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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

醉月 2023. 6. 14. 14:41

이승만 건국사(1) 스탈린과 40년 전쟁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44세ⓒ뉴데일리DB

 
●연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의 건국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이룩해낸 성공이다.
그 선구적 리더가 이승만이었음은 역사적 기록이 증명한다. 김구는 어떠했던가?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의 주역 이승만을 제쳐놓고 ’건국을 반대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가장 숭앙하는 역사왜곡의 아이러니에 빠진지 오래다. 왜 그럴까?
 
1948년 3월,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 총선거(5.10)를 앞두고서 벌어진 건국전쟁의 현장을 보자. ’유엔감시 총선을 통한 건국‘이란 외교독립론에 마침내 성공한 이승만 박사는 김구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지 유엔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적극 동조하던 김구가 하루밤새 돌변하여 ”김일성과 통일 협상“ 주장을 들고 나와 평양행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갈 테면 모스크바로 가라. 소련의 꼭두각시 김일성을 백번 만나봤자 무스 소용이 있겠나.
남북통일을 논의하겠다면 분단의 원흉 스탈린을 직접 만나서 담판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유 총선거를 무산시키려는 남북회의에 참가하면 스탈린의 목적에 이용만 당할 뿐이다. 
한국 지도자 중에서 이것을 홀로 모른채 평양행을 고집한다니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오.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국가 대사에 방해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승만 담화)
 
’갈 테면 모스크바 스탈린을 찾아가 담판하라‘는 한마디가 두 사람의 격차를 드러낸다.
’소련은 최악의 독재‘라는 말을 [백범일지]에 써놓았던 김구가 자신의 정당 한독당까지 반대하는데도 굳이 소련의 하수인 김일성을 꼭 만나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지정학의 함정‘에 놓여있는 한반도, 
국경선에 몸 붙인 주변국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당대의 군사대국들, 
 
’독립유지‘에 필요한 것은 지정학적 상상력, 지정학적 접근, 지정학적 전략전술이다.
조선왕조의 ’사대주의‘ 선택이 그 시대적 요구였다면, 강대국들 약육강식 전쟁시대에 일본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은 누가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으랴.
 
다행히도 스무살 청년선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 ’자유의 신대륙‘ 미국을 발견한다.
미국선교사들과 서재필과 유치호로부터 세계역사, 세계지리, 수학, 물리학, 천문학등 선진과학 문명과 영어를 배워 익히면서 망국직전 조선을 혁파하여 자유민주국가로 거듭나야하는 할 것인데 미국을 새로운 독립국가 모델로 삼는다.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 한국최초의 민간 일간지를 두 개나 창간한 언론인, ’만민공동회‘의 인기스타 젊은 혁명가는 급기야 한성감옥에 갇힌다. 모진 고문을 받던 중에 ’뜨거운 성령‘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한 사형수 이승만, 그 순간 기독교의 순교자적 신앙에 녹아든 자유와 민주주의 ’건국의 꿈‘은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오늘 봐도 참신한 그림으로 꽃피운다.
 
 

▲ 1910년8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왼쪽),오른쪽 책 표지는 프린스턴대학이 단행본으로 출판한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집.ⓒ뉴데일리DB

”미국 같은 나라 세우기 위해“ 미국 동부 엘리트 대학교만 찾아 5년내 국제법과 국제정치 박사가 된 35세 이승만은 당시 지구적 정세 통찰력과 지정학적 역사관을 갖추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란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승만은 미국독립이래 100년간 국제관계와 국제법, 전시 자유통상 무역에 끼친 미국의 영향력에 관해 집중 연구하였다. 결론은 ”아메리카 만세“였다. 즉, 해외 영토 야욕이 없는 고립주의(Monroe Doctrine)의 역사적 검증과, 기독교 국가의 국제적 자유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정학의 굴레에 묶여 3강국의 먹이가 된 한반도에서 주변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독립을 지켜줄 힘을 바로 미국 역사연구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힘을 이용한 한국독립“이란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의 현대병법으로 무장, 당시 유일한 글로벌 리더십을 갖춘 독립운동가로 스스로의 전투태세를 완성한다. 고종 황제 부자가 대한제국을 ”일본 천황폐하께 기꺼이 양도“하던 1910년 8월이었다.
’준비된 지정학적 리더‘의 탄생, 이렇게 자신을 새로운 국가리더로 무장한 현대적 독립운동가가 그 시대 누가 있었던가. 만약 이승만도 중국으로 건너갔다면 대한민국과 한미동맹은 과연 탄생할 수 있었을까. 
 
 

▲ 소련 레닌과 스탈린.(자료사진)

▶왜 ’스탈린과 40년 전쟁‘인가?
5천년 침략의 제왕 중국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물리쳐주었다.
러일전쟁으로 또 일본이 쫓아낸 러시아는 세계1차대전중 레닌의 공산화 쿠데타로 국제공산주의 맹주가 되었다. 그 레닌과 부하 스탈린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공산화로 뒤엎은 역사를 아시는가.
 
임정 초대대통령 자유주의자 이승만은 반기를 들었다. 
1923년 3월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을 발표, 당시 세계 최초로 반공노선을 천명한다.
세계를 열광시킨 공산주의를 겪어보지도 않고 왜 ’인류의 적‘으로 낙인찍는단 말인가? 
이승만은 이미 그런 인물이 되어있었다. 조선왕조의 전체주의와 싸우고, 천황 신권국 일본의 전체주의와 싸우고, 이어 등장한 국제공산당 전체주의 정체—-기독교 자유주의와 서구 문명사를 꿰뚫은 이승만의 글로벌 망원경 렌즈에는, 구미 지식인들이 환호하는 유토피아가 필경 사라질 악마주의임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적은 인간의 적, 붉은 사탄의 공세는 이승만을 평생 반공주의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이승만이 시작한 ’스탈린과의 전쟁‘은 얄타회담 음모와 해방3년을 거쳐, 6.25침략전쟁중 스탈린이 죽은 뒤까지 이어진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은 스탈린이 북한에 만들어놓은 가짜 김일성 왕조의 핵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 연재는 ’이승만과 스탈린의 전쟁‘에 국한시킨다. 
4.19이후 현재 이 시간까지 한반도 ’스탈린 분단체제‘가 자행하는 반인류-반역사의 야만적 폭력행위들의 역사적 성찰을 모두 담을 그릇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40년 전쟁‘이란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 대통령으로서 레닌-스탈린 하수인 세력의 임정 공산화에 맞서 싸우던 1920년부터 자진사퇴한 1960년까지를 말한다. 
 
지금 다시 살아난 중국-러시아-김씨왕조의 삼각 핵동맹의 포로가 된 대한민국, 이제 ’스탈린과의 전쟁‘에서 ’시진핑과의 전쟁‘ ’푸틴과의 전쟁‘ ’김정은과의 전쟁‘이다. ’햇볕정책‘이래 친북-친중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여러분의 피로한 몸에 한 모금 생수가 되고자 함이 연재의 조그만 바램이다.

이승만 건국사(2) 대특종! 고종과 러시아 '굴복'

23세 언론인, 왕정개혁-강대국 추방에 나서다

고목가 Song of an Old Tree
일.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구비 쳐
    몇 백년 큰 남기 오늘 위태.
이.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삼.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굿박여 반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영화 봄 되어
    강근이 자란 후 풍우불외.
사.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이승만, 1898.3.5. ‘협성회 회보’>
 
이 시는 124년전 23세 선비 이승만이 순한글로 쓴 작품으로 몇군데 옛날 말을 현대어로 고친 것이다. 위 시에 나오는 ‘고목’(古木)은 500년 조선왕국, ‘땃작새’(딱다구리)는 부정부패한 수구파들, ‘비바람’은 러시아의 공세, ‘포수’는 자신을 비롯한 개혁파를 가리킨다. 
 
썩을 대로 썩어 넘어지는 나라를 일으키자는 개혁 의지를 표현한 애국시의 전형이다. 영어제목까지 붙였다.
 
현재 국문학계에서는 ‘고목가’를 신체시(新體時)의 원조로 평가해야 옳다는 소리가 뜨겁다.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1908)보다 10년 앞선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에 천자문을 뗀 이승만 어린이는 그때 벌써 이런 漢詩를 짓는다. 
風無手而撼樹 月無足而行空(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간다). 문재를 타고난 이승만, 감옥6년과 망명 중에 수백수의 한시를 남긴 시인,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문장가 이승만이 이때 ‘고목가’를 우리말로 쓴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읽히기 위함이다.
 
이 시를 발표한 1898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俄館播遷:1896)한 1년뒤 경운궁(지금 덕수궁자리)으로 환궁, 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직후였다. 왕후 민씨가 일본의 손에 살해되자 겁에 질린 고종은 미-영 등 여러 공사관에 피신처를 구하던 중, 한반도를 탐낸 러시아의 ‘호의’에 따라 러시아 품에 안긴다. 고종답게도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러시아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왕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쏟아졌다. 제나라 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도망’친 왕에게 ”마마, 환궁하소서“ 상소가 잇따랐음은 물론 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도 고종의 굴욕적인 ’사대주의‘ 행태는 한술 더 뜨는 판이었다. 
그때 왕정개혁의 열망에 피 끓는 청년 이승만이 국민 계몽 시 ’고목가‘를 쓴다. 망국의 위기를 한탄하면서 러시아에 밀착된 부패황제와 모리배 간신들을 비판하면서, 중국 대신 나라를 휘두르는 러시아 ’비바람‘을 규탄, 친러정권의 교체와  ’러시아 축출‘의 뜻을 드러낸 혁명적 시다.

▲ 이승만이 잇따라 창간한 3개 신문. 1898년1월1일 주간 협성회회보. 4월9일 매일신문, 8월10일 제국신문. 매일신문은 한국민간인 최초의 일간지. 제국신문도 일간지, 모두 한글전용. ⓒ뉴데일리DB

#A ▶언론인 이승만◀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언론인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13세부터 19세까지 과거에 응시한 이승만은 친일정부의 갑오개혁에 따른 과거시험 폐지로 취업길이 막힌다. 20세때 ”영어라도 배워 밥벌이 하자“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미국선교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들어간다. 거기 눈앞에 펼쳐진 ’신천지‘에 경악한 이승만. ”영어보다 소중한 자유“를 알게 되자 ’자유의 신대륙 미국‘의 정치제도와 독립전쟁사, 신문 등 사회문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연구한다. 동시에 세계 역사 지리 과학등에 눈을 뜨고 딴사람이 되었다.
★서재필의 권유로 한국 최초의 학생회 ’협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된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참여하면서 시국토론회=왕정개혁 토론회를 51회나 진행한다. 그 중에 백성계몽에 시급한 신문 발행을 주장.’신문국(新聞局)‘ 설치를 촉구한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1898년 1월1일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곧 일간지로 바꿔 1898년4월9일 [매일신문]을 창간한다. 한국인 최초의 민간일간지다. 4개월후 8월10일 또 하나의  일간지 [제국신문]을 창간한다. 이승만의 모든 신문들과 모든 글은 한글전용이다. 반세기 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 되어 문맹퇴치를 성공시킨 그 한글전용이다.
★[협성회회보]에서 러시아의 ’부산 영도‘ 조차(租借)문제를 규탄한 논설 투쟁을 벌였고, 잇따라 [매일신문]에서 고종이 러시아-프랑스 등과 국토할양 이권을 거래한 밀약을 폭로하여 국제문제를 일으킨다. 결과는 고종과 러시아의 굴복이었다.
★독립협회의 거리정치집회 ’만민공동회‘의 인기 스타 이승만은 자신의 신문들과 정치시위를 입체적으로 활용, 계몽과 왕정혁파 투쟁을 병행한다. 특히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와 끊임없이 벌인 지면 논쟁은 국내 일본 경찰과 상인들의 횡포를 고발한 독립캠페인의 백미중 하나였다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갇힌 뒤, 몰래 글을 써서 감옥 밖으로 전달. [제국신문] [신학월보]등에 수백편의 논설을 게재한다. 내용은 모두 왕정과 국정개혁, 입헌 군주제, 기독교 교육 등인데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내자‘는 칼럼도 있다. 이승만은 투옥직후 참혹한 고문을 받던 중에 ’성령‘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回心)한 바, “기독교정신 교육만이 자유 독립의 기본”이라는 국가 교육철학은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 불굴의 신념이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옥중저서 [독립정신]을 저술한다. “한문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썩었고 나쁜 물이 들어 희망이 없으므로 백성들의 힘만이 독립의 원천이기에 순한글로 썼다”고 이승만은 머리말에 강조한다. 뒷날 미국 유학 후 1910년에야 LA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도‘라 불릴 만큼 독립운동가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일본 당국은 판매금지-압수를 계속하였다.
★1912년 일본총독부가 조작한 ’105인사건‘ 주모자로 몰려 망명, 하와이에서 ’태평양 잡지‘와 ’태평양 주보‘를 잇따라 창간, 독립운동의 무기로 삼았다. 여기에 유명한 ’공산당의 당부당‘등 반공 논설을 여러차례 반복, 교민들의 교재가 된다. 일본은 ’반일분자 두목‘ 이승만의 목에 30만달러 현상금을 걸었다.

▲ 러시아 공사관 옛모습(프랑스 프랑뎅 공사 후손 칼메트 소장사진. '다시 만나는 이웃'(2010)에서 전재). 오른쪽은 6.25때 파괴되어 현재 종탑만 만들어놓은 모습.

대특종 ’고종과 러시아의 비밀거래‘ 폭로
 
[매일신문] 창간 한달 뒤, 이승만은 충격적인 ’대특종‘을 터트려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미 ’고목가‘로 경종을 울렸던 이승만이 5월16일자 1면 전체와 2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기사는 바로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 즉 고종황제가 러시아 및 프랑스와 비밀거래를 흥정한 내용이었다. [매일신문] 사장-주필-기자를 겸한 이승만이 직접 취재하여 쓴 기사로 고종황제와 강대국 간에 은밀히 오고가던 비리를 보란 듯이 만천하에 공개하였던 것이다. 
내용인 즉,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땅과 섬들까지 사겠다고 요구하였고,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지역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구한국 외교문서. 손세일 지음 ’이승만과 김구‘ 제1권 P401).
두달 전 3월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독립협회 청년 지도자 이승만은 규탄논설을 이렇게 썼다. “땅을 아주 주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인 즉 관계치 않다고 하니, 이는 전국을 다 빌려주어도 좋다는 말이라.....동맹제국을 다 같이 공평히 대하자면 삼천리 강산이 몇 조각이나 남겠으며...”
이번 대특종 폭로에도 이승만은 기사 끝에 국민정신을 일깨우려는 선동적 글을 덧붙인다.
“이런 말을 들음에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 지라. 참 대한신민의 피가 끓는 소문이라. 어찌 가만히 앉아 있으리오. 동포들은 일심으로 분발하여 속히 조치를 취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서울 외교가와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러시아 공사 마튜닌(N. Matunine)은 즉시 공문을 외부(外部=외교부)로 보내 ’기밀 누설’에 항의하며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프랑스공사 플랑시(V, Colin de Plancy)도 관련자 처벌을 촉구했다. 
외교부는 이승만을 불러 책망 반 애원 반이다. 국가기밀을 퍼뜨려 황궁과 외국의 힐문에 끼어 못 견디겠으니 어쩌면 좋으냐는 호소였다. 이승만의 대답은 명쾌하다.
“외부대신이 외국 사람이 아니고 외부가 외국 관청이 아니거늘, 나라 일을 외국 영사와 몰래 의논하면서 우리 백성을 모르게 할 이유가 어디 있소? 이만한 일도 어렵다고 하면 외국 군사가 침노할 때는 어쩔 테요? 신문기사 때문에 나를 불러 이러시니 우리 신문이 우리나라 말고 외국을 도와주는 말을 해야 옳단 말이오?” ([매일신문] 보도)
“그러면 뭐라고 답변하면 좋으냐?”고 묻는 관리들에게 이승만은 답변까지 일러준다.
“신문기자나 대신들은 모두 대한 신민들인지라 내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이니 외국이 하지말라고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답하라.” 
 
이러고서 외부를 나온 이승만은 이때의 경과와 대화내용까지 [매일신문]에 빠짐없이 게재하여 뿌린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국제필화사건
 
이 사건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일어난 국제 필화사건이 된다.
국가 기밀과 국민의 알권리 충돌 문제는 지금도 언론자유의 핵심쟁점, 구시대 전제주의와 맛서 싸우는 개혁청년 이승만의 현대적 언론감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러시아 공사는 잇따라 새로운 항의를 제기한다. 이승만이 원산항에서 일어난 러시아 해군장교의 행패와 주민들의 규탄내용을 세 차례나  [매일신문]에 보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신문제작은 국민 계몽은 물론 강대국과 싸우는 독립운동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신문과 언론자유야말로 국민교육과 국가발전에 최선의 무기”임을 주창하며 대형신문사 설립 계획을 논설로 쓰기도 할 만큼 ‘미국 같은 자유세상’을 앞당기려 분투하였다. 
 
“외국 공영사도 이 종이 조각을 군사 몇 만명보다 두려워하니...” ([제국신문] 논평) 공방을 거듭하던 국제필화사건은 이승만과 독립협회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고종황제와 외교부, 러시아 및 프랑스도 두 손을 들고 계획을 철회하는 수 밖에 없었다.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거리 집회와, 청년 언론인 이승만의 신문동원 합작 투쟁은 대한제국에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에 결정적인 제동을 걸었다. 
이해 3월서 5월까지 거둔 성공은 다음과 같다. 고종이 들여온 러시아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게 만들었고, 부산 절영도의 조차요구도 철회시켰으며, 개업 한 달도 안된 한러은행까지 문을 닫아야 했다. 
 
★23세 언론인 이승만은 알고 있었을까.
청년시절 러시아와의 이런 싸움이 90평생 ‘소련 스탈린과의 전쟁’이 될 줄을.
그것은 운명일까, 행운일까. 이승만의 운명이요, 대한민국의 행운이다!

 

이승만 건국사 (3) 1898년: ‘민주화 혁명’의 불꽃

왕정개혁과 자유민권 투쟁으로 지샌 1년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기회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회를 기회로 알고 실천의지를 펼치는 힘이 나타날 때, 그 기회는 새 역사 창조의 전환점으로 재탄생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마찬가지다. 지금으로부터 124년전 1898년이 그런 해였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기회, 500년 왕권독재의 껍질을 벗고 자유민권과 민주공화제의 새 나라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1898년이었다.
유럽에선 프랑스 혁명 100년을 맞은 때, 문호를 개방한 고종의 대한제국에도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시대적 요구에 열정을 불태우는 개화파의 노력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갔다.
그 즈음 나라 분위기를 돌아보자.

▲ 1898년 3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단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자료사진)

★계급사회 개혁 3년=청일전쟁 개시와 함께 조선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주어진 ‘갑오개혁’이 을미년까지 3년간 진행된다. 인재등용 신분타파, 연좌제 폐지. 사노비(私奴婢) 혁파, 인신매매 금지, 신교육 실시, 태양력 사용, 단발령(斷髮令), 과거시험 폐지 등, 전통적 전제주의 계급사회를 해체하는 혁명적 조치들이다. 하지만 타국에 의한 개혁은 한계가 뚜렷한 것, 마지 못해 응한 명목상의 개혁이라 해도 백성들은 천민까지 개화분위기와 자유화 바람에 한껏 고조되었다.
 
★불타는 독립의지=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국을 물리치자 500년 묵은 중국 사대주의에서 풀려난 고종 정부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고, 개화파가 득세하는 중에 미국시민권자 서재필을 고문으로 초청 고용한다. ‘갑신정변’쿠데타에 실패, 미국 가서 의사가 된 서재필은 ‘못 다 이룬 꿈’을 실현하고자 달려왔다.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을 설치하며 청년층과 일반 시민교육에 나선다. 
 
★배재학당서 미국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뭉친다. 그중에 특히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개최하는 민중집회 ‘만민공동회’의 선봉장이 되고, [협성회회보]에 이어 일간신문 2개를 창간하여 거리투쟁과 언론투쟁을 병행, 큰 성과를 거둔다. 앞장에서 설명했듯이 고종황제와 러시아-프랑스의 비밀거래를 폭로, 무산시키자 자신감을 얻은 이승만의 요구는 갈수록 커지고 치열해진다. 그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이끄는 자유 민권운동의 기수로 앞장선다.

▲ 서재필과 미국인 부인. 미국시민권자 서재필은 서울에 와서도 본명대신 미국이름 Philip Jaison을 사용했다고 한다.(사진=기파랑 발행 [선구자 서재필]에서 전재)

서재필의 귀국 만류 시위...“가실 테면 가시오"
 
독립협회와 이승만의 언론이 강대국들의 이권침탈을 고발하고 고종 정부의 부패 무능을 강력히 규탄하자 각국은 서재필의 추방부터 요구하고 나선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서재필의 외국인 고문 10년 계약을 해지하고 출국을 종용한다. 이에 독립협회는 강력히 항의하였고 이승만은 독립협회 허락도 없이 서재필에 체류를 간청하는 만민공동회를 강행한다.
”각하는 부모 나라를 버리고 어디 가서 천고에 썩지 않을 이름을 세우고자 하느뇨. 다만 자기 일신만 위하며 뭇 사람의 요청을 돌아보지 않는다 할지면, 우리의 공동회가 각하의 수레를 멈추고자 하니 각하는 세 번 생각하시오“([독립신문] 1898.5.5.)
이럼에도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 뜻 밖에도 [독립신문]을 폐간시키려는 일본 공사와 4,000원에 매도하기로 합의한다. 10년 계약중 7년 넘게 남은 기간의 급료를 모두 챙긴 서재필은 1898년 5월14일 용산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한다. 강변엔 ”가지 말라’는 함성과 눈물의 이별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승만은 “가실 테면 가시오. 우리는 더 크게 싸우리다” 결의를 다지며, 서재필이 없는 만민공동회를 연일 개최하며 왕정개혁과 계몽운동를 더욱 강화해 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신문]은 결국 윤치호가 맡아 7월1일자부터 일간신문으로 바꿔 더욱 확장시켰다.
서재필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엇갈린다. 12년 만에 귀국하고도 본처 가족을 외면했다든지, 미국부인과 거리에서 걸인을 발로 차는 등 인종차별이 심했다는 둥, 일부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류하는데도 뿌리치고 가버린 것은 돈과 일신상 안위만 챙긴 것”이란 비난도 어김없이 나돌았다. 
 

▲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현 덕수궁 자리)의 남쪽 정문 인화문(仁化門). 1902년경 철거됨.(국가기록원).

◆ ‘전면개각 요구’ 철야농성--“평화적 혁명” 성공
 
불길에 기름 붓는 일이 터졌다. 고종이 비밀리에 외국인 용병부대 30명을 데려온 일이다.
황실 친위대 병사들까지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불안해진 황제는 외국인 고문에게 주선을 부탁하여 유럽인과 미국인 등 용병들과 계약을 맺었고, 그 백인부대가 9월15일 서울에 도착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즉각 ‘항의’시위를 시작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신문 [제국신문] 주필로서 격렬한 비판 논설을 실어 정면 대결한다.
“슬프도다.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인으로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 치고 어느 나라가 그럴 수 있으리오. 이는 신하도 없고 군사도 없고 백성도 없음이니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괴변이라. 마땅히 신민이 일심으로 주선하여 결단코 시행 못하도록 함이 도리에 합당한지라...” ([제국신문] 1898.9.9.)
외교부 앞에서 “세계로부터 야만 대접을 받는 나라가 되었도다” 선동 연설과 시위를 연일 벌이는 사태에 직면하자 마지못해 고종은 용병을 포기하고 만다. 서울 도착 닷새 만에 해약당한 용병들은 1년치 급료를 받아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때 엎친 데 덮치는 ‘날벼락’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났다.
러시아어 통역 김홍륙의 황제 부자 독살 미수사건이다.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서 고종의 통역을 맡았던 그는 경운궁으로 환궁 후에도 안하무인 실력자로 행세하여 황제의 인사권 등을 좌지우지하던 중에 독립협회의 고발과 규탄으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게 되자 앙심을 품은 것이었다. 그는 부하를 시켜 고종이 마시는 차와 황태자의 커피에 마약을 탔다. 황제는 토하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고종 실록] 광무2년 1월).
이 음독 후유증 탓에 황태자=뒷날 순종은 영구히 생식능력을 잃었다고 전해져온다.
 
발칵 뒤집힌 정부는 갑오개혁 때 없어진 ‘나륙법’을 들고 나왔다. 범인의 사지를 잘라 전국에 전시하는 최악의 형법, 독립협회는 “죄는 처벌하되 야만적 악법의 부활은 절대 반대, 국제사회에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항의, 재판소와 황궁 정문 앞에서 날마다 철야투쟁을 벌인다. 이참에 “수구파 대신 7명을 파면하라”는 전면개각 요구를 밀어붙였다, 고종의 직접답변을 촉구했지만 황제가 차일피일 거부하자 ‘민중대회’로 집회를 확장하며 상소를 거듭한다. 현재 덕수궁 남쪽 인화문에 시위 인파가 인산인해. 1902년경 궁궐 학장시 철거된 인화문(仁化門, 경운궁 정문)앞 농성장엔 여러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 철시한 상인들까지 합류하여 밤낮으로 성토대회를 열었다.
해산시키려는 경찰이 “장사나 하라”고 강압하자 상인들은 “우리도 자유권리가 있으니 이 따위 수작 말라”며 더 많은 상인들을 불러왔다. ([독립신문] 1898.10.13.)
“우리도 인간이다” 자유 민권에 비로소 눈을 뜬 노예백성의 결의를 누가 막으랴. 
 
마침내 고종이 두 손을 들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던 황제가 마침내 1898년 10월12일 수구파 7대신을 전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요구하는 박정양, 민영환 등을 입각시켰다. 황궁을 에워싸고 밤낮 12일간 벌인 ‘횃불 데모’가 얻어낸 값진 승리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울었다. 밤낮 연설로 목이 쉰 이승만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왕국의 수도에서 놀랍게도 황제 고종을 무릎 꿇린 ‘평화적 혁명’이 성공했다” 고종을 잘 아는 미국공사 알렌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의 일부이다.
 
1898년은 정초부터 년말까지 일년내내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로 낮밤을 지새우는 해가 되었다. 갖가지 개혁운동의 하일라이트는 10월부터 시작된 ‘입헌군주제’ 관철 혁명투쟁이다.

이승만 건국사(4) 입헌군주제- 혁명전야의 대격돌

"이것이 왕이라니..." 윤치호의 탄식
 
”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애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노예 유기환과 친러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5, 1898.11.5.)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국왕’- 그는 고종이다.
‘혁명의 해’ 1898년 11월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이런 일기를 쓰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듯 고종 황제를 ‘배신적인 비겁자’보다 더 천박한 사람이라 막말을 퍼붓는가.
일기대로라면 고종은 개화파를 기만 탄압하면서 친일파-친러파에 둘러싸여 일본-러시아의 이권 사업에 휘말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 [윤치호 일기]와 관복입은 윤치호.(자료사진)

독립협회의 민권운동 목표는 ‘입헌 군주제’
 
3월10일부터 거리정치 ‘만민공동회’를 시작한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로 국가체제 개혁을 목표로 정한 것은 4월이었다. <의회원을 설립함이 정치상 제일 긴요함>이란 토론회를 열고 [독립신문]에 장문의 논설을 게재, 여론화를 도모하며 개화지지 정부관료들과 은밀히 협상하여 합의까지 거친다.
마침내 7월3일 고종황제에게 의회 창설을 공식적으로 제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갑오개혁때 자문기관으로 설치한 중추원이 유명무실하니 이것을 새로운 의회로 만들어 ‘민의’를 널리 채용하라 주장한 제안이다.
그리고 당장 상원-하원을 두기에는 백성의 교육이 미비하다며 ”우리는 외국과 통상 교제한 후 몇 해 동안 배운 것이 지권연(紙卷煙) 먹는 것 한가지 밖에 없으니 어찌 하원을 꿈이나 꾸리오...“ 그러니 우선 상원부터 설립하자고 주장하였다.([독립신문] 1898.7.27.)
이 ‘논설’도 이승만이 쓴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 의회제도 지지자로 변신한 이승만은 그러나 상하 양원제도는 국민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고 조선의 현상으로서는 백성들이 명망가를 선출할 수준이 못되므로 그 중간단계 ‘입헌정치(입헌군주제)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독립정신] 이승만 지음, 1904)
따라서 프랑스 혁명처럼 당장 제왕을 살해 축출하는 폭력혁명보다는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상징적인 왕을 두고 실질적 국가운영은 헌법에 따라 엘리트들이 미국식으로 추진 발전시키는 방향을 당시 개화파들은 선호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고종은 ”조정의 일에 직분을 넘어 망령되이 논하지 말라“며 거부하였다. 
거듭 상소를 올린 독립협회는 외인용병, 황제음독, 7대신 전면 개각 등 농성투쟁을 이어가는 중에 고종이 개화파 박정양 내각을 수용함으로써 의회설립운동은 급진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고종 같은 황제가 그리 쉽게 권력을 의회에 양보할 리가 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황국협회’(皇國協會)란 단체가 나타나 박정양의 집에 들이닥쳐 사임 요구 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황국협회는 수구파가 보부상(褓負商;등짐 진 행상)들을 소집, 개화파에 대적하려 급조한 시위꾼 조직체로서 경비는 황실이 하사했다고 했다. ([독립신문]1898.10.18.)
고종이 독립협회 요구를 들어 수구파 7대신을 해임한 나흘 뒤의 일이다.
그때 고종이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한 윤치호 독립협회 회장은 황제를 직접 만나 ‘관민 합동 국정개혁 집회’의 필요성을 설득, 고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 고종 황제 정복차림(자료사진)

천민 백정의 애국 연설...‘헌의6조’ 채택
 
10월28일 오후 3시 종로 만민공동회는 박정양 등 대신들이 참관자로 나타났다.
첫 관민공동회인지라 독립협회는 각종 사회단체, 각학교 학생들, 상인, 승려, 맹인, 백정 기생등을 초청하여 다양한 민의를 황제에게 전하려 하였고, 황국협회 측도 참석하였다. 
박정양이 먼저 ”성상께서 인민의 방책을 들어오라 하셨으니 협의 끝나고 모두 해산하면 입궐하여 상주하겠다”고 말하자 만세와 박수가 터졌다.
 
이어 등단한 사람은 백정 박성춘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천민이 대신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것이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애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하나의 장대로 받친 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우리 황제폐하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國祚:국운)로 하여금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 ([이승만과 김구] 제1권, 손세일 지음, p460, 조선뉴스프레스, 2015)
 
마침내 ‘헌의6조(獻議六條)’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임금에게 논의를 드리는 6개조는 국정개혁과 의회설립의 기초가 되는 내용이다.
1. 전제황권의 공고화.
2.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 체결 등에는 각부 대신과 중추원이 합동 날인.
3. 전국의 재정과 조세는 탁지부(度支部)가 관장하고 예산 결산은 인민에게 공개.
4. 모든 중범죄도 공판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형을 집행함
5. 황제가 임명하는 칙임관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함
6. 장정(章程:법률 규정)의 실천.
요컨대 고종 정부의 부패무능 직무태만을 청산하고 인권 보장 및 민의를 철저히 반영하라는 요구였다. 
박정양이 헌의6조를 상주하여 다음날 반포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10월31일 새벽 고종은 ‘헌의6조’를 공포하였다. 
군중은 말세를 부르며 해산하려 하자 청년 이승만이 나섰다.
“매번 황제의 조칙으로 정부가 행하도록 했으나 그 실시를 본 적이 없소. 따라서 본 회는 경솔하게 해산할 것이 아니라 만약 이번에도 실시하지 않으면 우리가 쟁론하여 그 실시를 보는 것이 옳을 줄 아오.” 
이승만의 연설에 군중은 주저앉았다. 궁중에 다시 한번 ‘실시 촉구’ 서한을 보냈고 정부도 화답하였을 때공동회는 6일간의 밤낮 농성을 풀었다.

▲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화재전의 모습. 2층대궐은 화재후 단층으로 신축된다. 자료사진)

수구파의 음모...고종은 어디까지 변하는가
 
11월4일 공포된 ‘중추원의 신관제’는 제1조에 ‘법률-칙령의 제정과 폐지, 개정'과 정부의 상주사항 일체를 심사한다고 규정되었다. 이튿날 5일엔 ‘의원 선거’ 실시공고도 했다. 드디어 사상 처음 국회의원 선거와 입법기관 출범을 알리는 혁명적 결정이 나온 날이다.
 
그날 밤, 서울 장안엔 정체불명의 벽보들이 광화문 등 요소마다 붙었다. 
마치 독립협회가 만든 것처럼 꾸민 ‘익명서’ 내용은 “조선왕조가 쇠퇴하였으니 만민이 합심하여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국민이 개명진보를 이룰 것”이란 투로 누군가 조작한 것이었다.(윤치호  ‘독립협회의 시종’-[신민] 1926년6월호.[이승만과 김구]제1권, 손세일 지음)
경찰은 황제에게 보고하였고 수구파 조병식 등은 고종에게 “날이 밝으면 독립관에서 박정양-윤치호의 공화정이 나타나 황실을 없앨 것”이라며 우왕좌왕하는 고종을 거짓 선동한다.
안 그래도 의회제도에 따른 왕권 상실을 우려하던 고종은 즉각 분기탱천, 사실 확인조차 안한채 즉석에서 독립협회 간부 20명 검거령을 발한다.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한 17명이 체포되고, 중추원 의원선거를 준비하던 윤치호는 배재학당 아펜젤러 집으로 피신한다. 
 
고종은 이날 독립협회를 포함한 모든 민간단체의 해산을 명하고 박정양등 ‘헌의6조’에 찬성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 익명벽보 조작의 주역 조병식을 다시 등용하여 수구파 내각이 된다.
 
그날 밤, 고종의 어이없는 배신에 분노한 윤치호의 일기가 글머리 부분에 인용한 것이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그 ‘천박한 거짓말쟁이 국왕’의 조령모개(朝令暮改) 변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에 이승만은 윤치호에게 달려갔다.
방법은 군중 동원 거리투쟁뿐이다. 윤치호와 합의한 이승만은 청년학도들을 이끌고 경무청앞에서 진을 친다. 술렁이던 상인들 부인회, 시민들이 사방에서 합류해왔다.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아니면 우리도 체포하라” 
구금된 동지 17명을 내놓으라는 시위는 경찰력과 몸 싸움을 벌이며 연설, 또 연설, 밤이 되자 횃불을 피우고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시민들은 장국밥 300그릇을 보내고 성금과 물픔을 가져와 성원하므로 농성장은 더 기세를 올렸다.
 
“만민공동회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나의 선친이 오셔셔 ‘너는 6대독자’라고 강조하셨다. 때로 아펜젤러 교장이 와서 배재의 학도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별의 별 풍문이 나돌았다. 정부가 병정을 보내 총격으로 해산시킬 것이라느니, 또 나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달랠 것이라느니...실제로 두 사람이 밤중에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쉬지 않고 연설을 해야 했다. 제일 힘들 때는 동트는 새벽, 사람들이 적어지고 모두들 지쳤으며 춥고 졸렸다....” ([Autobiography of Dr, Syngman Rhee] -‘청년 이승만자서전’ 이정식 지음. 권기봉 옮김.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철야시위 닷새 되던 11월10일, 고종은 또 마음이 변했다. 
17명을 재판에 회부, 채찍40대를 선고하자 17명은 ‘불복’을 외쳤다. 보고 받은 고종은 형을 면하고 석방하라 했다. 
“17명이 드디어 석방되었다. 그날 밤이야말로 나는 득의충천하였다.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가 달성되었도다...” (이승만 자서전 초록)
 
사기가 충천한 만민공동회는 해산은커녕 종로로 장소를 옮기고 상소를 올렸다.
1) 독립협회를 모함한 조병식 유기환등 5명을 재판에 회부하라. 2)‘헌의6조’ 즉각 실시. 3)독립협회 부활.4)정부대관 임명시 백성의 동의를 얻을 것. 5) 조병식 집권시의 외교문서를 공개할 것.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렸음에도 정부는 공포되었던 ‘중추원 신관제’를 개정, 독립협회의 민선의원 조항을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일찌기 입법기관(국회) 의원50명중 25명은 독립협회가 선출하도록 합의한 것을 고종이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것이다.
 
이에 공동회는 시위장소를 다시 황궁 정문 인화문 앞으로 옮긴다. 본격적인 강공태세.
수구파 조병식은 또 고종에게 개화파들이 대궐을 포위하고 ‘프랑스 혁명’같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부추기면서, 외국공관들의 동조를 막으려 독립협회 명의로 ‘간섭 말라’ 거짓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20대 이승만(오른쪽)과 아버지 이경선 옹. 6대독자 이승만은 열여섯살에 결혼,아들을 낳았다.(자료사진)

“비겁한 황제‘의 급습...이승만은 육탄전
 
철야시위 17일째 11월21일 새벽, 황제측의 보부상패들이 언제 습격할지 몰라 술렁이는 농성장에 정부대신들이 나타나 ’보부상 혁파‘와 ’피습방지‘를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 2,000여명은 서대문 고개를 넘어 정동 인화문 앞 시위대를 향해 진격을 개시한다. 
공격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연단에 올라 소리 지른다.
”동요하지 마시오. 우리가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지금 들은 즉 못된 간신배가 보부상패를 불러 우리를 치라해서 목전에 당도하였소. 죽더라도 충애충군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천추에 영광이외다.“
 
이때, 함성을 지르며 들이닥친 보부상패가 무차별 공격을 개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금방 3명이 즉사하고 부상자들이 속출, 맨손으로 치고받는 유박전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격분한 이승만은 보부상 단체두목 길영수를 보자 ”나부터 죽여라“ 머리로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누군가 이승만을 끌어안았다. 온몸을 얻어맞은 이승만은 땅을 치며 통곡하는데, 아들이 걱정되어 나왔던 아버지가 끌어안고 같이 통곡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으로 뛰어가 쓰러지고 말았다. 
친구 김원근이 뛰어들어와 ”이승만이 맞아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날 오후 신문도 이승만이 보부상패에 덤볐다가 맞아죽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만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의 주역, 의회 설립의 국민희망을 한 몸에 받는 청년 스타가 되어있었다.
얼마 후 이승만은 모여든 군중들과 함께 종로로 나아가 만민공동회를 다시 개최한다.
 
한성(서울) 시내는 혁명전야와 같이 술렁거렸다. 
공동회 시민들은 보부상패를 찾아 몰려가고 한편으론 수구파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민영기 등 대관들의 집에 몰려가 때려 부수었다.  
학교마다 문을 닫고 학생들은 공동회에 속속 합류한다. 상인도 시민도 음식과 성금을 갖고 몰려 들었다. 경비와 해산을 맡은 병정들과 경찰들도 시위를 지지한다며 일부는 제복을 벗어던지고 대열에 참여하는 상황으로 급변한다.
낭패한 고종은 한성 시장 등을 보내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군중들은 돌팔매로 응수한다.
성난 군중에 쫓긴 보부상패는 마포 쪽까지 밀려나 재공격명령을 기다렸다.
 
겁먹은 고종은 을미사변(민비피살) 직후처럼 각국 공사들을 입궐시켜 함께 머물자면서 대책을 구한다. 무력진압을 하겠다는 고종의 말에 동조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뒤늦게 윤치호더러 해산을 간청했지만 격분한 이승만의 청년 혁명대를 설득할 묘수는 윤치호 능력 밖이었다. 한마디로 고종 황제 자신이 일구이언(一口二言) 갈팡질팡 수습불능사태를 만들어 놓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가. 
 
고종은 마침내 또 변신, 독립협회를 부활시킨다. 보부상 단체를 합법화 시킨 규칙도 철회한다.
만민공동회는 만세를 불렀을까. 이승만이 이끈 투쟁이 독립협회 해산 후 18일만에 승리했지만 군중은 만세도 부르지 않고 해산도 하지 않았다. 이승만 투쟁세력은 ’헌의6조‘와 ’의회설립‘ 약속을 빨리 이행하라며 ’종로 투쟁‘을 가열시켰다.
 
고종은 해산할 줄 알았던 만민공동회가 더 커지자 직접 수습해보기로 시도한다.
11월26일 오후 경운궁 밖 군막 주변엔 각국 외교관들과 그 부인들까지 초대되었다. 공동회측의 요구에 따른 것, 믿을 수 없는 고종의 발언을 국제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증인‘ 외국 공사부부들을 입회시키라 했다. 고종이 궁문을 나와 말했다.
입회한 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독립협회 부활등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해산하라는 요청이다.
이승만 등은 그제야 황제 만세를 부르고 해산한다.
정상업무로 돌아간 독립협회는 이승만을 부회장 이상재와 동격으로 격상시킨다.

▲ 중추원이 열렸던 독립관(현재 모습).

23세 ’국회의원‘ 이승만...한 달 만에 사라진 꿈
 
11월29일, 고종은 자기방침대로 중추원을 새로 구성한다.
독립협회가 요구한 민선 25명도 황제가 임명해버린 것, 의관(議官=국회의원) 50명 중 독립협회계열은 17명 뿐이었다. 만 스물 세살 이승만도 종9품 의관이 된다. 연봉은 360원.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헌의6조‘ 실천과 입헌군주제 실시를 위해 원내-원외 양면 투쟁에 돌입한다.
사흘후 12월1일 보부상패에 맞아죽은 신기료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을 새로운 시위투쟁 이벤트로 만들어 거창하게 치른다. 학교별 마을별로 수많은 명정을 준비, ’충의(忠義)에 죽은 대한제국 의사(義士) 김덕구‘라 써서 들고 노래하며 행진하는 광경에 시민들은 ”영의정 장례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환호하였다.
이어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고 철야 상소시위를 재개한다.
 
소수당이지만 양면투쟁이 고조되자 긴장한 고종과 수구파는 기회를 엿보았다.
고종은 또 중추원 부의장에 윤치호를 지명, 선출하게 한다. 온건 개혁파 윤치호의 역량에 기대한 것.
그런데, 12월18일 ‘임용적임자 추천결의’가 고종에게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다.
황제가 임명할 고관들 명단을 의회가 추천하는 일에 이승만 등 젊은 주동자들은 전면개각에 해당하는 11명이나 개화파를 선정한 것, 거기 박영효와 서재필이 포함되었다. 
두 사람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서 특히 박영효는 ‘민왕후 폐비’ 음모에 가담한 적이 있다.
 
고종은 즉각 칼을 빼들었다. 박영효 영입을 주장하는 박영효 측근들을 일제히 체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킨다. 독립협회도 해산령은 없었으나 사실상 해산되었다.
1월3일 개화파 의관들과 함께 이승만도 파면 당한다. 이승만은 친분이 깊은 의료선교사 에비슨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9일 체포되어 경무청에 갇히고 만다.
 
백일몽의 국회 한 달!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려던 급진 개혁운동가 이승만의 꿈은 이대로 허망하게 사라졌는가. 아니다. 배재학당서 미국의 자유를 발견하고 미국같은 의회 민주주주의를 신봉한 청년 이승만의 굳센 신념과 불굴의 의지는 한 번도 포기할 줄을 모른다.
한성감옥, 미국 유학, 망명, 하와이 독립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까지 결코 멈출 수 없었던 자유민주공화국의 대서사시는 50년후 마침내 대한민국 건국이란 꽃을 피운다. 우선 한성감옥의 사형수를 찾아가 보자
 

이승만 건국사(5) 한성감옥: ‘하나님의 종’이 되다

기독교를 빼고 이승만을 평가 말라
 
이승만의 90평생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한성감옥에서 ‘성령’을 받은 순간이다.
기독교를 경멸하고 선교사들을 증오했던 23세 청년이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게 기도가 터져 나오고, 기도한 순간 하나님의 응답이 그를 뜨거운 불로 지져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후 이승만이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봉사‘ 그것이다.
 
이어서 출옥하자마자 떠난 미국 유학,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에 ’합당한 영육‘을 만들기 위한 대장정이다. “나는 5년 내로 박사까지 받아야만 조국에 돌아가 할 일을 할수 있으니 입학시켜 달라”고 하버드 대학원장에 보낸 편지가 잘 말해준다.
이승만이 해야 할 일이란 감옥에서 확신을 얻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말대로 5년에 학사-석사-박사를 따낸다. ’믿으면 이루리라‘ 성경말씀대로다.
 
한성감옥 5년7개월, 미국 유학 5년 6개월, 합해서 11년 1개월---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윌슨 총장(뒷날 대통령)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곧 탄식을 토했다. “나는 준비가 끝났는데 내 할 일을 해야 할 나라가 사라졌구나.” 8월22일 서울에선 한일병합 밀약이 조인되고 일주일 뒤 29일 ’병탄‘이 발표되었다.
그 순간부터 이승만의 사명은 ’왕이 포기한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초지일관하였다. 다름 아닌 “기독교 선진국 영국-미국과 동등한 나라 만들기’이다.
의병투쟁이나 암살 등 살인폭력을 거부하고 암살사건 변호를 거절하고 ‘사탄의 독재’ 공산주의 실체를 세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이승만의 통찰력 등은 기독교정신을 빼놓고 설명하려 하면 근본적인 오류을 범하게 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이승만의 모든 행적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어낸 응답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이 동서양 학문을 쌓은 위에  ‘하나님의 눈’과 영성(靈性)으로 무장되었음을 간과하면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인간 평가를 제대로 할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보좌관 미국대학교수 올리버는 기록했다. “이승만의 명상은 절반이 기도’라고. 
부인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은 걸어가면서도 기도한다‘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이 연재는 그래서 이승만의 한성감옥 생활과 미국유학 행적을 압축 정리한다.

