는 연설이 열을 띄었다.
“임시정부는 어떤 한 계급, 어떤 한 당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 입장에 입각한 민주 단결의 정부였다”고 강조했다. 
장제스의 요구에 따라 지난 3년간 공산당과 좌우합작을 했던, 그러나 공산당이 귀국직전에 총사퇴를 주장했던 일과, 그리고 좌우합작을 반대했던 이승만과 우익진영을 감안한 말이다.
“남한 북한의 동포가 단결해야 하고,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노소가 다 단결해야한다. 오직 이러한 단결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여기까지는 이승만이 귀국후 줄기차게 외쳤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문제는 결론부분이다.
“우리는 중국, 미국, 소련 3국의 친밀한 합작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 3국의 친밀한 합작의 기초 위에서만이 우리의 자주독립을 신속히 가져올 수 있다”고 김구는 다짐하는 것이었다.
군중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서울 장안을 울릴 듯 길게 이어졌다.
김구의 좌우파 단결 주장에 대하여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도 그대로 인용, 환영하였다.

▲ 임시정부 환영식에서 연설하는 김구(자료사진).

이승만 “우리를 넘보는 나라와 국내 매국분자들애 경고”
이승만이 단상에 올라 입을 열었다. 그는 김구의 주장과는 판이한 연설을 시작했다.
“삼천리 강산의 한치 땅도 우리 것 아닌 것이 없다. 3천만 남녀 중에 한사람도 이 땅의 주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지금 밖에서는 우리를 넘겨다 보는 나라들도 있고, 안에는 이 나라를 팔아 먹으려는 분자들이 있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조석에 달렸다. 
그러나 우리 민중이 한몸 한뜻으로 뭉치를 이루어 죽으나 사나 동전동퇴(同進同退)만 하면 타국정부들이 무슨 작정을 하든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중략)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연합국이 새삼 선언하기를 모든 해방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우며 무슨 제도를 취하든지 다 그 나라 인민의 원에 따라서 시행한다 하였으니, 우리 민중은 우리의 원하는 것이 완전독립이라는 것과 완전독립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표할 뿐이니, 일반 동포들은 내말을 믿고 나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주어야 될 줄로 믿는다.”[동아일보] 1945.12.20.)
 
이승만이 말하는 ’우리를 넘보는 나라들‘은 김구가 ’합작해야한다‘고 말한 중국-소련이다. 또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분자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조선공산당을 지칭한 정면 공격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완전독립이 아니면 결코 받지않겠다‘는 결심, 그것은 미-소의 신탁통치가 결정되기도 전에 ’신탁통치 반대‘를 공개선언한 말이었다. 
끝으로 ’동포들은 나의 인도를 따르라‘는 요구는 사실 김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강대국을 의자하며 ’뜬구름 잡는 소리‘ 그만 하고 내 말대로 하라는 공개요구 아닌가.

▲ 김구와 이승만.ⓒ뉴데일리DB

▶이승만과 김구의 시각차이,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능력의 높낮이가 한눈에 드러난 연설이었다. 김구는 남북한 동포의 단결을 주장한다. 소련 공산당의 지배에 약탈당하는 북한동포를 어떻게 남한동포와 단결시킬 것인가.
그는 또 ’중국-미국-소련의 친밀한 합작‘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자고 당부하였다. 강대국 미국-소련은 고사하고 한반도를 넘보는 중국을 우리 힘으로 미국-소련과 ’친밀한 합작’관계가 되도록 어떤 노력을 하란 말인지. 나름 방법론이 있는지, 막연한 수사인지 알 길이 없다.
 
김구의 중국 장제스에 대한 의존성은 유난히 컸다고 전해진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왔고 수백명 광복군도 중국군에 편입시켜 그 지휘에 맡겼으며, 중국 돈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깊어진 의타심인가. 심지어 장제스의 강압에 가까운 요구로 공산당과 좌우합작까지 했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의 김원봉을 데리고 왔다. 귀국 시에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임정책임자 소육린(邵毓麟)을 한국까지 동반하게 해달라고 장제스에게 급전까지 쳤다. (김구가 장제스에게 보낸 1945년11월8일자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그래서인가. 3국을 말할 때 김구 입에선 중국이름이 먼저 나온다. 김구는 장제스가 ‘3국 합작’의 중심역할이라도 하리라 여겼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중-미-소 3국의 친밀한 합작위에서만 독립이 가능하다’는 김구의 발상은 이해 불가능이다. 임정초기부터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는 김구라면, 게다가 좌우합작에 시달린 체험도 있을진대,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에 머물러있었던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얄타회담 때부터 소련과 미국의 새로운 냉전질서 이념전쟁이 시작되었음을 간파했던 이승만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한반도에 내려와 공산정권 세운다”며 미국정부에게 임정 승인을 그토록 촉구했던 이승만의 역사인식,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판별력을 임정 주석이라는 김구에겐 기대할 수 없단 말인가. 
 
★이날 성대한 환영식에 이어 오후3시부터 덕수궁에서 화려한 환영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저녁 7시 30분,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에서 결정타를 날린다.

이승만 건국사(37) 이승만 ‘반공’ 선언...“공산당은 제 조국 소련으로 가라”

역사적 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파괴자' 공산주의자는 '건설자'와 융합 불가능""지금 해결못하면 동족상잔 불가피" 경고김구는 갑자기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 자금 지원"' 밝혀

▲ 이승만 박사와 하지 사령관.ⓒ뉴데일리DB

하지, 이승만의 '수요방송' 검열...이승만, 기습 폭탄 연설
 
귀국 이후 부정기적으로 시작한 이승만의 라디오 연설은 해방후 방황하는 국민들에게 ‘구원의 소리’처럼 설득력이 컸다. 이승만 특유의 유머 섞인 비유법과 역사해설을 곁들인 방송은 자상한 국제정세 해설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 정신교육에 좋은 강의가 되었다. 
그러자 ‘원군’을 얻은 듯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의 방송을 매주 수요일로 정례화 시켰고, 그 ‘수요방송’을 통하여 이승만은 국내외 정치적 리더십을 쌓아갔다. 
12월19일 김구의 임정귀국 환영식이 열린 날도 수요일, 그날 저녁 7시30분 방송 제목이 바로 유명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서울운동장서 10여만 군중들에게 소련과 국내공산당에 대한 경고를 날리며 “나를 따르라”고 외쳤던 이승만이 저녁 방송에서 국내외에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의 ‘수요방송’ 원고를 사전에 검열해왔는데, 공산당에 대한 자극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이날 이승만은 연설 앞부분만 제출하였고 정작 중요한 본론 부분은 방송 중에 비서 윤석오가 몰래 전해주었다고 한다.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1970). 그 만큼 이날 방송 내용은 미군정의 대한정책은 물론, 이승만의 건국투쟁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내용 전문을 살펴보자.

▲ 귀국후 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

◆“한국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세계에 선언합니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이승만 연설문
1945년 12월 19일 오후 7시 30분 방송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요, 공산당 극열 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천년의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의 잘못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간신히 살아나서 발을 땅에 다시 디디고 일어서려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초심해서 어린 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폴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 중국의 내전 실상을 보라
 
 
공산당 극열분자들의 행동을 보시오. 
동서 각국에서 수용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열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 독립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영-미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가 급기야 노국(露國:러시아)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차탁(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군기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 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구라파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뭔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서 저항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분쟁이 아니 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장개석총통의 애국심과 용감한 군략으로 전국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맹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거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장총통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뺏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 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공화국’ ‘민주주의’로 거짓말...조국이라는 소련에 가서 충성하라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 명이 못 되었나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대다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 줄 우리는 의심 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경을 없이 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사익과 영광을 위하여 부언위설(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여 군기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 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열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노국(러시아)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을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결심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가족과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는 부모형제라도 거부해야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국족과 우리 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 주시오. 내용을 모르고 풍성학루(風聲鶴涙)로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우리는 과거를 탕척(蕩滌)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오, 종시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親父兄)이나 친자질(親子姪)이라도 거절시켜서 즉 원수로 대우해야 할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애증과 친소(親疎)를 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적에 그 부형은 영국에 충성하여 독립을 반대하는 고로 자식들은 독립을 위하여 부자형제간에 싸워가지고 오늘날 누리는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건설자와 파괴자는 합동 불가능...지금 해결 못하면 동족상잔 불가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와는 합동이 못되는 법입니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심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갖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됩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 중이니 지금이라도 그 중 극열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 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 무궁한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서울신문] 1945. 12. 21)

▲ 스탈린, 이승만, 트루먼.ⓒ뉴데일리DB

◆미국과 소련에 ‘선전포고’...건설자와 파괴자의 건국전쟁 
 
이승만은 해방4개월의 탐색기간을 끝내고 ‘건국전쟁’의 깃발을 들었다.
한반도는 미국이 아니다. 공산당도 합법적인 미국식 민주주의로는 이 땅을 소련에 갖다 바치는 결과가 뻔하다. 친소적인 미국무부의 좌우협력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는 미군정사령부를 계몽하고 설득해서 이용해야 하는 이승만은 우선 미국무부에 ‘선전포고’를 날린 것이다.
동시에 북한을 공산화하는 소련의 스탈린에 공식 도전장을 던졌다. "소련은 물러가고 북한 땅을 해방시켜라. 이대로 소련을 놔두면 한민족끼리 좌우 동족상잔이 피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소련이 나서면 삼천리 강토는 소련 식민지가 될 것이며 한민족은 공산독재의 노예가 된다."
 
특히 이 연설은 어제에 이어 김구와 임정세력을 직접 겨눈 경고와 설득과 포용의 카드다.
임시정부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한 자칭 ‘탄핵안’을 받아들였던 국무령 김구, 2년후 소비에트체제로 혁명을 일으킨 공산당의 개헌안을 결재한 김구, ‘공산당과 혼잡 말라’며 그토록 말렸건만 나중엔 ‘좌우합작’까지 수용한 ‘주석 김구’와 그 세력은 지금 귀국해서도 이승만의 ‘독촉’을 경원시 하고 있다. 
이승만은 12월15일 돈암장에서 개최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첫 회의에 39명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15명만 참석한 것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임시정부 측의 참여를 논의한 끝에 ”불여의하면 독자적으로 진행하겠다“고 공언하였던 것이다.
”좌우협력의 일이 늦어서 하지 장군이 골이 나있다”고 말한 이승만은 “만약 독립을 반대한다 하면 그 반대자와는 분수(分手:손을 뗌)하는 수 밖에 없다. 나라를  파괴하려는 자와 나라를 건설하려는 자가 어찌 같이 일알 수 있나”라며 공산당 영입을 포기하였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록] 1945.12.16.)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해체 불가피론’을 피력하였다. 첫째, 미국과 소련이 승인하지 않는다. 둘째 임정 내부에 좌우가 갈라져 싸우니 스스로 해산될 길을 걷고 있다. 셋째, 김구 개인은 ‘독촉’과의 통합을 양해하는데 “임정 제공(諸公)의 속박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이승만은 결단을 내려 우익인사들 만으로 ‘독촉’ 결성작업을 일단 마무리하고 지방조직 확대를 위해 남한 전역에 선전대를 파견했다. ([자유신문] 1945.12.15.)

▲ 박헌영과 여운형.ⓒ뉴데일리DB

★박헌영과 여운형 ”이승만은 파쇼, 반통일의 원흉“
프롤레타리아의 조국 소련만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은 12월23일 ‘세계민주주의 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의 성명을 반박함’이란 긴 제목의 성명을 내놨다. 코민테른의 세게 공산화 전열에 폭탄을 맞은 충격에 분노하는 장문의 이승만 규탄이었다. ”....세계를 파괴하는 자가 파쇼가 아니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며, 폴란드에서 유럽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며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해방구의 민중생활이 비할 수 없이 행복해짐을 무시하고 장제스 주석의 중국 건설은 오직 국공합작에 있음을 인식하여 불원한 장래에 국공엽립정부가 수립 될 것에 눈을 감은 이승만이 덮어놓고 공산주의로 인한 파괴 운운함은 너무나 세계사정에 무지몰각함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독촉 중앙협의회와는 완전 절연을 선언하였다. ([해방일보] 1945.12.25.)
그날 인민당의 여운형도 ”독촉중협은 드디어 반통일의 노선을 걷고 말았다. 내것 만으로서의 통일을 강행하려 한다면 파쇼적 독단이요. 반통일 행동“이라 비난하는 담화를 냈다.
요컨대, 남한의 통일전선이 무너진데 좌절과 분노를 토하며 이 기회를 역이용하려는 공세였다.
 
★임시정부 측도 이승만에 거부감...민혁당은 ‘남북한 통일공작’ 시사
임시정부 인사들도 이승만의 연설에 부정적인 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이미 중경에서 결의한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귀국후 각계를 망라한 과도정부를 세우기로 했는데 이승만이 먼저 ‘독촉’을 결성한 것을 보고 불평불만이 가득했던 판이었다.
임정 비서장 조경한은 ”우리 입국전에 하등의 연락도 없이 성립되었으므로 하나의 사회단체로만 보겠다“고 간단한 논평만 발표하였다. 그리고 ‘독촉’과는 별개로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의 최고기관“을 목표삼아 ‘특별정치위원회’를 결성할 것이라 했다.([자유신문]1945.12.25.)
임정내의 공산세력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는 앞으로 남북한을 한데 뭉쳐 전국적 통일공작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북한과의 물밑작업이 진행중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 돈암장으로 이승만(두루마기)을 방문한 김구(왼쪽).

◆이승만, ”신탁통치 단호히 배격“ 방송...‘독촉’ 강화 호소
 
이때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이른바 ‘3상회희’가 열리고 있었다. 12월16일부터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전후처리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는데,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추측들이 국내에도 외신을 인용 보도되어 어수선하다. 
 
이승만은 26일 ‘수요 방송’에선 ”신탁통치를 단호히 배격한다면서 남한 전역에 ‘독촉’ 지부 조직을 독려하였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결의를 다졌다. 모스크바의 ‘신탁 결정’ 전야에 이승만은 ‘신탁 결사반대’를 다시 한번 국내외에 확인시킨 것이었다. 
또한 “독촉의 통합이 성숙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극단적 공산주의자만 없었다면 민족통합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라며 ”우리가 지금 방해자들의 파괴행위를 방관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싸워도 효과가 없다“고 경고한다. 신탁관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주저하지 말고 ‘독촉’ 지부결성을 서둘자고 말했다. 독촉의 조직투쟁으로 신탁통치를 막자는 전략이다. 이승만은 독립촉성회를 새로운 정부 수립의 추진체로 활용하기로 하지 사령관과도 합의하였음을 시사하면서 ”과도정부 수립까지 한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 필요한데 그것이 독촉중앙협의회“라며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를 엄호하고 그 기능을 대행한다고 설득했다.

▲ 소련의 레닌,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경무국장 김구(1920년).ⓒ뉴데일리DB

◆김구 연설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 임정을 가장 먼저 도와주었다“
 
★모스크바 발 ‘신탁통치’ 보도...공산당도 ‘절대 반대’ 발표
이튿날 27일 아침부터 외신들이 ‘신탁통치’에 관한 급전(急電) 보도를 쏟아냈다. 
한민당, 국민당 등 우파정당들은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특히 한민당은 ‘신탁통치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시아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3천만이 최후까지 싸울 국민운동을 주창하였다.([조선일보]1945.12.28.)
조선공산당 대변인 정태식도 ”우리는 절대 반대한다. 5년은커녕 5개월 신탁통치라도 반대“라고 말했다.([조선인민보]1945.12.29.)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총무 이여성은 ”신탁통치안은 그 어느 나라가 하든 원치 않는다. 소련은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나라로서 조선에 들어 올 때 모든 것은 조선인의 것이라 하여 감사했는데 이제 와서 신탁통치를 하겠다하니 못 믿겠다. 오보가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신조선보]1945.12.27.)
 
★김구, 귀국후 처음 ‘레닌 선생’과 ‘진보적 민주주의’ 내놓다
이와 같이 좌우 정파들이 ‘반탁’을 들고 나온 판에 김구가 이상한 연설을 하였다.
같은 날 27일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방송으로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연설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귀국후 이승만을 만나면서 기자회견 때도 발언에 신중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적극적이며 좌파적인 주장이었다.
김구는 ”그동안 임시정부가 중국, 소련,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 ‘승인’과 같은 지원을 받았다“면서 종래와 다른 말을 꺼냈다. 그 지원의 예로써 임정 초기에 소련 레닌이 제공한 자금 이야기를 인용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國父) 레닌 선생은 제일 먼저 임시정부와 손을 잡고 거액의 차관을 주었다.“ 김구가 토해낸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란 호칭은 반공의 우파 진영에선 못 듣던 말이었다. 
이어서 김구는 공산당의 슬로건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연설을 이어간다. 즉 ”우리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모 일계급의 독재는 반대한다“고 공산당독재를 견제하는 말을 덧붙였다. 
경제 균등의 실현을 위한 토지와 생산기관의 국유화, 교육균등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숙청을 다시금 표명하였다. ([동아일보]1945.12.30.)
이와 같은 김구의 연설은 지난 주 이승만의 ‘강렬한 반공’ 연설의 여파에 올라타는 ‘임정 선전‘의 다목적 포석이란 해석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날 연설문은 한독당 선전부장이자 김구의 연설과 편지 전담자 엄항섭(嚴恒燮, 1898~1962)이 작성한 것이었고, 방송도 엄항섭이 김구 대신 읽었다고 한다.
 
서울 장안이 ’반탁‘으로 술렁이는 날,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 대신에 ’소비에트 국부 레닌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연설에서 김구가 ’레닌의 임시정부 지원 차관‘이라 지칭한 자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서 연재 (18)에서 살펴 본대로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이동휘에게 제공한 200만 루블은 코민테른 국제공산주의 확산을 위한 공작금이었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라‘는 돈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임시정부의 공산화와 직결된 지령이었다. 그 자금으로 이동휘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인사들과 상하이 청년들을 공산당원으로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김구는 그때 거절하였다고 한다.([백범일지]) 
레닌의 자금제공을 알게 된 임정은 ”독립운동 자금이니 내 놓으라“고 다그치지만, 이동휘는 ”임시정부와 무관한 자금“이라며 거부하고 상하이를 떠나버린다. 
경무국장 김구는 부하들을 시켜 이동휘의 측근 자금책 김립을 ’독립자금 횡령‘ 범인이라며 1922년 2월 대낮에 노상에서 살해하였다.
김구 자신이 내막을 잘 아는 이 사건을 왜 해방 후 귀국하여 새삼 소환한 것일까. 그 자금이 과연 ”소비에트 국부 레닌 선생이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차관“이란 표현은 합당한 것인가?
 
김구의 방송 다음날 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과 발표에서 ’한국신탁통치‘ 부분이 밝혀졌다. ’반탁‘ 불길이 솟는 이날, 김구와 한독당 중심의 임정 인사들도 즉각 비상대책을 강구하고자 이틀 연속 철야회의를 진행하는데 놀랍게도 뜻밖의 살인사건이 터진다. 바로 송진우 암살사건!
 

이승만 건국사(38) 김구, 미군정 반대 “1일 쿠데타”...송진우 피살

▲ 환국한 임정요인들이 경교장 앞에서 기념촬영. 앞줄 오른쪽부터 신익희, 조소앙, 이시영. 김구. 신익희 뒤쪽 김원봉.(자료사진)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등 한국민주당(한민당) 지도부는 중경의 임시정부 인사들의 조속한 귀국을 미군정 측에 요청하면서 김구의 거처와 임정 사무실 건물을 마련하였다. 친분이 있는 광산왕 최창학과 협의하여 그의 별장 ‘죽첨장’(경교장)을 임정에 재공하기로 결정하고, 임정인사들의 귀국후 생활대책을 위해 자금도 모았다. 모두 송진우가 앞장선 일이다.
 
‘국일관’ 환영 만찬회서 ‘친일파’ 격돌
 
임정인사 1-2진이 다 귀국한 뒤 1945년 12월 중순쯤, 종로 관수동의 국일관(國一館)에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항, 신익희, 엄항섭 등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김성수와 송진우의 한민당이 베푸는 ‘임정 환영’ 만찬회, 다음주 대대적으로 개최할 ‘봉영회’(奉迎會, 임정을 받들어 환영하는 대회)에 관한 간담회도 겸한 자리였다. 국일관은 일제 때 명월관(明月館), 장춘관(長春館), 식도원(食道園) 등과 함께 한국요리 기생집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술잔이 돌면서 임정 내무부장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가 문득 독설을 터트린다.
“국내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총독부에 크든 작든 협력한 친일파들이다”
안 그래도 서먹하던 환영 분위기는 금방 싸늘하게 변했다. 
한민당 설산 장덕수가(雪山 張德秀)가 벌떡 일어났다.
“해공,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임시정부가 그런 색안경을 끼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다니...기가 막혀서...그럼 나도 숙청감이로군 그래...”
그러자 신익희가 한마디 더 했다. “어디 설산 뿐인가” 
불씨에 기름 붓는 이 말은 만찬장을 뒤집어 놓았다. 참다못한 송진우가 나선다.
“해공, 어찌 그럴 수 있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게 된 임시정부를 누가 모셔왔는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그랬을 것 같애? 천만에. 우리가 임정을 모셔다가 국민들이 떠받들게 하려는 것은 3.1운동 법통 때문이오, 노형들 개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아시오. 당신들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먹고 살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아?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 고생은 우리보다 적었을 거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힘을 합해 건국에 힘쓸 생각부터 해야지, 그런 말은 앞으로 삼가시오. 해외에서 헛고생들을 했군. 쯧쯧.” 
그러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후 임정 측의 친일파 숙청론은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고하 송진우 평전] 동아일보사,1990)
 
이 뿐이 아니었다. 열흘 전 임정 2진이 도착한 다음 날 12월2일, ‘더러운 친일파의 돈은 안받겠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송진우가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앞두고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금융계와 실업계로부터 900만원을 모아 경교장에 전하였을 때의 일이다. 
임정 재정부장 조완구는 ‘친일파의 부정한 돈“이라며 거절하였다. 국무회의까지 열어 민족반역자의 돈을 받느냐 마느냐 주먹다짐 직전까지 침을 튀긴다. 침통한 얼굴로 한숨을 쉬던 송진우가 일어나 또 진정시켜야 했다.
“정부 세금에는 양민의 돈도 있고 죄인의 돈도 있는 법이오. 지금 민족의 큰 일을 앞두고 이런 왈가왈부는 불필요하지 않겠소?” 그제야 ‘자금반환 결의’를 하던 임정 요인들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고하전기편찬위원회, 1965) 
 
 
아무튼 이날 국일관의 술자리 ‘친일파 언쟁’이 18일후 12월30일 새벽 송진우가 살해되는 원인의 일단이 될 줄을 거기 누가 알았으랴.

