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지구 산소 첫 원천인 남조세균 흔적 확인
대리석 채취와 문양석 가공공장으로 곳곳 훼손
지구가 태어난 뒤 나이의 절반을 먹을 때까지도 세상은 황량했다. 식물이 없는 바위와 모래 언덕이 끝없이 이어졌고 요동치는 바다는 텅 비어 있었다. 산소가 없는 대기를 뚫고 해로운 자외선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약 20억 년 전 중대한 변화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났다. 얕은 바다 밑바닥을 초록 융단이 뒤덮었고, 거기서 뽀글뽀글 공기 방울이 솟아올랐다. 바로 지구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은 산소다. 초록 융단을 만든 주인공은 최초로 광합성을 한 원시 미생물인 남조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다.
다시 10억 년이 지난 원생대 후기, 현재의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 소청도가 될 해변에도 초록 융단이 깔려있었다. 육지엔 아직도 풀 한 포기 없었고 바다에도 껍데기를 가진 몸집 큰 생물은 없었다.
남조세균은 여전히 강한 자외선을 막기 위해 점액을 뿜어냈다. 점막층에 주변의 퇴적물이 들러붙었고, 여기에 세균이 배출한 탄산칼슘이 엉겨 시멘트처럼 굳었다. 남조세균은 햇빛을 향해 마치 고층아파트를 올리듯 켜를 이루며 위로 성장했다. 이 건축물을 스트로마톨라이트라 부른다.
켜켜이 쌓인 게 스트로마톨라이트…열과 압력 따른 변성 덜 받아 보존
지난 22일 이광춘 상지대 교수(지질학)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있는 소청도를 찾았다. 섬으로 접근하자 남동쪽 해안을 따라 하얗게 분칠을 한 것처럼 보이는 분바위가 한 눈에 들어왔다.
분바위는 거대한 대리암 암벽이었다. 새하얀 대리암 절벽은 홍합과 굴이 다닥다닥 뒤덮은 흑갈색 해변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 교수는 “대리암은 바다 밑에 퇴적한 석회암이 변성작용을 받아 생긴 암석”이라며 “대리암 표면이 풍화돼 흰 가루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분바위 꼭대기에는 진흙이 굳어 생긴 암석이 종이를 구겨놓은 것처럼 뒤틀린 습곡이 있다. 지각변동의 흔적이다.
하지만 소청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지난 10억 년 동안 열과 압력에 의한 변성작용을 덜 받은 선캄브리아 시대 지층이 남아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분바위를 돌아 작은 만으로 들어서자 소나무 껍질 같은 무늬를 한 바위들이 눈길을 끌었다. 안에 가느다란 켜가 촘촘히 들어있는 주먹 크기의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무언가에 짓눌린 듯 일그러져 빽빽하게 뭉쳐있는 모습이었다.
이성주 경북대 교수는 김정률 한국교원대 교수와 이광춘 교수와 함께 이곳 스트로마톨라이트에서 남조세균의 화석을 발견해 2003년 학계에 발표했다.
이 원시세균은 나선 형태, 얇고 긴 머리카락 모양, 공 모양 등 다양했는데, 이 가운데는 세포가 두 개로 분열하던 도중 화석으로 굳은 것도 있었다. 연구진은 나선형 화석을 근거로 지층의 연대를 원생대 후기, 약 10억 년 전으로 추정했다.
김정률 교수는 “빗방울 자국, 물결무늬와 바닥이 갈라진 흔적이 함께 화석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소청도는 얕고 따뜻한 바닷가 조간대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생업 방해될까 천연기념물 반대…세계지질공원 지정 필요
소청도와 같은 선캄브리아 시대 지층은 황해도 등 북한으로 이어지고 20억 년 전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북한에서 보고된 적도 있다. 남한에서는 소청도 이외에도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강원도의 약 5억 년 전 고생대 석회암 지층과 경북 등의 약 1억 년 전 중생대 호수 퇴적층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와 분바위는 자연유산 가치를 인정받기 훨씬 전부터 훼손돼 왔다. 일본 강점기 때에는 이곳의 대리암을 대량으로 채굴했고, 스트로마톨라이트의 무늬를 이용한 문양석 가공공장이 1980년대 초까지 섬에서 가동했다.
