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개심사 솔숲
깊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송홧가루 묻은 숲 공기가 지친 몸과 마음을 슬며시 어루만져준다. 성난 짐승처럼 날뛰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몸은 기운을 회복한다.
속도 강박증에 걸린 채 먹고사는 일로 허우적거릴 때, 헛된 망상과 강퍅해진 마음으로 심란할 때,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눈앞을 가릴 때, 솔바람 소리가 그 무엇보다 든든한 위안이 된다. 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솔바람 소리로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자 개심사(開心寺)로 향했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솔바람 소리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송운(松韻)’ ‘송성(松聲)’이라 칭하며 솔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 어머니들이 솔밭에 정좌하여 솔바람 소리를 태아에게 들려주면서 시기와 증오와 원한을 가라앉혔던 이유도 솔바람 소리가 상처 받은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때 묻은 마음을 씻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 절집인들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지 않으랴만, 솔바람 소리가 품고 있는 의미와 관련해 개심사를 떠올린 이유는 솔숲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 표석에 대한 옛 기억 덕분이었다. 바로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절집’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각기 세심동과 개심사가 새겨진 두 개의 조그마한 표석은 솔숲을 오르는 돌계단 초입 양쪽에 붙박이 모양으로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세태에도 변함없이 정겨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 광경에 가슴이 저려왔다. 절집으로 향하는 숲길은 구도와 사색과 명상을 위한 길이 아니던가. 그 숲길이 편리함과 효율을 좇아 점차 자동차 길로 변하는 세태에,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는 감회가 복잡했다. 더불어 산천의 깊이와 크기에 따라 작은 인공물조차 앉힐 자리를 헤아려 배치했던 옛 스님들의 안목이 그리웠다. 공간 활용에 대한 옛 사람의 지혜가 새삼 그리운 이유는 오늘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찰 주변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자연파괴 행위 때문만은 아니다. 무작정 실용만 좇는 우리네 삶의 가벼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계단 길을 두세 굽이만 돌면 바로 다다를 수 있는 짧은 거리를 긴 여정인 양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가슴을 펴고, 귀를 활짝 열고 천천히 걷는다. 마침내 고대하던 솔바람 소리가 쏴~하고 불어온다. 솔숲 위로 바람이 인다. 가지가 흔들리고, 가지 끝의 솔잎들도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한다. 장자는 바람을 ‘대지가 뿜어내는 숨결’이라고 했던가. 솔잎 사이로 지나면서 만드는 바람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영혼을 흔드는 소리를 담는다. 막혀 있던 귀가 뚫린다. 납덩이처럼 가슴을 짓누르던 망상이 심호흡과 함께 빠져나간다. 어느새 순진무구한 상태로 부처님의 나라에 도착한다. 어느 시인은 바람결에 실려온 냄새만으로도 솔숲을 지난 바람인지 참나무 숲을 지난 바람인지 아니면 대숲을 지난 바람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떤가? 혹 솔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잠깐의 여유조차 아까워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기 바쁘다면, 여러분은 일 중독자일지 모른다. 바람결에 실려 온 계절의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 자연의 진수를 남보다 더 깊고 진하게 체득하는 자연주의자일 것이다.
굽은 소나무의 생명력
개심사의 들머리 솔숲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답지 않게 대부분 50~60년 묵은 비교적 어린 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엔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6·25전쟁이나 이후 사회적 혼란기에 훼손된 탓일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강원도의 백담사나 법흥사, 경북 울진의 불영사 경내의 곧게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개심사의 모든 소나무는 구불구불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적 차이는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인구밀집 지역에서 꽃피운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다. 소나무는 이 땅의 어떤 나무들보다 건축재나 조선재로 활용도가 높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던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구릉과 평야지대의 소나무들은 지속적으로 농경문화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건축재와 조선재로 벌채되었다. 옛 사람들 역시 오늘날의 우리처럼, 재목감으로 줄기가 곧은 소나무들을 먼저 벌채해 사용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곧은 소나무를 계속하여 벌채했으니 지금은 형질 나쁜 나무만 남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 소나무 고유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화가나 사진작가, 또는 시인들은 오히려 굽은 형태의 소나무에서 역동의 기운과 생명력을 느낀다. 그래서 쭉쭉 곧은 소나무보다 굽은 형태의 소나무를 더 선호한다. 굽은 소나무가 표출하는 조형적 아름다움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소나무관(觀)은 소나무를 베어서 쓸 재목으로 바라보는 임업적 시각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곧은 소나무보다 굽은 소나무들이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더 멋지게 형상화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나무다리로 영지(影池)를 건넌다. 개심사가 코끼리 형상을 한 상왕산 자락에 안겨 있기에 영지는 코끼리의 물통을 상징한다던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배롱나무가 먼저 객을 맞는다. 마음을 여는 절, 개심사는 654년(백제 의자왕 16년)에 창건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고쳐 짓거나(重建), 수리(重修)하거나 또는 낡은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重創)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개심사는 조선 성종 6년(1475)에 있었던 산불로 절집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산불은 충청도 절도사를 지낸 김서형의 사냥 때문에 일어났고, 절집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숲이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 고장의 다른 절집들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되거나 파괴되었지만, 개심사는 전란의 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절집의 규모가 작은데도 개심사가 충남의 4대 사찰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는, 근대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스님이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개심사가 품고 있는 보물로는 대웅전(보물 143호)과 영산회괘불탱(보물 1264호) 등이 있다.
