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우정(避雨亭).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 회주인 밀운(密耘·74) 스님의 주석처에 조그맣게 걸려있는 당호다. 그는 1988년 조계종 분규 당시 서울 봉은사 주지로서 막강한 서의현 총무원장 반대의 선봉장이었다. 그 일로 봉은사 주지직을 내놓은 스님은 봉선사에 ‘비나 피할 만한’ 방 한칸을 마련해 칩거에 들어갔다.
운악산 자락 봉선사 한쪽의 ‘피우정’ 에서 20년째 머물고 있는 밀운 스님. 스님은 “산과 물의 자비와 파리 모기까지 존경하는 존경심을 갖는다면 어떤 일을 해도 옳고, 세상이 평화로울 것” 이라고 말했다. <봉선사(남양주)/이상훈 기자>
스님은 그곳에서 19년째 머물고 있다. 광릉수목원으로 유명한 운악산 자락 봉선사는 지금 한창 연꽃이 피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경내에 5000여평의 크고 작은 연지를 만들고 연꽃을 심은 이가 바로 밀운 스님이다.
봉선사 큰법당 오른쪽 방적당 옆에 피우정이 있다. 곧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잔뜩 흐렸다. 시골집 울안 꽃밭 같은 뜨락에는 붉고 노란 여름꽃들이 피어 있었다. 통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피우정 좁은 방에는 각각 다른 달필의 선시(禪詩)들이 사방 벽을 채웠다.
‘負木捨柴(부목사시) 寄避雨亭(기피우정) 不關風雷(불관풍뢰) 開眼睡眠(개안수면)’. 부목이 땔나무를 버리고, 이 정자에서 비를 피하려네. 태풍과 뇌성벽력도 상관하지 않고, 눈을 뜨고 잠에 들리라.
스님이 피우정에서 칩거를 시작할 때 지은 시다. 부목은 절에서 땔나무 등을 하는 일꾼을 말한다. 스님은 ‘종단의 부목’을 자처할 만큼 많은 일을 했다. 서울 강남 봉은사와 이곳 봉선사의 주지를 지내는 동안 굵직굵직한 불사를 척척 해냈다. 영암 스님은 봉은사 주지 시절 불가능해보였던 옛 봉은사터 2만여평을 되찾는 것을 보고 “허공에 논을 칠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스님은 총무원의 재무부장·총무부장·부원장 등을 맡아 경찰 포교조직인 경승단 창립, 승가대학 설립 등 종단 행정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스님이 땔감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인 의미야.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이번 생 자체가 피우정이거든. 마음 가운데 어리석음을 다 버리고, 사람 사람의 번뇌와 시시비비 따위에 물들지 않고, 그대로 중생과 세상을 훤히 꿰뚫어 보는 지혜와 광명을 찾겠다는 뜻이야.”
스님은 마음씨 푸근한 이웃 할아버지처럼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대했다. 일상에서의 그는 봉선사의 부목처럼 지냈다. 소박한 농부같은 트레이닝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고 경내에 연꽃밭을 만들고, 하수구를 고치고,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았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아침 예불과 108배, 참선을 빠뜨린 적이 없다. 스님은 최근에도 예산 수덕사 선원 하안거를 마쳤으며, 봉선사 열반선원에서 대중스님들과 함께 참선정진하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스님은 특허청에 5개의 특허를 낸 특이한 이력도 지녔다. 하수구용 배수전, 칫솔, 촛대의 받침반 구조, 연등의 프레임 결합구 등으로 실용신안과 의장등록 특허를 취득했다. 이 또한 절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불편을 개선하기 위해 찾아낸 아이디어들이다. 특히 1995년도에 의장등록을 얻은 칫솔은 1㎝의 간격을 두고 솔의 길이를 달리해 이빨 구석구석 잘 닦이도록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특허가 유출돼 독일에서 변형된 형태의 상품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상품화되지 못했다.
스님은 열아홉살 때 대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부림(部林). 대오 스님은 선방수좌로 늘 참선만 강조하던 스님이었다. 부림 스님은 나중에 봉선사 운허 스님의 건당제자가 됐다. 절집에서는 계를 준 은사가 아닌 다른 스님의 제자로 입적해 불법을 있는 것을 건당제자라고 한다. 운허 스님은 일생을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에 바친 근현대의 대강백이다. 현재 봉선사 조실인 사형 월운 스님이 스승에게 그를 추천했다. ‘밀운’은 평소 그를 지켜보면서 남모르는(密) 수행정진(耘)을 칭찬하곤 했던 운허 스님이 지어준 법호다.
