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_05

醉月 2012. 12. 19. 07:18

침, 위생, 그리고 봉건 근대주의 환상을 버려라!

사관(史觀)의 역사성 잊은 현대인에게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조선은 봉건사회가 아닌데도 조선시대를 가리켜 ‘자꾸’ 또는 ‘굳이’ 봉건시대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근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이는 일련의 왜곡이다. 그들은 왜 이런 왜곡을 만들었을까? 조선 봉건사회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필자는 이를 사관(史觀), 담론(談論), 에피스테메(episteme)의 문제에서 찾는다. ‘특권화’한 근대주의는 우리 역사학자들을 왜곡의 골목길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에는 세 가지 행위가 담겨 있다. 세 가지 행위는 분리돼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관돼 있다. 첫째, 지금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고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이다. 각각의 언론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혹시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다면 이 역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청와대를 비롯해 각급 기관에서 쏟아내는 각종 공문서, 기업에서 업무 중에 발생하는 각종 문서도 그 자체로 현실의 반영이며 기록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숙제로 나오는 일기(日記) 역시 날마다 남기는 기록이라는 뜻이고, 나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역사를 기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기록하는 것(ecording), 이것이 역사의 첫 번째 행위다.

둘째, 기록된 인간의 경험을 잘 관리해 후세에 넘겨주는 일이다. 여러 나라에 있는 국립기록관(National Archives)이나 지방기록관, 종교단체나 학교의 기록관들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기록관을 박물관, 도서관과 함께 3대 문화시설로 생각하는데, 아쉽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기록관이 시민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한 4대 사고(史庫)의 전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대목이다. 서서히 나아지리라 믿는다. 이렇게 역사를 보존하는 것(archiving), 이것이 두 번째 역사 행위다.

셋째, 이렇게 보존된 기록을 통해 그 경험, 즉 역사적 사실을 재현(再現·representation)하는 일이다. 앞서 남긴 기록을 사료(史料)라고 하고, 이렇게 재현하는 행위를 역사서술(historiography)이라고 한다. 필자가 지금 쓰는 이 글의 성격도 기본적으로 역사서술의 영역에 속하며, 기타 논문이나 저서도 대체로 역사서술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역사나 다른 흥미로운 시대에 대해 알려주는 일은 모두 이 역사서술에 속한다.

기록-보존-재현, 이것이 역사다. 우리는 종종 기록-보존은 빼놓고, 재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 대한 오해를 낳는다. 자, 그러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인생을 녹음해두고, 잘 보관했다가 훗날 손자, 손자의 아들딸들이 다시 듣고 되새길 수 있게 해보자. 거듭 말하거니와 그 자체가 곧 역사적 행위다.

 

사관(史觀)

 

조선시대 백자로 만든 타구(唾具). 침 뱉는 그릇이다. 관청 사무실이나 집안에서 침 뱉는 데 쓰였다. 같은 시기, 유럽 궁정에서는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는 것이 예절로 정착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행위, 역사를 만드는 행위에는 사관이 개입한다. 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눈이라는 말이다. 기록-보존할 때도 사관이 개입한다. 무엇을 기록하고, 어떤 기록을 남길까 하는 질문에 이미 선택(selection)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중요한 것’을 기록-보존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애매한 말이 어디에 있는가? 과연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하지만 사관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록-보존보다 역사서술, 즉 재현의 단계가 아닐까 한다. 재현은 기록-보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재현은 기록-보존 단계에서 남긴 사료가 없으면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재현은 사료의 제한, 기록-보존 단계에서 이뤄진 선택의 제한을 그대로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록-보존의 목적이 ‘한 시대의 경험을 후대로 전승한다’는 다소 일반적인 성격을 띠는 데 비해 재현은 어떤 동기나 이유를 가지고 특수한 배경 속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사관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나온다. 우선 재현하려고 하는 주제나 대상과 관련된 사료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아무리 관심이 크더라도 남아 있는 사료가 적으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다음으로 재현의 ‘이유나 동기’, 그 재현 자체를 규정하는 인식체계, 즉 재현하는 사람이 그 재현을 수행할 때 적용하는 사유방식이 두 번째 조건이다. 이를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단하고 나누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행위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피스테메는 대상을 설명하면서 담론을 구성하는 방식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바로 이런 ‘세계=대상을 질서 지우는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은 역사적으로 변천해왔다는 것이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의 논지였다.(이규현 역, 민음사, 2012)

 

담론

예를 들어 알아보자. 우리는 지금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 상 위나 바닥에 함부로 침을 뱉지 않는다. 그런데 왜 침을 뱉지 않을까? 답은 뻔하다. “더러우니까!” 사실 난 침이 왜 더러운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남녀의 키스는 침이 있어서 감미롭다. 침이 더럽다는 분들, 키스는 어떻게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관념을 따라가보자.

