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끝

醉月 2009. 12. 23. 08:54
신의 축복인가 악마의 유혹인가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들의 욕망, 이스라엘에서 이집트·그리스까지 화장술 문화의 변천사

 

“주께서 그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환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반지와 코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구약성서 이사야서 3장 18~23절)

 

2700년전, 여성들은 무엇으로 꾸몄는가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욕망은 신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쓴 이 이사야서는 아름다움과 인간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복잡한지 절절하게 확인시키고 있다. 일단 이런 구절을 보고 난 뒤 이사야가 기원전 약 740년 무렵에 활동했던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뭔가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2700여년 전 여성들이 자신의 미모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꾸몄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려 21가지의 패션 관련 품목이 여기 등장한다. 그뿐인가. 그 다음 절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 이스라엘 전통 의상 차림의 여성. 구약에 나타난 화장술은 오늘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이사야서 3장 24절)

이스라엘 여성들은 당시 기본적으로 향을 발산하는 화장품을 가지고 다녔으며, 머리 손질에 깊은 공을 들였으며, 미모를 위해서 엄청난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번역은 ‘숱한 머리털’로 했지만, 영어 번역으로는 ‘well-dressed hair’로 돼 있다. ‘고운 얼굴’도 영어 번역은 ‘beauty’이다. 더군다나 이사야서에 나타나고 있는 ‘장식한 발목 고리’로부터 ‘너울’까지 21가지 품목이 영어식으로는 모두 단수 아닌 복수로 돼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 시대 여성들은 현대인에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여 화장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성서와 관련된 역사서적에 따르면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기술인 화장술은 근본적으로 악한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의 위서(僞書)로 분류되는 기원전 2세기의 <에녹서>(the Book of Enoch)는 천사 아자젤이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금속과 그 금속을 다루는 방법, 팔찌와 장신구, 안티몬으로 눈 주위를 칠하고 눈꺼풀을 분으로 꾸미는 법, 진기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온갖 염료를 전해주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유대교에 따르면 이 아자젤이라는 존재는 속죄의 날 의식 때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의 길을 떠나는 염소를 받아들이는 ‘사막의 악마’로 나타난다. 따라서 아자젤은 악마적인 존재로 비정되고, 그런 존재가 인간의 여성에게 가르쳐준 것들도 악마적인 성격으로 비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악마적인 것일까?

 

클레오파트라는 ‘화장미인’일까

이스라엘보다 훨씬 여권이 강력하고, 문명이 발달했던 이집트에서는 화장술, 미용술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활용됐다. 오히려 그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들이 누린 화장술은 더욱 고급화하고, 독점화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상황에 따라서는 화장 방법이 대단히 과학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도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런 사회에서는 화장술이 단지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남성들도 함께 누리고 즐기던 문화였다.

» 화장하는 로마의 부인을 묘사한 헤르쿨라네움의 프레스코화. 로마의 귀부인들은 점차 과도할 정도로 강렬한 중동의 화장술에 빠져들어갔다.

구체적으로 보자. 이집트인들은 <에녹서>의 아자젤이 인간에게 전수했다는 안티몬 화장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안티몬과 미묵(眉墨)을 눈에 칠하고 있다! 이건 과학적 근거도 있다. 사막지대인 이집트에서 살아가려면 건조해지기 쉬운 눈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안티몬과 미묵이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해 눈의 건조를 막아준다. 각막염이나 결막염 등 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이집트 신으로서 매의 형태로 현세에 나타난 호루스의 눈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나아가 땀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향과 테레빈유를 사용했다. (이 유향이 기독교의 신약성서에서 동방박사가 예수의 탄생 때 가지고 온 3가지 예물 황금, 유향, 몰약 가운데 하나이다.) 도미니크 파케는 이집트인의 화장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집트인의 몸단장은 향료를 푼 욕조에서 시작됐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욕조에서 이집트의 호수에서 구한 ‘나트론’이라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몸을 문질렀다. 그 다음에는 ‘수아부’라는 표백토와 재를 섞은 반죽으로 각질을 제거하고 향유로 마사지를 했다. 몸은 금빛을 띤 황토색 기름을 발라 윤기를 띠도록 했고, 상반신과 관자놀이의 정맥들은 그 반짝이는 금빛과 차가운 대조를 이루는 푸른빛으로 부각시켰다. ‘호소하는 듯한 눈을 만드는’ 검은 미묵을 칠한 눈은 물고기 형태로 늘여 그렸고, 눈꺼풀에는 녹색 공작석, 터키옥, 테라코타, 구리의 검은 산화물, 숯 등을 빻아 강한 색조를 입혔다. 이 기이한 눈은 길게 늘여 검게 칠한 눈썹으로 완성됐다. 검게 그려넣거나 뽑아낸 속눈썹, 장밋빛 볼, 분홍이나 양홍빛 입술 등은 푸르스름한 가발을 쓴 성스러운 얼굴에 무희의 얼굴과 같은 화려한 광채를 주었다. 손질된 손톱과 발톱에는 적갈색 헤나 염료를 입혔다. 이 염료는 사막의 먼지로부터 손톱과 발톱을 보호했으며,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

» 영화 속 클레오파트라의 모습. 그는 화장술을 뛰어넘는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이었지만, 당시의 화장술을 적절히 활용했다.

처음에 성직자 계층이 독점하던 이런 화장술은 점차 역사가 흐름에 따라 귀족계급에게도 확대된다. 성직자들이 사용하던 화장술의 비결을 귀족들이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집트의 화장술이 이처럼 고도화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도 그 인위적 성격을 비판받곤 했다. 이른바 ‘화장미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주장이 어느 정도 맞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크도 “그의 미모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며, 타고난 미모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도 당시 이집트 최고의 도시(이집트 최고라면 그대로 세계 최고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알렉산드리아의 여인들처럼 향수와 장신구, 보석 등을 이용했다. 알렉산드리아 여인들은 화장에 능했다. 미용술, 복잡한 머리 모양, 진홍빛 드레스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당대의 남성 영웅들을 사로잡았던 매력은 더 고차원적이다. 말할 때 저절로 드러나는 우아함, 부드러움, 친절함 그리고 10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놀라운 지적 능력…. 일단 그와 말을 나눠본 사람이라면 그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 화장품을 근절하다

이집트와 경쟁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화장술은 이집트보다 훨씬 억압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이집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였다는 점도 이런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국주의적인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는 아예 화장품을 근절시키는 조치까지 취해졌다. 스파르타보다는 더 개방적이던 아테네에서는 그래도 조금 숨을 돌릴 여지는 있었다. 비록 결혼한 여성은 규방에만 갇혀 있었지만, 동양(여기서의 동양은 중동지역을 말한다)의 화장품이 꾸준히 그 규방으로 흘러들어갔다. 밤에는 ‘남편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약간의 화장이 허용되기도 했다. 나중에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이집트 문명 등과 혼효돼 헬레니즘 문명을 꽃피우면서 화장술은 더 활발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동양에서 유래한 짙은 화장이 유행하고 이른바 ‘백연 편집증’이라는 증후군이 지중해 일대를 휩쓸게 된다. 얼굴을 백연, 석고, 백묵 등으로 진하게 화장하는 유행이 휩쓸더니 다시 그 얼굴에 푸코스 아르칸나, 밀토스 같은 식물성이나 광물성 재료로 붉게 액센트를 주는 방식이 히트를 쳤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리스 시대의 아름다움은 이집트보다 훨씬 억압적이었다. 나아가 아름다움을 조절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화장술보다는 운동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유지됐다.

» 미국 육상선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의 화장한 얼굴과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 현대 스포츠의 세계에도 화장과 패션의 물결은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사진/ Rex Features)

로마도 그리스적인 전통을 많이 답습했다. 그러나 제국이 풍요로워지면서 화장술도 점차 발달하게 된다. 가슴 팔 겨드랑이 다리 입술 뒤 코털 등을 본격적으로 제거하는 게 로마 귀족부인들의 기본적인 방식이었으며, 코르셋을 사용해 몸매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부터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을 안티몬이나 사프란으로 칠하고, 다시 볼을 아르칸나나 연단으로 붉게 칠하는 요란한 화장이 로마에서 유행했다. 로마의 최전성기를 지난 뒤부터는 오늘날 미국을 연상시키는 풍조가 나타난다. 비만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것이다. 테렌티우스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은 “운동선수처럼 보일까봐 두려워 음식의 양을 줄였다”고 한다.

 

감추기와 냄새 없애기에 매달린 로마인들

이와 함께 로마인들은 감추기와 냄새 없애기에도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이 시대에 이르면 대하수도의 오염이 심각한 상황으로 들어가고, 로마식 식생활의 폐해가 장기적으로 축적해 점차 노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저마다 화장수와 향유를 발라 유해오염 물질이 몸에 접촉하는 것에 대비했으며, 피부병이나 구취·반점 등을 감추고 없애는 데 거의 신경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게다가 백연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얼굴빛이 변색되고 치아가 검어지고 신경이 둔화되는 증상까지 확산됐다. 제국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화장술을 억압하거나 왜곡해왔다. 그 뒤 현대에 들어와 다시 이집트적인 자유분방한 화장술 문화와 로마 말기의 과도한 화장술 문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미래의 여성들은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일까?

 

당나라 여인들 아아새도우를 배우네

» 흉노족에게 시집가는 중국 한나라 때의 미인 왕소군. 중국은 서양보다 화장술이 덜 활용된 편이다.

동양에서도 화장술은 발달했지만, 외형적인 면에서는 서양보다는 상대적으로 뒤지거나 전혀 다른 길을 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역사에서 가장 국제주의적인 대제국이었던 당나라만 보더라도 당시 화장술의 발전이 서양에 미치지 못한다. 시인 원진의 법곡(<원씨장경집> 권24)을 보자.

“여인은 호부(胡婦)가 되려고 호장(胡?)을 배우고

기생은 호음(胡音)을 권하고 호악(胡樂)으로 섬기네.”

페르시아 여성을 가리키는 호부가 호장이라는 서역의 화장으로 매력을 떨치자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 그 취향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이 호장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눈가를 군청색이나 남색으로 그리는 아이섀도인 것이다. 또 당나라 여성들이 퇴계 모양이라 해서 머리카락을 높이 땋고, 입술은 검은 기름을 발라 검은 입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볼에는 혈훈장이라고 해서 연지를 반원 또는 원으로 칠하고 있다. 이 머리카락을 높이 땋아 올리는 것은 로마시대 여성들의 화장술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파이윰의 부인’이라는 1세기에서 5세기 사이의 것으로 보이는 이 로마시대의 초상은 이런 측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또 볼에 연지를 바르는 것도 장밋빛 볼을 강조하는 이집트 화장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화장술이 나중에 로마시대를 거쳐 서양 전역의 중세와 근세,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쉽사리 증명된다.

동양권에서는 오히려 아름다움의 기준이 여성의 몸매나 여성 고유의 매력에 따라 달라진 성격이 두드러진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대표적인 미인은 ‘허리가 가는 여성’이었고, 한나라 시대 대표적인 미인 조비연(趙飛燕)은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가녀린 여성’이었다. 조비연은 원래 이름이 조의주(趙宜主)였다. 그런데 배에서 춤을 추다가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물로 떨어지려는 것을 황제인 성제가 손으로 잡은 뒤 그 손 안에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아 비연(나는 제비)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당나라 때 최고 미인으로 치는 양귀비는 대단히 풍만하고 큰 ‘글래머’였다. 당시의 미적 기준은 그런 글래머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는 아름다움을 온천욕으로 가꿨으며,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했다. 여지는 중국식으로는 리치라고 발음하며, 좀 비싼 중국음식점에서 후식으로 나온다.

한편 하나라 때의 미인 포사는 그 찡그리는 표정 때문에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는 등 동양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은 좀더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스파르타쿠스] 인간해방, 노예들의 드라마!

