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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속의 도교

醉月 2009. 6. 29. 11:35

우리 문화 속의 도교
-<초월의 상상> 서설 원고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1905년 권중현(權重顯, 1854-1934)은 《공과신격(功過新格)》 3권 1책을 펴낸다.

중국 여동빈(呂洞賓)의 도교 수양서인 《공과격》을 본떠 지은 권선서(勸善書)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선악으로 나눠 선행에는 공(功)을 주고, 악행에는 과(過)를 주어,

그 받은 점수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권중현은 을사년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된 골수 친일파다.

1905년 을사년 당시 그는 농상공부대신이었고,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던 인물이다.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그가 같은 해 그 바쁜 공무의 와중에 《공과신격》을 펴내고,

이듬해에는 이의 보급을 위해 《공과신격언해》까지 펴냈다. 그리고는 내외에 이 책을 무료로 배포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 후기 들어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선음즐문(善陰騭文)》, 《공과격》과 같은 도교 계통의 권선서들이 활발히 간행된다.

대표적인 권선서로 널리 읽혔던 《태상감응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없고, 오로지 사람이 스스로 부를 뿐이다. 선악의 응보는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름과 같다.”

그래서 천지에는 사과신(司過神), 즉 허물을 관장하는 신이 있어, 그 사람이 범하는 죄과의 경중에 따라 그 사람의 수명을 빼앗는다고 했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삼태북두신군(三台北斗神君)이 그 죄악을 낱낱히 기록하고,

몸에 붙어사는 삼시신(三尸神)은 두 달에 한 번 경신일 밤이 되면 하늘에 올라와 그 죄를 고자질한다.

또 매달 그믐날에는 부뚜막 신도 하늘에 올라가 그 집 식구들의 죄과를 일러 바친다.

사람이 이 책에서 규정하고 있는 선행을 1,300번 이상 닦으면 천선(天仙)이 될 수 있고, 3백번을 닦으면 지선(地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죄과를 닦으면 사명신(司命神)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계산하여 그 수명을 빼앗는데,

계산이 다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죽는다고 믿었다. 죽은 뒤에도 셈할 계산이 남으면 그것은 자손에게 넘겨진다.


1852년 최성환의 주동으로 《태상감응편도설언해》가 간행된다.

중국에서 《태상감응편》의 내용을 판화로 찍어 도설(圖說)한 책을 다시 우리말로 풀어서 펴낸 것이다.

이 책의 서두에 보면, 항주 사람 왕정허(汪靜虛)란 이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태상감응편》 100부를 10년간 필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준 공덕으로 자식형제를 두었다는 이야기,

간주(簡州) 사람 왕손(王巽)이 수 십년 간 병을 앓아 살 가망이 없다가 이 책의 간행을 위해 가산을 아낌없이 쏟고는 병도 낫고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종류의 권선서들이 19세기에 들어 갑자기 성행하게 되었을까?

권중현 같은 친일파는 왜 이런 책을 내서 무료 배포했을까?

책에서 규정하고 있는 선행 중 가장 큰 공이 선서를 간행해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책을 간행하여 자기의 죄과를 상쇄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왕정허나 왕손처럼 자기 집안의 복을 빌기 위해 그랬을까?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권선서의 성행을 통해 우리는 당시 민간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던 도교 신앙의 깊은 뿌리와 만나게 된다. 도교는 우리 문화 속에 최근까지도 알게 모르게 깊이 침투하여, 의식의 밑자락을 지배하고 있다.

도교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은 그 연원이 오래다. 도교는 흔히 유교의 대가 되는 노장철학을 가리킨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인위를 배제하고 본디 그러한 자연의 상태에 따라 살라는 노자의 가르침과, 곧 쓸모 없는 것이야말로 쓸모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도 중국 최대의 종교로, 울긋불긋한 복장의 도사들이 요란스레 악기를 두드리며 자옥한 연기 속에서 잡다하게 진설된 복잡한 신상 앞에 제사를 지내는 시끄럽고 복잡한 종교 의례도 도교다. 저 노장(老莊)의 현허(玄虛)의 가르침과, 오늘도 중국 곳곳에 자리잡은 도관(道觀)에서 행해지는 야단스런 종교 의례와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놓여 있다.


