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살 드러낸 들판… 얼굴 내민 도자기
한때 ‘실크로드의 바그다드’ 선사유적 이름 떨친 아나우
이곳서 출토된 채문 도자기 기형이나 문양서 단연 압권
주변 이라크 이란 인도 중국 도자기 비슷 ‘채도벨트’ 형성
니사 유적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투르크메니스탄의 최신 건축술을 자랑하는 킵착 마스지드(사원)에 들렀다. 킵착 마을은 현 니야조프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다. 1948년 대지진 때 잃은 그의 부모와 형제를 기려 지은 이 대사원은 2005년 준공되었다. 사원 귀퉁이에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91m 높이의 미나라(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가 우뚝 서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한다. 카페트 특산지답게 바닥에는 2톤짜리 대형 카페트를 깔았다. 미흐랍(예배 방향을 가리키는 벽감) 상단에만 아랍어로 경전 한 구절이 새겨졌을뿐, 벽면은 온통 투르크메니스탄 말로 쓴 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슬람 사원의 벽면 문자장식은 아랍어로만 하는 관례를 깬 것이 이채롭다. 이 나라는 탑을 쌓는 데 일가견이 있는 성싶다. 일찍이 호라즘 왕조의 수도였던 우르겐치에는 14세기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쿠드르그 티무르 미나라가 지어졌고, 1995년 유엔 185개국이 이 나라의 중립을 염원해 세운 7 높이의 아슈하바트탑도 유명하다.
빠듯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 3시 서둘러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에서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카라 테페와 알틴 테페, 고누르 테페 등 기원전 4000∼2000년께 문화층에서 나온 각종 토기류와 메르브 고성의 게오르 카라 유지에서 출토된 불상머리(불두)와 불경을 넣은 항아리, 니사 고성에서 발굴된 여러 형태의 뿔잔 같은 유물들이다. 그러나 정작 만나고 싶었던 아나우 유적의 저 유명한 채도 유물은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가. 박물관 해설원도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아마도 출토된 유물이 몽땅 바깥으로 흘러나간 데다 근간에 새 발굴작업이 없었던 탓이 아니겠는가 짐작할뿐이다. 실망과 우려 속에 오후 5시께 동쪽 20km 지점에 있는 유적 현장을 갔다.
한때 '실크로드의 바그다드'라고 불리운 아나우는 선사 유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초기 농경문화를 실증하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일찍부터 동서 고고학계의 눈길을 끌어왔다. 오아시스 육로의 요충지에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나 사마르칸드와 비견되는 대도시로 부상한 아나우는 몽골군의 유린을 당한 데다 1948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잡초만 우거진 들판을 한참 헤집고 들어가니 유적이 나타난다. 유적은 약 1km를 사이에 두고 높이 12∼1의 남·북 두 구릉으로 갈라져 있다. 우리가 닿은 곳은 북부 구릉인데, 둘레는 600m쯤 되며, 남부 구릉은 훨신 더 커 보였다. 지금 구릉은 아마 발굴 때 지층을 파내면서 쌓은 흙더미인 것 같다. 이 두 구릉을 중심으로 사방에 아득히 펼쳐진 평야가 바로 옛날 아나우의 텃자리다.
1880년대 러시아의 코모로프가 북부 구릉지대의 고고학 조사를 시작한 이래, 독일의 슈미트와 미국의 휴벨트 등 서양 고고학자들이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벌였다. 특히 1903∼04년 미국 카네기 재단 후원을 받은 펌펠리는 숱한 유물들을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발굴결과를 보면, 유적은 크게 신석기와 금속병용기를 구분해주는 상·하 두 개의 문화층(테페)으로 이뤄졌다. 하층에서는 탄화된 밀과 보리, 소와 양을 기른 흔적이 나타났고, 상층에서는 산양과 낙타 뼈, 많은 토기가 나왔다. 두 층에서 나온 짐승뼈만 500kg이 넘는다. 가장 주목된 유물은 상층에서 나온 갖가지 채도다. 이곳에서 출토된 채도는 양이나 질은 물론, 기형이나 문양에서도 단연 압권이어서 채도 문화 연구에 전기를 마련했다.
