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우리의 전통놀이

醉月 2010. 1. 14. 09:00

지금처럼 아파트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골목마다 아이들이 옆집 대문 앞에 서서 노래처럼 외치는 "친구야, 노올자."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다. 딱히 이렇다할 놀이기구가 없어도 어쩌다 얻어 가진 석필 한 자루, 나무막대 한 자루, 고운 돌멩이 몇 알이면 해 저물 무렵까지 심심하지 않았지요. 최고급 컴퓨터와 비싼 게임 CD 때문에 기죽을 일도 없었고 학교 공부 마치면 그뿐, 두세 개씩 학원엘 다니느라고 며칠씩 친구 얼굴 못 보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리하고 말끔해 보이는 요즘 아이들이 30~40년 전 아이들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을 것인데도 자꾸만 마음이 쓰여질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느라 사나워진 눈빛이, 무언가 따뜻하고 정다운 것들은 저만치 밀어놓고 살아가는 듯한 허전한 아이들의 손이 안쓰러운 것입니다.

오남매의 넷째로 연년생인 오빠가 둘씩이나 있어서. 터울이 지는 여동생과 하는 소꿉놀이보다 자치기, 제기차기, 딱지치기 등의 골목놀이가 더 손에 익었던 내 어린시절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저녁 하루쯤은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아침 신문에 끼워져 들어온 광고지를 접어 딱지를 만들고, 손칼로 나무막대를 다듬고, 손잡고 다니며 공깃돌을 주워서 말갛게 씻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박한 놀거리 속에 담긴 정다움과 여유로움을 전해주며 한번쯤 제대로 살가운 어미 아비 노릇을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은 애물단지인 비닐봉투가 흔치 않아서 푸주간 같은 가게에서 물건들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주던 시절, 종이는 귀한 물건에 속했습니다. 아침에 아버지가 보신 신문은 온 가족이 돌려본 후 다시 곱게 개켜져서 대청 마루 한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종이만 따로 모으는 고물장수가 오면 얌전히 팔려갔습니다.

그 중에 한 장을 집어내어 어린 형제가 햇볕 따뜻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딱지를 접습니다. 딱지 접는 종이가 좋기로는 다 쓴 공책이나 스케치북의 겉장이 좋지마는, 없으면 여러 겹 겹친 신문지도 쓸만은 했습니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3 : 1이 되도록 종이를 자르거나 접어서 양쪽 끝 1/3씩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도록 직각삼각형으로 접습니다. 그런 종이를 2장 만들지요. 그리고는 가운데 정사각형 부분이 겹치도록 2장을 직각으로 놓고서 끝부분의 삼각형 4개를 차곡차곡 안쪽으로 접습니다. 마지막 삼각형은 제일 처음 삼각형의 안쪽에 끼워 넣지요. 아버지의 와이셔츠 상자나 명절날 어쩌다 들어온 화과자 상자는 훌륭한 딱지통이 되어주었습니다.

편편한 바닥에서 둘 이상이 모여서 하는 '넘겨먹기'는 상대방의 딱지를 위에서 내리쳐서 딱지가 넘어가면 자기 것이 됩니다. 얇은 딱지는 옆모서리를 비스듬히 내리치고 두꺼운 딱지는 위에서 힘껏 내리치면 잘 넘어갑니다. 그리고 상대의 딱지 한쪽 옆에 자신의 발을 대고 딱지를 내리치면 더 잘 넘어가지요. 이걸 '바람치기'라고 하는데 바람치기를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는 시합을 하기 전에 정해두곤 했습니다.

또 모두 함께 담벼락을 향해 힘껏 딱지를 던져서 더 멀리 딱지가 퉁겨나간 사람이 나머지 사람의 딱지를 모두 갖는 '담벽치기'도 있고, 딱지를 원반처럼 모서리를 돌려 날려서 멀리 날린 사람이 딱지를 따 가는 '날리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안에서 할 수 있는 '밀어내기'라는 딱지치기가 있는데, 여기에 쓰는 딱지는 아버지의 담배갑 속에 들어있는 은종이로 조그맣게 만들었습니다. 동그란 원 안에 각자의 딱지를 놓은 후, 손가락으로 자신의 딱지를 퉁겨서 상대의 딱지를 밀어내는 놀이입니다. 방바닥에 크레용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어머니께 혼이 나곤 했지요. 그래도 비가 오는 날이나 추운 겨울날에는 참 고마운 놀이였습니다.

