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비행 소녀 아멜리아 에어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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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도 비행소녀들이 하늘을 누비고 있다. 하늘을 나는 꿈을 이룬 파일럿은 물론, 2002년을 기점으로 공군사관학교 여학생들은 전투조종사의 활동까지 말끔하게 해낸다. 이들의 선배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1897년 미국 캔자스의 애치슨이라는 작은 도시 출신으로 극성맞은 개구쟁이 소녀였으나, 시대가 요구하는 조신한 숙녀가 되는 길을 찾아 여학교 나와 간호사 교육도 받고 군병원에서 일하다 사회복지사가 되어 이민자 출신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하지만 서른살 되던 해, 자기보다 네살 아래인 우편배달부, 항공우편을 담당하던 린드버그가 대서양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문득, 제 안에 접혀진 두 날개가 퍼덕대는 소리를 듣고 본능에 충실하기로 맘을 바꿨다. 비행소녀를 꿈꾸던 당시 언니들은 있는 돈 몽땅 털어 비행학교에 등록하는 붐이 일었다 한다. 운 좋은 그녀, 이듬해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기에 한 자리 얻어 타지만 손수 기계를 몰고 싶은 욕망을 잠재울 수 없어 용기와 담대함을 자랑하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포스터로 만들어 방 안 가득 붙이고는 정진하길 4년, 1932년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 이어서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대륙 종단까지 일취월장 승승장구, 국민 영웅이 되어 그 무렵 태어난 계집아이 중에는 아멜리아란 이름이 많았다 한다.
아멜리아의 활약 뒤에는 그녀를 지지하며, 멋진 활동을 책으로 엮어내는 남편이 있었다. 허술한 창밖으로 휘익 날아간 지도를 주우려 불시착을 감행하고 날개가 떨어져나가면 또 잠깐 쉬며 그걸 찾아 이어붙이고 날아야 했던 목숨을 건 대모험의 이야기들을 더 잘 듣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강연을 주선하며, 아내의 훌륭한 기록 경신을 위해 물심양면 헌신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7년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오겠다고 떠난 아내의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녀의 전설은 더욱 신비해졌다. 아직도 전말이 드러나지 않은 실종 사건, 이를 추적하던 미군쪽 기록에 뭔가 은폐된 흔적이 확인되면서 진짜 미스터리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일본 패망 무렵 남편에게 보낸 편지는 사이판을 점령했던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쓴 것으로 “나 잘 있고, 엄마한테 안부”라는 내용이었다. 비행기 추락 뒤 미국인 비행소녀를 봤다는 사이판 주민들의 증언, 2차 대전 직전 일본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녀에게 뭔가 간곡한 부탁을 했다는 소문, 일본군에게 처형당했다는 추측, 종전 뒤 그녀가 신분을 감춘 채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까지 마치 김현희와 관련한 소문처럼 ‘국가 혹은 비밀’ 그런 야릇한 냄새만 자욱하다.
다만 실종 직전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사연만이 그녀의 분명한 진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떤 나라에 살든, 여자도 남자들이 꿈꾸는 일들을 죄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실패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도전이 될 테니까요.”
난년 중 난년 비행소녀 박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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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에로스와 통정하며 ‘오! 마이 섹스’를 쌔근댄다는 모 기자의 교성 덕에 모 주간지가 품귀 현상을 빚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중 ‘난년들’이란 제목을 보고 박경원을 떠올리다 전혀 다른 내막을 알고는 좀 낯뜨거웠다. 난년들 중 난년인 박경원의 삶과 죽음을 그린 <청연>(푸른 제비)이란 제목의 영화가 드디어 완성돼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됐다니, 그 영화를 보고 이 땅에 또 얼마나 많은 비행소녀가 탄생하고 난년들이 될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렌다.
