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햇님이’ 그레이스 오말리
1980년대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형편없는 나라 같았다. 1987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도 받고, 영국병까지 따라 하다니, 식민지의 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이웃한 강대국에게 800년 맺힌 설움이라니, 베트남이나 티베트 그리고 한반도 사람들도 이심전심이다. 그런데 20년도 흐르지 않은 2005년 12월,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아일랜드를 선정했다. 반면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한 영국은 29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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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사람들이 그레이스 오말리를 더욱 자랑스러워하는 건 그 때문일 거다. 세계를 지배한 대영제국 엘리자베스 1세와 맞장 떴던 그녀는 1530년, 여왕보다 3년 먼저 태어나 일흔셋의 나이로 같은 해 운명했다. 그레이스 오말리는 아일랜드에서도 백령도쯤 되는 서쪽 섬 원주민의 고명딸로, 고향 사람들은 그녀를 그라인느, 즉 ‘햇님이’라고 불렀다니 태양여왕과의 결투는 진작부터 예고된 셈이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부모님이 키우던 새끼양을 채가다 쫓아온 햇님이의 이마를 날카롭게 할퀴었으나 꼬마는 눈도 까딱하지 않고 덤볐고, 상처는 해리 포터의 그것처럼 반짝 빛났다. 아버지는 씩씩한 딸을 뱃길에도 데려갔는데, 영국 해적들이 나타나면 갑판 뒤로 숨으라고 가르쳤으나 막상 일이 벌어지자 아이는 돛을 타고 올라가 상황을 파악한 뒤 아버지 등에 칼을 들이댄 해적 머리로 뛰어내려 사태를 전복시켰다. 용맹한 딸에게 아버지는 일찌감치 배 모는 법을 가르치고, 선주 노릇도 시켰다. 여느 딸들처럼 그녀 또한 열여섯엔 아버지가 정해주는 혼처로 시집가서 1녀2남 쑥쑥 낳았으나, 곧 바다로 나가 또 배를 몰았다.
그녀의 선단은 엄청 불었고, 20년 함께 산 첫 남편이 배 위에서 쌈질하다 세상을 뜬 뒤, 오말리 대장은 남편보다 더 뱃심 좋게 세력을 넓혀가며 일대 섬들과 인근의 성 다섯 채를 소유한다. 그 와중에 신랑감도 찍어 오랜 구애 끝에 재혼하고 늦둥이도 하나 두었다. 조선반도 해군이 거북선을 짓고 일본 해적을 상대로 힘든 싸움 벌인 1593년, 영국은 아일랜드를 통째로 먹고 ‘처녀여왕’의 은덕을 베풀어 족장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다니, 오말리 대장에게 이들은 우리의 ‘을사오적’ 정도에 해당했겠다.
스페인 무적함대도 무찔렀던 세계 최강의 도적 선단을 상대로 해적질을 하다 2년 남짓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 오말리는 남편의 부음을 듣고 간신히 풀려나는데, 그래도 싸움은 계속되어 결국 남동생과 늦둥이 아들이 생포당한다. 예순이 넘은 오말리는 자기 목에 현상을 걸었던 엘리자베스 1세와 담판을 지으러 가고(그림 왼쪽이 오말리), 이 협상에서 힘이 센 두 할머니는 서로 원하는 바를 얻었다 한다. 세월은 많이 흘러 처녀여왕보다 해적여왕 오말리가 더 매력적인 언니로 추앙받는 요즘 서양 아이들의 축제 분위기는 설움 많던 아일랜드에 순풍처럼 부는 국운과도 무관치 않은 듯하다.
세포여, 살림을 하라 린 마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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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줄기세포는 위조 로또였다. 일희일비하던 잔치는 끝났고, 몰래카메라 앞에서의 소동은 마무리 중이다. 하지만 줄기세포가 아니어도 생명의 기본단위 세포는 그 자체로 놀라운 생명의 복음서다. 생명의 단위인 세포, 요술 지팡이처럼 생긴 바늘로 그걸 콕콕 치며 황금을 길어내겠다고 연기를 펼친 황 마술사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이상 가슴 졸이지 말고, 슬픈 군중이여, 부디 더 기쁜 소식을 들어주시라!