날마다 아침이면 한묶음씩 신문에 딸려오는 광고지를 추려내다 문득 어릴 적 생각에 잠깁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질 좋은 종이가 흔했더라면 정말 훌륭한 왕딱지를 많이도 접었을 텐데......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이따금 가운데에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옛날 동전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동전은 특히 사내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걸로 좋은 제기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무궁화가 그려진 1원 짜리 동전 한 닢이면, 그 뒤로는 5원이나 10원 짜리 동전 한 개면 구멍가게에서 파는 비닐 제기를 살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좀더 무게가 나가고 숱이 더 많아서 잘 차지는 제기를 만들기에는 옛날 동전이 좋았습니다. 그런 동전을 갖지 못한 아이들은 가게에서 파는 제기를 뜯어서 그 속에 들어있는 구멍 뚫린 동그란 쇠 밑에 다른 쇠조각을 덧대어 무게를 늘리고, 습자지라고 부르던 얇은 종이로 숱을 풍성하게 다시 꾸몄습니다.

제기를 만드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다란 습자지 한쪽 끝 가운데에 동전을 놓고 꼭꼭 눌러가며 길다랗게 접어 갑니다. 그러면 가운데에 동전이 들어있는 길다란 대롱 모양이 되지요. 그 다음엔 동전의 가운데 구멍에 맞추어 접은 종이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종이 대롱의 양쪽 끝을 밀어 넣어 당깁니다. 그런 다음 그 양쪽 종이 대롱을 손으로 가늘게 찢어내려 제기의 숱을 만들지요. 더 정성을 들이는 이들은 습자지로 된 머리끝 부분에 물감을 들이기도 하고, 동전이 들어있는 동그란 아래 부분을 두꺼운 천 조각이나 가죽 조각으로 단단하게 싸주기도 했습니다.

제기로 노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땅강아지'라는 것인데, 누가 더 오랫동안 제기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많이 차는가 하는 놀이입니다. 둘러선 아이들이 셈을 하고 가운데 선 아이는 열심히 오르락내리락 안쪽으로 무릎을 접어 올리며 제기를 차지요. 그러다가 많이 찬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지면 꼴찌를 한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종 드리기'를 합니다. 상대가 찰 수 있도록 조금 떨어져서 손으로 제기를 던져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벌칙이 끝나면 다시 순서대로 차고......

그리고 '동네제기'도 있습니다. 둥그렇게 둘러서서 한 번씩 돌아가며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서 차는 것이지요. 그때 제기가 발에 맞을 때마다 붙이던 노래 아닌 노래,
'동, 네, 제, 기, 왔, 다, 갔, 다. 이, 리, 저, 리, 꽝.'
기억하시는지요? 그리고 한 발이 계속 땅과 허공을 오가는 '땅강아지'와는 달리 한 발이 계속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제기를 차는 '헐랭이'도 있구요, 양발을 번갈아 쓰는 '양발차기'도 있지요.
예전 아이들은 방바닥에 주저앉는 좌식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더 제기차기가 수월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아이들은 의자생활에 익숙해져서 서양인들처럼 가부좌를 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다리가 길고 늘씬해진 반면에 관절이나 근육의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내 어릴 적 기억으론 제기를 잘 차는 아이들은 거의가 달음박질도 일등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누군가의 연구에 의하면 제기차기가 다리 안쪽의 잘 쓰지 않는 근육들을 발달시켜서 다리의 근육이 고르게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도 했습니다.

지나간 일은 모두 그립고 소중하다는 감상이 아니더라도, 이따금은 아파트 마당에서 아이에게 제기차기를 가르치고 딱지치기 시범을 보이는 젊은 아빠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롤러브레이드나 퀵보드처럼 생동감 있고 짜릿하진 않아도, 떠오르는 제기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셈을 해주고, 떨어진 제기와 딱지를 주워주며 손끝이 닿는 그런 정겨운 놀이가 가끔은 우리 생활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파트 뒷마당에 여름 들어 우거진 나뭇가지를 쳐내느라고 굵고 가는 가지들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거들 떠 안 보는 쓰레기 더미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사내아이들이 잔뜩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적당한 길이로 자른 가지에서 나뭇잎을 훑어내고 주머니칼로 잔가지를 다듬어 매끈한 나무막대를 만들려구요.