로마 지배계급을 공포에 떨게 한 검투 노예들의 무장봉기… 그 정점에서 빛나는 스파르타쿠스의 전설

 

“더러운 로마놈들아, 너희들은 인간의 모든 꿈과, 인간의 손에 의한 모든 노동과, 인간의 이마에 맺힌 모든 땀을 조롱하고 있다. …너희들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취미라곤 유혈의 검투를 관람하는 것뿐이다. …너희들의 화려한 그 생활은 전세계에서 강도질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장이다. 전세계의 노예들에게 우리는 외칠 것이다. 일어나라! 쇠사슬을 풀어버려라!” (하워드 파스트, <스파르타쿠스>에서)


검투 노예 봉기, 70여명으로 시작하다

기원전 73년 여름,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부와 영광으로 흥청대고 있을 때 검투 노예들이 카푸아에서 탈출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70여명으로 시작한 검투 노예의 이 봉기는 곧 수많은 노예들이 가세하면서 수만명 규모로 커진다. 그들은 중부에서 북부의 알프스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남부의 땅끝 항구 레기움까지 전진하는 등 2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그들의 분노 앞에 로마는 연전연패하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고대 세계를 뒤흔든 이 검투 노예들의 투쟁은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이렇게 기록됐다. ‘스파르타쿠스 노예전쟁’ (The Spartacus Slave War).

노예제를 운용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영원히 죄악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일하는 가축처럼,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동물처럼, 움직일 수 있는 소유물처럼, 사고팔 수 있는 동산의 재산처럼 간주하고 취급하던 죽음과 죄악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번영을 누린 나라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본격적인 노예무역을 대대적으로 벌인 네덜란드와 영국,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간을 살육하고 노예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흑인 노예를 19세기 후반까지 활용했던 미국…. 이런 압제 앞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궐기하곤 했다. 그 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마의 지배계급을 겨냥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노예들이다. 그 가장 빛나는 정점에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이 있다.

» 영화 <스팔타쿠스>의 전투장면. 노예들은 위대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죽어간다. (사진/ Rex Features)
 

역사적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은 로마 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노예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자 세 번째의 것이다. 그에 앞서 두 노예전쟁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시칠리아 노예전쟁은 기원전 135년에서 132년까지 계속됐고, 두 번째 노예전쟁은 기원전 104년부터 102년까지 이어졌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 전쟁은 에우누스와 클레온이라는 이름의 시리아(또는 중동) 출신 노예들이, 두 번째 전쟁은 아테니온과 살비우스라는 시칠리아 출신 노예들이 지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약 70년 동안 30여년 주기로 세 번씩이나 노예전쟁이 잇따라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당시 광범한 농업노예제도가 정착하면서 무자비하고 가혹한 억압·수탈 체계를 노예들에게 종신토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노예들의 반발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이런 가혹한 체제와 달리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한때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새로운 정복지에서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로마 지배 지역에서 정치적 혼란이나 범법에 따라 갑자기 노예로 전락한 사람이 많았다.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 마침내 떨쳐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셋째, 시칠리아 등 변경에 새로운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반농·반목축 형태의 독특한 노예들이 크게 늘어났다. 환금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라티푼티움 지대에서는 농업노예를 엄격한 감시 아래 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쇠사슬을 채워 재우는 데 반해, 변경의 노예들은 상대적으로 이동도 자유롭고 상황에 따라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가벼운 무장도 해야 했다. 기동성과 무장 가능성이 뛰어났던 셈이다. 시칠리아에서 두 차례 노예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런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았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선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크와 <로마내전사>를 쓴 그리스 출신의 아피안 등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 19세기 지오바뇰리의 소설 <스파르타코>의 삽화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 영화와 달리 스파르타쿠스가 동료 크릭수스를 구하는 것으로 돼 있다.

로마 검투 노예의 중심지인 중부 카푸아의 한 검투 노예 양성소에서 주로 골인(Gauls·오늘날 프랑스 지역 사람들)과 트라키아인(그리스 북동부 변경지대 출신 사람들)으로 이뤄진 검투 노예 70여명이 탈주한다. 다른 검투 노예 양성소로 무기를 싣고 가던 마차 행렬을 털고 무장한 노예들은 산속에 거점을 마련한다. 그들의 지도자 세명 가운데에는 트라키아 목부 출신으로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스파르타쿠스도 있었다. 로마에서 행정관인 클로디우스가 병력 3천명과 함께 진압군으로 파견된다. 클로디우스는 노예들이 진을 친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길목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스파르타쿠스는 산에 자생하는 식물의 넝쿨을 이어 튼튼한 밧줄 사다리를 만들어 병력을 비밀리에 내려보낸 다음 로마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둔다. 이 승리를 계기로 주변에 있던 목축 노예들과 농업 노예들이 대거 노예군에 합류한다. 두 번째로 다시 행정관인 프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된다. 스파르타쿠스는 바리니우스의 부관으로 2천 병력을 이끄는 푸리우스와 격돌해 그들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로마 진압군의 진지를 유린해버린다. 이 전투에서 바리니우스의 부관인 코시니우스를 죽이고 그의 말도 빼앗는 것을 계기로, 로마 전역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퍼짐에 따라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자신들이 로마에 대해 군사적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는다. 알프스를 넘어 각각 골과 트라키아, 게르마니아 등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다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 돌파를 저지하려는 로마 키살핀 골 총독 카시우스의 1만 병력을 패퇴시켰는데도 알프스를 넘지 못한다. 노예군 진영에 가담한 엄청난 머릿수에 도취한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져 약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 로마 검투경기를 묘사한 2세기 무렵의 모자이크. 리비아 트리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로마 원로원은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집정관을 두명이나 파견한다. 그 가운데 한명인 겔리우스 프블리콜라는 스파르타쿠스 주력군에서 이탈한 게르만 노예군을 기습한다. 게르만군은 자신감에 가득 차 스파르타쿠스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게르만군은 대패하고 노예군은 살육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건재했다. 또 다른 집정관인 렌툴루스가 대규모 야전군으로 포위하자 스파르타쿠스는 반격에 나서 렌툴루스를 향해 돌진했다.

 

페텔리아 산속에서 최후를 맞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파르타쿠스군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막대한 병참 물자를 노획한다. 로마 원로원은 이 패전 소식에 분격해 두 집정관에게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크라수스를 노예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많은 로마의 귀족들이 전쟁 수칙에 따라 크라수스의 진압군에 가담한다. 크라수스는 일단 로마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스파르타쿠스 후방에 있는 무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둥글게 배치해 스파르타쿠스를 지속적으로 포위하는 진형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미우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와의 전투에 돌입해 대패하고 만다. 많은 로마군들이 죽고, 전장에서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난다. 크라수스는 이 패전 뒤 오랫동안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는 고대 로마의 무시무시한 의식을 재현한다. 전장에서 맨 먼저 도망친 군인 500명을 10명씩 50개 그룹으로 나눈 뒤 징벌로써 각 그룹에서 한명씩 제비를 뽑아 죽이게 한 것이다. ‘데시마시용’(10분의 1씩 죽이는 것)이 벌어진 것이다. 이 참혹한 처벌을 모든 병사들이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었다.

» 서기 1세기 무렵 로마 폼페이에 있던 검투 노예 양성소 막사. 마당은 훈련장이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는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바다를 통해 해외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남쪽 땅끝 레기움까지 가서 배로 시칠리아로 건너가기 위해 해적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해적들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다로 달아나버린다. 그사이 크라수스의 로마군은 남쪽까지 쫓아내려와 노예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장벽 구축 작업에 돌입한다. 폭 4.5m, 깊이 4.5m 되는 도랑을 동쪽 바다 끝에서 서쪽 바다 끝까지 약 50km 거리에 걸쳐 판 뒤 다시 그 뒤에 높은 장벽을 견고하게 쌓은 것이다. 처음에 이 장벽을 대수롭게 보지 않던 스파르타쿠스는 보급물자가 바닥나면서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이 바다와 장벽에 섬처럼 갇힌 채 겨울에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면 공격에 나섰으나 병력의 3분의 1만 장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결국 크라수스 군대의 공세에 맞서 노예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패배한다. 스파르타쿠스와 분리된 노예주력군은 모두 1만2300명이 살육당하는 패배를 겪는다. 크라수스는 전투 뒤 노예군 가운데 단 2명만이 등쪽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지 않고 정면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것이다.

한편 동쪽 항구 브린디시움을 향해 가던 스파르타쿠스는 외국에 주둔하던 로마군이 이 항구를 통해 이미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크라수스의 주력군과 대혈전을 벌인다. 이 전투 뒤 스파르타쿠스는 페텔리아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추격해온 로마군과 싸우다 숨진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을 위해 무장봉기한 그의 이름은 2천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

» 마르크스. 그를 시작으로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두 스파르타쿠스를 열렬하게 존경했다. (사진/ GAMMA)

1865년 칼 마르크스는 숙제를 하는 딸 제니로부터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스파르타쿠스’와 ‘케플러’라고 대답한다. 스파르타쿠스를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당시 벌어지고 있는 2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외국의 간섭 아래 있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려는 낭만적 애국주의자 주세페 가리발디의 투쟁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해방 문제를 놓고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소식이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아피안의 <로마 내전사>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었네. 매우 가치 있는 저술이야.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가장 훌륭한 인물로 꼽힐 만하네. 위대한 장군(가리발디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이자 고결한 인물이며,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야.”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유럽 사회주의 운동은 스파르타쿠스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편지에서 보인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작은 힌트를 계급투쟁론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은 바로 레닌이다. 그는 이런 논지에 따라 로마 세계를 노예와 지배자 사이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계급투쟁으로 정의한다. 레닌은 <국가>에 이렇게 쓴다.

“역사는 압제를 벗어던지려는 피압박 계급의 지속적인 시도로 채워져왔다. 노예제의 역사는 수십년 동안 지속된 노예해방 전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의 멍에에 대해 진정으로 투쟁하는 유일한 독일의 정당인 공산당이 ‘스파르타쿠스주의자’의 이름을 채용하고 있다. 독일 공산당은 가장 위대한 노예봉기(slave insurrections) 가운데 하나인 2천여년 전의 그 봉기에서 스파르타쿠스가 가장 걸출한 영웅 가운데 하나였기에 그 이름을 채용한 것이다. 전적으로 노예제에 기반한 채 오랜 세월 절대전능한 것만 같던 로마 제국은 스파르타쿠스의 지도하에 무장하고 단합해 거대한 군대로 변신한 노예들의 전국적인 봉기로 충격 상태에 빠지고 치명상을 입었다.”

그 뒤 소련 시대에 이르러 스탈린이 승인한 ‘단계이론’(stage theory)에 따라 로마의 노예 반란은 당대 계급 시스템의 지배를 전복시킨 러시아혁명이나 프랑스혁명과 같은 범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 이론작업에 따라 스파르타쿠스는 본래의 인간주의적 활력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본 측면도 강해진다.

 

[태평천국] “함께 기도하고 모두 밥을 먹자”

천왕 홍수전의 자살로 마감된 태평천국의 꿈… 기독교로 무장한 농민군의 폭발력이 중국을 흔들다

 

“상제(야훼 하나님)를 경배하는 사람은 도망가지 않는다. 모두 함께 밥을 먹자!”


19세기 후반 이민족과 유교 사대부 계급의 오랜 압제와 착취에 시달려온 중국 농민들이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기치에 매혹돼 무장봉기에 돌입한다. 자신들의 나라를 ‘태평천국’(太平天國), 스스로를 ‘성스러운 병사’(성병·聖兵)로 부르는 등 독특한 기독교적 사상과 구호로 무장한 농민군은 엄청난 열정과 폭발력으로 중국 전역을 14년 동안 뒤흔들었다. ‘태평천국운동’으로 기록된 이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16개성 600여 도시가 파괴되고 모두 2천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태평천국은 비록 부패한 청나라 조정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중국을 직접적으로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그 평등과 해방의 슬로건을 현대 중국에 승계하는 데는 성공한다.