구릉 꼭대기에 올라보니 이곳저곳에서 흙더미를 마구 파낸 자취가 눈에 띈다. 어떤 곳은 흙살을 그대로 드러낸 점으로 보아 최근 파헤친 게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여러 색깔과 무늬의 채도 조각들이 나뒹군다. 낭떠러지 흙벽을 나무꼬챙이로 후벼내도 채도 조각과 짐승뼈가 묻어나온다. 박물관에서 진열창 너머로 눈동냥이나 하던 '역사의 별똥'(유물)을 손수 캐보고 만져보니 참 감개무량하다. 금방 '노다지'라도 캐낼 듯, 들뜬 기분을 가까스로 다독이면서 1시간 반 동안의 현장 답사를 마쳤다. 조각도 유물이라, 반출할 수 없어 몇 개만 모아놓고 카메라에 담았다.
채도란 질 좋은 진흙으로 기형을 만들어 약 1000도의 온도에서 구운 채색토기를 말한다. 대체로 붉은 바탕에 검정색과 누른색, 갈색 같은 여러 색깔, 여러 문양을 넣어 윤택하게 연마한 아름다운 토기다. 일명 ‘채문토기’라고도 한다. 바탕이 붉은 색인 것은 흙에 섞인 철분이 산화하기 때문이며, 채색은 여러 색깔의 유약을 입혀서 그렇다. 채도 문양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하학적 문양과 동물, 인간 등 형상 문양으로 구분된다. 기형은 농산물 저장용기나 생활도구 용도에 걸맞게 제작되었다.
채도는 신·구 대륙 농경지에서 널리 채용됨으로써 신석기 시대 주요 문화권의 하나인 ‘채도 문화권’을 이루었다. 특히 아시아 대륙의 동·서 여러 곳에서 채도 유적이 연이어 발견되면서 채도 문화권을 형성시킨 통로, 즉 ‘채도의 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7000년께 이라크 자모르 채도이며, 다음으로 아나우 채도가 기원전 5000년, 중국의 앙소(仰韶) 채도가 기원전 3500년께를 헤아린다. 그 사이에 이란 시알크 채도와 인도 모헨죠다로 채도가 놓이는데, 각각 기원전 5500년과 3000년께로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약 3천∼4천년 시차를 두고 아시아 동서에 채도란 문명요소를 공유한 하나의 긴 문화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 문화대가 자생적인 것인지, 교류에 의해서인지, 만약 교류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실현 가능케 한 공간매체로서의 길, 즉 '채도의 길'은 어떻게 이어졌을까란 문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 논쟁을 벌여왔다. 그 핵심은 앙소 채도를 비롯한 중국 채도의 자생 여부다.
1921년 중국 정부의 광물지질조사 고문이던 스웨덴 지질학자 안데르슨은 우연히 후난성 뤄양(낙양) 서쪽의 민지현 앙소촌에서 단단하고 아름다운 채도를 발견했다. 낯선 유물에 당황한 그는 미국 펌펠리 조사단이 쓴 <아나우 선사유적 보고서>를 구해 읽어본 뒤 유물 문양이나 기형, 낟알 등 반출품의 유사성을 근거로 이 앙소 채도는 서아시아(아나우) 채도의 영향을 받아 발생했다는 이른바 ‘앙소채도 서래설’을 내놓는다. 일찍이 18세기부터 기네의 ‘한자 서래설’, 19세기 리히트호펜의 ‘중국문화 동투르키스탄 기원설’, 포르의 ‘중국인 수메르 기원설’ 등의 허망한 서구 기원설 ‘근거 찾기’에 집착했던 서구학계에게 안데르슨의 가설은 가뭄의 단비였다. 이제야 그럴싸한 ‘유물증거’를 찾은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학계는 물론, 일부 서구학계조차도 반론을 제기해 결국 안데르슨설은 상당부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서래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편년상의 상차와 성형법, 기형·문양의 유사성을 들어 이 학설의 합리성을 고집하고 있다.