“좋다, 그럼 침이 왜 더러운가?”라고 묻는다면 “병균이 옮으니까!”라는 반응이 나온다. 아마 현대인이라면 이런 문답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은 없을 터. 침에 병균이 묻어 감염될 위험이 있으므로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고, 나아가 길거리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도 침을 뱉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인식은 타당한 것인가?

흥미롭게도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는 예절은 유럽의 경우 11, 12세기에 생겨났다. 그것은 궁정에서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태도의 하나로 등장했다. 높은 분 앞에서 침을 뱉는 것이 미안해서 생긴 예절이었다.(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역, ‘문명화과정’, 한길사, 1996) 이 사실이 전해주는 진실은 무엇인가?

 

사실 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는 예절은 병의 감염과는 상관없이 생겨났다. 침과 병의 감염을 연관시키려면 침과 병균의 관계를 알아야 하고, 그 병균이란 미생물이기 때문에 현미경이라는 도구가 의학, 생물학에 적용된 뒤에야 가능한 해석방식, 즉 담론이 된다. 그런데 인류가 현미경을 생물학에 적용해 미생물을 발견한 것은 17세기인 1660년 이후였다. 네덜란드 사람 안톤 레벤후크(1632~1723)가 최초로 현미경을 이용해 미생물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는 위생관념과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는 습관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건이나 풍속 등 역사적 현상의 발생과 해석이 종종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관념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사람들이 침을 뱉지 않는 예절을 만든 이유와 현재의 우리가 침을 뱉지 않는 이유가 서로 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에 따라 다른 시대나 사회의 역사를 해석하면 종종 오류에 빠지게 된다.

 

봉건 또는 중세, 전근대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 해방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에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홍명희, ‘임꺽정전(林巨正傳)에 대하여’, 삼천리1호, 1926. 6. ‘임꺽정’ 권 10, 사계절출판사, 2008 재수록)

‘우리는 이 글에서 우리나라에서의 봉건제도의 분해와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에 관한 문제부터 해명하려고 하였다. 이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문제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전석담·허종호·홍희유,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이성과 현실, 1970)

위의 두 인용문은 20세기에 조선시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대의 도적이다. 명종 때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普雨)를 앞세워 정치에 간여하면서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생겨난 도적이 임꺽정이다. 사실 나는 위의 글이 정말 벽초 홍명희(1888~1968·월북 소설가·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역임)의 글인지 의심하고 있다. 벽초의 글치고는 너무 거칠고 도그마틱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벽초가 쓴 글이라고 하니 일단 인용해뒀다. 저 글에서 벽초는 조선을 봉건사회라고 했다.

동화에 나올 듯한 예쁜 성은 유럽 봉건제의 흔적이다. 봉건제 아래서 영주는 지역의 왕이었고, 농노들의 거주지역과 분리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지은 독일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은 아름답지만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 아래 인용문은 북한 역사학계의 하이라이트였던 분들의 발언이다. 저분들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그나마 논문다운 논문도 사라져버렸다. 저분들의 주장 역시 자본주의사회로 오기 전의 조선은 봉건사회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남한 학계에서는 중세사회라고 하거나 전근대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이런 습관을 굳이 정의하자면 ‘아무렇거나, 조선은 봉건적이다’란 말이 될 것이다. 이미 ‘봉건’은 중세, 전근대라는 말 대신 사용돼도 될 정도의 탄력성을 가진 용어, 공감을 확보할 수 있는 용어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봉건은 특수한 학술 개념이기도 하지만 담론이기도 하다. 이렇게 담론은 어떤 근본적인 성격이나 특징에 의해 형성된다기보다, 발언 또는 발화(發話)의 규범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그 발화자의 욕망이나 성격, 신념의 소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와 무관한 경우가 많다. 이미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게끔 결정돼 있는 것이다.