 

홍수전, 두번의 과거에 낙방한 뒤…

태평천국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홍수전이 꼽힌다. 청나라 말기 비판적 지식인인 그는 농민과 숯굽는 사람, 하급노동자, 광부, 난민 등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 체제 변혁의 이데올로기와 전략을 제시하는 역할로 이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역사가 전하는 그의 일대기는 대략 이렇다.

» 태평천국군의 진격 모습 상상도. 기독교적 사상과 구호로 무장한 그들은 중국 전역을 14년 동안 뒤흔들었다.
 

홍수전은 1813년 광동성 화현에서 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4살 때 광주에 나가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그 직후 중국에 진출해 있던 개신교도에게서 전도용 팸플릿인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얻어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듬해 다시 두 번째 과거에서도 낙방한 뒤 그는 열병을 앓는다. 이때 40여일을 병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그는 기독교적 이미지와 발상으로 가득 찬 ‘환상’(visions)을 보았다. 여기서 환상은 기독교적인 표현으로서 일종의 꿈 또는 예언적 환상을 가리킨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불만스러운 유교적 현세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기독교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그 이론을 강화해나간다. 그 결과 “세계 만물을 창조한 존재인 야훼(여호와 하나님)를 경배하고, 요마를 격멸해야 한다” “하늘의 상제는 야훼, 그 큰아들은 그리스도, 그 둘째 아들은 자신 홍수전이다”는 등의 이론체계가 세워진다. 동시에 그는 만주족의 청나라를 요마로 규정하는 등 반청의 기치도 선명히 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1844년 야훼를 숭배하는 모임인 상제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홍수전은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는 강남 지역에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해나간다.

드디어 홍수전은 1850년 광서성에서 상제교 신도들에게 봉기를 명령하는 ‘금전기의’(金田起義)을 발의한다. (기의란 의로운 봉기라고 할 수 있다. 금전은 봉기를 위해 모이라고 지정한 마을의 이름이다.) 상제회는 당시 홍수전식의 기독교적 교의를 덧붙여 종교적·사회혁명적 비밀결사로 발전한 상태였다. 이 발의에 대해 2만명이 호응해 봉기에 돌입한다. 봉기군은 엄정한 규율과 높은 사기 그리고 “죽은 뒤 혼은 천당에 올라 영원히 천상에서 복을 누린다”는 ‘천당론’ 등으로 종래의 농민봉기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보인다. 나중에는 봉기군의 전투의식을 높이기 위해 다시 이런 기독교적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현세에 구현된다는 내용의 ‘소천당론’(小天堂論)을 발전시킨다.

»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 얼굴 그림(왼쪽). 태평천국군의 북벌을 그린 연환화(연결식 그림책. 중국식 만화책).
 

이듬해인 1851년 영안주성을 함락시킨 봉기군은 ‘태평천국’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천평’(天平)이라는 연호를 채택한다. 홍수전은 ‘천왕’(天王)이 된다. (야훼 하나님을 황제 격인 천국의 상제로 상정했기에 지상에서는 다시 황제가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왕으로 된 것이다.) 태평천국군은 이듬해인 1852년 북상해 당시 중원에서 가장 큰 도시인 무한을 점령하고, 1853년 2월 중국의 가장 많은 역대 왕조가 수도를 삼는 등 북경과 쌍벽을 이루는 왕도인 남경까지 점령한다.

 

지도자들의 내분에 휩싸이다

이 무렵 태평천국군은 병력 백수십만에 이르는 수준으로 비약적으로 팽창한다. 인근 진강과 양주까지 점령한 태평천국군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일부 병력을 출동시켜 ‘요마세력’인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향해 진격시키기는 했으나 주력군대는 남경에 그대로 머물고 장고에 들어간다. 결국 홍수전 등 지도부는 강남 일대를 평정하면서 내실을 다진다는 명목으로 소극론으로 기울어간다. 이런 소극론은 불과 4만 병력으로 북경을 향해 진격한 북벌군이 연전연승하면서 북경 100km 지점까지 접근했다가 뒷심 부족으로 패퇴하고 마는 사태로 이어진다. 홍수전 등 지도부는 남경을 ‘천경’(天京)으로 삼고 북경의 청나라 조정과 병립하는 형세를 취한다.

» 태평천국운동 당시의 청나라 관군 모습.
 

이어서 태평천국쪽은 지도부 내분에 휩싸인다. 전쟁의 확대에 따라 새로이 정치와 군사 양대 권력을 장악하면서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한 가난한 농민 출신의 동왕 양수청과 다른 지도부 사이의 알력은 결국 북왕 위창휘의 양수청 살해와 그 일가족 학살을 불러왔다. (태평천국은 당시 으뜸인 천왕 홍수전 밑에 지도자 6왕을 두었다.) 다시 북왕 위창휘는 익왕 석달개와 반목하다가 천왕 홍수전에게 제거된다. 익왕은 천왕 홍수전이 홍씨 일가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자 태평천국에서 이탈해나간다. 태평천국의 소극적 전략과 내분을 틈타 그동안 밀리기만 하던 청나라쪽은 반격에 나선다. 점령지를 지속적으로 되찾으면서 전세를 만회해나간다. 나아가 태평천국군은 양자강 지역의 소주·항주를 점령하면서 이 지역에 진출한 서구 제국주의와도 직접 충돌하게 된다. 이에 대해 영국·프랑스 등 서구세력은 북경조약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청조를 도와 태평천국군 공격에 직접 가담한다. 전세는 급격하게 태평천국쪽에 불리해진다. 이전에 양자강 일대를 점령하면서 청나라군을 남과 북으로 양단했던 태평천국군은 이제 도리어 자신의 군대가 식량수송로를 차단당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내몰린다. 결국 1864년 이홍장, 증국번 등 청나라 군대와 고든 등 외국군이 천경을 포위 압박해오자 홍수전은 자살한다.

 

지배계급의 완전 전복을 시도

태평천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중국 역사상 최대의 농민운동: 한편으로 태평천국운동은 과거 농민반란, 농민봉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성격을 띤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태평천국은 그 규모와 파괴력, 인명피해 규모, 국제전적 성격으로 단연 손꼽힌다. 특히 청조 중엽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태평천국운동 시기 인구는 4억5천만명을 넘었다. 이런 실정에서 인적 규모를 나타내는 수치는 당연히 기록적일 수밖에 없다.

(2) 지배계급의 완전 전복을 시도한 본격혁명의 성격: 그러나 태평천국은 종래의 농민반란이나 봉기가 안고 있던 역성혁명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었다. 주도세력의 명확한 계급성, 평등주의적 이상을 천명한 천조전무제도 등은 근본주의적 혁명성을 보여준다. 특히 태평천국의 건국지표라 할 수 있는 천조전무제도는 지주의 토지 몰수와 토지의 균분, 일정액 이상 소득의 몰수와 평등 분배 등까지 규정하고 있다.

(3) 중국화된 기독교 사상체계의 과감한 수립: 홍수전은 수천년 동안 중국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적 지배이데올로기를 철저히 파괴하지 않으면 근본적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파악했다. 중국의 가치체계를 급진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외부의 전혀 다른 이론체계, 사상체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근거를 전혀 다른 사유체계인 기독교적 교의에서 발견한 뒤 그의 이론작업은 더욱 근본주의적 변혁성을 갖추게 됐다.

(4) 중국 공산혁명으로의 승계: 태평천국은 현대 중국 공산혁명에 사상적·전략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51년 태평천국 100주년 기념 사설에서 “선진계급의 지도가 없는 구식 농민혁명의 최고형태”라고 규정했다. 비록 현대적 의미의 노동자 계급의 선진적인 사상과 지도라는 측면을 충족시킬 수 없었지만, 당대의 조건에서 볼 때 최고의 바람직한 혁명상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태평천국의 성격은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5) 여성해방의 맹아를 선보임: 태평천국 치하에서 구시대와 비교해 가장 혁명적으로 바뀐 영역으로 여성의 지위 변화를 꼽는 견해가 나온다. 특히 여성 억압을 상징하는 봉건적 잔재인 전족의 폐지라든가, 과감한 여성관리의 채용 등의 조치도 주목할 만하다. 또 천경 등 태평천국 지배 지역에서 여성들은 청조 지배 지역의 다른 도시와 달리 말을 타고 활보하는 등 해방공간적 상황을 실현했다. 여성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외국인에 대한 스스럼없는 태도 등을 기록한 외국인의 증언도 있다. 이런 여성해방적 성격은 이후 현대 공산혁명 이후의 여권 향상과 적지 않은 연관성을 지닌다.

(6) 초기 혁명의 진정성 상실: 태평천국군은 남경 점령 직후 병력만 백수십만명으로 확대된 전성기 상황에서 중대한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총력으로 북경을 점령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특히 4만명의 소수 병력만 파견했던 북벌군이 북경 인근까지 승리하면서 육박해갔던 점을 고려하면 주력군을 동원한 시의적절한 총력전을 펼쳤더라면 북경을 어렵지 않게 점령하고 새로운 국면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을 늦추는 전략적 실수가 결국 청나라 조정에 반격을 위한 시간적·물질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전세는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기울어갔던 것이다. 나아가 남경에 그대로 머물면서 종래의 역성혁명 세력과 같은 타락상을 보였다는 설도 주목할 만하다.

 

기독교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현대 중국

(7) 치명상이 된 지도부의 내분: 초기 태평천국은 천왕 홍수전 밑에 6명의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가 각각 왕으로 포진한 채 서로 협조하고 상승효과를 극대화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내분에 따른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3명이 죽거나 이탈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혁명이 성공하기 어렵다.

150년 전 중국 대륙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억압받는 가난한 민중들이 홍수전의 주장에 호응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태평천국의 봉기에 열렬하게 합류했다. 비록 홍수전식으로 각색되거나 변형되기는 했어도 대단히 기독교적인 교의에 그토록 많은 하층민들이 호응한 셈이다. 그런데 현대 중국은 어떠한가? 태평천국의 혁명이론적 자양분만 계승되고 기독교적 성격은 완전히 사라졌다. 뭔가 이상하고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노아-모세-그리스도-홍수전


» 태평천국군이 입었던 군복. ‘성병’, 성스러운 병사라는 한자가 선명하다.

홍수전의 기독교적 이론작업은 24살 때 열병 기간 중의 ‘환상’으로부터 시작된다. 환상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1) 천상계를 방문해서 흑의를 입은 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세계 만물을 창조한 나를 경배하라. 귀마(鬼魔)를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요괴를 죽이는 검과 인장을 주었다.

(2) 홍수전은 중년의 사람과 함께 사악한 신을 찾아 베어서 멸망시켰다. 그는 이 중년의 사람을 큰형이라고 불렀다. 흑의 노인은 공자를 힐책했다. 공자는 부끄러워하며 죄를 참회했다.

(3) 환상을 보는 동안 요마는 새나 사자 등으로 변신하면서 그에게 덤볐지만, 노인에게서 받은 인장으로 막자 물러났다.

여기서 흑의 노인은 여호와 하나님, 중년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요마는 사탄, 인수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태평천국의 공식 역사서인 <태평천일>은 이런 식으로 성경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당초 천부상주황상제는 6일 만에 천지, 산해(산과 바다), 인물을 조성해 7일째에 완공했다. 상고의 때 온 천하는 모두 황상제의 은전에 감사할 줄 알고 있었다. 노아 때에 이르러 세인(세상 사람)은 사마에 유혹돼 세계를 더럽혔다. 황상제는 대로해 40일 낮과 40일 밤의 큰비를 내렸고, 홍수는 세상 사람을 침몰시켜 거의 없애버렸다. …황상제는 대로해 내려와 이스라엘을 구해 이집트국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게 하고… 황상제는 십관천조(十款天條·십계명)를 지었다. …이때 다행히도 구세주 천형 기독이 있었다. …황상제의 태자인데 강생해 몸을 버려 세상 사람을 대신해 속죄하기를 원했다. …태평진주(홍수전)는 또한 천부, 천형의 막대한 은애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주의 나이 25살 때인 천유년(1837년) 3월 초하루 자시에 무수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런 식으로 노아-모세-그리스도-홍수전이라는 구세주의 계보를 만들고 있다.