▲ 종신형을 받은 죄수복 차림 이승만(자료사진)

“세상 것 다 버리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다” 
 
1899년 1월 혹한의 지옥에 던져진 ‘대역죄인’--이승만에겐 입헌군주제 추진과 박영효 쿠데타 음모 관련 혐의에 탈옥 미수란 죄가 덧씌워졌다. 그가 탈옥한 것은 1월30일, 상동교회 청년동지회 주시경(뒷날 한글학자)이 권총 두 자루를 구해주어 동지 최정식과 함께 도망친다.
“한시 바삐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고 싶어” 경찰 구치소를 빠져 나왔으나 동지들은 사라지고 이승만만 잡혔다. 2월1일 청계광장 근처 한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쿠데타 음모에 탈옥까지 누가 봐도 죽어야할 사형수, 24세 이승만은 참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을 각오하였다. “어느 날에나 죽이려는고...” 이승만은 이 세상을 체념한다. 
목에는 10㎏ 넘는 큰 칼을 메고 가슴과 두 팔 두 손목은 수갑과 오라 줄에 묶이고 두 발목은 무거운 차꼬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족쇄를 질질 끌며 날이면 날마다 끌려 나가 형틀에 엎어놓고 묶여 고문을 받는다. 장정 두 명이 다리 사이에 옹이 박힌 몽둥이를 넣어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엔 세모난 대나무 토막을 끼워 살점이 떨어지도록 비틀었으며,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매질을 계속하니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수 있으랴.
그날도 그런 형벌을 받은 뒤 감방 흙바닥에 던져진 죽음의 순간, 피 흘리는 입술에서 비명 같은 기도가 통곡처럼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목숨까지 포기한 초죽음의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뜻밖에도 하나님의 뜨거운 응답을 받았다.
“그 순간,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새하여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불심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가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 생활과 옥중잡기 연구] 유영익 지음)
 
뒷날 기도가 나온 순간의 심정을 이승만은 이렇게 돌아본다. 
“그 참혹한 감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사람들이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감옥에 가게 될 터였다. 그러자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선교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오’ 그런 기억이 나자 그대로 큰 칼에 얼굴을 대고 기도가 절로 나왔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증오심이란 당시 미국의 ‘하와이 병합’(1897)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
하와이 사탕수수 무역을 하던 미국이 선교사들을 보내 원주민들을 포섭한 뒤 하와이 여왕을 추방하고 섬들을 차지하였으니, 조선을 개방시키고 온 선교사들도 한반도를 그렇게 먹기 위한 미국 정부의 ‘앞잡이’들로 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이승만이 ‘뜨거운 불의 세례’ 은총을 받자 성경이 읽고 싶어졌다. 
단발령때 자신의 머리를 잘라준 에비슨 선교사에게 영문성경과 영어사전을 넣어달라고 부탁, 큰 칼 쓰고 오라줄에 묶인 몸으로 ‘신약성경’을 쉬임없이 읽었다. 동료 죄수 한명이 파스를 서고 도 한명이 성경책을 한 장씩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 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마침내 죄수 이승만은 기독교의 회심(回心)을 통하여 성경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니 원죄를 속죄 받고 ”영생불멸의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젊은 날의 이승만] 유영익 지음,연세대출판부,2002)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최대의 정적이 재판장, 뜻 밖에 종신형 판결
 
3월18일 첫 공판을 시작하여 7월10일 재판에서 이승만은 종신형이 확정된다. 
박영효 쿠데타 관련 혐의를 벗었고 탈옥도 종범으로 인정되어 태(笞)100대, 종신복역수가 되었다. 이때의 재판장이 홍종우, 황국협회 회장으로 이승만의 만민공동회를 습격을 지휘했던  수구파 행동대장이 그가 어느 새 재판장이 되어 이승만을 재판한 것인데 결과는 뜻밖이었던 것이다.
 
”나의 정적이던 홍종우가 평리원의 재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나의 형틀을 제겨하도록 명령했다. 홍종우는 황국협회 회장으로서 나의 가장 큰 정적의 하나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생명을 살려주려고 온갖 힘을 써주었다. 찹으로 인생의 야릇한 역정이었다. (중략) 최정식과 내가 재판을 같이 받게 된 날, 나는 몸이 몹시 쇠약해 있어서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처지였다. 최정식은 활기 있게 웅변조로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나는 나 지신을 방어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최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나에 대한 진술가운데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판사는 다음날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는 자기가 한 말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증거품으로 나의 권총이 제출되었는데 나는 한방도 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중략)...재판장 홍종우가 나의 부친에게 나를 살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는 소식은 퍽 뒤에 들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당시 이승만의 구명운동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우선 미국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외교계를 통해 감형과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독립협회에 호의적이던 한규설 중추원의장의 노력은 그의 편지가 열통쯤 남아 기록을 전한다. 또한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일반 지지 세력이 급증, 황실 호위대 병사까지 [제국신문]에 이승만 구명을 위한 시(詩)를 게재할 정도였다.
 
그의 형기는 그해 12월13일에 15년으로 감형되고 12월 22일엔 10년으로 감형된다. 이는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기념 특사의 일환이었다.

 

이승만 건국사 (6) 한성감옥: 감방에서 영어를 마스터한 비결은?

 

▲ 유영익 지음 [젊은 날의 이승만] 표지.ⓒ뉴데일리DB

감옥을 '대학 이상의 대학'으로 활용한 20대 이승만
 
이승만이 남긴 ‘한성감옥 5년7개월의 기록’은 이승만 평가의 가장 기본적 인식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그의 기독교정신과 자유민주 정치사상과 대한민국 건국정신 및 외교독립론 등이 감옥생활에서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 유영익(연세대 명예교수, 전 이승만 연구원장)은 이승만의 옥중생활 기록을 한국최초로 심층 연구하여 [젊은 날의 이승만](연세대출판부, 2002)을 펴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행적 평가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이 연구서에서 유 교수가 제시한 몇가지 주장을 소개한다.
▶청년 이승만은 기독교 개종의 급격한 정신적 혁명을 체험함으로써 인생관과 정치관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켜 서양화된 ‘근대적 인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승만의 멸청(蔑淸) 공로(恐露) 반일(反日) 친미(親美) 사상은 한성감옥에서 확고히 형성되었다. 즉, 청나라를 버리고 러시아를 경계하며 일본을 반대하고 미국과 친해야한다는 이승만의 정치철학과 국제정치적 역사관을 확립한 것이 감옥에서 공부한 결과이며, 1905년 을사조약 이전 한국의 누구보다 앞선 근대화 선각자로 변신하였다.
▶엄청난 독서와 탐구를 통하여 한성감옥은 이승만에게 ‘대학이상의 대학’이라 하겠다. 스스로 영어와 일본어를 체득하고 서구적 학문에 천착함으로써 뒷날 미국 유학시 일류대학들이 받아주는 높은 수준의 동서양 연구자로 자신을 만들었다. 필자도 유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이승만의 옥중생활을 간추려본다.

▲ 이승만은 감옥에서 읽은 서적들 목록과 번역 저술한 책의 목록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오른쪽 사진은 1902년 국내신문에 보도된 '영일동맹' 조약문을 보고 이승만이 영문으로 번역해 본 것인데, 뒷날 원본과 대조하여 크게 틀린 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기록의 왕’...다양한 옥중 활동
 
한순간에 ‘변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승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거리투쟁을 하고 싶어 탈옥까지 감행했던 ‘열혈 급진파’ 청년은 신약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 온순한 ‘어린 양’이 되었다. 
 
이승만은 타고난 ‘기록의 왕’이기도 하다. 배재학당 입학후 주요기록은 물론, 한성감옥 5년7개월간 벌인 각가지 활동을 깨알같이 기록해 놓았다. 더구나 그의 미국 유학 5년이후 망명 35년간 일기와 각종 편지들, 저술 등 자료들은 또 얼마나 귀중한 현대사의 살아있는 자료인가. 
 
한마디로 청년 이승만에게 한성감옥은 교회, 학교, 독서실, 영어학원, 집필실, 대학교실이었다.
특히 감옥에서 집필한 논설들과 저술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하나님의 나라’로 ‘한반도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건국 구상, 다시 말하면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의 원형을 구상 설계하였음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하기보다는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는 현대적 국민국가의 지도자를 자임하는 자유민주주의 면모가 돋보인다.

▲ 죄수복을 입은 이승만(왼쪽끝)이 기독교를 전도하여 개종한 전직고관 양반들과 자제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아들), 무명의 소년(부친대신 복역중).ⓒ연세대이승만연구원.

◆성경공부 & 개신교 전도...감옥학교 개설
 
 
 “생지옥이 복당(福堂)으로 변했도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드린 이승만은 한성감목을 ‘복당 감옥’이라 불렀고 동료 죄수들이 합창한다.
이승만은 감옥서장 김영선에게 ‘학당 개설’을 요청한다. 
“백성으로서 죄를 범하는 것은 교화(敎化)가 안된 탓인 것을, 백성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그 죄만을 다스리려 하니 죄수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급하다“며 감옥학교 개설을 허락받는다.
김영선은 개화파 대신 한규설의 절친으로서 여러차례 이승만을 보호해다라고 요청한 한규설의 편지들이 남아있어 두 사람이 이승만의 감옥활동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음이 밝혀진다. 
이승만은 당시 죄수 350여명을 소년반, 성인반으로 나누어 ‘가갸거겨’부터 국사, 윤리, 산수, 세계지리 등을 가르치고, 성경을 함께 읽고 강론하며 기도하고 찬송가를 합창하면서 초급영어까지 큰 소리로 읽으니 생지옥은 그야말로 ‘복당’이요, 장안에도 드문 기독교 개화 학교가 되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전도사이자 교사“가 된 이승만은 어느 새 죄수들의 ‘구세주’로 카리스마가 생겼다.
”나는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동포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끌려가면서 마치 내가 자기들을 구해줄 수 있는 듯 내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다. 그런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을 질러주는 것뿐이었다. 무거운 칼 소리가가 들려올 때 그 복잡한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장호익 장군도 우리 감방 바로 뒤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는 세 번째 칼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 만세를 불렀다. 나는 요사이도 꿈 속에서 감옥시절의 이런 저런 장면을 보곤 한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Gale)은 당시 감옥학당을 이렇게 보았다.
”감옥은 처음에 ‘진리탐구의 방’으로 시작하여 ‘기도의 집’이 되고 예배당이었다가 급기야 ‘신학당‘이 되었다. 이 과정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내보내어 이 나라 수도의 기독교계에서 사역하는 최초의 지도자들이 되었다.“([전환기의 한국] 게일 지음. 1909)
게일이 기록한 지도자들이란 이승만이 전도하여 개종시킨 양반계급 지식인들 40여명으로, ’개혁당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개종한 사람들은 한성감옥서의 간수장 이중진(李重鎭)과 그의 동생 이중혁(李重爀)을 비롯해 나중에 연동교회, 서울YMCA, 그리고 동경의 한인YMCA 등에서 크게 활약하는 이상재(李商在), 유성준(兪星濬), 이원긍(李源兢), 김린(金麟), 김정식(金貞植), 홍재기(洪在箕), 안국선(安國善) 등 여러 장로가 포함된다.
. 이것은 한국교회사에 전무후무한 왕조 엘리트 집단의 입교 기록, 이들은 그때부터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건국 후까지 적극 동참한 평생동지들이 되었다. 

▲ 이승만의 한성감옥 성경공부 그룹의 일부, 성경을 들고 찍었다. 왼쪽부터 세번째가 이승만, 그 앞에 어린이는 이승만의 아들 봉수. 나막신을 신었다. 사진 왼쪽위 영문자는 이승만이 뒷날 써놓은 메모. ⓒ연세대이승만연구원.

◆기독교 서적 탐독...영어사전 외우며 영어공부 
 
선교사들은 이승만의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이승만이 부탁하는 책들을 수시로 제공한다.
워낙 책의 반입이 금지되어있었는데 감옥사정 김영선이 눈감아 준 것이다.
일찍이 배재학당 졸업식(1897.7.8.)에서 학생대표로 ’The Indepence of Korea’란 영어 연설을 유창하게 하여 외국공사들까지 놀라게 했던 이승만은 감옥에서 영어를 미국인 수준으로 마스터하려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감옥은 곡식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는데 흙바닥엔 돗자리를 깔았고 겨울엔 난로를 주지 않아 죄수 각자가 이불을 가져다 썼다...(중략)...글을 쓸 수 있는 그 무엇이나 책은 일체 못 들여오게 되어있지만 간수들은 우리 일을 묵인해 주었다. 우남(이승만)은 [화영사전]을 가지고 있었고, 아펜젤러와 벙커씨는 잡지 [뉴욕 아웃룩](New York OUTLOOK)과 [독립신문]을 들여보내 주었다. 죄수들은 1척 직경쯤 되는 항아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승만은 그 항아리를 눕혀놓고 그 속에 몰래 들여온 양초를 켜놓고 공부를 하곤 했다. 간수들이 올 때는 항아리를 벽 쪽으로 돌려놓으면 불이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러면서 영어를 공부했다. 미국 잡지들이 그의 교과서였다. 그는 붉은 물감을 몰래 들여와 잉크를 만들어 낡은 잡지에 붓글쓰기 연습도 하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잡지에서 읽은 문장들을 외웠다. 그는 사전에 있는 영어단어를 모두 외우는 것이었다..." (옥중 동지 신흥우의 증언. [인간 신흥우] 전택부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1971).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언론인 출신답게 시사문제에 관심이 깊어 [OUTLOOK] 외에도 중국, 일본, 미국 등에서 발간되는 주요신문들과 잡지 등 영문 정기간행물을 들여다가 날마다 애독하였던 일이다. 따라서 영어공부는 물론, 그는 감옥 밖의 지도층보다도 시사문제와 국제정세에 정통하였으며, 외국인들과 소통능력의 격을 높이게 된다. 뒷날 이승만이 글로벌 리더십을 구축하는 국제정치적 대화와 외교의 남다른 자질은 이때부터 단련된 것이었다.

▲ 이승만이 1903년부터 옥중에서 편찬한 [신영한사전] 원고들 영인본.ⓒ연세대이승만연구원.

영어에 자신감을 갖게 된 집념의 사나이 이승만은 한영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자 마침내 [신한영사전](New English-Korean Dictionary) 편찬을 시작한다. 아펜젤러가 차입해준 [웹스터 영어사전](Webster English Dictionary)와 [화영사전](Japanese-English Dictionary)을 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정리해야 하니 일본어 공부도 저절로 되었다. 
그러나 그 사전은 F항 중반에서 포기해야 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부랴부랴 책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그 책이 옥중명저 [독립정신]이다.
 
미국 사립명문 에머리(Emory)대학 유학파이며 중국에서 영어교사를 했던 엘리트 윤치호가 당시 이승만의 영어 실력에 감탄한다. ”어제 석방된 이승만을 만나보았다. 그는 놀랄 만한 청년이다. 감옥에서 영어 실력을 너무나 잘 향상시킨 결과 그는 이제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아주 멋진 기사를 쓸 수 있다.“([윤치호 일기] 1904.8.9.)
 
◆광범한 독서 & 왕성한 번역, 그리고 ‘서적실’
 
‘부지런한 일꾼’ 이승만은 옥중에서 놀랄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우선 순위로 보면, 기독교 신앙서적, 역사, 법률-외교, 시사관련 신문과 잡지, 문학 등을 포괄한다. 아펜젤러, 벙커, 에비슨 등 선교사들이 넣어준 기독교 교리 서책들은 물론,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종교서적들도 읽었다. 
역사책은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영국선교사 리차드 지음 서양사),  [만국역사] [만국사략]은 세계역사, [조선사기](영문 한국사), [중동전기본발](中東戰紀本末:미국선교사 알렌 편저 ‘청일전쟁사’) 등이다. ‘중동’이란 중국의 동쪽 조선을 가리킨다.
국제정치와 외교에 관심이 깊었던 이승만은 [공법회통](公法會通), [약장합편](約章合編) [만국공법](萬國公法:International Law) 등 국제법 책들을 탐독하였으며, 유길준의 [서유견문], 영국 크리스천 소설 [천로역정] 김만중의 [구운몽] 등 소설들도 틈틈이 읽었다.
 
동시에 이승만은 중요한 책들을 번역하는데 힘썼다. 그가 번역한 책들은 [중동전기] [만국사략] [만국공법]과 기독교 교리서 [주복(主僕)문답], 감리교역사 [The Junior History of Methodism] 등이다. 영문법 [English Grammar Material Primer]도 번역하여 옥중교재로 썼다.
물론 모든 번역책은 그가 창간한 신문들처럼 한글전용이었다.

▲ 개신교인이 된 이승만이 번역한 [감리교 역사] 현대판 표지. 1902년 군산 앞바다 선박침몰로 순교한 아펜젤러 선교사.(자료사진)

★특히 [주니어 감리교역사]는 아펜젤러가 죽은 직후에 번역을 끝냈다.
배재학당 설립자로 이승만의 사상과 종교를 지도하고 석방운동을 주도하며 이승만 집안의 생활비까지 지원한 스승, 아펜젤러의 죽음은 이승만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아펜젤러는 성경번역사업 등을 위해 1902년 6월 제물포를 떠나 목포로 향하던 중 11일 군산앞바다에서 선박끼리 충돌 침몰하는 중에, 물에 빠지는 소녀를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44세). 
이승만의 충격과 슬픔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은사의 비보를 듣자 하루 반을 내리 울고 단식했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조선일보 1934.11.27. ‘조선 신교육측면사- 배재50년 좌담회’)
 
지금도 계속 출간되고 있는 [주니어 감리교역사]는 요한 웨슬리의 회심과 산업혁명전야 도탄에 빠진 영국사회를 웨슬리의 순례 전도로 구원한 역사를 담고 있다. 거기 웨슬리의 회심과정이 이승만과 많이 닮아있다.
그 신앙적 교감 속에 떨어진 날벼락, 아펜젤러의 순교 앞에서 이승만은 몇 달이나 기도와 명상에 빠진다. 그리고 나서 시작한 것이 본격적인 죄수 교육 ‘옥중 학당’이다.
”웨슬리를 따라 아펜젤러를 따라“--홀연히 떠난 스승의 뒤를 따라 이승만은 ”땅끝까지라도 복음을 설파하는 십자가의 순례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개화의 스승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서재필을 능가하는 혁명적 계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기독교 교육과 신앙의 롤 모델 아펜젤러가 사라지자 개신교계의 선봉에 나섰다.

▲ 이승만이 감옥에서 편역한 [청일전기] 표지. 오른쪽은 2020년 연세대이승만연구원이 발간한 '우남이승만 전집' 제4권 표지.

이승만이 번역한 여러책 가운데 [중동전기]에 정성을 들인 것은 청일전쟁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전쟁사라기보다 이승만의 관심사인 국제관계와 전쟁외교에 초점을 두어 재편집한 책이다. 
”청일전쟁이 임진왜란보다 더 큰 난리요, 한인들이 가장 통분히 여길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 한국이 잔멸을 당하고 독립을 잃었다.“ 그 망국의 근본원인은 청일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기에 ”태평양이 마르고 히말라야 산맥이 평지가 될지라도 조선의 독립을 우리 손으로 회복하겠다는 의자가 있다면 “이런 책을 많이 보아 외국형편과 내나라 사정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청일전기] 서문, 1917)라서 번역한다고 했다.
그래서 [청일전기]는 원전의 전쟁기록보다 전쟁전후 중국, 일본, 조선등 관련국 정세와 각국이 교환한 외교문서, 조약문들을 모았고 이승만이 2편의 해설 칼럼을 덧붙여 냈다.
이 밖에도 지리, 산수 등 10여개를 번역, 교재를 만들어 옥중학당에서 가르쳤다.

▲ 이승만은 옥중에서 처형되거나 콜레라 등으로 사망한 죄수들 명단을 작성해놓았다. 오른쪽은 틈틈이 쓴 한시(漢詩)100여수를 묶은 책 [체역집] 표지.ⓒ연세대이승만연구원.

아펜젤러가 순교한 해에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처음 크리스마스 축하행사를 열었다. 이때 벙커 선교사가 선물로 기독교서적 150여권을 가져오자 이승만은 ‘서적실’을 설치한다. 
목공이 취미였던 이승만은 책장도 손수 만들고 곳곳에서 책을 수집하였다. 처음 250권으로 시작한 책장은 일본 중국 등에서 선교사들이 책을 보내어 금방 523권이 되고, 보름동안 열람자가 268명이 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이승만은 유성준과 함께 ‘옥중도서 대츨 명부’도 작성, 서적실서 먹고 자면서 운영을 도맡았다.
 
◆콜레라로 떼죽음...간호와 시신 수습...신앙고백
    
1903년 3월엔 대륙을 휩쓴 콜레라가 서울 한성감옥에도 번져 죄수들이 집단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미국선교사 에비슨에게 약을 구해 들여와 환자들을 간호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거침없이 헌신하는 것이었다.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줄을 믿고 마음을 굳게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괴질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며칠 사이 60여명이 목전에서 쓸어내릴 새, 심하면 하루 열일곱 목숨이 쓰러질때 죽는자와 호흡을 상통하여 그 수족과 몸을 만져 시신과 함께 지내었으되 나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을 가르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할 지라...(중략)
이 험한 중에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요....이것이 나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이니 이 깨달음으로 날마다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나는 새가 깃들이게 될 줄을 믿겠나이다." ([신학월보] 1903년 5월호)
 
이 즈음 이승만의 믿음과 봉사가 얼마나 깊어지고 확신을 얻었는지를 보여주는 신앙고백이다.

 

이승만 건국사(7) 한성감옥: 러일전쟁 경고..."고종이 또 전쟁을 자초한다"

열강들이 미워하는 러시아 '호랑이 굴'에 숨은 고종
 
죄수 이승만이 감옥에서 ’러일전쟁‘을 예견하고 고종에게 경고를 날리는 논설을 쓴 사실을 아시는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언했대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Japan Inside Out]은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등으로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40년 앞서 러일전쟁을 ’예언‘한 논설은 지금껏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1903년 2월18일자 [제국신문]에 게재한 논설 ’러-일 양국의 대한(大韓) 관계‘가 그것이다.
 
이승만이 남긴 옥중기록물 중에 ’영-일동맹 조약문‘ ’러-일 비밀협약‘ 등 국제관계 문건들이 많다. 영어신문에서 베낀 것들과 국내 신문에 한문으로 게재된 것을 영어로 번역해놓은 것도 있다. 왜 이토록 국제문제에 관심이 많았을까. 
바로 이 점이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다른, 너무나 다른 이승만의 차별점이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에 일찌감치 눈을 뜨고나서 20대 청년시절부터 국제법과 외교를 잘 알아야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줄곧 주장한 이승만이 망국 후엔 '외교 독립론'을  초지일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투옥되기 전 신문사 주필 이승만이 한국최초의 국제필화사건을 일으켜 고종과 러시아-프랑스의 이권거래 밀약을 폭로, 무산시킨 사건은 연재(2)에서 설명한 대로다.
누구보다 앞서 강대국들의 패권경쟁을 알고 ’대한 독립‘을 맹렬히 부르짖은 이승만은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래 러시아 품에서 놀아나는 황제의 ’외교무지‘와 부패무능에 대하여 격분을 넘어 경멸해왔다. 옥중에서도 미국 시사주간지 [아웃룩]과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날마다 읽으며 노심초사하는 그에게 놀라운 뉴스가 날아든다.
[황성신문]에 보도된 ’영일동맹 체결‘ 기사와 그 협약문이다.
즉시 한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며 눈앞에 닥친 전운(戰雲)에 분노와 걱정이 끓는다.
“내 백성의 항거를 막지 못해 청일전쟁을 일으켜놓고 이후 10년 세월을 허송하던 황제가 기어이 또 다시 러-일 전쟁까지 불러오는 구나“
그는 논설을 쓰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탐욕 있는 호랑이라. 세계를 하나의 고기 덩어리로 보아 표트르 황제 이후로 천하를 통합할 주의로 대대로 남의 땅도 많이 침탈하였거니와 각국이 더욱 두려워하고 러시아를 조심하여 애당초 상관을 잘 아니하며 미워함이 자심한지라....(중략)....그 욕심으로 을미사변(일본의 민왕후 살해) 후에 일본인을 물리치고 대한(大韓) 황실을 보호하는 의탁이 되어 러시아는 속으로 조선이 자기를 태산같이 믿어서 벗어나지 않도록 만들매...(중략)....일본은 고종을 달래고 협박하여 지난 장악력을 회복하려 하나 의심과 배심이 깊어갈 뿐이라....” ([제국신문] 논설 ’러-일 양국의 대한 관계‘1903.2.18.)
 
오래전부터 ’영토약탈자‘ 러시아에 열강들이 모두 러시아의 서진남진(西進南進)을 가로막고 있는 국제정세 소개로 시작한 논설은 황제 고종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며 정면으로 들이댄다.

▲ 고종 황제(왼쪽)와 고종을 러시아와 수교하도록 배후조종한 독일인 외교교문 뮐렌도르프.(자료사진)

“은혜(아관파천) 입은 친구 러시아 힘만 믿고 호랑이 굴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이리(일본)가 더 가까이 오지 않는 것만 다행히 여기니, 어찌 그 호랑이가 언제까지 보호하여 주기를 바라리오.,,(중략),,,,그 사이 나라에 병들이고 백성에 해될 일을 하지 말고, 내 백성을 일으켜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와 황실을 보호하는 직책을 맡게 해서 양국(러-일)의 간여를 멀리 하였으면 좋은 기회가 많았을 것이거늘, 백성과는 나날이 반대가 되며 정부형세는 세상에 외롭게 되어...(중략)....큰 나라에 의지하여 강한 자의 부용(비유;놀이개 여성)이 되는 것이 쾌하다 하여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병이 들었으니 어찌 따로 볼 날이 있으리오.” (*주: 괄호안은 필자)
 
독힙협회의 만민공동회 투쟁과 고종의 줏대없는 탄압을 다시 한번 타격한 이승만은
이리(일본)가 호랑이 굴을 기습할 때를 대비도 할 줄 모르는 고종의 우둔함을 지적한다.
 
'그레이트 게임'의 산물 '영일동맹'을 모르는 조선
 
영-일 동맹은 영국과 러시아의 오래 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산물이다.
19세기 초반 러시아가 페르시아(이란)과 5차 전쟁을 벌여 카스피해-흑해 연안까지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자 영국은 비상이 걸렸다. 영국 최대의 식민시장 인도에 대한 위협, 지중해로 진출하면 중동 위협, 그때부터 시작된 영국의 봉쇄작전과 러시아의 진출작전의 대결이 ’그레이트 게임‘이다. 레닌의 공산쿠데타까지 100년을 헤아리는 패권게임에 독일도 가세한다.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남진, 영국에 막히자 시베리아 철도를 놓아 만주와 한반도로 향한다. 놀란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 항로에 놓인 거문도를 점령(1885)하고, 한반도를 노리는 일본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깥세상을 모르는 고종은 거문도 점령도 시베리아 철도의 의미도 몰랐고, 20대 위안스카이의 ’총독질‘만 무서워서 러시아에 밀사를 보내 “보호”를 애걸한다. 그것도 청국 이홍장이 조선과 일본을 감시하라고 파견한 독일인고문 묄렌도르프가 조국 독일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 동진을 돕는 2중간첩질과 이에 장단 맞춘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포섭작전인 줄을 고종이나 민비가 알 턱이 없다. 러시아는 자다가 떡먹기다. 
급기야 일본이 ’러시아의 여우 사냥작전‘이란 이름으로 민왕후를 살해하고, 피난처를 찾아 갈팡질팡하던 고종을 러시아가 끌어안는다. 이에 청일전쟁때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토해내야 했던 일본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감행하자 즉각 영국에 동맹을 제안한다. 영국은 ’그쪽은 일본이 맡으라”며 1차 영일동맹을 체결한 것이 1902년 1월30일이다.
감옥에 앉아서 강대국들의 패권 놀음을 지켜보던 이승만이 2월18일 고종에게 국가멸망위기를 경고하는 논설을 게재한 것이었다.

▲ 1904년 2월 3일 자 영국 잡지 '펀치(Punch)' 삽화. 러·일 양국이 조선 노인의 허리를 밧줄로 조이는 장면. 러일전쟁에 '엄정중립'(Strict Neutrality)을 선언한 조선을 풍자.

"러시아와 일본이 먹이를 다투니...위태하고 위태하도다"
 
“세계에서 다 싫어하는 나라(러시아)를 홀로 의지하여 여러 이익까지 주어가면서 자기보호만 받으려하니 타국이 어찌 마음에 즐겨 하리오....(중략)....남이 나를 쳐서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을 자초하고 있다“고 개탄하는 이승만이다. 
고종에게 ‘독립’이란 ‘왕실 살아남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러시아-프랑스가 한편 되고 일본-영국이 한편 되어 ’줏대 없는 물건‘(대한제국 고종)을 놓고 다투는 모양새라...위태하고 위태하도다. 장래 관계는 다시 설명하겠노라.”
 
안타깝게도 당시의 [제국신문]이 17개월치나 사라져 ’장럐관계‘등 추가 논설을 볼수 없음이 너무 아쉽다.
이 논설이 게재된 꼭 1년 후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진다. 
영일동맹을 맺은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 앞바다와 요동반도를 동시에 기습,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다. 함포소리가 쿵 쿵 한성감옥까지 울려온다.
 
“나라가 망했구나. 대한은 이제 일본 것이냐? 러시아 것이냐?” 옥중 개화파는 통곡한다.
1904년 2월 19일,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면서 영어단어 8,233개까지 정리한 [신영한사전] 편찬 작업을 F항 중반에서 중단하고 [독립정신] 집필에 돌입한다. 전쟁발발 열흘만이다.

이승만 건국사(8) 한성감옥: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계하다

대한민국을 '잉태'한 한성감옥...건국사의 요람
 
한성감옥은 이승만에게 축복 받은 용광로였다.
‘왕은 존재하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 - 성리학의 중독과 무법 부패의 늪에 빠진 조선 왕권 전제주의를 혁파하려는 청년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자로 담금질해 대한민국의 건국자로 재탄생시킨 용광로 – 한성감옥은 그래서 대한민국을 ‘잉태’하게 해준 축복의 지옥이다.
그 축복의 실체는 이승만이 옥중에서 써낸 수백편의 논설에 가득 담겨 있다.
 
기독교 ‘회심’ 2년째 1901년 2월부터 이승만은 논설을 쓴다. 자신이 창간한 [제국신문]의 동지 이종일(李鍾一)과 공모, 감방에서 몰래 쓴 논설을 밖으로 내보내 게재하는 작업을 이듬해 4월17일까지 장장 2년 7개월 계속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세계 언론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승만의 논설이 실린 신문은 잘 팔리고 안 실린 신문은 인기가 없었다”는 증언(신흥우)처럼 이승만은 이미 국가개혁운동의 스타가 되어있었기에 그의 논설이 주장하는 영향력은 컸다.
 
이승만은 동시에 감리교 선교사 존스(G.H.Jones)가 최병헌 전도사(崔炳憲, 정동감리교회 목사)와 함께 인천에서 발간한 [신학월보]에도 5편의 논설을 실었다.
 
[제국신문]의 당시 지면이 17개월분이나 없어져 이승만의 정신세계를 전부 알 길은 없으나 남아있는 90여편의 논설과, [신학월보]의 내용만으로도 그의 사상과 건국구상은 선명하다.
이들 논설들의 주요 논지는 대부분 이승만의 옥중 명저 [독립정신]에 수렴되었다.

▲ 이승만이 처음 ‘옥중 전도’ 논설을 게재한 월간지 [신학월보] 표지와 글. 위쪽에 이승만의 영문 메모가 보인다. 이승만은 자신이 보관한 모든 자료에 직접 영문으로 장소와 날짜 등을 기입해놓았다. ‘기록이 역사’임을 아는 기록광이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예수교를 근본 삼아야 미-영과 동등한 나라 된다”
 
[제국신문]에 논설을 연재하면서 [신학월보]에 기고한 첫 논설 내용은 이렇다.
제목: 예수교가 대한(大韓) 장래의 기초.
“제 몸이 멸망을 면하며 제 집안이 환란을 면하며 제 나라가 위태함을 면하는 도리가 있음을 알진대 행하고자 아니하는 자가 어디 있으리오만, 몰라서 못하기도 하며 알고도 확실히 믿지 못하여 날로 멸망함을 당하면서도 저절로 없어지기를 앉아서 기다리나니, 일을 당한 사람이 멸망을 면할 도리를 차리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일이 저절로 면하게 되리오”([신학월보] 1903년 8월호)
 
놀라워라! 120년 지난 21세기 지금 대한민국에 울림이 더 큰 말이 아닌가!
 
“예부터 유교가 있어 정치와 합하여 다스림에 선미한 지경에 이르러 보았은즉, 지금도 이를 다시 행하면 이전같이 될 줄로만 생각하여 다른 도리는 구하지 않으니...”
이는 마치 “어려서 입던 좋은 옷을 다시 입으면 또 좋을 줄 알고 몸에 맞지 않는 줄은 생각지도 않는다”며 이승만은 세상 변한 줄 모른 채 유교의 구습에 얽매어 신학문을 배척하고 탄압하는 ‘수구꼴통 왕조’의 시대착오를 통박하고 있다.
 
“예수교 외에는 더 좋은 씨도 없고 더 좋은 밭도 없으니.....남의 목숨을 끊어다가 내 목숨을 이으려던 자가 이제 남을 대신하여 고난 받으려는 자 될지니.....사탄을 치는 강한 군사가 많아지고 어린양의 무리를 인도하는 자가  많이 생겨......영원히 영혼의 구원을 함께 얻을지라.”
 
이승만은 1년뒤 쓴 [독립정신]에서 이를 건국정신으로 확장, 강력히 주장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고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한다면, 이 교(敎:예수교의 가르침)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통상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고, 신학문을 힘쓰더라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여, 외교에 힘쓰더라도 다른 나라들과 깊은 정의(情誼)를 맺지 못할 것이며, 국권을 중하게 여기더라도 남들과 참으로 동등한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의리를 숭상하더라도 한결같을 수 없을 것이며, 자유 권리를 중히 하려고 해도 평등한 자유 권리의 방한(防限:한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교(敎)로써 만사의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어야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영국 미국 등 각국과 동등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 ([독립정신] 이승만 지음, 1904. 박기봉 교정, 비봉출판사, 2018)

▲ 미국 유학중 이승만이 [독립정신] 원고를 풀어보고 있다. 1905년 옥중동지 박용만이 원고를 한장한장 꼬아 가방에 숨겨서 미국의 이승만에게 전해준 것이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세계 교류, 자유통상이 국부(國富)임을 깨달아야”
 
‘수출’이라면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즉각 연상하게 된다. 
세계 무역시장이 박정희때 확장된 때문이지만 그 원조가 이승만이었음을 몰랐던 역사의 무지 탓이다.
위정척사 쇄국의 사슬을 끊고 강대국들과 조약을 맺은 조선은 ‘타의에 의한 개방’이었기에 지도층도 국민도 의식구조는 ‘개방’을 모르는 ‘쇄국’ 그대로였다. 산업정책은커녕 경제도 없고 제조업도 없는 원시적 농경사회, ‘국민’ 아닌 왕의 노예 백성 각자가 의식주를 근근이 해결해야 하는 자급자족 풀뿌리 연명상태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때 이승만은 26세때 옥중에서 쓴 논설에서 말한다.
“옛글에 말하기를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라 하였은 즉...(중략)...그때는 세계 각국이 바다에 막혀 내왕을 못하고 각기 한 지방만 지키고 있으매 백성들이 다만 그 땅에서 생기는 곡식만 믿고 살았은 즉...(중략)...지금으로 말할 지경이면 세계만국이 서로 통상이 되었은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상업흥왕함에 달렸으니 천하의 큰 근본을 장사라고 할 수 밖에 없도다.
대저 농사에서 생기는 이익은 한정이 있거니와 장사의 이익은 사람이 내는 것이라 한정이 없는 고로, 지금 영국은 그 나라의 부강함이 천하제일인데, 그 토지인즉 불과 조그만 섬이요, 또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땅이 기름지지 못하여 농사에는 힘을 쓰지 아니하고 전국 백성들이 상업에 종사하여 기교한 물품을 만들어 남의 나라에 가서 금은으로 바꾸어다가 자기 나라를 부요하게 바꾸어 놓고 있으니...(중략)
나라가 점점 빈약하여 백성들이 필경은 지탱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이런고로 지금은 상업을 불가불 천하에 큰 근본이라 할지라.,,(중략)...대저 오늘 날 세계 큰 싸움과 다툼이 모두 이익과 권세에는 장사보다 더 큰 것이 없은즉 당장의 급선무로 아무쪼록 장삿길을 널리 열어서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것보다 몇 천 배나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제국신문] 1901년 4월19일)
이승만은 이 ‘상업-통상 흥왕’이 성공하려면 될수록 많은 나라들과 ‘선한 이웃’이 되어야 통상이 확대되고 이익이 극대화 된다며 외국인들과 친교하고 각국과 교류할 것을 주장한다.
“이웃의 범위가 넓을수록 내가 만든 물건들이 널리 쓰이게 될 것이고 견문과 학식도 더 넓어질 것이다. 이것이 곧 천하만국과 이웃이 되어 문호를 열고 풍속을 고치며 물화(物貨)를 교환하는 이유이다...(중략)...각처가 서로 통하는 것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아 한구석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게 만들려고 기선과 기차, 전보와 우체국이 생겨난 것이다.” ([독립정신] 이승만 지음,1904. 앞의 책)
 
놀랍게도 당시 이승만의 통찰력은 국제사회의 정치 외교 경제를 좌우하는 자유통상의 자본주의 메카니즘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 국가적 이익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 각국이 상업하기 위해 전쟁을 피할 것이므로 평화가 깃들일 것이고, 둘째 나에게 있는 것과 남에게 없는 것을 교환하게 되므로 제조업이 발달하며 이익이 커지며, 셋째 빈곤한 나라가 부자가 되며 앞서나가는 새 문명의 혜택을 보게 되고, 넷째 국제간 상업이 흥하면 새롭게 필요한 ‘일자리’가 늘어나니 인재배양도 저절로 된다.([제국신문] 논설 ‘외국통상비교’-2, 1903.3.13.)
 
한마디로 청년 이승만의 국가관은 자유통상 부국론, 즉 근대 자본주의 도입이다.
“지금 세계상에 부강한 나라들은 밤낮으로 재정의 근원을 확장하야 광산, 어업, 담배제조, 방직공장, 임업, 공원에 동물원 수족원, 곳곳에 벽돌집을 높이 짓고 관립-사립학교, 사통팔당 교통과 전신, 철갑군함과 수뢰포를 많이 만들어 바다에 떠다니며 나라를 지키나니...“
정부도 양반도 백성도 꿈에서 깨어 돈을 벌어 문명부강해지자고 ’자본주의 정신‘을 외쳤다.

▲ 국내서 출판이 불가능했던 [독립정신]은 미국유학중인 이승만에게 전해져 1910년 LA에서 문양목 목사등 동지들이 처음 출간하였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후속판들.(자료사진)

◆“백성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 ...‘계급노예’ 해방 주창
 
“헌법 정치를 채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아니하고 그 긴급함이 이렇듯 절박하지만, 백성들의 수준이 지금 같아서는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중략)...여러 천년을 전해 오면서 병들고 썩은 깃이 속속들이 배어들어 웬만한 학문이나 교육의 힘으로 갑자기 그 근본원인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마땅히 ‘새 교화(敎化)’의 ‘자유(自由)하는 도(道)로써 오랜 악습에 결박당해 있는 민심을 풀어주어야만 비로소 고질의 구습을 깨뜨리고 차차 자신의 생각으로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여 택할 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결박당해 있는 그 마음(정신)을 풀지 못하고 자유하지 못하고 몸만 자유를 얻으려 한다면 이는 결단코 자유로 될 수 없는 일이다.” ([독립정신] 이승만지음,1904. 앞의 책)
 
이승만의 정치 경제 사회사상의 결정체 [독립정신]의 목차를 보면 ’백성의 해방과 교육‘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구상들이 즐비하다.
★백성이 힘써 노력하면 될 것이다.
★백성이 깨이지 못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마음 속에 독립을 굳게 해야.
★자주 권리는 긴요하고 중대하다
★새것과 옛것의 구별
★정치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다.
★자유 권리의 한계.
★미국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
 
이처럼 국민이 아닌 백성(왕의 소유물)을 독립주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몸만 풀어서는 안되고 정신을 독립시켜야 할 진대, 이는 다른 것으로는 안되고 예수교 정신 교육(새 교화)을 통해야만 가능한 일이며, 예수교의 ’자유하는 도“를 체질화해야 진정한 ‘인간 자유’ ‘자유 인간’으로 거듭나는 ‘대한인 해방’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이승만은 확언한다.
 
왜 예수교만이 가능하다고 고집하는 것인가.
투옥직후 ‘개신교 회심’ 뒤 신학공부에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으킨 세계적 혁명 역사와,  감리교창시자 웨슬리의 영국 사회개조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온갖 핍박 속에서도 루터는 결국 개신교를 온전히 세워서 사람마다 자유롭게 성경을 공부하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후 200년간 루터의 개신교가 정치제도를 개혁하기에 이르러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각국의 정치적 대혁명이 일어났고 오늘날 구미각국의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인간 행복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를 근대문명의 시조라 칭함이 과연 합당한 것이며, 그 루터 선생의 능력은 모두 예수의 진리에서 비롯하여 된 것이다.“
 
따라서 공자-맹자의 충효사상만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힘들다”며  ”하나님 앞에 만민은 평등하고 나면서부터 자유를 주셨으니 예수교의 자유정신으로 무장해야어느 지경에 닥치더라도 ‘인간 자유’를 굳게 지켜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오랜 세월 충효사상만 지킨 결과는 1인 왕권독재 뿐이며 “자유없는 백성의 힘으로눈 왕과 양반의 부패무능 횡포를 고칠 수도 없었으므로” 재능도 풍부한 백성의 힘을 국가독립 성장에 합치기 위한 ‘기족정신 교육’과 ‘신성한 노동’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 '노예 백성'을 해방시킨 이승만. 흑인노예를 해방시킨 링컨.ⓒ뉴데일리DB

◆“일하러 가세”---‘무노동’ 양반 문화 청산운동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 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을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승만이 평생 애창한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 명령 따라 열심히 일하자’는 노래다. 즉, 이승만은 ‘일하지 않는 양반’ 문화의 오래된 폐해를 추방하고 싶었다.
“점잖은 사람이 어찌 재물에 눈을 돌리랴‘
”엽전 수효를 헤아리지 못해야 선비요 재상이다“
이러면서 모든 노동일을 외면하고 백성들의 노동력과 생명을 착취하던 계급사회 굴레에 정면 도전한 이승만, 그 역시 아버지 이경선옹은 왕족 족보나 뒤지며 팔도강산 유람이나 다니고 밥벌이는 어머니 삯바느질로 연명하는 생활이었다.
”전국의 인민을 보건대 양반은 1000분의 1도 안되는데 1000분의 999는 다 양반들을 위해 살아야하니, 실로 국가는 총명하고 영특한 백성들을 모두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담배만 피우고 앉아있구나“ ([독립정신] 이승만 지음, 앞의 책)
양반사회의 무노동 풍조는 백성들에게도 전염병처럼 번져 ”한국 남자들은 여성들만 일시키고 놀고 먹는다“는 선교사들의 기록이 수두룩하다.
 
[제국신문]의 이승만 논설들은 대부분 ’기독교 교육‘ ’힘써 일하자‘ ’미신타파‘ ’위생문제‘ ’인신매매결혼 청산‘ 등 ’국민 의식 개혁에 집중된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논설도 썼다. ([제국신문] ’세계에 큰 명일‘ 1902. 12.24)
 
’하나님께 무한 봉사하는 노동관‘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를 연상시킨다. 건국후 1951년 자유당을 창설할 때 이승만은 당명을 ’노동자 농민당‘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예수의 뒤를 따라 목숨 바쳐“...’자유민권 국민국가‘ 만들기
 
결론적으로 이승만이 구상하는 독립국가 그림은 ”기독교가 나라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란 말에 집약된다. 그것은 예수교로 교화된 국민이 만들어가는 자유민권 근대 국민국가, 곧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국인 정체성을 구현하는 한국 내셔널리즘이었다.
 
’미국 백성이 누리는 권리‘ 논설을 5회나 [제국신문]에 연재하며, ”이런 나라는 참 즐겁고 편안하야 곧 인간의 극락국이라 할지라“ 미국 국민들을 본받아 독립선언 독립투쟁을 해야 할 것이라 했다. 그것은 유럽에서 핍박 받아 아메리카로 건너온 ’청교도‘의 미국 독립 혁명정신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로 기독교 국가들은 모두 노예가 사라졌는데 한국과 청국만 남았다며, 한국이 현대적 국민국가로 나아가는데 ”가장 방해되는 나라는 청국“이라고 낙인찍었다.
[독립정신]에서 강조하는 ”백성을 위해 백성의 힘으로 영원한 백성의 나라”를 세우자는 말은 미국 링컨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1863.11.19.)--’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의 이승만 버전이다. 
그는 미국 유학시 미국인들로부터 미국역사를 미국사람보다 더 잘 안다는 칭찬을 수 없이 들을 만큼 자기머리 메모리 서버에 ’미국의 모든 것‘을 20세부터 저장하고 있었다.

