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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 암릉, 격동의 역사와 함께하다

醉月 2010. 7. 7. 09:48
우람한 암릉, 격동의 역사와 함께하다
해안(解顔), 안심(安心), 무태(無怠)```. 팔공산 인근에는 견훤에게 패주하는 왕건의 동선을 따라 재미있는 마을 이름들이 남아 있다. 이때의 치욕에 대한 보상일까, 경기도 인근 산에는 반대로 왕건에게 쫓기는 궁예의 도피로를 따라 흥미로운 지명들이 전한다. 부하들이 서럽게 울었다는 명성산(鳴聲山), 쫓기는 신세를 한탄하며 건넜다는 한탄강부터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는 운악산의 대궐터까지.

정신분석학상 과대망상, 자아도취, 광포 성향의 소유자로 알려진 궁예는 말년에 운악산으로 숨어들었다. 산중턱에 성채를 짓고 추적해온 왕건의 군사들과 끝까지 항전했다. 이미 세는 기울었고 흐름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년에 궁예는 농가에서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들켜 가래에 머리를 찍혀 무지개폭포에서 가료(加療)하다 파란만장한 생을 접어야 했다.

한때 애국가 배경 영상에는 백두산, 한라산을 포함해 모두 30여 개의 산이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은 모두 4천440개. 운악산도 1%가 안 되는 관문을 뚫고 그 영상에 포함됐으니 그 자체가 명산, 명소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V 속 운악산의 병풍바위는 장쾌한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우람한 암릉을 펼쳐 산꾼들의 등정 욕구를 자극해왔다. 객관적으로도 인기 명산 33위에 랭크돼 전국구 명산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한북정맥의 중추`인기 명산 순위 33위 랭크

운악산은 화악산, 관악산, 감악산, 송악산과 함께 경기 5악(五岳)으로 불린다. 높이에 밀려 화악산에 맏형 자리를 내주었지만 산세만큼은 어느 산에도 뒤지지 않는다. 경기, 강원지역에 줄기를 뻗친 한북정맥에 속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청계산, 국망봉과 이웃하고 명지산, 매봉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다.
등산로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보통 현등사-눈썹바위-미륵바위-병풍바위-만경대-현등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가 인기 있다. 궁예의 행적에 관심이 많다면 만경대에서 청학대를 거쳐 무지개폭포-운주사로 진행하면 경치와 역사테마를 아우르는 최상의 조합이 된다.

취재팀은 가평의 고찰 현등사 입구를 들머리로 산행에 나섰다. 현등사 입구는 두부촌으로 유명하다. 식당마다 두부전골, 순두부, 콩비지를 진설(陳設)해 관광객들의 입맛을 유혹한다.
현등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비탈을 따라 오른다. 30℃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숨을 턱턱 막는다. 더위에 지친 일행에게 눈썹바위가 제일 먼저 손을 내민다. 초승달 모양의 미인의 아미(蛾眉)를 상상했는데 그저 눈썹 형상을 한 평범한 바위였다.

급경사길은 계속된다. ‘악’(岳) 자 돌림 산들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거니와 그 덕에 시원한 암릉미를 기대하고 왔는데 초입은 그저 그런 육산(陸山)이었다.

725봉을 넘어서자 건너편으로 운악산 정상의 암릉들이 웅장한 근육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운악산의 간판인 병풍바위가 웅자(雄姿)를 자랑한다. 8폭을 꽉 채운 듯한 거대한 바위군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바위 틈새, 암릉 사이엔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획으로 점으로 박혀 화폭을 구성했다.

#암릉과 노송의 환상 조화 ‘병풍바위’

저 풍경을 헬기로 잡았다면 화각(畵角)은 더 웅장했을 것이고 이 감동을 자산으로 병풍바위는 애국가 속에 초대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람한 암봉들 맨 위에서 미륵부처가 높게 솟아 만상(萬象)을 굽어본다. 운악산 제2의 명물 미륵바위다. 암봉 틈새마다 노송들이 뿌리를 내려 청백(靑白)의 수묵담채를 완성했다.

40도가 넘는 급경사 계단을 올라 운악산 정상인 만경대에 닿는다. ‘경기의 설악’답게 시원한 조망을 펼쳐 보인다. 산 밑으로 산너울을 따라 휘어진 가평들녘이 초록융단을 이루었다.

일행은 대궐터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역사의 풍운아 궁예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다. 궁예는 한때 경기, 강원, 충청 일대를 귀속시켜 한반도의 3분의 2를 세력권 안에 두었지만 믿었던 부하의 칼에 패망하고 말았다. 망자는 말이 없고 붓을 쥔 승자는 패자(覇者)의 역사를 썼다. 그 결과 궁예는 패륜, 자아도취, 광포의 인물로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대궐 터는 7부 능선 계곡 옆에 있었다. 왕궁 터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20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운악의 주능선이 철옹성처럼 둘러쳐 있고 바로 밑엔 무지개폭포가 산 밑에서 접근을 차단해 천혜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대궐터 요새 삼아 왕건에 끝까지 저항

‘비운의 이상주의자인가 과대망상의 폭군인가.’ 산속에서 초라하게 최후를 맞은 궁예의 흔적들을 보니 공과(功過)에 앞서 인간적 연민이 앞선다. 인간 궁예의 최후를 애도하며 일행은 왔던 길을 돌려 만경대-절고개를 거쳐 현등사 코스로 하산길을 잡는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길 역시 가파른 내리막이다. 절고개 쪽은 계곡이 발달해 있고 물이 풍부하다.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국사가 세웠다는 현등사에서 목을 축인 후 다시 길을 재촉한다. 현등사 일주문 근처에서 ‘민영환 암각’과 만난다. 한말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백관을 이끌고 일제의 야욕에 온몸으로 맞섰던 그는 가끔씩 이곳에 들러 기울어가는 국운을 안타까워하며 그 울분을 바위에 새겼다. 사후(死後)에 조정에서는 을사늑약 때 순절한 민영환, 조병세, 최익현 3충신을 기려 산 밑에 삼충단(三忠壇)을 세우고 매년 11월에 제를 올렸다.

운악산은 후삼국, 한말의 격동의 역사 속에서 많은 인물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궁예, 민영환 둘은 ‘망국’을 공약수로 역사적 비운을 공유했다. 당대엔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후대의 사가(史家)들은 그들을 위인의 반열에 올려 행적을 추모하게 했다.

역사의 순환성과 선의(善意)에 대한 보상, 운악산 산행에서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