절집 꽃나무와 육법공양
개심사가 품고 있는 또 다른 보물은 이곳에 터 잡은 자연유산이다. 바로 매화와 복사꽃, 그리고 청백홍의 색깔로 꽃을 피우는 겹벚나무들이다. 이들 꽃나무(花木)들 중에서도 초여름이 시작될 시점인 음력 4월 초파일 전후에 3가지 색깔의 겹꽃을 피워내는 왕벚나무의 꽃이 유별나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개심사 왕벚꽃은 희고 붉고 푸른 꽃을 피워내기에 5월의 개심사를 꽃 대궐로 탈바꿈시킨다. 특히 다른 곳에서 쉬 볼 수 없는 청색의 벚꽃이 단연 압권이다. 청벚꽃은 붉은빛이 덜한 반면, 꽃심이 청포도 같은 연한 녹색을 띠고 있어서 푸르스름해 보인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보면 마치 병든 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청벚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개심사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져 있다. 허름한 해우소 옆이나, 돌로 대충 쌓아 지은 오래된 낡은 창고 곁에서 변함없이 아름다운을 꽃을 피워낸 벚꽃의 화려함을 감상하면, 개심사를 꽃 대궐로 부르는 이유를 수긍할 수 있다.
벚나무는 예로부터 절집과 인연을 맺어왔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 백양사 초입의 벚꽃 길이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엄사의 올벚나무, 개심사의 삼색 왕벚나무처럼, 절집에 이르는 도로변이나 절집에 벚나무를 심는 이유는 불가에서 벚꽃을 속세를 떠나 극락(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피안앵(彼岸櫻)’의 상징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봄은 남녘의 화신이 북상하면서 무르익기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절집의 동백이 개막 테이프를 끊고, 매화와 복사꽃이 그 뒤를 잇는다. 벚나무는 어쩌면 조금 늦게 봄이 무르익고 있음을 알리는 최종주자일지 모른다. 여름의 문턱에서 왕벚꽃으로 장식되는 꽃 대궐의 장관을 못 잊어 개심사에 왕벚나무의 개화 여부를 전화로 문의했다. ‘벚꽃’이라는 이야길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답이 돌아왔다. “아직 피지 않았습니다. 2~3일 더 있어야 필 것 같지만, 짐작일 뿐 그건 꽃이 피고 싶어야 피는 것 아닙니까?” 왕벚꽃의 개화시기를 궁금해 하는 확인 전화가 전국 각지에서 얼마나 많이 걸려왔으면 바로 이런 답변이 튀어나올까? 불사나 스님의 안위보다 벚꽃의 개화를 확인하려고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보살의 심경을 헤아려봤다.