이른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른다며 생명의 진화를 얘기할 적에, 삼엽충과 공룡의 화석 등 죽은 동물 뼈다귀들을 늘어놓고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정복하는 ‘먹이사슬’이며 ‘힘의 법칙’을 얘기할 적에, 메탄가스로 뒤덮인 돌덩어리 지구 곳곳에 푸른 이끼가 돋아나며 40억 년 동안 지구어머니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설파한 과학자가 있었다.
1970년대 린 마굴리스는 지구별만큼 정교하고 신비한 시스템인 세포를 들여다보며, 이 둘은 장구한 세월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진화한 존재라는 사연을 발표했다. 결론적으로 지구어머니의 모든 자식은 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한 ‘공동살림체’임을 밝히고, 놀라운 존재 ‘지구’의 애칭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라는 이름을 헌정했다. 한편, 세포들은 수십억 년 생명 진화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가장 놀라운 사연인즉, 이들을 더 높은 차원의 생명활동으로 이끈 진화의 동인은 공격과 정복을 일삼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아니고, 세포 내 기관들이 각자의 살림을 하다 더 큰 일, 진화의 도약을 위해 공동살림, 즉 공생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이야기에 정통 과학자들은 “가이아는 암컷 들개”라며 길들여지지 않는 그녀의 야생적 학문 태도를 조롱했고, 박사 논문으로 제출한 ‘세포 내 공생설’에 대해선 입을 다문 채 반대 의견조차 아까워했다. 그러나 20여 년 세월이 흐르며 ‘세포 내 공생’은 고도로 발달한 생명의 전략이며 자연의 질서임이 확인돼 대학 교과서에 자리잡았고, 이에 대해 마굴리스는 “남자들이 물리적 힘의 법칙으로 수백만 년의 진화를 이해하고 설명한 데 비해, 나는 수십억 년에 걸친 생화학적 조화와 절묘한 변화를 겪은 생명체의 공생에 주목했다”고 활짝 웃었다.
‘가이아설’과 ‘세포 내 공생설’ 등 파격적인 진실로 논란을 일으키고 대중들에게 과학의 생각거리를 던져주던 그녀는 <코스모스>와 <콘택트> 등의 과학 저술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천문학자인 첫 남편 칼 세이건과 함께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과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토론하며 열심히 연구했다. 또 아이 넷을 낳아 기르며 연구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생명의 진화는 ‘로또’를 차지하는 조급한 꾀나 힘이 아니라 수십억 년을 거쳐 ‘공생의 길’을 가는 자연의 진리임을 가슴으로 이미 느끼고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정략결혼 만세? 이사벨라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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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정략결혼으로 남북, 아니 스페인 동서남북을 통일시켰다. 네 나라로 갈라져 있던 상황에서 가장 큰 두 왕가의 후계자인 남녀가 1469년 결혼하니 이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이었고, 800년 남짓 영화를 뽐내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까지 통합하니 이는 통일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왕녀들의 팔자는 권력 혹은 운명의 장난 앞에 더욱 무력할 따름이라, 이복 오빠 헨리 4세가 카스티야의 왕위에 오르자 세 살 먹은 이사벨라에게는 공포의 유년기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없던 헨리 왕과 반대파의 대립 사이에서 그녀의 남동생 알폰소가 독살당하고, 그 틈에서 이사벨라 공주가 헨리 왕의 후계자라는 운명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음해 적대국이던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 페르디난드와 혼인을 맺자, 기다렸다는 듯 헨리 오빠는 후계자를 자기 딸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5년 뒤 그가 세상을 뜨고, 이후 5년 이사벨라는 조카 사위와의 싸움 끝에 다시 카스티야의 군주가 되고 남편 페르디난드는 아라곤의 군주가 된다. 더 이상 완벽한 결합이 어디 있을까. 귀족들의 힘을 잘라내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대대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이들 부부는 신앙까지 부창부수라, 다음해인 1480년부터 대대적인 종교재판을 시작해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며 신비주의에 빠진 이단을 샅샅이 색출하고 가톨릭인 척하며 몰래 자기들 신앙을 계속하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를 응징하기 시작하니, 당시 교황이신 식스투스는 이런 심판을 정당화하는 교회칙령을 발표하시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는 ‘님들이 곧 가톨릭’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시다, 서기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하신 과거사 회개 및 반성 목록에서 무척 민망한 인물 중 한 분으로 찍히셨다.