▲ 송진우 한민당 대표와 한독당 김구.ⓒ뉴데일리DB

 김구의 야망...‘반탁’ 투쟁으로 집권까지...국민 총동원령
 
모스크바에서 27일 발표된 3상회의 내용이 보도된 28일 오후4시, 김구는 경교장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기대치 않았던 탁치라는 문제가 3천만의 머리 위에 덮어씌워졌다. 우리가 이 보자기를 벗어날 운동을 전개해야겠다. 우선 이만하면 우리정부의 결정적 의사를 발표해도 좋겠다하여 발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5.12.30.)
이 김구가 말하는 ‘우리 정부의 결정적 의사’라 함은 귀국 전 중국에서 채택 결의한 바 ‘임시정부의 당면 정책’ 제6항, 즉 ‘국내정부 수립’이며, 그것은 바로 임시정부의 집권이다.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는 선언서를 채택한 회의는 밤새워 ‘새로운 독립운동’의 행동전략을 논의하였다. 
당장 투쟁에 돌입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 임시정부의 장정위원(章程委員)으로 각파를 대표하여 김구, 조소앙, 김원봉, 조경한, 유림, 신익희, 엄항섭, 김붕준, 최동오 등 9명을 선정하였다. ([조선일보]1945.12.30. ‘임시정부 국무회의 결과’)
이튿날 12월29일에도 150여명이 경교장에서 “이번 기회에 일치단결하여 나라를 찾자”는 김구의 지침에 따라 방대한 조직을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신탁통치를 물리치는 ‘새로운 정부’임을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결의안을 채택한다. 
“우리 임시정부에 즉각적인 주권행사를 간망(懇望)할 것”이란 도전장이다. ([동아일보]1945.12.31.)  ‘임정의 주권행사’라는 결의는 ‘미군정의 권력을 임정이 접수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송진우가 ‘반기’를 들었다.
 
★송진우, 김구의 ‘과속’에 '신중한 반탁' 요청
한민당도 임정과 마찬가지로 이미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3천만이 1인도 빠짐없이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28일 저녁부터 서울 거리는 ‘반탁’ 시위와 전단이 뿌려지고 갖가지 벽보도 요란하게 붙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을 만나고 온 송진우는 경교장 김구를 만나 임정 측의 급진적인 ‘과속’에 브레이크를 걸며 ‘신중한 반탁 투쟁’을 호소하였다. 하지는 29일 각당 영수들을 초청하여 모스크바의 공동성명 내용을 설명하고 “신탁통치는 앞으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논의해야 할 사항이라 발표되었으므로, 지금 한국인은 흥분하지 말고 신중하게 그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설득했다 한다. ([동아일보]12945.12.30)
송진우는 임정인사들에게 간곡히 설명하였다. 
“미국은 여론국가이므로 우리가 국민운동으로 의사 표시를 하면 신탁통치안이 재고될 수도 있을 것, 미군정과 충돌하면 미국을 비롯한 민주진영 국가들과도 충돌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것, 이런 혼란이 일어나면 공산당만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논지를 폈다. 
이때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호통치면서 “찬탁자 매국노”라 단정하였다.(강원룡의 증언 ‘나의 체험 현대 한국사').
이에 호응한 임정 인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하(古下)는 찬탁하자는 말이요?”
송진우는 남감하다.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히 하자는 것이오. 미군정과 싸우면 그 뒷수습은 어쩌자는 것이오. 미국이 손을 떼면 소련 세상이 와도 좋다는 말이오? 미군이 최소한 2년쯤 더 소련을 막아줘야지요,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앞의 책). 
갑론을박은 결론도 없이 흥분상태로 새벽녘에야 흩어졌다.

▲ 1926년 3.1운동 7주년 기념사 필화사전으로 투옥된 송진우(자료사진)

★탕 탕 탕...‘정치암살 제1호’ 송진우 쓰러지다
새벽 4시쯤 귀가한 송진우는 원서동 자택 사랑방에서 잠들었다.
이른 아침 식사준비를 하던 부인은 느닷없는 총소리에 뛰쳐나가는데 양아들이 달려와 소리쳤다. “엄마, 큰일 났어. 아버지가...” 사랑방에 뛰어들자 송진우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해방정국 최초의 정치적 암살사건, 자객들은 13발을 쏘았고 송진우는 7발을 맞고 즉사했다.
경교장의 격론 2시간 만에 ‘미국의 필요성’을 주장한 신중론자는 제거되었다.
 
“새벽 4시쯤 잠이 깨어 두 어대 담배를 피우며 형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5시쯤 다시 잠이 들었다. 6시가 될까 말까 돌연 인기척이 뒤꼍에서 났다. 이 때 형님은 ‘누구요?’하고 평상 말투로 소리쳤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뒤이어 마루의 덧유리 창문이 열리더니 난데없는 육혈포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형님은 말없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 뒤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것은 유일한 목격자 외사촌 양신묵의 증언이다. 그도 범인을 잡으려다 칼을 맞았다고 한다. 테러범들은 한현우(34세) 유근배(21세)등 청년 5명이었다.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시위(자료사진).

◆"외국 군정 철폐, 전국 경찰을 임정에 예속"
 
1945년 12월31일, 송진우의 암살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국민총동원위원회는 중앙위원 76명을 발표한다. 그야말로 거족적인 총동원체제, 한민당의 김성수, 공산당의 박헌영, 북한의 조만식과 김두봉, 김무정, 그리고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박열까지 남북한의 좌우익을 총망라한 전열을 짰다. 여기에 여운형만 빠져 눈길을 끌었다. 임정은 유독 여운형에 대하여 배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서울신문] 1945.12.31.)
국민총동원위원회는 ‘행동강령’ 9개항을 발표하였는데 ▶탁치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 ▶임시정부를 절대 수호 ▶외국 군정 철폐 ▶탁치정권은 격퇴 등이다.
영하20도의 강추위를 뚫고 종로네거리에서 시작된 시위는 눈 덮인 거리를 지나 서울운동장에 집결한다. “3천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정한 우리 정부로서 절대지지,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선언문과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를 통고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때 ‘국자(國字) 제1호 및 제2호 포고문’이 살포되었다. ▶전국 행정청 소속 경찰기구 및 한인직원은 전원 임시정부에 예속케 함 ▶이 운동은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계속하며 국민은 앞으로 우리 정부 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 등이다.
한마디로 미군정의 모든 행정권을 임시정부가 접수한다는 포고문이다. 
플래카드를 휘두르는 군중은 포고문을 흔들며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였다.
미군정청 직원 3천여명도 시위에 가담하고, 전국 검찰 법원 등도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특히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와 서울시청 직원들도 총사직을 결의했다. 
신익희는 경찰서장들을 인솔하여 경교장 김구에게 데려갔고, 그들은 “앞으로 임시정부의 지시아래서만 치안유지와 질서유지를 행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순식간에 서울을 석권한 반탁운동의 태픙, 상가는 철시하고 음식점 등은 일제히 휴업이다.
심지어 반도호텔의 종업원들도 모두 사라져 하지 사령관은 식사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하지 격분 ”또 기만하면 죽이겠다“...김구, 자살하겠다...굴복
미군정 입장에서 보면 김구의 선언서와 시위 및 포고문 등은 ‘배신’이었다. 중국서 귀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통치에 협력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임시정부가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나온 것은 군중 반란으로 정권을 빼앗겠다는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하지는 김구 등 임정요인들을 체포하여 인천 소재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감금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31일밤 방송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놀란 조병옥이 군대식 해결은 해결이 아니오 민심은 ‘반미’로 변하리라 만류하였다. 대신 이튿날 하지가 김구를 직접 설득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새해 첫날 1946년 1월1일 오후, 하지 사령관은 김구를 반도호텔 사무실로 불렀다.
”미국에 도전하는 과격행동“을 즉시 중지하라하고 요구한 하지는 ”서약하시오. 당신이 또 다시 나를 속이면 적으로 간주하여 죽이겠다“고 미군사령관으로서 통고한다고 했다. 이때 금방 굴복한 김구는 ”자살 하겠다“ 말했다는데 그에 관한 행동은 밝혀진 게 없다.
 
★김구의 ‘1일 천하’--그날 밤으로 그는 라디오를 통하여 투쟁 철회를 방송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 목적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이오, 결단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거나 동포들의 일상생활을 곤란케 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는 평화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를 배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믿는다. 모든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별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일제히 복업(復業)하고, 지방에서도 파업을 중지하고 복업하기 바란다.“ 
임정이 미군정을 접수하려던 ‘쿠데타’ 시도는 이렇게 끝났다. 그것은 김구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국내외적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자초한 단막극이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6권)

▲ "미국을 대한민국 건국에 활용해야 한다"는 이승만 박사.(자료사진)

◆이승만 ”스탈린과의 싸움에서 미국을 이용하라“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을 보는 이승만의 시각은 김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미 ‘카이로 선언’의 한국독립조항에 ‘IN DUE COURSE’(적당한 절차)란 문구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승만은 루즈벨트와 스탈린 간에 ‘숨은 흥정’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해 왔다. 다음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의 기득권을 보장했다는 소련 간첩의 제보를 받자 이를 폭로하며 몸부림을 쳤다.(연재 29-30 참조). 그래서 해방후 모스크바 외상회의를 앞두고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날마다 부르짖었던 것이었다. 
12월28일 ‘한국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구성’을 규정한 발표를 접한 이승만도 망연자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돈암장에서 울고 있는 임영신을 달래며 이승만은 간단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씨가 누차 편지와  공식선언으로 표시한바 있으므로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예측하고 나로서는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침대로 집행할 결심이니 모든 동포는 일시에 일어나 예정한 대로 준행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 전국이 결심을 표명할 시에는 영, 미, 중 각 연합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 ([동아일보] 1945.12.29.)
 
‘이미 준비한 방책’이란 무엇인가. 연합국 중에 소련을 제외한 이유는 또 무엇인가.
12월31일 대대적 시위가 예고된 아침, 정례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말한다. 
”반탁 시위는 마땅하나 우려 되는 것은 격렬분자와 파괴분자들이 난국을 만들어서 독립운동 전부를 실패케 함이라. 모든 단체가 개인은 자유행동을 말고 규칙 범위에서 안녕질서를 지키라.“ 강조한 이승만은 특별히 미국정부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미국 정부가 우리를 해방한 은인이요. 군정당국은 우리의 절대 독립을 찬성하는 고로, 신탁문제에 대하여 본국정부에 반대 공문을 보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독립의 친우를 원수로 대하면 이는 도리어 우리 독립을 저해하는 짓이다.“([동아일보]1946.1.2.)
김구와 임정세력의 무모한 ‘임정 집권’ 시도 행태를 점잖게 나무라는 말이었다. 
이승만의 ‘준비된 방책’이 여태까지 주장하고 고수해온 ‘용미’(用美) 전략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반도를 40년간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쳐준 미국이다. 진작 미국이 그렇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랐던 것은 이승만뿐이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다 그랬다.
이제 북한을 점령한 소련을 물리쳐줄 힘도 미국 밖에 없다. 그 미국을 배척하고 밀어내면 소련이 남한까지 집어삼킨다. 이처럼 뻔한 상황을 김구는 왜 보지 못하는가. 오로지 권력쟁취에 눈먼 구태의 임정세력과 이를 악용하는 남북한 공산당의 장난, 이를 물리쳐야 하는 힘도 미국 뿐이다. 그 미국의 힘을 동원해야 하는 능력은 이승만 밖에 없음을 또 한 번 증명해준 김구의 무모한 해프닝이었다.

▲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브루스 커밍스.(왼쪽부터).ⓒ뉴데일리DB

◆배후는? 하지, 조병옥, 장택상, 부르스 커밍스 등 ‘김구 지목’
 
이승만은 송진우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볼 줄 아는 동지가 한민당에서 송진우 정도였는데 무지한 수구집단이 동원한 테러리스트들의 총탄에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아까운 56세 송진우를 애도하는 만시(輓詩)를 짓는다.
義人自古席終稀 의인은 예부터 명대로 죽기 드물고
一死尋常視若歸 한번 죽음을 심상히 여겨 제집 돌아가듯,
擧國悲傷妻子哭 온 나라가 슬퍼하고 처자가 곡하는데
臘天憂里雪霏霏 섣달그믐 하늘 망우리에 눈만 부슬부슬...
 
★현장 주범 한현우를 4개월 뒤 체포하고 일당이 다 잡히자 송진우 암살사건 수사는 빨라졌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경찰총장 장택상이 배후 규명에 나섰다. 장택상은 송진우 피살 당시 ”형님의 원수를 꼭 갚겠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미군정 당국도 국내 정치권도 시선은 김구에게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김구가 중국에서 친일파등 30여명을 살해할 때 동원했던 비밀테러조직이 귀국하여 지하활동을 재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구는 귀국 후 새로운 이름의 청년조직도 만들었다.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 때 만든 ‘한인애국단’과 비슷한 조직이었다고 알려졌다.
사령관 하지는 직감적으로 암살의 배후로 김구와 임정을 지목하였다. 
조병옥도 장택상도 범인들의 자백 등을 수사하면서 그런 심증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송진우가 우파 내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심지어 미국의 좌파 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omings)도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김구가 배후라는 듯 묘사하였다. 
『송진우를 죽인 한현우는 송진우가 미국의 신탁통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살해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다. 김구는 귀국했을 때 중국에서의 전력 때문에 여기저기서 ‘Killer'(자객)이라 불렸다. 하지는 김구에게서 별 감명을 받지 못했다. 김구의 첫 번째 행동이 한민당수 송진우의 암살을 공작함으로써 ‘Killer'라는 호칭이 사실무근이 아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986)
강대국 미국과 약소국 임정의 대결...'배후 지목'은 '지목'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뒷날 '전향했다'는 남로당 총책 박갑동(朴甲東)은 송진우 암살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고하(송진우)는 스탈린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북한은 소련 것이 되고 말며, 우리의 힘으로는 반영구적으로 북한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탁치라도 몇 년간만 눈 딱 감고 받자고 했던 것이다. 여운형도 같은 입장이었다...』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1991)
 
과연 북한에선 스탈린의 시나리오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이 사건  39일 뒤 1946년 2월 ‘북한 인민위원회’가 출범한다. 그 행사장 밖에 걸린 대형 현수막엔 ”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다“라고 씌어있다.

이승만 건국사(39) 조만식 연금...해방6개월만에 김일성 단독정권 수립

박헌영, 김일성과 첫 만남에 북조선공산당 주도권 빼앗겨소련군정, 조만식 설득 10여차례...김일성은 "죽여버리자"스탈린 재촉...김일성을 책임비서로...반탁-친일파 숙청'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임시' 수식어 붙여 위장

▲ 박헌영(오른쪽)이 거의 매일 만났던 소련영사관 정보담당 부영사 샤브신(왼쪽사진 오른쪽)과 소련 영사 폴리안스키. 박헌영 사진은 평양서 숙청 1년전 1952년 찍은 것.

★박헌영, 평양 다녀와 ‘찬탁’ 돌변...”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 무렵 서울 정동거리 소련영사관은 ‘박헌영의 모스크바’였다. 일제경찰을 피한 지하암약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던  박헌영은 해방 후 정동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크렘린(Kremlin)의 지령’을 받아 본격적인 ‘혁명전’을 펼친다. 조선공산당 재건, 인민공화국 선포, 미군정과 ‘합법투쟁’ 등은 물론 모든 활동에 대하여 모스크바에 건의하고 결재를 받아가며 벌인 결과와 무수한 정보를 소련에 그날그날 ‘일일보고’ 하였다. 
그 박헌영도 모스크바3상회의 공동성명을 놓고 허둥지둥한다. 왜냐하면 사전에 크렘린의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 부영사 샤브신(Anatoli I. Shabshin,1910~1967)도 ”본국의 훈령이 없다“며 박헌영에게 평양의 소련군정사령부를 찾아가보라고 한다. 1940년 서울에 부영사 이름으로 부임한 샤브신은 조선 공산세력의 관리자, 박헌영에게는 ‘스탈린과 직결된 다리’였다. 소련 영사 폴리안스키(Aleksandre Polanskii)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 참석 중이었으므로 답답하고 조급한 박헌영은 발표당일 12월28일 밤 38선을 넘어 29일 평양에 도착한다.
김일성을 만나자 그에게도 ‘훈경’은 없었다. 다음날 30일 모스크바에 갔던 소련군정 로마넨코와 서울총영사가 평양에 돌아왔다. 31일 북조선 공산당 집행위원회 소집, 3국외상회의 결정사항의 설명과 그 실행전략전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요지는 이러하다.
▶소련이 관철한 이번 합의의 초점은 신탁통치보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있다.
▶핵심은 미-소공동위가 만들어야하는 남북한 합작 ‘민주적 임시정부’ 구성이다.
▶임시정부의 세력관계는 2대1이어야한다. 북한+남한 공산당 V 남한 들러리 세력.
▶따라서 신탁통치 여부보다 ‘2대1 공산정부’ 구성이 소비에트 혁명의 지름길이므로 이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신탁통치를 적극지지 관철해야 한다.
 
”과연!!“ 박헌영은 한숨이 터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반탁’시위를 허락했다니...난감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박헌영 [자술서] 1953,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출판사,2010)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새로운 투쟁전술을 논의한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련군정이 작성한 매뉴얼을 김일성이 앵무새처럼 전달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 ‘엎질러진 물’을 주어담는 대대적 국민운동 ‘찬탁 투쟁’ 방식을 잡았다. 이 ‘찬탁투쟁’이 곧 ‘2대1 정권’ 만드는 고도의 정치심리전, 즉 민족통일전선 내지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강화하는 혁명과업이다. 모든 것은 소련군정의 자금지원과 각본-연출에 따른다. 
 
1월2일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성명서를 발표, 기관지 [해방일보]가 호외로 뿌렸다.
다음날 3일 서울운동장에서 예정되었던 ‘반탁’ 대회는 이름조차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로 바꿔, 애국가 대신 ‘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행사를 펼쳤다. 대회 후 군중은 ’외상회의 절대지지‘ ’인민공화국 사수‘ ’김구 이승만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반탁‘인줄 알고 참가했던 사람들은 욕설을 하며 흩어졌다.([조선일보]1946.1.4.)

▲ 1945년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 조만식ⓒ고당기념사업회

◆아, 조만식..."내가 떠나면 북한은 소련 것"
 
박헌영이 평양을 떠난 사흘 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이 운명의 날을 맞는다. 1월5일 오전 11시 평양시내 산수국민학교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회의실에서 소련군정이 소집한 긴급회의가 열렸다. 당시 평남 인민위가 표면상 북한의 정부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소련군정 측에선 치스차코프 대장, 레베데프 소장, 로마넹코 소장, 메클레르 중좌 등 수뇌부를 비롯, 조선 공산당 측 위원 16명 전원이 참석하였는데 민족세력 쪽에선 인민정치위원장 겸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부당수 이윤영 목사 등 몇 명 없었다. 나머지 위원들은 38선을 넘어 남하하였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 목적은 일주일전 발표된 ’신탁통치‘에 대하여 평남인민정치위가 찬성 결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정치담당 실력자 레베데프가 먼저 모스크바 발표문의 내용 설명을 마치자 공산당 위원들이 일제히 찬성하며 조만식 의장에게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다그쳤다.
의장 조만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조선민주당이므로 반대한다. 민족적 양심이 이 문제를 경솔하게 다루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충분히 토의하기 전에는 표결에 부칠 수 없다“
말이 끝나자마자 소련 장성 하나가 고함친다. ”그러면 의장직을 사임하라“
상기된 조만식이 벌떡 일어섰다. 
”지금 사임하겠다. 모든 의사표시는 우리 조선인의 자유여야 한다. 아무리 군정이라 해도 언론 제한은 민주주의 원칙이 아니다. 무슨 구실을 달더라도 신탁통치란 것은 남의 나라 정치에 간섭하는 것 아니냐. 우리가 우리의 주권과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5척단구(五尺短軀) 조만식의 두 눈이 뿜는 불꽃이 혹한에 얼어붙은 유리창을 흔들었다. 조만식이 휭하니 나가자 지지자들이 따랐다. 소련군정은 기다렸다는 듯 ’사표 수리‘를 발표하고 ’신탁통치 만장일치 찬성‘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레베데프 인터뷰,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인용. 2008)
조만식은 묵고 있던 고려호텔로 직행, 지지자들과 투쟁대책을 논의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날부터 호텔 밖으로 한발작도 내밀 수 없었다. 소련군 5명이 24시간 경비, 조만식은 6.25전쟁까지 그렇게 연금되었다. 그리고 국군에 쫓기는 북한군 총탄에 1950년 10월 세상을 떠난다.

▲ 1945년9월 평양의 소련군정 행사장에 참석한 조만식(오른쪽)과 치스차코프, 로마넹코, 레베데프등 소련 장성들.