한편 홍수전은 국정지표 <천조전무제도>에서 ‘예배’조를 두어 ‘관리와 인민은 예배일마다 성경강독을 듣고 진심으로 천부를 경배한다’고 의무화하고 있다.

 

[마르크스] 유령은 지금도 세계를 배회한다

20세기 최대의 거대담론을 제공했던 마르크스… ‘신념’은 빛을 잃었지만 ‘비판이론’으로서는 건재

 

소련이 붕괴한 뒤 현실 사회주의를 미래의 이상향으로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 지난 10여년 동안 사회주의는 ‘죽은 개’처럼 취급받아왔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저 ‘비판’ 세력이기는 했지만,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로 대변되는 공산주의는 전 유럽을 배회하는 공포의 대상(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유령’)이었다. 그 유령이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현실이 됐다. 그리고 1991년 이 현존 사회주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기며, 경멸 속에서 또다시 죽어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 현실을 빗대어 거꾸로 이렇게 표현했다.


“마르크스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지만…

하지만 마르크스 이후 누구도 이 마르크스의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난 150여년의 역사를 통틀어 마르크스만큼 사람의 골치를 썩게 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이론에 동의하는 사람에게도,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마르크스는 똑같이 끊임없는 논쟁 대상이었다. 그의 이름을 붙인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종교보다도 더 많은 순교자를 냈고, 가장 많은 ‘안티’를 만들어냈다. 그 이단과 아류의 이름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책 한권은 넉넉히 메울 만큼 무수한 가지가 자라났다. 역설적으로, 그 수다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을 읽은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전부 독파한 사람들만큼이나 드물겠지만 말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보고한 산파였다면, 마르크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자본주의의 사망을 진단한 암 전문의였다. 비록 환자가 의사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있지만, 마르크스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선언했다.

» 마르크스 무덤 앞 동상. 런던 변두리에 있는 그의 묘지는 언제나 쓸쓸하게 관광객을 맞는다. (사진/ 고경태 기자)

“이 시스템은 순환상에 문제가 있다.”

“치료하는 게 불가능하다. 선천적 질병인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이 환자는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게 인류를 위해 좋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들의 진단이나 희망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독일 라인주 트리어에서 유대인 기독교 가정의 7남매 가운데 세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해 법률,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841년 예나대학에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1842년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 신문 <라인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이 신문의 편집장이 됐다. 이 신문은 2년 뒤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간됐다. 그 직후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위인 W. 예니와 결혼하고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한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적 언론에 기고하고 사회주의 내용의 저작에 힘을 쏟는다. 그는 이어 <독불연보>를 출간한 것을 계기로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된다.

1845년 벨기에 브뤼셀로 간 그는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는 한편 기고와 저술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노력 속에서 1844년 <경제학 철학 소고>와 <헤겔법 철학 비판서설>을 썼다. 그리고 1845년 프리이드히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한다.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처음으로 유물사관의 주장을 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47년 그는 무정부주의자 P. J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같은 해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여기에 가입해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 명의로 집필한다.

 

지독한 물질적 곤궁… 엥겔스가 도와줘

한편 1848년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 파리, 쾰른 등지로 가서 직접 혁명에 참가했으나 그곳들의 혁명은 좌절하고 만다. 그에게는 잇따라 추방령이 내려진다. 그는 다시 런던으로 망명해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칩거한 채 저작에 몰두한다. 그동안 그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곤궁에 심하게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1851년부터 미국 <뉴욕 트리뷴>의 유럽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는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받았다. 이 시기 그에게 닥친 고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자식 가운데 5명이 빈곤과 관련된 질병이나 기아로 죽어갔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왼쪽). 그는 마르크스의 평생의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러시아혁명 시기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는 볼셰비키 혁명군. 현실 사회주의는 러시아혁명으로 현실 권력을 장악했다.
 

마르크스는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 비판>을 간행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여기에 참여해 프루동, 라살, 바쿠닌 등 무정부주의 계열의 이론가들과 논쟁을 벌인다. 1867년 함부르크에서 그동안의 연구를 집대성한 대작 <자본론>의 제1권을 출간한다. (2권과 3권은 그가 죽은 뒤 엥겔스가 각각 1885년과 1894년에 잇따라 출판한다.) 처음에 그가 제4권으로 구상했던 부분은 K. 카우츠키에 의해서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형태로 출판됐다. 말년에 마르크스는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마지막 몇년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내야 했다. 그 뒤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장녀의 죽음으로 격심한 충격을 받는다. 결국 그는 1883년 3월 런던 자택에서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치이론가이자 역사학자였으며, 무엇보다 혁명가였다. 언론인 생활도 병행했으며, 법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제대로 된 수입을 보장해주는 직업을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그토록 경멸했던 자본가 계급에 속한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먹고살아야 했다. 그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호소했지만, 그것이 노동조합 운동으로 되는 것은 가차없이 비판했다. 역설적으로 마르크스는 정치적 혁명을 믿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8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거의 정치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 누가 정권을 잡았느냐는 그에게 별로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었다. 임노동 관계라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혁명 없이는 모든 변화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혁명을 지향하는 다른 사상들을 ‘공상적’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최대의 거대담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 역사의 전체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히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소유 관계에 따라 각 계급들을 구별하고, 계급들 사이의 갈등을 핵심적인 사항으로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투쟁은 계급들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구조로부터 자라나온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이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성격을 지닌다.

“사회를 그 뿌리로부터 규정하는 힘은 무엇인가?”

 

구조주의, 민족사회주의, 네오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요약판인 사적유물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역사를 진전시킨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예컨대 맷돌을 돌리던 시대의 생산관계, 즉 봉건시대의 영주와 농노라는 계급관계로는 증기기관차가 사회의 주요 생산수단이 되는 시대를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증기기관차의 시대는 거기에 맞는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전환의 순간을 그는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레닌. 그는 인류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한편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은 사회주의 종주국이 됐다. 이 소련의 국가철학은 공식적인 마르크스주의로 작동하고, 이런 소련의 주장에서 이탈하는 것에는 ‘수정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1950년대 후반 중-소 분쟁 때 공산화된 중국이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수정주의 제국’이라고 부를 때까지는 이런 식의 권위가 유지됐다.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인 임금노동과 사적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조세나 국가정책을 통해 그 모순을 완화하는 체제를 지향했다. 결국 그 길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의 운명은 더욱 복잡해진다. 각각의 특수성 때문에 주도자의 이름을 따서 ‘모택동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하는가 하면, 동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는 ‘민족사회주의’라는 명칭을 얻은 조류가 힘을 얻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소련의 정통 논리를 거부하고 마르크스의 원전에 충실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네오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가운데 좌파적 성향은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로 분화돼갔다.

 

가장 치명적인 ‘소련 붕괴’ 사태

1968년 유럽에서의 학생운동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종래의 거대담론들에 대한 폐기 선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나 계급투쟁과 같은 추상적이고 대규모적인 개념과 이론을 신뢰하지 않게 됐다. 미시적이고 세부적인 것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주목이 이루어졌다. 칼 포퍼의 <역사주의의 빈곤>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바로 이같은 미시이론에 대한 역사철학적 근거로 각광을 받았다.

이런 조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점차 급격하게 설 자리를 잃어갔다. 승리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이 시대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표현했다. 더 이상의 새로운 혁명이 없는 시대, 영속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태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전 단계인 현실 사회주의의 국가인 소련이 붕괴한 것이다.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은 사실상 관료자본주의였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이 현실의 실패는 그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렇게 20세기를 관통했던 혁명의 시대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썰물처럼 밀려갔다.

그 결과 지금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가장 과감한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됐다. 심판으로서의 세계사라는 19세기의 신념은 빛을 잃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과제이지만 말이다.

 

마르크스 대 무정부주의자

 

» 제3차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을 선포하는 포스터.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그 유명한 구호로 끝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Working men of all of countries, unite!)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단결은 쉽지 않았다. 1864년 결성된 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첫 국제적 조직인 제1차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의 불화 끝에 결국 10년 만에 해체돼야 했다. 두 사람은 이런 문제를 놓고 갈라졌다.

‘자생적인 대중봉기인가?’

‘조직화된 혁명인가?’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던 프루동의 영향을 받은 바쿠닌은 대중들의 자발적인 ‘자유의지’에 기초를 두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꿨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조직’과 ‘과학’에 중심을 두었다. 나아가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구조 속에 내재된 구조, 바꿔 말해 생산관계라고 보았다. 특히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놓고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했다. 바쿠닌이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변혁의 중심적 주체의 하나로 본 데 반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부터 이들을 ‘위험한 계급’이라면서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사람은 대중중심주의였던 데 반해, 다른 한 사람은 엘리트 지식인의 역할을 지도적인 것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문화적인 취미에서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대립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인터내셔널을 해산하고 각각의 길을 가기에 이른다.

두 사람 사이의 이론적 대립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고’를 더 조직화하고 대중을 목적의식적으로 지도하는 공산당을 표방한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승리로 끝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 또는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연대는 이후 제2차, 제3차 인터내셔널의 결성과 붕괴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오히려 더 많은 분화와 갈래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체 게바라] 사랑과 감동을 그대에게!

20세기가 낳은 가장 인간적인 혁명 게릴라의 한 사람인 체 게바라… 죽어서 영원한 전설을 남기다

 

한 백인 중산층 집안의 소년이 우연히 길에서 사귄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친구네는 단 하나의 침대만 있는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었다. 얼마나 가난한지 겨울에도 난방은커녕 신문지나 넝마 조각으로 추위를 가리려 할 정도였다. 사람이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소년의 가슴을 울렸다. 그 뒤 소년은 자주 굶주린 친구들이나 광부의 아이들, 호텔 노동자의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웠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소년의 집은 해방공간과도 같은 곳이 돼갔다. 성장해서 의과대학을 졸업할 무렵 소년은 선배 한명과 함께 500cc짜리 모터사이클 한대로 라틴아메리카를 종단하는 여행에 나선다. 조국 아르헨티나를 출발해 칠레,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콜롬비아를 거쳐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1만km를 주파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역사를 온몸으로 끌어안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존의 나환자와 라틴아메리카

195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는 전통적인 과두지배 계급의 독재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짓눌려 고통받고 있었다. 지나는 나라마다 민중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소년은 이 여행을 겪으며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라고 확신한다. 이 라틴아메리카 종단여행에서 소년 일행은 운명적인 한 만남을 경험한다. 그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 쿠바와 콩고, 볼리비아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그는 21세기 세계시민의 가슴에 살아 있다. (사진/ SYGMA)

“아마존 유역에 있는 한 ‘치유 불가능한’ 중증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찾아 들어간 두 사람은 열심히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봤다. 소년은 나환자 한명을 설득해 오른쪽 팔꿈치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집도하게 된다. 이 인디오 나환자는 온전한 살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채 나머지 신체도 계속 나병균에게 야금야금 파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곪은 상처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데다 높은 열까지 겹쳐 이미 다른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내린 뒤였다. 그러나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신경이 살아 있으니까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고 말아요.’ …결국 수술은 성공하고 환자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수술 소식을 듣고 감동한 나환자들은 소년의 24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조촐한 댄스파티를 열어준다. 소년은 댄스파티에 참석한 인디오 처녀들과 각각 24번씩 포옹한다. 어떤 처녀는 나환자가 아니었지만 어떤 처녀는 나환자였다. 인디오들은 나환자일지라도 가족과 헤어지지 않은 채 함께 살려 했다. 그 때문에 감염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인디오들은 그런 삶을 피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 가족이기라도 하듯이 이 모든 이들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20세기가 낳은 가장 인간적인 혁명게릴라의 한 사람인 그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그런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1952년 6월 아마존 나환자촌의 경험은 그 뒤 게바라의 삶을 결정짓는 중대한 상징의 모티브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바라, 그는 그때 나환자들을 끌어안았던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때 오직 수술만이 그 나환자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의 불행과 모순은 미국 제국주의와 과두지배 계급의 독재를 무너뜨려야 해결된다고 결론지었다. 의사 출신의 혁명가였던 게바라에게 라틴아메리카를 살리는 수술은 바로 무력혁명이었으며, 그 수술의 도구는 게릴라 전술이었다.