1492년 이들 부부는 드디어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유대인들까지 시원하게 쓸어버리니 “계란을 세워보라”는 벤처투자가다운 질문을 굳이 생략한 건 아니었어도 “여왕 폐하의 신대륙”이라며 지도를 들고 온 젊은이에게, 더 이상 관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특히 “나의 백성인 인디언들도 하느님의 귀한 창조물이니 본국의 백성과 마찬가지 정의와 공정함으로 대하라”고 콜럼버스에게도 당부를 했다.
광활하게 열린 이사벨라 여왕의 마음은 그녀의 문장에 새겨진 ‘ne plus ultra’(더 이상은 없다)에서도 드러난다. 1504년 쉰세 살에 승하하실 때까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만큼 모든 일을 달성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정략결혼은 인류가 찾은 최고의 평화정책일 수 있겠다 싶다. 예컨대 70년대 남북 왕가의 후계자 둘이 결합되었다 치면, 한반도에 떨어진 노벨평화상은 더 일찍 더 젊은 남녀에게 돌아갔을 거다. 이사벨라 여왕을 떠올리며, 아니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밀레바 마리치
젊은 시절 밀레바 마리치의 행적은 높은 이상과 지적 호기심, 인내와 도전정신 등 마리 퀴리와 유사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 과학자의 비극적 삶’을 빠짐없이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 시작은 어디부터였을까?
오스트리아 제국 태생이지만, 출신지는 헝가리 변방의 분쟁지역이니 조선족 신세와 흡사. 근면성실로 제법 살림 일구신 부모님의 금지옥엽 귀한 딸이었으나, 선천성 고관절 탈골로 걸음마부터 죽을 때까지 다리를 절어야 했다. 다재다능하고 꿈 많은 소녀 고향엔 여학교가 없어 이웃나라 세르비아로 유학을 떠났고, 더 고독하고 차분해진 그녀, 내면으로 파고들던 습성 또한 그녀 비극의 씨앗이었을까?
그리움이 고향이 되고 주거부정한 자의 불안이 일상이 되면, 진지한 성품만큼 비례해서 사소한 일도 주눅들 핑계가 된다. 이를 상쇄할 전술로 밀레바는 취리히 공대에 입학한 이후 더욱 총명하게 사물을 직시했고, 또래 사내애들의 누이 노릇을 하며 학업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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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자라면 기꺼이 내 거부터 꺼내 썼을 거라는 비장한 말씀, 심하게 숙연했다. 내 난자도 뽑아가라고 여자들이 줄을 선 건, 숭고한 인류애로 여성 학대를 위장한 마초 과학자의 감언이설 탓이 아니라, 귀가 얇아 속고 또 속는 그녀들 탓일 뿐이다, 젠장.
양자역학을 연구하던 남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세계, 이른바 소립자의 엉뚱한 면모에 전율하며 19세기 끝 성탄과 20세기 최초의 새날을 함께 축하했다. 이 무렵 취리히 공대에서 교수 눈 밖에 난 말썽꾸러기 그녀의 남자친구는 사랑에 못 이겨 밀레바 마리치를 임신시키고, 혼전 출생한 ‘민망한 딸아이’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최근 남동생의 증언으로 간신히 존재가 확인되었다.
학생부부의 옹색한 신혼집은 팔방미인 아내의 헌신으로 학문과 예술과 낭만의 공간이 되었고, 1905년 부부의 합작품 ‘특수상대성이론’은 이 집 남편을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올려주었다. 결혼 뒤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애증의 강을 건너는 십여 년 동안 정신질환을 앓는 막내로 인해 부부는 더 서로를 원망했다. 일흔 넘도록 그 앨 돌보다 초라한 노파가 된 그녀, 1948년 쓸쓸히 숨을 거두고, 갈채받는 일이 좋았던 철부지 남편은 곧 새로운 사랑을 찾아,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내와 두 아이를 깨끗이 잊은 채 춥고 어두운 땅에 버려두었다.