교종본찰로 불리는 봉선사에 가면 지금도 월운, 밀운 사형사제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내를 포행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두 노장 스님은 날마다 월운 스님의 주석처인 다경실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봉선사의 온갖 살림들을 상의해 처리한다고 한다.
스님은 출가 후 군에 입대해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군에서도 계를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저녁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참선을 했다. 어느날 은사인 대오 스님과 나중에 총무원장을 지낸 동암 스님이 면회를 왔다. 다음날 포천의 동화사 법당에 다녀오면서 동암 스님이 “부처님이 시원찮아”라는 말을 했다. 그는 “부처 중에도 시원찮은 부처가 따로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보름 동안 이 의문을 붙잡고 정진했다. 그때 얻은 한 생각이 ‘불행불(佛行佛)’이다. 부처행을 하면 모두가 부처라는 뜻이다. 그러나 견성한 상태 그대로가 부처일 뿐 부처도 중생심이 들면 도로 중생이다. 스님은 외출증을 끊어 서울 정릉 적조암 녹야원으로 동암 스님을 찾아갔다.
“그 얘기를 꺼내니 동암 스님이 웃으면서 ‘동화사 불상 조성이 시원치 않다’고 한 말을 잘못 들었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스님은 불행불이란 답을 얻어낸 진전은 대단한 것이라고 칭찬하더군.”
그의 이 생각은 훗날 ‘불행불, 승행승(僧行僧), 인행인(人行人)’으로 이어졌다. 스님이면 계를 지키며 살아야 스님이고,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의 일이 평생 동안의 공부에 도움이 됐고, 아직도 그 힘으로 살아. 세속의 공부도 머리로만 외운 것은 실(實)이 없어. 깨달은 생각이 있어야 철학이 되고, 사상이 되지.”
스님은 80년대 불교 성지인 스리랑카를 자주 찾았다. 스리랑카 승가사범대학과 국립 푸리베나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85년 성수, 고산, 원담, 정무스님 등을 모시고 스리랑카 불치탑 순례를 갔다. 스님은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108배를 했다.
“108배를 마치고 참선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무원근(無遠近)이 떠올랐어. 멀고 가까운 것이 없는 것,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그런 경지야. 환희심이 일어 원담 스님(수덕사 방장)께 말씀드렸더니 ‘참 복받았다’면서 게송까지 지으셨어.”
그리고 그는 얼마 뒤 봉은사 사태가 일어나 주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스님은 부처님께 그런 복을 받았는데 공부는 안하고 살림이나 살아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스님의 선시에는 특히 ‘무원근’이 많이 들어 있다. 그중 하나가 만공 스님 기일에 지은 시다. ‘허공진뢰(虛空震雷) 우주생기(宇宙生起) 일월괴멸(日月壞滅) 시무원근(是無遠近)’. 만공 스님이 한 생각 일으키니 우주가 생겨났네. (또 한 생각 일으켜) 일월이 무너지니, 자성은 본래 나고 죽음이 없다.
스님은 “요즘 대통령 선거 한다고 후보들이 서로 헐뜯는 모습만 보여줘서 민망하다”면서 “모든 사람이 자비, 존경, 양보, 용서의 네가지만 지키면 세상 평화는 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종교인, 정치인은 명심해야 돼. 이 네가지만 앞세우면 뭘 해도 옳고, 어떤 일도 원만해질 수 있어.”
스님은 자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옷장문에 큼직하게 붙어있는 법어를 가리켰다. ‘山抱禽獸族(산포금수족) 水摩魚蟹●(수마어해군)’. 산은 모든 짐승을 가족으로 안아들이고, 물은 어해(물고기와 어패류)들을 어루만져준다.
“산은 짐승이든 나무든 말없이 모두 품어주잖아. 물은 드러내지 않고 물 속에 사는 모든 것을 어루만져 준단 말이야. 산과 같고 물과 같은 마음이 바로 자비야.”
스님의 ‘존경론’도 독특하다. 그는 “흔히 잘난 사람, 윗사람만 존경하는데 파리 모기까지도 존경하는 것이 진짜 존경”이라고 말했다.