우리의 원조 난년인 권기옥과 박경원은 각각 평양과 대구에서 1901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나는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 결심을 하고 일찌감치 상하이로 망명해 중국 공군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여든살이 넘도록 장수를 누리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번영을 모두 목격한 비행소녀가 권기옥인 데 비해, 일지매의 누이를 떠올리는 억척 소녀 박경원은 일본에 유학했던 신여성으로 미국의 원조 비행소녀 아멜리아와 신기할 정도로 꼭 닮은 하늘 길을 갔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얘기를 내내 듣고 자란 박경원 역시 애초에는 조신하게 차려입고 고통의 늪에 빠진 환자를 돌보는 간호원 교육을 받았지만, 빨간 마후라 휘날리는 조선 최초의 비행소년 안창남의 번쩍이는 비행기를 보고 넋이 빠진 뒤 당장 자기 삶의 기수를 돌려버렸고, 또 비행 도중 원인 모를 사고를 당해 요절했다.
더 공부해 의사가 되겠다고 부모님을 속이고 다시 동경으로 건너온 활달하고 덩치 좋은 박경원, 솥뚜껑처럼 두툼한 손에 힘이 장사라 어떤 남자와 맞붙어 씨름을 해도 지는 일이 없었고,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할아버지와 염문설이 떠돌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니 그녀의 에로스는 어땠을까 무척 궁금하다. 그 할아버지와 함께 신사참배를 하고 일본군의 선전 비행에 동원되는 등 친일 행적 역시 논란거리이지만, 그녀는 당시 식민지 출신의 가난한 고학생 주제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채 ‘조센징’이란 말만 들렸다 하면 쫓아가서 따귀를 올려붙일 만큼 기개가 넘쳤다 한다.
1928년 3년짜리 동경 비행학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200시간의 비행 기록도 다 채운 그녀, 태평양 횡단 연습을 위해 먼저 만주까지 날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1933년 기쁠 일 별로 없던 시절, 고국의 하늘을 빼놓고 만주 하늘부터 날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그녀의 금의환향을 학수고대하며 감격의 눈물을 닦고 있는 착한 동포들에게 그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여의도 공항에 먼저 착륙하기로 노선을 수정했다. 이날 여의도가 보이는 한강 둑에 사람들이 몰려와 정오 무렵에는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동포들의 뜨거운 환영을 눈앞에 둔 박경원, 선글라스를 쓰고 날렵한 비행기 ‘청연호’에 올라탄 채 시동을 걸고, 현해탄을 넘어 서울 하늘에 멋지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갑작스런 안개에 갇혀 일본을 벗어나지 못한 채 어느 산중에 추락하니, 비보를 접한 조선과 일본 국민들은 함께 슬픈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녀를 살려내라!” 울리케 마인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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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정권이 성립된 1934년에 태어난 울리케 마인호프는 예나의 박물관장이던 아버지를 다섯 살에 여의고, 소련이 동독을 점령하자 미술사학자였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열두 살에 서독으로 넘어오지만 2년 뒤에는 그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다. 부모님의 친구로, 나중에 독일평화연맹 창설자가 되는 레나테 리멕 교수가 그녀와 자매들의 양어머니 노릇을 해준 덕에 지적으로는 유복한 청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대학 입학 뒤 유려한 글발 날리는 인문학도가 되어 당시 서독 군대의 핵무장 움직임에 반대하는 좌파 학생운동의 짱으로, 아데나워 총리의 무자비한 반공 이념에 반기를 드는 한편,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는 독일 좌파의 대표적인 시사평론지 <콘크레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비판적 성격이 강한 TV 시사프로의 대본작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961년 <콩크레트> 발행인 뢸과 결혼해 쌍둥이 딸을 낳고, 1965년에는 극우파의 대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비방하는 기사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68혁명의 불길 속에 마초 남편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여성운동의 기치를 내건 선언문을 발표하며 들떠 있던 그녀, 학생운동의 영웅이던 루디 두치케가 암살당한 사건 이후, 분노의 딸로 다시 태어나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불경한 조직을 꾸린다.
1970년, 후배인 안드레아스 바더의 구출을 기획하고 감옥에서 꺼낸 뒤 행동대원들과 요르단으로 건너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와,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적군파를 결성해 도시 한복판에 있는 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극우 권력을 제거하는 테러리스트로 활약하는데…. 남미 전사들이 밑바닥에 속하는 농촌 인민들과 손잡고 민심을 쌓아간 데 견줘, 적군파 언니 오빠들은 조금은 병적이고 급진적인 행동파 지식인들이었다.
