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응답하라 옛 馬山

醉月 2016. 2. 26. 20:37

‘마산(馬山)’이란 지명은 이제 과거의 것입니다. 어색하지만 정확한 행정명칭으로 부르자면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입니다. 그곳에서 옛 마산의 자취를 찾아갔습니다. 마산이란 이름이 환기하는 건 가곡 ‘가고파’에 등장하는 고향 바다입니다. 하지만 사실 마산은 바다보다 그 바다를 메워서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압축성장의 시대를 가장 화려하게 건너왔다는 자존심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기력을 잃어버리고 만 도시. 마산에서 만난 것은 급격한 도시의 쇠락이 남겨놓은 자취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미처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은, 그 시대를 건너온 도시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이제 그 자취를 찾아갑니다. 백열전구가 켜진 늙은 술집과 오래된 책을 꽂아둔 헌책방, 그 사이로 난 골목을 따라 LP판의 올드팝과 문 닫은 극장을 찾아 나섭니다.

무학산 자락의 학봉에 올라 내려다본 마산 일대의 야경. 처마를 잇댄 주택들과 해안의 고층 건물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야경이야말로 마산의 가장 화려한 모습이다. 도시 너머로 마산만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마창대교와 부산에서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의 모습도 보인다.


# 마산에서 압축성장의 뒤를 돌아보다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지금은 창원통합시에 속한 두 개의 구(區) 이름으로만 남았지만,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마산의 위세는 그야말로 당당했다. 마산의 중심은 단연 창동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인파들이 떠밀려 다니던 곳이었다. 서울 명동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창동은 죽었다. 그것도 너무 쉽게. 경제자유도시의 입주 기업이 하나둘 떠나면서 경기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일자리는 빠르게 사라졌으며 인구는 줄었다. 흥청망청 북적거리던 창동은 금세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이제 창동이 힘겹게 살아나는 중이다. 창원과 마산, 진해가 합쳐져 만들어진 거대도시 창원통합시가 균형발전 전략을 짜면서 마산지역 성장동력의 한 축을 관광 쪽에 맞췄다. 이른바 ‘좋았던 시절’의 영광과 추억을 테마로 마산 원도심의 도심재생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그게 3년 전의 일이다. 쇠락한 골목과 낡은 상가, 누추한 시장을 더 이상 허물지 않는 대신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 이야기들이 덧입혀졌다.

한때 번성했던 도시의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도시 출신이 아니고, 그 골목의 추억이 없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감상을 던져줄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마산의 원도심을 찾아가는 길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됐다.

마산이 흥청거렸던 시절에는 누구나 앞만 보고 달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어디 마산만 그랬을까. 압축성장의 시기에는 다른 도시도 다 마찬가지였다.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마산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삼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볼 여유가 주어졌다. 마산이 고향이 아니라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산의 바다가 ‘고향 바다’로 일컬어지는 것도 사실 그곳이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고향의 이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마산의 도심에는 4·19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의 시신을 건져낸 부두가 그대로 남아있고, 요정들이 즐비했다던 골목이 있으며 바닷가 선창에 판자로 덧대 만든 선술집 ‘홍콩빠’의 추억도 있다. 57년 된 양과자점과 뜨끈하게 속을 덥히는 2000원짜리 콩물을 파는 역전 식당 같은 곳이 여행자들에게 반가운 건 그곳이 꼭 ‘마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효율과 속도를 좇는 도시라면 진작 없어졌어야 하는 곳들이 마산에는 여태 남아 추억을 되새김할 수 있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다 할 해안 풍경이 없는 마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사궁두미 해안. 진해 쪽의 해안 능선 위로 떠오르는 해의 붉은 기운이 바다를 온통 물들이는 곳이다.


# 고향의 봄 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여기 마산을 배경으로 한 두 곡의 노래가 있다. 하나는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곡 ‘가고파’이고, 다른 한 곡의 노래는 록그룹 노브레인이 부른 프로야구단 ‘NC 다이노스’의 응원가 ‘컴 온 컴 온 마산 스트리트’다. 이 두 곡의 노래처럼 마산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고파’는 마산에서 나고 자란 노산 이은상이 가사를 붙인 가곡이다. 이 노래에서 마산은 따뜻한 남쪽 고향 바다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반면 응원가 ‘마산 스트리트’는 정반대다. 록그룹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가 고향 마산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는 이 노래에는 ‘콜라빛 나는 바닷물이 흐르고…’라는 가사가 있다. 같은 마산의 바다를 두고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라는 가사와 ‘콜리빛 나는 바닷물’이란 가사가 보여주는 간극이라니….