▲ 현재 국내 판매중인 [독립정신] 표지들. 왼쪽은 김충남 교수와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총장이 간추린 현대어판. 오른쪽은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이 주석을 붙여 발행한 전문판. ⓒ뉴데일리DB

[독립정신]엔 '후록'이 있다. 국민전체의 행동강령이자 건국정신이다.
◆[독립정신] 후록—독립주의 실천 6대 강령
★세계와 교류, 자유통상
★법률의 현대화, 신학문 전면 도입
★같은 부류와 진실한 외교, 국제법 준수
★국권(주권) 엄수, 국가이익 추구, 태극기 존중
★개인과 국가간 의리 존중, 공공의 용기 필수
★나와 남의 자유 권리를 생명 같이.
 
이와 같은 실천 강령을 온전히 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각자 골수에 박혀 “예수가 아닌 그 누구도 빼낼 수 없어야” 가능하고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이승만은 자신과 백성 모두에게 다짐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죄 지은 인류에게 구원을 열어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써...(중략)...다 용서를 얻고 복을 받게 하셨으니 순전히 사랑하심이 아니면 어찌 몸을 버리기까지 하셨겠는가...(중략)....이 은혜는 다른 것으로 갚을 수는 없고 다만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일하는 것 뿐이다. 천하에 의롭고 사랑하고 어진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에 하나님의 감사한 은혜를 깨달아 착한 일을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므로 서로 사랑하고 돕는 가운데 이 잔인하고 포악한 인간 세상이 곧 천국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의 뒤를 따라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이 한마디에 이승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나라 ’독립 건국‘을 위한 불굴의 신념과 영적 결의을 담아 스스로 하나님과 자신에게 맹서를 했던 것이다. 개신교가 말하는 ’십자가 신앙‘ 또는 ’순교자 신앙‘이 이승만의 그것 아닐까.
 
[독립정신]을 읽어본 국내학자들은 거기에서 서구 계몽주의자들이나 근현대 정치, 철학, 경제학, 종교학 대가들의 저서에 나오는 대목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고 많이 놀랐다고 말한다. 
예컨대, 루소, 홉스의 국가론, 아담 스미스 국부론, 루터와 칼뱅의 소명론, 칸트의 영구평화론, 막스 베버의 청교도 윤리론, 토인비의 문명론, 토크빌의 민주주의론,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등등이다. 당시 감옥에서 그런 학설들을 접했을 리 없는 20대 이승만의 글들에서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읽었다면 기록광 이승만이 독서목록에 남겼을 터이다.
 
이승만의 오랜 자문교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의 공로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인 토마스 페인(Thomas Paine)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저서들이 미국 독립에 기여한 것과 같다“고 평가한다.([신화속의 인물: The Man Behind the Myth] 1960)
 
수천년 전제주의 대륙문명에 신음하던 노예를 해방시켜 역사상 처음 자유민주공화주의 해양문명의 바다로 배를 띄운 대한민국의 선장 이승만! 
망국의 지옥 한성감옥은 그래서 오늘의 한국인을 탄생 시켜 준 은혜의 요람이 아니라 할 것인가. 이승만은 자기맹서에 충실하게 따라 [독립정신]에 쓴 대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독립정신]에 그린대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기 때문이다.
분단국가? 한반도 분단 책임은 스탈린과 김구(金九)에게 물어보라. 

이승만 건국사(9) 미국유학: 7대독자 잃고....세계 신기록 세우다

5년4개월 만에 미국 명문 3개대학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학위 취득.

이승만의 미국 유학기록은 한국은 물론 아마도 세계에서 찾기 힘든 신기록 아닐까.
미국인 천재청년도 아니고 배재학당 2년 학습이 전부인 한국인 30세 유부남이 어떻게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가. 이승만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과연 ”이승만은 세계사에 드문 희대의 인물“--[대한민국의 기원]을 쓴 이정식 교수가 되풀이 하는 말이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에서 ”한국에 군계일학(群鷄一鶴)이오, 미국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미국 유학계획, 한성감옥서 다 짰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언제 결정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유학을 결심했다는 설이 많지만 필자는 ‘한성감옥에서 이미 스스로 결심하고 준비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남긴 수많은 옥중기록과 논설 중에 ‘미국흥학신법’(美國興學新法) 즉 ‘미국의 교육을 일으킨 신법’이라 해제하여 쓴 긴 논설이 있다. 이승만은 글머리에 1872년 명치유식직후 주미일본공사가 미국정부에 부탁하여 받은 것으로 미국정부의 교육부에서 채록한 자료라면서 ‘미국의 교육진흥에 관한 새 제도’라는 부제도 붙여놓았다.
“예수교로 백성 교육”을 주창한 청년 이승만이 기독교 국가 미국의 교육제도를 알고 싶어 이 자료를 구해 들여와 읽고 해설까지 써 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 글에 미국식 교육제도를 설명하면서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 미국 동부에 산재한 이른바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교들도 소개한다. 특히 미국 건국 전 1636년에 청교도들이 세워 가장 오래된 하버드 대학은 하버드 개인이 거금을 투자해 세계 일류로 육성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은 이때 유학할 대학들을 다 골라 놓았을 터이다.
 
이 글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결정적 메모가 남아있다.
<유학생이 생계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거리. Works of Students for Earning Livehood>가 그것이다. 잔디깎기, 나무 톱질하기, 우유배달, 식당 웨이터, 상품판매, 급사, 타자, 신문 기고, 야간 개인교수 등등 21개 일거리를 적어놓았다.
유학 결심이 없었다면 감옥에서 왜 이런 메모까지 남겼을까. 이승만은 이때 스스로 생계를 해결할 고학을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선택한 ‘고학 알바’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독립운동’이다. 공부하며 틈틈이 교회들과 YMCA등을 순회하며
미국인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연하고 거기서 나온 성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 뒷날 기록들은 눈물겹다. 볼티모어 장로교회에서 9달러, 워싱턴 제일침례교회에서 7달러40센트...등등. 유학생 이승만은 가계부 적듯이 입출금을 꼼꼼이 적어 남겼다. 그는 유학기간 140여회의 순회강연을 펼친다.
만주나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인을 상대로 ‘독립 강연’ 캠페인을 장기간 벌였다는 기록이 과연 있었던가?
 
감옥서 석방되자 도미 준비...추천서 19통 챙겨
 
 
1904년 8월7일 마침내 5년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은 [제국신문] 주필 일을 하면서 미국 갈 채비를 서두른다.
첫째, 선교사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요청한다. 세례교인으로 미국에 가야 기독교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장로교 게일은 이승만에게 워싱턴 커버넌트 감리교회 목사 햄린((Lewis T. Hamlin)에게 세례 받으라며 추선서등 소개장 3통을 써주었다. 이 밖에도 이승만은 언더우드 7통, 벙커 등 도합 19통의 추천서를 받았다. 이 추천서들 사본이 이승만의 일기장에 첨부되어 지금도 남아있다.
 
둘째, 이승만은 민영환-한규설을 만나 미국에 정부대표로 가도록 건의한다. 러일전쟁 종전협상을 서두르는 미국에게 ‘대한독립’을 도와달라고 설득하라는 주문이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제국신문]에 논설을 쓰던 이승만은 그 논설 때문에 일본 헌병사령부가 신문을 정간시켰고 “전쟁에서 이겨 한국을 손아귀에 넣자 그 생명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르렀으니” 조미수호조약에 의거 미국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영환은 이승만을 주미공사로 임명하겠다며 고종을 만났다(이승만 영문자서전 초록: 출간안됨). 결과는 “영어 잘하는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 즈음 어느 날 밤 이승만의 집에 궁녀가 나타나 “폐하께서 단독 면담을 원하시니 입궐하자”고 전하였다. 이승만은 쌓였던 증오감이 북받쳐 즉석에서 거절한다. “4,200년 왕통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많은 임금”으로 경멸하던 이승만이다. “금전과 밀서를 주려고 불렀겠지만 황제면담을 거부한 것을 후회해본 적 없다”고 했다. ([청년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 1904년 11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청계천 모전교 근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연세대이승만연구원

◆마지막 가족사진! 
이 사진은 이승만이 도미하기 직전 기념으로 서울시내 사진관에서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이승만은 양복차림, 그 옆에 서있는 오른쪽 여성이 조강지처 박씨 부인이다. 1890년 한동네  15세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아들 봉수(모자 쓴 어린이)를 낳았다. 6대독자가 낳은 7대독자는 미국유학중 미국에 데려왔다가 전염병에 걸려 숨진다. 그 옆에 앉아있는 노인이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 공, 맨 왼쪽이 이승만의 맏누님(우태명씨 부인)이고 봉수 뒤에 서 있는 소년은 누님 아들이다. 이승만 어머니 김씨 부인은 1896년 8월 갑자기 별세하였다. 

▲ 1902년 12월 최초의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 121명을 싣고 호놀루루로 간 미국기선 갤릭호(하와이 이민사 박물관)

◆이민선 3등 객실...‘자유의 항해' 스타트
 
1904년 11월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다음날 제물포에서 미국선박 오하이오 호(S.S. Ohio)에 올라 미국을 향해 떠난다. 품속엔 난생처음 해외여행 여권과 여러사람이 준 여비, 그리고 아메리카 신천지 유학을 도와줄 추천서 19통이 들어있다.
1902년부터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들을 실어날으는 선박 최하급 선실에 자리 잡은 이승만은 이 날부터 일기를 쓴다. 항해일지처럼 ‘Log Book’이라 이름붙인 일기는 40여년 지나 해방후 귀국할 때까지 쓰는 ‘독립운동 항해 기록이다.
 ‘Log Book of S.R’은 2015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김영섭 원장(연세대 교수)이 영문과 국문 영인본과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부산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항에 도착, 일본 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청중들이 거둬주는 여비를 받았다. 이 돈은 뒷날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교회 순회강연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고학생활의 첫 성금이 된다. 
 
고베에서 사이베리아 호(S.S. Siberia)로 바꿔타고 하와이 호놀루루에 내린 것은 11월29일 아침이다. 긴 항해동안 이승만은 [제국신문]에 기행문과 논설을 써보내 게재한다.
배재학당 동문 윤병구(尹炳求) 목사 등 교민200여명이 한인교회에서 열어준 환영회에서 이승만은 장장 4시간 열변을 토하여 한많은 이민 노동자들을 감동시켰다. 자신도 울고 청중도 울었다.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이승만보다 1년 먼저 미국에 온 안창호(安昌浩)는 만나지 못했고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여 1주일을 보낸뒤 대륙횡단 산타페(Santa Fe)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마침내 목적지 워싱턴에 도착한 날이 12월31일 그해 마지막날 저녁7시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의 작은 호텔에 여장을 푼 이승만은 그길로 햄린목사를 찾아갔다.
게일 선교사의 간곡한 추천서를 읽은 햄린 목사로부터 4월23일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다.

▲ 조지 워싱턴대학 유학생 이승만. 오른쪽은 대학내YMCA 강연회 연사로 뽑힌 다른 학생들과 이승만(맨아래) 홍보전단.ⓒ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한국 천재“ 칭찬받으며 조지 워싱턴 대학교 3학년 편입
 
걱정하던 대학입학은 뜻 밖에도 순조로웠다. 2월에 워싱턴 사교계의 VIP 햄린 목사는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니덤(Charles W. Needham) 총장에게 소개한다. 면접 결과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다. 배재 대학 수준이 이렇게 높으냐“며 대뜸 3학년에 편입시켜 주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장차 귀국하여 교역자가 되고 싶다하니 등록금 전액에 상당한 교회 장학금까지 마련해 주었다. 유학기간이 짧아지고 학비 걱정이 가벼워졌다.

▲ 1905년 8월4일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예복을 입은 유학생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첫 대미 외교 – T.루즈벨트 대통령 만나 ‘독립’ 호소
 
30세 늦깎이 한국 유학생이 강대국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 민간인으론 최초의 일 –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외교를 잘해야 나라를 지킨다“고 실천강령에서 주장한 이승만의 첫 외교무대, 그것도 미국 하원의원과 국무장관을 만나고 대통령까지 만나는 최상급 외교 시험대이다. 이승만은 쓰라린 시험을 맛본다.
 
대학입학 문제와 함께 중요한 사명은 미국에 대한 ‘독립지원 요청’이다. 이승만은 서둘러 친한파 하원의원 딘스 모어(Hugh A. Dinsmore)를 만나 국무장관 헤이(John M. Hay) 면담 주선을 부탁하였고, 2월20일 딘스 모어 의원과 함께 헤이 장관을 30분 면담한다. 헤이는 조미수호조약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7월1일 돌연 사망하였다. 
낙담하던 차에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일본 방문길에 호놀루루에 들렀다. 
윤병구와 교민들은 8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열린다고 발표된 러일전쟁 강화회의에 이승만과 윤병구를 파견하기로 정하고 미국대통령에게 제출할 탄원서를 만들었다.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과 탄원서를 가지고 윤병구는 워싱턴 이승만을 찾아가 백악관에 대통령 면담신청을 한다. 
의외로 금방 정해진 면담은 1905년 8월4일 오후 3시30분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 여름 백악관(Summer Whitehouse), 두 사람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를 직접 만났다.
외교관 차림의 이승만은 탄원서를 제출하며 ”각하께서 언제든지 기회 있는대로 조미수호조약에 입각하며 불쌍한 나라를 위험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고 거듭 간청하였다. 
루즈벨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중대한 사안이니 이 문서를 공식루트를 통해 다시 보내주면 강화회의에 올리겠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기대이상의 반응에 접한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 한국공사관 대리공사 김윤정을 찾아갔다. 이게 웬일인가. 어이없게도 김윤정은 ”본국 훈령이 없어서“라며 필요한 절차를 거부한다. 분노한 이승만은 온갖 설득과 협박까지 해봤으나 맹수같은 흑인 경비명이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뿐인가. 이승만 자신도 국제문제를 잘 안다 했지만 그때 ‘루즈벨트의 연막작전’에 속아 넘어간 것을 어찌 알았으랴. 
루즈벨트는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장관이 가쓰라 일본총리와 ‘밀약’을 맺은(7.27) 뒤에야 대한제국의 ‘특사’를 형식적으로 만나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장악과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양해한 ‘태프트-가쓰라 메모’는 1924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덴네트(Tyler Dennett)가 발굴해낼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이승만은 이때의 ‘미국 배신’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 용미(用美) 전술에 기막힌 무기로 활용한다. 특히 6.25 휴전 협상때 한미동맹 요구를 기피하는 미국의 목덜미에 이 배신의 칼을 꽂아 굴복시킨 일은 유명하다.
 
★9월5일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제2조는 이렇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 및 감리 조치를 취하는데 대하여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아니할 것을 약정한다’
이미 8월12일 체결된 2차 영일동맹협약 제3조에도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도 감리 및 보호 조치를 인정한다고 명문화 되었다. 이로써 양국의 양해를 얻은 일본은 11월18일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행한다.

▲ 이승만을 줄곧 도와준 민영환과 한규설.ⓒ뉴데일리DB

◆민영환의 자결...”우리집은 누가 돌봐주나“
 
11월18일, 고종이 끝내 일본의 압력에 굴복,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유일하게 반대하던 의정대신 한규설은 파면되고 감옥에 갇힌다.
반대 상소를 계속하던 민영환도 끌어내자 이틀후 그는 자결하였다.
11월30일 민영환 순국 소식을 접한 이승만의 충격은 남다른 것이었다.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해주고 감옥살이 할 때 자기집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었으며 석방운동에 앞장섰고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면서 ‘집 걱정은 말라’던 두 사람의 지원자 민영환과 한규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이승만은 국가존망과 가족 생계가 아득하다. 
이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영문 메모가 눈을 끈다. ‘Min Young Whan is dead. Who will Support our home?’
민영환이 죽었으니 우리 집은 누가 지원해주나?
 
그래서일까. 이승만의 ‘강연 알바‘는 더욱 많아지고 바빠졌다. 그의 연설이 인기를 끌자  YMCA등 곳곳에서 초청도 많아졌다. 그해 12월엔 뉴욕과 메릴랜드까지 9회나 뛰어다녔고 이듬해 1월엔 8회, 아들 태산(봉수는 아명)이 숨진 순간에도 교회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 조지워싱턴대학때 뉴잉글랜드의 국제기독학생모임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벌어진 일
 
조지 워싱턴 대학때 1906년 6월말, 이승만은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만국 기독학생 공회‘에 대학대표로 참석했다. 한국인으론 처음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가 열렸다. 각국 깃발이 걸린 홀에는 남녀 3,000여멍 참가자들이 각기 제나라 의상을 입고 축하연설을 들으며 미국국가와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국가별로 순서에 따라 일어나 경축하는 차례였다. 
일본 학생 4명이 ’일본 만세‘를 부르고 중국학생 10여명이 일어나 국가와 만세를 불렀다.
 
그때 이승만이 벌떡 일어나더니 강단에 올라가 주최자에게 말했다.
”나는 한국 학생인데 혼자 경축하겠습니다.“
주최자는 흔쾌히 그러라며 장내에 알렸다.
이승만은 무대에 올라 힘차게 ’독립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대한제국 만만세“를 세 번 부르고 ”아메리카 만만세“를 세 번 불렀다.
청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지르며 이승만에게 몰려와 악수를 청하였다.
 
이날 행사를 이승만은 편지로 써서 서울의 [제국신문]에 보내어 3일 연속 크게 보도되었다. 이어 [대한매일신보]도 전문을 전재하여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다.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손세일 지음, 조선뉴스프레스. 2015)

▲ 1905년 미국에 온 아들 태산을 돌봐줄 기독교가정을 찾는 워싱턴 타임즈 신문기사. 오른쪽은 디프테리아로 숨진 태산의 묘비.(필라델피아 공원묘지에서 필자 찍음)ⓒ뉴데일리DB

◆독립운동 강연다니다가 7대독자를 잃다
 
서울의 박씨 부인은 아들 봉수를 박용만 편에 미국으로 보냈다. 나중에 자신도 미국에 갈 생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대학편입 두 달 만에 아들까지 돌봐야 했던 고학생 이승만, 더구나 그는 대학수업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몰두해 있었다. 교회들과 기독교 단체 등 어느 모임이든지 달려가 일본의 압제에 몰린 한국의 현실과 역사를 알리는 강연을 진행하고 있던 이승만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이자 강연장 청중의 성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이었다. 
 
생각다 못한 이승만은 친분있는 신문기자에게 부탁하여 [워싱턴 타임즈]에 아들을 맡아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는 기사까지 낸다. 그날로 희망자가 나타나 아들 태산을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보이드 부인 집에 맡겼다. 그러나 그 부인은 태산을 자기집에 두지 않고 시립아동보호소에 보냈다.
 거기서 태산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숨졌던 것이다.
영어를 몰라 언어장애 등 이상증상을 보이고 우울증까지 겹친 소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흘을 앓다가 눈을 감았다. 
뒤늦게 전보를 받고 달려온 아버지 이승만은 ‘방역법’에 막혀 아들 시신도 보지 못했다. 그는 일기에 ‘슬프다’ 딱 한줄만 써놓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아들의 죽음과정을 적어 남겼다.([Log Book of S.R.] 이승만 일기)
나라를 잃고 후원자 민영환을 잃고 유일한 혈육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승만은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그의 공부와 독립운동 양면활동은 더욱 치열해진다.
 
필자도 필라델피아에 묻힌 태산의 묘를 참배한 적이 있다. 
조그만 묘비엔 ‘RHEE TAISANDH 1899~1906’이라 적혀있어 태산이 7살에 숨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당시 시립아동보호소의 착각으로 여겨진다.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열네살’로 말할 뿐더러 그가 배재학당에 들어갈 때 아들 나이가 세 살이었다고 회고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6대독자 이승만은 7대독자 아들을 어이없이 잃었고 다시는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
58살에 만난 30대 프란체스카 부인에게 이승만은 농반진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미(호칭)는 다 좋은데 아이를 못 가지는 게 탈이야.“ 

▲ 이승만이 미국유학 시절 자료를 보관했던 하버드 앨범 표지, 하버드 대학원생 이승만이 머물던 주택.ⓒ연세대이승만연구원

◆”나는 2년내 하버드 박사 돼야, 입학시켜 달라“ 
 
이런 무모한 도전이 가능한가. 한성감옥에서 부터 하버드를 꿈꾸던 유학스케줄을 고집한 이승만 다운 용기였다. 미국 일류대학생도 힘든 것을 30대 동양남자가? 
 
이승만은 스승 서재필에게 먼저 편지를 보낸다.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박사를 하려는데 도움 말씀을 달라는 요청이다.
서재필의 응답은 뜻밖이었다.
"석사만 하고 귀국하라. 박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왜 그랬을까? 스승이 시샘하나? 
미국시민이 되어 의학박사가 된 서재필은 미국여성과 결혼, 그때 필라델피아에서 문방구를 경영하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B.A.) 취득을 앞둔 1907년 초, 이승만은 하버드 인문대학원장에게 단호한 편지를 쓴다.
”나는 동양학을 다년간 연마한 학자인데 하버드대에서 2년 내 박사학위를 얻게 해달라. 한국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조지 워싱턴대학에서는 2년 내 박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의 우수한 학생도 하버드 인문학 분야 박사를 따려면 최소 5년이 상식인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승만은 목표를 향해 정면돌파하는 신념과 용기를 여기서도 보여주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하버드 대학원은 논의 끝에 일단 ‘2년 시한 없는 입학’을 허가할 테니 석사과정부터 완수하라고 회답한다. 이승만은 두말없이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하자마자 보스턴으로 달려갔다.
배재학당 입학순간 발견한 ‘자유의 신대륙’ 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요람 보스턴, 거기서 장차 ‘대한독립의 꿈’을 연마하며, 하버드 출신 미국 지도층과 대등한 대화와 협상력을 키울 수 있는 본거지 아닌가. 1907년 가을학기부터 1908년 봄까지 이승만은 ‘청교도의 자유 독립역사’를 호흡하면서 강연 순회도 계속하였다. 
 
그때,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난데없는 뉴스가 터진다.
애국열사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이다.
스티븐스는 일본이 고용한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인데 ”일본 지배가 한국에 유익“ 운운 막말 선전을 계속하자 동포들이 격분했다. 3월23일 아침 기차역에서 그는 쓰러지고 만다.
문제는 검거된 두 사람의 재판 변론을 영어 잘하는 이승만이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티븐스 피격사전이 터지자 친일 분위기 미국 언론은 친일적 보도를 계속한다.
따라서 캘리포니아는 물론, 동부지역도 한국인 기피 현상이 생겨나고 하버드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의 역사학 지도교수는 면담을 피할뿐더러 과제논문들 심사도 않고 우편으로 돌려보내는 등 지식인들마저 따돌림 판이었다. 하버드냐, 변론이냐, 이승만의 고민은 깊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첫째, 평소 무장투쟁은 이대로는 무익하다고 주장해온 것, 둘째 기독교신앙에서 폭력 살인을 거부한다는 것, 셋째 적국 일본의 선전꺼리만 되며 본국 동포를 탄압하는 빌미만 준다는 것, 넷째 지금은 실력양성이 먼저요 무장투쟁은 국제환경이 조성되면 미국과 함께 총력전을 벌이자는 것 등이었다. 
특히 하버드대 석사 공부를 계속해야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가장 큰 이유임은 물론이다.
 
이래저래 하버드대 박사까지는 이런 분위기에서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보스턴을 떠나 뉴욕으로 갔다.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기숙사에 머물면서 2년내 박사학위를 줄 다른 대학, 컬럼비아대학교나 시카고 대학을 물색하며 입학수속을 진행한다.
그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서 옥중 이승만을 도왔던 선교사 홀(Ernest F.Hall) 목사와 우연히 마주친 일이다..
홀 목사는 대뜸 말했다. ”주저 말고 당장 프린스턴대로 가자“며 기차표부터 끊는 것이었다.
프린스턴대학과 프린스턴 신학원(Prinston Thelogical Seminary)을 나온 홀목사는 ”2년내 박사 가능할 것“이라며 이승만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 하버드 대학원 재학시절 급우들과 국제법 지도교수 윌슨(앞줄 가운데)ⓒ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프린스턴대 대학원생 이승만이 기숙사 Hodge Hall 숙소에 앉아있다. 책상에 테니스 라켓이 보인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프린스턴大서 2년만에 박사...최초의 국제법 학자
 
프린스턴대 웨스트 대학원장은 이승만에게 ”2년내 박사과정을 끝낼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약속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원 기숙사에서 무료로 기숙하라는 혜택까지 베풀었다.
이승만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에서 외교학과 국제법을 전공하며 미국사, 철학사 등을 공부하고 신학교의 특별학생으로 1년간 신학도 연구하였다. 
당시 대학총장인 윌슨(Woodrow Wilson), 대학원장 웨스트(Andrew West), 신학교 학장 어드만(Charles Erdman) 등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이승만은 엘리엇(Edward Elliot) 교수의 지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 
제목은 ’미국의 힘에 영향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즉, 오늘날의 국제법상의 전시중립(戰時中立), 교역의 중립을 다룬 것인데, 미국의 독립 1776년 이전과 그후 1872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발전한 전시 무역의 중립에 미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검증해본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기간 크게 발전한 통상의 자유는 인류에 대한 큰 축복이며, 그 중심에 ”미국의 공헌이 절대적”이라고 결론짓는다. 영국등 유럽 해양강국의 반격를 제압하며 무역의 중립성을 역사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것은 “미국의 힘“이었으므로 ”아메리카 만세“라는 말로 논문을 끝맺는다. 
 
이승만이 당시 독립분야도 아닌 국제법과 평소 주장하던 ‘자유통상 부국론’과 연결시켜 미국100년사에 걸친 해양경쟁 국제관계를 연구한 목적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이승만의 미국유학 목적의 하나라고 추정한다.
[독립정신]에서 명백히 밝힌 ‘미국과 동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연대가 절대필요하다는 지정학적 인식에서 지정학적 접근법으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현대적 버전을 만들려는 이승만의 ‘독립유지 전략’이 그 동기라고 본다.
다시 말해 한미동맹 구축을 향한 출발점이 ‘국제정치와 국제법적 미국 탐구’ 논문인 것이다.
그의 유명한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 전략의 사전 점검과 동력을 생산 축적하는 여정이 미국 유학이었다.
이 논문은 이승만의 졸업2년뒤 1912년 1월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공해상의 중립문제가 대두하자 이 단행본에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어 
”당시 나는 중립교역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되었다“고 이승만이 기록할 정도였다.(이승만 자서전 초록)
 
★하버드 대학원 석사학위(M.A.)는 1910년 2월23일 취득한다. 프린스턴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이승만은 석사학위 취득을 요청하였고, 하버드 대학원은 여름방학 기간 한과목을 더 수강하도록 하여 미국사 B학점을 받음으로써 석사를 수여하였다.

▲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과 프린스턴 대학서 출판한 박사논문 단행본.ⓒ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을 총애한 윌슨 총장은 집으로 데려가 가족만찬을 함께 즐기며 딸의 피아노 반주도 들려주었다. 윌슨은 주위 사람들에겐 ”이 사람은 미래 한국 독립의 구원자”(the future redeemer of Korean independence)라 소개하며 이승만과 한국독립문제와 미국 정책등 토론도 벌이곤 하였다. .
프린스턴 대학총장으로서 마지막 졸업식은 1910년 6월14일, 윌슨과 대학원장 웨스트는 이승만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어깨에 전통적인 후드를 걸어주며 축하의 박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윌슨은 직후 프린스턴 대학을 떠나 그해 뉴저지 주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1912년엔 2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승만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도 참관한다.
윌슨의 세 딸 중에 둘째 제시(Jessie Wilson)가 이승만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하며, 자신의  결혼식땐 하와이에 망명중인 이승만에게 청첩장도 보내 화제가 되었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면사포를 쓴 여인이 제시,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윌슨 대통령과 윌슨 여사.(1913년 11월23일 제시 결혼식 기념사진).
 
 

이승만 건국사(10) 귀국 첫 강의 “임금이 없어져 시원하다”

▲ 미국유학 6년만에 귀국할때 이승만이 탄 여객선 발틱호. 영문메모는 이승만 친필.ⓒ연세대이승만연구원

5년새 고종 부자가 일본에 내준 나라에 돌아오다
 
“나의 준비기간은 끝났는데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내가 가서 일해야 할 한국은 이제 나의 나라가 아닌 것을...”  
1910년 6월 프린스턴대학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이 남긴 소회다.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던 해, 그토록 경멸 증오했던 황제 고종의 을사조약으로 망해버린 조국은 5년 지나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서 박사 받은 두 달 만에 8월 29일 순종이 종지부를 찍는다. “나라를 일본 천황폐하께 이양하니 소란 떨지 말고 복종하라”는 항복 선언, 총 한방 쏘지 않고 자기 스스로 500년 왕국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일본의 뇌물 받고 국권을 넘긴 고종 ([매국노 고종] 박종인 지음, 2020), 그 아들 순종의 합방조약 내용은 ’나라와 백성을 일본에 주고 왕실은 일본 천황가의 식객이 되어 일본 돈으로 호사를 누린다‘는 약속이 전부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명문대 박사 이승만에게 취업의 길은 많았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직도 가능하지만 초지일관 조국에 돌아가야 할 이승만이다. 
그의 ’알바‘가 독립운동이었듯이 이제 ’준비된 독립운동가‘는 고종이 일본에 내준 나라를 다시 찾으러 나선다.
 
서울에선 언더우드가 기독교 대학을 설립한다며 교수직을 제의하고, 게일 선교사는 서울 YMCA서 일하자고 했다. 뉴욕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ohn R. Mott) 박사를 만난 이승만은 모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그 뜻을 이렇게 말한다.
“서양 문명의 모든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음을 한국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전공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싶다. 일본의 전체주의 치하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언더우드에게 보낸 편지 일부).
 
드디어 이승만은 6년만에 유학 목표를 달성하고 미국을 떠난다. 
간단한 짐은 대부분 책과 자료들, 평생 사용할 영문 타이프라이터와 순회강연 때 타던 자전거도 꾸렸다. 
윌슨 총장 가족 등 친지들과 작별한 이승만은 한일합병 닷새 뒤 9월3일, 뉴욕 항에서 발틱 호(S.S. Baltic)를 타고 영국 리버풀로 향한다. 언제 다시 해외여행할지 모르므로 유럽을 둘러본다.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경찰의 입국심사를 받으며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실감”하였고 계속되는 일경의 심문에 응하는 동포들을 보며 적개심을 누르기 힘들었다. ([신화속의 인물] 올리버 지음).
 
제물포를 떠난 지 5년11개월, 서울 ’남대문역‘에 10월10일 오후 8시쯤 내리자 아버지 이경선 옹이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나오지 않았다.

▲ 1910년 서울 종로 YMCA 건물앞 이승만과 성경연구반 학생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젊은이들의 ’우상‘...YMCA 교장...Wonderful 연발하는 ’이굉장‘
 
옥중동지들이 다시 만났다. 특히 평생 멘토이자 YMCA를 이끌던 이상재(李商在)는 학감(學監=교장) 이승만을 ’한국인 총무‘(Chief Korean Secretary)로 기용되도록 적극 밀었다고 한다.  미국인 총무 질레트와 동급이 되어 국제YMCA ’보호망‘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서울 YMCA는 애국청년 지사들의 집결지, 제2의 독립협회처럼 윤치호, 이상재, 김린, 김일선, 김규식 등 옛 멤버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유급직원만 83명이나 되었다.
명성 높은 미국 박사 이승만이 가담한 서울YMCA는 미국, 유럽, 일본 YMCA와 유대를 강화하여 일본 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국제 기독교 조직으로 재탄생하였다.
 
일찍이 ’만민공동회의 스타’가 미국 박사로 금의환향하니 이승만의 명성은 전국의 관심 집중 그대로 첫 강연부터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강당을 꽉 메운 첫 날 이승만은 ’폭탄 발언‘으로 귀국 제1성을 터트린다.
“오랜만에 귀국해 보니 시원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임금이 없어져 시원하고, 양반이 없어져 시원하고 상투가 없어져 시원하다”
나라가 없어진지 두 달도 안되는 상황, 왕당파의 시비가 일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이처럼 확고한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어 YMCA 교장을 맡은 이승만은 왕정복고 세력에 분명한  선을 긋고, 꿈에 그리던 기독교적 자유민주 국민 교육에 돌입한 것이다.  
이승만은 계획대로 우선 ’연경반‘(硏經班:Bible Class)을 조직하여 성경강의에 집중하고 국독립운동사와 민주정치사를 강의하며 배재학당시절 학생회 ’협성회‘ 토론회서 그랬듯이 토요일마다 YMCA연합토론회를 빠짐없이 열어 의식화 정신교육을 심화시켜 나갔다.
 
모임마다 수 백 명씩 몰린 학생들에겐 자신들의 ’우상‘ 이승만의 행동 하나하나가 화제였다.
모든 공부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냈으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영어로 혼자 기도하는 ’이승만 박사님‘의 신기한 모습들, 게다가 풍부한 유머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강의였다. 
학생들이 조금만 잘해도 “원더풀”을 연발하고 중요한 대목마다 “굉장해. 정말 굉장해” 강조하여 ’이굉장‘이란 별명도 생겨났다. 설득력이 강한 연설은 마치 부흥목사와 같이 열기가 뜨거웠다고 제자들이 증언한다. 이때 수강했던 임병직(林炳稷), 허정(許政), 이원순(李元淳), 정구영(鄭求瑛) 등의 회상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망명 독립운동과 건국과 국정의 동지들이 된다.

▲ 복당구면(福堂舊面) 기념사진. 복당구면이란 한성감옥서 기독교로 개종한 옥중동지들을 다시 만났다는 뜻. 왼쪽부터 김정식,안국선, 이상재, 이원긍, 김린, 이승만.ⓒ독립기념관

★이승만은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집을 뛰쳐나온다.
당시 집은 동대문밖 창신동 낙산 성벽아래 법륜사(法輪寺) 근처, 부인 박씨는 채소를 가꾸고 복숭아 밭의 복숭아를 따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왔다고 했다. 문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돌이길 수 없는 감정싸움, 밤마다 이승만은 아버지와 아내가 털어놓는 ’6년간의 이야기‘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아버지는 7대독자 태산이를 며느리가 제멋대로 미국에 보내 죽었으니 대가 끊겼다며 통곡하였다. “네가 저년을 여편네로 여긴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되풀이하는가 하면, 아내는 아내대로 괄괄한 성격이다.
견디다 못해 가출한 이승만은 YMCA 3층 다락방에서 혼자 기거한다. 미국 자취생활에 단련된지라 생홀아비 같지 않게 항상 옷차림에 신경을 써서 ’핸섬한 고품격 신사‘로 학생들의 선망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 YMCA성경반 1910년 성탄절 행사.ⓒ연세대이승만연구원

◆기차 타고...배 타고...나귀 타고...걷고 걸어 1천리
 
초반 6개월쯤 YMCA서 교육에 몰입했던 이승만은 전국 순례 길에 나선다.
당시 뜨겁던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다. 이미 미국 유학에서 미국의 구령운동에 참여했던 이승만은 1911년 여름 YMCA협동총무 브로크만(Frank M. Brockman)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와 강연을 강행한다.
“기차를 타고 1,418 마일, 배를 타고 550마일, 말 또는 나귀를 타고 265마일, 우마차 타고 50마일, 걸어서 7마일, 인력거 타고 2마일 등 도합 2,300마일...” 3천7백㎞ 약 1천리 길을 누빈 교통수단까지 시시콜콜 적어놓았다. ([이상재 평전] 전택부, 범우사, 1985)
이때 전남에서 평안도까지 33회 집회에 7,535명의 학생이 참여하였고 이승만은 수십개 기독교 학교에 YMCA를 조직, 기독교적 독립운동의 전국 청년조직을 만들어냈다.
평양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개성에서 ’제2회 기독학생 하령회‘를 개최한다.
독립협회 때부터 음양으로 이승만을 돕는 윤치호(서울YMCA부회장)의 한영서원(韓英書院:Anglo-Korean Academy)에서 윤치호가 주재한 모임엔 전국 21개 기독학교 대표 93명이 참가, 미국인 부흥목사들의 설교로 부흥회를 열고 YMCA 활성화 방안과 세계기독학생협의회(WSCF) 가맹문제 등을 토론하였다.
이 하령회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일본 총독부가 ’105인사건‘을 꾸미게 된다.

▲ 1911년 개성에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에서 개최한 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 앞줄 가운데 검은 양복 이승만. ⓒ연세대이승만연구원

◆’105인사건‘ 날조, 일제 총독부 ’이승만 퇴거‘ 명령
 
“윤치호와 이승만을 잡아라” 총독부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신민회(新民會)의 지하활동을 추적 단속하던 일제경찰은 총출동을 개시한다.
신민회란 1907년 고종 강제퇴위 때 양기탁, 이동휘, 안창호, 이동녕 등이 만든 비밀결사. 총독부는 지하의 신민회에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기독교 조직의 등장에 눈이 뒤집힌 듯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라는 날조극을 짜낸 것이다.
한일병탄 직후 모든 한국인 단체를 불법화 해체 시킨 총독부는 국제여론 때문에 YMCA 동향을 감시만 하다가, 거물 윤치호와 명성 높은 이승만이 전국청년들을 조직화하자 더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들었다.
1911년 11월부터 평안도 선천 지역 기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압송하기 시작, 신민회원을 포함한 기독교인 700여명을 검거한 경찰은 다음해 2월4일 윤치호를 투옥하였다.
국제YMCA가 가만있겠는가. 서울에 달려온 모트 박사가 개입, “미국 기독교의 주요인물 이승만을 체포하면 미국은 물론 국제적 반발이 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를 발한다. 
그해는 마침 기독교감리회 4년총회(The Quadrennial General Conference of the Episcopal Church)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해, 서울의 한미 목회자들은 서둘러 이승만을 한국평신도 대표로 뽑아 파견하기로 합의하였다.
다 잡은 대어를 포기할 수 밖에 없어진 일본은 “이승만 퇴거 명령”을 내린다.
 
’105인사건‘이란 700여명중 123명이 기소되고 105명이 실형을 받아서 붙은 이름이다. 

▲ 일본총독부의 '강제퇴거' 명령으로 출국하는 이승만 송별기념 사진. 앞줄 중앙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박사 받아 독립운동 백성교육‘에 헌신한 이승만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7개월, 그 짧은 기간에 이승만이 남긴 족적은 컸다. 무엇보다 전국에 YMCA 조직망을 만들어 이들이 뒷날 3.1운동의 주역들로 독립만세 선봉대가 되었고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된 일이다. 
짬짬이 미국 교재들을 번역 출판한 기독교 교재들도 세권이나 남겼다.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이때의 이승만을 보고 ’온몸이 정열 덩어리‘(渾身都是熱)라 비견한 누군가의 표현도 남아있다.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손세일 지음, 앞의 책)
 
1912년 3월26일 이승만은 부산행 열차에 오른다. 만 37세 생일이다.
중풍으로 쓰러진 75세 아버지는 눈물로 손을 흔들었고, 부인 박씨와 또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승만은 고종사촌형 한사건(韓士健)에게서 여비 200원을 얻어 100원으로 창신동 복숭아 밭을 사서 부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상 ’영원한 이별‘의 위자료가 되고 말았다.
누가 알았으랴. 6개월 예정 여권으로 출국([매일신보] 보도) 했다는 이승만이 다시 귀국하는 날이 33년 뒤에나 오게 될 줄이야. 
 

이승만 건국사(11) ”하와이 8도(島)를 조선 8도(道)처럼“

▲ 하와이 왕국의 이올라니 궁전.(자료사진)

이승만의 망명생활은 1912년 3월 서울을 떠나서 1945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33년7개월쯤 된다. 그중 25년간 하와이, 마지막 4년10개월을 워싱턴에서 보냈다.
‘망명 혁명가 이승만의 하와이’를 제대로 조명하자면 책이 몇 권이나 필요하다. 
'미국화' 정책에 매인 교민 교육과 한국 교회를 미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일, 교민사회를 지배하는 한인단체의 부조리 척결,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동지들과의 갈등, 중국에 매달린 임시정부와의 관계, 반공노선의 탄생,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벌인 독립투쟁, 태평양 전쟁기 소련-미국과의 대결 등, 하나같이 폭넓은 연구를 요구하는 역사의 반전이 거듭되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이승만의 건국까지 ‘스탈린과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하와이 25년’ 기록 가운데 교육분야부터 요점만 간추린다.

▲ 1912년 3월 미국 망명길에 일본에 들른 이승만은 유학생들을 모아 '가마쿠라 춘령회'를 열었다. 뒷줄 가준데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도쿄의 한국YMCA 단합...회관 건립기금 마련
 
1912년 3월26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일본에서 열흘간 머물며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도쿄조선YMCA)의 기반을 획기적으로 다지는 작업을 벌인다. 거기 총무를 맡고있는 옥중동지 김정식(金貞植)와 함게 ‘가마쿠라 춘령회’(鎌倉春令會)에 참석, 일주일간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하며 ‘기독교적 신앙과 애국적 단합’을 역설, 지역별로 분열된 조직을 통합하도록 정신교육을 실시한다. 그 결과 '학생복음전도단'을 발족 시켰으며 218명의 유학생들이 통합YMCA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을 벌였다. 뒷날 그 회관은 3.1운동에 앞선 ‘2.8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이때 일본 유학생들이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김성수, 안재홍, 최린, 신익희, 조용은, 김병로, 현상윤, 이인, 윤백남, 전영택. 김필례, 장덕수, 주요한 등으로 이승만을 ‘국제적 인물’로 존경하고 기대한 청년들이었다. 
 
일본을 떠난 이승만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도착, 5월1일부터 29일까지 ‘기독교감리회4년총회’에 참석한다. 일부대표들이 한국감리교회를 중국감리교협의회에 통합시키려 하는 음모를 포착하고 이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국교회의 독립이 한국의 독립에 긴요하며 한국의 독립이 국제평화 유지에 필수이므로 세계 기독교인들이 단결하여 지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 1912년 7월 미국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오른쪽)에 이승만은 윌슨과 함께 참관. 왼쪽 대회기념 보자기 오른쪽위 모서리에 태극기. 한일병탄으로 없어진 나라 국기를 그대로 넣었다.ⓒ뉴데일리DB

美대통령 후보 윌슨과 ‘한국 해방’ 논의...민주당 지명대회 참관
 
★6월19일 뉴저지 주지사 윌슨이 직접 이승만을 별장으로 불렀다.
미니애폴리스 회의를 마친 이승만은 윌슨의 둘째딸 제시를 만나 면담을 신청해두었었다.
윌슨을 만난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이 출판한 자신의 논문집을 윌슨에게 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28대 대통령에 출마한 윌슨은 미국의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이승만의 아이디어를 물었다. 
이승만은 지체 없이 ‘약소민족의 해방론’을 펼치며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준비 중인데 “유력한 대통령 후보께서 성명서에 동의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윌슨은 정중히 거절하여 말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서명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돕고 싶소, 그러나 미국 대통령으로서 그 성명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만, 우리가 함께 일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잖아도 나는 당신의 나라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국각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오.”
이승만은 예상대로였지만 다시 한 번 졸라 보았다.
 
“미국의 현상유지 정책을 떠나서 정의인도가 지배하는 세계를 위해 나의 편이 되어주십시오”
“물론이오. 하지만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오. 당신의 갸륵한 뜻은 명심하리다.”
그러면서 윌슨은 지방순회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주면서 덧 붙였다.
“이 박사, 당신은 나 한사람의 서명만 받으려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로부터 마음의 서명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이상 대화내용은 건국후 1949년 이승만이 구술하고 시인 서정주가 집필한 [우남 이승만전:雩南 李承晩傳]에 나온 대로 요약한 것이다.
 
미국 동부를 한바퀴 돌아 다시 윌슨을 찾았다. 미국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볼티모어에서 열리고 있던 때, 윌슨은 바쁜 중에도 이승만을 초대하여 가족 만찬을 함께 하였다. 
지명대회에서 투표를 거듭하다가 44번째 투표에서 마침내 윌슨이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때까지 이승만은 윌슨 곁에 머물며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를 직접 체험한다. 