1972년 살인 및 강도죄로 체포되고, 상당한 관리와 마땅한 배려가 요구되는 정치범이던 그녀는 1974년 8년형을 선고받는다. 슈탐하임 교도소 독방에서 복역 중이던 그녀는 추측만 무성한 가혹 행위에 항거해 몇 차례 단식투쟁을 벌이는 갈등을 빚다 1976년 5월9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사인은 자살이라는 공식 발표에도 4천 명이 운집한 그녀의 장례식은 곧 “그녀를 살려내라!”는 시위로 변했으며, 그 죽음의 배후에 대한 의구심은 독일 현대사의 가장 불미스런 미스터리로 남았다.
쌍둥이 중 동생인 베티나 뢸은 맹렬 기자로 활약하며, 유럽의회 녹색당 당수가 된 68세대의 또 다른 영웅 다니엘 콩방디의 어린이집 성추행 사건과 독일 외무부 장관이 된 요슈카 피셔의 폭력행위 등 진보 마초들의 불미스런 과거를 파헤쳐 세간의 물의를 일으켰고, 한편 어머니 주검의 뇌를 빼내 포르말린에 담아두었던 의과대학 교수들을 고발했다. 울리케 마인호프의 정의로운 분노와 누적된 시름 또한 2002년 그녀의 주검을 복원하는 장례를 다시 치렀던 똑똑한 효녀를 지켜보며 조금은 잦아들었기를 빈다.
구원인가 덫인가 마거릿 대처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영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 총리였던 그녀, 최근 팔순잔치를 치렀다. 화학을 공부하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정치를 하겠다’는 소녀 시절의 황당한 꿈을 잊지 않았던 그녀, 1992년 귀족 칭호를 얻어 케스티븐의 남작이 되셨던 마거릿 대처 할머니는, 세월을 잊고 부시 대통령과 전화로 수다를 떨다 20분 늦게 행사장에 도착해 자기 후임이던 존 메이저와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롯해 여왕마마와 수백 명 VIP를 기다리게도 했지만, 수렁에 빠진 ‘대영제국’을 일으켜세운 구원투수였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둔하고 비대해진 노조의 횡포 탓에 자동차, 운수, 병원, 청소 등 사회 기간 부문이 줄곧 마비되고 물가는 치솟는 악순환의 덫에 걸린 채 IMF 구제금융을 받을 만큼 경제가 파탄난 이른바 ‘영국병’을 말끔히 고쳐놓은 여자. 그녀가 보수당 당수가 되고 영국 최초 여성 총리가 되었을 때, 아무래도 남성 정치가와는 다른 면모가 있으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대처는 어떤 남성보다 대차게 노조에 맞섰고, 몹시 강경하되 합리적인 대처 방안으로 그들의 허세를 꺾어놓았으니, 아둔하고 혼탁한 노조와 강철 여인의 만남에 따른 결과는 타산지석으로 삼음직하다.
또한 아르헨티나와 붙은 포클랜드와의 한판 승부에 핵잠수함까지 동원해 ‘제국의 영화’를 확인시킴으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조폭 두목 같은 정치 행태를 스스럼없이 재현했다. 살판났다고 환호하며 날뛰는 군중 틈에서 “쓸모없는 전쟁에 희생된 내 아들을 살려내라”는 어머니들의 목 놓아 울부짖는 소리쯤은 밟아버려도 끄떡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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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녀는 정직과 소박, 자조 정신과 보살핌의 화신인 빅토리아풍의 현모양처로, 나라 일이 암만 중해도 집에만 가면 완벽한 가정주부로 변신해 밥도 손수 짓고 빨래도 직접 해 낭군과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는 스위트 홈을 사수하고도 “저는 보통 주부입니다”라며 끝까지 겸손을 떠는 슈퍼우먼 강박증을 퍼뜨렸으니, 가부장제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전설 속 ‘영원한 구원의 여인’이 아닐 수 없다.