애당초 ‘개념(槪念)’은 ‘얼개 지식’이다. 그러나 ‘봉건’이 획득한 탄력성과 공감은 바로 ‘봉건’이라는 용어를 특권화 했다. 그리고 이런 특권은 이미 ‘봉건’이 어떤 담론 속에 배치됐음을 의미한다. 그 담론의 공간 안에서 특정 목적과 이론을 통해서 새로운 계열의 개념을 만들고, 각각 뭔가의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건, 장원

기실 봉건, 중세는 서유럽 역사 발전의 패러다임이었다. 봉건제에서 권력은 영주의 국왕에 대한 충성, 영주에 대한 기사의 충성에 따라 배분되며, 이를 매개로 불수불입권(不輪不入權·Immunity)을 행사할 권력을 위임받은 영주는 장원 안의 농노를 지배하는 분권사회를 구축한다. 서유럽 봉건제도는 전사(戰士)로서의 복무를 조건으로 봉토를 받고 충성을 서약하며, 봉토를 받은 영주는 자신의 봉토(封土·장원) 내의 농노 노동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농노를 지배한다. 8세기 프랑크(카롤링거 왕조) 왕국의 은대지제도(恩貸地制度·베네피키움)에 기원을 둔 봉건제도는 동시에 로마 관료제도의 잔재인 카롤링거 왕조의 흔적을 청산하면서 등장했다.

장원은 가족, 봉신(封臣) 집단, 도시공동체 등과 같은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물로 이루어진 시대를 봉건사회, 또는 봉건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장원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제도였지만, 그 성격을 이해하려면 이런 연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장원의 경영은 토지생산물의 한 부분이 단 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도록 조직되어 있고 그 주민은 동일한 인물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집단을 이룬다. 그 땅의 지배자이자 소유주인 이 사람이 바로 영주이고, 그 땅이 곧 장원이다. 장원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의 결합, 즉 경제적 이익의 도모와 일종의 지배권이라고 부르는 것간의 결합이었다.(마르크 블로흐, 이기영 옮김, ‘서양의 봉건제’, 까치, 2002)

문명의 중요한 단위인 국가의 형태를 통해 봉건제를 정의한다면 당연히 봉건제는 분권사회다. 이에 반해 조선은 중앙집권화된 국가다. 학계에서는 고려시대의 사회 성격을 놓고 귀족제-관료제 논쟁이 있지만, 귀족제설이 꼭 분권사회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조선의 정치제도가 양반관료제였다는 부분에 대해 학계에 이견은 없다. 국가는 재화와 권력을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고도의 문명 양식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중앙집권적인가, 지방분권적인가 하는 것은 봉건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다.

 

근대주의

이런 점에서 조선사회를 봉건사회(또는 봉건사회를 염두에 둔 중세)라고 하는 것은 역사 현실과 부합하지 않고 따라서 적절한 개념화도 아니다. 이는 한국 역사학의 근대주의를 반영한다.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가 근대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근대주의다.

사실의 측면이란 어느 사회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가치의 측면이란 자유와 평화, 인권의 실현을 위해 근대는 바람직한 시대라는 말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로스토 식의 경제발전 5단계설이나, 스탈린 시대 속류 마르크시즘의 역사발전단계설 및 역사 합법칙설 모두 이런 근대주의의 변형이다. 이런 분류의 사유방식을 나는 근대주의라고 부른다. 근대주의에는 이전 시대와 위계를 설정하는 진보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진보관념은 막강한 과학의 힘과 생산력이 뒷받침한다.

물론 근대주의 역사학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로스토 식 발전사관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적 유물론, 사회경제사학의 발달은 역사를 정치사, 그중에서도 뛰어난 개인이나 국왕을 중심으로 서술하던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인에서 사회구조나 형태로 눈을 돌림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 진전을 가져왔다.

경제사나 사회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 그 예다. 그러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을 주로 영웅이나 초월적 존재 또는 우연에만 맡겨버리던 타성에서 벗어나, 생산하는 사람들, 곧 농민·민중을 포착하게 됐고, 노동·여성·제3세계 등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국사

강릉 선교장. 마을에는 양반과 평민이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사 연구에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회와 경제구조, 농민의 운동, 변혁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학 발전의 징표였다. 역사학의 발전은 20세기 후반기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이 성장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역으로 역사학이 그 성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사 연구는 곧 역사의 이행(移行) 문제를 제기했다. 더구나 덤덤한 이행도 아니라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아픈 이행’을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조선은 식민지로 연결됐고, 그에 따라 우리가 설명해야 할 ‘변명’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또는 필연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든지, 식민지가 아니라 자생적인 근대로 갈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식민사관이라면 후자는 민족사관 등 이른바 식민사관을 극복하겠다고 생각한 이들을 대변한다.