▲ 호놀루루 도착후 첫 숙소 앞에 선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하와이 정착...아버지 별세..."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한 것은 당시 미국 땅에서 교민이 가장 많은 5천여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드넓은 미국 본토에는 1천여명 뿐인데 하와이에는 이민 노동자들이 한때 7천명도 넘었다가 줄어들었지만 독립운동 기지로서 가장 좋은 곳이라 옥중동지 박용만과 합의 선택하였다.
1913년 2월3일 호놀루루에 도착한 이승만을 많은 교민들이 환영해주었는데 충격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친 별세’ 전보, 아버지는 전해 12월5일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석달 뒤에서야 알게 된지라 충격은 매우 컸다. 
75세 이경선 옹은 아들이 떠난 뒤 며느리와 ”한지붕 아래 살수 없어“ 집을 나왔다. 이상재가 YMCA 뒤편에 구석방을 얻어 주어 병약한 몸을 연명하다가 눈을 감는다. 그의 시신은 지게에 지워져 고향땅 황해도 평산에 묻혔고, 연고자는 박승선(朴承善)이 된다. 며느리 박씨 부인은 이승만이 도미한 뒤 남편 이름에서 ‘승’자와 시아버지 이름에서 ‘선’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이승만은 “아버지가 생각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써놓았다.([청년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한편 하와이 양대 유력지 중 하나인 [호놀루루 스타 블리틴](Honolulu Star-Bulletin)은 슬픔에 잠긴 이승만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기사를 낸다.
“오늘날 한국에 이승만 박사보다 더 위대한 종교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인”이라면서 신문은 하와이 최대 교회에서 초청강연회를 연다는 선전까지 해주었다.

▲ [한국교회핍박] 초판 표지와 2008년 청미디어 출판 표지.ⓒ뉴데일리DB

[한국교회핍박] 저술 “동양 최초의 기독교 나라 될 것”
 
호놀루루의 한국자유교회(담임목사 신용균) 소유 오두막에 거처를 주선 받은 이승만은 [한국교회 핍박]이란 책부터 쓴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105인사건’ 조작과 기독교 탄압의 경위
둘째,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무서워하는 배경과 이유
셋째, 하와이 동포들과 세계에 전하는 이승만의 신앙과 정치적 비전.
 
이승만은 한일병탄 뒤의 한국인들을 5개 부류로 나눈다. ①양순한 다수의 백성 ②이완용, 송병준 등과 일진회(一進會) 등 일본에 충성하는 노예들 ③ 주색잡기 부패 대관들과 상류층 ④소수의 배일(排日)하는 사람들 ⑤전국 각지의 기독교 지도자들. 
이 중에서 ⑤의 사람들을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여 기독교를 뿌리 뽑고자 105인사건을 날조하였다고 설명한다.
 
왜 일본이 기독교 교회를 겁내는지 이승만은 8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❶교회는 한국인들이 자유로이 모일 수 있는 장소
❷교회의 활동력. 죽는데서 살기를 바라는 예수교의 오묘한 이치
❸교회의 합심되는 능력, 곧 신앙의 단결력
❹교회의 국민보건 보호. 마약-도박-술-담배 추방
❺교회가 청년들을 교육함
❻우상 숭배 거부. 일본의 신도와 신사 배척
❼선교사들의 도덕적 영향력
❽기독교의 혁명사상 전파력
 
바로 이 여덟 번째 기독교의 혁명성을 설명한 이승만은 “예수의 가르침이 곧 혁명사상”이라며
“일본의 핍박은 하나님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동양에 첫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라 강조하였다. ([한국교회 핍박] 이승만 지음, 청미디어, 2008)
 
이 책의 집필 중에 열린 두 개의 대규모 선교집회에 연달아 참석한 이승만이 “찬미에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강연에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외치는 부흥사적 열변을 계속하자, 하와이 교민사회가 “우리의 지도자 나셨다”며 새로운 지식인 박사의 등장에 열광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고 본부에 보고한다.
한달 남짓에 탈고한 [한국교회핍박]은 박용만이 주필이 된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에서 출간하였다. 

▲ 이승만이 태평양잡지에 직접 그린 하와이 군도 약도.ⓒ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하와이 8도는 조선 8도”---이승만은 [태평양 잡지]에 이런 글을 쓴다.
“이 여덟 섬에 한인이 아니 간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팔도라, 섬도(島)자와 길도(道)자가 뜻은 다르나 음은 일반이니 과연 조선이라 이를 만한지라. 장차 여기서 대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10년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되기를 기약하겠도다....(중략)....이곳을 태평양의 낙원이라 하나니. 우리 고초중에 든 민족에게 이곳이 낙원 되기를 바라노라.” ([태평양잡지] ‘하와이 군도’ 1914년 6월호).
조선 8도에서 좌절한 ‘예수 믿는 자유공화국’ 세우는 꿈은 이제 하와이 8도에서 실천함으로써 ‘기독교 정신의 대한민국’ 건국의 독립기지로 삼겠다는 포부이다.

▲ 여학생 기숙사 공사장서 교민들과 작업하는 이승만.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아래에 191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 메모가 보인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한국기독학원---‘미국화’교육에서 ‘한국화’ 교육으로!
 
하와이에는 이미 미국 감리교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가 있었다. 운영이 곤란해진 상태에서 이승만이 나타나자 책임자 와드맨은 8월에 교장직을 제의하고 이승만은 수락한다.
학교를 맡은 이승만은 하와이 군도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실상을 점검하며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즉각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원’(Korean Central School)로 바꾸고 자신의 교육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긴다.
 
★첫째 ‘남녀 공학’을 실시하였다. 한성감옥에서 부르짖던 ‘여성 교육’이다.
섬을 순회하며 딸의 교육을 외면한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을 설득, 어린이들을 데려왔다.
특히 ‘사진결혼’으로 무작정 이민왔던 여성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얼마 안가서 여학생 숫자가 40명이 넘었다. 기숙사가 필요하다. 부모들이 열광적으로 성금을 거두어 주어 인근에 방을 구하여 기숙사도 마련하였다.
★‘미국화’ 교과목을 전면 개편, ‘한국인 주체성 교육’으로 전환하여 한글과 한문, 한국 역사, 한국 지리 등을 가르쳤다. 
이 모든 것은 이승만이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 썼던 ‘미국흥학신법‘ 논설로 주장한 바를 실행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 감리교 측이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왔다.
이승만은 사표를 던진다. 동시에 미국감리교 산하의 교회 행정직에서도 탈퇴하였다.
1915년 7월, 늘어나는 여학생들을 위해 동포들의 모금을 통하여 기숙사를 갖춘 ’한인여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남학생들까지 급증하자 3년후 1918년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이라 개명한다, 더 큰 학교가 필요해지자 막대한 자금이 문제였다. 여성단체가 구성되고 학부모들이 앞장서 대대적인 모금에 나서 무려 1만 달러 넘게 모았다. 기존의 땅을 매각하고 3.5 에이커(약 4,200평) 대지를 구입, 학교와 기숙사를 신축한다. 

▲ 한국기독학원 학생들과 교직원. 왼쪽 흰양복이 이승만 교장.ⓒ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은 4가지 교육지침을 발표하였다.
첫째, 교육과 기독교 지향의 학생활동(To promote Educational and Religious Activity). 둘째,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To retaining Korean Identity). 셋째, 젊은이들의 지도력 양성 (To promote Leadership among the Young Peaple). 넷째, 사회교육의 진흥(To promote Social Education). 이는 하와이 미래 세대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 사회의 지도층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려는 이승만의 교육철학을 보여준다. 실제로 졸업생들 중에 그런 지도자들이 여럿 나왔다. 뒷날 미국 주재대사가 된 양유찬을 비롯하여 경제계, 건축계, 과학계에 진출한 인재들이 많다.
 
★학교 이사진을 하와이사회의 유력한 미국인들로 구성하였다. 한국기독학원이 미국사회에 인정받을 수 있으며 졸업생들의 사회진출에 힘이 되고 ‘인종차별’을 될수록 배제하려는 뜻에서다. ★교사진도 미국인이 대부분, 한국 과목도 영어로 진행하였다. 따라서 한국기독학원 졸업생들은 미국 공립 고등학교에 쉽게 진학할 수 있었다.
★보이 스카웃(Boy Scouts)도 조직하였고, 야구등 체육과 음악 교육도 빼지 않았다. 악대를 만들어 이승만의 친구인 하와이왕립군악단 단장출신이 지도해주었다.
★수업료는 전액 무료, 기숙사도 실비만 받았다. 또한 학생들은 일하면서 학비를 버는 기회도 제공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이승만은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편찬하여 교재로 삼았다. 국내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투쟁기를 가르쳐 학생들에게 독립일꾼 정신을 심었다.

▲ 한국중앙학원 첫 졸업생들과 교장 이승만(왼쪽), 오른쪽사진은 1918년 한국기독학원 여학생들과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1920년 학생수가 갈수록 늘어나자 이승만은 학교를 팔고 칼리히 계곡에 4,000에어커 땅을 사서 학교와 기숙사를 크게 확장한다. 이때 비용이 8만 5천달러, 하와이 모금으로만 감당할 수 없던 이승만은 ‘학생고국방문단’ 20명을 조직, 일본치하의 조국에 보내 모금을 추진하였다. 고국에선 이상재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극진히 환영하고 부유층에선 민박을 제공하였고, 남학생들은 야구를, 여학생들은 무용과 음악을 공연했다. 이승만 반대세력은 이 고국방문단에 대해서도 비난하는데 결과는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 이승만이 6.25전쟁중 설립한 인하공대는 사진과 같이 종합대학교로 크게 성장하였다.ⓒ인하대학교 홈피

인하공대 설립◀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후 6.25전쟁의 휴전이 다가오자 1952년 12월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한다. “인천에 미국의 MIT 같은 공대를 세우자” 그것은 그 해가 하와이 이민 50주년이라, 인천(제물포)을 떠나 하와이로 간 이민을 기념하는 사업을 하자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한국기독학원’ 일체를 매각하고 교민들의 성금과 예산을 보태서 ‘인하공대’를 설립하였다.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의 첫 글자를 합쳐 ‘인하(仁荷)공대‘ 이름도 지었다.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에 원자력공학과도 최초로 설치, 휴전후 산업발전과 에너지 대책까지 세웠다. 
◆[태평양잡지] 창간---“길게 준비하는 것,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태평양 한가운데 하와이에 발행하는 잡지, 그 보다는 ‘태평양 시대’의 도래를 전망하는 미국 엘리트 사회의 트렌드를 간파한 이승만이 그에 먼저 올라타는 취지에서 [태평양잡지]로 이름지어 창간한다. 표지도 한글로 직접 쓰고 영문 이름 ‘The Korean Pacific Magazine’과 영문 목차까지 만든 이유이다. 창간호 1913년 9월호부터 자본주의 경쟁원리를 도입, 동포들의 성금에 의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판매대금으로 발행한다고 선언한다. 
일찍이 23세때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창간 운영했던 언론인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도 역시 한글전용, 창간 목적도 계몽을 통한 ‘독립 성취’ 그것이다.
 
“본 잡지의 주의가 아무쪼록 우리 인민을 육체와 지혱와 신령상으로 두루 발달시켜 모든 일이 날로 자라서 전진하게 하고자 하나니...(중략)...만일 우리의 원하는 것이 성취하는 날이 있고저 할진대 오늘 일만 생각해서는 될 수 없으며, 지금 당한 일만 제일로 치고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으리니, 이것을 깊이 깨달아 길게 준비하는 것이 가하다 하노라”
 
“길게 준비하는 것”---이것은 이승만 특유의 ‘외교독립론’의 기초라 할 것이다.
“전쟁을 아니하고 내것을 찾을 수 없는 줄도 깨닫지 못함이 아니라. 그러나 우리는 피 흘리지 않고 될 전쟁을 준비하고자 하나니 처음 듣는 말이라 괴이하게 여길 터이나 이것을 이루는 방법이 두 가지 있나니, 하나는 우리 용맹을 기름이오, 또 하나는 의리를 배양함이라“
요컨대 기독교정신의 용기를 기르며 섣불리 싸우자고 나서 국제여론에 왕따 되지 말고 기독교 국가들과 의리를 키워나가자는 것이었다.
 
잡지의 내용은 소설까지 다양했지만 역시 국제정세와 독립역사에 관한 글이 가장 많았다. 미국의 공화사상, 미국 헌법의 발전, 파나마 운하, 일본 해군의 협잡, 멕시코와 각국, 필리핀 독립, 아일랜드 자치운동, 미국의 평화운동, 브라질 유람, 비행선 시대 등 한국독립과 민주주의 교육, 태평양 시대의 이슈들이 주를 이루었다. 뒷날 [태평양주보]도 발행하였다.
특히 1923년 발표한 반공논문 시리즈 ‘공산당의 당부당’에 관한 설명은 이 연재 뒤에 나오는 해당사건 편에서 다룬다. 

▲ 이승만이 4만달러를 들여 건축한 한인기독교회. 앞에선 여성들은 이승만을 적극 후원한 대한부인구제회 회원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한국기독교회---독립운동의 영적 파워 생산기지
 
한인중앙학원의 교장과 미국감리교 하와이 지방회 교육분과위원장을 맡아 일하던 이승만은
1915년 6월 두 가지 직책을 모두 사퇴한 이유는 앞에서 밝혔다. 미국 감리교측의 친일적 행태를 이승만이 여러번 비판하자 새로 부임한 프라이 목사가 ”학교일만 하라“고 나왔다.
학교 문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독자적인 한국인교육으로 새 출발에 성공하였지만 교회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승만은 다시 한번 여러 섬을 돌며 ‘독립된 한국인 교회’를 세우자고 역설했다.
드디어 1916년부터 이승만을 따르는 교인들이 학교 기숙사에 모여 예배를 시작하며 교인들이 늘어나 스스로 ‘신립교회’(新立敎會)라 부른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 23일 각 섬의 대표14명이 모여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로 결정, 공식출범함으로써 이승만은 한국인 학교에 이어 한국인교회까지 세우는 쾌거를 이룬다.
 
장로와 집사가 없이 평신도 중심의 민주주의 원칙을 따르는 이 교회는 창립자 겸 선교부장인 이승만이 지도하는 이사원(理事院)이 인도하는 자치교회였다. 
3.1운동후 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또는 임정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열정적으로 보좌한 인물들은 민찬호(閔燦鎬) 이종관(李鐘寬) 장붕(張鵬) 등 목사들과 안현경(安玄卿), 이원순(李元淳) 등 이사들이다
예배당 건물도 없이 떠돌던 한인기독교회는 10여년간 건축헌금을 모아 마침내 1938년 4월24일 릴리하 가(Liliha Street)에 경복궁 광화문을 본뜬 3층 기와집을 준공한다. 3개의 아치문을 가진 이 건물은 지금도 교회로 살아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꿈 꾸고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 실천강령을 만든 이승만이 망명객이 되어서 마침내 태평양시대 한 복판에 세운 기독학교와 우리 교회--”기독교를 근본 삼는 자유 독립“의 민족공동체 구축을 위한 ‘정신혁명’ 실험이 일단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언젠가 조국 3천리 한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다시 찾아서 반드시 이룩해야할 꿈을 살려줄 독립운동의 영적 파워 생산기지들이다. 
 
사사건건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한인기독교회를 세운 것을 두고도 ”이승만이 동포사회를 분열시켰다“고 욕을 한다. 도대체 그들에게 ‘독립’은 무엇이고 무슨 방법론이 있었던가?
이제 무장투쟁 독립론의 박용만을 만나볼 차례이다.

 

이승만 건국사(12) 독립노선 대결! 의형제 박용만 결별...왜?

한성감옥의 '3만 의형제' 
 
한성감옥 시절 정순만(鄭淳萬,1873년생), 이승만(李承晩,1875년생), 박용만(朴容萬,1881년생)은 ‘3만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출옥후 미국에 가서도 이승만과 박용만은 의기투합, 하와이로 건너가 정착하여 미주지역 초기 독립운동을 각자의 방식대로 이끌게 된다. 그런데 이 ‘형제 지도자’들이 5년 만에 갈라서고 박용만은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최대의 ‘적’으로 변신한다. 왜 그랬을까?
 

▲ 이승만 앨범의 박용만 얼굴ⓒ연세대이승만연구원

★우성(又醒) 박용만(1881~1928)의 면모부터 살펴보자.
강원도 철원 출생,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유학 중에 귀국, 일제의 황무지 개척요구에 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1904년 한성감옥에 갇히면서 이승만을 만나 ‘3만 의형제’를 맺는다.
그해 8월, 이승만이 출옥하여 11월 미국 유학을 떠난 뒤 박용만도 출옥하여 도미한다.
이때 이승만이 옥중에서 몰래 쓴 저서 [독립정신]의 원고를 숨겨 가져다가 이승만에게 전달하고 동시에 이승만의 아들 태산(봉수)도 데려다주었다. LA에서 [독립정신] 출간에 앞장선다.
 
곧 박용만은 숙부 박희병(朴羲秉)이 살고있는 콜로라도주 덴버(Denver)에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다. 여름방학기간에 ‘한인소년병학교’(Young Korean Military School)을 개설, 한인청년 30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 등 군사관계 책 세권을 출판한다. 1912년 8월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일종의 ROTC 과정을 이수한 그는 정치학 학사로 졸업한다.
1908년엔 이승만의 도움을 받아 ‘애국동지대표회’를 소집, 이승만이 회장이 되어 미주독립운동조직을 만들기도 했던 두 사람은, 이승만이 프린스턴대 박사를 마치고 귀국하였다가 일본의 탄압에 ‘쫓겨 미국에 다시 갔을 때 네브라스카(Nebraska)에서 만난다. 그리고 교민이 가장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기지로 삼자고 합의한다. 
   
1912년 11월, 박용만은 자신의 ’무장투쟁 독립론‘을 향한 결정적 행보를 시작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대표자회의에 참석, 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을 기초하였다. 
이 선포문 주요내용이 유명한 ’무형정부=자치정부‘ 규정들이다.
첫째, 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을 대표하여 공법상에 허한 바 가정부(假政府)의 자격으로 입법·행정·사법의 삼대기관을 두어 완전히 자치제도를 행할 일.
둘째, 회원과 아님을 물론하고 각국 각지에 있는 대한국민에게 그 지방 생활정도를 따라 얼마씩 ’의무금‘을 정하여 전체 세입·세출을 정관할 일.
셋째, 일체 회원은 병역의 의무를 담임할 일.(다만 연령에 따라).
즉,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모든 한국인들을 통치하는 무형의 정부로서 3권을 자악, 고민들의 국방의무, 남세의무까지 행사하며 범법자에게는 사법권을 발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멸망한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사실상 ’임시정부‘를 지향하겠다는 그들의 결의였다. 
 
 
다음달 12월초 하와이 호놀룰루에 먼저 정착한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의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를 개명한 [국민보]의 주필을 맡는다. 이어 총155개조에 달하는 하와이 지방총회(이하 국민회) ‘자치규정’을 제정하고, 하와이 군도를 통치하는 ‘자치정부’의 주역이 되었다. 곧바로 네브라스카 대학때 실험해 본 ‘무장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호놀룰루 뒤편 큰 산 너머에 교민의 소유 파인애플 농장에 ‘대조선독립군단’(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을 창설하고 부속기관 ‘병학교’(兵學校, Korean Militay Adademy)를 개교, 막사와 군문(軍門)를 지었다.([국외한인사회의 민족운동] 윤병석 지음. 일조각, 1990)
박용만은 하와이 이민 노동자들 가운데 고종황제의 ‘광무군인’(光武軍人) 출신 200여명을 중심으로 군사교육과 훈련을 개시한다. 건축과 교육 등 비용은 국민회가 거두는 ‘의무금’ 즉 자치정부의 세금으로 충당하였음은 물론이다.

▲ 박용만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 단장정복을 입은 모습. 칼을 차고 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교육사업 v 군사훈련...이승만 v 박용만 노선충돌
 
◆박용만보다 석달 늦게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교육사업에 매진한다.
앞에서 보았 듯이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무료로 교육시킬 때, 동포들의 호응이 뜨거워 그때그때 성금으로 꾸려가지만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기숙사의 필요성이 절박해진다.
약 2000달러를 모금하여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하자 미국학교에 다니던 남학생들이 몰려옴에 따라 남학생 기숙사도 필요해진다.
이승만은 국민회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국민회 소유의 빈터가 남아있으니 학교를 짓자고 제안하였다. 국민회 측은 “형편대로 하라. 교육이 뭐 그리 급하냐‘고 거절한다.
그러면서 국민회 회관을 5천여달러나 들여 건축하는 것이었다. 기숙사 건축을 위해 모금하던 이승만은 국민회가 회관건립 모금을 강행하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불신을 드러낸다.
교민의 ’의무금‘이 대부분 박용만의 군사학교 지원과 국민회관 건립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2중3중의 모금에 시달리는 동포사회의 불만도 팽배하였다. 
 
요컨대,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박용만의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가 평행선의 충돌을 재촉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사관학교 '병학교'의 막사와 군문 낙성식 기념사진(1914년 8월29일)ⓒ연세대이승만연궈원

국민회 부정부패 탄로...집행부 숙청, 이승만이 장악
 
★1915년 봄, 마침내 ’터질 것이 터지는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재선된 국민회장 김종학(金鍾學)의 집행부가 건축비에서 2,379달러나 유용한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국민회는 ’자치규정에 따라‘ 처벌은 하지않고 착복한 돈을 변상하게 하였다.
이승만은 참고 참다가 [태평양잡지]에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대저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간부들이 국민회를 망치고 있으며 교육사업을 방해하여 동포들에게 겹겹이 피해를 준다고 질책하였다.
”지난 2년간 사탕밭에서 땀 흘려 모은 돈을 받아 무엇에 썼는가. 학생 기숙사는 한번 세우면 영원히 우리 자녀들을 양성하는 시설이다. 재정출납을 보면 쓰라는 것은 쓰지 않고 쓰지 말라는 것에 쓴 것이 많으니...(중략)....국민회 임원들이 공의를 무시하니 국민회가 위태롭다.“
 
실제로 국민회의 수입은 박용만이 ’의무금‘을 신설한 뒤 급증하였다. 의무금만 1만달러가 넘고 모금액도 5천달러가 넘었다. 그 중에 이승만의 교육사업엔 한 푼도 안주고 대부분 박용만의 사업용으로 지출되었고 ’병학교‘ 교관들 옷까지 새로 사주었다. 게다가 박용만과 몇몇 간부가 개인 돈 쓰듯 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더구나 김종학 회장은 연봉을 720달러에 호화생활을 함으로써 동포사회는 진작부터 들끓고 있었다. 당시 노동자의 월급은 20~25달러,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저축할 돈이 남지 않았다. 더구나 알고 보니 박용만의 ’병학교‘ 재정은 2년에 7만달러가 넘었고, 그곳 파인애플 농장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김종학이 임시대회를 소집한다. 그동안 건축비 내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종학의 횡령액이 1,345달러나 새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의 ’자체 문책‘을 두고 이승만지지 대의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어찌하여 죄인 김종학을 징역살이 안 시키는가? 이러러면 다 해체하라“
임시 총회장은 김종학을 미국 법정에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 미국 경찰이 김종학을 체포 연행하였다.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과정에 기존 세력이 회의장에 난입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이승만은 끄덕도 하지 않고 국민회 장악에 성공한다. 
”피땀 흘린 동포들의 돈으로 일회성 이벤트에 물 쓰듯 하고, 회관이나 짓고 ’산너머 병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짓는 짓‘이므로“ 이승만은 동포의 교육과 복지에 전념하겠다고 천명한다. 하와이 신문들은 연일 흥미꺼리로 보도하고 김종학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호놀룰루 기차역 앞에 선 이승만과 박용만(오른쪽, 1913.4.20)ⓒ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박용만, 이승만과 끝내 결별...베이징에 새 근거지
 
이승만은 반대파인 박용만을 잃고 싶지 않아 편지를 보낸다.
”내 가슴속에는 당신에 대한 우정과 형제애 뿐이오. 당신에게는 옛 옥중동지보다 더 나은 친구가 없다는 것을 분명이 아시오. 국민회를 망치는 저들과 양자택일 하여 정하기 바라오. 언제나 변함없는 당신의 형 이승만“
박용만의 군사학교 행사 때마다 참여하여 격려해왔던 이승만은 이번에 부정을 저지르는 패들과 손을 끊고 함께 새 출발하자고 예정을 드러내 포용하려 애썼다.
 
박용만은 그동안 자기 명의로 해놓았던 국민보 회사와 국민회관의 부동산 일보를 원래대로 하와이 국민회 지방총회에 반납하였다. 국민회의 지원이 끊진 ’병학교‘도 이전하고, 사퇴하였던 [국민보] 주필을 다시 맡았다. 
”우리의 친애하는 박용만 군이 다시 국민보로 들어와 생사존망을 같이 하기로 하였으니 재외동포와 2천만 본국 동포를 위하여 큰 행복이니...“ 이승만은 이렇게 사설로써 박용만을 환영한다. 무장투쟁 독립론 지도자를 끌어안은 이승만 개인의 행복이기도 했으리라.
이렇게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이때부터 ’예수교를 근본 삼는 자유민주 공화국‘의 실험을 탄탄하게 이어 갈 수 있었다. 
 
★ ’타고난 무골‘ 박용만은 끝내 이승만에게 ’결별‘을 고한다. 
첫째, 박용만이 군사를 키워 독립을 쟁취하려던 ’병학교”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국민보] 주필로 복귀한 박용만이 “고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자”는 논설을 썼는데,
이 글을 보고받은 일본 외무대신이 “반란 선동을 왜 방치하느냐”고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 하와이 총독이 박용만 학교의 무기 등을 조사하여 본국에 보고하였다. 미국 내무부는 “폐쇄하라” 지시한다. 이런 상황이 되자 ‘병학교’에 땅을 빌려준 농장주가 박용만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박용만은 ‘사관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미국 FBI 보고서, [박용만 평전] 방선주 논문: [이승만과 김구]제2권. 손세일 지음).
 
둘째, 병력을 훈련시켜 언젠가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꿈에 빠진 박용만이 ‘무장투쟁’을 쉽사리 포기할 리 없었다. 그는 진작부터 ‘원동(遠東)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300여명 동포 청년들과 독립운동을 벌이는 신규식(申圭植)과 연대하고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등 무장투쟁파들과 연락을 계속하면서 ‘대동단결선언’을 이끌어낸다. 
박용만은 ‘길게 준비하자며 설교’나 하는 이승만과 마침내 결별을 결심하고, 지지자들과 새로운 조직 ‘갈리히 연합’을 결성한다. 곳곳에 지부를 만들고 [공고서]를 발행하여 이승만 세력을 규탄하기 시작하였다. “김종학의 원수를 갚자”는 세력의 유언비어성 증상모략은 두고두고 이승만을 괴롭힌다. 
 
셋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마저 박용만의 이탈행위를 비난하며 “해산하고 복귀하라”고 권고하면서 그동안의 박용만 무장투쟁론을 직격한다.
“....우리 동지 중에 아무리 무식하여 판단력이 부족한 이라도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고 그런 문제를 제출하는 것은 허망한 것으로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고...” (안창호 연설 ‘전쟁종결과 우리의 할 일‘. 주요한 편저 [안창호 전서])
 
마침내 박용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5월 19일 하와이를 떠났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장투쟁 동지들이 기다리는 베이징(北京)에 새로운 터를 잡고, 신채호,·신숙(申肅) 등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 박용만 병학교의 학도들과 교관들. 앞줄 왼쪽 세번째 박용만 교장.ⓒ연세대이승만연구원

박용만의 암살=1928년 10월 17일 청년 2명이 중국 베이징 근처 농장으로 박용만을 찾아와, 1천원을 요구하였다. 박용만이 거절하자 권총을 뽑아 쏘았다. 이해명(李海鳴)이란 청년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지금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쪽에서 알려진 것은 박용만의 국내 밀입국과 일본 총독 밀회설이다. 
김현구(金鉉九)의 [우성유전(又醒遺傳)]에 나오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박용만은 1924년 말경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에 잠입한다. 박용만은 펑위샹의 세력기반이자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고에서 한인 둔전병(屯田兵) 양성 계획을 제안하였다. 이에 공감한 펑위샹은 밀사3명을 일본관동군과 조선총독부에 파견한다. 목적은 내몽고에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 러시아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본에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박용만은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밀사 3인과 함께 조선에 밀입국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박용만의 행동이 결국 독립운동진영으로부터 친일파 혹은 밀정으로 오인 받아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하와이 대학 교수였던 서대숙의 연구에 따르면 ’이해명은 수사관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은 박인식이라 밝혔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원으로 상관은 공산주의자 김시현‘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연구에도 ’김원봉이 직접 증언을 하였고 박용만이 밀정이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증거가 없다고 한다. (서대숙, 박용만과 그의 혁명과제:Pak Yong-man and his Revolutionary Career, 한국민족학 연구, Vol.No.4, 1999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 2015)
 
충격적인 소식에 접한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측을 책망하는 편지를 쓴다. 
이에 주석 김구는 반발한다. “박용만의 제거는 친일행위를 응징한 것이므로 형님이 간여하지 마시라”고 답한다. 이승만은 ”박용만이 그럴 리 없다“면서 폭력투쟁을 자제하라고 말한다.
김구 쪽에서 박용만 암살에 참여한 것일까? 이에 관한 사실도 명백히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한다.

▲ 네브라스카 대학시절 박용만이 1908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한인소년병학교' 용지에 썼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자금도 정처도 없이 악전고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고달픈 노선 대결—-군대를 만들어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박용만의 무장독립노선도,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 노선도, 이승만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이기는‘ 교육과 외교 독립노선도, 당시 세계1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방황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모으는 뉴스가 들려온다.
바로 1918년 1월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다.
 

이승만 건국사(13) 김성수가 말하는 이승만의 '3.1운동 밀사'

3.1운동의 기획자는 하와이 이승만 "총궐기 하라"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이 폭발한 날은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애국시민들과 청년들이 만세를 부르고, 태화관(泰和館)에선 민족대표 33인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미리 연락한 일본경찰대가 대기하다가 이들을 연행하였고 파고다공원 만세 인파를 해산시키며 줄줄이 끌어갔다.
민족대표 33인이 이 거사를 일으켰는가? 맞다. 하지만 그 배후엔 민족의 카리스마 이승만의 전략적 지도력이 이들을 결합시켜주었음을 역사는 기록에서 지워버리고 있다. 
 
이날의 역사적인 만세운동은 그러나 이승만이 요청한 ’거사‘(擧事) 계획보다 늦어도 너무 늦게 터졌다. 그 전해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1월8일 국회 연두교서에서 국제연맹 창설과 약소민족 자결주의 등 14개조를 발표하였을 때, 전쟁중인 연합국들의 관심은 국제연맹에 쏠렷을뿐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는 한참 후에야 세계에 알려진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박사는 달랐다.
윌슨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프린스턴 대학시절 총장 윌슨과 이승만이 자주 토론하던 약소민족 해방 독립론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통령에 출마한 윌슨을 찾아갔을 때 윌슨은 이승만에게 ”한국 독립을 위해 협력하겠다“고 다짐까지 하지 않았던가.
 
세계1차대전이 종말에 이르던 1918년 10월, 이승만은 국내인사들에게 ’거사‘를 일으키라고 밀서를 나누어주었다. 귀국인사차 하와이로 찾아온 유학생 여운홍(呂運弘, 여운형 동생)과 평북선교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하여 이승만은 본국의 이상재(李商在), 송진우(宋鎭禹), 함태영(咸台永), 양전백(梁甸伯), 이종일(李鍾一) 등에게 알렸고, 일본과 중국에도 연락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 청년 이승만 박사와 스승 윌슨 미국대통령ⓒ뉴데일리DB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는 전쟁이 끝나는 11월까지도 ’고요‘하였다.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가 1월에 열린다는 뉴스에 조바심치는 이승만은 다시금 밀사와 밀서를 보낸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최대의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의 기획자‘는 누구보다 먼저 움직인 이승만 박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도 다른 약소민족들과 함께 독립할  기회가 반드시 온다“ 결정적인 때가 왔음을 직감한 이승만이 제각기 우왕좌왕 동요하는 국내외 애국지사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묶어주는 중추역을 해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국내서 가장 재정이 풍부하고 조직이 큰 천도교단을 기독교 감리교 조직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천도교 손병희(孫秉熙)는 1월 말쯤 독자적으로 거사를 논의하던중 김성수 측과 함태영 기독교 측의 제의를 받아 2월 하순 합동작전을 펴기로 합의한다.
여기서 이승만의 ’밀사‘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촌(仁村) 김성수(金成洙,1891~1955)의 증언 기록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의 동남 편에 있었다.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오늘날에는 화강암 석조 대강당이 있는 터였다.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겨서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했고 원래 숙직실 자리에는 ‘3.1운동 책원지(策元地)’라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 숙직실은 일제 초기 가장 우수했던 민족의 수재들이 드나들었던 아지트였을 뿐 아니라 후에는 3.1운동의 모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인촌(仁村)과 고하(古下)의 살림집이기도 했다. (중략)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밀사(密使)는 이런 내용의 밀서(密書)를 휴대하고 있었다.
 
仁村-古下-幾堂 등 세 사람은 ‘이제야 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숙직실 방안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어떻게 할까를 논의했다. 그러나 당장 묘안이 없었다.
거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된다는 목표는 설정되었다.」
                        (동아일보사 발행 [仁村 金性洙-사상과 일화] 1985.6.25. p121)
 
이것은 3.1운동 석달 전 겨울, 이승만이 보낸 밀서를 가져온 밀사를 만나고서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는 인촌 김성수의 회고 증언이다. 
당시 김성수(1891~1955, 만27세)는 중앙학교 소유자, 공동소유자인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1890~1945, 만28세)는 교장, 기당 현상윤(幾堂 玄相允,1893~1950, 만25세)은 교사, 일본 와세대 대학 유학선후배로서 20대 후반의 팔팔한 애국지사들이다.
그들에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복음’이었기에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에 쫓기고 있을 때 모세처럼 나타난 이승만의 밀서야 말로 젊은 피를 폭발시키는 뇌관이나 다름없었다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박사는 젊은이들의 우상,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더구나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대학 총장때 이승만에게 박사모를 씌워준 은사이므로 사제지간인 두 지도자가 손을 잡으면 독립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기대감이 식민지 전체를 부풀게 하는 희망의 등불이었던 것이다.
세 청년은 천도교와 손잡기로 작정하고, 손병희(孫秉熙,58세) 측근 최린(崔麟, 40세, 보성학교교장)을 찾아 그의 제자인 현상윤이 달려간다. 당시 국내최대 조직과 재정의 천도교를 끌어들이는 지하작업은 다음해 1919년 1월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이 동대문 밖 천도교 소유의 상춘원(常春園: 현 숭인동)에서 손병희를 만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고 2월 하순 이승훈(李昇薰), 함태영(咸台永)등 개신교 대표들과 합류, 3월1일 궐기를 결정하게 된다. 그 뒤에 태평양 멀리 이승만의 ‘먼 손’이 있을 줄이야.

▲ 부통령 김성수와 대통령 이승만.(자료사진)

▲ 임영신의 회고록 표지. 오른쪽은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과 임영신.ⓒ뉴데일리DB

◆승당(承堂) 임영신(任永信,1899~1977)의 증언
 
‘이승만의 밀서’에 대한 기록 가운데 승당(承堂) 임영신(任永信)이 자서전 [나의 40년 투쟁사]에 보다 상세히 남긴 상황설명이 볼만 하다. 임영신은 3.1운동 몇해 후 이승만과 합류,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 후엔 이승만의 유엔외교에 앞장섰으며 건국정부에서 초대 상공부장관을 맡은 여걸이다.
 
「교사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산 밑에 있는 공지에서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다.
교편을 잡고 있는 동창생들에게 편지로 이런 모임을 갖도록 권유했다. 그들의 반응은 열렬했으며 수개월 내로 9개의 모임이 되었다. (중략)
하루는 서울에서 온 행상 하나가 집에 왔다. 그가 보따리를 풀었을 때 나는 밑에 삐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울의 지하운동본부에서는 행상들이 연락원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행상은 주저하였다. 그의 정체를 알고 싶은 나는 이런저런 지하운동 이야기를 남한테 전해들은 말처럼 나누던 중에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을 슬쩍 던지는 순간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은 지하운동본부에서 왔지요?’라고 말하자 그는 끄덕였다. 나는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몇 장의 삐라를 꺼내주었고 나는 열심히 읽었다. (중략)
1918년에는 두 개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1차대전이 끝난 것과 유행성 감기가 전국에 퍼진 일이다. 얼마 전부터 지하운동단체에서는 전국적인 통신망을 개척하여 나도 어떤 사업가의 도움으로 상하이와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상하이를 통하여 우리는 이승만 박사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14조문을 선언하였다. 그중 한조문이 민족자결권이다. 여러분은 이 조문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만 된다. 여러분의 의사 표시가 국제적으로 알려져야만 한다. 윌슨 대통령은 확실히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그해 겨울 내내 이 메시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다. 상하이에 있는 한국 지하운동본부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다고 알려졌다. 이승만 박사의 메시지는 남경으로 전달되고 그곳엔 제2의 비밀본부가 있었다. 다른 연락원이 두만강까지 와서 대기 중인 연락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국으로 메시지를 가져오기에는 겨울이 가장 안전하였다. 강이 얼어서 다리에 있는 일본군 순찰대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독한 감기에 걸려 이틀이나 코피를 흘린 2월 어느 날 연락원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3월1일 큰 시위를 결정하였소. 정오에 종이 울리면 모든 한국인은 자유를 위하여 절규할 것이오. 우리의 시위가 파리 베르사이유 회의에 알려지면 세계의 민주국가들이 우리를 자유로 만들어 줄 것이오.’」
만 20세 교사로서 전라북도 지하운동 대표였던 임영신은 부랴부랴 몇날 밤을 새우며 태극기를 만들어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 우남 이승만전 표지(화산 문화기획, 1995)

◆이승만 자서전...“기회는 왔다, 총궐기하라”
 
김성수와 임영신의 기록보다 이승만 자신의 회고담이 가장 확실한 증언이 될 터이다.
다음은 자서전 [雩南 李承晩 傳] 가운데 ‘3.1운동 전후’(p211~219) 장에서 ‘밀사와 밀서’ 관련 내용만 요약한 것이다.
 
「...윌슨이 국회에서 연두교서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 하였을 때 이승만이 세상의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당연하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시절 윌슨이 집으로 불러 만찬을 즐기며 토론할 때마다 이승만이 주장하였던 ‘약소민족 해방론’이 마침내 미국 대통령의 공식연설로 공표되었던 것. 또한 그후 망명한 이승만이 바로 지난해 ‘한국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는 선언문’에 서명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윌슨 대통령이 “지금은 때가 아니오. 때를 기다리시오. 그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던 ’그 때‘가 마침내 눈앞에 열린 것이었다.
 
”많은 약소민족들이 일어날 테니 한국이 먼저 윌슨대통령의 주장에 호응해야 한다.“
이승만은 임박한 ’종전에 대비하여 궐기할 준비를 갖추라’는 밀서를 국내외 동지들에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지시를 서면으로 보내고 밀사를 통하여 보내고 전신으로도 보내어 뜻있는 동지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1월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 예비회담 의제 속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었음을 확인한 이승만은 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있는 동지들에게 “민족 총궐기의 때가 왔다‘는 지령과 밀서를 다시 한 번 곳곳에 보냈다. 
그리고 미국의 프랭클린 내무장관과 폴크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 대표가 파리회의에 참석할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편 중국 동지들은 상하이에 모여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파리회의 대표(김규식)를 선정하고, 조선 본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즉시 본국에 장덕수를, 일본에 김철, 선우혁, 서병호 등을 파견하고 여운형을 소련 쪽에 보낸다.
이에 따라 2월8일 일본 도쿄의 조선인 기독청년회관에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독립요구서‘ 혈서를 써서 일본 국회와 정부에 제출하려다가 경찰의 칼 끝에 유혈의 참극을 당하였다....」
 (1949년 대통령 이승만 구술,시인 서정주 기록/화산 문화기획 재출간 1995)

▲ 1919년3월3일 고종의 장례식. 덕수궁 앞에 조문 인파. (스코필드 박사 촬영, 독립기념관)

◆이승만이 진술한 대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프린스턴 대학원시절 이승만의 ’약소민족 해방론‘에 의기투합했던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의 합작픔이나 다름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승만도 ”그때 나의 주장에 윌슨이 어디까지 동감했는지...’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긴 하지만, 윌슨의 대통령 연두교서에 전세계의 약소민족 자결권으로 나타났으니 다툴 여지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승만의 3.1운동 기획“은 당사자인 이승만이 밀서를 몇 차례나 보냈다는 본인 진술로써 확증이 된다. 그 밀서들은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 운동을 행동으로 폭발시키는 결정타 폭약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데도 3.1독립운동 역사에는 여태까지 이승만 이름 석자마저 깡그리 무시되어 왔다.
 
필자가 2019년 3월 뉴데일리TV (유튜브)에 ’3.1운동의 기획자는 이승만‘이란 방송을 하자 어김없이 반박하는 글이 쏟아졌다. 반박 이유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밀서의 실물을 찾을 수 없다...이승만은 당시 하와이에 있었다...제3자의 기록도 기억력도 믿을 수 없다...다 죽었으니 확인할 길도 없다...“ 등등 억지와 일방적인 부정이다. 어느 좌파 학자는 소위 ’직접사료‘가 발견되지 않았고 ’간접사료‘는 신빙성이 없다며 거짓이라고 막말로 도리질 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사 5천년의 기록은 몽땅 거짓이란 말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은 직접사료인가? 간접사료인가? 왕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해 놓은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왕들의 음성녹음이나 사진이라도 보고 들어야 믿겠다는 생억지 아닌가.
3.1운동에 대한 이승만의 직접진술을 못 믿겠다면 5천년 민족사는 공중분해 되고 만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 속에서 극비의 항일운동 '밀서'를 누가 얼마나 오래 보관할 수 있겠나. 즉석에서 불태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좌파나 친북세력의 ’대한민국 죽이기‘ 작전은 ’이승만 없애기’에 이토록 집요힌 거짓선동을 이 순간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가 열린 베르사이유궁 거울의 방.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윌슨 미국대통령.(자료사전)

★3.1운동이 ”늦었다“는 의미는 1월의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기 전에 거사해야 미국-영국등 승전국들의 관심을 불러 있으킬 수 있다는 이승만의 요구가 말해준다. 
다행히 베르사이유 회의는 6월까지 이어지지만 약소국 해방문제는 승전국들의 입맛대로 처리된다. 왜냐하면, 윌슨의 원칙을 연합국들이 걷어찼기 때문이다. 결국 패전국 독일 등의 식민지들만 ’자결주의‘ 이름으로 또 다른 먹잇감이 되었고, 승전 연합국 일본의 식민지 한국은 여지없이 제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국식민지도 마찬가지, 바로 약육강식의 패권주의 놀음은 또 한차례의 세계대전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그때부터 너무나 외로워진다.

 

 

이승만 건국사(14) 김구, 3.1 만세운동을 거부...왜?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 자네들이나 부르게"
 
서울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급속히 번져갈 때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요? 잠깐 들여다 봅시다. 
 
43세 김구가 3.1운동을 맞은 것은 그의 고향 황해도 안악군 동산평 농장에서였다. 서당 같은 학교에서 농촌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하던 때다. 
우선 김구가 썼다는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때의 일을 요약해보자.
 
「...청천벽력과 같이 경성 탑골공원에서는 만세소리가 일었고, 독립선언서가 각 지방에 배포되자 평양·진남포·선천·안악·온정·문화 각지에서 벌써 인민이 궐기하여 만세를 부르고, 안악에서도 계획하고 준비하던 때였다. 
장덕준(張德俊) 군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뜯어 읽어보니 ‘국가대사가 일어났으니 같이 재령에서 토의 진행하자’는 것이다. 나는 ‘기회를 보아 움직이마.’라고 답신을 보내고, 밀행하여 진남포를 건너 평양으로 가려하니, 그곳 친구들이 “평양에 무사히 도달하기 불가능하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므로 그날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안악에서는 
“이미 준비가 완성되었으니 함께 나가서 만세를 부릅시다”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참여하지 않으면 누가 선창합니까?”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한 터인 즉, 나의 참·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안악읍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 평내 소작인들을 지휘하여 농기구를 가지고 모이라하여 제방 수리에 몰두하였다. 나를 감시하던 헌병들이 내 동정을 보아야 농사준비만 하기 때문인지, 정오가 되어 유천(柳川)으로 올라가버렸다. (중략)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을 보고 즉시 출발하여 사리원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신의주 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는 물 끓듯 하는 말소리가 만세 부르는 이야기뿐이다. (중략)
나는 중국인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큰 다리를 지나서 안동현(安東縣)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장수라 하고서 7일을 경과한 뒤,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하략)...」
 
이상의 기록은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년 발행)의 ‘상해 망명’ 부분에 나온다. 김구가 ‘만세운동’ 참여를 거부하는 이유와 중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이 간단히 정리되어있다.
즉, 만세는 젊은이들이 부르면 되고, 김구 자신은 ‘장래 계획’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당시 3.1운동에 대한 김구의 기술 전부이다. 
 