저 하늘 위 열 세 겹의 구름을 뚫고 대라천(大羅天)의 하늘에 열리는 황금궁궐과 위계질서도 정연한 신들의 세계,

밤마다 학을 타고, 또는 용이 끄는 수레에 올라 곤륜산 요지에서 열리는 서왕모의 요지연(瑤池宴)에 참여하는 신선들의 이야기도 도교다.

깊은 산 속에서 불에 익힌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호흡과 명상의 수련으로 신선의 꿈을 꾸며 한 세상을 건너갔던 은자(隱者)들의 지향도 도교다. 이들은 벽곡(辟穀)과 도인(導引), 호흡법의 수련으로 내단을 닦아 결태를 이뤄 환골성선(換骨成仙)하는 것을 자기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들 숲 속의 은자들은 저 신선세계의 가없는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자고 인간의 욕망을 끊어버리고 그 고생을 사서하며 신선의 꿈을 꾸었을까? 그리고 이들과 인위를 버리고 자연의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라는 노자의 가르침은 또 어떻게 연결되는가?


민간 신앙화된 도교의 의례 가운데 수경신(守庚申) 신앙이란 것이 있다.

삼시(三尸)란 벌레는 인간의 몸 속에 깃들어 살며 인간의 죄과를 낱낱이 기록해둔다.

그러다 60일에 한번 경신일 밤에 제 주인이 잠들면, 그 틈을 타서 하늘에 올라가 그 죄과를 낱낱이 고자질한다.

그러면 하늘은 그 죄과의 수만큼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고려 때부터 이 신앙이 유행했다.

이날만 되면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았다. 삼시의 고자질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뜻이다.

혹시나 싶어 《고려사》의 경신일 기사를 뒤져 보았다. 웬걸! 경신일 만 되면 왕이 신하를 불러 밤새 잔치를 베풀었다거나,

죄수를 방면하고, 빈민을 구휼하며, 절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가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왕이 평소 나쁜 짓을 많이 해놓고 이 날이라도 좋은 일을 해서 자기에게 올 벌을 상쇄하자는 의미로 읽혔다.

조선 태조 뿐 아니라, 연산군도 수경신과 관련된 일화를 남겼다.

이렇게 보면 역대의 임금이 경신일에 행한 선행이나,

구한말 친일파 권중현이 권선서를 무료로 배포해 복을 지으려 했던 것이나 근본 생각은 다를 것이 없다.


도교는 우리에게 아직 낯설다. 하지만 불로장생의 꿈과 신선의 전설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

선가(仙家)에서 비인부전(非人不傳)으로만 전해지던 단학은 그 수련 인구는 나날이 늘고 있다.

민족의 미래를 예언했다는 비결서들은 가짜 시비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굴되고(?) 간행된다.

후천이 열리고, 낙원이 열리는 꿈은 알 수 없는 매력으로 삶에 지친 영혼들 사이로 파고든다.

깊은 산 속에는 지금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련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그것은 국조(國祖) 단군을 앞세운 민족의 얼굴을 하고, 때로는 깨달음의 모습으로,

혹은 무병장수의 건강상품으로, 또는 환타지의 황홀한 빛깔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삼국시대나 고려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도교는 표면적으로 그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다. 하지만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너무 친숙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알게 모르게 도교는 우리 문화의 이면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며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해왔다.


4,5세기 불교가 아직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가 도교의 나라였음을 웅변한다.

고구려 국내성의 장천(長川) 1호분에는 백라관(白羅冠)에 현포(玄袍)를 입고 백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선이 있다.

그 맞은 편에는 용의 등에 올라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선인이 보인다.

백학을 탄 신선의 모습은 퉁코우 사신총의 벽화에도 보인다.

집안 오회분 4호묘 고분에는 태양을 나타내는 세 발 까마귀 그림을 사이에 두고 용의 등에 올라탄 신선과 봉황의 등에 올라탄 신선의 모습이 나온다.