★소련군정, 10차례 조만식 설득...김일성은 ”죽여 버리자“
 
스탈린의 ’9.20지령‘이 말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을 내세워 공산혁명을 하라는 명령이다. 스탈린의 충복 슈티코프는 ’인민의 추앙을 받는 지도자‘ 조만식을 지목했다. 스탈린의 결재를 받은 그는 조만식 포섭에 나선다. 로마넹코, 레베데프 등은 열 번도 더 조만식을 만난다. ”소련의 후견제(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성명만 발표해 달라. 우리는 김일성을 군부 책임자로 하고 선생을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겠다“ 
소련군정은 이미 모스크바 3상회의 발표 이전부터 ’소련의 북한 후견제‘를 전파하였다. 조만식이 들을 리가 없다. ”소련군은 노린내가 나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거부한다. 소련군정은 어쩔 수 없이 김일성, 최용건을 앞세웠다. 김일성 담당 ’가정교사‘ 메클레르는 김일성을 데리고 조만식을 요정으로 초청하여 술자리를 베푼다. 청년시정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술을 끊은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
 
김일성은 ’선생님‘이라며 굽실거리다가도 돌아서면 ”저런 늙은이 초장에 내가 죽여버리겠다“며 투덜거렸다.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죽였을 것’이라고 메클레르는 회고한다. (김국후, 앞의 책). 
 
해방 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조만식은 드디어 조선민주당을 창당한다. 김일성이 스티코프 지시대로 설득하였기 때문이다. 스티코프는 “당 중앙(스탈린)의 명령이므로 조만식을 포기 말라”고 했다. ‘조만식이 창당하면 김일성도 입당하여 소련군과 가교역할을 하며 독립정부 수립을 돕겠다’는 거짓 각본을  주었다. 공산화에 필요한 복수정당, 부르주아 계급을 흡수 정리하는 정당이 필수품이다.
 
마음을 정리한 조만식은 결국 기독교인사들 중심으로 11월3일 광주학생의 독립운동 기념일을 정하여 조선민주당을 설립한다. “평양은 내가 지킨다. 북한 공산화를 누군가 막아야한다. 내가 남쪽으로 내려가면 북한을 통째로 소련에 진상하는 꼴이 되지 않느냐”고 창당이유를 밝혔다. (박재창 증언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고당 조만식 회상록] 고당기념사업회, 1995)
11월23일 신의주학생 반공의거가 터졌을 때 수만 명의 학생 청년들과 민족세력이 대거 월남할 때에도 측근들이 “제발 피하시라” 했지만 조만식은 끝까지 남았다. 
1950년 10월18일, 인천상륙잔적 이후 유엔군에 쫓겨 국경선 강계(江界)로 도망치는 김일성은 그때까지 ‘이용물’로 남겨두었던 우익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이때에도 조만식은 “죽일테면 여기서 죽여라. 평양을 떠날 수 없다”며 몸부림쳤다고 전해진다.

▲ 해방직후 북한의 각급학교에선 소련어 교육이 필수, 여학생이 흑판에 스딸린, 레닌 이름을 쓰고 있다. 소련군정은 공산주의 교육에 수많은 책을 번역 공급한다.

◆스탈린의 음모! 미국과 협상 ‘위성국’ 세우기
 
★미국 대사 케넌의 증언 ”번스 장관의 일방적 양보“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은 한마디로 미국무장관 번스(James F. Byrnes)가 스탈린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고 한다. 아니, 소련이 내놓은 제안에 번스가 ’사소한 수정‘만 가하고 그냥 통과시켜준 ’스탈린의 구상‘ 그대로였다. 왜 그랬을까. 그 회의에 참석했던 실무자 소련주재 미국 대리대사 케넌(George F. Kennan)의 기록을 보자. 
”그 결정은 번스가 ‘해방된 유럽’에 대한 얄타선언의 파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하여, ’동유럽에 대한 스탈린의 노골적인 독재를 숨기려고 민주적절차를 가장하는 무화과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다“ ([George F. Kennan, Memoirs 1925~50] 1967)
루즈벨트의 유산 얄타회담을 금방 파괴한 스탈린의 행태에 분노하기보다 미국 자신의 치욕을 감추려고 했다는 것, 게다가 트루먼 대통령이 ”무슨 의제든지 합의하기 전에 나에게 보고해야한다“고 다짐한 지시를 번스가 어겼다”고 밝혔다. 국무장관으로서 번스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문제에 소련이 양보할 것을 기대하면서 멋대로 결정하였으며 “이 결정에 운명이 걸린 한국인, 루마니아인, 이란인에 대하여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던 번스가 무슨 조건이든 오로지 ’합의‘한다는 것만 중요시했다“고 외교관 케넌은 회고록에 썼다. 그저 장관의 ‘실적‘만을 위한 결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 따라 ’신탁통치‘ 밀려나고 ’남북한 임시정부‘ 수립이 초점
처음 미국은 루즈벨트의 원안대로 4국 신탁통치를 하면서 남북한을 아우르는 과도정부를 세우자는 안을 내놓았지만 스탈린은 달랐다. 남북한 좌우를 엮은 임시정부를 먼저 세우고 이 정부를 돕는 역할이 미국과 소련이어야 한다면서, 점령국 미-소 이외의 국가들 영국과 중국도 배제시켰다. 
그것은 한반도정책에 어정쩡한 미국을 구슬러서 ’소련 후견체제‘를 관천하려는 술수, 앞에서 말한 ’2대1‘ 정권, 공산당이 2가 되어야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처음부터 만들겠다는 음모였다. 
요약하면, 미국은 ’선(先) 신탁통치, 후(後) 정부수립‘을 주장하였고, 소련은 ’선(先) 정부수립, 후(後)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관철시킨 것, 신탁통치가 아닌 사실상 소련 단독 ’섭정‘의 노림수이다. 이미 동유럽에서 진행중인 방식과 같은 수법이다. 
그때 폴란드, 헝가리, 동독에서 진행중인 ’합당공작, 공산당주도로 좌익정당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대중정당을 만들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는 시나리오였다. 그게 바로 스탈린의 ’9.20지령‘--’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란 괴물이다. 

▲ 평양의 소련군정 로마넹코 민정사랑관과 김일성.

★스탈린, 신탁통치때 ”부산-진해-인천-제주도를 달라“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완전점령하며 38선을 봉쇄한 이후, 스탈린의 ’한반도 야욕‘을 보여주는 소련 문서가 있다. 
2차대전후 처음 런던에서 9월 열리는 5대강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 외상이사회(th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에 대비하여 만든 ’일본의 과거식민지에 대한 노트‘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정부의 제안‘ 등이다.
 
 「한반도는 2년쯤의 미-소 양군에 의한 군사점령을 거쳐, 미-영-소-중 4개국 공동신탄통치를 실시하고, 신탁통치 협정에는 부산과 진해, 제주도, 제물포의 3개 전략지역은 소련에 분할하여 소련군사령부의 통제아래 둔다는 규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중-소 공동해군기지 요동반도 여순(旅順)까지 소련의 자유항해 보장, 미국의 전략지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며 ”제주도를 중국 점령지역으로, 또는 대마도를 한국에 제공하는 제안도 필요하다“고 했다. (김성보 [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집. 손세일 앞의 책)
 
소련은 미국의 일본열도 독점에 불만이 컸다. 따라서 남한을 점령하는 미국에게 남한 항구들을 요구한 것이다. 10월2일까지 열린 런던외상회의에서 소련 외상 몰로토프(Vtacgeslav M. Molotov)는 미국무장관 번스에게 일본 점령관리 문제를 토의하자고 몇 번 요구했지만 미국은 불응하였다. 태평양의 방파제 일본 열도를 소련과 나눌 생각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 줄담배 피우는 김일성과 '김일성만들기' 담당 정치교사 메클레르.

◆스탈린 재촉...’반탁‘ 청소...김일성을 실권자로
 
소련의 평양군정 사령부는 북한의 ’부르주아민주정권‘을 만들어내는 소련공산당 군사독재 정부다. 9월20일 스탈린의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받은 다음달 10월17일, 모스크바의 외무인민위원부(외교부)로부터 구체적 훈령이 또 내려왔다. 스탈린은 재촉이 심하다. 그에 따라 실행된 사항은 이렇다.
▶북조선5도행정국 설치=“북한을 임시민정자치위원회를 창설, 중앙집권화하라‘는 지령에 따른 대대적 조직개편, 이것은 북한5개도를 통치하는 중앙집권기구, 바로 북한 정부의 모태(태아적 정부:embryonic government)이다. 산업국, 재정국, 농림국, 교통국, 체신국, 상업국, 교육국, 보건국, 사법국, 보안국 등 10국을 11월 19일까지 설치 완료. 국장들은 레베데프가 선정하여 슈티코프가 결재 임명했다. 그중에 ’보안국‘의 규모는 가장 방대하다. 본국 지령대로 모든 조직은 소련군사령부의 직접통제를 받는 구조이다.
 
김일성을 북한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선출=말이 선출이지 소련군정의 일방통행 명령이다. 1945년 12월17일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회의실에서 비밀리에 열린 제3차집행위원회는 소련군정이 그동안 진행해온 북조선 공산당 창립대회나 마찬가지다. 
해방후 평양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서울 중앙의 박헌영에 충성함으로써 신출내기 김일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소련군정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박헌영과 만나 담판하게 만들었다.
 
지난 10월8일 개성 북쪽 소련군 38선경비기지에 만난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 30대 아마추어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40대 중반 공산주의 전문 레닌주의자 박헌영의 ’주도권 대결‘은 그러나 김일성의 일방 승리로 끝났다. 동석한 로마넹코의 위세 앞에 박헌영인들 어쩌랴. 
박헌영에게 북한으로 오든지 북한에 조선공산당 본부를 옮기든지 택일하라 욱박지르니 굴복하고 말았다. 타협안은 임시로 북부조선분국(分局) 설치로 합의, 사실상 평양이 조선공상단 ’중앙‘으로 되어버렸다. 
박헌영도 중요한 정책마다 소련 군정의 결재를 받으러 평양에 갔고 그때마다  김일성이 나서서 ’스탈린의 결정을 전달‘해주니 저절로 상하가 역전되어갔던 것이다. 박헌영은 다음해 6월에 완전 월북할 때까지 다섯 차례나 월북하여 김일성을 만나야 했다. 
 
그리하여 12월 17일 대회에서 국내파 공산당의 결점과 실패를 맹렬히 공격한 연설을 마친 김일성은 다음날 18일 드디어 ’책임비서‘로 선출된다. 박헌영을 집중 비판한 그 연설은 유독 ’레닌과 스탈린의 어록‘을 많이 인용했는데, 이는 소련 군정이 작성해준 것으로 ’김일성 만들기‘ 전담 정치교사 메클레르가 교육하고 연습시킨 대로 ’명연기‘를 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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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초장부터 조직국 제1비서를 맡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아직 정치훈련이 안되어 불안해서...“ 메클레르는 여러 번 만류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정보기관 고위 참모들과 서울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도 ”박헌영이 북한지도자 깜“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의 김일성 낙점‘ 때문에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메클레르 인터뷰, 김국후 앞의 책). 이 날로 북부조선분국은 ’북조선 공산당‘으로 승격했고 이 사실은 당분간 극비였다.
반공-반탁 세력 대청소=북한 점령과 함께 소련군정이 진행한 반소-반공세력에 대한 ’친일파 청소‘는 조만식의 연금을 전후하여 ’반탁‘이란 죄목이 추가되어 대대적 피바람이 불었다. 이때 또 죽음의 38선을 넘는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진다. 미처 월남 못한 사람들은 무작정 시베리아로 끌어가 학살과 강제노역에 던져졌다.  
▶’신문과 방송은 혁명의 총알‘=소련군정은 북조선 공산당 기관지 [정로(正路)]를 창간한다. 레닌시절부터 ’신문과 방송은 혁명의 총알‘이라는 소련 공산당의 선전선동 지침에 따라 신문사와 방송국을 세워 북한공산화의 총알을 대량 생산한다. 소련군정은 해방 다음 달부터 북한 각급학교에서 소련어 교육을 실시하였고. 마르크스-레닌 저작물과 공산주의 교육을 위해 조선역사책을 직접 만들고 번역작업도 서둘렀다. [정로]는 뒷날 [로동신문]이 된다.
 
▶김일성정권 창출에 ’소련파‘ 독무대=김일성정권 창출의 1등공신은 소위 ’소련파‘였다. 소련에서 모두 5회에 걸쳐 북한에 데려온 ’인재 그룹‘은 428명, 고등교육을 받은 정치-경제-교육 등 전문가들로 각분야 ’소비에트혁명의 실무코치‘들이다. 
그 중심인물 허가이(許哥而,1908~!1953)는 소련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로 조선공산당 및 행정제도와 기관들을 만들고 훈련하고 운영을 정착시킨다. 모든 조직의 부(副)자리에 소련파를 앉혀 ”2인자는 고려인“이란 실권을 잡아 소련군정의 손발이 되었다. 
김일성은 책임비서가 되자 중국 빨치산 동지들을 조직에 심고, 뒤늦게 들어온 연안파도 활용한다. 이 소련파와 연안파는 서로 ’무식쟁이‘ ’협잡꾼‘등 시기질투 경쟁하다가 스탈린이 죽고 6.25전쟁서 패전 후 김일성에게 모조리 숙청당한다. (김용삼 [김일성-신화의 전설] 북앤피플, 2016)

▲ 1946년2월8~9일 열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축하행사장 밖에 걸린 현수막들.

공산화 <2대1 음모>...’임시‘ 위장한 ’단독정권‘ 
 
1월16일부터 2월6일까지 서울에선 미-소 공동위윈회 구성과 개최를 위한 준비회담이 열렸다. 
스탈린의 전권을 위임받은 ’북한 총독‘ 슈티코프와 레베데프 대장등 대표단 5명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군정대표단과 미-소공위의 일정과 의제를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처음부터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리고 슈티코프 일행이 평양에 돌아온 다음날 2월8일, 그동안 준비를 끝낸 역사적 행사가 벌어진다. 
바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는 경축식이다. 
박헌영을 압박하여 김일성을 조선공산당의 명실상부한 실권자 책임비서로 만든 소련군정이 ’반탁‘의 조만식을 연금한지 한 달 만에 북한 단독 정권을 출범시킨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꼭 6개월, 스탈린의 ’9.20지령‘후 5개월 만에 지령대로 소위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회의 명칭은 ’북부조선 각 정당, 대중단체, 행정국 및 각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라는 긴 이름을 내세웠다.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각본대로 회의 소집 취지를 밝힌다. 
”북조선의 중앙기관, 즉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자는 의견은 전국의 각 단체 대표들이 먼저 제안하였고 발기부(勃起部)를 조직했다. 이 발기부의 의견을 소련군 사령부가 전혀 반대하지 않고 대환영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소련 군정의 작품이 아니라 북조선 인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결정임을 주장하는 말이다. 스탈린이 지령하고 재촉했던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소련은 어디까지나 아래로부터의 인민혁명의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 행사에는 소련군정 측은 참석하지 않았고 완전히 김일성의 단독행사로 꾸몄다. 
김일성은 ”북조선의 행정과 입법권을 가지는 독재적  관으로서 임시 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라고 선언하였다. 행사장 밖에도 ”인민위원회는 우리에 정부이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대회를 마친 다음날에야 명단이 발표된다.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양욱, 보안국장 최용건 등 17명이다. 
 
★미-소 공동위의 핵심이 된 '남북한 임시정부' 구성
소련 군정이 해방 6개월만에 급조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미-소 공동위원회에 대비한 한반도공산화 사니리오의 핵심부분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스탈린의 각본은 신탁통치 논의보다 신탁통치를 위한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이 먼저였다. 미-소 공동위는 그 남북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이 주목적이며, 이는 막연한 신탁통치에 매몰된 미국의 무정책을 활용하는 공산당 특유의 전략전술이댜.
즉, 소련의 지령에서 보았듯이 ‘2대1’ 음모, 북한공산당+남한공산당 V 남한의 들러리를 합친 남북한 임시정부 구성, 누가 봐도 소련이 장악하는 ‘공산 정권’의 구성 방법론이다.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남조선 ‘인공’으로 대표되는 공산세력, 여기에 민족통일전선을 통한 중도파와 ‘쓸모있는 바보’들을 합친 정부형태가 스탈린의 계산법이 된다..
이 계산법이 말해주는 몇가지를 보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독립의지’로 만든 북한유일의 대표이다.
▶‘임시’라는 접두어는 ‘과도정부‘임을 보여주는 위장술, 미-소공동위가 임시정부를 만들어내면 “즉시 해산한다”는 단서까지 달았다. 스탈린의 지령이다. 당초에 소련군정이 ’임시‘를 반대하였으나 북한간부들이 남한에서 ’단독정부‘로 비난할 까봐 ’임시‘를 붙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게 그거다. 만약 미-소 공동위 협상에서 임시정부 구성이 실패할 경우, 소련은 그대로 ’단독정권‘을 이어가기로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다. ’임시‘ 수식어는 다음해 2월21일 사라진다.
 
▶소련은 이미 ’임시정부 내각 명단‘까지 마련하였다. 3월16일 몰로토프 외무상이 보낸 지령이 말하는 내용은 ’경악‘ 그 자체이다. 
"미-소공동위 개막날짜는 3월18일로 하라, 임시정부 구성원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라라, ’후견‘ 조치를 강구하라, 민주주의적(공산주의적) 자주권 확보를 위해 2단계로 투쟁 진행하라..."등등, 치밀한 협상전략까지 일일이 제시하고 있다.(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외)
내각 명단을 보면, 수상 부수상 등 요직은 북한 측에 배정하고 농림상 교통상 등 주요성이 떨어지는 부서는 미국측이 추천하도록 정해 놓았다. 실권부서 내무상은 김일성이다.
 
★제1차 미-소공동위는 3월18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 그것은 스탈린의 도박판, ’밑져야 본전‘이다. 미국이 속아주면 한반도를 다 먹고 깨어져도 북한은 소련 위성국이다

이승만 건국사(40) ‘반탁’의 국제정치학...‘용미’(用美)의 용병술 1탄 성공

신탁통치 반대 ‘반탁’은 새로운 독립운동이다. 
세계 최강들과 싸우는 국제적 ‘건국전쟁’이다.
식민주의 일본이 물러가자 강대국들이 차지한 한반도, 북한을 점령한 공산독재 소련과 싸워야하고, 남한을 점령한 민주주의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 독립해야 한다.
모든 싸움은 ‘지피지기(知被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요, 부지피부지기(不知彼不知己) 매전필태(每戰必殆)’라고 했다.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3장 모공(謀攻)편의 결구 「너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도 자신도 모르면 싸움마다 위태하다」는 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도 한다. 
자, 그러면 소련과 미국과 어떻게 싸워서 물리치고 우리 뜻대로 나라를 세울까.
김구(金九)처럼 “미군정 물러가라. 임시정부가 집권하겠다”는 의병식 항일투쟁 발상으로는 강대국의 호통 한마디에 굴복하는 자살행위 밖에 안됨을 보았다.
 
“충역(忠逆)이 역전되었구나...” 이승만의 말이다. 충신보다 역적이 많다는 말, 이것은 이승만이 귀국 직후 토로한 상황인식, 해방 당시 자유민주주의의 적(敵) 공산세력이 압도한 남한의 실상이다. 이 왜곡된 구조를 재역전시켜야 한다는 각오의 다른 표현이겠다. 
“신탁통치가 강요된다면 우리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격”이라며 이승만은 “연합4국의 이해가 결코 일치될 수 없어 한반도는 열강상쟁의 수라장이 될 것”이라 경고하며 각개격파 작전을 준비한다. 
이승만은 모스크바 발표에 통곡하는 임영신(任永信)에게 “나한테 계획이 있다”고 달랬다.
무슨 계획인가. 이승만의 평생지론은 <미국의 힘을 이용한 용미(用美)외교 독립론>이다. 이 방법론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 “미국 같은 나라 만들기 위해선 먼저 백성을 기독교정신으로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기독교정신이 만들어놓은 강국 미국으로 달려가 5년간 연구하여 당시 미국에도 없던 ‘국제정치-국제법 박사’를 따내며 업그레이드시킨 ‘기독교 신념의 독립 실천론‘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그래서 “오래 준비하는 싸움, 총칼로 싸우지 않고서도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러니 사람들 눈엔 김구의 폭탄이나 공산당의 죽창만 보이고 이승만의 1천편 논설들이나 ’JAPAN INSIDE-OUT’은 안 보인다. 이승만은 폭력이 아니라 말과 글과 조직으로 싸운다. 그는 교사, 전도사, 목사, 자유 십자가 군병의 대장이다. 미국의 지도자들로 ‘신념의 자유 네트워크’ 2만5천명을 깔아놓고 그들을 동원하여 싸웠다. 독립운동의 강력한 인프라이자 신생국의 지원군이다. 해방 되나마나 더 큰 굴레를 뒤집어쓴 ‘분단’과 ‘신탁통치’ 앞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지닌 자산을 총동원한다. ‘용미의 건국전쟁’ 새 출발이다.