어른 손가락보다 조금 굵고 팔뚝보다 기름한 나뭇가지는 참 쓸모가 많았습니다. 전쟁놀이에서 천하무적 칼이 되어주었고, 삐죽하니 손잡이가 달린 놈은 인민군을 무찌르는 총 노릇도 했지요. 학교놀이에서는 선생님의 매도 되었고, 악대의 지휘봉도 되었지요. 그렇게 막대 하나로 놀다 지치면, 길이 50~60cm 가량 되는 큰 막대는 어미자로 삼고 ,10~15cm 쯤 되는 작은 막대는 새끼자로 삼아 자치기 놀이를 시작하지요.

먼저 골목 한켠에 어미자를 반지름 삼아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가운데에 새끼자 길이의 반쯤 깊이로 새끼자 길이만큼 길쭉하게 땅을 팝니다. 그리고 차례를 정하던가, 아니면 편을 가릅니다. 처음 시작하는 아이는 먼저 파 두었던 길쭉한 홈 중간에 새끼자를 얹어놓고, 어미자를 홈에 넣어 퍼올리듯 새끼자를 쳐냅니다. 그 때 원 바깥쪽에서 수비하는 아이들 중에 새끼자를 받아내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공격수가 되어 다시 새끼자를 쳐냅니다. 하지만 수비하는 아이들이 새끼자를 못 받으면 새끼자가 떨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아이가 새끼자를 동그라미 안으로 던져 넣습니다. 제대로 던져 넣으면 그 아이가 공격수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토끼치기를 합니다. 토끼치기는 새끼자를 홈의 앞쪽 끝에 비스듬히 걸쳐놓고 비쭉이 나온 끝부분을 어미자로 쳐올린 다음 공중에 뜬 새끼자를 다시 한 번 쳐서 멀리 날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려보낸 새끼자가 땅에 떨어지면, 쳐낸 아이는 그 곳까지 어미자로 몇 자나 되는지 재어둡니다. 그렇게 놀이를 계속해서 그 잣수가 많은 아이가 이기게 되는 놀이입니다.

요즘은 거의 모든 골목길이나 마당에 시멘트를 발라 놓아서 자치기 놀이를 할 엄두도 내기 힘이 들지요. 자치기는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놀이가 발견될 만큼 널리 퍼져있는 놀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 나라에서처럼 사라져 가는 놀이인가 궁금합니다. 흔한 막대기 두 개로 여럿이 어울려서 반나절은 즐겁게 놀 수 있는 놀이인데도 요즘엔 좀처럼 볼 수 없는 까닭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흙바닥이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당에 수북히 쌓인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학교 마당에 시소, 미끄럼틀, 정글짐 등을 마련해 놓듯이, 한켠에 민속놀이 마당을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하구요. 그곳에 잘 지워지지 않게 자치기 할 동그라미와 홈도 마련해 놓고, 오랫말과 비석치기 놀이를 할 금도 그어 놓고, 한쪽 구석엔 어미자와 새끼자, 오랫말과 비석치기에 쓸 말돌과 공기놀이에 쓸 올망졸망한 공깃돌도 한무더기씩 쌓아 놓으면, 그리고 나이 든 선생님이 땅바닥에 아이들과 함께 주저앉아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본다면 아이들에게 학교가 좀더 정겹고 선생님이 더욱 친근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구요.




무더운 여름, 시원하게 겨울에 타던 썰매 이야기 좀 해 볼까요?

썰매라고 하면 요즘 아이들은 우선 눈썰매장의 플라스틱 바가지 썰매를 생각하고, 다음엔 산타할아버지의 사슴이 끄는 썰매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30~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썰매는 사과 궤짝을 뜯어서 만든 깔판 밑에 각목 두 개를 나란히 대고, 그 각목 아래에 기다란 양철 조각을 덧댄 그런 썰매일 것입니다. 그런 썰매를 탈 때는 지금 스키를 탈 때 폴이 필요하듯이 팔뚝 길이 만한 각목 끝에 못을 거꾸로 박아 만든 꼬챙이 두 개가 필요했지요.

지금은 언덕을 헐어내어 길을 내고 대단위 아파트를 짓고 하느라고 골목 언덕길이 많이 없어졌지만, 예 전에는 산동네도 많았고 언덕길도 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흔하지 않아서 골목길은 훌륭한 아이들의 놀이터였지요.

