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09

醉月 2010. 5. 30. 07:45
중국에도 인어공주가 있었다 사랑에 빠진 용왕의 딸 이야기 유의전
▲ 일러스트 이철원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1805~1875)의 동화 작품인 ‘인어공주’는 세계적 명작이다. 왕자를 사랑한 공주의 이야기로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바다에 빠져 물거품이 되고 마는 비극적 결말을 갖고 있다. 미국 디즈니사는 이를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고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5월 1일 상하이 엑스포가 개막되었다. 덴마크는 안데르센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인 코펜하겐에 만들어 놓았던 인어공주상(像)을 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전시하기로 결정하고 그 첫 대상지로 상하이를 선택했다. 갈수록 성장하는 중국의 위상이 인어공주를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중국에도 이런 인어공주에 비견되는 상상 속의 인물이 있으니 그녀는 바로 용녀(龍女)이다. 중국의 신화와 민간 전설에서 용녀의 이야기는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

 
동해용왕의 딸 세상으로 외출

용녀는 불교의 이십제천(二十諸天) 중 19천인 용왕의 딸로 8살 때 문수보살의 염불을 듣고 즉시 성불하여 그 뒤로 관세음보살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고 전한다. 민간 전설에서는 보다 재미있는 내용으로 전해진다. 용녀는 동해용왕의 딸로 인간세상에 어등(魚燈)축제가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용왕에게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몰래 수정궁을 빠져 나온다. 어촌의 소녀로 변신한 용녀는 달빛을 받으면서 인파에 파묻혀 넋을 잃고 온갖 모양의 어등을 구경한다. 이때 누각 위에서 끓이던 찻물 한 방울이 용녀의 머리에 떨어진다. 물기가 닿으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다급해진 용녀는 비바람을 불러 축제를 난장판으로 만든 뒤 급히 바다로 향하지만 바닷가에 이르러 그만 큰 물고기로 변하고 만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뚱보와 홀쭉이가 큰 물고기로 변한 용녀를 발견하였다. 담이 작은 뚱보는 불길하게 여기며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담이 큰 홀쭉이는 시장에 가져가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며 고집을 피워 큰 물고기를 짊어지고 시장으로 향한다.

이때 지상의 상황을 간파한 관음보살은 시종인 선재(善財)에게 향로의 재를 한 움큼 가져가 용녀를 사서 바다에 풀어주라고 명한다. 선재가 향로의 재를 집자 돈으로 변하였다. 그는 승려로 변신하여 용녀가 도끼로 찍힐 찰나에 돈을 지불하고 용녀를 사들인다. 주위에서 승려가 물고기를 산다고 의심하였지만 방생할 것이라고 둘러대고 뚱보와 홀쭉이와 함께 바다로 향한다. 홀쭉이는 같이 따라가 방생을 하고 나면 다시 잡아 팔 속셈이었다. 바다에 이르러 바다에 풀어주자 큰 물고기는 승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홀쭉이는 큰 물고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낙심하며 손에 든 돈을 바라봤지만 순간 재로 변해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승려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용궁에서는 용녀가 사라지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용왕이 부하들을 닦달하고 있을 때 용녀가 돌아왔다. 용녀는 아버지의 노여움이 두려워 간밤의 일을 실토하였고, 용왕은 화도 나고 자녀교육 불찰로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을까 두려워 용녀를 수정궁에서 내쫓는다. 다음날 망망대해를 떠돌던 용녀는 관음보살이 보낸 선재의 도움으로 관음보살이 있는 자죽림(紫竹林)을 찾게 된다. 용녀는 자신을 구해준 선재를 알아보고, 관음보살은 둘을 자매처럼 함께 지내며 곁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후에 동해용왕이 후회하고 딸의 귀가를 바랐지만 용녀는 수정궁에서의 갇힌 삶이 싫어 이후로 관음보살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안데르센이 이 이야기를 차용하여 ‘인어공주’를 창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안데르센이 여러 기행문을 쓴 걸 감안할 때 전혀 허황된 추측도 아닐 듯싶다. 이런 용녀의 전설이 문학작품으로 정착된 것은 당대(唐代)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 419권에 실려 있는 당대 전기(傳奇)소설 ‘유의전(劉毅傳)’이 그 최초의 작품으로 작가는 이조위(李朝威·약 766~820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농서군(             ·지금의 깐수성 지역) 사람으로서 생애와 사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유의전’은 ‘아Q정전’의 작가 루쉰(魯迅)에 의해 당나라 시인 원진(元?)의 애정 전기소설 ‘앵앵전(鶯鶯傳)’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선비 유의, 뭍에 나온 용녀를 구하다