▲ 김영삼정권이 1995년 폭파한 일본총독부 건물. 일본에 나라를 바친 고종의 경복궁을 점령한 대형석조건물이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 건물은 일본의 항복후 미군정청이 사용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이루어진 곳. 제헌국회가 헌법을 만든 첫 국회의사당이며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운 건국정부가 첫 정부청사로 이용하였다. 영욕의 흥망사는 건물을 철거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사진은 철거직전쯤 모습)

◆“밖에 발설 말라. 남한에 정부 세워 북한을 청소하자”
 
새해 1월 미소공동위원회 구성을 위한 양국대표 예비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 14일 감기몸살로 누웠던 71세 이승만이 돈암장 정례기자회견에 나섰다. 외국 기자들도 몰려왔다.
이승만이 말한다. “나는 대한민족의 통일이 형식이나 실지로나 완성된 것을 선언한다” 여기서 통일이라 함은 남북한 민족세력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를 결성한 사실이다. 북한의 조선민주당 조만식에게도 연락하여 부당수 이윤영이 참여했다.
“공산분자와 협동하려고 시일을 허비하였으나, 사실상 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성의를 다 하려 한 것이다. 중국 장개석도 좌우합작에 실패하였고 유럽 각국에서도 번번이 실패한 것어어늘, 유독 한국에서 어찌 홀로 성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찌 한길을 갈 수 있을까.....이제 우리는 38선에 관계없이 한족정신으로 합동하였다” ([대동일보]1946.1.15. [동아일보]1946.1.16.)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의 구성부터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반탁 시위만 할 것이 아니라 미소공동위라는 것부터 용납해선 안된다. 미국은 우리를 해방시켜준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는 막판에 뛰어들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우리정부조직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다른 나라는 소련이다. 소련이 미소공동위에 참여하는 자체부터 막아내자는 말이다.
특히 ‘소련의 야심‘과 달리 한국에 영토적 이익을 찾지 않는 미국을 강조한 것은 이승만의 오래된 지정학적 연구결과이며, 이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공통인식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독촉중협을 ‘전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선언하고 미소공위를 거부하면서, 따로 움직이는 김구의 ‘비상정치회의’와 통합하는 작업을 벌였다. 
 
미-소의 공동위 예비회담 개막 후 1월18일 이승만은 독촉중협 회의에서 말한다. 
“내가 알아보니 미국정부와 군정청도 우리의 반탁-반공의 뜻을 이제야 인정하고 있다. 미국무장관 번스씨도 한인들이 원치않으면 탁치를 안해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느냐. 이에 우리가 할 일이 명백하다.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을 이유로 미국에 공동위 설치를 요구하면 미국이 불응하기 곤란할 터이므로 우리가 미국 측에 거부할 명분을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이승만은 이처럼 ‘미국을 이용한 신탁통치 무효화’를 이끌어내려 물밑작업을 시작하였다. 
 
★‘국회 같은 국민조직’ 만들자...하지와 협력
“나에게 양책(良策)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의사를 띠고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이 가져온 안이다. 우리 힘으로 모든 세력을 망라하여 ‘국회 같은 국민조직’을 완성, 미군정청 고문기관 같은 형식으로 독립을 추진해나가자. 미국은 물론 중국 영국까지도 환영할 것인 즉, 소련이 아무리 야심이 크더라도 별수 없이 양보할 것이다.”
이 안에 김구도 김규식도 찬성하였다면서 이승만은 내일부터라도 실행하자고 서둘렀다.([독촉중협 제5회 회의록] 1946.1.18.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3], 손세일 앞의 책)
독촉중협은 이날 이름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 비상국민희의란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혁명이나 건국 때에 쓰던 이름이다. 오랜세월 이승만은 이미 ‘건국혁명’을 진행해왔으니까 드디어 고국현장에서 건국투쟁기구를 만들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도 미소공위에 극히 비관적이었다. “소련이 한반도 공산화를 노리기 때문에 남북한 통합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본국 국무부가 현장사정도 모르면서 자신의 건의는 무시한다”고 맥아더에게 불만을 전달했다. 남북한의 공산당에 우려가 깊은 하지는 이승만이 제안하는 ‘국회같은 국민조직’의 역할과 그 ‘민주정부로의 이행’ 등에 적극 공감하였다.
 
★스탈린의 ‘민주기지’에 대응한 ‘자유기지’ 선언
1월21일 돈암장 독촉중협 회의에서 이승만은 ‘중대 발언’을 꺼낸다.
“이 말은 밖에 누설되어선 아니된다.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말이지만, 군정측 사람들 말로는 소련 측과 결렬되는 형편은 불가하다 한다. 만약 결렬이 있으면 공동위라든가 신탁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하야 정부를 세운 후에 북쪽을 소청(掃淸)해야 하겠다. 우리의 통일은 전에 비하면 더욱 공고하니까 우리가 직접으로 북선(북조선)의 관계를 해결하겠다고 내가 말했다.” ([우남이승만문서 동문선-13]
즉, 자신이 반대하던 미소공동위 구성이 결렬될 수 없음을 알고 난 이승만은 미국 측에 실망하여 새로운 결심을 토한 발언이었다. 하지와 맥아더의 ‘반공’에 기대하였으나 결국 미국무부의 지휘를 거부하지 못하는 군인들의 한계를 어쩌랴.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정부를 세워서 북한을 청소”해야겠다는 결심을 공개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비록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의 이 발언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2월8일 출범하기 18일전에 나온 것으로서 지난해 ‘스탈린의 9.20지령’과 같은 남한판 단독정부 수립론이라 할 수 있다. 스탈린은 북조선에 ‘민주기지를 세워 남조선까지 혁명’한다했는데, 이승만은 남한에 자유민주정부를 세워 북한 공산당을 청소하여 통일하겠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남한 자유기지론’이라 하겠다. 이 비밀발언은 5개월 뒤 6월3일 ‘정읍발언’으로 나타난다. 
 
이날 독촉중협 회의에 김구가 환한 얼굴로 참석하였다. 이승만이 통합을 요구한 자신의 비상정치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한민당의 김성수와 장덕수 등이 노력한 결과였다. ([비상국민대회대표 회의록]1946.1.21.) 충칭시절 좌우합작 했던 좌익 김원봉 등이 이때 이탈함으로써 임정은 사실상 해체된다.

▲ '과도정부의 모체' 민주의원의 역사적 성립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소련의 독주 막자”...‘과도정부의 모체’ 민주의원 설립
 
비상국민회의는 2월1일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이틀간 열었다. 소련대표와 희의중인 미군정대표 아널드 소장과 러치 군정장관은 축사에서 “이 모임으로 한국민족의 통일은 완성되었다고 보며, 세계에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한민당의 함상훈 선전부장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건국회의”라고 규정하였다. ([조선일보]1946.2.2.)
가장 관심이 집중된 일은 최고정무위원 설치 결정이다. 그 인선은 이승만과 김구에게 일임하였다. 이때 김구와 굿펠로가 돈암장에서 살다시피 매일 방문한다. 그렇게 각계대표 28명이 선정된다. 물론 공산당은 제외되었는데 인민당 여운형이 들어갔다. 이승만의 부탁을 받은 굿펠로의 포섭작업 결과였다. 이 명단은 11개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13일 공개하였다.
이 최고정무위원을 미군정이 수용하여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民國民主議院)이란 긴 이름으로 공식 탄생한다. 이 이름도 이승만이 주도한 것은 물론이다.
바로 이승만이 하지에게 제의, 의기투합한 “국회 같은 국민조직”이다. 당장의 형식과 기능은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지만 이승만에게는 ‘새로운 임시정부’와 같은 ‘건국의 모체’인 것이다.
 
오전10시 미군정청 (옛 총독부청사) 제1회의실에서 거행된 ‘민주의원’ 개원식 무대에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과 김구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개원 연설에서 민주의원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실하게 규정한다.
“나는 오늘 개인자격으로 제위를 대하는 것이 아니외다. 왜냐하면 나는 국민을 대표하야 국민의 소리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까닭입니다. 오늘이야말로 한국의 발전과 주권국가로서 독립한 자주정부의 복구를 향하야 비약하는 신기원을 짓는 날이올시다. 깊이 영광을 느끼는 바입니다. 고문 자격으로서 하지 장군에게 협조하려는 이 (민주)의원은 한국을 급속히 독립국가로 만들려는 여러 정당 수뇌자들과 오랫동안 협의하고 신중히 고려한 나머지 성립된 것입니다. 이 민주의원의 성립은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통일된 독립 한국의 목적 달성의 전조가 될 것입니다....우리를 분열시키는 사소한 논쟁을 배격하고 오직 우리 국가의 자유라는 큰 목적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중략)....한국 국민에 대하야 우리의 부단한 노력을 맹세합니다. 세계에 자유 국민으로서의 성공의 모범을 보여줍시다. 한사람이라도 이 전무후무한 기회에 실패하였다는 말을 듣도록 하지 마시오. 진도는 다난하나 문제는 명료합니다. 자유와 독립이여!”
 
이승만이 굿펠로와 하지 사령관과 힘을 모아 설립한 민주의원의 성격은 부의장 김규식이 낭독한 ‘의원 선언문’이 확인하고 있다.
“한국의 여러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피선된 남부한국민주주의대표회의 의원이 된 우리는 이 땅에 머무를 미군 총사령관이 한국의 과도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노력에 자문자격으로 협조하기를 동의함. 우리는 모든 활동을 이 대표회의로서 조정하고 우리의 노력을 경주하여 한국인민의 현상을 개선하며 그로써 한국의 완전독립을 속히 실현하기에 공헌하기를 기함”
 
하지 장군은 ‘민주의원’의 설립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기분이었다.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국무부의 훈령이 ‘현장을 모르는 헛소리’인지라 화나고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도와준 이승만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제 소련과의 협상에 자심감도 생긴다. 
하지의 정치고문 굿펠로 대령도 “남한 최초의 임시정부(The First Temporary Government)를 세우는 임무 수행이 내 생애 큰 보람”이었다고 했다.
 
과연 ‘용미(用美) 전략가’의 성공! 이승만의 용병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지난해 10월 귀국길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난 이승만은 그때 이미 굿펠로를 한국에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동시에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으로 굿펠로를 적극 추천하였던 것이다. 맥아더는 그대로 들어주었다. 이듬해 1월초 한국에 온 굿펠로는 거의 날마다 돈암장과 미군정청을 오가며 이승만과 ‘민주의원’이란 독립기구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승만이 말했던 대로 미국이 소련의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도구 하나를 제공해준 셈이다.

▲ 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이승만보다 4개월 늦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사진은 김포공항에 마중나온 이승만과 일행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자유와 독립’--민주의원이 ‘헌법 초안’을 만들다
미군정의 자문단체로 발표된 민주의원은 사실은 ‘임시정부’이자 ‘국회’이다. 이승만은 개원과 동시에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을 직접 작성하여 3.1절 직전에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하였다.
‘과도정부’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열어 설립할 ‘남북한 임시정부‘를 말한다.
이승만은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는 제목으로 그 내용을 설명한다.
▶민중의 평등, 18세이상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언론 집회 종교 출판 및 정치운동의 자유, 주요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의무교육제도, 최저임금제, 사회복지제도 등 ’당면정책‘은 국가경영의 모든 것을 종합정리한 ’헌법 초안‘ 같은 국가비전이다. (손세일, 앞의 책)
그것은 만약 소련이 개입한 과도정부가 공산주의 정권이 되지 않도록 ’철갑을 두른 것‘이다.
특히 토지개혁에서 ’유상 구입, 유상 분배‘ 원칙을 강조하며 ’농민 우선주의‘에 대하여 자세한 해설을 하였으며, 고리대금과 축첩까지 금지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독립운동 기념일인 3월1일을 국경일로 제정할 것을 결의, 하지 사령관이 즉시 수용한다. 
이때 민주의원이 결의하여 확정한 이승만의 33개항 정책들은 2년후 대한민국 건국 의회가 헌법을 제정할 때 거의 그대로 수용된 대한민국 헌법안이다. 이렇게 기능을 다한 민주의원은 건국국회 개원 전날에야 문을 닫는다. 
 
민주의원은 의사당으로 덕수궁 석조전을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미소공동위 개최 때문에 양보하고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으로 옮겼다. 
이 무렵 약 6개월간은 이승만과 하지의 하니문(Honey-Moon)이라 할만하다. 곧 찾아올 '견원지간'에 비해서는 그렇다.
또 하나의 하니문이 찾아온다. 민주의원 개원 1주일뒤 2월21일 워싱턴에서 귀국문제로 골치를 앓던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가 서울에 왔다. 4개월 만에 다시 만난 부부는 드디어 고국에서 감회어린 제2의 하니문을 맞았다. 그리고 프란체스카도 부부일심동체의 건국전쟁에 발 벗고 뛰어든다.

이승만 건국사(41)‘정읍선언’은 ‘이승만 독트린’...‘분단’아닌 ‘통일’선언

 

1946년 3월20일 오후 2시,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양국 5명씩 대표단의 단장은 미국 아널드 소장, 소련은 슈티코프 중장이다. 관심이 집중된 슈티코프의 개막연설이 노골적이어서 충격을 불렀다.
“한국 인민은 민주적 자치정부 기관으로서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한국인민을 민주화시키는 과정에는 이를 방해하는 반동적 및 반민주적 그룹의 반항에서 기인하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있다.”
그가 말한 한국인민이란 북한주민을 가리킨다. 한 달전 출범시킨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단독정부)를 가리켜 ’자치정부‘란 말로 위장발표하고 민주화(공산화)에 저항한 반공세력 숙청의 고충을 털어놓은 연설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새로 구성할 ’남북한 임시정부‘가 ’친소정부‘여야 한다는 점을 집중 강조하였다.
“소련은 한국이 앞으로 진정한 민주적인 독립국가,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지 않을 우호적 국가가 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임무는 민주적 자치정부의 발전과 주권적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원조해야 한다.”
첫날부터 ’북조선임시인민위‘를 부각시키며 그가 준비해온 협상 각본, 앞에서 본 ’2대1 공산정권‘ 구성 카드를 미국 측에 들이대는 압력이었다.
이 연설에 대하여 미국 아널드 단장은 대표단회의에서 “개막연설이 아니라 폐막연설 같다. 하지 장군도 연설이 한국의 소비에트화와 식민지화를 추구하는 소련의 야심을 잘 나타냈다고 한다”고 말했다.(손세일, 앞의 책)

▲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대표들. 앞줄 왼쪽 미군정 하지 사령관,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 뒤로 소련장성들.(자료사진)

★슈티코프의 ’북한 토지개혁‘ 3월중 완료...수십만 주민 엑소더스
슈티코프가 연설하는 시간, 북한에선 전국의 대대적 토지개혁이 막바지 단계였다. 
김일성의 북조선임시인민위가 소련군정의 결정과 지휘에 따라 3월5일 개시한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은 한마디로 북한 전역의 산림과 농경지 전체를 국유화시킨 것, 아니 국민재산 전부를 ’공산당의 소유‘로 바꾼 만행이었다. ’지주‘ 딱지가 붙으면 주택과 다른 재산까지도 몰수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소작농의 고통을 겪었던 농민들은 공산당의 ’적개심 선동‘에 앞장서서 무엇이든 ’강탈‘하고 파괴하고 불태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불합리한 약탈적 토지개혁에 반기를 들었던 농민들과 학생들 시위는 물론 소련군이 무차별 진압하였다. 
토지개혁은 불과 20일 만에 완료, 잇따라 중요산업 국유화, 남녀평등법과 노동법 시행, 사법기관 재편등 소위 ’민주개혁‘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붉은 태풍이 휩쓸었다. 
슈티코프가 연설에서 말한 한국인민의 ’자주적 민주화‘ 바람이다. 
이때 ’민주화된 농촌‘에는 무려 1만1,930개의 ’농촌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8~35세 청년들의 ’농민자위대‘가 나타나 중국의 홍위병처럼 저항하는 기독교계 등 ’반동-반민주‘세력 청소에 돌진한다. 이때 38선엔 소련군의 총탄을 맞으며 밤마다 대규모 엑소더스 행렬이 수십만명 이어진다. 장애물은 사라졌다. 1945년말 4천여명이던 북한 조선공산당원은 6개월후 37만명으로 늘어, 소비에트화가 급진전한다.
스탈린의 오래 된 목표 ’한반도 먹기‘에 절반 성공이 이루어졌다. 밀려오는 피난민들로부터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을 들은 정치인들이 “우리도 서두르자”며 이승만을 찾았다.
이승만은 말했다. “남의 손으로 하지 말자. 미군은 소련 대응도 못하는 군인들 아니냐. 어서 빨리 우리 정부 세워서 우리 법을 만들어 우리 손으로 개혁해야 한다. 북한식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더 잘할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자.”

▲ 미소공위에서 대화하는 하지와 슈티코프(오른쪽).

◆슈티코프, ’반탁‘세력 참여 거부...이승만 ’3남 시찰‘ 대장정
 
개막 열흘 만에야 미소공위 성명 3호가 나왔다. 소련의 장난에 갈팡질팡하던 미국이 작업계획에 합의했다. ’임시한국민주정부‘ 구성을 위한 스케줄, 슈티코프가 오로지 ’정부구성‘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할 조건과 순서, 임시한국민주정부의 기구 및 조직원칙과 임시헌장에 따라 조직될 기관에 대한 제안의 준비 토의, 임시한국민주정부의 정당 및 법규의 준비 토의, 임시한국민주정부의 각원에 대한 제안에 관한 토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소위(小委) 설치 등이다. 쟁점은 금방 협의 대상 정당-단체의 선택에 모아졌다. 
미국 대표단은 이미 대비했던 대로 남한대표를 ’민주의원‘으로 일원화하자고 제안하였다.
 
소련 대표단은 민주의원을 남한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모스크바 결정에 찬성하는 정당과 단체만이 협의 자격을 가진다고 했다. 즉 공산당이 빠진 단체의 ’반탁‘ 이승만 김구를 거부한 것이다. 
남한에 ’분열탄‘을 터트려놓은 슈티코프와 소련 대표단은 덕수궁의 미소공위보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좌익세력을 접촉하며 공작하는 일이 더 바빴다고 한다.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앞의 책). 북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을 전후해 남한의 통일전선 조직체를 준비한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은 미군정의 민주의원 개원 다음날 2월15일 서울 YMCA회관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소련군정의 북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맥을 같이했던 것임은 물론이다.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전원 참여를 주장하는 미국 지영에 혼선이 나타났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육군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에게 제동을 걸어왔다. “하지 장군의 실패하는 행동 때문에 나는 동요가 크다”는 비난, 요컨대 하지 사령관의 ’반공 발언‘등이 장애가 되므로 회담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Byrnes to Patterson, Apr. 1. 1946. FRUS 1946, vol. Ⅶ) 어디까지나 소련과 협력하겠다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변함이 없었다.
 
4월5일 슈티코프가 ’절충안‘이란 이름의 묘한 카드를 던졌다.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해온 정당과 단체라도 앞으로 지지한다면 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불난 집에 불 지르기, 미소공위에 비관적이던 우익세력과 소극적인 미국 측에 달콤한 유혹의 불화살을 쏜 것이다. 미군정도 우익진영도 혼미에 빠진다.
4월6일 AP통신이 ’미군정에서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본국에 제의했다‘는 보도까지 함으로써 정국은 더욱 시끄럽다. 이승만에게도 질문이 날아든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런 보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미소공위가 토의하는 기간에는 침목을 지키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미소공위가 38선을 철폐하야 남북이 통일을 회복하기로 양국이 결정해주기만을 바란다”며 다시 한 번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였다.
 
그때 침묵하던 하지가 도쿄 맥아더를 찾아 날아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온다. 
무슨 대응책을 찾았을까. 하지가 귀국한 다음날, 이승만은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을 시켜 ’남선순행‘(南鮮巡行) 계획을 발표한다. 4월15일부터 3주일간 남한 3남지방 순회여행이다.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은 번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좌익이 강한 지역에 자기 세력을 강화하러 여행 간다”고. 곧 소련의 이승만 거부에 대응하려는 하지와 맥아더의 묘안인 셈이었다.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주겠다는 의도, ‘국민의 이승만 지지가 이렇게 높은 데도 참여시키지 않을 테냐’는 계산이다. 그러나 소련을 모르는 미국 군인들의 순진한 카드였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이승만은 선뜻 지방시찰에 나서기로 했다. 무슨 국면이든 그것을 역이용하는 전략가 이승만은 ’반공 여행‘ 기차에 오른다.