화석 산지의 바위에는 쇠말뚝과 굴착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 교수는 “좋은 화석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보존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학계의 보존 목소리는 10여 년 전부터 나왔지만 문화재청은 지난달 이곳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겠다고 예고했다.
김태회 대청면 소청출장소장은 “문양석을 캐는 일은 이제 전혀 없다”며 “그러나 주민들은 천연기념물 지정으로 생업에 방해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광춘 교수는 “지질유산이 풍부하고 서로 가까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묶어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을 받아 보존과 동시에 지역사회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해 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
태백산 분지, ‘5억년 전 흔적’ 바다 냄새 ‘솔솔’
① 삼엽충의 고향
당시엔 얕은 바다로 삼엽충 등 다양한 생물 살아
평창과 영월 사이 중간쯤이 없는 것은 ‘수수께끼’
고생물학자들은 강원도 태백, 영월, 평창, 정선으로 둘러싸인 태백산 분지에서 바다 냄새를 맡는다. 약 5억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 때 이곳은 끝없이 펼쳐진 얕은 바다였다. 해안에는 따가운 햇볕에 졸여진 소금결정이 반짝였고, 바다 속에는 삼엽충들이 조개와 오징어의 조상 사이로 꾸물꾸물 돌아다녔다.
5억년이 얼마나 먼 과거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길이로 환산하면 된다. 1년이 1㎝라면 5억년은 5000㎞, 서울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까지의 거리이다. 요즘 학생들에겐 1원과 서울의 중형 아파트 값으로 비교하는 편이 쉽다는 지질학 교수도 있다.
당시 태백산 분지는 적도 부근에서 막 오스트레일리아와 헤어져 북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태백산 분지가 올라탄 북중국 땅덩어리에는 오늘날의 북한 평남 분지, 중국의 산둥, 만주, 시안이 함께 있었다(남중국과 함께 있던 경기지역과는 한참 뒤인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만난다). 수천㎞에 걸쳐 산이라고는 없는 평탄한 땅과 얕은 대륙붕이 멀리 뻗어나간 독특한 곳이었다.
석회암을 원료로 만드는 시멘트는 삼엽충이 준 선물
지난 3일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구문소를 찾았다. 고생대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5억4천만년~4억6천만년 전) 사이 태백산 분지에 쌓인 약 1200m 두께의 퇴적층 가운데 최상부에 가까운 곳이다. 지층이 비스듬히 누워 있어 여기서 남동쪽으로 갈수록 과거로 거슬러 오른다.
태백시가 짓고 있는 고생대 자연사박물관 터 아래 황지천변에 짙은 회색의 펄이 굳은 ‘셰일’이 깔려 있었다. 동행한 박태윤(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박사과정)씨가 단단한 암석표면을 가리켰다. 완족류와 두족류와 함께 세 쪽으로 나뉜 몸과 빗살무늬의 마디가 선명한 삼엽충 화석이 들어 있었다.박씨는 “이곳은 태백산 분지에서도 화석이 가장 풍부한 곳”이라며 “얕은 바다였던 곳이어서 삼엽충과 함께 필석, 완족동물, 조개류, 복족류, 두족류, 개형충 등 다양한 동물 화석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하류로 50m쯤 내려오자 암반이 흰 돌로마이트로 바뀐다. 셰일 층보다 약 1천만년쯤 전에 퇴적한 석회암의 일종이다. 층층이 가지런하게 쌓인 돌로마이트를 마구 헤집어놓은 수많은 저서생물의 흔적과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지거나 물결이 남긴 자국 화석이 당시 환경을 말해 준다. 최덕근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구문소는 적도의 태양 아래 증발이 많고 염분이 높은 조간대의 특성을 보여 오늘날의 페르시아만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태백산 분지 퇴적층의 더 먼 과거를 보기 위해 경북 봉화군 석포리 석개재로 향했다. 석개재 임도를 따라 고생대 초기 지층이 펼쳐져 있다. 구문소보다 2천만~3천만년 전 조금 더 깊은 바다 밑에 쌓인 퇴적층이다.