» 쿠바에서 게릴라 투쟁을 벌일 때 피텔 카스트로(왼쪽)와 함께한 모습. (사진/ SYGMA)

혁명가이자 게릴라로서 게바라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 시기를 거치고 있다.

(1) 쿠바혁명 동참: 1955~59년

(2) 혁명정권의 유능한 행정가이자 게릴라 전술의 이론가: 1959~65년

(3)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 실험: 1965~66년

(4) 라틴아메리카 동시혁명 시도와 그 좌절: 1966~67년

놀라운 능력과 지성, 그리고 유머

게바라가 맨 처음 본격적으로 맞닥뜨린 혁명은 쿠바혁명이다. 그는 1955년 멕시코에서 쿠바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혁명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게바라는 가난한 사람과 약자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 대해선 냉철할 정도로 무력투쟁론에 집착했다. 게바라는 모터사이클 여행의 동료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기도 없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형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또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쓴 것도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해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게바라가 베껴쓴 파블로 네루다의 시 ‘위대한 송가’.

당시 카스트로 형제는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병영을 습격한 이른바 ‘몬카바 병영 습격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됐다가 풀려나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제는 동지들을 규합해 다시 쿠바로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바티스타를 전복시킬 계획이었다.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렸다. 그 뒤 두 사람은 게바라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속시켜나간다.

멕시코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카스트로의 무장혁명군 82명은 드디어 1956년 11월 그란마(스페인어로 할머니라는 뜻)라는 이름의 하얀색 요트를 타고 쿠바로 출항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그란마호가 상륙 예정지로 돼 있던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해안에 좌초하고, 쿠바 정부군에도 발각돼 공격받는 바람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상당수 대원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붙잡힌 것이다. 결국 살아남은 10여명이 정글로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쿠바 민중들은 독재적인 바티스타 정권 대신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 결과 혁명군은 곳곳에서 잇따라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간 끝에 결국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다.

쿠바혁명 성공 뒤 게바라는 전권대사, 국립토지개혁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혁명정권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특히 그는 직관력과 학습, 두 가지를 무기로 경제 분야의 주요 현안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먼저 게바라는 온건파와 권력을 분점하는 상황 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던 대토지 사유제를 종식시키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와 함께 각종 개혁정책의 추진과 집행에 속도를 가했다. 또 미국이 쿠바의 새 정부에 대해 곧 경제봉쇄 등 적대적 정책을 취할 것으로 보고 치밀하게 대책을 세워나갔다. 미국이 쿠바의 주수출품인 사탕의 수입을 격감시키거나 중단하고, 쿠바에의 원유 공급을 거부하고, 미국산 공산품의 쿠바행을 막을 것에 대비해 소련 등 공산권과의 교역 루트를 확보했다.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이자, 게바라에 대한 미국의 공세는 더욱 강화됐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은 이렇게 보도하기조차 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현재 쿠바의 얼굴이자 목소리이며 정신이다. 그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혁명을 위해 뽑은 단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바라는 두뇌이다. 그는 이 삼두마차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여자들을 홀리기에 딱 좋은, 우수가 묻어나는 미소를 입꼬리에 흘리면서 체 게바라는 냉정하고도 치밀한 방식으로 쿠바를 이끌고 있다. 놀라운 능력과 지성, 그리고 세련된 유머로서.”

 

다시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로…

쿠바혁명을 수호하는 이런 활동과 함께 게바라는 1960년대 동안 각종 연설과 저술 등을 통해 혁명이론을 체계화시킨다. 그 결과 몇몇 유명 저작들이 생산된다. <쿠바의 인간과 사회주의>(1965), <게릴라전>(1960) 등이 이런 작품들이다.

» 게바라의 볼리비아 캠페인이 실패한 지 12년 뒤 다시 게릴라 투쟁을 바탕으로 니카라과 혁명이 성공한다. 니카라과 혁명을 상징하는 벽그림.

이렇게 분주하면서도 다양하게 쿠바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1965년 4월 갑자기 공석에서 사라진다. 그가 찾아간 곳은 아프리카의 콩고(옛 자이르), 사회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이 벌이는 내전에 직접 몸을 던지고 나선 것이다. 그는 쿠바 게릴라 출신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콩고의 좌파 세력인 파트리스 루뭄바 여단의 조직 결성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루뭄바의 계승자들이 쿠바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는 바람에 결국 큰 성과 없이 이 아프리카 실험을 마감한다.

게바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땅은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나라 볼리비아, 1966년 가을의 일이다. 볼리비아는 안데스산맥과 아마존강 사이에 자리잡았고 그 주위에 페루,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삥 둘러싸고 있다. 이론적으로 여기서 혁명이 성공하면 주변 국가들로 진출할 기회와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된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인을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 그리고 일부 유럽인까지 포함된 국제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이 게릴라 전쟁은 실패하고 만다. 1967년 10월 볼리비아 특수군에 포위된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는 괴멸적 피해를 입고, 게바라 자신도 부상당한 채 붙잡힌다. 볼리바아군은 곧 그를 처형한다.

15년 전 게바라가 아마존 나환자촌을 떠나기 전날 나환자촌의 인디오들은 작별인사를 해준다며 악대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를 찾아왔다.

“아코디언을 타는 사람은 오른손에 손가락이 하나도 남지 않아 손목에 대나무를 이어놓았더군요. 그 대나무 손으로 연주를 하는 거예요. 노래를 맡은 가수는 장님이고요. 다른 이 대부분도 이 지방 나병의 특징인 신경계 이상에 따라 모두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어요. 그런 이들이 호롱불에 의지해 연주를 이어가는 것이지요. …아마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게바라는 죽어가며 이 나환자의 인디오들을, 그들이 선물한 선율을 마지막으로 기억했을까? 그는 죽어서도 ‘전설’이 됐다.

나는 해방자가 아니란다

» 볼리비아군에 처형당한 게바라의 모습. 1967년 10월의 일이다.

“나는 해방자가 아니란다. ‘해방자’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민중을 해방시키는 건 그들 자신이란다.”(1959년 쿠바혁명 성공 뒤 한 소년 전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2년이 걸린다는 그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에 시에라의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굶어죽고 말 걸세. 이건 의사로서 자신 있게 하는 말일세. 그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일일세.”(혁명 초기 온건파 행정관료들이 제시한 프로그램을 비판하며)

“그것(임금을 노동생산성과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자극제이다. 이 자극제 대신에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할 수 있는 윤리적 자극제로 대체돼야 한다.”(프랑스의 좌파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샤를 베틀랭과 토론하며)

“학문에 취미가 없다면 손을 쓰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야채밭에서 일을 해라.” (게릴라 출신으로 행정부에서 일하게 된 부하들을 교육하면서 징벌 조치를 내리며)

“우리의 유일한 자본은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있는 무장한 민중입니다. 우리는 이 자본으로 우리의 토지개혁을 실행할 것이며, 그 힘을 심화할 추진력으로 산업화의 길에 진입할 것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선 우리를 분열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을 각각 커피, 구리, 석유, 주석, 사탕수수 생산국으로 나눠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시장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킬 더 낮은 가격으로 한정 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1960년 교육시의 건설에 참여한 국제여단을 치하하는 연설에서)

“가난한 나라의 인민들이 피와 땀이 마르도록 생산한 1차 상품을 국제시장 가격으로 팔고, 최신식으로 자동화된 거대한 공장들이 생산한 기계들을 국제시장 가격으로 사는 일을 과연 호혜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하고 있다고 결론내려야 할 것입니다.”(1965년 2월 알제리에서 열린 제2차 아프리카-아시아 세미나에서)


[헬렌 켈러] 헬렌 켈러의 아름다운 투쟁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장애를 딛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인간적으로 증명해내다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한 아기가 심하게 앓고, 결국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 모든 게 깜깜하고, 조용하고…. 그래서 밤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왜 낮이 이렇게 더디게 오는 거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낮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아프기 직전까지 막 말을 배우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껴가던 아기에게 갑자기 세상이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터미네이터’와 헬렌 켈러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보면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닌 로봇들이 잇따라 등장해 인간을 주눅 들게 한다. 아널드 슈워제네거로 표징되는 가공할 완력과 초능력을 자랑하는 첫 번째 터미네이터로부터, 형상기억합금으로 재탄생한 더 빠르고 강력한 두 번째 터미네이터, 그리고 어떤 기계라도 만능으로 다루고 지배하는 여성형 로봇인 세 번째 터미네이터 등 날로 업그레이드되는 이 인조인간 앞에서 우리 인간은 자꾸 초라해지고 왜소해지기만 한다.

이런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인간은 그 존엄성을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줄기 배아세포의 복제라는 첨단 과학에 따라 인간의 장기가 대량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조차 복제될 수 있는 시대가 밀어닥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복제 가능의 시대에서 인간은 필요하면 기계의 부속품처럼 자신의 신체 일부나 거의 전부를 갈아끼우는 게 가능한 존재로 재규정된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귀 하나, 눈 하나의 소중함은 간단히 사라진다. 외형적으로 인간은 그런 복제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부속품을 갈아끼움으로써 마치 신체 이상의 한계라든가 수명 제한의 한계를 간단히 극복하는 것처럼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착시현상이 아닐까? 실제로 이런 식으로 인간이 재규정되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닐까?

헬렌 켈러, 태어나서 19개월 만에 뇌척수막염(또는 성홍열, 수막염)으로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을 모두 한꺼번에 상실하는 3중 장애의 고난에 빠졌던 인간, 이렇게 세상이 가없이 어린 자기를 갑자기 내팽개쳐버리는 절대 절망 속에서 처절한 노력으로 아주 힘들고도 느리게, 그러나 마침내 성공적으로 그 닫혀버린 문을 열어낸 인간,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비장애인도 해내지 못한 인간의 존엄을 증명해낸 인간…. 개인적으로 지난 14개월 동안 역사 인물에 대해 나름대로 읽고 생각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인간적으로 증명해낸 인물이 바로 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특히 그가 그런 3중 장애를 딛고 일어선 뒤 쓰고 말하고 일함으로써 쉼없이 다른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되새기면 그의 독특한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대단히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헬렌 켈러의 업적이랄까, 그의 활동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육체적 투쟁: 자신에게 닥친 3중 장애의 극복

(2) 사회적 투쟁1: 장애인에 대한 당시의 편견과 오해와 맞섬

(3) 사회적 투쟁2: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도 맞섬

(4) 사회적 투쟁3: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치활동 모색과 참여

 

그는 어떻게 세상과 소통했는가

1880년부터 1968년까지 헬렌 켈러가 88년 생애를 다 바친 이 네 가지 투쟁은 결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헬렌이 맞닥뜨려야 했던 세상은 오늘날과 달리 아주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시각-청각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편견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이전에 시각과 청각이 손상돼 언어장애까지 갖게 된 사람이 살아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대다수가 유아기 때 혈육에게 살해됐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일은 지구 곳곳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눈이 먼데다 귀까지 들리지 않은 사람은 괴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장성하기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곤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눈이 먼 아이들을 산꼭대기로 끌고 가 굶겨 죽이거나 산짐승들에게 잡아먹히게 내버려두었다. 다른 고대 사회에서도 눈 먼 아이들은 노예나 창녀로 파는 일이 흔했다. 동양에서는 으레 창녀가 됐으며,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에게 버림 받거나 구걸하며 연명해야 했다. 시각장애 하나만으로도 이런 악행의 피해를 받을 지경이었으니, 거기다 귀까지 들리지 않는 2중 장애인들은, 다시 거기서 말까지 하지 못하는 3중 장애인들은 어떠했을지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 88년간 헬렌 켈러는 자신에게 닥친 3중의 장애와 모든 편견에 맞서 싸웠다.사회활동을 하는 헬렌 켈러의 모습.