이 땅의 사찰들은 장구한 역사의 사연만큼이나 각기 다른 꽃나무를 키우고 있다. 백련사, 선운사, 화엄사처럼 동백꽃이 봄철을 장식하는 절집이 있는가 하면, 직지사처럼 절집 마당 한구석에 자라고 있는 수백 년 묵은 개나리가 봄의 절기를 알리는 절집도 있다. 또 상원사나 부석사처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생목인 산돌배나무의 꽃이 생명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기도 한다. 절집마다 제각각 다른 화목들이 자라는 데는 절집의 유구한 전통이나 스님들의 독특한 취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불가에 전해 내려오는 육법공양(六法供養)의 전통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육법공양이란 부처님께 바치는 초, 향, 차, 꽃, 과일, 쌀 등 6가지 공양물과 함께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자비) 세상을 밝혀(지혜)주기 때문에 ‘지혜의 등불’을 뜻하고, 향은 어둡고 가려진 곳까지 두루 향기를 나누어주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해탈의 향기’를 의미한다. 차, 특히 감로차(甘露茶)는 괴로움에 빠진 중생에게 부처의 가르침이 마치 감로수와 같기 때문에 ‘열반의 맛’을 뜻한다고 한다.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인 과일은 개개인의 지극한 수행이 열매를 맺기 바라며 올리는 공양물로, ‘깨달음의 열매’를 뜻하고, 쌀은 봄부터 여든여덟 번의 노력으로 추수할 수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기쁨’을 나타낸다고 한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꼭 피어야 할 존재이며, 울긋불긋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보살행의 서원으로 여기기 때문에 ‘보살행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꽃이 초, 향, 차, 과일, 쌀과 함께 불가의 공양물이 된 사연을 알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꽃을 피워내는 화목들이 절집의 진객으로 자리 잡은 이유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보살행의 아름다움’ 덕분에 우리가 고찰의 마당 한구석에서 절기마다 다양한 화목이 피워내는 꽃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와유(臥遊)의 즐거움
나의 남녘 절집 순례는 개심사에서 수양벚꽃을 감상하는 것으로 끝났다. 쌍계사의 십리벚꽃과 선암사의 무우전 고매(古梅)를 만난 후, 북상하는 화신을 따라 화엄사의 홍매와 백매에 취하고, 다시 백양사의 벚꽃과 고불매를 즐긴 후, 가장 늦게 화신을 전하는 개심사의 왕벚꽃을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감상하지 못했을망정, 수양벚꽃의 멋진 모습을 즐겼으니 올해의 봄은 여느 해의 상춘행사보다 알찬 셈이다.
봄만 되면 나는 왜 이런 걸음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나만의 와유첩(臥遊帖)을 꾸미고픈 욕심 때문이다. “누워서 유람한다”는 의미의 와유는,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과 글을 보며 즐기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육신이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허약해지더라도 정신만 멀쩡하면 행할 수 있다. 그러니 와유첩이란 누워서 유람할 수 있는 그림과 글을 모아둔 화첩이다.
3월27일자 신문에는 “조선시대 선비 김계온(1773∼1823)이 금강산을 유람한 후 화원을 시켜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을 본떠 그리도록 한 ‘오헌와유록(寤軒臥遊錄)’을 1853년 다시 본떠 그린 와유첩이 17억2000만원에 낙찰되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조선시대 와유첩을 소장하게 된 이의 경제적 여유가 부럽지만, 그런 와유첩을 소장할 수 없는 나의 처지가 곤궁하거나 부끄럽지는 않다. 그 까닭은 건강할 때 오늘 이 땅의 풍광을 가능한 한 많이 담아서 나만의 와유첩을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봄만 되면 탐매행각이나 절집의 화목을 찾아 나서는 나의 방랑벽도 그런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국토의 모습일망정, 절기에 따라 그때 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가능한 한 절실하게 담고자 했던 것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나이 먹어감에 대한 남다른 대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눈으로만 보지 않고 냄새로, 촉각으로, 소리로, 맛으로도 느끼고 가슴 깊이 새기고자 노력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몸을 잘 움직일 수 없는 여건에서도, 맑은 정신으로 이 땅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다. 그뿐만 아니다. 눈앞에서 사라져 볼 수 없는 풍경도 옛사람의 글이나 그림을 통해서 머릿속으로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와유의 풍류를 즐겼다. 와유의 삶을 추구했던 조상들의 옛 전통을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런 풍류를 누리고 싶었을 터이다. 와유란 바로 마음의 풍요를 얻는 안일(安逸)과 풍류(風流)의 또 다른 일상인 셈이다.
이 순간, 자신만의 와유첩을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일 자신만의 와유첩을 준비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와유첩을 준비하고 있는가? 바라건대, 부디 눈앞에 보이는 풍광을 담는 데 급급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신체의 오묘한 감각기관을 십분 활용해 이 산하의 아름다움을 가슴 깊이 저장하는 방법을 몸으로 체득하는 일도 우리의 길어진 여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좋은 방법이다.