500마르크의 벌레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10년 넘게, 유럽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된 2002년까지, 독일 지폐에 들어간 인물은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1:1이었다. 여성 인물 지폐 중 가장 고액권인 500마르크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과 그녀가 그린 벌레와 푸성귀로 장식됐다.
스무 살에 의붓아버지의 제자와 결혼하고 딸 둘을 낳지만,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녀 앞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남자와 곧 헤어졌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그녀는 몹시 경건해졌다. “시집가기 싫어 수녀원에 갔다”는 흔한 증언처럼, 그녀가 속한 신앙공동체에도 좀 자유롭고 싶었던 페미니스트들이 몰려와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정신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곳에서 번데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더 개방적인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비슷한 관심을 갖는 친구들을 만나고, 쉰이 넘은 나이에 지천명, 드디어 하늘의 뜻을 알아채고 날개를 펼친다. 그녀가 꿈꾼 곳은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풍요롭고 신비한 자연의 세계, 아마존 유역 수리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30만 명의 노예를 잡아다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죄악의 땅.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말라리아뿐 아니라 돈벌이에 혈안이 된 농장주들도 그녀가 넘어야 할 벽이었다. 갈등 속에서도 메리안은 새벽 일찍 일어나 딸과 함께 열대림을 누비며 곤충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고 기록을 남겼다. 1년 반 넘게 수집한 자료를 갖고 2개월 항해 끝에 무사히 돌아온 그녀가 내놓은 갖가지 표본과 양피지에 그린 아름다운 수채화, 그 보물 앞에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환호했고, 몇 년의 작업 끝에 출간한 <수리남 곤충의 변태>는 “벌레는 악마의 소산”인 줄 알았던 미개한 유럽인들의 편견을 씻어냈고, 각국의 생물학자와 그림 수집가들을 열광시켰다. 서양 할머니들 외롭게 사는 집에는 꽃 핀 오이와 민들레, 나비와 애벌레 등을 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 비슷한 세밀화들이 몇 점씩 눈에 띈다. 우리 어머니들이 혼수 준비하며 조각이불보에 그런 무늬를 수놓았던 데 견줘, 20세기 초반까지 서양의 규수들은 메리안 화풍을 따라 벌레나 식물의 단편을 그리는 자연화가 유행했다고 한다.
고릴라와 의문사 제인 구달이 침팬지의 수호자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데 견줘, 한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고릴라의 각별한 친구 다이앤 포시는 덜 알려져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1932년생이니 제인 구달보다 두 살 위인 그녀는 1954년 대학에서 수의학 공부를 위한 준비 과정을 마치고 재활의학을 전공했다. 장애인을 돌보는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다 1963년 아프리카 여행을 가 고릴라의 멸종 위기에 대한 강연을 듣고 이 분야에 매료된다. 처음에는 자이르로 갔다가 1967년부터 르완다에 정착해 18년을 고릴라의 친구로 살았으나 1985년 성탄절 다음날 자신의 오두막에서 의문사로 세상을 떴다.
인간과 많이 닮아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던 큰 몸집의 고릴라는, 우리의 편견과 달리 채식주의자일뿐더러 결코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으며 인간과 꼭 같은 희로애락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그녀의 작업은 체력적 한계와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안개 자욱한 산속 몇날며칠 같은 자리에서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숨소리도 죽여가며 머물다 보면 기력이 소진하고 때로 견디기 힘든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나 겸손하고 친절한 다이앤 포시는, 그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행동거지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무리 속에 들어가 새끼들을 함께 돌보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황홀한 체험을 통해 말 그대로 고릴라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지난해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호텔 르완다>에 묘사된 바와 같이 종족갈등으로 1994년 르완다에서는 80만 명의 집단 학살이 자행되는데, 이 끔찍한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은 다이앤 포시의 활동 지역이던 루엔게리주의 악질 지사로, 1985년 발생한 그녀의 토막살인 사건의 배후 인물 역시 같은 놈이라는 증거들이 수집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이태 전 고릴라의 친구가 된 사연을 적어놓은 책을 출간한 덕에, 시고니 위버가 다이앤으로 나온 영화 <안개 속의 고릴라>를 통해 우리는 그녀를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 지난해엔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한때 연인이었던 사진기자 밥 캠벨의 사진을 엮어 다이앤 포시 사후 20년을 기념하는 책도 나왔고, 올봄에는 그녀의 삶을 기린 오페라도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다.