이 암흑의 시대에 인간은 이런 표현을 마구 써댔다.

‘원죄의 대가’ ‘어둠의 상징’…. 유대인은 <탈무드>에서 ‘살아 있는 시체’라는 표현까지 썼다. 거기서 더 나아가 ‘산 채로 묻힌 시체’를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일조차 흔했다. 미국에서도 그런 장애가 마치 성병과 관련이 있다는 식의 무지와 오해 때문에 헬렌 켈러가 기고하는 것을 기피하는 여성잡지도 있었다.

헬렌의 장애극복 과정은 또 어떠한가?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이 다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선생님인 애니 설리번과 함께 기울인 노력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1) 촉각만으로 만나는 세상: 오로지 촉각만으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촉각이 곧 눈이요, 귀요, 입인 것이다.

(2) 글자도 모르는 단계: 글자를 손바닥에 써준다. ‘인형’ ‘과자’ ‘엄마’…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 하다가 나중에 알고 글자를 스스로 흉내내서 쓸 수 있게 된다.

(3) 머리 쓰는 법 가르치기: 나무 구슬이 들어 있는 상자와 유리 구슬이 들어 있는 상자를 가져다가 실에 나무 구슬 2개를 꿰고 다음에 유리 구슬 1개를 꿰어서 헬렌의 손에 쥐어준다. 헬렌은 처음엔 나무 구슬만 꿴다. 그걸 다 빼내고 다시 제대로 꿴 다음 만져보게 하고 다시 하게 한다. 그 다음에는 헬렌이 정확하게 한다. 그러나 매듭을 묶지 않으니 다 빠져나가버린다. 그 다음에는 스스로 매듭을 묶었다.

(4) 포크 사용법 가르치기: 손으로만 먹고 포크를 쥐어주면 내던지는 것을 계속 다시 쥐어주는 식으로 해서 성공한다. 음식은 포크로 먹는 것이다!

(5) 단어에 대한 이해와 추가 학습 열망: 사물과 단어의 연관성을 깨닫는다. 펌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우유와 다른 물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장면이 영화 <기적은 사랑과 함께>에 감동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때부터 단어를 본격적으로 배워나간다.

(6) 점자 공부: 손으로 써서 알게 된 알파벳과 단어를 점자로 바꿔 인식하게 한다. 그 결과 올바른 문장을 쓸 수 있고, 자기가 쓴 글을 고칠 수 있게 됐다.

» 어린 시절의 헬렌 켈러(왼쪽).LP음반의 노랫소리를 손가락의 촉각으로 느끼는 모습(오른쪽).

애니 설리번의 인내와 노력이여

(7) 수화 알파벳 익히기: 손으로 알파벳을 표현하는 수화 알파벳을 익히게 한다. 헬렌이 스스로 알파벳을 수화로 표현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한편, 헬렌이 다른 사람의 손을 만져서 그 알파벳을 알아내도록 가르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화 알파벳으로 서로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촉각만으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단계다.

(8) 발음교육: 이것이 가장 어렵고도 가장 극적인 대목이다. 손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만져서 입술의 모양과 움직임, 혀의 위치, 목젖의 상태와 움직임 등을 느끼도록 한 뒤 그걸 그대로 흉내내서 소리를 내도록 한다. 보거나 듣지도 못하고 오직 촉각만으로 발성기관의 모든 것을 느껴서 그것을 흉내내도록 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재현하는 처절한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재현한 소리는 보통 사람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한 단어를 발음하는 것을 배우는 데 하루가 걸리기도 했다. 절망해서 울음을 터뜨린 적도 많다. 어쨌든 발음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 헬렌 켈러의 생이를 그린 영화<운명을 이긴 사람>에 직접 출연한 헬렌 켈러(손든 사람).

(9) 점자로 독서: 지식의 극대화·다변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헬렌 켈러는 1880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남군 퇴역 대위이자 면화농장주로서 주간지를 발행하는 지방 언론인이기도 했다. 생후 19개월 만에 병을 앓고 살아났으나 3중 장애에 빠진다. 그 뒤 거의 의사소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난폭하고 제멋대로인 생활을 한다. 접시를 깨고, 등불을 부수고, 다른 사람이 먹고 있는 접시에 담긴 음식을 손으로 휘젓고, 할머니를 꼬집어 내쫓고, 광문의 열쇠를 잠가버리고….

 

사회주의에 경도… 나치즘 반대 활동 벌여

그러다가 전화기의 발명자이자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권고로 장애인 특수교사를 가정교사로 두게 된다. 헬렌 켈러는 이 특수교사인 애니 설리번의 인내와 노력, 전문성 있는 교육으로 세상과 재소통하는 데 마침내 성공한다. 그 결과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거쳐 하버드대학의 여자부 래드클리프대학을 졸업한다. 그 뒤 자신처럼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서 온 생애를 바친다.

당시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장애인 교육시설과 교육방법의 개선에 지원해줄 것을 호소한다. 이를 위해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 국가의 순회 강연에 나서고 다양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순회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위해 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39개국을 방문했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세계를 순회하며 전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 위문하고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에서 ‘헬렌 켈러 국제상’이 생겨났다. 건강이 나빠진 뒤 말년에는 명상과 기도 생활을 하다가 1968년 숨진다. 정치적으로 헬렌 켈러는 사회주의에 깊이 경도됐으며, 전쟁과 나치즘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좋은 것은 가슴의 느껴질 뿐"


» 헬렌 켈러의 기념우표.그는 인류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다.

“인생에 과감한 도전이 없다면 그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에서 안전에 집착하는 것은 미신에 집착하는 것과 다름없다. 안전이라는 것은 자연상태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대신 다른 쪽 문 하나가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닫힌 문만 바라보고 우리를 위해 다른 쪽에 새롭게 열린 문은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다만 가슴으로 느껴질 뿐이다.”

“친구와 어둠 속을 함께 가는 것이 혼자 밝음 속을 가는 것보다 낫다.”

“나는 위대하고 고상한 일을 완수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작은 일을 바로 그렇게 위대하고 고상한 일인 것처럼 완수해내는 것이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즐거움을 느껴본 것이라면 결코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우리가 깊이 사랑한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우리 삶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다른 사람의 삶에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 나름대로 경탄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 심지어 어둠과 침묵조차도 그렇다. 그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기운을 내시게나. 오늘의 실패를 생각하지 말고 내일 찾아올 성공을 생각하시게. 어려운 과업을 세웠군. 하지만 참고 견디면 성공할 거야. 난관을 극복하노라면 기쁨이 찾아오나니.”

“지식은 사랑이며 빛이며 비전이다.”

“비관주의자치고 행성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 있는가? 인간정신을 위한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 있는가?”

“볼 수 있으면서도 비전이 없다면? 끔찍한 일이다.”

“과학은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나쁜 것-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치료하는 방법은 찾아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말은 내게 깊은 위안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세상에 즐거움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 용기인지 무엇이 인내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더 테레사] 세상에 사랑을 전염시키다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섬긴 ‘20세기 성녀’ 마더 테레사

에피소드 1: 어느 날 그가 콜카타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몸을 굽혀 그의 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젊은이가 말했다. “오늘이 내 결혼식날입니다. 지난날 걸식을 하다가 굶어죽게 됐을 때 나를 데려다가 간호해주고 치료해주셨어요. 그래서 몸이 낫고 새 생명을 얻었어요. 그 뒤 구두닦이가 되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됐어요. 마침내 오늘 결혼까지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착한 일을 한 때는?

» 세상에 사랑을 전염시킨 마더 테레사. 그의 활동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성을 띤 채 계속되고 있다.

에피소드 2: 나병과 피부병의 권위자인 센 박사는 큰 병원에서 정년퇴임한 뒤 그를 찾아왔다. 나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살려 당신을 돕고 싶다고. 보수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고. 센 박사는 마침내 그와 함께 콜카타에서 가장 가난한데다 가장 기피되는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합류했다. 편안히 여생을 즐기며 살아도 될 의사가 빈민굴에서 남은 능력과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에피소드 3: 스위스의 보르슈트라르트 부부는 그가 하는 일을 알고 나서 가난한 인도의 어린이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했다. 이미 부부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었지만, 계속 아이들을 품어나갔다. 처음에는 사비타라는 심리장애가 있는 여자아이를, 그 다음에는 네팔에서 태어나 콜카타에서 방황하던 마야라는 7살짜리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그 뒤 다시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아이를, 그 다음에는 임신 중 수면제 복용으로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를 입양했다. 마지막으로 부부는 인도 산중에서 사고를 당해 손과 발을 모두 절단한 쿠마리라는 소녀를 입양한다.

에피소드 4: 종교적인 오해로 적의를 품게 된 힌두교 학생들이 떼를 지어 그가 활동하는 장소로 몰려왔다. 금방이라도 폭력사태나 파괴행위가 벌어질 듯한 상황이었다. 학생들의 지도자 격인 한 학생이 그와 동료 수녀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들어와 둘러보았다. …한참 뒤 밖으로 나간 그 학생은 동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을 여기서 쫓아낼 수는 없다. 단, 하나의 조건, 만일 여러분의 어머니나 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매일 이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들을 쫓아내도 좋다.” 학생들은 말없이 돌아서 흩어졌으며 두번 다시 오지 않았다. 수녀들은 거기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몸에 구더기마저 들끓고 악취가 진동하는 걸인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씻기고 약을 바르고 먹여주고 수발들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로 나오는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살아 있는 성인’ ‘20세기의 성녀’로 불리는 마더 테레사다. 그의 삶에 대해 읽다 보면 문득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착한 일을 한 게 언제쯤이지? 그리고 그게 무슨 일이었지?’

그러면서 그렇게 묻는 게 왠지 자연스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랑이 전염됐기 때문일까? 마더 테레사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써 세상에 사랑을 전염시킨 사람이다.

» 콜카타의 빈민들을 돌보는 마더 테레사. 그는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겼다.

말이 쉽지, 실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지금껏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극히 짧고도 단편적인 경험 한두 가지를 보자. 네팔 카트만두의 허름한 노동자 합숙소 같은 데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공동 화장실 겸 세면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냥 대변이 구덩이에 떨어지는 우리 옛날식 화장실 같은 데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화장지가 없었다. 낭패스러웠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사람들은 화장지를 쓰지 않는다. 왼손으로 닦고 물로 닦는 정도다. 그 사실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일까, 세면장 벽과 바닥도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고 곳곳에 대변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이가 덜덜 떨렸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빈민들이 사는 데랑 비교하면 상전 중의 상전이다. 거긴 어디 물이 나오는가? …산골마을 비슷한 데 갔을 때는 또 어땠는가. 어둠 속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화장실 같은 데가 없었다. 헛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변은 참고 소변을 논 가장자리 같은 데 실례했다. …이튿날 깜짝 놀랐다. 아낙 하나가 바로 내가 오줌을 눈 그 자리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소중한 식수원에 오줌을 누고 있었던 것이다! …빈민들과 함께 사는 것, 아니 그러면서 그들을 섬기는 것을 평생 실천한 마더 테레사를 읽으며 내 머릿속으로는 그런 장면들이 느리게 하나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마더 테레사는 1910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서 건축가의 3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자녀들은 가톨릭학교를 다니며 유복한 성장 과정을 거친다. 테레사는 18살 때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이듬해 인도로 들어가 교단이 운영하는 콜카타의 성 마리아여고에서 17년 동안 지리교사와 교장으로 일한다. 그러다 1946년 ‘열차 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뒤 인도의 빈민가로 직접 들어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봉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길고 지루한 절차를 거쳐 어렵게 교단의 허가를 받아낸 뒤 기초적인 의료기술 등을 습득하자 1948년 빈손으로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몸부터 씻긴 뒤 벵골어와 산수, 재봉을 가르쳤다. 대부분 힌두교도인 인도 사람들의 오해와 적대감을 극복하면서 점차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된 그는 학교를 더 늘렸다. 성 마리아여고의 제자들도 그의 활동에 합류하고 후원자들도 점점 늘어났다. 빈민가의 어려운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의 활동영역은 곧 질병을 앓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버려진 아이들, 나병환자처럼 기피받는 악성 질병자들로 확대됐다. 무료진료소,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인 ‘니르말 흐리다이’,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인 ‘사슈 브하반’, 평화의 마을인 ‘산티 나가르’ 등이 잇따라 문을 열고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독립교단인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설립되고, 그 연장선에서 ‘사랑의 선교 수사회’(Missionaries of Charity Brothers)도 결성된다. 사랑의 선교회는 그 뒤 전세계 120여개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전세계적으로 4천여명의 수녀들이 참여해 빈민봉사 활동을 벌이는 규모로 발전해나간다. 한 수녀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섬긴다는 결심를 한 뒤 50년도 안 되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 올리비아 허시(가운데)가 주연한 영화 <마더 테레사>의 한 장면.