“시방세계 모든 중생은 나보다 잘하는 것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어. 파리는 천장에 붙는 재주가 있고, 모기는 어둠 속에서도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지. 그래서 파리 모기까지 일체중생을 모두 존경하라는 거야.”
스님은 이어 “양보하고 용서하면 싸울 일이 없다”면서 “이 네가지를 지키는 것이 성현을 닮고, 성현이 되는 삶”이라고 했다. 그는 “자비, 존경, 양보,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것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참 종교인”이라고 덧붙였다.
“정치인이나 조직의 지도자들이 개인의 성공에만 집착하면 모두가 함께 실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것은 결국 개인에게도 성공이 아니고 나중에는 불행으로 그 빚을 갚아야 돼.”
스님에게 결혼식 주례를 하면 꼭 들려주는 글이 있다. ‘花召群蜂(화소군봉) 蜂樂花香(봉락화향) 花蜂相助(화봉상조) 終古不變(종고불변)’이다. 꽃은 벌떼를 불러모으고, 벌은 꽃향기를 좋아하니, 꽃과 벌은 서로 돕기에,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서로 나빠질 일이 없다는 말이다. 부부가 꽃과 벌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부처의 마음을 일으키는 놈이나 중생의 망상을 일으키는 바로 그놈이 똑같이 나 자신”이라며 “진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내가 생각을 돌이켜 심성을 정화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돌아나오는 길. 운악산 봉선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님이 가꾼 연지의 연잎들이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를 키웠다. 빗속에 아늑한 섬이 되어버린 피우정에서 오늘도 밀운 스님이 ‘무원근’하고 있다.
▲ 밀운스님은
1934년 황해도 연백 출생. 한국전쟁 때 누님과 단둘이 월남했다. 1954년 경북 영주 초암사에서 대오(大悟)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72년 봉선사에서 운허 스님 문하에 건당했다. 불국사 선원, 통도사 극락암, 해인사 선원 등에서 안거했다. 제5, 6, 7, 8, 9대 중앙종회의원과 총무원 총무부장, 부원장, 법규위원장, 봉은사 주지, 봉선사 주지를 지냈다. 2004년 조계종 대종사, 2007년 원로의원.
화암스님이 본 밀운스님
“수행에는 철두철미하면서 생활에는 소탈하고 자상하신 분입니다. 아침예불, 108배, 참선, 포행, 운력으로 쉬는 날이 없어요. 특히 나무 키우고 꽃 가꾸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주지 화암 스님(사진 오른쪽)
밀운 스님의 상좌인 경기 양평 사나사 주지 화암 스님은 “봉선사에서 하수구나 화장실, 전기 등에 문제가 생기면 일꾼보다 큰스님을 먼저 찾을 정도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신다”며 “어느새 5000평이나 되는 넓은 연꽃밭을 가꿔 봉선사의 또다른 자랑거리가 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스님이 한창 연꽃밭을 만드느라 평상복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광릉수목원을 거쳐 봉선사를 찾았다가 스님 뵙기를 청했다. 제자들이 승복을 입으라고 권했을 때 스님은 “나를 보러 왔지 옷을 보러 왔느냐”면서 차림 그대로 대화를 나눴다.
“스님은 봉은사 사태 때문에 약간은 강성 이미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종단의 어른스님으로서 항상 화합을 강조하십니다. 이제 종단 정화가 됐으니 징계를 받은 스님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앞장서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스님의 제자는 맏상좌인 흥국사 주지 화범 스님 등 20여명. 스님은 제자들이 요청하는 법회와 불사 등에 빠짐없이 참석해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화암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는 용문산 사나사는 신라 경명왕 7년(923)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했다.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태고 보우 스님이 중건했다. 태고 스님의 부도와 비가 있다.
독경으로도 유명한 화암 스님은 사나사를 포교와 교육, 기도 도량으로 일신하고 있다. 최근 들어 요사채와 범종각을 세우고, 태고 보우 스님 탄신 기념 다례제, 국사추대식, 산사음악회 개최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현재 어린이여름불교학교(27~29일), 템플스테이(8월3~5일)를 준비중이다.
화암 스님은 “큰스님은 제자들에게도 불행불, 승행승, 인행인을 강조하신다”며 “제자들도 솔선수범하는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만큼 각자 맡은 소임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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