가사 속에 등장하는 묘사는 둘 다 마산의 바다다. ‘가고파’가 그리는 마산 바다는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풍경이다. 세금으로 거둔 쌀이며 진상품을 모아두었던 조창이 들어섰던 조선 시대부터 마산은 번성했다. 당시만 해도 마산에는 경상도에서 가장 큰 장이 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마산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을 넘보는 전진기지가 됐다. 1920년대 말 일본식 청주를 빚는 공장만 7곳에 달했다니 느닷없이 진행된 근대화로 마산은 적잖이 흥청거렸던 모양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오래도록 마산의 바다는 쪽빛이었다. 마산 도심을 굽어보는 산책로가 있는 회원현 성지에서 만난 노인들은 ‘모래를 잡아 뿌리면 새파란 야광충들로 바다가 푸르게 빛나던 시절’의 마산 이야기를 했다.

마산 푸른 앞바다에는 부산, 충무(통영), 거제 등 남해안 항포구로 드나드는 여객선이 바삐 오갔다. 해방 직후에는 유행병처럼 도는 폐병을 얻어 국립마산결핵요양원으로 밀려든 젊은 문인들 덕에 도시 전체에는 문학적인 향취가 그윽했다. 6·25 이후에는 피란 온 예술인들까지 더해져 다방과 음악감상실이 만원이었다고 했다. 노인들은 마산에서 번성했던 다방과 사교클럽 이름을 줄줄이 댔다. 백랑, 컨티넨탈, 비원, 외교구락부, 콜럼비아 찻집…. 이와 함께 마산 사람들이 빼놓지 않았던 건 4·19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죽음과 자유당 정권 시절 3·15 부정선거에 맞선 저항정신에 대한 자부심 넘치는 이야기였다.

# 콜라빛 바다…번영의 시대의 마산

‘가고파’가 마산의 바다가 쪽빛이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마산 스트리트’가 그려낸 마산 바다의 풍경은 1970년 마산이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기업들이 앞다퉈 마산으로 내려왔던 시절의 모습이다. 한일합섬, 한국철강, 무학으로 대표되던 기업들이 번성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마산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출근길 노동자들의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마산의 번영은 시작됐다. 퇴근 무렵이면 도심 창동 일대는 인파들로 흥청거렸다. 전국 7대 도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던 때였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낮은 처우에도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이들은 오동동 일대의 횟집에서 막걸리 몇 잔에 고된 노동의 시름을 풀었다. 당시 마산의 명물은 어시장 부근에 판자로 바다에 반쯤 걸쳐진 횟집들이었다. 물 위에 지은 집들이 홍콩을 연상시킨다 해서 ‘홍콩빠’라고 불렸다. 형편이 좀 나은 이들은 오동동 거리의 요정을 찾았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로 시작하는 ‘오동동 타령’도 마산의 오동동 요정거리 권번 기생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였다.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거치면서 마산의 바다는 각종 오·폐수로 오염됐다. 환경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깨끗한 바다보다 먹고살 것이 더 중요했던 때였다. 수출자유지역으로 전성기를 누릴 때 마산의 바다는 전국에서 가장 더러운 바다였다. 응원가 ‘마산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콜라빛 바다’가 바로 그때 마산의 풍경이다. 지난 2013년부터 NC 다이노스의 팬들이 마산구장에서 8회 공수교대 시간에 목이 터져라 불렀던 응원가 ‘마산 스트리트’는 한때 퇴출위기에 처했다. ‘깨끗해진 마산의 앞바다를 모욕하는 표현’이란 주장 때문이었다. 고심하던 구단은 응원단에게 ‘자제’를 요청했지만, 아직도 ‘마산 스트리트’는 NC 다이노스의 대표 ‘떼창’ 응원곡이다. 응원가는 계속 불리고 있지만 어찌 됐든 마산은 이제 ‘고향 바다’의 쪽빛 바다색을 다시 찾았다.

주민들은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고 했지만, 마산어시장은 여전히 활력으로 펄펄 뛴다. 아케이드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난전마다 떠들썩한 흥정이 벌어진다.


# 마산 바다를 굽어보는 가장 아름다운 자리

마산으로의 여정은 쪽빛 고향 바다를 굽어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마침 봄볕이 따스한 날들이 계속돼 마산 앞바다의 빛깔은 더 곱다. 마산 일대의 경관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는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에서 압도적인 곳이 무학산 자락의 부엉산 학봉이다. 교방동의 서원곡 유원지에서 임마누엘 수도원 방면으로 비포장길을 살짝 들어서면 체육시설이 놓인 작은 공원이 있는데, 거기서 학봉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가 있다. 학봉 못미처 전망 좋은 자리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여기까지는 20분이면 넉넉하다.

