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금강산

醉月 2009. 12. 14. 08:48

한자락씩 읊었구나 저 글발들은 무엇인고 금강산 구룡연

강원도 금강산은 우리 민족사에서 자연유산이라기보다 문화유산에 가깝다. 조선 후기 조속, 겸재 정선 등이 우리 산하의 기운을 찍어내듯 추려 표현하는 진경회화의 모태로 삼은 곳이 이 산이었다. 김창흡, 이병연 등 숱한 문인들의 풍경시, 세조대왕, 율곡 이이, 월사 이정구 등의 유명한 유람기도 여기서 나왔다. 중국도 따르지 못할 천하제일 명산을 지녔다는 선인들의 자부심은 이렇듯 대단한 것이었다.

 

숱한 문인·화가들 붓들어 예찬
64척 ‘미륵불’ 새김글씨
명산 4000여곳 ‘방명록’ 새겨
들리는가 구룡의 탄식소리

분단은 이 산의 탐승로에도 얄궂은 파장을 남겼다. 옛 선인들은 철원, 회양, 단발령을 거쳐 내금강 중심으로 탐승했고 기록도 압도적으로 내금강이 많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이 재개된 지금 남녘 사람들은 명문의 산실 내금강을 못 보고, 동해 쪽에서 외금강 일부밖에 볼 수 없다. 분단이 탐승경로조차 바꿔 버린 것이다.

외금강 중 선인들 입에 오르내렸던 명승은 단연 구룡폭포와 구룡연이다. 외금강 신계사에서 시작해 세존봉과 옥녀봉 자락을 끼고 들어가는 옥류동 계곡 끝에 있는, 최고 높이 100m의 험악한 석벽에서 내리꽂듯 흘러내리는 74m 높이의 폭포와 그 아래위의 아홉 연못들은 숱한 문인과 화가들의 상상력을 당겼다. 1928년 나온 금강산 시·유람집 모음인 〈금강승람〉편을 보면 구룡연에 대한 다기한 묘사들이 쏟아진다.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인 삼연 김창흡은 아홉 마리 용이 깃든 연못을 아홉 연짜리 ‘구룡연 9수’로 읊었다. 초연에서 맑기가 거울 열어놓은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3연에서 거뭇하고 푸른 연못 물색이 너무 깊어 신기한데도 가까이 못 가니 안타깝다고 했다가 9연에서는 물속 잠룡이 몸을 쉬이 드러낼 것 같다며 환희에 떨었다.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폭포 흐르는 암반 위의 모습은 가운데가 쏙 들어간 것이 마치 말 귀와 같아 폭포가 흘러 떨어지는 것이 말의 두 귀 사이에서 물이 흘러 떨어지는 것 같다” “둥근 못에 절구 찧는 것 같다”고도 했다. 화인들 사이에서도 단원과 겸재는 거장답게 구룡폭포도를 남겼고, 광기의 화가 최북은 그림도 성이 안 찼던지 구룡연에 직접 뛰어드는 자살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금강예찬〉이란 명기행문을 남긴 육당 최남선도 “(폭포)소리를 뒤쫓아 몸뚱이 나온다! 귀는 터진 대로 먹어 버리고, 눈은 뜬 대로 멀고, 얼은 말짱한 채 빠져 버리고…나도 모르게 하느님 하고 예배했다”고 고백했다.

겨울에 찾아간 구룡폭포는 굉음을 멈춘 채 단단히 얼어붙은데다 거뭇한 석벽들도 허연 눈을 잔뜩 이고 있어 그런 환희를 체감할 수 없었다. 단 폭포 오른쪽 석벽에 근대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금강산 불교도들의 부탁을 받고 새긴 길이 64척짜리 ‘미륵불(彌勒佛)’ 새김글자가 더욱 위용을 자랑한다. 일제시기 숱한 현판과 각서를 남겼으며 고암 이응노의 스승이기도 한 이 대서화가의 글씨는 영하 20도를 넘는 혹한의 구룡폭 공간에 더욱 지엄한 신비감을 흩뿌린다. 하지만 금강문, 옥류동을 거쳐 구룡폭까지 조선~일제 때 숱하게 새겨진 탐승객 이름과 명승이름 글씨를 접하며 올라온 탐승객들은 이 새김글씨 앞에서 묘한 상념에 빠질 법도 하다. 북한 당국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선전구호 등을 역시 눈에 띌 만한 바위와 암벽마다 ‘글발’로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금강산에만 무려 4000곳 넘는다는 이 글발과 옛 선인, 탐승객들이 다닥다닥 새긴 글자들이 금강산의 자연 문화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이고 유산이 될 것인가. 통일되면 발라버려야 할 흔적에 불과한 것일까.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 유기〉에서 구룡연 암벽에 글씨 새긴 김규진을 대죄를 범했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 생각은 또 다른 듯하다. 옛적 금강산을 탐승했던 문인들 또한 마구 바위에 글 새기는 행태에 혀를 차기는 했다. 19세기 훈장 출신으로 〈동행산수기〉라는 걸작 탐승기를 남긴 어당 이상수는 이렇게 일갈했다. “큰 글자를 새기느라 산의 돌을 무른 대나무처럼 여긴다면 이로움이 있겠는가? 앞사람 이름 깎아 자기 이름 새기는 것은 남의 무덤 허물어 자신을 묻는 것과 같으니….”