작품에서 선비 유의는 시험에 떨어져 고향으로 향하였다. 낙양을 지나던 도중에 아리따운 한 아가씨가 양 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아가씨는 원래 동정(洞庭)용왕의 딸인데 경천(涇川)용왕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남편의 괄시를 받았고 시부모도 그녀를 멀리 하였다. 용왕의 귀한 딸이 외진 곳으로 쫓겨나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유의는 그녀의 호소를 듣고 용녀를 대신하여 동정호의 용왕에게 그녀의 편지를 전해주겠노라 약속한다. 용녀가 알려준 대로 동정호 남쪽에 있는 커다란 귤나무를 찾아 가지를 두드리니 호수에서 장수들이 나와 그를 용궁으로 안내하였다.

유의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동정용왕은 비통해 하였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용궁 전역으로 퍼졌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시뻘건 용이 번개와 우박을 동반한 채 하늘을 뚫고 날아왔다. 동정용왕의 동생인 전당(錢塘)용왕이 화가 잔뜩 나서 들이닥친 것이다. 조카가 경천에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전당용왕은 단숨에 경천용궁으로 쳐들어가 경천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카를 구해 동정용궁으로 돌아온다.

딸이 무사히 돌아오자 동정용왕은 유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큰 잔치를 베풀고 진귀한 보물을 선물한다. 그 자리에서 전당용왕은 술에 취해 유의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유의도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애초 순수한 의리로 시작하였고, 또한 전당용왕의 고압적인 자세가 맘에 들지 않자 그를 한바탕 꾸짖은 다음 용궁을 빠져나온다.

양주(揚州)로 돌아온 유의는 용궁에서 가져온 보물을 조금 팔아 지역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그는 장씨 성의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다시 한씨 성의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그 역시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유의는 금릉(金陵·지금의 난징 南京)으로 이사하였다. 외로운 생활이 계속되자 유의는 중매에게 신붓감을 부탁하였고 중매는 노(盧)씨 성의 과부를 소개하였다. 유의는 길일을 택해 지역민의 부러움 속에 그녀와 혼례를 올렸다.

 
사랑 찾아 다시 뭍에 나온 용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유의는 아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예전 용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유의는 노씨에게 예전의 일을 말해 주었다. 노씨는 처음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부인했지만 결국 자신이 용녀임을 고백한다. 자신이 용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유의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유의가 완강하게 거절하며 떠나자 낙심하였으며 후에 용왕이 다른 용왕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였지만 유의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았음을 고백하였다. 부모님도 유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보내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지를 묻는다. 유의는 애초에 자신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인간의 신분과, 처음에 가졌던 의리, 전당용왕의 강압에 대한 반감으로 당시에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설명하면서 용녀와의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둘은 동정호를 찾아 동정용왕에게 인사를 하고 남해에서 늙지 않고 40년을 살았다고 한다. 당 현종이 신선이 되고자 도사들을 찾는다고 법석을 떨자 유의는 동정으로 돌아가 10여년간 종적을 감추었다. 유의의 조카 설하(薛?)가 유배길에 올라 동정호를 지나는데 호수 중간에서 갑자기 큰 산이 나타나 설하를 찾았다. 설하가 산에 오르니 그곳에 유의가 보다 젊은 모습으로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선약(仙藥) 50알을 주면서 한 알에 1년씩 젊어지는 약이며 약이 다 떨어질 때쯤 다시 오라 일렀다. 결국 48년 뒤에 설하도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유의에 관한 이 같은 전설은 다분히 신화적이지만 용왕과 그 딸의 형상은 완전히 인격화되어 있다. 유의의 정직함과 당당함, 용왕 딸의 열정과 선량함, 동정용왕의 후덕함과 침착함, 전당용왕의 강렬함과 난폭함 등이 모두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전당용왕이 ‘푸른 하늘을 헤치며 날아가는(擘靑天而飛去)’ 장면은 특별히 뛰어나 사람들의 혼을 빼고도 남는다. 당대 소설가들의 생생한 필치를 충분히 맛볼 수 있다. 