정자에 서면 마산 앞바다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가까이로는 다닥다닥 붙은 주택가들과 해안가의 고층건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지고 그 앞이 바다다. 바다 쪽으로는 마산만을 건너는 마창대교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부산 가덕도에서 거제를 잇는 연륙교가 지나간다. 여기서 보는 낮의 쪽빛 바다 경관도 좋지만, 해 질 무렵 올라가 화려한 야경을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낮은 처마의 산동네 주택가의 노란 불빛과 빌딩 숲의 흰 불빛이 밤이 깊을수록 또렷해지며 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탄성이 나올 정도다.

발품을 팔지 않고도 문신미술관이나 미술관 뒤편 언덕 위의 추산 근린공원에 있는 회원현 토성의 옛 성터에서 굽어보는 마산만의 경관도 나무랄 데 없다. 문신미술관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이 1980년 고향인 마산으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미술관을 만들기 시작해 1984년 개관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에는 브론즈와 스틸 작품이 스케치, 석고 원형 등과 함께 전시돼 있는데, 야외 전시장에서 마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미술관 뒤편의 옛 성터는 고려 때 지어진 토성의 자취인데, 토성 정상 부근에 최근 누각을 세워 두었다.

# 마음이 닿는 곳을 향해 오래된 골목을 걷다

▲ 봄볕으로 가득한 봉암수원지의 모습. 물 위에 지은 정자가 독특하다.

마산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창동과 오동동 일대다. 마산의 지나온 과거의 풍경이 이곳에 다 모여 있다. 그러니 마산을 여행한다는 건 창동과 오동동 일대의 골목을 둘러본다는 것과 같은 뜻인 셈이다.

창원시의 원도심 재생사업도 창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도심 재생의 테마는 문신예술골목, 마산예술흔적골목, 에꼴드 창동골목, 이렇게 세 가지이지만 사실 도심재생 사업의 대상이 그렇다는 것이고, 원도심을 걸어서 둘러보는 도보 길은 훨씬 더 많다. 술값만 내면 안주가 끝없이 나오는 통술집을 지나가는 ‘소리길’도 있고, 어시장 주변의 ‘복국 거리’와 ‘아구찜 거리’를 둘러보는 길도 있다.

이런 길들을 각기 다른 이름으로 구분해서 걷는다면 오히려 헷갈릴 뿐이다. 서로 이어진 골목이라 굳이 지도를 펼쳐 들고 따로 구별해 둘러보지 않아도, 방향감각만 유지한다면 빠짐없이 다 둘러볼 수 있으니 걱정할 건 없다.

다만 무엇을 봐야 할 것인지는 미리 알아두어야 하니 ‘걸어서 만나는 마산 원도심 이야기’란 제목의 지도를 한 번 쓱 보는 것 정도는 필요하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창동 아트센터 앞 아고라 광장에서 시작할 것. 광장이라야 손바닥만 한 마당이지만, 방향감각을 유지하려면 기준이 되는 출발지점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두 번째는 바삐 서둘지 말고 천천히 소일하듯 느긋하게 걸어야 한다는 것. 경험으로 미뤄보면 바삐 움직인다면 필시 길을 잃게 된다. 일단 걷기 시작했다면 감(感)을 믿고 눈길이 끌리는 대로, 발길이 닫는 대로 걷는 것이 요령이다.

# 헌책방과 요정, 그리고 혁명의 자취

▲ 마산부두의 1960년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에 세워진 김주열 추모비.

창동의 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건 이런 것들이다. ‘삼성당 문고’와 낡은 LP 따위를 파는 헌책방, 종업원 없이 주인이 손수 음식을 차려 하루 30명 손님만 받는 식당, 간판에서부터 연륜이 묻어나는 59년 된 제과점, 새알심을 넣은 뜨끈한 팥죽을 내는 팥빙수집, 한때 피란민처럼 손님들이 몰려 ‘6·25’란 이름을 갖게 됐다는 떡볶이집…. 평생 헌책방을 운영하며 헌책만 130만 권을 모았다는 ‘영록서점’의 주인은 창원대에 인문학 강좌까지 나가는 제법 이름난 명사이고, 진한 팥으로 소를 내서 팥죽을 차려내는 ‘복희집’의 여주인은 40년째 같은 메뉴로 손님을 맞고 있다.

동선을 더 넓혀 길게 걷는다면 1950년대 요정이 즐비했다는 요정 골목, 50여 년 동안 1만3000쌍의 무료결혼식을 치러줬다는 신신예식장 등을 만나게 된다. 요정골목 인근의 보쌈집 앞에는 3·15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첫 시위가 열렸던 3·15 의거 발원지가 있고, 정부마산지방합동청사 옆 부두에는 김주열의 시신을 인양한 지점에 세워진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가 서 있는 철책 뒤쪽의 세 번째 쇠말뚝이 있는 해안벽 3m 앞의 바다에서 1960년 4월 11일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혀 숨진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고 이를 계기로 부정선거에 대한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4·19로 이어졌다.