약 5억년 전 지층은 회색 석회암과 황토색 셰일이 교대로 쌓여 시루떡 같은 모습이었다. 생물활동이 왕성해 석회암이 쌓이다가 무언가의 이유로 중단되고 펄이 쌓이는 일이 수백만년 동안 계속됐다. 이 임도를 따라 한 시간을 걸으면 적어도 5천만년 동안의 퇴적층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암석 곳곳에는 연구자들이 화석 등을 연구하기 위해 흰 페인트로 채집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
고생대 캄브리아기 동안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금보다 10배나 높았다. 온실효과로 기온이 높았고 풍부한 이산화탄소를 이용하여 탄산칼슘 골격을 만드는 삼엽충, 완족동물 등 생물이 번창했다. 전 세계에 걸쳐 막대한 양의 석회암이 이때 형성됐다. 석회암을 원료로 만드는 시멘트는 삼엽충이 준 선물이다.
1억5천만년 동안 퇴적층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려
태백산 분지에서 1924년 처음으로 삼엽충 화석을 발견한 이래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특히 고바야시 도쿄대 교수는 1931~1971년 동안 연구결과를 보고해 한반도 삼엽충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1990년대 들어서야 최덕근 서울대 교수 등 한국인에 의한 삼엽충 연구가 본격 시작됐다. 1995년에는 영월의 삼엽충을 연구한 최초의 국내 박사가 배출됐다. 최 교수는 “어떤 삼엽충이 있나를 넘어 삼엽충의 진화와 발생, 고환경 복원으로 연구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태백과 영월의 삼엽충이 왜 다른지는 흥미로운 관심거리이다. 캄브리아기의 4천만년 동안 두 곳에서 서식한 삼엽충 가운데 같은 종은 전혀 없다. 그러나 오르도비스기로 가면 공통종이 나타난다. 최 교수는 캄브리아기에 좀더 깊은 바다였던 영월이 오르도비스기에 들어 퇴적작용으로 수심이 낮아지면서 태백과 비슷한 환경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영월과 태백의 중간쯤 되는 수심을 가진 지역이 여전히 발견되지 않는 것은 미스터리다.
고생대의 오르도비스기 중엽인 4억4천만년 전부터 석탄기에 이르는 1억5천만년 동안 퇴적층이 전혀 없는 ‘대결층’도 수수께끼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와 북중국에서 나타나는 이 현상이 “해수면이 하강해 태백산 분지가 육지가 됐지만 퇴적물을 공급할 높은 산지가 없었고, 곤드와나 대륙에서 떨어져 대륙이 이동하는 과정이어서 퇴적층이 쌓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밝혔다.
|
지구 첫 원시림의 선물, 삼척탄좌
바다 출생 생물이 30억년만에 상륙해 숲 이뤄
1억년 삶의 흔적 미라로 있다가 불로 ‘환생’
바다에서 태어난 생물들에게 육지는 넘보기 힘든 곳이었다. 메마르고 온도 변화가 큰데다 자외선이 강하게 쪼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생물이 바다에 나타난 지 30억년이 지나도록 육지는 텅 빈 상태였다.
약 4억 2천만년 전 마침내 물가에 교두보를 마련한 원시 식물은 빠르게 진화해 육지를 초록으로 덮기 시작했다. 리그닌(목질소)의 발명은 두번째 도약을 촉발했다. 식물 조직을 단단하게 만드는 리그닌을 벽돌 삼아 최초의 나무가 탄생했다. 중력에 짓눌려 땅바닥을 기던 식물은 하늘을 향해 키자람을 시작했다. 물과 양분을 나를 관다발과 뿌리, 잎이 잇따라 등장했다. 육지에 나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약 3억5천만년 전 고생대 석탄기에 이르면 지구 최초의 원시림이 펼쳐진다. 바닷가 늪지대에 고층아파트 높이의 소철, 석송, 나무고사리가 삐죽삐죽 서 있는 사이로 비둘기보다 큰 잠자리가 날아다녔다.