우주의 중심을 나타내는 신수(神樹)와 각종 비천(飛天)의 형상 등 이들 벽화 속에서 우리는 도교적 상징들로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고구려인의 상상세계와 만날 수 있다. 4호묘에는 또 복희(伏羲)와 여와(女媧)로 상징되는 해신과 달신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은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팔이 변하여 날개로 되고 인면사신(人面蛇身) 즉 사람 얼굴에 뱀의 몸뚱이를 지닌 형상으로 양손에 각각 해와 달을 받치고 있다. 달에는 두꺼비가 해 속에는 세 발 까마귀가 그려져 있다.


1993년 백제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어떤가?

구름이 감도는 33산의 선계에는 온갖 선금서수(仙禽瑞獸)들이 뛰놀고, 신선들은 곳곳에서 명상에 잠기고, 낚시를 하며, 머리를 감거나, 말타고 달리며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정상 부근에는 기러기를 닮은 봉래산에 산다는 원앙 다섯 마리가 우러르는 가운데, 피리와 비파 등 갖은 악기로 연주하는 선악 속에 봉황이 너울 너울 춤을 춘다. 향로의 밑바닥은 구비구비 몸을 서린 용이 역시 그 가락에 맞추어 제 몸을 뒤튼다.

이밖에 삼신산의 꿈을 간직한 백제의 산경수전, 날개 달린 흰 말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신라의 천마총 등 수다한 도교적 유물 또한 고대 삼국시기부터 도교가 한국문화의 토양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는 도교가 중국에서 우리에게로 건너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우리의 것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종교적 외피를 입고 다시 넘어 왔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나니’ 불교도 아니요 유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닌,

그것을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했다. 단군의 홍익인간, 화랑의 풍류도를 그 맥락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이것의 사실 여부를 살펴 따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도교가,

그 중에서도 신선사상이 우리 민족의 호흡에서 전혀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졌던 사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 속에서 도교는 불교의 전래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정신은 혈맥을 타고 흘러 기층에 뿌리내리고,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신라 사선(四仙)의 전설, 그들의 이름이 난새를 타고 노니는 난랑(鸞郞)이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영랑(永郞)인 것은 얼마나 도교적인가?

또 그들과 관련된 삼일포(三日浦), 사선봉(四仙峯),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郞湖), 아랑포(阿郞浦) 같은 지명들 속에 풍기는 물씬한 선취(仙趣). 당나라에 들어가 신선술을 배워 익혀 백일비승(白日飛昇) 했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김가기(金可紀) 같은 신선의 존재, 그밖에 많은 관련 기록들은 기층에 뿌리 내린 도교의 흔적들을 끊임없이 증언한다.

 

고려 시기 왕실의 잦은 도교초재(道敎醮齋)나 도관(道觀) 관련 기사들은 도교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불교의 영향 못지 않게 고려 사회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중심 사유의 하나였음을 입증한다. 삶 속에서 도교적 실천을 행했던 도류(道流)들의 존재는 여러 문헌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예종 같은 임금은 아예 나라의 종교를 도교로 바꿀 작정까지 했다.


이단을 배척하고 유도(儒道)를 존숭함을 표방하면서 조선조가 출발하자 도교는 더욱 변두리로 소외되었다.

도교는 유교에 대한 안티 테제의 성격을 띠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상보적 기능을 수행해 왔으므로 비록 주변적이긴 해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하였다. 여전히 궐내에는 도교 제의(祭儀)를 거행하던 소격전(昭格殿)이 임진왜란 전까지 존속되어 군신간에 갈등을 빚었다.

해동단학파(海東丹學派)를 일컫는 수련도교 계통의 지식인 집단은 사승(師承)으로 맺어져 조선 후기까지 존속되었다.


도교는 주변성을 무기로 사상․문학․민간신앙․양생법 등 다양한 차원으로 이 땅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스며들었다.