그 대목에서 역사학은 방심했다. 역사학 본연의 문제, 즉 왜 두 사회가 다른가, 왜 한 사회는 다른 사회로 이행하기도 하는데 어떤 사회는 이행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외면했다. 조선사회 또는 문명에서 근대적 요소를 발굴해내는 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안타까운 조바심이 가세하면서 사회구성체의 복합성과 역동성은 쉽게 경제주의로 환원되었고, 상부구조와 토대의 조합에 따른 다양한 사회 형태에 대한 탐구는 토대결정론으로 좌초되었으며, 역사 전개의 다양성은 역사적 합법칙성이라는 사이비 보편주의에 휩쓸렸다. 근대를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갖는 조선사 연구가 주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역사학의 근대주의다. 사회구성, 구조, 민중, 농민 등의 키워드로 상징되는 발전된 성과를 담은 역사학은 넓은 평원을 놓아두고 돌아오기도 힘든 골목길을 찾아든 셈이라고나 할까.

그러면 이런 지점을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다시 역사학 원론을 생각하자. 역사는 인간의 경험이다. 경험이란 다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부정적인 경험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고, 긍정적인 경험은 살려내야 할 것이다. 근대주의는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첫째, 근대주의는 조선 문명에서 경험을 똑바로 바라볼 가능성을 봉쇄했다. 근대주의자들은 오로지 근대로 귀결될 수 있는 경험만 쳐다봤다. 이런 식의 논리를 결과론이라고 한다.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를 비판할 수 있는 경험으로서의 조선 문명의 가치가 무시됐다. 흔히 조선 문명의 어떤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곧 그에 대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드라마가 아닌 이상 누가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현재 우리삶에 이러저러한 문제나 불합리가 있는데, 그걸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 사회의 경험이 있다면 거울삼아 살펴보자는 것이 아닌가. 그게 역사 공부의 본래 의미 아니었나.

이것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봉착한 현주소다. 역사학자들이 골목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다른 학문 분과에서 평원을 누비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할 것이다. 하긴 역사 연구가 어떤 학문분과의 전유물이 된 것은 근대의 현상, 즉 언젠가 사라질 역사적인 현상이니까.

 

 

인식론적 반성

근대주의자들은 빨리 중세를 해체하고 근대로 와야 했다. 그것을 지체시킨 요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강화, 즉 조선을 유지시킨 힘은 오히려 저해요인으로 매도됐다. 대체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한 계해반정(인조반정·1623년) 이후 시대에 대해선 오직 ‘근대적 요소’를 발견하는 연구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는 기형적 현상이 생겨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계해반정 이후 백성의 삶을 더 편안히 해주기 위해 취해진 세금, 부역, 신분제의 개혁은 개량적 조치로 폄하됐고, 실체도 흐릿한 ‘탈주자학’과 ‘반주자학’의 논리가 풍미했다. 결국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탓에 300년 동안 조선 사람들은 상황의 타개 능력도, 시스템의 혁신 능력도 없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경직됐던 것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이 아니라, 20세기 근대주의자들이었던 셈이다.

진작부터 사실과 가치의 측면에서 목적론적으로 설정되었던 근대(현대)가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목적론적으로 설정될 수 없다는 사실과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지구상의 극히 일부만이 근대로의 길을 갔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근대는 노예 또는 식민지라는 폭력적 상황 속에서 다가왔다. 아니, 근대로 이행한 그 일부 지역에서조차 자본을 탄생시킨 농민층 분해는 정말 농민의 신체를 분해하는 강도로 진행되었고, 살인적인 아동노동까지 강요했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가치의 측면에서 근대가 더 이상 가야할 유토피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은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근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선전하던 신분해방은 계급대립으로 대체되었음이 드러났고, 자유는 토지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즉 박탈이 본질임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근대적 인간은 노동력만 팔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인간, 노예나 농노가 누렸던 최소한도의 안전망조차 확보할 수 없는, ‘다른 인간이나 사회의 보호로부터’ 자유로운 분리된 인간을 의미했다. 인류 문명 사상 처음으로 곡식 재배와 물품 생산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세상이 이른바 ‘진보된 근대’임이 밝혀졌다.

더 큰 문제는 근대 문명의 부정적 측면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역사인식에 들어가면 근대주의에 포섭된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유럽 계몽주의자들에게 봉건사회는 암흑시대였듯이, 이 땅의 깨어 있는 시민과 지식인들에게도 조선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았을 해체기로 인식되는 것이다. 인생에 그냥 지나갈 시기가 없듯 역사에도 그런 시기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하는 특수한 인식체계, 에피스테메가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현대인처럼 진보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 문제는 적당한 시기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