고생대 석탄기와 페름기에 지구엔 어떤 일이?
고생대 석탄기에서 페름기에 걸쳐 1억년 가까이 적도를 중심으로 지속된 거대한 숲의 시대는 인류에게 석탄을 남겼다. 삼척탄전 등 강원도의 무연탄도 이 시대의 유산이다. 국내 최대의 탄광인 강원도 태백시 장성탄광에서는 오늘도 수백명의 광부가 지하 1000m 깊이에서 1인당 하루 9t꼴로 무연탄을 캐낸다. 이들은 서민의 구들장을 데우는 연탄을 만들거나 동해화력발전소의 연료로 쓰인다. 유시근 대한석탄공사 개발부장은 “탄광에서 석탄은 시루떡의 팥고물처럼 층을 이루고 있는데 지각변동을 받아 45~70도 기울어진 모습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다량의 석탄이 부존된 지층이 형성된 지질시대를 석탄기라고 부른다. 영국의 지질학자 윌리엄 코니베어러와 윌리엄 필립스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22년 지은 것으로 최초의 지질시대 구분이기도 하다.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호주 등에 막대한 탄층을 형성시킨 고생대 석탄기와 페름기에 지구엔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석탄기와 페름기에 걸친 3억~2억5천만년 전 지구는 유럽, 그린란드, 시베리아, 북미, 북중국 등으로 이뤄진 로라시아 대륙과 남극, 아프리카, 인도, 호주, 남미 등을 포함한 곤드와나 대륙이 초대륙 판게아를 형성하던 참이었다. (그림 참조)
게임 프로그램 팩맨이 동쪽으로 입을 벌린 듯한 모습의 판게아 대륙은 남극에 두터운 얼음에 뒤덮혔지만 적도에 있던 고 테티스 해 주변에는 따뜻하고 얕은 바닷가 습지가 광대하게 분포했다.
판게아 대륙의 한가운데는 히말라야 산맥에 버금가는 커다란 산맥이 있어 적도 일대에 강우벨트가 형성됐고, 비에 씻긴 엄청난 양의 퇴적물이 강을 따라 하구에 쌓여 삼각주와 습지를 만들었다.
해수면 상승속도가 조금만 빨랐거나, 조금만 느렸어도…
박석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사(석탄지질학)는 “죽은 식물이 미처 썩지 않은 상태에서 토탄층을 이룬 뒤 해수면 변화로 퇴적층에 묻히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땅속에서 높은 온도와 압력을 받아 석탄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삼척탄전에서는 모래가 굳은 30~40m 두께의 사암층 위에 평균 2m 두께의 석탄층이 있고 그 위에 5~10m 두께의 펄이 굳은 셰일층이 놓여있는데, 이런 탄층이 6개나 되풀이된다.
박 박사는 “장성탄광에서 두께 4m인 석탄층이 10㎞ 길이로 연장돼 있는데, 이 정도 두께의 탄층이 형성되려면 처음 퇴적층의 깊이가 적어도 40m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의 지형과 기후는 대규모 탄층이 형성되기 위한 조건을 갖추었다. 열대 해안의 강 하구와 석호의 습지에는 지름 1.5m에 높이 30m에 이르는 석송류와 지름 30~60㎝에 키 20m짜리 나무고사리, 30m 높이의 소철 조상 등이 무성했다. 죽은 나무는 서서히 상승하는 바닷물에 잠겨 썩지 않고 토탄이 됐다. 만일 해수면 상승속도가 너무 빨랐다면 습지가 사라졌을 것이고, 너무 느렸다면 죽은 식물은 토탄이 되지 않고 썩어 없어졌을 것이다.