대찬 리더십과 능란한 외교정책으로 철의 장막 소련을 붕괴시킬 계략도 철두철미 세웠던 철의 여인 대처는 레이건과 손잡고 고르바초프의 등을 두들기며 냉전의 지루함에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대신 국경 없는 시장을 활짝 열어 불타는 경제전쟁의 포문을 열게 했고, 그에 따른 세계 질서의 변화는 21세기 지구촌의 재앙 ‘세계화의 덫’이 되어 우리 발목을 붙드는 새로운 족쇄가 되었으니, 이 족쇄에서 빠져나올 계략과 실천은 그녀와는 전혀 다른 감성의 정치 지망 소녀들에 의해 꼭 이뤄지길 소망할 따름이다. 아울러 또 다른 족쇄들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무수히 경계하고 다짐할 일이 있으니, 권력을 나누자고 소리치던 집단의 꾸준한 자기 점검과 성찰 그리고 역사로부터 배우는 겸허함이다.
PC의 바이런 에이다 러브레이스
1975년 미 국방성은 새 프로그래밍 언어를 발표하며 그 이름을 에이다(ADA)라 붙였다. 최초의 컴퓨터가 나오기 150년 전, 오늘날 PC의 가능성까지 예견했던 그녀의 원래 이름은 에이다 바이런,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친딸이었다. 귀족 출신인 그녀 어머니는 1815년 결혼하고 딸아이가 태어났지만 “우울하고 정열적이며, 참회하는 동시에 또 후회 없이 죄를 범하는 바이런적 인물”의 원조 바이런과 곧 절연한 탓에, 에이다는 8살에 세상을 뜬 부친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살 규수가 된 에이다, 시집가서 3년 뒤 남편의 작위 수여로 러브레이스 백작 부인이 되시고 또 줄줄이 아이를 낳고 살림하느라 수학을 팽개친 날이 계속되면서, 그만 우울증에 빠진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파티에 와서도 산업혁명의 열매인 발명품들에 대해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눴다는데, 여기 끼어든 백작 부인 러브레이스는 갑자기 생기가 돌고, 이를 본 남편과 어머니는 그녀가 하고 싶은 걸 그냥 하게 놔두기로 합의를 봤다. 이 무렵 고귀한 재능의 에이다를 알아보고 환호한 또 다른 천재, 찰스 배비지 아저씨는 프로그래밍 역사의 기원이 되는 ‘해석기관’ 강의를 하고 다니며 이를 프랑스어 책으로 출간하는데, 에이다는 그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는 중에 모두 터득하고 해석까지 보태, 하드웨어 작동이 아닌 소프트웨어 개념과 관련해 훨씬 더 복잡한 계산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줄 루프, 점프, 서브루틴 그리고 ‘if’ 같은 경로들을 고안한다. 그리고 이런 기계가 앞으로 과학 발전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작곡하고 그래픽을 만드는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것이라는 엄청난 잠재력을 정확히 예견했다. 이렇게 똑똑했던 에이다, 수학을 통해 뭐든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확률의 법칙을 통해 게임에 이기는 법을 알아내려던 그녀는 엉뚱하게 도박에 빠져 나머지 인생을 죽쑤고 만다. 엄마도 남편도 부자였지만 제 몫의 재산이 없는 여자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다 급기야 자궁암까지 겹쳐 36살,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요절했다. 배비지 아저씨와 손을 맞잡고 경마에 대박 내는 프로그래밍을 만들어서 손해를 메울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그녀, 미래를 예측하고 제 맘대로 장난하는 일, 그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패가망신하는 일을 좀 삼갈 수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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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숍의 전설, 아니타 로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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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사업은 과대포장에 쓰레기를 양산하며 특히 여성들에게 거짓과 사기를 일삼아 이뤄질 수 없는 꿈을 파는 악덕산업”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아니타 로딕. 맨손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그 이름도 유명한 바디숍을 일군 전설적인 기업인이다.