 
4월초 상해에 도착한 김구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거기에 참여하고 싶어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었다. 5월 안창호가 미국에서 왔다.
김구는 "나는 배운게 없으니 임시정부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한다. 안창호가 '경무국장' 임명장을 주어 사양하다가 받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 1919년4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 김구. 오늘의 경찰국장격이지만 임정대통령과 임정요인들의 경호를 비롯, 청사 경비와 간첩잡기등 치안 총책.(자료사진)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 과정
 
★[이승만과 김구] 전7권(조선뉴스프레스, 2015년 발행)을 저술한 손세일(孫世一: 3선 국회의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신)은 김구 연구의 선두주자로서 백범관련 연구서를 내고 ‘김구 국부’ 취지의 글도 많이 쓴 언론인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상기 저서(제2권)에서 김구의 망명과정에 관한 보다 상세한 자료를 구해 소개하고 있다. 즉, 105인사건 중 ‘신민회 사건’ 관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김구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둘이서 중국으로 망명했던 최명식(崔明植)의 회고 기록이다. 
「....유천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니 감격과 흥분을 금할 수 없게 했다. 그곳 친구들과 술을 나누면서 무작정 흥분하기만 했다. 안악에 가서 좀더 자세한 소식을 들을까 하던 차에 김용진(金庸震)이 사람을 보내서 김구와 함께 오라 했다. 동산평으로 김구를 찾아가 함께 안악으로 들어가니 김용진 형제는 우리에게 ‘이번 서울의 만세사건이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우리도 이 기회에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인데...(중략)...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세계에 선포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양으로 많은 대표가 참가하기를 희망한다 하니, 김구와 나더러 상해로 나가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최명식 [안악사건과 3.1운동과 나])
 
그때 최명식과 김구는 “매우 수동적”이었다고 고백한다. 가족 생활문제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용진이 “가족들 생계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적극 설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고민하다가 망명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써놓았다.

▲ 백범일지 1979년 교문사 발행 표지, 1997년 돌베개 발행 표지ⓒ뉴데일리DB

연구자들이 제기하는 몇가지 의문들
 
여기에서 손세일은 [백범일지]의 3.ㅣ운동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을 열거하고, 특히 김구가 3.1운동 참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며 강한 의구심을 나타낸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중국행 배를 같이 탔던 인물들이 15명이라 적어놓았는데,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인 김병조(金秉祚)를 비롯하여 안승원(安承源), 장덕로(張德櫓), 이원익(李元益), 조상섭(趙尙燮), 양준명(梁濬明), 이유필(李裕弼), 고일청(高一淸), 김인서(金引敍), 이규서(李奎瑞) 등이다. 대부분 자신들의 고장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목사나 교인들로서 일본경찰에 쫓기다가 망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원익, 이유필, 고일청은 김병조와 함께 평북 의주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병조 [독립운동사략], [독립운동사] 중 ’3.1운동사‘ 상권,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이와 같이 만세운동을 이끌고서도 망명할 수 있었는데 왜 김구는 만세운동을 거부한 것일까.
그리하여 손세일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의문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일찍부터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외치며 계몽운동을 해왔던 김구가 고향에서 시위운동을 벌이는 일이 극히 자연스러움에도 불구, 자신을 따르는 청년들이 시위 준비를 끝내고 ’만세 선창‘을 요청하는데도 “즉석에서 거절”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더구나 황해도의 만세시위는 서울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고 다른 지역보다 한층 격렬하고 꾸준했다는 당시 기록을 손세일은 제시하고 있다. 
즉, 김구가 망명하던 3월 한 달 동안만도 김구의 고향 안악은 물론, 곳곳에서 거의 매일 수백명씩, 때로는 천명 넘게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일본경찰의 공격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잡혀간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조선헌병사령부 편 [대정8년 조선소요사건 상황],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앞의 책). 이 거센 독립만세의 물결을 등지고 중국행을 선택한 김구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세계의 약소국들을 고무시킨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파리 강화회의 같은 국제 정세에 대해서 1928년에 쓴 [백범일지]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10여년이 지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1941년경 김구가 쓴 [백범인지] 하권 서두에서야 비로소 민족자결주의를 언급하고 지나간다.
 
셋째, 3.1운동 준비과정에서 김구에겐 왜 아무도 연락을 안했을까하는 점이다. 동학에 동참했던 김구인데도 천도교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기록이 없을 뿐더러, 105인사건때 함께 붙잡혀 옥살이도 같이 했던 개신교 33인대표 이승훈 장로까지 김구를 빼 놓은 점이 의아스럽다.
 
넷째, 장덕준(장덕수 형)이 재령으로 와서 국사를 논하자고 요청하는데 이를 거부한 김구가 평양으로 달려가다가 친구들이 만세운동 때문에 못 간다고 말리자 진남포에서 되돌아선다. 왜 장덕준의 요청을 외면하고 왜 평양부터 가려했는지 [백범일지]에는 설명이 없으니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다섯째, 그토록 원하던 첫 아들(김인 金仁)을 낳은 지 석달 밖에 안되었을 때, 가족과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중대 결단을 내린 중국망명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다. 더구나 가족걱정에 망설이다가 설득을 받고 결심한 망명이라면 독립운동가로서의 심정변화 동기와 망명 목적 등을 설명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독립을 입에 달고 살던 김구 아니던가.
게다가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두 차례 옥살이 이야기를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써 놓았고, 특히 감옥의 열악한 급식에 대한 불만 등 소소한 일들은 불필요할 만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런 때에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중략)....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해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백범일지] 돌베개 1997)
이런 막말을 인용해놓은 손세일은 ’김구의 정직성을 말해준다‘고 감싸면서도, 그러나 평생을 바칠 중국망명 독립운동 문제와 관련된 진술이 여기에 안 보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물을 수 밖에 없다 하고 있다. 

▲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판(왼쪽)과 중국어 판 표지.(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2권에서 전재)

20대 '치하포 사건'에서 70대 '김일성과 협상'까지
 
★[백범일지]를 둘러싼 ’김구의 미스터리‘는 연구자들이 여러 가지를 내놓는다.
유명한 ’치하포 사건‘이 대표적이다. 칼 찬 왜인을 보자 ’국모를 살해한 일본 미우라 공사이거나 공범‘으로 단정하고 살해한다든지, “난도질한 왜놈의 피를 마시고 얼굴에 바르는” 그 잔인한 살인행위의 상세한 묘사라든지, “국모보수(國母報讐: 민왕후 피살의 복수)”라고 김구가 주장하고 뒷날 지지자들이 ’복수 의거‘라 찬양하고 있지만, 당시 대한제국정부 수사당국의 기록에는 도피중인 ‘살인강도’를 붙잡아 처벌한 것이라 적혀있다. 
또한 김구가 일방적으로 왜놈장교라 지목한 피살자는 일본 민간인 약장수로 판명이 났는데도 김구는 뒷날까지 ‘왜놈 소위...중위“ 등으로 때에 따라 계급을 올려 말하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모든 인간의 본능적인 ’자기과시욕‘이겠지만 세칭 ’민족지도자‘의 품격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한 당시 인천 감옥에서 사형 직전에 고종의 ’석방 전화‘로 풀려났다는 주장 역시 전화개통 시차가 드러나 맞지 않음이 판명되기도 했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에서 ”소련 공산주의가 세계 최악의 독재체제’라 써놓고서도 소련 스탈린의 꼭두각시 김일성과 통일논의를 벌였다는 사실을 두고서 김구의 정치적 정체성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나의 소원'을 이광수가 썼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김구는 [백범일지]의 분실을 염려하여 필사본을 몇 개 만든다. 
해방직전엔 미주 동포에게 보내 출간 되었고, 1945년 귀국후 만든 필사본이 있으며, 당대의 소설가 이광수(李光洙)가 한글로 풀어 ‘유려한 문장’으로 윤색한 번역본이 잘 알려진 자서전이다. 여기에다 90년대에 여러 판본 자료를 총망라하였다는 ‘돌베게 판’이 나와 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붙어있는 「나의 소원」 부분이 사실은 이광수가 써서 붙인 것이란 주장이 나온지도 오래 되었다. ‘돌베게 판’ 주석에서도 “「나의 소원」은 1947년 12월 ‘국사원본’이 간행될 때 처음 수록된 것으로 당시 백범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백범일지]와는 달리 매우 다듬어진 글이다.”라는 해석을 붙여 놓았다.
이와 별도로 특히 ‘문화국가’론은 소설가 이광수의 언론인시절 주장과 판박이라는 증거까지 내놓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성역화된 백범’ 레드라인에 막혀있는 게 현실이다. 
그럴수록 [백범일지]를 추측과 오해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우리 현대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 정리해야 할 때가 지나도 너무 지나지 않았는가. 북과 남에서 선전선동에 악용하려고 ‘만들어낸 신화의 가면’을 늦게라도 벗겨내야, 자기역사도 모르게 되어버린 국민들이 ‘역사문맹’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이승만 건국사(15) Phila 독립선언...日王에게 한반도 철수 요구

▲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44세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여기서 1919년을 조명한다. 이 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5천년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이 탄생을 준비한 역사, 그리고 이승만이 최초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임정을 공산화하려는 소련 레닌과 싸우며 세계최초로 ‘반공주의’를 정립하는 계기가 된 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제정치-국제법 박사 이승만이 격동하는 세계 정세를 꿰뚫어 전체주의와 대결하며 한국의 건국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그것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글로벌 지도자(Global Leadership)의 면모를 확립한 기간인 까닭이다. 

▲ 외교독립운동의 동지--40대 이승만과 60대 마사리크. 두 사람은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자료사진)

◆체코의 마사리크와 협력–‘외교독립운동’의 성공사례
 
해가 바뀌고 파리에선 연합국 강화회의가 열리는데도 서울에선 ‘만세운동’ 소식이 없다.
1919년 1월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들과 대한인국민회(회장 안창호)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라며 대표로 선출하자 미국 본토로 떠난다. 
이승만은 미국무장관 서리 프랭크 폴크(Frank L. Polk)에게 파리행 여행증 발급을 신청한다. 미국적을 얻지 않았던 이승만은 무국적자이므로 미국을 떠날 때마다 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한다. 이것은 서재필, 안창호, 김구와 본질이 다른 점이다. 여행증 발급신청과 동시에 이승만은 백악관에 윌슨 대통령 면담도 신청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다. 시위운동은 그의 ‘외교독립운동’에 필수적인 선전도구의 하나이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있던 아일랜드나 체코 등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을 이승만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독일식민지 체코의 프라하 대학 교수 토마스 마사리크(Thomas Garrigue Masaryk, 1850~11937)를 워싱턴에서 자주 만나 두 나라 독립문제를 협의하곤 했다. 두 사람의 운동방식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임병직 [임병직 회고록] 여원사, 1964)
마사리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1918년 종전까지 미국내서 독립운동을 벌여 불과 4년만에 외교선전투쟁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을 통합시키며 독립을 쟁취해내 ‘전설적 국부’가 된다. 미국 내서 마사리크의 독립운동 방식이 바로 이승만이 주창해온 ‘외교 독립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건국이념’도 ‘칸트의 영구평화론’ 등 사상적 전략적 공감대가 깊었다. (김학은 [이승만과 마사리크] 북앤피플, 2013).  
의기투합한 두 거물의 친교는 체코 독립(1919)후 마사리크가 3선 대통령을 지낸 뒤에도 계속된다. 뒷날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이승만이 소련 방문을 추진할 때 프라하로 마사리크를 방문하려다가 시간이 안 맞아 포기하기도 했다.(이승만 일기 ‘Log Book of SR’)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낸 '국무총리' 선출 통보문(왼쪽)과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설립과 이승만 집정관총재 선출 선포문.ⓒ뉴데일리DB

★서재필을 만나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약칭 Phila)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말하자 주저하던 서재필도 동의했다. 이승만은 2월 13일 서재필과 공동서명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개최 초청장을 미주, 유럽 등 해외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국역 이승만 일기] 2015)
미국 독립의 성지 필라델피아에서 영문표기대로 ‘제1회 한국인 의회’ 형식의 대회를 열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행진을 벌임으로써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에게 건국의지를 과시하자는 것, 3.1운동후 잇따라 생긴 임시정부들보다 한 달 앞서 개시한 미국내 임시정부 설립운동이었던 것이다.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3월10일 이승만은 한국에서 3.1운동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재필과 기뻐하던 중, 3월21일 ‘대한공화국’이라는 임시정부가 생기고 자신을 ‘국무경’으로 추대하였다는 뉴스를 알게 된다. “홍보가 곧 독립운동”인 이승만은 즉각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미국의 AP통신 기자를 만나 인터뷰, “임시정부 대한공화국 국무경으로서 동양에 처음 되는 예수교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평소의 지론을 펼쳤다. 기독교 국가 미국에 대한 지원요청 메시지였다.

▲ 1919년4월16일 필라델피아 소재 미국 독립기념관. 1776년 조지 워싱턴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은 이승만과 미주 한인대표자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임정 초대대통령’탄생...연합국에 ‘정부수립’ 승인요청
 
 
필라델피아 대한인대표자회의는 4월14일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에서 막을 올렸다. 연장자 서재필이 의장을 맡았고, 참석자는 장택상(張澤相) 민규식(閔圭植) 윤병구(尹炳求) 민찬호(閔贊鎬) 정한경(鄭翰景) 임병직(林炳稷) 김현철(金顯哲) 장기영(張基永) 천세헌(千世憲) 유일한(柳一韓) 김현구(金鉉九) 조병옥(趙炳玉) 노디 김(Nodie Kim:한국명 김혜숙) 등 150여명이다. 미국 교민단체 총회장 안창호는 이 대회를 외면하고 연락도 없이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고 이승만은 일기에서 섭섭해한다. 
 
16일까지 3일간 영어로 진행된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보내는 호소문’ ‘임시정부지지 선언문’ 등 5개결의문의 작성과 통과를 주도하였다. 회의를 마친 참가자들은 리틀 시어터를 나와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가랑비가 내리는 거리, 필라델피아 스미스(Thomas B, Smith) 시장이 제공한 기마대와 군악대의 선도를 따르는 행열은 대행 태극기를 앞세우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KOREA INDEPENDENCE LEAGUE’(한극독립연맹)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들었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일행은 역사적인 방으로 들어갔다. 1776년 7월 4일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독립선언서를 서명 선포했던 의자에 이승만이 앉았다. 서재필은 임정대통령이니 거기 앉으라 권하였다. 기념 촬영 뒤에 이승만은 영어로 번역한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였다. “대한민주국 만세!” “미국 만세!”를 3창한 일행은 ‘자유의 종’을 한사람씩 만지며 독립을 다짐하며 독립기념관을 나왔다.
 
★4월15일 채택된 5개 결의안 가운데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Aims and Aspiratioms)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건국의 종지(宗旨)’라 번역, 홍보했 것처럼,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요지였다. 
‘정당한 권력은 통치를 받는 자로부터 나온다’를 비롯,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 ‘대통령과 내각은 국회에 책임을 진다’ ‘지방의회 설립’ ‘세계만방과 자유통상’ ‘의무 교육’ ‘종교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등 주요항목들은 1948년 제정한 건국헌법의 뼈대가 되었다.

▲ 이승만이 만든 대통령 취임 엽서. 오른쪽은 동포들이 만든 축하카드.ⓒ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연합국들에 정부수립 통보...한성임시정부 법통 고수
 
4월11일 상하이 임시정부에 이어 4월23일 서울에서도 ‘한성임시정부’가 등장한다. 13도 대표자들이 새로운 독립국 지도자로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란 직위에 선출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6월초쯤 서울의 ‘미국인 친구’가 한성정부 서류를 몰래 갖다 줌으로써 이승만이 뒤늦게 처음 알게 된다.(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세대 출판부, 2009)
이때부터 이승만은 몇 번 썼던 ‘임시정부 총리’(Premier for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직함을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으로 바꾼다. 이유는 한반도 전역의 대표성을 지닌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이며 국가대표로서 미국 대통령과 대등한 직함이어야 세계 외교를 펼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함 쓰지 말라”는 상하이 임시정부 안창호의 반발을 물리친 이승만은 한성정부 체제와 대통령 호칭을 고수, 그해 9월13일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만들게 하고 ‘대통령’ 직함을 관철하여 해방 날까지 이를 고수한다.★

▲ 비 내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를 마친 150명 대표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행진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은 즉각 ‘대통령’(President) 이름으로 5개 외교문서를 작성 발송한다.
파리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 미국대통령 윌슨, 프랑스 대통령 뽀앙까레(Raymond Poincare), 이탈리아 국왕, 영국 조지6세, 중화민국 대통령 쉬스창(徐世昌)에게 “한반도에 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탄생"하였으며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대한민주국 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윌슨에게 추가 편지를 보내어 ”1882년 조미수호 조약 제1조에 의거하여 미국은 독립을 원하는 한국 국민을 위해 ’거중조정‘의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이 대미외교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반성과 협력’을 끌어내려 이용한 ‘용미(用美)전략’을 구사한 첫 출발이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은 ‘한인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결성에 나섰다.
미국 전역에 한국을 지워하는 미국인 조직을 엮는 작업은 5월2일 필라델피아 시티클럽에서 발기, 16일 필라델피아 22명으로 처음 결성된다. 
6월6일엔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대한자유공동대회’(Mass Meeting for Korean Freedom)를 열어 워싱턴 한인친우회를 결성한다. 이 회의는  필라델피아 회의와 달리 미국인들이 주동이 되어 미국정부와 의회에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특히 이승만의 ‘외교무기’ 곧 조미조약상 미국의 ‘거중조정’ 의무를 이행하라고 미국인들이 촉구한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 워싱턴 임정대통령 사무실의 이승만. 오른쪽은 일본천황에게 보낸 '한반도 철수 요구' 영문 통고문.ⓒ뉴데일리DB

◆ 일왕에게 ‘통고문’...“즉시 한반도애서 철수하라“
 
파리 강화회의 조약국들에게 ‘정부수립’ 통보를 하기 전에,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출범을 알자마자 맨먼저 6울18일 일본 ‘천황’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일본 철수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국가수반으로서 외교전례에 따라 ‘Your Majesty“로 칭한 영문 문서의 주요대목을 보자.
 
”....본인은 대한민국의 명의와 권위에 입각하여 일본이 한국에서 모든 무장 군대와—--통상적인 외교사절 및 영사들을 제외한---모든 일본 관리 및 민간인 등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는 본인에게 부과된 의무이며 한국인의 바람이다. 
우리는 폐하가 대한민국을 분명히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아울러 이 취지에 위배되는 모든 조약의 조항들은 무효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 통고문은 비서인 임병직이 직접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전달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를 결성하려는 13도 국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일본의 통치권 철거와 군사의 철퇴 요구‘등 조항을 알고 있었기에 ’한국 대통령’ 자격으로 이를 일본에 공식 요구한 것이었다. 

▲ 이승만 임정 대통령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 건물(왼쪽). 초대위원장 김규식(오른쪽)과 찍은 사진.ⓒ뉴데일리DB

◆’구미위원부‘ 설치...사실상 미국내 임시정부
 
파리 강화회의가 6월28일 베르사이유 조약과 함께 폐막, 한국 독립엔 아무 소용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워싱턴에 ’대한민주국 공사관'(Lagation)을 7월17일 개설한다. 
이미 5월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한인친우회 조직확대를 꾀하던 이승만은 8월25일 명칭을 ‘구미 위원부’(The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로 바꾸고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金圭植)을 임명한다. 대통령 직권으로 조직을 만든 이승만은 애국성금 등으론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여 공채를 발행하였다. 미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1년내 상환하는 조건, 10달러부터 500달러까지 판매한 공채표 자금은 2년간 8만 1,351달러나 되었다. 이것은 당시 각국이 미국서 모은 자금중 가장 큰 금액이었다.
 
이 즈음 구미위원부가 벌인 활동은 대단하다. 
상하이 임정에 매달 1,000 달러씩 송금하고, 서재필의 영문잡지와 파리 황기환(黃玘煥)에게 영문-불문 잡지를 발간케 하였으며 많은 독립관련 영문저서와 출판을 지원한다. 
무엇보다 미국내 21개 도시와 런던 파리등 유럽에 설치한 ‘한국 친우회’를 적극 후원, 1921년엔 미국에서만 2만5천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대미 정치외교 활동으로는 미국 상-하 의원들에게 한국독립문제를 꾸준히 설득함으로써 마침내 1920년 3월17일 본회의 의제로 상정되었다. ‘한국독립지지 결의안’을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표결한 결과, 아일랜드안은 가결되고 한국안은 안타깝게도 34대 46으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처럼 구미위원부는 각종 외교활동과 더불어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괄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사실상 ‘미국내 임시정부’ 역할을 담당한 기구였다. 뒷날 건국 다음해 1949년 1월 대한민국 주미대사관이 개설될 때까지 존속한다.(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이승만 건국사(16) 30만$ 현상금 사나이, 태평양을 밀항

▲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 상하이로 밀항할때부터 중국 가서 활동기간중 신변안전을 위해 중국인 옷을 입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화물선 밑창 '시체 창고'에 숨은 대통령
 
짙푸른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쏟아지는 새벽, 검은 물결이 뱃전을 날름거리는 화물선에 뛰어오른 검은 그림자 두 명이 재빨리 큰 철제 상자 같은 공간에 숨어들었다. 
내통한 선원은 밖에서 문을 잠갔다. 전등도 없는 내부는 깜깜하고 통풍도 안 되는 창고였다. 들키지 않을까 가슴 졸이는 두 사나이는 기다란 나무 궤짝들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쯤 잤을까...천장 위를 분주히 오가는 게다짝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간이 지나며 방안이 더워지고 철판 지붕이 태양열에 달궈지는 듯 숨이 막힐 지경에 갈증이 났다. 
아무 일 도 할 수 없는 그들은 궤짝에 누운 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부두와 연결된 건널 판이 거두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뿌웅 뿌우웅 뱃고동 소리, 드디어 출항이다. 두 남자는 조마조마 하면서 태평양 파도에 몸을 맡겼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오라 했다. 위층 갑판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8시쯤 망망한 태평양 바다 물결 앞에 카우아이(Kauai) 섬이 보인다. 아뿔사...가슴이 철렁...하와이 서쪽 끝 작은 섬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나려는 게 아닐까
 
“이 가방은 뭐야? 망할 중국 놈 밀항자 새끼들” 낯선 선원이 소리 쳤다.
중국인 옷으로 변장한 이승만이 고래를 저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시늉이다.
“그래, 되놈 시체들과 잠잔 기분이 어때? 왜 몰래 탄 거야? 엉?”
맙소사! 침대 삼아 잠잔 궤짝들이 미국서 죽어 고국에 가는 중국인들 시체를 담은 관일 줄이야. 새삼 으스스 했다.
옆에 있던 임병직이 영어가 서투른 체 중얼중얼 대답한다.
“이 분은 제 아버지인데...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용서해주시오”
45세 대통령 이승만과 27세 비서 임병직은 누가 봐도 부자 같이 보였고, 실제로 부자처럼 밀착된 평생 동지다.
잠시후 선장이 부르더니 이것저것 묻고 항해사를 불러 일이나 시키라고 말했다.
그제야 안도한 이승만과 임병직에게 항해사는 화물선 병실을 숙소로 배정해주었다.

▲ 1920년 11월 하와이서 상하이로 밀항하던 때 이승만이 쓴 일기ⓒ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에게 주어진 일은 야간 항해 때 바다를 살피는 망보기였고 임병직에겐 갑판 청소를 맡겼다. 이때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된 이승만은 뱃머리에 앉아 밤바다를 둘러보며 한시(漢詩)를 짓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의 작품 아홉수가 지금도 보존되어있다.
꿈 많은 20대 청년 임병직과 임정대통령 이승만은 밤마다 뱃머리에 앉아 철야 망보기 근무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망국민의 설음과 상하이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갈등과 이승만 공격, 기약 없는 독립운동의 향방 등 온갖 상념에 밤새우는 고독한 부자(父子),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칠언절구(七言絶句)는 명작이라 한다.
 
一身漂漂水天間   물과 하늘 사이를 떠다니는 몸
萬里太洋畿往還   만리 태평양을 오가기 몇 번인고
到處尋常形勝地   여기저기 명승지도 심드렁하구나
夢魂長在漢南山   꿈도 혼도 늘 머물기는 서울 남산
 
(이승만의 영문 ’상해 방문기‘-연세대이승만연구원 소장, 임병직[임병직 회고록] 앞의 책)

▲ 워싱턴 구미위원부 시절 이승만(앞줄 가운데)과 비서 임병직(뒷줄 왼쪽부터 두번째). 아래 큰 얼굴은 건국후의 임병직.ⓒ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은 그해 여름쯤 상하이에 가기로 작정했다. 그동안 중국 땅에서의 ’비합법적 활동’에 부정적이던 이승만은 ‘필라델피아 독립선언‘후 워싱턴에 임정대통령 사무실을 차리고 ’대한민국 특파구미주찰위원회(大韓民國 特派歐美駐紮委員會) 설치를 공포, 8월25일부터 ‘구미위원부’로 통칭한 사살상 임정 외교본부를 가동하여 세계를 상대로 ’임정 홍보‘와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임정 총리 이동휘에게는 “당신은 원동지역을 맡고 나는 이곳서 국제외교를 맡겠다”는 역할분담을 통지하고 1년여를 동분서주 뛰어다닌 것이다. 
 
문제는 ’통합 임정‘(9월13일 출범) 대통령으로서 상하이의 파벌싸움과 ’대통령 공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1920년 5월이래 이동휘와 비서장-차장급 인사들이 짜고 ’대통령 불신임 운동‘을 펼치며 상하이에 부임하지 않으면 불신임 결의를 하겠다는 편지까지 보내 왔다. 
이를 방치하면 임정분열이 불가피하므로 불화를 막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 결국 이승만이 중국행을 서둘렀다고 한다. (이원순 [인간 이승만] 신태양사, 1988. 반병률 [이승만과 이동휘], 유영익편 [이승만 연구] 연세대출판부,2000)

▲ 1941년 이승만이 팔을 낀 평생친구 보스윅. 1920년 이승만의 중국 밀항선을 주선해준 하와이 사업가.(오른쪽)ⓒ연세대이승만연구원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떠난 이승만은 6월말 하와이로 돌아와 중국행을 준비한다.
김규식과 노백린(盧伯麟,1875~1926)도 동행하려 했으나 일행이 많으면 위험하다. 무국적자 이승만이 미국 여행증을 받는다면 다 노출된다. 상하이까지 밀항(密航)하는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목에는 일본이 30만달러 현상금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이원순 [세기를 넘어서] 신태양사, 1989)
 
 임병직과 단둘이 가기로 정한 이승만은 일본에 기항하지 않는 배편을 주선해달라고 친구 보스윅(William Borthwick)에게 부탁한다. 호놀루루 저축은행장까지 지낸 보스윅은 당시 장의사를 운영하며 이승만을 도와왔는데 뒷날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는 ’50년 지기’가 된다. 그는 이승만 일행을 자신의 별장에 숨겨두고 배편을 알선하였다. 겉으로는 이승만이 이미 상하이로 떠난 것서럼 가짜 소문을 냈다. 
마침내 11월16일 새벽,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배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서 목재를 싣고 상하이로 직행하는 네덜란드 화물선 웨스트 하이카(S.S. West Hika) 호, 보스윅의 부탁과 선장의 지시를 받은 2등 항해사 스나이더(Snyder)가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 임정대통령 이승만과 임정 외무장관대리 신익희. 1921년 상하이에서.(오른쪽)

◆“결단코 이곳으로 오지 마시옵소서”
 
이승만은 일찍이 상하이 지지세력들로부터 임정의 불화를 잠재우고 반대파들의 저항을 진압할 아이디어를 구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의 중국행을 반대한다는 편지를 전해왔다..
외교담당 장관급 차장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는 경기도 광주출신 ‘기호파’이다. “임시정부는 한마디로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평을 들어왔으며, 이를 혁파할 묘책은 안보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6, 외무부)
‘당동벌이’란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한패가 되어 다른 사람을 물리침’이란 의미로 임정의 패당싸움이 처음부터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임정 수립 주도자의 한명인 현순(玄揗)도 이승만의 상하이 부임을 “극구 반대”한다며 “굳이 오시겠다면 자금을 얼마쯤이라도 가져와야 합니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측근 통신원 안현경과 장붕은 더더욱 부정적이었다.
“결단코 이곳으로 오지 마시옵소서. 샌프란시스코(안창호파)와 상하이 몇몇 야심가(이동휘파)들이 내응이 되어 세 분(이승만-김규식-여운홍)을 상하이에 끌어들여야 미주-하와이 일이 해결된다 하였고, 대통령께서 이곳에 오시면 안창호는 미국으로 간다합니다” (안현경, 1920.4.23)
 
“각하를 이곳으로 오시라는 운동은 모두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여러 가지 작은 허물을 찾아내어 공박하자는 의도에 불과하며, 또 각하를 위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시는 것을 원치 아니 하나이다. 연일 국무회의도 하고 차장들이 비밀히 단결되어 각하를 공격할 하자도 찾고 방책도 연구하는 듯 하외다. 추신: 만일 오시려거든 돈 기만원을 가지고 오셔야하며, 또 사용(私用)할 기밀비도 기만원 있어야 하겠소이다”” (장붕, 1920.7.16.)
 
임시의정원 의장 장붕의 다른 편지에 나오는 색다른 지적도 눈길을 끈다.
“안창호가 임정의 3분의2 이상을 독점하고 있으니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 
실제로 “안창호가 상하이에 와서 황제노릇 한다”는 반발이 일어날 정도였다.(안창호 [도산일기]). 당시 안창호는 미국에 이어 상하이 흥사단 비밀조직하느라 물심양면 전념하여 1920년 9월20일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결성하는데, 해방 때까지 유력자만 190여명으로 중국지역 독립운동가들을 뛰어넘는 규모다.
 
안희경과 장붕의 보고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없을리 없다. 
한인사회당 김립(金立, 1880~1922)이 당수 이동휘에게 사흘마다 보낸 편지들. (★한인사회당은 레닌 혁명후 1918년 볼셰비키 지원을 받아 이동휘가 하바로브스크에서 창당) 그 한 대목만 보자.
 
“....승만을 몰아내고 다시 국(局)을 정리하려 힘쓸 마음이 많았소이다....설사 승만이 상해에 오지 않을지라도 상해 국중(局中)에 안창호가 공심이 있는 자이면 동심협력하여 이 국을 일신할 수 있아오나...” 이것은 1919년 7월의 편지, 임시정부 통합(9월)이 되기 전에 이미 좌익 이동휘 일파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통합임시정부를 꾸리자는 모의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승만 반대세력이 이승만의 상해행을 끈질기게 요구한 행위는 ‘이승만 퇴출 계략’ 그것이었다. 
 
이승만은 임시의정원(국회) 의장 장붕에게 편지를 쓴다.
“재정을 다소간 휴대하고 와야겠다 하심에 심히 난처한 일이라. 내가 어디에서 재력을 득하여 유력정치객들의 수단을 당하오리까. 내게 있는 성력(誠力)으로 대신하고자 할 따름이외다.”

▲ 1920년12월28일 이승만 임정 대통령의 상하이 부임 환영식. 가운데 화환을 건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에 안창호. 왼쪽에 이동휘 국무총리. ⓒ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합시다”
 
12월5일 상하이 황푸강(黃浦江) 부두에 도착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인력거를 타고 중국인 여관 멍위엔관(孟淵館)에 들었다. 장붕부터 만나 현지 브피링을 들은 뒤에 이승만은 임정에 도착사실을 알렸다. 임정은 이승만을 상하이 최대규모 벌링턴(Burlington) 호텔로 옮겼다. 12일엔 여운형의 주선으로 프랑스 조계 안의 미국인 선교사 크로푸트(J.W. Crofoot) 집으로 다시 옮긴다. 신변안전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에서 상하이를 떠나는 5월까지 머무른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상하이YMCA 미국인 총무 피치(George A. Fitch) 목사와 친밀해진다. 
 
다음날 13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처음 정부청사에 나타나 직원들을 먼저 접견하였고, 임정 각 부서는 업무보고서를 만들어 이승만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 오후 7시30분 교민단 사무소에서 환영식이 열린다. 
‘환영 대통령 이승만 박사’라는 금글씨 대형 한글 현수막과 태극기와 만국기로 장식한 식장에는 임정 각료들, 의정원 국회의원들, 현지 동포사회 인사들로 300여명이 북적거렸다. 박은식, 이일림, 안창호의 축사에 이어 이승만이 답사를 한다. 
감사와 감회를 피력한 다음 “많은 금전이나 대정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여 기대감에 파문을 일으켜 놓은 이승만은 ‘독립전쟁론’을 터트렸다.
 
“미구에 기회가 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이 하고 각각 사업하며 비밀히 예비하여 단도와 소총 한 개씩이라도 사서, 적어도 두 놈은 죽이고야 죽겠다는 결심을 가집시다”
외교독립론 주창자 이승만, 이런 말은 이동휘 세력은 물론, 박용만, 신채호 등 무장 투쟁론자들을 의식한 대통령의 수사 만이 아니다. 뒷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국민총궐기 동원령을 방송하고 피흘려 싸우자며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가. 
 
상하이 임정의 파벌싸움을 정조준, 이승만은 ‘단합’을 부르짖었다.
“세상이 우리를 단합하는 민족이라 하니 기쁘외다. 단합에 견고를 더하여 넘어져도 한결같이,일어나도 한결같이 향진합시다...(중략)...왜탐정과 이완용을 제하고는 다 한 지체이데, 한사람이라도 불합이라 하면 우리 사업에 그만치 해가 되리다. 어느 곳에서 작정하고 동원령을 내릴 날이 있으리이다.” ([독립신문] 1921.1.15. ‘우리의 처음 맞는 대통령의 연설’)
[독립신문]은 이날 ‘장시간의 연설이 청중들에게 심각한 감동을 일으켰다’고 썼다.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우리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 전장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예”하고 나서자」 이런 환영 찬양 기사는 이동휘, 안창호 등 수뇌부의 암투와 전혀 다른 일반 망국민의 독립열망을 토로한 것이리라. 
새해 1923년 1월 1일엔 신년 축하식을 거행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정 각료 및 의정원  등 다 합쳐 겨우 59명, 이들이 출신지역과 이념과 이해관례로 찢어지고 갈라져 날마다 싸움질이다. 이승만은 이들 전원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다시 날이 밝자 벼르고 벼르던 이동휘의 붉은 입술이 드디어 폭발한다. <계속>

▲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 59명이 1921년 1월1일 이승만대통령과 신년축하식후 기념 촬영.ⓒ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건국사(17) 스탈린의 민족통일전선과 이동휘, 그리고 안창호

◆상하이 통합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
 
임시정부 이래 대한민국의 모든 비극은 레닌의 1917년 ‘10월혁명’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9월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이후 난립한 임시정부들 가운데 주요한 3개를 묶어 만든 것, 안창호가 주도한 통합과정에서 시베리아의 ‘한인사회당’ 설립자 이동휘(誠齋 李東輝,1872~1935)를 끌어들이면서 ‘좌우합작’ 정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미국식 자유민주공화주의자 이승만, 2인자 국무총리는 소련 레닌의 ‘특별지원’을 받는 이동휘를 앉혔으니 출발부터 정면충돌이다.
 
★3개 임정=대한국민의회(3.17), 상하이 임시정부(4.11), 한성임시정부(4.23)★

▲ 1917년 러시아 공산화 쿠데타 직후 연설하는 레닌(자료사진).

레닌은 3.1운동 다음날 1919년 3월2일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국제공산당)을 설립,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항하여 약소민족들을 소련 공산당 중앙집권체제로 일원화하는 ‘국제공산당 기구’를 출범시켰고,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4월 거기에 가입했다. 
 
이동휘는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은 거의 모른 채 ”소련의 힘을 빌어 군사를 키워서 왜놈을 물리치자“는 무장투쟁에 전념하는 열혈 독립원동가였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함께 ‘고려공산당’을 만든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1886~1947)의 증언이다. (김준엽-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⓵, 청계연구소,1986)
 
사실 당시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거의 비슷하였다. 레닌 등장 훨씬 전부터 만주와 중국,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이합지산을 거듭하던 때, 게다가 일본군에 쫓겨 소련 땅으로 몰려든 고립무원의 한인 무장대들이 선택할 길이 어디겠는가. 코민테른의 그물에 다 걸렸다.
 
대륙에 붙은 한반도 지정학(地政學)의 희비극 드라마, 자유민주 독립운동가들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와 미국에 있었다. 이들까지 모두 대륙으로 갔다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일컬어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한민족을 끌어내 선진화시킨 선각자”란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공산주의자도 못 되는” 이동휘가 왜 이승만을 축출해서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공산체제로 뒤집으려 했던가. 그의 인물과 행적을 요약해 살펴보자.

▲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이동휘.(자료사진)

◆고종의 총애 받은 ‘왕당파’...‘무산계급의 왕’ 레닌 만나다
 
20대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미국을 발견하고 “자유의 유토피아” 미국 같은 나라 만들자며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중간목표로 입헌군주제 깃발을 들고 고종과 싸우다가 반역자로 몰려 투옥, 6년간 고종의 탄압을 받은 뒤에 미국 유학까지 마쳐 확고한 ‘전체주의 반대’ 자유민주형 지식인이 되었다.
 
 
반면에 이동휘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동휘 약력★
-1873 함경남도 단천 출생. 군청 통인, 
-1891 한성무관학교 졸업. 궁정 진위대 근위장교(육군 참령), 강화도 진위대장, 
-1905 을사 조약후 반일운동, 대한자강회 강화 지부장
-1907 군대해산때 봉기 배후자로 감옥살이.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
-1911 일제의 ‘105인 사건’때 피체, 인천 무의도 유배.
–1913 간도로 망명.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1914 이상설 이동녕 등과 ‘대한광복군 정부’ 조직, 부통령.
-1917 레닌 혁명후 ‘볼셰비키와 연대한 항일무장투쟁’ 주장.
-1918 볼셰비키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지원받아 ‘한인사회당’ 창당.
 
위에 보듯이 10대 시절부터 무관교육을 받은 이동휘는 왕실을 보위하는 청년장교로 출세를 거듭하며 고종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왕당파’가 되었다. 더구나 망국후의 반일운동은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 ‘근왕주의자’로서 의병을 일으키고 항일투쟁을 벌인 것과 같다. 여기서 그가 만주로 망명, 사관학교를 세우며 ‘광복군정부‘까지 조직, 독립군활동을 지원하다가 앞장서서 소련의 “볼셰비키와 연대”하던 시기의 국제상황을 둘러봐야한다.
 
세계1차대전중 감행한 레닌의 폭력혁명은 러시아 짜르체제를 무너트린 ‘2월혁명’의 산물 케렌스키 공화정을 타도한 것이었다. 혁명성공과 동시에 ‘휴전’을 제의하는 한편, 교전국 독일-오스트리아는 물론 연합국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인민들에게 ‘반전투쟁’과 ‘공산혁명’을 전개하라고 선언, 본격적인 선동전을 펼쳤다. 
이에 격분한 연합국들이 레닌 정권을 응징하자며 1918년 군대를 동원한다. 이른바 적군(赤軍)-백군(白軍) 전투이야기, 백군중 맨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역시 ‘러일전쟁’의 승리자 일본이었다. 해군함대와 육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출병하여 중국과 재빨리 손잡아 중국군까지 동원하였고, 출병한 김에 만주지역 한인 독립군들을 제거하는 ‘소탕작전’을 벌인다. 미군도 8월에 그곳에 상륙하지만 그때의 미군은 오늘의 미군이 아니다. 같은 연합국 일본의 한인 학살은 관심 밖이었다.  
 
레닌은 다급하였지만 전술적이다. 연합국과 상의도 없이 독일과 일방적 휴전을 맺고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내준다. 백군들과는 ‘분산과 집중’ 전술로 대응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의 무장자원을 총동원하는데, 일본군의 무차별 만행에 쫓겨오는 만주지역 한인독립군 무장부대를 방패막이로 이용하였다. 이때 조직을 잃은 한인 병력을 소련군에 편입시키면서 정당조직으로 ‘한인사회당’, 곧 한인 공산당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즉, 레닌 혁명정권이 시베리아 전역에 지방 공산당을 조직해갈 때, 이르쿠츠크 공산당에 ‘한인부’를 설치한 것이 1월이고, 6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결성된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정당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의 위원장은 이동휘, 주요 인물은 김립(金立), 유동열(柳東說), 오성묵(吳成默), 이인섭(李仁燮), 김 알렉산드라 및 오 와실리 부부등이다.
 
이동휘가 이승만을 배척하며 비난한 말이 남아있는데 흥미롭다.
“이승만은 아직 사회주의 소양이 무(無)한 즉, 식견이 미국의 정치제도를 불유(不踰)하야 진정의 평등 자유의 공리는 불오(不悟)할 듯 하다.” 풀이하면 ‘이승만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넘지 못해 사회주의에 무식하므로 진짜 자유평등을 모를 것’이란 말이다. (장붕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1920,8,21 [이승만 동문서한집] 연세대 출판부, 2009)
 
볼셰비키 선전 팀과 교류하며 사회주의(소련 공산주의)를 익힌 이동휘는 새롭게 눈 뜬 자유평등에 감복하여 미국의 자유평등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환호하였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신식교육은 받은 적 없이 중년까지 황제를 모시던 무관 근왕주의자에게는 ’무산계급의 독재자‘ 레닌이 자유평등의 왕으로 비쳤던 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23세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미국의 자유평등을 발견하고 매료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발등의 불' 무장투쟁을 도와줄 든든한 협력자 소련 볼셰비키를 만난 이동휘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공산정권과 손을 잡았다. ’왕정복고‘ 독립투쟁의 목표가 이젠 ’사회주의 자유평등 독립국가‘로 바뀐 셈이다.

▲ 상하이 임시정부때부터 6.25침략까지 대한민국 공산화에 총력을 기울인 소련 독재자 스탈린.(자료사진)

◆영토 야심가 스탈린은 ’민족 통일전선‘ 지휘자
 
미국의 윌슨보다 먼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레닌과 볼셰비키 민족문제 책임자 스탈린에게 ’민족‘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자본주의 붕괴와 함께 소멸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무기”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만 필요하며 그 체제 수호의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게 사용되도록 분야마다 정교한 정책을 짰다. 그 전략 전술적 이름이 ‘민족통일전선’이요, 약칭 ‘통일전선’이다.
 
“만약 유럽민중이 궐기해서 제국주의를 섬멸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섬멸되고 말 것”
(트로츠키, 1917.11.8.일 혁명 다음날 연설)
“1년 뒤에 우리는 유럽에 공산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할 것이다. 그때까지 전 유럽이 공산주의 일색이 될 테니까.” (지노비에프,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장,1919.3.2.)
 
민족문제위원장 스탈린은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논문에서 우랄산맥 동쪽 여러 민족을 볼셰비키화를 통하여 제정러시아 시대의 영토를 부활시키고 있다고 큰 소리쳤다.
“...이들 변경지방은 중앙 러시아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없이는 독립적 존재를 수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정에다 ‘공산주의 민족강령’ 명제를 가미한 것이 공산주의 러시아의 민족정책 성격 규정이다...” ([스탈린 전집] 러시아공산주의 민족정책, 일본 도쿄 오오츠키 서점,1952.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그 변경지방은 1차적으로 중앙아시아이고 다음은 몽고, 중국이며, 조선왕 고종이 아관파천 하였던 ‘고려반도’ 역시 예외가 아닐 터이다.
그 단초가 바로 앞에서 본 ‘한인사회당’의 등장이고 그것은 한민족을 끌어안는 볼셰비키 통일전선의 첫 작품이었다. 

▲ 도산 안창호와 성재 이동휘(오른쪽).

◆‘서북파’의 두 지도자 안창호와 이동휘
 
지리(地理)의 힘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1차적 요소이다. 파란만장한 한반도의 역정이 그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이래 표면화한 서북파와 기호파의 대결은 현대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지역감정’의 참극을 빚어낸다.
서북(西北)이란 관서(關西: 평안도)와 관북(關北:함경도)의 합성어로 그 연합체가 서북파, 기호파(畿湖派:경기, 충청, 황해)와 오랜 세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었다.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의 지적대로 고려 인종때 일어난 ‘묘청의 난‘(1135)이 갈림길이다. 
 
서북파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 출신,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언론파‘와 ’무장파‘의 양대 기둥이다. 
안창호가 연해주로 사람을 보내 레닌을 추종하는 이동휘를 불러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려는 근저에 지역감정은 조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왕조 500년은 유별난 한국적 지역감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색당파가 그것이고 성리학 학파들이 그러하다. 국적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하려는 상하이 임시정부 역시 파벌싸움이 잠잘 날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 중심은 지역감정이 먼저였다.

▲ 구한말 최고의 근대적 지식인 가운데 한사람 좌옹 윤치호(1865~1945). 왼쪽은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 친필본. 오른쪽은 영문일기.(자료사진 모음).

★윤치호 일기---안창호가 왜?★
 
“안창호씨는 서북인으로 기호인을 싫어한다. 기호인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는다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한다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윤치호 일기] 1920. 8.30)
“하와이, 미국, 시베리아, 만주, 상해의 조선 사람들이 서북파와 기호파로 갈려있다. 서북파의 지도자 안창호는 먼저 기호파를 제거한 다음에 독립해야 한다고 하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윤치호 일기] 1931.1.8.)
 
“파벌은 민족최대의 병폐다. 안창호가 이끄는 서북파는 기호파을 미워한다. 안창호 같은 지도자가 왜 난국에 빠진 민족의 파벌을 조장하여 화해 불가하도록 적개심을 갖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윤치호 일기] 1931.4.17.)
 
“안창호가 말하기를. 일본은 불과 몇십년 동안 적이지만 기호인은 500년 동안 우리의 적이므로 기호인을 먼저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데, 믿을 수가 없다....신흥우와 여운형이 서북파에 대항하는 단체를 조직하자는 것을 만류했다.” ([윤치호 일기] 1933.10.4.)
 