시골에 사는 친구들은 얼어붙은 냇물이나 눈이 쌓여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좀더 낭만적으로 썰매를 탔지만, 도회지에 사는 친구들은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수시로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행인들을 재주껏 피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눈길이 얼어 빙판이 될까봐 부지깽이에 연탄재를 꿰어들고 나온 동네 아주머니의 성화를 피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누구나 썰매를 만들어줄 큰 형이나 삼촌 등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썰매가 없는 아이들은 친구의 썰매를 얻어타려고 썰매 주인에게 구슬이나 딱지를 바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썰매가 없는 아이들이 궁리 끝에 근사한 썰매를 하나 생각해 내었습니다. 바로 '양회 부대 썰매'였지요. 당시 양회 부대라고 더 많이 불렸던 시멘트 부대는 지금처럼 아주 질긴 누런 종이에 습기를 막으려고 안쪽에 비닐 코팅을 한 것인데, 그것을 뒤집어서 판판하게 고른 후 깔고 앉아서 언덕진 눈길이나 빙판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부대 종이의 양쪽 모서리를 단단히 움켜쥔 채 엉덩이에 단단히 힘을 주고 앉아 있으면, 요즘 타는 눈썰매장의 썰매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속력이 붙었습니다.

집 앞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길에서 옆집 사내아이와 양회 부대 썰매를 타던 어느 겨울날, 나는 양회 부대 썰매를 '비루 푸대 썰매'라고 부르는 이상한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앞집 사는 동장집에 다니러 온 그 집 친척 아이였는데, 우리가 번갈아 타고 있는 양회 부대 썰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고, 서울서도 비루 푸대 썰매를 타능교?" 하고 심한 사투리로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고만 서 있는 우리들에게, 마침 집에서 나온 동장댁 아주머니가 비루 푸대라는 것이 농사를 지을 때 쓰는 비료 부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이 부대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우리뿐만이 아니라 시골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 아이가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롤러 스케이트나 롤러 블레이드, 아니면 킥 보드를 타고서 아파트 단지를 씽씽 누비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꾸만 어린 시절의 양회 부대 썰매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그건 아마도 지금 아이들의 얼굴에서 외로움 비슷한 걸 읽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옛날 썰매는 양쪽에서 손을 잡아 끌어주기도 하고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몇 번 못 타고 망가져 못쓰게 되는 양회 부대 썰매일망정, 거기엔 번갈아 밀어주며 깔깔거리던 정겨움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싼 블레이드과 킥 보드를 가지고도 둘 이상은 잘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요즘 아이들이 조금 낯설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이번 겨울, 눈이 많이 내리면 스티로폼 박스라도 잘라서 아이들과 썰매를 한번 만들어 타볼까 싶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널찍한 골목길 귀퉁이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서울 아현동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2~3학년 짜리 꼬마에서부터 갓난이를 업은 열 서너 살 짜리 아이보기 언니까지 모두 모여서 노래에 맞추어 고무줄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고무줄은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검정 고무줄이었는데, 당시 팬티를 비롯한 거의 모든 옷에는 이 재생한 검정 고무줄을 넣어 입었습니다. 특히 자주 삶아 빨아야 하는 속옷은 고무줄이 늘어붙어서 잘 상했기 때문에, 시장에는 항상 기다란 검정 고무줄 뭉치를 잔뜩 들고서 파는 아저씨나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함께 가지고 놀던 고무줄에 말썽이 생기면 엄마나 할머니를 졸라 집안에 비상용으로 둔 고무줄을 한 개씩 얻어 가지거나, 그도 안되면 못 입는 헌 옷 속에 든 고무줄을 모아 이어서 자기 몫의 고무줄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몫의 고무줄을 이어서 기다란 고무줄을 만들었습니다. 여럿이 함께 놀아야 더 재미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학교 마당처럼 사내아이들이 많은 곳에서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망보는 아이도 두셋은 있어야 했는데, 가끔 개궂은 사내아이들이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이나 날카로운 사금파리 조각을 끼고 달려와서 줄을 끊고서 도망가곤 했기 때문이지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칙칙하던 60년대의 학교 마당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원색의 접시치마를 입고서 나풀나풀 고무줄을 넘는 계집아이들의 모습은 유난하게 돋보였을 것이고, 머리 큰 개구쟁이들의 심술을 돋굴 만도 했을 것 같습니다.