▲ 3남지방을 순회하는 이승만 부부와 운집한 주민들. 앞쪽 가운데 한복차림 프란체스카와 그 뒤 이승만이 보인다. 장소 불명.ⓒ연세대이승만연구원

★3남(三南)순회 연설여행...“우리의 국부” 수십만 열광의 환영대회
지방에선 난리가 났다. 국민적 영웅의 행차, 전국 144개 군(郡)중에 114개군에 조직된 독촉국민회들이 너도 나도 “우리 지역에 꼭 오십시오” 갖가지 준비에 바쁘다.
◉첫 방문지 천안(天安)=프란체스카와 부부동반 여행은 온양(溫陽)온천에서 1박, 제일국민학교 3만군중에 연설, 
◉다음날 대전(大田)=본정국민학교 4만여 군중에 반공 연설, 유성(儒城)온천에서 환영간담회.
대전 방문 직전 이승만 암살단 7명 검거.
굿펠로가 군용기로 내려와 소련의 ’5호성명‘ 내용을 이승만에게 설명했다. 미소공위는 슈티코프의 ’절충안’을 받아들여 제5호성명을 18일 발표하였는데. 갈수록 소련의 음모에 끌려들어가는 미국이다. 성명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이 되고 싶은 정당과 사회단체는 ‘민주적’이어야 하고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실행에 협력한다는 서약 선언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도 서명을 설득하고 나섰다. 민주의원들은 난감하다. 이승만의 귀경을 기다려 결정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무슨 생각인지 예정된 여행을 계속한다.
◉김천(金泉) 가는 길에 태극기 물결=옥천(沃川) 국민 학교에서 연설하고 김천 동부 국민 학교 운동장에서 남녀학생들과 군민 4만여명에게 미소공위 진행상황 설명. 일치단결 호소.
◉대구(大邱)에서 해방기념 식수=기자단 회견에서 ‘5호성명’ 비판, 공설운동장 경북도민 환영대회 10여만 군중이 환호. 연설도중 비가 내려 방송으로 다시 연설하다.
◉경주(慶州) 영천(永川) 영일(迎日) 울산(蔚山) 4개군 연합환영대회=5만여 주민들에게 시국강연, 불국사에서 프란체스카와 이틀 휴식.
◉동래(東萊) 가는 길에 암살범 1명 검거. 온천장 호텔에는 민주의원 백남훈과 윤치영이 대기,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요구하는 선언서에 서명하고 반드시 참가하여 주장을 관철시키라는 당부와 함께 ‘선언서’에 서명하여 주었다. “이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서명이 아니요, 신탁을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뜻대로 안될 터이니 타협이 못 되면 그때엔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해도 늦지 않을 터이다.”
◉부산(釜山) 공설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의 20만 인파=태극기와 환호성, 기독교 연합 합창단의 환영합창 속에 “우리의 국부(國父)”라는 소개와 함께 등단한 이승만은 눈물을 훔쳤다. ‘한덩어리로 뭉쳐서 자주독립을 찾자’는 노래 가사에 감격하여 ‘단결’을 외치고 외쳤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견이 달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선동하여 근로대중을 못살게 만들고 국가 산업을 파괴하는 행위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쉬운 말로 해설하며 토지개혁문제도 자기 구상을 설명한다. “무상분배 한다고 하나 이것은 국민의 재산권을 무시함이니, 장차 우리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에 국법을 제정하여 국민 생활복리를 옹호함이 지당하다.”
이승만의 남선순행중 부산 강연이 ‘반공 캠페인’의 하일라이트 같았다. 
◉마산(馬山) 강연에는 거제도와 남해도에서도 배 탄 단체들이 모여들었다. 4만여 군중 앞에 미군 해병대 800여명이 군악행진을 벌여 이승만의 위상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함안(咸安) 의령(宜寜)을 거쳐 진주(晉州) 환영대회는 고성(固城) 통영(統營) 하동(河東) 산청(山淸) 등 9개군민 3만여명 집결.
◉순천(順天) 군수 김양수(金良洙)는 이승만의 하와이 동지회원, 목사 배민수(裵敏洙)는 주미외교위원부 출신, 오랜만에 재회한 사제는 3만여 군중 앞에서 감격의 독립운동을 다짐하였고, 배목사의 교회에선 “공산당이 일본보다 더 구속한다”고 비판하며 “자주독립과 자유신앙에 노력하자”고 설교하였다.
◉5월6일 벌교(筏橋)를 지나자 부인회가 “그냥 가시니 섭섭하다”며 꿀물을 대접한다. 보성(寶城)에서도 1만여명이 모여 강연과 기념식수를 했다. 장흥(長興) 환영대회를 거쳐 목포(木浦)다.
산수 국민 학교에서 3만여명 강연. 그때의 호남은 오늘의 호남이 아니었다.
◉광주(光州) 서정 국민 학교에서 5만명 환영강연회, 두 시간이 넘는 연설회가 끝나고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38선 철폐를 거부하는 소련’을 집중 비판하였다. 
그날 서울의 미소공위가 결국 무기연기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과 순리적으로 잘 해결할 줄 알았더니 그걸 못하고 미국대표들도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매우 유감이다. 38선문제도 소련이 해결 못하면 소련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큰 불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하였고, 우리 강토를 단 얼마라도 남에게 양여치 않을 결심이니 이것을 소련사람들이 하루 바삐 각성하기 바란다.” 
(이상 이승만의 ‘남선순행’ 내용은 [대동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보도 참조).
5월10일 급거 귀경한 이승만은 즉시 하지 사령관과 요담하고 이튿날 굿펠로를 불러 돈암장에서 대비책을 궁리한다. 
 
★김규식 “제주도에 세워도 통일정부” 최초의 ‘단독정부’ 발언
하루도 쉴 틈 없는 이승만은 12일 오후,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남선순행 하며 이승만이 준비한 행사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주최, 100여개 우파 정당과 사회단체달이 참여한 대회는 10만여 군중들이 ‘신탁통치 절대 반대’ ‘38선 철폐하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소련을 규탄하는 ‘대회선언’과 미소공위 정회의 책임 규명과 국제여론 심판‘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23세때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와 싸우던 청년 이승만이 71세에 또 소련과 싸우는 방식의 하나였다. 
이 대회에서 폭탄발언이 터졌다.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연단에 오른 김규식은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한 경위를 설명한 뒤 문제의 발언을 이었다. “이제 우리는 양국의 협력을 기대할 것 없다. 우리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우리 손으로 정부를 만들어 열굴에 자랑해야 한다. 남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리가 정부가 아니다. 38선이 급히 터지면 북측 친구들이 와서 우리를 못 견디게 할 것이므로 38선은 드개로 두고 38선 이남에서 한인만으로 정부를 만들면 그 정부는 대구에 있든지 제주도에 있든지 우리 통일정부다” 
이날 흥분한 시위대들은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중앙신문] 등 좌익신문사들을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하였다.
좌익정당들은 김규식의 발언을 ‘단정 음모’라며 격렬하게 반발, 총공세를 퍼부었다. 김규식은 뒤늦게 “사실 무근이다. 나는 단독정부란 말을 안했고 통일정부라 했다”고 부인하였다. ([동아일보]1946.5.17.)

▲ '정읍 선언'을 보도한 신문들.

‘정읍 발언’...“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세워 소련 추방후 통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무기휴회 때문에 중단하고 귀경했던 남선순행을 다시 떠났다.
이번에도 프란체스카와 함께 기차를 타고 6월2일 출발, 정읍(井邑)서 1박후 다음날 3일 아침에 유명한 ‘정읍발언’ 연설을 한다. 바로 ‘6.3정읍 선언’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야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에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야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조선일보] 1946.6.5.)
 
그날 오후 정읍을 떠나 전주에 도착한 이승만은 다음날 6월4일 오전 10시 공설운동장에 모인 5만 환영인파 앞에서 정읍 연설과 같은 연설을 했다. 그리고 6월5일 이리(裡里) 7만명, 6월6일 군산(郡山) 20여만명의 환영대회 연설여행을 강행한다. 군산연설 요지는 이랬다.
”공산 극렬분자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손을 잡고 말리기 바란다. 미소회담을 기대하였으나 소련의 고집으로 무기휴회되었다. 우리는 냉정히 참고 참되 끝이 아니날 때에는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 이때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아야 한다.“ ([대동신문]1946.6.8.)
6월7일 충남 공주(公州)와 8일 충북 청주(淸州), 9일 진천(鎭川)과 장호원(長湖院)까지 강행군을 마친 이승만 부부는 그날 밤 9시 반쯤 서울 돈암장에 돌아왔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이승만의 정력적인 ‘반공’ 캠페인 여행은 끝났다. 도시마다 지역지도자들을 만나 조직점검과 작전 협의, 기자회견까지 쉬지 않았고 연설 주제는 한결같았다.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와 같다. 극렬분자들과는 협력은커녕 타협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굴복하느냐 저항하느냐이다. 한국의 자유 독립을 달성하려면 신탁통치와 소련 공산주의를 철저히 거부하고 물리치는 길 뿐이다.“
과연 이승만의 3남순회 캠페인은 ‘국민적 반공의 시발점’을 만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클라이막스가 ‘정읍 선언’이다. 미국도 소련도 기대할 것 없음을 실감한 국민공감대를 확인하고 강화시키며,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 세우라“는 열광적 환호 속에서 이승만은 그의 평생신념  ‘반공-자유-자주 독립의 건국’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한의 소련을 물리쳐 자유통일국가를 창조한다는 국민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강대국에 맞서 싸워 민족의 소원을 이루는 글로벌 지도자로 솟아올랐다. 
 
김구도 이승만보다 먼저 지방 나들이를 떠났는데, 김구의 여행은 이승만의 정치캠페인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연고지를 찾아다니는 ‘센티멘탈 저니’(Sentemental Journey)였다고 손세일은 그의 책에 써놓았다. ([이승만과 김구] 제6권)
 
★공산당 등 좌익, 극악한 모략 선동...우익세력도 ‘반대’ 
이승만의 발언내용이 ‘분단’이 아니라 ‘남북통일’이 목표임을 분명히 말하는데도 이를 무시한 공산당 및 좌익들은 일제히 맹렬한 비난을 쏟아낸다. 
스탈린의 전술이다. 이미 해방 열흘만에 38선을 봉쇄하고 6개월 만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권을 수립한 소련의 위장작전, 스탈린은 ‘분단’ 카드를 이미 동원한 것이었다. 남몰래 급조한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임시’를 붙여 ‘임시위원회’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분단 책임’을 피하려는 계획적 음모, 분단 책임은 소련의 ‘공산화 협상 카드’를 거부하는 미국과 남한의 우익세력, 특히 철저한 ‘반소주의자’ 이승만에게 ‘분단의 원흉’ 낙인을 찍어 매장시키야 한다. 평양의 소련 군정이 날마다 서울 소련 영사관에 지령을 보내고, 제집 드나들 듯 비밀 왕래하는 박헌영 등 남한좌익들을 동원한 선전선동이다.
 
이승만의 발언이 합동통신에 요지만 보도되자 좌익은 기다렸다는 듯 들고일어났다.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 좌익정파들은 물론,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부녀총동맹(부총) 등은 일제히 이승만을 ”반동 거두,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 폭언을 퍼부는다. 극좌적 선전선동은 ‘망국배족(亡國背族)의 분열주의자’ ‘독재몽(獨裁夢)을 꿈꾸는 파쇼주의 흉한(凶漢)’ 등등 극악한 인민재판이었다. [조선인민보] [청년해방일보] [경성인민보] [독립신보] [현대일보] 등 좌익언론이 선전삐라다.
 
문제는 우파와 중도파를 자처하는 정당, 단체 및 언론들이다.
‘정읍선언’ 지지파는 한국민주당(김성수), 여자국민당(임영신), 조선민주당(조만식) 등 몇 개에 불과하고,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 등 자칭 민족계열은 ”단독정부 절대반대“를 주장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산파와 한길수등 반이승만세력), 천도교청우당 등도 반대 일색이다.
[동아일보]는 침묵을 지키는 반면, [조선일보]는 반대를 표명했고 [서울신문]도 비판적이다.
이들 반대세력의 명분은 ”38선을 고착시켜 민족분단-국토분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엔 ‘북조선인민위’도 안보이고 소련의 38선봉쇄도 모르는 듯 했다. 무서운 소련의 국제적 술수와 공산화의 현실적 위협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없이 그저 우물안 개구리의 ‘낭만적 민족주의’를 읊조리는 명분론자들이었다. 소련과 미국에 끌려가자는 사대주의적 패배주의,  조선500년을 망친 그 후손들 아니랴. 

▲ 1946년 3월26일 만71세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사진을 찍은 이승만과 46세 프란체스카.ⓒ연세대이승만연구원

‘민족통일총본부’ 설치...”내가 ‘죽자’ 하면 죽을 각오 있소?“
 
 1946년 6월29일, 이승만은 마침내 ‘민족통일총본부’(약칭 민통총본부) 결성을 발표하였다.
‘정읍 선언’에서 밝혔던 ‘통일을 위한 과도정부나 임시기구’를 만들기 위한 전국적 조직체 통일단체이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6월10~11일 정동교회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2차전국대표대회를 열어 1,165명의 지방대표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 절차를 거쳤다.
이날 한 시간도 넘는 이승만의 연설은 총재추대 문제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여러분의 원(願)이라면 내가 피하지도 않겠고, 통일의 긴요함을 느끼는 만치, 내가 마정방종(摩頂放踵:온몸을 바쳐 남을 위해 희생함)할지라도 모든 단체와 협의해서 통일을 이루도록 힘써 볼 터이지만, 나는 명의만 가지고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내가 ‘죽자’하면 다 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있소?“
그러자 장내는 1천여명이 ”예“로 답하는 열광적 박수가 폭발한다.
”그런 사람은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참석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보였다.
”한 손을 드는 것을 보니 절반쯤 각오가 드는 모양이야.“ 이 말에 웃음이 터지고 대표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옳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겠단 말이지“
장내는 박수와 환호소리에 터져나갈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통일을 속히 이루려면 통괄하는 총본부를 설치 전민족이 동일한 보조를 취해야만 할 터이지, 이를 위하야 사지(死地)라도 피하지 않고 복종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자 하오“
참석자들은 다시 일제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승만은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단호히 척결할 맹약을 요구하였다.
대회는 ‘3천만의 총의로 통일정권 수립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 등 3개항의 결의문과 미소공위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대한독립촉성국민대표대회 회의록],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4] 연세대한국학연구소,1998)
이어 일주일후 종로YMCA 강당에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나는 여자의 힘이 남자의 힘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며 이승만은 남녀단합과 여성 평등과 민주주의 강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3남순회 때 못 간 개성을 방문하여 반공연설회를 열었다.
이렇게 전국 순방을 끝낸 이승만은 전국민의 총의를 모아 남북통일정부 추진을 위하여 6월29일 민통총본부를 창설하고 ‘민족통일선언’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민통총본부는 이승만이 귀국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에 이어 만든 네 번째 민족통합 조직체이다. 이번엔 공산당 등 좌익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참고자료를 통해 이승만의 해방당시 국제정세관과 독립의지를 확인해보자. 해방당일 8월15일부터 27일까지 소련, 영국, 중국, 미국(전문발송순)의 수뇌들에게 보낸 이승만의 전문 내용을 살펴보면 그 면모가 한눈에 드러난다. 이러한 이승만의 신념과 결의는 해방정국 3년간 한 치의 변함이 없었다.
 
★참조=8.15 해방시 이승만이 4대국 수뇌에게 보낸 전문
Ⓐ이승만은 1945년 8월15일 해방 당일, 소련 스탈린에게 가장 먼저 전문을 보낸다. 독립운동기간 줄곧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한다“고 미국 정부에 경고했던 이승만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자 극도의 위기감에서 전략적 수사를 담은 편지를 썼다.
”전쟁후 한반도에 건설될 ‘통일 민주 독립 한국’(A United Democratic and Independent Korea)은 소련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보호장치(Safeguard)가 될 것이니, 한국의 독립과 지역 평화 수호를 지원해 달라“---이는 소련의 한반도 공산정권 수립을 막기 위해 서둘러 ‘경고와 요구’를 날려 보낸 것이다. 
그리고 8월21일 영국 수상 애틀리에게는 ”한국이 제2의 폴란드가 되어선 안되며 영국은 소련의 한반도 괴뢰정부 수립의 움직임을 막아서 한국이 평화의 안전판(peace stabilizer)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장제스에게는 미국 트루먼에게 빨리 전문을 보내서 소련의 음모에 동조하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간곡히 당부하며 “통일 민주 독립 한국은 중국의 충실한 동맹이 될 것”임을 약속, 반공-반소 연합전선 구축의 손을 내밀었다.
Ⓑ 8월27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은 “한반도에는 미군의 단독점령을 환영”한다고 요청한다. 왜냐하면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은 한민족을 갈라놓아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어떤 종류의 공동신탁통치나 위원회도 절대 반대한다. 한국의 민주독립은 오직 미국대통령의 손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였다.
동시에 맥아더에게도 공동점령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미국정책을 비판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피를 흘린 것은 민주주의 승리를 위한 것인데, 왜 소련을 끌어들여 한반도의 공산화를 가져오는가, 이는 내전의 씨앗이 될 것이니 미군이 단독 점령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7, 연세대, 2009)

▲ 이승만이 스탈린에 보낸 영문전문(오른쪽)과 독립운동기간 이승만이 교환한 2,954통의 편지 전보문 영인본을 묶은 책 8권중 7권째 표지.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분단’이 아닌 ‘자주통일 전략’의 선언이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에 맡겼던 한반도의 운명을 되찾아 우리 손으로 독립정부 만들자는 '이승만 독트린'이다.
”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하야 정부를 세운 후에 북쪽을 소청(掃淸=청소)하여야 하겠다“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이 결단한 말이다. 모스크바 3국 결정을 거부, 소련의 남북한 공산화 음모에 정면 도전, 미국의 소련 협력주의에 반기를 들어 제2의 독립운동 '건국전쟁'에 돌입하였다.
‘북쪽의 청소’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과 그 꼭두각시 일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나 과도조직체를 만들어 유엔과 연대하여 소련을 물리치자“고 외친 ‘정읍선언’의 이승만이 어찌 ‘분단의 원흉’일 것인가. '정읍선언'은 '정읍독트린'이오. 이승만의 건국독트린, '이승만 독트린'이라 규정해야 옳다.
이런 연설을 좌익들이 극악한 말로 폄하하면서 ‘정읍발언’이라 불렀는데 우파들도 그 ‘이름 짓기 선전’에 그냥 따라간 결과 오늘의 학자들까지도 ‘정읍발언’이라 부르는 것은 통사적 역사의식이 결핍된 우중적(愚衆的) 역사 문맹자들의 행태이다.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북한점령 소련과 싸워 실지(失地)를 되찾겠다는 ‘건국전쟁 선포’이자  자주독립 선언이며, ‘공산당을 청소하겠다‘는 반공전쟁 선언, 국토통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완성하겠다는 ‘자유통일 선언’이다. 스탈린이 미국보다 두려워한 세계유일의 반공자유전사 이승만, 그리하여 이승만은 건국까지 ‘혼자’ 싸워야 했다. 독립운동가들 누가 ‘준비된 글로벌 리더’를 흉내 낼 수나 있었던가

 

이승만 건국사(42) 미국 “이승만을 은퇴시켜라”...좌우합작 강행

▲ 워싱턴서 독립운동 당시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소련 간첩 앨저 히스(오른쪽).

★미국무부, 소련의 요구에 순응하는 ‘대한정책’ 지시
 
“이승만을 은퇴시켜라”
이것은 이승만의 정읍선언 3일후 6월6일, 미국무부가 일본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내린 훈령이다. 이날 미국무부가 확정한 [대한정책](Policy for Korea)은 해방후 1년간 세 번째로 만든 한국정책으로서 미국이 한국문제에 얼마나 소극적인지를 말해준다. 
미국 스스로도 “소련이 미국의 한국문제 무관심을 지적하며 하지 한사람에게 내맡긴 상태로 여긴다”라고 인정하며 미소공위 무기휴회 한 달 만에 ‘새로운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이었다.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국화’(Koreanization)였다. 미군정의 각 분야에 한국인들을 많이 참여시켜야 하고 소속정당 문제로 차별을 두어선 안 된다고 했다. 즉, 좌우를 막론하고 등용하라는 말이다. 
‘한국화’란 한마디로 풀면 “한국문제는 한국인의 손에 맡기라”는 정책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바로 1975년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의 방위는 베트남인들에게 맡긴다”던 ‘닉슨독트린’이 그것이다. 수렁에 빠진 월남전에서 ‘명예롭게 철수’하려는 미국의 궁여지책, 그 ‘월남화’ 30년 전에 19045년 분단된 한국을 떠나려는 미국의 ‘한국화’이다.
 
[대한정책]은 한국화를 위해 ‘좌우 차별없이 광범한 등용’을 지시하면서도 장황한 단서를 붙였다.
 “미군사령관은 일본의 항복이후에 귀국한 한국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정계은퇴를 어떤 방법으로든 반대하지 말아야한다.” 
곧 이승만, 김구 등 ‘반탁’ 세력을 자발적 형식으로 은퇴시켜 미소공위 협상에서 배제시키라는 미국 정부차원의 노골적인 명령이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서 태풍의 눈이 되어 온 몇몇 인사들이 일시적으로 정치무대에서 은퇴한다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합의뿐만 아니라 남한의 여러 파벌들 사이의 합의도 크게 충족될 수 있다. 표현의 자유 원칙을 주장하는 미국의 의견과, 공공연히 반소적인 특정 한국 지도자들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소련의 결정 사이에 충돌을 일으켜 협상이 결렬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해석의 근거가 이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일본의 항복이후 귀국한 원로 망명인 그룹이다. 그들이 한국의 여론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한국의 민주주의 건설이나 미국의 목표달성에 필수적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 반대로 그들이 정치무대에 존재함으로써 소련과 합의하는데 어려움을 증폭시킬 뿐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한국정치 참여는 미국에 도움보다는 대체로 방해가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면서 [대한정책]은 ”되도록 일본지배기간에 한국 안에 있던 지도자들이 참여하도록 고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국무부 문서, FRUS 1946, vol.Ⅷ], 손세일, 앞의 책)
 
요컨대, 소련과 조속한 합의를 원하는 미국 정부는 소련이 거부하는 기피인물들 ‘반탁-반소’ 세력의 은퇴공작을 펴라고 공식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우익 인사들이다. 
특히 해방 전부터 미국무부의 거물 소련간첩 알저 히스(Alger Hiss)와 충돌했던 이승만을 ’반소주의자‘로 낙인찍은 미국무부가 이승만의 귀국도 막았고, 소련도 그때부터 극히 싫어하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누구보다도 이승만을 반드시 은퇴시켜라“ 하지 사령관에게 떨어진 새로운 숙제다.

▲ 이승만과 하지.

★하지,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를 데려오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진작부터 하지사령관의 반공적 언동이 못마땅하여 소련과의 협력에 악영향을 준다며 경고성 편지를 보낸 것은 앞에서 보았다. 한국 현지사령관 하지는 ’현장을 모르는 본국지시‘를 비난하면서 한국 실정에 맞는 대응책을 여러 가지로 이승만의 자문에 따라 진행해 왔다. 민주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의 격렬한 ’반소-반공‘ 주장이 걱정스러운 하지는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미국 시라큐스 대학 교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1909~2000)를 서울로 불렀다. 
올리버는 이승만이 정읍서 연설하던 6월3일 김포에 도착했다. 이튿날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이 불러 찾아갔다.
 