반면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 특히 중국 학자들은 서아시아와 중국 사이에 전래를 증명할 중간 마디에 해당하는 지역(중간환절 지역)의 관련 유물들이 보이지 않고, 두 지역이 채도를 만든 문화적 배경도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자생 설을 줄곧 견지해 왔다. 그러나 최근 그 중간환절에 해당하는 신장성 일대에서 채도가 속속 발견되면서 중국 학계에서는 적어도 상관성쯤은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답사 때 우르무치 신장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쟈잉이(賈應逸) 교수도 이제는 ‘사상을 개방’해 자생설만 고집하지 말고 상관성에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의 경우 전형적인 채도는 아직 선보인 바 없지만, 그 변형인 홍도(紅陶)는 여러 점 출토되었다. 전래설이건 자생설이건 채도를 공통적 문명요소로 한 채도 문화대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그런 문화대는 그것을 관통한 ‘채도의 길’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시안의 반파유적과 투르판 하미, 페르가나의 나만감, 시리아의 텔 카잘, 터키 트로이 등 중국~터키 곳곳에서 발견된 채도 유물을 현장이나 박물관에서 목격하면서, 우리는 이 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속고갱이를 파먹고 내동댕이친 미과(美果)처럼, 황막한 들판에 버려진 아나우 유적은 7천년 전부터 채도 문화대의 한복판에서 ‘채도의 길’을 튼 주역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중국 앙소채도 톱니 무늬
서아시아 토기서도 확인 서구전파설 입증?
선사시대의 채도는 실크로드 문명사의 기원을 캐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사료다. 역사서에 남지 않은 선사시대부터 동서 실크로드의 유구한 역사가 펼쳐졌음을 증언할 뿐 아니라 동서 문명 지역의 상호 교류 영향 관계의 시원을 밝힐 실마리도 숨겨놓고 있다.
중국의 선사 채도가 근대 서구학계에서 100년 가까이 실크로드 문화 전래의 주체인지를 놓고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형태, 무늬, 색깔 등의 기본 구조가 서아시아 채도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앙소채도에 흔히 보이는 톱니모양 무늬(거치문)는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등지의 채문토기에도 보이는 것이며, 점이나 격자무늬 표현 등도 중근동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된다. 특히 실크로드의 중국 쪽 입구인 간쑤성과 신장 지역의 채도는 파미르 서쪽의 서투르키스탄 쪽의 채도와 분명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 학계의 통설은 채도의 탄생지를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농경지대로 보는 편이다. 이른바 오리엔트 기원설인데, 티그리스강 기슭의 니네베, 사마라를 비롯해 페르시아와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 투르크메니스탄의 아나우, 남러시아, 동유럽 등지에서 나온 숱한 채도유물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연대적으로 중근동 지역의 채도는 기원전 7000~2000년께로 편년되어 중국 채도보다 2000~3000년 가량 앞선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실제로 중국의 선사시대를 최초로 구획한 안데르손도 이를 바탕으로 중국 채도를 기원전 2500년께부터 동 500년께까지의 6기로 나누고, 앙소문화기를 기원전 22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께까지로 고찰한 바 있다.
게다가 최근 신장성 하미 등 동투르키스탄 곳곳에서 서아시아풍의 채도가 속속 발굴되면서 중국 학계에서도 서구 전래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조금씩 수정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 아나우나 게오크슐 유적의 채도는 앙소 채도와 기본적 문양 등에서 비슷한 구석이 많아 오아시스로를 통한 채도 동방 전파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신장성 서역 남도의 호탄 등지에서 나오는 옥이 장건의 서역 착공 이전부터 중국에 유명한 특산품으로 널리 전해졌던 것 또한 그 간접적 근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앙소문화와 서아시아의 농경문화는 의식주 형태나 농작물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일방적인 전파설로만 단정 짓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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