마더 테레사의 공로를 인정해 1979년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 어느 일에서건 자신을 내세우기를 바라지 않는 테레사 수녀는 이때도 수상행사의 연회를 열지 않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달고 상을 받았다. 그는 노벨상 상금 19만2천달러 전액을 나환자 구호소 건설기금으로 내놓았다. 상을 받을 때도 ‘사랑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그렇게 인류에게 깊은 감동을 남기는 삶을 살던 마더 테레사는 1997년 심장병으로 눈을 감았다.

 

알렉산드리아와 마더 테레사

마더 테레사의 일생은 이런 특징을 지닌다.

1. 좋은 부모의 좋은 교육을 받았다: 부모님은 늘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주는 생활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와 함께 자녀들에게 독실한 신앙생활의 본보기를 보여줬다. 특히 어머니의 경우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가정의 생계를 훌륭하게 이끌어갔을 뿐 아니라 깊은 신앙심으로 막내딸의 수녀 서원과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을 지지해준다.

2. 늘 소명에 순종하며 전 생애를 매진했다: 테레사 수녀는 처음 수녀가 될 때부터, 선교활동을 위해 인도행을 결심하고, 인도에서도 안락한 수녀원을 나와 빈민가에서 직접 봉사를 하기로 결심할 때까지 늘 소명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심한 이후에는 전력을 다해 그 실천에 매진하는 방식으로 전 생애를 살아나갔다.

3. 스스로 낮아지라, 가장 낮은 이를 섬겨라: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라는 예수의 말에서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근본주의적 원칙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바로 예수 자신인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 자신인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낮아져 가난한 이를 찾아가야 한다. 이 근본주의적 원칙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4.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 독실한 가톨릭인 그가 가톨릭의 틀만을 고집했다면 곧 한계에 부닥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테레사는 종교를 가리지 않았으며, 봉사의 대가로 가톨릭을 선교하거나 교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정한 인도인이 되기 위해 인도로 귀화했다. 나아가 그가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이들의 지원을 얻는 방식은 탁발 등 전통적인 인도 방식을 그대로 본뜨고 있다. 그는 더 큰 틀에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라는 논지를 펴면서 종교를 설명하지 말고 행동이나 헌신을 통해 신앙을 보여줘야 한다고 설득한다. 오직 사랑의 깊이만이 신앙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혼자 아닌 함께 일하는 사람의 힘: 마더 테레사는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활동의 문을 늘 열어놓았으며, 그런 자세를 기초로 사랑의 선교회를 전세계로 확대해나갔다. 그리고 그 활동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성을 띤 채 계속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을 탄생시킨 땅에서 알렉산더의 죽음 2300여년 뒤 마더 테레사가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그 숱한 죽음을 몰고 온 전쟁을 치르며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70여개를 남겼다. 마더 테레사는 그와 달리 자신의 영혼이 깃든 조직 ‘사랑의 선교회’를 전세계 120여개국에 남겼다. 과연 알렉산드리아와 ‘사랑의 선교회’ 그 어느 것이 오래갈 것인가?

 

"누구든 개종을 강요해선 안 됩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로서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향하는 데 장애물을 적게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불평한다면 우리도 같은 것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는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고통 없이 일한다면 우리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낙태란 두말할 것도 없이 살인입니다. 그것도 친어머니에 의한 살인입니다. 악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개종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라도요. 신앙을 갖는 것이나 개종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길에서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온몸에 구더기가 끓었습니다. 그 몸을 씻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저는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남이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절망·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아이가 8명이나 되는 힌두교 가족이 굶고 있다가 우리에게서 쌀을 받았습니다. 그 집 엄마가 과감하게 쌀을 반으로 나누더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돌아온 그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웃집 역시 굶고 있답니다.’ 이웃 회교도 가족을 위해 자기 것을 나줘준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사랑이 아닌가요?”


[간디] 간디는 영국과도 안 바꾼다

비폭력을 무기로 폭력·식민주의·인종주의와 투쟁하며 인도의 독립을 쟁취한 ‘위대한 영혼’

에피소드1


» 마하트마 간디. 그는 20세기 중반까지 완고하게 식민지배를 계속하려는 세계 최강의 무력국가 영국에 비폭력적 무저항운동으로 맞섰다.

“아미르 하드 나이. 아미아콘 고노 가스파르테 푸리나.”(나는 손이 없네. 그래서 나는 일을 할 수 없다네.)

1994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만난 한 사업가는 이 지역에 지금까지 이런 노래가 전해져온다고 일러주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중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손목을 잘렸다고 했다.

에피소드2

1893년 겨울, 인도 출신으로 24살의 젊은 변호사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탔다. 1등칸의 표를 가지고 1등칸에 탔던 그는 역무원에게서 짐차칸으로 옮기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는다. 그가 거절하자 경찰까지 동원해 그를 강제로 기차에서 끌어내리고 짐까지 내던졌다. 유색인종이 1등칸에 탔다는 이유에서다. 이튿날 다시 역마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하던 그는 이번에는 백인 마부로부터 심하게 얻어맞는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마부석 앞 바닥으로 물러나 앉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영국을 경악과 충격에 몰아넣다

고등학교 영어 참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영어 문장이 하나 있다.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영국인들은 그런 말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인도인에게 이처럼 치욕적인 표현은 없다. 흔히들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상징하듯 지금껏 영어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인도에서 빨아들이는 부와 쾌락을 끝까지 인도인에게 돌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영국의 탐욕스런 죄악은 기본적으로 민중들의 손목까지 무자비하게 잘라버리고, 인도인들을 학대·폭압하는 폭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제국은 폭력으로 건설되고 폭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제국주의 영국이 18~20세기에 다른 나라, 특히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폭력·무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1757년 벵골 지방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벵골 태수의 군대가 맞붙은 플라시 전쟁 때 영국군은 단지 3천명인데도 5만명의 벵골군을 물리치고 있다. 그 영국군 가운데 백인은 단지 3분의 1이었고, 나머지 3분의 2는 인도의 용병들이었다. 영국군의 무기가 압도적으로 우수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뿐인가? 벵골군에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군까지 일부 가담해서 싸웠는데도 그랬다. 이 플라시 전쟁으로부터 1세기 이상 영국의 인도 지배가 공고화되고, 나아가 세계제국 영국의 군사력도 비약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과연 인도는, 인도인은 어떻게 맞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 보어전쟁에 앰뷸런스부대원으로 참전한 간디(왼쪽). 오른쪽은 남아공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던 모습.

이 절체절명의 국면에서 길을 연 사람이 바로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는 뜻)로 불리게 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다. 그는 20세기 중반까지 완고하게 식민지배를 계속하려는 세계 최강의 무력국가 영국에 비폭력적 무저항운동(사티아그라하·원뜻은 ‘진리를 위하여’임)으로 맞섰다. 글도 모르는 인도의 대중은 간디의 지도에 따라 서로 팔을 걸고 대열을 지은 채 나아가 몽둥이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비폭력 시위에 참여했다. 인도의 대중은 그가 물레를 돌리면 같이 물레를 돌리는 것으로 영국 물품을 배척하는 운동에 떨쳐나섰고, 그가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소금을 만들었다. 간디의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 영국 식민 당국은 경악과 충격 속에 빠지곤 했다. 불결하기 짝이 없고 다민족·다종교로 갈갈이 찢겨져 제대로 된 하나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것만 같던 인도인은 한 인간의 지도 아래 뭉쳐 그렇게 인간의 존엄을 증명했다. 그리고 역사를 바꿔나갔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해안 구자라트주 포르반다르에서 대대로 지방태수국의 총리를 지내온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평생 힌두교적 가치관과 종교관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된다. 간디는 19살 때인 1888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변호사 자격을 딴 뒤 귀국한다. 그는 1894년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인도인 상사의 고문 변호사 자리를 제안받자 곧바로 남아프리카로 간다. 이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시작으로 다른 인도인들의 참상에도 눈뜨게 된 간디는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백인들의 기도를 계기로 정치적 활동에 나선다. 그 결과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조직하게 된 그는 그 뒤 남아프리카에 20여년 머물며 인두세 폐지운동 등 인도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일한다. 남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를 비롯해 세계의 여러 종교를 접하게 된 그는 힌두교의 주요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깊은 영감을 얻는다.

또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사상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그 결과 러스킨의 저작에서 영감을 받아 농사를 지으며 <인디언 오피니언>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는 센터인 피닉스공동체를 만드는가 하면, 톨스토이 농장도 세우게 된다. 그는 정치사상적으로 인도의 식민지 몰락이 영국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인도인들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과 종교분열도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인도의 분열, 그리고 힌두교도의 총격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간디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당시 영국 당국은 만일 인도인들이 이 전쟁에 협력해준다면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식으로 회유책을 내놓고 있었다. 간디 역시 이 약속을 믿고 앞장서서 인도인의 전쟁 참전과 영국 지원을 호소했다. 다른 한편으로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인권운동 투쟁이 기본적으로 한 구성체 안에서 영국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허용해달라고 주장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인 역시 백인과 동등한 의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과 결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영국의 이런 반동적인 억압정책에 반발해 인도인들의 반영민족운동이 일어나자 간디는 앞장서서 그 운동을 지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논지를 펴는 <영 인디아>를 창간하는 한편 영국제품 불매 운동, 물레 장려, 비폭력적 무저항주의 등 전 인도적 차원의 운동을 주도한다. 인도 민중들은 간디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인도 역사상 한 지도자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에 대해 이처럼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는 일찍이 발현된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간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인디아 대중들은 하나가 됐다. (사진/ GAMMA)

1930년대 초 간디는 노령을 이유로 일단 정치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와할랄 네루 등 젊은 지도자에게 자리를 맡긴 뒤 칩거한 채 묵상과 헌신 등으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디는 다시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는 독일 나치스 등 파시즘에 대해선 항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해 지난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맹목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은 반대했다. 영국이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 당국은 전시라는 이유와 반영적이라는 이유로 간디를 비롯해 국민회의 지도부를 모조리 붙잡아 투옥했다.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그는 아내를 잃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인도가 독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간디 등 지도부가 투옥돼 있는 동안 인도의 힌두교 사회와 이슬람교 사회는 결정적인 분리독립쪽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결국 1947년 8월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하나의 인도가 아닌,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의 인도로 분리된 채였다. 그래도 간디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나라의 통합을 호소하며 인도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도 대세를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48년 1월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드리러 가던 중 과격 힌두교도의 총격을 받고 7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가

간디는 살아서 적어도 세 가지 혁명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1) 식민주의에 대한 혁명

(2) 인종주의에 대한 혁명

(3) 폭력에 대한 혁명

                         네루(왼쪽)와 함께한 간디. 그는 1930년대 초 노령을 이유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사진/ GAMMA)
 

 

 

 

 

 

 

 

 

 

 

 

 

 

 

 

 

[연재를 마치며] 고난은 인간을 키운다

요셉에서 간디까지 5천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겨진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 요셉, 손빈, 여불위, 링컨, 최부잣집 사람들, 마더 테레사, 야율초재, 스파르타쿠스, 류관순, 간디.
 