”우리가 당신을 오라고 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오. 당신이 부디 이승만 박사를 자제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렇게 안하면 그의 생애는 끝날 것이고, 우리가 소련과 합의할 수 있는 기회도 이미 망쳐버린 상태란 말이오. 내가 보기에 이 박사는 한국 정치가들 중에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는 한, 그는 새로운 한국정부에서 어떤 자리도 맡지 못할 것이오.“
하지는 쌓여있던 사연이 터진 듯, 긴 시간 말을 멈추지 않았다고 올리버는 썼다.
”개인 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아주 쾌활하고 훌륭한 인물이지만 집회에 나가면 한 없이 난폭해져서 소련과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매도하여 우리를 몹시 난처하게 한다오. 그가 계속 이런다면 미군정으로서는 이박사의 유용성이 끝날 것이며, 그를 내가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파멸시켜야 할지도 모르겠소.“ 하지 장군은 착잡한 듯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긴 대화가 끝나고 나서 올리버는 그날 [나의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이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밖에는 대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 하는 것이라 한다. 지금 소련의 야심을 관대하게 넘기는 것은 과거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 그랬던 것과 꼭 같이 소련의 공격력을 길러주는 일이 된다고 역설한다. 그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있는 많은 미국인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지 장군과 러치 장군은 소련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이승만 박사를 ‘목안의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구나.」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2013.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석조전, 좌우합작위원회 사무실도 여기 있었다.(사진 1910년 한일병탄 무렵 모습)

◆ 36세 중위 버치.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책임 맡다
 
미군정에서 ‘좌우 합작’이란 막중한 정치적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은 새파란 36세 장교 버치(Leonard M. Bertsch,1910년생) 중위였다. 하버드 대학을 나와 변호사 경험밖에 없는 젊은 군인이 난마(亂馬)의 한국정치세력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얼마나 힘을 발휘할 것인가.
미고공위 소련 대표단이 서울 회담에 처음 참석했을 때 미국 대표단을 보자 ”장군은 두 명 뿐이고 모두 애송이들이니 우리가 이겼다“며 속으로 웃었다고 전해진다.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앞의 책]. 
그러나 버치는 금방 한국정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미국정부가 이승만 등 ‘반탁’ 지도자들을 제쳐놓고 ‘좌우합작’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버치의 집이 새로운 정치무대로 변했다.
 
◉좌우합작의 첫 예비접촉은 5월25일 신당동 버치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 한국민주당 총무 원세훈,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여운형, 조선인민당의 황진남(黃鎭南), 우익 2명, 좌익 2명이다. 이날부터 모든 모임은 버치가 주재하였다.
◉6월14일 2차 모임, 한민당 원세훈이 18일 ‘기본원칙’으로 ”부르주아민주공화국 건설에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발표하자 거센 반론이 일었다. 지난해 스탈린이 북한에 지령한 ‘부르주아민주국’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기본원칙이 돼야한다“고 주장했다.
◉6월20일 박헌영이 ‘합작3원칙’ 제시, 3상결정지지 원칙이면 참여 용의 발표.
◉6월22일 버치의 집에서 4자 회합.
◉6월26일 버치의 집에서 김규식-여운형 2자 회담. 
◉7월1일 하지 사령관,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노력지지 성명 발표.
◉7월2일 좌우합작 위원을 5대5로 증원, 버치가 결정.
◉7월10일 좌우합작위원회 성립.
◉7월12일, 버치가 민주주의민족전선 여운형, 김원봉, 장건상 등과 좌우합작기구 및 입법기구 설치 논의. 이날 ‘좌우합작위원회’ 첫 회의 개최.
◉7월16일 버치의 집에서 좌우합작위 2차 회의. 본격적인 토의 개시.
◉7월17일 버치의 집에서 회의, 여운형이 권총괴한들에게 집단폭행 당함.
◉7월21일 버치의 집에서 제1차 좌우합작 공식 예비회담. 공동의장에 김규식-여운형 합의. 회의장소로 덕수궁 미소공위 미국대표단 본부로 결정.
◉7월25일 덕수궁에서 제1차 정식 회담 개최, 비서국 설치 결정.
◉7월26일 좌익이 약속을 깨고 ‘합작 5원칙’ 발표. 우익서 절대 반대.
◉7월27일 원세훈의 좌익비난 담화 발표, 좌익이 회담 거부.
▶참조: 좌익의 ‘합작5원칙’ 내용
1)3상결정 전면지지, 미소공위 재개,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행동 통일.
2)북한식 토지개혁 무상몰수-무상분배, 주요산업 국유화, 노동계급 정치적 자유 보장.
3)친일파, 민족 반역자, 파쇼 반동 거두들 완전배제.
4)남조선에서도 미군정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할 것.
5)미군정고문기관 및 입법기관 설립에 반대할 것.
▶좌익의 ‘합작5원칙’은 남한도 북한처럼 소비에트화시켜 ‘공산통일’하자는 주장이다.

▲ 로버트 올리버(오른쪽)가 쓴 [이승만의 대미투쟁](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의 번역본)표지.ⓒ뉴데일리DB

★이승만 ”해봐야 안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좌우합작 찬성“
 
오랜만에 만나는 자문교수이자 동지인 로버트 올리버를 돈암장으로 초청한 이승만은 3남순회강연과 좌우합작까지 의견을 나누며 당분간 침묵을 지키며 시국을 관망하겠노라고 말했다.
로버트 올리버가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9월, 이승만이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을 출간을 직후였다. 일손이 필요했던 이승만이 한국서 태어난 선교사의 아들 전킨(Edward Junkin) 목사에게 부탁하여 올리버를 소개받았다. 당시 33세의 젊은 학자 올리버는 시라큐스 대학을 거쳐 버크넬 대학교수로서 잠시 휴가중이었다. 올리버는 워싱턴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 부근의 숄스 카페테리어(Sholl’s Cafeteria)에서 처음 만난 이승만의 첫 인상을 그의 책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67세의 적지않은 나이에서 풍기는 젊은이 같은 패기...언변이 좋았다. 적절한 어휘 선택과 나무랄데 없는 발음으로 쉬고 조리있게 말을 구사한다. 하지만 말보다는 그의 온몸으로 나타내는 표현이 더 웅변적이다. 얼굴을 동적이고 눈을 빛났으며 입과 눈가의 주름에서도 풍부한 유머 감각과 진지함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내가 받은 강항 인상은 그의 절제된 품위였다. 침착함과 자신감이 결연하고도 도를 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은 대인이다. 자제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남의 말도 경청할 줄 알았다. 그의 말 속에는 자신감과 더불어 탐구적인 자세가 풍긴다. 아무튼 그가 사라들과의 소통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은 분명했다. 한마디로  이승만이란 사람은 소통의 달인이었다.
번잡한 식당에서 처음으로 한국이 겪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감동한 나머지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지 않습니까?”
그는 미소로 대답하였다. “나는 작가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걸 써보면 어떻겠소?”
나는 그의 저의에 말려들었다. 어떻게 그 제의를 거절한단 말인가.“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그리하여 올리버는 그때부터 1960년 이승만의 하야까지 18년간 동지가 된다.
 
필자가 올리버의 글을 길게 인용하는 까닭은 이승만의 지성적 자유투사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반공 반소’의 극렬분자로 매도하는 미국이나 소련 패들의 끈질긴 모략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대응으로 일관한 자유지성 이승만,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이 어이없는 미국의 ‘좌우합작에는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한달 쯤 지켜보던 이승만이 6월26일 저녁 김규식을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만은 담배 대통을 선물로 내놓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이승만보다 6살 아래, 유난히 담배를 즐기는 애연가이다.
”이 일은 아우님이 잘해주기 바라오. 이것이 하지의 개인 의견도 아니고 미국무성의 정책이란 말이오. 우리가 이 정책을 실행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절합니까? 아우님이 한번 해 보시오. 독립을 위하여 미국사람들이 한번 해보라는 것을 어떻든 해봐야만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겠소.“ 
 
이승만은 다음날 미국으로 떠난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하지 장군이 시도하는 것은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소련이 동의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만일 김구와 내가 제외된다면 소련이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내가 지지하지 않으면 김규식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김규식이 연립정부 수립에 성공하고 그 정부가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은 뒤에는 전국 선거를 실시하기로 다짐하고 하지 장군에 동의하였다.“ ([대한민국사 자료집-28])
 
이승만은 7월1일 하지 사령관의 ’좌우합작지지‘ 성명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연다.
”내가 지금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김구씨와 내가 이미 협의하고 김규식 박사가 여운형씨와 교섭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언명하였나니, 여운형씨의 협조를 얻으면 우리 민족통일이 좌익까지 포함되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좌우합작이 깨질 줄 알면서도 ’지지한다‘고 발표한 뜻은 무슨 일이든지 한 발 앞서 보고 국면을 활용하는 이승만 특유의 전략적 사고에서 나온 것, 미군정과 좌우파에 던진 ’1석3조‘의 미래카드였다.
올리버가 말한 ’소통의 달인‘ 이승만은 무작정 반대하는 ’고집통‘이 아니다. 한치도 양보하지않는 것은 오로지 ’공산주의 반대‘ 뿐, 그래서 공산당과 미국이 뒤집어씌운 누명이다.
해봐야 안되는 좌우합작,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이 원한다니까 ’겪어봐야 알 것‘이란 자세로 일단 지켜보겠다는 이승만이다. ”좌우합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미국 스스로 체험하여 증명해보이라“는 것, 미국을 반공교육 시켜서 이용하려는 포석이기도 하다.

▲ 미국의 선택을 받아 남한의 '좌우합작' 협상을 진행한 김규식과 여운형(오른쪽).

★버치의 선택 ’김규식-여운형 합작‘은 가능할 것인가.
버치 중위는 한국지도자들 가운데 김규식을 좌우합작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로 택한다. [버치 문서]철 속에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버치가 그만큼 김규식을 중시하였던 것은 그가 임시정부 소속으로 보수 우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반탁-반소‘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 같은 좌파들과도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 2013).
또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에 찬성하면서도 과거 좌익정당(민족혁명당) 활동에도 불구하고 현재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는 가담하지 않은 점 때문에, 좌우경력을 겸비한 영어 잘하는 학자풍이기에, 30대 젊은 장교 버치는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찍었다고 한다.
 
당시 버치와 김규식의 ’야릇한 관계‘에 대하여 미국 신문 [시카고 선 Chicago Sun]의 마크 게인(Mark Gayn) 기자가 한국을 취재하여 쓴 기사가 흥미롭다.
「점심을 먹으면서 버치는 흥분하여 김규식에게 닥쳐오는 위대한 운명에 대하여 말했다. 김규식에게는 분명히 결여되어있는 박력과 정력을 비치가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버치는 마치 예언자 김규식의 제자 같았다. 그러면서도 버치 속의 책략가가 머리를 쳐들었고, 그럴 때면 김규식은 정치적 괴뢰가 되었다. 요컨대 두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규식은 빈틈없으며 야심적이다. 그리고 버치가 자신을 한국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버치도 신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과는 별도로, 그의 친구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정부의 고문이 되는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Mark Gayn [The Japan Diary] 1948)

▲ 해방후 남한의 좌우합작을 주도한 미군정 36세 장교 버치 중위(왼쪽)와 버치문서를 소개한 박태균교수의 책 표지.

◆스탈린에 ’국공합작‘을 선물한 루즈벨트...트루먼은 이승만을 선물로!!
 
1년 전 죽은 루즈벨트가 살아났는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는 소련의 유엔 창설참여와 한반도 신탁통치를 합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 ”중국 국민당 정부에 공산당을 참여시키도록 장세스를 설득해야겠다“는 선심까지 불쑥 내밀었다. 스탈린은 굳이 요구할 필요도 없이 ’자다가 떡 먹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중국 국공합작‘이다. 
루즈벨트의 유산을 갑자기 떠안은 트루먼은 1946년 1월에 마셜 장군을 중국 장제스에게 보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좌우합작‘을 시도하였다. 
같은 무렵 남한의 좌우합작도 같은 발상이었다. 미국이 주도한 신탁통치 문제도 미국의 ’국가 체면‘을 살리려면 무슨 방법을 쓰든지 소련을 달래 미소공위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2월엔 미국무부가 ”한국에서 극우-극좌가 아닌 진보적 인사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맥아더에게 보낸다. 5월24일엔 서울의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과 테이어(Langdon & Thayer)가 ”소련이 남한의 공산세력과 제휴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려면 ’온건한 애국자‘ 세력을 내세워 맞서야 한다“고 건의한다. 
’온건한 애국자‘들로 소련과 싸우고 남한 공산세력과 반공투쟁이 가능할 것인가?  
아무튼 미국무부는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남의 국토를 선물로 퍼주었듯이,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거부한 ”이승만 은퇴“를 선물로 주기로 하고, 좌우합작을 통하여 ’온건한 정치단체를 구성하라‘는 ’6.6 한국화 대한정책‘을 훈령했던 것을 위에서 보았다. 
이 문서는 다음해 11월 유엔의 ’남북한 총선’ 결의안이 나올 때까지 줄곧 ’좌우합작의 바이블‘이 되어 한국의 우익만 죽이고 공산당을 키워주는 ’헛 수고‘에 땀을 흘린다. 
오로지 소련의 합의를 끌어내 남북한 과도정부를 만들어놓고 ”명예롭게 한국을 철수“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시급한 지상과제로 변한 것이다. 더구나 소련이 수용하는 합작정부가 세워지면 ”한반도는 폴란드처럼 공산화 될 것“이라는 예측은 이승만만의 경고가 아니었다. 하지 사령관의 편지도 본국 정부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탈린의 친구‘들이 이끄는 미국무부의 눈에 한국인3천만의 운명이 보일 리가 없다.
 
★트루먼 정부가 일개 중위 버치에게 떠맡긴 남한의 좌우합작은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버치는 ’온건한 우익 대표‘로 지목한 김규식과 ’온건한 좌익 대표‘ 여운형을 한자리에 ’합석‘시키는 일조차 힘들었다. 겨우 겨우 7월10일 좌우합작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갈수록 앞길이 험난하고, 그럴수록 이승만과 김구 등을 비난하는 보고서만 늘어갔다. 
우익세력은 어처구니없는 미국의 행태에 냉소적이었고, 공산당 등 좌익은 뜻밖에 좌우합작 파괴공작에 나섰다. 박헌영은 ”미국의 반공 놀음에 끼어들어 놀아나지 말라“며 여운형을 궁지로 몰아세운다. 왜? ’좌우합작 반대‘는 모스크바 스탈린의 지령이었다.

 

이승만 건국사(43) 스탈린, 김일성-박헌영 불러 지령 ”북한 무장하라“

▲ 1946년경 30대중반 김일성과 40대중반 박헌영(오른쪽).

박헌영, 김일성 만나러 7차례 밀입북
 
1946년 6월 어느 날, 스탈린이 명령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을 크렘린으로 데려오라”
그동안 폴란드, 동독, 항가리 등의 대규모 숙청과 공산화에 몰두했던 스탈린은 KGB(국가공안위원회)의 극동 보고를 받자 한반도에 눈을 돌린 것이다. KGB의 보고는 바로 박헌영의 ‘투서’ 내용이었다. 
박헌영은 미소공위가 무기휴회 되자 스탈린에게 직접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러시아어로 써서 김일성 몰래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KGB극동지부에 보냈다. 그는 김일성이 국내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고 빨치산 출신들만 앞세우는 독재가 심하며 남한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남발하고 자신을 따르는 당간부들을 배제하는 등 분열을 획책한다며 집중 비난하였다. 평양의 소련군사령부에 대해서도 “조선공산당 책임자 박헌영을 따돌리고 김일성만 옹호하니 당의 권위가 추락하여 공산혁명 사업에 차질이 심하다”고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스탈린이 보기에 이는 박헌영이 자신의 지도력을 정면비판한 것이다. 슈티코프에게 맡긴 미소공위도 1차 실패한데다 남북한 공산당이 패싸움 하는 꼴이니, 이참에 획기적인 ‘한반도 혁명 계획’을 부과할 때가 왔음을 직감한 스탈린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박헌영, 네번째 밀입북서 모스크바로=박헌영은 해방후 김일성을 만나러 7차례나 밀입북하였다.  그는 6월 27일경 측근 세 사람을 데리고 극비리에 서울을 떠나 평양을 향했다. 작년 10월 개성 북쪽에서 김일성과 밀담한 이래 네 번째 밀입북이다. 개성 루트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소련군정은 김일성의 전용 승용차를 내주었고 대남연락 실무자들은 군용 찦을 타고 38선까지 달려와 박헌영을 맞았다. 이번엔 모스크바 스탈린을 만나러 가기위한 월북이므로 북한 지도자들도 모르게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박병엽, 앞의 책).
평양에 도착한 박헌영은 29일 북조선공산당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남한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집중논의된 것은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다. 

▲ 조선공산당의 대규모 지폐위조사건, 1945년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거액을 찍어낸 정판사 위폐사건을 보도한 신문지면(자료사진).

▶조선공산당 위폐사건◀ “김구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해방 두 달후 조선공산당이 저지른 거액의 지폐 위조 사건, 1945년 10월 20일부터 이듬해까지 6회에 걸쳐 ‘조선 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공산당원 7명이 약 1,200만원(당시화폐)의 위조지폐를 찍어 공산당에 제공하였다. 박헌영의 공산당은 일본총독부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옛 미도파백화점 옆, 현 롯데백화점 남측)을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위조지폐 인쇄 장소로 사용하였다. 활동자금 조달방책을 모색하던 공산당은 그 건물에 지폐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재무과장 박정상(朴鼎相),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기술공 정명환(鄭明煥), 창고계주임 박창근(朴昌根) 등이 비밀리에 모여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과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權五稷)의 지령을 받아 거액을 위조하게 하여 당자금으로 활용하였다고 수사당국이 발표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사건과 얽힌 ‘뚝섬 위폐사건’ 수사가 진행되던 중, 뜻 밖에 김구의 이름이 등장하고 큰 며느리 안미생(安美生) 등이 거론되면서 파문이 커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미군정 경찰의 수사결과에는 ‘정판사 위폐사건’만 발표되었기 때문에 또 한 차례 ‘모종의 은폐 의혹’이 일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상구 [김구 청문회] 2014). 
이때 조선공산당은 위폐사건 자체가 경찰의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 역선전을 폈다. 구속된 범인 14명도 공산당원이 아니라 우기며 재판을 폭력으로 방해하였지만 허사로 돌아간다.
앞서 말했듯이 평양에 간 박헌영도 북조선 간부회의에서 증거물 처리 소홀 등에 대하여 추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거액을 확보한 박헌영이 은밀한 축하자리를 마련하고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며 북조선공산당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듯 ‘객기를 부렸다’는 말도 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16일 공산당 지관지 [해방일보]를 폐간시켰고, 11월 28일 공판에서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 등 무기징역, 기타 징역 15~10년을 선고하였다. 이 경제교란 위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합법대우 하던 미군정이 강력 대응함으로써 좌익세력은 지하로 잠입하는 시대로 변한다.    

▲ 1946년7월초 모스크바 스탈린이 베푼 만찬에서 젓가락질하는 김일성.(자료사진)

◆스탈린, “평양에 군사고문관들을 파견하라...기술원조”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의 부름에 평양을 출발한 날은 6월30일쯤이다. 하바로프스크의 소련 극동군 연재구군관구 사령관 메레치코프 원수가 특별기로 평양에 착륙, 김일성과 박헌영, 소련군정사령관 로마넨코 등을 태웠다. 박헌영 등 남한공산당 점담 샤브신(Anatolli I. Shabsin, 서울주재 소련부영사)도 박헌영의 통역 겸 동행한다. 샤브신은 해방 전야부터 박헌영을 매일 만나 지휘하고 복종하는 ‘바늘과 실’ 관계이다. 
 
여기서 눈길은 끄는 점은 평양의 소련군정사령부 정치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가 김일성에게 스탈린과의 문답에 대비하여 빈틈없이 준비시켰는데, 특히 ‘북한의 무장’(武裝)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발언과 지시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는 사실이다. (레베데프 증언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앞의 책)
스탈린과 평양의 소련군정은 이때 이미 ‘북한의 남침계획’을 준비했다는 이야기이다. 신탁통치안을 지렛대 삼은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 시나리오는 이제 미국과 화전(和戰) 양면작전 단계로 돌입한 것이다. 
 
★“남북 정당 단일화” 스탈린 지시...레베데프 “김일성은 아첨꾼”
스탈린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남북한의 정세부터 설명을 요구했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직접 만나는 것은 지난해 8월 소련군빨치산 장교로 ‘면접’한 이래 두 번째, 보잘 것 없는 자신을 ‘김일성’으로 만들어 북조선 단독정권 두목으로 세워준 ‘은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지경이다. 더구나 슈티코프와 로마넨코 등 ‘직속상관’ 소련 군부 장성들이 합석한 자리, 무슨 명령이 떨어질지 긴장한 것은 김일성만도 아니다. 김일성에 도전한 박헌영도 스탈린의 입술을 주시한다. 김일성에게 질문을 던진 스탈린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북조선 풋내기 ‘꼭두각시’의 달라진 모습이 대견했을지도 모른다. 
달달 외우듯이 대답하는 김일성의 설명을 들은 스탈린은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북한 정당들을 합쳐 “단일당으로 통합, 일당독재체제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던 것 같다. 스탈린의 통역관 말로는 “김일성이 아첨하는 어조를 쉬지 않았고 스탈린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잔뜩 긴장해 있었고, 자기 주인의 명령을 언제라도 따르겠다는 충신의 자세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스탈린은 김일성이 마음에 들었다. 김일성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으로 차지한 ‘영웅’의 자리가 ‘큰 지도자’의 손짓 한번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였다...」 (레베데프 증언, 앞의 책)
스탈린은 박헌영에게 말했다. “힘든 여건에서 분투하는 당신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 남한의 좌익정당들도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때의 모임을 두고 그동안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테스트하는 자리’였다는 해석을 붙여 왔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보다는 미소공위 결렬 등 달라진 국면에서 이에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스탈린의 새로운 전략 ‘큰 목적’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구상’ 북한의 군사력을 동원한 한반도 장악이다.
 