‘먹고살 길’을 찾아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그녀의 어머니는 해변에 작은 식당을 열어 밥도 팔고 술도 팔아 딸 셋과 막내아들을 자랑스레 키워낸 억척 아줌마였다. 열 살 때 돌아가신 양아버지 헨리 아저씨가 자기와 남동생의 친부였다는 사실을 안 순간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고 킥킥거리는 아니타에게 세상은 마냥 태양빛 가득한 환희였다.
세상이 너무 궁금해 시골학교 교사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알뜰히 모은 돈 긁어모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지를 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들렀던 그녀는, 인종차별의 현장에 충격을 먹고 마지막 행선지인 스위스에 가서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온다. 거지꼴로 나타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찍어둔 사윗감이 있는데 잘 왔다고 화들짝, 그날 밤 당장 만난 아니타의 배필 고든은 여지껏 바디숍의 공동 운영자다. 급하게 아이부터 만들고 둘째를 또 임신했을 무렵, 두 사람은 미국의 히피 마을에 가서 좀 놀다가 결혼식도 거기서 올렸다.
젖먹이 딸 둘을 데리고 어머니 식당 일을 도우며 빌어먹어야 할 무렵, ‘그녀의 고든’은 어릴 적 꿈이 생각나 아내가 선선히 보내준 여행 ‘말 타고 세계 일주’를 떠나고, 그녀 또한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배낭여행 중 만난 원주민들에게 배운 화장법들을 활용해 순수자연 ‘동동구리무’를 만들고, “고객이 필요한 만큼” 덜어서 파는 방식은 포장 중심이 아니라 내용 중심의 ‘리필’ 전통이 되었다. 곰팡이가 자욱했던 동네 귀퉁이 가게는 아니타의 꿈의 궁전으로 진한 초록빛이 인상적인 환경 비즈니스의 모델이 되고, “생명력이 아름답다”는 그녀의 왕수다는 멋진 슬로건이 되었다. 또한 제3세계 원주민과 직접 ‘정의구현 무역’(fairtrade)을 실천하는 아니타의 방식은 1980년대 내내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바디숍식 환경경영의 희망이기도 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연출한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에 열혈 투사로 모습을 드러낸 그녀, 자연 파괴적인 기술개발과 반인륜적인 기업을 향해 독설을 뿜어대는 그녀는 이윤 극대화가 최고의 미덕인 자본중심적 경영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절대적 가치를 가운데 놓고 세상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행복한 일에 앞장서왔다.
하지만 1990년대 북미를 비롯해 한국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로 진출해 현재 50개 나라 곳곳에 프랜차이즈 매장을 설치한 바디숍은 ‘동물실험 반대’ ‘삼림훼손 금지’ 등 선도적인 환경친화적 기업 이미지를 101% 활용하는데, 한국에서도 짭짤한 재미를 보는 각 매장의 분위기와 환경 마케팅의 상술이 너무도 두드러져 보이는 요즘 추세는 어느덧 이순이 넘은 아니타 로딕의 진정성마저 의심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왜 바르셀로나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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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이 터져 프랑스가 로마에서 철수하고 드디어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70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90년 최초의 의과대학 여학생이 된 마리아 몬테소리는 남학생들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강의실에 들어가고, ‘벌거벗은’ 주검을 다루는 해부학 시간에는 그들이 실습을 끝내고 모두 나온 뒤 혼자 들어가서 보아야 했다.
소아정신의학과에서 임상 경험을 쌓은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정신지체 아동들을 접하며 놀라운 발견을 한다. 포로수용소와 다름없는 방에서 죄수처럼 사는 아이들이 떨어진 빵 부스러기로 ‘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에게는 ‘먹을거리’만큼 중요한 게 ‘놀거리’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년기 아이들의 생각주머니는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개발하면서 ‘자연스레’ 커진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사업 수완도 탁월한 그녀, 1906년 ‘어린이 집’을 개원해 자기 실험을 제도적으로 실현할 터전을 잡고, 나무로 만든 알파벳에 빛깔을 입혀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조물거리며 글자를 배우게 하는 교재를 개발하니, 이는 ‘몬테소리’라는 이름을 달고 오늘날까지 부가가치를 보태 널리 판매되고 있다. 그녀의 유치원은 세계적 모델이 되고, 특히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네 살배기가 일기를 쓰는” 기적의 조기교육으로 엄청 팔렸다. 그녀가 결론내린 가장 중요한 교육 원칙은 “관찰하며 기다리는 것” 즉 ‘냅도’였지만, 그 실천은 오히려 정반대로 진행된 셈이다.