▲ 유의에게 결혼을 강권하는 전당용왕. / 유의와 용녀 석상(石像).
원나라 잡극 등 다양한 작품으로 진화

원대에는 이호고(李好告·일설에는 상중현 尙仲賢)가 ‘장생자해(張生煮海)’라는 잡극 작품으로 각색하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우(張羽)가 석불사에서 가야금을 탔고 동해용왕의 셋째 딸인 경련(瓊蓮)이 소리에 이끌려 찾아와 사랑을 확인하고 추석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용왕의 저지로 경련이 약속장소에 갈 수 없게 되자 장우는 도사가 준 은화로에 바닷물을 넣고 끓이니 바다가 끓어올라 할 수 없이 결혼을 승낙하였다.’ 청대에는 유명한 희곡가인 이어(李漁)가 이 줄거리를 토대로 희곡인 전기(傳奇)작품 ‘신중루(蜃中樓)’를 창작하였다.

장생과 용녀의 사랑 이야기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장르의 다양한 작품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현대극인 ‘용녀목양(龍女牧羊)’과 ‘장우자해(張羽煮海)’ 등도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고, 1954년에 만들어진 월극(越劇) ‘유의전서(劉毅傳書)’, 1958년 홍콩에서 만들어진 영화 ‘유의전서’, 1962년 중국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1984년 중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용녀’, 2002년 난징시 월극단에서 공연한 동명의 월극 등을 비롯하여 지금도 중국인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2004년 7월 17일에는 중국 우정국이 ‘민간전설’ 시리즈로 ‘유의전서’에 관한 내용이 담긴 4매의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후난(湖南)성 웨양(岳陽)시 쥔산(君山)에 가면 동정묘(洞庭廟)가 있다. 쥔산은 동정호 안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이백이 시로 노래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웨양시는 1997년 막대한 자금을 들여 넓은 부지에 동정묘를 건립하였다. 내부에는 ‘유의전’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벽화가 진열되어 있고 내부에 모신 신은 동정호 지역의 어민들을 보호하는 흑검대왕(黑?大王)이라고 한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흑검대왕이 바로 당대의 서생 유의라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용녀와 결혼한 유의가 용궁으로 돌아가 동정용왕에 봉해진다. 그런데 인간의 하얀 얼굴로는 수중과 육지의 요괴들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동정용왕이 전당용왕에게 부탁하여 괴물의 탈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낮에는 탈을 쓰고 호반을 순찰하고 밤에는 탈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늦게까지 순찰을 하다가 규칙을 어기고 탈을 쓴 채 집으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유의는 흑검대왕이 되었다고 한다. 유의가 좋은 일을 많이 하였기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군산에 사당을 짓고 향을 태우며 평안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지금도 유의정(劉毅井)이 남아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우물 곁에는 원래 커다란 귤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유의가 바다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그 지점이다. 우물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 한 사람이 엽전을 실에 매달아 우물 속으로 내려 깊이를 알아보려 했으나 아무리 내려도 끝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중국은 이야기도 많고 사연도 많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와 사연을 현실로 이끌어내 기념하려는 중국인의 노력에 거듭 놀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