스탈린은 김일성-박헌영과의 대화 끝에 측근들에게 지시한다.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치적 준비태세를 전면 강화할 것.
▶김일성의 단독정권을 위하여 평양으로 경험 많은 군사고문관들을 파견할 것.
▶북한의 군사적 원조와 기술 원조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조속히 마련할 것.
지시를 받은 소련군 총참모부는 물론, 소련 정치 지도부는 “극동의 위성국 북한이 강력하고 현대적인 군대를 가져야 할 때가 왔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레베데프, 앞의 책)
 
그날 저녁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박헌영을 격려한 스탈린은 슈티코프 등 간부들에게 박헌영에게 며칠 동안 모스크바 관광을 시키고 산업시설을 견학시키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투서’를 올린 박헌영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스탈린은 김일성과 달리 공산주의에 해박한 이론가를 북한의 프롤레타리아혁명 경제통으로 이용하라는 지시였다. 
 
스탈린의 한마디로 박헌영은 좌절한다. 행여나 기대했던 김일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어쩔 것인가. 김일성을 뛰어넘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소련은 박헌영에게 10여년 전 헤어진 외동딸 비비안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첫 부인 주세죽과 낳은 딸은 어느새 18세, 상하이에서 주세죽이 박헌영을 버리고 남편 친구 김단야(金丹冶)와 눈이 맞아 도망칠 때 모스크바로 데려왔다. 그후 김단야가 ’일본 간첩‘ 혐의로 사형되고 주세죽은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유배되었으므로 보육원에서 자란 비비안나는 소련 민속무용단에서 발레리나가 되어 있었다.

▲ 레닌이 1919년 창설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로고(왼쪽). 1946년 스탈린이 만든 코민포름의 로고(오른쪽).

◆스탈린,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공산당을 ‘노동당’ 개칭
 
레닌의 코민테른이 1928년 스탈린주의로 변질되면서 스탈린의 대숙청 등 공포정치에 대한 국제적 반감이 팽배, 1943년 자멸하다시피 해체된 국제공산당의 힘은 종전후 새롭게 소환된다. 동유럽 등 점령지역을 공산화 하는데 스탈린은 소련의 중앙집권적 파워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그동안 반발이 컸던 계급투쟁성을 희석하고 대중성을 위장 강화하기 위하여 ◉당 명칭에서 ‘공산’을 빼고 ‘노동’을 넣어라. ◉정강 등에서 ‘공산주의 대신 민주주의’를 표방하라는 새로운 원칙을 세워 밀어붙인다. 이에 따라 폴란드에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합쳐 통일노동자당을 창립하였고, 헝가리는 사회노동당으로 단일화, 동독에서도 사회통일당으로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스탈린이 김일성-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명령한 ‘합당’도 이처럼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대중을 포섭하려는 총체적 사기극으로서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을 만들게 하여 통합시킨 ‘조선로동당’ 탄생, 스탈린의 작품이다. 
이 ‘대중화 위장전략’ 원칙은 이듬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자 스탈린은 ‘코민포름’(Cominform: Information Bureau of the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으로 대응한다. ‘반공’으로 돌아선 미국의 자유블럭 형성에 소련이 9개 위성국을 묶어 10월5일 폴란드에서 국제공산조직을 부활시켰다. 마침내 자유세계 블록과 공산세계 블록이 정면충돌하는 냉전시대의 현실화이다. 그 3년 뒤 38선에서 6.25침략전쟁으로 ‘영토야욕’을 폭발시킨  최악의 군사독재자가 스탈린이다. 
 
북한의 무력 현대화를 서두른 것은 미국과의 협상 끝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미국의 정책 비밀을 빼내는 KGB 보고에 따라 미군철수가 머지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죽은 루즈벨트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없다”고 확답을 해준 바 있으며, 트루먼 정부의 ‘한국화 정책’도 ‘명예로운 미군 철수’를 위한 고육지책임을 재빨리 확인을 거듭하였다. 
미소공위 협상은 미국이 지치면 끝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지치게 하자. 주인 없는 남한은 무주공산(無主空山), 천적 일본이 손대기 전에 선점해야하는 방법은 무력 밖에 없지 않은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신전술’을 지령한 그날부터 소련의 군사전문가들이 평양을 향해 떠날 준비에 바빠졌다.

▲ 조선공산당 박헌영과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오른쪽).

박헌영 “소련은 늦어도 3년내 남한을 점령한다”
 
모스크바에서 평양을 거쳐 7월22일밤 서울에 온 박헌영은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을 소집, 중대발언을 터트린다. 이번 방북에서 얻은 극비정보라며 “소련은 늦어도 3년 이내에 남한을 점령할 계획임을 알았다”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그 점령은 협상을 통해 실현할 것이지만 “어떤 방법으로든지 꼭 이뤄질 것“이라 장담하였다.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 문서). 물론 이것은 스탈린과의 면담에서 파악한 정보였는데 모스크바 여행 자체가 극비였던지라 그것까지는 입을 다물었다. 
1946년에서 3년 이내라면 늦어도 1949년, 바로 미군이 남한을 완전 철수하던 해, 스탈린의 정보력이 놀랍기만 하다. 
 
★”밀린 활동자금 빨리 보내라“ 소련군정에 재촉한 박헌영
박헌영은 공산당을 약화시키려는 미군정의 좌우합작에 반대투쟁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3당합당‘을 기화로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내부에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 없는 인민당을 먹으려한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을 이용해 미군과 짜고 자신을 제거하려한다는 정보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경멸한다. 소신 없는 ’좌익 멋 부리기‘ 부르주아 기회주의자라 여긴다.
여운형은 박헌영을 몹시 싫어한다. 공산당 프락치로 자신의 인민당을 파괴하고 ’합작5원칙‘을 내세워 좌우합작를 폭력으로 뒤엎으려 기도하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은 여운형이 살아남을 유일한 출구였다. (박병엽, 앞의 책).
이리하여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지 한 달이 넘어도 박헌영의 합당 교섭은 갈수록 갈등만 깊어진다. 남한의 ‘좌익 3당합당’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합당이다. 박헌영은 8월20일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로마넨코에게 도움을 청한다. 세가지 요구 사항은 ◉남조선신민당에게 반공세력과 손을 끊고 합당하라고 압력을 가해 줄 것, ◉북조선공산당 명의로 남조선공산당을 반대하는 좌익들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줄 것, ◉끝으로 ‘남은 것들’을 속히 보내 줄 것 등이다. 여기서 ‘남은 것들’이란 소련군정이 박헌영에게 보내주는 활동자금을 가리킨다. 해방 후부터 소련군정이 남한 공산당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북로당’ ‘남로당’ 탄생...박헌영은 ‘신전술’ 감행
북한에선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열흘 만에 북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4개정당과 북조선직업동맹, 북조선농민동맹 등 15개 단체를 묶어 7월22일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는 속전속결을 자랑한다. 누구에게? 스탈린에게!
종주국 제왕 앞에서 장담한 대로, 절대강자 슈티코프와 레베데프의 지휘감독에 따라서 김일성은 특유의 아첨과 만용을 무기로 임무를 완수한다. 마침내 8월28일부터 사흘 동안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레베데프는 박헌영의 도움 요청에 답하듯 ‘창립대회 결정서’를 채택 공표한다. ”남조선공산당은 종파분자 분열분자들에 대하여 ‘결정적 대책’을 실시하여 합당하라“
박헌영은 1주일 뒤 9월4일 3당합동준비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3당합당-남조선로동당 창당’이란 ‘결정서’를 가결한다. 박헌영의 1인 쿠데타—‘남로당’의 등장이다. ([조선로동당대회 자료집-1])
 
동시에 박헌영은 ‘신전술’의 칼을 뽑았다. 이것은 그동안 벌여온 ‘합법투쟁’에 ‘비합법투쟁’을 적극 동원하는 공산혁명전술의 전환인데, ‘정당방위를 위한 정면대결’이란 구실을 내 세운 폭력투쟁이다. 스탈린 면담후 귀환길 평양에서 김일성 등 북조선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대강을 합의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미군정의 탄압이 가중된다며 신중론을 폈지만,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박헌영에게는 남한의 주도권까지 내놓을 수 없는 카드였다. 
”탄압이 가중될수록 정당방위를 위해 군중투쟁의 힘을 동원, 제압해야 한다. 좌우합작 음모도 포기시킬 수 있고 인민공화국도 인정받을 자신이 있다“며 박헌영은 ‘반합법-비합법 투쟁’을 철저히 배합시켜야 승리한다며 극좌 폭력투쟁에 들어갔다. 
‘북한의 총독’ 격인 공산화 총지휘자 슈티코프는 ‘양손의 무기’ 김일성과 박헌영을 가지고 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레베데프, 앞의 책)
 
★‘남로당 폭동시대’ 개막...미군정, 그제야 박헌영 체포령
미군정은 결국 공산당에 강경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자유 운운하며 방치해왔던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좌익신문을 폐간시키고, 9월7일에는 마침내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에 체포령을 내렸다. 박헌영은 도피하고 다음 날 이주하만 검거된다. ([조선일보] 1946년9월7일자, [동아일보] 1946년 9월10일자)
지하로 숨은 박헌영은 서울자동차파업 투쟁에 이어 전국적인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일으킨다. 극좌적 남한파괴 무법투쟁, 살인, 방화, 무차별 폭력사태가 ‘남로당의 테러시대’ 막을 열었다. 
꿈꾸는 미국 때문이다.
 

이승만 건국사(44) 스탈린의 폭동...슈티코프, 박헌영 앞세워 총지휘

이승만과 스탈린의 오래된 이념전쟁은 마침내 유혈 충돌로 폭발한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가 깨진 뒤 스탈린이 남한전역에 총파업과 폭력시위, 도시 폭동, 농민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7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으로부터 ‘신전술’(미군정타도 폭력투쟁)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주도권 도전에서 김일성에게 패배한 좌절감을 만회하기 위하여, 김일성이 못하는 남한민중폭동을 전개하여 스탈린에게 자기만의 능력을 과시한다. 스탈린의 용병술에 놀아나는 남북 ‘동족상잔’ 비극의 시작이다.
1946년 가을, 해방 1년 뒤 남한 전역을 뒤집어놓은 총파업과 폭력-학살사태, 그 현장 지휘자는 박헌영이고 그 총사령탑은 스탈린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반도 공산화 총책’ 슈티코프(Terenti Shtykov)였다. 그는 1945년 4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 공산화 각본을 짜고, 해방후 정치담당 부사령관으로서 북한군정의 사실상 총사령관역, 즉 사실상 ‘북한 총독’ 역할을 수행하였고, 1948~1951년 북한주재 초대 소련특명전권대사로 아예 평양에 부임, 6.25침략전쟁을 현장에서 총지휘한다.

▲ 해방직후 대학로 동숭동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모습, 1946년 미군정이 국립종합대학으로 만들어 서울대학교가 된다.

◆9월 총파업-10월 대구 폭동...데모대 ’시체 장사‘ 첫 등장
 
총파업에 앞서 박헌영의 신전술은 ’국대안(國大案) 반대 투쟁‘에서 시작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 온 박헌영은 인민위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등 산하단체에 ‘정당방위의 역공’전술을 선언,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투쟁 지침을 내려보냈다. 전평 의장 허성택은 대규모 파업투쟁을 추수가 끝나는 10월 하순으로 기획했다. 추수를 끝낸 농민들도 참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때, 미군정이 7월 13일 국립종합대학교(서울대) 설립을 발표했다. 일본이 만든 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과 수원 농림전문학교 등을 합해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을 만들겠다는 안이다. 박헌영은 무릎을 친다. 젊은이들을 총동원할 절호의 기회를 미군정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투쟁을 개시하자 전국 중학교(현 고등학교) 이상 절반 쯤이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에 휩쓸려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조선인 이양, 미국인 총장 한국인 대체“ 각종 구호가 등장했다. ‘국대안은 학원의 자유를 말살하는 미국의 식민정책이다’는 현수막을 학교마다 걸었다. (이영석 [건국전쟁] 조갑제닷컴, 2018).
열기는 무르익었다. 미군정이 박헌형 체포령을 내린 9월7일 이틀후 박헌영은 10월예정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긴다.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 북한 공산화 총책 슈티코프와 그의 일기(국사편찬위 발간). 슈티코프는 60권의 일기를 남겼다.

★슈티코프, 박헌영에게 파업지침-200만엔 전달
해방부터 6.25까지 남북한에서 일어난 공산당의 모든 사건들은 스탈린의 작전이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들은 1990년대 초 소련정부가 공개한 문서들이며, 그중에서도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비망록과 ‘총독’격인 슈티코프가 남긴 60권의 일기가 생생한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슈티코프)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와 결재 없이 북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 스탈린의 지시대로 북한정권 만들기에  핵심역할을 맡았던 정치총책 레베데프(예비역소장)의 증언이다. 
1991년부터 3년간 중앙일보사 취재팀이 소련을 방문하여 발굴한 자료는 일간지에 연재하였고 《발굴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를 출간했다. 10년후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방대한 일기 중에 한반도 관련 내용을 발췌 번역하여 《쉬띄꼬프 일기(1946∼1948)》를 냈다. 거기 9월총파업 관련대목만 뽑아보자.
 
◉1946년 9월9일: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9월19일: 박헌영의 향후 활동 방향에 대한 전문을 작성하여 로마넨코로 하여금 박헌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9월 28일: 남조선 재정지원을 위해 200만엔을 지급하다.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다.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의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스탈린 지시 사항).
 
요컨대, 슈티코프가 박헌영 및 김일성에게 내린 지침들은 모두 모스크바 당중앙 스탈린에게 건의하여 ‘승인’받은 것들이었다. 총파업을 비롯한 모든 투쟁은 그 시기와 방법, 목표, 자금지원까지 슈티코프가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결재’하고 명령을 전달 수행하고, 이를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빠짐없이 거쳤음이 소련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외).
 
★철도파업, 식량수송 차단...식량난 일으켜 전국 폭동 불질러
9월23일 서울 용산 철도국 노조원 3천여명이 전면 파업 농성을 개시한다. 부산, 전남 철도노조가 합세하며 파업은 금방 교통, 체신, 전기, 금속, 해운, 식료 등 전평산하 전국노조들로 확산되었다. ‘국대한 반대’ 학생들과 함께 전국은 ‘반미 시위’에 뒤덮이고 말았다. 미군정은 노조의 요구에 응하여 협상했지만 ‘처우개선’등 그 요구들은 더 큰 투쟁을 부르는 불씨일 뿐이다.
총파업과는 별개로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대로 레닌의 10월혁명을 기념하는 남조선 혁명투쟁의 봉화를 올렸다.
 
바로 10월 전국 폭동이다. 이를 위한 사전작업이 총파업이었던 셈이기도 하다. 사전작업이란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배급을 철도 파업으로 곡물수송을 봉쇄해버린 것. ‘식량난 궐기’를 계획한 대로 시작된 시위는 10월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돌을 던지는 수천 명 시위대의 폭력에 경찰이 발포, 1명이 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다음 날 시위대는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다. 시체를 본 시민들은 폭동으로 돌변하여, 관공서는 물론, 잘사는 집들과 우익인사들의 민가를 습격, 불 지르고 식량과 생필품을 약탈, 닥치는 대로 집단린치를 가하며 찌르고 죽였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 ”굶어죽는 한국인을 살려내라“ ”쌀을 달라. 밥을 달라“는 구호를 만들어 가장 원초적인 요구를 폭발시킨 전술의 성공이다. 전국의 부녀자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밥주걱을 들고 시위대에 동참한 주부들의 외침은 증오의 폭력을 부채질하여 약 2개월간 남한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미군정은 경북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미군은 출동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이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렀던 대구, 그 불길은 서울, 수도권, 영남, 호남, 충청까지 번져 박헌영이 조직한 지방 인민위원회와 전평의 총궐기 폭력투쟁과 농민반란은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에서 계속된다. 미군 보고서는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하였다. 박헌영은 ‘미군정 타도를 겨냥한 스탈린 신전술’로 남한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월북하였다. 

▲ 1946년 시위가 일어난 전국 지역 표시 지도.(정해구[10월 인민항쟁연구] 열음사,1998)

★슈티코프, 박헌영에 300만엔 추가 지원...농민투쟁 교시
다음은 [쉬띄코프의 일기 1946-1948] 중에서 ‘10월폭동’ 관련 부분이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에서는 노동자들과 경관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중략)...서울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 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미군정은 초급 당단체들에 발송된 박헌영의 미군정 반대투쟁 지령문을 몰수했다.
◉10월 2일: 3백만 엔의 지원과 집회 개최를 허용하는 지시를 내리다.
◉10월 7일: 10월 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10월 8일: 남조선에서 전평 의장 허성택이 도착했다.
◉10월 21일: 김일성과 대화하다...(중략)...부산에서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김일성)는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묻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빨치산 부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 할지 묻고 있다. 박헌영과 대화하다...(중략)...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해 교시를 내려 줄 것을 요청하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들의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
 
★박헌영, 관속에 누워 월북=해방후 6차례나 밀입북 하여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야했던 박헌영은 마침내 김일성 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박헌영이 장례행렬을 꾸미고 관속에 시체로 위장해 숨어서 월북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공산당 측에선 한사코 부인하였지만 슈티코프가 일기에 적어 놓았다. 
하지 미군사령관은 박헌영의 체포에 소극적이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직접 박헌영 체포에 나서자 하지는 ”그를 체포하면 국제적 트러블이 난다“며 말렸다고 한다.(장택상 ‘나의 교우 반세기’ [신동아]1970년7월호). 협상상대 소련이나 좌익 폭동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데, 제 발로 도망가도록 ‘월북 몰이’로 유도했다는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시체 투쟁’의 원조=1980년대 5공 시절, 주사파의 폭력시위 때 대학생이나 노동자의 분신자살 사건이 툭하면 일어나곤 했다. 보다 못한 시인 김지하는 ‘시체 장사 그만하라’는 글을 썼다가 곤욕을 치렀는데 그 원조격인 ‘시체장사’(혁명 불쏘시개) 수법이 해방 후 남로당 투쟁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있다.
 
실제로 10월폭동에 가담했던 대구사범 학생 김계철의 뒷날 증언이다. 
‘대구의 스탈린’ 이재복(李在福, 1906~49)과 박상희(박정희 전대통령의 형), 황태성 등이 그때 그 현장의 주역들이다. 박상희도 시위 중에 경찰 총에 피살되었는데 당시 월북했던 김계철은 40여년 뒤 중국으로 탈출, 1994년 귀국하여 10월폭동의 자기체험을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김계철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4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고 물었다. 그 학생이 김계철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담겨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했다...다음날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써먹은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김계철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다.”(조갑제 [박정희 전기] 1권 ‘군인의 길’ 2007).
 
★경찰보다 앞장 선 청년들=박헌영의 총파업-폭동을 진압한 것은 미군정의 경찰과 경찰의 요청을 받은 청년단체들이다. 미군은 단 한명도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 사령관은 본국의 훈령 때문에 소련과의 협상과 좌우합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전국을 휩쓰는 유혈폭동을 감당할 경찰력은 없었다. 경찰이 부탁하기도 전에 뛰어나가 맨주먹으로 공산당과 싸운 청년들은 누구였던가. 

이승만 건국사(45) 이승만, 스탈린과 건국전쟁 선언...전위대 ‘서북청년회’

▲ 스탈린과의 '독립전쟁'을 외치는 이승만. 오른쪽은 스탈린.

스탈린이 이럴 줄 알았다. 박헌영의 ’신전술‘ 폭력투쟁이 스탈린의 ’폭동전술‘임을 직감한 이승만은 칼을 뽑았다. 이승만을 배제시키고 좌우합작에 매몰된 미군정은 예상도 못한 사태 전개에 속수무책이다. 이때, 이승만의 “맨주먹 반공투쟁‘이 미군정의 구세주가 된다. 
바로 북한 탈출 ’반공 청년‘조직들의 대반격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귀국직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를 구성하며 ’독촉청년회‘를 조직, 자신을 찾아오는 탈북청년들을 포용하여 후원해왔던 터이다.
 
◆대한노총 총재 이승만, 40개 청년단체 합쳐 좌익 파업 해산
 
★9월7일 미군정의 박헌영 체포령이 내린 날, 서울 정동교회에서는 독촉국민회 제3회 전국 대표자대회가 열렸다. 면단위까지 망라한 대표 1,400여명이 조직 강화를 이승만 총재에게 일임한 모임에서 이승만은 이례적 성명을 발표한다.
”오늘까지 독립이 지연되는 것은 소수 극렬공산분자들이 정권을 차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으로 전선통일을 해보자고 애쓰던 것도 다 헛일이 되었다. 외국 지령을 받아 독립을 방해하는 분자들은 자멸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나갈 길은 오직 한 덩어리가 되는 것뿐이다.“(조선일보 1946.9.8.)

▲ 이승만이 설립한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 후신 대한노총 11년차 대의원대회 장면(1957). 오른쪽 인물은 초대위원장 전진한, 건국내각의 사회부장관이 된다.

★9월12일 종로YMCA 강당에서 ’대한독립청년단‘ 결단식이 열린다. 대한건국청년회, 역도청년회 등 21개 우익청년단체가 통합하는 행사에 참석하러 가던 이승만은 창덕궁 돈화문 앞을 지날 때 총격을 받는다. 총탄 4발은 승용차 뒷 유리창을 뚫지 못해 이승만 부부등 5명은 무사하였다. 축사를 하려고 연단에 오른 이승만의 말에 장내엔 폭소가 터졌다.
”지금 내가 여기 오는 길에 어디서 땅땅 소리가 나기에 아이들이 딱총놀이 하는 줄 알았더니 나한테 권총을 쏜 모양이더라. 네발씩이나 쏘고 나를 못 맞혔으니 그 사람은 아마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인줄 믿는다.“(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 금문사, 1973)
이승만은 대한독립청년단 총재로 추대되었다.
 