“심사숙고 끝에 여운형에게 말했다. ’서북인은 오랫동안 억압받아왔다. 그들은 신분상 이질감 없이 응집력이 있으며 지도자가 많다. 흥사단의 안창호 같은 지도자를 배출시켰다. 일본인보다 기호파를 더 미워하기 때문에 일본당국은 이를 이용하여 분열을 조장할 것이다.”([윤치호 일기] 1933.10.6.)
 
“중앙호텔로 안창호씨를 찾아가 단독 면담하다. 기호파를 비난했느냐고 물었다. 안창호는 자기가 조선 사람들에게 지역감정을 부추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오히려 이승만 쪽에서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창호는 매우 말을 잘하는 이야기꾼이다.”([윤치호 일기] 1935. 3.24)
 
여기까지 [윤치호 일기]를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안창호 발언의 진위와 관계없이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뒤엉킨 지역감정이 얼마나 완고한 고질이었는지를,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 양파의 뿌리깊은 경쟁의식을 보여주고자 함에서다.
 
 
◆“임시 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
 
모든 혁명전술이 그렇듯이 스탈린의 ‘민족통일전선’에서도 ‘혈연, 지연, 학연’ 등등 계급투쟁에 필수적인 에너지 분노와 증오를 극대화시킬 생산요소를 총동원한다. 레닌의 ‘통일전선’ 원칙을 스탈린이 실천적으로 구체화한 것, 영토적 야심가는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며 현장 중심 입체작전을 펼쳐 단기간내 대박을 터트린다.
한반도의 경우 윤치호는 일본의 분열공작을 걱정했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스탈린이 정교한 한인정책에서 국내외 한인들에 내재된 갈등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했음은 물으나 마나다. 
이동휘에게 한인사회당을 만들어주고 그 지도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에 투입함으로써 제2의 통일전선을 꾸리는데 성공한 ‘스탈린의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이동휘는 얼마 뒤 “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라며 레닌으로부터 거액의 공작금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보자.
 
안창호가 불렀을 때 이동휘는 처음엔 거절했다고 한다. 이승만 등의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서를 들어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싫다’는 이유였다는데, 김립 등 측근들과 소련 코민테른 지원자의 설득에 응하여 상하이로 출발했다. 그리고 9월 11일 통합 임정이 출범한다.
그때부터 초대 임정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에 오기까지 1년 남짓, 그동안 국무총리 이동휘는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지원 속에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느라 분주하다.
이제 미국파와 소련파, 기호파와 서북파의 리더들이 합류한 임시정부는 무슨 활극을 보여주려나
 

이승만 건국사(18) 레닌의 거액 공작금...“안먹은 사람 드물다”

▲ 중국인 옷 입은 이승만 임정대통령, 경호담당 경무국장 김구(오른쪽).

김구는 그동안 명성으로만 알고 있던 이승만을 처음 만났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소재 임시정부 청사에 나타난 초대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경무국장 김구는 그날부터 ’대통령 경호‘라는 임무가 더 늘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부임을 전후한 당시 임시정부(임정) 상황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기미년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장관)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에 따라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김구 [백범일지] 돌베개, 1997)
 
소련 레닌이 임정과 같은 해 출범시킨 코민테른의 ’국제공산화‘ 물결이 세계를 삼키는 시기, 스탈린의 노림수 ’동방‘의 상하이에 숨어있는 임시정부에도 붉은 태풍이 덮쳐왔다.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국무총리의 공산주의 대결! 첫 걸음부터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은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공산주의와 싸워 이겨야 살아남는 기구한 '지정학적 운명'을 그때 걸머지고 탄생했던 것이다.

▲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 임시정부 청사(자료사진)

이동휘, 임정 장악후 ’고려공산당‘ 조직...레닌의 공작금 확보
 
1919년 9월 통합된 임시정부 국무총리는 이동휘, 그 총리 비서와 국무원(정부) 비서장을 겸직한 사람은 이동휘의 ‘심복중의 심복‘ 김립(金立, 1880~1922, 본명 김익용, 가명 3개)이다. 
대통령 없는 임정의 실권을 모두 장악한 두 사람이다. 
이동휘와 동향(함경도 명천)인 김립은 한일합방 직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영, 이동휘와 함께 만주 무관학교 교수도 지냈다. 볼셰비키의 지도로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명망있는 이동휘를 간판으로 내세운 김립은 누구인가. 상하이에서 흥사단 신문 [독립신문]을 만들던 문인 이광수 등 여러명의 증언이 놀랍다. “김립은 책사(策士)로서 임정을 소비에트와 처음 연결한 사람” “파괴도 건설도 탄복할만한 정치수완” “조화를 잘 부리는 음모가” 등이다. 
 
임정을 한 손에 쥔 두 사람은 또 한명의 심복이자 볼셰비키 전문가 한형권(韓馨權)을 모스크바로 파견한다. 이동휘가 임정 몰래 ’임정 대표‘ 문서를 만들어 보낸 한형권은 김립의 전략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다. 빨리 인정해주고 대폭 지원해 달라”
클레믈린에 한형권을 불러들인 레닌이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냐?”
한형권은 크게 부른답시고 200만루블이라 대답한다.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데 그걸로 되겠느냐”고 했다. 당황한 한형권은 각지에서 동포들이 도와준다고 얼버무렸다. 레닌은 칭찬하면서 200만 루블을 주라고 외교부에 지시하였다. 200만 루블은 현재 평가로 2,0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쾌재를 부른 한형권과 이동휘-김립은 약속한다. 이 돈은 “임정이 절대 모르게 우리만 써야할 공산혁명 자금이다.” 
만주까지 마중 간 김립은 한형권과 비밀을 다짐하고 일부 금액을 가지고 돌아온다. 12월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전에 이승만 축출용 비밀 공작금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모스크바 코민테른 본부의 극동국은 1920년 4월 상하이에도 극동국을 설치한다, 책임 비서는 보이친스키, 바로 2년전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결성을 주도했던 장본인이다. 이번엔 중국공산당 결성과 이동휘를 앞세워 한인공산당, 즉 ’고려공산당‘ 설립이 주임무였다. 
새로 발족한 동양 비서부에 중국부, 한국부, 일본부를 만들었고 한국부(고려부) 조직원은 이동휘, 김립 등 임정 고위층이다. 
코민테른의 한국혁명 목표는 일석이조(一石二鳥), 고려공산당 만들어 임시정부를 탈취, 또는 전복시키고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그 무기는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국무총리직‘과 코민테른의 공작금, 이를 보이친스키가 잘 운용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새로운 공산당 조직에 나선 이동휘와 김립은 임정 내외의 주요인사들은 물론, 상하이에 몰려든 청년남녀들을 비밀리에 포섭한다. 총책 보이친스키는 유망한 지식인들에게 레닌주의 의식화 교육을 맡았다.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것이 이때였다.
 
★이때의 일도 김구는 [백범일지]에 남겼다. 이동휘의 김구 포섭 이야기.
「공원에 산보가자는 이동휘를 따라가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를 좀 도와주시오”
김구는 얼핏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무슨 유감이 있나. 이동휘는 아니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대저 혁명이란 유혈 사업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하고 나면 또 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될 것이니 두 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아우님)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우리가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지않고 공산혁명을 할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오” 이동휘의 대답을 듣자 김구는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일이라 거절하고 ’자중‘을 권고했다」

▲ 1921년 46세 이승만 임정 대통령, 48세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오른쪽).

◆ “매국노 이승만은 반성하고 사퇴하라” 이동휘 막말   
 
앞장애서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낸 편지로 보았듯이 ’공석‘을 핑계 삼아 이승만을 빨리 상하이로 오라고 재촉한 것은 다목적 계락이었다. 미국과 이승만의 ’관계단절‘과 하와이 동포의 돈줄 가로채기, 대통령 체제 없애기, 공산당의 권력 독점 등 ’데려다 놓고 죽이기‘ 작전이다. 
이승만이 나타나자 “위임통치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요구가 약속이나 한 듯 사방에서 터졌다.
 
★’위임통치‘란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말한다. 3.1운동 발발 직전, 병상에 누웠던 이승만은 정한경이 만들어온 문서를 읽어보고 찬동하여 서명한 일이다. 내용인즉 ’새로 설립되는 국제연맹이 한반도에서 일본을 물리쳐주고, 완전독립을 전제조건으로 일정기간 안정화 통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국제연맹 창립에 즈음하여 다른 식민지 약소민족들이 원하던 방식이었다. 대한인국민총회 안창호 회장도 회의를 거쳐 결재하였고 정한경은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상하이 여운형도 중국정부를 방문한 미국특사 크레인을 만나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요청하고 긍정적 대답을 듣자 ‘신한청년당’을 급히 만들어 독립청원서를 크레인에게 주었으며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 김규식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국제연맹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 이동휘 일파는 ’매국노는 사퇴하라”고 밀어붙인다. 김립은 그동안 임정 인사들을 설득해 놓았던 ‘임시정부의 제도개혁문제’를 공식 제기하였고 이동휘는 이를 이승만에게 국무회의석상에서 날마다 요구하며 “성난 사자처럼” 막말을 쏟아낸다.

▲ 30대시절 안창호(왼쪽), 김규식 박사.

◉이동휘=“위임통치 떠드는 자들은 이완용보다 더 한 역적이다.” 이것은 2년전 임정 통합때 신채호가 한말-‘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대통령 이승만’ 선출을 반대하던 비난 그대로다. 
“유약한 민주주의냐? 강철 같은 철혈주의냐? 선택하라” 이동휘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맹공한다. 철혈(鐵血)주의는 무장투쟁 독립론, 그때 북경의 박용만과 신채호 등은 정부형태의 군사위원회와 ‘철혈단’도 만들었다. 하와이에서 궁지에 몰려 떠났던 박용만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를 맨 처음 상하이에 알려주고 규탄운동을 벌여왔으며, 이에 호응하듯 이승만의 중국행에 맞춰 무장 암살단이 상하이로 숨어들었다.
이동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임시정부 체제를 ‘위원제’로 전면 교체하라” 최종목표 ‘소비에트식 위원회체제’를 들이댄다. 모스크바 레닌 앞에서 장담했던 임시정부 혁명안이다. 이승만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기자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도 거부당한다.
 
◉김규식=자신도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국제연맹에 냈던 김규식이 '위임통치'를 가지고 이승만을 공박한다.
“그땐 내가 바빠서 몰랐는데 사과하고 탄핵안이 나오기 전에 사임하시오.” 김규식은 이승만이 임명한 구미위원부 위원장,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장면이다. 이승만이 설명하고 설득하자 김규식은 사퇴하겠다며 욱박질렀다. 이승만은 즉석에서 수리하였다. 
 
◉안창호=뜻밖에도 안창호가 ‘임정 체제변경’에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공산주의 전문가 김립이 주장한 ‘제도변경’의 이유는 ‘효율성’이다. 상하이에 집중된 현행제도는 효율성이 없으니 ‘분산제도’로 변경하여 각자의 소재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상하이에는 김립이 총책으로 각처를 조절하는 연락부만 두어도 된다는 ‘대안’ 제시, 그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임정탈취 작전이다.
‘효율성’이란 초기 공산주의에서 주장하고 활용한 자본주의 체제 불지르기 첫 폭발물이다. 
그것이 '임정 공산화 혁명' 전술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 2년간 임정을 좌지우지하던 안창호가 '제도변경'에 호응하고 나섰다. 
제도변경위원회(안창호, 김규식, 신규식)와 외교위원회(안창호, 김규식, 노백린, 신익희)를 구성하고, 날마다 임정 개혁문제를 논의, 이승만 대통령 사임 이후 권력배분까지 갑론을박하는 판이었다. 
이미 임정은 1년간 이동휘와 김립의 심리전을 통하여 ‘이승만 제거-정부 개조’의 공감대가 무르익었던 것, 공산주의 이론도 실제도 모르는 애국지사들의 순진함이라 이해해야 할까. 사실은 공산주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지역감정과 권력 이기주의가 몇 배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악용하는 것이 공산주의 전술 아니던가. 

▲ 박용만, 신채호, 김원봉(왼쪽부터).

◆‘레닌 자금’ 들통...이동휘, 사표 던지고 모스크바로
 
한형권이 교섭하여 레닌이 제공한 200만루블은 금괴가 많아 엄청 무거웠다. 일단 60만루블만 가져와서 40만루블은 빼돌리고 김립이 상하이로 가져와 나누고 살포하였다.
 
「공산당의 공식보고에 따르면, 40만루블 가운데 한형권의 활동비로 6만루블, 도중에 없어진 4만8천루블, 상하이 고려공산당에 15만루블, 김립이 사용한 것이 11만루블이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3권. 앞의 책).
고려공산당은 15만루블 가운데 본국 국내 조직에 4만5천루블, 중국 및 대만 공산당 조직을 위해 1만1천루블, 일본 공산당 조직을 위해 1만1,500루블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 공작금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의열단 김원봉이었다. 북경 신채호의 역사서편찬에 지불하고, 이극로의 중국어-러시아어 회화책 출판비, 김규식의 모스크바 여행비로도 쓰였다고 한다.
고려공산당 당원 포섭용으로 뿌려진 공작금이 얼마인지는 자료도 없다. 일부 인사는 사생활에 호사를 누렸으며, 상하이 청년들 치고 “그 돈을 안써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는 회고담도 전해진다.(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김립은 레닌의 금괴를 빼돌려 북간도 가족을 위해 토지를 매입하고 자기는 상하이에 숨어서 광동출신 중국여인을 첩으로 삼아 향락하였다“(김구 [백범일지] 앞의 책)
 
이러니 이동휘와 김립의 비밀자금 약속은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설전이 폭발하고 말았다.
임정 측은 ”국무총리가 레닌이 임시정부에 보낸 거액을 혼자 착복하였으니 대역범죄“라 들고 일어났다. 이동휘는 ”임정이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제공한 자금“이라며 반격한다. 맞는 말이다.
”더 이상 이승만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 이동휘는 결국 사표를 던지고 사라진다. 임정변혁은 김립에 맡기고 거액을 지키려 사퇴한 그는 몇 달 뒤 모스크바에 나타난다. 레닌과 새로운 '약속'을 위해서.
 
★이승만, 공산당 공세와 파벌 염증...암살 위협에 상하이 탈출
 
이승만은 진작부터 상하이 임정에 비판적이었다. 불법적 폭력운동에 매달려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고, 지역파벌 정쟁이나 일삼는 수구적 정치집단의 행태는 구한말 의병활동의 연장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새해 연두교서도 발표하여 현실에 맞는 임정의 활동목표와 벙법론까지 제시하며 설득도 해봤지만 구제 불능 상황이다. 이동휘도 떠났고 안창호마저 사퇴한다며 들락날락이다.
이승만은 이동녕(李東寧) 등으로 ‘기호파 내각’을 구성해 놓고 ‘결별’을 선언한다. 상하이 부임 5개월 남짓. ”나는 구미위원부에서 할 일이 많다“며 마침내 5월19일 짐을 꾸렸다.
당시 상하이에는 벼라별 폭력살인 범죄 조직들이 100개를 헤아릴 정도였다고 한다. 북경의 암살단 소문에 일제의 밀착감시까지...시간이 아깝다. 
은신했던 선교사 집을 나와 며칠 동안 미행을 따돌리며 숙소를 옮겨다니다가, 피치 선교사가 사준 표를 받은 이승만은 마닐라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것도 안면있는 미국 외교관를 우연히 만나 ‘동행’처럼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기도한다. 위기마다 나타나 도와주는 사람들은 필경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으랴.

 

이승만 건국사(19) 세계에서 가장 알기쉬운 '공산주의 비판'

가장 난해한 마르크스-레닌의 가면을 벗기다이승만은 '반공'선언...안창호는 공산당과 '동업'

▲ 상하이 조계지 와이탄(자료사진)

 이승만 임시정부(임정) 대통령이 하와이로 돌아간 뒤, 상하이는 양대 ‘비밀조직’이 세상을 만났다. 하나는 소련 레닌이 이동휘-김립을 앞세워 조직한 ‘고려공산당’이요, 또 하나는 서북파(西北派) 리더 안창호가 1919년 미국서 달려와 은밀히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이다.
당시 독립운동을 한다는 ‘상하이 사람’들은 두 조직중 하나, 또는 양쪽에 가담하게 되었다.
나라도 고향도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들을 움직인 힘은 나름대로의 ‘이념과 돈’이다. 공산당의 선전과 레닌의 공작금, 그리고 안창호의 언변과 재력이다. 안창호는 미국서 교민들로부터 모금한 거액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상하이 1922~1923■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 <1922.1.21.~2.2>
레닌의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극동의 한국-중국-일본을 중심으로 약소민족 대표들을 불러들인 국제공산주의 확산대회, 전체 144명중 56명이 한인(韓人)대표였다. 중국42명, 일본 19명, 몽골14명, 인도2명 등 9개 지역이다.
왜 유독 한인들이 많이 참가했을까.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건 별칭 ’원동(극동)민족대회‘는 같은 시기에 미국서 열리고 있는 ‘워싱턴회의’(1921.11.12.~1922.2.6.)를 지켜보던 소련이 대응한 전략이다. 세계1차대전 연합국들의 워싱턴회의는 파리강화회의처럼 약소민족 문제 처리는 제외하였고, 이에 ‘버림받은 피압박민족’들을 레닌과 스탈린이 품어 안은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에 기대를 걸고 이승만, 정한경 등 대표단을 파견하려 하였으나 워싱턴회의는 한인의 대표성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레닌의 공작금을 체험한 한인들에겐 “소련이 유일한 구세주”로 다가왔고, 이승만 반대세력과 좌파 한인들이 대거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대회 의장단에 레닌, 트로츠키와 함께 김규식(당시 41세) 여운형(36세)이 선정되었다. 임정 학무총장(교육부장관)이던 김규식이 공산당 대표자격이다.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현순도 ‘상해공산당’ 자격으로 참가, 주요인물들은 김상덕 이동휘 박진순 조봉암 박헌영 홍범도 장건상 장덕준 김승학 김시현 권애라 등이다. 6.25때 이승만대통령 암살 미수범 김시현은 이때 만난 권애라와 결혼한다. 밀양폭탄사건 김시현은 일본경찰과 짜고 ‘정보제공’ 대가로 여비를 얻어 참석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주요 연설 내용을 보자.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마치 한국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국가들이 워싱턴에 모인 것 같이 워싱턴회의에서는 코리아란 단어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극동민족대회는 바로 한국을 주요타깃으로 삼았다. 
김규식(대회공동의장, 고려공산당) 연설 요지=”모스크바는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는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고자 함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가면을 쓴 흡혈귀와 같다. 소비에트 러시아 만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 만세!“
기독교도 김규식이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일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운형도 유창한 영어로 연설하였다.
 
대회 결의 내용(한국관계)=첫째, 한국은 농업국이므로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농민중심으로  민족해방 운동을 일으킬 것. 둘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이를 개량하고 촉진시킬 것. 코민테른 고려부가 만든 결의 내용은 임시정부를 혁파하라는 명령이다. 이 대회는 사실상 한국과 중국의 공산화를 위한 전략회의였다.
 

▲ 1922년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반병률 외대교수의 발굴사진)

레닌은 한인대표들을 두 차례 만났다. 여운형의 증언이다.
레닌은 먼저 일본인 대표 가따야마(片山潜)에게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투쟁하겠는가?”라고 묻고, 여운형에게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 물었다. 두 사람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레닌은 “혁명동지라도 사람인 이상 감정을 초월할 수 없는 일이어서 이해와 양보가 필요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다."라고 다짐을 두었다.  
다음날 중국대표 구추백과 같이 갔을 때 레닌은 손문의 혁명운동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레닌의 지침 요지는 ⓐ민족해방운동을 먼저 하고 ⓑ다음 계급투쟁인데 ⓒ우선 상하이 임시정부를 전면교체 하라는 것, 임정전복 지령이다. (여운형 공판조서, 1929,8,6. 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 독립군 장수 홍범도.

레닌, 홍범도(洪範圖, 1868~1943)에게 군복-권총 선물 
대회에 참석한 홍범도(전 독립군 지도자)를 트로츠키가 크렘린 궁의 레닌에게 데려갔다.
레닌은 소련군장교의 군모와 군복, 레닌과 홍범도의 이름 이니시얼을 새긴 권총, 금화 100루블을 선물하며 치하한다. 무엇을?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바로 전해 1921년 6월28일 자유시에선 ‘붉은 군대’가 무장해제와 소련군 강제편입을 거부하는 한인독립군들에게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이미 소련의 요구에 순응했던 청산리 전투의 독립군 장수 홍범도는 독립군 집단학살 작전에 공을 세웠다는 것. 그것으로 ‘토사구팽’당한 그는 말년에 고려인 마을의 극장 수위로 지내다가 숨졌다고 한다. 
 
◆김구, ‘레닌 자금’ 독식한 김립을 대낮에 암살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폐막 직후 1922년 2월 8일 제10회 임시의정원(국회) 개원식이 열렸다. 방청석에 앉아있는 김구는 무언가 다른 연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 시간 상하이 구시가지 거리에서 콩 볶는 총성이 울렸다. 대낮에 벌어진 암살, 즉사한 사람은 총알 일곱 발을 맞은 김립이다. 중국여인과 거처를 옮겨 다니던 김립은 경무국장 김구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구는 레닌자금을 독식하는 임정 배신자를 죽였다고 한다. 하수인 2명은 황해도 안악 고향출신 청년들이다. 김립과 동행중에 총알 세례를 받은 고려공산당 핵심 김철수(金錣洙, 1893~1986)는 재빨리 도망쳐 은행에 달려가, 남아있던 레닌 자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겼다.
 

▲ 모스크바 크렘린 성벽앞 레닌묘(자료사진)

◆레닌의 지령 ‘통일전선 국민대표회의’ 끝내 실패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여운형 등은 레닌의 명령에 따라 상하이 ‘국민대표회의‘를 서두른다.
자금은 한형권이 숨겼던 레닌자금 20만루블을 가져와서 물 쓰듯 풀어놓아 동조자를 모았다. 
여운형 등 고려공산당의 ’임정 제도변경‘에 동조한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발표하자 태풍이 몰아쳤다. 상하이 임정 옹호파는 물론, 본국에서 비판이 폭발하고 하와이와 미주 교민들도 들고 일어났다. 3.1운동과 한성임지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던 국내 이상재를 비롯, 최남선, 오세창, 한용운, 강매 등은 ’경고 해외각단체서‘란 성명을 배포, 그간의 임정 비리를 규탄하며 4개 실행과제를 촉구한다. 첫째 지방 파벌을 배제하라. 둘째 불법 불의한 무리를 징벌하라. 셋째 사사로운 단체들을 해산하라. 넷째 임정을 옹호하고 망동을 일삼지 말라 등이다. 이 성명은 각처에 배송된다. 이승만도 ’대통령의 선언‘을 발표하고 공산당의 세력과 금력을 동원한 국민대표회의가 3.1정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이승만은 임정옹호세력에 ”공산당을 조심하라. 함부로 혼잡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1923년 1월3일, 진통을 거듭하던 국민대표회의가 마침내 미국인 침례교회에서 개막되었다.
고려공산당 이동휘와 코민테른 극동국 보이친스키가 축전을 보냈으나,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격한 대결이 일어났다. “임정을 없애고 소비에트 정부 만들자”(창조파).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부분 개편하자“(개조파). 안창호는 ’개조파‘의 리더이다. 
레닌의 명령을 실현하려는 고려공산당도 쪼개졌다. 이른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헤게모니 싸움, 여운형의 이르쿠츠크파는 새로운 독립정부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고 연호도 바꾼다. 
지켜보던 내무총장 김구가 나섰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라며 국민대표회의 해산명령을 내렸다. 반년 동안 극심한 혼란을 일으킨 레닌의 임정전복 작업은 일단 제동이 걸렸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만주로 떠났다.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일당독주에 돌입한다.
임시의정원(국회)에선 개조파 의원들이 ’이승만 탄핵안‘과 개헌안을 내놓고 임정옹호파와 싸우고 있었다.

▲ 이승만 임정대통령(왼쪽부터)이 1923년 비판한 공산주의 원조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하와이 1921~1923■
 
상하이를 떠나 하와이로 돌아 온 이승만은 미국 신문 인터뷰를 통해 ”비상한 세력으로 확산되는 사회주의 운동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어 ”일본의 팽창과 동양지배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필연적으로 두 번 째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10년 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20년 전에 ’미일전쟁‘을 시사하는 경고성 전망이었다. 
 
◆’동지회‘ 결성...”우리 정부를 목숨 걸고 수호하자“
 
1년전 이승만이 상하이에 부임했을 때 하와이에는 ’교민단‘이 출범했다. 대통령 이승만이 ’국무원령‘ 제2호로 재외동포로 하여금 지역별로 거류민단을 만들어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한 것. 말할 것도 없이 그 같은 조처는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가 중남미 동포들까지 장악하여 사사건건 독주하였기에 교민단체들을 임정 직속으로 바꾸어 버린 이승만이다. 즉 ’국민을 가진 정부 체제‘를 갖추어 국제적 지위를 높여보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 이승만이 이번엔 ’믿을 수 있는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21년 7월20일 하와이 교민당장 민찬호와 상하이 측근 안현경, 이종관 3명이 임원으로 출범한 동지회의 설립 이유를 이승만은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보호하면 정부가 있고 백성이 보호하지 아니하면 정부가 없나니, 이는 10여년 전에 우리 정부를 잃어(한일병탄) 반만년 역사에 수욕을 끼쳤도다...(중략)...남녀 동포는 주저 말고 담대히 나서서 우리 정부를 복종함으로써 완전한 독립을 각국이 승인하도록 만들기를 결심하고 합동단결하기를 촉성하시오.“
이는 상하이에서 뼈아프게 체험한 이동휘의 고려공산당과 안창호의 흥사단, 북경의 박용만일파의 공격 등에 시달린 끝에 결단한 일이다. 안창호의 흥사단은 서북파 엘리트 중심이었지만 국민국가론자 이승만은 일반 교민 중심이다. 특히 15개항의 동지회 규정은 정부옹호 대동단결, 불충불의한 자들에 상당한 척결, 정부의 위난에 몸과 물질을 다하여 응대할 것 등과 ‘중대한 사건’은 극히 비밀을 지키라고 못 박았다. 사생결단의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상하이에서 벌어지는 좌우 파벌이익 쟁탈전에서 ‘정부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느꼈던지를 짐작케 해준다.

▲ 워싱턴회의에 파견된 대표 이승만 임정대통령과 정한경(왼쪽).(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워싱턴회의에 활발한 외교전
 
임정 대통령으로서 11월부터 열리는 ‘워싱턴 회의’에 대하여 이승만은 특유의 외교전을 펼치기로 한다. 상하이 임정이나 서재필 등은 이번에도 한국독립문제에 큰 희망을 건 듯 설치는데 이승만에겐 그런 희망보다 ‘외교 선전장’으로 이용할 가치에 비중을 두었다. 
왜냐하면 국제법 박사 이승만은 이미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이 보여준 약소민족 독립문제 처리 원칙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슬며시 사라지고 독일식민지 나눠먹기로 끝낸 연합국들인데, 더구나 ‘군축회의’로 불리는 강대국 세력균형 재조정을 위한 워싱턴 협상 테이블에 한국문제가 오를 자리는 당초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한국대표 참석은 거부당할 것인데, 그 화살은 ‘이승만의 무능‘으로 집중될 것이 뻔한 일, 더욱이나 상하이에선 ’이승만 축출‘ 국민대표회의 음모가 한창인 판국이다.
비록 참석은 못할망정 얼마나 물 좋은 외교선전장인가. 이승만은 다른 독립 운동가들보다 앞서서 최선의 외교전 준비와 활동에 앞장선다.
예상대로 한국대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만찬외교를 비롯, 악수외교와 선전물 배포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특기할 일은 유명한 영국 작가이자 기자 H.G.웰스(Herbert G. Wells, 1866~1946)를 만나 만찬을 함께 하며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정부 수립문제, 한국의 독립문제 지원에 공감을 나누면서, 맥켄지에 이어 또 한명의 영국 언론인 동지를 얻은 일이다. 

▲ 1923년 이승만 임정대통령이 공산주의를 비판한 글과 게재된 '태평양잡지' 표지ⓒ뉴데일리DB

◆최초의 ’반공‘논문을 발표---<공산당의 당부당>
 
상하이의 공산당과 서북파의 ’반정부 집회사태‘를 지켜보며 ”공산당을 배격하라“ 경고를 거듭하던 이승만은 마침내 자신의 독립운동 매체 [태평양잡지](1923년3월호)에 ’반공‘ 논문을 발표한다. 제목은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즉 공산당의 옳고 그른 점을 분석 정리한 글이다. 
국민대표회의가 한 달을 넘겼을 때 공표한 이 글은 공산주의에 휩쓸린 맹목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가“ 깨우쳐주려는 목적임은 물론, 미주와 본국 등 한국인들을 위한 교육목적이 크다. 왜냐하면 이런 글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제목이 다른 관련 칼럼들이 연재되어 있고, 해마다 공산주의 비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잡지들이 결락본이 많아 확인할 순 없지만, 1924년 7월호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는 국내 동아일보에 보내 게재한 것이며, 1925년 7월호에서도 ‘공산주의’ 제목의 분석비판 글을 발표했다 (김현태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비봉출판사,2016)
언제나 한글전용으로 이승만이 직접 쓰고 편집하는 이 잡지는 하와이, 미국본토, 쿠바, 멕시코, 중국 상하이, 북경, 남경, 만주와 본국에도 밀송되었고 영국과 독일까지 발송하였다.. 
 
청년시절부터 언론인 계몽운동가이자 저술가이며 기독교 민주주의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 임정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공산독재의 소굴로 빨려 들어가는 2천만동포를 어찌 방관할 수 있으리오. 
 
이승만이 언제 어떤 책으로 마르크스-레닌 이론을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광이 기록을 남기도 싶지도 않은 이론이다. 하지만 ‘공산당의 당부당’등 일련의 반공 논문은 이승만 특유의 우리말 비유법을 사용, 공산주의자도 난해하다는 공산주의 이론을 너무나 쉬운 우리말 용어로 바꿔 술술 풀어낸 것이다. 그가 천재라지만 공산주의를 완벽히 체득, 자기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는 1843년 말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1955년 프랑스 지식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아롱보다 32년전 이승만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자유의 적, 인간의 적이다”
이리하여 ‘공산당의 당부당’은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비판 논문이다.
지금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가 읽어야할 글, 아니 자유대한민국 각급 학교와 국민이 기본 교양으로 단숨에 읽어야할 ‘알기 쉬운 공산주의’ 고급 교과서이다. 
선각자 이승만은 레닌의 공산혁명 6년째에 공산주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66년후 소련은 사라진다. 여기 전문을 게재한다. 
 
★공산당의 당부당★  
이승만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공산당 주의가 이 20세기에 나라마다 사회마다 전파되지 않은 곳이 없어, 혹은 공산당이나 사회당이나 무정부당이라는 이름으로 극렬하게 활동하기도 하고, 혹은 자유권이나 평등권의 이름으로 부지 중 전파되기도 하여, 전제 압박하는 나라나 공화·자유하는 백성도 그 풍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가 없도다.
 
공산당 주의도 여러 내용이 있어서 그 의사가 다소간 서로 같지 아니하나 보통 공산당을 합하여 논의해보면, 그 주의가 오늘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도 있고 합당치 않은 것도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이 글의 제목을 ‘당부당’(當不當, 옳고 그름)이라 하였다. 우선 그 합당한 것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인민의 평등주의다. 옛적에는 사람을 반상(班常)으로 구별하여 반(班)은 귀(貴)하고 상(常)은 천(賤)하므로 반은 의례히 부(富)하고 상은 의례히 빈(貧)하여 서로 바뀌지 않도록 구분하여 방한(防閑: 못하게 하는 범위)을 정하여 놓고, 영영 이와 같이 만들어서, 양반의 피를 타고난 자는 병신·천치라도 윗사람으로 모든 상놈을 다 부리게 하고, 피를 잘못 타고난 자는 영웅·준걸의 재질을 타고났을지라도 하천한 대우를 면치 못하였으며, 또한 노예를 만들어 한번 남에게 종으로 팔린 자는 대대로 남의 종으로 팔려 다니며 우마(牛馬)와 같은 대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천년을 살아오다가 다행히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공화(共和)제 이후로 이 사상이 비로소 변하여 반상의 구별을 혁파하고 노예의 매매를 법률로 금하였으니, 이것은 서양문명의 사상이 발전된 결과로서 만세 인류의 무궁한 행복을 가져오게 하였도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반상의 구별 대신에 빈부의 구별이 스스로 생겨서, 재산 가진 자는 이전 양반 노릇을 여전히 하며 재물 없는 자는 이전 상놈 노릇을 감심(甘心: 달게 여김)하게 되었다. 그런즉 반상의 명칭은 없어졌으나 반상의 등분[차별]은 여전히 있어서 고금에 다를 것이 별로 없도다.
 
하물며 노예로 말하면 법률로 금하여 사람을 돈으로 매매는 못하게 하였으나, 월급이라 하는 보수 명의로 사람을 사다가 노예같이 부리기는 마찬가지라.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살며 인간행락(人間行樂)의 모든 호강 다 하면서, 노동자가 버는 것으로 부자 위에 더 부자가 되려고 월급과 삯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구지계(糊口之計)를 잘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 흘리며 노력하여도 남의 종질로 뼈가 늘어나도록 사역하다가 말 따름이요, 그 후손이 태어나더라도 또 그렇게 살 뿐이니, 이 어찌 노예 생활과 다르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산당의 평등주의가 이것을 없이하여 다 균평하게 하자 함이니, 어떻게 이것을 균평히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거니와,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 자체는 옳은 일이니 이는 적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산당 주의 중 부당한 것을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❶ 첫째,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이니, 모든 사람의 재산을 토지 건축 등 모든 부동산까지 합하여 평등하게 나누어 차지하게 하자 함이니 이것은 가난한 사람은 물론 환영하겠지만 토지를 나누어 가진 후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 하든지 일을 아니 하든지 하여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하겠는가.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게으른 가난장이를 먹여야 할 것이요, 가난장이는 차차 숫자가 늘어서 장차는 저마다 일 아니 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나라에 가득할 것이다.
 
➋ 둘째, 자본가를 없이 하자 함이니,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가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을 수 있겠지만 재정가[기업인]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 이용후생 하는 모든 물건이 다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자본을 폐기하기는 어려우리니 새 법률을 제정하여 노동과 평등한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나을 터이다.
 
➌ 셋째,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이니, 모든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의 학식으로 양반 노릇하는 사람들과 대등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가능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다.
 
➍ 넷째,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이라. 자고로 종교단체가 공고히 조직되어 그 안에 인류 계급도 있고, 토지 소유권도 많으며, 그 속에서 인민 압제와 학대를 많이 하였나니, 모든 구교(카톨릭) 숭배하던 나라에서는 이 폐해를 다 알지라. 그러나 지금 새 교회(개신교)의 제도는 이런 폐단이 없고 겸하여 평등 자유의 사상이 본래 열교확장(裂敎擴張) 되는 중에서 발전된 것이라. 교회 조직을 없이 하는 날은 인류덕의(人類德義) 상 손해가 지대할 것이다.
 
➎ 다섯째,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함이라. 이에 대하여는 공산당 속에 서도 이견이 많을뿐더러,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만 보아도 정부와 지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이다. 다 설명을 요구치 않거니와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여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 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하게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이천만이 모두 다 밀리어네어(Millionare 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에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괄호안은 필자)
 
▶ ‘평민시대’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
“....설령 공산주의가 일후에 실시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오늘 구할 것은 공화주의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한 민족 간에 충돌이 없이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우리끼리 충돌날 것을 먼저 시작하는 것은 아무 것도 다 못하게 할 위험이 있은 즉, 남들이 먼저 경험하도록 버려두고, 우리는 먼저 철저한 공화정신으로 다 한 덩어리가 되어 우리 목적을 이루는 것이 차서를 지키는 도리라....”
 
▶‘사회 공산주의에 대하야’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 하고 덮어놓고 따라 나가다가 몇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 풍조에 파동이 되면 그 해가 전체에 미찰까 염려함이라.....우리가 전력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리 민족의 생존책이며 그 원칙을 방해하는 것은 곧 민족의 자살이라....세계주의(국제공산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보다 크고 높다하나 실상은 저희 이익과 세력 확장을 위하야 빈 명사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 우리는 헛되이 속지 말 것이다.”
 
▶‘공산주의’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 <공산주의 이론과 선전내용 비판>
“....우리는 타국과 타민족의 속박을 먼저 면하야 남과 같이 잘 살게 만들어놓은 후에 우리 인민의 평등을 보호하자 하는 것이 가한지라....남의 노예된 백성이 저희끼리 평등성을 가진다 한들 무엇이 상쾌하리오. 그러므로 다 합동하야 우리의 공동 자유를 먼저 회복한 후에 의론해도 늦지 않을지라...”
“...내몸을 없이하야 원수를 놀래는 것이 어찌 원수 갚는 일이라 하리오.....독립은 어찌되든지 다른 주의(공산수의)가 더 높고 더 넓으니 그것을 휘하자 하는데는 결코 찬성할 수 없을자러,...따라서 광복운동이 우리의 생명운동이라...”

 

 

이승만 건국사(20) 안창호는 대통령을 '축출‘...김구는 '벼락 출세'

안창호의 흥사단 서북파의 '쿠데타'국회, 소련식 체제혁명 개헌을 감행김구 주석, 뒤늦게 '이해못할' 설명

1924년 1월21일 레닌이 죽었다. 
잔혹한 희대의 독재자 레닌은 쿠데타 다음해 저격을 받아 총탄이 몸에 박혔다. 2년간 뇌졸중으로 세 번이나 쓰러져 반신불수와 언어장애로 요양하다가 53세로 눈을 감은 것. 그가 남긴 유서는 후계자 문제에서 “스탈린을 쫓아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너무 저속한 인물이다. 서기장 감이 아니다. 온화하고 이성적인 인물로 바꿔라” 레닌은 1년전 스탈린을 제1서기로 임명을 한 것을 후회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이 쓰러지자 즉각 당 조직을 자기사람 1만여명으로 교체,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며 병상의 레닌에게도 폭언을 퍼부었다. 레닌이 죽자 스탈린의 독살설이 나돌 정도였다.
 
레닌이 지어준 이름 ‘철의 인간’ 스탈린(Stalin)! 레닌도 두려워한 최악의 독재자 스탈린은 집권30년간 동지들을 비롯, 소련인만 수천만명을 제거하였으며, 코민테른 두목으로서 ‘제정 러시아의 영화’를 능가하는 ‘스탈린 제국’을 목표로 공산주의란 무기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세계적 침략자였다. 그의 마지막 침략이 한반도 6.25전쟁, 그 출발이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 공산화 공작이다. 

▲ 레닌과 스탈린.

★대한민국에서 3월은 ‘탄핵의 달’인가.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3월10일 헌재에서 탄핵=파면을 당하였다.
그 92년전 1925년 3월18일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의정원(국회)의 일방적인 ‘탄핵 쿠데타’로 ‘면직’을 당한다. 
오늘의 여소야대 여의도 국회에선 초유의 ‘장관 탄핵’안이 통과되어 3월로 가고 있다. 창끝은 역시 대통령을 겨누지 않는가. 그 배후세력은 과연 누구일까? 
여기에선 ‘상하이 쿠데타’ 무대 뒤를 열어보자.

▲ 상하이 임정의 일방적 '유고' 통보를 거부한 이승만이 '단결'을 호소한 성명서 '재외동포에게'ⓒ연세대이승만연구원

'흥사단 내각'...'대통령 유고'...구미위원부 폐지
 
‘창조파’ 고려공산당이 연해주로 가버린 뒤, 임정 국회는 ‘개조파’ 세상이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안창호의 흥사단이 국회를 점령, 이승만을 퇴진시키는 책략에 골몰하였다. 스탈린의 민족통일전선 ‘국민대표회의’는 실패하였지만 이동휘가 주고 간 임무이자 상하이 코민테른 책임자의 공작은 맹렬하다. 
 
▶제1라운드=1924년 6월16일 국회 개조파는 ‘대통령 유고(有故)안’’을 상정하고 가결한다. 상하이 임정에 대통령이 부임안하니 ‘유고’라며 의장 최창식이 이를 이승만에게 통보, 국무총리가 ‘대리’한다고 타전했다. 
 
이승만은 “대리 불가” 답전을 치고 긴 성명서 ‘재외동포에게’를 선포, 이동휘 김규식 안창호 등의 분파행동을 겨냥하여 ‘단결은커녕 독립운동을 파괴하는 국가의 공적’이라 질책한다.
이어 발표한 성명 ‘한인들은 어찌 하려는고’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갈등이 고조되는 이때, 우리는 강국들의 충돌을 이용하여 독립해야 할 것인데 정반대로 자중지란”이라며 개탄한다. 이런 분자들은 친부자형제지간이라도 ‘불충분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동시에 [태평양잡지]에 ‘공화주의가 일러’라는 제목의 논설을 쓴다. 서양의 공화제도를 익힌 이승만은 지난 5~6년간 임정을 체험해보니 “우리는 서양같은 공화주의 제도만으론 안되고 공화주의는 지키되 행동은 명령적으로 행할 밖에 없다”며 이는 순전히 서북파 등 지도층의 지방열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제2라운드=12월11일 박은식 대통령 대리 선출. 내각이 또 바뀌었다. 이시영은 이때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순전히 서도인(西道人), 즉 흥사단 내각이 된 셈‘이라고 알렸다. 안창호의 작품이란 말이었다. 
이승만은 ”정부 전복의 시작“이라 경고하고, 하와이 교민들은 ’정변‘ 반대운동을 벌인다.
 
러시아로 돌아갔던 창조파들이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제 ’헌법 개정‘ 작업이 속도를 낸다.
법제위원장은 공산당 윤자영, 3개파 핵심세력이 모여 개헌을 논의하였다. 
이른바 ’삼방연합(三方聯合)이라 불린 그들은 ㊀서북파 흥사단세력, ㊁안창호의 주도로 흥사단 청년조직과 고려공산당 조직을 합쳐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상해파 핵심 윤자영(尹滋瑛) 일당, ㊂국회의장 최창식과 부의장 여운형 등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중 기호출신 인사들이다. 
개헌 이유는 미루었던 레닌의 공산당식 ‘위원회 체제’로 임정을 바꾸는 것, 곧 체제혁명이다.
공산주의자 여부에 관계없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레닌 자금의 노예로 변한 듯, 베이징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대표 카라한(Lev M. Karakhan)을 만난바 있던 여운형이 대통령제 폐지와 위원제 개헌을 주도하였다. 카라한은 ”소련의 원조를 빨리 받으려거든 우리가 원하는 개헌을 주저없이 단행하라“고 다짐두었던 것이다. 3년전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을  창당시킨 소련은 국민당에게도 자금을 주면서 임시정부 개조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개조파 의원들에게 ‘이승만 축출’ 방침만 정해놓고 미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개헌내용에 대하여 ‘결재’를 해달라는 심복들의 편지에 안창호는 이렇게 답신하였다.
”위원제라는 말을 쓰면 ‘적화’(赤化) 되었다는 선전이 방해할까 우려되니 사용 말라“ 위원제는 소련체제이므로 호칭은 피하고 싶고 대통령제는 없애라는 것이 도산의 뜻이다. 위원제 정부의 ‘수령’이 되어달라는 요청에는 ”단호하게 거절“한다고 답하였다.
 
▶제3라운드=1925년 3월10일 박은식 정권, 워싱턴 ‘구미위원부’ 폐지 공포(임시대통령령 제1호)하다.  즉시 이승만에게 급전을 보내 재정업무 및 일체의 사무를 대한인국민회에 인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금과 권리, 외교업무를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에 통째로 넘겨준다는 일방적 통고였다. 이승만을 축출하기 위한 사전조처이다.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받은 이승만은 성명을 발표, 동포들의 애국심과 정성으로 위기를 극복하자고 호소한다. 분노한 교민들은 국민담보금과 인구세로 거둔 거액을 이승만에게 보냈다.
 
 
안창호의 서북파, 이승만 탄핵안 발의...가결...통고
 
▶제4라운드=개헌보다 앞서 3월14일 ’대통령 탄핵안‘이 먼저 제출되었다. 이승만이 개헌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탄핵 발의자 10명은 20~30대 초반 젊은이들로 6명이 평안도 출신이었고, 재석 의원 24명은 거의 서북파, 이승만 지지자들은 출석을 거부하였다. 3월18일 밤 탄핵안이 통과되고, 21일 심판위원회에서 ’대통령 면직‘을 결정, 23일밤 국회가 가결되었다.
그 자리에서 국회는 박은식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박은식은 취임사에서 ”우리 독립운동은 세계 여러 민족과의 ’연합주의‘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며 그 대상으로 중국, 소비에트 러시아, 인도를 꼽으면서 신생 강대국 미국은 빼놓았다. 당시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국제적 인식이 이승만의 정치철학과 충돌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튿날 박은식이 새 정부를 구성, 8명의 장관중 여섯자리를 서북파가 장악, 또 다시 ’안창호 내각‘이다. 
 