죽은 식물이 2m 이상 쌓여있는 인도 갠지즈 강 하구나 미국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디스멀 습지는 석탄 층 형성 당시와 비슷한 환경을 보여준다. 낙동강 하구의 옛 하상에서 메탄가스가 발생하는 것도 땅에 묻힌 식물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생대처럼 많은 양은 아니지만 석탄은 지금도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
거대 익룡 고향 군위
앞발자국 길이 35.3㎝…1억6천만 년 ‘군림’
코끼리보다 큰 몸집으로 어떻게 날았을까
화석 찾기는 고생물학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3월 경북 군위에서 척추동물 화석을 찾아나선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연기념물센터 학예연구관은 몇 시간째 지표면에 드러난 암석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땅만 보고 걸어다녔다. 이 지역은 곤충과 어류 화석이 많다고 알려진 곳이다. 벌레와 물고기가 있다면 이를 잡아먹는 척추동물도 있을 터였다.
숨을 돌릴 겸 등산화끈을 매려고 앉았다 일어나는 순간 바위에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공룡 발자국인가? 그게 아니어서 낙담하는 순간 “심 봤다!”라는 소리가 터져나올 뻔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큰 익룡의 오른쪽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던 것이다. 무릎에 맥이 풀려 주저앉아 어른 손보다 2배나 큰 발자국을 더듬었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호숫가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1억년 전 동해 열려 일본이 떨어져 나가기 전 호숫가
아직 동해가 열려 일본이 떨어져 나가기 전, 경남·북과 전남 일대는 육지였고 커다란 호수가 여기저기 있었다. 따뜻한 열대기후 속에 소철과 속새가 번성했다. 이들을 먹는 작고 날렵한 초식공룡 힙실로포돈, 거대한 목 긴 공룡인 부경고사우루스, 그리고 이들을 노리는 육식공룡 메갈로사우루스가 호숫가를 어슬렁거렸다. 물속에는 원시악어가 거북과 함께 물고기를 사냥했다. 하늘에는 거대한 익룡이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며 유유히 날아갔다.
중생대 백악기 한반도 남부를 ‘공룡의 낙원’이라고 부른다면, 절반을 빠뜨린 셈이 된다. 당시 하늘을 지배한 익룡은 공룡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류의 익룡이 서식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임 박사가 군위에서 발견한 익룡의 앞발자국은 길이 35.3㎝, 폭 17.3㎝로 세계 최대의 화석이다. 3개의 발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군위의 익룡 발자국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 발자국은 전남 해남군 우항리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발자국만으로는 어떤 익룡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임 박사는 “군위와 해남의 익룡은 모두 테로닥틸로이드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케찰코아틀루스라는 거대 익룡의 골격 일부가 미국 텍사스에서 화석으로 발굴됐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가들은 이 익룡의 날개 폭이 10~11m, 무게는 70~85㎏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한다.
영국 포스머스 대학 고생물학자 마크 위튼과 다렌 나이쉬는 지난해 국제학술지 피엘오스 원(PLoS onE)에 실은 논문에서 우리나라 우항리 발자국의 주인은 날개 폭이 10m가 넘고 키는 3m에 달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반도 거대 익룡의 키는 인도코끼리보다 크고 기린의 어깨 높이에 필적했다는 얘기다.
달리기도 선수, 네 발로 뛰다 박차고 날아올라
날개를 폈을 때 F-16 전투기 만한 거대 익룡의 무게가 이 정도에 그친 까닭은 현재의 새처럼 뼈의 내부가 비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어른보다 무거운 몸집으로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거대 익룡의 날개는 폭이 넓고 짧은 게 특징이다. 알바트로스보다는 콘도르에 가까운 형태이다. 따라서 거대 익룡은 독수리나 황새처럼 상승기류를 옮겨 타며 천천히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테로닥틸로이드 익룡의 상당수가 바다에서 먼 내륙에 서식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논란을 부른다. 해안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륙할 수 있었을까.
거대 익룡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들의 걷거나 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는 날개를 접은 익룡이 지상에서 우수꽝스러운 몸짓으로 뒤뚱거리는 이제까지의 상상을 뒤엎는다. 새 이론의 유력한 증거가 바로 우항리의 발자국이다.