와유첩과 관련된 자료를 뒤지다가 서울대 국문학과 이종묵 교수의 인상적인 글을 발견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아름다운 산천을 그린 그림과 글은 상상력을 촉발하는 매개물이라 하였다. 또 선천적인 맹인은 본 기억이 없으므로 꿈을 꿀 수 없다고 하였다. 상상력의 촉발을 위해서는 매개물로서 그림과 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은거를 꿈꾸는 사람은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걸어놓고, 왕유(王維)와 같은 별서를 꾸미고 살고자 하면 망천도(輞川圖)를 걸어놓았으며, 왕희지(王羲之)처럼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고 싶으면 난정(蘭亭)을 그린 그림을 구해 완상하였다.”
성호 이익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모든 것이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살이 속에 현대인은 성호 이익이 추구했던 이런 목가적 삶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더 큰 집, 더 비싼 자동차, 더 빠른 컴퓨터와 같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느라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빠듯한 일상에서 그나마 우리가 여유를 갖고, 마음의 풍요를 쌓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옛사람처럼 우리도 자신의 와유첩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 아닐까.
굽은 나무로 절집을 지은 이유
개심사의 해탈문, 심검당, 범종각은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축조했기 때문에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범종각의 네 기둥이 모두 굽은 이유나, 심검당의 기둥과 들보가 굽은 목재로 지어진 것을 보면, 이 고장 소나무의 옛 모양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옛날 이 일대의 솔숲도 굽은 소나무의 형태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추정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일을 해석하는 잘못은 흔히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쉽게 저지른다. 목재의 해부학적 연구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절집을 비롯한 고건축물들이 소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나 참나무로 지어졌다는 단순한 결과만을 근거로 삼아, 옛날에는 소나무 대신에 다른 수종이 건축재로 더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오늘의 잣대를 과거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단견일지도 모른다. 산림학을 전공하는 내 안목도 다르지 않았다. 절집은 한 시대 최상의 문화를 꽃피운 성소랄 수 있는데 왜 굽은 나무로 절집을 지었을까? 재목으로 좋다는 소나무 대신에 옹색하게도 굽은 나무나 짧은 길이의 느티나무를 잇대어 재목으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개심사의 해탈문을 들어서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런 의문은 어느 해 여름 신응수 도편수와 함께 절을 찾는 길에 풀렸다.
경복궁 복원공사를 20년째 주관하고 있는 신 선생은 예로부터 몇몇 국찰(國刹)을 제외하고는 가람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는 운송수단이나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은 탓에 절 주변 숲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절집 주변에 좋은 솔숲이 있으면 소나무재를 쉽게 구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인근에 자라는 느티나무나 참나무를 재목으로 쓸 수밖에 없었었을 것이란 부언 설명도 이어졌다.
선생의 답변을 개심사의 범종각이나 해탈문, 심검당에 적용하면, 개심사 일대의 소나무들은 옛날에도 굽었으며, 한때는 굽은 소나무조차 쉬 구할 수 없어서 느티나무와 같은 활엽수재로 절집을 짓거나 고쳤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유추는 중건 연대가 알려진 절집을 통해서 당시 옛 숲의 상태를 엿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이는 개심사의 심검당이나 범종각을 굽으면 굽은 대로, 곧으면 곧은 대로 쓴 조상들의 미의식이 응축된 현장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오히려 목재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덧대고 잇대어 수도도장을 축조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와 염원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주장이 이치에 합당한 것은 아닐까.
사진과 글로 한국 전통건축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난 십수년 동안 기록해온 건축가 김석환 선생께 소나무 답사 여행길에 개심사의 당우를 축조한 건축재에 대한 이야길 나누면서 인상적인 설명을 들었다. 개심사의 절집이 이처럼 굽은 나무들로 축조된 이유에 대해 선생은 새로운 설명을 덧붙였다. 절집 축조에 이처럼 굽은 나무들이 그대로 사용된 이유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숭유억불의 정치적 상황 못지않게,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적 세계관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던 고려의 시대상황은 가람의 건축도 일정부분 규격화하고 도식화하여, 규정된 형식으로만 축조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그래서 다른 수종의 목재를 사용할망정 굽은 나무는 쓰지 않았을 거란 설명이다.