도교는 이들에게 지배이념에 대한 안티테제로 작용하여, 독선․일방의 문화가 가져올 수 있는 면역력의 약화를 방지하며

조선문화의 건강성을 유지시켜 왔다.
조선시대의 고전소설 속에서 우주의 주재자는 언제나 도교의 최고신인 옥황상제다.

부처님께 자식을 빌더라도 그것을 점지해주는 것은 옥황상제였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천상에서 죄를 범해 인간에 귀양온 신선으로 설정된다.

그들은 천상에서 지은 죄의 대가로 지상에 내려와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견뎌낸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에서의 과업을 훌륭히 완수하고 정해진 징벌의 시간을 마친 뒤 천상으로 복귀한다.


조선조 지식인들이 신선세계를 꿈꾸며 남긴 그 많은 유선시들은 그들의 내면을 할퀴고 지나간 갈등과 소망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유선시는 그들의 방황과 꿈의 모식(模式)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인줄 알면서도 그들은 꿈꾸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저 몇 겹의 하늘 위에 장엄하게 솟아있을 백옥루(白玉樓)와,

깊은 산 인적이 미치지 않을 어딘가에 열려 있을 무릉도원의 별세계를 그리워했다.


조선 후기 공과신앙(功過信仰)을 반영하고 있는 권선서(勸善書)의 잦은 간행과, 각종 신흥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후천개벽 신앙의 모습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교와 만난다. 우리나라 곳곳에 전쟁도 미치지 않고, 재앙도 미칠 수 없는 열 곳의 승지(勝地)가 있다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그곳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근세에 들어 도교는 서구 기독교의 메시아니즘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종교 형태로 변모했다.

19세기 민중운동은 대부분 정도령이라는 진인출현설과 관련이 있다.

일종의 메시아니즘의 성격을 지닌 진인출현설은 말세가 쇠진한 뒤에 정도령,

즉 구세주가 나타나 세계를 구원하고 복락이 보장된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을 약속한다.

정도령은 미륵신앙, 후천개벽신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 유대(酋大) 고을(⻏) 도령, 즉 재림 예수의 상징으로까지 부각된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민란에서 확인되는 정진인(鄭眞人)이 살고 있다는 바다 위의 이상향 삼봉도(三峯島) 전설,

뿐만 아니라 구한말 조선 남부 지방에서 성행한 《정감록》의 십승지설과 관련하여 김유사(金有司)란 사람이 압록강 북쪽 만주 지방 어딘가에 양화평(楊花坪)․옥계촌(玉鷄村)이란 유토피아가 있다는 유언비어를 그곳의 지도와 함께 유포하여,

이 말을 믿은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낙토(樂土)를 찾아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간도를 찾아 헤매던 것은 불과 백년도 안된 일이다.

정부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하여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게 했다.

그들은 오지 않는 정도령(鄭道令)을 고대하며, 복사꽃이 피는 도화 낙원이 지상 위에 건설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후천이 개벽한다. 불덩이가 떨어지고, 우리 민족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된다.

근세의 신흥 종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높였던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문화 저변에 깔린 도교의 잠재적 영향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도교를 우리 문화의 주변부에 방치하려는 시각은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어려움에 봉착한다.

하지만 막상 그 정체를 포착해 중심부에 위치시키려 하면 그것은 다시 오리무중의 안개 속으로 슬그머니 숨어 버린다

.
오늘날 도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도교는 지나온 역사 속에서 언제나 주변부에 위치하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데 한 축을 떠받쳐 왔다.

도교의 지식인들이 언제나 체제의 바깥에서 방외인으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해온 것은 도교가 갖는 의미를 헤아려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도교의 비판정신과 부정정신은 중심이 지닌 권력의 속성을 해체한다.

우리의 의식을 알게 모르게 억압하고 왜곡하는 권력 담론들이 있다.

서구중심주의․남성중심주의․과학중심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세계와 삶의 구조를 왜곡한다.

물론 도교 자체가 이런 중심주의들에 대한 직접적 대안 담론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도교적 시각을 통해 우리는 왜곡되고 억압된 이념의 속살을 헤집어 볼 통로를 마련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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