열대림에서 죽다 도로시 수녀 인도 콜카타에 마더 테레사의 이름이 남았다면, 불법벌목, 토지강탈, 노예노동, 환경훼손, 인권침해로 악명 높은 브라질 파라에는 도로시 스탕 수녀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다. 다이앤 포시가 아프리카 르완다 숲에서 고릴라의 생존권을 지키다 비명에 갔다면, 도로시 수녀는 아마존 열대림의 생존권을 위해 헌신하다 개발이익에 눈이 먼 벌목꾼과 농장주가 고용한 암살범들의 총격으로 꼭 1년 전에 살해당했다. 1931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1948년 노트르담수녀회에 입회한 그녀는 해방신학을 공부한 뒤 ‘불의에 맞선 항거가 하느님께 복종하는 길’임을 깨닫고,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 곁으로 가라’는 부름에 응해 1972년 아마존 유역으로 들어가 30여 년간 빈민운동과 환경운동을 했다. 이 무렵 한국에 진출한 노트르담수녀회는 비인격적인 처우로 고통받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고 있던 버스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자긍심 회복을 위한 교육과 그녀들의 인권보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자연 학대든 여성 학대든 약자를 착취해 얻는 이익에 반하는 활동은 포악하고 뻔뻔한 짓을 벌이는 이들을 적으로 만드니, 아마존에서는 벌목업자·목장업주와 농민·환경운동가들의 대립이 그치지 않았다. 1985년 이래 브라질 전역에서 1400여 명이 살인청부업자의 손에 죽었고, 도로시 수녀가 활동한 파라에서 희생된 주민 수만 해도 1988년 살해당한 아마존의 전설 치코 멘데스를 포함해 500명이 넘는다. 도로시 수녀의 얼굴에 날아든 총알은 그녀가 읽던 성서를 손에서 떨어뜨렸고 수녀복을 피로 적셨다. “1986년 거기 갔을 때도 어떤 남자가 우리를 따라다녔다. 땅주인들은, 돈 몇 푼이면 언제라도 귀찮은 사람들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했다.” 장례미사에서 그녀의 동생 마그리트는, 희생자들의 뒤를 이어 죽음의 길을 간 언니는 진작부터 그 순간을 각오했으며,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가엾은 하수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기 목숨을 창조주께 감사 예물로 바쳤을 거라며 울먹였다. 습격 두 달 전 브라질 인권상을 받는 자리에서 도로시 수녀는 정부 차원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무시됐다. 아울러 그치지 않는 의문사의 해결을 촉구하며 우림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으나 부패 권력과 결탁한 범인들의 자취는 미궁으로 사라진다. 룰라 대통령은 하위 20%의 인구가 단 2%의 부를 소유한 현실을 바꾸겠다고 공언했으나 경제적 압박이 심각한 상황에서 정치적 호언은 말잔치에 그칠 뿐이라, 도로시 수녀의 희생 뒤에도 함께 활동하던 주민 다섯 명이 더 살해됐고 이들과 함께 아마존도 죽어나간다. 지구 전체 우림의 40%에 이르고 지구 전체 산소량의 20% 이상을 공급하는 아마존 열대림은 지금도 1분마다 축구장 8개 넓이씩 사라지고 있다. 2월12일은 지구의 허파 아마존을 지키다 스러진 도로시 수녀의 거룩한 활동을 기리는 날로 기념해야 한다.