고무놀이의 줄을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는데 보통은 편을 갈라서 술래인 편의 두 명이 길게 한 줄로 양쪽에서 잡거나 또는 너무 길면 중간에 한 명이 더 서기도 하고, 아예 세 명이 삼각형 모양으로 서서 고무줄을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놀기도 했습니다. 함께 놀 아이들이 두셋뿐이면 줄 한쪽을 기둥에 매기도 했지요. 고무줄놀이 중 가장 간단한 놀이는 '고무줄 넘기'인데, 바닥에 대고 양쪽에서 좌우로 흔들어대는 고무줄을 발에 닿지 않게 앙감질로 넘는 것부터 시작해서 고무줄을 차츰차츰 높여가다가 어깨 높이 정도 올라가면 물구나무서듯이 손을 바닥에 대고 줄에 다리를 걸어 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장 즐겨하던 놀이는 노래에 맞추어 네댓 가지의 반복된 동작으로 고무줄을 넘고 밟고 휘감는 것으로, 이것도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발목·무릎·장딴지·허리까지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가슴·어깨·머리·머리 한 뼘 위 등으로 올라가면 첫 번에 줄을 잡기 위해 역시 물구나무서듯이 해서 발로 줄을 끌어내렸습니다. 함께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나풀나풀 고무줄 위에서 춤을 추다가, 박자를 못 맞추거나 고무줄이 엉키거나 튀어오르면 죽게 되어서 다음 아이 차례가 되었지요.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이 학교에서 배운 "나의 살던 고향은... ",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등 동요가 많았지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등의 군가도 있었고 "꼬마야, 꼬마야..." 등 일본 동요에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도 해서 의식 있는 어른들의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골목길에 아이들 서넛이 모여서서 왁자지껄 작은 싸움이 붙었습니다. 금을 밟았느니 안 밟았느니 하면서 옥신각신하다가 다시 편을 가르고 놀이를 시작합니다.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여러 개의 칸이 있는 네모 모양의 그림을 그려 놓고, 일정한 순서에 따라 앙감질로 돌을 차며 나가는 사방치기라는 놀이입니다.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돌차기, 평안도에서는 망치기, 함경도에서는 마우차기라고 부르는데, 서울에서는 오랫말이라고도 합니다. 이 이름들은 놀이에 쓰는 돌을 망, 마우, 또는 말이라고 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서울에서 쓰는 오랫말이라는 이름에서 '오래'의 뜻은 분명치 않지만, '한 이웃에서 되어 사는 구역 안'이라는 의미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방치기를 할 때 바닥에 그린 그림을 '밭'이라고 하는데, 밭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이웃과 함께 하는 농촌의 생활구역'을 뜻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적 서울에서 하던 사방치기는 대게 밭을 아래 그림처럼 8칸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이 놀이를 팔방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있었지요. 처음에는 1번 칸에 말을 던져놓고 앙감질로 말을 차며 차례로 8번까지 가기도 하고, 2번에서 7번으로 말을 차 넣은 뒤 3번 칸을 앙감질로 지나서 4,5번 칸은 다리를 벌려서 함께 딛고 다시 6번 칸을 앙감질로 지난 후 7번에 있는 말을 앙감질로 차서 8번까지 가기도 합니다.

어느 방법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데, 대게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차례대로 말을 차고 조금 큰 아이들은 건너뛰기를 많이 했지요. 어떤 방법이든지 마지막 8번 칸에서는 두 발을 모은 후 말을 집어들고서, 다시 갈 때의 걸음으로 돌아옵니다. 다음에는 2번 칸에, 그 다음에는 3번 칸에...... 그렇게 해서 8번까지 모두 끝나면 발등에 말을 얹고 올려차서 손으로 받아듭니다. 그러면 첫 번 놀이가 끝나는 것이지요. 다음에는 '집사기'라고 해서 뒤로 돌아서서 말을 밭에 던지는데 이때 말이 들어간 번호의 밭을 얻습니다. 그런 다음 앙감질로 뛰어가 자기 밭에서부터 말을 차서 8번까지 간 뒤 첫 번처럼 돌아나오면 됩니다. 다음 사람도 역시 돌아서서 망을 던져 집을 얻는데 똑같은 밭이 나올 때는 무효가 됩니다. 상대편 집에는 망을 집어넣지도 못하고 들어갈 수도 없어서 가던 길에 남의 집이 나타나면 뛰어서 넘어가야 합니다. 상대편과 몇 차례 집을 차지한 다음 더 이상 차지할 집이 없으면 놀이가 끝이 나지요.