 

천년고찰 무상세월 석탑만이 변함없네 » 최근 복원된 신계사 대웅보전 전경. 금강산 신계사

외금강 구룡연 계곡 들머리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 신계사(神溪寺)는 옛적이나 지금이나 외금강을 탐승하는 이들이라면 꼭 거쳐가는 길목이다.

 

세존봉·문필봉 사이
명당자리
중건…보수…소실…복원…
권세따라 흥망성쇠
남북 원상복원 계획

육당 최남선이 기행기 <금강예찬>에서 절묘한 필력으로 옮긴 것처럼 신계사 터는 금강산 사찰 가운데 지정학적으로 가장 명당자리다. 외금강의 등뼈격인 ‘관음연봉이 군선, 한하의 양 골짜기 사이로 줄기차게 뻗쳐 나오다가 문필봉을 보당(절 행사 때 쓰는 깃대)으로 앞세우고 너부죽하게 열린 바닥에 있는 고찰’인 것이다. 게다가 뒤에 붓끝을 닮았다는 문필봉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앞에는 세존봉의 기기묘묘한 장관을 끼고 있으니, 옛 사람들은 절 영역을 일컬어 ‘세존 원내’라고도 일컬었다고 육당은 기록하고 있다. 문필봉의 문자향과 관음·세존봉 영기가 서로 어울리는 이 절에서 근대 선불교를 이끈 석두(1882~1954)와 그의 제자로 판사였다가 출가해 종정이 된 효봉(1888~1966) 등의 걸출한 선지식이 배출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조계종의 주도로 복원된 신계사 대웅전에 수행·관리자로 파견된 제정 스님은 “탁트인 정면 경관 왼쪽으로 문필봉이, 오른쪽으로 집선·채하·세존봉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까닭에 비스듬히 해가 떠서 기우는 겨울이 오히려 여름보다 더 낮이 길다”며 “이렇게 절묘한 지세는 처음 봤다”고 했다.

 

사실 신계사만큼 인간 세속의 자취가 덧없는 백일몽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시켜주는 유적도 드물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절집 자체가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신라, 고려, 조선시대부터 신계사는 왕실, 권력층과 밀접한 공생관계를 지니면서 번성해오다 거푸 버림받고 다시 지은 내력이 되풀이되었다. 1825년에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을 보면 고찰은 신라 법흥왕 5년인 519년 보운스님이 세운 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 653년 중건하고,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과 문무왕 동생인 김인문이 대웅전을 보수했다고 전해진다. 또 지방기록인 <관동읍지>를 보면 ‘(신라 마지막왕인)경순왕이 쫓겨난 뒤 불사를 닦으려고 원당을 지었으나 시비는 알 수 없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광종 때에 국사를 지낸 탄문스님이 신계사를 보수했고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실력자 묘청이 1130년에 중창한 기록도 전해진다. 왕실과 다소 소원했던 신계사는 1789년 영조에 의해 굶어죽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다시 일어선다. 정조가 원불전과 어향각을 지어 수원 현륭원(사도세자의 사당)의 원당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구한말엔 고종 황실로부터 공명첩과 거액의 내탕금 등을 지원받아 대웅보전과 각종 불구를 장만할 정도로 살핌을 받았다. 당시 중신인 소하 조성하는 “ 허위허위 걸어 뒤늦게 신계사에 이르니 기러기 날아갈듯한 탑의 자태하며 절 처마 밑 풍경에 걸린 물고기하며 아주 큰 도량이로구나’라고 절의 위세를 노래하고 있다.

 

19세기 말 전각이 21채에 이를 정도로 대찰이었던 신계사는 1911년 정문누각인 만세루 2층 15칸과 최승전 60여칸이 불에 타면서 다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일제시대인 1920년대 대웅전 앞 석축과 만세루, 요사채 등이 복원 되었으나 이미 전통적인 절집의 배치와 1000년 이상 된 삼층탑 자리의 놓임새, 구조가 일본인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현재 진행중인 전통 사찰 복원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춘원 이광수도 <금강산유기>에서 이게 못내 아쉬웠던 탓인지 ‘신계사라, 그 사무소가 유리창, 의자, 탁자의 면 사무소나 순사 주재소 식인 것이 매우 눈에 틀립니다. 오래된 석탑만 오직 옛 뜻을 변치않고 서있을 뿐이외다”라고 털어놓고 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남북 합동발굴에 따라 올해 만세루와 요사채 제 위치를 찾아 원상복원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제행무상의 진리를 떠올리게 하는 절 터에서 의연한 것은 곧 대자연뿐이다. 이를 깨우쳐주기라도 하듯 1887년 씌어진 신계사 법당 중건 상량문의 게송은 달뜬 밤 절집 공간의 환상적 풍경을 전해준다. “ 한 지팡이로 밤에 삼 만리를 돌아가니 달은 밝고 끝없는 하늘 바람 소리 들리네… 만 이천봉은 권속과 같으니 한 신선의 피리소리에 흰 구름이 멈추도다… 하늘 향 계수나무 바람에 날리니… 방장의 깊고 깊은 데서 승려가 결제에 드네…’달 비치는 새벽 깨달음에 목말랐던 신계사 옛 승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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