대신 울어주는 큰무당 김금화
시대 탓일까? 70 넘고 80 넘은 할머니치고 기구하고 서러운 인생의 고비를 넘지 않은 분이 얼마나 될까. 전쟁과 폐허를 헤치고 살아남은 그녀들 삶은 대개가 시난고난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홉 살에 신병을 앓기 시작해 딱 60년 전 정월 대보름, 열일곱에 내림굿을 받은 큰무당 김금화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삶은 유난히 돋보이는 한 편의 서사극이다. 14살에 시작된 고된 시집살이, 2년 만의 도망과 곧 이어진 1년간의 지독한 무병은 물론 한국전쟁 동안은 혹세무민을 이유로 인민군에게 끌려가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미신 타파’의 기치를 걸고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탄압을 하며 덩달아 우쭐해진 동네 건달들을 보내 굿판을 헤집곤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다섯 남매 중 그녀에게 유난히 모질던 외할머니도 그렇고, 문화 권력에 빌붙은 하수인들뿐만 아니라 가난해서 예단을 못해온 며느리 구박하느라 “저고리 바느질해놓으면 섶 잘못 달았다고 북북 뜯어서 흙바닥에 짓이겨놓고, 버선코를 박아놓으면 솔기가 안 맞는다고 얼굴에 내던지던” 시어머니도 알고 보면 그녀를 큰 만신으로 만든, 제 몸 던져 그녀를 키운, 어이구, 영혼의 스승이었다. 무당이던 외할머니는 공수를 주면서 펑펑 울었다. “손녀딸아, 나는 양반집에 시집 와 아들 못 낳아, 아들 낳게 신령님께 기원하다 신이 들어 무당이 됐다. 그런 내가 왜 몰랐겠나. 어찌하든 막아보려고 일부러 너한테 몹시 굴었건만 오늘 이 길 들어서게 됐으니 남 욕되게 하지 말고 큰 사람 돼라.” 나와 남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무당. 그러나 경계는 위태롭게 마련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아니 여성이며 남성인 경계.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를 보면 피부 빛의 경계도 큰 내공을 쌓을 때까지는 존재의 위기 지대라, 어쩌면 경계는 영혼의 성장을 위해 꼭 순례해야 할 땅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우리 사회의 저급하고 천박한 가치관과 거기 놀아나는 의식의 서툰 수작 탓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자유로운 의식을 지녔다면 경계에 드는 일이 반드시 비극적인 운명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남의 아픔을 제 것으로 삼아 대신 아파주고 대신 울어주던 큰무당 김금화의 속살이 짓무르는 속내 이야기는 영혼의 성장이 갈급한 시대적 소재기도 하다. 최근 소설 속 인물 ‘계화’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자기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기 운명을 덫이 아니라 힘의 원천으로 삼아 알을 깨고 나오라고 속삭인다 |
102살 인생 레니 리펜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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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넘어 공포처럼 다가오는 ‘노령화’ 사회, 아니 사회 말고 노령화 당신, 어떤가? 불혹에서 지천명 넘어 이순과 고희 지나고, 할 일도 별로 없는데 여든여덟 미수, 아흔아홉 백수 척척 지나 상수라는 백살도 다 살아버려 더 이상 붙일 이름도 안 남았는데, 당신 아직도 끈질기게 목숨이 붙어 있다면?
1902년 태어나서 102살에 세상을 뜬 레니 리펜슈탈을 보면 참, 100년도 별거 아니겠다 싶다. 현대예술 여기저기서 새싹이 돋던 시절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뭐든 다 하며 성장한 다재다능한 그녀는 그림과 춤, 영화와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 눈부신 족적을 남겼다. 무릎 부상으로 ‘영혼을 해방시키는’ 무용가의 길을 접었던 ‘독일의 이사도라 덩컨’ 레니는 손수 대본을 쓰고 춤 잘 추는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며 몸소 감독한 영화 <푸른 빛>으로 세상의 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마침 레니의 재능과 미모는 위대한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눈을 매혹시켜,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기록하고 편집한 ‘나치뉘우스’ 최고의 걸작 <의지의 승리>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전설적 재능뿐 아니라 나치의 힘까지 온 세계에 과시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으로 스포츠와 미디어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결합을 예고하며 그녀는 제3제국 나치의 최고 예술가로 꼽히지만, 종전 뒤에는 전범 혐의로 더 이상 영화작업에 손을 댈 수 없게 된다. 나치 당원이 되는 것만은 끝까지 거부했노라고 법정에서 변명했으나, 히틀러의 군대가 파리를 침공했을 때, “게르만 민족을 깨어 일으킨 위대한 지도자”에게 그녀는 깊은 감사를 느낀다며 전보도 쳤다.