 

사방치기는 처음에는 말을 칸 속에 정확히 던져 넣는 것이 중요하지만, 신발의 앞뿌리에 적당히 힘을 주어 다음 칸으로 알맞게 차 넣는 것을 더 잘해야 했습니다. 1950~60년대 대부분의 아이들이 신었던 신발은 고무신이었습니다. 물론 학교에 가거나 나들이 갈 때에는 간혹 앞쪽의 좁고 하얀 띠 부분에 이름을 쓴 까만 운동화를 신기도 했지만, 골목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은 대개타이어를 녹여서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었지요. 고무신이 질기기는 해도 바닥까지 얇은 홑겹인지라 계속 돌멩이를 차다보면 발이 아프고 아픈 발에 잘못 맞아 말이 빗나가기도 했지요. 그래서 편을 가를 때는, 놀 때에도 운동화를 신을 수 있는 잘사는 집 아이를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애쓰곤 했습니다. 신발을 빌어 신으려고요.

언젠가 초등학교 쉬는 시간에 몇몇 아이들이 종이에 사방치기 그림을 그려놓고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을 연필 끝으로 퉁겨가며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누구에게 배웠냐고 하니까 큰누나가 가르쳐주었다고 했습니다. 전래놀이도 시대에 따라 변해가나 봅니다. 하지만 컴퓨터와 텔레비전 등으로 가뜩이나 운동이 부족한 요즘 아이들이 마당에 나가 큼직하니 그림을 그려놓고 씩씩하게 돌을 차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흙이 드러난 곳이라곤 화단과 놀이터 밖에 없고, 알맞은 돌멩이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 터이고, 그나마 빈 공간마다 차들이 들어차 있어서,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천방지축으로 뛰어 놀기엔 어려움이 많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게 시원스레 뛰어 놀지 못하기 때문에 조용해야 할 공공장소에서도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참을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기를 업은 채 주인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고무줄놀이에 끼었던 아이보기 언니는 "아이 업고 펄쩍거리다가 아이 허리 병신 만들겠다"고 야단치는 아주머니 손에 끌려 들어가고, "배 꺼진다 뛰지 마라, 신 닳는다 놀지 마라"하는 딱정떼 구두쇠 할아버지 등살에 윗동네 판잣집 선희도 불려가고, 아랫동네 아이들 두어 명만 집 앞 계단에 오두마니 앉아 있던 긴 여름 날 오후가 생각납니다.

잘살고 못살고도 없었고, 학교에 다니고 안 다니고도 따지지 않았고, 어리면 어린 대로 크면 큰 대로, 제일 큰언니가 놀이의 난이도를 조절해주며 함께 놀았던 고무줄놀이는 꿈속의 놀이처럼 기억됩니다.
서울의 어느 곳에선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의 평수를 따져가며 놀이에 끼어주고 안 끼어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정말 오로지 아이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먹고살기에 바빴던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이 함께 노는 아이가 그저 되바라지지 않고 못된 짓만 않으면 다 좋은 친구이려니 여겨주었고, 빈 병으로 바꾼 강냉이라도 생기면 소쿠리에 담아 골목으로 내다주었습니다.

전통놀이는 모두가 얼굴을 맞대고 살갗을 스쳐가며 함께 모여서 놀아야 즐거운 놀이들입니다. 사십 중반인 우리도 제대로 두어본 적이 없는 고누놀이, 꼭 흙바닥에 주저앉아야만 할 수 있는 땅따먹기, 전후 건설붐이 일어서 골목마다 모래더미가 쌓여 있던 시절에 즐겨하던 두꺼비집놀이, 깡통에 구멍을 뚫고 불을 지펴 넣을 수 있을 만큼 큰형이나 어른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쥐불놀이 등, 어찌 보면 싱거워도 보이고 준비할 것도 제법 되어서 성가실 것도 같은 놀이들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으면 놀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놀이들입니다. 가치와 생활 환경이 바뀌면 놀이 문화도 변해야겠지요. 하지만 그 변화가 정말 자연스런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의 삶의 편의와 욕심을 위해 아이들의 특성이 무시되고 의도된 것은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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