★9월23일 ’전평‘의 총파업에 대응한 대한독립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은 긴급회의를 열어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기로 결의한다. 대한노총은 1945년 12월21일 이승만이 결성한 ’독촉 청년총연맹‘의 후신조직이다. 이때 위원장엔 전진한(錢鎭漢,1901~1972)이 취임하였는데 이승만은 2년 뒤 건국정부 수립때 그를 초대 사회부장관으로 임명한다.
대한제국 말기 20대 청년시절 만민공동회 투쟁 때에도 천민취급 받던 백정, 신발장수, 쌀 장수 등을 연사로 내세우며 스스로 서민을 자처했던 이승만은 뒷날 자유당을 결성할 때에도 ”나는 쌍놈 당을 만들겠다“며 ’노동자-농민 정당‘을 당명으로 주장하기도 한다.(조용중 [대통령의 무혈혁명] 나남, 2004)
대한노총 총재는 당시 한국노동자들의 대표, 이승만은 40여개 청년단체가 결성한 파업대책위원회와 손잡고 ’전조선파업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미군정 간부들과 협의를 거쳐 공산당의 전국파업 진압작전을 짰다. (조선일보, 1946.10.2.)
마침내 9월30일 파업진압 청년대는 미군정 경찰(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함께 용산역의 좌익 철도파업 현장부터 급습, 해산시키는데 성공한다. 노동자들은 직장에 복귀하고 극렬분자 1,7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 "국제합의를 깬 배신자 소련은 물러가라"는 영문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서북청년회(1948).

★이승만은 파업사태가 일단 진정되자 정읍선언 직후 결성했던 ‘민족통일본부’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한다. 요지는 오로지 독립쟁취를 위해 싸우자는 ‘독립전쟁’ 선포에 다름 아니다.
”독립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우리는 모든 문제를 독립문제와 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일체의 행동이 우리의 독립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비판한 뒤에 행동을 결정하라. 한사람 한사람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부합할 때에만 ‘애국적인 행동’이 된다...(중략)...공산주의가 세계를 혁명시킬 줄 믿던 한인 공산파들은 마음을 고쳐서 민주주의 독립완성을 위해 사생결단하기로 하자. 만일 그렇지 못하면 공산파들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랄 수 없음을 명심하라. 다시는 외국의 지휘를 받지 말며 파업이나 분란을 일으키는 공작을 포기하라. 먼저 국권을 회복한 후 우리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자.“ (대동신문, 1946.10.2.~3)
‘반공 청년’들은 똘똘 뭉쳐 이승만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국의 파괴분자 공산당과 싸우는 ‘건국전쟁’ 전선으로 총출동한다. 처음 수천명이던 전사들은 금방 9만여명을 헤아린다.
15 초 후 SKIP

▲ 청년단체를 이끈 지도자 이승만(왼쪽)과 서북청년회 지도자 문봉제와 손진.

◆”청년들의 중심은 언제나 이승만이었다“
 
”너무 고달파서 너무 외로워서 돈암장에 수시로 찾아갔다.
어깨를 다독거려주는 이승만 박사의 손길이 너무나 그리웠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집결한 청년들의 눈물겨운 증언이다.
(이하 인용-참고문헌: 손진 [서북청년회-건국과 6.25] 건국이념보급회,2014. 서북청년회 [대한민국 건국 청년운동사], 이주영 [서북청년회] 백년동안, 2014. 이영석 [건국전쟁] 2018).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 무차별 약탈과 착취, 시베리아 추방과 강간, 집단학살까지 자행하는 공포의 세월, 일본군보다 더 무섭고 야만적인 만행에 주민들은 피난 보따리를 쌌다. 마을마다 청년들이 밤낮으로 경비를 섰고 소련군이 나타나면 비상을 걸어 도망치고 숨어야 했다. 여자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습격하는 바람에 남자 옷을 입고 얼굴에 숯 검뎅이 칠을 했다.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 ”소련군 물러가라“며 집단항거를 벌였다. 그 주민들의 자발적 ‘반공 의거’ 주요 사건만 다음과 같다. (정당 주도 반공투쟁은 제외).
▶해주 반공의거사건(1945.9.16.) 황해도 해주, 사상자 불명,.
▶함흥 반공학생의거(1945.11.7.) 함남 함흥, 학생 사상자 약 50명.
▶용암포 반공시민시위(1945.11.16.) 평북 용암포, 사상자 13명.
▶신의주 반공학생의거(1945.11.23.) 평안북도 신의주 6개 중학교 3,500명 궐기, 사망 40~50명, 부상 350명 이상, 검거 및 시베리아 유형 약 2,000명. 
▶평양 반공의거(1946.3.1.) 평양, 3.1절 행사 김일성 암살 시도 실패 후 무차별 탄압.
▶평남 주민반공의거(1946.3.13.) 평안남도 일대 곳곳에서 주민 봉기. ▶함흥 반공학생의거(1946.3.23.) ▶양양 반공학생의거(1947.12) 강원도 양양군 학생 봉기 ▶평양 반공청년의거(1950. 2) 등, 6.25침략전쟁 이전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사건들만 이러하다. 
특히 신의주 반공학생 궐기 집회 때는 소련군이 폭격기를 동원, 학생들을 무차별 난사하여 희생자가 많았고, 당시 남한으로 탈출한 청년 학생들과 주민 등 피난민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 서북청년회 지도자 손진 지음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 표지.(건국이념보급회 발행, 이승만 총서-6, 2014)

★”남한이 더 빨갛구나.“
    지역별 조직 만들어 ‘북한실정 설명회’ 순회강연
 
서울에 모인 탈북청년들은 망연자실했다. 남한은 미군이 있어 북한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공산당 조직들이 거미줄같이 짜여있고 미군정은 ‘공산당도 합법정당’이라며 방관상태 아닌가.
”큰일났다. 남한이 더 빨갛게 물었으니 남한이 먼저 공산화되는 게 아니냐“
자연스레 지역별로 탈북청년들이 모였다. 함경도 출신 ‘호림장(虎林莊)’을 비롯하여 묵정동 대원장(大元莊), 해방촌 천막합숙소 등 100명이상 수용하는 합숙소만 50여개나 되었다. 
”공산당을 모르는 남한동포들을 계몽시키자“ 청년들은 ‘북한실정 보고회’부터 열었다.
순회강연 하면서 북한의 소련군과 공산당의 만행을 포로하자 좌익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원한맺힌 반공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증오와 복수의 투지’로 뭉쳐 반격, 번번이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 1946년 미군정과 함께 구성한 민주의원 회의를 마치고 나온 이승만과 김구(창덕궁)

★”김구에 실망...혁명가는 될 망정 정치가는 못된다“ 평가
 
38선을 넘어온 청년들은 처음에 김구부터 찾아갔다. 황해도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주석이기에 북한이 고향인 청년들은 저절로 김구의 경교장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다리시오. 지금 주석께서는 휴식중이라서...“ 경호원들이 제지하고 시간을 끌었다.
한참 기다린 끝에 2층으로 안내받은 청년들은 저절로 무릎 꿇고 큰 절을 올렸다. 
금빛 칠을 한 높은 의자에서 절을 받은 김구는 청년들의 간곡한 애원을 듣더니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잘들 해보시오.“ 그리고는 묵묵부답이다. 
근엄한 분위기에 질린 청년들은 또 큰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막막한 서울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탄식하던 청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승만 박사에게 달려갔다. 돈암장에선 경호원이 있는지 없는지 무사 통과였다.
”잘 왔소이다.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소, 그러잖아도 그대들을 만나고 싶었다네“
벌떡 일어선 이승만은 차례차례 청년들의 두 손을 잡고 악수하며 격려부터 하였다.
청년들은 쌓인 한이 풀리듯 북한과 남한의 실정을 토로하며 ‘북한실정 보고회’를 설명하고 지원을 부탁하였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협력을 약속한 이승만은 ‘돈봉투’를 쥐어주었다.
”젊은이들이 잘 먹어야 할 텐데 어떡하나. 힘을 내서 싸우되 아까운 청년들이 피를 흘려서는 안되오“ 등을 두드리며 서양식 악수를 하고 안아주는 이승만의 친부모 같은 격려에 감격한 청년들은 눈물을 흘렸다.
”말없이 엄하던 김구 선생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 박사는 북한 실정을 꼬치꼬치 캐묻고 조만식 선생의 안부도 물으며 우리 이야기를 한시간 가까이 들어주셨다. 그러면서 외세를 몰아내지 않고는 독립할 수 없으니 우리 힘을 다 합해 Build-up하자고 하셨다. 나올 때는 경비에 보태라면서 1,000원을 주셨다.“ 탈북청년조직 지도자 문봉제(文奉濟,1915~2004)의 증언이다.(이영석, 앞의 책). 문봉제는 건국후 치안국장과 교통부장관을 지내게 된다.
경북출신 반공청년지도자 손진(孫塡,1920~2017)은 저서에서 말한다.
”김구 앞에서는 무조건 엎드려 큰절을 했지만 이승만 박사와는 친구처럼 선채로 악수만 하였다. 그 분은 동네 할아버지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우리들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망정 정치가는 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 해방후 좌익과 투쟁하다 순국한 청년들 17,274명의 위패를 봉안한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 동지들(1969). 비석에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고 새겼다.(손진 소장 사진)

◆전국 ‘좌익청소’작전...제주4.3폭동에서 6.25까지
 
1946년 ‘10월폭동’ 진압작전이 고비를 넘기자 목숨을 걸고 공산당과 싸웠던 청년들이 모여 11월30일 ‘서북청년회’(약칭 ‘서청’)을 정식 발족시킨다. ‘서북(西北)’은 평안도 관서(關西)와 함경도 관북(關北)을 합친 이름, 탈북 반공청년들의 ‘이승만 지지’ 통합조직이다. 
그들의 목표는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휘말리는 남한 동포 계몽 선도 ▶북한에 자유의 소리를 전하고 북한 지하 동지들과 연합하는 대북공작 ▶최후의 승리까지 ‘타공멸공(打共滅共’ 완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서청가(西靑歌)’로 시작하는 하루, 가사는 남북통일의 염원 그것이다.
 
우리는 서북청년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나가 38선 넘어 매국노 쳐버리자
진주(眞珠) 서북, 지옥 되어 도탄을 헤맨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등잔 밑에 우리 형제, 원수한테 밟힌 꽃송이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자가 서북에.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무시하고 폄하해온 서청은 당시 최고의 지식층이다. 문맹80% 한반도에서 중졸이상이 수만명 수준이던 시절, 서청 멤버들은 최소한 중학교(5년제, 고교과정포함) 졸업생이었고 일본, 미국등 유학생들이 상당수로 지휘부를 맡았다. 
 
서청은 경성방송국에 교섭하여 한국최초의 ‘대북 방송’도 시작하였다.
매주 금요일밤 9시 여자 아나운서가 ”지금부터 서북청년회의 대북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는 멘트와 함께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산주의 비판, 서청활동 소개, 이승만 등의 자유독립운동, 이 방송을 듣고 남행을 결심했다는 북한동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38선 요소요소에 북한출입 비밀통로도 만들었다.

▲ 대한노총의 후신 한국노총이 '멸공통일'이란 '승공' 행진을 벌이고있다. (1960년대 자료사진)

▶▶▶‘좌익이 탈취한 기업’ 되찾기...산업현장 정상화
 
서청은 기업들을 탈취한 좌익노조를 분쇄하여 ‘기업의 구세주’로 큰 지지를 받았다.
해방당시 우리기업은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하다 떠나간 ’적산(敵産)‘이었고 한국인이 세운 기업도 ’친일‘ 딱지가 붙었다. 미군정 통치가 지지부진하면서 이 기업들은 이른바 ’자치‘의 이름으로 좌익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장악해버렸다.
대표적 사례가 영등포 ’경방(경성방직)‘과 고무공장, 사장은 인촌 김성수의 아우 김연수, 당시 가장 규모가 큰 이곳은 전평위원장 허성택이 직접 장악하여 난공불락이었다. 서청에 ”경영권을 찾아 달라“는 SOS가 날아들었다. (손진, 앞의 책).
서청 조직이 공식출범하기 전, 레슬링의 스타 황병관(黃炳寬) 등을 비롯한 ’맨주먹 투사‘들을 모아 3대의 트럭을 몰고 쳐들어갔다. 전평 노조원들은 용광로에 달군 철봉을 휘두르며 역습, 난투극이 벌어진 공장은 쏟아진 기름과 불길과 피 범벅의 아수라장이다. 
공산당에 부모형제 고향을 잃은 반공투지를 이길 장사는 없었다. 전평은 항복했다. 전평의 본거지격인 경방이 정상화되자 ”우리도 살려주오“ 전국에서 구원의 비명이 몰려왔다. 
인천의 동양방직, 조선화학비료, 조선기계, 조선제마, 조선차량, 조선알미늄, 노다 정유 등등 전평 깃발을 뽑고 대한노총 깃발을 꼽았다. 동시에 서울의 경전(京電: 한전), 철도, 석탄공사, 대한중석 등 주요 공기업도 차례차례 탈환작전에 성공하였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이승만의 대한노총 산하 청년단체, 노동단체, 학생단체의 반공투쟁이 해방 경제의 생명줄 산업현장을 정상화 시켰던 ’독립전쟁‘ 그것이었다.
 
▶서청의 원망◀ ”해방직전 송진우는 왜 일본총독의 정권인수 제의를 차버렸던가. 좌익 여운형이 재빨리 가로채 ’건국준비위‘를 조직하고, 이를 박헌영이 ’인민공화국‘ 만들어 전국을 장악하게 하다니....만일 송진우가 먼저 정권을 인수하였다가 늦게 진주한 미군정에 넘겨주었더라면 남한에 공산당은 소수로 몰려 쫓겨났을 것을...천추의 한(恨)이로다.” (손진, 앞의 책).

▲ 6.25전쟁이 나자 입대한 서북청년들 만드로 구성된 '백골부대' 마크(왼쪽). 손진 선생이 가슴에 달았던 '대한유격대' 기장과 KLO 특별부대 배지.(손진 소장품 사진).

▶▶▶’북한실정 폭로‘ 강연에 공산당 ’죽창 부대‘의 습격
 
◉미군정의 ’국방 경비대‘가 좌익 소굴=1946년 1월 미군정이 설립한 ’국방 경비대‘는 공산당의 소굴로 변했다. 미군정이 중립을 지킨다며 입대 청년들의 사상검증을 전혀 안했기 때문이다. 군대까지 점령한 공산당은 인민위원회, 전평, 민애청(민족통일애국청년동맹) 등으로 남한사회를 장악하고, 서청의 ’북한실정폭로‘ 현장 등을 조직적으로 공격하였다. 
가장 사망자가 많았던 영동(永同(동)) 참극을 보자. 읍내에서 강연을 마친 서청대원 10명이 잠든 합숙소를 습격한 국방경비대 200명은 칼로 무자별 난자하고 도망쳤다. 현장에 도착한 남선(南鮮) 파견대장 임일(林一, 함북 청진출신)은 처참한 동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당시 국방경비대의 좌익들이 우익에 가한 폭력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당하면 보복한다” 서청의 처절한 멸공작전=전국의 공산당 조직들은 서청의 북한실정 폭로강연이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하자 ’죽창부대‘를 만들어 기습공격,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대원들이 무참히 피살되자 서청은 좌익응징에 나섰다. 우선 영동의 국방경비대 좌익부대를 새벽2시에 급습, 불지르고 복수를 했다. 이때부터 당하는 족족 보복하였고 지역이나 기관에 숨은 좌익분자 색출과 제거작전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임일의 눈부신 활약에 좌익에서 ’임일 장군‘이란 별명을 붙였다. 날마다 덤벼드는 공산당의 죽창에 찔리고 쓰러지던 그때, 주요사건 몇 개만 적어보자.
▶좌익교사들이 장악한 학교들에 포진, 극좌 교사들을 추방하고 학생들 선도.
▶대전 메이데이 행사장 3만 인파를 혼자서 맨주먹으로 해산시키다.
▶공주 강연회를 위해 금강교를 건너가던 대원들이 다리 중앙에 이르자, 다리 밑에 매복했던 공산당 100명 죽창부대가 양쪽에서 습격, 서청회원 1명 즉사 15명이 절명직전.
평북 출신 사망 청년의 아버지가 달려와 눈물을 훔치며 가슴을 쳤다. “일본군으로 나가 싸우다 죽기도 했는데, 건국을 위해 공산당을 무찌르다 갔으니 그리 원통할 것도 없구나. 남은 사람들은 꾸준히 싸워 고향을 찾아가야지...”
▶부산지검 남로당 검사 정수복을 출근길에 권총 암살. 부산 좌익신문 사장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박경영을 서청대원이 자택으로 찾아가 권총으로 암살.
▶부산극장서 좌익이 미소공동위 축하예술제 개최, 다이너마이트 던져 무대 폭파.
▶목포극장서 북한실정 폭로 강연중 죽창부대에 피습, 중상자 다수.
▶논산-강경 중학(고교) 학생들이 밤중에 합숙소 습격, 보복 못하고 제적시켜.
▶광주 전남방직공장서 공산당 색출하던 대원이 피살 암매장됨, 지도부 소탕전.
▶박헌영과 이강국의 고향 예산, 공산당이 강연회 대원들을 포위공격.
▶서산서 전세버스로 이동중 60여명 서청 대원들, 매복한 수백명이 기습하여 도끼로 난자질하고 불질러 전원 피살. 2명만 목숨을 건지다. 
▶김원봉의 고향 밀양에서 수백명 죽창부대 기습, 식사 중 7명은 죽음의 위기, 유도선수 공원태(孔元泰)가 출입문을 몸으로 막으며 외쳤다. “내가 막을 테니 어서 도망가라” 6명은 뒷문으로 도망쳤다. 혼자 힘으로 어찌 당하랴. 출입문이 부서지고 공원태는 죽창에 무수히 찔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산 번화가 대낮의 결투, 좌익 경남본부 제거작전. 민애청-민전-해운동맹 등 3개소를 동시에 습격하여 장악함. 간판들을 떼어내 불태우고 ’서북청년회‘ 간판으로 바꿔 달았다. 시민들이 수군거리자 서청대원 반성환이 나섰다.
“우리는 38선을 넘어온 청년들입니다. 지금 이시간에 북에선 우리 부모와 누이들이 소련군과 공산당의 약탈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에게 나라를 넘기려는 매국도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쓰러지면 시민 여러분들이 우리의 시체를 넘어 서북에서 신음하는 우리 형제자매를 구출할 줄로 믿습니다.”
모여든 시민들의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 대원들은 ’서청가‘를 목메어 불렀다.
▶군산, 이리, 전주, 남원 등 곳곳에서 죽창에 찔려 죽고 둔기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소식이 없어 찾아보면 골목길에 엎어져있고 웅덩이에 쳐박혀 있었다.
▶10월폭동의 대구=임일 대장이 “경북의 좌익은 10월폭동 후 기세가 꺾였을 텐데...” 말하자 서청의 선우경식이 맞받았다. “아니요. 여전히 모스크바입니다. 남로당 도책(道責) 이상훈이 서청을 대구에서 몰살시킨다고 떠들고 있지요.”
달성공원 합숙소 피습. 칠성동 다리 건너다 죽창 공격에 8명 사상. 대구역전 공회당 찬탁대회장의 전기줄을 끊고 급습하여 지도부 난타 해산. 좌익신문사 파괴, 전평등 주요당원 납치하여 포항으로 끌고가 배에 실어 북한으로 보냈다.

▲ 서북청년들이 선발대로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왼쪽)를 켜고 항로를 안내했던 미군 상륙작전 부대(오른쪽)..

★’고향 찾기 통일전쟁‘=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년까지 3년간 서청이 진행한 ’좌익 청소‘사건들은 한마디로 ’고향찾기 통일전쟁‘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우리는 혁명가도 군인도 아니다. 단지 북한의 내 고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남북 공산당을 타도하는 길 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죄라더냐?” 
죽창부대와 목숨을 건 살육전이 한바탕 끝나고 나면 서북청년회 청년들은 부모형제가 그리워 눈물을 펑펑 쏟아내곤 하였다.
 
해방정국 3년, 소련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는 이승만의 ’정읍선언‘ 정신으로 뭉친 반공투쟁의 전사들은 자나깨나 다시 찾아야 할 북한 땅을 통일시키려는 투지에 불탔고 그 중심은 누가 뭐래도 이승만이었다. 그들은 피의 대가도 바라지 않았고 자유통일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지푸라기처럼 내던졌다. 그 점에서 이승만과 청년들은 한 몸이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장택상 경찰청장의 요청과 국방경비대의 지원 간청에 발 벗고 나섰다.
◉이승만의 건국외교작품 유엔결의에 의한 총선을 저지하려는 소련과 남로당의 제주4.3폭동이 확산되자 “도와 달라’는 SOS에 달려가 생명을 바친다. 
◉6.25침략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함경북도 출신 정일권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앞장세웠고, 서북청년들은 너도나도 군에 뛰어들어 북한군-중공군을 물리치며 낙동강 최후의 마지노선 구축에 몸을 던져 방벽을 쌓았다. 
◉인천상륙작전에선 맥아더의 선봉장이 되어 영종도를 사전 토벌하고 팔미도 등대 불을 켜서 상륙함대를 안내한다. KLO 특공대의 숨은 전공을 아무도 몰라줘도 개의치 않았다.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미군보다 앞서 탈환하였다. 대동강을 멀리 바라보며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마침내 고향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우리는 기억하는가? 그들이 어디 갔는지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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