이승만은 ’탄핵 면직‘을 인정하지 않고 이시영에게 편지를 보낸다.
상해 정국은 아이들 장난 같소. 내버려두고 간여하지 않으려 하오. 교령을 반포하여 의정원을 해산하고 내각을 변경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으나 인심을 지켜보려 합니다.“
이때 개헌한 의정원 의원은 13명이다. 초기 의정원(국회)의 정원은 57명인데 자꾸 줄어서 나중엔 20명도 안된다. 그것도 대부분 안창호가 심은 20~30대 초반 젊은이들이다. 당시 '아이들 장난'이란 말이 이래서 나온다.
 
'내각제 개헌' 단행...헌법전문 3.1선언문 삭제
 
▶제5라운드=박은식 정부는 ’위원제‘가 아닌 ’내각 책임제‘ 헌법을 국회에 제출하고, 30일 밤 10시 만장일치로 가결, 확정시킨다. 안창호가 ’적화‘인식을 피하라는 요구에 따른 것이다. 4월7일 공포된 새 헌법은 정부수반을 ’국무령‘(國務領)으로 정하고 국회의 개헌 정족수를 대폭 완화하였는데, 헌법의 적용범위를 모든 ’인민‘에서 ’광복운동자‘로 좁혀놓은 것이 특이하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헌법 전문(前文)을 삭제한 점이다. 
임정 헌법 전문은 3.1독립선언문을 요약한 것인데 고려공산당은 물론 안창호의 흥사단도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미련없이 지워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언젠가 헌법도 ’소비에트 체제‘로 개헌하지 않으면 소련을 설득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로써, 3.1운동이 세운 대한민국 임정의 3.1정신은 사라지고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이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의 지향점으로 굳혀져 갔다. 
 
 

▲ 임정의 내각제 개헌에 반대한 이승만의 대통령선포문. 영문 메모는 이승만 친필ⓒ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개헌 반대...구미위원부 고수
 
임정 옹호파 이승만 지지세력은 격렬한 반대에 나섰다. 이시영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자행된 유례없는 정변“이라 비난하고, 불법개헌을 규탄하는 성명들이 각지에서 나온다.
뉴욕교민단은 ’성토문‘을 발표, 의원 정족수 미달에 취해진 박은식 선출과 개헌 등과 구미위원부 폐지는 모두 위헌, 위법이라며 전미주 투쟁을 선언하였고,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등지에서도 이를 따라 집회와 항의전보, 가두시위를 벌였다.
 
 4월29일 이승만은 비로소 공식적인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한다.
”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조직하야 세계에 공포한 우리 임시정부는 해내외의 일반 국민과 달리 상해의 일부 인사들이 파괴를 시도하야 일장 난국을 이룸.....지금에 와서 정부전복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이르니, 우리 총애 동포가 어찌 이를 용인하리오.....민족의 체면을 위하며 3.1운동의 전도를 위하야 침묵과 견인과 실력으로 국민대단결을 도모하며, 한성계통의 구미위원부를 유지하야 외교 선전사업을 계속 진행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라. 이것이 본 통령의 희망이오 재내동포의 위탁이로라.“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임을 재확인하며 한성임정의 집정관총재로서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임정대통령 직을 고수, ’외교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공산당과 연합, 임정을 깨는 사람들
 
★’3월 정변‘은 끝났다. 그것은 ’이승만 축출‘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 ’개조파의 쿠데타‘를 지휘한 원격작전의 성공이었다. 
임정 옹호파 등은 안창호가 공산당과 손잡고 임정을 전복시켰다며 ”안창호가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다닌다“는 등 투서들을 미국정부 측에 우송하기도 하였다. 미국 이민국은 안창호를 불러 조사를 벌였다. 미국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안창호 규탄 목소리는 더 커졌다.
실제로 그것은 안창호가 연설과 인터뷰에서 ’사유재산의 공유화‘를 주장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족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사유재산을 공유로 하자는데 많이 공감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민족은 전부 빈민의 현상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부자와 자본가의 권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빈민의 현상을 바꿀 수 없는 연고이외다.“ 단합을 강조한 연설에서 계급투쟁론을 거론하는 듯 애매모호한 안창호의 화려한 언변은 그도 역시 당시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 선전 물결에 영향 받은 일면을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안창호의 ’이승만 축출‘은 5년간 임정 공산화를 노려왔던 소련 코민테른+이동휘+고려공산당의 ’미국세력 축출‘ 요구를 충족시킨 결과를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 임정 2대대통령 박은식(왼쪽),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녕.ⓒ뉴데일리DB

◆전격 개헌...김구, ’소비에트 위원제 헌법‘을 승인
 
’이승만 축출‘을 감행한 뒤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임정 초기엔 천명도 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임정 주변엔 이제 수십명만 남았다고 김구는 썼다.
2대 대통령 박은식이 67세로 숨을 거두었다. 호상위원들은 여운형 최창식등 개조파 일색, 총리를 지낸 이동녕도 김구도 빠졌다. 영국조계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룬 두달 뒤 노백린(盧伯麟)도 죽었다. 정부구성을 하려 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창호가 설득하여 국무령에 앉힌 홍진(洪震=洪冕憙) 내각도 개헌반대 투쟁 등에 밀려 4개월 만에 총사퇴, 무정부상태를 거듭한다.
 
마침내 김구 차례가 왔다. 이동녕이 김구에게 국무령이 되어 정부를 살리라 권유했을 때 김구는 사양했다. ”해주 서촌 김존위(金尊位:마을어른)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트리는 일이므로 불가하다.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하는 인재가 없을 것이다“(김구 [백범일지] 앞의 책)
요컨대, 상놈의 아들이라는 ’상놈 콤플렉스‘에서 나온 사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김구는 결국 국무령 ’벼슬‘을 수락한다. 
술고래에 툭하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매질하던 아버지, 그땐 꿈에도 언감생심, 임정 문지기나 대통령 경호원 노릇이 고작이던 상놈 출신이 내무장관을 거쳐 ’국가원수‘까지 벼락출세한 김구였다.
 
그러나 김구 내각은 박은식내각이 그러했듯이 또 한번 ’개헌용 과도내각‘이었다. 
김구 취임 즉시 국회는 헌법개정 제안을 가결하고 5명의 헌법기초위원회를 만든다. 김구의 심복 엄항섭(嚴恒燮)도 들어갔다. 
새해 1927년 1월12일 개헌안이 제출되자 ’충격적인 내용‘에 반대가 거세어 부결된다. 개헌론자들이 다시 기초위원회를 만들자 사퇴소동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개헌안은 1월19일 전격 통과되었다. 그날로 국무령 김구의 국무회의를 거쳐 확정 공포된다. 그 과정의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4권, 앞의 책).

▲ 상하이 임시정부 국회가 레닌 헌법을 본 따서 체제혁명을 일으킨 개헌을 보도한 조선일보(왼쪽)와 동아일보. 제목 '노농식위원제'란 소련 소비에트 권력구조. 집앵위원장 김구는 주석.

동아일보 보도=상해 임시의정원에서는 지난 19일 임시헌법을 개정하야 전부 쏘비에트 식으로 하고, 대통령 국무총리 이하 재래의 직제를 폐하고, 노농(勞農) 러시아 식으로 위원제(委員制)을 채용하였으며, 동시에 집행위원장 이하 집행위원을 선거하였는데, 그 씨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집행위원장 김구. 위원 이동녕 이시영 윤기섭 조완구 이규홍.
[조선일보]도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였다.
 
’소비에트식 개헌‘은 격렬한 반대를 불렀다. 그 중에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신문 [신한민보]의 개헌반대 논설이 당시 분위기를 대변한다. 첫째 소비에트제로 변경한다면 미국 별기(성조기) 밑에 있는 국민회가 해산당할 것이며, 둘째 안창호가 그 임시정부에 들어간다면 안창호의 단체 국민회는 임정과 관계를 끊어야 할 것인데. 무엇보다 그 ’더러운 지방열‘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창호의 입각은 절대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그때까지도 레닌의 공산정권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레닌의 쿠데타 집권 직후 이를 분쇄하려고 연합국들과 함께 미국도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싸운 것이 7년 전이다.
 
★김구는 이때의 전광석화와 같은 개헌파동에 대하여 [백범일지]에 두 차례 언급하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지극히 간략하고 애매하다“고 손세일이 저서에 써놓았다. 
”....조각이 심히 곤란한 것을 절감하여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쳐 의정원에서 통과되었다. 이제 명색이 국무위원회 주석이지만 그것은 개회할 때에 주석일 뿐이었다. 또한 국무위원들이 주석을 돌려가며 맡아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김구[백범일지] 앞의 책).
 
김구의 일기는 정말 몰랐거나 아니면 다분히 변명조의 설명이다. 
소비에트식 위원제는 임정출범과 동시에 국무총리 이동휘가 요구하였고, 국민대표회에서도 창조파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국민대표회의를 내무총장으로서 직접 해산시켰던 김구가 그 개헌 동기나 이념적 체제변혁임을 외면한 채 단순히 조각의 편의나 각료들의 평등 운운하는 기록은 납득하기 힘들지 않는가. 게다가 ’돌아가며 주석‘이란 말도 헌법 규정에 없는 것이다.
 
 
소련식 '1당독재체제' 국가 등장
 
◉새 헌법의 공산당식 핵심을 보자. 
개헌 팀은 국회가 폐회중이라도 국회의 직권을 행사하는 ’7인 상임위원회‘를 만들어 놓았다. 정부와 국회의 권력구조 역전, 국회의 지배를 받는 정부란 말이다. 
더 직접적인 대전제로는 절대 권력을 가진 ’당의 지배‘를 받는 국가체제를 명문화 한 점이다.
헌법 제2조--’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의 당‘을 만들어야 하며 이는 ’정부보다 상위의 권력기구‘로서 ”국가의 최고 권력은 당에 있다“고 선언한 혁명조항이다.
국회 쿠데타! 한마디로 소련 공산당식 ’1당 독재체제‘ 국가의 등장 아닌가. 소련 코민테른의 전략전술이 드디어 임시정부를 뒤집어 ’창조‘한 좌우통일전선의 작품이었다.
 
▶대한민국 비극의 탄생◀
 
1919년 3.1운동을 기획했던 이승만은 3.1운동이 탄생시킨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 5년 만에 대통령직에서 추방되고 7년 만에 3.1정신이 지워지고 대한민국도 이름만 남았다.
공산세력과 협력하여 대통령제를 없앤 안창호, 자유민주공화제 대신 소비에트식 독재 헌법을 받아들인 김구, 그들은 공산주의자였던가? 아니다. 그들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하였고 그때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 문제는 그들의 인식능력과 사고체계와 행동방식과 그 결과물이다. 
안창호는 1938년에 사라진다. 김구는 1945년 해방후 또 소비에트 러시아의 손길에 휘말린다. 이승만은 다시 자유민주공화국을 만들어 세우고 대통령이 된다. 인간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보이는 대로 말하고 행하고 살아가는 이기주의 동물이다. 잘 공부하고 잘 깨우쳐야 산다. 이 순간에도 역사는 그러하다. 

 

이승만 건국사(21) ‘동지촌’ 건설 실패....‘일본 추방’ 국제외교는 대성공

▲ 하와이 '동지촌'의 숯가마터와 동지촌 일부.ⓒ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속이 상할 대로 상하고 애가 탈 대로 탄 사람의 그 얼굴...."
 
★「이 박사의 댁—유심히 보았소이다. 화산 부스러기의 구멍이 숭숭 뚫린 검정 돌을 더덕더덕 쌓아놓은 돌기둥 문이 보이고 현관 앞에 엉킨 붉은 꽃, 파란 잔디 풀이 깔린 앞뜰에 우뚝우뚝 서 있는 야자나무....꼬불꼬불 층층단을 올라가 현관에 들어서니 판자벽에 유리창 문이 열렸는데 널찍한 응접실이 있고 흰 침대 한 개가 놓인 방 하나가 보이고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내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야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소이다. 그 이박사의 얼굴을 무엇이라고 형용하면 좋을는지요. 속이 상할 대로 상하고 애가 탈 대로 탄 사람, 기름이 빠질 대로 빠진 사람, 이런 사람 얼굴을 본 사람이 있으면 아마 그 이 박사의 얼굴을 상상하여 볼 수가 있으리라고 하는 말 밖에는 나에게 적당한 형용사가 없고 또 그렇게 밖에는 감각이 되지 아니하더이다....」 (장덕수 ‘미국 와서’ [동아일보] 1923.12.27.)
 
이 글은 미국 유학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 기착한 장덕수(당시 29세) 동아일보 주필이 신문에 연재한 방미여행기의 일부이다. 1923년 5월7일 장덕수가 만난 이승만 임정 대통령은 당시 상하이에서 안창호가 흥사단과 고려공산당을 앞세워 ‘국민대표대회’를 열고 ‘이승만 퇴진’을 압박할 때였다. 그날 저녁 이승만이 베풀어준 교민들의 환영회에서 장덕수는 “염치불구하고 실컷 울고 싶은 대로 울었다“고 썼다. 장덕수(張德秀,1894~1947)는 3.1운동때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이승만 쪽과 연락하며 일본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끌어내는 등 앞장섰던 인물이다. 
 
★「잡지가 나오면 이승만은 윤치영을 데리고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여 배달하러 다녔다. 아침은 15센트짜리 빵 한 개와 5센트 커피 한 잔, 점심도 빵 한 개와 야채 수프가 고작이었다. 바쁠 때는 하루 한끼 먹는 둥 마는 둥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꾀를 내어 배달시간을 일부러 동포들의 저녁식사 시간쯤에 맞추어 멀리 떨어진 와이알루아와 와히아와 등지의 동포들 집을 찾아가서 김치를 곁들인 밥과 국을 얻어먹었다. 두 사람은 함께 막일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농사 일뿐 아니라 젊어서 익힌 목수일이며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고 솜씨도 좋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윤치영 [동산 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의 월간지 [태평양잡지] 주필을 맡았던 윤치영(尹致瑛,1898~1996)의 회고담이다. 상하이 ‘탄핵소동’이후 이승만의 기도는 길어지고 어쩌다 회한에 빠져 청년시절 독립운동을 돌아보며 “기약 없는 국토회복의 앞날”을 탄식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하나님의 소명(召命:Beruf)이기에 좌절이나 포기를 모르는 이승만이다.
1921년 워싱턴회의 결과에 실망한 서재필과 정한경 등이 “가망 없는 독립운동 더 못 하겠다”며 생업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승만은 혼자서 하와이 동지회를 강화하는 일과, 한인기독학원을 새로 짓는 일 등에 뛰어다녔다. 

▲ 동지회원 이범녕이 구입한 동지식산회사의 주식.

◆’동지촌‘ 건설 사업, 미국의 대공황에 파산
 
이승만의 ’동지회‘(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사업을 두고 반대세력은 “탄핵당하고 할 일 없어 신선놀음”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이다. 
’동지회‘ 구상은 이미 이승만이 상하이로 밀항하기 전부터 구상하였고 상하이에 있을 때 물밑작업을 마친 뒤 이듬해 1921년 6월 하와이로 돌아와 7월7일 발족한 ’임정수호 조직‘이다.(이덕희, 앞의 책)
1924년 11월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들을 총동원, ’하와이한인대표회’를 열었다. 동지회 24개지역 대표들과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태평양잡지사, 대한부인구제회, 하와이대한인교민단 등이 모인 회의는 동지회 안에 ‘실업부’를 설치, 한인들의 경제력을 육성하기로 결의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12월 13일에 ‘동지식산회사’(Dongji Investment Company, Limited)를 설립하였다. 100달러짜리 주식을 모집하여 3만달러를 자본금으로 출발한 회사는 하와이 빅 아일랜드(Hawaii Big Island) 힐로(Hilo) 근처 임야 963에이커(약117만 9300평, 여의도 1.3배)을 구입하고, 그곳을 ‘동지촌’이라 이름 붙였다. 
 
이승만은 의욕에 불타올랐다. 잘만 하면 독립운동의 재정적 자립과 동시에 동포사회의 복지 및 금융업까지도 확장할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계획을 짜느라 동분서주한다.
그가 말하는 동지촌 건설 동기는 이러하다. “농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된 나이 든 노동자들이 계속 늘어나 것이 문제다. 호놀루루 한인기독학원 지도자들이 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 심각한 한인사회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요컨대, 독립협회시절부터 백성계몽을 중시하였던 이승만의 평민주의 사상에 기독교 구민 박애주의가 합쳐진 사명감 때문에 임정대통령으로서 시작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업은 완전 실패였다. 6년 뒤 파산하고 만다.
동기는 숭고했지만 경제를 모르는 애국지사의 기업운영, 애국심이 돈을 벌어주진 못한다.
이승만이 벌인 사업 내용은 임야개간, 공동 농장, 생산물 판매, 목장, 제재소 설치, 숯가마 운연 등이다. 동서양의 학문은 연마하였으되 사업경험이 없는 ‘학자 경영인’ 이승만에 대하여 윤치영은 이런 건의를 하기도 했다. 
“...각하가 소인배들에게서 비평을 많이 들으시는 그 뒤에는 선생님께서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시며 진실하신 도덕군자 같이 하시기 때문입니다.....선생님, 돈도 없이 어찌 하실려고 하십니까?...” (윤치영이 이승만에게보낸 편지 [우남 이승만 문서 동문편], 1998)
 
도덕군자 같은 기업인의 ‘동지식산회사’는 1931년 4월 파산선고를 받았다.
결정타는 미국의 대공황 기습, 자금난에 시달리는 회사는 빚더미에 깔렸다. 미정계에 발이 넓은 이승만도 그동안 판로개척엔 도움이 되었지만 불황은 불가항력...진주만 미 해군에 납품하던 연료 숯도 재목도 기술 미달로 실적 부진, 오히려 미국 정부가 때린 벌금이 더 컸다. 
한마디로 자금부족이 빚어낸 설비부족, 기술인력 부족 등 경쟁력 부족이다. 꽉 막힌 돈 줄을 어찌하라. 줄줄이 도산하는 미국 기업들처럼 이승만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넓은 꿈의 농장은 2년후 경매에 부쳐져 매입 원금도 안되는 헐값에 낙찰되었다. 터널을 뚫은 숯 가마터는 지금도 원형이 보존되어 한국인 관계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 김현구(왼쪽),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동지회'가 사용하던 회관 건물.(자료사진)

★회사 기울자 ‘파산’ 전에 ‘배신’이 먼저 왔다.
 
이승만은 동지촌 건설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본토와 하와이 동지회 대표들을 총동원, 독립운동 조직 ‘동지회 단결 강화’에 나섰다. 1930년 7월에 열린 ‘동지미포대회’(同志美布大會), 초점은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관계회복과 활동 확대, 그리고 늘어나는 현지출생 청년들을 대거 영입하는 일이다. 여기서 또 안창호의 대한인교민회 측과 갈등이 불붙는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 산하로 합쳐놓은 하와이교민단이 “청년조직을 독점하지 말라”며 반기를 들었다.
이때 신세대 여성들이 따랐다는 중년 미남 김현구(金鉉九, 1889~1967)가 뜻밖에도 이승만에게 등을 돌려 교민단 편에 선다. 
이승만보다 14살 아래인 김현구는 20살때 도미하여 박용만의 군사학교도 다녔고 안창호의 교민단 부회장까지 지낸 인연일까. 하지만 이승만의 워싱턴 구미위원부에 들어와 4년간 일하면서 이승만과 나눈 편지가 300여 통이나 남아있다(이승만 보관).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하와이로 옮겨 [국민보] 주필과 [태평양잡지]도 맡고있는 그에게 이승만이 동지회 입장을 게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동안 자연스럽던 일, 그 김현구가 느닷없이 불응, 사직서까지 내는 게 아닌가.
한술 더 떠서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등, 갖가지 비난 글들을 [국민보]에 몇 달 동안 게재하며 반대편을 들었다. 시카고대표 김원용(金元容, 1896~1976)과 목사 등 동조자가 3명 더 있었다. 
참담한 이승만은 ”돌이라면 닳고 쇠라도 녹는“ 대화로 설득을 이어갔지만 양파의 폭력사태까지 벌어지자 ’파면‘ 형식으로 사직서를 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김현구는 ’탄핵되었으니 물러나라‘는 둥 이승만 반대 캠페인을 줄기차게 벌인다. 그는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Autobiography with Commentaries on Syngman Rhee, Pak Yong-Man, and Chong Sun-man]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썼다.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이래서 ’3만‘이라는 인물비평에서 이승만 비난이 초점임은 물론이다. 
김원용 역시 이승만 정권 말기 1959년 [재미한인50년사]라는 책을 냈다. 두 사람의 책은 1930년 전후 이승만의 측근에서 돌변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인데, 이 주장들이 지금까지도 이승만 규탄의 원천으로 악용되고 있는 실정이 한국적 풍토이다.

▲ 제네바 몽블랑 다리에 선 이승만.

◆ 제네바 국제연맹 외교...일본을 ’퇴출‘ 시키다
 
Big News! 이승만은 벌떡 일어난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 1931년 9월 18일 류티야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공기지로 만들기 위한 ‘만주사변’(9·18사변)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청왕조 부의를 인형처럼 데려다 만주국을 세웠다.
때가 왔다. 무슨 때? 이승만이 평소에 주장하던 때, 그것은 일본을 국제연맹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는 때, 바로 3.1운동직전 이승만이 서명하여 ‘매국노’ 욕을 먹었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과 같은 전략이다. “미국을 움직이자. 미국 여론을 일으키려면 미국 언론을 이용하자”
이때의 이승만이 얼마나 만주사변의 기회를 노려 대미 외교에 집중했는지는 그가 3년간의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점이 말해준다.
 
워싱턴으로 달려간 이승만은 우선 미국 정부를 향한 문서외교를 개시한다. 
12월16일 미국무장관 스팀슨(Henry L.Stimson)에게 긴 편지를 냈다. 
“나는 한반도 2,000만명, 시베리아 200만명, 만주 60만명, 하와이와 미주지역 1만여명 한국인을 대표하여 청원합니다. 일본이 만주의 풍부한 자원을 장악하면 아시아는 물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강대한 침략국이 될 것이니, 또 한번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은 대통령 연두교서로 세계문명의 적 일본에 대하여 강경한 행동을 취할 때임을 성언해야 합니다.”
새해 1932년 1월엔 미국 외교정책 수립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외교정책협회(American Foreign Policy Association)에서 ‘극동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견해’란 강연과 질의응답을 펼쳤다, 뉴욕의 각 기관들의 초청강연이 이어졌다. 뉴욕 대학과 큰 교회들의 강연도 계속한다.
 
그는 미국무부에서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워싱턴 구미위원부도 정리하여 새 건물로 이전하고 뉴욕동지회를 움직여 ‘뉴욕동시회보’를 창간, 국제정세의 새로운 전개를 선전하는 글도 써낸다. ‘기회를 이용하자’는 발표에선 “한국의 독립기회는 언제나 미국과 일본의 충돌에서 찾아야한다며 ”1차대전 후 아일랜드의 독립이나 인도의 비폭력 운동 등이 모루 미국의 공론을 얻어 된 것이라“며 ”지금은 미국의 친일주의가 결정적으로 변할 시기가 왔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미국의 일본정책은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 실패의 연속으로서 일본의 침략역량만 키워주었기에 ‘미-일 충돌’이 날로 자라날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미국이 도덕적 각성을 하여 한민족을 응원하도록 동맹적 연대를 맺는 것이 구미위원부의 최우선 외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승만 특유의 친미용미(親美用美) 전략이다.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의 ‘전권대표’자격을 얻으려는 이승만이 조소앙 외무장에게 여러번 전보를 쳤으나 감감소식이다. 그때 김구 등 지도부는 윤봉길의 홍구공원 거사 때문에 은신중이었다. 황주로 피신한 조소앙과 연란이 닿아 가까스로 한문 신임장이 파리로 보내진다.
미국무부는 태도가 달라졌다. 골치아픈 반공주의자이자 무국적자 이승만을 외면하던 때와 달리 이번엔 미국 법무장관과 스팀슨 국무장관이 서명한 문서가 왔는데 그것이 이승만의 ‘특별 외교관 여권’이 되었다. 

▲ 제네바 드루씨 호텔. 이승만이 여기서 외교전쟁에도 승리하고 평생의 반려자도 만났다.(자료사진)

★미국-유럽 각국 언론과 ‘선전 외교’ 집중
 
제네바엔 파리에서 10년 유학하고 임정연락대표로 활동하는 서영해(徐嶺海,1902~사망불명)가 미리 와서 호텔 드 뤼시(Hotel de Russi)에 스위트 룸을 예약해 놓았다. 이승만은 이튿날 작은 방으로 옮겼다. 
그날로 이승만을 찾아 온 AP통신 특파원, 그는 한달동안 이승만의 홍보역을 맡았다.
일요일 예배당서 배재학당의 은사 아펜젤러의 친구 등 미국인 들을 만나고, 월요일부터 미국 총영사 길버트(Prentiss B. Gilbert)와 뉴욕 타임스, 뉴욕 월드, UP통신 등 특파원들부터 인터뷰와 홍보에 많은 협력을 얻는다. 그동안 미국 언론들과 친분을 쌓아온 덕분이며 이승만의 품격에 반한 미국 기자들이 자진하여 나서서 도와주었다.
 
반면, 안창호 측의 [신한민보]는 이승만의 제네바 행을 비아냥거리고, 하와이교민단에선 김현구, 한길수 등이 국제연맹에 제출해달라는 편지를 중국대표단에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이 만난 중국대표가 이 편지를 이승만에 제시하며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웃음으로 치부했다한다.

▲ 만주국 왕 푸이, 일본의 대륙침략지도(자료사진).

★만주침략 다음해, 일본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인형처럼 앞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왜냐하면 만주를 일본이 직접통치하면 1922년 워싱턴회의 9개국 조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잔꾀에 능한 일본은 그래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끌어다가 “만주국은 만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분리 독립을 원하여 세운 나라”라는 각본을 짠 것. 조선을 먹을 때 써먹던 수법이다.
 
이에 국제법 박사 이승만은 더욱 쾌재를 부른다. 그 잔꾀가 급소!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 8개국이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세계를 일본 스스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승만이 원하던 ‘일본 고립’ 구도, 이것이다. 결코 만주인의 의사가 아니란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강대국들만 모른체 한다. 나라 잃은 동포 100만이 만주에 쫓겨가 본의 아닌 만주인이 되어 고통받는 20년 세월, 이승만은 ‘문서에 의한 독립운동’에 혼신을 바친다. 

▲ 이승만의 인터뷰를 1면전면에 보도한 스위스신문.ⓒ연세대이승만연구원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국제연맹 조사단장 리튼(Victor A. G. B. Lytton)이 이끄는 조사단은 중국을 방문, 일본의 만주침략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국제연맹에서 심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조사단 19개국 위원을 비롯, 그 나라 수상, 외교관, 언론들을 순방 접촉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의 주장이 일본의 주장을 꺾을 수 있는 증거”라면 된다는 반응이다. 즉, 일본이 만주의 중국인-한국인들의 찬성을 얻어 만주국을 세웠다는 일본 측 보고서를 뒤엎자는 것, 즉각 이승만은 몇날 몇밤을 새워 길고 긴 문서를 작성한다. 
그동안 일본에 속아 열강들이 몰랐던 이승만의 ‘반일 증거’들의 증거력은 너무나 강력하다.
핵심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사의 비극들: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 모든 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군사기지로 대륙을 침략한 것. 1910년 한일병탄을 미국이 승인하였기에 지금 한국을 기지삼아 또만주와 중국을 침략한다는 것. 그때마다 약소국 한국인들이 일본에게 당한 집단학살과 재산권 자유권의 유린을 보라. 현재 만주의 한인동포들은 일본 침략의 희생물이다. 수백년 일관된 일본의 군국주의 본능, 이번에도 일본의 만주국 점령을 용인한다면 국제연맹의 ‘민족자결 원칙’은 무효가 된다. 그러므로 한국독립문제는 만주국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열쇠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해줄 것이다..
 
이 문서는 국제연맹 사무국장과 세계 회원국 대표들에게 60부를 배송, 신문과 방송 기자들에게 배포하였는데 너도 나도 요구하여 50부씩 두 번이나 더 주문해야 했다. 
스위스 뉴스 신디케이트 대표가 찾아와 인터뷰하고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제네바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 방송들이 날마다 시사해설을 한다. 
마침내 ’만주국 불승인‘ 9개국 소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중국대표단은 이승만에게 감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 일기. Log Book of S.R. 1933년 2월)
 
◉총회 개막 3일전, 이승만은 국제연맹 방송으로 마지막 열 번을 토한다.
30분간 방송한 이 원고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작성하여 가져온 것이다. 일본의 한국과 대륙침략사를 다시 한번 강의하고 “한국은 열강의 보장 아래 독립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일합병은 중국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한국의 독립은 빠르면 빠를수록 아시아와 세계 평화가 빨리 확보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프랑스어 신문들이 이승만 기사를 대서 특필하였다. 특히 [라 트리뷴 도리앙 La Tribune D’Orient]은 개막전날 아침 1면 전면을 이승만 인터뷰로 채웠다. 
♥이 신문이 58세 이승만에게 33세 비엔나 미녀를 데려다주는 사랑의 메신저가 될 줄이야♥ 
23일엔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 Der Bunt]가 뒤를 따랐다.
 

▲ 이승만이 제네바 국제연맹총회때 발간한 [만주의 한인들],국제연맹 조사단의 [리튼 보고서].

41대 1 완승! 이승만 ‘1인 외교전쟁’ 만세
 
★24일 국제연맹 총회는 ‘만주국’을 부인하는 19인위원회의 보고서를 41대 1로 채택한다. 반대 1표는 일본이다. 이승만 임정대통령의 외교력이 국제무대에서 3천만의 적 일본을 물리친 완벽한 승리다. 이것이 그의 ‘외교독립론’의 실체를 보여준 본보기, 어림없는 무장투쟁 독립론이 고개를 숙인다.
이승만은 총회기간 줄곧 준비한 [The Koreans in Manchuria 만주의 한국인들] 책자를 발간, 배포 한다. 일본의 야만적 만행을 폭로, 한국 독립이 시급한 당위성을 증거하는 역사자료는 다시 한번 열강들의 마음을 굳히는 심리전 작품이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일본은 다음달 3월27일 결국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만다. 
이승만의 일본 고립화‘ 전략에 성난 맹수 사무라이 일본은 4년 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다시 4년 뒤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다. 이승만의 희망대로! 예언대로! 마침내 미국과 일본의 대격돌...그 4년 뒤 ’독립의 문‘이 활짝 열린다.
 
 

이승만 건국사(22) 아, 프란체스카! 레만 호반서 만난 ‘운명적 사랑’

국경도 나이도 잊은 독립운동가의 평생동지 결혼김노디의 놀라운 문서 발견, 이승만의 '양녀'였다

▲ 1933년 2월21일 저녁,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우연히 처음 만난 제네바 호텔 드 루시. 바로 앞 레만 호수를 건너는 몽블랑 다리가 보인다.(자료사진)

#1> 호텔 드 루씨(Hotel de Russie)의 레스토랑
 
눈 덮인 알프스 산맥 물그림자가 아름다운 레만(Leman) 호숫가에 늘어선 호텔들은 무척 붐빈다. 1933년 2월 아담한 국제도시 제네바에 지금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중이라 60여개국 VIP와 대표단, 옵서버들과 보도진들, 관광객들까지 몰려들어 곳곳이 초만원이다.
21일 저녁, 호텔 드루씨(Hotel de Russie)에 두 달째 머물며 동분서주하는 이승만은 그날도 ‘일본 추방’을 위해 회의와 방송, 신문 인터뷰등 뛰어다니느라 뒤늦게 호텔 식당에 혼자 들어갔다. 대만원...지배인이 합석도 좋으냐고 물으며 이승만을 이끌었다.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신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지배인의 말에 두 여인이 응락한다.
4인용 식탁엔 두 백인 여인, 프랑스를 여행하고 스위스를 관광하러 막 도착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중소기업 집안 모녀였다. 이승만은 프랑스어로 “자리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앉았다. 
 
모녀는 깜짝 놀랐다. 첫 인상이 기품 있고 귀족 같은 동양 신사가 주문한 메뉴 때문이다.
조그만 소시지 하나, 시큼하게 절인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와 감자 두 개 뿐. 외모와 달리 너무나 초라한 접시를 보는 젊은 딸이 놀라움에 호기심이 겹쳤다. 
중년처럼 젊어 보이는 신사는 “봉 아뻬띠”(Bon Appetit:맛있게 드세요) 신사의 예의를 차리고 식사만 하는 것이었다. 숙녀들에게 말을 잘 거는 서양남자들과 달리 한마디 말도 없이 거뜬히 먹어치우는 모습, 눈이 마주치자 무안해진 그녀는 얼굴이 발개져 얼떨결에 입술이 열렸다.
“동양이시면...어느 나라죠?”
“코리아”라는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얼마전 독서클럽에서 읽은 글 중에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물어본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과 양반이 있다지요?”
이번엔 이승만이 놀랐다. 아무도 모르는 조국 코리아, 일본이 더럽고 썩은 미개국으로 악선전하여 매장된 금수강산,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 그 코리아를 되찾으려 뛰고 있는데 난데없이 젊은 백인 여성이 금강산과 양반이란 말까지 묻고 있다. 얼마나 반가웠으랴. 환해진 얼굴로 대화가 시작되는데 지배인이 다가와 ‘스위스 기자가 기다린다’는 메모를 전했다.
“실례합니다.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승만은 급하게 자리를 뜬다. 국제연맹총회 개막전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신문 인터뷰, 여론 선전술이다.
바쁘게 나가는 동양신사의 뒷모습을 왠지 서운한 듯 바라보는 33세 독신녀의 이름은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1900~1992). 뒷날 이름이 Franziska란 기록도 보이는데, 당시 이승만은 일기(5월9일자)에 Francesca로 적었다. 꼼꼼한 그가 본인에게 확인한 표기일 것이다. 
이혼남과 이혼녀의 만남, 프란체스카의 첫 결혼 상대는 자동차 레이서였는데 내연녀가 있음을 알고 금방 헤어졌다고 한다.

▲ 제네바 국제연맹 건물 앞에 선 이승만, 오른쪽 사진은 10대시절 프란체스카.ⓒ뉴데일리DB

#2> 첫 눈에 끌리다...기품 있는 신사의 뜨거운 ‘독립 열정’
 
 
22일 아침신문을 받아본 프란체스카는 새삼 뛸 듯이 놀란다. 그리고 감동한다.
[라 트리뷴 도리앙] 신문 1면 전면을 가득채운 인터뷰 기사, 어제저녁 합석했던 ‘양반의 나라’ 신사가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야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막고 세계의 평화를 확보할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는 기사를 프란체스카는 한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그 신문을 오려서 봉투에 담아 자기 이름은 안쓴 채 안내에 맡겼다. 그랬더니 ’친절에 감사한다‘는 답장이 왔다. 다음날 아침 다른 신문에 또 같은 주장을 하는 기사가 실려 또 오려서 보냈다.
이번엔 ”답례로 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짐짓 사양하다가 만나고 말았다.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힘든 여건에서 미국 국적도 정식여권도 없이 멸망한 조국을 다시 찾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58세의 남자, 독립을 말할 때는 넘치는 정열이 젊은이 같은 열기를 뿜어내 정신없이 듣고 있는 프란체스카는 그냥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 신문을 오려보낼 때부터 끌렸던 마음이 이제 독립투사의 동지처럼 가까워지는 듯 느껴졌다.
프란체스카는 저도 모르게 ”이 분을 돕고 싶다“는 감정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세 딸 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나를 상업학교에 보내고 영어를 배우도록 스코트랜드 유학까지 시켰다. 그 결과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땄고 속기와 타자(타이프라이터)가 특기였다」  
프란체스카는 모국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잘했는데, 영어까지 잘하게 되었으므로 ’외로운 독립운동가‘에게 그때까지 갖춘 재능을 바쳐 돕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독립투사의 비서‘일은 5월까지 석달쯤 계속된다. 
어머니가 눈치 채고 말았다. 관광도 마다하고 동양신사 일을 제일인양 걱정하며 봉사하는 딸, 게다가 가난한 남자라 시간과 돈을 아낀다며 날계란에 식초를 쳐서 끼니를 대신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당장에 짐을 싸라고 성화였다. 
다시는 만나지 말라며 이승만과 작별하는 것도 거부하는 어머니, 프란체스카는 ’그분이 좋아하는 김치 대용 사우어 크라우트‘ 한 병을 종업원에게 ’전해 달라‘ 맡기고 떠나야 했다.

▲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이승만 인터뷰 기사. [라 트리뷴 도리앙]신문 1면 전면에 가득찬 동양신사 독립운동가의 열변에 감동한 프란체스카는 신문을 오려 이승만에게 전한다.

#3>  ’일급 비서‘ 만난 이승만, 4개국 항일연대 협력체 구상
 
일본을 국제연맹서 퇴출시키는데 성공한 이승만은 할 일이 많다.
3개 국어에 능하고 타자 잘 치는 무료봉사 ’일급 비서‘를 만났으니 일할 맛이 난다. 
첫째, 구한말 고종이 맺은 서양 각국과의 조약문들을 국제연맹에 공식 등록해야 한다. 
이승만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은 국가들에게 조약의 인증사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둘째, 국제연맹 헌장 16항에 따라 일본에 ’금수 조치‘를 취하도록 필요한 서류를 작성한다. 
셋째, 고립된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서 미국-중국-러시아와 한국이 ’4국 항일연대‘ 협력체를 구상하여 중국의 국제연맹 상주대표 후스쩌(胡世澤)와 미국 총영사 길버트(Prentiss B. Gilbert)와 협의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황무지가 된 조선, 이승만은 지정학적 비극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일본 침략의 피해당사국 중국-러시아에다 미국을 더하여 한국이 동맹을 맺고 일본의 도발을 합동방어하려는 방안을 제안한 것, 국제법 박사다운 지정학적 전략이었다. 중국과 미국 대표가 긍정적 반응을 보이자 이승만은 소련 방문에 적극적이 된다.
 
시간이 지나니 여비에 쪼들렸다. 소련 방문 비용도 마련해야한다. 이승만은 독일은행에서 대출 받으려 했으나 어찌나 까다로운지 프란체스카의 보증서신을 보내 겨우 120달러를 빌렸다. 
그런데 그 직후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비서가 어머니와 함께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닌가.
 
이승만은 중국의 상주대표 후스쩌(胡世澤)에 부탁하여 소련까지 거쳐가야 할 각국주재 중국영사들의 소개장을 받았다. 5월21일 제네바를 떠나 기차 편으로 파리에 도착한다. 얼마 후, 후스쩌로부터 러시아 친구 소개장이 오고 호놀룰루에서 여비를 보내니 러시아에 가라는 전보가 왔다. 즉시 러시아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 [국역 이승만 일기]표지.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표지ⓒ뉴데일리DB

#4> 비엔나 숲 속의 데이트...’사랑‘을 알고 결혼 약속
 
프란체스카는 두 달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식을 받았다. 
이승만이 7월7일 밤 비엔나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었다는 편지, 프란체스카는 뛸 듯이 기뻤지만 어머니가 두렵다.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비자도 받고 프란체스카도 만나러 온 것이다. 
 
일주일의 사랑! 
”그분은 만날 사람이 많아 바빴고 나도 어머니 감시 때문에 집을 나오기 쉽지않았다“는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몰래 ”우리는 비엔나의 명소들과 아름답고 시적인 숲을 거닐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이승만 일기에는 이 기간, 고색창연한 쇤브른 궁(Schonnbrunn Palace)이며 비엔나 전시가지를 내려다보는 호텔 쉴로스(Schloss) 등을 찾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특히 9일 밤 “프란체스카 도너 양이 나를 데리고 헤르메스 빌라(Hermes Villa)로 갔다가 밤에 돌아왔다”고 적었다.
그가 뒷날 일기에 ‘Vienna Affair’라고 적은 ‘비엔나의 정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윽고 프란체스카는 결혼을 결심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 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며 결국 가난한 한국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물론 언니들도 반대한다. “나이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했다가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보내게 되다니...”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도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7월15일 아침, 소련을 향해 비엔나를 떠나는 이승만이 기차에 올랐다. 미리 짐을 실어준 프란체스카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기차가 커브를 돌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고 이승만은 일기에 썼다. 

▲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커플이 밤을 지낸 비엔나 숲속의 에르메스 궁. 오른쪽은 이승만이 약혼선물로 준 '어머니의 참빗'(이화장 전시중).

★어머니의 참빗
비엔나 데이트 중에 어느 날, 이승만이 문득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물건을 꺼냈다. 
“이것이 내 전재산이오” 프란체스카에게 건네주는 그것은 어머니의 참빗이다. 빗살이 작고 촘촘한 참빗은 한국 여인의 필수품,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고 쪽을 찔 때 쓴다. 
이승만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 빗으로 머리를 빗겨줄 때 아파서 울기도 했다는데, 당시 목욕을 모르고 살던 한국남녀의 머리카락 속에는 이와 서캐가 우글거려 참빗으로 훑어 내리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과거시험이 없어진 갑오개혁 때, 아들 낳은 20세 이승만은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를 속이고 ‘서양 귀신’ 기독교학교 배재학당에 들어간다. 선교사들에게 한글 가르치기 알바로 거금의 강사료를 받자 어머니에게 달려가 사실을 고백한다. 어머니는 울었다. 다시 어머니 허락을 받아 상투를 자르는 단발까지 할 때 조상이 죽은 듯 흐느끼던 어머니는 다음해 1896년 여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58세 지금까지 ‘어머니의 참빗’을 품고 다녔던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에게 반지 대신 ‘약혼선물‘로 어머니의 유품 참빗을 준 것이었다. 다이어몬드보다 더 값진 마음을 바친 프로포즈!
“하와이 우리 아이들 이와 서캐도 많이 잡아주었다오” 사탕수수 농장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이 교육은커녕 자녀들까지 노동에 부리는 현장을 찾아다닌 이승만, 어린 소년소녀들을 데려다가 씻어주고 재워주며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승만의 표정은 청년 같았다고 프란체스카는 말한다. 
6.25전쟁 때 임시수도 부산의 대통령 관저에서도 전쟁고아들을 데려다가 머리를 빗겨주던 이승만, 하야 후 하와이 병상에서 어머니의 참빗을 꺼내 만지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이승만이 별세한 뒤 프란체스카는 남편처럼 고이 간직하였다가 며느리 조혜자(양자 이인수 부인)에게 물려주었다. 그 참빗은 지금도 이화장에 가면 유물전시품 속에서 볼 수 있다.
 
<여기까지 내용은 (프란체스카 지음 [이승만대통령의 건강} 조혜자 옮김, 도서출판 촛불, 2007)과 [국역 이승만 일기]에서 발췌 요약 부연 설명함>

▲ 200달러 짜리 중고차 윌리스를 몰고 미국 대륙을 횡단한 이승만.

#5> 모스크바의 하룻밤, 소련은 일본 압력에 비자 취소
 
7월19일 오전 9시30분 모스크바 도착. 20일 밤 11시 모스크바 출발. 이승만이 모스크바에 머문 시간은 고작 38시간이다. 호텔 방에 소련 외무성 직원이 찾아와서 정중하게 말했다. 
“선생께서 속히 러시아를 떠날 것을 통보하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나는 귀국의 외무성에 전해야 할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왔소. 비엔나의 귀국 대사는 나의 이 편지를 외무성에 직접 제출하라 하였고. 비자를 연장해주어 한 달간 머물 것이오.”
“잘 알고 있습니다. 비자 발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수였습니다. 지금은 외무성이 선생을 떠나라고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예상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을 알고 허허 웃었다.
“누가 뒤에 개입했는지 알 것 같소. 이 편지나 전해주시오.”
그 편지에는 이승만의 구상 ’4국 항일연대‘에 관한 설명과 제안이 들어있었다.
 
범인은 일본이었다. 이승만을 추적하던 일본당국이 이승만이 기차를 타자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은 것이다. 왜? 러시아와 동청철도(東淸鐵道) 매입을 협상하러 일본철도위원회 협상단이 지금 모스크바에 와있는데 중국이 반대하는 판에 이승만까지 나타나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만주국을 세운 일본에 동청철도를 매각하여 무력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이 철도는 청일전쟁때 일본이 가져간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개입, 중국에 돌려주고 그 대가로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 부설권을 얻어 러시아가 건설한 것, 다렌에서 하얼빈을 지나 러시아 국경인근에 이르는 노선이다.
 
밤차로 모스크바를 떠난 이승만은 폴란드로 향했다. 모스크바 거리에서는 택시를 볼수 없었고 낡아 빠진 마차들 뿐, 굶주려 쓰러진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들었다. 가난한 공산주의 왕국, 농촌의 초가지붕들은 이승만이 갈파한 공산독재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로마로 가는 기차에서 도너 양을 만났다고 한다. 우연인지 약속인지는 알수 없다. 8월2일부터 나흘간 로마 여행, 6일자 일기엔 “도너 양은 나와 같은 기차로 출발하여 플로렌스로 떠났고 나는 제노아로 갔다”고만 써놓았다. 둘이 함께 보냈다는 구절은 없다. 