우항리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443개의 익룡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기록인 7.3m 길이의 보행렬이 발견됐다. 특히 이곳의 발자국은 익룡이 두 발뿐 아니라 네 발로도 경쾌하게 걸어다녔음을 보여준다.
허민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과거엔 익룡이 육상에서 마치 우산을 겨드랑이 끼고 어정쩡하게 걷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우항리 화석을 통해 앞뒷발을 모두 이용해 자연스럽게 걸었음이 분명해졌다”며 “거대 익룡이 헬기가 이륙하듯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랐음을 발자국 화석에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황새처럼 물가나 육상 성큼성큼 걸으며 먹이 낚아 채
거대 익룡이 무얼 먹고 살았는지도 논란거리다. 거대 익룡 골격의 특징은 큰 두개골과 이를 지탱하는 길고 뻣뻣한 목뼈이다. 처음엔 이들이 죽은 공룡의 사체를 처분하거나 땅속에서 무척추동물을 잡아먹었다고 생각했다. 이어 턱을 물속에 잠근 채 바다 표면을 날면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최근엔 황새처럼 물가나 육상을 성큼성큼 걸으며 먹이사냥을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유력하게 나오고 있다. 이들의 메뉴에는 작은 원시 악어나 공룡 새끼가 들어있었을 것이다.
임종덕 박사는 “거대 익룡의 발자국이 발견된 군위에서는 크지 않은 공룡 발자국과 물고기, 어패류, 곤충의 화석도 함께 발견되기 때문에 이곳이 익룡의 사냥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조상이 두 발로 서 인간이 되기까지 400만년이 걸리지 않았지만 익룡은 1억6천만년 동안 지구의 하늘을 지배했다. 그러나 익룡의 마지막 세대인 거대 익룡도 공룡을 몰락시킨 중생대 말의 대멸종 사태를 피하지 못했다. 큰 덩치로는 급격한 환경변화를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
최후의 피난처, 여수
추도 등 인근 섬 지역 3500여 점 발자국 화석
초식공룡 한 무리가 얕은 호숫가를 두 발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메마른 황무지에 점점이 흩어진 호수와 골짜기를 따라 몇 달째 이동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이곳엔 골짜기 강들이 간간이 범람하여 마르지 않는 물과 먹이 식물도 많았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자 공룡 무리는 고개를 들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대한 목 긴 공룡은 이제 거의 보기 힘들어졌지만 육식공룡은 아직도 끈질기게 이들을 노린다. 안도하는 순간 하늘을 찢는 굉음이 땅을 울렸다. 화산재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발자국 화석에 풍부하게 담긴 살아있는 공룡 정보
마지막 공룡은 아마도 이런 고단한 삶 속에서 안식처를 한반도 남쪽에서 구했을 것이다. 지난 28일 공룡이 멸종을 앞두고 아시아 지역에서 최후의 흔적을 남긴 전남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의 사도·추도·낭도를 찾았다. 이들 섬에는 중생대 백악기의 마지막 시기에 쌓인 퇴적층이 해안에 드러나 있다.
파도에 깎인 낭도의 남쪽 해안 절벽은 희거나 녹색인 사암과 어두운 회색 이암이 교대로 시루떡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여길 보십시오.” 썰물로 드러난 바닥 암반에서 파래를 걷어내면서 허민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한국공룡연구센터 소장)가 하트 모양으로 움푹움푹 패인 곳을 가리켰다. 초식공룡 한 마리가 두 발로 걸어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니 공룡 발자국 화석은 곳곳에 있었다. 초식공룡의 발자국은 발가락이 두툼하고 양쪽 가장자리가 넓다면 육식공룡의 것은 새 발자국 모양이고 끝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남아있기도 하다. 절벽엔 퇴적물이 눌린 발자국 단면도 보인다.
이웃 섬인 추도에는 6마리의 조각류 초식공룡이 나란히 걸어간 84m 길이의 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공룡 보행렬이다. 얕은 호숫가 바닥이 물결 모양을 이룬 연흔 위에 찍힌 발자국도 보인다.