어떤 정치적인 계산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 특히 벌거벗은 인체에 감복한 탓에 영상미의 궁극을 추구했을 뿐이라는 레니 리펜슈탈 할머니는 이순 넘어 아프리카 수단에 가선 조각품 같은 누바족의 몸매에 숨이 막혀 10년 남짓 그 율동을 필름에 담고 두 권의 화보집으로 출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98살의 나이로 헬리콥터를 타고 친구들을 방문하러 가던 길에 사고를 당해 하늘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고희 넘길 무렵 요통에 좋단 소리를 듣고 시작한 다이빙으로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갔다 그 장관에 매혹돼 70대 후반에는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딴 뒤, 이번에는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10여 년 동안 물속을 촬영한 필름들을 모아 100회 생일을 기념하는 화보로 출간했다.
2002년 레니 할머니의 상수, 즉 100살을 기념해 독일 정부는 “치매 노인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전범 목록에서 빼주기로 결정했으나, 위대한 그녀의 필름에 엑스트라로 동원된 뒤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집시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정”이라며 통탄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에 당국은 “더 이상 경거망동할 수 없는 나이”라며 그녀를 한사코 변호해줬다.
체 게바라의 누님 플로라 트리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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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의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탕은 페루 출생으로 스페인 무적함대의 장교였던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803년 사생아로 태어났다. 한반도에선 열한 살 먹은 순조의 등극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그늘이 짙어질 무렵 프랑스에선 생시몽, 푸리에 등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미래는 여성의 것”이라고 우아하게 떠들었으나, 동시대를 맨몸으로 부딪치며 산 그녀는 “위선 혹은 비굴로 위장하지만 여성은 결국 종으로 태어난다”며 절박한 삶의 현장을 토로했다.
다섯 살 먹은 플로라의 부친이 죽자 상속권이 없는 모녀는 사회적 차별에 더해 경제적 곤란까지 사무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열여덟 먹은 딸을 어머니는, 그 애가 다니던 공장 사장에게 떠밀어 시집보냈다. 그 앤 두 아이 낳고 지긋지긋한 남편과 살기 싫다며 남미로 여행 가는 부잣집 가이드로 따라나섰지만, 여성은 이혼청구권이 없던 시절이었다. 술꾼에 노름꾼에 손찌검을 일삼던 남편은 ‘불손한’ 마누라 잡아온답시고 지 딸을 납치해 성폭행까지 범했어도 곧 석방되고, 놈의 갈겨대는 총질에 플로라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페루에서 손꼽히는 부자 귀족인 삼촌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받길 꿈꾸었으나, 사생아인 조카는 법적 권리가 없었다. 더욱이 “가장에게서 도망친 여자는 부랑자”일 뿐 사회에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분노한 그녀는 후일 고갱의 엄마가 되는 딸에게 “세상과 맞서 싸워 더 이상 부랑자 취급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상속권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1년 남짓 페루에 체류하면서 기행문 연재하는 작가로 이름을 떨친 플로라 트리스탕은 ‘이주 여성’의 삶을 통해 이들이 부당한 대우와 협박을 받지 않도록 제재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최초의 외국인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다. 법적 보호 장치가 없던 나폴레옹 시절, 여성 가장이던 그녀가 작성한 이혼청원서와 남성 중심의 평등권 및 시민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의 저술은 프랑스 양성평등 사상과 여성운동의 거름이 된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1840년 펴낸 <런던기행>은 산업혁명의 여명이 깃들던 영국,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빚어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과 노동자,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이 겪는 착취 상황 및 성적 학대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1842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노동조합>은 극렬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인민의 해방을 선언했던, <공산당 선언>보다 한발 앞선 ‘위험한 문건’이기도 했다.
1844년 총격으로 스러진 그녀의 장례식 이후 뒤를 잇는 후배들이 속출했으나 1848년 노동운동은 파국을 맞고, 역사에서 사라졌던 그녀의 이름은 폴 고갱이 죽은 뒤 그의 외할머니로 간신히 복원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배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다시 조명된 그녀의 발자취는 체 게바라의 빛나는 누님으로 특히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상당한 숭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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