그러나 조선의 개국과 함께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움으로 구성된 것을 진리로 인식한 성리학적 세계관은, 고려시대의 도식화된 가람 건축 양식과 달리, 절집을 축조하는 데 굽은 목재를 건축재로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도록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숭유억불에 의해 산중가람으로 내몰린 불교의 처지를 생각할 때,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세계관과 일정부분 융화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설명도 이어졌다. 특히 불교의 수행 전통이 교리 중심의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조화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산신각의 솔숲에서 나를 비운다
동편 산록의 산신각 주변 솔숲은 개심사의 숨은 명소다. 이곳은 들머리 언덕길의 소나무와 달리, 꽤 굵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일반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개심사를 찾는 많은 이가 절집 앞을 둘러보고 마는데, 어느 계절이든 산신각의 솔숲을 꼭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봄꽃의 아름다움으로 온 절집이 화려하게 들썩거리는 계절에도, 송홧가루가 흩날리는 신록의 계절에도 산신각의 솔밭에서 자신을 한동안 그대로 놓아둬 보는 것은 좋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만이 재충전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할 일과 책임져야 할 업무, 시간에 맞춰 해내야 할 과제 등을 잠시나마 잊고, 자신을 과감하게 비우는 것이야말로 절집 숲에서 실행해봐야 할 일이다. 명상은 멀리 있지 않다. 고승대덕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문이 깊은 학자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용감하게 자신과 대면하면서, 자신을 만나는 일이 바로 수행이고 명상이 아닐까?
산신각 솔밭에서 보드랍고 화창한 봄바람에 따라 송홧가루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청명한 봄 하늘로 피어오른 송홧가루 구름은 어느 틈엔가 내 머리 위로 연두색 안개가 되어 내려앉는다. 옅은 송진 냄새가 온몸을 휘감는다. 솔잎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지 않다. 세속에 찌든 영혼까지 청신한 기운으로 씻기는 듯하다. 이웃나라 일본 국민의 30%가 봄철만 되면 삼나무 꽃가루 때문에 코와 눈과 기관지 알레르기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오래전부터 송홧가루를 약용과 식용자원으로 애용해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맛이 달고 온하며 독이 없다. 심폐를 윤(潤)하게 하고 기(氣)를 늘린다. 풍(風)을 제거하고 지혈을 시킨다”고 송홧가루의 효능을 설명하며, 송진(松脂)이나 솔잎(松葉)보다 약효가 더 좋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현대화된 기기로 분석한 결과 송홧가루에는 칼슘, 비타민 B1, B2, 비타민 E 등의 성분이 풍부해 혈관을 확장시켜 치매예방에 좋고, 중풍·고혈압 및 심장병은 물론 폐를 보하고 신경통, 두통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공리적인 효능과 달리 송홧가루는 나에게 먼 옛날 솔밭에서 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시간여행의 실마리가 되어준다. 송홧가루가 날리는 계절에 솔숲을 찾으면 잊지 않고 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박목월의 ‘윤사월(閏四月)’을 가만히 읊조리는 일이다.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고 / 엿듣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봄 풍경의 아름다움을 꾀꼬리의 울음소리로 상상하는 눈먼 처녀의 애틋한 모습을 떠올리며, 절기의 아름다움을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의 행복에 고마워한다.
마침내 산신당의 산신탱에 그려져 있는 소나무가 소리를 낸다. 산신 앞의 호랑이도 네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켠다. 어느 틈에 솔숲에 바람이 인다. 켜켜이 쌓여 있던 생각의 고리들을 불어오는 솔바람에 흘려보낸다. 생각의 고리와 시름의 고리들이 산산이 흩어져 솔숲에 흩뿌려지고, 마침내 솔숲 속에 묻힌다.
●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 고려대 임학과 졸업
●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석사, 박사
● 現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 저서: ‘숲과 한국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숲 보기 읽기 담기’ ‘한국의 명품 소나무’ 외 다수
입을 벌려 심호흡을 한다. 허파꽈리 저 밑바닥에 쌓여 있던 온갖 찌꺼기를 뱉어내고, 송홧가루가 묻어 있는 맑은 숲 공기를 가슴에 담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 거듭되는 심호흡에 날뛰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비워져가는 나를 만난다. 산신탱 속의 호랑이가 정겹고, 소나무가 편안하다. 어느 틈에 산신이 된 나 자신을 만난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모든 존재가 조화롭기를” 반복해 읊조린다. 행복과 평화와 조화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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