고난 없이 인간은 성공하지 못한다. 골짜기가 깊어야 산은 높아지던가? 지난 15개월 동안 5천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겨진 인물들을 되짚어오며 무엇보다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고난을 겪고서야 비로소 더 큰 일을 이루게 되는 역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4천년 전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7년 연속 기근의 대재앙에서 구한 것으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요셉을 보자. 자신을 시기하는 형제의 손으로 웅덩이에 던져지고… 그 형제의 손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고… 다시 여주인의 유혹을 피하는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도 모함을 받아 감옥에까지 갇히고…. 끝내 그를 훨씬 더 성숙시키고 남을 위해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비의 편애였던가? 자신의 잘남이었던가? 아니다. 오직 모든 고난과 억울함을 묵묵히 이겨낸 뒤에야 그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큰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손빈은 어떤가? 전국시대 병법의 대가 손빈은 스승 귀곡선사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손빈은 질투와 시기의 힘, 세상 사악함의 파괴력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문하 출신으로 먼저 위나라에 출사해 대장군에까지 오른 방연의 초빙에 응했다가 그의 간계에 말려버린다. 무릎을 잘리고 돼지우리에 돼지처럼 갇힌다. 이 처참한 지옥도에서 손빈은 자신의 최대 능력인 지혜를 발휘해 제나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13년 뒤 손빈은 제나라 군대의 군사(전략참모)로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해 결국 방연을 고슴도치처럼 화살 세례를 받아 죽게 만든다(일부에서는 생포설도 있다). 손빈은 처절한 고난을 겪은 뒤에야 진정한 제1인자가 됐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던진 여불위

이쯤 되면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고난은 곧 행복이다.’ 역사는 항상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인공의 목숨마저 요구했다.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에 인질로 온 진나라 왕자에게 전재산을 투자한 여불위는 대성공을 거둔다. 진나라 왕자는 자신의 공작대로 진나라 왕이 됐다. 그뿐인가? 이미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무희마저 진나라 왕의 비로 들여보내 아들까지 낳는다. 일개 상인에서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최강대국 진나라의 승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마침내 사실상 자신의 아들(진시황)이 진왕에 즉위하는 감격까지 맛본다. 그러나 그도 결국 출생을 둘러싼 소문을 잠재우려는 진왕의 의지에 따라 몰락으로 내몰린다. 아들인 진왕을 위한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그는 하나뿐인 목숨마저 던져야 했다. 인질로 온 진나라 왕자에게 투자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무희를 그 인질왕자에게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진나라의 승상 자리까지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승상 자리에서 더 일찍 물러나와 낙향생활을 했더라면…. 역사는 필연의 과정을 거쳐 그를 자살로 내몰아가고 있었다.

링컨은 어떤가?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흑인노예도 해방시키고, 저 유명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라는 명연설이 지금껏 회자되는 그는 19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온갖 실패의 경험을 딛고 미국은 물론 세계사의 스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완전한 승리와 성공의 순간 암살당한다. 후세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지만, 그는 남북전쟁 승리 1주일도 채 안 되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성공을 위한 대가로 바쳐야 했다.

 

패배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기쁨으로 채워주는가?

권세에 있지도 않았다. 정복에 있지도 않았다. 세상을 떡 주무르듯 흔들어대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에 있지도 않았다. 나라 안팎에서 골라 화려하게 치장한 솔로몬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도 있지 않았다. 고대 세계 최대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넓은 땅덩어리를 정복하고도 자신과 자식의 목숨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채 30대 젊디젊은 나이에 죽어갔고, 탐하는 대로 여인을 취해본 솔로몬도 끝내 탄식해야만 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행복은 가까운 곳, 낮은 데 있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작은 나라 조선의 경상도 지방에 사랑과 사람다운 삶을 심어 300년을 전해온 경주 최부잣집의 마음 같은 것이 곧 행복이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를 섬긴 마더 테레사만이 종교의 차이를 넘어 힌두교도의 진정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참행복의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바로 이렇게 남을 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몽고 재상 야율초재는 그 학살과 살육의 시대에 죽음을 무릅쓰고 개봉 백성 140만명을 살리는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 아닌가? 행복은 이기심의 굴레를 벗을 때 시작되고, 남과 함께 살아갈 때 그 열매를 맺고 있었다.

슬픔도 힘이다. 놀랍게도 슬픔도 패배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고 있었다.

고대 로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는 패배했지만 죽지 않았다. 그에게 군사적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성공하려는 자들의 참고인물 정도로 박제화됐지만, 그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2천년 이상 자신의 뜻을 이어나가도록 이끌고 있다.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모든 세대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된 것이다. 어찌 슬픔이, 패배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류관순도 이런 슬픔의 힘으로 한민족의 별이 되고,

제갈량도 이룰 수 없었던 천하통일의 슬픔 때문에 민중들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교육에서 승리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

그리하여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할 때가 찾아오면 역사를 통해서 진리와 사랑이 승리한 순간을 기억해내지. 독재자와 살인자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지만, 결국 늘 몰락하고 말았어. 항상 그걸 생각해보며 힘을 얻지.”

무엇이 가장 의미 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역사는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고 있었다. 신과 문자와 인간 그리고 그것을 종합해서 후대에 이어주는 교육이었다. 놀랍게도 모두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인간집단도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가지고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선 세상의 패권까지 움켜쥘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이 요소들의 변증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가장 일찍 신의 존재와 가치를 제대로 안 족속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신과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기록해서 전승시킬 수 있는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모세 오경’ 등 유대교의 경전과 탈무드 등 가르침이 자신들의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됐다. 문자는 곧 교육체계로 이어진다.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는 로마군에게 유대 지역이 점령돼 깡그리 파괴될 때 오직 대학이 있는 유대교 교육도시 야브네만을 살려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은 인구라는 성장 엔진을 가장 먼저 가동한 족속이기도 하다. 요셉의 시대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12지파 선조 70여명이 불과 수백년 만에 200만명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부부가 사랑하고 생육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찬양하고 권장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독선적인 교리와 선민의식은 이웃의 반발과 혐오를 불러오고, 이슬람교의 탄압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까지 겹쳐 이 인구라는 요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음이 없인 인구라는 성장 엔진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법일까?

중국인은 이 가운데 신을 빼고 문자 교육 인구로 승부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사례다. 대영제국은 쇠락했어도 그들의 언어 문자 영어는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패권문자가 돼 있다. 미국은 외형상 여러 민족을 다 받아들여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민족의 용광로, 문화의 용광로 같은 성격으로 발전의 모티브를 잡은 측면도 강하다. 이제 이 모든 주역들은 교육에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달리는 말에 올라 산을 본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것도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식의…. 전문가도 전혀 아니면서, 심지어 한번도 그 인물에 대해 읽어보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는 하염없는 부끄러움만 남는다. 한번 뭔가 흉내라도 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항해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이제 닻을 내린다. 이 부끄러움 속에서도 마지막 글을 쓰는 힘은 단 하나,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모자란 사람의 한마디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쳐보시라

“앞으로 자네들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될 거야. 선배나 친구의 조언도 좋지만, 깊은 밤 홀로 역사인물을 한번 읽어보시게나. 혼자 있어야 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나와 대화할 수 있거든. 그리고 사람이 혼자 울어야 진정 슬픔의 힘을 깨닫게 될 때도 있거든.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제 산에 올라 바다를 한번 바라보시게. 깊게 심호흡을 하고 한번 크게 외쳐보시게나. ‘바다야, 내가 간다! 세상아, 우리가 간다!!!’”

 

매력적인 사람들, 아쉬운 사람들...

» 이건희, 세종대왕, 프리다 칼로, 에디슨.

한번 꼭 써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아쉬움을 모아 이름이라도 한번 적어보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이건희 회장이 가장 아쉽다. 어느 의미에서 그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일을 이뤄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동시대 가장 많은 인류 구성원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동시대인이기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은 한글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과연 한민족이 한글을 제대로 살려나갈 수 있을지, 그렇게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마다 그는 우리 곁에 다시 살아올 것이다.

문익점을 쓰고 싶었다. 처음 우리 민족에게 목화를 전해준 인물. 그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가난한 이들은 덜 춥게 됐다. 제법 사람답게 살게 됐다. 어느 군주가, 정복자가, 영의정이 그보다 훌륭했단 말인가? 그가 비록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산업스파이 격이라 할지라도 나는 당연히 그의 편에 서련다.

기황후. 어느 면에서 보면 참 매력적인 여성이다. 지금껏 우리 민족 가운데 이 여인처럼 세속권력의 최상층부에 가본 이가 있을까? 없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만나볼 만하지 않은가?

외국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깊은 흥미를 느낀 사람은 조지프라는 이름의 인디언 추장이다. 로키산맥 북쪽 태평양 연안에 살던 네스 페르세족의 추장인 그는 1870년대 미국 정부가 그자기 부족을 강제로 보호구역에 몰아넣으려 하자 부족원 300여명을 이끌고 탈출한다. 그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된 부족원들을 무섭고 강력한 미국 기병대의 추적 속에서 살려낸 ‘인디언 모세’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놀랍고 눈물겹다.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도 교통사고로 온몸이 망가지는 운명을 극복하고 놀라운 예술혼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 분야에 헬렌 켈러, 마더 테레사 같은 여성이 많아 아쉽지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에디슨도 한번 꼭 다루고 싶은 이였다. 너무나 잘 알려졌지만, 발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었다.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의 미래 장기 생존에 발명이라는 요소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위해 소중한 지면을 내주신 <한겨레21>과 그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글 가운데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적하시며 가르쳐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국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이 혁명은 20세기를 지나 21세기 현재까지도 엄밀한 의미에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성격을 띤다.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북한에 대한 압박, 중국에 대한 견제의 이면에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냄새가 강력하게 풍겨나온다. 미국뿐인가? 미국은 물론 유럽 축구판에서도 심심치 않게 분출되는 사건과 추문은 아직도 인종주의의 망령이 현대 세계를 배회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폭력의 문제는 식민주의나 인종주의보다 훨씬 명확하고 무거운 실체로서 인류를 짓누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간디는 이런 폭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맞서는 방식으로 폭력을 무력화하고 있다. 과연 이런 방식이 핵무기로 인류를 수백번이나 멸절할 수도 있는 이 참담하고 무시무시한 세계에서 유용할 수 있는가? 어쨌든 그는 20세기 영국과의 투쟁에서 성공했다. 간디의 이런 철학의 바탕에는 정확하게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나아가 간디가 힌두교를 신봉하면서도 기독교나 이슬람교, 파르시교, 자이나교, 불교, 가톨릭 등 여러 종교의 교리를 비교 연구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지켜나갔다는 사실도 종교갈등의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 그가 제시하는 무소유(아파리그라하)에 대한 철학도 새롭게 조명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도는 그 오랜 관념론의 역사와 그토록 다양한 종교 인종의 축적된 총량 속에서 간디라는 빛을 인류 앞에 선보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약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는 강한 자의 속성이다.”

“죽은 사람들, 고아가 된 아이들,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그 미치광이의 파괴 행위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건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스런 이름으로 행해졌건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인생에는 단순히 속도를 더 빨리 하는 것 말고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너 자신을 찾아내는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며 너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의도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때 묻어 보인다.”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신이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신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배워라.”

“<신약>은 매우 다른 인상을 주었고, 특히 ‘산상수훈’은 사뭇 내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한 것을 대적하지 마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왼쪽 빰마저 내밀어라. 또 누가 네 겉옷을 취하거든 그에게 속옷까지 가져가게 하라’는 말은 나를 한없이 기쁘게 해 샤말 바트의 ‘한잔 물을 위해 잘 차린 한상 밥을 주라’는 말을 더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됐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폭력이 선한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보일 때라도 그 선은 일시적인 것이고, 그 폭력이 행한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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