확신은 과장을 낳기 십상이라, 그녀는 위험 소지가 많은 아이들을 선별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키우는 학습 도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으니, 1922년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그녀를 교육부 장관에 임명하고, 국가의 후원까지 받게 된 몬테소리 교사들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자신들이 ‘인종 개량’을 위해 큰일을 한다는 자뻑에 심각한 망상까지 앓게 되었다.
정신이 든 그녀, 저항의 표시로 1932년 이탈리아를 떠나 다 큰 아들이 살고 있는 바르셀로나로 간다. 유아교육 교재 개발을 함께 했던 동료와 연인이 되고 임신까지 했던 그녀, 남자는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해 미혼모가 되지만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신분을 숨긴 채 시골의 유모 집에 맡겼다. 유아교육에 그녀가 유난히 혼신을 다한 까닭은 그에 대한 미안함과 아픔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역사상 전대미문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21세기 한반도, 우리 유아들이 겪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고약하다. 돌봐줄 손길이 없어 비참한 죽음을 맞고, 밥술 좀 뜨는 집 애들의 상당수는 각종 재능을 발굴당하느라 24시간이 모자라는 현실이니,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1952년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뜬 마리아 몬테소리가 겪어야 했던 여러 딜레마가 우리 현실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슬람의 큰 언니 나왈 엘 사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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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와 클레오파트라, 이시스와 오시리스… 고고학 혹은 신화로 다가오던 이집트. 그 오래된 나라 여자 하나가 지난해 이맘때,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에 끼어들어 연대서명을 했다. 이집트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던 나왈 엘 사다위. 24년째 집권을 놓지 않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견제 앞에 총선 몇 달 전, 무소속 후보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1980년 그녀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널 <미즈>에 여섯 살 소녀 시절 겪었던 악몽을 고발했다. 아직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이던 1931년, 나왈은 이집트 시골 마을에서 아홉 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낼 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관습의 칼날은 피할 수 없어, 혼몽한 꿈결에 칼 가는 소리를 들으며 끌려나와 다리 사이 여린 살점을 난도질당해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간 그녀, 1952년 나세르 혁명으로 사회주의가 도입되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파격적으로 바뀌는 전환기에 자기 정체성을 키웠다.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를 일삼는 가부장 사회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남성들을 질타하는 한편 여성 스스로의 자각과 의식 전환에 대해 계몽운동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잠시 달콤한 땀의 대가를 맛보기도 했다. 일찍이 이런 과정을 거친 덕인지 이집트는 한국에 비해 월등하게 양성평등의 실천이 앞선 면모가 많다.
하지만 악습의 위력 앞에 지나간 혁명은 무력할 따름. 의사가 된 그녀, 여자 몸은 노출금지 품목이라 옷 위로 주사를 찔러야 하는 악습을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이후 국립보건원 원장이 된 사다위는 1969년 가정폭력과 일부다처제, 근친상간과 피임법 등의 내용이 담긴 계몽실용서 <여성과 성>을 출간해 논란의 불을 지피지만, 결국 몰매를 맞고 파면당한다. 덕분에 13억 무슬림 인구의 절반 자매들은 자기들의 목소리를 튼실하게 대변하는 큰언니를 갖게 되었다. 순결한 영혼은 수난을 통해 단련되는 법, 그녀는 글쓰기로 스스로를 치유하며 오래된 새길,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녀를 더욱 키운 인물은 사다트. 당시 한반도에는 박정희가, 이집트엔 사다트가 있었다. 이집트의 ‘고독한 파라오’는 그녀를 불온하고 불순한 반정부 인사 3천 명 중 하나로 지목해 ‘시인학교’에 처넣고 몇 달 만에 총탄에 스러지니 곧 출소한 나왈 엘 사다위는 1983년 <여죄수의 회고>라는 책을 들고 비타협적인 참여작가로 거듭난다.