마산 어시장은 긴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해산물을 좌판에 펼친 어물전들이 끝 간 데 없이 늘어서 있다. 상인들은 시장의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고 했지만, 제철을 맞은 도다리와 돌문어, 갖가지 조개류와 오징어 따위가 그득한 어시장은 펄펄 뛰는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 도시 풍경이 숨겨놓은 바다와 호수

마산에는 또 바다와 도시 풍경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빼어난 풍경을 가진 명소들도 곳곳에 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팔용산을 끼고 있는 봉암수원지다. 봉암수원지는 일제강점기이던 1928년 인구 3만 명이던 마산의 계획급수를 위해 조성한 저수지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제방을 확장했으나 1970년대 인구 증가로 급수에 차질을 빚자 1984년 마산권 지방상수도 확장사업을 완공하면서 수원지는 폐쇄됐다. 수원지로 활용되던 시절 봉암수원지는 출입이 통제되면서 일대는 해병대 진해교육기지 벽암지 교육대가 주둔해 해병 지옥훈련 교육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2009년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활용해 탐방로를 놓으면서 수원지 일대의 빼어난 풍경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수원지를 끼고 호수를 한 바퀴 도는 50분짜리 산책로는 나무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맑은 물과 물 위에 지어놓은 정자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이제 막 얼음이 풀린 수면 위로 고요한 숲길의 침엽수림이 뿜어내는 초록이 수면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팔용산 반대편 사면의 양덕동에는 마산보건소에 근무하던 인근 주민이 1993년 산사태로 굴러 내려온 돌로 13년 동안 쌓았다는 700여 기의 돌탑 군락도 있다. 돌탑이 무어 볼 게 있겠냐 싶지만, 한 사람의 혀를 내두를 만한 정성과 노고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수효의 돌탑 군락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마산 9경(景)’의 하나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음에도 이렇다 할 해안 풍경이 없는 마산에서는 덕동의 사궁두미 마을의 일출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고깃배를 묶은 밧줄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포구 뒤로 등대가 서 있는 자그마한 섬이 있는데 해는 그 너머의 능선에서 올라와 바다를 온통 시뻘겋게 달군다. 수면을 차고 올라오는 일출은 아니지만, 내만의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로 붉게 떠오르는 해가 자못 감격적이다.



◇가는 길 = 중부내륙고속도로 칠원요금소로 나간 뒤 내서분기점에서 남해제1고속도로 지선을 타고 서마산 나들목으로 나간다. 진해·시청 방면 좌회전해서 석전교 사거리에서 마산합포구청·상남광장 방면으로 우회전. 3·15대로를 타고 가다 6호광장 오거리에서 불종거리 방면으로 가면 마산의 중심인 창동이다. 서울역에서 마산역까지는 KTX 열차편이 운행한다. 서울역에서 마산역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창원에는 특1급인 풀만앰배서더호텔(055-600-0773)이 있다. 수준급의 시설과 서비스로 이름난 곳이다. 풀만앰배서더호텔에서 마산합포구 창동까지는 9㎞ 남짓으로 차로 20분이면 닿는다. 마산 합포구 쪽에는 앰관광호텔(055-223-0550)과 리베라호텔(055-248-5200), 마산관광호텔(055-285-2175) 등이 있다.

옛 마산 일대에는 먹거리들이 제법 많다. 마산은 아귀찜이 시작된 곳. 오동동 일대의 ‘아구찜 거리’에는 다정생아구찜(055-223-9959) 등 20여 곳의 아귀찜 집이 있다. ‘아구찜 거리’ 인근에 복요리 집들도 모여 있다. 1960년대 이전 마산만은 천혜의 복어 서식지였다. 이후에도 참복이 헐값으로 경매돼 전국의 일식집으로 보내졌다. 복요리 거리에도 남영복집(055-223-9959)등 복국(사진)을 내는 식당 20여 곳이 있다. 마산에는 또 각종 해물 안주가 한 상 통째로 나오는 ‘통술집’이 명물이다. 오동동의 통술집 거리에는 10여 곳의 통술집이 있고, 신마산 쪽에도 통술집이 20여 곳을 헤아린다. 창동의 ‘복희집’(055-242-1157) 팥죽이나 팥빙수, 부림시장의 ‘6·25 떡볶이’ 등은 간식으로 적당하다. 지역 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