“발자국이 뼈 화석 못지않은 정보를 준다”고 허 교수가 설명했다. 골격화석과 달리 발자국 화석만으론 어떤 종류의 공룡인지 가려낼 수 없다. 그러나 뼈 화석이 죽은 공룡의 모습을 간직한다면, 발자국 화석은 살아있던 공룡의 자취를 전달한다. 얼마나 빨리 걸었는지, 이동습성은 무언지, 집단생활을 했는지, 기후가 어땠는지 등 생태정보가 담겨있다.
사도에서 발견될 가능성 있는 소행성 충돌 흔적
허 교수는 지금까지 추도 1759점, 낭도 962점, 사도 755점 등 모두 3500여 점의 발자국 화석을 여수 섬지역에서 발견했다. 82개 보행렬이 있는데, 이 가운데 65개가 두 발 초식공룡인 조각류의 것이고, 16개가 육식공룡인 수각류, 네 발 초식공룡인 용각류의 것은 1개에 그쳤다.
흥미롭게도 이곳 공룡발자국은 2개의 큰 방향성을 보였는데, 하나는 호숫가를 따라 걸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직각 방향인 호수 중심을 향한 것이다. 호숫가의 방향은 물결무늬 화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허 교수는 “발자국의 방향에서 일부 공룡이 호숫가를 이동 경로로 이용했으며 또 일부는 정기적으로 물을 마시러 호수에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발자국의 길이와 폭, 깊이, 보폭 등에서 공룡의 크기와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 허 교수는 사도의 초식공룡이 엉덩이까지의 높이가 약 2m, 전체 길이 약 7m로 시속 2.8㎞의 속도로 천천히 걸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공룡은 중생대가 끝난 약 6500만년 전 멸종했다. 여수 낭도리의 섬들에는 약 7000만년 전 퇴적층에 공룡 발자국이 남아있다. 아시아 공룡화석 산지 가운데 최후기에 속한다.
사도 남쪽 해안에 가면 중생대 퇴적암 위에 화산재가 쌓인 위로 용암이 굳은 20여m 높이의 화산암 절벽이 펼쳐져 있다. 응회암 가운데는 불에 타 숯이 된 중생대 나무의 화석이 들어있다. 이곳이 중생대의 최후가 기록된 곳일까.
백인성 부경대 환경지질학과 교수팀이 화산암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사도 암석의 형성연대는 6820만~6550만년 전으로 나왔다. 중생대와 신생대의 경계층은 소행성 충돌로 인한 이리듐이 많은 퇴적층의 띠로 확인된다. 백 교수는 “사도에서 그런 경계층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미 침식돼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기-건기가 되풀이된 반건조지대…간헐적인 화산활동 영향
여수의 섬들은 당시 쇠퇴하던 공룡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가능성이 있다. 중생대 중기인 쥐라기를 풍미하던 거대한 몸집의 용각류는 중생대 말인 백악기에 들어서면 아시아와 유럽, 북미 등에서만 살아남고, 백악기 후기엔 거의 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기가 오랜 마산 호계리와 창녕 등지에선 용각류가 적지 않게 확인되지만 백악기 말 극히 일부가 여수에서 발견될 뿐이다.
여수의 퇴적층은 이곳이 우기와 건기가 되풀이된 반건조지대였으며 간헐적인 화산활동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백인성 교수는 “지금의 캘리포니아주 내륙처럼 땅속에 소금기가 많은 건조지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에 따라 호수는 불어나고 줄어들었지만 물이 마르지는 않았고, 세쿼이어 같은 식물들이 무성했다. 마지막 공룡은 이곳에서 중생대를 끝낸 거대한 소행성의 충돌 여파와 그 재앙을 뚫고 살아남은 ‘나는 공룡’인 새들의 비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전통놀이 (0) | 2010.01.14 |
---|---|
염화실의 향기_01_성수스님 (0) | 2010.01.12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06 (0) | 2010.01.10 |
金秉模의 考古學 여행_끝 (0) | 2010.01.08 |
조현설_사자상의 내력을 보면 (0) | 2010.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