▲ 지난해 처음 발굴한 이승만-프란체스카 결혼사진. 오른쪽은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환영레이를 목에 건 신혼부부ⓒ뉴데일리DB

#6> 뉴욕서 결혼...하와이에선 ’서양부인 데려오지 마시오“
 
”비엔나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화니(Fanny)가 비자를 받아 9월28일 유로파(S.S.Europa)호로 출발할 것“이라고 한다.([국역 이승만 일기], 1934.9.26.)
이승만 일기엔 이날부터 프란체스카를 ‘화니’라 부르고 있다. 
무국적자 이승만은 약혼자를 미국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부탁해 보았지만 결국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가 미영사관에서 ‘이민 비자’를 받아 뉴욕에 오는 것이다.
10월4일 화니는 배에서 내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이승만이 교통체증 때문에 늦었다.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맞은 편 몽클레어(Montclair) 호텔에 들었다.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이렇게 번거롭고 여행하기 힘드실 텐데 미국 국적을 잠시라도 얻으면 안될까요?"
이승만이 대답했다.
"한국이 머지않아 독립될 것이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립시다"
프란체스카는 여권때문에 힘든 일을 10년 더 기꺼이 해냈다.
 
10월6일 뉴욕 시청에서 결혼허가증을 발급 받았다. 
그 다음날 메이시(Macy) 백화점에 가서 이승만은 반지 하나를 사고 화니는 결혼식용 베일을 샀다.
 
10월8일 오전 6시30분, 몽클레어 호텔 홀에서 결혼식. 
주례는 미국 목사와 윤병구 목사, 들러리는 이승만의 미국인 지인들과 그 부인들이 섰다. 
식당으로 옮겨 아침 식사겸 피로연, 호텔 밴드가 결혼행진곡을 연주하다. 
 
★문제가 생겼다. 
하와이로부터 축하전보를 받았는데 ”나 혼자 오라고 함“....이틀 뒤에 온 전보에도 ”각하 혼자만 오시라“는 단서가 붙었다. 이승만 부부는 친지들을 찾아 신혼인사를 다니면서 고민했다. 프란체스카는 그 전보 생각만 나면 흐느끼는 것이었다.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인은 한국인끼리 결혼해야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심복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는 중고 자동차를 사서 직접 운전하여 미 대륙 횡단 길에 나선다. 
59세 신랑과 34세 신부의 신혼여행, 국적도 나이도 잊은 독립운동 부부동지의 새 인생 출발은 스피드광 이승만의 과속운전 때문에 프란체스카는 몇 번이고 팔에 매달려야 했다.
장장 두달 동안 찾아다닌 미주 전역의 ‘독립운동 친구’들은 한인은 물론 미국인도 많다.
프란체스카에게 그 여행은 남편 이승만과 독립운동과 한국에 대하여 새롭게 눈을 뜨는 귀한 시간이었다.
 
”미주의 우리 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보았다. 그때 너무나 가슴아파하는 남편의 모습을 평생 잊을수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자금을 모아 보내는 동포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남편이 왜 값싼 3등열차나 3등 선실만 골라 타는지,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1석3조의 여행, 즉 백인 중산층 숙녀를 데리고 다니며 ‘한국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현장실습을 시키고 동지애를 키워주는 교육자였다.

▲ 결혼반지, 진주가 박힌 위 반지는 이승만이 산 것, 아래 다이어몬드가 박힌 반지는 프란체스카가 산것. 오른쪽 장도리와 드라이버는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것.(자료사진)

#7> 하와이 최대의 한인 결혼잔치....”김노디는 어디로 가나?“
 
태평양 물결을 가르며 하와이로 달려가는 말롤로(S.S.Malolo) 호의 3등 선실, 호놀루루가 다가오자 초조해 보이는 아내 화니를 이승만이 다독인다. ”이번엔 우리를 환영해줄 동지가 없겠지만 다음엔 달라질 것이니 힘을 내시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935년 1월25일, 호놀룰루 항구에는 역사상 최다의 한인들이 운집하였다.
무려 3천여명의 인파, 태극기와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는 함성에 프란체스카는 또 한번 울었다. 
당시 하와이 한인 인구가 6천여명 남짓, 그 절반이 몰려나왔다. 한인동지회 회원들이 독려한 결과, 게다가 자신들의 높은 지도자가 선택한 백인미녀를 보려는 사람들도 많을 터이다. 다음날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린 결혼잔치에도 9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승만 부부는 다시 한인기독학원을 맡아 부부동체의 새로운 운동에 돌입한다.  이승만이 교장, 프란체스카는 기숙사 사감이다. 
신혼살림은 학원 기숙사에 차렸다. 결혼생활비도 이제 동포들의 성금에 의지해야 한다.
 
이승만이 없는 동안 학원을 도맡아 1인3역으로 일했던 김노디는 물러났다.
여기서 동포사회에는 새로운 흥미꺼리 ‘김노디의 행방’을 두고 설왕설래한다. 
진작부터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가 결혼한다면 김노디가 틀림없을 것’이라 쑥덕거렸는데, 뜻밖에 백인 부인을 데려왔으니 김노디 거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오벌린 대학 졸업무렵의 김노디(왼쪽)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독립운동가 김노디.(이승만 앨범)

★김노디는 누구인가
 
지난 2021년 9월 문재인 전대통령은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김노디 애국지사에게 추서하는 독립유공자 훈장을 김노디의 딸 위니플레드 리(Winifled Lee, 한국이름 이보경, 95세)에게 수여하고 치하하였다. 늦어도 너무 늦은 보훈이 아닐 수 없다.
 
김노디는 오벌린 대학졸업 후 1927년 사업가 이병원과 결혼하여 딸 이보경을 낳고 나서 이혼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이승만 반대파는 이 딸이 이승만과 김노디 소생이라 의심하고 소문을 냈다.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호놀루루에 돌아왔을 때 김노디의 딸은 8세였다.  
 
김노디(본명 김혜숙)은 1905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했는데,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직접 모아 공부시키던 이승만이 기숙사에 데려다가 교육시킨 모범생이었다. 
김혜숙은 이승만의 장학정책에 따라 오하이오주 우스터 고등학교로 유학가고 오벌린 대학까지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승만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김혜숙은 신세대 독립운동가로 변신, 이승만이 벌이는 모든 사업과 행사에 적극 참여한 청년지도자가 되었다. 
3.1운동때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 연설로 언론의 주목도 받았고, 한인기독학원, 동지회, 애국부인구제회 등을 이끌며 미국식이름 Nodie로 개명, 한인친우회 확장에 나서 미국인 회원을 2만명 넘게 늘리고 자금을 모으는데 공을 세운다. 앞에서 본대로 학생 고국방문단을 인솔하여 본국에 와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노디는 이승만의 결혼 직후 상처한 동포 사업가 손승운(孫承雲)과 결혼한다. 이를 두고도 박용만파 등 반대파는 ”실망해서 아무나하고 결혼했다“는 둥 악담을 만들어 퍼트린다.
그뿐인가. 김노디의 본토유학시절 어머니를 만나러 하와이로 가던중 미주를 순방하는 이승만을 우연히 만나 같은 기차를 탄 것을 누군가가 ‘만법(Mann Act)’ 위반으로 밀고하여 두 사람이 미국 이민국의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 ‘만법’은 매춘등 목적으로 여성을 데려가는 등 성범죄 행위를 단속하는 법인데, 이민국 조사결과 ‘결백’으로 판명된다. 조사관은 어느 일본인이 무고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것도 반대파는 얼씨구나 나서서 이승만 모함에 활용하였다.
 
심지어, 이 사건이 백년도 지난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가 역사다큐 ‘백년전쟁’이란 명목으로 제작 방영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거짓 밀고자의 시각 그대로 가짜 영상까지 조작하여 만든 다큐는 다큐가 아니라 ‘이승만 죽이기‘ 왜곡 선전물로 학계의 판정이 났다.
 
이런 구설과 조작극을 일거에 씻어줄 ‘놀라운 자료’가 2022년 발견되었다. 
김노디가 사실은 ‘이승만의 수양딸‘이었음을 밝혀주는 110년전의 손글씨 문서 한장!
 

▲ 작년에 처음 발견된 문서, 김노디 아버지 김윤종이 이승만 교장에게 딸을 양녀로 맡긴다고 명기 날인한 입적 계약서.ⓒ뉴데일리DB

◆ 놀라운 발견! 김노디는 아버지가 이승만에게 맡긴 ‘양녀’
 
다음은 김노디 아버지가 한인학원 교장 이승만에게 써준 딸의 <양녀 입적 계약서>이다.
 
「나의 13세 된 여식 김또라(노디)를 이박사 승만씨에게 수양녀로 주며 
나와 나의 부인 김윤덕이 그 부모 된 권한과 책임을 영구히 넘겨 맡기며
이를 위하여 자에 성문으로 증명함」 
1913년 6월25일 호놀룰루 하와이
계약인 김윤종 (날인) 증인 한일성
 
이 입적계약서는 하와이로 이민 왔던 아버지 김윤종(1852~1936) 부부가 8년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신앙 깊은 이승만 박사를 믿고 어린 딸이라도 제대로 교육시켜 달라면서 맡긴 것이라 전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노디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딸 위니플레드 리가 어머니 유품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다큐 영화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제작하던 하와이 이민연구 학자 이덕희가 조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 딸도 이 계약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결혼식 사진도 함께 찾아냈다. 
이승만은 뉴욕 결혼식후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내지 않았고 유일한 가족인 양녀 김노디에게만 먼저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부녀는 입양사실에 침묵했을까. 신앙 깊은 양아버지와 양딸은 정치적 중상모략과 인신공격이 하도 많은지라 뜬소문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1948년 건국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김노디를 외자구매청장(1953~1955)에 임명하여 김노디의 미국 인맥과 성실함을 활용, 휴전후 미국자금을 유치 관리하고 달러 부정부패를 감시하게 하였다. 김노디는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대한부인회 간사, 인하대학교 이사 등으로 활약한 뒤 1958년 하와이로 귀환, 1972년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건국사(23) 영웅들의 불꽃 드라마...이봉창, 윤봉길, 김구

"거지 중에 상거지..." 명맥 위태한 임시정부
 
여기서 잠깐, 카메라를 상하이로 돌려보자.
이승만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제거한 임시정부는 앞서 설명한대로 소비에트 지도체제, 주석 김구는 임정청사에서 잠자고 밥은 동지들 집을 기웃거리며 얻어먹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청사 월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인데 이것을 낼 돈이 없어 소송이 줄을 잇는다.
공산주의자들이 판치는 임정은 한마디로 텅빈 집에 무정부 상태, 김구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정부 명맥마저 막연한 나날, 한때 독립운동자들이 1천여명이던 것이 수십명만 남았다.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동냥하는 나는 거지 중에 상거지...”라는 표현까지 쓰며 도와준 사람들이 고마워서 이름들을 다 적어놓았다.
 
소련의 새로운 발표가 나왔다. “식민지 운동은 복국운동이 우선한다” 공산화 중간단계의 민족해방론이다. 민족운동자들을 비난하던 공산주의자들은 그날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만들자고 덤비더니 저희들끼리 파벌 싸움이 벌어져 흐지부지된다. 
그때, 본국에서 광주학생의 항일투쟁(1929.11.3.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받아 임정사람들은 ’한국독립당‘을 1930년1월25일 결성한다. 그리고 김구는 비밀조적 ’의경대‘(義警隊)를 만들고 자금조달에 나선다. 하와이 미국 멕시코 쿠바까지 동포들에게 활동비 좀 보내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얼마쯤 호응이 있었다. 그런데 돈이 들어오지만 돈 찾으러 보낸 심부름꾼들이 돈을 가지고 노름도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임정은 여전히 빈털터리다. 이래서 안 되겠다. 무슨 일을 벌여야 할 텐데 써먹을 만한 젊은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처음 입단한 단원1호 이봉창. 거사전에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걸고 입단식을 했다.ⓒ독립기념관

◆31세이봉창 "일본 천황은 내가 죽이겠다"
 
그때 하늘이 보냈을까, 일본냄새 풍기는 청년이 나타나 큰 소리를 쳤다.
“당신들 여기서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도대체 뭐 하는 거요?
일본 천황쯤 죽이는 거 일도 아닌데 그걸 아직도 못하다니,
할 테면 제대로 해보란 말이오”
 
김구는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하지만 수상하다. 말의 절반이 일본말이고 억양이나 손짓 몸짓에 왜색이 진하다.
첩자냄새를 맡은 김구는 다음날 그 청년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저는 서른 한 살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간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려고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31세 청년의 이름은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4년제 학교를 나온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형과 함께 일터에 나선다. 용산역에서 일하다가 승진도 월급도 차별이 심해지자 뛰쳐나와 일본으로 간다. 오사카의 일본인 집에 가정부로 꺼가는 조카와 함께 일본땅을 밟은 25세 이봉창은 “일본인보다 더 잘난 일본인”이 되리라 결심하고 열심히 일한다. 그러다가 천황(히로히토)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몸수색에서 한글편지가 나오자 경찰에 구금되어 고생한다. 분노한 그는 난생처음 ’독립문제‘에 눈을 떴다. 하지만 생활문제가 급한지라 오사카의 일본인 상점에 취직, 신임을 얻어 이름도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로 양자가 된 그는 한국인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었다. 그러나 끓는 피를 어쩌랴. 일본말을 못한다고 조선인 종업원이 구박받는 광경을 모른체 하던 이봉창은 다시 깨닫는다..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살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 상점을 나온 그는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탄다. 상하이의 영국전자회사는 민족차별이 없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하지만 취직이 그리 쉬운가. 모은 돈만 까먹게 되자 프랑스 조계에 있다는 조선의 ’가정부‘(假政府)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가정부는 일본의 임정 호칭) (홍인근 [이봉창 평전], 나남출판, 2002)
 
김구의 믿음직한 약속을 받은 이봉창은 그때부터 일본인 행세를 하여 일본인 철공장에서 밥벌이를 하며 운명의 거사를 기다린다. 김구는 중국군에서 근무하는 김홍일을 통하여 수류탄을 확보하고 미주 동포들의 성금으로 이봉창의 여비도 마련하였다. 1931년 12월 6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에서 처음 ’천황폭살‘ 계획을 보고, 조소앙등 일부가 반대했으나 승인받았다,. 
 
“폭탄은 언제 준비되느냐”며 재촉하던 이봉창은 김구가 부르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봉창은 김구를 따라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둘째동생)의 사진관에 갔다. 김구가 하라는 대로 미리 준비된 폭탄 2개를 양손에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걸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김구가 벌써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입단식, 이봉창은 제1호 단원이 된 것이다.
 
12월17일 아침 김구는 이봉창을 전송하러 함께 상하이 부두로 나갔는데, 많은 일본인들이 배웅하러 모인 것을 보고 놀랐다. 역사의 아이러니, 천황을 죽이러 가는 조선인이 다정한 일본친구로 알고 나온 일본인들 중엔 일본총영사관의 경찰 간부도 있었다. 그는 자기 명함에 소개장까지 써주었다가 사건 뒤에 파면되자 자살했다고 한다. (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뒷날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봉창과 이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화애하지마는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대인 담론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술은 한량없고 색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가곡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홍구에 거주한지 1년도 못되어 그가 친하게 사귄 친구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왜경찰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현혹되기도 하고 모 영사의 내정에는 무상출입이었다. 그가 상해를 떠날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짓는 아녀자도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김구 [백범일지] 및 [동경작안의 진상])
’東京炸案의 眞相‘은 김구가 이봉창의거의 전모를 중국신문에 기고한 글인데, 그 원본은 2000년에 처음 발굴되었다.(동아일보, 2000.10.31.)
 
★1932년 1월8일 아침,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는 천황이 참석하는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이 열렸는데, 만주를 장악한 공로를 치하하고 만주국의 임무수행을 격려하는 행사다. 
이봉창은 행사장 입구 하라주쿠(原宿)로 달려갔다. 경비가 삼엄하고 연병장이 넓어 포기한 그는 돌아가는 천황을 노리기 위해 아까사까 미쓰케를 오락가락하다가 천황의 행렬을 놓쳤다. 택시를 잡아타고 뒤를 쫓았다. 경찰이 가로막았다. 차를 내린 이봉창은 겹겹의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마차가 황거(皇居) 남문 사쿠라다문(櫻田門)으로 향해 가는 순간, 다급한 이봉창은 주머니 수류탄을 꺼내 힘껏 던졌다. 
꽈앙! 두 번째 마차 바퀴에 맞았다. 소리는 컸으나 연기만 날뿐, 마차는 끄떡없다. 더구나 천황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일본경찰에 곧 체포되었다. 다른 수류탄은 꺼낼 겨를도 없었다. 이봉창 의사는 그해 10월10일 도쿄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는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그의 말대로 ’영원한 쾌락‘의 세계에서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하였다.
 
★김구 “나를 지원하는 서신들이 태평양 위로 눈꽃처럼 날아들다”
 
세계의 톱 뉴스! 김구는 이봉창이 의거직전 보낸 전보를 받자 몸을 숨겼다.
일본 경찰은 이봉창 조사에서 주모자로 김구를 지목,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김구 검거령을 내린다. 조소앙 등 공범자도 수배하지만 잡을 수가 없다.
텅빈 임정에는 그러나 곳곳의 동포사회로부터 재정지원이 급증하는 효과를 보았다.
김구는 “나를 애호 신임하는 서신이 태평양 위로 눈꽃처럼 날아들었다”고 [백범일지]에 썼다.
피신 중에도 김구는 모아진 지원금을 가지고 제2의 거사를 모색한다. 발길이 뜸하던 청년들이 김구를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중에 상하이에서 일하던 윤봉길이 있었다.

▲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식. ⓒ독립기념관

◆24세 윤봉길, 두 아들에 “병정 되어라” 유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은 충남 예산군 덕산 출생, 농민의 장남으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으로 자퇴하고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6년간 한학을 공부, 한학과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닦는다. 일본어도 독학으로 떼고 교재’농민독본‘을 만들어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며 농민운동단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이 되었다. 그러던 중 광주학생 사건과 함흥수리조합사건에서 농민들이 타살되었다는 소식에 망명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23세. 꽃다운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떠나는 이유를 윤봉길은 이렇게 써놓았다.
“갈수록 우리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서있을 수 없다. 나의 각오는 나의 철권으로 적을 부수려는 것...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임시정부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젊은 아내와 사랑하는 자식들과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김구에게 써준 ’이력서‘애서)
 
어렵게 중국 청도(靑島)에 도착하여 공장도 차려보고 중국회사 직공도 해보다가 해고 되자 상하이로 옮겨 홍구 시장에서 채소와 밀가루 장사를 했다. 그가 김구를 알게 된 것은 중국회사에서 일할 때, 두 사람은 시국문제에 의기투합하여 신뢰가 쌓였을 때 거사를 결심하였다.
장소는 4월29일 천장절(天長節, 히로히토 생일)행사장 홍구(虹口) 공원으로 합의하였다.
 
4월26일 김구는 이번에도 국무회의에서 혼자 준비한 홍구공원 거사를 승인받았다.
폭탄은 중국군 장교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장에 주문, 공장에서는 이봉창 거사를 알기 때문인지 많이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도시락 폭탄‘과 ’수통 폭탄‘ 두 개, 일본신문이 행사장에 매점을 금지하니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안내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번에도 윤봉길을 안공근의 사진관으로 데려가 이봉창처럼 ’한인애국단‘ 제2호 입단식을 행한다. 사진을 찍고 난 윤봉길은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유서를 쓴다. 두 아들과 조국청년들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김구에게 바치는 한시도 썼다. 2시간동안 쓰는 유창한 글을 보고 김구는 그 재능에 감탄한다.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모순(模淳)과 담(淡)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들이 되어라”
 
젖먹이 두 아들에게 병정이 되고 훌륭한 인물이 되라는 유서, 농민지도자 답게 동서양의 상식이 풍부했던 윤봉길은 수첩을 김구에게 맡기고 폭탄 사용법을 되풀이 실습하였다.
 
★자폭 명령★
윤봉길에겐 이봉창과 달리 특별 명령이 내려진다. 거사 장소가 상하이이기 때문이다.
「식단 뒤쪽에서 단상을 향해 첫 번째 폭탄을 던진 후에 두 번째 폭탄으로 자폭하기로 했다. 자폭하되 폭탄을 얼굴 가까이 대고 폭발시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일본군이 범인을 중국인으로 착각하든가 아니면 고의적으로라도 중국인이 한 것으로 억지를 부려서 그것을 빌미로 일본이 남경을 공격할지도 모르며, 만약 그렇게 되기만 하면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중국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을 감행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김홍일  [대륙의 분노])
죽음을 넘어버린 24세 애국의 불꽃 윤봉길은 얼굴을 망가트리는 자폭 연습도 한다.
 
▶4월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마지막 식사를 든든하게 먹어치웠다. 죽음을 초월한 투사는 투지의 에너지를 가득 채운 것이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뒤에는 이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
회중시계를 교환한 두 사람은 폭탄을 들고 메고 나선다. 택시를 탄 윤봉길에게 김구가 나직히 말했다. “지하에서 만납시다” 
 
홍구공원 일본군 행사는 11시 30분에 시작, 전원이 일어서서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기회는 이때다. 기마병 뒤에 선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내려놓고 끈 달린 물통 폭탄 안전핀을 뽑으며 뛰어나가 단상에 힘껏 내던졌다.
명중! 천둥치는 굉음과 함께 비명과 고함소리...도시락 폭탄을 집으려던 윤봉길은 군경의 몰매를 맞으며 체포된다. 두 번째 명령 ’자폭‘을 실행 못한 채 끌려가는 윤봉길은 가슴이 아프다.
 
단상의 일본군 장성들은 벼락을 맞았다.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사령관은 24군데 파편을 맞아 병원에 실려가 한달도 안돼 절명,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는 중상,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는 눈알이 빠지고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도 중상,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였다.
이봉창이 도쿄에서 미수에 그쳤던 한을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보기 좋게 풀었다.
“다 죽었던 임시정부가 살아났다” 좌절감에 빠졌던 임정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가 구세주 같았다고 한다.

▲ 거사전 윤봉길과 김구.ⓒ독립기념관

◆김구는 피신, 안창호 체포...김구 비난 봇물
 
검거선풍이 불었다. 김구는 거사 승인후 주요 인사들에게 미리 피신 비용도 주었다고 한다.
이동녕과 조소앙 등은 항주로 갔다. 김구 일행은 의논 끝에 상하이 YMCA 미국인 목사 피치(George A.Pitch)와 교섭하여 그의 집에 은신하였다. 
 
문제는 안창호가 검거된 것이다. 안창호는 워낙 일시적 폭력테러에 대하여 “애꿎게 한인들만 살 곳을 잃는다”며 반대하였는데, 그날도 측근 이유필 아들에게 소년단기금을 주기로 약속하였기에 그 집으로 갔다가 잠복했던 프랑스 경찰에게 붙잡혔다. 
안창호는 “나는 중국인이오. 이유필이 아니다”며 중국정부 발행 여권도 보여주었으나 허사혔다. 사건 당일에만 11명의 독립운동자들이 연행되었다.
 
상하이 흥사단 등과 미주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 세력이 격분하여 들고 일어났다.
“연락도 없이 저만 도망치고 왜 도산선생을 잡아가게 놔두었느냐”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김구 측에선 ’미리 피신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이쪽에선 ’거짓말‘이라 반격한다. 누가 진실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는 경찰이 주모자가 누구냐는 심문에 윤봉길이 ’이유필‘을 줄곧 말했다는 것이다. 안창호 측은 이것보라는 듯 김구를 공격하고 나섰다. 실제로는 교민단 대표 이유필이 윤봉길과 장기간 공모한 의거였는데 김구가 막판에 뒤늦게 나서 ’공로‘를 가로챘다는 논리였다. 
(김상구 [김구 청문회] 1권, 매직하우스, 2014). 
이 책이 제기하는 ’김구의 독립운동 의혹‘은 수 십 가지에 달한다. 심지어, 윤봉길은 “김구 돈벌이의 먹이”였다는 주장까지 인용해 놓았다. 왜냐하면 의거 열흘 뒤에 5월10일 김구가 “내가 다 했소” 과시하는 성명서를 때늦게 배포하여 언론들이 대서특필함으로써 엄청난 성금을 모아 독식했다는 일방적 주장이었다. 
오늘 날까지도 진상은 없고 주장들만 남아있다. 윤봉길이 그해 12월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본국으로 송환되어 감옥을 전전하다가 옥고로 합병증이 극도로 심화, 1938년 61세로 눈을 감는다. 
 

▲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보도한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호외(1932.5.1). 아래는 연행되는 윤의사.(자료사진)

★이승만, 프랑스에 항의 서한...김구, 상하이를 떠나다
 
상하이에 폭음이 진동하던 날, 뉴욕에 있던 이승만은 임정요인의 검거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주미 프랑스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검거 항의 및 중지와 안창호 등 11명의 석방을 촉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위원부는 체포된 한국인들이 폭탄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프랑스 조계 한국인들은 범죄자가 아니요 법을 준행하는 양민들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비폭력주의를 믿으며 폭력행위를 권장하지 않는다. 일본 당국은 하등의 증거도 없이 오직 그들의 상용수단으로 한국인들을 모함한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무법의 희생양이 되게 방치하지 말 것이며, 일본에 대하여 무고한 한국인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여 프랑스 조계에 돌려보내 보호해 주기를 간곡히 요망한다.” 
이승만의 서한을 접수한 프랑스 정부는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에게 한국인의 보호를 훈령하고 그 사실을 이승만에게 통보하였다. 이승만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감사 답신을 보냈다.
 
윤봉길 의거로 본국과 각국의 동포사회에서 김구의 권위가 급상승하였다. 이봉창 의거때보다 더 적극적인 재정지원이 이어지고 중국인들과 장개석 정부의 관심도 달라졌다.
김구는 그러나 상하이에서 공개 활동이 불가능하므로 안공근과 함께 가흥(嘉興)의 피난처를 향하여 기차에 오른다. 가흥과 항주(杭州)에는 미리 피신한 임정 인사들이 기다린다. 정처없는 임시정부의 유랑길! 망명 14년만에 상하이를 떠나는 김구 앞에 중일전쟁이라는 고난의 길이 또 열릴 줄이야. 

이승만 건국사(25) 미국과 세계를 움직인 책–‘JAPAN INSIDE OUT’

중일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국제연맹서 펼친 이승만의 ‘만주침략 고발’ 외교가 불을 질러 만장일치로 일본의 만행 규탄이 나온 뒤, 국제연맹을 스스로 탈퇴한 일본이 마침내 ‘상하이사변’을 조작하여 중국 본토를 공격하였다. 이승만이 바라는 미-일 충돌의 시간이 다가오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신축을 서둘러 추진한 이승만은 광화문을 본떠 지은 교회 축성식을 마치고, 한인기독학원 운영체제를 정비하여 이원순, 김노디 등 측근들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1939년 11월10일 정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여객선 메소니아호에 올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호놀룰루를 떠난다. 망명 27년을 살았던 ‘하와이의 이별’은 21년이 흐른 뒤 4.19하야 직후에야 ‘망명아닌 망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 1938년4월 준공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광화문을 본떠 이 교회를 지어놓고 이승만은 망명 27년만에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옮긴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세계2차대전 폭발...이승만은 ‘미국을 가르치는 책’을 쓴다
 
1939년 9월1일 독일의 폴란드를 기습 이틀후 3일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한다. 일본의 중국침략 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한 것이다. 
 
서둘러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급박한 국제정세의 새로운 전개에 심장이 불탄다.
“미국이 일본을 공격할 미-일전쟁의 때가 왔다. 아니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만은 영어로 미국인들에게 호소하는 책을 영어로 쓰기 시작하였다. 
구미위원부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싼 주택을 할부로 산다. 워싱턴 시내 각국 외교공관들이 몰려있는 거리 노스웨스트 지구에 자리한 아담한 2층 벽돌집에 이승만 부부는 12월30일 입주했다. 국립동물원이 바라보이는 호비트 스트리트(Hobert St. N.W.) 1766번지, 밤낮으로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산책과 기도 속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역사적인 작품 저술에 몰입한다. 
 
“동양문제에 대하여 미국 대중은 몽매해서. 일본이 한국을 합방한 사기극, 만주병탄, 중국 침략 정책을 영문세계에 알려주기 위해 영문으로 썼소”([태평양주보] 리박사 영문서책, 인터뷰, 1941.8.23.) 이런 이승만의 말처럼 [JAPAN INSIDE OUT]이란 제목을 붙인 이 영문 책은 모두 15장으로 구성, 하버드와 프린스턴대학 출신의 국제법-국제정치학 박사답게 방대한 각국 자료를 분석 해설 평가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세계 자유를 위한 역사성 및 현장성이 설득력을 발휘하는 실증적 정치사상서이다. 
이승만은 그동안 축적한 동서양의 지식과 유창한 영문실력과 타고난 문장력을 동원, 발등에 떨어진 국가위기를 외면한 채 ‘잠자는 미국’을 일깨우는 국제정세 해설서이자, 자유정신의 철학서, 임박한 전쟁의 경고장, 아주 쉽게 풀어 불을 지르는 고급 선전 선동서를 썼다. 
특히 미국의 대외정책과 외교의 오류, 전통적 먼로주의의 시대착오적 패착들을 신랄하게 파헤쳐 미국인들의 공감을 불러냈다.
 
이승만은 무려 16개국의 역사적 정치적 정세변화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프란체스카는 책의 전문을 세 번이나 다시 타이핑하느라 손가락이 짓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29세 때 집필한 옥중 명작 [독립정신]과 함께 이승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는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나온 [일본 내막기], 그 뒤에 [일본 군국주의 실상] [일본 그 가면의 실체] 등으로 세 번 번역되었다. 1956년에는 일본에서도 [나의 일본관]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최근에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란 번역본이 시판중이다. 몇몇 대목을 소개한다.
 

▲ 1941년 발간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표지. 오른쪽은 비봉출판사의 번역판ⓒ뉴데일리DB

★“일본이 조선에 불붙인 산불, 미국을 태우려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쓴 동기가 전쟁을 위해서가 하니라 평화를 위해서임을 말해두고 싶다. 나는 가끔 오해를 받아왔다. 동양문제를 논의할 때면 ‘자네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회피하기를 바라며, 지금이라도 미국이 전쟁을 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승만은 2천년 유교문화를 향유하는 한민족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지를 에로 들면서, 그 평화를 깬 것은 일본임을 역사적으로 풀이한다. 그래서 미국에게 경종을 울린다.
“미루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산불을 저절로 꺼지지 않는다. 불길은 하루하루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수년전 여러분(미국인들)은 불행의 희미한 속삭임만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화성이나 다른 항성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후 시커먼 연기 기둥이 솟는 것이 보였고 불길이 구름에 빛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러분은 근심이나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벌써 그 불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이 와서 편안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중략, 중일전쟁 피해사례 인용)...여러분은 이제 동양에 건설한 조계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사업상의 투자, 선교본부, 병원 등 소유 기관들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중략)...이런 일들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런데도 여러분은 아직도 산불이 멀리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지금도 여러분은 ‘한국인과 만주인과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게 내버려두라.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서문).
 
★세계 유일신(神) 숭배 전쟁국가 일본, 선과 악의 ‘아마겟돈’을 막아라
 
“일본은 유일신의 국토이며, 일본민족은 유일한 태양의 자손 야마토(大和)민족이오, 일본 황제는 유일한 신의 지배자이고 하늘의 황제 천황이다. 따라서 일본이 세계의 빛이 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장에서 죽는 전사나 애국자는 그 순간 신이 되어 극락세계 신의 가족에 합쳐진다. 이 신토(神道) 기본사상 신비주의로부터 극단적 애국사상 국수주의가 발전되어 해외의 군사적 정복국가로 되었다. 이런 전쟁숭배 사상은 국가팽창이 그 목적이 됨에 따라 무사숭배(武士崇拜) 종교로 체질화하였고, 일본은 7천만의 전신(戰神)들로 이루어진 전쟁도구이다” (제1장 ‘일본의 성전사명과 전쟁심리’)
이승만은 천황주의(Mikadoism)는 일본 열도, 일본 국민, 일본의 지배자가 모두 신이 만들어 내려보낸  전체주의적  신정일치(神政一致, theocracy) 특이체질임을 미국인들에게 가르쳐준다. 일본 고대사를 기록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해박한 일번역사 지식을 인용, 일본 특유의 신권(神權)국가 형성역사를 해설한 이승만은 일본이 뼈속까지 우상숭배인고로 기독교 자유정신과는 완전 배치되므로 미-일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내가 35년전에 그 징조를 간파했고 근년에 미국인들에게 경고해온 ‘아마겟돈’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35년전‘이란 1905년 을사조약을 말하고, 아마겟돈(Armageddon, 요한게시록 16장16절)은 세계 종말의 날에 지구가 불타는 선과 악의 최후 결전이다. 따라서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 책에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 워싱턴서 [JAPAN INSIDE OUT]을 집필하던 1941년 무렵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연세대이승만연구원

★“미국이 조선을 버린 결과로 세계대전이 또 일어난다“
 
일본의 세계정복 교본 ’다나카 메모리얼‘(田中 Tanaka Memorial)을 주목하라. 중국지배를 비롯, 세계를 천황질서로 통합하려는 전략을 기술한 괴문서, 만주침략부터 주목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이것이 독일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일본의 대륙침략 교본이 되었다고 말하고, 그 발단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맺은 ’조미상호통상수호조역‘을 파기하여 ’거중조정’(good offices) 의무를 저버리고 일본의 ‘강도행위’를 용인함으로써 한국이 주권을 상실함을 열강이 방관하게 되어 세계대전까지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비판하였다.(제2장 ‘다나카 문서’)
 
★일본이 한쪽 뺨을 때리면 계속 다른 쪽 뺨을 대주는 영국과 미국.
 
레이디버드호 & 페네이호 사건. 진행중인 중일전쟁에서 영국포함과 미국전함이 양자강에 정박중 공격당하고 침몰한 사건인데 영국 미국 양국이 일본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충돌을 피하려고 속아주고 양보한 ‘치욕의 평화주의’를 현장분석으로 비판 경고함.
미국이 일본과의 배상금 협상에서 매번 굴복하는 자세는 ”일본이 계속해서 미국의 뺨을 때리더라도 미국은 꾸준히 다른 쪽 뺨을 내밀어야 하는 상호이해 하에서만 일본이 주장하는 ‘우호관계’에 부응하려 하는 것“이니 미국민의 권익은 무엇이냐고 따진다. 일본과의 협상에서는 ”힘을 보여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선전술에 놀아난 미국 대통령, ”해군을 빨리 증강하라”
일본은 진작부터 ‘태평양은 일본의 호수’ ‘일본의 뒤뜰’로 간주, 미국을 속여 전쟁준비를 해왔음에도 미국의 몬로주의가 이를 방관하여 침략의 산불은 턱밑까지 다가왔다고 했다. ”일본이 태평양을 제것인양 우선권을 행사할 때마다 모른 척 해온 미국은 일본의 공격을 받을 때가 닥쳐올 것“이니 해군력을 증강하라고 거듭 주장한다.
청일전쟁이후 일본이 해마다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어 미국의 여론을 정복함. 그 결과 러일전쟁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일본 손을 들어주었고, 한일병탄이래 반일기사도 사라졌으며 ‘반일’은 금기어가 되었다. 미국 민주주의 2대원칙 ‘표현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최대한 이용한 일본의 선전술에 무방비로 전락한 ”미국은 범국민적 선전기구를 발족하여 군국주의에 대항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맹목적 평화주장 진보주의자들은 ‘제5열’과 같다
 
미국의 반전주의를 비판. 전통적인 고립주의자(isolationist)들과 정신적 부채감에 빠진 진보주의자(liberal)들, 친 전체주의 파시스트(pro-facist)들, 6만명의 미국 공산당, 그리고 적대적 소수민족들이 극렬한 반전여론을 일으켜 ”미국에 국가재난을 초래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만일 미국인으로서 모든 전쟁을 비난한다면 워싱턴 기념탑이나 링컨 기념물들은 파괴되어야하고,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고귀한 유산 자유와 정의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주의자라 하여 자기나라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정할 여지가 없다.
국가의 방위, 국가의 명예, 국가의 독립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전쟁으 거부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투쟁적 반전론자들은 제5열(the fifth column)과 같이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이다.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결과는 같은 것이다.”
(‘제5열’은 스페인 내전에서 생긴 용어로 간첩, 내부의 적, 반역 등을 의미한다.-필자 주)
 
★소련을 세계 처음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미국은 외로운 섬이 되었다”
 
이승만은 당시의 세계 판도를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 국면임을 꿰뚫는다.
획기적인 주장은 “소련 공산주의가 히틀러의 나치나 일본을 신권 군국주의와 같은 인류의 적, 최악의 전체주의로 규정한다. 이것은 미국이 2차대전의 연합국으로서 소련과 손잡은 루즈벨트의 ’바보짓‘을 정면으로 고발한 것이며, 세계를 풍미하는 레닌-스탈린주의의 파멸성을 세계에 경고한 이승만의 탁월한 역사적 통찰력의 직격탄이었다.
”일본, 소련, 독일, 이탈리아의 전체주의가 서반구를 제외한 거의 전세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으므로, 미국 민주주의는 전체주의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하나의 섬이다. 모든 전체주의는 평화적 침투라는 익숙한 방법으로, 필요하다면 무력 침략으로, 미국 대륙에 뿌리를 내릴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승만은 앨라스카와 하와이가 위험하다고 경고음을 발한다.
 
★”미국을 행동하게 하자---지금 당장에 행동하게!!“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 리더십의 확보에 실패하였다.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는 이미 세계를 3대 세력권으로 분리할것을 요구한다.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 태평양에서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지배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서, 미국은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의 원칙대로 미주나 지비하며 만족하라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미주대륙은 정대 침범하지 않겠다는 비적(匪賊) 국가들의 약속을 믿고서 나머지 세계를 비적들끼리 나누어 먹도록 내버려둔다면, 큰 실책을 범하게 된다. 누가 저들의 말을 믿겠는가? 그것은 먼로독트린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시작되는 것, 즉 세계 지배권을 확보하는 날 비적들은 “먼로 독트린 사문화”를 외칠 것이다.
 
저들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저들과는 약속도 하지말고 약속을 받지도 않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저들이 이웃나라에서 무력으로 탈취한 모든 것들을 토해낼 때까지 경제적 제재, 금수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미국은 저들을 공적(公敵)으로 낙인 찍힌 자들을 다루어만 한다.
미국을 행동하게 하자! 지금 바로 행동하도록!“
 
이승만의 결론은 명뱍하다.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으니 미국이 전쟁을 못하도록 선제하라”는 것이다. 유럽에서 소련과 독일이 싸우는 틈을 노려 일본은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며 “솔직히 말해서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회피하거나 연기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출판 4개월후 일본의 진주만 기습...베스트셀러...미군부 ‘필독서’로
 
세 번이나 고쳐 쓴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는 교민들의 지원금을 받아 1941년 8월1일 뉴욕의 플레밍 H. 레벨(Fleming H. Revell Company)에서 출판하였다,. 
이승만은 책이 나오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부인 엘리노어 여사에게 먼저 보냈고, 육군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 국무장관 헐(Codell Hull, 1833~1944)을 비롯한 미정부 고위층과 국무성 관료. 그리고 미의회 등 친지들에게도 보냈다. 하와이와 본토 등 동지회에서 보급에 힘썼다. 

▲ 노벨문학상 미국작가 펄벌. 오른쪽은 부천에 펄벅이 설립한 소사희망원 어린이들을 방문한 펄벅.('시니어오늘'게재 사진 캡처)

★노벨문학상 펄 벅의 서평 “무서운 진실...미국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
 
여러 신문과 잡지에 서평이 나왔다. 그 중에 3년전 노벨문학상(1938)을 받은 인기 여류작가 펄 벅(Pearl S. Buck,1892~1973)이 [아시아 매거진](Asua Magazine)에 기고한 서평은 정곡을 찔러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그덧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는 바라지만, 그것이 오직 너무나 진실인 것이 두렵다. 사실 이승만 박사는 일본에 정복된 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전반적으로 놀랄 만큼 온건한 인물이다. 그는 공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기술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아시아에서 현재 일본이 계획하고 있는 ‘신질서’(New Order)에 대하여 권위있게 말할 수 있는 민족이 있다면 한국인들일 것이다. 
나는 이 박사가 미국인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사실, 곧 미국이 1905년 수치스럽게도 한미조약을 폐기하였고, 그럼으로써 일본의 한국 병탄을 허용했다고 말해 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박사는 ‘이것이 큰 불이 시작되는 불씨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 말에 당연히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만주사변보다도 더 일찍이 역사상 우리 세대로 하여금 인도에 대하여 불명예스럽게 만든 무자비한 영토쟁탈의 시작이었다. 미국인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나라의 대부분이 국민이 모르는 외교의 사악함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이 박사는 우리가 나치즘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온 술책과 구실과 망상이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일본의 정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인들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들을 위하여 집필된 것이고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이 책을 읽어야할 때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진실임을 두려워한다.”
 
펄 벅은 한국에 중국 만큼 애정을 쏟은 작가였다. 생후 석달만에 선교사 부모와 함께 중국에 가서 성장하여 중국의 전통적 지주 일가를 모델로 쓴 장편소설 [대지]를 발표, 노벨문학상을 받은 첫 미국여성작가이다. 이승만을 알게 된 펄 벅은 이승만의 건국 후에는 한국에 와서 활발히 복지사업을 벌인다. 부천에 있던 유한양행 소사 공장이 이사를 가자 유일한의 도움으로 그 부지를 매입, 1964년 한국펄벅재단 소사희망원을 설립하고, 19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9년간 8번이나 소사희망원을 방문해 아이들을 직접 씻기고 돌봤다. 그때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원제 [The Living Reed], 장영희 번역,1963)도 있다. 펄 벅은 서문에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썼다. 
경기도 부천문화재단은 펄 벅의 소사희망원 한 동을 복원, 2006년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불타는 미함정 아리조나 호.ⓒ위키피디아

★일본의 결정적 패착! 진주만 공습(眞珠灣攻襲, The Attack on Pearl Harbor)=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새벽(하와이 현지 시각) 항공모함 6척으로 편성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미국 하와이의 오아후섬 북쪽에 바싹 접근하여 400여대 함재기가 진주만을 폭격,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는 쑥밭이 된다.
 
이승만이 경고한 '산불'이 마침내 미국에 붙어 불태우기 시작한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미국 함정 12척이 침몰 파손되고 미군장병 2,334명과 민간인 103명이 사망한다. 다음 날, F.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명한 "치욕의 날 연설"로 의회의 '전쟁 참가법'이 만장일치 통과, 미국은 참전을 공식선언 한다.
 
사실 일본은 미국과 전면전쟁에 돌입할 마음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지 중일전쟁 이후 미국의 금수조치등 ‘경제제재’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 ‘평화협상’의 돌파구를 뚫으려는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그 경제제재는 순전히 일본의 야욕이 자초한 것이다. 유럽전쟁에서 식민국가들 프랑스나 네덜란드가 독일에 고전하는 틈을 노려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 열도로 진격, 풍부한 전쟁자원을 탈취하였다. 이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를 단행, 전쟁 에너지를 미국산 석유에 의존하던 일본은 ‘사무라이식 복수’의 칼을 빼고 말았다. 
미국의 고립주의와 미국인들의 평화여론만 믿고 전쟁할 줄 몰랐는데 루즈벨트가 다음날로 선전포고, 만사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초장의 승리에 만세를 부른 천황주의 일본군은 자기체면에 빠져 ‘가미가제’(神風신풍) 자살폭탄에 이르기까지 ‘성전’(聖戰)의 광란에 돌진하였지만, 막강한 미국의 전력-전략 앞에 다시는 승리를 맛보지 못한다.
 
 
★이승만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국 참전’--마침내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여 이길 것임으로 꿈에도 소원인 ‘독립의 문’이 열렸다. 이승만의 소원을 일본이 들어준 셈, 그리고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주머니에 모처럼 목돈이 들어오게 된다.
처음 [JAPAN INSIDE OUT]이 발매되었을 때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모르는 미국 지식인들이나 반전주의자들은 “전쟁을 도발하려는 전쟁광의 책”이라는 둥 혹평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4개월 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하루아침에 반전이 일어난다. “이승만은 예언자”라는 칭송([임병직 회고록] 여원사,1964)까지  나오면서 책은 팔려나갔다. 중간을 거듭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런던에서도 출간되었다. 
 
루즈벨트나 스팀슨이 이 책을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미국 육군은 이 책을 미군의 정훈교육 교재로 채택하여 ‘필독서’로 권장하였고, 영국 군부에서도 채용하였다고 한다.
남편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프란체스카에게도 잊을 수 없는 선물이 생겼다.
결혼후 처음 선물 같은 선물, 이승만이 난생처음 인세에서 돈을 떼어내 아내에게 검은 색 드레스 한 벌을 사주었으니 얼마나 소중한 사랑의 열매인가. 프란체스카는 그 옷을 40여년간 입다가 며느리 조혜자(曺惠子)에게 물려주었다. 지금도 이화장에 전시되어 볼 수 있다. 
 
★이 책은 미국을 움직이고 세계 역사를 움직인 책이다. 왜냐하면 2년후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그 선언문에 ‘한국독립 조항‘을 넣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집요한 백악관 외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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