관습과 법, 과학과 신화, 정치와 종교 곳곳에 박혀 있는 조작된 진리를 향해 저돌적이고 선동적인 화법으로 질타를 날리는 그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신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암살 후보 서열 1순위다. <나일강의 암사자> <이브의 감춰진 얼굴> <차도르> 등 이슬람 여성의 억압 상황을 고발하는 책들은 나오는 족족 판금되기 일쑤였다. 고희가 넘었어도 숱 많은 그녀의 백발은 아직도 헤자브나 차도르 속에 구겨넣을 수 없을 만큼 뻣뻣하고 풍만하다.
“내 신랑은 영국" 엘리자베스1세
여섯 차례 장가든 헨리 8세가 아버지, 그의 여섯 마누라 중 세컨드인 앤 볼린이 어머니지만 스페인의 약탈자 손에 잉카제국이 몰락한 1533년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는 눈칫밥 꽤 먹으며 컸다. 세 살 때 ‘의회의 결정’으로 어미가 반역과 간통죄로 처형된 탓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찌나 총명하고 씩씩한지 “여성의 나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셨으며, 인내심 역시 남자 못지않으셨다”는 기록이다. 탁월하신 외국어 실력은 따라갈 자 없었으며, 눈썰미 날카로워 활솜씨 뛰어나고, 춤이면 춤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에 짓궂은 장난도 잘 치시는 재치만점 명랑소녀기도 하셨다. 그러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요절로 왕위를 계승한 본처의 딸은 그 유명한 ‘피의 메리’, 이복 언니 치하에선 반란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쓴 채 런던탑에 유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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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메리 언니의 서거로 왕위를 물려받은 그녀는 숱한 위협과 공포를 견디며 여러 차례 구애를 받고 시집갈 뻔했으나, “나의 신랑은 영국”이라며, 음모와 배반의 소용돌이 속에 정략결혼보다 더 정략적인 수완과 지략으로 오스트리아의 찰스 공, 프랑스의 왕이 되는 앙주 공, 스웨덴의 에릭 14세, 러시아의 이반 대제 등 화려한 신랑감들을 골고루 사랑하고 물리치고 활용하며 독신으로 지내 ‘처녀’ 여왕이라는 칭찬도 듣지만, 미혼으로 살다 보니 감춰둔 아들이 있다는 헛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가톨릭을 포기한 정책 탓에 로마의 교황들은 대를 이어 “비열한 이단자를 제거하는 건 결코 죄가 아니”라며 그녀의 암살을 부추기기도 했다.
형부였던 필리페 2세와도 결혼설이 있었으나, 밀고 당기고 적절하게 관계만 유지하다 결국 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시대를 열었으니, ‘위대하신 여왕 베스’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다. 동인도 회사의 설립을 비롯해 잉글랜드 상인들이 전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고 셰익스피어나 스펜서, 베이컨 등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이 속출하니 “남성적 학문의 토대를 튼튼히 하고” 확고한 진리를 찾아내기로 결의한 왕립학회도 창설(!)되었다.
진흙 위에 망토를 깔아 그녀가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게 한 월터 롤리 경은 미국 땅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에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건 ‘처녀’ 엄마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이 ‘처녀’ 여왕을 기린 것이다. 45년 통치 뒤 1603년 승하까지, 감자와 담배뿐 아니라 사탕과 초콜릿 등 식민지에서 들어온 신기한 단것들을 너무 밝혀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이가 새까매지거나 아예 빠져버리는 바람에, 미모에도 좀 손상이 갔다. 제국의 태양, 그녀가 좀더 첩보에 밝았다면, 뱃길에 강한 납치범 몇 명을 뽑아 조선반도에 보내, 당시 음양오행에 따른 산해진미 웰빙 요리로 중종 임금 수라상을 장식하던 대장금 언니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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